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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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돈이 많았던 고리오 영감이 두 딸에게 전 재산을 다 쓴 뒤에 그 딸들에게 외면을 당한 채 싸구려 하숙집에서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 읽는 재미를 준다.


고리오 영감 다음으로 주목할 인물이 라스티냐크다. 그는 고리오의 둘째 딸 델핀과 사귀게 되는데 하숙집에 함께 사는 고리오 영감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애를 출세의 도구로 삼으려던 라스티냐크는 델핀을 사랑하게 되고 고리오에게 아버지를 대하듯 잘해 준다. 고리오가 병들어 죽어 갈 때 라스티냐크가 보살피고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지내 준다. 


하숙집 주인인 보케르 부인이 하숙인 고리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고리오의 시신을 감싸 줄 시트를 내 주면서 시트 값을 계산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보면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가 느껴져 지금의 이 시대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출세 지향적인 라스티냐크라는 청년이 출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발자크(1799~1850)가 19세기에 쓴 이 소설은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청년이 상류 사회의 귀부인과 친분을 맺어 신분 상승을 꿈꾸고, 고리오의 두 딸은 각각 애인를 두고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고리오는 결혼한 딸이 딴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보며 나무라기는커녕 딸의 행복을 응원하는 등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남편이 자기의 친자식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첫째 딸 나지가 아버지인 고리오에게 전하는 장면은 놀랍기까지 하다.


대답하오. 당신이 낳은 아이 중에 내 자식이 있소?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어느 아이요?라고 그는 물었어요. 장남인 에르네스트라고 대답했어요.(323쪽)    


아버지의 분별없는 사랑과 집착이 낳은 비극


부모의 사랑이 비극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사랑의 한계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보케르 부인이 파리에서 사십 년째 운영하는 싸구려 하숙집에는 여러 명이 하숙하고 있다. 그 하숙인들 중 고리오 영감은 제면업으로 큰 돈을 번 사업가이다. 부유한 농부 집에서 외딸로 태어난 그의 아내는 고리오에게 종교적 찬미와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하게 칠 년을 살고 나서 죽었다. 이들 부부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홀아비가 된 고리오에게 부성애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인 아내를 잃자 그의 사랑은 두 딸에게로 옮겨간다.   


고리오는 매년 육만 프랑 이상을 벌어들이는 부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천이백 프랑 이상 쓰지 않았다. 딸들의 기분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다. 가장 우수한 선생들이 훌륭한 교육처럼 보이는 모든 기예를 그녀들에게 가르치게 했다.(124쪽)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딸들이 원하면, 이 아버지는 서둘러서 그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그는 그 선물의 대가로 단지 한번만 껴안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124쪽)

 

고리오는 두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며 딸들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준다. 첫째 딸 나지는 레스토 백작의 부인이 되고, 둘째 딸 델핀은 뉘싱겐 남작의 부인이 됨으로써 두 딸은 상류 사회에 진입한다. 


제면업자였던 고리오는 오 년간이나 딸들과 사위들이 일을 그만두라는 종용을 해 오자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들은 고리오가 장사를 계속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내도 없고 일거리도 없는 이 노인은 마음이 오직 자식에게 쏠려 머릿속에 딸들 생각만이 꽉 차 있게 되었다. 과부가 자신의 인생길을 오직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데 바치듯이, 홀아비 고리오는 인생길을 두 딸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바친다. 


딸들은 씀씀이가 커 결혼한 뒤에도 돈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면 하숙집을 찾아와 아버지에게 돈 부탁을 한다. 고리오는 그 돈이 어디에 쓰는지 알고도 돈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가령 딸들은 무도회에 입고 갈, 금은박으로 장식한 의상을 마련하기 위해 또는 애인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돈 부탁을 하는 것이다. 


어째서 고리오는 딸들의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었을까? 금은박으로 장식한 의상이 필요한 딸에게는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살면 안 된다고, 애인을 위한 돈이 필요한 딸에게는 남편을 두고 애인을 만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거나 타일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딸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고 싶은 고리오는 영속 연금 공채를 팔기도 하고, 종신 연금을 저당잡히기도 하고, 도금한 은 식기를 팔기도 하면서 돈을 마련하며 점점 가난해진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해진 딸들은 그 익숙해진 관계를 당연시하고 보답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결혼한 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한 괴로움 때문인지 고리오는 병이 든다. 병은 회복되지 않고 가벼운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 상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라스티냐크는 고리오가 잠든 줄 알았다. 크리스토프라는 소년이 고리오의 딸들을 부르러 심부름을 갔다 와서 보고했다. 소년의 보고에 따르면 고리오의 첫째 딸은 남편과 다투고 있어서 갈 수 없다며 다 끝나면 곧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둘째 딸은 무도회에서 새벽에 돌아와 지금 자고 있어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고리오가 자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었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그 애들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368쪽)


결국 고리오는 앓다가 죽는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그가 임종할 때 그 자리에 사위들은 물론이고 두 딸도 없었다. 딸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아버지가 돈을 다 써서 가난하기 때문일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물론 아버지가 부자라면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딸들이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아버지가 자기밖에 모르는 딸들로 키웠다는 점이다. 즉 효심이 있는 딸들로 키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딸들이 원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고리오는 한마디로 말해 두 딸을 잘못 키운 아버지였다. 잘못 키웠기에 결혼한 뒤에도 아버지에게 돈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리오는 아버지로서 딸들을 어떻게 키웠어야 했을까? 고리오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제어할 줄 아는 자식으로 키웠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면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돈 문제를 해결하는 딸들이 되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것이 부모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고기를 잡아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말은 고리오에게도 필요한 말이겠다. 


