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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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시간의 퍼즐이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운명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단순한 논리 구조로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인간의 직선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 것도 아닌 까닭에 우리 삶의 결과는 때로 기적처럼 부풀려지기도 하고 농담이나 조롱처럼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로서 개개인의 삶이 비록 하찮고 무의미할지라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은 오직 한 개인에게 귀속된 유일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따금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전해듣기도 하고, 한 권의 책 속에서 어떤 이의 삶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바라며 사는 동안 다른 누군가의 삶을 끝없이 궁금해하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은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 분량은 꽤나 길고 두꺼운 까닭에 인물 상호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소설이다. 물론 사람의 심리라는 게 형식화된 틀 안에서 정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설정한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나 지나온 삶의 이력을 대입하면 소설 속 인물 개개인의 행동이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일반 독자의 리뷰에서 종종 왜?라는 의문부호를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탄광 지대라는 낯선 환경이 독자들로 하여금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소설 속 중심인물인 의선의 성장 배경이 그곳이었다는 것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겼을 테다.


"의선의 생감새는 평범했다. 조그맣고 마른 얼굴에 코와 광대뼈는 평면적이었다. 긴 외까풀 눈이 유달리 맑기는 했다. 인중이 약간 짧아 웃을 때면 입술이 유아적인 동그란 모양으로 벌어졌고, 그 안으로 오종종한 옥니가 보였다. 애써서 찾아보려 해도 남다르게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누군가 후천적인 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그때서야 어렴풋하게 떠오를 법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도 아닌 내가 이따금씩 그녀를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p.81)


각 인물의 복잡한 심리에 비해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은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던 의선이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실종되자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아 그녀의 고향인 황곡으로 향한다. 같은 건물에 위치한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인영은 의선이 살던 반지하방의 침수로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고 진심을 다해 의선을 돌봐준 인물이다. 인영의 후배이기도 한 명윤은 의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한편 의선의 고향인 황곡에서 만난 장종욱은 탄광 사진작가로서 의선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고통 속에서 성장했던, 혹은 고통과 함께 현실을 살고 있는, 그럼에도 어둠을 박차고 밝은 햇빛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 '검은 사슴'과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의 정신이 폭발했을 때 그 사건은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더이상 의선은 병원에서 진정제를 맞을 필요가 없었다. 내장에 든 것을 모두 토한 뒤의 마르고 쓸쓸한 얼굴로 웃지도 않았다. 극도로 말을 아끼다가도 매우 이따금, 마치 오랫동안 글로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을 천천히 독백하던, 나이에 비하여 성숙해 보였던 스물다섯 살의 여자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p.201)


한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사라져가는 탄광촌 황곡에서 의선을 찾아 헤매는 인영과 명윤의 과거가 허물을 벗듯 하나씩 드러난다. 어쩌면 의선은 인영과 명윤이 겪고 있는 어둠의 트라우마를 벗겨줄 작은 희망, 밝은 침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의선이 제풀에 지쳐 쓰러져 다시 어둠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잠시나마 의선과 연이 닿았던 인영과 명윤 역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되돌리려던 그들의 발길을 끝내 황곡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p.320)


잔뜩 흐렸던 하늘에는 조금씩 빛이 되살아나고 있다. 다행이었다. 인간의 연약함과 깊은 어둠을 탐색하는 이와 같은 소설을 읽은 날에는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벗겨진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햇살이 비친다.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아주 이따금 희망의 웃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의 강인한 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내가 쓰러지면 다른 누군가가 즉시 나를 일으켜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저 햇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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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차다. 겨울인데 이 정도 추위도 없다면 그게 어디 겨울인가? 하고 반문할 이도 있겠지만 추위는 아무튼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한다. 집 근처의 도서관에 들러 책 한 권을 빌려 돌아오는 길, 나들이 삼아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가의 손을 잡고 도서관 나들이에 나선 젊은 부부에서부터 서로에게 의지하여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팔순의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그 행색이나 구성은 제각각이었지만, 주말을 맞아 책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은 비슷한 듯 보였다. 여린 겨울 햇살이 그들의 어깨 위로 가볍게 흩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 투표가 있는 날이다. 그러나 비상계엄이 있었던 날로부터 10여 일이 훌쩍 지났지만 그 실체와 과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의문 중에서 사람들이 무엇보다 궁금해하는 것은 비상계엄의 동기가 아닐까 싶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반란이나 소요 등 혼란 상황이 지속되었던 것도 아닌데, 대통령은 무슨 근거로 비상계엄을 발동하였고, 도대체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이렇게 저렇게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성적인 절제가 잘 되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고 자고 싶으면 자야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본능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본능을 억제하도록 종용하는 어떤 순간이 찾아오면 솟구쳐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자고, 마음껏 여행하고 싶은 기대와 욕망이 있었는데 이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국가세력에 의해) 좌절되자 이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것이 곧 비상계엄의 선포였다. 이에 대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옹호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들 역시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로 하여금 고차원적인 가치를 따르라고, 좀 더 이성적인 행동을 하라고 윽박지르며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고 엇나가는 행동(이를테면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게 할 뿐이다.


