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의 콩트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정재곤 옮김 / 북하우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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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소설이나 범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범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아! 물론 모든 범인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연쇄 살인범이나, 살인이라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살인범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범인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통점이라는 것은 대부분 어렸을 적 기억하지 못하는 충격으로 인한 무의식의 잔재, 또는 그 경험이 주는 충격으로 정신병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나 소설은 이들이 정신병으로 인해 감옥에도 들어가지 않는, 또는 사형으로부터 면제되는 상황을 설정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주는 폐해는 정신병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최근의 잇따른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도 우울증이라는 것으로 접근하고, 또 우울증에 대한 원인도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접근하고 만다.

이책 <정신과의사의 꽁트>는 바로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또한 실제 사례를 꽁트형식으로 그려내면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책을 읽는 것이 즐겁다.

한 예를 들면, 우울증에 걸린 중년의 회사 간부를 치료하는 부분에서 단순히 우울증 약을 준다거나, 주위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우울증에 대한 원인이 과거의 어떤 경험때문이라고 확정짓지도 않는다.

먼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현재의 상실에 대한 감정이 과거 그가 아기였을때 느꼈던 감정(퇴행)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즉 어린 시절과 무의식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바라보는 원인은 대부분 이런 관점으로 집중된다. 다음으로 행동주의 분석이 있다. 이것은 환자가 현재 처해 있는 환경과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기울였던 노력에 주목한다. 즉, 행동에 따른 긍정적 강화와 부정적 강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바라본다. 다음으로 생물정신의학적 관점이 있다. 이것은 생물학적 개념을 빌려와 설명하는데, 신경전달물질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로토민, 도파민, 호르몬 등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환경적 요인이나 과거 병력, 유전적 요인 등이 거론된다.

즉 어떤 병의 원인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는 대증적 요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원인들을 따져봄으로써 종합적인 치유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접근 속에서 그 치유 방법도 보다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책의 장점이다. 그리고 열가지 정신병이라고 불리는 증상에 대한 실제 예와 함께 치유과정이 재미있게 쓰여졌다는 것도 딱딱할 것 같은 이야기를 가볍게 읽도록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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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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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이 팽배하던 대학시절, 오히려 동양 고전을 읽은 덕분에, 친구들에게 도사의 이미지를 얻게됐다. 지금이야 논어, 노자를 공중파 방송에서 강의할 정도로 어느 정도 대중화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묵자가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올 정도였으니, 그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질만도 했을 것이다. 당시 번역된 붉은 표지의 묵자는 물론이고, 한비자 등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깊숙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노자와 장자에 빠져 소요유하는 삶을 꿈꾸었다는 정도가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나에게 남긴 흔적이라면 흔적일 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그 시절 내가 고전을 읽었던 방식은, 그 고전 속에서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먼저 찾아내고, 그것으로의 접근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공부였던 것인듯 싶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고전이 제왕학의 수단이었다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서 제도적 변혁 보다는 개인적 수양에 중심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전이 쓰여졌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막연한 추측만으로, 오직 텍스트 그 자체만에 치중했던것 같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가 쓴 강의는 당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시대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고전의 의미를 재 복원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척 교훈적으로 다가온다.

일단 과거 내가 읽었던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면, 유가 묵가 도가의 경우는 농본적 질서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에서 복고적 경향을 띤다. 즉 이상향이 요임금이나 순임금 시절과 같은 과거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반면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제국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나, 철로된 쟁기 등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가 등의 정치 경제적 급변과 맞물려, 법가의 경우 변화를 인정하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미래사관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의 사상이 어떤 뛰어난 한 천재적 개인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밑바탕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지금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사상적 기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며,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데서 이 책의 큰 장점이 있다하겠다.

