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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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의 완성형은 부모다. 선배는 잠깐이고, 직장 상사도 (요즈음은 근속연수가 예전처럼 길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잠깐이다. 라떼는 말이야,의 완성형은 부모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성경에 쓰여있지 않다 하더라도 진리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식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렇게 삼종세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는 때가 있는 법이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듣는 입장에서는 참 곤욕스러운 일일 테지만, 실제로 그 말을 하는 입장에서는 진심을 다한 말이다. 문제는 태도. 형식과 내용이 모두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잔소리가 되기도 하고, 훈계가 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꾸지람이 되기도 한다. 진심은 종종 전해지지 못 하고, 서운한 말들만 기억에 남는다. 최선은, 말하지 않는 것. 진심이 담겨있다 할지라도 받아들인 만하지 않다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자이며 이적의 어머니로 유명한 박혜란님의 조언을 되새긴다. 아이를 손님으로 대해라. 그렇다. 손님에게는 잔소리하지 않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존재를 알았던 중학교 2학년 때로부터 어언 시간이참 많이도 흘렀다. 이렇게 야무지게 찰지고, 스펙터클하고, 영화로 옮겨도 손색없을 만한 완벽하고 훌륭하고 결정적으로 너무 재미있는 소설을, 여태 읽지 않았다는데 스스로에게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자꾸만 말하고 싶어지고, 자꾸만 권하고 싶어진다. 아가야, 딸아, 아들아. 이 책을 읽어 보렴. 보아라, 엄마가 이 책을, 세 권 모두, 개정판으로, 문학동네판으로, 근사한 번역으로 구입하지 않았더냐. 나는 몰라서 못 읽었다. 나는 없어서 못 읽었다(이건 뻥!). 아가야, 읽어보렴. 딸롱아. 아롱아.



디오니소스의 주연을 방불케 하는 떠들썩한 술판(308)에 경찰서장, 검사 그리고 예심판사가 들이닥친다. (140년 된 소설이니 스포일러 걱정 없이 써본다.) 무죄를 주장하는 미챠와 그를 의심하는 검사 간의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지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저평가해서가 아니라, 140년 전에 이런 대화를 상상했다는 게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다. 현대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누구의 것을 빌려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등장 인물간의 대화, 상황 묘사는 너무나 현대적이다.     



부패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하자마자, 고인의 방에 들어오는 수도사들의 표정만 봐도 그들이 왜 왔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은 들어와서 잠깐 서 있다가는, 밖에서 무리 지어 기다리는 다른 동료들에게 소문이 사실임을 한시바삐 확인해주기 위해 얼른 나가곤 했다. 기다리던 사람들 가운데는 슬픔에 젖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악의에 찬 눈길 속에 노골적으로 번쩍이는 기쁨을 아예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108)



그의 대단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조시마 장로의 죽음 이후의 풍경을 그려낸 부분이다. 질투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흔한 감정이다. 조시마 장로의 인격, 그의 위대함, 그리고 사랑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한 노력을 폄훼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었다. 장로의 죽음 이후 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자, 그들은 위대한장로에게 어찌 초자연적인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시간보다 더 빨리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는가 의심을 품는다. 이를 종교적 언어를 이용해 그를 음해하는데 사용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 한다. 질투하며 존경했던 자의 몰락을 바라되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치졸한 범인들의 행태가 너무나 생생하다. 가장 추한 인간의 내면. 가장 비겁하고 치졸한 모습들.




2권을 읽었고 이제 한 권이 남았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존재를 알았음에도 나는 이제야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는데, 마야 안젤루는 열 다섯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나 보다. 어제 읽은 그녀의 책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온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페이퍼에서.






