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당신의 인생은 멋지다는 니나(여자)의 말에 트리고린(남자)은 소설가로서 느끼는 고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니나 : 당신의 인생은 멋져요!

트리고린 : 대체 뭐가 멋지다는 겁니까? (시계를 본다) 이제 그만 가서 글을 써야 합니다.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서……. (웃는다) 말하자면 당신은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겁니다. 그래서 난 동요하고 얼마간 화가 나기 시작한 거요. 나의 멋지고 산뜻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사람이 밤이고 낮이고 간에 생각하면, 예컨대 달에 대해 생각하면 강제된 표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게도 나름의 그런 달이 있어요. 하나의 성가신 생각, 즉 나는 써야 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밤낮으로 나를 괴롭힙니다……. 중편소설 하나를 끝내자마자 무슨 일인지 벌써 다른 중편소설을 써야 하고, 그다음엔 세 번째, 그 후엔 네 번째 중편을……. 역마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끝도 없이 쓰는 겁니다. 다른 방도는 없어요. 대체 여기에 무슨 멋지고 산뜻한 게 있다는 건지, 묻고 싶군요. 오, 얼마나 소름끼치는 인생입니까! 당신과 함께 있어서 흥분하고 있지만, 나는 매 순간 끝내지 못한 소설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있습니다. 저기 피아노를 닮은 구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소설 어디선가 써먹어야지, 하고 말이오. (중략) 작품을 마치고 나면 극장에 가거나 낚시하러 달려갑니다. 거기서 쉬면서 잊어버렸으면 하는 거죠. 그런데, 아닙니다. 머릿속에 이미 묵직한 철제 포탄이 굴러다니는 겁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올라서 나를 책상으로 잡아당기고, 그러면 서둘러서 다시 쓰고 써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언제나 늘 자신으로부터 편안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인생을 파먹고 있다는 걸 느끼고, 어딘가 있는 누군가에게 줄 꿀을 얻으려고 가장 좋은 꽃에서 꽃가루를 모으고, 꽃잎을 따고, 꽃의 뿌리를 짓밟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정말로 미친 게 아닌가요? 

-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426~427쪽.

  

위의 글을 읽노라면 체호프 자신이 작가로서 겪은 고충을 듣는 것 같다. “나는 써야 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밤낮으로 나를 괴롭힙니다…….” 이처럼 소설가 트리고린은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하지만 심심하지 않으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퇴직할 나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소설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좋은가. 


“저기 피아노를 닮은 구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소설 어디선가 써먹어야지, 하고 말이오.” 이 점이 나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내가 글을 쓸 때 써먹어야지, 하는 것들을 책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만약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만큼 독서에 빠져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독서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키우고 싶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 글쓰기 취미가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 지루할 틈이 없고 노년이 되어도 소일거리가 있으며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

- 혼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아 가족 간, 친구 간 불화가 생길 여지가 크지 않다.  

- 책을 유독 좋아하다 보니 다른 것들 이를테면 명품백이나 고급 자동차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무엇을 가지지 못했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단점이 있다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니 허리 디스크나 소화 불량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스트레칭과 걷기 운동을 한다.



공연 전에 2층 객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예술의 전당에 무용 공연을 보러 갔다. 희곡과 공연과 가까워지기로 했다.




..............................

의성 산불이 빨리 진화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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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27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부럽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하고 싶으면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하고. 노후의 직업으로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요즘은 눈이 안 좋으니까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싶기도하더라구요. 또 하루는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ㅠ
책 넘 예쁜데 벽돌책이네요. 들고 다니기 어렵겠어요.