위에 말한 것은 과거 내가 읽었던 방식 자체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강의>를 꿰뚫는 시점은 물론 이것 이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관계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관계론은 단순히 인간이라고 말할때의 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간이란 사이 존재며 사이 존재라는 것 또한 존재 중심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 그 자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회란 것 또한 이런 관계,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극한점이 바로 불교의 화엄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화엄은 무정부주의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양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관계론으로 바라본 고전을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할 수는 없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셔야) 다만 이렇게 재해석된 고전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만 잠깐 이야기해보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과 정서가 분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관계론이란 단순히 사람과 사람만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도, 또한 내 몸과 감성과 감정, 이상 등과의 관계도 모두 포함되어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상품 미학의 발달로, 가상 세계의 등장으로, 교환 가치가 최우선의 가치가 됨으로써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나의 삶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따로 돈다. 그것이 바로 소외이며, 행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허전함을 가져온다. 따라서 허구적 관계로 말미암아 삶의 진정성을 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비하는 인간이 행복한 인간이 된 세상, 나혼자 즐거우면 행복한 獨樂의 세상. 과연 이곳이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진정 행복한 삶이란, 공감을 통해, 與民樂으로 흥겨운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전에 대한 이 <강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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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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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가혹행위를 담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상이 벌컥 뒤집어졌던 일이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엔 학대자 개인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다, 이것은 미군이라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힘의 우월성을 가지고, 그것을 최대한 누려보고픈 욕망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어느 잡지에서 이런 잔혹함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 실험을 예시로 들었다. 인간이란 불합리한 명령앞에서도 얼마나 복종을 하는지 보여주는 이 실험을 통해 미군의 잔혹성과 함께 나치의 비인간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보다는 상황의 논리에 의해 행동이 선택되어진다는 측면을 이해했다고 할까... 이런 상황의 논리는 이 책 3장의 달리와 라타네가 행한 실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권위에 복종한 사람은 대략 65%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65%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거야' 라고 넘겨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35%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머지에 대한 설명은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심리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한 논거로 짤막한 예시를 통해 접해왔기 때문일까? 실험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향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바로 이런 부분에 메스를 들이댄다. 그 이외의 사람들, 실험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차곡차곡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실험이 끝나고 나서 피 실험자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추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심리 실험이 가져다준 압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 경로가 뒤바뀌어 버린 사람, 그리고 주류를 형성했던 행동을 선택한 사람이, 실험이 끝난 후 비슷한 상황에서 비주류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심리실험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씻어내고자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 또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영화<어퓨 굿맨>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퓨 굿맨>은 탐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인데 군대 내 폭력을 다룬 법정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군대 가기전에 한번 보고, 제대 하고 나서 다시 우연찮게 접하면서 순간 내가 얼마나 변해 있었는지 굉장히 놀랬던 적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학생이 개구리복(군복)을 입고 나서는 사선에서 자신의 동료들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즉, 내가 겪은 상황이 어떤 사건의 당사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버렸다. 상황에 대한 이해, 실험의 당사자가 겪은 경험이 가져다준 변화를 나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 책은 20세기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심리실험 10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맛깔스럽게 써내려간다. 이 책의 흐름이 심리에서 뇌로 변해가듯, 심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도 유심론적 측면에서 뇌생물학쪽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이런 흐름이 환원주의를 넘어서 기계론적 환원주의로 흘러가지 않을까 못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즉, 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 등등의 여러가지 정신병을(이 책에선 또한 정신병에 대한 진단이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가도 보여준다) 뇌의 일정부분의 고장으로 발생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런 병에 뇌의 이런 부분을 제거하면 된다는 식의 치료방법이 횡행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환원적 방법을 통한 치료가 어느 정도 성과를 가져온 것을 현실로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당사자에겐 희망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이해와 치료가 어떤 부작용이나 오해를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을 가질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더 차분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은 이런 환원적 사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황우석 박사의 사건이 가져다준 희망과 절망의 희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만병통치약에 대한 인간의 숙원,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염원. 정말 가능한 일일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오리무중인 인간 심리에 대해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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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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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한 대목이다. 현상이 모두 공이라는 이 생각은 자칫 허무주의로 사람을 빠지게 만들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인간의 한계점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한다. 물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하다.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리뷰에 난데없이 반야심경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차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해가기로 하겠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아닌 헬렌 켈러와 같은 감각에 대한 유희를 주장하는듯이 보여진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인간의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다(11쪽)

