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되돌아본 2012년



해가 바뀌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주를 창조할 만큼의 세월', 다시 말해서 일주일이 흘러갔다. 

작년 끄트머리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이라는 책을 읽은 탓일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심원한 시간'에 비해 우리가 꾸려나가는 삶은 지나치게 짧고도 순간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올해가 불과 며칠이 지났다고 새삼스레 이런 푸념까지 늘어놓을 필요는 없지 싶은데, 하루 하루를 '새날처럼' 살고 싶다는 희미한 결심을 떠올려 보면 약간의 경각심을 가져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지난해 말에 때맞춰 올리지 못하고 중단된 글이지만, 묵혀둬 봐야 무슨 독 안에 담긴 김치처럼 맛깔스럽게 익어갈 노릇도 아니고 해서 더 늦기 전에 땅 속에서 끄집어 올려 본다.

작년에 책으로 만난 인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을 다시금 음미하면서 '새로운 나날'에 대한 기대와 결의를 조금쯤 보태더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의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이며 멋진 시간들을 가질 수 있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의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 앞의 눈도 역시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468쪽)

 

 

 

참다운 독서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
(150쪽)

 


 

고전 연구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더 현대적이고 더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탐구적인 학생은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고 얼마나 오래되었고 간에 항상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서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 대하여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의 신탁이나,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 신의 신탁도 밝히지 못한 해답들이 들어 있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고 해서 자연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145쪽)


  

탕왕의 욕조

중국 탕왕의 욕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127
쪽)

 

<1월>

태백산에 올랐었다. '새해의 멋진 일출'을 보리라 잔뜩 기대하면서 칠흙같은 어둠과 혹한의 겨울 새벽을 뚫고 용감하게 전진을 계속 했지만, 야속하게도 그날 자연의 신(神)은 단지 우리에게 '미광'만 부여하셨다. 그래도 좋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또다시 태백산을 찾았을 땐 태양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겨울산을 뒤덮은 눈에 반사되어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지만 새해 벽두에 느꼈던 깊은 감흥은 없었다.

 - 生과 死의 경계는 어디에...... 
 


Shooting Date/Time 2013-01-12 오전 8:21:05 

태백산의 겨울


<2월>

일본의 오키나와엘 갔었다. 대입의 관문을 용케 통과하느라 애쓰고 지친 아들 녀석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힐링을 위해 떠난 여행이었고, 한겨울에 훌쩍 초여름의 남태평양의 섬으로 다녀온 여행은 오래도록 잊기 힘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 조개를 줍는 아들과 아내

Shooting Date/Time 2013-02-01 오후 12:12:30

오키나와, 그 섬에 또 다시 가고 싶다


<4월>

대략 20년 동안 꿈꿔 왔던 히말라야를 찾았다. 아직도 히밀라야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언젠가는 다시 히말라야를 또 찾으리라.

 - 여기는 대략 해발 4,700m. 산소는 희박하고 숨이 몹시 가쁘다. 체르코리(4,984m)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Shooting Date/Time 2013-04-30 오후 6:10:16(한국시간)

5. 랑탕빌리지에서 체르코리까지


 - 샤브루베시에서 다시 카트만두로 가는 길. 아찔한 순간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바닥에 땀이 난다.

Shooting Date/Time 2013-05-02 오후 6:37:21(한국시간)

7. 샤브루베시를 거쳐 다시 카트만두로


<6월>


일찍 찾아온 여름을 맞아 영암의 월출산과 해남의 보길도 등을 다녀왔다. 여러 해 동안 찾으려 애썼던 월출산을 제대로 종주할 수 있어서 기뻤으나 마실 물이 너무 일찍 바닥이 나는 바람에 하산하는 내내 '타는 목마름'을 견디기 어려웠던 기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하다.

 - 바위턱에 걸린 구름다리와 모내기가 한창인 들판.

Shooting Date/Time 2013-06-06 오후 12:18:32

 - 보길도 예송리 앞바다를 찾은 여인들.

Shooting Date/Time 2013-06-07 오후 2:29:09

월출산과 보길도를 거쳐 미황사와 선운사까지


<9월>

지난해 여름엔 무얼 하고 지냈는지 벌써 기억이 가물거린다. 9월 하순에 찾은 하늘공원엔 벌써 바람부터 가을이다.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씩은 '산책'을 한다던 소로우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 가을의 속삭임

Shooting Date/Time 2013-09-25 오후 5:32:00

가을 산책


 - 해마다 가을이면 다시 찾는 고향이지만 세월따라 사람도 바뀌니 고향 풍경도 해마다 달리 보인다.


Shooting Date/Time 2013-09-28 오후 12:08:32

고향의 가을 풍경_2013. 9.28



<10월>


해마다 8월 하순부터 10월 하순 무렵에는 일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만날 수 있는 때이다. 그만큼 나도 평소보다 훨씬 더 자주 호수를 찾느라 부산을 떨지만 지난 해에는 좀처럼 멋진 일몰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쩌면 지난 해엔 '태풍'이 심술을 부리지 않고 이 땅을 멀찌감치 비켜간 탓도 있었으리라.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노을

Shooting Date/Time 2013-10-10 오후 5:38:04

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



 - 제법 불타올랐던 어느 저녁 노을

Shooting Date/Time 2013-10-21 오후 5:38:33

해 질 녘


- 경북 영덕의 칠보산.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채 쓰러져 조용히 썩고 있었다.


