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이중노동에 시달리던 나는, 이제 삼중노동의 거대한 늪 앞에서 걱정과 한숨과 푸념과 원망을 적절히 쏟아내었다. 수험생 놔두고 어디 가느냐 잔소리 시전하려니, 나도 3월에 수험생 두고 싱가포르 갔... 남편은 봉투를 내어놓았다. 물론 나도. 여행간다고 봉투를 준다는 말!은 했다. 월급이 안 들어왔는데, 어떻게 주겠나. 월급 나오면 주겠다고 했다.
평생 한결같이 집돌이인지라 맨날 그걸로 솔찬히 놀리고 있는데, 이번에 여행간다고 새로 산 캐리어에 착착 옷을 개켜 넣는 뒷모습에서 어슴프레 감지되는 '신바람'의 기운. "자기, 혹시 지금 신난거야?" "일로 가는 거잖아. 일이야, 일." 남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은 채 잘 접어둔 옷을 꼭꼭 누르기만 한다.
엄마가 없으니 네가 아빠 마중 좀 해라,는 말에 대학생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는데, 멀리 가는 길이니까 지하 1층까지는 내려가야 한다,하는 엄포에 잠옷 입고 슬렁슬렁 내려가서는 캐리어 싣고 출발하는 차에 대고 빠이빠이 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냈고.
안녕,은 잠시. 제아빠가 핸드폰 두고 간 것을 알게된 대학생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신고서는 500미터를 전력질주. 제아빠에게 무사히 핸드폰을 건네었는데. 놀라운 건, 바로 그거. 네 아빠가 상가에 차 세우고 그 정류장으로 갈지 어떻게 알았어? 아빠가 얘기했어. 그러니까 흔한 P들의 대화. 동선과 시간을 공유하는 이 쓸데있는 치밀함.
잘 도착한 1인은 도착하자마자 카톡 프로필을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고. 단톡방에서 좀처럼 말이 없는 수험생은, 이거 다 핸드폰 없었으면 안 될 일이야,라고 말했다나 뭐래나.
인천까지 퀵을 부른다해도 전달하는 비용까지 생각하면 엄청날 거다. 30만원은 줘야한다, 착한 엄마의 선빵. 달리기 선수가 된 대학생은 60만원을 부르던데, 아서라. 너는 물정도 모르고, 네 아빠도 모르는구나. 너는, 못 받을지 싶다. 고맙다는 말 외에는.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2번. 그걸로 끝.
수험생 기다리며 읽는 책은 비비언 고닉. 야한 장면 있는데 좀 야해서, 점잖은 곳으로 골라봤다. 엄마 생각났다. 울엄마도 내게 요리, 청소, 다림질을 가르친 적이 없다. 전문 살림꾼인 엄마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