자식에 대한 사랑의 한계선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한 사건이 뉴스에서 보도되기도 하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은 판단을 무디게 하므로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매로 다스리라라는 속담은 헛말이 아니다‘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도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사랑은 내려가고 걱정은 올라간다’는 속담도 있다. 사랑은 언제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어 주게 되고 걱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끼친다는 말이다. 이런 속담들만 봐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는 쉬우나 그에 비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베풀기만 하는 사랑이 좋은 게 아니다. 자식에게 집착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모로서 꼭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분별력이다. 사랑은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잃기 마련이다. 분별력을 갖고 부모가 자식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본다.

 

분별력이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 사랑에 한계선을 정해야 할 것 같다. 한계선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고리오는 자기 딸들이 먼 훗날 자기처럼 가진 것을 자식에게 모두 내 주어 빈털터리의 몸으로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터이다부모들이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되, 자식이 자신의 인생과 똑같이 살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딱 그 선을 한계선으로 정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면 자식 사랑의 부작용이 생기지 않으리라 믿는다.


파리와의 대결을 외치는 라스티냐크


고리오가 지는 해라면 라스티냐크는 뜨는 해이다. 시골 출신의 순수한 청년이었던 법대생 라스티냐크는 사치 허영 불륜 출세욕 탐욕 등이 난무하는 혼탁한 도시인 파리에 어울리는 인물답게 공부는 뒷전이고 사교계에 진출하고자 한다.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는 보트랭이 출세하는 방법에 관해 알려 준 것이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겠고, 그가 무도회에 직접 가 보고 느낀 것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겠고, 무엇보다 파리 자체의 분위기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려는 것을 암시하듯, 소설의 마지막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다음과 같이 우렁차게 말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쪽) 


라스티냐크는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리오 영감이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해 불행을 낳았듯이, 출세에 대한 집착이 강한 라스티냐크 역시 행복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행복’과 동행할 수 없으므로. 



<내가 뽑은 밑줄긋기>....................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149쪽)


돈이 바로 인생이야.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315쪽)




<리뷰를 마치며>.................... 


발자크의 작품은 「붉은 여인숙이라는 단편 소설로 처음 만났다.「붉은 여인숙」은 워낙 수작이라 내게 짙은 여운을 남겼다.  


「고리오 영감」은 아버지가 가진 것을 모두 딸들에게 주고 나서 딸들에게 외면당하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고리오 영감과 리어왕을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고 푸시킨의 단편 소설 「역참지기」가 떠올랐다. 

 

「역참지기」는 이런 내용이다. 역참에 머물던 경기병 대위가 역참지기의 딸에게 반해 버려 그녀를 데리고 사라져 버린다. 아내 없이 사는 홀아비 역참지기는 사랑하는 외딸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는 딸이 그 경기병 대위와 편안히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다.


「고리오 영감과 「역참지기」는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집착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날씨가 쌀쌀해져 오랜만에 순댓국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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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1-08 1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딸을 키우는 아빠라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자식은 부모를 닮아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부모가 아무리
싫어도 그 영향을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우리 딸들은 저와 애들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느껴요. 저는 비록 제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하고 불효자로 살고 있지만, 제 딸들은 너무 잘 자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딸 바보라 자식 자랑만 남기고 가네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5-11-09 10:12   좋아요 0 | URL
자식 사랑 실컷 하셔도 됩니다.ㅋㅋㅋ
원래 아빠들은 딸에 약하죠. 엄마들은 아들에 약하고요.
유전자의 힘은 세죠. 어딘가 모르게 부모를 닮거든요. 외모도 많이 닮고요.
저 역시 애들 키우는 일에 많이 마음 써서 키운 것 같지 않은데 잘 자라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감은빛 님 덕분에 무플을 면했네요. 감사드립니다.^^

잉크냄새 2025-11-09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그것이 고전이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겠죠.

페크pek0501 2025-11-09 11:1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소설에서 유부녀를 사귀어 출세하려는 청년을 보니, 우리 사회에서 한때 유행했던 제비족, 이 생각나더군요. 제비족들은 출세보단 돈을 뜬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젊은 남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기혼 여성을 상대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전이 말해 줍니다.^^

그레이스 2025-11-09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고리오영감은 어떤지요?
저는 을유가 좋던데,,,
화자의 마지막 다짐이 기억에 남는군요!

