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을 통해 동물은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고기로 존재하는 동물에게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중략)... 동물이라는 이름은 소비자가 고기를 먹기 전에 죽은 동물의 신체에 다시 이름을 부여하는 언어, 곧 각 부위별 명칭에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p104)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되살려지는 것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육식에 대한 폭력성을 대비하기에 앞서 내가 스쳐 지나쳤던 동물에 대한 기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체되기 전의 동물, 그리고 해체된 동물, 어쩌면 해체되었을 것 같은 동물.


어릴 때 키우던 개를 생각한다. 이름이 에스였지. 짧은 흰털을 가진 잡종견이었는데 영민한 녀석이었다. 답답할 때 가끔 집을 뛰쳐나갔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 집을 찾아 돌아오고 우리가 들어가면 야단스럽지 않은 모양새로 컹컹 거리며 다가오던 개였다. 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동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아주 살갑게 대하진 않았지만, 동물이라든가 반려견이라든가 얘길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어릴 때 추억과 결부하여 내게 꽤 깊숙이 박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어느날 집을 나간 에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엄마가 불쑥 말씀하셨다. "어디 개장수한테 잡혀갔나보다... 에스가 우리집에 다시 안 올리가 없는데.." 그 때 내 머릿속에는 개장수라는 것과 보신탕이 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어린 마음에 개장수가 우리 에스를 잡아가서 어떻게 했을까 죽였을까 라고만 생각하고 안타까와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개장수가 데려갔다면... 버~얼써 어느 사람의 뱃속에 들어갔겠다 싶다. (으악) 내 옆에 있던 개가 누군가에게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고 나누어져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거란 생각 자체가 뭐랄까. 그냥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고야 만다. 


그리고 나서 우리집에 새로 들어온 개는 돌이였다. 이름 한번 촌스럽게 지었다 싶지만, 이 개는 긴 갈색털이 산지사방으로 자란 그냥 잡종견이었다. 영민하지도 않았고 그냥 얌전하기만 했다. 어디 뛰쳐나가는 법도 없었고, 그 자리에서 맴맴 돌기만 하는 녀석이었다. 내 동생이 꽤나 예뻐해서 엄마가 너무 돌보기 힘들다고 작은 아빠 집에 보내버렸을 때 울고 불고 하여 다시 데려온 기억도 있다. 돌이는,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같이 못 가게 되어 지나가던 개장수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잡종견이고 집에 들여 키우기도 힘든 개라 아무리 찾아도 누가 받아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결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날 그렇게 팔려가던 돌이는, 철제 케이스에 갇혀 바깥으로 주둥이를 내민 채 우릴 쳐다보던 그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슬프다고만 딱 잘라 얘기할 수 없던 그 눈빛. 알고 있었던 거지. 헤어짐과 자신의 (먹힐) 운명을. 어쩌면 내 감정이 이입되어서 더 그렇게 느꼈는 지도 모른다.... 아뭏든,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장면이다.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개든, 소든, 돼지든... 닭이든... 동물은 살아 숨쉬고 뛰어다니고 내 곁에 와서 몸을 부벼댈 수 있는 뜨거운 피를 가진 생명체인데 그것이 고기로 전락되는 순간, 원래의 그것은 사라진다. 내가 이 책이 정말 고마운 것은, 잊고 싶었거나 몰랐거나 그냥 지나쳤던 그 '생명과 고기 사이의' 과정을 명확히 인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은 똑같이 고통을 받으며 죽는다. 당신이 자기가 기른 돼지를 잡아 먹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죽여야 했으면, 십중팔구 당신은 돼지를 죽이지 못한다. 돼지 멱따는 소리 듣기, 솟구쳐 흘러내리는 붉은 피 지켜보기, 이 광경이 무서워 엄마 뒤로 숨어버리는 아이 바라보기, 동물의 눈에서 죽음의 그림자 보기 등은 당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래서 당신은 돼지를 대신 잡아줄 사람을 고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게토가 지저분하다고 비웃는 부유한 귀족들이 그 고통에 찬 비명을 들었으면, 배고픔에 서서히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봤으면, 사람들의 사나이다움과 위엄이 교살되는 장면을 목격했으면, 살인을 계속 저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이런 공포를 겪을 기회가 없다... 만약 당신이 고기를 먹기 위한 동물 살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당신은 게토의 이런 실상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쪽도 정당화할 수 없다. (Gregory 1968, 69~70) (p110) 



그래서, 이런 구절, 조금 과하게 비교한다 싶은 이런 구절도 어느 면에선 마음에 와닿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과연 채식주의가 될 것인가, 육식을 줄이게 될 것인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계속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은 분명해보인다. 동물에만 그치는 내용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과 해체와 소비에 대응된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더 기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고기는 늘 권력을 쥔 자가 먹었다. 유럽의 귀족 사회는 온갖 고기로 가득한 음식을 소비한 만면 노동자들은 합성 탄수화물을 소비했다. 식습관은 계급 구분을 명확히 해주며 가부장제에 기초한 구분도 확실히 한다. 2류 시민인 여성이 먹는 음식, 그러니까 채소, 과일, 곡식 등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2류 식품으로 여겨진다. 육식에서 드러나는 성차별은 형식은 다르지만 계급 차별로 되풀이된다. 고기는 남자의 음식이고 육식은 남성적 행동이라는 신화가 모든 계급에 스며들어 있다. (p98)


