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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Moneyb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아마도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샘 레이미가 감독했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사랑을 위하여(1999)'가 아닐까 생각된다. 거기서 프로야구의 투수이자 야구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주인공은 이제 마지막 게임을 치르고 있다. 영화는 노히트 노런의 퍼펙트 게임을 향해 완투하는 현재의 모습과 그의 과거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의 과오 실패 상처 등등으로 점철된 그의 과거의 모습을. 거기서 그는 마치 그러한 과거의 상흔을 지우려는 듯이 하나 하나 힘차게 볼을 던진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던지는 하나의 볼은 그 모두가 몰려드는 아픔과 죄의식을 지우려는 욕망의 몸짓이다. 그래서 그의 퍼펙트 게임은 그대로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샘 레이미가 이토록 인생과 야구를 조화롭게 연결시켰으면서도 결국 이 영화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은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를 못해서도 샘 레이미의 연출이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정작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의 그 상처를 아픔을 포용하려 든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극히 수비적인 인생에 대한 태도가 정작 주인공을 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으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다시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처럼 다시금 야구를 통하여 인생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고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쓰고 베넷 밀러가 감독한 '머니볼'이다.
이 영화는 머니볼 이론을 이용하여 약체이자 가난하기 그지없는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미국 야구 역사상 140년만에 처음이라는 '20 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이루게끔 만든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영화가 더 주의 깊게 다가가는 것은 빌리 빈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며 그것이 현재의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가 그 실패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홀로 타석에 들어서서 쳐낼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날아올 공을 기다리고 있는 고독한 타자 빌리 빈의 모습인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태도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애슬래틱스가 플레이 오프전 우승 여부를 놓고 싸우는 그 순간, 단장인 빌리 빈은 그 시합장에 있지 않고 텅 빈 구단 운동장 관객석에 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승이 좌절되자 카메라는 분노에 차서 홀로 자동차를 타고 이리저리 누비는 그의 모습을 담더니 그나마 있는 스타급 플레이어들 마저 줄줄이 트레이드 되고 현재 가용한 비용으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된 팀을 꾸릴 수 없음을 체감하는 그 순간에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각광받는 기대주였으나 시합에 참가하자마자 형편없이 몰락해 버린, 이제 빈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그 기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내내 애슬래틱스를 강한 팀으로 만드려는 그 모든 노력들이 모두 그 과거의 실패로 부터 달아나려는 노력에 다름아님을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드디어 이 영화가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그 장면이 바로 빌리 빈의 딸이 기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불러주는 노래를 빌리 빈이 듣는 장면이다. 그렇게 LENKA의 'THE SHOW'를 들으며 빌리 빈은 자신의 삶이 그 노래의 가사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I'm just a little bit caught in the middle
Life is a maze and love is a riddle
I don't know where to go, can't do it alone
I've tried and I don't know why
I'm just a little girl lost in the moment
I'm so scared but I don't show it
I can't figure it out, it's bringing me down
I know I've got to let it go
and just enjoy the show
어쩌면 이 가사를 토대로 빌리 빈의 삶을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랫말은 정확히 현재 빌리 빈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 노래를 듣는 가운데 뭔가 마음에 덜컥 와 닿아버린 듯한 표정을 빈이 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 '머니볼'은 빌리 빈의 노력과 성공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담아낸다. 빌리 빈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측불가능성'이다. 그것은 모든 스카우터로 부터 최고의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시합에 임해서는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준 자신의 과거 경험 그 자체에서 절절히 느낀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빌리 빈은 '머니볼' 이론에 매달려 오랜 시간의 경험과 감을 무시한다고 항변하는 자기 팀의 스카우터 앞에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는 하지말라고 당당히 말할 수까지 있는 것이다. 이 '예측불가능함'은 그의 두려움 근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가 브랜든의 머니볼 이론에 매달리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출루율'이라는 드러나는 기록에만 의지하는 머니볼 이론은 오로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넘쳐나는 이 상황에 있어 그나마 '기록'이라는 예측 가능한 좌표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문득 홀로 밝혀진 등대 불빛과도 같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자료들을 말이다. 바로 그랬기에, 그 자신 가장 두려워하는 예측불가능에 그나마 구원의 빛을 던져준 것이었기에 그는 그 누구의 반대와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렸던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빌리 빈이 얼마나 예측불가능성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예측불가능성을 벗어나려 머니볼 이론의 매달림이 과거 상처의 치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또 다른 것으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영화는 대표적으로 20연승이라는 140년만의 대기록이 막 이루어지려는 현장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시합에 지는 것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당연히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빌리 빈은 그 어떤 시합도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을 언제나 홀로 차 속에서 보낸다. 카메라는 운전하는 그를 화면에 꽉 차도록 담음으로써 그 '홀로'라는 고립감을 더욱 더 강조한다. 20연승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에도 빈은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축하한다고. 라디오를 켜니 어마어마한 점수 차이로 자신의 팀이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처음으로 직접 시합을 관람할 생각을 하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자 갑자기 하늘을 흐려지고 자신의 팀이 내리 점수를 내주기 시작한다. 결국 패배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빈은 경기장을 나오고 만다. 이러한 영화의 묘사는 빌리 빈의 성공기를 다루었다면 굉장히 이상한 묘사이다. 20연승이란 머니볼 이론의 최종적 승리나 마찬가지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데 영화는 그 어떤 흥분도 전해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빌리 빈이 대단히 불운한 남자로구나 하는 인상만 심어줄 뿐이다.
