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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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는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라는 부제로스웨덴 의사 한스 로슬링과 며느리 안나 로슬링 뢴룬드아들 올라 로슬링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세계에 관한 이야기고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14)


 

저자들은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사실질문 13개를 제시하고독자로 하여금 13개 문항에 직접 답하도록 한다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을 근거로 일반인은 물론 언론인기업인과학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밝혀낸다.





 

세상을 오해하는 본능으로 저자들은 간극 본능부정 본능직선 본능공포 본능크기 본능일반화 본능운명 본능단일 관점 본능비난 본능다급함 본능을 제시한다.

 

 

1장은 10가지 극적인 본능 중 첫 번째인 간극 본능 이야기다우리에겐 모든 것을 서로 다른 두 집단나아가 상충하는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을 상상하는 거부하기 힘든 본능이 있다. (38)

 


저자들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의 단순한 구분이 실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다년간의 연구 개발로 완성한 물방울 도표를 통해 보여준다. 8번째 오해 본능은 단일 관점 본능이다세계를 단순화하고모든 문제는 단 하나의 원인이 있어 항상 그것만 반대하면 되고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단 하나라고 주장하려는 본능이 단일 관점 본능이다단일한 원인단일한 해결책.

 

 

한스 로슬링은 평생에 걸쳐 인도주의적 의료를 실천한 사람이다백인 중심서양 중심적인 사고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백인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그의 나라 스웨덴에서 오해에 사로잡힌 학생들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앞선 우리는 누구이고뒤쳐진 그들은 누구인가동양이란 어디이고어디까지가 서양인가.

 


나는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해 세상을 판단하고 낙관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스웨덴 백인 남자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는다또한 그의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그가 페미니즘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저자는 <감사의 말>에 아들보다 며느리 이름을 먼저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다만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읽은 책들내가 썼던 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문제의 단순화를 경고하는 수많은 글을 읽었음에도어느 순간 나는 이 세상을 남자와 여자의 대결로 손쉽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나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정확히는 남자들이 만든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여자들의 대결.

 


여성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완벽하게 지워졌다나는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하지는 못하겠다몇 명의 특별한 여성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국회의원고위각료 중 여성의 비율은 극히 미미하다유력한 CEO 중에 여성의 숫자 역시 극소수이고독특하고 비중 있는 목소리를 가진 여성 언론인도 찾아보기 힘들다교수는 물론 강사 자리를 얻을 때도 여성은 불리하다대작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투자를 받을 수 있는 여성감독은 몇 명이나 되는가여자배우를 원톱으로 하는 시나리오가 투자를 받을 수 있는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라심지어 여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요리에서도 그것이 푸드 토크쇼’ 형태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질 때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셰프는전문가들은 모두 남자들이다전 세계에서평생 동안 요리하는 사람들은 할머니어머니아내모두 여자들인데 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다. … 문제는 성이 남성에게는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여성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다()은 남성에게 별 의미가 없는데여성에게 몸은 자원이자 억압으로 인생의 주요 모순이 된다. (『낯선 시선』, 75)

 


여자이기 때문이다여성의 몸을 가졌기에출생에서부터 생명을 위협받고평생을 성폭력의 위협 속에 살아간다더 적은 급여에 만족해야 하고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착한 딸착한 며느리여야 한다직장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일하는 이중노동에 시달려야 한다물론 그 사이에 아이를 돌봐야 한다여성은 남성이라는 집단 아래에 속한 하나의 계급이다하지만이와 동시에 성은 독립적 요인이 아니다무엇이 다르다는 사회적 규정은 계급인종연령성별 등 다양한 권력이 개입하고 관련을 맺으며 작동한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정희진, 32)

 

백인 여성은 비참한 처지의 흑인 여성보다 자신과 같은 계급에 속하는 백인 남성을 더 가깝게 느끼기 쉬우며백인여성 유력자와 약자 또한 식민지의 브라운 흑인 남성과 여성 약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득을 공유한다(『가부장제와 자본주의』, 306).  ‘여성이라는 차이에 근거한 단 하나의 요인과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여러 개의 요인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에 허점은 없는지 꾸준히 점검해보라내 전문성의 한계를 늘 의식하라내 생각과 맞지 않는 새로운 정보다른 분야의 새로운 정보에 호기심을 가져라그리고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하고만 이야기하거나내 생각과 일치하는 사례만 수집하기보다 내게 반박하는 사람이나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나와 다른 그들의 생각을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 훌륭한 자원으로 생각하라. (267)