따라서 동물권 옹호자들도 동물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여성에게 적용되는 '성폭행rape'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주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은유적으로 동물에 적용할 때, 우리 문화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행의 사회적 맥락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선결 조건 없이 단지 동물 억압을 설명하려고 여성 성폭행이라는 단어에 의존하고 마는 은유적 차용은, 결국 가부장제의 근원적 폭력에 맞서지도 못할 뿐 아니라 동물 억압과 여성 억압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목적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폭력에 맞선 저항이자 부재 지시 대상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제 구조의 제거다. (p139)




오늘은 여기까지. 


아직 절반 좀 넘게 읽긴 했어도, 이 책, 좋다. 내 행동에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겠고 (자신은 못하겠지만, 내 일부는 변하리라 본다) 그 전에 내 인식의 지평을 좀 더 넓혀 주는 책이다. 아울러 이 책을 읽으면서 보관함에 푱푱 담은 책들..은...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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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21-01-14 16: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돼지고기 찌개감을 500g 사다가 김치, 청국장 끓여서
돼지고기가 아니면 이게 이렇게 맛있겠냐 같은 생각이 지금도 진심으로 들지만
이러던 것도 ˝그땐 그랬지˝ 하게 될 거 같기도 해요. 육식에 대한 관점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때가
오고 말 거 같은.

한편 그래서 불안하기도.. ㅎㅎㅎㅎㅎㅎ
돼지고기 찌개 먹고 싶은데 아직은요.

붕붕툐툐 2021-01-14 16:35   좋아요 3 | URL
돼지고기가 아니면 이렇게 맛있겠냐에서 공감을 안할 수가 없네요~ㅋㅋㅋㅋㅋ

비연 2021-01-14 20:26   좋아요 1 | URL
아.. 정말 딜레마에요. ㅜㅜ 돼지고기 찌개라고 하니 뭔가 확 당기는..
근데 <육식의 성정치>가 절 쳐다보고 있고..
관점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때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위안.. (먼산;;)

붕붕툐툐 2021-01-14 16: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대사회는 푸른 풀밭에서 뛰어놀던(실제야 어쨌든) 소, 돼지, 닭이 어떻게 우리 식탁에 오르는지 그 과정을 지우려고 무척 애쓰고 있죠.. 아는 분 딸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닭 잡는 모습을 보고, ˝꼬꼬 불쌍해..... 맛있겠다.˝ 했다는 얘기가 떠오르네요..

비연 2021-01-14 20:27   좋아요 1 | URL
푸하하. 불쌍해.. 에 이어 맛있겠다..가 나와서 빵터짐... ^^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과정들이, 그러니까 의식 속에서 생략된 과정들이 너무나 많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 읽는 내내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금 회의하게 되는...

미미 2021-01-14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덤스 책 읽고 ‘프랑켄슈타인‘ 다시 보게됐어요! 여성작가의 소설인줄도 몰랐구요.저도 푱푱 담아갑니다 ㅋㅋ

다락방 2021-01-14 17:26   좋아요 4 | URL
프랑켄슈타인은 진짜 엄청 재미있어요, 미미님! 제가 그걸 2017년엔가 읽었는데, 그 해 읽은 최고의 소설이라고 페이퍼 썼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미미 2021-01-14 17:36   좋아요 2 | URL
어머 페이퍼 찾았음요! 1년에 한권 읽을 수 있음 이 책이라니 저 또 조급해집니다!!

다락방 2021-01-14 17:43   좋아요 3 | URL
아니, 찾아보실거라 생각했다면 제가 링크 드릴걸 그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미님이 프랑켄슈타인 읽으시면 어떤 감상을 들려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꺅 >.<

비연 2021-01-14 20:28   좋아요 2 | URL
저도 예전에 다락방님이 쓰신 <프랑켄슈타인> 관련 글, 기억나요...
한번 읽어봐야지 할 정도로 뽐뿌질 막 느끼게 하는 페이퍼였는데^^

미미님. 푱푱~ 자꾸 하시면..ㅋㅋㅋ 어느 새 보관함이 그득... 자꾸만 사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 흠냐.

다락방 2021-01-14 1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은게 겹치네요, 비연님. 아마도 겹칠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예요.
언급하신 것처럼 내 인식의 지평을 좀 더 넓혀주는 책이라서 읽기에 신나고 흥분되는가 봅니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절판이라 번역본을 구할 수가 없어 아쉬워요 ㅠㅠ

비연 2021-01-14 20:30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ㅎㅎ 비슷한 데가 좋았던 모양이네요.

<정글>은 번역본을 구할 수 없길래.. 세상에. 이 책은 왜 절판이 된 것이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원서를 보관함에 담긴 했는데.. 그냥 번역본이 다시 나와주십사.. 하는 게 솔직한 심정 ㅜ

han22598 2021-01-14 2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잡아먹을 동물을 짐승이라고 따로 구별해서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슬픈 이름 짐승 ㅠ

비연 2021-01-15 01:55   좋아요 1 | URL
짐승.. 그럴 수도. 그런 짐승이란 단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반대 입장이 되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syo 2021-01-15 0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멍뭉이 이야기만 나오면 높아지는 나의 집중력.....