그럼 가서 쟁취해라.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주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음식값은 내가 주마. 비서들이 출근하기 전에 사무실로 가. 비서들이 출근하면 따라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네가 읽는 그 두툼한 러시아 책 한 권 들고 가고.”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었다. (72)

 








그가 말하더군요. "천국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고 지금 내 마음속에도 숨어 있으니,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천국은 나에게 정말로 나타나 평생토록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 P50

인간이여, 동물들 앞에서 우쭐대지 말지어다. 그들은 죄 없는 창조물들이지만, 그대는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그 위대함과 더불어 대지를 부패시키고 거기에 자신의 썩은 자취를 남기고 가니 - 오오, 슬픈지고, 우리 거의 모두가 그러하도다!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라, 그들 또한 천사처럼 죄가 없으며,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일종의 지표로서 살고 있기 때문이니라. - P84

여기서 그대에게 구원의 길은 단 하나이니, 그대 자신을 사람들의 모든 죄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그렇게 만들도록 하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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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6-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야 안젤루의 책에 저런 대목이 나오는군요. 보관함에 있던 것이 장바구니로 넘어가려 합니다..
전 도선생님을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저 두꺼운 분량에 차마 재독하는 게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이나..
코로나 시국에 한번 시도해볼까 싶기도 해요 .ㅎㅎㅎ

단발머리 2020-06-25 11:37   좋아요 0 | URL
장바구니로 잘 넘어가셨지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야 안젤루는 사랑입니다.
도선생님은 말 그대로 미리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인데, 전 반강제 진행중이라 헉헉대면서 간신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moonnight 2020-06-2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ㅠㅠ 이제라도 읽어야 하는데 카.조.형ㅠㅠ;;;;;; 민음사와 열린책들 갖고 있는데 문학동네도 갖고 싶어요(읽기 전 모아놓기-_-) 올해 안에 꼭 읽기(시작이라도 하기;;)로 결심합니다^^

단발머리 2020-06-25 11:38   좋아요 0 | URL
전 열린책들 읽다가 도중 하차 기억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문학동네로 읽는데 새책이라 그럴까요?
가독성이 엄청 좋습니다. 추천드려요!

수이 2020-06-2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루고 미루었던 이 두껍디 두꺼운 책을 이번 기회에 실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진심 고민중입니다.

단발머리 2020-06-25 11:40   좋아요 0 | URL
수연님은 또 현대소설도 신경쓰시느라... 또 에코페도 읽으셔야 하고. 많이 바쁘신줄 제가 잘 알지요^^

북극곰 2020-07-0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아, 갑자기 저도 까라마조프를 읽고 싶어져가지고,
(요즘 도서관이 문을 안 여니 언젠간 읽어려구 사준 책들에 손을 댑니다.)
집에 있는 건 열린책들에서 나온 건데...... 도중에 하차하셨다고요?..... ㅠ.ㅠ
어쩌지....

단발머리 2020-07-04 12:24   좋아요 0 | URL
제가 이번에 도스토옙스키 챌린지 하면서 여러분들이 댓글 주셨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열린책들 책으로 성공하신 분을 3분 보았고, 실패하신 분을 저까지 4명 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래요.
만듦새 같은 경우는 문학동네가 이번에 새로 나온 책들이 너무 예쁘구요. 번역도 전 술술 읽히더라구요.
저도 큰 맘 먹고 온 가족 다 읽어라!의 심정으로 구매했어요. 일단 1인이 성공했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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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다.

 


나는 말이 없는 사람보다는 말이 많은 사람이 낫다고 생각한다. 말이 없는 사람도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을진대, 말을 하지 않으면 좀처럼 그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을 쉽게 내보이는 사람은 얄미울 때도 있지만, 또 가끔은 귀엽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전 세계 말 많은 사람 탑3’에 오를 만한다. 영광의 옆자리는 필립 로스에게 내어 드리고, 나머지 한 자리는곧 이 세상에 나타날 또 다른 말 많은 사람에게 남겨두기로 하자.

 

그래서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말 많고 속 보이고 욕심쟁이에 이기적인데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저열한 인간상을 보고 일면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게 되고(이야, 이 인간 봐라. 적어도 나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 그의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게 된다. (거 봐라, 인과응보야.)

 


완벽한 소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책이지만, 스토리텔링이라는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로서 독자를 아주 가까이 끌어들인다. 이야기 속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각 인물이 전하는 다채로운 매력이 읽기의 어려움을 한껏 덜어내 준다.

 


대심문관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태복음 4,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장면은 알고 있을 듯하다. 로마의 압제 아래에서 청년 예수에 대한 민중의 기대와 열망은 초반에는 큰 갈등이 없는 듯 했지만, 권력과 특권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교 기득권층에게 예수는 눈엣 가시였다. 민중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십자가의 임무를 감당해야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탄의 3가지 시험은 예고편과 같다. 완벽한 신이며 완벽한 인간인 예수에게, 천지만물보다 먼저 존재했으나 이제 인간의 한계 안에 갇힌 예수에게, 사탄의 유혹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마치 대심문관의 말처럼.