Shooting Date/Time 2013-10-26 오전 11:30:41

가을 산행


<11월>


한 해의 마감을 알리는 단풍들이 한낮 동안의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익히며 다가올 겨울을 조용히 준비하는 때이다. 언젠가 한때 '11월'이 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못 견디게 외롭고 우수에 젖어들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문득 되돌아보니 그런 '계절'조차 다 잊혀지고 말았다. 어쨌든 '자연의 가을'은 우리에게 슬프게 다가오기 보다는 대체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 가을 단풍

Shooting Date/Time 2013-11-03 오후 12:18:49

가을의 빛깔들


 - 낙엽도 다 떨어지고 어느새 인적마저 드문 호숫가의 저녁 풍경. 2013년이 그렇게 영원히 모두의 곁을 떠났다.

Shooting Date/Time 2013-11-19 오후 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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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4-01-0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호강하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4-01-07 23:23   좋아요 0 | URL
그렇게혜윰 님 반갑습니다. '혜윰'은 요즘 옥외간판에서도 볼 수 있더군요. ㅎㅎ
그렇게혜윰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클 2014-01-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 보니 감탄밖에는... 부러워요. ^^

oren 2014-01-07 23:24   좋아요 0 | URL
야클 님 오랜만이네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숲노래 2014-01-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한 해
아름다운 숲과 들과 하늘과 바다와 물을 마주하면서
즐겁게 하루를 누리셨네요.
언제나 알찬 빛이었겠지요.

oren 2014-01-11 00:14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이야말로 아름다운 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함께 사시는 분이시지요.
저야 늘 매캐한 도시의 숲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까스로 몸부림칠 뿐이고요.
그래도 한 해를 돌아보니 자연이 계절마다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다시금 듭니다.

카스피 2014-01-0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찍으셨나요.사진이 넘 아름답습니다.
그나저나 늦었지만 오렌님 서재의 달인 등극 축하드리면 새해 복많이 받으셔용^O^

oren 2014-01-07 23:31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사진들은 제가 찍었습니다만 한 장의 사진(히말라야 4,700m 고소에서 헉헉거리며 오르는 모습)은 앞서 오르던 동료한테 찍힌 사진이네요. ㅎㅎ 카스피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14-01-08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경을 담는 오렌님만의 눈이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정리 한번 해보고싶네요.

oren 2014-01-08 10:5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께서 올리셨던 글 속에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진들이 많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멋지게 한번 정리해서 올려주시면 저도 즐거이 감상하겠습니다.

세실 2014-01-08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해를 참 아름답게 보내셨습니다^^
오키나와 그 섬에 저도 가고 싶어 집니다.

oren 2014-01-08 11:02   좋아요 0 | URL
보기 좋은 사진들로만 한정해서 살핀다면 참 즐겁고 아름다운 시간들이 많았던 듯하지만,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런 저런 아픈 시간들도 적지 않았던 한 해였다 싶어요.

오키나와 섬과 그 섬에 딸린 또다른 여러 섬들은 참 아름다운 곳들이 많더라구요.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요즘엔 엔화 가치도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세실 님께서도 조만간 그 섬에 가보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cyrus 2014-01-0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의 좋은 글귀에 멋진 사진이 함께 있는 달력 하나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ㅎㅎㅎ

oren 2014-01-09 10:15   좋아요 0 | URL
cyrus 님의 글을 읽으니 소로우보다 몇십 년 앞서 살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생각이 나는군요. 옛날엔 달력이 참 귀했는데 요즘엔 친구들끼리도 달력을 만들어 나누는 세상이 되었어요.ㅎㅎ
 
나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여러 종류의 편견들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책


시간이 지나간다. 저만치 흘러가는 시간의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현기증부터 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시간'을 두고 하필 이 즈음에 굳이 '전에' '있었던 것' 혹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기필코 '둘로 갈라놓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 * *

 


프로이트가 간과한 '엄청난 시간적 규모에 대한 이해'


인류의 소박한 자존심은 역사 속에서 과학적 진보를 통해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입었다. 첫째로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버리게 했다. ······ 둘째로 생물학적 연구(진화론)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에 불과함을 밝혀냄으로써 성서의 특별 창조설에 따라 지상에서 우리가 당연시하던 인간의 특권을 박탈했다.

(이에 덧붙여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선언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의 마지막 자부심과 위안마저 무너뜨려버렸다고 주장했다. 곧 우리 인간이 비록 저급한 유인원에서 진화했을지라도 사고할 줄 아는 이성적 존재인 줄 알았는데 무의식에 지배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져 인간의 지위가 또다시 추락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지배 영역인 지구가 우주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공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갈릴레이 혁명)과 인간이 모든 '하등' 피조물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사적 양대 사건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갈릴레이 혁명과 다윈의 진화론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시간적으로도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지질학적 발견을 간과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사고를 전환한 과학사적 주요 사건에서 지구 나이의 엄청난 시간적 규모에 대한 이해, 곧 "심원한 시간"[deep time, 존 맥피(John Mcphee)의 멋진 표현]의 발견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지구가 생성된 지 며칠 이내에 인간의 의지에 맡겨진다는 성서 기록에 따른 젊은(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지구관은 지상에서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뒷받침해주는 편리한 시간 개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구한 지구의 나이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장구한 세월의 마지막 아주 짧은 순간에 인간이 출현했다는 생각은 지상에서 인간의 지위에 얼마나 커다란 위협이 되었는가!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장구한 지구 나이에 비추어 찰나적인 존재인 인간에 대한 위안을 찾기 어려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는 겨우 3만 20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인류의 출현 이전에 수억 년 동안 지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구가 인간이 아닌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리라고 가정해보는데, 나 역시 잘 알지는 못한다. 만약 현재 에펠탑의 높이가 지구가 생성된 이후의 시간의 길이를 가리킨다면, 인간이 출현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에펠탑 꼭대기의 뾰족탑 표면에 칠한 페인트 두께에 불과하다. 에펠탑 꼭대기에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의심해보지만, 나 역시 잘 아는 바는 아니다.