오늘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조지 오웰의 산문집 <책 대 담배>이다. 조지 오웰의 글은 언제 읽어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요즘과 같은 어수선한 시국에 읽으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정치에서는 두 악 중에서 그나마 덜 악한 것을 결정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가령 전쟁이 필요할 수 있지만 전쟁은 분명 옳거나 온전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심지어 총선이라고 해서 딱히 유쾌하고 즐거운 행위나 교훈적인 광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면 - 노령, 우둔함 혹은 위선이라는 갑옷을 입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 자신의 일부분만은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삶은 이미 분리됐기 때문에 그 문제가 동일한 형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고 그들의 노동과 정치 행위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노동자로 비하하도록 요구받는 경우가 없다. 예술가는 특히 작가는 그런 요구를 받는다. - 사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다."  ('책 대 담배' 중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책이 유해 도서로 채택되는 까닭도 그런 맥락이다. 본능에 충실한 작자들에게 이성적인 절제나 영혼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강요하는 세력은 곧 반국가세력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세력인 것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본능을 절제하도록 요구하는 야당과 국민에게 분노했을 뿐이다. 그것이 비상계엄의 동기인 셈이다. 더도 덜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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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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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의 유리창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있을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 밖의 먼 풍경으로부터 나의 시선을 그렇게나마 가까이 두고자 했던 어설픈 행위. 뽀얗게 변한 유리창에 엉성하게 그려진 어떤 형체는 차라리 이별의 무게 혹은 그리움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멀어질수록 가슴속 빈자리도 커져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휑하게 뚫린 가슴을 차곡차곡 채워갈 것임을 그 시절에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멀어지려는 나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붙잡기 위해 성에가 낀 유리창에 형체도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름 석 자를 써보거나, 흩어지는 성에를 붙잡기 위해 반복하여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던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삶을 자신만 모르는 채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에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p.19)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는 동안 나는 야간열차에서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마치 전시 포로병의 소지품을 면밀히 검색하는 군 수사관의 시선으로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내가 미처 몰랐던 어떤 큰 비밀이라도 숨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역시 소멸해가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했던 여자는 열일곱 살 겨울 무렵 갑작스레 말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말을 잃고 살아가던 여자의 말문을 다시 틔워 준 것은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한 여자는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다시 말을 잃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말을 다시 찾았던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희망이 희랍어였습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여자가 듣는 희랍어 강의의 강사 역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입니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에 입국하여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는 남자는 앞을 볼 수 없다는 마흔을 일이 년 앞두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지켜보면서 여자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소설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합니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言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p.183)