비연 2021-01-15 01:48   좋아요 1 | URL
역시나 멍뭉 하면 쇼님...
 

 

 

 

 

 

 

 

 

 

 

 

 

 

 

 

 

감각적인 문체에 젊은이들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선... 시작하고 1/3 정도까진 괜찮았는데, 갈수록 기분이 좀 나빠지려고 하더니 마지막엔 많이 나빴다.. 고나 할까.

 

메리앤과 코넬은 둘다 우수한 학생이었다. 트리니티 대학에 가서도 둘다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의 우수한 학생. 메리앤은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사회의 부조리함과 약자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 비해 코넬은 영문학 전공이긴 했지만 딱히 어디에 관심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둘은 여러 의미로 방황하고 있었고 둘 사이도 끊임없이 삐걱댔다. 환경도 달랐지만, 오해도 있었고 서로에게 지극한 끌림은 있었지만 매순간 방해를 받았다. 코넬은 메리앤의 부유한 환경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찾고 싶었던 것 같고 메리앤은 그런 코넬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수 있다. 새로운 연인이 생기고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유지하는 묘한 상태가 지속된다.

 

그런데, 메리앤은 마조히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새로 사귄 제이미에게 섹스를 할 때 자기를 때려달라 요구하고 그게 심각해지면서 목을 조르고 구타하고... 반면에 코넬은 의대생인 헬렌을 만나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끼고 제대로 된 연애라는 걸 한다. 메리앤의 방황은 점점 심해지고 점점 우울해지고... 그리고 코넬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한다. 코넬은 그런 메리앤을 보며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면 옆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뭐죠, 이건?

 

코넬은 친구의 자살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호평을 받게 된다. 메리앤은... 급속도로 평범해진다.

 

 

... 메리앤은 더 이상 찬탄의 대상도, 매도의 대상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잊어버렸다. 이제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녀가 지나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p310)

 

 

중등학교 때 만난 이 둘은, 중등학교 때는 코넬이 늘 인기의 중심이었다. 다정하고 편안하고 누구에게나 친근한 사람이었다. 메리앤은 뭔가 사차원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친구도 없고 뭔가 다가가기 힘들다고 여겨졌다. 그것이, 트리니티 대학에 같이 진학하면서 역전되었더랬다. 코넬은 뭔가 위축되어버린 반면, 그래서 친구도 그다지 없이 그냥 혼자 밥먹고 혼자 책읽는 상태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반면, 메리앤은 지성과 매력을 발산하며 모두의 중심에 섰다.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고 그녀와 사귀고 싶어하는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그랬다. 그런데 이제 평범해졌다.

 

어쩌면 평범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늘 이상한 애 취급을 받으며 자기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은 코넬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외롭게 지낸 지난 세월에 비해, 코넬이 옆에 있고 자신은 튀지 않는 생활로 직장에서 상사의 이메일을 대신 날려주는 일에 만족하며 지내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회와 주변 사람의 사는 모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 빛을 잃었다는 게,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코넬의 통제 아래에서 안정을 되찾았다는 설정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코넬은 메리앤의 지지 속에서 이제 글로 인정을 받고 심지어 좋은 자리에 오퍼도 받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지원한 자체를 메리앤에겐 말하지 않았다. 결과만 말했다. 승산없는 시도였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는 의논했던 일을 그녀에겐 얘기하지 않았다. 결과만 통보하는 남자.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여자. 이 상태, 이게 사랑인가? 마지막 문장은 화가 더 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한다. 그는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달라져서 돌아오거나.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결코 다시 되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고독으로 인한 고통은, 그녀가 예전에 가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느끼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마치 선물처럼 선한 면모를 선사해주었고, 이게 그것은 그녀의 것이다. 한편 그의 삶은 그의 눈앞에서 동시에 사방으로 펼쳐진다. 지금껏 그들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말이야, 정말.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말로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어.

넌 가야 해. 난 항상 여기 있을 거야. 너도 알잖아. (p324)

 

 

둘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헌신한 결과가, 여자에겐 선한 마음이고 남자에겐 성공인가. 그리고 여자는 말한다. 난 항상 여기 있을게. 으악. 내가 너무 삐딱해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전개가 너무나 맘에 안 들었다. 그래서 처음의 그 촉촉하고 풋풋했던 사랑의 이미지가 다 날아가버렸다. 둘다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상태로 먼 거리를 두고 살아도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결말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메리앤이 누군가에게 의존적이고 지배(?) 하에 있고 싶어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사실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중이지만) 그게 결론이 되면 안되지 않았나 싶은 거다. 뭔가를 뚫고 올라가는 맛이 없이 뚫어보려는 시도조차 없이 그냥 주저앉아 평범을 가장한 안주를 하는 느낌이랄까. 그에 비해 코넬은 '사방으로 펼쳐지는 삶'을 누리고 말이다.  드라마도 있다고 해서 킵해두었는데 지웠다. 영상으로 보면 더 화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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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8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도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
기대로 시작해서 실망으로...

