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
윤두열 지음 / 우연은인연으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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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시시하다'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시시하다. 시시하다. 시시하다.' 이렇게 몇 번을 되뇌다 보면 멋진 시구가 술술 풀려나올 것만 같고, 세상 심각하게만 여겨지던 일도 '그까짓 거' 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만트라도 없을 성싶지만 어떤 종교도 '시시하다'는 말을 경전에 넣을 리는 만무할 터, 나는 이 말을 바지 뒷주머니에 허술하게 찔러 넣었다가 언제든 필요할 때면 용돈처럼 꺼내 쓰곤 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어느 명사의 연설을 들을 때도 나는 '시시하다'는 말을 입속에서 굴리며 엄숙한 시간을 이겨내곤 한다. '시시하다'는 말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몇 번을 굴리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눈 쌓인 경사면을 내려오는 어느 개구쟁이의 눈썰매처럼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고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사소한 사건도 중요해질 것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될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지 마세요. 방법을 알려드렸으니, 그냥 하시면 됩니다. 그럼 정말 그렇게 될 거예요."  ('마지막 순간' 중에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과거 어느 시기에 나는 포토 에세이에 한동안 빠져 지냈다. 변종모나 이병률 등 이 분야의 대표적인 작가뿐만 아니라 사진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행 에세이도 무작정 사서 읽었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멋진 풍광의 사진과 그 한 켠을 차지하는 달큰한 글귀가 메말라가는 감성을 자극하곤 했다. 팍팍하고 메마른 현실을 살아가는 나에게 작은 도피처를 제공하고 때로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삶의 한 시기가 훌쩍 지나고 나는 한동안 포토 에세이와 담을 쌓은 채 살았다. 일부러 피했던 건 아니다. 책에도 유행이 있는지 이상하게도 그 많던 포토 에세이가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윤두열의 포토 에세이 <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가 반가웠던 건 과거의 기억이 아련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강으로 향하는 길에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면서, 오늘 노을은 좀 아쉽다고 말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토록 멋지고 완벽한 곡선을 만났으니까. 우리의 삶과 인생은 때때로 이런 선물을 받는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에 옷과 양말이 젖어도 기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을 여러 번 겹치고 포개어 인연으로 만드는 일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 중에서)


사진이 주는 감성은 여러 갈래로 뻗어간다.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으로 이끌기도 하고,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쥔 듯한 벅차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이끌기도 한다.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십수 년 전으로 회귀하게도 하고, 오지 않은 먼 미래를 꿈꾸게도 한다. 말하자면 포토 에세이는 독자의 나이와 감정을 제멋대로 휘저어놓는다. 윤두열의 에세이 <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를 읽는 동안 나는 사진에는 없는 쨍한 추위와 휘몰아치는 바람과 꿈꾸는 듯한 햇살과 침잠하는 어둠을 읽었다. 나의 시선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에 오래 머물고, 끝없이 서성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을 꿈꾸고, 부족함을 채우려는 부지런한 사람들 사이에 자꾸 나를 데려다 놓는다. 바쁘고 싶지 않은데, 바빠야 잘 산다는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충전이 없으면 방전은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는 밤. 비록 성과는 없을지라도 성취는 있길 바라면서."  ('성취' 중에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지하철에서 내린 젊은이의 축 처진 어깨를 볼 때마다 나는 '시시하다'라는 말을 달빛 뒷면에 큼지막하게 써서 용돈 대신 그의 뒷주머니에 찔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의 반지하 자취방 좁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여린 달빛에 기대어 '시시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사는 게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까. 낡은 출근 가방에 챙겨 넣을 서류 뭉치와 함께 달빛에 딸려 온 작은 용기도 그곳에 잘 갈무리하면 내일 아침 출근길 발걸음은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시시하다. 시시하다.' 주문처럼 몇 번 되뇌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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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고 선명하던 나뭇가지가 연녹색 봄의 물결로 차츰 흐릿하게 변해갑니다. 장한 햇살과 나날이 높아만 가는 기온이 흐릿하던 나뭇가지의 형체마저 완전히 지워버리는 날 우리는 어쩌면 짧았던 봄의 여운을 못내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산로에는 은사시나무 씨앗이 잔설처럼 쌓이고, 도로변 가로수는 이팝나무꽃으로 하얗게 물들었습니다. 그렇게 2025년의 4월이 가고 있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 오가는 등산로에는 잘게 부서진 가랑잎이 마치 김가루처럼 흩날립니다. 나는 그 가랑잎의 잔해를 밟을 때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쳐야 온전하던 가랑잎이 저렇게 부서지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무거운 체중으로 눌러야 저렇게 형체도 없이 부서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런 의문은 정확한 답을 찾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삶을 지속하는 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일회성의 반성과 자책의 감정이 조금쯤 포함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강 작가의 산문집 <빛과 실>을 읽고 있습니다. 17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이기에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책이라면 뭐든 일단 사놓고 보는 성마른 성격의 나이기에 구매 일자와 완독 일자는 매번 크게 차이가 나곤 합니다. 책이 발효가 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책의 출간 일자에 맞춰 일찌감치 사 두었다가 묵히고 묵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슬그머니 읽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사치라면 사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내 삶에서 누리는 가장 큰 호사는 어쩌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마음껏 사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그 기쁨에 홀려 십오 분마다 쓰기를 중지하고 마당으로 나와 거울들의 위치를 바꾼다. 더 이상 포집할 빛이 없어질 때까지 그 일을 반복한다."  (p.95~p.96)


