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간지 <황해문화 117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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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291쪽)
작가는 물음을 제기하는 존재지 선명한 답을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다.(294쪽)
작가에게 “고정된 믿음”은 그의 창작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작가가 마주하는 수많은 사건, 세계, 생명체 앞에서 그런 믿음은 공허하다. 작가는 자신이 마주한 타자의 세계에 얼마나 더 접근할 수 있을지를 묻는 존재, 더 나아가 잠시라도 그 타자와의 부딪침을 통해 새로운 감각과 사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존재다.(297쪽)
최종적인 답이 제시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어디선가 들뢰즈가 썼듯이 작가는 의견opinion을 갖지 않는다.(296쪽)
- 오길영(문학평론가), ‘고정된 믿음은 위험하다’, <황해문화 11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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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서 ‘작가는 의견opinion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점이 칼럼과 다른 점이다. 칼럼은 필자의 의견opinion을 보여 주는 글이므로 의견opinion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필자가 물음을 던지고 답을 쓰는 칼럼도 있을 정도로 칼럼은 메시지가 뚜렷하다.
그러나 칼럼의 필자라고 해서 언제나 고정된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이 칼럼에선 이런 의견을 내놓았지만 시간이 지나 다른 칼럼에선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인간은 생각이 변할 수밖에 없고 마땅히 변해야 한다. 생각은 고여 있는 물이 되어서는 안 되고 흐르는 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에밀 시오랑의 글이 떠오른다. “착각에 빠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확신을 하나하나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2.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년 제10회>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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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희망이란 때때로 멀쩡하던 사람까지 절망에 빠뜨리곤 하지 않나? 아니, 오로지 희망만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희망은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우리들은 대체로 그런 탐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자주 진이 빠지고 영혼의 바닥을 보게 되고 회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237쪽)
- 정영수, ‘우리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년 제10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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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이면으로 읽힌다.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의 희망으로 구원을 받기도 하지만, 희망으로 인해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식으로 돈을 벌기 위해 희망을 갖고 투자했다가 빚을 지는 일이다.
포기할 줄 몰라서 희망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망칠 수 있으니, 포기가 필요할 땐 깨끗이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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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의 분위기가 그렇게나 완벽했던가? 그들이 정말 그렇게나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나? 어쩌면 내가 그들을 실제보다, 그들이 그랬던 만큼이 아니라 그랬으면 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꾸민 기억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이 아닐까?(241쪽)
- 정영수, ‘우리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년 제10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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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란 믿을 게 못 된다. 우리는 기억에게 사기를 당하곤 하지 않는가.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요술을 부려서 실제 그림을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놓은 걸 모르고 그것을 우리는 정확한 기억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으리라.
기억은 착각, 사기, 거짓말, 엉터리.
내가 기억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내 일기장을 보고 깨달은 게 있어서다. 일기장에는 어떤 날 일어난 일에 대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달랐다. 물론 내 기억이 엉터리였다. 이때부터 내 기억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의 기억이라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3.
공자의 <논어>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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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어서 인하지 못하다면 예(禮)를 지킨들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되어서 인하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엇하겠는가?”(52쪽)
각주 : 인(仁)은 사람들 간의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그러한 관계를 이루어 내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52쪽)
- 공자, <논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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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훌륭한 운동선수라 할지라도 사람답지 못하다면 훌륭하다고 할 수 없고, 위대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사람답지 못하다면 위대하다고 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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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루어진 일은 논란하지 말고, 끝난 일은 따지지 말며, 이미 지나간 일은 허물하지 않는 것이다.“(62쪽)
- 공자, <논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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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지난 10월 29일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수사가 종결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앞으로 재수사를 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면 끝난 일이라도 재수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배우자의 외도가 있었고 이를 용서하기로 했다면 공자의 말대로 끝난 일은 따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4.
