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무료한 손길이 슬쩍 닿기만 해도 휘청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은 주말의 오후. 일주일 동안의 누적된 피로가 어깨를 짓누릅니다. 지방선거가 있었던 수요일 하루를 쉬었는데도 체감하는 피로는 여느 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삭바삭하던 햇살이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의 수증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 한낮의 시간은 길고 미끈한 자신의 몸매를 한껏 뽐내려는 듯 유영하듯  아주 천천히 지나갑니다. 나처럼 성마른 인간은 그 흩어짐의 틈새도 진득하게 기다리거나  바라볼 수 없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졸린 눈을 끔벅거릴 뿐입니다.


2026년의 시간이 은근슬쩍 6월로 접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휴가를 기다리면서 미래의 시간에만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훌쩍 지나버린, 이미 거가 되어버린 시간에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미래를 좇아 헤매다가 2026년의 끝이 보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숨을 쉬며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6월입니다. 나는 내게 할당된 임무를 완수하느라 내가 가진 체력을 지나치게 소진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5개월 1주의 분량보다 더 무거운 피로를 체감하며 주말에 있을지도 모르는 달콤한 휴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집 <결혼.여름>(녹색광선)을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삶을 사랑하는 체한다. 즐기려고 노력하고,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매한 정신의 관점이다. 쾌락주의자가 되려면 흔치 않은 자질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삶은 고매한 정신의 도움 없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고독과 동시에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 일을 해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하면서 대개는 아무 불평 없는 저 벨쿠르 사람들을 보노라면, 슬그머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삶들엔 사랑이 많지 않다. 아니, 이제 더는 사랑이 많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삶들은 적어도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았다.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는데 가령 죄란 단어가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들이 삶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을 거스르는 죄라는 건, 아마도 삶에 몹시 절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삶을 바라고 현생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여름의 신들이다. 스무 살의 그들은 삶에 대한 열정으로 여름의 신이었고, 모든 희망을 잃은 지금도 여전히 여름의 신이다. 나는 그들 중 두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은 공포로 가득 찼지만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 인류의 죄악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모든 악을 쏟아낸 후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통념과 달리, 체념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P.54~P.55)


'희망은 체념과 동격'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전에 나는 블로그 포스팅 한 귀퉁이에 '희망은 생명이 유한한 인간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다면 인간이 바라는 바는 아예 없거나 현저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른한 시간의 경과를 무한대로 흘려보낸들 영생을 누리는 인간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생명이 유한한, 체념과 조급함만 가슴에 품고 있는 서글픈 존재입니다. 6월의 첫 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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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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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합리적인가? 경제학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의 이론 전반에서 내세우고 있는 이 전제를 실생활에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컨대 같은 물건일지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이 판매한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고,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한 인테리어 업자에게 공사를 맡기기도 한다.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닥칠 이 명징한 사실을 대부분의 인간은 구체적을 인식하거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헤어진 연인의 얼굴처럼 이따금 떠올릴 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어떤 특별한 일이 닥치면 미래에 맞이할 그 사실이 확실한 현실로 각인될 수도 있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처럼.


"옷을 갈아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마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는 상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상중인지 그녀가 알고 싶어 해서 나는 "어제부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약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장에게 그 말을 했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p.35~p.36)


1부와 2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주인공인 뫼르소의 일상을 좇고 있지만, 독자는 그의 일상을 통해 언뜻언뜻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하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행동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구축한 삶의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쌓이는 기억들은 선악(善惡)이나 정오(正誤)와 같은 명확한 기준을 통해 선별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기억 역시 일상에서 부딪히는 삶의 부조리처럼 아무런 기준도 없이 무작위로 쌓이는 것이다.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던 뫼르소는 크게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하게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같은 직장에 다녔던 여성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고, 관계를 맺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뫼르소와 그의 이웃들도 구질구질한 일상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어떤 것 하나도 분명한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잡이의 볼록하고 매끈한 부분을 만졌다. 그때, 둔탁하고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과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제거했다. 내가 낮의 균형을, 행복해하던 해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임이 없는 시체 위에 네 발을 더 쏘았고, 총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깊이 박혔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째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p.97)


2부에서는 아랍인 살해 혐의로 체포된 뫼르소와 그의 행적과 태도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검사와 배심원은 살인이 있기 전 며칠 동안 보였던 뫼르소의 행적으로 볼 때 그는 사회적 통념과 동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로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뫼르소는 그가 주장했듯 햇볕이 눈부시고 머리가 아파서 행한 우연한 살인이 아닌, 계획적 살인을 저질렀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뫼르소에게는 결국 사형이 선고된다.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이 확정된 이후에서야 모든 자신의 삶이 선명해진 듯하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대전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머리를 외로 꼰 채 모르는 척 살아갈 수도 있고, 죽음 이후의 허구적인 구원을 진실인 양 믿을 수도 있고, 뫼르소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 대한 확신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보다는 확신이 훨씬 강했고, 내 삶과 다가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진리가 나를 사로잡는 만큼 그 진리를 믿고 있었다. 내가 옳았고, 여전히 옳고, 늘 옳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p.188)


