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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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으로 통하는 소설가 이외수의 자전적 에세이집. 1998년에 출간되었다 다시 나옴.

사실 이외수의 소설을 읽어본 경험은 <꿈꾸는 식물> <들개> <벽오금학도> 였던가 확신이 안설만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 <베스트 극장>이었던가 텔레비젼에서 <칼>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만 선명하다. <칼>은 道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그래서 항상 이외수는 기인을 넘어 도인처럼 여겨졌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계속해서 접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청소년 시절 강한 충격을 주었던 소설가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매력때문에 접한 이 책은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시 한번 마음 속에 파장을 일으켰다. 치기를 넘어 무모하기까지 보여지는 그의 행동들 뒤로 그가 깨달은 것들이 온 몸으로 다가온다. 특히 <칼>을 쓰게 된 계기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집을 장만해주기 위해 빚을 진 상태에서의 절박함으로부터 나왔다는 에피소드는 처절함까지 스며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저변에 흐르는 것은 삶에 대한 따스함이다. 굶주림의 아픔, 창작의 고통 뒤에 숨겨진,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곳곳에 비친다는 점에서 이외수의 선입견으로부터 조금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더군다나 댐의 방류 탓에 죽을 상황에서 벗어난 후, 재판장에서 든든하게 자신을 돌보아준 아내의 사랑은, 군더더기 없는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가 현재의 나를 질타한다. 특히 의형제를 맺은 이남이의 모습은 그저 콧수염에 '울고싶어라'만 노래하던 그저 그런 가수라는 편견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저는 스스로 자신의 즐거움이 부럽습니다" 라는 말을 뱉어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럽다. 왜 나는 스스로 자신의 즐거움을 찾지 않는가? 라는 후회를 마구마구 일으킨다. 고통이나 시련 뒤에 찾아오는 것들 너머의 즐거움. 왠지모를 타성에 젖어 금욕(?)적 생활에 쳇바퀴 돌듯 살아가던 나에게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 파장이 커져 쓰나미가 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내 자신이 부러워할만큼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이외수의 젊은 시절이 가져다준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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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의 사진으로 본 삶 흔적
김창수 지음 / 파미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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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다보면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눈으로 보이는 감흥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많은 것들을 집어넣으려 하지만, 막상 찍혀진 사진을 보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메시지를 옳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주제가 명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제를 부각시켜줄 부제를 제외한 다른 피사체들은 미련 없이 빼내어야 한다. ...사진을 '뺄셈의 예술'이라고 한다.(51쪽)

사진가는 있는 대상물 중에서 구성에 필요 없는 사물을 사진 찍는 위치를 바꾸어가면서, 아니면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이용해서 하나씩 제외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66쪽)

불필요한 정보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정보를 버리는 것도 판단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126쪽)

사진이 풍경과 사물을 담아낼 때 조차도 그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인생이 녹여져 있다. 만약 그 대상이 사람인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인생을 담아내는 사진의 예술이 뺄셈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 자체도 뺄셈이 되어야 할 때가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인가 꼭 꼭 채워넣으려하는 욕심이 결국 마음을 흐리게 만든다. 흐려진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아는 그래서 뚜렷하지 못하다. 이 빼기의 삶은 그러나 쉽지 않다. 눈으로 보인 모든 것을 다 담고 싶은 욕망이 사진을 망치듯,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할때 삶도 망가지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예술작품이 표상하는 세계는 실제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가능한 세계이며 논리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앎의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상상된, 머릿속에서 꾸며진 가능한 세계일뿐이다. (107쪽)