 

다시 인간을 찾아온 예수에게 대심문관 추기경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방해하러 온 것이냐?(506)’고 묻는다. (예수)는 모든 것을 교황에게 넘겼으니 아예 오지 말아라(507)고 말한다. 인간을 그토록 존경한 나머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노라고(518) 주장한다. 신앙을 위해 스스로를 유폐하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흔의 노인은 그토록 숭배하던 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다.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절대로 오지 마라…… 서슬 퍼런 대심문관의 충고에도 나는 다시 돌아가 한 번 더 읽어야겠다. 예수 앞, 대심문관의 말들을.  

 



문학동네 도스토예프스키 챌린지 시작하기를 잘 한 것 같다. 알라딘에서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하면서 같이 읽기의 효과를 보았던지라, 이번에는 카라마조프 읽어볼까?’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덕분에 책도 구입하고 짬짬이 도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을 선물 받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아니고 완독한다고 큰 선물 주는 것도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메일도 오고, 문자메시지도 오는데, 챙겨 주는 느낌이 좋다.

 

고전이란 자고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생명력 있는 책이라지만 새 번역, 새 옷을 입은 고전은 훨씬 더 쉽게 읽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2권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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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1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5년 전에 열O책들 버전으로
도전했다가 완독에 실패했다가
이번 챌린지로 마침내 완독에 성공
했답니다.

접근을 이것은 러션 막장 소설이다
라고 하니, 좀 더 수월하게 읽히더라
구요.

지금은 <죄와 벌>의 재독을 앞두고
마의 산에 올라 볼까 고민 중이랍니다.

단발머리 2020-06-13 10:25   좋아요 0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전 이제 막 1권을 끝냈는데 이번 메일에 벌써 반이 지났다고 하더라구요. 다음주에는 더 서둘러야겠어요.
러시아 소설이 재미있다,는 데에 묘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죄와 벌>과 <마의 산>도 모두 성공하시길요^^
 
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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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친 아담』의 가까운 과거는 현재의 미래다. 『미친 아담』의 먼 미래가 현재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근육단위의 단백질 조직 배양이 가능해졌다. 뇌 없이 닭다리만으로 이루어진 근육이 판매되고, 인간 장기를 위한 슈퍼 돼지도 사육된다. 홍채, 지문, 귀의 변형을 통한 신분 위조가 가능하고, 경제적 위계에 따라 사는 곳의 구별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크레이크는 크레이커를 창조한다. 크레이커를 창조하기 직전, 그는 인류 말살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새로운 세상에 크레이커들을 살게 한다. 크레이커는 태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자신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들을 만들어준 크레이크는 어디로 갔는지. 두려움이란 무엇인지, 희망이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인류와 꼭 닮은 크레이커는 인류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지 않기를, 순수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감수성 충만한 시기의 제일 황금같은 시절을 짝사랑으로 지샜기에,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더 감상적이게 된다. 내가 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기적 중의 기적. 기적 곱하기 기적이다. 그런 일이, 기적 곱하기 기적의 일이 토비에게 일어났다. 토비는 남몰래 젭을 짝사랑했다고 하는데(미친아담 3부작 지난이야기, 12), 그 사랑을 얼마나 꼭꼭 숨겨왔는지 나도 몰랐다.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져 기쁘다.




아니, 당신은 좀 그랬어.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정원사들을 모두 통틀어서 당신이 미스 순결이었어. 아담1을 헌신적으로 돕는 소녀 복사였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담1이 혹시라도 당신과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어. 내가 얼마나 질투했는지 아마 당신은 모를 거야.” … “당신은 수녀원장 같았어. 당신이 날 혼쭐낼 거라고 생각했었지. 접근하기 어려운 흰눈썹뜸부기.” 젭은 토비가 예전에 사용하던 미친 아담 대화방의 암호명을 언급한다. “그게 당신이었어.” …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울기 시작한다. 명상을 위한 물질이 그런 효과도 가져오는 것 같다. 그것이 요새의 벽들을 용해하는가 보다.

이봐. 왜 그래? 내가 좋지 못한 말을 한 거야?”

