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아시아는 근동, 중동 등으로도 불려왔다. 최근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이슬람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7세기나 되어서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 동․서 교역로의 강대국,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개방적 지형으로 고대로부터 여러 민족의 침입이 있었고 왕조 교체가 잦아서, 이 지역의 역사를 세세하게 공부하기는 매우 힘들다. 최초의 통일제국인 아시리아가 가혹한 통치로 단명하고, 진정한 고대제국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 제국이 서남아시아를 차지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p90 >

 

그냥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할 때는 BC559에서 BC330까지 통치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말한다. 이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폴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전쟁’을 치렀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의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망하고 뒤를 이어 파르티아 왕국이 400여 년간 이 지역의 강자가 되었는데, 오랜 기간의 존속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으로 특기할만한 세력은 아닌지 별 언급이 없다. 동·서무역의 주역자리를 지키며, 전성기의 로마제국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는 정도이다. 파르티아는 이란계이고, 박트리아는 그리스계이다.

 

파르티아왕국을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한 것은, 페르시아제국의 부흥을 내세운, 사산왕조 페르시아이다. 사산왕조는 로마제국과 대립하면서, 동·서무역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신라까지 페르시아 문물이 들어왔다는 증거로 삼는 물병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것이다. 사산왕조는 페르시아의 관용정신을 이어받아, 동·서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227년경부터 642년까지 이어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p92 >

 

지도만 딱 보아도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은 동서교역의 패권을 놓고 충돌하게 되어 있다. 두 제국의 충돌은 예기치 않게 서아시아 세계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아라비아반도의 성장이 그것이다. 동·서 교역을 주도하던 상인들은 두 거대 제국의 충돌로 육상 교역로가 위험하게 되자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가는 해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부족 단위로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을 하던 아라비아인들은 아라비아 반도가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동·서무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따라 해안가의 메카와 야스리브(메디나) 같은 도시가 급속히 성장했다. 아라비아인은 모두 상인이라는 등식도 이때부터 성립하게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2. 아랍에서 이슬람교가 일어나다.

 

잉여농산물과 함께 계급이 생겨났듯이 (인간문명이라는 것이 왜그런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경향을 띤다. 메카 등은 상업 활동으로 부유해졌으나, 아라비아인은 부를 독차지한 귀족과 먹고살기조차 힘든 빈민으로 극명하게 나뉘어졌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7세기 무함마드가 “신 앞의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를 외치며 예언자를 자처하자,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평등을 인정할 수 없는 메카 귀족들의 박해로 무함마드는 야스리브(메디나)로 피신하였다. 헤지라(622)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이슬람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작성자 미쉘>

 

무함마드는 세력을 확장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일부는 전쟁을 통해서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외교와 담판으로 이슬람세계에 통합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조선이 단군왕검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였듯, 이슬람 역시 무함마드가 종교적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인 정교일치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슬람교는 어떤 종교보다 정치 및 일상적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 것은 무작정 도피한 것이 아니다. 메디나에서 한 부족이 제3자에게 분쟁조정을 의뢰하고자 무함마드를 초청했던 것이다. 이후 무함마드는 신의 예언자일 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이자 입법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무함마드가 죽고 난 뒤 이슬람은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중세의 이슬람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해 볼 수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먼저 정통 칼리프 시대가 이어졌다.  4대에 걸쳐 선출된 칼리프가 이슬람 세계를 이끌었다. 칼리프란 무함마드의 후계자 혹은 대리자를 뜻한다. 마지막 칼리프인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다. 알리는 1대 칼리프 선출때부터 유력 후보자였으나 젊은 나이로 인해 선출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칼리프의 자격을 두고 논란이 있었고, 4대째 선출된 알리가 암살된 이후에는 대립이 격화되었다.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칼리프는 무조건 무함마드의 혈통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 세력은 혈통과 관계없이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을 이어받은 사람은 칼리프의 자격이 있다고 맞섰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어지는 시기는 우마이야 가문이 칼리프를 세습한 우마이야 왕조 시대다. 우마이야 왕조가 열리면서 알리를 따르는 무리들은 극렬 반발했고, 이로부터 1400년에 걸친 시아파(시아 알리: 알리를 따르는 무리)와 수니파(무함마드의 언행)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연 무아위야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다. 시리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가 수도가 된 것은 이때문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런데 정복된 곳의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우마이야 왕조는 재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기 때문에 개종만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믿을 수 있었지만 지즈야라는 세금을 내야했다. 피정복민들이 초기에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이 세금 때문이었다. 종교적 성공이 역설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불러 왔던 것이다. 결국 우마이야 왕조는 교리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개종한 비아랍인들에게 세금을 계속 물리는 등 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아랍인 제일주의는 비아랍인과 시아파의 불만을 폭등시켰다. 우마이야 왕조가 급속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90년 정도로 단명한 것은 이때문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3. 세 대륙을 품은 이슬람

