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하면 다 안다는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강의, 전근대편을 마치고 근현대편을 시작했다. 중학교때 배운 국사가 학교교육의 전부라 그걸 다 듣고 외우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렇게 상세하게 알아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문제집을 풀어보니 진짜 다 알아야했다. 그러고도 교재에 없는 문제도 보인다.
근현대편은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 전후부터 시작하니, 공부삼아 듣고 있어도 참 깝깝하다.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치욕만이라면 차라리 웃고 말겠지만, FTA 같은 현대판 통상조약과 겹치는 부분도 많아 참 씁쓸하다. 1876년에만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르고 그러는지 알면서도 그러는지 비슷하게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론스타가 외환은행 먹튀를 하고도 모자라 우리 정부를 상대로 5조원 소송을 하고 있다. 한미 FTA 체결 당시 독소조항으로 격렬한 반대를 일으킨 투자자·국가간 소송(ISD) 항목의 결과다. 조·일 수호조규의 부속 조약인 조·일 통상 장정의 무관세 항목을 연상시킨다. 조선은 이 무관세 항목이 얼마나 커다란 독소조항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4년이 지나서야 새로 협상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과거로 현재를 비추어 보는 것, 그것이 역사의 힘인 것 같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7>
동아시아 삼국 중 가장 먼저 강제 개방을 당한 나라는 청이다. 그 유명한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42년 영국과 난징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는데, 조선의 온건 개화파들이 지지한 양무운동이 있다. 중체서용中體西用. 본체는 중화이나 서양의 문물을 이용한다? 막 해석하면 그렇다. '교육학용어사전' 이라는 것의 풀이는 이렇다. : 중국 본래의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하기 위해 근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어쨌든 이 중체서용을 본따 조선의 온건개화파들은 동도서기東道西器 를 주장한다. 중체서용의 조선판이 동도서기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되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인다.
일본을 개방시킨 것은 미국이다. 태평양을 건너 딱 마주쳤겠지.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맺었다. 이때 당한 불평등 조약을 일본은 20년이 조금 지나 고스란히 조선에 써먹었다. 강제 개항후 1868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1868년이면 조선은 병인양요(1866) 후에 오페르트라는 독일인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사건이 벌어져 대원군이 외세에 더욱 강렬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때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후 딱 8년만에 후다닥 배워온 기술로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을 강제 개항했다. 10년이 안돼 서양제국주의의 기술을 마스터한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성공적으로 개혁작업을 완수했다. 적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조선이 나아간 꼬라지를 보면 더욱 비교가 된다.
그리고 조선은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한다. 일본은 서양열강들이 조선을 개방하기 이전에 조선에 대한 선점권을 갖기 위해 서둘러 운요호를 출동시켰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4>
조선의 해안가에 서양 선박들이 수시로 나타난 것은 이미 19세기 초부터다. 그러니 일본도 마음이 급했겠지. 조선인의 용기인지 대원군의 고집인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선은 1866년 프랑스 군함을(병인양요), 1871년 미국군함을(신미양요) 물리치고 떡하니 척화비를 세워놓고 있었다.
1866년 평양의 대동강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선박은 제너럴셔먼호이다. 이때 평양감사가 박규수이다. 1862년 임술농민봉기가 한창일 때 안핵사로 내려가 삼정이정청 설치를 건의했던 그 박규수, 박지원의 손자이다. 북학파의 대표인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할아버지의 명성에 걸맞게 조선 개화파의 대부로 성장한다. 온건개화파도 급진개화파도 모두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서양문물을 배우고 토의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866년에 박규수는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는 미국의 제너럴셔면호에 불을 질러 홀라당 태워버렸다. 군관이 협력, 화공으로 물리쳤다. 제너럴셔면호의 선원은 모두 죽었고, 이 사건을 빌미로 5년후 미국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로 쳐들어온다. 그것이 신미양요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5>
병인양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재미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고 있자 신경이 거슬리던 대원군이 어떻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보려고, 프랑스 선교사와 비밀리에 전략을 짰는데 실패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위정척사파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된 대원군이 180도 방향을 선회, 병인박해를 일으켜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 신자 수천명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그러자 대원군의 SOS를 모른척 하던 프랑스 함대가 순식간에 강화도로 달려와 병인양요가 일어났다고 한다. 대원군으로서는 이이제이를 노려본 것인데, 일은 안되고 욕만 먹게 생기자, 그 화풀이를 무고한 천주교도들에게 한 셈이 되어버렸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2>
1차 침입때 조금만 더 들어왔으면 한양이다. 여하튼 2차 침입때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물리쳐,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이때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있는 문서들을 불태우고 멋지게 보이는 책들만 들고 튀었다. 그것이 최근 외규장각문서 반환 협상에 의해 5년간 대여 갱신의 형태로 국내에 들어와 있는 그 책들이다. 정식명칭은 외규장각의궤이다.
덕진진, 초지진, 광성진은 신미양요때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어재연이 결사항전하다 죽었던 곳이 광성보?, 광성진? 이다. 신미양요때는 조선인이 300여명 죽고, 미국인은 3명 죽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통상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래서 대원군이 의기양양 척화비를 꽂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2>
이 할아버지는 생긴 것처럼 무서운 위정척사파의 거두다. 1860년대, 막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전투가 벌어질 때, 척화주전을 외치던 통상수교 반대파이다. 전쟁불사의 기개를 드러냈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왠지 서글프다. 1870년대, 개항을 반대하던 최익현 할아버지도 있다. 위정척사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을사늑약 후 결국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40>
1880년대에 위정척사를 이끌었던 이만손이라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황의 핏줄이라고. 그래서 1881년 미국과 통상수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결사반대, 영남 만인소를 지휘했다.영 남 유생 만명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6년 조·일 수호 조규에 이어 1882년 조·미 수호통상 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맺고도 어영부영하다가 4년이나 지난 1880년에야 청의 제도를 본따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통리'는 통괄적으로 관리한다. '기무'는 근본이 되는 일 혹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다. '아문'은 뭐 그냥 아문인 것 같다. 여하튼 개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관이다. 그 결과 다음 해인 1881년에는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보내고,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개화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