산에는 요즘 밤꽃 냄새가 진동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결혼식에서 시어머니가 대추와 밤을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줌으로써 다산을 기원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밤꽃 냄새에서 생명과 에너지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누군가의 결혼식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모든 게 모호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들인다는 게 과연 축복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한다. 가뜩이나 출산율이 저조한데 다산을 기원하고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게 마땅하겠지만 나로서는 그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처럼 밤꽃 냄새가 진동하는 시기에 나는 생명력이 넘쳐나기보다 부조리한 삶을 이어가는 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워진다. 뫼르소의 확신이 내게는 없는 까닭이다. 모든 게 모호할 뿐이고, 하루하루 새롭게 생성한 삶의 기억들이 아무런 선별 기준도 없이 그저 쌓여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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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잠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간밤에 나는 어떤 이유인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꿈지럭거리며 늦잠을 잘 수 있는 기회마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실컷 얻어맞은 듯 온몸이 쑤시고 아파왔습니다. 자고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하고 어지러웠습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인근의 도서관에 나왔습니다. 공기가 맑은 탓인지 건조하고 쨍한 햇살이 피부를 뚫고 몸속 깊은 곳까지 침투할 듯 강하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오가는 행인도 없는 인도에는 선거 유세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듣는 이도 없이 멀리까지 퍼져나가고, 더위를 모르는 까치 몇 마리가 먹이를 찾아 총총 옮겨 다니고 있었습니다. 비둘기 모이 주기를 금지한 탓인지 그 많던 비둘기 떼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던 건 꽤나 생경한 풍경이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에어컨에서 나오는 서늘한 바람으로 인해 마치 딴 세상에 도착한 듯 느껴졌습니다. 책을 읽으려는 목적보다 더위를 피하는 게 더 큰 이유였는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다들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거나 집에서 가져온 태블릿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무인반납기에서 책을 반납하는 사람들 몇몇만이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린 꼬마의 손을 붙잡고 나온 젊은 부부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이것저것 설명하기에 바쁜 모습이었고, 나는 종합자료실에 빼곡하게 꽂힌 수많은 책들을 훑어보면서 읽은 책보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너무 높다는 생각에 잠시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작가 욘 포세가 쓴 소설 <샤이닝>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완벽한 침묵. 너무나 조용해서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침묵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침묵이 말을 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침묵도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그것은 단지 목소리일 뿐이다. 그 목소리를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소리는 그냥 거기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거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p.49)


멀리 보이는 인도에는 반려견을 산책시키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나선 몇몇 사람들이 지친 듯한 걸음으로 느리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말귀가 통하는 제 자식이라면 어쩌면 오늘처럼 햇살이 강한 한낮에 밖으로 나가자고 아무리 떼를 써본들 결코 들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린애가 납득할 수도 없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산책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반려견을 위해서는 휴일의 달콤한 여유도 반납한 채 자발적으로 산책을 나서는 걸 보면 현대인들은 어쩌면 사람보다 동물에게 더 깊은 애정을 쏟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식은 탓인지, 아니면 이제껏 없던 동물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높아진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씁쓸한 입맛은 지울 수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초여름 햇살이 시간이 갈수록 더 높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선거 유세 차량의 노래도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더위 탓인지 나는 여전히 식욕이 없고 나른하기만 합니다. 모든 것은 어쩌면 잠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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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위에 피는 꽃
이순실 지음 / 밀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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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남자에게 있어 병역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이기도 하다. 현역으로 군에 입대하여 제대하는 것만으로 모든 병역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와 동시에 동원 예비군(1년차~4년차)에 편성되었다가 다시 일반 예비군(5년차~8년차)으로, 그리고 민방위대원(8년차 이후~40세)을 끝으로 비로소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복무 연한은 과거에 비해 대폭 줄어들기도 했고 처우와 보상 역시 크게 향상되어 그럭저럭 할 만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런 이들 중 나이 마흔을 넘겨 민방위대원으로서의 역할도 제외되는 순간, "나는 이제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학창 시절부터 교련 과목을 배워왔던 나로서는 군에서 제대한 후 예비군 훈련을 받는 게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대학의 교련 과목은 운동장에서 하는 실기보다는 이론과 정신교육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제대 후 대학교의 학생 예비군에 편성된 후에도 군에 다녀오지 않은 후배 대학생에 비해 교육 시간이 조금 더 길다고 느꼈을 뿐 교육 내용에 있어서는 달라진 게 없는 듯 여겼다. 물론 당시에 초빙된 강사들의 강의라는 게 특별히 재미있거나 귀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따분한 강의 시간을 견딘다는 게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운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보란 듯이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서 잘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교묘한 자세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거나, 고개를 외로 꼬고 대담하게 잠이 들어 코를 심하게 골다가 지적을 받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다. 예비군 훈련이나 교련 시간에 다녀갔던 수많은 강사들의 강의 중에 비교적 많은 학생들이 눈을 똘망똘망 뜬 채로 강의에 집중했던 경우는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당시 동독 유학생으로 있다가 탈북한 탈북 대학생의 강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북한 이탈 주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거나 불가능에 가까웠던 까닭에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기한 대상이었다.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어눌한 북한 사투리와 학생들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대한 우리와 다른 방식의 반응과 답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 사회의 실상에 대한 궁금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강의는 늘 인기가 높았다. 오죽하면 그들을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대중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을까. 물론 그들도 역시 방송 출연료와 강의료를 받은 돈으로 음식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이 살고 있는 요즘, 북한 출신이라는 건 그들의 경쟁력이 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더구나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 시대에 방송 출연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이탈 주민 이순실이 쓴 <돌 위에 피는 꽃>을 읽으면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났던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녀의 삶이 내가 예비군 훈련장의 강사로 접했던 동독 유학생의 삶과 겹쳐져 긴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참으로 춥고 추웠던 날, 양강도 혜산 역전에서 진통을 맞았다. 배를 끌어안고 출산할 자리를 찾았지만, 아기 낳을 변변한 자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짐승들도 새끼를 낳기 전에 둥지를 튼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아기 낳을  자리 하나 없다는 처지가 그렇게 서글플 수 없었다. 진통의 아픔으로 몸부림쳐도 그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역전 승무원들은 행여나 역전 안에서 아이를 낳을까 봐 당장 나가라고 내쫓기 바빴다. 역전 보일러 아궁이 옆에 쓰러져 있자니 이미 양수가 터져  다리 밑으로 물이 흥건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도와달라고 요청해 보았지만, 꽃제비 따위에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63)