 

(19∼21쪽)



 


손톱을 한 번만 밀어버리면


심원한 시간을 가리키는 숫자의 산술적인 이해는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수십억이라는 수는 1뒤에 0이 아홉 개 붙는 큰 수라는 것쯤이야 간단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수십억 년의 시간을 실질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심원한 시간은 실감하기 어려운 장구한 세월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은유를 통해서만 그것을 가늠해볼 수 있다. 지질학자들은 사람들이 심원한 시간의 길이를 헤아려볼 수 있도록 다양한 비유를 들어 왔다. 예를 들어 지질학적 시간의 전체 기간을 1마일로 나타내보면 인간의 역사는 끄트머리의 몇 인치에 불과하며, 1년으로 압축하여 환산해보면 현생 인류의 조상인 슬기사람(Homo sapiens)은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몇 초 전에야 출현했다. ······ 지질학자 존 맥피는 『분지와 산지(Basin and Range)』라는 지질학 대중 서적에서 지질학적 시간을 다음과 같이 아주 흥미롭게 비유하였다. 지구의 나이를 1야드(yard)의 길이로 간주했을 때 손톱 다듬는 줄로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한 번만 밀어버리면 인간의 역사는 모두 지워진다.
(22∼23쪽)

 

 

 


편협한 관점


편협한 관점은 지식인에게 저주나 다름없다. 학자들이 합의를 통해 심원한 시간을 수용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 사이다. 로시(Rossi)는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후크(Hooke)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구 역사를 6,000년으로 생각했고, 칸트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구 역사가 수백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인식했다." (24쪽)



 * * *


 


정말 놀라운 사실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이 모든 시간과 공간을 통해 무리 속의 무리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89쪽)
 

 

 

 


 


막대한 시간의 경과에 대하여


지구의 많은 지층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고(일부는 웨일스와 그 고대 부족들의 이름을 따서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라고 명명되었다) 연대도 추정되어 있었다. 역사의 80퍼센트가 한때 메말랐던 것으로 여겨지는 선캄브리아기 속에 있다. 대부분의 화석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과거의 60퍼센트 정도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345쪽)

 

 

 


느린 시계

밤이 지나고 낮이 올 때 금속 막대의 팽창과 수축으로 움직이는, 비틀리는 진자에 의해 가동되는 이른바 '느린 시계 The Clock of Long Now'를 만드는 계획이 외딴 사막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시계는 한번 똑딱거리는 데 1년, 괘종을 한 번 치는 데 100년, 뻐꾸기가 튀어나오는 데 1000년이 걸릴 것이다. 지질학에서 그 시계는 그저 스톱워치에 지나지 않으며, 긴 현재는 우리 행성의 이야기에서 순간에 불과하다.(346쪽)

 

 

 


무대 장면의 변화

진화의 연극은 너무나 오랫동안 장기 공연을 해왔기 때문에 그 무대 장면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5억 년 전에는 공기중에 지금보다 20배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있었다. 2억 년 뒤 이산화탄소의 양이 줄어들었을 때 역전된 '온실효과'가 일어났다. ...... 심지어 지구의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도 변해왔다. 달은 그 이웃의 자전에너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산호는 매일 변동하는 활동과 연간 변동하는 활동을 하는데, 4억 년 전부터 만들어진 성장 고리는 당시에는 1년이 400일이었음을 말해준다.
(402쪽)

 


 * * *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되,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고 하였다. 아침 8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5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행이나 불행이라 하며 고찰하는 것을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 인생을 영겁에 비교해 보면, 그보다도 산·강물·별·나무, 또는 어떤 동물에 비교해 보면,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는 똑같이 가소로운 일이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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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3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가 태어난 나이를 헤아리면
시간도 숫자도 참 부질없어요.

우리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누리면 넉넉하리라 느껴요.

oren 2013-12-30 18:30   좋아요 0 | URL
기나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끊김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이 지구별에서 우리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매순간이 기적적이다 싶고, 또 그만큼 매순간을 아름답게 살아야겠다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3-12-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해를 하루 남긴 이 시간에서,
저는 우주의 손톱만큼도 안 되는 시간을 가지고 전전긍긍 살고 있네요.
그래도, 제게는 이 시간만이 주어져 있으니,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렌님 페이퍼를 읽으며 합니다.

건강하고 평온한 새해되셔요.

oren 2013-12-31 15:07   좋아요 0 | URL
마고님께서도 매순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랄께요..
그리고 새해 바라시는 일들도 모두 다 이뤼지길 바랄께요~

꼼쥐 2013-12-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부질없는 짓이지만 정해놓은 1년이 다 지나가는 이맘때면 시간을 초단위로 재게 되네요.

새해에도 늘 행복하시고 책과 함께 즐거운 시간 되시길...^^

oren 2013-12-31 15:17   좋아요 0 | URL
꼼쥐 님 반갑습니다. 하루 하루가 새날인데 되돌아보면 언제나 늘 그날 그날에 빠져 살아온 듯해요. 늘'처음처럼' 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만큼 하루 하루를 새날처럼 맞이할 수 있기를 함께 소망해 봅니다. 꼼쥐 님도 새해엔 더욱 행복하세요~~
 


이 영화는 역사의 회고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판결이다. 이 영화는 편히 앉아서 감상하기에는 뭔가 너무 불편하다. 자꾸만 가슴 저 밑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무엇보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이 영화에서 자주 듣게 되는 '국가'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 국가를 무력으로 움켜 잡았던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 스크린 속에서만 어른거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분노 속으로 떠밀어 넣는다.

