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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ㅣ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평점 :
계절은 이제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매년 이맘때면 사람들은 유난히 이 음식에 집착하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술이다. 술을 음식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나는 술꾼들의 기분을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술꾼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가깝게 지내는 술꾼들이 내게 이따금 자신들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의 기분을 자세히 들려주기는 해도 직접 경험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렇다 저렇다 도무지 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선천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이 태어난 까닭에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얼굴은 물론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기운이 쭉 빠지는 통에 그 즉시 잠을 자지 않으면 활동을 하기 어렵다. 남들은 즐겁자고 마시는 술이지만 나에게 술은 그야말로 사약에 버금가는 고통유발물질에 불과할 뿐 기호식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술을 가까이해보려 억지로 노력한 적은 있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좋아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술자리를 일부러 피하거나 술꾼들과 거리를 두려 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술을 못 마시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의식(?)이나 미안함을 더 크게 가졌던 듯하다. 그런 마음이 나를 더 자주 술자리로 이끌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바람에 나는 술값이며, 대리기사 호출 등 술꾼들의 뒷수습을 전담하는 뒷감당 전담 매니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자리매김하면서부터 웬만한 술자리에는 으레 나를 부르는 것이 일종의 선결 과제로 정착되고 말았다. 이처럼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술자리 경험은 누구 못지않게 풍부했던 까닭에 술에 관련된 전문 서적이나 술과 얽힌 경험담을 쓴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편혜영 외 다섯 명의 작가가 쓴 <술과 농담>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말들의 흐름' 시리즈 네 번째 책이었던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을 우연히 읽었던 게 이 시리즈 중 몇 권의 책에 더 손이 간 직접적인 계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무렵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유별난 조갈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혼자 아이를 감당하느라 얼마나 지쳤는지, 날마다 자라는 아이를 돌보면서 나이 들어가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당시의 나는 한번도 헤아려보지 않았다. 길가에 앉아 바쁘거나 한가로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등을 땀으로 적시는 손자의 무게를 견디며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맥주를 마시는 동안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모른다는 게, 지금도 종종 마음을 아프게 한다." (p.24 '편혜영')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술의 미덕에 대해 찬양한다. 스트레스 해소에 그만이라거나 묵었던 앙금을 풀고 일치된 마음으로 단합하는 데는 술만 한 게 없다는 등 술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다. 그러나 술로 인한 실수나 실패의 경험 또한 술꾼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대목이다. 과거 우리 사회가 술에 대해 무한정으로 관대했던 시기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을 상대로 입사 축하주랍시고 독한 술을 들이붓는 바람에 양복을 입은 채로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못 먹는 술을 억지로 권하던 풍습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고, 술은 그야말로 좋아하는 사람의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에 시작된 만취 습관은 일 년 정도 계속되다가 스물한 살이 되자 그야말로 볕을 받은 눈송이처럼 녹아 없어졌는데, 그건 단지 한 살 더 먹어서가 아니라 어떤 허무의 집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테이블 위의 술을 몽땅 마셔버릴 수 있을 것만 같던 호기롭던 마음과 사랑이니 정의니 하는 아름다운 단어를 들으면 언제라도 거리로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던 그 간질거리던 마음은 술자리가 끝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귀갓길에선 예외 없이 허무가 찾아왔다. 이상한 걸 알면서도 이상하고 싶어 했던 스무 살은 그렇게 지나갔다. 솔직해서 풋풋했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미덕이기도 한, 단 한 번의 시절...... 솔직함의 시절, 가끔은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p.49 '조해진')
술에 관대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술의 소비를 한껏 부추겼다. 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마저 '주취경감'이라는 이유로 형을 가볍게 하거나 용서하자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되는 바람에 취객은 언제나 보호되고 용서되었다. 사회 공동체가 얼싸안고 힘을 합쳐 취객을 보호하자는 공동선언이라도 한 듯 우리 사회는 취객을 보호하는 데 언제나 앞장서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어느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이 소멸되고 개인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요즘 취객의 실수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취급되고 있다. 가슴 답답한 누군가가 술에 취해 하던 넋두리는 이제 아무도 받아줄 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게 조각조각 부서진 사회가 더 많은 술꾼을 양산하고 있지만, 그 모든 술꾼들에게 '입은 닫고 실수는 금물'이라는 표어를 강제하는 바람에 술에게도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우울한 현대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취해서 길에 누운 자들이 보일 때마다 경찰에 신고했다. 어찌된 일인지 모두 남자들이었다. 여름밤, 겨울밤. 경찰들은 대개 친절하게 말했고 더욱 친절하게도 경과를 문자로 알려주기까지 했다. 언젠가 내가 길 위에 눕게 된다면, 누가 나를 경찰에 신고하게 될까? 나는 그에게 스타벅스 커피쿠폰이라도 미리 보내주고 싶다. 혹은 발베니 21년산 한 병을. 나는 단 한 번 단 한 잔 그 술을 마신 적이 있고 그대로 죽고 싶었다." (p.127 '한유주')
못 믿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술을 못 마신다는 건 팔이 하나 없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멀지 않았던 과거의 일이다. 나 역시 음주량을 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공동체 의식이 과하게 넘쳐나던 시기였고, 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구성원 모두가 예외 없이 마셔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먹고 죽자'는 말이 농담처럼 읊어지던 시절이었고, 서툰 개인주의가 구성원 모두에게 눈총을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