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40세 전후로 보이는 두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고 있다. 나보다 젊은 작가들은 무엇에 대해 글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













정지우,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신문에 실리기 좋을 에세이들이 담겨 있다.


식궁합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 책에는 ‘예민함 궁합’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연애나 결혼에서 흔히 이러저런 궁합들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궁합 중의 궁합은 ‘예민함의 궁합’이 아닐까 싶다.(87쪽)


누군가는 냄새나 청결에, 누군가는 말투나 표정에, 누군가는 단어나 색깔에 민감하다.(88쪽)


그렇게 어릴 적부터 어디에 얼마나 예민한가는 그 사람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예민함의 궁합이 대단히 중요해지는 것 같다. (...) 말투에 너무 예민해서 상대방의 퉁명스러운 말투 하나에도 크게 상처받는 사람은, 말투 자체가 별달리 문제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과 살면 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는 냄새에 극도로 예민하여 항상 가글을 하는데 한 사람은 좀처럼 그런 데 둔감하다면, 살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나쁜 기억들이 무척 많이 쌓이게 될 것이다.(88~89쪽)


예민함의 부분들이 거의 일치하는 사이는 사실 그렇게까지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고 크게 불편할 이유도 없다.(89쪽)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결혼하기에 앞서 상대편의 무엇을 참기 어려운가에 대해 서로 관심을 갖고 판단하여 결혼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자신이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한 예로 수다스러운 사람이 싫을 수도 있고 말 없는 사람이 싫을 수도 있다. 


나는 독재적인 사람이나 오만한 사람을 싫어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나마 좋게 해석하여 참을 수 있다. 상대방이 기분 상할까 봐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러나 독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오만한 태도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상대하기가 어렵다.  



 

**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소설가가 쓴 산문집이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은 한 신문에 연재했던 짧은 원고들을 매만진 칼럼들이라고 한다.  


당신은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판단을 마지막 순간까지 유보하는 사람.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만 가지고 손쉽게 누군가에게 선이나 악으로 꼬리표를 붙이려 하는 순간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97쪽)


소설가로서 나는 언제나 서사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커다란 구멍으로 남아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은 그런 지점들이 아닐까? 우리는 삶과 세계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하려 애써 노력하지만, 사실은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인 서사들을 성글게 엮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바로 거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서사와 서사 사이의 결락 지점. 그런 지점이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자리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98쪽)


한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어서 옮겨 봤다. 





봄은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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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5-04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예민한 게 다르기도 하죠 정말 그게 잘 맞아야 좋을 듯하겠습니다 다르다 해도 서로가 무엇에 예민한지 안다면 좀 나을 듯한데, 그런 데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으니, 뭘 그런 것 가지고 할 때가 많을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05-05 21:09   좋아요 0 | URL
엄밀히 따지고 보면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듯합니다. 누구나 어떤 면에선 예민한 거죠. 또 예민하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예민하지도 않고요. 아마 모든 면에서 예민했다가는 과부하로 살 수 없을 겁니다.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 하는 사람하고는 잘 지내기 어렵겠죠.^^

서니데이 2025-05-04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 사이는 참 어려운 것들이 많아요. 잘 맞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요. 처음엔 잘 맞던 사람도 시간 지나면서 달라지는 것들이 생기고요. 예민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서로 다르고 만약 반대라면 조금 힘들거예요. 그래도 잘 배려하는 분이 계시고, 또 잘 안될 때가 있긴 한 것 같고요.
주말이 거의 다 지나갔어요. 페크님,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5-05-05 21:16   좋아요 1 | URL
결혼하고 나면 육아 문제, 교육 문제로 많이 다툰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사교육을 많이 시키고 싶은 아내와 그렇지 않은 남편과의 마찰 같은... 이런 것도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인 거죠. 연애할 때 충분히 상대편에 대해 알아야 하고 문젯거리가 될 만한 것은 서로 얘기를 나눠 타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오늘은 석가탄신일이어서 절에 갔다왔답니다. 어머니때부터 다니던 절이 멀리 있어서 자주 갈 수 없으니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는 간답니다. 푸른 5월처럼 우리 마음도 푸르기를 바랍니다.^^

잉크냄새 2025-05-05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민함의 궁합이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기는 한데, 쉬워 보이면서도 쉽지 않은 문제로 보입니다.

페크pek0501 2025-05-08 17:01   좋아요 0 | URL
정말 쉽지 않겠죠?
지금 생각난 것인데, 주장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면 양보와 타협이라는 덕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5-0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민함의 궁합 공감가네요^^

페크pek0501 2025-05-08 17:02   좋아요 1 | URL
저도 공감이 갔어요. 곱씹어 볼 만한 글입니다.

