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공장 건물 이층에 있고 창문도 넉넉하지만, 땅에 가까워서인지 아무리 쳐다봐도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다.
정작 창문주인은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한데도, 주인으로 모자라 창까지 그럴 필요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여튼 그날 일에 지쳤던 나는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한 심정을 어찌해볼 수 없어서, 공기가 희박해진 것처럼 갑자기 숨마저 안 쉬어져서, 공장을 뛰쳐나가 고개를쳐들고 울었다. 울고 울다, 그 울음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일 것이다.
나보다 더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한 허공의 작은 창문과 우연히 마주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울음이 그치더니 숨통까지 트이는 걸 경험했고, 그후 나는 더이상 개발의 소음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 P14
하지만 매일 그렇게 똑같은 일을 하고 살면 인생이 짧게 느껴진다는 걸 우산씨는 알까.
종종 나는 내 나이의 반도 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장갑을 짜는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매일 우산을 들고 사는 삶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산씨의 사막은 광장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산씨와 내가 각자의 인생을 살면서 동시에 서로의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P25
그러면서 늙은 영주는 말했다. 인생사에는 행복한 일보다 불행한 일이 훨씬 많고, 불행을 자초하는 건 인간이지만 본능적으로 자초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잘못도 아니라고,
커다란 행복이라도 머무는 건 잠깐뿐이고, 불행은 작은 것조차 불씨를 오래남겨서 인간을 괴롭힌다고, 행복은 느리게 찾아왔다 빨리 가버리는 것이고, 불행은 빨리 다가왔다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아무리 행복한 일이 자주 생겨도 작은 불행이 차지하는 마음의 면적이 워낙 넓어서 불행하다 여기며 살 수밖에 없다고, 그게 인간과불행의 속성이라고, 그러면서 강한 어조로 결론을 내렸다. - P73
영주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행복은 왜 푸짐할 수 없나. 맛없는 불행은 왜 늘 후하기만한가.
"없어지긴 해." 늙은 영주가 다시 천장을 보고 누우며 말했다.
"어떻게?" "뒤지면, 간단하다면 간단하지."
그러면서 덧붙였다.
"기껏 죽어라 하고 열심히 살아봤자 다들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생일 뿐이야." - P75
"놀면서, 청춘을, 보낸 사람은, 노느라, 낭비했다고, 말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은, 안 놀고, 공부만 해서, 낭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우산이 내 우산에 부딪혔다.
"낭비란, 어떻게 살아도, 찾아옵니다. 열심히 살아도, 열심히 살지 않아도‘
열심히 살았지만 원치 않은 삶이었다면 낭비란 말이 맞았다.
나는 낭비했다. 낭비해서 이번 생은 실패로 간주하자고, 내가 바라는 모든 걸 다음 생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낭비하는, 겁니다. 다음 생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P141
나는 그 사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우산에 대해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우산을 들고 사는 불편한 생활에 대해..
직접 겪어보니 우산씨가 그동안 힘든 일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산이란 건 꽤 무거워서 오래 붙잡고 있으면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다. 물론 시선도 아팠다.
안 보일 뿐 우리 모두는 각자의 손에 우산 하나씩을 들고 사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불편한 것일 수도,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 P143
그와 비와 우산은 무슨 관계일까. 지금까지 지켜본 우산씨는 기다리기보다 일부러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기다리는 걸 그다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데 지쳐 이젠 기다림을 기다리는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분명 뭔가를 기다렸으나 시간이 오래돼서 지금은 그게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 기다리는건 결국 오거나 오지 않는다. 어떤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누구에거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 P175
당신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볕이 뜨거우면 그늘을 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한때라도.
어쩌면 그는 우산을 들고 기다려왔던 것을 드디어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기다린다. - P222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이 어떤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꿈을 꾸지 않더라도,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꼭 나쁜 삶은 아니라는 글이었다.
그것은 엄마가 읽은 외국 소설에 밑줄 그어져 있던 문장이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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