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엔 영화 《리빙 보이 인 뉴욕》을 봤다. 극장에는 나를 포함해서 여자 일곱명이 관객의 전부였다. 그 중에 다섯명은 나처럼 혼자온 사람들이었고 커플이 한 쌍. 우리 모두 여자들... ㅎㅎㅎㅎ 상영관은 1관으로 컸는데 주말에 이렇게 관객 일곱명이어서 어쩌나..라는 전혀 내가 할 필요 없는 걱정을 잠깐 오지랖 넓게 해보았다.


영화는 추천할만한 건 아니다. 영화 평에 보면 막장이란 말이 많이 보이던데, 음.. 막장이라면 막장이랄 수 있겠다. 어쨌든.

추천할만하진 않지만 나는 나름 여러가지가 인상깊었는데, 그중 하나가 주인공인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내연녀인 '조한나'가 토마스에게 하는 말이었다.


니가 아는 게 다가 아니야.

니가 아는 게 잘못된 걸 수도 있어.



토마스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으로 아직 이렇다할 직업을 가진 것도 없고, 애인이 있는 '미미'를 짝사랑하고 있다. 미미와 자기 사이에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미는 자신에게 '그저 실수로 하룻밤을 같이 보낸' 거라고 한다. 그런 참에 아버지가 다른 여자랑 함께 있는 장면을 보게된 것.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나 내연녀와 결혼할 생각까지 갖고 있단 걸 알게된다. 이에 토마스는 조한나를 찾아가 자신의 아버지랑 헤어지라 말한다. 이미 안그래도 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는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너질 거라는 것. 그때 조한나가 토마스에게 '니가 아는 게 다가 아니야, 오히려 네 엄마가 원하는 걸 수도 있어'라는 말을 하는 거다. '어쩌면 네 엄마도 네 아빠랑 헤어지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지' 라고. 토마스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그녀를 말리고자 하는데,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랑 헤어지는 것이 어머니에겐 무너질만한 일일 수밖에 없는 거다.









물론 시간은 흘러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헤어지자고, 다른 여자가 있다고 얘길 한다. 이 사실을 알고 토마스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부랴부랴 찾아가지만,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한나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어머니 역시 나름의 비밀을 숨기고 25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것.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다. 혹여라도 그것이 밖으로 꺼내어지면 토마스에게 상처가 될까봐 꾹꾹 숨기고 참고 살았던 거였는데, 이제 그 비밀까지도 토마스가 다 알아버렸다. 반드시 그것만이 이유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다른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들과 자주 교류하고 넉넉하게 살았음에도 계속 우울해했고, 오로지 토마스만을 바라보며 살았더랬다. 이렇듯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데 두고 다른 사람과 사는 것은 내내 삶을 우울하게 만들수도 있어...



그런 한편 어머니가 25년을 내내 가슴속에 품고 살아왔던 남자도 마찬가지.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어쩌지를 못하고, 그저 홀로 그 긴 세월을 살아간다. 그렇게 허구헌날 술을 마시면서 그녀를 그리워만 한다... 나는 사랑에 미쳐서 사람이 한없이 우울해지거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버텨내기를 바라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내 바람일 뿐, 이렇게 내가 간절히 원하는 단 하나의 상대와 내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는 한없이 절망속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는 거다. 무엇보다 내가 그걸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나는 한 달 내내 울며 보낸 적이 있었다. 걷다가 울고 음악 듣다 울고 지하철 안에서 울고 산에서 울고.... 아아,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아픈 날들이었지. 나는 사랑을 잃고 씩씩하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사랑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마음도 너무나 잘 알겠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떡해야 한다? 사랑을 지켜야 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 해.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둘 사이에 끼어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좀 애틋한 영화가 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고, 내가 간절히 원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했을 때 사람이 얼마나 많이 우울해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인생 뭐냐

사랑 뭐지?



