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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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폴 로진의 말을 인용해 원초적 혐오의 모든 대상은 동물이거나 동물적 물질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혐오의 대상은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동물성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41)

 


인간은 동물인 것이 분명한데,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대상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너의 구별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은 나와 너 사이의 차이를 바탕으로 우리와 다른 그들을 창조해냈다. 어떤 인간이 더 인간다운가. 어떤 인간이 더 동물에 가까운가. 이 질문이 바로 혐오의 시작점이다.

 


유대인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동물성과 육체성이 두드러진 존재로 여겨졌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더 냄새나고 더 성적이라고 인식되었으며(160), 유대인 남성은 다른 어떤 인종의 남성보다 더 여성적이라고 여겨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들은 난폭한 짐승과 같다고 생각했고(161),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존재로 여겨졌다.    

 

착하고 거짓이 없고 주인에 대해 무한한 충직함을 보이는 반려동물들을 떠올려볼 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판단은 진실이 아니다.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동물이다. 동물인 인간은, 스스로 동물이기를 거부하고, ‘동물성이라는 굴레를 자신들과 다른 집단인 그들에게 투사한다. 유대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민자, 성적 소수자 그리고 가장 방대한 소수 집단인 여성에게.

  


특정 집단을 우리보다 더 동물적이라고,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냄새가 나고 성적이며 죽음의 악취가 풍기는 집단이라고 규정하면 어떨까? 그런 집단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지배하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닌 그들이 동물이고 더럽고 냄새가 나는 대신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발밑에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다. 이와 같은 모순적 사고가 골치 아픈 동물성과 자신과의 거리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다. (147)

 


인간을 동물과 식물에 비유할 때, 남성은 동물로 여성은 식물로 환원된다. 남성은 동물의 활동성과 적극성을, 여성은 식물의 고정성과 수동성을 부여받는다. 반면 인간과 동물로 그 기준점이 이동하면, 남성은 더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 여성은 더 동물적인 존재가 된다. 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동물적인가. 여성을 더 동물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성에 대한 혐오는 모든 투사적 혐오와 마찬가지로 분명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언젠가 맞게 될 육체의 죽음이다. 여성이 그 두려움의 (하지만 종종 욕망되는) 조건을 대변한다면, 이는 곧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결국 남성들의 두려움 때문에 여성들이 통제와 규제를 받게 된다. (242)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고 임옥희 님의 글이었다고만 기억나는데, 사실 그것도 정확한 건 아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유는 여성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특별히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5-6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남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여성을 억압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에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과학 기술이 이 정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임신과 출산은 말 그대로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이즈만 다른 존재를 눈에 보이지 않게(배만 보이게) 간직했다가(임신), 죽다 살아나는 과정을 통해 쏟아 낸다는 것(출산)은 우주의 신비 그 자체이다. 초기 인류에게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을지는 더 이상의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다. 두려움은 혐오로 이어지는데,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근거였던 임신과 출산이 이제는 혐오의 근거가 된다. 여성은 월경을 하기 때문에, 임신을 하기 때문에, 출산을 하기 때문에 동물적이라고 여겨진다.

 


편파적인 생각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대인은 거짓말쟁이라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은 성적 에너지에 사로잡힌 존재라던가, 아랍계 이주민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라던가,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타 집단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 모든 집단 가운데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하게 동물성의 상징이 되었던 여성들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디 여자가. 감히 여자가. 여자 따위가. 이 엄격하고 강력한 굴레의 무게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을까.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홍성수 교수는 마사 누스바움의 핵심 사상이 이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접근하기 쉽도록 쓰였다는 데는 동의한다. 백인 노동자 출신의 자수성가한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는 고등교육과 직업적 성취를 격려하면서도, 뿌리 깊은 인종 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기억하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 <서문>만 읽어도 충분히 좋은 독서가 될 듯싶다.