페크pek0501 2025-11-11 11:0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민음사를 선호하는 편이고 다른 출판사의 고리오 영감과 대조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잘 읽히는 걸로 보아 번역의 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을유는, 저는 글자 크기가 작아 요즘은 사 보지 않아요. 예전엔 그러니까 젊을 땐 을유 팬이었죠.ㅋ 고리오 영감, 쓸 게 많았는데 반 이상 삭제했는데도 긴 리뷰가 되었어요. 그만큼 언급할 만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요.^^

희선 2025-11-1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거리를 두어야 할 텐데, 고리오 영감은 그러지 못했네요 돈보다 사랑을 더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고리오 영감 같은 사람은 지금도 있겠습니다 부모가 잘해줘도 자식은 뭘 잘해줬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 자식 어려운 사이일 듯합니다


희선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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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삶이 끝난 사람은 저승에 가게 되어 이승에서의 삶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믿곤 했다. 죽고 나면 생전에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얼마나 했는지에 따라 저승의 왕이 판정하여 망자에게 상벌을 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었다. 나의 막연한 생각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 「심판」에서 재현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혼자만의 추측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나처럼 추측하는 것일까. 


「심판」은 아나톨 피숑이라는 한 남자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뒤 천국에 있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되어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담긴 희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피고인의 직업은 판사였다. 즉 판사의 위치에서 피고인의 위치로 바뀌게 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천국에서는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의 평가 기준이 이승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베르트랑 검사는 피고인 아나톨 피숑이 잘못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베르트랑 : 피숑 씨,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택했고,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당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어요.(128쪽)


이에 따르면 피숑은 세 가지의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 피숑이 ‘솔랑주’를 배우자로 택하지 않고 다른 여성과 결혼한 점이 잘못이다. 둘째, 피숑이 연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도 배우가 되지 않고 판사가 된 점이 잘못이다. 셋째, 피숑이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한 것이 잘못이다. 


베르트랑의 말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천국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나쁘게 본다는 점이다. 이는 유행하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고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들을 작가가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가. 의류 매장에서 점원이 손님에게 “이 옷이 요즘 잘 나가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남을 따라 하고 싶은 인간의 동조적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승객들의 열에 아홉은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행에 따라가고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똑같은 모습을 보았다면 질색하였으리라. ‘밀’은 「자유론」에서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일들, 고통을 느끼게 되는 상황, 이런 문제들을 지각하는 육체적 · 정신적 작용은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그러므로 각자의 경우에 맞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 제각기 타고난 소질에 맞게 정신적 · 도덕적 · 미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도 없게 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붕어빵같이 동일한 가치관과 동일한 삶의 방식으로 살게 만드는 현대 사회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다. 밀의 시각에서 보자면 스마트폰 사용이 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누구에게 스마트폰이 유용한 교육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학습에 방해가 되거나 스마트폰 중독으로 인해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베르트랑: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132쪽)


아나톨 피숑이 실패할까 봐 두려워 시도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고 한다.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것이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설명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있을 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뜻이겠다. 


아나톨 피숑이 잘못한 점이 많음을 지적한 베르트랑 검사는 아나톨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천국에서 말하는 사형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여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이 최상의 판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최악의 판결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것에 대한 아나톨의 반응 또한 신선한 놀라움을 준다. 아나톨은 지상에 돌아갈 마음이 없다며 지상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에게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딱 맞는 표현인 모양이다. 


검사의 지적이 자기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서 피고인이 항변할 수가 없는 이유가 있다. 천국에선 리모컨만 누르면 이승에서 살았던 때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화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카롤린 변호사는 피고인을 변호하느라 이렇게 말한다. 


카롤린: (계속해서 서류를 뒤적이며) 여기 피고인이 행한 5,281개 선업의 목록이 있습니다.


베르트랑: 5,281개?


카롤린: 그래요. 선업 5,281개. 그는 거지에게 적선을 했어요. 시각 장애인이 길을 건너게 도와주고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했죠. 뭐가 더 있더라? 아, 그래요. 교통사고 부상자 두 명을 구조하기도 했어요. 자선 단체들에 기부금도 냈죠.(143~144쪽)


카롤린 변호사의 열띤 변호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가브리엘: 따라서 피고인 아나톨 피숑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156쪽)


가브리엘: 그러므로 피고인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지상의 태아로 환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법정과 전생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잃게 될 거예요.(156~157쪽)


이로써 심판은 끝났다. 만약 환생을 하지 않고 검사, 변호사, 재판장 들처럼 천국에 남고 싶다면 한 번은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가령 영웅이 되는 것이다. 카롤린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불 속에 띄어들어 어린아이들을 구하다 질식사하는 것이 점수가 아주 높다고 한다. 


결국 아나톨 피숑은 태아로 환생하게 되는 판결을 받으나 환생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방도를 궁리하여 제시한다. 그 방도란 무엇일까? 이것이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직접 읽기를 권한다. 카르마와 자유 의지에 대해 언급한 대목도 있으니 자세히 읽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소설과 희곡 등 장르를 넘나들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작가가 상상한 사후 세계를 엿보는 재미에 빠져 볼 수도 있는 책이다.


희곡은 등장인물이 많아 읽기가 어려운데 「심판」은 피고인(아나톨 피숑), 변호사(카롤린), 검사(베르트랑), 재판장(가브리엘) 등 딱 네 명이어서 읽기가 수월하다. 게다가 얇기도 하고 여백도 많은 책이라 서너 시간이면 읽을 수 있어 완독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금한 이에게는 강추한다. 독자들은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 주는 이 책을 통해 사후 세계를 깊이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본다. 혹자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착하게 살아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단 다짐을 하게 될지 모른다. 자기의 생을 돌아보며 겸손의 미덕을 배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심판」의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1961년 출생)는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썼다고 하니 그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 또한 필연이 아닌가 싶다. 



