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강명, 「미세 좌절의 시대」


아내와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배달이라는 서비스에 값을 치렀고 그 가격에 배달 기사가 합의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걸까? 비가 오건 그렇지 않건, 배달 기사의 안전 운행은 오로지 그 자신이 신경써야 할 몫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배달 기사가 빗길을 달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음식을 주문했다면, 그의 안전에 대해 우리도 약간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30~31쪽)


만약 후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대만 폭스콘 공장의 비인간적인 노동 실태가 폭로됐을 때 우리는 애플 제품도 거부해야 하는 걸까? 내가 잠시라도 어떤 사회 시스템에 간여한다면, 그 시스템 전반이 공정하고 정의로운지,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걸까?(31쪽)


누군가는 그런 문제를 조사하고 있을 테고, 그 결과를 통해 법이나 협약이 개정되겠지, 나는 그 법이나 충실히 따르면 되지, 하다가 혹시 그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논리 아니었나 싶어 불안해진다. 전체 시스템이 사악할 때 “나는 정해진 법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평범한 악’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시스템을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 한다.(31~32쪽)





**













이성복, 「래여애반다라」


시에 대한 각서

                                            이성복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31쪽)






고독은 당신이 남긴 빈 잔

  고독은 낮잠 자는 고양이

    고독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터진 풍선

      고독은 햇볕이 쬐는 마당의 침묵

         도시인은 곳곳에서 고독을 느낀다

         - 위의 시를 흉내 내어 페크가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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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2-17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페크님의 시가 이성복 시인의 시보다 훨씬 더 좋아요!
저라면 첫 행을 이렇게 쓸 것 같아요.

고독은 당신이 마시다 남기고 간 잔에 아주 조금 남은 술

장강명 책의 저 인용문들은 정말 생각할 꺼리가 많은 문제죠.
사회의 시스템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고, 그 안에서 최대한 부조리를 제거하고
정의를 향해 가야할텐데,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부조리인가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죠.
언제나 어디서나 겉으로 보이는 이면에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이미 혼돈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페크pek0501 2025-02-18 08:52   좋아요 0 | URL
제가 쓴 시가 좋다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ㅋㅋ
감은빛 님의 시 구절이 멋지군요.
사회는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사회를 만들죠. 인간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하나의 사회를 형성해 가죠. 우리 모두 사회 시스템에 관여하는 셈. 나라마다 사회의 양상이 다른 것은 그때문이겠죠. 요즘처럼 국민들의 생각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흔치 않지요.
언제나 양면성을 봐야 하는 게 어려운 문제예요. 이쪽에서 보거나 저쪽에서 보거나 뒤집어 볼 때 달라지는 것들이 있어요.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그 이면을 볼 수 없겠죠.^^

잉크냄새 2025-02-17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마침 <동물해방>을 읽고 있는데 비슷한 딜레마에 봉착하더군요. 어려운 문제지만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독은 눈꺼풀에 어른거리는 햇살의 춤사위.....라고 하나 덧붙여봅니다.

페크pek0501 2025-02-18 08:56   좋아요 0 | URL
저도 배달시키려 할 때 비가 오는 날은 머뭇거리게 되어요.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 때문이죠. 동물해방, 책이 궁금하군요. 저도 동물에 관한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워낙 두꺼워서 언제 완독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한 걸음씩 나가는 게 목표일 뿐. 고독의 멋진 시 구절 한 줄에 감사드립니다.^^

희선 2025-02-18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음식 배달은 시켜 먹지 않지만(거의 안 사 먹어요), 택배는 받는군요 뭔가 살 때 별 생각 없을 때도 있는데, 아주 더울 때는 안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기도 하네요 어제 알았는데 제가 물건 산 곳에서 쉬는 날에도 물건이 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바뀌다니, 그런 거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하는 사람도 많이 힘들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페크pek0501 2025-02-18 09:00   좋아요 0 | URL
음식 배달은 주로 애들이 시키죠. 택배를 배달하는 분들이 무척 힘들게 일한다고 해요.
저는 그래서 요즘 1층 현관문 앞에 두고 가시고 문자 남겨 달라고 메시지를 쓰고, 제가 1층으로 내려가서 갖고 옵니다. 알라딘 택배도 그런 식으로 책을 받아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25-02-19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행복이 인간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살아야 하는데, 잘사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의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잘산다는 말은 인간성이 원활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성이야말로 인간 행복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80쪽)