성근 숲이 조금 더 울창해지면 나는 숲 속에서의 신비를 지금보다 더 자주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뉘 때문입니다. 어두컴컴한 숲의 그늘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 어쩌면 그것은 한강 작가가 썼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신비로운 감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이팝나무 가로수의 흰색 꽃물결이 저쪽으로 밀려났다 금세 되돌아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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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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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아름다움에는 3할의 기쁨과 6할의 슬픔, 그리고 잡다한 불순물이 1할쯤 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순도 100%의 기쁨이나 100% 슬픔을 지닌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뿐만 아니라 각자가 속한 연령대에 따라 아름다움이 발산하는 구성 성분을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창작자 역시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의 질료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우리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누군가는 웃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현실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피상적 관찰에 불과한 현실에서의 삶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일, 어쩌면 그것이 문학이 추구하는 시대적 소명일지도 모른다. 최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정대건의 소설 <급류>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애쓰지만,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사랑의 소용돌이와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인간의 감정을 심도 있게 추적하기도 한다. 사랑이 아름답다는 건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피상적인 개념일 뿐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선에 따라 충만한 기쁨일 수도 있고, 지저분한 슬픔의 잔해일 수도 있음을 작가 정대건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증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p.100)


소설은 계곡과 저수지로 유명한 '진평'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열일곱 살의 도담은 도시에서 전학을 온 해솔에게 한없이 끌린다. 게다가 물에 빠진 해솔을 구하기 위해 겁 없이 뛰어들었던 도담은 결국 베테랑 소방대원인 도담의 아버지 창석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도담과 해솔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창석으로부터 수영을 배우게 된 해솔과 그 모습이 그저 반가웠던 해솔의 엄마 미영.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외지로 이사를 온 미영 역시 창석의 다정한 모습에 반해 부쩍 가까워진다. 창석의 아내 정미는 잦은 병치레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도담과 해솔은 풋사랑의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도담의 친구 희진으로부터 창석과 미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빠 창석에 대한 의심과 미움이 쌓여가던 도담은 어느 날 밤 창석과 미영이 폭포 호수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도담과 해솔은 랜턴을 들고 폭포로 향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자 랜턴을 켜게 된다. 그리고 물로 뛰어든 미영을 구하기 위해 창석마저 급류에 휩쓸리고 두 사람은 결국 사망한 채 발견된다. 엄마를 잃고 진평을 떠난 해솔은 할머니와 함께 자란다. 아빠를 잃은 도담은 진평을 떠나지 않은 채 건강을 되찾은 정미와 함께 지낸다. 해솔의 소식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도담과 도담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해솔. 그렇게 끝날 것 같은 인연은 두 사람이 대학을 간 후 극적으로 재회한다. 약학과에 진학하여 약사가 되고자 하는 해솔과 물리치료사를 꿈꾸는 도담. 그들은 그동안의 결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상대방에 대해 집착하고 탐닉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불안한 사랑이 이어지는데...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p.226)


해솔과 도담의 불안한 사랑은 결국 도담의 엄마인 정미의 개입으로 인해 끝이 나고, 서로에 대한 소식도 모른 채 한동안 세월만 흐른다. 소방서에서 의무 소방대원으로 군생활을 한 해솔은 한강에 투신한 학생을 구조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위험을 향해 뛰어든다. 그리고 해솔은 결국 약사가 아닌 소방서의 구조대원이 된다. 물리치료사가 된 도담 역시 틀에 박힌 일상에서 떠돈다. 그들이 서른 살이 된 2018년의 어느 날 불길을 뚫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던 해솔이 자신의 동료가 보이지 않자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도담은 여유롭게 헤엄치며 웃었다. 자유롭다. 내가 얼마나 수영을 잘했던가.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있을지 모를 미래에도 목매지도 않으면서 진정으로 살고 싶어졌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거센 물살을 헤엄치듯이."  (p.295)