아 더 읽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비연 2021-01-08 13:19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흑. 사람마다 감상이 틀릴 수 있다니.. 한번 읽어보심도...ㅜ
저는 실망이었지만.. 혹시 다른 느낌이실 수도 있고. 제가 넘 삐딱한가 싶기도 하고ㅜ

단발머리 2021-01-08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패쑤 쪽으로 마음이 슬슬 이동중입니다. ㅎㅎㅎㅎㅎ

비연 2021-01-08 14:54   좋아요 0 | URL
... 흠... 아직 시작 안 하셨다면.. 패쑤.. 하셔도 되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레.
 

 

연도를 굳이 끊어서 독서를 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정초라 그리고 이 페이퍼가 2021년의 첫 페이퍼라 이렇게 쓰고 시작해본다. 고요하지만 지속적으로 (혼자) 바쁜 정초에, 문득, 아 정말 이러면 안되겠어, 라는 마음으로 며칠 확 쉬어버렸다. 흠. 그랬더니 지금 일 목록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오게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잘 쉬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지. 끄덕.

 

 

 

 

 

 

 

 

 

 

 

 

 

 

 

 

 

새해 들어 첫 책은, <물의 살인>. 1월부터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나란 인간. 그러나, 마르탱 세르바즈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쉬면서 살살 읽었다. 여전히 재미는 있는데 역시나 주인공 괴롭히기 신공에 들어간 것이지. 도대체 작가들은 왜 스릴러물을 쓰면서 갈수록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것인지. 악취미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써클>이 되겠지만 앞 편의 제목을 <눈의 살인>으로 잡고 시작해서 연속선상으로 <물의 살인>이라고 붙인 듯. 하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이눔의 써클이 뭔 의미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 눈길 끄는 데는 <물의 살인>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권 스트레이트로 다 읽고는, 아직 몇 권 남은 스릴러/경찰물을 약간 뒤로 하고 든 책은, <노멀 피플>.

 

 

 

 

 

 

 

 

 

 

 

 

 

 

 

 

 

워낙 호평이라 어찌어찌 고민하다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젊은 남녀 사랑 이야기에는 이제 하등 관심이 사라져버린 상태라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책을 들었다, 가 맞는 말이다.  젊은 아일랜드 작가라. 요즘 젊은이들의 문체일까 뭐 그런 정도의 호기심. 근데 이 책, 꽤 재미나다. 인정.

 

그러니까 내용은 심히 진부한 토대를 가진다 이거다. 부모가 변호사인 '좋은' 집안의 메리앤과 그 집에 엄마가 청소 도우미로 일하러 가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코넬이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이야기다. 메리앤은 친구가 없고 아웃사이더인 반면 코넬은 누구나 좋아하는 주변에 늘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둘이 사귀게 되었는데, 메리앤은 전혀 눈치라는 걸 보지 않고 코넬과 사귀는 것에 자유로운데, 코넬은 늘 주위 눈치를 살핀다. 둘만 있을 땐 더없이 좋은데 말이다. 아웃사이더인 메리앤과 사귀는 걸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집안이 차이가 나니 메리앤 집에서 알게 되면 싫어하지 않을까, 이런 등등의 이유로 눈치를 본다.

 

 

그러면 우리 둘 다 더블린에 있게 되는데, 그가 말한다. 장담하는데,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면 너는 나를 모르는 척할걸.

메리앤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긴장하며,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그를 모르는 척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그는 메리앤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의 미래, 그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겁에 질려 망연해진다.

그 순간 그녀가 입을 연다. 나는 절대로 너를 모르는 척하지 않을거야. (p40)

 

 

코넬은 그러나, 메리앤을 모른척 한다. 졸업파티에 (코넬을 좋아하던) 다른 여자애에게 함께 갈 것을 청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메리앤은 학교를 그만둔다. 코넬은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사랑한다고 했었는데, 사람들 눈치보느라 그녀를 배신한 거다.

 

 

코넬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한다. 나는 절대로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알았지? 절대로. 그녀응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너 때문에 정말 행복해.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덧붙인다. 사랑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진심이야. 그녀는 다시 눈물이 가득 차올라 두 눈을 감는다. 그녀는 심지어 훗날 기억 속에서도 이 순간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이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든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처음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열렸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그게 내 삶의 시작이었어. (p60-61)

 

 

이 대목에서 정말 간만에 마음에 파도가 일렁였다. 삶이 시작되던 순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새롭게 하던 순간. 아연하게 돌아보며 이 대목을 세 번 정도 다시 읽었다. 이 작가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 걸까. 경험하지 않고 이 느낌을 알 수 있을까... 헤어졌던 메리앤과 코넬이 트리니티 대학에서 다시 만나 다시 시작하는 생활을 읽고 있다. 이들의 앞날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사랑이야기임에도 왠지 기꺼운 마음으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대사를 따옴표에 넣지 않은 게 좋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처럼, 문장 속에 대화체가 녹아난 듯한 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보고 있는 일드의 내용에서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눈치를 보는 사람. 나기. 나기의 휴식(凪のお休).

