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세상 일이 답답할 때가 없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도 24시간 내내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추스릴 뭔가를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떻게든 외부의 자극으로 틈틈이 비는 시간들을 메우려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일을 만들고 찾게 된다. 그럴 경우 나는 늘 두 가지의 탈출구를 찾게 된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머리만 쓰는 미스터리를 읽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몰두할 만한 미스터리를 찾았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 구라치 준의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었다. 

 

 

 

  구라치 준은 벌써 데뷔한 지가 20년이 넘는 중견작가인데도 그렇게 작품이 많지 않은 과작 작가이다. 일본에서는 냉장고가 비어야 비로소 작품을 쓴다는 말까지 농담 삼아 떠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과작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치밀한 논리 전개만을 주 무기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치밀한 논리적 전개 만으로 하나의 미스터리 작품을 형상화하기란 참으로 힘든다. 더우기 그게 장편이라면 말이다. 그런데도 구라치 준은 해설과 옮긴이 글 빼고 총 464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을 오로지 하나의 논리적 매듭으로 묶어내고 있으니 그 하나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어찌 아니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 책 앞에 표기된 함랑표에 따르면 

  이렇게 다른 건 몰라도 논리정연이 만점을 상회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더 도전의식이 불타오른다. 그래서 들었다. 사각의 링으로 들어가는 권투 선수 처럼 반드시 이겨주리라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구라치 준이 만들어 놓은 눈 덮인 겨울 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작품이다. 

  새로이 구입한 산장을 색다른 레져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한 부동산 업자가 광고 효과를 내기 위해 미디어들의 총아들을 불러 모은다. 늘 그렇듯이 저녁 만찬을 즐거운 가운데 만끽하고 수순에 의해 당연히 폭풍이 갑자기 몰아쳐 다음 날 산장은 고립된다. 그리고 그 고립된 날 아침. 타살된 시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견된다. 

  너무도 전형적인 구성... 그래서 뭐라 별달리 붙일 말도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뻔한 구성이라 왠지 더더욱 구라치 준의 자신만만한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그는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봤어? 자, 별다를 거 없지? 너무도 뻔하지?  하지만, 난 이 정도로도 충분히 너와 승부할 수 있어. 이렇게 아주 뻔한 구성으로도 널 멋지게 넉다운 시킬 수 있단 말이다아~!" 그리고 후렴 처럼 달라붙는 그의 우렁찬 웃음소리...  

  이 상상이 그저 공연한 공상은 아닌 것이 구라치 준은 그것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거기에 더해서 아예 새로이 시작되는 장마다 간단한 안내까지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1장이 시작되는 7 페이지 맨 위에는 

일단 이 작품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화자이자 이른바 왓슨 역이다. 즉 모든 정보를 독자와 공유하는 입장이며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더하여 시체가 발견되는 장이 시작되는 163 페이지에는 

  하룻밤이 지나 시체가 발견된다. 살해 방법은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이고 부자연스러운 트릭 따위는 사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이렇게 모든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안내문이 미리 나오는 것이다. (해설을 쓴 decca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일흔 다섯마리의 까마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쓰츠키 미치오의 전매 특허 스타일이라고 한다. 구라치 준 자신도 작품의 말미에 그에 자극을 받아 썼다고 솔직히 밝히고 있다.) 이거 정말 패를 모조리 보여줘도 이길 수 있다는 작가의 호연지기가 아닐 수 없는데 요즘 우리나라 호연지기의 갑으로 불리는 그 분보다 더 한 호연지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정말 한 아마존 독자의 서평 처럼 순수한 직구로만 승부하는 작품이다. 

   "젠장! 난 직구밖에 못 던져! 쳐 볼테면 쳐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는 투수를 앞에 두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인 것이다. 

   방망이를 굳게 잡고 투수를 노려보며 난 이렇게 말한다. 

   "좋다. 싸워볼 만 하군. 이 승부 받아주마."  

   그러자 구라치 준이 씨익 웃으며 몸을 크게 뻗는 듯 하더니 순간적으로 공을 날린다. 

   과연 그 결과는...? 

   젠장, 졌다. 완패했다. 설정 같은 거 무시하고 오로지 논리로만 겨뤘는데 보기좋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일본 작가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나라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독자들 뒤통수를 때리는 트릭들을 잘도 개발해 내는 것인지 놀랍다. 트릭이라 말했지만 진짜 논리의 직구다. 여기엔 아무 변칙이 없다. 하지만 그 직구를 읽어내야 하는 내 눈이 이미 무엇에 의해 잘못 보도록 씌여져 있었다면...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투수와의 본격 대결 전에 내가 우연히 투수와 포수가 타자를 속이기 위해 서로 약속한 신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주웠다고 해보자. 나는 물론 기뻐할 것이며 이제 투수가 그 어떤 속임수를 쓴다고 해도 내가 다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니 시합에 임하는 마음 역시 느긋할 것이다. 아마 아이의 재롱을 보는 부모의 느긋함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쪽지는 투수가 일부러 내 앞에 떨어드린 것이었고 나는 이미 거기서부터 투수에게 속고 있었다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이런 작품이다. 거짓없는 하나의 커다란 직구와 그 직구를 전혀 다르게 읽게 만드는 유발된 사소한 착각. 하지만 그 착각이 어디서 비롯될 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이 또 이 작품의 매력이다. 

   당신은 구라치 준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대신 멋진 홈런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을까?... 

   미스터리 해결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라면 당장 도전해 보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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