....................<재밌어서 뽑은 밑줄긋기>....................


베르트랑: 피숑 씨는 신호 위반을 873차례, 속도 위반을 1,525차례 저질렀어요. 하지만 이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119쪽)


아나톨: 경찰한테 걸린 적 없어요.


베르트랑: 경찰은 못 봐도 우리는 봤어요.


베르트랑이 핸들을 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속도를 내고 있는 피숑의 사진을 보여 준다.(119~120쪽) 


 

....................<후기>....................

『심판』은 만성적인 의료계 인력 부족, 교육 개혁, 법조계 부패 같은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고, 결혼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있게 지적하기도 한다.(옮긴이의 말, 219쪽) 


이 리뷰는 위에 언급된 프랑스 사회의 문제에 중점을 두지 않고 내가 독자로서 주의 깊게 살펴본 대목을 중심으로 쓰고자 했음을 밝혀 둔다. 천재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린 천국의 법정에서는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관심이 컸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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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01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는 본국에선 그닥 인기가 없는데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를 모르겠네요.그의 소설이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면이 있는것 같아설까요?

페크pek0501 2025-10-01 12:20   좋아요 0 | URL
저도 유튜브를 통해 자국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하네요. 우리 국민 정서에 뭔가 맞는 요인이 있나 봐요.
영화 기생충, 을 극장에서 봤을 때 그냥 괜찮은 영화, 라고 생각했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큰 상을 수상할 거란 생각을 못했어요. 자국민과 타국민의 시각 차이가 분명히 있나 봅니다.^^

yamoo 2025-10-01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을 페크님 서재에서 볼 줄이야!!ㅎㅎ
베르베르 소설은 몇 권만 읽으면 대체로 서사가 비슷비슷하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만 베르베르 책이 인기가 많은데....베르나르 소설은 개미가 제일 좋더라구요. 그 많은 작품 가운데 개미를 뛰어넘는 작품은 없는 듯합니다.

사회비판 소설이라면..물론 저는 베르나르 보다는 우엘벡 쪽이라...^^;;

페크pek0501 2025-10-01 12:25   좋아요 0 | URL
하하~~ 저, 베르베르를 좋아합니다. 나무, 라는 단편집으로 처음 만난 작가예요. 제가 황혼, 이 들어가는 단편의 줄거리를 여기에 올린 바 있죠. 기발하고 상상력이 뛰어나고 ... <개미> 전 5권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개미, 라는 소재로 5권을 쓰는 능력!
서사가 비슷비슷. 메시지도 비슷한 경우가 많죠. 원래 작가들은 같은 메시지를 버전만 다르게 해서 새 버전으로 반복해 말하고 있는 거라는 걸 어디서 읽었네요.
우엘벡. 오늘 처음 아는 저자네요. 검색해 보겠습니다. 야무 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는...^^

yamoo 2025-10-01 13:53   좋아요 1 | URL
아뉘....미셸 우엘벡...아직 안 읽으셨다면 읽으시면 되것습니다!ㅎㅎ
그의 출세작 <투쟁영역의 확장>의 버전 업 작품 <소립자>를 반드시 읽어보셔요~
보다 대중적인 건 <지도와 영토>..

페크pek0501 2025-10-01 14:33   좋아요 0 | URL
ㅋㅋ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담아 놨습니다.ㅋㅋ 소립자, 를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를 기대합니다!!!

감은빛 2025-10-06 03:16   좋아요 1 | URL
야무님, [개미]를 뛰어넘는 작품이 없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페크pek0501 2025-10-09 11:05   좋아요 0 | URL
개미 1~5권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씀이죠? 기억해 두겠습니다.^^

꼬마요정 2025-10-01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습니다. 제가 불자여서 그런지 다시 태어나는 건 형벌이라는 데 격하게 공감합니다. 어디 있어도 미혹에 빠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존재 여부가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저는 깨닫지 못한 인간이라...

라떼인가요? 커피 너무 맛있겠습니다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5-10-01 12:27   좋아요 1 | URL
저도 불교 쪽이죠. 삶이 만만치 않긴 하죠.
라떼, 맞습니다. 강좌 수강 끝나고 수강생과 카페에서 차 한 잔 할 때 찍어 두었죠.
며칠 전의 사진입니다. 맛있어요!!!

그레이스 2025-10-01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는 개미 밖에...
이 안에서 드러내는 사회 문제들이 그런 것들이라구? 했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페크pek0501 2025-10-01 15:48   좋아요 1 | URL
개미를 완독하셨다면 개미밖에, 가 아니라 5권 완독의 스탬프라도 찍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미는 오디오북으로 듣기 시작했는데 이건 종이책으로 봐야 하는 거네, 라는 생각으로 5권이 아니라 1권만 사서 읽고 나머지를 살 것인지 결정하자고-이제 이렇게 영악해졌어요.- 맘 먹고 있어요. 베르베르의 책을 읽다 보면 천재작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나리자 2025-10-03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베르베르의 작품은 고양이1,2만 읽었네요.. 프랑스의 사회문제를 얘기한 작품이군요.
지금 현재도 프랑스는 난리인 것 같더군요.