 

 

 

 

 

주인공인 나기는 28살 생일을 앞둔 싱글 직장인이다. 다른 사람 눈치와 분위기를 살피느라 맨날 손해보는 타입. 동료가 일을 막 떠맡겨도 네네 하고 웃으며 받고 동료가 잘못한 것도 자기가 한 것마냥 다 짊어지고 남들이 나 빼고 다른 데 모여 자기 이야기할까봐 SNS를 집착적으로 찾는다. 덕분에 매번 야근이고 매번 갈팡질팡이다. 애인은 같은 회사 영업사원 신지.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는 사람인데 나기와 사귀는 것을 비밀로 하고 연애를 한다. 나기는 신지와 결혼해서 이 모든 상황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에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한다. 혹시 날 버리면 어쩌지,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늘 내키지 않아도 하자는 대로. 식욕이 채워졌으니 성욕을 채워야겠다며 신지는 설겆이 하는 나기의 등에 대고 말한다. "해줘.". 뭘 해줘.. 미친. 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나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간다. 젠장.

 

그런 나기가 신지가 회사 동료에게 자기 애인 얘길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걸 듣게 되고 그 순간 과호흡으로 쓰러진다. 쓰러지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동료도 애인도 연락한번 없었다는 걸 알게 된 나기는 SNS도 다 지우고 연락처도 다 지우고 짐도 다 버리고 이불과 자전거 하나만 든 채 멀리 이사를 가서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주위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던 자신의 모습을 고쳐나가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내용이다. 신지는 정말은 나기를 사랑한다며 어떻게 해서 나기를 찾아내서는 와서 너는 못 변해, 너는 그대로일거야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고. 그러나 나기는 힘들지만 그 상황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신지가 더 주변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비겁한 인간상인 게지. 나기와 사귀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이 뭐라 할까, 그런 생각에 겉으론 쿨한 척 하면서도 자기 마음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바보. 짜증.

 

쿠로키 하루가 뽀글머리로 나와서 (사실 원래 심한 뽀글머리인데 놀림을 너무 받은 나머지 매일 아침 일어나 한시간씩 머리를 폈었다. 쉬는 동안 그냥 뽀글머리 그대로 지내기로 한다) 역시나 그녀만의 자연스러우면서도 투명한 연기를 잘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조금 한적한 곳에서 나름의 개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그 속에서 자기를 찾아나가는 나기를 보면서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든다. 물론 가스라이팅하는 신지는.. 발로 걷어차고 싶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 특히나 사랑을 하면서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한다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다. 컴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처지 때문일 수도 있고 뭐 기타 등등 이유는 많겠지만 결국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인 사랑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속인다면 어디가서 떳떳하게 행동할 자신감 따윈 가질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공기는 읽어서 눈치보라고 있는 게 아니라 마시고 뱉는 거라고 말하는 나기가 인상적이었다.

 

空気は読むものじゃなくて、

吸って吐くものです。

 

공기는 읽는 것이 아니라 마시고 뱉는 거에요.

 

 

 

이제 이 책도 손에 들어야 할 때. 오늘 아침에도 불고기 그득 구워먹었는데.. 이제 그런 것도 슬슬 포기하게 될까. 괜한 두려움(?)에 들기 어려운 책이지만. 함께 읽기로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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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1-06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쿠로키 하루 넘 좋아해요!! 나기의 휴식 콜!! 근데 어떻게 보나요?? 한국 넷플릭스에서하나요?? ㅠㅠ

비연 2021-01-06 16:49   좋아요 0 | URL
아.. 이게 넷플에는 없는 것 같고 왓챠에만 있는데 왓챠가 한국 전용 서비스라 ㅜㅜㅜㅜㅜㅜㅜ 한국에선 재작년에 채널J(일본방송 전문)에서도 했다는데.. 미국에서는 보기 힘들겠죠? 아쉽 ㅠㅠ

라로 2021-01-06 16: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왓차!!!!😞

레삭매냐 2021-01-06 1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대하던 <노멀 피플> 중고서점에
떠서 사러 가려고 했는데 고새 누가
사갔더라구요.

그래서 어제 도서관에 가서 빌렸
답니다. 다들 재밌다고 하시니 한
번 보려구요.

비연 2021-01-06 17:42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함께 읽어요~^^ 저 중간쯤 읽고 있는데 재미지네요^^

단발머리 2021-01-06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멀 피플 대출했다가 한 쪽도 안 읽고 반납한 사람, 손! 손!!

비연 2021-01-06 21:27   좋아요 0 | URL
헉. 이런.. 한번 다시 시도해보심이 ^^;;;;;;

공쟝쟝 2021-01-06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멀피플 우어어 촉촉해진다! 보관함에 쏙 넣기! 그리구 (보지않을) 드라마 주인공 나기를 응원해요! 나기야 우리는 할 수 있어! 자존을 스스로 획득 체득 하자! (왜 여기에??)