 

아바스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아바스 제국은 민족차별 없이 이슬람법에 따라 평등하게 통치하는 "진정한 의미의 이슬람 제국"이었다. 하지만 신실한 아랍 무슬림들에게 개종한 이민족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에 철저하게 복종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불만을 아바스 제국은 움마와 울라마를 통해 해결했다. 행정적 통치는 칼리프가,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은 울라마라는 이슬람 지식인 혹은 (종교)법률가들에게 맡겼다. 무슬림은 움마라는 (종교)공동체 안에서 코란을 필두로 한 샤리아(이슬람법)에 철저히 복종하며 살았는데, 이 샤리아를 해석하고 개개 행위가 샤리아에 적법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을 울라마가 담당했다. 무슬림의 삶에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움마가 되었다. 중앙권력은 세금을 걷는 등 행정적으로 관여했을 뿐이다. 아바스 제국의 이런 정책은 이후 모든 이슬람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세계가 다른 종교에 관대했던 것은 이슬람 움마처럼 다른 종교에도 움마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즉 이슬람 세계 안에서 각각의 종교인들은 종교 자치체를 꾸려 각각의 종교와 관습에 따라 살 수 있었다. 

 

"율법의 자율적 운용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중요한 결과는, 울라마가 무슬림의 생활을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집단의 지도자들 역시 자기네 신자들의 개인적 · 종교적 문제를 지도하고 규제해주기를 무슬림 정치 당국이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공동체에 폭넓은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세계의 역사』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103>

 

하지만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모두 다스린 시기는 없었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후우마이야 왕조가, 북아프리카에는 파티마 왕조가 각기 이슬람 세계를 다스렸다. 10세기에는 페르시아계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칼리프는 여럿이었지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슬람 제국은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한 후우마이야 왕조에는 이슬람, 비잔티움, 그리스의 문화가 어우러져 화려한 꽃이 피었다. 종교적 차별 없이 아랍인과 유럽인,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가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카이로를 수도로 삼고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파티마 왕조는 이슬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파티마는 무함마드의 딸로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부인이다. 즉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가 세운 이슬람 국가로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칼리프로 인정했다.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이슬람세계의 중심지였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를 잇는 교역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그다드는 ‘세계의 시장’ 이었다. 탈라스전투를 통해 당으로부터 비단길을 빼앗은 이슬람 상인들은 낙타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내륙에서 중국까지 왕래하였고, 배를 이용한 해로를 통해서는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고려까지 왕래하였다.

 

 

 

4. 이슬람세계에 부는 바람

 

이슬람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 무함마드 이래 이슬람세계의 주인공은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튀르크인이 이슬람세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튀르크인은 우리역사에 돌궐로 등장하는 민족이다.

 

<처음 읽는 터키사>

 

 

셀주크 튀르크는 1037년에 건국되어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바그다드를 점령한(1055) 토그릴 베그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이슬람세계는 처음으로 정교분리의 체제를 갖게 되었다. 칼리프는 종교적 상징으로만 남았다. (움마를 인정한다해도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종교적 수장이다.)

  

 <처음 읽는 터키사>

 

서양사에서 셀주크 튀르크는 십자군 전쟁으로 등장한다. 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았다. 비잔티움제국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1096~1270)이 벌어지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살라딘이다. 살라딘은 사로잡은 크리스트교도들을 풀어 주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관대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128>

 

그러나 지중해를 둘러싼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의 아웅다웅은 한방에 날라 갔으니, 몽골군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1258년 바그다드는 몽골에 함락되고, 몽골세력은 이 지역을 일한국으로 편입하였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은 이슬람의 새로운 수호자가 되었다. 셀주크의 명맥은 1308년까지 이어졌으나 술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각 지역의 튀르크족이 점차 떨어져 나가 크고 작은 나라를 세웠다. 그 중 하나가 1299년 오스만이 세운 오스만 공국이다.

 

  <처음 읽는 터키사>

 

이후 튀르크족이 다시 한번 서아시를 통일하는데,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거대제국을 형성했던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오스만 후기에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에 따라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아나톨리아반도의 터키 공화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여러민족들은 독립하여 각각 현대의 여러국가를 건설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