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총사 3D - The Three Muskete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각색은 영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아무래도 2차원적 활자를 3차원적 영상으로 옮겨야 하는 만큼 고유의 영상문법이 적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집중력은 90분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상영시간이 길어지면 영화사 수입에도 지장이 있다. 그래서 고전일 경우, 특히나 '삼총사' 처럼 다소 긴 장편일 경우 부득이하게 대체로 거대한 줄기만을 가져오거나 혹은 몇 인상적인 에피소드만 따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거의 재창조 수준의 각색이 이루어지기가 일수다. 그렇다고 각색이 원작보다 뒤떨어진다고만은 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는 그런 경제적 효용 못지않게 그 고전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바로 지금'이라는 동시대적 가치관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각색을 통해 오히려 고전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와 더불어 생생히 호흡하며 살아 뛰는 작품으로 거듭 날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각색이 상업적 이윤을 위한 한낱 소재이냐 아니면 인상적인 새로운 재해석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영화예술적 자의식이다. 즉 그들이 영화를 무엇으로 생각하냐에 달린 것이다. 

  

 

   삼총사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지금까지 이미 수많은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 까지 부지기수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익숙한 작품을 다시금 만든다는 것은 사실 모험에 가깝다. 다시금 만들려는 사람은 작품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고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명세다. 유명세는 양날의 검이다. 즉 유명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잇점은 있으나 그들에게 깊이 각인된 인상은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상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 주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새로이 만들어지는 작품은 그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된다. 즉, 인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그 작품을 처음 맛보았을 때 느껴던 환희를 재차 환기시켜줄 것과 그와는 반대로 그 인상을 넘어선 또 새로운 느낌 역시 맛보게해달라고 새로운 작품에게 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이 둘을 모두 다 만족시켜야 하는데 물론 이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너무 독창적이면 예전의 그 기분 그대로라는 '환기'를 줄 수 없어 원성을 살 것이고 그렇다고 '환기'에만 집중하면 허름한 재탕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들을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다시금 만들려는 작가는 이러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한다. 이러한 위험은 마치 '나는 가수다'에서 탈락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가수라고 불러지는 '김건모', '임재범'의 노래를 경연에서 부르게 되었을 때 그 가수가 직면해야 하는 위험과도 같은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작가는 우리말로는  '객기' 일본말로는 '곤조'를 부리게 된다. 자신이 믿는 영화의 정의에 따라서 말이다. 관객에게 새로운 삶의 비젼을 준다는 예술가적 '똘끼'로 충만한 작가라면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고전의 재창조에 목숨을 걸 것이다.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쉽고 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을 영화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전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데만 신경을 쓸 것이다. 즉, 우리는 고전을 다시 어떻게 만드는가를 통해 작가의 자의식마저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2011년 다시금 찾아온 '삼총사'를 만든 폴 W.S 앤더슨은 어떨까?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가 아주 개인적인 작가 영화에서 대중적인 상업영화로 진행해 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개인적인 작가영화라고 내가 평가하는 '이벤트 호라이즌' 마저 상업적인 영화라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앤더슨 감독의 개인 필모그래피만 기준해서 본다면 그 영화는 그래도 개인적 자의식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던 그가 대중적인 상업 영화로 넘어왔을때 무엇보다도 그를 그렇게 인도했던 것은 바로 '게임'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상업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일본의 게임회사 캡콥의 히트 게임 '바이오 하자드'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즉, 앤더슨에게 있어 지금 지속되고 있는 상업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중추는 감히 '게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 '삼총사 3D'도 마찬가지다. 삼총사가 소개되는 도입부분에서 우리는, 특히나 아라미스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게임인 '어쎄신크리드'를 떠올리게 된다. 액션의 연출이 참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된 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한 몫할 것 같다. '3D'는 아무래도 관객에게 3D체험을 많이 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진지한 연출 보다는 게임과도 같이 현란하면서도 과장된 연출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여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에서 애초에 원작의 맛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줄 '환기'의 쾌락은 포기해야 한다는 한계가 지워져 있다. '3D' 자체가 원래 관객에게 작품을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줌으로써 보다 쉽게 다가가려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앤더슨은 영화에 대해 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삼총사 3D' 역시 거기에 충실하여 원작과 많은 다른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원작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짝 비교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트레빌'의 부재다. 트레빌은 영화에서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총사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은 차마 말하지 못한 그 사람이다.(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분명 그러할 것이다.) 원작에서 트레빌은 총사대를 이끌면서 다르타냥에게 일종의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원래 원작은 그 트레빌과 추기경을 대칭구도로 하면서 트레빌에 속한 총사대와 추기경에 속한 친위대의 집단적 대립 구도다. 하지만 트레빌이 사라지면서 총사대 자체도 사라졌다. 즉 양강구도가 영화에서는 일강구도가 되면서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마저 능가할 정도로 프랑스 전체의 권력을 가지고 있음이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로 왜 추기경이 왕을 폐위시키려 하는지 그 동기는 약화되고 말았다. 사실 이미 왕은 추기경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게 총사대가 사라짐으로 인해 원작에서 총사대에서 만나서 결투에 이르게 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만남 역시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이 파리에 올라오자마자 그 삼총사와 오해에서 비롯된 만남을 가지게 된다. 재밌는 것은 아라미스와의 만남이다. 원작에서 다르타냥은 아라미스가 감추고 싶었던 한 아녀자의 손수건을 주워 돌려줌으로써 아라미스를 난처하게 만들고 결국 결투를 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주차 위반 딱지'로 바꼈다. 아마도 종이가 손수건과 비슷한 얇은 것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초반에서 모든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다르타냥이 고향에서 타고온 '버터컵'이라는 말이다. 살찌고 못생긴 말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다르타냥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화에서 말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그 말과도 같은 시골 청년 다르타냥에 대한 도시 파리인들의 무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원작에서 뒤마가 다르타냥으로 하여금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과 차이가 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원작과 영화는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달타냥이 그들과 악연을 맺게 한 것은 바로 로슈포르' 때문이었다. 그를 뒤쫓다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던 것이다. 