그건그렇고, 남자주인공은 넘나 매력없어... -0-



보다가 케이트 베킨세일 머리 너무 이뻐서 아아, 나도 머리 길게 웨이브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저 영화 보기 바로 직전에 컷트친 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렇게 머리 기르려면 한 십 년 걸리려나.... 그러면 내 나이가 몇이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내가 오늘 아침에 알라딘 주문해서 식판이 올 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간을 넣지 못했다는 게 넘나 슬프다.... 아니, 루시 바턴도 못샀는데 무슨 형제 또 나오고 그래? ㅜㅜ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고 그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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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1-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니까 영화 보고 싶은대요.
영화 보러 자주 나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주에는 혼자라도 나가야겠어요. 매력적인 남주도 볼겸 겸사겸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신간들이 줄을 섰네요.
으흠... 저도 엘리자베스는 딱 한 권 읽었던 터라 뭘 먼저 읽을까~~ 행복한 고민중~~

다락방 2017-11-20 11:0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남주는 매력적이지 않아요. 아오 찌질하고 답답하고 제가 안사귀고 싶은 스탈의 남자사람 ㅋㅋㅋㅋㅋ
이 영화가 아니라도 다른 영화라도 보러 훌쩍 나갔다 오세요, 단발머리님. 맛있는 것도 사 드시고요. 저는 육개장칼국수 사먹어봤는데 다시는 안사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경험이 중요해요. 헤헷.

저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올리브 키터리지] 딱 한 권 읽은 게 전부라 저 두 책 모두 사고 싶어요! 앗! 에이미와 이사벨은 가지고 있는데 안읽었네요. 다른 많은 책들이 그렇듯이... 하하하하하

스윗듀 2017-11-2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는 다락방님 페이퍼..역시 재밌어 크으 ㅠㅠ 다락방님 저는 얼마전에 <뉴니스>라는 영화를 혼자 봤는데 넘나 잼났어요. 현실 모던 러브의 반영이랄까. 조금은 유치하고 어리고 우리가 아는 그 얘기긴 하지만 여주 남주 모두 매력적이었더구욧! 특히 니콜라스 홀트 너...하아 ㅋㅋㅋ 다락방님도 만약 보시게되면 같이 감상 나눴으면 해요. 히힣

다락방 2017-11-20 13:12   좋아요 1 | URL
아니, 스윗듀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대체 그동안 뭐하시느라 이렇게 오랜만에 나타나신 거예요?! 안그래도 며칠전에 문자메세지함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던에 스윗듀님과 나눴던 문자메세지가 보관되어 있는 걸 봤답니다. 아아, 스윗듀님 요즘 뭐하고 지내시나... 생각했던 참이었어요. 생각만 하면 이렇게 똭- 나타나는 마법! 매직! ㅎㅎㅎㅎㅎ

뉴니스 라는 영화는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데이트앱을 통해 만난 커플의 이야기네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상영시간이 저랑 안맞아서..흐음... 다운 받아 보든지 해야겠어요. 후훗.

비연 2017-11-2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달달한? 영화 안 본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이거 (제목 때문에) 볼까 했더니 그런 내용이 아니었네요..ㅜ
저스티스 리그나 봐야겠어요 ;;;;

다락방 2017-11-20 15:56   좋아요 0 | URL
주인공 토마스는 아버지의 내연녀와 섹스하고 그런데 그 아버지가 사실 알고보니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고...같은 내용이 나와요. 로맨스랑은 좀 거리가 멀어요. 하핫.

비연 2017-11-21 08:19   좋아요 0 | URL
헐... 로맨스 아니군요 ㅠ

다락방 2017-11-21 08:37   좋아요 1 | URL
영화 카피에 썸머가 가고 가을이 왔다 이래가지고 달달이 로맨스인줄 알고 가서 봤네요. -_-
막장+로맨스 코딱지만큼+성장드라마=딱히 안봐도 된다
이런 공식이 나옵니다. ㅎㅎ
 

무거운 책이라 독서대를 이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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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23:12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11-20 07:05   좋아요 0 | URL
딩동댕!!