아니에요. 그저 감상적이 되어서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은 나의 생명선이었어요, 토비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지는 못한다.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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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5-1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홍수를 읽고 나서 읽어야
하는 책인지 궁금하네요.

구판 홍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단발머리 2020-05-15 13:17   좋아요 0 | URL
오릭스와 크레이크-홍수의 해-미친 아담, 이 순서인데 전 순서대로 읽었구요.
과거 현재 미래 이리저리 오가면서 전개되는지라 순서대로 읽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다^^
 
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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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그러하듯 책과의 만남도 정해진 시간이 있는 듯하다. 잠자냥님의 대프니 듀 모리에의 신간인형』에 대한 페이퍼를 읽고나니, 『인형』은 물론이고, 『레베카』와 그녀의 다른 단편을 읽어보고 싶었다. 제일 먼저 읽게 된 작품은나의 사촌 레이첼』.

 

그녀의 나이 44, 작가적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발표된(1951) 이 작품은 영화, TV 시리즈, 연극, 라디오 드라마 등으로 수차례 제작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2017년에 다시 한 번 영화화되었다.

 


필립은 앰브로즈의 사촌이자 유일한 상속자로 그의 아들처럼 자란다. 자신의 전부였던 앰브로즈가 요양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 레이첼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가 전해지자 필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계절이 바뀌고 이제 집으로 돌아와야 할 앰브로즈는 돌아오지 않고 평소의 그답지 않은 편지 몇 통을 받게 된 후, 필립은 직접 앰브로즈를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다. 앰브로즈가 기거했다는 저택에서 필립은 이미 앰브로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 모든 절망은 레이첼 때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영지와 영지 소유물의 유일한 주인으로서 묘한 안도감에 사로잡힐 즈음, 필립은 레이첼이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책을 읽기 전 구경한(?) 무비클립 <나의 사촌 레이첼> 속 레이첼은 암울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필립의 시선에서 그녀에 대한 미움과 호기심, 열정과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원작 속의 레이첼은 다른 사람이다. 레이첼은 똑똑하고 다정하며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누구든 그녀를 만나면 5분도 못 되어 이내 그녀에게 빠져든다. 간단한 몇 개의 질문만으로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지식과 지혜에 감탄하고 작은 키, 왜소한 체격의 그녀를 기꺼이 우러러본다. 그녀는 아름답고 두려운 존재이다.


 





소설 맨 앞, 필립은 과거를 회상하며 대부 닉 켄들의 말을 기억한다.

 


필립, 본인에겐 아무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더러 있단다. 좋은 여자들인 경우도 아주 흔하지. 그들은 무든 손을 대기만 해도 비극을 일으킨다. 너한테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꼭 해줘야 할 것 같구나.” (23)

 


닉 켄들의 말은, 마녀가 만지기만 해도 우유통의 우유가 상해버린다고 굳게 믿었던 마녀 사냥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설명할 수 없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가진 존재에 대한 두려움. 닉 켄들의 말을 통해 그런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남자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작은 키, 아름다운 외모, 아이 같은 손가락을 지닌 이 사람이다. 여성이다. 레이첼이다. 지혜로운 여성, 지식을 소유한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이렇게도 표현된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어떤 식물에서 추출한 원료로 천식을 앓는 가슴에 바를 연고를 만들거나 화상에 효과가 좋은 오일을 만들기도 했고, 소화불량이나 불면증에 좋은 물약을 - 잠자기 전에 마시기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료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 만드는 비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가 하면, 특정 생과일주스가 어떻게 목감기부터 다래끼까지 거의 모든 병을 낫게 하는지 설명해주기도 했다. (255)

 


유럽의 마녀 사냥으로 인해 여성들은 자신들의 소유권을 박탈당했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게 운용해왔던 토지를 강탈당했다. 가장 큰 박해를 받았던 여성들은 출산 현장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산파였고, 대대적인 마녀사냥으로 이 지혜로운 여성들은 출산 현장에서 쫓겨났다. 출산의 주체인 산모는 이제 남자 의사에게 자신의 육체와 아기의 운명까지도 맡겨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약초를 이용한 자연적인 피임법을 포함해 여성들이 민간에서 사용해왔던 자연친화적 치료법들은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에 더해, 마녀의 술수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녀들은 화형에 처해졌고, 자신이 하던 일에서 쫓겨났으며,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오지 못 했다. 마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레이첼이 얼마나 마녀처럼 보이는지, 또는 얼마나 순수해 보이는지. 레이첼이 얼마나 결백한지 혹은 그녀가 얼마나 거짓말에 능숙한지. 레이첼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혹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지. 오직 이 소설을 읽은 사람만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필립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에 대한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난 레이첼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5분 안에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고 아름다운 여인을, 단순한 몇개의 질문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그런 사람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했던 레이첼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다. 또 한가지 즐거움 아니 안타까움이라고 한다면, 레이첼을 향한 필립의 사랑이다.

