어제는 집에 왔는데, 정말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이 주 정도 deadline이 정해져 있는 일을 하느라 달려왔더니 어제만큼은 쉬고 싶다, 하루 정도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라는 마음이 너무나 강력히 드는 거다. 그래서 오는 길에 녹두전과 맥주(!)를 사왔다. 요즘 건강 챙긴다고 술을 가급적 안 먹고 있는데 (지난 달에도 며칠 안 먹었지. 아예 안 먹진 않았고 ㅎㅎ) 그리고 추운 겨울날엔 찬 맥주를 선호하지 않아서 손이 가질 않는데... 어제는 맥주가 먹고 싶었다. 그래, 한번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야지.
맥주와 녹두전으로 한 상을 차리고, 옆에는 여분의 맛밤도 장착한 후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가 이 영화를 골랐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
1992년 작품이다. 그리고 소설이 원작이기도 하지. 소설을 작년에 다시 읽고 영화도 다시 봐야겠다 라는 마음으로 왓차 보관함에 넣어두었었는데 이제야 꺼내보게 된 거다. 50년 전의 두 여자와 주위 사람들, 그리고 지금의 두 여자와 주위 사람들 이야기가 잘 어우러져 훈훈한 마음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고 영화였다. 물론 영화는 늘 그렇듯 소설을 다 담아내지 못해서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젊은 날의 캐시 베이츠와 이제는 고인이 된 제시카 탠디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맥주를 마시며 간간히 녹두전을 먹고 거실 불을 다 끈 채 스탠드 조명만 밝히고는 영화를 보는데.. 아 행복했다. 간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행복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이지(Idgie)는 소설에서 느낀 이지의 반의 반도 소화를 못하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자유분방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주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으면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많은 것을 감수할 줄 아는 여성. 그리고 그 옆에서 사랑으로 든든히 이지를 지지해주고 있는 다정하면서도 강인한 루스(Ruth). 아무래도 1992년 영화다보니 이 둘의 관계를 우정과 사랑의 중간 정도로 애매하게 묘사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서로를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세상의 편견 따위 그냥 무시하고. 그 주변의 사람들, 십시와 빅조지, 목사님, 잇지의 형제들, 루스의 아들 버디 주니어(책에선 스텀프).. 과 함께 가족처럼 살면서 카페를 운영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왔었다. 영화에 그게 다 안 담아진 게 아쉽기 그지 없지만, 책과 영화를 몇 번 보다보니 볼 때마다 약간씩 느낌이 달라지는데.. 어젠 사람들과 그렇게 어우러져 사는 다정한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았더랬다. 아마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을 잘 못 만나고 살고 어찌보면 좀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혼자만의 생활에 적응(?)해 지내고 있어서 더 그런 게 아닌가.
세월이 지나, 루스도 죽고 카페도 문을 닫고... 황량하게 변한 철도 주변이 쓸쓸해졌을 땐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불어들었다. 영화에는 안 나왔지만, 난 책에서 루스의 아들 스텀프가 자라서 일가를 이루고 딸과 손녀와 손녀의 남자친구 앞에서 옛이야기를 하던 장면을 좋아한다. 그 다정함이 잘 전해지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팔 하나 없이 살아야 했던 스텀프가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에 왠지 위안을 받아서.
우리 어머니하고 이지 이모는 카페를 운영하셨지. 대단잖은 일일 지도 모르겠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말해 주고 싶네. 우리들, 그리고 음식을 구하러 온 사람은 누구든 거기서 식사를 했다네... 흑인이건 백인이건. 나는 이지 이모가 오는 사람 막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이모는 필요하다면 술도 내주는 사람으로 유명했지...
이모는 앞치마 속에 술병을 넣어 가지고 다니셨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네. '이지, 넌 사람들에게 나쁜 습관을 들이고 있어.' 하지만 당신부터가 술을 좋아하셨던 이지 이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루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 (p428)
그리고, 영화에서는 에벌린이 니니를 집에 데려가는 것처럼 했지만, 책에서 니니는 자는 중 저 세상으로 갔다. 에벌린이 묘지에 가서 보니 거기엔 이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기차길에서 죽은 오빠 버디, 니니의 아들 앨버트의 묘가 있었고.. 그 아래쯤에 니니의 묘가 있었다.
버지니아 (니니) 스래드굿
1899-1986
집으로 돌아가다
순간, 노부인에 대한 달콤한 기억이 물밀 듯 밀려왔다. 에벌린은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깨달았다. 꽃을 내려놓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p505)
그리고 거기 앉아 살아있는 사람한테 말하듯, 이얘기 저얘기 하기 시작한다. 다정함과 사랑은, 이렇게 50년이 지나 누군가에게 전해졌고 그렇게 또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전해질 거다.. 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에 따스한 기운이 스몄다. 어젠, 그래서인지 참 좋은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책과 영화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얼핏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