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은 종로를 비롯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웠다. 조선군의 사망자는 350여명, 미군의 사망자는 3명뿐인 신미양요 직후의 일이다. 조선의 주전척화파는 “병인년부터 양이들을 배척해온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로 화친은 절대 논할 수 없습니다.”며 의기양양했다. 조선군이 얼마나 죽었든 조선 땅을 뺏기지 않고 통상도 하지 않았으니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미 청나라는 1842년에 영국에 의해, 일본은 1854년에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했다. 그러니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연거푸 물리친(?) 조선으로서는 척화비가 너무나 당당했을까?

 

척화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끌고 와 통상을 요구했다. 1868년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한 바로 그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무서운 속도로 개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채 10년이 되지 않은 1876년에 군함을 이끌고 와 조선을 강제 개항시켰다. 조․ 일 수호 조규, 이른바 강화도 조약이었다.

 

개항과 개화가 대세가 된 이후에도 조선은 제대로 된 개화작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1880년에야 김홍집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고, 개화작업을 총괄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외세의 간섭이 없었다면 개화의 길은 순탄했을까? 그러나 동양의 개화라는 것이 이미 제국주의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잔잔한 물결 위로 순항하는 개화란 애초부터 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조선은 왜 그렇게 다른 길을 걸어야 했을까?

 

조․ 일 수호 조규의 부속 조약인 조․ 일 무역 규칙의 3無 조항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조선의 경제 기반을 몰락시켰다. 조선후기에 싹을 틔우며 성장하던 자생적 수공업은 무관세로 들어오는 싼 면제품과 공산품에 의해 무너졌다. 무제한 곡물 유출이 허용됨으로써 엄청난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곡물이 부족해진 조선은 폭등하는 곡물가격에 신음했다. 기층 민중의 경제가 파탄 난 것이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던 구식군인의 폭동으로 시작했지만 곧 도시빈민이 합세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일본인 교관을 죽이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요청에 의해 들어와 난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해갔다. 임오군란으로 청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일본 군대까지도 조선에 주둔하게 됐다. 군란이 진짜 군란을 초래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의 수위를 높여갔고, 조선의 두 갈래 개화파는 더욱 격하게 대립했다. 민씨 정권과 결탁한 온건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동도서기식 개화를 추구했다. 반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삼은 급진개화파는 문명 개화론을 주장했다.

 

1884년 급진개화파는 말 그대로 급진적 방식을 택했다. 일본군의 도움을 믿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짧은 교전 끝에 일본군은 물러나고 청군이 사태를 장악함으로써 김옥균, 박영효 등은 3일천하를 마감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이 내세운 14개조의 개혁안은 입헌군주제와 신분제 폐지 등을 담고 있는 최초의 정치 개혁안으로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 때문에 토지개혁 같은 가장 절실한 개혁안을 담지 못했고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갑신정변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 땅에서 언제든지 부딪힐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맺어 동시 철군할 것과 향후 파병시 상대국에게 통보할 것을 약속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텐진조약을 통해 거의 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였다. 10년 후 텐진조약은 청․일 전쟁의 빌미가 되는데, 이 10년 사이 일본은 절치부심 국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 10년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가에 변란이 터질 때마다 외세에 의존하고, 그 결과 외세의 간섭은 극심해지고, 경제는 거덜이 나고 있는데, 조선은 이 귀중한 10년을 왜 그렇게 허망하게 놓쳐버린 것일까?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운동 사이, 딱 10년 동안 물론 조선도 동도서기식 개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혁에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건전한 재정확보가 1차 과제가 되어야 한다. 요즘도 그렇지만 국가 재정은 탄탄한 민중경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래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민중 경제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씨 정권은 봉건적 착취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려 했다. 기본조세에 각종 무명잡세까지 백성의 등골을 뽑는데다가 그나마 중간에서 착복하는 수령들이 부지기수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0권 '망국'  p34>

 

“결국 개화와 근대화는 재정개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개혁의 주체여야 할 ‘위’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손대지 못한 채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구체제에 균열을 내는 일은 결국 ‘아래’의 몫 이었다. p34”

 

동학농민운동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전봉준이 봉기를 위해 돌린 사발통문에는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더라. p54” <만화 조선왕조실록 20권>

 

고부군수 조병갑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고부봉기가 가라앉을 즈음 다시 기름을 부은 것은 안핵사 이용태다. 백산에 다시 모인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 승리하고, 이어서 전주성을 접수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59>

 

비극은 외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씨 정권에서 비롯되었다. 청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들어올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청군을 불러들이고, 일본군이 들어오자 마치 몰랐다는 듯이 허둥댔다. 일본군은 제물포로 상륙하면서 그들의 표적이 동학농민군이 아니라 경복궁임을 뚜렷이 드러냈다.