비연 2017-11-2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공부? 하는 포스심다..^^

다락방 2017-11-20 08:21   좋아요 1 | URL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하는 책임엔 틀림없습니다!! ㅎㅎㅎㅎㅎ

비연 2017-11-20 15:14   좋아요 0 | URL
저도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독서대를 오늘 꺼내볼까 하는 마음이 몽실몽실 올라오네요 ㅎㅎ
(흠흠.. 그럼 공부를 해야 하나요 ㅜㅜ)

다락방 2017-11-20 15:5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그냥 책만 읽으세요. 두껍고 무거운 책은 들고 보면 모가지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그래요 ㅠㅠ
 
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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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이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일단 페미니즘 소설에는 어떤 게 있을까,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선택가능한 책이 되니 좋을 것이고, 페미니즘은 걸러가자, 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걸러내버릴 책이 되니 단점이 될 것이다. 실상 페미니즘에 관련된 입문서, 안내서, 소설까지, 정작 읽어야 할 사람은 '페미니즘은 걸러가자'고 하는 사람들 쪽일테니까. 접근을 용이하게 한 것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작가들에게 주어진 순간, '페미니즘 페미니즘' 하고 머릿속에 가득차서 글을 풀어내는 게 좀 자유롭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달아 세 편이 '사실의 기술'에 가까우며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의 다른 버전들을 만나는 것 같았으니까. 애인에게 파혼을 선언하는 여자, 집에서 장녀인 여자, 아들을 키우는 여자의 이야기들이 순차적으로 나온다. 우리가 연애를 하면서, 집에서 딸로 자라면서 겪었던 것들이 이야기되어지고, 그리고 결혼해 남편과 살면서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 삶 속에서 '어 이건 아니지 않나' 했던 것들 혹은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스스로에게 자꾸 되뇌었던 것들. 그 의문과 불안,걱정은 어느 한 시기에 진행되었다 끊기는 것이 아니고 여자로서 살아가는 평생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의 실린 단편의 순서는 어쩌면 의도적인 것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설 혹은 문학에 기대하는 바는 사실 기술 그 너머에 있다. 단순히 현실과 사실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내가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이것 말고 조금 더, 를 바라게 하는 거다. 이건 사실 소설을 대하는 독자의 개인적 취향일 것이다. 누군가는 소설의 의미가 바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데 있다 할 것이고, 내 경우엔 그걸 넘어서 '그 무엇'에 닿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1더하기 1은 2다', 라고 말해지고 그걸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읽는 과정에서 '앗! 1더하기 1은 2인거구나, 2일 수 있는 거구나!' 하게 만들어지는 걸 원한달까.  '김이설' 작가가 자신의 단편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망치로 남자 머리를 깨부수는 여자가 등장하는 십 년 전에 쓴 소설이 더 페미니즘적인 소설이었나 싶고(p.122)'라고 한 것처럼, 이 책속의 작가들이 그저 자연스레 자신이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쪽에 더 페미니즘이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 '페미니즘' 이라고 주제를 딱 던져놔 버리니 오히려 너무 전형적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은 거다.


그래서 내게는 좀 아쉬움을 주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것이 페미니즘이든 혹은 또다른 무엇이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목적지를 찾아가고자 하려면 일단 지도를 펴고 내가 서 있는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내가 오른쪽으로 가야할 지 사거리를 건너야 할지 뒤를 돌아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런점에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자,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파악하자' 하는 것을 권유하는 느낌이다. 자, 우리가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봐야 하지, 라고. 이 책에 단편을 써낸 작가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윤김지영 쌤은 '헬페미'로서 자신의 역할은 바로 지금의 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헬페미들의 언어와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다고 했었더랬다. 바로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로서 같은 운동을 할 수만은 없다.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생활이 있고 각자의 환경이란 것이 있으니까. 그런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게 중요할텐데, 이 책을 써낸 소설가들은 그것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표현한 것일 테다. 사실의 기술이든 그 너머를 나아가든 나는 이 소설가들이 앞으로도 부지런히 소설을 써낼 수 있기를 바란다. 굳이 '페미니즘'으로 소설을 써보자, 하는 게 아니어도, 그들이 쓰고 싶은 바로 그 글을 쓰더라도 그 안에 페미니즘이 자연스레 깔려있기를 원한다. 성평등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들의 소설을 읽었을 때 성평등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라는 것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기를 원한다.



