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고구려, 백제의 왕 순서 따위를 외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태정태세~”에 비하면 생뚱맞게 느껴지는 이름들이라 거리감이 더 컸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외우기를 잘했다 싶다. 광개토대왕이니 장수왕이니, 좀 들어봤다 싶은 왕들도 사실 몇몇 업적이나 알았지, 고구려 전체 역사에서 어떤 맥락 아래 놓이는지는 몰랐다. 왕들을 주~욱 꿰고 나면, 한 왕조의 탄생과 성장, 절정과 쇠락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 있다. 전기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듯 말이다.

 

시험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요즘 시험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의 관계와 그 흐름을 묻는 것이 많다. 앞뒤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니, 왕들의 순서를 알아두면 아주 유리하다.........만, 외우기가 싶지는 않다. 다행히 인터넷에서 좋은 자료를 얻어 한결 수월하게 외울 수 있었다. 자료의 주인장에게 감사드린다.

 

http://blog.naver.com/tiranomaster/10139981772

(아쉽게도 2016년 11월 현재, 이 사이트는 비공개로 돌려져 있다.)

 

 

Ⅰ. 삼국의 성장

 

<최태성의 개정 고급 한국사> 강의와 교재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각 요런 성장 곡선을 가지고 있다. 삼국의 성장은 대체로 고대국가의 기틀 마련, 개혁 정치, 그리고 전성기의 순으로 이어진다. 고대국가 완성에 꼭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율령반포와 정복활동(영토 확장), 왕위세습, 불교의 공인이다. 불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로 왕권강화에 기여했다.

 

 

1. 고구려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사 전근대편>

 

1세기 태조왕과 2세기 고국천왕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3세기 동천왕 때 중국 위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나, 4세기 초 미천왕이 낙랑군을 몰아내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위기는 4세기 중반, 안팎에서 몰아닥쳤다. 중국 전연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기도 했고,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당하며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뒤를 이은 소수림왕의 개혁정치는 고구려에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고국양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것이다. 청년군주는 정복전쟁에서 연승을 거듭했다. 거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5세기를 고구려의 시대로 우뚝 세워놓았다. 장수왕은 전쟁보다 외교에 능했으며, 백제의 한성을 공략할 때도 치밀한 전술 아래 움직였다. 삼국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던 한강유역이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문자왕 때는 고구려의 영토가 최대였다고 전해진다.

  

 6세기와 7세기는 고구려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한강 회복을 꿈꾸던 백제의 성왕과 뒤늦게 성장했으나 어느덧 훌쩍 커버린 신라의 협공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국제정세 또한 불리하게 돌아갔다. 위진남북조의 오랜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 대륙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언제나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고구려였지만, 통일된 중국은 고구려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수문제와 수양제의 거듭된 침략을 물리치며 민족사에 살수대첩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고구려의 힘은 쇠퇴해 갔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자, 영류왕은 친당정책을 폈지만 당태종의 야심은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몰고 왔다.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대비책을 강구했지만 내분 속에 영류왕이 살해되고 연개소문이 실권을 장악했다. 당태종은 이것을 꼬투리 삼아 침략해 들어왔고, 고구려는 위기를 겪으며 끝내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구려의 국운은 이미 멸망을 향해 있었으니....

 

 

2. 백제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국사 전근대편>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다. 3세기 고이왕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개혁정치를 추진했고, 4세기 근초고왕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일찍이 중국과의 교류로 선진문물을 재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마한을 병합하고, 요서를 공략했으며,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동진과 동쪽으로는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다.

 

 

  

 

4세기 말부터 삼국의 주도권은 고구려로 넘어가고 있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압박으로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을 모색했다. 비유왕 때 신라의 눌지마립간과 나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빼앗겼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쫓겨 가야 했다. 웅진성 천도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동성왕 때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왕권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즉위한 무령왕은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그의 무덤으로 더 유명하지만, 백제 중흥의 발판을 놓은 강력한 왕이었다. 무령왕의 치세로 부강해진 백제를 이어받은 성왕은 사비 천도를 단행했다. 한강유역을 되찾는다는 백제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들뻘인 신라의 진흥왕과 손잡고 성왕은 마침내 한강유역을 회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한강상류는 신라가, 한강하류는 백제가 가진다는 약속을 깨고, 진흥왕이 한강하류를 공격했다. 배신에 울분을 삼키던 성왕은 진흥왕과 관산성에서 운명의 일전을 벌였다. 6세기는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백제가 아니라 신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백제 중흥의 꿈도 막을 내렸다.

 

7세기 백제는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였지만, 오히려 백제 멸망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다. 무왕 때부터 백제는 신라를 수 십 차례 공격했다. 의자왕은 신라 선덕여왕을 궁지에 몰며 대야성 등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고구려, 왜 등과 동맹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마침내 김춘추가 당태종을 찾아가기에 이르렀으니.... 백제도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3. 신라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국사 전근대편>

 

신라는 늦된 나라였다. 4세기 말 내물마립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김씨 세습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며 나라를 통치했다. 통치자의 명칭도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순으로 변화를 거쳤다.

