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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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의 달인에서 달인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ㅇㅇㅇ 해봤어. 안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평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다 해보고 죽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접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간접경험은 여전히 간접경험일뿐.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 경험은 오직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바로 나 자신이 겪었던 순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개인적 경험들이 타인이 절대 이해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절대 이해 불가라고 한다면 사람과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가능하지 않게 될 터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100% 그 경험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 사이에 오해 또는 오역 등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경험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져본 특권?에 가깝다. 극소수만이 누리는 경험이야 찾아보면 또한 수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주선에 대한 로망은 국가적 차원 또는 세계적 차원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더욱 관심이 쏠리는 부분이다.

이책은 다치바나 다카시가 우주선을 탔던 우주인들을 직접 만나 정신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내용이다. 단순히 지구궤도에서 지구를 바라봤는지, 달궤도까지 진입했는지, 달에 착륙했는지에 따라 그 충격의 크기 또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삶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다. 물론 이중엔 그냥 신비한 경험이었을뿐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나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지구로 돌아온 우주인들은 정치가가 되기도 하고, 경제인이 되기도 하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쪽에 발을 담근 것은 미국이라는 사회의 제도때문이기도 하다. 50대 이후의 경제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선 늦어도 40대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압박이 경제쪽으로 이들을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물론 계속 NASA에 남아 자리를 보존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이들의 이야기 중 공통적인 것은 지구의 신비, 생명의 경이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이 얼마나 얇은지, 그리고 그 얇은 대기권 덕에 생명이 살아간다는 것을 놀랍다고 말한다. 생명이 내뿜는 푸른색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국경도 없다. 전쟁 중인 국가의 총성과 충돌은 불꽃놀이처럼 보인다. 왜 이들이 아웅다웅해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세계평화를 위해 발벗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 전지구적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태운동에 헌신한 사람들도 있다.

생명의 신비와 경이로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땅을 딛고 있는 이 지구의 생명력은 이미 신비 그 자체인 것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믿음의 문제이겠지만 아무튼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가져다 주는 지구의 모습.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임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든다.

비록 내가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내가 직접 보고 느끼진 못했지만, 그 암흑의 공간에서, 적막의 공간에서 생명의 푸른 구슬을 본다는 경험이 분명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겪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우주적 사고를 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아직 우리가 우주시대에 접어든 것은 아니지만 슬슬 그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는 과연 어떤 경험을 했을까. 너무나 많은 과학적 실험때문에 지구를 바라보며 명상에 젖어들었던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했을까. 그녀의 사유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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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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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매트릭스 세상으로 돌아가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망각할 수 있는 파란 알약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을 알게 되는 빨간 알약 중 하나를 집어먹어야 할 때,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다.

이 책 <키치..>도 빨간 알약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키치란 병적 행복을 보장하는 것(148쪽)이라면서 건강하고 정상적인 불행을 선택하라고 말하기 떄문이다. 피곤에 치쳤으니 이제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예술이 바로 키치라는 것이다. 감상이 용이하고 그 향수가 편안해야 하며(37쪽) 마땅히 목가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기만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자기 만족적이고 비천해야 한다. 존재의 고달큼과 진실을 은폐해주기만 하면 된다.(37쪽)

아치 이것은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배신하는 싸이퍼를 떠올리게 만든다. 현실에서 접하는 그 맛없는 음식 대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기를, 또는 달콤한 커피향을 느낄 수 있는 쪽을 선택한 싸이퍼를 우리는 쉽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것이 거짓된 것일지라도 그것이 주는 행복감을 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마치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또는 초등학교의 도덕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왜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했을까.

키치는 우리에게 이차적 눈물 또는 이차적 정서를 심어준다. 즉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이 조성하는 어떤 다른 표상으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을 키치적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3쪽)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감상이나 행복에 젖을 때 음악 그 자체의 미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회상-예를 들면 첫사랑의 오솔길이나 이제는 사라진 젊은 시절 등-때문일 경우 우리는 키치적 정서에 몰입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키치는 작품 그 자체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삶 본연의 의미보다는 자기 자신의 허구적 모습에 현혹되어 살아갈 경우 우리는 속물로 전락하면 동시에 키치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13쪽)

즉 외로움을 노래한 곡을 듣고 외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감정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직접적 슬픔보다는 영화가 주는 이미지로 인해 슬퍼하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키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키치는 만들어졌고 우리의 주위에서 맴도는 걸까.

