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일이 힘든 이유는, 이 책이 나 역시 현재 지구의 총체적 위기의 공범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47쪽)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의 영향 아래 있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 문단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의무나 금지로서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데, 이것은 마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거점으로 삼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의 심층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지,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혹은 국가와 계급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관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 66쪽)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권력. 지배계급의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입장을 강권하는 효과. 그것이 피지배자에게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그것이 지배계급에 가하는 압력.
아시스 난디는 <친밀한 적>에서 피지배자의 예속화가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한다고 말하는데, 인도를 식민화했던 영국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들어갔음에도 문화적으로 파편화되고 정치적으로 이질적이었던 인도의 특성상 영국 제국주의의 영향은 도시 중심부와 서구화된 혹은 반서구화된 상층, 중간계급, 그리고 전통적 엘리트에게 국한되었다. (82쪽)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동질성을 띤 작은 섬나라였던 식민지 본국은 식민 통치의 경험에 압도당했고, 식민지의 위계질서가 약간의 변형을 통해 영국 사회에 적용됨으로 인해 장남이 아닌 아들들과 부인들은 물론 ‘그 모든 그런저런 기타 등등의 존재’들이 비극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83쪽)
식민주의의 영향이 지배자에게는 경제적 이득을 포함한 성장과 발전의 희망을 선사한 데 비해, 피지배자들에게는 모욕과 불이익, 불평등만을 안긴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여성, 다른 민족과 문화를 타자화하고 종속시킴으로 해서 지배자 역시 그로 인한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억울한 심정이 든다. 나 자신을 피해자로만 정체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럴 수 없다는걸,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단 말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이 세계 이 우주 속에서. 이 모든 일들은 쌍방 폭행, 쌍방 과실로만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일말의 가책 없는 가해자와 자기 성찰하는 피해자. 내가 걱정하는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처지가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일말의 사과도 없는 일본은 부끄럼 없이 다음 세대에게도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 대한 맹신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 극우와 성찰하는 진보, 피해자 경쟁이 아닌 기억 연대로 나가자는 축이 넓은 스펙트럼으로 공존하고 있다.
다시 마리아 미즈에게로 돌아온다.
'과개발-저개발' 개념을 이런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런 원칙에 따라 구조화된 하나의 세계 체제에서 저개발 국민의 문제가 발전을 지원하는 '원조'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던가, 개발 국가의 국민이 저개발 세계를 더 착취함으로써 인간적 행복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제한된 하나의 세계 안에서 두 편 사이의 착취와 억압의 관계는 양편 모두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역사의 현 단계에서 이런 진실은 과개발된 세계의 사람들 속에서 점차 밝혀지고 있다. (113쪽)
그렇다. 착취와 억압의 관계는 앙편 모두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가부장제로 인한 착취와 억압으로 모성과 여성성을 강요받는 여성만큼 공격적인 남성성을 요구받는 남성 역시 괴로울 것이다.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받는 남성이 존재할 것이고, 가부장제의 이상을 실천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여성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지나 ‘플라이트 쉐임(flight shame)‘까지 지구의 마지막 슈퍼맨이 되려고 하는 서구 유럽은 여전히 건강하고, 건재한 데 비해,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 현재까지도 내전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여러 나라들의 고통은 언제 끝날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가자 지구에서의 전투는 말할 것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 앙편 모두에게 파괴적인 결과가 주어진 것은 사실인데, 그 넓이와 깊이가 새삼 다르다고 느껴지는 지점이다. 피해자에게 세상은 훨씬 더 가혹하다. 억울한 포인트가 바로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