페크pek0501 2025-03-27 11:51   좋아요 0 | URL
능력만 있다면 작가란 직업은 늦잠을 잘 수 있고 좋지요.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출근하는 게 힘들잖아요. 그렇다고 돈을 안 벌 수는 없고...
눈이야 뭐 안경점에 가서 안경 맞추면 문제 끝, 이죠.
저 벽돌책 말고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체호프 희곡, 있으니 그걸 추천합니다. 책값도 반, 무게도 반, 이에요. 저 책은 희곡 동아리에서 지정된 책이라 샀어요. 무거워서 둘로 분책 했어요. 분철^^

고양이라디오 2025-03-2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취미 장단점이 공감이 많이 갑니다ㅎ 소설가의 고충도 어떻게 보면 단점, 반대로 보면 장점이 될 수 있네요. 항상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5-03-27 13:39   좋아요 1 | URL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대요. 일단 두뇌에 자극을 주잖아요. 두뇌 자극이 전혀 없다면 생각을 안 해 치매에 걸릴지 몰라요. 우린 머리를 써야 하고 그러려면 걱정이나 해결할 문제가 있어야 하죠. 인간은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어요. 독서광들은 남들이 관심 갖는 물건엔 무관심한 경향이 있을 거예요.^^

페넬로페 2025-03-27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글 쓰는 이유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5-03-28 12:38   좋아요 1 | URL
맞아요. 돈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면서 혼자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친정어머니 보니깐 노후엔 할 일이 있어야겠더라고요. 코로나로 노인정이 잠기니 얼마나 지루해 하시던지... 요즘도 노인정 문을 열지 않는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지루하다고 불평을 하세요. 그러면 제가 가곤 하죠.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것 하나쯤은 꼭 갖고 있어야 합니다.^^
 

체호프의 희곡 중 ‘갈매기’라는 작품이 있다. 청년 트레플료프의 어머니인 아르카지나는 여배우이고, 소린은 트레플료프의 외삼촌이다. 소린이 아르카지나에게 말한다. 아들한테 돈을 주라고.


아르카지나 : 그 아이가 안됐어요! (생각에 잠겨) 취직이라도 하면 어떨까요…….

소린 : (휘파람을 분다. 그다음에는 주저하면서) 내가 보기엔 가장 좋은 것은 네가……. 그 아이한테 돈을 주는 거야. 무엇보다도 사람답게 옷을 입어야 하니 말이야. 보렴. 3년이나 똑같은 프록코트를 입고 다니고, 외투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잖아……. (웃는다) 젊은 녀석이 흥취 있게 노는 걸 막을 일은 아니잖니……. 외국으로 나가도 좋고……. 돈도 많이 들지 않으니까.

(중략)

아르카지나 : 그래요. 돈은 있어요. 하지만 저는 배우예요. 몸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도 파산할 지경이라고요.(436~437쪽)


아르카지나는 몸치장에 쓸 돈은 있어도 아들의 옷을 사 줄 돈은 없다고 한다. 대사만으로도 어떤 어머니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니나’라는 젊은 아가씨는 ‘트리고린’이라는 유명 소설가를 흠모한다. 둘이 친한 사이는 아니다. 


니나 : (주먹을 쥔 한쪽 손을 트리고린 쪽으로 내밀면서) 짝수일까요, 홀수일까요?

트리고린 : 짝수.

니나 : (한숨 쉬고서) 틀렸어요. 내 손에는 한 알의 완두콩이 있을 뿐이에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점을 쳐본 거예요. 누가 조언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트리고린 : 그건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오.(434쪽)


위의 대화를 보면 니나가 트리고린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고, 니나가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희곡은 대사에 인물에 관한 정보를 숨겨 놓는다. 니나가 트리고린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자기 손 안에 든 완두콩의 개수가 짝수인지 홀수인지 맞춰 보라는 물음을 트리고린에게 굳이 던질 필요가 없다. (체호프가 왜 이런 장면을 넣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의 행동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행동의 숨은 뜻을 모르면 희곡을 읽는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말과 행동과 몸짓에는 정보가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직장의 여자 동료에게서 금요일 저녁에 전화가 왔는데 남자가 전화를 받으려다가 전화기를 잘못 건드려 전화가 끊겼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 다 미혼이다. 이때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 궁금해하며 전화하지 않는 남자라면 상대편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삼 일 후인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서 둘이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남자에게 그날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묻는다. 남자는 전화를 받으려다가 전화기를 잘못 건드려 끊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여자가 상대편이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 안심이 된다면 그녀가 잘못 해석했다고 본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남자라면 전화가 끊기고 바로 액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에게 바로 전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만날 때까지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에 대해 무관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거나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한 이유를 묻게 돼 있다. 둘이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희곡을 읽을 때도 등장인물의 말, 행동, 몸짓을 꼼꼼히 살피며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는 것이 된다. 이 맛에 희곡을 읽는다.



