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지음 / 삶과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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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50명의 시인과 그 대표작(작가가 선정한)을 싣고 그 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무릇 시를 읽는 독자들의 몫은

모든 훌륭한 문학 작품은 크건 작건 사람살이와 세상에 대한 독자적인 발견을 보여주고 있고 또 언어적 세목에서 새로운 발명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알아차리고 공감하고 감탄하는 것이 독자의 소임이다.

라고 저자는 공표한다. 그래서 이 정의에 주목하고 시를 읽다보면 갑자기 눈에 띠는 시어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그 시어로 인해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감탄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존재하고, 어려운 시라는 것이 걸작과 함께 미성숙한 또는 과시하는 낮은 수준의 시가 혼재되어 있다는 저자의 말에 또다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예사롭게 보이는 시라 할지라도 그것이 수작인지 평작인지 또한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데, 그것 또한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많은 시를 대하고 읽으면서 그 눈을 뜬다고 한다. 얼핏 그럴듯하다고 공감하면서도 또 하나, 시라는 것이 경험의 깊이, 연륜이라는 것이 쌓여갈 때 비로소 제대로 읽혀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몇 일전 길을 가다 우연히 엿듣게 된 모자의 대화

와~ 단풍 예쁘다.

엄마, 뭐가 예쁘다는 거야

음~. 너도 조금 더 커야지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거야.

걸으면서 한참을 생각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어서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은 없는 것일까? 난, 이렇게 단풍에 흠뻑 취해있는데, 조금 전 그 아이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왜일까?

그 고민은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풀렸다. 생명을 다하는 것의 처절함, 그리고 그 마지막 찰나의 몸부림, 떨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 시에 쓰여진 시어들은 80,90년 전에서부터 10여년 전까지, 그리고 시골에서 도시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는데, 과거 시골에서의 삶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전혀 감흥을 일으키지 못할 것들이 상당히 많이 선택되어져 있다. 단순히 상상만으로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서부터 전혀 알 수 없는 것까지, 추억 또는 기억은 아름다움마저도 그 깊이를 다르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수없이 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좀더 세심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시는 다음과 같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나 나를 쫓아오느냐.

-김광균<노신>중에서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너에게>중에서

지금 이 험난한 시기를 지나면 이 싯구들이 조금은 다르게 내 마음에 다른 무늬의 파장을 그릴지 궁금해진다. 지금의 나에겐 파장이 아니라 파랑이다. 파랑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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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낚는 마법사
미하엘 엔데 지음, 서유리 옮김 / 노마드북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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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하엘 엔데의 노래가사를 모아둔 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마도 그 운율을 어차피 살리지 못하는 관계로 풀어쓴 꽁트정도로 생각하는게 더 나을듯 싶다. 엔데의 글을 읽으면 굉장히 혼동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내가 반어적으로 쓰인건지 직설적인 건지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전쟁이나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그려보이는 글들은 명확한 풍경화를 보는 듯하지만, 인생에 대한 고독감이나 외로움, 사랑이나 꿈에 대한 글들은 몽롱한 추상화를 보는듯하여 쉽게 어떤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겠다. 인생이 푸른색인지 붉은 색인지 때론 붉었다 푸른 느낌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의 처지에 따라 반어적으로 해석해도 될듯해 보이고, 또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수 있는듯한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다. 이것이 혹 작가의 의도라면 오히려 다행이겠지만, 또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면 된다는 식의 수용자 중심적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면야 그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어쨋든, 그럼에도 명확하게 이야기되어지는 것들 중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꿈에 대한 것들이다. 꿈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슬퍼하거나, 반대로 꿈만을 쫓아 사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동경하지도 않은채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모두 포용하려 하는 자세 뒤편엔 그래도 꿈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줄곧 토로하는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벼룩시장에서 발견하는 영롱한 꿈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를 일깨워주는 작용을 해줄듯 싶다.

벼룩시장에선 다양한 꿈들을 판다. 빛바랜 꿈에서부터 보석보다 찬란한 꿈들까지. 누군가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스스로 버렸을지도 모르고, 또는 팔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중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꿈을 사고 싶지만, 그것이 이미 내것이었던 것일지도 모르는 그 꿈을 사려하지만 지금은 가난하기에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꿈을 사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은 애틋하지만, 가난이라는 핑계로 꿈을 저버린다는 것은 슬프다.