욕망을 뺌으로써 충만해지는 삶이 아름다워지기 위한 방법은 바로 상상으로의 여행이지 않을까 싶다. 뺌으로써 빈 자리를 상상으로 채운다면 삶은 하루하루가 살아갈만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마음을 움직이는 멋진 사진하나처럼 우리 인생도 돌이켜보았을때 멋진 감흥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 책은 사진 속에 남겨진 삶의 흔적들을 잔잔한 에세이와 함께 실었다. 사진의 실용적 기술보다는 사진과 삶에 대한 성찰을 돕는다. 우리 모두의 삶의 흔적이 아름답기를... 그리고 꼭 기억하고픈 그 무엇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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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6-05-1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필요한 정보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정보를 버리는 것도 판단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이 말이야 말로 버릴 것 없는 표현이네요~
아..갑자기...도종환이 접시꽃 당신(?) 시리즈에서였나.....에 나온 시 한구절 생각나는데요... 그릇은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뭐 그런.

하루살이 2006-05-1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자가 떠오르네요.
 
하늘 오르는 길
손재식 지음 / 그물코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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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웰빙 바람이 불어 등산인구가 몇백만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산은 왜 오르는가? 라는 질문은 유효할듯 싶다. 특히, 단순히 건강을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계마저 산에 의지하며, 오직 남이 오르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질문은 그리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에 그 등정이 목숨까지 거는 일이라면, 당사자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 산을 왜 오릅니까? 라고.

이 책은 1998년 히말라야  산맥을 이루는 산 중 하나인 탈레이사가르 원정대에 대한 이야기다. 7000m가 체 되지 않아, 높이를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게다가 설벽과 빙벽으로 이루어진 북벽은 난공불락이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자 하는 등로주의(머메리즘)자들에겐 어찌보면 천국일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천국의 계단 앞에서 3명의 젊은이들은 추락하고 만다.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이들은 결국 죽음에 직면하고, 그들이 오르고자 했던 길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사고가 일어난 이후 북서릉으로 올라 정상에 선 한국인들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북벽은 자신의 길을 내놓지 않았다.

책 속에선 이들의 등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자 동행했던 동료의 글을 중심으로 고인들의 일기가 조금씩 삽입되어 있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항상 고통과 직면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에 직면하게 되면 꼭 떠오르는 생각, 왜 나는 지금 이런 고생을 사서 하며 산에 오르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런 고통을 함께 한, 또는 목숨을 서로 의지한 산친구와의 만남, 이 고통 뒤에 되돌아가게 될 일상의 행복을 깨치게 만든다는 것이 산을 오르는 이유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산과 생활 사이에서 버텨내는 건 정말 고행이다.(54)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오른다.(139)

극도의 고난은 곧 일상을 행복으로 돌려놓는다(144)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 합리적 이유를 찾다가 나온 해답일뿐, 진정한 답은 따로 있을듯 싶다.

안정된 삶을 추구하다 보면 이런 선택의 기회에서는 자연히 멀어진다.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구태의연한 목적을 뛰어 넘게 하는 것은, 의미에 연연하지 않게 만드는 저 무심한 벽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성취감이든 자유든 간에 논리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야 얻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맹목적으로 보이는 행위의 당위성을 굳이 깨닫거나 반문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138)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는 것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산이라는 단어대신 개인들은 각자의 무엇인가를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답은 실상 거기에 있다. 직접 부딪쳐야 얻을 수 있다는 것. 해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 그래서 다분히 이 책을 읽는 것이 산을 오르는 이유를 알게 하는데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내 놓지 못한 것은 고인이 된 3인의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좌절과 고통 속에 처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혹 가르쳐주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의지를 북돋워줄 것만은 확신한다. 비록 그들은 추락함으로써 하늘에 올랐지만, 걸어서 하늘 끝까지 오른 것보다 더 숭고하다. 책을 읽은 이들에게 그 걸음을 걸을 용기를 주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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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0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산에 가는 걸 좋아한 시절(??)이 있었답니다.
주로 주말 저녁에 밤기차를 타고 혼자 다녔어요(청승맞기도 하죠)
척추 디스크에 걸리고, 그 후 다시 재발하는 일이 반복하면서
지금은 얕으막한 뒷산 오르는 일로 만족합니다만(거의 산책수준이죠)
산에 가면 가장 좋은건 나무들과 만날 수 있어서에요. 새와 이름모르는 풀꽃과 곤충.
전, 인간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이라
여깁니다. 이 책 속의 고인들도 자연속의 일부인 인간, 자연과 일체의 인간을'추구하다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숙연해집니다.