모나리자 2025-05-17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젊은 세대 작가가 쓴 글을 읽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글을 쓰는지 알 수 있겠네요.
부지런히 살아야 책도 많이 읽을 수 있는데 한동안 게으르게 살고 있는 제가 반성하게 됩니다.
6월부터는 좀 더 활동하기로 다짐해 봅니다.ㅎ^^

페크pek0501 2025-05-17 14:34   좋아요 0 | URL
저보다 젊은 이들에게 배울 점이 많아요. 정보가 빠르고 이 시대에 더 익숙한 글을 써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지요. 저 역시 사 놓고 읽지 못한 책들이 많아 ‘아 저 책도 빨리 읽어야 하는데‘ 하면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게다가 할일은 어찌나 많은지..ㅋㅋ
그래도 틈틈이 좋은 계절이라는 것을 느끼며 사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25-05-2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민함 궁합이란 부분에 정말 공감해요.
저는 말 속에 숨은 뜻, 맥락 따위에 예민한 편입니다.
엊그제도 누군가와 그런 대화를 나눴어요.
상대는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 속에 가난에 대한 혐오가 숨어 있다고 느껴 저는 무척 불쾌했습니다.
제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지적을 하고 말았는데,
그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오히려 화를 내더라구요.
화가 났지만 참고 차근차근 말하고 있던 저도 그 지점에서는 그냥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어요.
 














유인경,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어」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법’이란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듯 누구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라고 설파한다. 


저자는 책을 내랴 방송 출연을 하랴 강연을 다니랴 바쁘게 사는 작가다. 내가 한 친구에게 유인경 님 같은 사람을 사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자기도 그렇다고 말해서 함께 웃은 적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선배님이라고 부르든지 언니라고 부르며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너그럽고 활달해 보여 좋다. 내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다 들어주고 지혜로운 조언을 해 줄 것만 같다. 큰 고민거리도 그녀에게 말하고 나면 하찮은 일이 되고 말 것 같다. 

 


전자책을 읽다가 마음에 새겨 두고 싶어 옮겨 본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도 나이 들면 낙엽 지고 가지 치듯 저절로 정리되더군요. 내가 서서히 물러나거나 저쪽에서 사라지거나 번잡한 관계들이 사라지고 핵심 인물만 남아요.


오래전에 한 스님이 고민이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구나’ ‘겠지’ ‘다행이다’란 3단계로 나눠 생각하라고 했어요. 누가 친구들에게 내 흉을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그때 ‘아무개가 내 흉을 봤구나’(인정), ‘나한테 못마땅한 게 있었겠지’(이해), ‘그래도 뒷말만 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엉뚱한 글은 안 올려 다행이다’(긍정 수용)로 나눠 생각하면 크게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는데 꽤 도움이 됐어요. 누군가는 날 욕할 권리가 있고 난 그걸 무시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나이 들어 편안해지는 가장 큰 비결은 나 이외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예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안달복달하고, 되고 싶은데 될 수 없는 사람을 질투하느라 더 이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거든요. 60년 넘게 살아 보니 부와 권력과 미모와 화목한 가정을 영원히 유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요. 처녀 시절의 눈부신 미모에 집착해 성형중독이 된 여배우, 거물이었다가 고물로 추락한 정치인, 재산은 많지만 자녀가 엉망인 재벌, 과거의 명함과 영화를 못 잊어 “나 때는 말이야”만 떠들어 꼰대 취급을 받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연연할 것이 별로 없어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쉰답니다.


질투를 하지 않으니(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에게 착한 말, 좋은 말, 축복의 말을 자주 해요. 별장을 가진 친구 덕분에 별장에서 놀아보기도 하고, 부자인 데다 넉넉한 품성의 친구가 사는 밥과 선물을 기꺼이 받으면서 땡큐만 연발합니다. 세금 걱정이나 관리는 친구의 몫이고 나는 잠시라도 누리기만 하니까 그들이 계속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답니다. 뻔뻔하다고요? 편안해지려면 기꺼이 뻔뻔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나이의 힘이죠. 


승신 씨, 지금부터 너무 평화와 편안만 누릴 필요는 없어요. 목마르다가 마신 한 잔의 물이 생명수처럼 느껴지듯 오래 걸려 스스로 만든 편안함이 진짜 값지답니다. 조금 더 기다려 봐요. 


편안해지는 비결은 세월이 아니라 확실한 걱정거리와 막연한 두려움이 안개처럼 나를 감쌀 때 잠시 멈추고 그 생각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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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essa 2025-04-30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산홍이 뷰티풀해요. ^^!!!

페크pek0501 2025-04-30 12:58   좋아요 0 | URL
연산홍도, 철쭉도 화려한 색상이 마음을 끕니다. 봄이 주는 선물입니다.^^

Vanessa 2025-04-30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개했네요~~~

페크pek0501 2025-04-30 12:58   좋아요 0 | URL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2025-04-30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01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25-04-30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는 날 욕할 권리가 있고 난 그걸 무시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다른 듯 같은 이 권리가 참 어려워요. 우리 눈이 바깥만 보도록 구조화되어서 안으로 밖으로 향하는 것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되나봐요.

