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칼럼> 삼각관계에 놓인 연인들의 사랑
유부남이 서로 사랑한다고 느끼는 딴 여자와 함께 있다가 아내에게 들켰다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여러 경우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왕 이렇게 된 것, 아내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노라고 고백하고 이혼한 뒤 딴 여자를 택한다. 둘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에게 잘못을 빌고 딴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셋째, 아내에겐 딴 여자와의 관계를 끝냈다고 말하고 여전히 만나고 다닌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연인이 어떤 상황에 놓인다고 가정할 때 그 연인이 취할 태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연인을 깊이 이해한 것이 된다. 반대로 “당신이 그럴 줄 몰랐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 상대를 깊이 이해한 게 아니다.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아침드라마(‘미쓰 아줌마’)를 보게 되었는데, 한 가정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남편이 여자후배와 방 안에서 단 둘이 다정하게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남편과 여자후배는 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며 연애를 하던 사이였다. 또 아내와 여자후배는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남자는 여자후배와 사랑에 빠진 듯 달콤한 키스를 하기도 하는데, 아내에게 둘의 관계를 들키자 당황하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다. 여자후배를 급히 내쫓아 집 밖으로 내보냈으며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달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여자후배는 당연히 기분이 나빴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아내는 가방을 챙겨 가출한다. 남자는 여자후배에게 전화하여 혹시 가출한 아내가 거기에 가지 않았는지를 묻고, 여자후배는 자기를 걱정해서 전화한 게 아니라 마누라 걱정 때문에 전화한 남자에 대해 잔뜩 화가 난다. 분하고 불쾌하기까지 해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긴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세 사람들이 착각하는 모습이다. 아내는 다른 남편들이 모두 바람을 피운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남편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착각임을 알았고, 여자후배는 아무리 그의 아내에게 들켰다고 할지라도 남자가 백팔십도로 변해서 자신을 집에서 내쫓을 줄 몰랐으며, 또 남자는 미혼시절 아내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열정적인 사랑이 지금은 변했음을 간과하고 그 여자후배와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결국 그 부부는 이혼을 하고 남자는 여자후배와 결혼하기로 한다).
연인이 서로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의미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남자가 느끼는 사랑과 여자가 느끼는 사랑의 의미가 다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같은 성별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사랑이란 함께 있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일 수도 있고, 그 상대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일 수도 있다. 그 누구를 사랑할 경우, 그 상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랑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 만약 상대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마치 독약이 든 사랑과 같다.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은 누구나 반갑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사랑처럼 상대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이 드라마에서 남자와 여자후배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선 여자후배는 아내에게 들켜서 마음의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그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따뜻한 위로를 해 주어야 그게 사랑이 아닐까. 남자는 이런 곤란한 상황에 있게 한 여자후배에게 미안해 하고 내쫓김을 당하게 만든 일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해야 그게 사랑이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은 아내에게 들킨 그 사건 직후, 마치 그동안은 달콤한 꿈의 세계에서만 연애를 하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듯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신하고 만다. 남자는 행여 가정이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여자후배는 자신의 상한 기분만 생각한다. 서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신의 입장만 중요한 것이다. 이런 감정과 생각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서영은 저, <먼 그대>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여주인공은 일요일마다 방문하는 유부남을 기다린다. 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그의 아내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녀는 그 남자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나 조금도 남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남자에게 자기가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모조리 털어 주고, 거기다가 모자라면 빚까지 얻어다 준다. 어느 날 남자는 물주를 만나겠다며 그녀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그녀는 이모에게서 그 돈을 구해 남자에게 준다. 남자는 돈을 받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녀의 사랑법은 그랬다.
“사랑은 그것이 희생일 때 이외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적합하지 않다(R. 롤랑).”는 말처럼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희생’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눈에 보이는 효과로 판단한다면 우정보다는 증오에 더 가깝게 보인다(라로슈푸코).”는 말에 공감할 것 같다. 사랑을 하면 무조건 아낌없이 주는 태도를 갖기보다, 자신이 준 사랑에 비해 돌아오는 사랑이 작다고 생각되면 우선 화부터 나고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화가 많이 나면 날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마치 부모를 사랑하듯, 자식을 사랑하듯, 형제를 사랑하듯, 연인을 또는 배우자를 사랑해야 해야 한다. <먼 그대>라는 소설 속의 그녀처럼 말이다. 만약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한쪽 배우자가 어떤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는 달콤한 연애로 행복해 하기보다 그 삼각관계에 괴로워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다른 한쪽 배우자 역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런 괴로운 사랑에 빠진 배우자에게 연민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배우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그런 괴로운 사랑을 하게 되다니…, 가엾군요.”라고.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랑이란 <먼 그대>라는 소설 속의 그녀가 가진 희생적인 깊은 사랑이 아니라 다소 이기적이라고 할 만한 얕은 사랑일 듯싶다. 사랑이란 상대를 위한 사랑이기보다 자기를 위한 사랑에 지나지 않아서, 다만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이, 그를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모든 유형의 기본이 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은 '형제애'라고 말했듯이, 모든 남녀관계에서의 사랑은 형제애로써 ‘정’의 탑을 둘이 쌓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정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처음엔 설렘과 그리움으로 연애를 시작하지만 시간에 따라 그런 뜨거운 감정은 퇴색한다. 그 대신 함께 있는 시간이 만드는 ‘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쌓는 ‘정’의 탑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가 관건이 된다. 서로 아끼면서 배려해 주는 횟수가 많을 때 그 탑은 튼튼할 것이고, 싸우는 일이 잦아져서 정떨어지는 횟수가 많을 때 그 탑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 탑이 허물어질 때 연인은 이별을 하고 부부는 이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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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그들은 사랑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1.
언제나 상대를 조금은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것, 이것이 끊임없는 갈망이 되어 행복한 사랑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의심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으며, 절대 지루해지는 법도 없다. 또한 매우 열중하게 되는 것도 특징이다.
- 스탕달 저, <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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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에 의하면, 서로를 믿는 안전한 사랑보다 의심하는 불안정한 사랑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2.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모습은 변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부부에게는 부모 자식 같은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원래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비탄에 잠기고 상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 속에 존재하고 그렇게 쌓인 것이 자기 인생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라서 사랑이 성취되었는지 어떤지는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강상중 저, <고민하는 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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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어서 사랑에 대해 뭐라고 단정할 수 없다.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3.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세계를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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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이 그들 사랑의 강렬함의 증거라고까지 믿고 있는데 이것은 오류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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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서영은 저, <먼 그대>
스탕달 저, <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
강상중 저, <고민하는 힘>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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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에 관한 것으로 어떤 책이 있나>
조너선 프랜즌 저, <자유> : 이 소설은 남편을 배신하고 남편의 오랜 친구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주인공 패티의 이야기다.
'자유'는 가장 통속적이며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인간관계를 다룬다. 배우자의 배신과 불륜, 그리고 용서. 남편 월터를 배신하고 남편의 오랜 친구 리처드와 부정한 관계를 맺을 때 주인공 패티는 결코 어떤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덧없는 욕망에 단단히 붙들린 패배자에 불과함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욕망의 대상을 향해 돌진할 자유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왜곡된 자유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결혼은 붕괴됐고 패티는 자신이 냉소해 온 월터와의 관계가 사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굳건하고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묻는 가장 이지적이며 설득력 있는 장편.
- 조선일보(2011. 6. 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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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조너선 프랜즌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매우 좋아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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