그것은 인생의 부조리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실존주의적 전제를 바탕으로 쓰여져 있으니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한 책장을 넘기며 동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와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사이의 부조리에서 그 허무함을 키치가 메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메꾸는 한 키치는 언제나 사랑받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아표현의 도구로서 작동했던 노동이 자아실현은 커녕 되풀이되는 작업으로 인해 무미건조함만 가져다주고 대신 노동의 댓가로 임금이 지급되면서 그것을 통한 소비로 자아실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것이 나일 수 있는 이유가 나의 본연의 행동이 아니라 내가 소비하는 것이 되어버리듯, 문화라는 것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세상을 의미있다고 외치며 우리를 위로하는 키치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섣불리 감정이입하지 않고, 섣불리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잘게잘게 쪼개진 현실의 파편들을 이어붙이며, 문화와 나 사이의 상관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의미찾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일까.

아, 그렇다면 정녕 빨간 알약을 선택한 일이 다행스러운 일일까. 네오처럼 슈퍼맨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지니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 선택된 자는 정말 태어난 순간부터 선택되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되어졌음을 깨달은 순간 진정 선택되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능력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키워가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의 끝에선 매트릭스와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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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4
채운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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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대해 정의한다는 것은 경계를 짓고 한정짓는 작업이다. 이런 정의가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방편때문인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경계지어진 그 안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를 뛰어넘으려 한다. 예술에 대한 정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예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이외의 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술은 얼마나 많이 그 의미를 확장해왔는가.

어쨋든 이 책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술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얽매이지 않은채 관심을 쏟으며, 이런 과정에서 나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가 확장되고, 공감하는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확장은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천재란 쉼없이 움직이는 또는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듯 말이다. 천재에 대한 찬탄은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술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애정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한번 알아보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는 사랑을 매우 흥미롭게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상대방이 방출하는 모든 기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든 얼굴을 감싸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걸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저 사람이 피곤한가, 일이 잘 안 됐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등등 사랑하는 사람의 몸짓 하나가 우리의 해석 의지를 마구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문헌학자들처럼 사랑하는 이의 몸짓 하나, 말 한마디도 심혈을 기울여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부지런하다.

예술이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는 세상이 뿜어내는 기호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 예술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라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건강한 예술은 그러한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만큼 많다. 삶과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134쪽)

그렇다면 삶을 또는 예술을 행하는 나는 누구일까.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만큼이 자신의 세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공명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밭을 가는 말은 광야를 달리는 말보다는 밭을 가는 소에 가깝고, 들판을 달리는 소는 밭을 가는 소보다는 광야를 달리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럴진대 소나 말이라는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건,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무덤덤한지, 또 무엇을 만나면 기쁘고 무엇을 만나면 슬픈지, 어떤 일을 하면 능력이 커지고 어떤 일을 하면 작아지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지를 아는 일이다. 거미처럼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미세한 떨림들을 번개처럼 포착하는 일이다. (208쪽)

결국 살아가는 것도 예술이라는 것도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들에게 다가가, 한없는 애정을 쏟아가며 그 움직임을 타인과 공유, 공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이런 공감능력의 확대를 통해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을 지속가능하게 내 손에 닿을 수 있는 무엇인가로 바꿔놓는 일일테다. 그러므로 먼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을 알아채기 위한 마음의 문을 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테니.