페크pek0501 2025-05-01 11:49   좋아요 0 | URL
우리는 자신의 내면보다는 외부 사람들의 시선을 더 중요시하도록 훈련을 받아 온 셈이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내면, 자신의 삶을 중요시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책이 요즘 많이 나오네요. 어떤 상황에 놓여도 중요한 건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욕해도 내가 그 욕을 안 받아들이면 되는 거다, 이런 식으로요. 완벽해지려고 하지도 말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 삶을 행복하게 가꾸어 나가는 연습이 필요한 듯해요. 남을 위해 사는 건 아니니까 말이죠.^^

stella.K 2025-05-01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세월지나면 다 정리가 되는데 당시엔 왜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건지. ㅋ 유인경 기자 참 젊게 사는 것 같아요. 일선에서 물러날 때도된 것 같은데. 이런 분은 은퇴하면 병 날 거예요.^^

페크pek0501 2025-05-02 22:10   좋아요 1 | URL
유인경 작가(책을 많이 냈더라고요.)는 늘 활력 있게 살 것 같고 이런 분은 집콕~ 하면 정말 병 날지 몰라요. 자기 성향에 맞게 살아야 건강해요. 경향신문 기자로, 부장으로 퇴직후에도 왕성한 활동 보기 좋아요. 대단한 능력자이죠.^^

하나의책장 2025-05-03 1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에는 이 책을 엄마에게 선물해줘야겠어요^^

페크pek0501 2025-05-04 13:03   좋아요 0 | URL
좋은 생각이십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요.
유인경 작가가 딸을 대상으로 하여 쓴 글을 책으로 낸 게 있는데 오히려 어머니들이 많이 샀다고 하네요.^^

희선 2025-05-04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더 먹어야 편안해지려나 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하네요 마지막에 편안해지는 건 세월이 아니다는 말이 있으니... 자기 자신을 좋아해야 하는데, 그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잘 안 되니, 꼭 그렇게 해야 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05-05 21:50   좋아요 0 | URL
자신을 사랑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며 늙어 가는 게 좋은데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도 나이를 먹고 보니 저절로 너그러워지지 않더라고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해요. 나이 먹으면 자신감 상실, 열등감으로 오히려 속이 좁아지기 쉬워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이 들자고요. 푸른 5월, 잘 보내십시오^^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는 400편이 넘는 중·단편 소설을 써서 극작가보다는 소설가로서 더 유명하다. 나는 일찍이 그의 단편집 두 권을 읽고 소설 팬이 되었었다. 이번에 읽은 그의 희곡 또한 색다른 맛의 즐거움을 선사하여 희곡 팬도 되어 버렸다. 


“세계적으로 널리 공연되는 극작가 체호프의 희곡은 이른바 ‘4대 장막극’이라 불리는 <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으로 국한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공연되고 있을 것이다.”(옮긴이의 말, 771쪽) 


앞서 언급한 네 작품 모두 아래의 책에 실려 있다.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네 작품 중 <갈매기>와 <바냐 외삼촌>을 소개하고자 한다.  

 

*

젊은 날에 미팅을 하거나 맞선을 본 경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다. 상대가 내 맘에 들면 상대는 나에게 관심이 없고, 상대가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상대는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 엇갈리는 현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간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만약 이성을 처음 만날 때마다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이와 연애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처음 만나는 이성과 사랑에 빠져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 또 바람둥이라면 많은 이성과 사귀고 나서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어렵게 된다. 엇갈리는 현상으로 인해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기 어려우니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갖게 된 절호의 기회가 찾아올 때, 두 남녀는 비로소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지만.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서도 메드베젠코는 마샤를 사랑하고, 마샤는 트레플료프를 사랑하고, 트레플료프는 니나를 사랑하고, 니나는 트리고린을 사랑한다. 엇갈리기에 사랑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만다. 


소설가 트리고린은 남편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혼자 사는 아르카지나의 연인이다. 트리고린은 니나와 함께 살다가 니나를 버리고 옛 연인인 아르카지나의 곁으로 돌아온다. 아르카지나는 유명한 여배우로 트레플료프의 어머니다. 말하자면 트레플료프는 니나를 어머니의 연인한테 빼앗긴 셈이다. 


다음은 자살을 예감한 듯 트레플료프가 니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대목이다.


트레플료프 : (소총과 죽은 갈매기를 들고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들어온다) 당신 혼잔가요?

니나 : 그래요. 

이게 뭐예요?

트레플료프 : 오늘 비겁하게 이 갈매기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당신 발치에 놓겠습니다.

니나 : 무슨 일이죠? (갈매기를 들고 들여다본다)

트레플료프 : (사이를 두고) 조간간 나는 이런 식으로 자살할 겁니다.

