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보통사람들이야 법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다. 살아가면서 법이라는 문제와 부딪힐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종종 매스컴을 통해, 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말 간혹 자신에게 법이라는 것의 도움을 또는 법이라는 것으로부터 서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법에 대해선 정말 가끔 생각하게 된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질 않던가. 정작 법 없이 살았다가는 큰일 날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데스노트는 이런 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구를 끌어올 필요도 없다. 법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꾸준히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져 왔다는, 그래서 그 와중에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도덕적- 법적, 이성적 접근이 아니라- 당위성을 확보하게 됐다. 물

론 서두에 말한 것처럼 여전히 법에 대한 불신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이 법에 대해 무력감을 갖게된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거나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 자신에게 주어진 데스노트. 이름만 적으면 그 사람이 죽게 되는 살명부다. 전지전능한 힘을 얻게 된 주인공은 키라라고 불리게 되고, 거의 종교적 신에 가깝게 된다. 키라는 데스노트를 이용해 세상의 모든 범죄자를 없애고 이상향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 반대쪽에 아버지와 L 이 있다.
키라의 등장으로 실제 세계의 범죄율을 70%이상 감소한다. 억울한 사람들이 법으로 호소하지만 해결할 수 없었을 때 노트에 끄적이는 것만으로 그 억울함을 해결한다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 한계선을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어디까지의 범죄가 죽어야 할 정도의 악질인가. 그리고 그것은 또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뭐, 이런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키라는 자신의 이상향을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가 영화에서 어느 쪽을 편들게 만드느냐를 결정하게 만든다.
문제는 라스트네임이라는 속편에서 희생대상이 정도를 넘어선다는 점에 있다. 과연 키라가 이길 것인가, L이 이길 것인가의 두뇌게임에 몰입하다보니, 그리고 반전만을 생각하다보니 중요한 한가지를 놓쳐버린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 모두가 키라의 패배를 바랄수밖에 없고, 또 패배를 예측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까지 키라를 지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면, 그리고 키라의 고뇌를 바로 나 자신의 고뇌로 생각하도록 했다면 영화는 보다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키라는 이상향을 향한 집착에 빠져 도를 넘어섰는지, 속편에서의 그의 캐릭터는 너무 과장되어져 상식을 벗어나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키라가 끝까지 매력적 캐릭터로 남아 있을 순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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