그런데 그 흔들리지 않은 삶이 바로 깨달음의 세상은 아닐까 하는 우문을 던져본다. 아니면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들이 마구 뒤섞여 도저히 흔들리지 않은 그 흔들리지 않음일까. 예술인이 광인으로 또는 현인으로 비춰지는 것은 이것의 차이는 아닐련지... 이 책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까지 떠올리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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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4
채운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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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예찬이란 게으른 자들이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거나 감추기 위해 지어낸 픽션인 셈이다. (25쪽)

천재라고 불리는 자들은 예찬되어야 할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성을 사유하게 하는 자들이고, 어떤 목적을 향해 달리는 자들이 아니라 과정을 즐기는 자들이며, 타고난 자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자들이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인간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태도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는 대신, 바로 그 무능력 때문에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할 줄 아는 용기. 한 번 해서 안 되는 일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해서라도 되게 하려는 끈기. 정말 커다란 능력은 바로 이런 용기와 끈기가 아닐까.(33쪽)

깨달음을 이러저러한 것으로 규정되는 순간 경계가 생기고, 경계를 갖는 순간 경계를 벗어나는 것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컨대, 인간을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동물이라고 규정하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인간이나 인간보다 더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이보그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무언가를 실체로서 사고한다는 것은, 이처럼 사고의 경계를 만드는 명사적이고 점적인 사유다. 그게 바로 선승이 깨달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대답 대신 몽둥이로 화답했던 이유다. 깨달음이 뭔지 알고 싶으면 그저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할 뿐, 깨달음을 얻는 비밀 같은게 따로 있을리 없다는 것. (68쪽)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건 많은 경우 습관에 따른 것이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된 미적 기준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하다보니, 익숙하고 습관적인 감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익숙하지 않으므로 아름답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으므로 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충격적인게 아닐까. 예술의 반대는 비예술이 아니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상식 자체를 의심하는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넘어 작품 속에서 각자가 질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시각으로 질문하기. 즐거운 예술은 질물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의삼하라, 거침없이.(103쪽)

예술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그 순간부터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건 누굴 속이려고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106쪽)

인물에 대한 시각이든 공간에 대한 시각이든 역사에 대한 시각이든 하나의 절대적 시각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 역시 하나가 아니다. 내가 보는 세계와 다른 사람이 보는 세계의 다름과 그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자. 그러면 다른 세계로의 넘나듦이 가능해질 테고, 진실은 그런 넘나듦의 과정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지 법칙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113쪽)

대상의 외형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힘을 포착하는 것. .... 11월의 나무나 2월의 나무나 겉으로 보기엔 같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채 앙상한 가지만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11월의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인 반면, 2월의 나무는 봄을 준비하는 나무다. 즉, 11월의 나무는 몸을 바짝 움츠리고 겨울을 견뎌야 하지만 2월의 나무는 기지개를 켜고 봄을 호흡해야 하는 것. 예술은 그 차이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122쪽) 

위대한 배우와 삼류 배우의 차이는 이 세계와 얼마나 더 공감하느냐에 달린 것. 예술적 능력이란 더 많은 것들과 공감하고 변신할 수 있는 능력 외에 무엇이랴. 그러므로 언제든 만남을 준비하고, 변신 태세를 갖출 것.(127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는 사랑을 매우 흥미롭게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상대방이 방출하는 모든 기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든 얼굴을 감싸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걸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저 삶이 피곤한가, 일이 잘 안 됐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등등 사랑하는 사람의 몸짓 하나가 우리의 해석 의지를 마구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문헌학자들처럼 사랑하는 이의 몸짓 하나, 말 한마디도 심혈을 기울여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부지런하다. 예술이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는 세상이 뿜어내는 기호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 예술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라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건강한 예술은 그러헥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만큼 많다. 삶과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134쪽)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다. 무엇을. 살아 있음을..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면, 또 슬픔과 분노를 준다면, 그건 우리가 이러저러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141쪽)

구경은 보는 것을 대상화하는 행위다. 친한 친구가 겪는 기쁨이나 아픔을 구경하지 않듯이, 코끼리의 생태를 알고 코끼리와 친구가 된 사람이라면 코끼리를 구경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거다. ...때문에 자연이든 동물이든 누군가의 삶이든, 무언가를 구경하는 입장에 선다는 건 아주 시시한 일이다. 구경당하는 입장에선 아주 불쾌하고 끔찍한 일일테고.