이 영화가 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그건 어느 인권 변호사가 '한때는 내 친구들'이나 다름없는 듯한 모습으로 푸른 수의를 입은 피고인들을 위해 역사에 남을 만한 변호를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변호인이 비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감했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후 그를 더욱 애타게 그리워하고 칭송하면서 그를 향한 흠모와 추모의 열정이 더욱 뜨겁게 확산되고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사실 나도 그의 급작스런 비극적 결말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본 적은 있지만 그를 흔쾌하게 지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영화속 인물들이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제멋대로 끌어들이며, 필사적으로 죄없는 국민들을 향해 호통치고 고함치며 단죄하려는 '그들'에 대한 공분이 우리를 공감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떠올리기 싫은 끔찍스런 과거가 아직도 여전히 과거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아서 우리를 더욱 공감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 저들은 저토록 오만한가?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판단을 최고의 표준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국가'도 자신들의 것이라는 태도에 우리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오히려 경악할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국가'와 '통치자'가 얼마나 위험스런 대상인지 깨닫지 못할 바보는 없다. "그들은 이러한 오만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무한히 우월하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행하는 데 반대되는 장애물들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을 경멸하면서,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이토록 불편한 감정을 느껴보기도 쉽지 않다. 오래 가슴 속에 묵혀 두었던, 자꾸만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둔 수많은 죄없는 '죄수들'을 여기서 다시금 떠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몸소 헤쳐나왔던 세상이 저토록 어이가 없고 가혹했던가 싶은 생각조차도 차라리 집어 치우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끔찍한 과거조차 너무나 빨리 잊기 쉽고 또 너무 쉽게 미화하기 마련이라고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런 말을 함부로 못 하겠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두 번' 이루어지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것이라고 어느 저명한 정치학자가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국보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간신히 살아나온 어느 선배에게 그 얘기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 때가 아마도 영화속 '변호인'의 실제 인물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어느 겨울이지 싶다. 오늘 문득 그 정치학자가 누군지 찾아 봤더니 어이없게도 이런 기사가 뜬다. [기고] 국가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용납될 수 없다

저 기고문이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폭압적인 군부 독재 이후 얼마나 여러번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어왔던지 간에, 우리가 아직도 '벽'에다 대고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숨죽이듯 웅성거리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보노라면 '평화적 정권교체의 횟수'로만 민주화를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가를 금세 알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81년 부터 87년 민주화 항쟁 때까지 고스란히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래도 감옥까지 가는 불운에서는 용케 비켜났던 나조차 마음이 이토록 불편한데, 영화속 피고인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운명을 맞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더 괴롭고 불편할까. 그리고 스크린 속에서 시종일관 목소리를 드높혀 호통치던 그 많은 원고들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버젓이 '국가'를 들먹이며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걸까. '국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다.'라고 말한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가와 국민과의 관계'는 충분히 권위를 갖춘 '헌법'에 이미 오래전부터 명백하게 정의되어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함부로 단죄하지 말라.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외칠 수 있는 말 가운데 나는 이것보더 더 단순하고도 명백한 진리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 * *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21쪽) 



 

오늘날 이 미국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 나는 대답한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이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이다.(25쪽)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대중은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이 느린 진짜 이유는 그 소수마저도 다수의 대중보다 실질적으로 더 현명하거나 더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디엔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29쪽)

 


 

오늘날 정직한 애국자의 시세는 얼마인가? 사람들은 망설이고 후회하는가 하면 때로는 탄원서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추진하여 효과를 거둘 정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악을 몰아내어 더 이상 자신이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게 되기를 호의적인 자세로 기다린다. 기껏해야 그들은 선거 때 값싼 표 하나를 던져주고, 정의가 그들 옆을 지나갈 때 허약한 안색으로 성공을 빌 뿐이다.(29쪽)

 

 

 

한 인간의 의무가 어떤 악을(비록 그것이 엄청난 악일지라도) 근절하는 데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는 물론 할 수 없다. 그는 그 밖에도 다른 할 일들이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추구할 온당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그 악과 관계를 끊을 의무가 있으며, 비록 더 이상 그 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29쪽)

 

 

 

만약 불의가 정부라는 기계의 필수 불가결한 마찰의 일부분이라면 그냥 내버려두라, 그냥 내버려두라. 모르긴 하지만 그 기계는 매끄럽게 닳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닳아 없어질 것이다. 만일 그 불의가 그 자체를 위한 스프링이나 도르래, 로프나 크랭크를 가지고 있다면 치료법이 병보다 더 나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게 좋으리라.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38쪽)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메사추세츠 주가 보다 자유분방하고 풀이 덜 죽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유일한 장소, 또 현 시점에서 가장 떳떳한 장소는 감옥이다.(42쪽) 

 


 

부자는(불유쾌한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하는 바이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그의 목적물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위해 그것들을 획득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가지게 된 것도 무슨 큰 덕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일한 새로운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문제뿐이다.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44쪽) 

 


 

엄정하게 말하면, 정부는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내가 허용해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입헌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진보해온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향해 온 진보이다. 중국의 철인조차도 개인을 제국의 근본으로 볼 만큼 현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민주주의가 정부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진보일까?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고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한 걸은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국가가 개인을 보다 커다란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에 알맞은 대접을 개인에게 해줄 때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는 나올 수 없다.

나는 마침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가져본다. 그런 국가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익는 대로 떨어지게 허락해주는 국가는, 그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내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다.(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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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직 대통령인 분이나 그이를 둘러싼 분들도 이 영화를 볼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아이들도 어려
저희 식구는 극장에 갈 수 없습니다만,
극장도 많은 서울에서 정치를 하는 분들은
어떠할까 궁금하네요.

oren 2013-12-28 16:39   좋아요 0 | URL
그들이 이 영화를 보든 말든 사실 저는 별다른 관심도 없답니다. 위정자들의 위선이야말로 우리가 매일같이 TV나 신문을 통해 가장 지겹도록 보는 일인데, 그들이 항상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내세우니, 그만큼 자주 반복되는 거짓말도 없지 않나 싶어요.