 

늑대소년같은 그의 사랑이 예쁘고 안타까웠다. 세련미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직진의 사랑고백, 아이같은 순수함. 그의 어리석음과 질투, 그리고 파멸. 나는 레이첼을 사랑했고, 필립은 레이첼을 사랑했다.

 



읽기가 주는 즐거움, 특히 소설읽기가 주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가 없다. 책을 덮는 순간 나의 사촌 레이첼이 사라져버릴까, 덮인 책이 잘 지내는지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시댁 식구들이 다녀가셨고, 친정 식구들이 다녀가셨다. 아가들은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고, 오늘의 일정은 집 앞 주민센터에서의 사전투표 뿐이다. 선택 2020, 나의 4년을 책임질 중요한 선택 후에는 레베카』와 『인형』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 남아있다. 선택 2020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 진지하고 중요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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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1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철 정말 인상 깊은 주인공이죠. 그러나저러나, <레베카>와 <인형> 중 선택은 비례정당 어디 찍을까 고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데요! ㅎㅎㅎ

단발머리 2020-04-10 12:10   좋아요 0 | URL
레베카는 도서관에 있지만 기다려야 하고 인형은 구매하면 오늘 집에 가져다 줍니다^^ 어려운 선택이지요?
비례정당 투표 용지 칸이 좁다고 하더라구요. 신중히 찍어야할듯 해요.
참, 전 그 소식도 들었어요. 마스크 안 쓰고 가면 투표는 할수 있지만 그 사람 다녀가고 다 소독해야해서 다음 사람이 좀 기다려야 한대요. 코로나가 여러 풍경을 바꿔놓네요 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0-04-10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엇. 제가 [레베카]를 엄청 재미있게 읽고 [나의 사촌 레이첼]을 사두었지만 아직 안읽었거든요. 이 리뷰를 읽고 나니 레이첼을 당장 읽어야만 할 것 같지만, 그런책이 또 얼마나 많은지..

저는 지역구에 뽑을 후보가 정말 없고 ㅠㅠ 정당투표는 이미 마음 굳혔습니다. 후훗.

단발머리 2020-04-10 15:1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읽어야할 책들이 줄을 선다면... 줄을 그냥 쭈우욱 쭉쭉 줄을 섰을텐데요. 암튼 전 레이첼에게 화이팅해야 할 분위기입니다. 레이첼 뽜야!!!

지역구에 뽑을 후보가 없으시다니 안타까워요 ㅠㅠ

moonnight 2020-04-1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읽을 책들은 너무나 많군요. 행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죽기 전에 사놓은 책이나마 다 읽을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또 삽니다. 클릭클릭^^;;;; 대프니 듀 모리에 참 매력 있어요♡

단발머리 2020-04-11 12:58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요. 세상에는 읽을 책들이 너무너무너무 많아요. 전 그래서 책 살 때 아주 신중한데요, 옷은 그냥 버리겠는데, 책 버릴 때는 그렇게나 고민이 되서 버리는 게 힘들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또 사게 되지만요.
대프니 듀 모리에 너무 멋있어요. 하트자동발사됩니다.

유부만두 2021-07-1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종이책을 못기다리고 전자책으로 레이첼을 시작했습니다. 속으로 레베카랑 계속 비교하게 돼네요. (댄버스 부인도 아니면서)

잠자냥 2021-07-19 16:25   좋아요 0 | URL
댄버스 부인 ㅋㅋㅋㅋㅋㅋ 그렇담 아직 레베카>>>>>>>레이첼이군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1-07-19 20:03   좋아요 0 | URL
아직 레이첼은 등장 전이에요. 필립이 피렌체 막 다녀왔고요.
 