인간성이란 인간다운 기능이다. 인간의 기능은 생식, 감각, 사유로 나뉜다. 생식은 식물도 하는 일이며, 감각은 동물에게도 있다. 하지만 사유는 오직 인간에게만 내재된 기능이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사유를 인생의 본질로 삼았을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따라서 행복은 사유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선한 삶이고, 삶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80~81쪽) 


쇼펜하우어(1788년생)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 있는 글이다.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사유하며 ‘선한 삶’을 사는 데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유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겠네. 선한 삶을 살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겠네. 여기서 경제적 요건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

모든 사람의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은 전적으로 선의 향수에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혼자만 그 선을 향수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복지를 홀로 향수하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혜택 받고 운이 좋기 때문에 자신을 더 축복 받은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61쪽)


예를 들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은 전적으로 지혜와 참된 인식에 있을 뿐,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참된 인식을 갖고 잊지 않다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지혜, 즉 그의 진정한 행복에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기뻐하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염두에 두고 기뻐하며, 그러므로 앙심이 깊고 악의가 있는 동시에, 진정한 지혜를 모르고 충실한 생활의 평안도 알지 못한다.(61쪽)


스피노자(1632년생)의 「신학정치론」에 있는 글이다.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지혜와 참된 인식에 있을 뿐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게 아니고, 자기만 참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자신이 남들에 비해 더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타인의 불행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이란 지혜와 ‘선한 삶’이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겠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내용이 쉽지 않은 책이라서 술술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스피노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읽고 있다. 다행히 유튜브를 통해 스피노자 관련 강좌를 많이 접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 





***

내 생각 : 

쇼펜하우어나 스피노자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생에는 행복한 날과 불행한 날이 교차하기 마련 아닌가. 맑은 날도 있고 비바람 치는 날도 있는 것처럼.


누구나 다 알 듯이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아니라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부자인가 빈자인가 하는 것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속에 행복은 이미 깃들어 있다. 아무리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행복은 멀어진다. 두 철학자가 말한 지혜와 ‘선한 삶’을 추구할 때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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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12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이가 들면 좀 더 마음도 넓어지고 관대해지고 그럴줄 알았거든요. 근데 갈수록 더 쫌생이가 되는 느낌. 싫은건 왜 더 많이 싫어지고, 보기 싫은 사람은 왜 더 보기 싫어지는지.... 지혜와 선한 삶은 거저 주어지는게 아니네요.

페크pek0501 2025-02-13 10:59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이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써 주신 듯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속 좁은 선배뻘보다 후배뻘 사람을 만날 때가 더 즐거워요. 조심할 게 없어서요. 저도 만나기 편한 선배가 되어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아요. 너그러움, 어디 파는 데 없나요? 하하~~

stella.K 2025-02-13 11:41   좋아요 1 | URL
고독이란 약국에 가서 알아보시면 약을 줄지도...ㅋㅋ 쇼펜하우어 책 읽어보고 싶네요.^^

페크pek0501 2025-02-13 11:57   좋아요 1 | URL
갑자기 나타나신 스텔라 님! 고독이란 약국이 어디 있나요?ㅋㅋ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다 보면 진지한 글도 있지만 코믹한 글도 만날 수 있습니다.

숲노래 2025-02-12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고스란히 즐거이 부르는 노래로 흐른다면, 주머니에 돈이 있든 없든 그저 즐겁습니다. 마음에는 아무 노래가 안 흐르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든 있든 그저 안 즐겁겠지요. 돈살림이 어느 만큼인지 쳐다볼 노릇이 아니라, 마음살림을 얼마나 즐겁게 노래로 일구는가 하고 바라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하루에 열끼나 스무끼를 먹어치워야 배부른 삶일 수 없듯, 얼마나 벌어들이느냐에 치우치다가는 으레 마음을 잊고 잃을 테니까요.