니나 :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트레플료프 : 그래요.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그 이후로 그렇게 됐죠. 나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변했어요. 당신의 눈은 냉랭하고, 내가 있으면 당신은 괴로워합니다.(‘갈매기’, 423~424쪽) 


다음은 중견 소설가인 트리고린이 젊은 아가씨인 니나와 말을 주고받는 대목이다.(두 사람 앞에 트레플료프가 죽인 갈매기가 있다.)

 

니나 : 뭘 적으시나 봐요?

트리고린 : 그래요. 써 넣는 거죠……. 줄거리가 떠올라서요……. (책자를 감추면서) 작은 이야기를 위한 줄거립니다. 한 호숫가 마을에 마치 당신 같은 젊은 아가씨가 어릴 적부터 살고 있어요. 갈매기처럼 호수를 사랑하고, 갈매기처럼 행복하고 자유롭죠. 그런데 우연히 한 사내가 와서 보고는 이유도 없이 그녀를 파멸시킵니다. 마치 이 갈매기처럼 말이죠.(‘갈매기’, 430~431쪽)


트리고린은 니나를 보고 그런 착상이 떠올랐던 것. 신기하게도 트리고린의 말은 현실이 된다. 마치 미래에 대해 예언을 한 듯한, 비극을 암시하는 복선을 깔아 놓은 듯한 이 대사를 체호프는 왜 트리고린이 말하게 했을까 헤아려 본다. 그 이유는 이 희곡의 등장인물들 중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소설가란 직업을 가진 트리고린이기 때문이리라. 


놀라운 것은 트리고린이 말한 ‘한 사내’가 바로 트리고린 자신이라는 점이다. 물론 트리고린은 자기의 착상이 현실이 될 줄 몰랐을 테고 더군다나 ‘한 사내’가 본인이 될 줄 몰랐겠지만 말이다. 니나는 트리고린을 사랑하게 되고 그와 동거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고 만다. 그 뒤 니나는 트리고린에게서 버림을 받아 불행에 빠진다. 만약 트리고린이 나타나자 않았다면 니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트레플료프라와 짝이 되어 불행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트레플료프와 아르카지나는 말다툼을 하고 나서 서로 화해한다. 


트레플료프 : (그녀를 끌어안는다) 엄마가 아신다면! 전 모든 걸 잃었어요. 그녀는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제 글을 쓸 수도 없어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요……. 

아르카지나 : 낙심하지마라…….  다 잘될 게다. 그 사람이 떠나면 그 아이도 다시 널 사랑하게 될 게야. (그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렇고말고. 우리 이제 화해한 거다.

트레플료프 : (그녀의 손에 키스한다) 네, 엄마.(‘갈매기’, 441쪽)


트리고린이 자기와 이곳을 떠나고 나면 니나가 트레플료프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어머니가 아들을 위로하는 장면이다. 

 

이와 같이 이야기가 흥미 있게 전개된다. 그리고 등장인물 중에서 작가와 배우가 있기에 문학과 예술에 관련하여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가령 이런 것.


도른 : 콘스탄틴 가브릴로비치, 당신 희곡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조금 이상하고,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강력한 인상을 받았어요. 당신은 재능 있는 사람이니, 계속 써야 합니다. (...) 당신은 추상적인 사유의 영역에서 주제를 포착했어요.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은 반드시 어떤 거대한 사상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진지한 것만이 아름다운 법이오.(‘갈매기’, 411~412쪽)


작가 지망생이었던 트레플료프라는 작가가 되고, 배우 지망생이었던 니나는 연극 배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었을까?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 무모하게 가출할 만큼 용기가 있고 사랑에 쉽게 빠지고 현실 감각이 없는 니나. 그녀는 트리고린에게 버림을 받고 배우로 성공하지도 못하며 폐인이 된 듯한 모습이 되어 버린다. 작가가 되었으나 글을 쓸 수 없고 니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트레플료프. 니나는 트레플료프의 사랑 고백을 받아 주지 않고 자신을 버린 트리고린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트레플료프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니나와 트레플료프 같은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려운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 작품 속 명대사


작품에는 분명하고 명백한 생각이 들어 있어야 해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지 당신은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그림 같은 길을 명백한 목적도 없이 걸어간다면, 당신은 길을 잃을 것이고, 재능이 당신을 파멸시킬 겁니다.(‘갈매기’, 412쪽)

 

투르게네프 작품에 이런 대목이 있죠. “이런 밤에 지붕 아래 앉아 있는 사람과 따뜻한 모퉁이를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갈매기’, 465쪽)





**

체호프의 또 다른 희곡 ‘바냐 외삼촌’에서는 바냐가 지난 25년 동안 세레브랴코프에게 속아 황소처럼 일하며 어리석게 살았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레브랴코프는 연구 업적이 없이 퇴직한 교수로 지금은 통풍 환자가 되어 있다. 


