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10월과 11월은 일이 많은 달이다. 매년 그랬다. 덕분에 가을이라고 일컫는 달들에 단풍 구경이랄까를 간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좋아하는 여행을, 이 아름다운 날들에 가지 못할 정도로 일이 몰리는 시기다. 앉아서 꼼짝도 안하고 일해도 시간만 가지 능률은 그다지 오르지 않고, 진도는 나가지 않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시기이기도 하고.
그러나 사람인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바쁜 탓에 신경이 하늘 끝까지 예민해지고 잠을 못 자 허덕거리더라도 배가 고프니 뭔가를 먹어야 한다. 이런 때는, 뭔가 요리를 한다는 자체가, 사치다. 예전처럼 부모님과 살 때는 내가 이렇게 바쁘면 부모님이, 아니 정확히는 엄마가 밥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다리만 움직여 나가고 자리에 앉아 손으로 나르는 음식을 입에 넣어 씹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러고는 그대로 몸만 빠져나와 설겆이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라는 느낌으로 다시 자리에 앉아 일하고 했는데. 이제 나는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간편한 음식을 한다고 해도, 어쨌든 준비하자면 이것 저것 꺼내야 하고 그릇도 놓아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나서 열심히 먹고 난 후 남는 것은.. 설겆이. 물에 녹는 그릇을 발명해달라.. 부르짖고 싶어지는 즈음이다. 먹고 물에 딱 넣으면 싹 녹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먹을 땐 애써 외면했으나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설겆이 거리에.. 한숨이 푹 나올 뿐이다.
어쨌든 음식 만드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난데없이 밀키트라는 것을 쳐다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내 친구가 조선호텔 밀키트로 나온 짬뽕과 짜장이 맛나다고 보내줬을 땐, 그래? 하고는 무시했었는데, 이쯤 되고 보니 다시 옛 글들을 뒤져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다. 항상 품절, 품절. 오기가 나서 알람 걸어놓고 아침에 울리자마자 들어가도.. 아, 누군가가 이미 채가는 날이 이어지더라는...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는 다시 알람, 실패, 알람, 실패. 우씨.
그러다가 어느날! 잡혔다, 짬뽕과 짜장이. 부모님 드실 것과 내가 먹을 것을 하나씩 주문하고 완료를 누르는데, 그 흐뭇함이라니. 그 뿌듯함이라니. 해냈구나, 비연. 며칠 뒤 도착한 그것들은, 생각보다 부피가 되었다. 특히 짬뽕은 이것저것 든 게 많아서 이거 쓰레기 치우는 게 더 일이겠군 싶어서 살짝 후회도 했었다.
그러나, 그러나. 만들어 먹어보니, 오, 이것은 사서 먹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맛. 일단 외양도 비슷하고 (짜장에 오이 썬 거라도 올렸으면 좀더 비슷했을텐데 아쉽다. 오이가.. 집에.. 없었다 ㅜ) 맛도 아주 괜찮았다. 시켜먹는 것보다 낫다고나 할까. 일단 면이 생면이라 삶아서 담으니 쫄깃쫄깃한 것이 식감이 좋았고 그 위에 얹는 소스들도 훌륭했다. 특히 짬뽕은 해산물이나 야채가 꽤 실하다. 집에 해산물이 좀더 있거나 죽순이라도 있으면 추가해 넣어서 더 맛나게 만들 수 있겠구나 했다.. 물론 집에 없었다. 요즘 장을 못 봐서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 아멘. .ㅜ
그러나, 역시 설겆이는 남는다. 이래서 집사가 필요한 거다. 설겆이 시킬 집사. AI라도 좋으니, 설겆이 시킬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 먹고 나서 설겆이 하고 나면 맛있게 먹을 때의 감동이 십분의 일 정도로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뭐 암튼. 이거 추천. 내가 무슨 쓱닷컴 직원도 아니고 (쓱닷컴 근무하는 후배는 아주 좋아라 좋아라 하더라는 ㅎㅎ) 내돈내산하여 시식해본 결과 좋더라. 라는 평이다. 밀키트를 잘 안 먹어서 (사실 처음이다)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다시 사서 먹을 의향 이백퍼다. 물론 품절 상태의 이것들을 구입하려면 매일 아침 진이 좀 빠지겠지만서도.
.. 요즘 금주/절주 중인데, 오늘 일 하나를 끝내서 지금 와인 한잔 할까 고민 중이다. 한 달간 술 먹은 게 2번인가. 기적이다, 비연. 내가 아는 선배 언니는, 이 마당에 넌 금주/절주까지 하면 뭔 낙으로 사니? 했지만, 지금 일이 많아 술을 먹을 시간도 없어요 라고 대답.. 했다가는 맞을 것 같아서 그냥 웃지요.. 했다. 오늘은 한잔 할까? 큰 일 하나 일단 초안 완성했는데. 으흠?
**
이 와중에도 이번 달 책을 먹으면서 틈틈이 보는 비연. 짬뽕국물 짜장소스 튀길까봐 온몸으로 가리며 조금씩 읽고 있다. <사람, 장소, 환대>. 좋은 책이다. 지적이면서도 감정과잉 없고 억지논리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주장하는 바는 명백한 그런 책이다. 특히나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책이라 읽을 때 훨씬 편하다. 그렇다고 쉬운 책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렵다. 많은 이론들이 교차하는 데다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란 뭐지? 에서 시작한 이야기들. 나는, 이렇게 내가 그냥저냥 알고 있던 기본적인 이야기를 이론적으로, 새롭게 혹은 통합적으로, 풀어나가는 책을 무진장.. 좋아해서, 이 저자에게 큰 관심이 생겼다. 김현경... 이 사람 강의가 있으면 찾아서 가봐야겠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따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