페크pek0501 2025-02-13 10:55   좋아요 0 | URL
오! 숲노래 님, 오랜만의 방문이십니다. 잘 지내시죠?
아이들 사진 올린 것을 보곤 했는데 그 귀엽던 아이들이 많이 컸겠습니다.
돈살림만큼이나 마음살림도 중요하겠죠. 자기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가까운 길로 가는 지름길인 듯합니다. 좋은하루보내십시오. 댓글, 고맙습니다.^^

희선 2025-02-14 0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 행복이라고 하면 넉넉하게 사는 걸 생각할 때가 많은 듯합니다 그게 아닐 텐데...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닐 것 같아요 돈이 많은 사람도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있겠습니다 고마워하는 마음,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고마워할 게 아주 많은데, 그런 걸 자주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02-14 11:2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되는 일이 없네, 이러면서 불평을 갖다가 그래도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살 돈이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고 생각하면 기분이 풀어집니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다면 행복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하루보내세요.^^

그레이스 2025-02-14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두 공감하는 내용! 이네요~♡
알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게 항상 문제죠.ㅠㅠ

페크pek0501 2025-02-14 11: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 감사할 게 얼마나 많은가요? 전쟁을 치르는 나라를 생각만 해도요. 좀 겸손해지고 싶어요. 좋은하루보내세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본 일이 거의 없다. 한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30쪽)


그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도, 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31쪽)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31쪽)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31쪽)


작가가 가엾은 거지를 보고 그냥 지나친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자기반성의 소회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거지 동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으로 나뉠 듯하다. 


앉은뱅이의 배후에 왕초 거지가 있다는 것은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어도 동냥을 외면하기보다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주는 게 낫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오죽하면 동냥까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둘째는 앉은뱅이라도 돈벌이를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걸인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걸인들이 있는 것이라며 적선을 반대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걸인들에게 적선하지 말고 생계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계 기반을 마련해 주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한데, 그들은 당장 매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게 시급한 형편이라면 어쩔 것인가.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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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2-12 0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보면서 박완서 작가 글이 아닐까 했는데, 맞았네요 예전에 한번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박완서 작가 글은 많이 보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작가 글도 비슷하겠습니다

지금은 글에 나온 것 같은 사람이 거의 안 보이는 것 같네요 사는 걸 아주 다르게 바꿔주는 건 무척 힘들 듯합니다 오래 그렇게 살면 다르게 사는 건 힘들겠지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2-12 16:06   좋아요 1 | URL
박완서 작가 님의 글은 개성과 맛깔스러움을 느낄 수 있죠. 소설도 잘 쓰시지만 에세이도 수작이 많아요. 이 책은 작가가 생전에 남긴 660편의 에세이 중에서 따님이 가려 뽑아 엮은 것이라, 아마도 작가 님이 남긴 가장 나은 에세이집이 될 것 같아요. 소설도 많이 쓰셨는데 에세이만 660편을 쓰셨다니 위대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재래식 시장에 가끔 갈 때가 있는데 거기서 앉은뱅이를 보곤 합니다. 사실 적선하는 게 왕초 거지만 배부르게 하는 거라고 해서 뭐가 정답인지 단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고양이라디오 2025-02-12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읽어보고 싶네요.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저도 한 때 박완서 작가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속는셈치고 라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5-02-12 16:08   좋아요 1 | URL
아마 이 책을 읽으시면 좋다, 할 것입니다. 돌직구를 던지는 글이 있거든요.
예. 속는셈치고~~~ 좀 속으면서 살자고요.^^

잉크냄새 2025-02-12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지하철을 타던 시절에는 주머니에 잔돈을 넣고 다녔어요. 음악을 틀고 지하철 바닥을 기며 구걸하는 분들을 보면 그 분별심이 들기 전에 그냥 잔돈을 바구니에 넣었어요. 몇 푼의 적선이 고민과 갈등과 의심보다는 맘을 편안하게 하더군요.