보이니쓰키(바냐) : (...) 아, 난 얼마나 속아왔던가! 난 저 교수를, 저 보잘것없는 통풍 환자를 숭배했고, 그를 위해서 황소처럼 일했어! 나와 소냐는 이 영지에서 마지막 안 방울까지도 짜냈어. 한 푼 두 푼 모아 수천 루블을 만들어 그에게 보내주려고 우리는 마치 구두쇠처럼 식물성 기름과 완두콩, 치즈를 팔면서도 정작 자신은 배불리 먹어보지도 못했어. 난 그와 그의 학문이 자랑스러웠고, 그로 인해 살았고 숨 쉬었어! 그가 쓰고 말한 모든 것이 내겐 천재적인 것으로 보였지……. 맙소사. 그런데 지금은? 그는 은퇴했고, 그래서 지금 그의 인생 결과가 드러났어. 그가 죽고 나면 단 한 페이지의 저작도 남지 않을 거야. 그자는 전혀 유명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누 거품이야! 그래 난 속았어…… 알아. 어리석게 속은 거라고…….(‘바냐 외삼촌’, 497쪽) 


교수와 바냐는 예전에 매제와 처남 사이였다. 그런데 바냐의 여동생이 죽었고 그 여동생이 낳은 딸이 소냐다. 소냐와 바냐는 조카와 외삼촌 사이. 그래서 소냐는 바냐를 ‘바냐 외삼촌’이라고 부른다. 교수는 현재 엘레나 안드레예브나와 살고 있다. 엘레나 안드레예브나는 빼어난 미인으로 소냐의 새어머니인 셈이다. 바냐는 엘레나 안드레예브나를 짝사랑한다.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해 보지만 허사였다. 


‘바냐 외삼촌’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사람이다. 그 첫째는 교수였던 세레브랴코프의 학문을 위해 25년간 황소처럼 노동하며 희생했던 ‘바냐’다. 그 교수가 위대한 학자가 될 줄 알고 그의 학문에 희망을 걸고 산 바냐의 25년간의 삶은 바냐의 말처럼 어리석게 속은 삶이기만 했을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25년 동안 희망을 갖고 살았으니 희망찬 인생을 살았다고 말이다. 결과만큼 긴 시간의 과정도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둘째는 애인과 달아난 아내의 딸들의 양육을 위해 재산을 준 ‘텔레긴’이다. 그는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버림을 받은 상황 속에서 친자식이 아님에도 양육비를 주었고 그래서 행복을 잃었지만 자부심은 남았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은 의미 있는 인생일까, 헛된 인생일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전자일 수도 후자일 수도 있겠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인생과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을 ‘바냐 외삼촌’이란 희곡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냐처럼 누구에게 인생을 바치는 삶은 후회와 원망이 따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맞벌이부부가 흔치 않았던 과거에는 기혼 여성들이 자기 삶에서 얻지 못한 충족을 자녀의 학업 성적이나 남편의 출세에서 구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남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기보다 본인의 인생에 관심과 에너지를 쏟고 살 때 인간은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 삶의 주체자가 되려면 본인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삶을 비관하고 모르핀이 들어 있는 병을 훔쳐갖고는 자살까지 생각했던 바냐 외삼촌에게 소냐는 다음과 같이 위로한다. 


보이니쓰키(바냐) : (소냐에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야, 몹시 괴롭구나!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네가 알아준다면!

소냐 : 어떻게 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긴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이 우릴 가엾게 여기실 테고, 저와 외삼촌, 사랑하는 외삼촌은 밝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삶을 보고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지금 우리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되돌아보면서 우린 쉬게 될 거예요. 전 믿어요, 외삼촌. 뜨겁고 열렬하게 믿어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의 두 손에 놓는다. 지친 목소리로) 우린 쉬게 될 거예요!(‘바냐 외삼촌’, 545쪽)

 

“우린 쉬게 될 거예요!”라는 말이 마치 절규처럼 깊은 울림을 준다. 소냐 역시 자신의 사랑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어 괴로워하는 바냐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으리라. 소냐의 훌륭한 정신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 작품 속 명대사


늙은 까마귀 같은 우리 엄마는 끊임없이 여성 해방에 대해 떠들고 계셔. 한쪽 눈으로는 무덤을 보고 있으면서, 다른 눈으로는 그 잘난 책자에서 새로운 인생의 여명을 찾고 있거든.(‘바냐 외삼촌’, 477쪽)


자기 아내도 아닌데 어째서 당신들은 여자를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는 건가요? 그 의사가 옳게 말한 것처럼 당신들 모두의 내부에는 파괴의 악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은 숲도, 새도, 여자도, 누구에 대해서도 동정하지 않아요.(‘바냐 외삼촌’, 487쪽)


세상은 강도나 화재 때문에 파멸하는 게 아니라, 증오, 적대감, 온갖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파멸한다는 사실을 말이죠…….(‘바냐 외삼촌’, 495쪽)


여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순서로만 남자의 친구가 될 수 있어. 처음에는 아는 사람, 그다음엔 애인, 그러고 난 다음에 친구.(‘바냐 외삼촌’, 498~499쪽)


이런 날씨엔 목을 매기 좋지요…….(‘바냐 외삼촌’, 483쪽)




..............................

