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미터가 필요한 여자
"이제부터 3미터씩 떨어져."
밤 아홉 시가 되면 딸들에게 외치는 말이다. 유난히 질문이 많은 큰애와 나로부터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는 작은애가 성가셔서 묘안을 짜내었다. '엄마 혼자 있는 시간'을 밤 아홉 시부터 잠자기 전까지로 정한 것이다.
5학년생인 큰애는 수학문제나 영어문제를 묻고, 일곱 살배기 작은애는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놀아달라고 조르는 일이 잦아졌다.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수시로 묻기도 하는 아이들이 기특하여 흐뭇하기도 했다. 아이의 궁금증은 그때그때 풀어주는 게 좋은 교육이므로 최선을 다해 답해야 하리라. 그러나 엄마 혼자 놔둘 수 없다는 듯이 달려드는 딸들에게 허구한 날 시달리다 보니 몸과 마음이 시어 꼬부라진 파김치가 되곤 하였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주부로서의 일과가 끝나는 시간인데, 아이들은 내 곁에서 쉬지 않고 쫑알대기 일쑤다. 딸애들이 장난치는 시끌덤벙한 소리 때문에 아홉 시에 방송하는 뉴스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아 답답하였다. 또 조용한 밤에 책을 읽고 싶은 나의 욕구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사랑스러운 공주님들이 어느 덧 '밉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찾은 방법이, 밤 아홉 시까지만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밤 아홉 시부터 3미터씩 떨어져서 엄마에게 말하기 없기다 알았지?"
부드러운 말투로는 효과가 없을 것 같아 만약 이를 안 지키면 혼날 줄 알라고 엄포를 놓았다.
처음엔 혼선을 빚었다. 말을 걸었다가 몸을 움찔거리며 그냥 뒤돌아서고 마는 큰애, 말을 안 하는 게 어디 있느냐며 울먹거리던 작은애였는데, 그 시간만 되면 상종하지 않는 걸 며칠 겪더니 마음을 고쳐먹었나 보다. 신통하게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아빠에게 밤마다 엄마하고 유령놀이를 한다고 웃으며 말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졌다. 드디어 아이들과 나 사이에 황금 같은 3미터를 확보한 것이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짹소리 못하는 아이들을 볼 때 내가 '냉정한 엄마'가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내 기분이 좋아야 가족에게 다정해질 게 아닌가. 딸들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자기에게 충실해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래야만 다른 이도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훗날 딸들이 결혼하게 되면 휴식이나 독서를 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진정 바란다.
아이들이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배려해 주는 것은 가족 간에도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아는 습관이 자연스레 길러지기에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듯 싶다. 밤마다 혼자서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은 나를 여유 있는 주부로 돌아가게 한다. 이를테면 아이들 간식으로 인스턴트 식품을 택하기보다 손수 요리하여 먹이고, 아침마다 국을 찾는 남편을 위해 매일 새로운 국을 밥상 위에 올린다. 큰아이를 위해서 영어단어를 함께 외우고, 작은아이에게 동화책을 자주 읽어주는 엄마가 된다.
모든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나치게 밀착된 부부간이나 부모 자식 간이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든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사물을 볼 때도 눈에 바싹 대면 제대로 보기 어렵다. 거리를 조절하기 위해 사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야 한다. 너무 가까워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
딸들이 성장함에 따라 자식에 대한 애착이 점점 커져 감을 느낀다. 자식들 인생마저 소유하고 싶은 내 욕심은 아이들의 특기를 마음대로 정하려 들고 장래희망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아마 먼 미래에는 내 가치관으로 그들의 직업선택에 간섭할 것이다. 배우자선택에 있어서도 딸의 신랑감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사윗감을 고집할지 모른다. 그래서 모녀간에 많은 갈등을 낳게 될까봐 걱정이다.
3미터의 간격, 어쩌면 이 간격이 딸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어머니가 되게 해주지 않을까. 그 애들이 밤 아홉 시만 되면 나를 한 개인으로 존중해주듯 나 또한 그들을 소유하려 들지 않고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게 되는 3미터가 되었으면 한다.
매일 밤 뉴스를 보고 나면 떠들썩한 놀이터 속이 아닌 조용한 쉼터에서 연속극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다. 갈증 날 때 마시는 톡 쏘는 탄산음료 같은 나만의 작은 행복을 챙기는 것이다. 주부는 휴일이 따로 없기에 이 특별한 휴식은 내게 짜릿한 즐거움을 솟아나게 한다.
3미터의 밤을 떠올리면 저녁을 준비하면서도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아이들의 방해가 없는 나만의 밤이 생긴 후로 나는 전에 비해 너그러운 엄마가 된 것 같다. 몸은 3미터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3미터 더 가까이 다가선 셈이다.
* 2003년 제1회 CJ 문학상 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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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50만 원의 상금을 안겨 준 수필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쓴 것인데,
이 글을 쓰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거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은 '생각을 많이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점 같습니다.
이제야 꺼내 공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