비연 2021-01-06 21:28   좋아요 1 | URL
촉촉합니다... 드물게 촉촉한 사랑 이야기네요..^^ 그리고 나기는 저도 응원중 ㅎㅎ

유부만두 2021-01-06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나기의 휴식> 드라마 봤어요. 첫회에 너무 짜증났는데 자꾸 그 남자넘에게 서사를 앵겨줘서 싫었어요. 옆집 젊은넘도 너무 싫고 아 그 엄마는 최고로 나쁜.... 그런데 끝까지 다 봤는데, 음 뭐랄까, 이런게 인생이다? 아니 휴식도 좀 하자? 일본 드라마는 예측불허로 계속 고구마데쓰네, 그런게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노멀 피플> 저만 별로라 했나보네요,,,,
제가 애브노멀이라 그런가, 아님, 제가 이미 너무 늙어버려서 어린 사람들 연애 이야기를 너무 멀뚱 멀뚱 읽었나보아요.

비연 2021-01-06 21:36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2화까지 봤는데 그 남친넘 정말 때려주고 싶은... (그래서 드라마 남우조연상 받았다네요?ㅎㅎ)
그래도 쿠로키 하루가 좋아서 계속 보고 있고.. 뭐랄까. 좀 힐링도 되는...
일드가 좀 고구마스럽긴 하죠 어떤 면에선 ㅎㅎㅎ

<노멀 피플>은 호불호가 좀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이 어린 애들 사랑 이야기라. 흠.. 저도 이거 몰입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어서 놀라는 중요.

psyche 2021-01-07 09:03   좋아요 1 | URL
저도 <노멀 피플> 별로였어요. 내가 너무 늙었다보다 싶었다는....

비연 2021-01-07 10:22   좋아요 0 | URL
psyche님도 별로셨다니... 이 쯤 되면 제 감성이 아직 청소년...?ㅜㅜㅜ

psyche 2021-01-07 10:39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사랑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해요. 영원한 사랑이 어딨냐. 같이 살아봐라 뭐 이런 마인드라서,,, ㅎㅎ

syo 2021-01-06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인 두 권 나란히 놓으니까 되게 예쁜 살인이다.... 그렇지만 정작 챙겨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기의 휴식> ...

비연 2021-01-06 21:4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두 권 나란히 놓기 전엔 표지가 뭐 이래? 했는데 이런 깊은 뜻이 있더라구요 ㅎㅎ
<나기의 휴식>... 남친넘이나 근처 남자넘들이 열받게 하지만 (막 그냥 넘으로 나간다..;;) 그래도 재밌어요^^

han22598 2021-01-07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의 살인..아주 궁금합니다. 물이 빨강색, 검은색으로 막 바뀌고 그러나요? ㅋㅋㅋ

비연 2021-01-07 10:21   좋아요 1 | URL
흠.. 물 안에 시체가.. 그 밖에도 여러 개가..ㅜㅜㅜㅜ
그러나 내용은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심도..^^;;;;
 

 

 

 

 

 

 

 

 

 

 

 

 

 

데이비드 발다치의 데커 시리즈는... 나오면 찾게 되는 시리즈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찾다가 버린 시리즈들도 숱해서 꼭 끝까지 함께 하겠어요 하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암튼 이번에 나온 <진실에 갇힌 남자>도 나쁘지 않았다. 에이머스 데커가 딸의 생일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얘기는 시작되고, 거기에서 신참 형사일 때 맡았던 사건에서 감옥으로 보냈던 사람을 만난다. 일가족 세 명과 한 사람을 죽인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구금중이었던 그 사람은, 말기 암으로 석방이 된 상태였고 일부러 데커를 찾아와 난 무고하니 내가 무죄임을 밝혀달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한다. 이상하다 생각한 데커가 그 사람과 약속을 잡고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은 죽어 있었고. 아주 비참하게.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그러니까 진실을 알면 안 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데커가 눈치채고 다시 그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얘기는 진행된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래서 결국 실체가 파악되긴 했지만 그 무성한 이야기들로 말미암아 다음에 나올 책은 이 이야기의 연장선상이겠구나 떡밥 가득 뿌리며 끝난다. 사실 이번 책은, 범인을 잡고 어쩌고 하는 것보다 데커의 변화가.. 좋았다.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지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그 이후에는 사람과의 접촉을 꺼려하고 자연스러운 감정교류도 어려워진 데커. 자신의 그런 점을 포용해주고 사랑해주던 부인과 딸은 저 세상으로 가버렸고 그래서 더욱 사는 것이 팍팍해진 데커였지만, 처음 책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제미슨과 이번에 만난 옛 동료 랭카스터, 그리고 자신이 혐의를 벗겨주어 인생의 극적인 반전을 이룬 마스.. 와 같은 좋은 주변 사람들 덕분인지, 아니면 그 과잉기억증후군을 일으킨 뇌의 변화가 나이가 들면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아뭏든 이제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위로를 하고 공감을 하고 접촉을 해도 꺼려지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번 책에서는. 나는 생물학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따뜻함이 그를 열리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다.