                                                                                

 로슈포르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앤더슨에게 가장 실망한 것은 로슈포르의 묘사다. 로슈포르는 악역이긴 하지만 삼총사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느끼겠지만 작품 내내 미지의 인물로 남아있으면서 다르타냥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죄의식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악마적 존재이다. 사실 로슈포르는 다르타냥에게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씨' 처럼 또 하나의 분신 즉 하이드 같은 존재인데 이 영화에서는 로슈포르가 원작에서 가졌던 그 풍부했던 의미를 모조리 제거하고 그저 비열하고 무자비함만 강조한 단순한 악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비단 로슈포르 뿐만 아니라 삼총사의 악역 전부에 미친다. 원작의 버킹엄 공작은 비록 적국인 영국인이지만(프랑스와 영국이 견원지간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꽤 합리적이고 귀족다운 풍모를 보인다. 더구나 악역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완전 정반대로 만들어버렸다.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영화 속 버킹엄은 그지없이 오만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버킹엄과 프랑스의 여왕이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 원작에서는 버킹엄과 프랑스 여왕이 연정이 싹터 사랑의 증표로 보내준 보석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리슐리외 추기경이 여왕을 몰아낼 심산으로 거짓으로 꾸며낸 증거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사실은 인간적이고 선한 인물들을 오히려 역전시키면서도 유독 밀레디만은 예외로 남겨둔다.  

 

   즉 원작에서 사랑 따위는 발톱의 때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자를 이용할 뿐인 밀레디가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을 구해주거나 아토스에게 여전히 애정이 있음을 내보이는 등 오히려 인간적 색채가 가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여성의 지위가 그 때보다 격상되었다거나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보자면 원작의 밀레디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밀레디는 다르타냥을 비롯 삼총사에게 전혀 이해불가하면서 속수무책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다르타냥마저 밀레디에게 유혹된다. 더구나 그녀는 다르타냥의 사랑인 콩스탕스를 죽인 장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밀레디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표적인 악녀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그 메데이아는 크리스타 볼프에 있어서 완전히 재해석된 바 있다. 밀레디 역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완전히 재해석될 필요가 있는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앤더슨이 이번 영화에서 그러한 것을 좀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인물의 뒤틀린 변형에는 한 가지 일관된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은 물론 감독 자신의 것으로 그것이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귀족적인 것'이다. 즉 앞에서도 말했듯 원작과 영화가 뚜렷이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은 바로 '귀족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다. 원작의 뒤마는 '귀족적인 가치'를 지지한다. 그는 특히나 귀족이 가지는 '명예를 소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르타냥에게 나타난다. 다르타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귀족'으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의 '귀족적인 것'을 무시했을 때 다르타냥은 언제나 발끈한다. 적국인 영국의 귀족이지만 버킹엄의 중후한 인간미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앤더슨에게 있어서 귀족은 이미 지난 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영화속 다르타냥에게 있는 것은 자존심 뿐이다. '귀족적인 것'은 오로지 배신과 술수 그리고 협잡으로만 연결될 뿐이다. 다르타냥의 자존심은 어차피 그러한 귀족들에게 무시당할 필요없다는 일종의 당당한 선언 같다. 때문에 앤더슨은 적이지만 귀족적인 풍모를 여전히 보여주었던 버킹엄은 비열한 모사꾼으로, 다르타냥의 또 하나의 분신이자 언제나 공정히 승부를 겨루었던 로슈포르는 비겁하고 무자비한 악한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바로 거기에서 뒤마와 앤더슨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였으며 때문에 삼총사의 이야기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삼총사'는 기존의 대강적인 줄거리만을 따왔을 뿐이고 그 밖의 배경이나 사건이나 그리고 인물은 모두 변형을 가했다. '3D'라는 한계상 오로지 관객에게 쉽고 빠르게 다가가는 것만을 목적했기에 원작에서 풍부했던 인간적 모습은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평면적이 되어버렸고 로슈포르나 밀레디의 묘사에 이르러서는 거의 안타까울 정도의 수준마저 보여주었다. 원작을 모른다면 그럭저럭 액션 영화로 즐길 수 있겠으나 원작의 팬이라면 글쎄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기 때문에 생겨난 한계인지도 모른다.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끝내 '트레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스포일러상 말할 수 없으나 가장 마지막 장면은(이것은 분명 '라로셸 포위전'을 다룬 것이리라) 앞으로 이 영화가 속편으로 이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작의 팬으로서, 이 영화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실망감은 다음 뒷 편이 나올때 까지 잠시 유보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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