긴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네요. 모쪼록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페크님.^^

페크pek0501 2025-10-03 19:13   좋아요 1 | URL
아, 고양이, 는 윌라에 전자책1,2 있어요 베르베르 책이 윌라에 많아요. 문명, 개미. 행성 등. 참고로 김영하 작가의 책도 윌라에 많더라고요.
프랑스가 대규모의 시위 등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놀랐지만, 여행 가면 다들 실망한다고 해서 더 놀랐어요. 쓰레기가 많고 불친절하다니... 파리, 하면 멋있는 도시 같은데 말이죠.
모나리자 님도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꾸우벅^^

희선 2025-10-05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희곡도 썼군요 몰랐습니다 형벌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맞겠습니다 저도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런 기억이 없다 해도... 한번뿐인 삶이니 즐겁게 살기는 해야 할 텐데, 그것도 잘 안 되는군요 그냥 자기대로 사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10-09 11:04   좋아요 0 | URL
희곡은 두 권을 쓴 걸로 알고 있고 소설을 많이 쎴죠. 기억, 이란 소설도 꽤 흥미진진해서 오디오로 듣다가 이것도 종이책으로 사야 하나, 하고 있어요. 대단한 작가예요.
사람으로 환생하는 게 가장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네요. 역시 작품엔 반전이 있어야 해요.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거든요. 잘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어요. 인생살이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죠. 남을 따라 살기보다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덜 경쟁하는 사회가 될 거예요.^^

감은빛 2025-10-06 0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나르 베르나라의 [개미]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읽고 받았던 충격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어떻게 이런 작가가 있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개미]에 등장하는 가상의 책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나중에 펴낸 것을 보면서도 재미있고 신기한 작가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개미] 이후에 낸 그 수많은 작품들은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저 위에 야무님 말씀처럼 [개미]를 넘어서는 작품은 없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5-10-09 10:59   좋아요 0 | URL
오! 베르베르 작가의 전문가들이 많군요. 코로나 전인 것 같은데 제3인류, 라는 책을 오디오로 듣고 그 역량에 깜짝 놀랐죠. 종이책으로 만난 건 나무, 라는 단편집인데 멋졌어요. 개미를 극찬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 5권이라 읽을 엄두가 안 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개미, 에 도전해 봐야겠네요.^^
 
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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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실제 사건을 다룬 소설이 「하얼빈」이다. 제목이 왜 하얼빈일까? 사살한 곳이 중국의 하얼빈이어서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아침에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 제국주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일본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에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안중근이 제 손으로 보드카를 따라 마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내 우덕순 앞으로 내밀었다. 우덕순은 일본 글이 서툴러서 읽기를 더듬거렸다. 

우덕순이 말했다.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온다고?(103~104쪽)


안중근은 이토를 쏘러 가자는 말에 두서없이 따라나선 우덕순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덕순의 질문 없음을 안중근은 신뢰했다.(135쪽)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여러 신문들을 사서 읽었다. 신문 기사들은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는 날짜와 시간을 점점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나 명시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25일에서 26일 사이일 것 같았다.(139쪽)


둘은 계획을 짜서 우덕순은 채가구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이토를 암살하기로 한다. 둘 중 한 사람은 이토 암살을 성공해야 했다. 안중근이 이토를 총으로 쏴서 이토가 죽든 죽지 않든 안중근은 바로 체포될 것이므로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우덕순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에게는 처와 자식들이 있다. 우덕순 또한 결혼해서 딸을 얻었는데 딸은 죽었고 처는 서울에 산다. 두 사람은 가족과의 이별도 각오해야 했다. 


사건 당일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총을 쏘는 데 성공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는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우덕순 역시 체포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인가? 일본인들이 보면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애국적인 인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조선 측에서 보면 주한 특파 대사로서 을사조약(1905년)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1905년에 초대 조선 통감으로서 우리 국권을 강탈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것에 대해 애국의 문제만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러면 그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 된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싸운 의거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애국심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쓴 ‘동양평화론’(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 실현을 위한 미완성의 논책)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안중근의 국제 평화주의 사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었고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그가 말하는 동양 평화란 자국의 평화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자국의 평화만을 외쳤다면 국가 이기주의라는 오명이 붙여질 수 있다.


최근 들어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던 트럼프에게 반감을 품곤 한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쇠퇴한 지역 산업을 되살리고 세수 확대를 통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매일신문, 2025년 8월 24일) 


미국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알겠으나 미국보다 더 어려운 국가가 많다. 약소국에 대한 배려 없는 약육강식의 일방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각각 그 나라의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트럼프도, 안중근도 애국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트럼프가 지구촌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고 있는 인물이라면, 안중근은 약육강식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두 인물은 그렇게 비교가 되어 흥미롭다. 


한편 관세를 무기로 타국에 압력을 가하며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겠다는 것은 오직 트럼프의 애국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 생각엔 애국심보단 이기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 나라의 이익만 중시하는 것은 자기 이익만 중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는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80년대 만 해도 학교에서는 나라 사랑의 한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곤 했다. 그러나 나라 사랑만을 강조한다면 미국 우선주의나 일본 제국주의를 닮을 위험성이 있다. ‘나라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저항 정신’이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에 그치지 않고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위대한 인물이다. 