 


이 책이 시작된 날은 2016 11, 미국 대통령 선거 날이었다. 비탄과 두려움으로 미국 전체가 들끓었던 밤, 외국의 호텔 방에서 그녀는 마음속의 두려움과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분노, 혐오, 시기와 같은 감정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트럼프의 등장이 미국인들, 특별히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던져주었을 무한의 절망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트럼프는 등장도 화려했지만, 퇴장 역시 화려했고, 그렇게 여러 번 미국에 새 역사를 선사하고는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릴 모양이다. 2024년을 기약하는 그의 말이 이번에는 제발 이루어지지 말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 계급 사람들이 바로 ‘육신의 오물로 더렵혀진 존재‘로 상상되었고, 혐오는 이들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활용되어왔다. - P6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일찍부터 그것이 특권이었음을 깨달았고 특권의 배타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회피하지 못했던 유일한 차별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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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과 동물성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4-01-20 19:00 
    『공포의 권력』을 읽는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감정의 문화정치>,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페미니즘의 개념들>, <쥘리아 크리스테바>에서 ‘아브젝시옹’, ‘아브젝트’ 부분을 찾아 읽었다. 마침 가족 중 한 명이 핸드폰을 교체하게 되어서 ‘밀*의 서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전자책의 ‘검색’ 기능을 야무지게 잘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건수하님이 소개해 주시고 다락방님이 추천해
 
 
미미 2021-01-1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단발머리 2021-01-18 10:24   좋아요 1 | URL
저는 아주 흥미롭게 읽은 책이에요^^ 미미님의 감상평도 듣고 싶네요 ㅎㅎㅎ

라로 2021-01-1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발 사라지기를 염원합니다!

단발머리 2021-01-18 10:25   좋아요 0 | URL
제발 제발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김정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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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이 책을 알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알라딘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서라면 책 읽기를 권하는 가정 분위기에, 일찍 어머니를 여읜 것, 이복 오빠들의 성적 학대가 의심되는 정황이 있었다는 정도를 알고 있는데,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 말 그대로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전할 때는, 몇 년, 몇 월, 몇 일자 일기인지, 혹은 그녀가 누구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나온 것인지를 소상히 밝히고 있어 더욱 신뢰할 만하다.

 

그녀의 일상과 일기와 편지와 만남이 어떻게 소설과 에세이, 비평 작업으로 이어졌는지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자신의 눈으로, 자신만의 기준으로 보기 원하는 독자라면 작가의 해석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나같은 경우는 몇 달 전에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올랜도』, 『파도』, 『세월』등을 어떻게 읽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기에 이런 작가의 도움이 무척이나 고맙다. 내년에 버지니아 울프 전작 읽기 계획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이 책을 꺼내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다.

 


버지니아는 결혼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엄청난 힘으로 생동하는, 항상 살아 숨 쉬고 항상 뜨거운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를 전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계획하는 삶은 작업하는 삶, 대화하는 삶, 자유로운 삶이었고, 두 사람의 사랑은 공감에 기초한 즐거운 사랑이었다. (65)

 


똑똑한 아내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내조하는 남편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그러한 내조를 받았던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전형적인 주부의 삶을 살았던 언니 바넷사를 보며 자신에게도 그런 삶이 가능할지 갈등했던 그녀, 독신 여성이자 이모이자 여성작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버지니아 울프에게 레너드 울프는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동료였던 것 같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특히 <서문>을 좋아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 문단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허마이오니 리 Hermione Lee버지니아 울프를 읽은 것은 십 대 후반에등대로를 처음 읽은 직후였다. 그때 나에게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 책이자 영문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어준 책이었다. 내가 울프를 대하는 마음에 형태를 잡아주는 책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짧은 전기가 허마이오니 리의 전기에 어떻게 빚지고 있는지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 지면을 통해 깊은 감사를 전하면서, 함부로 갖다 쓴 부분이 너무 많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8)



십대 후반에 버지니아 울프의등대로』를 읽고, 그리고 허마이오니 리의버지니아 울프』을 읽었던 알렉산드라 해리스의 경험은 이 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창작자로서의 고통, 지루한 자료 조사, 숱하게 지새운 밤들, 열정과 땀방울이 한곳에 모인다.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시작된 생각과 기록들이 허마이오니 리를 거쳐 알렉산드라 해리스에게 전해져 이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고, 보통의 독자인 나는 그 모든 노력의 결실을 편안하게 받아 누린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지식이 축적되고, 새로운 발상들이 지구 반대편의 이곳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놀랍고 고마운 일이다.