니나 : 작가나 배우가 되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저는 가까운 사람들의 미움, 가난, 환멸도 견디겠어요. 다락방에 살면서 호밀 빵만 먹고, 자신에 대한 불만과 스스로가 모자란다는 고통도 감수할 거예요. 하지만 그 대신 저는 영광을 요구할 거예요……. 진정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영광 말이에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머리가 빙빙 돌아요……. 아아!(430쪽)


이 글에서 작가는 명성을 얻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될 수 있는지 묻는 듯하다. 한 예로 어느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으나 안티팬들의 비난에 시달려 마음이 괴롭다면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안티팬들의 비난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들이 있지 않았던가.   







두꺼운 책이라 무거워 분책을 하였다. 비용은 6천원. 



....................

더 써야 하는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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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3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의 시대에도 홀짝이 있었군요.

페크pek0501 2025-03-13 23:27   좋아요 0 | URL
1860년에 출생한 체호프이니 옛날이죠. 잉크냄새 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시대에 홀짝이 있었던 게 신기하군요. 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좋은 발견입니당~~

감은빛 2025-03-14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갈매기 라는 희곡은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있어요. 제가 부산 사람이라 한때 부산갈매기 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래서 갈매기 라는 단어를 접하면 반가워요.

요즘 잇따른 연예인들의 소천 소식에 마음이 좋지 않네요.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만요. 말씀처럼 명성만을 바라보고 살았다면 인생의 다른 면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이 본인이 그런 삶을 선택한 거라면 또 옆에서 뭐라고 할 권한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참, 답답한 시절을 지나고 있네요. 이게 현실인가 싶다가도, 확실히 꿈은 아닌데. 그럼 현실이 맞네. 이러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눈 감고, 귀 막고 살고 싶은 유혹에 자꾸만 빠집니다.

페크pek0501 2025-03-14 12:36   좋아요 0 | URL
갈매기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저도 읽어 보기 전에 들어 본 희곡이었어요.
부산 갈매기이시군요.ㅋ
저는 악성 댓글이나 비난이 쏟아지면 사이판이나 괌 같은 곳에 가서 아니면 국내라도 한적한 섬에 가서 인터넷 연결을 끊고 칩거하며 책이나 읽으며 산책이나 하며 맛있는 것 사 먹으며 한 달쯤 시간을 보내고 오면 자기에 대한 비난이나 소문은 사라져 있을 거라고 봐요. 타인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 가지 않거든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면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르지요.
답답한 시절이라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 많다는 기사를 본 것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요..^^

희선 2025-03-14 0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은 별로 못 읽었네요 이 책 끝까지 못 봤어요 읽어야지 하는 생각만 했네요 나오는 사람이 하는 행동과 말 그리고 몸짓을 잘 봐야 알 수 있군요 페크 님은 그런 걸 잘 보시는군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3-14 12:39   좋아요 1 | URL
저도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정도 읽은 것 같아요. 소설에 비해 희곡 읽기는 쉽지가 않아요. 등장인물이 많아 헷갈리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할 때의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 다행히 저는 오디오북을 가지고 있어 들으며 종이책을 읽으니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이럴 땐 오디오북이 좋습니다. 오디오북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그레이스 2025-03-14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철!
과감하시네요^^

체호프 대표 희곡만 읽고,,, 단편들 읽고 있어요
읽을수록 넘 좋아요.^^

페크pek0501 2025-03-14 12:41   좋아요 1 | URL
아, 저 책이 제가 속한 동아리의 교재랍니다. 들고 다녀야 해서 무거워서 분철, 해 봤어요. 비용이 들어 그렇지 편한더라고요.
체호프 단편집을 두 권 읽었는데 다 좋았어요. 민음사 것과 펭귄 클래식 것을 읽었는데 겹치는 작품이 있긴 했어요. 체호프는 단편의 천재, 라고 봅니다. 희곡은 아직 다 읽지 못해 잘 모르겠어요.^^
 












공지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전자책이 있는데 읽어 주는 기능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완독했다. 그런데 꼼꼼히 한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아 종이책을 어제 샀다. 좋은 글이 많다.  