 

현명한 쪽은 전장의 농민군과 장수였다. 화약을 맺어 농민군은 철수하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청․ 일 양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은 철군을 거부했다. 청․ 일 양군이 남아서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이 거부하자, 다짜고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 함대를 포격했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조선 왕실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79>

 

일본은 조선을 내정 개혁한다는 명분을 위해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1차 갑오개혁이다. 대한민국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 이렇게 일본의 손에 의해 시작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차 갑오개혁의 핵심은 왕권을 약화시켜 입헌군주제적 성격을 갖추고, 신분제 등 전근대적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김홍집과 흥선대원군의 연립 내각으로 구성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은 민심 수습용일 뿐 실권이 거의 없었다.

 

대원군은 비밀리에 청군과 동학농민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아래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위에서는 청군이 협공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전쟁 초반부터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있었다.

 

전주화약 후 농촌으로 돌아가 집강소 활동을 하던 농민군은 이른 가을겆이를 마치고 삼례에 다시 집결하였다. 조정을 유린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에 대원군의 밀서가 힘을 보탠 것일까?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총 집결하여 한양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보국안민의 굳은 결의만으로는 우금치를 넘을 수 없었다. 일본군의 무라다 총 앞에 하얀 눈처럼 쓰러져 갔다.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후방의 동학농민군을 제거한 일본은 2차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대원군을 날리고, 친일 개화파 박영효를 김홍집의 파트너로 삼았다.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정리, 반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홍범14조가 그것이다. 홍범이란 홍익인간 할 때의 그 ‘홍’에 규범, 규칙 등의 ‘규’, 즉 '큰 법'이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을미년에 청․ 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강화조약인(강화는 싸움을 끝내고 화해를 한다는 뜻)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등을 할양 받았다. 하지만 주변 열강들이 이 꼴을 곱게 두고 볼 턱이 없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삼국은 일본을 압박하여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찍소리 못하고 삼국간섭을 받아들이는 것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와 고종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기로 마음먹고, 박영효에게 역모죄를 씌웠다.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두 번째로 망명길에 올랐다. 삼국간섭으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은 명성왕후의 행보에 독기를 뿜었다. 자칫하다가는 청이 아니라 조선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차마 상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다시 대원군이 이용되었다. 대원군과 훈련대는 명성황후 시해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방패막이로 현장에 불려나와 있었다. 훈련대 대원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해도 대원군은 어땠을까? 1863~1873년까지의 고종 10년간의 개혁은 대원군의 혁혁한 치적이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의 행보는 원칙도 기준도 없는 권력욕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시해를 결행한 것은 일본낭인들이었다. 여우사냥이란 이름으로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떠했든, 혹은 어떠해야 하든, 을미사변 그 자체는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을미사변 후 3차(갑오1,2차에 이은) 을미개혁이 단행되었다. 김홍집은 여전히 살아남아 유길준과 함께 을미개혁을 지휘했다. 을미개혁은 곧 단발령으로 대표된다. 단발령은 을미사변보다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양반을 중심으로 한 을미의병을 촉발했다.

 

왕후를 잃은 고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왕후를 처참하게 살해한 일본의 감시 아래서 고종은 어떤 내일을 계획했을까?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다. 고종의 전격적인 아관파천으로 일본은 손안에 넣은 조선을 다시 한번 놓쳤다. 또 러시아였다.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승부수는 1904년 러․ 일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약 8년간의 시간을 벌어들였다. 그 귀 중한 시간동안 고종은 무엇을 하였을까?