‘바냐 외삼촌’에서 엘레나 안드레예브나가 “오늘 날씨가 좋네요……. 덥지도 않고…….”라고 말하자 바냐는 “이런 날씨엔 목을 매기 좋지요…….”라고 응수한다.






인간의 속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봄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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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28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5-04-27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갈매기는 예전에 영화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본 적은 없지만...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하기도 하네요 마음이 엇갈리다니... 그럴 때는 참 마음이 안 좋겠네요 이성 사이만 그런 건 아닌 듯해요 친구도 다르지 않은 듯... 그런 것도 그러려니 해야 할지도... 다른 사람 마음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에요

자기 삶을 사는 게 좋기는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도 좋은 일인데, 그저 도와준 것만으로 기뻐하는 게 좋겠지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04-28 08:07   좋아요 0 | URL
갈매기, 는 유튜브 영상으로 연극이 있더라고요. 인간관계에서 엇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지요. 운명의 장난, 같지요.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건 좋지만 자기 삶을 다 바치는 건 좋지 않겠죠. 인간인지라 본전 생각을 하고 대가를 바라거든요. 난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내게 어떻게 했어?, 라거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이럴 수 있니? 라고 하게 되거든요. 자기 삶을 충실히 살 때 후회가 없을 것 같아요. 그건 희생이 아니니까요. 좋은 봄날 보내세요..^^

태인 2025-04-28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을 매기 좋은 날이라니.중증 우울자의 모습이네요.T.T바냐 아저씨의 응수가 슬프네요.바냐 아저씨를 읽어 봐야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5-04-30 10:10   좋아요 0 | URL
제가 사족, 으로 붙여 봤어요. 요즘 날씨가 매우 좋아서요.
작품 속에서도 의사가 바냐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의사로서의 직감인 거죠.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쓰는 것이지만 저는 책으로 읽는 게 좋더라고요. 태인 님도 읽으시면 희곡의 매력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태인 님 반가웠습니당~~

그레이스 2025-04-30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냐삼촌,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페크pek0501 2025-04-30 12:36   좋아요 1 | URL
역쉬~~ 독서광 그레이스 님은 읽으셨군요.ㅋㅋ
 

공연을 보고 나서 맛있게 먹었다.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당신의 인생은 멋지다는 니나(여자)의 말에 트리고린(남자)은 소설가로서 느끼는 고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니나 : 당신의 인생은 멋져요!

트리고린 : 대체 뭐가 멋지다는 겁니까? (시계를 본다) 이제 그만 가서 글을 써야 합니다.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서……. (웃는다) 말하자면 당신은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겁니다. 그래서 난 동요하고 얼마간 화가 나기 시작한 거요. 나의 멋지고 산뜻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사람이 밤이고 낮이고 간에 생각하면, 예컨대 달에 대해 생각하면 강제된 표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게도 나름의 그런 달이 있어요. 하나의 성가신 생각, 즉 나는 써야 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밤낮으로 나를 괴롭힙니다……. 중편소설 하나를 끝내자마자 무슨 일인지 벌써 다른 중편소설을 써야 하고, 그다음엔 세 번째, 그 후엔 네 번째 중편을……. 역마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끝도 없이 쓰는 겁니다. 다른 방도는 없어요. 대체 여기에 무슨 멋지고 산뜻한 게 있다는 건지, 묻고 싶군요. 오, 얼마나 소름끼치는 인생입니까! 당신과 함께 있어서 흥분하고 있지만, 나는 매 순간 끝내지 못한 소설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있습니다. 저기 피아노를 닮은 구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소설 어디선가 써먹어야지, 하고 말이오. (중략) 작품을 마치고 나면 극장에 가거나 낚시하러 달려갑니다. 거기서 쉬면서 잊어버렸으면 하는 거죠. 그런데, 아닙니다. 머릿속에 이미 묵직한 철제 포탄이 굴러다니는 겁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올라서 나를 책상으로 잡아당기고, 그러면 서둘러서 다시 쓰고 써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언제나 늘 자신으로부터 편안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인생을 파먹고 있다는 걸 느끼고, 어딘가 있는 누군가에게 줄 꿀을 얻으려고 가장 좋은 꽃에서 꽃가루를 모으고, 꽃잎을 따고, 꽃의 뿌리를 짓밟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정말로 미친 게 아닌가요? 

-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426~427쪽.

  

위의 글을 읽노라면 체호프 자신이 작가로서 겪은 고충을 듣는 것 같다. “나는 써야 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밤낮으로 나를 괴롭힙니다…….” 이처럼 소설가 트리고린은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하지만 심심하지 않으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퇴직할 나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소설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좋은가. 