페크pek0501 2025-02-13 11:06   좋아요 0 | URL
아, 일부러 동전을 준비하시는 잉크냄새 님,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는 듯합니다. 얼마라도 적선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그래도 이 세상이 훈훈한 세상을 향해 가는 걸 증명하는 듯 여겨집니다. 저도 모른 척하지 않고 적선에 동참하겠습니다. 좋은하루보내십시오,^^

바람돌이 2025-02-12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동냥하는 분들 보이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넣곤했는데 요즘은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동냥하는 분들이 안 생기려면 국가에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와야 하고, 또 동냥이 밥벌이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걸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항상 그런 이성과 잠시의 내 마음의 편안함이 갈등을 일으키게 하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5-02-13 11:15   좋아요 0 | URL
댓글 중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하는 부분은 반전입니다.ㅋ 혹시 카드만 갖고 다니시는 건 아닌지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책을 마련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언제나 없어지려나요. 오늘 부산 세모녀의 극단적 선택, 의 신문기사를 보고 놀랐고 가슴 아팠네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헤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

가난한 사람들이란 원래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라 할 수 있죠. 나는 그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뒤틀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는 눈조차 전혀 다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곁눈질해 보고, 언제나 겁먹은 눈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혹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꼴사나운 놈이라고 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거나 아닐까, 이쪽에서 보면 어떻고 저쪽에서 보면 어떨까 하고 나를 흉보고 있는 게 아닐까?―이런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이고 따라서 누구한테도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엉터리 문학가들이 별의별 수작을 다 늘어놓는다 해도 가난뱅이임에는 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140~141쪽, 하서 출판사.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경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다고 느껴지는 글을 발견할 때 나는 감탄한다. 이 글을 읽고도 감탄했는데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을 경험한 적이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난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래전 그의 다른 작품 「죄와 벌」을 읽을 때 이미 그가 탁월한 역량을 가진 작가임을 알았다. 살인자가 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서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살인자의 심리를 잘 알아야 할 만큼 작가는 심리학자여야 할 것 같다. 





















**

공연을 하는 서커스단에서 지내는 난쟁이는 키가 작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난쟁이가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느 날 키가 커져 버렸다. 95센티미터였던 그의 키가 무려 175센티미터가 되었고 게다가 아주 잘생긴 미남으로 변했다. 난쟁이의 이름은 발랑땡이었다. 발랑땡은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동료들의 공연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발랑땡은 공연장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제르미나 양을 바라보았다. 곡마사는 말 위에 서서 팔을 관중 쪽으로 뻗어, 갈채에 웃음으로 답하고 있었는데, 발랑땡은 그녀의 웃음이 결코 자신에게 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고독이 지겨웠고 수치스러웠다. 그는 조금 전에 빠따끌라끄, 자니도 형제들, 줄넘기 곡예사 프림베르 양, 피프를랭과 일본인들 등 써커스단의 동료 대부분이 무대 위에서 줄지어 행진하는 것을 본 터였다. 그들의 공연이 모두 그를 새로이 좌절하게 했다.

“끝났어.” 그가 한숨지었다. “결코 공연장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야. 이제 바르나붐 써커스단에 나를 위한 자리는 없어.”(마르쎌 에메의 ‘난쟁이’에서)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280쪽. 


서커스단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키가 크고 미남인 것은 인생을 사는 데 유리한 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커스단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소설의 글감이 될 수 있는 이유일 듯하다. 