 

1897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라니?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제국주의의 수탈 아래 곧 숨이 넘어가는 나라가 제국은 다 무엇이며 황제는 무엇인가 싶어, 늘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 허세야말로 열강의 발아래 짓밟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후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은 성공하여 미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1896년 고종의 후원아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때까지 독립협회는 일종의 관민 가버넌스라 할 수 있다. 그런 독립협회를 고종은 왜 군사를 동원하면서까지 해산했을까?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18>

 

배재학당에서 열었던 토론회가 성공하자 서재필은 토론회를 독립협회로 확대했고 드디어 종로 한복판에서 민중을 상대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이를테면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못지않은 엄청난 민중이 모였다. 만민공동회의 힘은 막강하여 광우병 시위가 이루어내지 못한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무산시키고, 러시아 고문을 돌려보냈으며, 한러 은행의 문을 내렸다. 뜻하지 않은 승리에 만민공동회는 환호하며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고종은 분노했다. 러시아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고종이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고문을 요청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사실 시큰둥했다. 괜히 일본과 영국 등의 심기를 거슬러 만주를 노리는 러시아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봐 였다. 그런 러시아이니 만민공동회가 오히려 고마웠는지도 모른다. 조선 민중의 뜻이 그렇다면 알았다고, 즉각 철수해버렸다. 고종은 서재필을 추방해 버렸다. 미국인 서재필 역시 깔끔하게 떠났다.

 

 

윤치호가 맡은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에 몰두했다. 중추원을 의회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이미 만민공동회는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국정을 질의․ 질타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대신들을 날려 보낼 정도로 막강해지고 있었다. 고종은 중추원 설립을 받아들였다. 만민공동회는 어느새 대신들에게 토론회 참석을 종용하고, 밤샘 시위를 벌여 대신들의 참석을 끌어냈다. 여기서 정부대표 박정양과 독립협회 윤치호, 그리고 민중의 대표로 백정출신 박성춘이 똑같은 단상에 올라 연설을 했다. 민의의 승리였다. 헌의6조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건의안을 고종은 받아들였다. 헌의의 ‘헌’은 헌납, 헌정 할 때의 그 드린다는 뜻이다. 헌의는 의견을 드린다는 것.

 

 

고종은 곧바로 뒤통수를 쳤다. 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도모하려 한다는 익명서를 근거로 독립협회의 간부를 체포했다. 시위하는 민중들을 황국협회를 시켜 공격했다. 몇 번의 힘겨루기 끝에 결국 고종이 승리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12월 25일 군대에 의해 해산당하고 독립협회는 문을 닫고 독립신문은 자연 폐간되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망국' p214>

 

1899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의 광무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원수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황제 휘하에 두고 황제권의 강화를 추구했다.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겠다는 것. 개항이후 온건개화파가 추구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론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西器는 기술학교, 전화, 전차, 지계(토지소유증명서) 같은 것들이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개혁을 위해 고종은 힘껏 노력했다. 그러나 외세가 아가리를 벌리고, 재정은 열악하고, 민중의 힘도 짓밟아 없앤 상황에서 언제까지 사상누각 같은 개혁이 가능했을까? 민중이 지지하는 내정 개혁 없이 근대적 개혁은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종은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렸다.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 이제 남은 것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 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01>

 

1904년 러․ 일 전쟁이 터졌다.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여타 열강들과의 이권 등 복잡한 정세 속에 결국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같은 해 일본은 한․ 일 의정서를 맺어 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체결된 제1차 한․ 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는 사실상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재정과 외교 고문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1905년 러․ 일 전쟁의 종전을 앞두고 일본은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카쓰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에는 필리핀을 주는 대신 대한제국은 일본이, 제2차 영․ 일 동맹으로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어 미국의 주선으로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으로 근근이 버텨오던 대한제국은 이제 오롯이 일본의 손아귀 안에 놓였다. 곧바로 제2차 한․ 일 협약 즉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하는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고,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민영환이 자결하고,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싣고, 나철, 오기호가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의병이 궐기했어도 일본의 야욕은 거리낌 없이 진행되었다.

 

1907년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했다. 만국평화회의. 만국이란 제국주의 여러 나라를, 평화란 평화롭게 식민지를 갈라먹자는 뜻이라는 것을 고종은 몰랐던 걸까? 회담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폐위 당하고 한․ 일 신협약, 즉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번에는 군사권의 강탈이었다.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렸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고,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지만, 망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09년 사법권을 빼앗기고(기유각서), 1910년 결국 국권을 빼앗겼다(경술국치). 조선왕조 500년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끝났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훈의 총탄도, 1909년 안중근의 총탄도 망국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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