정대건의 소설 <급류>가 갖는 유일한 단점은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일 테다. 물론 소설의 흡입력이 워낙 커서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으로 빨려들게 되고, 그렇게 공감하며 읽다 보면 나른한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니 그것을 꼭 단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왜 이 소설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나는 비극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이와 같은 부류의 소설 결말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나야 한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나 통속적인 독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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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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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 밟히는 흙은 적당히 부드러웠습니다. 봄비 치고는 꽤나 많은 양의 비가 내렸습니다. 새벽 산행.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나의 오래된 이 습관은 비가 그친 다음날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청량한 공기와 더욱 선명해진 풍경, 그리고 낙엽 더미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와 코를 자극하는 솔향기. 아침을 깨우는 새의 울음소리는 어제보다 더욱 또렷했습니다. 이렇듯 매일매일의 다른 풍경과 일상이 모여 세월이 되고, 궁극적으로 어느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기온이 더 올라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올 때면 계절은 다시 여름을 향해 달려갈 테지만 지금 이대로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봄.


산을 내려오는데 한적한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어느 노부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앉은 벤치 주변으로 그들이 살아온 세월이 햇살처럼 쏟아지는 듯했습니다. 서로 아무런 대화는 없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풍경 사이로 무수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흑백 대비가 선명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벤치 주변에 내려앉았습니다. 긴 꽁지깃을 까딱거리며 우아하게 평형을 잡은 까치는 가는 다리로 총총걸음을 옮기며 땅 속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쪼고 있었습니다. 까치도 어쩌면 노부부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그들 모습에 넋을 놓았던 나처럼 말입니다. 서둘러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며칠 전 읽었던 폴 오스터의 소설 <바움가트너>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자식,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여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이들의 고통이 신체 절단의 후유증과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라진 다리나 팔은 한때 살아 있는 몸에 붙어 있었고, 사라진 사람은 한때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절단된 일부, 자신의 환상에 속하는 부분이 여전히 깊고 지독한 통증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치료가 가끔 이 증상을 완화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 치료법은 없다."  (p.68~p.69)


소설의 주인공인 바움가트너는 평생의 반려자였던 애나를 갑작스레 잃고 방황합니다. 70대의 노교수인 그는 글을 쓰다가 문득 누이에게 전화도 할 겸, 참고할 만한 책을 가지러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글을 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를 보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장갑을 낄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는 맨손으로 냄비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만 손가락이 데고 맙니다. 냄비는 바닥에 내던진 채 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검침을 나온 기사를 안내해 주다가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게 됩니다. 애나가 없는 일상은 엉망진창의 나날입니다.


그렇게 두 달이란 시간이 흘러 다쳤던 무릎도 나았고 작업중이던 키르케고르에 대한 책도 완성합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그는 로지타로부터 들었던 그녀 아버지의 사고를 떠올립니다. 손가락이 절단된 사고였지만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는데 바움가트너는 그 사고 소식을 매개로 머릿속에 남아 있던 '환지통'이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환지통'에 대한 생각은 곧바로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지난 삶 속으로 빠져듭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 버린다."  (p.77)


아내가 평생 써왔으나 한 번도 발표한 적 없는 글들과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들이 뒤섞이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허구와 환상 그리고 과거에 대한 회상을 두려움 없이 접하게 된 그는 애나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느낍니다. 애나의 친구이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주디스에게 청혼을 결심하기도 하고, 아내의 미발표 원고를 검토하고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방문하겠다는 젊은 여성 학자를 위해 그녀가 머물 차고의 숙소를 점검하는가 하면 엉망으로 변한 마당의 조경 계획도 세웁니다.


