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온라인 활동이 뜸한 이유는 오프라인에서 바쁘게 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오프라인에서 시간이 지루하지 않아서다. 매월 책을 읽고 가야 하는 독서 모임과 스터디 모임, 영화를 보고 가야 하는 영화 모임 등이 있다. 그밖에 주 1회의 강좌를 수강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책을 읽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번 겨울 학기 강좌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책 두 권이 포함되어 있다. 읽어야 할 책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는 것은 잘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2.
내가 온라인 활동이 뜸한 또 다른 이유는 넷플릭스나 유튜브에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집은 텔레비전으로 유튜브 동영상을 볼 수 있게 해 놨다.) 어제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보고 감탄했다. 그 정도로 춤을 잘 추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할까? 그의 춤 동작에서 발레를 배워야만 할 수 있는 동작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분야든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이런 생각을 했다.
3.
요즘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 보며 많은 정보를 얻는다. 그가 1954년생이라고 하니 71세일 텐데 나이 들어 머리가 희끗한 것도 보기 좋고 그의 목소리도 듣기 좋다. 며칠 전 본 영상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살인 사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치정 살인’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다는 것이 놀랍다. 가해자의 90프로가 남성이라고 하는데 부정을 저지른 여성을 죽이거나 불륜 관계에 있는 상대편 남자를 죽인다고 한다. 대체로 남성은 우발적으로 죽이는데,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약해 우발적으로 죽일 수 없으므로 치밀한 계획을 해서 죽인단다. 여성이 한 남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계획을 세워 남성을 죽이는 경우가 있단다.
치정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쥘 아메데 바르베 도르비이’의 ‘무신론자들의 저녁식사’라는 소설이다.
부부처럼 사는 두 남녀가 있다. 여자는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바람둥이다. 여자가 아기를 낳았을 때 남자는 자신이 아기의 아버지임을 의심치 않고 자기 아들인 양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태어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이 아기가 죽자 남자는 미칠 듯이 괴로워했다.
어느 날 여자가 쓴 편지를 발견한 남자는 누구에게 보내느냐고 여자에게 물었고,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편지를 빼앗았으나 편지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남자는 알 길이 없었다. 질투에 사로잡힌 남자는 이 일로 흥분하고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툰다. 이를 옷장 속에서 듣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메닐그랑’이었다. ‘메닐그랑’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그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아! 우리 아기!’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지요. ‘당신 씨가 아니야!’
나는 야생 고양이의 목멘 울음소리 같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소령의 파란 눈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했어요. 그는 하늘을 가를 듯한 욕설을 내뱉었지요.
‘그럼 누구의 씨야? 가증스러운 악녀 같으니!’ 그가 물었고, 곧바로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어떤 소리를 내질렀어요.
하지만 그녀는 하이에나처럼 계속 웃어댔어요.
‘넌 죽어도 알 수 없을걸!’ 그녀가 그를 비웃으면서 말했지요. 그녀는 이 넌 죽어도 알 수 없을걸!이라는 조롱의 말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그를 힐책했고, 말하기가 싫증나자, 믿을 수 있겠습니까? 팡파르처럼 노래로 불렀소! 그러고 나서 제정신이 아닌, 자신이 손아귀에 쥐고 있다가 망가뜨릴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 남자를 이 말로 실컷 후려쳤고, 이 말을 채찍 삼아 팽이처럼 돌렸으며, 이 말로 불안과 의심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증오의 힘으로 파렴치해져서, 자기와 관계를 가졌던 모든 연인의 이름을 말했고, 장교단 전체를 들먹거렸어요.
‘그들 모두를 가졌어.’ 그녀가 외쳤어요.(‘무신론자들의 저녁식사‘에서.)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183~184쪽.
‘무신론자들의 저녁식사’라는 소설에서 발췌했다. 이 소설은 14편의 소설이 수록된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는 책에 담겨 있다.