공병부대 장교였던 아버지와 군단장 요리사로 근무했던 어머니 덕분에 저자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던 듯하다. 그러나 저자가 군대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비극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연락도 받은 적 없지만 저자가 군에 있었을 때 두 분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일컫는 극심한 경제난이 겹치면서 저자는 한순간에 꽃제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북한 탈출이 시도되었고, 번번이 잡혀 되돌아가서 고초를 겪었음에도 끝내 탈출에 성공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철조망을 넘자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 탈출의 길이 살길이 될지, 죽을 길이 될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목숨 걸고 저지르는 도박과도 같았다. 이 길을 걸으려고 얼마나 수많은 탈북자들이 매 순간 목숨을 내걸고 모질게 버텨 왔을까. 살았다는 안도감 저편으로 북한에 남겨져 있을 가족들 생각에 이내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p.254))


무사히 우리나라에 정착한 저자는 여러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도 하고, 김치와 냉면, 만두 등을 판매하는 식품사업도 운영하면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듯하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녀의 얼굴이 그저 낯선 아줌마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녀는 어쩌면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에게는 성공의 표상이자 고난 극복의 이정표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가 가속화됨으로써 매년 증가하던 북한 이탈 주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의 염원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곧 6월이다. 인도의 보도블록 위에는 까맣게 익어 떨어진 버찌 열매가 오가는 행인의 발길에 밟혀 얼룩얼룩 검은 반점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살다 간 흔적도 그와 같을 것이다. 어느 노인의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우리는 각자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저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서서히 잊힐 테다. 선명하던 버찌 열매의 흔적이 행인들의 발길에 서서히 지워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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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던 시간이 지난 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오면 '사는 게 뭔지...'하는 허탈감이 밀려오곤 합니다. 우리가 지나 온 시간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적어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일을 끝낸 후 만족하거나 아쉬움이 남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마저도 찾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몰아친다는 건 꽤나 슬픈 일입니다. 혹자는 그런 말들도 합니다. 그래도 바쁜 게 낫다고 말입니다. 물론 은퇴를 하고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겐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길게 느껴지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다는 의미인 까닭에 하루가 마냥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건 자신의 무계획성과 게으름을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지방선거 사전투표가 있는 날입니다. 지방자치의 역사도 길고 민주주의 모범이라고 여겨지는 미국 지방자치의 현실을 생각할 때 나는 사실 지방자치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미국은 현재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무투표 당선지가 늘고, 투표율 또한 낮아서 선거 비용이나 후보자의 열정에 상관없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하고, 이로 인하여 지방자치는 갈수록 퇴보하고 있는 듯합니다. 결과적으로 엉망이 된 지방자치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지게 될 테고 말입니다. 그러한 불만은 다시 지방선거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면서 악순환은 끝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가 갖는 특색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가까운 사전투표소에 들렀습니다. 투표를 하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기다리거나 지체하는 시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투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궂은 날씨 탓에 며칠 선선하던 대기는 다시 쨍한 열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오가는 행인들의 몸에 쌓인 열기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2026,소담출판사)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나는 땀과 태양을 제거했다. 내가 낮의 균형을, 내가 행복해하던 해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임이 없는 시체 위에 네 발을 더 쏘았고, 총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깊이 박혔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p.97))


한 주가 다 흘러가면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아쉽게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기에 장마가 지고 우리는 또다시 긴 우울에 빠져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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