함께살기 님께서는 한적한 시골에 사시니 이런 영화도 제때 보실 수가 없군요. 나중에라도 기회가 닿으면 이 영화 놓치지 마세요~
 
2013 서재 기네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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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oren님이 작성해주신 글은 총 135개이며, 작성해주신 글자수는 501,774자 입니다. 이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만든다면 4.36권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oren님은 전체 알라디너 중 243번째로 글을 많이 작성해주신 알라디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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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총 방문자는 24,420명이며, 방문자가 가장 많았던 날은 12월 26일(수)486명이 방문하셨습니다.


 * * *

연말이다. 다른 모든 활동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결산'이 필요한 때이다. 어느 활동에서든 누구라도 자신의 '1년 동안의 활동 내역'을 받아 들고 아무런 소감이 없을 수는 없다. 한해를 되돌아보니 작년 이맘때 정말 뜻밖에 '서재의 달인'에 선정되면서 내 서재에 노란 딱지 하나가 덜컥 붙은 모습에 무척이나 놀랐던 기억이 뚜렷한데 어느새 엠블럼이 하나 더 덧붙여진 모습도 이젠 별로 놀랍지 않다. 사람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몹시도 욕망하지만 이미 가진 사물에 대해선 금세 시큰둥해진다는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싶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나는 내 종마장에서 늙은 말 한 필을 쫓아냈다. 이놈은 암컷 냄새만으로는 붙여 볼 도리가 없었다. 제 암컷들과는 일이 쉬우니까 바로 물려 버렸다. 그러나 다른 집 암컷들은 어느 것이 목장 부근을 지나기만 해도 귀찮게 이힝힝거리며 흥분하는 꼴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676쪽)

 


'2013 알라딘 서재 결산'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내용은 없는 듯싶다. 늘 꾸준히 얼굴을 내밀던 친숙한 분들이 얼마간 자리를 채우지 못했고 새롭게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 분들이 새로운 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이런 면모는 흔히들 갖는 수많은 연말 모임과도 닮은 측면이 있다. 서재 결산 또한 여느 모임에서 '총무'가 간략히 발표하는 '결산 보고'와도 어느 정도 닮았다. 나는 여느 '연말 모임'의 회원들이 으례 그렇게 행동하듯이, 이곳의 회원으로서 나에게 해당되는 몇 가지에 대해서 짐짓 모른체하고 넘기기가 조금은 쑥스럽다.

우선 첫째로, 나의 보잘 것 없는 서재가 서재 기네스 Top 10 '즐겨찾기' 부문에서 수많은 명망높은 알라디너 분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힘써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나로서는 서재의 달인에 선정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결산 소득이다.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좋은 리뷰나 좀 더 읽을 만한 페이퍼를 열심히 올려야겠다는 새로운 다짐도 해보게 된다. 그렇더라도 나는 내 힘에 부치는 욕심을 내지는 않겠다.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902쪽)



두 번째로, 내 글에 추천받은 수(496회)에 비해 내가 추천한 수(275회)가 너무 적었던 점을 반성해 본다. 내가 다른 분들의 글에 '추천' 버튼을 누르는 데 잠깐씩 주저했던 순간들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대체로 내가 다른 분들의 글을 추천하는데 매우 인색했던 점을 반성한다. 이와는 반대로 내 글에 몰래 추천을 꾹꾹 눌러주고 가신 많은 익명의 회원 분들께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다음의 인용글이 익명으로 추천하는 분들께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드러내 놓지 않고 몰래 추천을 눌러주신 많은 분들께 이럴 때 말고 언제 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는가.

드러내 놓은 것은 반은 이미 할인된 것이다

선한 행동의 명성이 높아 감에 따라 나는 그 선한 점이 선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도 명성을 얻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을 억누른다. 드러내 놓은 것은 반은 이미 할인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것을 성취한 자들의 손에서 자연스레 풍겨져 나오거나, 점잖은 사람들이 다음에 그것을 택하여 세상에 묻혀 있는 것을 드러내고 그 자체가 좋으므로 세상에 알려지고 드러날 때에, 한층 더 운치가 나는 것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고 성취된 행적이 훨씬 더 찬양할 만하다고 본다"(케케로)고 세상에서 가장 허영스런 인물은 말한다. 


(1139쪽)



사실 지난 1년을 되돌아 보면 알라딘과 심각하게 날을 세운 일부터 먼저 떠오른다. 그건 내 서재에서 <1년간 추천을 많이 받은 글 TOP 3>에서도 다시금 확인되는 일이다. 올 연초에 불거진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 때문에 나는 사실 알라딘을 떠날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동안 알라딘을 외면했었고 알라딘을 통해서는 책조차 사지 않았다. 그러나 내 스스로 알라딘 서재와 결별하기에 앞서 계속 꾸물거리다가 결국 다시 여기에 눌러붙었다. 꾸물거림의 가치도 무시하긴 어렵다. 누구 말대로 '사랑받는다고는' 말하지는 않겠지만, 설령 내가 이곳을 떠난 뒤 다소 외롭고 쓸쓸해 지더라도 그게 오히려 나를 키워줄 지도 모를 일임을 믿기 때문에, 알라딘을 떠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로만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랑받는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유약한 행동 습관에서 오는 거칠고 쓴 일은 상대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내게서 적의나 시기심 같은 것은 쉽사리 벗어 던진다. 사랑받는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미움 받지 않기로는 나만큼 기회를 얻은 자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사람과의 교제에 냉담하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잃었고, 그 사람들이 나의 이러한 태도를 나쁜 의미로 해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902쪽)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

사람들 중에는 은둔적이고 내향적인 특수한 성질도 있다. 나의 본질적인 형태는 나를 표현하고 사람과 교제하는 데 적합하다. 나는 천성이 사교와 우정을 즐기며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보여 준다. 나는 외롭고 쓸쓸함을 즐기고 권유하지만, 그것은 주로 내 심정과 사상을 자신에게 끌어오는 데 그치며, 내 생활이 아니라 욕망과 근심을 제한하여 압축하기 위함이며, 외부의 일이 되어 가는 형세로 외로워지는 것도 단념하고, 굴종과 부담을 극도로 피하기 때문이며, 사람이 많은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내 사는 자리가 외롭고 쓸쓸한 것은, 진실을 말하면 오히려 나를 뻗쳐서 밖으로 키워 준다. 나는 혼자 있을 때에 더 즐겨서 국가와 우주의 일에 열중한다.

