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일상에서 좋아하는 순간들은 다 다르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은, 주말에 와인과 안주를 놓고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 사실, 와인만이면 모르겠지만 안주까지 대동하면 책 보기는 좀 어려울 수 있고 대부분 이런 상황에선 영화를 본다.
최근에 매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일단락되어서 (아직 요원하긴 하지만) 편한 마음으로 이 자세를 취하며 영화를 보는 시간을 한번씩 만들고 있다. 많이 행복한 시간이다.
와인 안주를 만들면서,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는 것도 꽤나 즐겁다. 넷플릭스와 왓차가 내 곁에 있으니 왠만한 영화는 다 볼 수 있고 그래서 이걸 볼까 저걸 볼까 꼼지락거려보는 재미가 그만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암튼 어제 일요일 저녁에 내가 그런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는 것이고, 영화는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를 선택했습니다, 이 얘길 하고 싶은 거다.
이 영화를 알게 된건, 빌 게이츠 덕분이다. 빌 게이츠가 이 영화의 원작인 실화 소설을 그 해의 최고 소설 중에 하나로 꼽았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것. 그렇다. 이 영화는, J.D.밴스라는 실존 인물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쓴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날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빌 게이츠가 얘기하기도 했고 해서, 책을 보기 전에 우선 영화부터 찜을 해둔 상태였다. 어젠, 문득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선택. 거실 탁자에 와인과 안주(브리치즈구이)를 놓고 감상 시작.
(*아름답다. 그만큼 칼로리는 폭탄이었음을 고백..;;)
영화는 예일대 법대에 재학 중이고 중요한 인턴십 면접을 앞에 둔 J.D.밴스가 누나로부터 엄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는데서 시작한다. 입원의 이유는 헤로인 과다복용. 뭐 이 쯤 되면, 어떤 내용이 전개될 지 예상이 되기 시작한다. 최종 면접이 잡힐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일단 엄마에게 가기로 한다. 그 와중에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가게 된다.
오하이오주에서 살던 J.D.밴스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누나, 이렇게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낳아준 아빠는 알 수 없고 엄마는 간호사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며 살고 있다. 알고 보면, 엄마는 고등학교 때 매우 우수했으나 꼬이고 꼬여 결국 이렇게 된 것이라고 중간에 설명이 나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지금은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할아버지는 주사가 심해서 어릴 때 아이들을 학대했고 할머니는 그걸 막고자 심지어 할아버지에게 불을 붙이기까지 했었던 아픈 과거가 있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걸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마약에 손을 대게 되고 결국 일자리도 잃게 된다. 아들인 J.D.밴스를 데리고 누군가와 결혼을 하지만 거기에서 J.D.밴스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어 술을 먹고 사고를 치고 성적은 바닥을 기게 된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손자의 양육을 맡겼다가 이렇게 뒀다가는 인생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딸에게서 손자를 데려온다. 그리고 단호하고 강하게 손자를 대하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쓴다. J.D.밴스는 첨에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가 할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약도 못 먹으면서 손자를 위해 음식을 구걸(?)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고는, 마음을 잡게 된다. 그렇게 그렇게 알바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해병대도 가고 대학도 가고.. 이젠 예일대 법대생이 되었다. 이 얘기.
힐빌리(Hillbilly)는 사전적 정의는 '두메산골 촌뜨기' 인데, 뉘앙스는.. 우리나라 말로 따지면 '흙수저'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아 이 용어 정말 싫지만 말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인턴십 면접을 갔더니 유수한 집안의 자제들이 (예일대이니 어련하겠는가) 와서 아빠 얘기하고 집안 얘기하고.. 정작 본인은 포크와 나이프 사용하는 방법도 모르는 채,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멀뚱멀뚱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보면 '개천에서 용난' 얘기이고, 그 핵심엔 가족이 있다..를 강조한다.
어수선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족이지만, 가족이 지지대가 되었기에 지금의 나가 있다.. 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할머니는 특히, 손자의 장래를 위해 헌신한다. 엄하게, 살아남을 길에 대해 얘기하고 없는 살림에 그렇게 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한다. 누나는, 어렵지만 엄마를 용서하려 하고 감싸려 하고 동생을 보호하고 싶어한다. 엄마는 엄마만의 방식으로 자식을 보호하려 하고 나중에 아들이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조용히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준다. 가라고. 가족은 말한다. 남을 건드리지는 마라. 그러나 나를 건드리면 끝까지 대적해라. 그러다 안되면, .. 가족이 나타날 것이다.
영화는 좀 밍숭맹숭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대단히 감명깊다 싶지는 않지만, 미국이란 사회, 러스트벨트라는 곳에서의 사람들의 삶,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체제들, 계급적인 사고방식,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에 대한 비평도 비평이지만, 책에 대한 비평도 만만치 않다. 저자가 군데군데 백인우월적인 요소들을 계속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제일 커 보인다. 백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이 상황을 대면하는 것과 흑인이나 다른 인종이 대면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일 테니까. 결국 저자는 성공한 백인이고 이제 그 관점에서 과거를 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게다. 빌 게이츠도 백인이니.. 아마도 인종적인 측면에서의 문제는 그다지 못 느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관함에 넣긴 했는데, 살지 안 살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말미에, 실제 인물들의 근황과 사진들이 나온다. 와. 내가 진정 놀란 건, 배우들과 실존 인물들의 싱크로율. 거의 도플갱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아서 이게 실제 인물인지 배우인지 살짝 살짝 놓치게 되더라는 것. 글렌 클로즈의 나이든 모습이 슬프긴 했지만(예전엔 화려한 악역으로도 많이 나왔어서 더 그런 듯) 역시 연기력은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하기도 했고. (감독이 론 하워드라는 것을 고려할 때) 영화의 완성도가 대단히 뛰어난 건 아니지만 볼 만은 했다.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