 







* 이 책의 원제는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이고, 허마이오니 리의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는 『버지니아 울프 (책세상, 2011)』로 번역되었는데, 현재는 품절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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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29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읽어볼래요! 내년에 단발님은 버지나 울프 전작 읽기가 목표입니까? 너무 근사해요! >.< 응원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쏙 담아가요!

단발머리 2020-12-29 08:08   좋아요 1 | URL
전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럴까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라면 이 책의 접근법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너무 가깝게 가지 않으면서도 울프 그녀의 말로 상황을 설명하려는 게 느껴집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차근히 함 읽어보렵니다^^

수이 2020-12-29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따라쟁이는 버지니아 울프 책 하나씩 모으고 있어요. 우와 떨린다 기대된다.

단발머리 2020-12-31 20:11   좋아요 0 | URL
자자잔!!!!! 짠!!!!

난티나무 2020-12-29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버지니아 울프 부분 읽고 있어요!! ㅎㅎㅎ 전작 읽기 좋아요~^^

단발머리 2020-12-31 20:12   좋아요 0 | URL
자신이 없는데 일단 하겠다고 페이퍼를 써버렸네요. 하나씩 찬찬히 읽어보려고요. 12월에 올랜도인데 이제 12월이 끝나간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icaru 2021-01-1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저도요, 저도 이책 읽어볼래요!!! ㅋ 얼마전에 어깨에 생긴 혹을 수술하러 집과 멀리 있는 병원에 예약하고 갔었는데요. 대기하면서 병원 대기실에 비치된 책들중에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나온 자기만의 방, 이 있는 것을 본 거예요... 그리고 나서 나중에 마이클 커닝햄의 책 세월ㅡ을 들춰보고, 영화 디아워스를 다시 봤어요(아 보다 말았지만..) 버지니아 울프를 더 캐봐야겠어요! ㅋ

단발머리 2021-01-18 10:42   좋아요 0 | URL
어깨에 혹이 생기셨다고요? 수술까지 받으셨다면 많이 고생하셨겠어요... 에궁 ㅠㅠ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책장을 살피신다니 icaru님 책사랑은 어디에서든 빛이 나네요.
치료는 잘 받으신 거지요? 날이 추워서 병원가는 것이 큰 일인데 무사히 깨끗하게 잘 치료받으셨기를 바래요!!!!!