(905∼906쪽)

 


내가 작성한 댓글(178개)와 내 글에 달린 댓글(181)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다. 나는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도 싫지만 내 글에 달린 댓글을 외면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렵다. 혹시라도 내 글에 달린 댓글에 내가 미처 댓글을 달아 드리지 못했다면 그건 순전히 내 불찰이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점을 믿어 달라.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후하게 내려줌은 이미 더 많이 실시하였을수록 다음에는 그만큼 더 못하게 된다. 기분좋게 하는 일을 오래 두고 할 능력을 상실케 하는 일보다 더 어리석은 처사가 어디 있는가?"(키케로)

(1001쪽)

 
 

받아버린 것


받아버린 것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앞으로 후대받을 것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왕은 남에게 주다가 줄 것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심복을 잃는다.

채워 줄수록 커 가는 욕심을 어떻게 만족시킨단 말인가? 가질 생각을 가진 자는 이미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탐욕은 배은망덕하기에 꼭 알맞은 소질이다.

(1002쪽)



나는 댓글을 다는 일에 몹시 조심하는 편이다. 혹시라도 내가 쓴 댓글이 글을 쓴 분들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면 이 기회에 용서를 구한다. 내가 여러번 인용하는 글이지만,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댓글을 읽을 땐 가끔씩 '강인한 귀'를 가질 필요도 있다.

 

강인한 귀, 특별한 우정의 표시

우리는 자기를 솔직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강인한 귀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속이 쓰리다고 느끼지 않고 남의 비판을 참고 듣는 자는 드문 까닭에, 우리에게 감히 비평을 시도하는 자는 특별한 우정의 표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좋게 해 주려고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모욕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건전하게 사랑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못된 소질이 착한 소질보다 강한 자를 비판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플라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는 자에게 지식과 호의와 과감성이라는 세 가지 소질을 가지라고 명령한다.

(1201쪽)



내가 쓰는 글들은 가끔씩이나마 '애써서 지은 품'이 박혀 있을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체로 애를 쓰기만 할 뿐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한다. 좀 더 부지런히 읽고, 자주 그렇게 해왔듯이 책에서 발견한 좋은 글들을 부지런히 옮겨 쓰면서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글을 쓸 때보다 좋은 책을 읽을 때가 훨씬 더 즐겁다.

 

좁은 홈통

웅변이 자유롭고 유쾌하게 굴러가지 않으면 쓸모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 어떤 작품들은 애써서 지은 품이 박혀 있어 어딘가 투박하고 무뚝뚝한 맛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등불과 기름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잘 지어 보려고 애를 쓰며 자기 일에 너무 긴장하고 억눌린 마음 때문에 자연스러운 웅변을 억누르고 꺽어 빽빽하게 만들고,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


(
48쪽)


 

별 대수롭지 않은 '결산'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무리하니 몹시 홀가분하다. 더구나 내일은 즐거운 성탄절이다. 나도 어서 퇴근해야겠다. 이맘때만 쓸 수 있는 유쾌한 인사를 여기서 빼놓을 순 없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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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는 2013년을 즐겁게 마무리하면서
다가오는 2014년을 기쁘게 맞이하셔요~

oren 2013-12-26 10:36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 덕분에 즐거운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내년에도 더욱 아름다운 책과 글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할께요~

카스피 2013-12-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당^^

oren 2013-12-26 10:39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으로부터 축하의 말씀을 들으니 고마우면서도 괜히 쑥스럽네요.
카스피 님이야말로 저와는 차원이 다른 서재의 달인님이시죠..

transient-guest 2013-12-25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좀더 일찍 님의 서재를 알게 되었더라면 좋은 글과 사진을 빨리 접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이제부터라도 자주와서 좋은 글과 사진을 감상하겠습니다.ㅎ

oren 2013-12-26 10:41   좋아요 0 | URL
변변찮은 글과 사진뿐인데 transient-guest 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transient-guest 님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다크아이즈 2013-12-2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결과입니다.
즐찾 십위 안에 가볍게 진입하신 오렌님의 내공^^
새해에도 신세지겠습니다.~~

oren 2013-12-26 10:43   좋아요 0 | URL
신세라면 제가 팜므 님께 많은 신세를 입었지요.
내세울 게 전혀 없는 일임에도 그걸 빌미로 삼아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싶었어요.
거듭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야클 2013-12-2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글 올라오면 제일 반가운 서재 중 하나입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기대합니다. ^^

oren 2013-12-26 10:47   좋아요 0 | URL
늘 반가운 야클 님~ 이맘땐 님의 필명에서 산타'클'로스의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ㅎㅎ
새해에도 자주 유쾌한 모습으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글에 담긴생각> (2) 왜 나보다 나의 글이 더 나을까



pek님의 흥미로운 글을 읽으니 저는 몽테뉴가 '자신의 글'에 대해 말했던 아주 재미있는 말부터 떠오릅니다. 그는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고 너스레를 떨었었지요. pek님의 이 글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아주 많은 글들이 몽테뉴의 책 속에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 가운데 몇몇 글들을 대충 빠르게 골라서 먼댓글로 써볼까 싶네요.