지금 세상 어딘가에서 꿈을 팔고 있을 벼룩시장을 떠올려보자. 혹시 그곳엔 나의 빛바랜 꿈이 주인을 찾고자 슬피 울고 있진 않을까? 나의 마음 속에 절반을 걸친채, 절반은 그 벼룩시장으로 몸을 맡긴 꿈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저것이 나의 꿈이었다는 것조차 잃어버린 꿈이 체념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있을지도. 자, 핑계대지 말고 꿈을 그러모으자. 그것은 결코 가난하다고, 현실이 너무 힘들다고, 또는 달콤한 유혹 때문에 포기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잖은가? 자, 이제 벼룩시장에 버려진 꿈들을 찾아오자. 휘황찬란하진 않더라도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값진 꿈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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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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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시멜로 이야기>는 성공을 향한 책이다. 그 성공이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날마다 똑같은 일상을 지겨워하며, 꿈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을듯 싶다. 고백하건데, 난 이 책을 읽고나서 제일 먼저 책상에 쌓인 먼지부터 닦았다. 과연 나의 이 행동이 얼마나 지속될련지 알 순 없지만 분명 자극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달력에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크게 써 놓았다. 지금 그래, 바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적어도 달력을 보는 그 순간만큼이라도 나를 돌이켜보라고...

이 책은 조지아라는 40대의 성공한 회장이 자신의 운전사 찰리에게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조지아가 어렸을적, 4살때 참가했던 한 실험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실험자가 마시멜로를 하나 준다. 그리고 15분간 먹지않고 참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고 약속한 뒤 자리를 뜬다. 조지아는 유혹을 이겨내고 마시멜로를 하나 더 얻어낸다. 실험에 참가했던 아이들을 10년후 다시 추적해본뒤, 그들의 학업성적이나, 집중도, 아이들과의 관계 등을 조사해봤다. 그랬더니,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었던 아이들에 비해 유혹을 이겨내고 마시멜로를 2개 얻었던 아이들이 모든 방면에서 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 실험 속에 다 드러나있다. 지금 당장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준비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인내심을 발휘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자에게만이 성공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광고가 있고 그것에 대한 패러디로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가 있다. 그야말로 이 마시멜로 이야기를 제대로 드러내주는 카피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의 평생동안 마시멜로를 즐길 수만 있다면 당장 눈앞의 마시멜로를 집어 먹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구가 가장 드높을때 그 욕구를 충족한다면 그 가치가 제일 높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말 마시멜로는 당신의 인생에서 날마다 당신 앞에 놓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실은 이런 이야기에 딴죽을 걸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마시멜로야 상관없긴 하지만 그들이 갖는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그 마시멜로는 눈앞의 마시멜로를 먹은 사람들에게 조금은 돌아가야 할 미래의 마시멜로를 다 가져가버려서 생긴 것은 아닐까? 또 세상은 이미 마시멜로를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바닥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마음껏 즐기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 마시멜로로 또다른 마시멜로를 쉽게 얻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마시멜로는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 한쪽은 높은 산을 이루고 다른 한쪽은 깊은 계곡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본다. 그러니 점점 더 계곡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마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아 산의 정상을 쉽게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련지.... (책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가젤과 사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자에게 잡혀먹지 않기 위해서 아침부터 가젤은 뛰어야 한다. 사자보다 느리면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사자 또한 아침부터 뛰어야 한다. 가젤보다 느리면 자신은 굶어 죽어야 하니까. 아침부터 뛰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그러니 모두 다 아침부터 뛰어라. ㅡ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가젤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은 태어나면서 사자와 가젤로 구분지어 놓았다는 것을) 그래서 산 정상의 흙을 조금 퍼다 늪같은 계곡에 쏟아부어 애시당초 불평등한 관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해 누구나 보다 쉽게 정상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면, 그래서 평원사이에 조그만 언덕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은 없을까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런 상상의 세계, 그러니까 그런 나의 꿈이 실은 내가 나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그러니 궂이 이 책에 딴죽만 걸 필요는 없을듯싶다.) 뭐, 내가 세상을 바꿔 새로운 세상을 만들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원대한 꿈을 꿀 정도의 포부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무엇인가를 해볼수 있지 않을까 라는 꿈 말이다. 그래서 나의 이 꿈을 수억개의 마시멜로로 생각한다면, 지금의 마시멜로를 집어먹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불연듯 든 것이다. 그래서 생각컨대 내가 아직 꿈을 잃지않았다면, 그리고 그 꿈을 그래도 한번쯤 이뤄볼 수 있을것이라고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꿈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서, 끊임없이 유혹을 이겨내며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날마다 반성하면서 말이다. 인생의 제2막을 꿈꾸며 마시멜로를 다신 한번 음미해보아야겠다. 꿈은 그저 꿈이라는 체념과 한탄에서 벗어날 용기를 이 책을 통하여 조금은 얻은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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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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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난감했던 것은 이 책의 장르를 무엇이라고 해야할지였다. 문화인류학적 에세이가 가장 근접할듯 여겨지지만 글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고, 또한 테무진에 대한 인물평전같은 느낌을 지울수도 없었다. 게다가 책의 전체 줄거리를 꿰뚫을만한 단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마드적 인생 행로, 즉 유목의 삶에 대한 찬양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몽골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설득력에 동의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유목이나 농경이라는 구분보다는 칭기스 칸의 권력에 대한 동경으로 정복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에도 쉽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실제 칭기스 칸의 행로를 쫓아가면서 체득하게된 현실감을 책에 그대로 살려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슬람 문명과 중국으로 국경을 확대해갈 수 있었던 이유들과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던 원인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참 흥미롭다. 마치 전장의 한 복판에 서 있는듯한 느낌을 주듯이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해나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느낀다. 게릴라전을 연상시키는 전술과 정보전에 대한 선견, 그리고 상대방을 공포로 몰아넣음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획득하는 심리전 등은 마치 그가 현대의 전투를 치러내고 있는듯이 여겨질 정도다. 또한 중국의 왕조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겼던 보급로에 대한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전략에 혀를 내두를수밖에 없다. 먹어야 힘을 내고 싸울텐데 그 먹는 것을 농경이 아닌 유목민적 특성으로 극복해나가는 장면은 정말 기발하다. 정복지에서 필요한 것을 모두 얻어가면서 전진하는 모습. 농경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농경지를 파괴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땅을 짓밞음으로써 초원을 생성하고, 그 초원을 바탕으로 양식을 얻어가는 모습은, 문명의 차이가 가져다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렇게 멈추어 서지 않는 삶은 정복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저 문물의 유통만을 통제하고자 하는 새로운 통치의 방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칭기스 칸이 세계를 정복해 가는 과정 중 어떻게에 대한 하나의 해답일뿐이다. 그 어떻게의 매력만으로도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는 갑자기 라는 질문을 떠올려본다.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 (172쪽)는 그야말로 변명이다. 다른 국가를 침범하기 위한 구실일뿐인 것이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154쪽)는 병사 개개인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명분일련지도 모른다.