2021-01-24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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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레삭매냐님의 서재에서 알게 된 책이다. 도서관 신착도서 자리에서 만났을 때 제목이 눈길을 끌어 한 번 쳐다보기는 했는데, 처음 보는 작가라(죄송합니다, 작가님) 패쓰했는데, 레삭매냐님 리뷰를 읽고 관심이 생겼다. 주말에 도서관에 갔더니 아직도 그 곳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기에 얼른 대출해 왔다. <작가의 말>에서 정소현이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가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상황이 무서워 그곳을 영영 떠났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이 소설은 미안하다고 말하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아파트라는 공동 건물이 가진 한계와 나만의 공간을 침범해 들어오는 소음이라는 가볍고 두려운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1111호 윤서엄마는 결혼할 당시만 해도 명랑하고 싹싹한 여자였다. 전처의 아들, 시어머니까지 감싸 안으며 예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딸 윤서를 낳은 후에도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며느리를 믿지 못 하고 의심하는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모른 척 하는 남편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중, 아이를 낳고 8년이나 지난 후에 심각한 산후풍을 앓게 된다. 한기 때문에 냉장고도 열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집에서만 생활하던 윤서엄마는 시어머니의 분가 이후, 시어머니와 친했던 1211호 진이 이모 손자들의 층간소음을 더는 참을 수 없어한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말은, 피해자들에게 전적으로 가혹한 말이다. 귀책사유가 95인 사람과 귀책사유가 5인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때, 현재 상황으로는 둘이 싸우고 있으니 너희 둘 다 잘못이다,라는 말 역시 그렇다. (: 귀책사유 95의 윤총장과 귀책사유 5의 추장관) 더 잘못한 사람(윤총장)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얼마나 흐릿한지를 보여주는데, 가장 약한 고리의 피해자가 아파트 위층에 산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되고, 무조건 피해자인 아래층이 윗집의 횡포 때문에 옆집의 가해자로 변해가는 과정이 소상하게 그려진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이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유의해서 볼 만하다. 1111호 윤서엄마는 산후풍으로 9년 가까이 침대에만 누워있는 상태이고, 1211호 진이 이모는 오후에 손자 5명을 돌봐주는 외할머니이자 친할머니이다. 1011호 주부는 배앓이중인 신생아를 돌보는 초보엄마이다. 원하던 원치 않던 이제는 자신의 집에 갇혀 버린 그녀들. 휴식과 재충전의 장소이자 화목한 스위트홈은 이제 감옥이 되어, 감옥에 갇힌 그들은 결국 하나 둘 미쳐간다. 들리지 않은 소리를 듣고, 고통을 주는 윗집과 옆집, 아랫집을 향해 음악을 틀어 대고, 발로 쿵쿵대고, 급기야는 우는 아이를 안고 소파위로 올라간다. 아이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를 윗집에 잘 들리게 하려고.

 


각 가정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하고 흔한 거라서, 오히려 슬펐다. 가족이라는 굴레, 시어머니의 질시, 재혼 가정의 갈등, 초보 엄마의 괴로움까지. 집에 갇힌 그녀들의 한숨과 슬픔이 너무나 생생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가해자이며 피해자였고, 어린 아이가 둘이라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1211호 쌍둥이 엄마의 대사는 내가 한 말 그대로다.

 



“… 인터폰 주신 뒤로 저희는 더 조심하고 지내요. 아이들까지 층간소음 방지 슬리퍼를 신겼어요. 그런데 또 인터폰을 주셔서 좀 당황스러웠어요. 그때도 관리실에 말씀드렸지만, 한번은 애들이 앉아서 숙제하는 중이었고, 한번은 애들이 학원에 있었고 저는 소파에 앉아 있었거든요. 오늘도 오전에 외출했다가 이제 막 들어오는 길인데 이렇게 올라오셨네요.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신다면 그건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에요. 옛날이랑 달라진 것도 없는데 갑자기 이러시니 저희도 좀 당황스럽지만 죄송한 일은 죄송한 거고 아닌 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저희도 신경 쓰고 조심하고 있으니 그쪽에서도 예전처럼 배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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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리...

순전히 그놈의 리뷰 대회 참전과 소소
한 상품에 눈이 멀어- 뭐 그랬습니다.

층간 소음은 고저, 서로 양해해 가면서
사는 것 밖에는 답이 없는 것으로.
저도 누군가에겐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는 게 참.

단발머리 2020-12-05 18:24   좋아요 0 | URL
리뷰 대회 참전을 위해서지만 그 대상이 좋은 책이라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수상도 축하드리구요!!

층간 소음은 조심하는 수밖에는 없는 듯해요.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한 번 전화오면, 말 그대로 전화가 딱 한 번 오면,
그 다음부터는 툭하면 전화가 오더라구요 ㅠㅠ 전화 없는 세상을 위하여...
 