한 번뿐인 내 인생 이렇게 살다가 가기 싫다 하고 마음먹은 이후,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겠다 마음먹은 이후, 내게 또 하나의 변화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과 우정을 맺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사적 관계도 끊어내는 일이었다. 나중에는 전화나 문자도 받지 않았다.(161쪽)


아주 쉬운 예를 들면 “너 의외로 다리가 굵다”라든가 “너 얼굴이 생각보다 커”, “어머 배 나온 것 좀 봐. 왜 그렇게 살이 쪘어. 얼른 빼!”라든가, “너 성질 좀 안 좋잖아”, “너 머리 그렇게 자르지 마. 이상해”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멀리했다.(161쪽)


“언니 그러면 주변에 사람 아무도 남지 않을 거예요. 그걸 다 끊어내면 혼자 남아요.”

그러면 나는 대답했다. 

“그런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나 자신을 폄하하는 말들과 괴로워하며 싸우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나아요.”(161~162쪽)


“듣기 싫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 너를 위해 이러는 거야”라는 사람은 “듣기 싫은 이야기를 왜 굳이 해야겠니? 나는 성녀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라는 말도 없이 그냥 차단했고, “저기 내가 좀 심한 말을 해야 할 텐데 괜찮겠니?” 하고 접근해 오면 “아니 괜찮지 않으니까 절대 하지 마세요!”라며 응수했다.(162쪽)


그냥 되었던 것 아니다. 연습했다.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렸고, 그리고 기회가 오면 떨리지만, 이렇게 하면 내가 교양 없고 예의 없고 속 좁은 사람이라고 혹은 꼰대라고 욕할까 봐 겁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다.(162쪽)


⇨ (이에 내가 덧붙여 말한다면) 그런 기분 나쁜 말을 하는 곳에 나를 두고 싶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나는 소중하니까.


이런 글을 읽으면서 왜 내 속이 시원해졌는지 모르겠다. 저자에게 잘했네요,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굳이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사람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 


누구나 남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한두 번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끊는 것이 낫다고 본다. 


나의 경우 한 친구의 어떤 단점이 못마땅해서 내가 잔소리를 하는 악역을 맡고 싶지 않아 끊어낸 적이 있다. 만나면 내가 상처를 주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지금도 연락이 오면 따뜻하게 대해 주고 내가 연락을 하진 않는다.


늘 기분 좋은 말만 들을 수는 없을 테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상처 받는 걸 감수하는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행운이라 할 만하다.  




올해 2월에 산 책. 



....................

어제 외출했더니 오늘 일이 많아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을 했다. 집안일을 다 하고 나서 글을 좀 쓰려 했는데 매일 칼퇴근하는 남편이 귀가했다. 내가 안방에서 내다보지 않으니 거실에서 “이리 오너라” 한다. 웃겨. 자기가 왕인가? 거실로 나가 보았다. 장을 봐 왔다고 한다. 동태탕을 사 와서 끓이기만 하면 되었다. 덕분에 편히 그리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장을 보는 것은 그의 취미.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니 이 시간이다. 이제 누워 쉬고 싶어 이쯤에서 글을 마친다. 다음에 많이 써야겠다. 매일 일을 미루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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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28 2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설적이게도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관계를 끝장낼 용기가 필요합니다. 관계를 끝장낼 용기란 결국 상대방과 동등한 독립적 인격체로서 선다는 의미죠.