칭기스칸은 평화와 번영이 그 나름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131쪽)가 어떻게보면 계속해서 확장을 해야만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련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아마 이런 관점에서 칭기스칸의 정복을 설명하려 든 것 같다. 즉 약탈 경제로 이루어진 유목적 삶은 유통의 확장을 통해서 문물이 교환되어질 때에만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때문에 일단 국경이 정해지고 정체되어지는 순간 몰락의 순간이 다가올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크로드와 중세 유럽의 변화 아랍권의 몰락 등도 이러한 유통을 확장시킨 몽골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정복의 형태는 테무진 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칭기스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135쪽)라는 작가의 설명이 내게 있어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여겨졌다. 세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싶었던 욕구는 제국의 초기시절, 형제를 죽이면서 몽골을 통일시켰던 모습 속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다. 칭기스칸이 후손들에게 절제를 강조했듯, 그 자신은 물질에 대한 어떤 소유욕을 드러낸 적은 별로 없는듯이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서는 오직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냐, 없는냐가 보다 큰 관건이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그 순수한 통제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권력욕이야말로, 물질적 풍요를 위해 땅을 넓혀왔던 기존의 제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통제라는 것 또한 그저 흐름에 대한 통제일뿐 문화나 언어, 종교에 대한 어떤 구속이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제국과는 또다른 양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물질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 물질적 생산의 토대를 착취하는 현재의 제국들이나, 종교적 박해를 가하는, 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피를 원하는 그런 국가들에게 일침을 가하는듯이 보여진다.

개인적으로 노자가 말하는 소민과국의 유토피아를 동경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제국이라도 분명 착취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몽골이 특히 칭기스칸이 보여주는 인종, 언어, 문화, 종교에 대한 편견없는 자세는 지극히 놀랍다. 착취와 편견없이도 자유로운 교환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는 표본으로서 칭기스칸이 이끌었던 몽골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것 같다.