"아마도 무엇보다 책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책이 다는 아니다. 바움가트너는 애나의 죽음이 여기에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프 코드 해변에서 그녀가 말릴 기회도 주지 않고 물로 달려 나갔던 그 마지막 날. 애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몸을 담그러 가겠다고 말할 때 이미 일어나 있었고, 바움가트너는 타월 위에 널브러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p.237)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햇살 속에서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생각하거나 반추해 볼 새도 없이, 마치 빗방울이 미끄러운 나뭇잎 위를 또르르 흘러내리듯 금세 흩어져버리곤 합니다. 그렇게 흩어져버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하고,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이별하기도 합니다. 내가 아침 산행에서 보았던 어느 노부부의 뒷모습처럼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가 마주한 풍경 위에 무언의 언어로 묻고 답하면서 지나온 삶을 되돌이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는 지극히 단순한 구성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사유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소설입니다. 나 역시 하룻밤에 후루룩 읽어내지 못하고 멈춤과 사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아침 산행에서 내가 노부부의 뒷모습에 넋을 놓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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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송사리 하우스
기타하라 리에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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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했다'는 말은 타인에 의해 내려지는 칭찬 성격의 판단인 동시에 이따금 나 스스로의 자기 검열에 의해 내려지는 뿌듯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장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하거나 자신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해 그 결실이 맺어지곤 한다. 자신의 인생에 반드시 넘어야 할 성장의 계단이 숫자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각자는 '성장했다'는 말과 함께 한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성장이나 깨달음이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에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에서 우연처럼 주어지는 삶의 선물과 같은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다. 즐거웠던 기억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물론 모든 것을 잊는 건 아니지만 완벽하게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도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제아무리 깊은 슬픔에 휩싸여도 인간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건 '잊는다'는 기능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p.68)


기타하라 리에의 소설 <어서 와 송사리 하우스>는 외모도 성격도 직업도 제각각인 네 명의 여성이 한 집에 모여 살게 되면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가벼운 터치로 묘사한 청춘 드라마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일명 '송사리 하우스'로 불리는 여성 전용 셰어 하우스에 세 들어 사는 네 명의 입주민이 주인공인 짧지만 강렬했던 셰어 라이프라고 하겠다. 막연히 도쿄를 동경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규슈 출신의 평범한 여성 엔도 하루카, 삼류 배우에서 일류 배우로의 도약을 꿈꾸지만 노출을 고민하는 배우 미야타 나치, 여성 직장인으로서 원대한 꿈이 있지만 결혼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오야이즈 가에데, 대기업 사장의 딸이자 송사리 하우스의 주인이지만 가정사로 인해 불운한 성장기를 겪었던 이쿠시마 유즈, 이 네 사람이 살고 있는 '송사리 하우스'는 역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입지 좋은 곳이지만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고작 1년. 소설은 그 1년여의 여정을 아이돌 출신의 작가 기타하라 리에의 섬세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나치 말대로 인간이라는 나약한 생물은 혼자 살아가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때 더 강해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킬 것이 있어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중요한 것을 나는 성인이 된 후 잊고 있었다. 팀원들을 위해 이를 악물었기에 그 여름의 일본 제일이 될 수 있었는데, 사회의 거친 풍파에 시달리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힘을 낸다는 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일이다."  (p.166)


소설은 '송사리 하우스'의 입주민인 네 여성이 겪는 꿈과 사랑, 현실적인 고민과 그들 나름의 적절한 해결책 등을 제시하며 억지나 왜곡이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 나간다. 인기 아이돌 그룹의 리더이자 멤버였던 키타하라 리에에게 이와 같은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는 건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도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하루카가 미팅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자 친구 마사야를 어느 날 몸이 아파 일찍 귀가하게 된 날 나치의 방에서 보게 된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성장한 나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의문부호를 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소설은 마지막 순서인  이쿠시마 유즈에게로 옮겨진다. 부동산 회사의 사장인 유즈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한 후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이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이복동생인 쇼다이가 '송사리 하우스'에 찾아와 서로 인사를 하게 되는데...


"앞으로 송사리 하우스에서 보낼 시간이 그리 길진 않다. 하지만 이 집에서 보낸 시간이 확실히 존재했던 것은 흔들림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언젠가 끝나 버리기 때문에 다들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나라서 더욱 남아도는 공간에 흘러들어 와 준 사랑스러운 시간들. 나는 이 집에서 보낸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가족이 있다. 혈연관계는 아니고 말로 확인한 적도 없지만 확실히 이곳에 있다."  (p.246)


국내에서의 취업이 어려워 국내 구직 활동을 접고 일본에 가서 1년 남짓 셰어 하우스 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다 돌아온 청년을 알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자격증도 있었던 그는 일본인과의 간단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셰어 하우스에서 사는 동안 입주민들과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들었던 탓인지 함께 어울리는 일도,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감옥과도 같았던 셰어 하우스에서의 1년을 매우 끔찍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의 셰어 하우스 입주민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를 돌보고, 고민을 나누고, 즐거운 일을 함께 하고자 한다. 어쩌면 행운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속에서 겪는 고통이나 즐거움을 통해 깨닫고 성장하는 것도 전혀 다를 테지만 말이다. 유난히 바빴던 한 주. 벌써 주말이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처럼 덥게 느껴지는 걸 보니 여름이 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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