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토마스 모어, 코페르니쿠스, 셰익스피어, 갈릴레이, 세르반테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눈부신 이름들은 어떻게 중세 천년의 암흑으로부터 한꺼번에 튀어 나왔을까?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분열했다. 신 중심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에게는 신을 대신할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탄생했다.
르네상스Renaissancce는 재생이란 뜻을 가진다. 르네상스가 재생시킨 것은 ‘고대’이다. 신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립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자연과학이 그 방법을 제시했다.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이어,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가 뒤따른 것은 이런 맥락 아래에서이다. 세속화, 인문주의, 자연과학적 방법은 하나로 엮여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르네상스를 “화약의 발명에 적응해 간 시대”로 규정한 학자도 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먼저 피렌체의 예술을 떠올리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화약과 대포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화약은 전쟁 양상, 도시 설계 방식, 군대 규모, 삶의 방식 등을 바꾸었다. 화약과 대포가 등장하면서 중세의 무기 체제가 쓸모없어졌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화약과 대포 때문에 지역의 영주가 아닌 중앙의 군주가 세금을 거두어야 했다. 전쟁의 규모와 비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약뿐만 아니라 송나라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역시 유럽이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로 도약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동양은 물론 전 세계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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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적인 의미의 르네상스에 조금 집중해 보자.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에는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가 먼저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것도, 북유럽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간 것도, 모두 중계무역과 관련이 있다.
십자군 전쟁이후 지중해 무역으로 부유해진 이탈리아는 상인과 왕의 지원으로 주로 미술 분야에서 ‘부흥’했다. 대표적 후원자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던 것과는 반대로 내부분열이 계속되던 이탈리아는 무역의 주도권마저 대서양무역로에 뺏기자, 르네상스 문화도 쇠퇴했다.
대서양무역으로 급성장한 16세기 (알프스 북쪽) 북유럽은 예술 보다는 사회비판과 종교개혁이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유토피아』 ,『우신예찬』,『돈키호테』 등의 작품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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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서로 경합하는 쌍둥이’ 혹은 ‘종교개혁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운동’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걸쳐있고, 종교개혁은 16세기에 일어났다. 14~16세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로 잡는다면, 그 안에 중세의 위기와 해체에 해당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모두 포함된다. 이 시기를 거쳐서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럽의 근대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운동이 짧은 시간에 많은 세력을 얻었던 이유는 첫째, 프로테스탄트가 세속적 통치자(제후)와 영합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가톨릭에 회의와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교황 레오 10세가 면벌부를 팔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루터가 문제 삼은 것은 면별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남발하는 것이었다. 1517년 뷔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 때에도 교황에 대해 완전히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교황 레오 10세의 대처가 미온적이었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은 순수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교황의 미온적 대처를 목격한 독일 영주들이 자신들의 땅 곳곳에 있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들은 루터가 교황에 맞설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뒷받침했고, 이와 동시에 영지 내에 있는 교황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까지 이어졌다.
종파분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사람들은 종교분쟁에 환멸을 느꼈다. 겉으로는 신앙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정치적․ 경제적 싸움일 뿐이며, 종교는 이것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을 겪으며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종교를 명분으로 세상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종교를 대체할 확실한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회의주의적인데다가 느긋하게 생각하는 힘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심란한 정서에 더 이상 맞지 않았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은 데카르트와 뉴턴이었다. 고전적 권위에서 탈피하여 수학적 확실성에 의존하는 과학,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물리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학문들에 대한 요구 등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지배계급은 재빨리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거나 후원하며 과학을 통한 지배의 정당화를 모색했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하면서 17세기 중반에 르네상스는 완전히 끝이 났다. 중세의 신을 대신할 규범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등장했지만, 종교전쟁의 혼란 끝에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고대로의 복귀가 아니라 과학이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투쟁에서 근대적인 것이 승리했다. 고대적인 것이란 자기 지식의 최종 근거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텍스트에 두는 것이라면, 근대적인 것은 과학, 특히 실험과학에 두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종파간의 대립이 극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수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대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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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종교개혁을 다루는 방식을 잠깐 살펴보자. 가톨릭이 신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교황과 성직자를 매개로 삼았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성서지상주의를 주장했다. 성직자 따위 없어도 성서를 통해 곧바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루터파는 파문과 전쟁, 화의를 거쳐 종교적 자유를 획득했다.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제후만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제후가 선택한 종교를 그의 농노들은 무조건 믿어야하지만 말이다.("다스리는 자가 하나인 곳에는 종교도 하나이다.")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30년 전쟁 이후에야 주어졌다.
스위스의 칼뱅파가 주장하는 예정설은 역설적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구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의 노력과 성공이 제시된다.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면 그것이 곧 구원에 대한 증빙이 되는 것이다. 노력과 성공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노력하고 성공한다는 역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무신론자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이유로 칼뱅파는 부르주아지에게 환영받고 자본주의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국교회는 루터파와 칼뱅파에 비해서 이질적이다. 이혼과 재정 문제로 국왕이 일으킨 개혁이다. 우리나라의 성공회(聖公會)가 영국국교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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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개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개혁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을 공식적으로 결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구교는 유럽이 신․구교로 쪼개지자 교세 확장을 위해 예수회를 조직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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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은 유럽의 핵심 강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제후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대립했다. 또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의 종교적 자유는 인정하되, 제후의 종교가 곧 그 영지의 종교로 규정되어, 제후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18년 보헤미아(체코)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의 탄압에 대항해 일어난 폭동이었다. 이 폭동으로 페르디난트 2세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개입했다. 그러자 가톨릭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루터파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개입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벌어졌는데, 당시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용병을 고용했기 때문에 전쟁은 더욱 잔인했고, 살육을 위한 살육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은 종교에 대한 극심한 의심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낡은 세계에 대해 절망했다. 보통 베스트팔렌조약 이후를 근대의 출발로 보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 전쟁을 통해 용병전쟁의 문제점이 드러나며 국민군이 탄생했다. 국민군 유지에는 막대한 물자가 필요했다. 상업이 국민군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른바 ‘군상 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전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두 개의 축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군은 곧 해외 정복에 나섰다. 서구 제국주의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루터파는 개인의 종교 자유를 획득했고, 칼뱅파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종교전쟁이 곧 독립전쟁이었던 네덜란드의 독립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승인되었다.

중세를 끝내기 전에 꼭 덧붙여야 할 것은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고, 종교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중세의 절정기가 아니라 중세가 붕괴되던 시점에서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교회는 종교적․ 정치적 혼란과 불안의 원인을 모두 마녀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마녀로 몰린 이들은 노파나 하녀, 과부 같은 힘없는 여성들이었다. 통치자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등장한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매카시즘 열풍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도 빨갱이는 사회 혼란기 때마다 등장했다.
마녀가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마녀를 만들어 낸다. 사회의 근본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화형대 위의 마녀를 필요로 했던 것은 권위를 잃고 추락하던 통치자들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