 

여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다남성 또한 여성의 적이 아니다알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냉철함을 잃지 말고그런 위험을 줄이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지지하자는 뜻이다다급함 본능과 모든 극적 본능을 억제하라세계를 과도하게 극적을 바라보고 상상 속에서 문제를 만들어 스트레스 받기보다 진짜 문제와 해결책에 좀 더 집중하자. (344)

 

 

글을 시작할 때는 글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가끔은 개요를 작성해놓고 글쓰기를 시작하고어쩔 때는 제목만 정하고 쓰기 시작한다글을 쓰다가 생각이 정리되는 경우도 있지만아닌 경우도 많다예상치 못했던 결론에 다다를 때도 많다이 책을 읽는 내내나의 페미니즘 사고에 대해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려고 했다여러 질문이 떠올랐고또 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이 글은 그 실패의 증거다당신이 이 책 『팩트풀니스』를 읽고 내게 답해주었으면 좋겠다만약당신이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면복잡하게 엉켜버린 내 사고의 어떠함을 당신이 이해했다면 말이다잘 모르겠다이 책을 다 읽었는데도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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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위험한 과학책 - 지구인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허를 찌르는 일상 속 과학 원리들 위험한 과학책
랜들 먼로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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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였다. 3 30분이 될 테고, 그리고는 새벽 4. 포장이사 업체 분들이 8시에 오시기로 했으니 이제 겨우 5시간이 남았다. 5시간 안에 남은 짐을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울고 싶었다. 아니,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해? 자기야, 어떻게 해? 남편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아기자기한 소품이었으나 이제 자질구레하며 정체와 용도를 모르는 물건들을 종이봉투 안에 구겨 넣었다. 이사 가기로 한 집은 평수는 같았지만 구조가 달랐다. 포장이사이기는 해도 거실장에 방치된 짐들을 대강이라도 정리해야 새로 이사 갈 집에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을 거였다. 귀중품은 미리 큰 가방에 넣어두었고, 속옷도 대략 정리해 캐리어 속에 넣었다. 아끼지 않는 책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특별히 아끼는 책들은 차에 미리 실어 두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쓰지 않을 물건들도 버리고, 책을 팔고 주고 정리했는데, 이제 남은 시간은 5시간이고, 거실장 정리는 요원하다. 이대로, 지금 이대로 집을 옮길 수는 없을까.

 


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은 나의 이러한 실존적 고민에 답해준다. 좀 더 빨리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아파트이고, 저자가 예로 든 집은 미국의 주택이다. 하지만 옮기는 집을 우리집이라 생각하고 과감히 이사를 감행해 본다. 짐을 싸지 않고 집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 집의 하중을 받는 부분에 맞추어 기초에 구멍을 뚫고 I빔을 놓으면 된다고 한다. ‘허리케인 타이는 먼저 제거해야 한다. 허리케인 타이란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집을 날릴 경우를 대비해 집을 기초에 매어 두는 역할을 한다.

 


그 다음은 집을 통째로 옮겨야 하는 일이 남았는데, 이 경우 나는 복잡한 길을 운전하기 보다는 집을 날려서 옮기는방법을 선호한다. 헬리콥터 여러 대를 이용하는 방법과 화물 비행기를 이용한 방법이 있고, 유달리 큰 짐들을 옮기도록 설계된 고래 모양의 특별 비행기도 이용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집을 공중으로 올려 옆으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라면 비행기 전체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 그런 경우 저자는 787 드림라이너의 엔진을 이용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엔진 두 개면 작은 집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뜻인데, 안정감을 위해 세 번째와 네 번째 엔진을 추가할 경우, 엔진이 연료를 가득 채우고 출발하여 떠 있는 시간은 이렇게 계산할 수 있겠다.  