하루살이 2006-05-0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몸살림운동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척추디스크라니 한번 사이트 검색해서 참고해보세요. 혹 도움이 될련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이 산으로서 온전히 남아있기를 기원해봅니다.
 
풍수잡설
최창조 지음 / 모멘토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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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일까. 최창조 교수의 강의를 청강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들었던 강연중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한국의 자생풍수는 비보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무덤을 잘 써서, 후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음택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조상들의 지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양택(?) 위주의 접근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스개 소리로 "우리나라 명당은 군부대와 절간이다"라고 말하며 돌아다닌 시절이 있었는데, 그 명당이란 개념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체험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바람이 유독 강한 깊은 산속에서 산불이 났을 경우, 진화를 하기 위해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절은 산불을 감시하고, 진화시 노동력을 긴급하게 투입할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는 주장은, 경치좋은 곳에 '떡'하니 자리 잡은 절간이라는 기존 관념과 맞부딪히게 된 것이다.

최창조 교수의 강연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상당히 강렬해 그의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책들은 전문적 내용이 많아 접근하는 것이 쉽지않았다. 흐지부지 세월은 흘러가고, 풍수에 대한 막연한 동경 또는 공부좀 해봐야되겠다는 의무감이 어깨를 다시 누르고 있는 요즘, 문득 그의 에세이를 접할 수 있게됐다.

이 책은 풍수에 대한 전문적 내용이라기 보다는 한국의 자생풍수를 공부하면서 겪게 된 인생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조직의 속성과 부딪혀야 했던 이야기며, 숨은 의도 없이 이야기했던 천도불가론 등으로 인한 세간의 관심과 질책이라는 고뇌 등등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풍수를 좋아하게 된 어렸을 적 추억이라거나, 행방불명된 형에 대한 기억, 대학을 떠나야 했던 사연 등등이 그의 다 타버린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절절하다.

최창조 씨의 기본적인 풍수에 대한 생각은, 터라는 것은 그저 인생의 무대일 뿐이며, 그것이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인가의 여부는 순전히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 달려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좋은 무대라 하더라도 배우가 형편없으면 그 연극은 실패하는 것이 되고 말지만, 싸구려 무대 위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들이 있다면 그 연극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에 십분 동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땅에 대한 생각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산도 여러 가지 말을 해 준다.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 풍수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봉천동 산동네의 산들은 그 괴로움을 다소곳이 토로하고 있다. 고층 건물을 허리가 부러지게 지고 있는 남산은 거의 사경이 되어 신음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깊은 애처로움을 지니고 산을 바라보면 그런 것을 다 들을 수 있다. 그저 지나치는 관심 정도로는 산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측은지심은 사람에게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산에 대하여서도 심성의 단초가 된다. 진정한 정만이 산과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런데 서울생활은 그런 심성의 단초까지 마비되게 해 버린 것이다. (46~47쪽)

마치 샤머니즘이나 물신주의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 속에 비쳐지는 술 좋아하는, 또는 술에 취해 살 수 밖에 없었던 그의 행적을 알고 있다면 결코 위의 글이 신비주의적이라거나, 호언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산과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을 나눈다는 것. 물론 산뿐만이 아니라 숨은 속내를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이 필요하다. 신음소리, 아우성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네는 비정하다. 산은 또는 땅은 그런 비정한 사람들에게 무정한 재앙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재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고, 함께 숨을 쉬고 있는 이 땅과 산에게 대화를 건네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퍼도 퍼도 한 없는 정을 나누어 줘보자. (제발 울지마거라 새만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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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한대수
한대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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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하면 '물좀 주소'가 떠오른다. 음유시인이라거나 히피라거나 같은 여러가지 레테르로 생각되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직 물좀 주소라는 거친 음성만이 귓가에 맴돈다. 간혹 길을 걷다 물좀 주소라고 읊조리게도 만드는 힘. 나에게 한대수는 사막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 사막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연상시킨다. 메마르지만 오아시스를 향한 끝없는 열정으로 모래바람을 등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놓여진 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을 걷고자 하는 외침. 그 자유의 목소리가 어떻게 그의 몸에서 만들어져, 세상을 향해 토해져 나오는지를 이 책은 살짝 보여준다.