“저기 피아노를 닮은 구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소설 어디선가 써먹어야지, 하고 말이오.” 이 점이 나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내가 글을 쓸 때 써먹어야지, 하는 것들을 책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만약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만큼 독서에 빠져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독서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키우고 싶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 글쓰기 취미가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 지루할 틈이 없고 노년이 되어도 소일거리가 있으며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

- 혼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아 가족 간, 친구 간 불화가 생길 여지가 크지 않다.  

- 책을 유독 좋아하다 보니 다른 것들 이를테면 명품백이나 고급 자동차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무엇을 가지지 못했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단점이 있다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니 허리 디스크나 소화 불량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스트레칭과 걷기 운동을 한다.



공연 전에 2층 객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예술의 전당에 무용 공연을 보러 갔다. 희곡과 공연과 가까워지기로 했다.




..............................

의성 산불이 빨리 진화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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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27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부럽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하고 싶으면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하고. 노후의 직업으로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요즘은 눈이 안 좋으니까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싶기도하더라구요. 또 하루는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ㅠ
책 넘 예쁜데 벽돌책이네요. 들고 다니기 어렵겠어요.

페크pek0501 2025-03-27 11:51   좋아요 0 | URL
능력만 있다면 작가란 직업은 늦잠을 잘 수 있고 좋지요.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출근하는 게 힘들잖아요. 그렇다고 돈을 안 벌 수는 없고...
눈이야 뭐 안경점에 가서 안경 맞추면 문제 끝, 이죠.
저 벽돌책 말고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체호프 희곡, 있으니 그걸 추천합니다. 책값도 반, 무게도 반, 이에요. 저 책은 희곡 동아리에서 지정된 책이라 샀어요. 무거워서 둘로 분책 했어요. 분철^^

고양이라디오 2025-03-2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취미 장단점이 공감이 많이 갑니다ㅎ 소설가의 고충도 어떻게 보면 단점, 반대로 보면 장점이 될 수 있네요. 항상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5-03-27 13:39   좋아요 1 | URL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대요. 일단 두뇌에 자극을 주잖아요. 두뇌 자극이 전혀 없다면 생각을 안 해 치매에 걸릴지 몰라요. 우린 머리를 써야 하고 그러려면 걱정이나 해결할 문제가 있어야 하죠. 인간은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어요. 독서광들은 남들이 관심 갖는 물건엔 무관심한 경향이 있을 거예요.^^

페넬로페 2025-03-27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글 쓰는 이유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5-03-28 12:38   좋아요 2 | URL
맞아요. 돈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면서 혼자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친정어머니 보니깐 노후엔 할 일이 있어야겠더라고요. 코로나로 노인정이 잠기니 얼마나 지루해 하시던지... 요즘도 노인정 문을 열지 않는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지루하다고 불평을 하세요. 그러면 제가 가곤 하죠.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것 하나쯤은 꼭 갖고 있어야 합니다.^^

2025-03-29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3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1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1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2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02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체호프의 희곡 중 ‘갈매기’라는 작품이 있다. 청년 트레플료프의 어머니인 아르카지나는 여배우이고, 소린은 트레플료프의 외삼촌이다. 소린이 아르카지나에게 말한다. 아들한테 돈을 주라고.


아르카지나 : 그 아이가 안됐어요! (생각에 잠겨) 취직이라도 하면 어떨까요…….

소린 : (휘파람을 분다. 그다음에는 주저하면서) 내가 보기엔 가장 좋은 것은 네가……. 그 아이한테 돈을 주는 거야. 무엇보다도 사람답게 옷을 입어야 하니 말이야. 보렴. 3년이나 똑같은 프록코트를 입고 다니고, 외투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잖아……. (웃는다) 젊은 녀석이 흥취 있게 노는 걸 막을 일은 아니잖니……. 외국으로 나가도 좋고……. 돈도 많이 들지 않으니까.

(중략)

아르카지나 : 그래요. 돈은 있어요. 하지만 저는 배우예요. 몸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도 파산할 지경이라고요.(436~437쪽)


아르카지나는 몸치장에 쓸 돈은 있어도 아들의 옷을 사 줄 돈은 없다고 한다. 대사만으로도 어떤 어머니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니나’라는 젊은 아가씨는 ‘트리고린’이라는 유명 소설가를 흠모한다. 둘이 친한 사이는 아니다. 


니나 : (주먹을 쥔 한쪽 손을 트리고린 쪽으로 내밀면서) 짝수일까요, 홀수일까요?

트리고린 : 짝수.