 



 



계산 결과는 생각보다 암울해서 아무리 많은 엔진을 사용하더라도 집이 떠 있는 시간은 90분보다 짧다고 한다. 안타까운 지점이 아닐 수 없겠다.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주제 분류에 따르면, 이 책은 과학>기초과학/교양과학에 속하는 책이다. 그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 독자의 기대란 무엇일까. 독자는 소설을 선택할 때와는 다른 필요에 의해 과학 도서를 선택할 것이다. 새로운 정보, 정확히는 새로운 과학 정보에 대한 욕구가 가장 주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 재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재미즐거움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데, ‘재미즐거움은 생각보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그 무엇이다. 관심 또는 흥미를 가지고 접했던 정보와 지식이 훨씬 더 오랫동안 더 강력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험이 이를 확인해준다. 나와 같은 과학 문외한은 알 수 없는 여러 과학 공식들과 일반인이라면 하기 어려운 정교한 계산 과정을 통해, 기발하고 놀라운 물음을 해결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훌륭한 서사로서 작동한다. 서사의 시작은 질문이다. 이를 테면 집을 통째로 날려서 옮길 수는 없을까?’와 같은 기발한 질문이 그 시작이고, 그 시작점에는 호기심과 재미가 사이 좋게 자리하고 있다.

  


이사는 잘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몇 개의 수납장을 새로이 창조해 냈고, 그리고 버리고 또 버렸다. 첫날 밤, 나는 저자의 제안 그대로 실행했는데,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그 때에 어쩌면 이리도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 나 스스로의 훌륭한 선택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이것이 인류의 지혜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인류 구성원 중의 하나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대충 바닥을 치우고 칫솔과 휴대폰 충전기를 담은 상자만 풀고, 나는 그렇게 잠들었다고 한다. 그림처럼, 쿨쿨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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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25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보고 빵터졌네요 ㅋㅋㅋ 그리고 아주 굿 아이디어 입니다. 저도 이사갈 때 참고해야겠어요. 히힛

단발머리 2020-06-28 18:51   좋아요 0 | URL
네.... 사진 그대로 하시면 되겠어요. 어렵지도 않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쉽게 따라할 수 있습니다요!

수이 2020-06-25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앞두고 아 이렇게 초간단으로 이사하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는데 싶어서 감탄하는중 :)

단발머리 2020-06-28 18:53   좋아요 0 | URL
제일 좋은 거는 집을 통째로 들어서 옮기는 건데요. 아, 하늘에 떠있을 수 있는 최장 시간이 90분이라 중간에 연료보충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쉽네요. 그 전에 짐을 줄이는게 좋은데.... 아ㅠㅠ

비연 2020-06-2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6-28 18: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psyche 2020-06-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하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단발머리님. 이사한 집에서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0-06-28 18:57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이사는 3월 초순에 했는데요. 이 책 읽다보니 힘들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ㅠㅠ 제 글만 보면 제가 짐 다 들고 이사한 줄 알겠어요. 이삿짐 해주시는 분들이 다 도와주셨는데도 이사가 큰 일이기는 하더라구요. 아직도 완전히 정리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위의 사진보다는 많이 정리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프시케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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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의 완성형은 부모다. 선배는 잠깐이고, 직장 상사도 (요즈음은 근속연수가 예전처럼 길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잠깐이다. 라떼는 말이야,의 완성형은 부모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성경에 쓰여있지 않다 하더라도 진리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식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렇게 삼종세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는 때가 있는 법이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듣는 입장에서는 참 곤욕스러운 일일 테지만, 실제로 그 말을 하는 입장에서는 진심을 다한 말이다. 문제는 태도. 형식과 내용이 모두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잔소리가 되기도 하고, 훈계가 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꾸지람이 되기도 한다. 진심은 종종 전해지지 못 하고, 서운한 말들만 기억에 남는다. 최선은, 말하지 않는 것. 진심이 담겨있다 할지라도 받아들인 만하지 않다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자이며 이적의 어머니로 유명한 박혜란님의 조언을 되새긴다. 아이를 손님으로 대해라. 그렇다. 손님에게는 잔소리하지 않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존재를 알았던 중학교 2학년 때로부터 어언 시간이참 많이도 흘렀다. 이렇게 야무지게 찰지고, 스펙터클하고, 영화로 옮겨도 손색없을 만한 완벽하고 훌륭하고 결정적으로 너무 재미있는 소설을, 여태 읽지 않았다는데 스스로에게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자꾸만 말하고 싶어지고, 자꾸만 권하고 싶어진다. 아가야, 딸아, 아들아. 이 책을 읽어 보렴. 보아라, 엄마가 이 책을, 세 권 모두, 개정판으로, 문학동네판으로, 근사한 번역으로 구입하지 않았더냐. 나는 몰라서 못 읽었다. 나는 없어서 못 읽었다(이건 뻥!). 아가야, 읽어보렴. 딸롱아. 아롱아.