자유와 평화는 누구의 것만이 아니어야 하고, 어느 국가의 것만이 아니어야 한다. 자유와 평화는 이기주의와 애국주의를 극복하여 전체 인류 사회의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안중근 의사의 염원이기도 할 것이다.


사형장에는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전옥이 통역과 서기를 데리고 미리 와 있었다. 안중근이 중앙에 앉고, 미조부치 일행은 연극의 관객처럼 빙 둘러앉았다.

구리하라 전옥이 집행을 선언하고 나서 안중근에게 말했다. 

―할말이 더 있는가?

안중근이 대답했다.

―없다. 다만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르게 해다오.

구리하라가 말했다.

―허락하지 않는다.(276~277쪽)

 

옥리들이 안중근의 머리에 흰 종이를 씌웠다. 안중근은 종이가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옥리가 안중근의 겨드랑이를 팔에 끼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옥리가 안중근의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대 바닥을 밟았다. 바닥이 꺼졌고, 안중근의 몸이 허공에 매달려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277쪽)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사망한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그 뒤 35년이 지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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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28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칼의 노래>이후 김훈을 제대로 보여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양반 요즘 왜 이래 ~‘ 하는 시큰둥한 반응에서 ‘아 역시 김훈‘ 이라는 감탄사를 뱉게 한 책이죠. 대단한 소설에 비하여 비슷한 시기 영화화된 <영웅>,<하얼빈>은 ‘이걸 영화라고~‘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크pek0501 2025-08-29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칼의 노래>1, 2를 읽었는데 그땐 왜 그 책이 호평을 받는지 잘 몰랐어요. 이번에 하얼빈을 읽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의 힘을 느꼈죠.
영화 <하얼빈>은 넷플릭스에 있던데 보기 시작하다가 껐어요. 소설 하얼빈의 리뷰를 쓰고 나서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두 개가 헷갈리면 안 되니까요.ㅋㅋ

stella.K 2025-08-28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 광복절에 영화로 봤어요. 보면서 감독은 원작을 그대로 살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중근과 함께 했던 일본 통역을 맡은 김상현 역의 조우진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뭘 발설을 하죠. 그러다 장면이 바뀌어 일본군 장성과 겸상을 하는데 고기를 아주 조금 잘라서 김상현 앞에 밀어주면서 먹으라고 하죠. 처음엔 미적거리다 결국 먹는데 환장할 맛이겠죠. 둘이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그 장성이 이번엔 아예 통째로 김상현 앞에 던져주고 먹으라고 해요. 결국 유혹을 못 참고 개걸스럽게 먹다 결국 눈물을 토하죠. 이게 책에도 표현됐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김훈 식 실존주의 같다는 느낌이 들어 책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들더군요.
영화 진짜 잘 만들었요. 혹시 시간되시면 함 보세요.^^

페크pek0501 2025-08-29 11:59   좋아요 1 | URL
광복절에 보셨다니 뜻깊은 날에 보셨네요. 넷플에 하얼빈이 있더군요. 저도 봐야겠어요. 그런데 대체로 소설보다 영화가 더 나은 경우가 드물어서 기대하지 않게 되더군요. 개걸스럽게 먹는 장면이 소설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ㅋㅋ없었던 듯...
식욕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긴 한데 자기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는 건 공감이 갑니다.
이문열 원작의 사과와 다섯 병정, 이란 단편이 있어요. 책으로 먼저 읽고 유튜브를 통해 TV 문학관으로 봤는데 실망이 되더군요. 원작과 다르게 나오면 원작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시청을 다하고 나니 드라마는 또 그것대로 새롭게 재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회 되시면 TV 문학관으로 보십시오.^^

페넬로페 2025-08-29 18:46   좋아요 2 | URL
영화 하얼빈의 주인공인 현빈 배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도 이 영화에서
조우진의 저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진짜 명연기였어요^^

페크pek0501 2025-08-30 12:11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 님도 스텔라 님이 말한 그 장면을 인상적으로 보셨군요. 저도 어제 넷플릭스로 하얼빈 영화를 봤어요. 그가 일본의 밀정이 되었으니 조국을 배반하고 동지의 생명을 팔아서 고기를 얻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죄책감, 모멸감, 슬픔 등 복합적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을 듯합니다. 결국 그는 일본 장교를 죽이죠. 그의 그런 감정과 눈물이 없었다면 일본 장교를 죽이는 일로 이어지지 못했겠죠.

그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둘만 나오는 장면이고 게다가 조용한 침묵이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여러 사람이 나오고 의견이 충돌하거나 몸으로 싸우거나 해서 시끄럽다가 그 장면은 조용해서 관객을 집중시키죠. 이것이 감독의 명연출이겠죠.
현빈 배우는 존재감이 미흡한 감이 있어요. 현빈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연기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카스피 2025-08-29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사살한것은 알고있었으나 또다른 역에서 우덕순의사가 이토를 사살하려고 대기한 사실은 처음 일았습니다.하얼빈 의거는 이 두분외에도 유도하와 조도선의사가 함께 거사를 기획했는데 이분들은 아는 분들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역사교육이 잘안된 탓인데 후손으로 참 죄송할 따름이네요.