우리가 잃어가는 게 비단 말語과 시력뿐이겠습니까. 다소의 시차는 존재하겠지만 언젠가 소멸하게 될 한시적인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에 새길, 혹은 영원에 약조하고픈 하나의 징표로 남길 만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이 됐든 연민이 됐든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한시적인 현상계에 사는 여리디여린 존재임을 소설을 통해 일깨우고 있습니다.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아주 잠깐 남아 있었던 나의 입김처럼 우리 모두는 기억하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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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뻘짓이란 '아무런 쓸모없이 헛되게 하는 짓', 말하자면 '허튼짓' 혹은 '헛짓거리'를 일컫는 서남 방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뻘짓에도 등급이 있어서 철없는 아기들의 무해한(보는 이들에게 웃음과 사랑스러움을 무한대로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한편으로 유익한), 최상위 등급의 뻘짓에서부터 모든 이들에게 해로움만 안겨줄 뿐 그 누구에게도 이로움이 없는 최하위 등급의 뻘짓(이를테면 지난 3일 윤석열 씨의 비상계엄령 선포와 같은)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뻘짓은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우연찮은 몸개그 등과 같은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간 등급의 뻘짓이겠지만 말입니다.


12월 3일 화요일, 소비자의 날이기도 했던 바로 그날 우리는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한 장면을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목격하고, 허둥지둥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분노와 공포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 발단은 바로 미치광이 윤석열의 비상계엄령 선포였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장 병력이 국회에 난입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장면을 현실에서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언론에 긴급 뉴스로 타전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창피함을 넘어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하는 통탄과 울분의 감정을 삭여야 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였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위 하나로, 최고 권력자라는 이유 하나로 그는 국민들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나흘의 잠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오늘, 탄핵 표결이 예정된 12월 7일 토요일의 오늘 별것 아니라는 듯 사과 한마디 툭 던지고는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한 주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작 이와 같은 혼란의 주범은 너무나 당당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미치광이를 최고 권력자로 선출한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언론과 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성장한 개신교 목사들과 MB 이후 권력의 맛을 알기 시작한 불교계 인사들이 윤석열과 같은 괴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윤석열에 버금가는 괴물들은 국민의힘 내에 차고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들의 잇속을 챙겨줄 인사를 찾기 위해 개신교와 불교계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는 그들의 이름 앞에 성스러울 성(聖) 자를 붙여 성직자로 칭하기도 합니다. 일반 소시민보다 더 욕심이 많고 사악한 그들을 두고 말입니다. 괴물 정치인이야 어쩌다 탄핵이라도 된다지만 괴물 성직자와 언론인은 탄핵도 불가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권력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윤석열이라는 괴물 정치인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힘을 소진해야 할까요. 그를 몰아내기 이전에 우리는 권력에 기생하는 종교인과 언론인부터 솎아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윤석열과 같은 괴물 정치인은 우리들 앞에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최하등급의 뻘짓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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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4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8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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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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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한 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관련 자료를 훑어보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문득 이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어느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이야기를 매개로 지각을 펼치고 세상을 탐지한다. 이야기는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며, 생물학적 생존 이익에 기여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으로 빚는 강력한 요소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이 영웅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우리 삶의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의 소설 <작별 인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능이 인간 삶의 유한성과 결합하여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유한한 삶에서는 결코 체험하지 못할 수없이 많은 다른 인생과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 더 강한 유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다른 인생이 내가 살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생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호기심은 두 배 세 배 증폭되는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독자는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된다.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 이런 종류의 낯섦을 처음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p.176)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비교적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현학적이거나 작가 개인만 알 듯한 특이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나 학교 선후배를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 혹은 나의 삶에서도 있었던 유사한 경험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산문집 전반에 흩어져 있다. 시인은 으레 사물이나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극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편견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깨트릴 수 있다. 애초부터 그런 편견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 봄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다시 겨울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은 시인의 일상 역시 독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책을 쓴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시인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책으로 읽는 까닭은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무료한 일상을 독서로 때우고자 함도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동지 의식 혹은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12월이 다가온다. 다가온다고 적으니 벌써부터 긴장이 감돈다. 물론 가장 아무것도 아닌 12월이 될 것이다. 가장 아무것도 아닌 선물을 또 누군가에게 줄 것이고 받을 것이다. 가장 시시한 일을 하며 가장 시시하게 지낼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12월은 무작정 설렌다. 왜 그런가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장 시시함에도 가장 설렐 수 있다는 것은 무조건 축복이고 무조건 내게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p.250)


우리는 비단 우러러보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의 특별한 일상만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의 일상도 궁금하여 때로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별것 아닌 각자의 일상도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궁금해하는 소중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결코 허투루 다룰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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