디오니소스의 주연을 방불케 하는 떠들썩한 술판(308)에 경찰서장, 검사 그리고 예심판사가 들이닥친다. (140년 된 소설이니 스포일러 걱정 없이 써본다.) 무죄를 주장하는 미챠와 그를 의심하는 검사 간의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지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저평가해서가 아니라, 140년 전에 이런 대화를 상상했다는 게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다. 현대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누구의 것을 빌려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등장 인물간의 대화, 상황 묘사는 너무나 현대적이다.     



부패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하자마자, 고인의 방에 들어오는 수도사들의 표정만 봐도 그들이 왜 왔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은 들어와서 잠깐 서 있다가는, 밖에서 무리 지어 기다리는 다른 동료들에게 소문이 사실임을 한시바삐 확인해주기 위해 얼른 나가곤 했다. 기다리던 사람들 가운데는 슬픔에 젖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악의에 찬 눈길 속에 노골적으로 번쩍이는 기쁨을 아예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108)



그의 대단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조시마 장로의 죽음 이후의 풍경을 그려낸 부분이다. 질투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흔한 감정이다. 조시마 장로의 인격, 그의 위대함, 그리고 사랑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한 노력을 폄훼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었다. 장로의 죽음 이후 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자, 그들은 위대한장로에게 어찌 초자연적인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시간보다 더 빨리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는가 의심을 품는다. 이를 종교적 언어를 이용해 그를 음해하는데 사용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 한다. 질투하며 존경했던 자의 몰락을 바라되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치졸한 범인들의 행태가 너무나 생생하다. 가장 추한 인간의 내면. 가장 비겁하고 치졸한 모습들.




2권을 읽었고 이제 한 권이 남았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존재를 알았음에도 나는 이제야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는데, 마야 안젤루는 열 다섯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나 보다. 어제 읽은 그녀의 책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온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페이퍼에서.






그럼 가서 쟁취해라.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주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음식값은 내가 주마. 비서들이 출근하기 전에 사무실로 가. 비서들이 출근하면 따라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네가 읽는 그 두툼한 러시아 책 한 권 들고 가고.”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었다. (72)

 








그가 말하더군요. "천국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고 지금 내 마음속에도 숨어 있으니,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천국은 나에게 정말로 나타나 평생토록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 P50

인간이여, 동물들 앞에서 우쭐대지 말지어다. 그들은 죄 없는 창조물들이지만, 그대는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그 위대함과 더불어 대지를 부패시키고 거기에 자신의 썩은 자취를 남기고 가니 - 오오, 슬픈지고, 우리 거의 모두가 그러하도다!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라, 그들 또한 천사처럼 죄가 없으며,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일종의 지표로서 살고 있기 때문이니라. - P84

여기서 그대에게 구원의 길은 단 하나이니, 그대 자신을 사람들의 모든 죄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그렇게 만들도록 하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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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6-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야 안젤루의 책에 저런 대목이 나오는군요. 보관함에 있던 것이 장바구니로 넘어가려 합니다..
전 도선생님을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저 두꺼운 분량에 차마 재독하는 게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이나..
코로나 시국에 한번 시도해볼까 싶기도 해요 .ㅎㅎㅎ