니나 : (한숨 쉬고서) 틀렸어요. 내 손에는 한 알의 완두콩이 있을 뿐이에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점을 쳐본 거예요. 누가 조언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트리고린 : 그건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오.(434쪽)


위의 대화를 보면 니나가 트리고린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고, 니나가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희곡은 대사에 인물에 관한 정보를 숨겨 놓는다. 니나가 트리고린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자기 손 안에 든 완두콩의 개수가 짝수인지 홀수인지 맞춰 보라는 물음을 트리고린에게 굳이 던질 필요가 없다. (체호프가 왜 이런 장면을 넣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의 행동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행동의 숨은 뜻을 모르면 희곡을 읽는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말과 행동과 몸짓에는 정보가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직장의 여자 동료에게서 금요일 저녁에 전화가 왔는데 남자가 전화를 받으려다가 전화기를 잘못 건드려 전화가 끊겼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 다 미혼이다. 이때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 궁금해하며 전화하지 않는 남자라면 상대편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삼 일 후인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서 둘이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남자에게 그날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묻는다. 남자는 전화를 받으려다가 전화기를 잘못 건드려 끊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여자가 상대편이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 안심이 된다면 그녀가 잘못 해석했다고 본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남자라면 전화가 끊기고 바로 액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에게 바로 전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만날 때까지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에 대해 무관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거나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한 이유를 묻게 돼 있다. 둘이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희곡을 읽을 때도 등장인물의 말, 행동, 몸짓을 꼼꼼히 살피며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는 것이 된다. 이 맛에 희곡을 읽는다.



니나 : 작가나 배우가 되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저는 가까운 사람들의 미움, 가난, 환멸도 견디겠어요. 다락방에 살면서 호밀 빵만 먹고, 자신에 대한 불만과 스스로가 모자란다는 고통도 감수할 거예요. 하지만 그 대신 저는 영광을 요구할 거예요……. 진정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영광 말이에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머리가 빙빙 돌아요……. 아아!(430쪽)


이 글에서 작가는 명성을 얻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될 수 있는지 묻는 듯하다. 한 예로 어느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으나 안티팬들의 비난에 시달려 마음이 괴롭다면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안티팬들의 비난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들이 있지 않았던가.   







두꺼운 책이라 무거워 분책을 하였다. 비용은 6천원. 



....................

더 써야 하는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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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3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의 시대에도 홀짝이 있었군요.

페크pek0501 2025-03-13 23:27   좋아요 0 | URL
1860년에 출생한 체호프이니 옛날이죠. 잉크냄새 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시대에 홀짝이 있었던 게 신기하군요. 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좋은 발견입니당~~

감은빛 2025-03-14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갈매기 라는 희곡은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있어요. 제가 부산 사람이라 한때 부산갈매기 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래서 갈매기 라는 단어를 접하면 반가워요.

요즘 잇따른 연예인들의 소천 소식에 마음이 좋지 않네요.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만요. 말씀처럼 명성만을 바라보고 살았다면 인생의 다른 면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이 본인이 그런 삶을 선택한 거라면 또 옆에서 뭐라고 할 권한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참, 답답한 시절을 지나고 있네요. 이게 현실인가 싶다가도, 확실히 꿈은 아닌데. 그럼 현실이 맞네. 이러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눈 감고, 귀 막고 살고 싶은 유혹에 자꾸만 빠집니다.

페크pek0501 2025-03-14 12:36   좋아요 0 | URL
갈매기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저도 읽어 보기 전에 들어 본 희곡이었어요.
부산 갈매기이시군요.ㅋ
저는 악성 댓글이나 비난이 쏟아지면 사이판이나 괌 같은 곳에 가서 아니면 국내라도 한적한 섬에 가서 인터넷 연결을 끊고 칩거하며 책이나 읽으며 산책이나 하며 맛있는 것 사 먹으며 한 달쯤 시간을 보내고 오면 자기에 대한 비난이나 소문은 사라져 있을 거라고 봐요. 타인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 가지 않거든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면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르지요.
답답한 시절이라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 많다는 기사를 본 것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요..^^

희선 2025-03-14 0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은 별로 못 읽었네요 이 책 끝까지 못 봤어요 읽어야지 하는 생각만 했네요 나오는 사람이 하는 행동과 말 그리고 몸짓을 잘 봐야 알 수 있군요 페크 님은 그런 걸 잘 보시는군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3-14 12:39   좋아요 1 | URL
저도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정도 읽은 것 같아요. 소설에 비해 희곡 읽기는 쉽지가 않아요. 등장인물이 많아 헷갈리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할 때의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 다행히 저는 오디오북을 가지고 있어 들으며 종이책을 읽으니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이럴 땐 오디오북이 좋습니다. 오디오북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그레이스 2025-03-14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철!
과감하시네요^^

체호프 대표 희곡만 읽고,,, 단편들 읽고 있어요
읽을수록 넘 좋아요.^^

페크pek0501 2025-03-14 12:41   좋아요 1 | URL
아, 저 책이 제가 속한 동아리의 교재랍니다. 들고 다녀야 해서 무거워서 분철, 해 봤어요. 비용이 들어 그렇지 편한더라고요.
체호프 단편집을 두 권 읽었는데 다 좋았어요. 민음사 것과 펭귄 클래식 것을 읽었는데 겹치는 작품이 있긴 했어요. 체호프는 단편의 천재, 라고 봅니다. 희곡은 아직 다 읽지 못해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