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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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팔루디에서 스테파니 팔루디로 변신한 그의 삶을 헝가리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서 변화의 과정과 원인을 추적해가는 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당신이 필연적으로 되어야 했던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당신이 누구인가는 당신이 이뤄 누구인가, 아니면 당신이 물려받은 것과, 그것의 유전적, 가족적, 종족적,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 요인의 운명적인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 정체성이란 당신이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피할 없는 무엇인가? (92) 




오래전 어머니와 이혼해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아버지.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라 접근 금지 처분까지 받았던 폭력적인 아버지가 여성이 되었다는 이메일을 보내오고, 수전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헝가리로 향한다. 그녀의 정체성 변화가 그녀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녀로서는 도저히 피할 없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체성의 문제를 스티븐 팔루디의 경우에 제한해 살펴보았을 , 그녀/그에게 정체성은생존 위한 다름 아니다. 가장 나이브하게 설명하자면 독일 점령 당시나치 완장 같은 것이다. 헝가리인이 되어야만 했고, 비유대인이 되어야만 했으며, 전쟁 후에는 미국인이 되어 진정한 남자, 남편, 아버지가 되어야만 했던 스티븐 팔루디는 헝가리로 귀국한 , 반유대정서와 유대 남성에 대한 편견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스티븐은 스테파니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여성이란 그의 머리 , 그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가능한 여성이다. 




아버지는 초로 장식한 케이크와 세로로 홈을 새긴 샴페인 잔을 가져왔다. ‘헝가리에 환영해케이크를 잘라 모두에게 나눠 주면서 아버지는 어떻게 택배 기사로 하여금 작년 겨울에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집까지 배달하도록 했는지 이야기했다. “여자라서 너무 좋아.” 아버지가 잔을 들면서 말했다. “내가 속수무책으로 보이니까 모두들 나를 도와준다니까. 야단법석이야. 여자들은 하고 싶은 대로 있지!” (310) 





여자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 않는다. 물론 남자들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남자와 여자 중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지 못하는 집단이 어디냐 선택해야 된다면, 집단이 어디인지는 모두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집단이다. 이동의 자유에 제한을 받는 집단. 밤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없는 집단. 밤에 돌아다닐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운 집단. 





방문 열어 줄래?” 그녀(아버지) 말했다. “자러 가면서 맨날 문을 닫잖아.” 

말을 잃고 뒤로 물러섰다. 

열어 줄래?” 

왜요?” 

여자로 대우받고 싶어서. 내가 옷을 벗고 돌아다닐 , 네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면 좋겠어.” 

여자는 옷을 벗고 대수롭지 않게 돌아다니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칼날이 닫혔고, 만약에 그것이 대화의 기회였다면, 기회 역시 함께 닫혔다. 그녀는 여성용 칼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119) 





여자는 옷을 벗고 대수롭지 않게 돌아다니지 않는다. 게다가 벗은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수전의 아버지, 스테파니가 되고자 하는여성 빨간 힐에 하얀 스커트, 어깨에 핸드백을 메고 시간이 때마다 화장을 수정하는 여성성(이라 이해되는) 상에 충실한 사람이다.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근자의 여성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상에 정확히 부합하는 여성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사랑했던 여성의 모습이 되기 원했는데, 사실 여성들은 그런 여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테파니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성이 되고자 했던 뿐이다. 여성이 되고자 간절히 원했던 그녀/그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여성이남성과 같은 사람 되고자 하는 맥락과 남성이사람이 아닌 여성 되고자 하는 맥락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외롭고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유대인 남성이 아니었기에 유대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사는것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동경했던 그는, 여성이 되기로 했다. 유대인이라는 범주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치 완장을 차고 유대인이 아닌 척하며 그의 부모를 탈출시켰던 것처럼,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수전이 내린 결론에 일면 수긍한다. 그녀의 말은 옳다. 가장 중요한 개의 이분법은 삶과 죽음 뿐이다(623). 죽음 이후, 생각과 , 고민과 갈등은 판단의 영역에서 살짝 벗어난다. 마지막까지 스테파니는 충실한 기자인 수전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고, 수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죽음이 전해준 이해와 용서 때문이다. 스테파니는 죽었고, 수전은 스테파니와 화해했다. 죽음이,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이 이를 확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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