페크pek0501 2025-02-28 21:18   좋아요 1 | URL
저자는 ˝사람하고 헤어지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146쪽)라고 쓰기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장점에 대해 들어야 한다˝(154쪽)라고도 썼더군요. 제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나 지적을 받은 경험이 있던 터라 공감했어요.
관계를 끝장낼 용기가 그런 거군요. 앞으로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많이 배우려 합니다.
고통만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는 글이 와 닿았어요. 제가 바꿔 표현하면 약자가 되어 본 자만이 성장한다. 가 되겠어요. 약자의 위치에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성장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5-02-28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만날 때마다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은 그냥 안 만나고 서서히 끊어내는 쪽이에요. 싫은 사람을 계속 만나는건 자기 학대같아요. ㅎㅎ
장봐와서 이리 오너라 하는 남편 너무 멋져요. 우리 남편도 장 봐오면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해도 다 봐주겠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5-03-01 13:04   좋아요 1 | URL
아, 자기 학대일 수 있겠네요. 예전엔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다 받아들이기로 하며 산 것 같은데 이젠 걸러 낼 것은 걸러 내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다는 생각이에요.
이젠 나이 들어 집안일을 혼자의 힘으로 하기가 벅찬데 청소, 장 봐 오기 등을 남편과 나눠 하니 좋긴 해요.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님의 표현이 재밌습니다.^^

2025-03-01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3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4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6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6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6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5-03-01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따뜻한 음식이 좋은 시기인데 동태탕 맛있게 드셨나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편안한 사이에서는 더 그렇고요.
사람을 만날 때, 끝나고 돌아올 때 좋은 기분이 드는 사람을 만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조금씩 느낌이 다르긴 해요. 좋은 사이를 오래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 이전에는 가까운 사람도 시간 지나면서 멀어지고, 전보다 가까워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인간관계는 참 어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5-03-03 12:39   좋아요 0 | URL
동태탕이 매콤해서 맛있었어요. 가끔 음식을 사 오면 편하지요.
만나고 돌아올 때 좋은 기분이 드는 사람을 만나라, 좋은 말씀이네요. 진짜 그런 것 같아요. 오늘은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네요. 나이가 들고 나니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좋은하루보내세요. 댓글 고맙습니다.^^

모나리자 2025-03-03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공감하고 웃음짓게 하는 글입니다. 원래 누구나 나이가 더해질수록 관계 맺는
사람이 적어진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유튜브 영상에도 인간관계에 대한 영상이
많이 나오더군요. ‘혼자가 편하다‘ 등등...책과 친구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ㅎㅎ
날씨가 춥습니다. 감기조심하시고요. 3월에도 화이팅 하세요. 페크님.^^

페크pek0501 2025-03-04 12:56   좋아요 0 | URL
저는 독서, 영화 등 동아리가 생기니까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사회에서 만났다고 할 수 있는데 적당한 거리가 있어서 서로 예의를 갖추다 보니 지적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라서 좋은 것 같아요. 또 얘깃거리가 풍성해요. 저도 휴튜브에서 보니 친구는 별 필요가 없고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취미 같은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벌써 3월입니다. 모나리자 님도 파이팅!!!^^
 



*

행복이 인간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살아야 하는데, 잘사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의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잘산다는 말은 인간성이 원활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성이야말로 인간 행복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80쪽)


인간성이란 인간다운 기능이다. 인간의 기능은 생식, 감각, 사유로 나뉜다. 생식은 식물도 하는 일이며, 감각은 동물에게도 있다. 하지만 사유는 오직 인간에게만 내재된 기능이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사유를 인생의 본질로 삼았을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따라서 행복은 사유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선한 삶이고, 삶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80~81쪽) 


쇼펜하우어(1788년생)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 있는 글이다.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사유하며 ‘선한 삶’을 사는 데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유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겠네. 선한 삶을 살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겠네. 여기서 경제적 요건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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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은 전적으로 선의 향수에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혼자만 그 선을 향수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복지를 홀로 향수하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혜택 받고 운이 좋기 때문에 자신을 더 축복 받은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61쪽)