 

살면서 제일 좋은 건, 우정이지. 라고 생각한다. 사랑도 좋지만 더 오래 가고 더 끈질기게 힘이 되어 주는 건 우정이지. 라고 생각하고. 그건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이나 국적이나 경제적 상황이나 어쩌고저쩌고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교감이다. 그냥 만나서 밥먹고 술먹고 수다떨고 그런 사람들은 '아는 사람'인 거고, 우정을 맺는 사람은 좀 다르지 않나 라고 늘 생각한다. 그래서 난 '친구'라는 말을 아무한테나 쓰지 않고 사실 친구 이외에는 다 비슷한 관계다 라고 여기고 있고. 친구가 주는 우정은 날 많이 변화시켜왔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데커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속에 자리하게 된 것 같아, 소설 속의 인물인데도 반가와하는 마음이 불쑥 일었다. 좋은 일이야. 데커. 잘 된 일이야... 토닥토닥.

 

그런데 그런데... 나는 이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를 나오는 족족 다 사서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6년부터 한 해에 한 편씩 나왔길래 흠? 2019년은 안 나왔었나? 하고 봤더니만.... 내가 안 읽고 건너뛴 게 있었다! ㅜ

 

 

 

 

 

 

 

 

 

 

여기까진 읽었는데. 이렇게 사람 얼굴 대문짝만한 표지들은 다 읽었는데...

 

 

 

 

 

 

 

 

 

 

 

 

 

 

 

 

이걸 건너뛰었다. 어쩐지 뭔가 이번 책을 읽으면서 데커의 변화가 좀 점핑하는 기분이네, 작가가 기분이 업되었나 뭐 이런 생각을 잠깐씩 했었는데 사실은 중간 단계가 있었던 거다. 으악. 이럴 수가. 12월이 가기 전 이 책을 사야 하나.

 

일단 지금 이 다음에 든 책은 이것. 올해를 마무리하는 12월하고도 하순에 읽기에 적합한 책제목 아닌가. 이 무례한 시대를 품위있게 건너는 법이라니... 그리고 여전히 푸코. 흠?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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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0-12-21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저도 책 한권 건너뛴 정도는 아니지만 엄청난 반전으로 유명한 어떤 책의 ‘첫 장‘을 빼놓고 읽었어요ㅠ

비연 2020-12-21 12:18   좋아요 2 | URL
헉. 그것은... ‘첫 장‘을 건너뛴다는 게 이해는 안되지만...생각해보니 으악.. 입니다 ;;
전 이렇게 건너뛴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지금 쪼르르 달려가 이 책 구매에 들어갑니다 ㅋㅋㅋ

미미 2020-12-21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저도 꽤 지난 아직까지도 믿기진 않지만 당시 너무 마음이 급했는지 어쩐지..ㅋ 그런 실수를ㅋㅋ 참고로 제목은 ‘살육에 이르는병‘이었어요

비연 2020-12-21 12:31   좋아요 2 | URL
아. <살육에 이르는 병>... 전 그 책은 첫장도 마지막장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안 읽어도 되실 듯ㅜㅜ 넘 끔찍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책이었어요.. 개인적으로ㅜㅜ

미미 2020-12-21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ㅠㅜ 워낙 내용이 끔찍해서 그런경우가 꽤 있더라구요.
트릭의 참신함만 기억하려구요ㅋㅋ

비연 2020-12-21 13:17   좋아요 1 | URL
넹넹.. 트릭의 참신함만.. ㅎㅎ 다른 건 싹 잊기로..ㅜ

파이버 2020-12-21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건너뛴 책만 표지가 다른 시리즈 같아서 놓치신 것이 이해되는걸요ㅎㅎㅎ 이건 출판사 잘못?입니다ㅎㅎㅎ

비연 2020-12-21 13:18   좋아요 3 | URL
그런 거죠? 도대체 왜 저 책만 표지가 다른 거죠? 우잉. 출판사 나빠요..

scott 2020-12-21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헷갈려 ㅜ.ㅜ 출판사가 표지에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다니 ㅋㅋ워낙 다작을 한 작가라서 편집자들도 건너뛰고 읽었나봐요 ㅋㅋ

비연 2020-12-21 15:29   좋아요 1 | URL
딱 이 한 권만 표지가 다르다니. 흑. 표지에 일관성을 가져라 가져라! 라고 부르짖고 싶습니다. 이렇게 시리즈물은 중간에 건너뛰고 읽으면 무지하게 찝찝해서... 급하게 주문해서 얼른 읽으려고 합니다 ㅎㅎㅎ

syo 2020-12-21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지막에 후렴처럼 타오르는 책 한권....

비연 2020-12-21 18:36   좋아요 0 | URL
언젠간 이 책을 메인으로... (언제??? 후다닥)
 

 

 

 

 

 

 

 

 

 

 

 

 

 

 

 

일이 정말 하기 싫을 때가 있다. 오히려 시간은 있는데, 그 시간을 그냥 농땡이를 친다 하더라도 일한다고 나서려는 마음도 안 생기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시기. 지금이다. 그래서 며칠 그냥 어영부영 지내버렸다. 일을 안 한다는 것 빼고는 내게는 아주 달콤한 시간이었다. 이런. 어쩌지. 흐흐.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이제야 보았고 (완전 재밌다!) 이 책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읽었다. 나의 관심사를 여러 모로 충족시켜주었던 시간이어서 후회는 없다. 나중에 일더미에 깔리면 그 때 후회하겠지. 아 몰라, 패쑤.