사족: 제국을 확장하면서 활약하는 사절단의 대부분은 거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과연 사절단으로 누가 뽑혀 갔을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또한 자신이 팔아치운 노예들로 인해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책 곳곳에 숨겨진 재미들은 이것 말고도 상당하다. 다만 모든 것이 다 장밋빛마냥 그려져 있는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 있다. 몽골은 칭기스칸은 위대했다라는 생각을 전제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한 점 허물없는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게 만든다. 위에서도 썼듯이 절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욕은 전혀 통제할 수 없었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질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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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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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잠정중단되고 업무복귀가 이루어지던 다음날. 선배 한 분이 이 책을 선물했다. 나는 항상 선물을 받을 때면 책의 앞장에 아무말이라도 하나 써주라고 요구한다.(선물 받는 것만도 고마운데 참 뻔뻔스럽게도...) 선배는 정말로 쓰고 싶은 말은 책의 앞 표지에 쓰여져 있다고 했다. 그럼 다른 말이라도 써 달라고 했다. 그래서 쓰여진 말은 우보천리(牛步千里). 그리고 여기 책의 앞 장에 쓰여진 머리말을 옮겨본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아마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 전해주고픈 글귀였는지 모르겠다. 또한 파업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좌절하지 않고 함께 지켜갔다는 동지애에서 비롯된 말이었는지도. 즉 위의 인용문 중 '글' 대신에 '행동'으로 대치했을때 지난 66일간의 지난한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건대 이번엔 책의 뒤표지에 쓰여진 글귀때문에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비록 내가 지식인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 대한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간 파업이라는 고통을 감수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책을 선물한 선배와 나와의 공통점은 파업이 결의되기전 회사를 떠나려했다는 것이다. 각자 인생의 계획대로 걸어나가기 위해서 결단의 순간이 왔다고 여긴 순간, 노조가 파업을 결정했다. 파업이 들어가기까지 3,4일간 고민의 시간이었다. 파업이 그냥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과감이 떠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임금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인의 비도덕성, 무능함을 사원들에게 전가하는 뻔뻔함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냥 떠나버리면 간단히 끝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의 성격이 이러하니 차마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즉, 리영희 교수가 말하는 회피나 기권으로 얼버무리기는 싫었던 탓이리라. 그래서 선배와 함께 힘든 길을 선택했다. 내가 계획했던 인생의 행로가 다소 늦추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값진 일일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다시 업무복귀. 파업은 잠정 중단이다. 실패로 끝났거나 성공했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중단은 또다른 문제다. 결정이 어느 쪽으로든 났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다. 아마 그런 속내를 알고 있는 선배로서, 그리고 같은 고민을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선물했을듯 싶기도 하다.

아, 부끄럽다. 리영희 선생은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때 북한 어선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며 난리를 피울때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비친 기사 한꼭지를 읽으면서 알게됐다. 70,80년대 사상적 스승이었던 그 분의 책을 한권도 접하지 못하고, 사회 생활로 내처졌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의 표본이다. 말 그대로 사회와 권력집단이 심어준 우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이성으로서 맞선 치열한 삶이었다. 그의 글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고, 감추어진 공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기에, 커다란 힘을 갖는다. 아무리 그를 깎아내리려 하거나 글에 대해 비판하려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은 철저한 탐구에 있다. 단순히 어떤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장들이 허구임을 그들의 자료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의 흐름을 모두 통찰함으로써 이 나라 이 곳의 진실을 건네주려 한다. 그리고 그 진실의 글로 인해 옥고도 3차례나 치른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로 인해 형벌을 견뎌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권력의 폭압과 상황의 분기점에 직면했을때, 자신의 사상적 자기충실을 택해야 하는 것을 보고, 한때 내가 심취했던 사르트르의 이른바 "자유는 형벌이다" 라는 명제가 처음으로 실감나게 와닿더구만(389쪽)

자기 자신에게 규율을 가하고, 그 규율이 자기 삶에 의미 있는 규율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에 따름으로써 보다 승화된 삶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488쪽)

지금 나는 굉장히 괴롭다. 아직도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갈팡질팡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라는 것이 힘들게 만든다. 참으로 꼿꼿한 지식인의 삶의 표상을 읽어가면서도 나는 어떤 선택을 하여야만 하는지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더 우습다.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내가 겨누고 있는 적의 모습은 희미하다. 직접적인 압박이 아니라 일상을 죄어오는 시련에 차라리 기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외부의 문제보다도 내부의 문제가 점차 불거져간다. 사람에 대한 희망의 한편에 절망의 씨앗도 커져간다.

대화라는 책이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에피소드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 김소월로부터 시작해서 고은, 조정래, 백낙청 등등, 그리고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중에 수습으로 들어왔던 김대중 주필에 대한 단상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장일순 선생과의 관계 등등,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젊을적 모습을 읽어가는 재미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지금 나의 주변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 사람들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의 씨앗은 과연 무엇을 쥐고자 하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을 꿰뚫고 오직 자유를 향해, 그 본질적 삶을 채우기 위해, 진실만을 향했던 리영희 선생의 지난한 삶은 존경스럽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기 때문이다. 회피하고 얼버무리면 편안할 것을...

아~, 나는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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