남녀가 치열하게 싸울 땐 소설 속의 여인이 상대편 남자에게 자기와 관계를 가졌던 모든 연인의 이름을 말했듯이, 상대편이 분노를 참지 못하도록 심한 말을 해 댄다. 그래서 우발적으로 치정 살인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도 남자가 화를 참치 못하고 여자를 죽이려고 한다. 그것을 눈치챈 메닐그랑이 옷장에서 튀어나와 남자를 죽여서 여자를 살려 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정 살인이 많은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남녀 관계에서 미움과 질투의 불이 맹렬히 타오를 때 누군가를 죽일 만큼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다.
4.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형부와 처제가 불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충격적이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없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던가.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불륜 행위가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한 글이 매일신문에 실려 그 글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
『한 학부모 단체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선정적(煽情的)이라며 도서관 비치를 반대했다. 형부와 처제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내용 등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내용을 다룬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재혼한 삼촌이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역시 도서관에서 퇴출돼야 한다. 근친상간·불륜·동성애·살인이 곳곳에 등장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도 마찬가지다.』 - [매일칼럼]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정서적 양극화, 김교영 논설위원, 2024-11-04.
이 글에 동의한다. 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도 동성애자로 짐작이 될 만한 사람이 나온다. 청소년인 주인공 홀든이 어느 선생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어 잠이 들었는데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떠 보니 선생이 그의 앞에 있었고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남자 선생은 청년으로 보이는 홀든에게 홀딱 반한 듯하고 동성애자인 듯하다.)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홀든은 다급히 그 집을 나온다. (자기 아내가 딴 방에 있는 집에서 아직 미성년자인 제자에게 딴마음을 먹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불륜을 다룬 명작은 많다. 어쩌면 불륜이라는 소재로 「안나 카레니나」를 명작의 대열에 올라서게 한 점이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인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했다.
5.
「채식주의자」에서 아내에게 불륜 현장을 들켜 버린 다음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긴박감이 넘친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벌거벗은 상체가 아내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셔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욕실 쪽에 내던져진 셔츠에 팔을 끼우며 그는 말했다.
“여보, 내가 설명할게. 이해하기 쉽진 않겠지만……”
아내는 갑자기 높아진 목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구급대를 불러놨어요.”
“뭐라구?”
아내는 희끗하게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그녀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수초의 시간이 걸렸다.
“……나한테 정신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때 매트리스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도, 아내도 숨을 멈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가 시트를 걷어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다.
“나쁜 새끼.”
아내는 낮은 소리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 저런 애를.”
아내의 젖은 입술이 파들거렸다.
- 한강, 「채식주의자」, 175~177쪽.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를 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불륜을 저지른 대가는 혹독했으므로 「채식주의자」를 읽은 청소년들은 불륜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나 독자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는 것이 소설의 임무는 아니다. 독자에게 이런 인간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려 주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소설의 임무다. 문학을 인간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고 위로를 받거나 주인공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소설의 장점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6.
「채식주의자」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다음 글이 떠올랐다.
한 민족에게 선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나 치욕으로 여겨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많은 것들이 여기서는 악이라고 불리고 저기서는 자줏빛 영광으로 장식됨을 보았다.
일찍이 그 어떤 이웃이 다른 이웃을 이해한 적은 결코 없었다. 한 민족의 영혼은 이웃 민족의 망상과 악의를 언제나 이상하게 여겼다.
민족은 저마다 가치의 표지판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98~99쪽.
정답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아 정답을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
7.
신의 아름다움이 신의 모습을 가리듯, 그대 하늘은 그대 별들을 숨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90쪽.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에 집중하느냐가 관건이다.
미남의 용모에 반해 버린 여성은 그 남성의 나쁜 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미녀의 용모에 반해 버린 남성은 그 여성의 나쁜 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빼어난 용모가 그의 다른 점을 가린다. 신의 아름다움이 신의 모습을 가리는 것처럼. 이런 생각을 했다.
8.
오늘 뽑은 시 한 편을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