페크pek0501 2025-08-29 12:02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통해 우덕순, 이란 인물을 알았네요. 그 외에 많은 인물이 있었을 거라는 걸 상상할 수는 있어요. 바다의 역사, 관한 책을 보면 어떤 땅이나 산을 발견했다고 하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구성원들이 있기 마련이죠. 함께 다니다가 발견하는 거예요. 의거니 혁명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대표 인물만 알지요...^^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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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80년에 있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일로 지금까지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며 악몽을 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대였고 인간의 잔인성이 상상을 초월했던 시대였다. 작가가 그 시대를 아파하며 쓴 걸로 알고 있는데 대다수 독자들 또한 아파하며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 역시 읽어 가는 도중 마음이 괴로워 책을 덮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는지라 허투루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기에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이 많았다. 그런 문장 중 골라 발췌하여 옮기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소설은 6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장마다 시점과 화자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말해 두어야겠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17쪽)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91쪽)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95쪽)



대학가와 가까운 그녀의 동네는 전염병이 지나간 것처럼 인적 없이 괴괴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자 아버지는 기다렸던 듯 달려나와 그녀를 들이고는 대문을 잠갔다. 다락에 그녀를 감춘 뒤, 다락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비키니 옷장을 옮겨놓았다. 오후부터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어내는 소리,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아니라우, 우리 아들은 데모 안했어라우, 총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라. 그들은 그녀의 집 초인종도 눌렀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딸이 고3이오. 아들들은 인자 중학생 초등학생인디, 누가 데모를 했겄소.(96~97쪽)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다락에서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시청 청소차들이 주검들을 싣고 공동묘지로 갔다고 말했다.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뿐 아니라, 상무관에 있던 관들과 미확인 시신들까지 모두 싣고 갔다고 했다.(97쪽)



그 순서가 끝나면 그들은 침착하게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소총의 개머리판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그들은 등과 허리를 밟았습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내가 몸을 뒤집으면 군화로 정강이를 짓이겼습니다.(106쪽)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쪽)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할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115~116쪽)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116쪽)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117쪽)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중략)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166~167쪽)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170쪽)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73~174쪽)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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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09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읽어야할 것 같긴한데 역시 아픈 역사는 큰숨 한번 내쉬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요즘 여기가 좀 뜸해져서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좀 늦었지만 설까지는 유효하니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자주 뵈어요.^^

페크pek0501 2025-01-13 09:26   좋아요 1 | URL
5.18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많았죠. 가장 아프게 느낀 게 <소년이 온다>였어요.
한강 작가의 상상력이 압권. 소설을 습작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교과서가 될 듯해요.
시점이나 화자를 다르게 쓰는 등 방식의 다양함을 배울 수 있거든요. 피해자의 어머니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어요.
스텔라 님도 저도 새해 들어 글이 올리지 않아 새해 인사를 나누지 못했네요. 스텔라 님도 새해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고 바라는 바를 이루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스텔라 님과 나는 오래된 친구...^^ㅋㅋ

2025-01-09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5-01-10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사놓기는 했는데, 노벨상 수상 소식 이후에 책을 찾아보려고 하니 못 찾겠네요. 분명 책장 어딘가 있을텐데, 조만간 책도 찾을겸 책장 정리 한 번 해야겠어요.

지인들이 다들 너무 읽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전철에서 읽다가 눈물이 나서 덮었다는 얘기도 하구요.

페크pek0501 2025-01-13 09:32   좋아요 0 | URL
저도 사 놓기는 오래전에 사 놨더라고요. 둘째애가 몇 년 전에 읽고 눈물이 났다고 해서 잘 읽었다, 라고만 하고 저는 읽지 않았어요. 워낙 5.18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접했는지라 또 다 아는 사건이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읽어 보니 꽤 꼼꼼히 취재해서 쓴 소설이더라고요. 발로 뛴 소설인데다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죽은 사람의 영혼이 생각하는 걸 쓴 부분.
읽기가 좀 괴로운 소설이에요.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감은빛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희선 2025-01-14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흘렀다 해도 그때 일을 겪은 사람은 잊지 못하겠습니다 무서운 꿈도 꾸고 여전히 힘들겠지요 그런 걸 치료해주는 것도 있어야 할 텐데... 지나간 일이지만 아주 지난 일이 아니기도 한 듯합니다 저도 아직 못 읽었네요 이 책은 언젠가 볼까 합니다

페크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1-17 21:25   좋아요 1 | URL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고 게다가 악몽까지 꾼다면 괴롭겠지요. 마음의 병은 잘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도 이제야 읽었습니다.
매일 나갈 일이 있어 댓글이 늦었습니다. 희선 님도 매일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2025-01-18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0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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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독일 로볼트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이전의 주로 고전적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과 비평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벤야민의 글쓰기 방식이, 여기서는 현실과 초현실 세계의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아포리즘적이면서도 이미지적인 성찰의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남다르다. 물론 동시에 그 탄생배경에 대한 사전이해 없니는 독해가 힘들다는 점에서, 그의 몇몇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알라딘 책소개’에서. 