즉 영화는 이렇게 또 한번의 (빌리 빈 개인으로서는) 좌절의 순간을 마련함으로써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에 매어달리는 것이 그저 환자가 순간의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맞듯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 내내 빌리 빈에게 있어 그 과거의 상처를 영원히 극복할 그 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때때로 환기되어 온 존재를 집어 삼키는 상처로서...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 했었던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머니볼'이 새삼 빌리 빈의 이야기에 주목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깊이 남아있는 9.11의 기억이다.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었고 여전히 환기되는 상처였다. 거기다 2008년에 서브 프라임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위기로 인한 아픔 또한 있다. 그렇게 만연된 아픔 널려진 상흔... 영화는 새삼 그것을 바라볼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상처는 이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로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영화는 '머니볼'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하나의 본질로 간직한 빌리 빈의 신체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그가 단 한 순간도 과거의 그 때 섰었던 타석으로 부터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차속에 홀로 고립되어 운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반복함으로써 말이다. 영화가 정말 묻고자 하는 것은 왜 그가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냐는 것이다. 거기에 영화는 바로 그가 그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지우려고만 애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샘 레이미의 케빈 코스트너가 그랬던 것 처럼... 지우면 치유가 될 줄 알았던 그의 착각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바로 지금 미국의 태도가 아닌가 묻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문제 앞에서 현재 미국은 그 고통들을 우리가 껴안으려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외부로 전가시킴으로써 애써 잊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것을 영화는 말 한 마디로 단칼에 해고되고 마는 선수들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내부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이너스가 되는 존재를 외부에 떠넘김으로서만 유지되는 시스템이 바로 미국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너무 멀리나아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상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떡해야 하는가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 영화는 단적으로 LENKA의 노래를 끝에서 다시 들려줌으로써 정리한다. 삶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그건 그냥 잠정적 과정에 불과하다. 상처 또한 마찬가지다. 상처가 상처로 있는 것은 그것을 상처로만 기억하는 우리들 때문이지 그 상처가 장차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제레미 브라운 2003년 5월의 야구 경기 장면의 의미이다. 신체적 여건상 절대 도루를 해서는 안되는 그였지만 그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도루를 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수비진에게 걸려 자신의 한계를 똑똑히 깨달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홈런을 쳤었으니까... 제레미 브라운이 스스로 인정했었던 한계가 바로 빌리 빈이 가지고 있던 상처에 대한 의미였다면 그가 자기도 모르게 쳐 버린 홈런은 장차 그 상처의 의미가 어떻게 나아갈지 모른다는 것의 비유인 것이다. 또한 브라운이 정작 누군가 알려줘서 그 사실을 알았듯이 우리로서도 현재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두를 볼 수 있는 관객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는 한은...
그러므로 영화는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측불가능성은 보기에 따라 빌리 빈에게 두려움의 근원으로도 또한 희망의 근거로도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상처 또한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관객의 자리에 앉지 않는 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선수일 뿐이라고... 이 모든 삶의 의미는 결국 관객의 자리에 서는 날, 그렇게 인생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신의 자리에 서는 날 알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예측불가능으로 인한 두려움이든 상처든 그대로 인정하고 그저 삶이란 쇼를 즐기라고...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반복되는 'and just enjoy the show'는 그래서 영화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어린 전언이자 지금 아픔의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