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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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느낌은 당혹감이다. 음` 소설도 이렇게 쓸수 있는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나 할까. 짧은 논문같은 느낌이 들었다가 일기장을 보는 것 같다가 꿈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가 기괴한 공상과학영화를 보는 것 같다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루하다거나 너무나 황당무계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후려갈긴 것은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는 단편이다. 마치 논문을 써내려가듯 소설 속 달걀이라는 단어를 집중 해부하면서 이것이 음란소설임을 증명한다. 작가의 후기에서처럼 친구들이 정말로 이 소설을 음란 소설로 치부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글장난이 얼마나 그럴싸 하는지를 방증한다.

논쟁의 기술은 또 어떤가. 논쟁이라는 것이 토론과 달리 승부가 결정나는 한판 싸움임을 강조하며 그것이 생사와 맞먹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을 보고 있자면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끌여다들이는 한심한 작태에 웃음이 터져나오고, 논리가 아니라 치사함으로 승리를 거두고자 함이 결국 살인까지 이어지는 황당무계함을 보여준다.

그러고보니 유독 이 작가는 죽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8편의 단편에서  적어도 5편은 죽는 모습이 나온다. 노란 육교는 아예 죽음으로 향하는 망자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설정이다.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이야 어떠하겠는냐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일까? 요즘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데만 몰두해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다. 당장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대도 눈하난 깜짝안할 태세다. 어쩌다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소설은 죽음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저 죽음이 죽음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집착하지도 초연하지도 않은 상태. 죽음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 그렇다면 그것은 또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인가?

두유전쟁을 보면 애시당초 이런 질문을 던지지 말라는 것 같다. 머리기름이 유전적 가치를 지닌 한 사내를 둘러싼 미국과 한국의 대결은 그저 코미디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 나타나는 죽음은 코미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한바탕 웃으며 살아보자~. 이래저래 이세상도 저세상도 코미디 아닌가? 망상에 가까운 꿈일지라도 놓치거나 버리지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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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2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라~...하하하하
내년에는 순수문학책을 좀 읽어보려구요.
아마 하루살이님의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하루살이 2007-01-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도움이 될련지... 제멋대로 읽는 버릇이 많아서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