미셸 드 몽테뉴의 <에세 1>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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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마음은 붙잡을 것을 주지 않으면 제 안에서 길을 잃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기대어 작용할 만한 무언가를 마음에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원숭이나 강아지에게 애착을 갖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 안에 있는 사랑하려는 마음이 합당한 대상을 얻지 못해 허망하게 있느니 차라리 시시한 가짜 대상이라도 만들어 내는 것이라 했다.(64~65쪽)
- 미셸 드 몽테뉴, <에세 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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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진 연인이 있다면 그를 잘 잊는 방법은 ‘새 연인이 생기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쏟았던 에너지를 다른 데로 쏟지 않으면 마음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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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무슨 까닭이든 꾸며 내 붙여 보려 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옳건 그르건 덤벼들 대상이 필요해서 아무것에나 분풀이를 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65쪽)
- 미셸 드 몽테뉴, <에세 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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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아 내가 다음과 같이 고쳐 써 봤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무슨 까닭이든 꾸며내 보려 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옳건 그르건 덤벼들 대상이 필요해서 아무것에나 분풀이를 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은 노여움을 애매한 다른 데로 옮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화가 났을 땐 화풀이를 해야 하므로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하다. 실연을 당한 사람이 노여움을 주체할 수 없어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경우 오로지 복수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뭐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가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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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평민들이 하던 이야기가 있다. 이웃 나라의 한 왕이 하느님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자 복수를 맹세하고는 십 년 동안 기도도 하지 말고, 그분에 대해 말하지도 말며, 자기가 권좌에 있는 한 그분을 믿지도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이야기를 통해 그려 보이고자 한 것은 어리석음보다는 이야기 속 나라의 타고난 오만이었다. 그 둘은 언제나 한 쌍을 이루는 악덕이지만 사실 그런 행동은 어리석음보다는 불경(不敬) 쪽에 좀 더 가깝다.(66~67쪽)
- 미셸 드 몽테뉴, <에세 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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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어리석음과 오만은 한 쌍이라는 것’이다. 즉 오만한 사람은 어리석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내가 동의하는 것은 오만한 사람은 대체로 어리석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도취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놓치는 수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 오만한 자가 될 수 없으리라.
5.
박완서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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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편견이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걸 나타내는 목소리까지도 우선 배타적이다. 남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배제하려면 제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다. 남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태세가 돼 있으면 그건 이미 극단적인 편견이 아니다. 극단적이 편견이 때로는 옳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게 혐오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 폐쇄성 때문에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84쪽)
- 박완서, ‘특혜보다는 당연한 권리를’,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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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으니 버트런드 러셀의 글이 떠오른다. “사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취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식인이란 이러저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 – 1935>에서.)
무엇이든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될 것.
(‘교조적’의 뜻 :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을까? 한 예로 살인이 나쁘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일까? 전쟁에서는 상대국의 수장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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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을 피하는 건 더러워서일 뿐 무서워서가 아니라는 말은 자신에 대한 변명은 될지 몰라도 여럿이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 대해선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다. 너도나도 똥을 피하기만 하면 이 세상은 똥통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똥은 피할 게 아니라 먼저 본 사람이 치우는 게 수다.
인간답게 사는 길도 나만 인간답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인간답지 못하다. 이웃이 까닭 없이 인간다움을 침해받는 사회에서 나만은 오래오래 인간다움을 지키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어리석음이다.(85쪽)
- 박완서, ‘특혜보다는 당연한 권리를’,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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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만 인간답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아닐까 한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채 본인만 올바르게 살겠다는 것이므로. 타인에 대해 배려하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므로.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곤 한다. 어떤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때 반박하고 나서는 것이 최선인지 아니면 그때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상대편의 주장에 반박했는데 상대편이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말다툼을 이어 가는 것도 마음을 피곤케 하는지라 결국 그냥 지나치는 쪽을 택할 때가 많다. 충돌을 피하는 것이다. 상대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다치기 싫다는 이기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이런 나의 마음 자세에 대해 점검해 보게 된다. 충돌을 피하는 것만이 최선인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