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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고쇼 그라운드
마키메 마나부 지음, 김소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평점 :
현실의 세상과 가상의 세계가 혼재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플라스마 상태의 세상을 살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은 신화가 상존하는 원시 부족의 세계로 나를 이끌기도 하고, 지금도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무시로 오가는 듯한 일본 국민을 떠올리게도 한다. AI를 비롯한 첨단 과학 문명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21세기 과학 중심의 시대에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를 맹신하는 것은 물론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님들과의 소통도 가능하다고 믿는 일본 국민의 특성은 때로는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범주에서 일본 국민은 죽은 조상이 그들이 사는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때로는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과 함께 삶을 향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안다. 어쩌면 환상일 수도 있는 그런 믿음은 어찌하여 일본 국민에게만, 지금도 여전히 강한 믿음으로 그들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옆에서 달리고 있는 건 일고여덟 명. 늘 그렇듯이, 라고 해야 할까, 모두 남자. 어쩐 일인지 모두 거무스름한 기모노를 입고 잇었다. 그뿐 아니라 머리에는 '상투'까지 틀고 잇었다. 개중에는 검은 헬멧 같은 걸 쓴 사람도 있었는데, 달리는 동작에 맞춰 상투가 머리 위에서 거짓말처럼 출렁거렸다." (p.43~p.44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 중에서)
170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마키메 마나부의 소설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표제작인 '8월의 고쇼 그라운드'와 단편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이 실려 있는 책이다. 일상적인 언어와 평범한 소재를 선택하여 읽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는 소설이지만, 두 작품 역시 일본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판타지가 현실에 개입하는 장면을 주입함으로써 '아, 이게 바로 일본 소설이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사실 현실과 판타지의 혼재는 하루키를 비롯한 많은 일본 작가가 흔히 쓰는 기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이 파괴되거나 부풀려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배합하고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일은 미슐랭 스타 셰프의 요리 솜씨만큼이나 어렵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조금 과하다 싶으면 아이들에게나 먹힐 법한 동화로 흐를 수 있고, 부족하다 싶으면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입학하고 겨우 한 달 만에, 학생에서 군인이 됐다. 그리고 다섯 달 후에는 전사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 인생을 강요당했던 젊은이가, 지금 여기 눈앞에서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신 고쇼G에서 하얀 셔츠에 옅은 녹색 바지를 입은 엔도 군이 행진하고 있는 이미지는 쉽게 뇌리에 떠올랐다." (p.217 '8월의 고쇼 그라운드' 중에서)
작가는 여름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겨울의 무자비한 추위가 번갈아가며 펼쳐지는 교토의 양극단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치명적인 방향치인 여고생 사오리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역전 마라톤에 참가하게 됨으로써 낯선 지역인 교토에서, 그것도 눈이 휘몰아치는 교토 거리를 달리는 상황을 재미있게 그린 '12월의 미야코오지 마라톤'과 친구 다몬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야구 시합에 참가하게 된 대학생 구치키 군이 8월 교토의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새벽에 펼쳐지는 기이한 야구 경기의 이상한 체험을 다룬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어쩌면 '에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도 가능한 소설의 가상공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감안하고 좀 더 포용적인 관점으로 읽는다면 주인공인 사오리나 구치키 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코 눈에 띄지 않았을 사람들도 소설과 같은 어떤 특별한 일을 계기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 준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우리의 청춘은 어떠했던가. 여린 마음을 헤집는 혼돈과 흔들림의 시절. 미지의 것들로 인해 불안하고, 미숙해 무모하기 쉬운 시절. 그럼에도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용감해 감히 눈부신 시절. 사탄과 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되찾고 싶어 하는 이 청춘의 허리를 잘린 이들이 <8월의 고쇼 그라운드>에 나타났다." (p.249 '옮긴이의 말' 중에서)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꿈을 미처 펼쳐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진 청춘도 있고, 이 세상을 살고는 있지만 어떤 이유로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청춘도 있다. 작가는 어쩌면 한스럽게 세상을 등진 가여운 청춘을 소설 속에서 다시 불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용기가 없어 자신의 꿈을 실현할 꿈도 꾸지 못하는 작금의 청춘 세대에게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다고 호되게 꾸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한시적이고 청춘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까닭에.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은 듯하다. 나는 어제 친한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었고, 수술 이후 뼈만 앙상한 그 모습에 마음이 울적했었다. 사는 일보다 떠나는 일이 더 어렵고 힘든 것처럼 느껴졌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비가 내리는 휴일 오후. 마키메 마나부의 소설 <8월의 고쇼 그라운드>에서처럼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리운 이들과 8월의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며 뒹굴고 싶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