키가 커진 그는 서커스단에서 쓸모가 없어진 존재가 되었으므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 뒤 난쟁이였던 시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가족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경험도 없으니 생계를 위해 취업하기조차 힘들 테니 말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 수록된 마르쎌 에메의 소설 ‘난쟁이’는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것, 무엇이든 그 가치는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난쟁이의 키가 커진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뒤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풀어 가는 재미있는 단편 소설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다른 작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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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06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한 작품이예요.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읽어보고 싶네요

페크pek0501 2025-02-06 22:02   좋아요 2 | URL
가난한 사람들, 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저 역시 좋아합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는 14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데 하나씩 읽어 보는 재미가 있답니다. 330쪽까지 읽었어요. 추천합니다!!!

서니데이 2025-02-06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 은행잎이 떨어진 유리창을 보니 가을에 찍은 사진이네요. 천장도 일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 보면 밝은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것 같았는데, 없어진 이전의 것들을 아쉬워한다면 새로 생긴 것들을 좋아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페크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5-02-07 12: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지난 가을에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언젠가 써먹어야지 했는데 이제 올렸네요.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표현, 참 좋네요.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요. 서니데이 님도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2025-02-07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7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8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5-02-07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시절이 길었대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자신이 가난했다고 다 그렇게 쓸 수 있는건 아니죠. 도스토예프스키니까.... ㅎㅎ 마르셀 에메라는 작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니 또 좋네요. ^^

페크pek0501 2025-02-08 13:08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창비세계문학단편선, 덕택에 새로운 단편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어요. 국가별 시리즈라서 하나씩 읽어 볼 생각입니다. 위의 책은 프랑스편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2-12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궁금하네요ㅎ

도스토옙스키는 심리묘사의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ㅎ 최근 톨스토이도 읽고 있는데 역시 심리묘사의 천재더라고요^^

페크pek0501 2025-02-12 16:11   좋아요 1 | URL
제 고민 중 하나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시리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어떤 것을 읽느냐, 예요. 읽을 책이 많아 몇 달째 고민만 합니다.ㅋ^^

고양이라디오 2025-02-13 21:12   좋아요 1 | URL
행복한 고민이네요ㅎ 전 <안나 카레니나> 읽고 있는데 너무 좋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생책이고요.

페크pek0501 2025-02-14 11:21   좋아요 1 | URL
행복한 고민, 맞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책으로도 영화로도 봤습니다. 명작이죠.
요즘은 카라마조프~쪽으로 기울여 있습니다. 올해는 신중하게 책을 사기로 했어요. 잘 될지 모르지만요. 오늘 책을 주문했는데 미우라 아야코의 책만 세 권을 주문했어요. 오디오북 듣다가 내용이 너무 좋아서요. 카라마조프~를 읽으셨군요. 아직 읽지 않은 제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ㅋㅋ^^

고양이라디오 2025-02-14 19:01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승자네요^^

저도 안나카레니나 아직 다 안봤으니 쌤쌤이네요ㅎ

페크pek0501 2025-02-16 10:58   좋아요 0 | URL
예, 쌤쌤입니다. 쌤쌤, 오랜만에 들어 봅니다.ㅋ^^
 


꼬리 

                       이병률


네발 달린 짐승에게 

꼬리가 있는 이유는


​좋은 풍경 앞에서

다리 네 개를 잠시 접고

꼬리라도 깔고 앉아 풍경이라도 보라는 이유


​네발 있는 동물에게

꼬리가 달린 이유는


다급히 기다리는 것이 있을 때

날개 삼아 꼬리를 펼쳐놓고

기다림을 기다리라는 이유


​양지바른 자리에

천 리를 깔고 앉아

만 리를 기다리는 운명을 명심하라는 이유


-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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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5-02-06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추워서인지, 초록색 잎이 있는 화분과 공간이 편안한 느낌이 들어요.
사진 잘 봤습니다.^^

페크pek0501 2025-02-07 13:05   좋아요 1 | URL
왠지 모르게 이 사진이 맘에 들었어요. 이 사진도 어느 카페에서 찍은 사진일 듯해요. 카페의 뒷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항상 폰을 휴대하고 다니니 사진으로 남기기가 간편합니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친정에서 올 때 조심히 왔어요. 눈길에서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