끝으로 표제작 <현남 오빠에게>를 다 읽고나서, 아, 이 여자 현남오빠(자꾸 한남오빠라고 쓰게 된다) 가 이 편지 읽고 찾아오면 어떡하지, 집 앞에서 기다리면 어떡하지, 스토킹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었는데, 이 걱정을 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이 글을 쓴 조남주 작가 역시 그런 걱정을 했더라.



느낌표를 찍고 마지막 문단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런데 강현남씨가 스토킹을 하면 어쩌지? 몰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놓았으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고요. 실제로 적잖게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p.39, 조남주, 작가의 말)




고백하자면 나 역시 어떤 연애가 끝나고난 뒤, 이런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로부터 해를 입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마지막에 자연스레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게 몹시 씁쓸하고 또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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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교수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음식을 음미했다. 그는 노르웨이의 고향 지방 풍습대로 수르콜(채썬 양배추에 향신료와 각종 양념을 넣고 삶은 요리)과 여러 채소, 감자, 말린 자두, 생크림 크랜베리 소스 등과 함께 돼지갈비구이를 먹었다. 식사 시간도 노르웨이 전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만찬을 먹는 오후 다섯시에서 일곱시 사이로 맞추었다. 다들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잘 먹지 않는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흔히 곁들이는 맥주와 아쿠아비트(향이 가미된 독주로 주로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생산된다)도 마셨다. 그는 천천히 의식을 치르듯 음식을 먹었고 생각에 잠겨 술을 마셨다. 식사를 끝낸 후에는 접시와 쟁반을 부엌으로 내간 다음 디저트로 리스크렘(쌀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 죽처럼 끓인 요리)을 가지고 왔다. 이 디저트를 먹는 것 또한 그의 가족이 지켜온 전통이지만 그는 그것이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격식을 갖추어 디저트까지 먹었다. (p.9-10)

















55세의 혼자 사는 남자 안데르센 교수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여 거실에 트리도 장식해 두었고 한 사람분의 상을 차려 만찬을 즐긴다. 이 책의 작가, 그러니까 안데르센 교수를 만들어낸 '다그 솔스타'는 노르웨이 사네피오르에서 태어났는데, 그래서 너무 당연하게도 노르웨이에 사는 안데르센 교수의 혼자만의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잘 살려냈다. 나는 사실 북유럽이란 곳에 딱히 로망을 가진 것도 아니고, 노르웨이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저 도입부, 혼자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며내고 한 사람분의 상을 차려내어 디저트까지 먹는 장면을 읽다보니 갑자기 가슴속에 꿈틀꿈틀... 노르웨이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 거다. 딱 이만큼만 읽고서 아아, 이것들 다 뭐여, 무슨 음식이지? 노르웨이 음식 나 알지도 못하는데, 노르웨이에 가서 며칠 머물면서 노르웨이 음식들 좀 먹어볼까?! 막 이렇게 되는 거다. 



때가 때이니만큼 안데르센 교수는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 박싱 데이에는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즐긴다.



그들은 전채 요리로 락피스크(송어 등의 생선에 간을 하여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발효시켜 그대로 먹는 노르웨이 전통 음식)를 먹었고, 주요리는 뇌조였다. 락피스크에는 맥주에 이어 체이서(약한 술 뒤에 마시는 독한 술, 또는 그 반대 순서로 마시는 술)로 아쿠아비트가 나왔고, 뇌조 요리에는 스페인산 고급 레드 와인 리오하가 나왔다. 전채 요리가 나오기 전에 여주인 니나는 메뉴를 정하면서 고민했단 난제에 대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전채로 락피스크를 먹고 나중에 뇌조를 먹으면 잘 어울린다. 락피스크와 뇌조 둘 다 같은 지역인 발드레스산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음료를 생각하면, 맥주에 체이서로 아쿠아비트를 마신 뒤 레드 와인을 마신다? 자신이 생각할 때 그건 이상적인 조합이 아니었지만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뇌조를 먹기 전에 다른 전채 요리를 먹는다? 아니, 그건 싫었다. 식품 저장실에 발드레스에서 만든 락피스크가 있고 같은 지역에서 난 뇌조가 있는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게다가 두 가지 모두 직접 나서서 구한 음식으로, 뇌조는 베른트가 발드레스에 가서 사냥했고 락피스크 역시 발드레스에 사는 가까운 지인에게서 구한 것, 그러므로 메뉴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p.37-38)