내가 수강하는 강좌에서 언급되었던 책을 집에 와서 찾아보았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라는 책이었다. 접힌 부분이 많았다. 그중 일부를 옮겨 적고 단상을 적어 보았다. 



계단 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織造)의 단계가 그것이다.(93쪽)


⇨ 이러한 단계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음미하며 읽어 볼 만한 글이다.


난 그저 생각이 흐르는 대로 초고를 쓰고 나서 단락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궁리하고, 단락의 순서를 어떻게 바꿀지 궁리하고, 마지막 단락이 깊은 여운을 주는 글이 되게 하려고 궁리한다. 퇴고할 때는 세심히 보며 삭제할 문장을 고르고, 잘못된 문장을 수정한다. 



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알게 되는 곳


그곳은 그의 실패에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고 그 약점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강한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배를 업신여기고 우리의 불운을 부끄러워한다. 승리와 행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강점을 인식한다고?!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바로 우리의 강점만큼 우리의 깊은 약점들을 드러내는 게 없다는 걸 대체 누가 알지 못할까?(172~173쪽)


⇨ 인간은 성공할 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성공하면 자신을 높은 위치에 두고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오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산다.


오만한 자는 하나의 그림자를 달고 있는데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일련의 실패들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우리는 그 실패들 속에서 온갖 부활의 술책들을 배우고 용의 피로 목욕하듯이 수치심 속에 목욕한다. 명성이든 알코올이든 돈이든 사랑이든, 사람은 자신의 강점이 있는 곳에서 명예를 모르고 치욕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며 침착함도 모든다.(173쪽) 


⇨ 실패를 경험하면 그것을 통해 배울 점이 있기 마련이어서 부활의 기회를 갖게 된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말리는 충고는 하지 않기


충고를 부탁받은 사람이 제대로 충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고를 부탁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다음 그 의견을 승인해주는 것이 좋다. 자신보다 더 똑똑한 의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남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충고를 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185쪽)


⇨ 나는 나보다 더 똑똑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고민이 있으면 친구에게 전화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어보기도 한다. 균형 잡힌 사고를 가지기 위해서 친구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다. 이때 친구의 의견에 동의할 때가 많다. 자신만이 똑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훌륭한 작가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227쪽)


⇨ (이 글은 238쪽에도 나와 있다. 중복 게재를 한 것은 출판사의 실수인 듯.) 


훌륭한 작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남의 문장을 베껴 쓴다면 모를까. 오늘날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베껴 쓰면 들통나기 십상이다. 


‘생각하기의 실현’이 없다면 생각하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함이 아닌가.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69쪽)



열악한 작가는 착상이 많이 떠올라 그 착상들 속에서 기력을 탕진해버린다. 이것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열악한 달리기 선수가 사지를 맥 빠지게 움직이거나 지나치게 활발하게 움직이느라 기력을 탕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악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227쪽)


⇨ 나의 의견을 말하면 글을 쓰면서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이 글을 부르기 때문이다. 기존의 글이 새 글을 부른다는 뜻이다. 즉 글을 쓰면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말이다. 

  




부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심지어 집중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다보면, 거의 모든 책에서 그 사람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은 심지어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적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편소설에서든 장편소설에서든 노벨레에서든 그 사람은 항상 새롭게 변신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의 사실이 추론된다.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116쪽)


⇨ 상상력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감탄스럽다. 상상력이란 접어놓은 부채를 펼쳐보는 것과 같은 능력이라는 것. 기억해 두고 싶다.


이 책은 난해한 문장이 있긴 하지만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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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25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얼마만의 리뷰입니까?
쓰신다더니 정말 쓰셨네요. ㅎ
저는 왠지 벤야민의 책은 어려울 것 같아 감히 손대기가 좀 그렇던데
어렵지 않았나 봐요. 하긴, 이런 사람의 책을 읽어두면 보약 먹은 기분들지 않을까요?
저도 언제가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참, 서재 손 좀 보셨네요. 산뜻하네요.^^

페크pek0501 2024-04-25 22:27   좋아요 2 | URL
올해 들어 처음 쓴 리뷰 같습니다.
난해한 부분이 있지만 읽을 만합니다. 보약 먹은 기분... 크하하~~~
발터 벤야민 같은 유명인의 책은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봄이 왔으니 겨울 풍경을 내리고 봄단장을 했어요.^^

서니데이 2024-04-25 2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서재 이미지를 봄 개편하셨군요.
벚꽃과 목련의 시기는 지났지만, 요즘 철쭉이 피고 화사한 시기예요. 연초록으로 새로 나온 잎들이 보기 좋네요.
이번주 비가 와서 조금 덜 더웠는데, 다시 오늘부터는 기온이 올라가서 주말에 29도 가까이 올라간다고 해요.
자주 달라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4-04-25 22:28   좋아요 2 | URL
봄단장을 했지요. 봄이 왔으니까요.
우리 동네에는 아직도 꽃잔치를 벌이고 있어요. 오늘 나가 보니 아직도 피어 있어요.
29도라니, 갑자기 여름 날씨가 되는 거군요.
서니데이 님도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2024-04-26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27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