단발머리 2020-06-25 11:37   좋아요 0 | URL
장바구니로 잘 넘어가셨지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야 안젤루는 사랑입니다.
도선생님은 말 그대로 미리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인데, 전 반강제 진행중이라 헉헉대면서 간신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moonnight 2020-06-2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ㅠㅠ 이제라도 읽어야 하는데 카.조.형ㅠㅠ;;;;;; 민음사와 열린책들 갖고 있는데 문학동네도 갖고 싶어요(읽기 전 모아놓기-_-) 올해 안에 꼭 읽기(시작이라도 하기;;)로 결심합니다^^

단발머리 2020-06-25 11:38   좋아요 0 | URL
전 열린책들 읽다가 도중 하차 기억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문학동네로 읽는데 새책이라 그럴까요?
가독성이 엄청 좋습니다. 추천드려요!

수이 2020-06-2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루고 미루었던 이 두껍디 두꺼운 책을 이번 기회에 실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진심 고민중입니다.

단발머리 2020-06-25 11:40   좋아요 0 | URL
수연님은 또 현대소설도 신경쓰시느라... 또 에코페도 읽으셔야 하고. 많이 바쁘신줄 제가 잘 알지요^^

북극곰 2020-07-0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아, 갑자기 저도 까라마조프를 읽고 싶어져가지고,
(요즘 도서관이 문을 안 여니 언젠간 읽어려구 사준 책들에 손을 댑니다.)
집에 있는 건 열린책들에서 나온 건데...... 도중에 하차하셨다고요?..... ㅠ.ㅠ
어쩌지....

단발머리 2020-07-04 12:24   좋아요 0 | URL
제가 이번에 도스토옙스키 챌린지 하면서 여러분들이 댓글 주셨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열린책들 책으로 성공하신 분을 3분 보았고, 실패하신 분을 저까지 4명 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래요.
만듦새 같은 경우는 문학동네가 이번에 새로 나온 책들이 너무 예쁘구요. 번역도 전 술술 읽히더라구요.
저도 큰 맘 먹고 온 가족 다 읽어라!의 심정으로 구매했어요. 일단 1인이 성공했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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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다.

 


나는 말이 없는 사람보다는 말이 많은 사람이 낫다고 생각한다. 말이 없는 사람도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을진대, 말을 하지 않으면 좀처럼 그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을 쉽게 내보이는 사람은 얄미울 때도 있지만, 또 가끔은 귀엽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전 세계 말 많은 사람 탑3’에 오를 만한다. 영광의 옆자리는 필립 로스에게 내어 드리고, 나머지 한 자리는곧 이 세상에 나타날 또 다른 말 많은 사람에게 남겨두기로 하자.

 

그래서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말 많고 속 보이고 욕심쟁이에 이기적인데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저열한 인간상을 보고 일면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게 되고(이야, 이 인간 봐라. 적어도 나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 그의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게 된다. (거 봐라, 인과응보야.)

 


완벽한 소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책이지만, 스토리텔링이라는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로서 독자를 아주 가까이 끌어들인다. 이야기 속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각 인물이 전하는 다채로운 매력이 읽기의 어려움을 한껏 덜어내 준다.

 


대심문관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태복음 4,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장면은 알고 있을 듯하다. 로마의 압제 아래에서 청년 예수에 대한 민중의 기대와 열망은 초반에는 큰 갈등이 없는 듯 했지만, 권력과 특권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교 기득권층에게 예수는 눈엣 가시였다. 민중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십자가의 임무를 감당해야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탄의 3가지 시험은 예고편과 같다. 완벽한 신이며 완벽한 인간인 예수에게, 천지만물보다 먼저 존재했으나 이제 인간의 한계 안에 갇힌 예수에게, 사탄의 유혹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마치 대심문관의 말처럼.

 

다시 인간을 찾아온 예수에게 대심문관 추기경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방해하러 온 것이냐?(506)’고 묻는다. (예수)는 모든 것을 교황에게 넘겼으니 아예 오지 말아라(507)고 말한다. 인간을 그토록 존경한 나머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노라고(518) 주장한다. 신앙을 위해 스스로를 유폐하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흔의 노인은 그토록 숭배하던 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다.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절대로 오지 마라…… 서슬 퍼런 대심문관의 충고에도 나는 다시 돌아가 한 번 더 읽어야겠다. 예수 앞, 대심문관의 말들을.  