행동하는 자들만이 질문한다. 행동할 때만 장애물을 만나고, 장애물을 넘으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질문이 샘솟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질문이 많은 것도 그들이 쉼 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 전체를 물음표로 만드는 의심이고 질문이며, 제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일종의 분열증이다. 즐겁고 건강한 분열증.(169쪽)

관습과 명령에 무기력하게 길들여진 나약한 신체가 아니라 다른 이의 욕망과 접속하면서 나날이 건강해지는 신체,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대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변모시키고 확장하는 신체. 그런 신체는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끊임없이 발산하고, 끊임없이 달리기 때문이다. 또 그런 신체는 고립되어 있는 법이 없다. 두리번거리고 달리면서 친구들을 만들기 떄문이다. (187쪽)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만큼이 자신의 세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공명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밭을 가는 말은 광야를 달리는 말보다는 밭을 가는 소에 가깝고, 들판을 달리는 소는 밭을 가는 소보다는 광야를 달리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럴진대 소나 말이라는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건,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무덤덤한지, 또 무엇을 만나면 기쁘고 무엇을 만나면 슬픈지, 어떤 일을 하면 능력이 커지고 어떤 일을 하면 작아지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지를 아는 일이다. 거미처럼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미세한 떨림들을 번개처럼 포착하는 일이다. (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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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세계를 탐구한다 - 물질과 생명을 잇는 물리학의 세계
다치바나 다카시.요네자와 후미코 지음, 배우철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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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양이 빌딩의 주인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일본의 대표적 물리학자인 요네자와 후미코의 대담을 글로 엮은 책이다.

물리학에서 물질을 거쳐 생명현상으로 이어지는 그 연결고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한다면 그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네자와는 아몰퍼스로 유명한 학자로, 아몰퍼스는 물질 내의 원자의 배열방식에 주기성이 없는 고체를 총칭한다. 나처럼 인문계열에서 공부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은 이 말조차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용어들이 조금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특히 생명이 지구상에 탄생한 것은 요동 때문이었다고들 하지요. 전체로서는 자유에너지가 최소가 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국소적으로는 요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99쪽) 

라는 대목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또한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을 넓혀준다. 현재의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바로 우리 사회가 살아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실감케하기도 한다. 자유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공권력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촛불시위라는 요동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전인수격 해석을 해본다.

반면 이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또한 랜덤한 세계 속에서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물성물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최저 혹은 부분적인 에너지 극소의 상태가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해도 됩니까... 다만 그 주장이 모든 경우에 옳다고 할 수 있을지, 생물에 대해서도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듯해요.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까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왔고 아마 그런 생각은 당분간 하나의 지침으로서 유지될 테지요.(135쪽)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것. 그것마저도 우린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요동이야말로 참 생명의 탄생을 알린다. 그러나 섣불리 모든 것을 단정지으려 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물리는 흑백을 확실히 가리는 것이었어요. 모두들 그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흑도 백도 아니라는 답이 나오면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개념적으로 적잖이 당황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해요. ...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은 결코 전체로서 최적화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을 최적화하면 다른 부분은 최적화되지 않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최적화된 상태에 있을 턱이 없지요. 그렇지만 전체로서 가장 나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록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할까요. 모든 부분의 최적이고 나아가 전체로서도 최적인 답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런 답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까 단백질 이야기에서도, 전체로서 최적인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발생 당시의 조건 가운데 최적일지도 모르는 것을 찾는 거지요.(132~134쪽)

2008년 6월이 다가는 이날, 대한민국의 최적인 상태는 무엇일까. 그들만의 최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촛불을 킨 것은 아닐까.

사족: 세상도 사물도 한가지 목적 또는 방향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칼이 수술도구나 요리도구로도 쓰이지만 강도의 도구로도 쓰이듯. 그 양면성의 길에서 최적의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생명으로서의 사명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사명에의 길이 항상 옳은 길은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언제나 동전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에게 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동전의 양면을 잘 알고 선택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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