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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ㅣ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매트릭스 세상으로 돌아가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망각할 수 있는 파란 알약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을 알게 되는 빨간 알약 중 하나를 집어먹어야 할 때,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다.
이 책 <키치..>도 빨간 알약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키치란 병적 행복을 보장하는 것(148쪽)이라면서 건강하고 정상적인 불행을 선택하라고 말하기 떄문이다. 피곤에 치쳤으니 이제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예술이 바로 키치라는 것이다. 감상이 용이하고 그 향수가 편안해야 하며(37쪽) 마땅히 목가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기만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자기 만족적이고 비천해야 한다. 존재의 고달큼과 진실을 은폐해주기만 하면 된다.(37쪽)
아치 이것은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배신하는 싸이퍼를 떠올리게 만든다. 현실에서 접하는 그 맛없는 음식 대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기를, 또는 달콤한 커피향을 느낄 수 있는 쪽을 선택한 싸이퍼를 우리는 쉽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것이 거짓된 것일지라도 그것이 주는 행복감을 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마치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또는 초등학교의 도덕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왜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했을까.
키치는 우리에게 이차적 눈물 또는 이차적 정서를 심어준다. 즉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이 조성하는 어떤 다른 표상으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을 키치적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3쪽)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감상이나 행복에 젖을 때 음악 그 자체의 미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회상-예를 들면 첫사랑의 오솔길이나 이제는 사라진 젊은 시절 등-때문일 경우 우리는 키치적 정서에 몰입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키치는 작품 그 자체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삶 본연의 의미보다는 자기 자신의 허구적 모습에 현혹되어 살아갈 경우 우리는 속물로 전락하면 동시에 키치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13쪽)
즉 외로움을 노래한 곡을 듣고 외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감정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직접적 슬픔보다는 영화가 주는 이미지로 인해 슬퍼하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키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키치는 만들어졌고 우리의 주위에서 맴도는 걸까.
그것은 인생의 부조리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실존주의적 전제를 바탕으로 쓰여져 있으니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한 책장을 넘기며 동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와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사이의 부조리에서 그 허무함을 키치가 메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메꾸는 한 키치는 언제나 사랑받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아표현의 도구로서 작동했던 노동이 자아실현은 커녕 되풀이되는 작업으로 인해 무미건조함만 가져다주고 대신 노동의 댓가로 임금이 지급되면서 그것을 통한 소비로 자아실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것이 나일 수 있는 이유가 나의 본연의 행동이 아니라 내가 소비하는 것이 되어버리듯, 문화라는 것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세상을 의미있다고 외치며 우리를 위로하는 키치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섣불리 감정이입하지 않고, 섣불리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잘게잘게 쪼개진 현실의 파편들을 이어붙이며, 문화와 나 사이의 상관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의미찾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일까.
아, 그렇다면 정녕 빨간 알약을 선택한 일이 다행스러운 일일까. 네오처럼 슈퍼맨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지니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 선택된 자는 정말 태어난 순간부터 선택되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되어졌음을 깨달은 순간 진정 선택되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능력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키워가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의 끝에선 매트릭스와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