 * 몽테뉴의 글에 대한 인용 순서는 '책의 쪽수'에 따랐음.


 * * *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

나는 의술뿐 아니라 더 확실성 있는 여러 기술도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고 본다. 시상이 떠올라 작가가 황홀한 무아경에 실려가며 시를 읊는 경우에는 왜 운을 탔다고 하지 못할까? 이러한 영감은 자기 능력과 힘에 넘치는 일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 밖에서 오는 힘인 것을 작가 자신도 인정한다. 웅변가들도 비상한 동작과 흥분에서 자기가 의도하던 것보다 넘치는 말을 할 때에 그것이 자기 능력이 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미술도 그와 같으며, 때로는 화가의 필법을 벗어나서 그의 구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작품이 나오면 화가 자신도 감탄과 경악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운은 이런 모든 작품들에 그가 차지하고 있는 몫을 작가의 의도뿐 아니라 지식 없이 이루어지는 그 작품의 우아성과 아름다움 속에 더 명백하게 보여 준다. 능력 있는 독자는 흔히 다른 사람의 문장 속에 작가 자신이 그런 점을 알아보며 거기 넣은 것과는 다른 완벽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더 풍부한 의미와 양상을 찾아 준다. 군사적인 작전으로 말하면, 운이 거기에 얼마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는 각자가 보는 일이다.(141쪽)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영생 불멸의 아이들


헤로도투스가 리비아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거기서는 여자들과 무분별하게 육체관계를 맺으며, 어린아이가 걸음마할 때가 되면, 군중 속에 데려다 놓고 첫걸음이 향하는 자를 아비로 삼는데, 잘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단순한 인연으로 그것을 또 다른 자신이라고 부르며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다른 생산물들이 있으니 그것도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우리의 정신·마음·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은 우리 육체보다도 더 고상한 부분으로 생산되는 것이며, 더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산물에 대해서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그 생산은 아이낳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거기에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른 아이들의 가치는 우리보다도 차라리 여자들의 것이며, 거기서 우리의 몫은 아주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 생산에서는 그 본래의 미와 우아성과 가치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생명있게 우리를 대표하며 알려 줍니다.

플라톤은, 이런 산물은 영생 불멸의 아이들이며, 그 부친(작가를 말함)들을 영생 불멸케 하고, 진실로 리쿠르고스나 솔론이나 미노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을 신격화한다고 하였습니다.
(423∼424쪽)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


로마에 라비에누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용기가 장하고 권세 있는 인물로 다른 소질보다도 문장에 능하였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쟁 때에 카이사르 휘하에서 으뜸가는 장수로 있다가, 다음에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 편으로 넘어 가서 카이사르가 스페인에 진격하여 그를 격파하기까지 너무나 용감하게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위대한 라비에누스의 아들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라비에누스에게는 그의 덕성을 시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황제들의 궁신이나 총신들은 그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솔직성과 폭군 정치에 반항하는 기질을 좋게 보지 않았을 법한 일로, 그런 기분은 그의 문장이나 작품에 배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적들은 그를 관청에 고발해서 출판한 여러 작품을 불태우라는 판결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형벌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실시된 것인데, 그것은 문장과 연구 논문까지도 사형에 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잔혹한 것을 할 방법과 재료가 부족해서 우리들 정신의 고안과 명성 같은 고통을 느낄 감각이 없는 사물에까지 미치며, 시신(詩神)들의 학문과 업적에까지 물질적 고통을 적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이런 손실을 참고 지낼 수도 없고 그렇게도 소중한 작품을 잃은 뒤에 살아남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무덤에 자기를 실어가게 해서 그 속에 들어가 산 채로 파묻혀 자살과 매장을 동시에 감행했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보다 더 맹렬한 애정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시우스 세베루스는 대단한 웅변가로 이 사람의 친구인데, 그의 책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같은 판결문으로 자기도 함께 산 채로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고함질렀습니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렌티우스 코르두스도 그의 작품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칭찬했다고 고발당하여 같은 처단을 받았습니다. 저 티베리우스보다도 더 나쁜 상전을 섬겼던 저 천하고 비굴하고 부패한 원로원은 그의 문장을 화형(火刑)에 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저서와 동행하기에 만족하고, 음식을 끊고 자살했습니다.

저 선량한 루카누스는 극악무도한 네로에게 처단을 받아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바로 죽으려고 의사에게 끊게 한 팔뚝의 혈관에서 피가 대부분 흘러 나와 사지의 끝은 이미 싸늘해져 가고 찬 기운이 생명의 심장부에 접근해 오기 시작하자, 그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파르살리아 전쟁에 관한 자기 작품의 시 몇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구를 마지막으로 소리쳐 읊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아이들에게 주는 애정에 찬 정다운 작별 인사였으며, 죽어 가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주는 굳은 포옹과 고별이었고, 이 최후의 순간에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물들을 회상케 하는 타고난 경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에피쿠로스는 그의 말처럼 담석증의 극심한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갈 때에, 그가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학설의 아름다움이 그의 모든 위안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나 잘 자란 아들들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서 그가 풍부한 저작을 완성했을 때만큼 만족을 얻었겠습니까? 잘못 성장한 못난 아이도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보다도 전자의 불행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예로 들자면), 우리 종교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의 작품을 땅에 파묻거나 그에게 자식이 있는 경우에 그 아이들을 파묻든지 하라고 제안했을 때에, 그가 차라리 아이들을 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경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와 관계해서 잘난 아이를 얻는 것보다, 시신(詩神)과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잘생긴 작품을 하나 얻기를 훨씬 좋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을 생긴 그대로 내가 여기 내놓은 것은 마치 육체적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고칠 수 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얻은 작은 재산은 이미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는 것보다도 더 충분히 사물들을 알고 있으며, 내게서 자신이 담아 두지 못한 것을 가져갔으며, 아무 관계 없는 딴 사람처럼 필요할 때에는 그에게서 빌려 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작품보다 더 현명할지 모르나, 그는 나보다 더 부유합니다.

