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남극인지 북극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끌어당긴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맹목적 끌어당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욱하는 성격이지만 쾌활하다. 조금 우울증도 있는 것 같고, 상당히 예측하기 힘든 캐릭터다. 조엘이라는 남자가 있다. 누군가에게 먼저 접근하는게 힘든 소심한 남자다. 이 둘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어느날 조엘은 갑자기 일탈을 행한다. 출근 기차를 타지않고 무작정 바다로 간다.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 뜻밖의 행동은 클레멘타인과의 만남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첫번째 만남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의 과거가 잊혀지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뜻밖의 만남을 통해 키워간 사랑,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다툰다. 그리고 그 다툼에 욱해 클레멘타인은 사랑했던 연인의 기억만을 지워주는 치료를 받는다. 조엘은 자신을 모른채 하는 클레멘타인에 당황해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되고 혼자만 괴로워할 수 없게된 조엘 또한 이 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기억이 지워져가는 순간, 아무리 이별의 상처가 크더라도 꼭 간직하고픈 따뜻했던 사랑의 기억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망가는 조엘. 그의 아픈 과거로 클레멘타인과 함께 망각의 전파를 피해 도망다닌다. 하지만 끝내 사랑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 그것으로 모든 사랑은 끝이 난걸까?

사랑은 지운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잊혀진다고 정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끌림은 마치 자석의 반대극마냥 운명처럼 다가온다. 인연의 끈은 가위로 잘라낸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뇌 속에 잊혀진 기억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온 몸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사랑에 대한 대상은 결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실험을 담당한 교수와 직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사랑 때문에 괴로운 현실도 그 사랑을 잊는 괴로움보다 더 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다고 해서, 또 듣고싶은 말을 한다고 해서 마음을 뺏기지는 않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그녀를 사랑하게된 직원이 조엘의 노트를 보고 그녀에게 조엘처럼 대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사랑은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이 잊혀지는 과정,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든 조수, 기억을 지우는 교수와 직원의 사랑 등등 여러갈래 얽혀진 사랑의 미로는 몽환적인 화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의 교차, 기억과 실제의 반복은 사랑의 전제조건인 인연을 설명해주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시나리오가 훌륭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화면으로 묘사해내는 감독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이다. 끌림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처절한 사랑에 대한 기억 지키기를 통해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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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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