 

이 책의 저자는, 일찌감치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고 공대를 다니다가 성폭력 사실을 입증할 의사가 한명이라도 더 필요하다는 말에 의대를 다시 갔고 의대를 다니는 중에도 끊임없이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여성주의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란 걸 뜻맞는 사람들과 만들어 지금 현재는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로 있다. 어찌 보면 특이한 이력의 추혜인이라는 의사가 '살림의원'을 하면서, 그것을 준비하면서 한 일들, 느꼈던 일들 그리고, 그 이전 학생 시절에 고민했던 일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찬찬히 써내려간 이 책은, 여러 각도로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혜인아, 그건 너만 그런 건 아니야. 여자라면 다 그래. 비혼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 우리 여자들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남자는 없어." (p92)

 

비혼 페미니스트인 저자는 같은 뜻을 품은 다른 여성들과 앞으로 계속 살 곳을 찾아 지금 사는 동네로 들어갔고, 나이가 들어서도, 가족이 없어도, 서로 돌보고 돌봄 받으며 페미니스트로서 나이 들고 죽을 수 있기를 원하는 마음에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노라 (p93) 말한다. 비혼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도, 요즘처럼 수명이 길어지고, 자식과 부모 사이의 돌봄이 먼 나라 얘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나이 들어 어느 요양시설에 갇히지 않고 동네에서 함께 살면서 지내고 싶다는 논의들이 예전보다 훨씬 활발하다. 같은 비혼인 나도 이런 고민을 이제 슬슬 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늙어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들이 마음에 많이 와닿는 게 사실이다. 가족이라는 범주가 이젠 새롭게 정립되고 있는 시점에서 혈연으로 묶여 서로에게 의무를 강요하고 강요당하기 보다는, 좀더 넓은 범위에서 네트워킹할 수 있는 작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 아닌가.. 라는 고민에 한 줄기 희망을 주는 방향이 아닐 수 없다.

 

곳곳에 페미니스트다운 관점들이 보인다. 여자의 몸이 아프다는 것에 귀기울이지 않는 의사들, 딸(특히 비혼)에게 돌봄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 어디에나 만연한 여성에 대한 폭력들, 추행들. 그런 것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노력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면서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녀가 농담처럼 '명의'라는 단어를 썼지만, 내가 아는 나는 명의가 아니다. 다만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그 말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사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연구들은 '여자 환자의 아프다는 호소를 믿기 힘들어하는 의사들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환자의 말을 믿는 것이 환자를 살리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p144)

 

우리 사회에서는 흔하지 않은 '왕진'의 이야기들도 좋았다. 아직 우리나라는 주치의 제도라는 것이 낯설고 지역사회의료라는 것이 보건소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정도라, 의사가 주기적으로 환자의 집을 방문하고 계속 그 추이를 살피는 것은 외국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주치의라는 것을, 그리고 지역사회협동을 통한 의료의 제공이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에 큰 동인이 될 수 있는 시도를, 추혜인이라는 의사는 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감동적일 때도 있고 재미있을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고 어처구니 없을 때도 있지만, 각각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저자의 따스한 시선이 있기에 뭔가 이런 노력들이 개인을,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어나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

 

당신이 혹시 나의 진료를 마음에 들어했다면,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 주치의이기 때문입니다. 살림의 조합원들이 자주 하는 말마따나, 페미니즘만으로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페미니즘 없이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건강을 해치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p333-334)

 

 

인터넷을 뒤져 저자를 살펴보니, 수수하고 넉넉한 웃음 뒤에 꼿꼿한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고 그 가치관을 몸소 실현하는 것에 스스럼없어 하는 인터뷰들이 여럿 있었다. 몇 개의 책을 추천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 내가 올해 읽은 책 중에 마음에 크게 와 닿았던 이 책도 있어서 반가왔다. 물론 전희경 씨가 이 책의 추천사도 썼더라는.

 

 

 

 

 

 

 

 

 

 

 

 

 

 

 

 

 

세상이 굴곡은 있을 지언정 발전해나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이런 때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나가는 어떤 방향으로 수렴해가는 지성들, 그리고 그 인식을 토대로 과감히 실천하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은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여러 가지 복잡했던 생각들이,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 속에서 조금 해결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이 책을, 그리고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안 읽은 분들에게 두 권 다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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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15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언급하신 두 책 다 샀어요!!

비연 2020-12-15 19:17   좋아요 1 | URL
Goooooood!!!

scott 2020-12-15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 이분에 삶 응원합니다!

비연 2020-12-15 19:26   좋아요 1 | URL
저도,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냅니다!!!!

단발머리 2020-12-15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분이네요. 이상을 위해 무언가를 새로 배우고 이상을 위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그런 분이네요!!!
저도 저 책 읽어봐야겠어요!

비연 2020-12-15 20:56   좋아요 0 | URL
정말 멋져요~ 책 강추!

han22598 2020-12-17 0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찾아오면 고쳐주겠다가 아니라, 고쳐주려 찾아 나서는 발걸음에 따뜻함과 다정함이 느껴지네요 ^^ 추천해주신 책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비연 2020-12-17 03:44   좋아요 2 | URL
정말 보기 드문 시도라서 꼭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책 다 좋으니 읽어보셔도 후회없으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