예를 들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은 전적으로 지혜와 참된 인식에 있을 뿐,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참된 인식을 갖고 잊지 않다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지혜, 즉 그의 진정한 행복에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기뻐하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염두에 두고 기뻐하며, 그러므로 앙심이 깊고 악의가 있는 동시에, 진정한 지혜를 모르고 충실한 생활의 평안도 알지 못한다.(61쪽)


스피노자(1632년생)의 「신학정치론」에 있는 글이다.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지혜와 참된 인식에 있을 뿐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게 아니고, 자기만 참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자신이 남들에 비해 더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타인의 불행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이란 지혜와 ‘선한 삶’이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겠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내용이 쉽지 않은 책이라서 술술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스피노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읽고 있다. 다행히 유튜브를 통해 스피노자 관련 강좌를 많이 접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 





***

내 생각 : 

쇼펜하우어나 스피노자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생에는 행복한 날과 불행한 날이 교차하기 마련 아닌가. 맑은 날도 있고 비바람 치는 날도 있는 것처럼.


누구나 다 알 듯이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아니라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부자인가 빈자인가 하는 것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속에 행복은 이미 깃들어 있다. 아무리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행복은 멀어진다. 두 철학자가 말한 지혜와 ‘선한 삶’을 추구할 때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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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12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이가 들면 좀 더 마음도 넓어지고 관대해지고 그럴줄 알았거든요. 근데 갈수록 더 쫌생이가 되는 느낌. 싫은건 왜 더 많이 싫어지고, 보기 싫은 사람은 왜 더 보기 싫어지는지.... 지혜와 선한 삶은 거저 주어지는게 아니네요.

페크pek0501 2025-02-13 10:59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이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써 주신 듯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속 좁은 선배뻘보다 후배뻘 사람을 만날 때가 더 즐거워요. 조심할 게 없어서요. 저도 만나기 편한 선배가 되어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아요. 너그러움, 어디 파는 데 없나요? 하하~~

stella.K 2025-02-13 11:41   좋아요 1 | URL
고독이란 약국에 가서 알아보시면 약을 줄지도...ㅋㅋ 쇼펜하우어 책 읽어보고 싶네요.^^

페크pek0501 2025-02-13 11:57   좋아요 1 | URL
갑자기 나타나신 스텔라 님! 고독이란 약국이 어디 있나요?ㅋㅋ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다 보면 진지한 글도 있지만 코믹한 글도 만날 수 있습니다.

숲노래 2025-02-12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고스란히 즐거이 부르는 노래로 흐른다면, 주머니에 돈이 있든 없든 그저 즐겁습니다. 마음에는 아무 노래가 안 흐르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든 있든 그저 안 즐겁겠지요. 돈살림이 어느 만큼인지 쳐다볼 노릇이 아니라, 마음살림을 얼마나 즐겁게 노래로 일구는가 하고 바라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하루에 열끼나 스무끼를 먹어치워야 배부른 삶일 수 없듯, 얼마나 벌어들이느냐에 치우치다가는 으레 마음을 잊고 잃을 테니까요.

페크pek0501 2025-02-13 10:55   좋아요 0 | URL
오! 숲노래 님, 오랜만의 방문이십니다. 잘 지내시죠?
아이들 사진 올린 것을 보곤 했는데 그 귀엽던 아이들이 많이 컸겠습니다.
돈살림만큼이나 마음살림도 중요하겠죠. 자기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가까운 길로 가는 지름길인 듯합니다. 좋은하루보내십시오. 댓글, 고맙습니다.^^

희선 2025-02-14 0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 행복이라고 하면 넉넉하게 사는 걸 생각할 때가 많은 듯합니다 그게 아닐 텐데...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닐 것 같아요 돈이 많은 사람도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있겠습니다 고마워하는 마음,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고마워할 게 아주 많은데, 그런 걸 자주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02-14 11:2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되는 일이 없네, 이러면서 불평을 갖다가 그래도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살 돈이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고 생각하면 기분이 풀어집니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다면 행복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하루보내세요.^^

그레이스 2025-02-14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두 공감하는 내용! 이네요~♡
알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게 항상 문제죠.ㅠㅠ

페크pek0501 2025-02-14 11: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 감사할 게 얼마나 많은가요? 전쟁을 치르는 나라를 생각만 해도요. 좀 겸손해지고 싶어요. 좋은하루보내세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본 일이 거의 없다. 한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30쪽)


그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도, 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31쪽)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31쪽)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31쪽)


작가가 가엾은 거지를 보고 그냥 지나친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자기반성의 소회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거지 동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으로 나뉠 듯하다. 