크게 1,2,3부로 나뉘어진 '올드보이...'는 일단 사진이 눈에 띤다. 사진으로 밥 먹고 살아온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살펴볼 수 있을듯도 싶다. 노래로 밥먹고 산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 밥 먹고 산다라는 표현에 놀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어린 학생에게 상담한 내용을 보면 이해가 갈법하다. 학업을 포기하고 노래를 공부하고 싶다는 여학생에게 한대수는 정규공부를 계속하도록 권한다. 노래를 비롯한 예술이라는 것을 하는 것은 배고픈 일이라는 것이다. 서태지와 같은 성공은 만분의 일도 안되는 케이스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음악이 좋아서, 또는 그림이 좋아서 그것에 전념하고 싶다면, 직업으로서라기 보다는 취미로 가지라는 것이다. 직업으로서 예술은 배고픔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취미로 즐기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버텨온 간난을 고스란히 드러내놓는것 같다. 모든 곡이 금지되어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러나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삶의 신산함이 그의 글 속에 녹아있는듯 싶다. 1부에선 이런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6,70년대 미국의 클럽 문화와 자신의 노래 역정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가슴으로 전해진다.

2부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살펴볼 수 있다. 9.11테러로 인해 바라본 미국이라는 제국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장들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진술하는 부분은 그가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다. 2부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마약과 같은 약물 중독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카인, 헤로인, LSD, 대마초 등등 흔히 록이나 히피 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마약에 대한 상세한 설명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다. 중독성 여부나 그것의 효과부분에서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냥 무턱대고 모든 마약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된다. 그렇다고 한대수가 마약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 싶다. 세상과 떨어져있음으로 인해 어떤 창조성의 계발을 가져오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이 천당이 될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즉 창조적 이면에 감추어진 파괴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중독성이 강한 약물일수록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뇌를 파괴시키는지, 그리고 그런 약물들로 인해 자신이 좋아했던 록스타들이 단명하게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고 있다.

3부는 여행일지다. 자신의 두번째 아내인 옥사나의 고향 몽골과, 유럽, 그리고 떠오르는 파워 중국을 다녀온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 여행일지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나는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갈때 무엇을 바라보게 될까 하는 점이었다. 그처럼 미술이나 음악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이국적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될까? 곰곰히 생각해보건대 나의 여행은 자연의 경이로움에 중점을 두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현지 음식정도. (하지만 이것도 몇년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게 됐으니 그다지 쉽게 경험할 순 없을듯하다) 그러나 한대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여행은 눈요기뿐만이 아니라 현지인들과의 대화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난 바로 그 부분에서 여행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조금 바꿔야하지 않을까 깨우친다.

삶은 결론없는 경험이다(298쪽)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된 것이다. 그저 자연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세상에 대한 유일한 잣대를 벗어던지는 것, 그것이 여행이 주는 행복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행은 다른 문화를 배우는 과정이다. 그네들의 습관, 음식, 관습을 배우고 그 속에서우리가 인류라는 공통인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우리가 똑같이 사랑 평화 인관관계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느끼게 된다.(299쪽)

모두가 똑같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토대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음악에 흥이겨워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하고, 그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내는 사랑, 그리고 내가 전하고 싶어하듯 남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같이 느끼고 이해하고자 하는 평화의 정신, 올드보이 한대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의 자유로운 삶의 향기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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