 



문학동네 도스토예프스키 챌린지 시작하기를 잘 한 것 같다. 알라딘에서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하면서 같이 읽기의 효과를 보았던지라, 이번에는 카라마조프 읽어볼까?’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덕분에 책도 구입하고 짬짬이 도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을 선물 받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아니고 완독한다고 큰 선물 주는 것도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메일도 오고, 문자메시지도 오는데, 챙겨 주는 느낌이 좋다.

 

고전이란 자고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생명력 있는 책이라지만 새 번역, 새 옷을 입은 고전은 훨씬 더 쉽게 읽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2권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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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1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5년 전에 열O책들 버전으로
도전했다가 완독에 실패했다가
이번 챌린지로 마침내 완독에 성공
했답니다.

접근을 이것은 러션 막장 소설이다
라고 하니, 좀 더 수월하게 읽히더라
구요.

지금은 <죄와 벌>의 재독을 앞두고
마의 산에 올라 볼까 고민 중이랍니다.

단발머리 2020-06-13 10:25   좋아요 0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전 이제 막 1권을 끝냈는데 이번 메일에 벌써 반이 지났다고 하더라구요. 다음주에는 더 서둘러야겠어요.
러시아 소설이 재미있다,는 데에 묘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죄와 벌>과 <마의 산>도 모두 성공하시길요^^
 
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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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친 아담』의 가까운 과거는 현재의 미래다. 『미친 아담』의 먼 미래가 현재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근육단위의 단백질 조직 배양이 가능해졌다. 뇌 없이 닭다리만으로 이루어진 근육이 판매되고, 인간 장기를 위한 슈퍼 돼지도 사육된다. 홍채, 지문, 귀의 변형을 통한 신분 위조가 가능하고, 경제적 위계에 따라 사는 곳의 구별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크레이크는 크레이커를 창조한다. 크레이커를 창조하기 직전, 그는 인류 말살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새로운 세상에 크레이커들을 살게 한다. 크레이커는 태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자신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들을 만들어준 크레이크는 어디로 갔는지. 두려움이란 무엇인지, 희망이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인류와 꼭 닮은 크레이커는 인류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지 않기를, 순수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감수성 충만한 시기의 제일 황금같은 시절을 짝사랑으로 지샜기에,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더 감상적이게 된다. 내가 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기적 중의 기적. 기적 곱하기 기적이다. 그런 일이, 기적 곱하기 기적의 일이 토비에게 일어났다. 토비는 남몰래 젭을 짝사랑했다고 하는데(미친아담 3부작 지난이야기, 12), 그 사랑을 얼마나 꼭꼭 숨겨왔는지 나도 몰랐다.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져 기쁘다.




아니, 당신은 좀 그랬어.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정원사들을 모두 통틀어서 당신이 미스 순결이었어. 아담1을 헌신적으로 돕는 소녀 복사였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담1이 혹시라도 당신과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어. 내가 얼마나 질투했는지 아마 당신은 모를 거야.” … “당신은 수녀원장 같았어. 당신이 날 혼쭐낼 거라고 생각했었지. 접근하기 어려운 흰눈썹뜸부기.” 젭은 토비가 예전에 사용하던 미친 아담 대화방의 암호명을 언급한다. “그게 당신이었어.” …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울기 시작한다. 명상을 위한 물질이 그런 효과도 가져오는 것 같다. 그것이 요새의 벽들을 용해하는가 보다.

이봐. 왜 그래? 내가 좋지 못한 말을 한 거야?”

아니에요. 그저 감상적이 되어서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은 나의 생명선이었어요, 토비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지는 못한다.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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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5-1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홍수를 읽고 나서 읽어야
하는 책인지 궁금하네요.

구판 홍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단발머리 2020-05-15 13:17   좋아요 0 | URL
오릭스와 크레이크-홍수의 해-미친 아담, 이 순서인데 전 순서대로 읽었구요.
과거 현재 미래 이리저리 오가면서 전개되는지라 순서대로 읽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