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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너스에이드
치넨 미키토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7월
평점 :
서스펜스 소설을 읽는 묘미는 쫄깃한 긴장감과 진한 감동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서스펜스 소설의 특성상 그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에 내재한 문제점과 구성원의 부조리한 인식을 공론화하는 것 역시 서스펜스 소설이 갖는 장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 독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지나친 폭력성이나 과한 선정성 등은 서스펜스 소설의 단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순하디 순한 서스펜스 소설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치넨 미키토가 쓴 <이웃집 너스에이드>는 꽤나 정제된 서스펜스 소설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책을 읽는 독자들이 으레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류자키는 사요코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고마워......" 하고 목소리를 짜냈다. 그 눈에 살짝 눈물이 어린 것처럼 보였다. "이야아, 아름다운 장면이네. 그럼 이쯤에서 슬슬 웃기지도 않는 신파극은 끝내도록 합시다." 비웃듯이 말하면서 세이류인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부하들이 보우건을 들어 겨누는 것을 보고 미오가 눈을 감았을 때 별안간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p.351)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세이료 대학 부속병원의 신입 간호조무사인 사쿠라바 미오와 통합외과의 천재적인 의사 류자키 타이가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대척점의 위치에 서 있다. 외과의사였던 유이는 심네스 환자인 언니 사쿠라바 유이를 수술하였지만 유능한 기자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절망감으로 자살하고 말자 미오는 PTSD를 겪으며 의사로서의 어떤 의료 행위도 하지 못하는 등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까닭이다. 의사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 미오는 세이료 대학 부속병원을 대표하는 히가미 교수의 도움으로 신입 간호조무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한편 불우한 가정형편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의사가 된 류자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의학적 지식과 끊임없는 훈련과 기술 연마뿐이라는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전국에서 우수한 외과의를 모아 설립한 세이료 대학 부속병원의 통합외과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등급인 플레티넘에 위치하였지만 그는 한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편 불안해하는 환자의 가족에게 담당의인 류자키가 수술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해 달라는 미오의 요구를 거절했던 류자키는 미오와 사사건건 부딪히지만 환자를 살리겠다는 열정과 간절함은 미오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환자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간호조무사 미오의 지적에도 그는 편견 없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유일한 의사였다. 일정이 잡힌 샴쌍둥이의 분리 수술 일자를 연기해 달라는 미오의 요구를 수용한 것도 류자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오의 집에 도둑이 들어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고, 갈 곳을 잃은 미오에게 자신의 트레이닝 룸을 기꺼이 내준 이도 다름 아닌 류자키였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의 옆집에 세를 들어 살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외과의사였던 미오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현관 앞에 선 미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는......" "내 트레이닝 룸이야. 비는 시간에 여기서 훈련을 거듭하고 있어." 미오는 이 아파트에 입주할 당시 집주인한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201호실과 202호실은 상주하는 사람은 없고 어떤 사람이 창고처럼 쓰고 있다고. 그 '어떤 사람'이 류자키였던 건가. 미오는 빨려 들어가듯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 보니 구석에는 러닝 머신을 비롯해 웨이트 트레이닝용 덤벨과 바벨까지 갖춰져 있었다." (p.108)
환자를 배하는 견해차로 두 사람은 서로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팀처럼 움직인다. 미오가 PTSD를 극복하고 하루빨리 의사로 복귀하기를 희망하는 류자키와 다른 이가 넘볼 수 없는 천재적인 의료 기술에 더하여 류자키가 환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미오. 어느 날 미오는 죽은 언니의 남자친구였던 다치바나 형사로부터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고 언니가 운행하던 차량의 내비게이션 이력에서 폭력단의 비밀 아지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미오는 다시 류자키와 조우하게 되는데, 그는 거액을 받고 불법 수술을 해주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은 마찬가지라고 담담히 대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류자키가 성장했던 보육원의 한 소녀가 충수염에 걸려 응급 수술을 받기 위해 내원하였는데, 사이비 종교를 믿는 그 소녀의 엄마가 수술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목숨이 위태로운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 미오와 류자키의 작전이 시작되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류자키와 미오, 같이 근무하는 간호조무사들 모두가 위험에 빠져들게 된다. 과연 그들은 미오의 언니가 취재하던 불법 행위의 내막을 밝히고 자신들이 처한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고, 피나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최고의 기술을 습득했어. 그 기술을 갖고 있는데 또다시 가족을 내버려 둔다면 내 인생은 무의미했다는 것이 돼. 그러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가족을 살릴 수 있게 해 줘. 그날 이후의 노력이, 그날 이후의 내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 있게 해 줘!" (p.272~p.273)
현직 내과의사로서 소설가를 병행하고 있는 치넨 미키토는 자신의 전문 지식을 이 소설에 쏟아 부음으로써 사실감을 드높이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독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재미를 잃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오겠지만 작가는 그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쓴 흔적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독자였던 나는 몇몇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의사였던 미오가 모든 걸 내려놓고 간호조무사라는 직업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과 젊은 여성인 미오가 언니를 죽인 자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폭력단의 아지트를 염탐할 수 있을까? 하는 점 그리고 언니가 남긴 취재 기록을 찾기 위해 자신의 집을 찾아온 사건 연루자들의 사정이 딱하다고 그들을 그냥 놓아주는 게 가능할까? 내가 소설에 심취했던 탓인지 이런저런 의문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그럼에도 재밌으면 됐다. 소설은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