 

4세기말 내물마립간 대에 신라는 왜에 의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오만의 군사를 보내 왜를 물리쳐주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받아야했다. 5세기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해 오자 눌지마립간은 백제의 비유왕과 동맹을 맺었고, 이후 소지마립간 때는 백제의 동성왕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맹을 강화했다. 소지마립간은 역사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지만 신라의 개혁군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중앙의 행정체계를 정비했고 경주에 동시라는 시장을 열었다.

 

6세기의 시작과 함께 신라는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렸다. 지증왕은 신라라는 국호와 왕호를 처음 사용했다. 우산국 복속은 독도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유명하다. 법흥왕은 신라의 진정한 개혁군주였다. 신라의 상징인 골품제가 율령과 함께 정비되었다. 이차돈을 순교시킴으로써 신라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였다. 병부를 만들고 금관가야를 정복했다. 진흥왕의 치세를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6세기를 신라의 시대로 만든 진흥왕은 신라인에게는 위대한 왕이지만, 배신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약 120년 이어져온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뒤통수를 쳤을 뿐만 아니라 노비출신으로 하여금 성왕의 목을 치게 함으로써 백제의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오명을 감수하고 얻은 대가는 컸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진흥왕이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땅땅 땅땅땅 세워 놓은 순수비는 그의 위세를 짐작하게 해준다.

  

 

진흥왕 이후의 신라에 대해서는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았다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팩션 드라마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화백회의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 그 뒤를 이은 진평왕, 진평왕의 맏딸인 선덕여왕, 선덕여왕의 사촌쯤 되는 진덕여왕 등의 통치 순서와 선덕여왕 때의 백제와의 충돌 등은 사실이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듯이,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 직면해 당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았다. 삼한일통의 꿈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Ⅱ. 7세기 불붙은 동아시아

 

7세기 고구려는 영류왕과 보장왕,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신라는 진평왕과 선덕여왕-진덕여왕-무열왕-문무왕이 집권했다. 한편으로는 천리장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당과 화친하려 했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살해되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왕위에 오른 후 당태종의 침략을 받았다. 645년 안시성 싸움으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고구려는 당의 골칫거리가 된다. 백제는 무왕 때부터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였고 의자왕 때에는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4세기 말 내물마립간 때의 절체절명의 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선덕여왕은 당과 화친을 맺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했지만, 국운을 건 한판의 승부가 다가오고 있었다. 최초의 진골왕에 오르게 될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에게 동맹을 제의했지만 실패하고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는데....

 

648년 신라 진덕여왕 2년, 드디어 당태종과 김춘추가 나․ 당 연합을 결성했다. 당태종으로서는 어떻게 해봐도 정복할 수 없었던 고구려를 정벌할 훌륭한 계책이었고, 신라로서는 백제의 등쌀에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삼한을 통일할 신의 한수였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신라인에게 한반도 전체에 대한 민족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까? 이때 체결된 나당연합은 당태종의 사망으로 660년에 가서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나․ 당 연합군의 1차 표적은 백제였다. 백제는 기벌포 전투와 황산벌 전투에서 거듭 패함으로써 660년 마침내 7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마감했다. 진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김춘추,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정복한 다음해에 삼국통일의 과업을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백제는 망했지만 이후 3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이 지속되었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항전하였는데 지도층의 내분으로 실패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참전이다. 일본은 수백 척의 전선을 만들어 백제를 도우러 달려왔다. 663년 백강에서 일본군이 당군에게 패하고, 백제 부흥운동도 끝이 났다. 일본왕은 왜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 백제를 구원해야 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조선술은 신라에게 배운 것이라는 점, 그래서 일본의 전선들이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일까?^^;;

 

 

다음 순서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668년, 역사에 이렇다 할 전투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망했다. 연개소문 사후 극심한 권력 쟁탈전의 와중에 침략을 당한 고구려는 차라리 스스로 무너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구려도 마지막 부흥운동의 불꽃을 피웠다. 특이한 점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신라가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고구려가 망하자 당은 숨겨놓은 야욕을 드러냈다.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고구려 땅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까지, 한반도 전체를 꼴깍 삼키려고 덤벼들었다. 670년 나․ 당 연합은 나․ 당 전쟁으로 돌변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도우면서까지 당의 침략을 물리쳐야 했다. 675년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전투에 승리하면서, 신라는 가까스로 당의 야욕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른바 삼국이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신라의 국경은 대동강에서 원산만 까지였다. 이민족을 끌어들인 결과 우리민족은 넓디넓은 요동벌판을 잃어버렸다. 후대의 입장에서 당시의 신라를 비난할 수 없다고는 해도 아쉽지 않을 수는 없다.

 

 

 

 

다행히 신라가 잃어버린 땅에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발해가 들어서고, 우리역사는 남북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가 중국의 당과 함께 200여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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