요코 씨의 말 1 - 하하하, 내 마음이지 요코 씨의 말 1
사노 요코 지음, 기타무라 유카 그림,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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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씨의 ” 1』은 사노 요코의 글에 기타무라 유카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활기차고 명랑해서 읽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노 요코의 책을 좋아해 여러 권을 읽었다. 단톡방에서 서울·경기권의 코로나 확산이 심상치 않다고 친구가 알려주기에, 토요일 아침부터 서둘러 도서관에 갔다. 혹 다시 도서관이 휴관하면 어떻게 하지. 다 읽은 책 네 권을 반납하고 네 권을 대출했는데, 고민 끝에 슈테판 츠바이크의사랑을 묻다』를 내려놓고 사노 요코의 책을 집어넣었다. 사노 요코를 좋아한다.

 


첫 번째 이야기가 가장 좋았다. 제목이 <재능인가 봐>이다. 요코 씨는 아이를 데리고 수영 교실에 간다. 난생처음으로 수영을 배우는 아이들을 본다. 신이 난 아이도 있고 우는 아이도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수업이 이어지면서 차이가 보인다. 나이가 상관없었고, 물에 대한 적응력도 달랐다. 요령을 터득하는 속도도 다르고, 동작이 얼마나 예쁜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재능있는 아이와 재능없는 아이, 그리고 보통의 아이들. 


 



내게도 수영 교실은 좀 특별한 추억이다. 큰아이가 수영을 오래 했다. 이제 그만해도 되겠지 싶었을 때 작은 아이가 수영을 시작하게 되어서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하게 됐다. 큰아이는 물론이고 작은 아이도 기초반, 교정반을 지나 한참을 선수반에 있었는데, 선수 대비반이 아니라 이름선수반이었다. 수영을 하기에 좋은 조건을 타고났지만(길이), 큰아이는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솔직히 못 하는 축에 속했다. 실제로 수영을 전혀 못 하고, 수영에 대해 1도 모르는 내가 봐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하게 되니, 오랜 시간을 투자하니 스피드도 자세도 점점 좋아졌고, 나중에는 잠실에서 열리는 제법 큰 수영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기도 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오랜 시간 꾸준히 하다 보니 말 그대로 나아졌다. 속도가 빨라지고 자세도 근사해졌다. 그러니까 동일한 수영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런 결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재능이란 축복이지만 가끔은 꾸준함이 재능을 보완합니다. 재능은 소중하지만, 열정 또한 그렇습니다. 아니다. 요코 씨를 그렇게 쉽게 봐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 요코 씨는 자신이 영어 공부 때문에 보냈던 힘든 시간과 숱하게 쏟아부었던 돈에 관해 이야기한다. 배운지 20일밖에 안 된 일본어로 자신 있게 말을 걸던 이탈리아 남자를 생각한다. 그리고, 수영장 너머로 죽을상을 하며 애쓰는 사내아이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건넨다.  

 




 


열심히 해서 나아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재능이 없더라도 꾸준함과 열정으로 재능의 부족함을 메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재능이 없을 경우에는 부족함을 넘어 평범함까지 이를 수 있을 뿐이다. 재능 있는 사람에게는 출발점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이젠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가. 예전만큼 샘이 나거나 억울하지는 않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보다, 에헴. 젊음도 열정도 체력도 살짝쿵 사라져버리고 나이가 남았나보다. 아주 넉넉하게는 아니지만 제법. 재능이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이만 남았는가, 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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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11-1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도서관을 부르는 페이퍼.......

단발머리 2020-11-16 10:38   좋아요 0 | URL
달려갑시다! 저도 친구의 알림에 뛰어갔다 왔다는...

다락방 2020-11-16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읽은 [5번 레인] 생각나네요. 거기서는 주인공이 학교에서 수영 제일 잘하는데도 대회 나가면 김초희 라는 학생에게 자꾸 져요. 김초희는 자기보다 출발도 느린데 팔이 길어서 어느 순간 필히 앞지르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나는 왜 팔이 짧을까, 이러면서 생각하는데, 열심히 열심히 훈련으로 보완해보지만 잘 안되는거에요. 신체적인 것은 우리가 어떻게 따라잡을 수가 없잖아요. 노력하면 노력하지 않은 것보다 반드시 나아지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타고나지 않으면 한계는 있는 것 같고요. 저는 사노 요코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특별함과 특별함 사이의 평범항이 와글와글‘은 가슴에 쏙 들어오네요. 정말 그렇잖아요. 저는 그런 와글와글 평범한 1인입니다..