시에 열중하는 사람치고 로마에서 가장 으뜸가는 미소년을 낳기보다는 《아에네이스》를 내놓기를 원하지 않을 자 없고, 전자보다도 후자를 잃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작가들 중에서 특히 시인들은 자기 후손으로는 딸들만 남겨서, 그녀들이 다음에 조상들에게 영광을 주리라고 자랑하던 에파미논다스(이 딸들이란 그가 라케데모니아 인들에 대해서 두 번 얻은 고귀한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가 그녀들을 그리스 전국의 화사한 미녀들과 바꾸었으리라고는 믿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자기 아들과 상속자가 아무리 완벽하고 완성된 인물이라고 해도, 그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얻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공훈들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피디아스나 다른 탁월한 조각가들이 오랜 노력과 면학으로 예술적으로 완성해 놓은 탁월한 조각상이 잘 보존되어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랐을 만큼, 그가 낳아 놓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보존되기를 원했을까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가끔 부친들이 자기 딸들에게 보이는 사랑이나, 모친들이 자기 아들들에 열중하던 악덕스런 미치광이 같은 태도의 사랑으로 말하면, 그런 예는 이 다른 종류의 부자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피그말리온에 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특별한 미를 갖춘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고 나서, 자기 작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친 듯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들은 이 조상에 생명을 넣어 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상아를 만지니
그것은 단단함을 잃고 유연해지며
그의 손가락에 눌려 들어간다.
                    (오비디우스)

(424∼427쪽)





다시 읽을 때에는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

나는 다시 읽을 때에는 얼굴을 붉힌다.
왜냐하면 많은 문장이 작가인 내가 판단하기에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

(703쪽)


 

 


자기 작품

나는 사람들이 남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도 판단할 눈이 없는 것을 본다. 자기 작품에는 애정이 섞일 뿐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식별해 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 자체의 힘과 운의 힘으로써 직공(작가)의 착상과 지식 이외에 그를 도와주며 직공의 역량을 넘는 수가 있다. 나로서는 남의 작품 가치를 내 것보다 더 흐리멍덩하게 판단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 《에세이》도 때로는 얕게, 때로는 높게 아주 줏대 없이 평가한다.
(1042쪽)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리석게도 나는 내 책 이야기를 하느라고 내 책을 늘려 간 것인가! 어리석고말고,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자들을 두고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들이 자기 작품에 그렇게도 자주 곁눈질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작품을 위한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이고, 자기 작품을 경멸하며 박대하는 것까지도 모정다운 뽐내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기를 평가하거나 경멸하는 일은 흔히 똑같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다른 점에서보다도 이 점에서 내가 더 자유로워야 하지만, 내가 나의 다른 행동들에 대해서 하는 식으로 나와 내 문장에 관해서 쓰고 있는 이상 내 제목은 그 자체로 뒤집히는 터이니, 모두가 이 변명을 받아 줄 것인지 모를 일이다.
(1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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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말은 나한테서 나와요.
곧 나 스스로를 낮게 여기면 낮은 말 나오고,
나 스스로를 높게 여기면 높은 말 나와요...

oren 2013-12-2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자존감이야말로 모든 향상과 발전을 이룩하는 힘이라 여겨요. 어떤 철학자는 '오만과 허영'까지도 긍정적으로만 발휘된다면 '인류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도 얘기하더군요.

다크아이즈 2013-12-2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로라하는 몽테뉴도 당신 글을 음미할수록 화가 치민다, 고 표현한 건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엔 너무 많아요. 글 잘 쓰시는 분들이...
몽테뉴도 남이 보면 따를 자 없었겠지만 본인은 본인 글에 만족 못 했을 것 같아요.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면 된다, 고 스스로에게 믿음을 주기엔 글쓰기가 너무 버거운 작업입니다.
오렌님 한 해 동안 고마웠습니다. 새해에도 좋은 정보, 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oren 2013-12-23 10:32   좋아요 0 | URL
훌륭한 글을 쓰는 작가일수록 스스로 드높은 기준을 갖고 있기 마련이겠지요.

저도 팜므님의 한결같은 성원에 감사드리며 새해엔 더욱 좋은 글로 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랄께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3-12-23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
- 저는 저의 글이 맘에 들지 않을 때 화가 치밀지는 않고 (이건 좀 오만해 보여요. 평상시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같아서)
기가 죽어요. 나,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이러면서요... 주제파악인 거죠.
제 글이 초라해 보이는 만큼 저 자신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저도 화가 치밀어 봤으면 좋겠어요. ^^


oren 2013-12-23 14:41   좋아요 0 | URL
자신의 글에 대해 품는 심정들은 각자 저마다의 취향과 성격을 따르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저는 '작품'을 써본 적이 아예 없으니 몽테뉴와 같은 말을 해볼 기회조차 가져보질 못한 셈이지요. 물론 수시로 써대는 허섭한 글도 넓은 뜻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그 경우에는 저도 화가 치밀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작품이라도 하나 썼더라면 그 경우엔 더더욱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 것 같구요. 한번 내뱉은 말이든, 써놓은 글이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든, 그 내용이 아무리 부끄럽거나 어리석더라도 그걸 도대체 도로 주워담을 수도 없고 내멋대로 고쳐볼 도리도 없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여러모로 비슷한 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