앉은뱅이의 배후에 왕초 거지가 있다는 것은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어도 동냥을 외면하기보다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주는 게 낫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오죽하면 동냥까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둘째는 앉은뱅이라도 돈벌이를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걸인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걸인들이 있는 것이라며 적선을 반대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걸인들에게 적선하지 말고 생계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계 기반을 마련해 주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한데, 그들은 당장 매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게 시급한 형편이라면 어쩔 것인가.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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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2-12 0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보면서 박완서 작가 글이 아닐까 했는데, 맞았네요 예전에 한번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박완서 작가 글은 많이 보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작가 글도 비슷하겠습니다

지금은 글에 나온 것 같은 사람이 거의 안 보이는 것 같네요 사는 걸 아주 다르게 바꿔주는 건 무척 힘들 듯합니다 오래 그렇게 살면 다르게 사는 건 힘들겠지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2-12 16:06   좋아요 1 | URL
박완서 작가 님의 글은 개성과 맛깔스러움을 느낄 수 있죠. 소설도 잘 쓰시지만 에세이도 수작이 많아요. 이 책은 작가가 생전에 남긴 660편의 에세이 중에서 따님이 가려 뽑아 엮은 것이라, 아마도 작가 님이 남긴 가장 나은 에세이집이 될 것 같아요. 소설도 많이 쓰셨는데 에세이만 660편을 쓰셨다니 위대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재래식 시장에 가끔 갈 때가 있는데 거기서 앉은뱅이를 보곤 합니다. 사실 적선하는 게 왕초 거지만 배부르게 하는 거라고 해서 뭐가 정답인지 단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고양이라디오 2025-02-12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읽어보고 싶네요.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저도 한 때 박완서 작가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속는셈치고 라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5-02-12 16:08   좋아요 1 | URL
아마 이 책을 읽으시면 좋다, 할 것입니다. 돌직구를 던지는 글이 있거든요.
예. 속는셈치고~~~ 좀 속으면서 살자고요.^^

잉크냄새 2025-02-12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지하철을 타던 시절에는 주머니에 잔돈을 넣고 다녔어요. 음악을 틀고 지하철 바닥을 기며 구걸하는 분들을 보면 그 분별심이 들기 전에 그냥 잔돈을 바구니에 넣었어요. 몇 푼의 적선이 고민과 갈등과 의심보다는 맘을 편안하게 하더군요.

페크pek0501 2025-02-13 11:06   좋아요 0 | URL
아, 일부러 동전을 준비하시는 잉크냄새 님,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는 듯합니다. 얼마라도 적선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그래도 이 세상이 훈훈한 세상을 향해 가는 걸 증명하는 듯 여겨집니다. 저도 모른 척하지 않고 적선에 동참하겠습니다. 좋은하루보내십시오,^^

바람돌이 2025-02-12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동냥하는 분들 보이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넣곤했는데 요즘은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동냥하는 분들이 안 생기려면 국가에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와야 하고, 또 동냥이 밥벌이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걸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항상 그런 이성과 잠시의 내 마음의 편안함이 갈등을 일으키게 하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5-02-13 11:15   좋아요 0 | URL
댓글 중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하는 부분은 반전입니다.ㅋ 혹시 카드만 갖고 다니시는 건 아닌지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책을 마련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언제나 없어지려나요. 오늘 부산 세모녀의 극단적 선택, 의 신문기사를 보고 놀랐고 가슴 아팠네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헤아리며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