베트남어 시작도 안했는데 역시 포기가 답일듯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16 10:41   좋아요 0 | URL
팔 긴 것도 전 재능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ㅠㅠㅠㅠㅠ 물론 농구 선수들 중에 작은 선수들도 있지만 그런 선수들은 발바닥에 용수철 달렸더라구요. 펠프스가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1인자였던 이유도 팔길이 때문 아닐까요.

책 뒤쪽에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아주 좋았어요. 쓸데없이 성실하거나(거북이), 남이 보기에 게으른 사람(토끼). 저는 굳이 따지자면 토끼보다는 베짱이 쪽인데..... 그런 시선이 전 좋더라구요.
베트남어 제가 응원한다니까요, 다락방님! 물론, 메리 트럼프도 응원하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20-11-16 22:48   좋아요 0 | URL
와 아드님이 수영을 꽤 오랫동안 하셨었군요. 저도 더 어릴 때부터 수영을 배웠으면 좋았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뒤늦게 배워서 더 잘하기란 역부족이네요.. ㅠ

수영을 배우고 나서 경기를 보다보니 그렇게 평영하는 사람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한 때 기타지마 일본 평영선수 팬이였어요.

아마 펠프스는 단발님 말대로 긴 팔 뿐만 아니라 왕발에다가 키에 비해 상반신이 큰 신체조건이 갖추어진 그야말로 수영선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ㅋㅋ

단발머리 2020-11-17 18:03   좋아요 1 | URL
저희집 큰애가 수영을 오래했지요 ㅎㅎ 작은 아이도 적지 않은 시간 했는데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아 가끔 걱정됩니다 ㅎㅎㅎㅎ 하지만 바다수영을 하는 겟타님에 비할수는 없지요. 평영도 멋지고 접영도 멋지고.... 수영을 하나도 못하는 제가 보기에는 모두 멋집니다.
언제 한 번 겟타님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군요. 하하하!

라로 2020-11-1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을 부르는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책 빌릴 수 있는 것이 부러운 페이퍼! 이 나이에도 여전히 부러움이 남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나이도 남고 부러움도 여전히 남고. ㅎㅎㅎㅎ
그나저나 저는 사노 요코 엄청 좋아해요!!! 미국으로 종이책을 어렵게 주문하면서 거기에 사노 요코 책을 4권이나 담았어요. 이렇게 일본어 공부해가지고 언제 사노 요코 책을 일본어로 일게 될지 모르는데 일본어로 된 사노 요코 책도 샀어요. 저는 사노 요코를 너무 좋아하죠!! 😂😂😂

단발머리 2020-11-16 17:06   좋아요 0 | URL
태그에서도 고백했다시피 저도 사실 부러움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이렇게 되뇌이는데도 자꾸 무언가 부럽습니다 ㅎㅎㅎ
라로님께서 사노 요코 좋아하신다니 너무 반가운데요. 사노 요코는 바다를 건너 미국에서도 사랑받는 작가군요. 사노 요코는 동화작가이고 상도 동화책으로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전 동화책은 제목으로만 들었고 그녀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다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다 좋아하죠. 이 책도 좋아서 2권도 읽어볼까 하고 있어요. 저도 사노 요코를 좋아합니다!!! 우아하하하하하하!!!

link123q34 2020-12-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해요!! 사노 요코!!!! 알라딘 읽은 책에 제일 많이 본 작가ㅋㅋ 전에 사는게 뭐라고 보고 갑자기 너무 좋아서 갑자기 너무 보다가 갑자기 너무 몰아서 봤나 조금 질렸다 싶었는데 역시.. 너무 좋네요ㅋㅋ 이런 시리즈가 있었다니.. 더 볼 수 있겠네요♡ 으하하하

