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산이라는 영화를 본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서극 감독이 스타워즈를 만들었던 할리우드의 특수효과팀을 불러 거대한 예산을 들여 만들었던 블록버스터다. 지금보면 스타워즈보다 더 엉성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무협이라는 소재를 영상으로 자유롭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고 보인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만들어졌다.

그후로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2001년 서극은 <촉산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보다 진보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현란한 화면을 자랑한다. 물론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변하면 영화도 변하기 마련이다. 2002년 개봉당시 영화를 보았을때만해도 당시 정이건이 주연했던 영화류의 CG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2007년 케이블 TV로 다시 본 <촉산전>은 새로운 감흥을 가져다 주었다.

<촉산전>은 무협이라는 겉모습 속에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무협물 또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마초에 가까운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 영웅을 둘러싼 여러 명의 여인들은 당연히 따라온다. 영웅호색. 무협의 바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남자를 둘러싼 여러 명의 여자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타협을 하고 남자 곁에서 사랑을 나누어(?) 받는다. 또는 남들이 쫓아올 수 없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슬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사랑과 슬픈 운명은 또다른 무협의 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촉산전>은 어떤가? <촉산전>은 중국 오호시대를 배경으로 아미파의 장문 백미가 수제자 단진자(고천락)와 곤륜파의 현천종을 이끌고 마귀의 무리들과 일전을 벌인다는 내용의 무협 판타지물 중국의 고전 <촉산검협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선과 악의 대결, 정의는 승리한다는 큰 줄거리 뒤에는 사랑과 운명이라는 이야기가 함께 숨쉬고 있다.

곤륜파의 장문 고월은 제자 현천종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때 사파의 장문인 마황 유천이 곤륜산을 공격하러오자 고월은 곤륜의 최대병기인 월금륜을 현천종에게 주며 일부러 피신시킨다. 그리고 그녀는 유천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2백년 후. 다시 마황 유천이 세력을 펼치자 각 문파가 하나로 뭉쳐 대척한다. 이때 현천종은 삼위일체의 깨달음을 얻어 마황과 대적할 힘을 얻어야 한다. 그를 도와주는 아미파의 제자 영기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월의 혼 한조각으로 형성된 인물이다. 그래서 자꾸 그녀를 보면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고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해선 과거를 모두 잊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잊어도 끝내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얼굴.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화염에 쌓인다. 그러나 아미파 백미의 도움으로 다시 부활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마침내 마황을 격퇴하지만 그와 함께 영기도 산산히 부서진다. 200년 전처럼. 영기는 이로써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말한다. 그때 현천종의 얼굴은 무척 슬프다. 깨달음도 사랑과 운명의 아픔을 초월하진 못한다.

한편 마황의 동굴을 지키고 있던 단진자는 사부의 명을 어기고 동굴앞의 요정을 살려둔다. 사랑과 동정이라는 복잡한 감정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정은 마황과 쌍각을 이루고 있는 마귀. 그녀에게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사랑은 때론 영혼을, 그리고 생명을 요구한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친구인 현천종에게 자신과 함께 마귀를 죽여달라고 하는 모습 속에선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다소 행복한 표정도 엿보인다.

한편의 영화이지만 정말 영화는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우연히 다시 보게된 <촉산전>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슬픈 영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