저자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책을 통해 보여주며, 세상을 한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온통 감각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으로 나뉜 각각의 장은 그 감각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갖고 있는 한계점 들이다. 52쪽에서 말하고 있는 매클린토크 효과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에 대한 전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들은 때때로 월경의 주기가 룸메이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월경주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 맞춰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는 듣지 못하고, 또는 너무 작아서 박쥐만이 듣는 소리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착시 현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에 잘못된 정보를 들여오기 일쑤다. 따라서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감각은 어찌보면 믿을만한 것이 못될련지도 모른다. 감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실은 외부 대상 자체들 또한 절대적인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것에 시간마저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니, 아무 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까?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보라. 흘려보냈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해보자. 실내도 괜찮겠지만 숲 속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먼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자.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소리마저도 들릴듯한 착각에 빠질련지도 모르겠다. 실내에 있다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새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꽃냄새에 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취하기도 할 것이며, 나뭇잎의 색깔이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기쁨으로 충만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깨치는 순간,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이 감각이 주는 행복감을 벗어나, 쾌락을 쫓는 순간 향유하던 감각은 이내 덫이 된다. 보다 더 좋은 소리, 보다 더 좋은 색깔에 대한 집착이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련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욕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상태.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거나 비틀어져서 들어오는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임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또한 내 몸 속에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 하나하나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세상은 온통 기쁨 투성이지 않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먼 헬렌켈러가 세상을 행복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듯 세상을 대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이 세상이 색즉시복福공즉시행幸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내 몸의 감각이 그렇게 소중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이 또한 소중한 것들이니,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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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손영기 지음 / 북라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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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전반적으로 해석의 문제에 집중되어져 있다고 본다. 한의학이란 것이 고정불변의 진리를 담은 책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들을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것임을 전제로, 한의학은 자연과 인간등 세상만사의 진리를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음양과 오행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되어진 것이 어찌보면 한의학의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임상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일 터이다.

고대 중국의 4가지 의학의 발달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고,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병의 종류와 그 대처법도 변해왔음을 보여준 저자는 그것이 우(공간)와 주(시간)라는 시대와 공간이라는 제약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제약을 염두에 둔 해석적 자유를 펼치는데, 현대의 문제를 토의 울로 보는 관점에서, 저자는 새로운 마이너스 건강법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공해와 먹거리의 오염, 스트레스의 증가로 오행 중 토가 울되어져 있는 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는한 음양의 변화나 오행의 움직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다른책 먹지마 건강법 등을 통해서 육식의 금지, 인스턴트 식품의 금지, 3백 식품의 금지 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모두 토의 정체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해토를 먼저 해주어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흔히 접하는 녹용, 인삼과 같은 약성이 강한 약재들도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같다. 즉 과잉섭취된 영양과 독소로 말미암아 비위와 장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 제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결코 건강해진 몸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행의 각 요소에 연결되어져 있는 오장과 육부중 토라는 것은 나머지 목화금수의 변화와 움직임을 조절해주는 작용을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순조로운 운행은 어불성설일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현재 서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해지기 위해선 영양과잉과 독소로부터의 해방을 먼저 이뤄야만 하며, 그것은 바로 해토라는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의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독자로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정설인지, 또는 올바른 해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대와 지역적 흐름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변해가는 것이 옳다면 그의 한의학 이론에 대한 재해석도 분명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듯하다. 그리고 또한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았던 우리네 사유체계를 전제로 어떻게 먹을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려움이나 슬픔 기쁨 등등이 장부와 연결되어져 있다고 본 선조의 생각이 꼭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마음과 몸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그 진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한 공부 또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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