단발머리 2020-12-17 21:42   좋아요 1 | URL
저도 몇 권 이어서 읽었는데 이 시리즈를 새로 발견해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림도 아주 정감 있고 귀여워서요.
즐거운 사노 요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한재호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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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의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의 손택이 박사학위를 받지 못 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 다니엘 슈라이버는 손택이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대학 세계에 속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147) 논문을 마치지 못한 걸 후회하기도 했고, 박사학위를 받으려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손택은 박사학위를 받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제안 받은 수많은 강사 직, 명예 박사학위, 교수 직도 대부분 거절했고, 진짜 박사학위를 너무 존중하기에 명예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그의 에세이적인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상반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박사학위나 대학교수의 직함보다 훨씬 더 강렬한 아우라가 그에게는 있었다. 1963년 가을, 손택의 출판인은 소설 『은인』의 뒷표지 전면에 케네스 버크와 한나 아렌트의 찬사에 가까운 소개말 대신 스물 아홉이었던 손택의 사진을 실어 출간했다. 흑백 사진은 해리 헤스가 찍었는데, 멋스럽게 자른 새카만 단발머리를 하고 현대적인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은, 기막히게 호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 여성을 담고 있었다(139). 니체를 말하는 하버드대 출신의 31세의 여성. 미모의 여성. 지성미를 발산하는 손택은 그렇게 유력 신문사의 후광에 힘입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저자는 이를 지적인 주체와 대상화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의 공생이라고 평한다.(139) 평생 동안 손택은 그런 대중적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위해 그런 평판과 명성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성이란 결국 인정의 문제다. 인정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을 때에만 나는 비로소 그런 사람이 된다. 박사 학위조차 갖지 못한 손택이 가부장적이고 비평과 비난이 공존하는 주류 예술 문화의 중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작가로서의 그녀의 천재적 역량과 지적이면서도 독보적인 그녀만의 매력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수많은 평론가들과 매스미디어, 대중의 호의와 적의를 오가는 절대적이고 폭발적인 관심이 존재했다.

 


이미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NBC에서 가진 에드윈 뉴먼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예술가에게든, 언론의 관심은 일반적으로 굉장히 파괴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언제나 골칫거리죠. 그게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관심의 정도라는 걸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하니까요. 자기 작업을 외부인의 시선에 비추어 생각하기 시작하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 인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죠. (…) 그러면 자기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237)

 


이 두 가지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실제로 이런 일들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사람들은 예술가 내면의 어떤 점에 대해 환호하고 열광하지만, 다음 순간 예술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점점 예술가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할 테고, 결국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대중적 관심은 곧 영향력이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실제로 중요한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손택은 어떻게 했을까.

 


많은 선배 작가처럼, 손택도 문학을 향한 첫 번째 시도로 일기를 꾸준히 썼다. “게으름 외에는 그 무엇도 내가 작가가 되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 글쓰기가 왜 중요할까? 그 주된 이유는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싶을 뿐, 꼭 써야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안 될 건 또 뭔가? 자존감을 약간만 쌓으면 이 일기가 기정사실화하듯 꼭 써야 할 말이 있다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2)

 



결국에는 내 안에 사람들에게 전해 줄 만한 무언가,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무언가가 있는가의 문제인데, 손택은 그것을 이렇게 해결한다. 자존감을 쌓음으로써, 꼭 써야 할 말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음으로써, 그리고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얻음으로써.


 

손택은 그렇게 존재했다. 알려진 게 아니라 선포된 채로.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

 

 


 






손택의 절대적이고 냉혹한 분노는 흔히 인용되는 서양문화 전반을 향한 비판에서 절정을 맞는다. "진실은 모차르트, 파스칼, 불 대수, 셰익스피어, 의회정치, 바로크양식 교회, 뉴턴, 여성해방, 칸트, 마르크스, 발란친의 발레가 이 특정 문명이 세계에 초래한 것을 속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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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16: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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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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