아, 진짜, 정말이지, 여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게 다 있다. 음식은 당최 어떤 것들인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크리스마스, 파티, 좋은 친구들, 맛있는 음식과 술... 아 너무 좋지 않은가. 내가 혼자 살게 된다면 나 역시 아주 친하고 소중한 사람 몇명만 불러서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엄마 아빠랑 같이 산다... 음..... 만약 내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파트너가 있다면, 파트너랑 만찬을 즐기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 이브, 크리스마스, 박싱 데이..(사실 박싱 데이에 우리는 쉬지 않지만...), 저녁마다 조용한 음악을 틀어두고 한 상 가득 기름진 음식들을 차려내어(물론 기름진 음식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날에도 잘만 먹지만...), 와인과 위스키를 꺼내놓고, 건배하고 이야기하면서(도란도란) 먹으면 너무 좋지 않을까. 진짜 행복이 폭발할 것 같은 거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술 마시는 거고(응?), 크리스마스고,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아, 나는 이 분위기에 압도되어, 이것이 마치 노르웨이여서 가능한 것마냥, 노르웨이에 가고 싶어지는 거다. 일단 혼자 가는 거지...노르웨이에는 같이 갈 사람이 없어... 내년에 나의 여행친구도 멀리 갈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혼자 갈 생각이고, 포틀랜드와 오클랜드 중에서 가야지 눈누난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슬로가 툭-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아, 오슬로여.....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크리스마스와 음식과 술과 파티에 취해있다고 해서 이 소설이 그렇게 훈훈하고 따뜻하고 아름답고 헤롱헤롱하는 내용인 것은 결코 아니다. 안데르센 교수는 한사람분의 식탁을 차려두고 혼자서 식사를 하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창밖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어엇, 하고 놀라서 밤을 꼬박 새고, 신고할까 주저하다 신고도 못했고, 그게 고민이 되어서 친구를 만나 얘기하려 했지만 파티 분위기에 그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찾지 못해 파티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안절부절... 그러는 동안의 안데르센 교수에게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이 이 소설의 내용인데, 안데르센 교수가 어떡하지, 어떡하지, 내가 진작 신고를 했어야 되는데, 이제와 신고하면 너무 늦었지, 내가 왜 신고를 안했지, 이러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나는 



크리스마스 좋아 홍야홍야 ♡

오슬로 가면 신기한 음식 많겠지? 헤롱헤롱 ♡

독주 마시고 싶어 힛힝~ ♡



이러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 나여...




안데르센 교수에게 내가 막 공감하지 못한 건 그가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살아 있는 살인자를 신고하는 것이 어쩐지 꺼려진다고 하는 그 마인드가, 나는 알듯도 하지만 그것이 나의 마인드가 아니기 때문에, 좀 공감을 하려다가 튕겨져 나오고 공감을 하려다가 튕겨져 나오고..... 그래서 이 소설이 내게는 재미가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재미는 없는데..... 자꾸자꾸 술 마시는 거 나와서 넘나 좋고, 그 술을 마시는 데에 있어서 자기만의 철학이 있고(노란 탄산수는 안돼, 파란 탄산수여야 해!!), 크리스마스인 것도 넘나 좋은 것이다....... 누가 물어보면 '나는 그 책 별로였어' 라고 대답할 책인데, 책을 다 읽고 치워두고서도, 아아, 노르웨이에 가야겠구나.....하고 머릿속에 잔뜩 노르웨이에 대한 생각만 나는 것이다......



아아,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노르웨이 아름답다고 한 것도 아니고, 노르웨이 살기 좋다고 한 것도 아니고, 노르웨이가 지상낙원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아, 나는 그런데 어째서 ... 크리스마스에 기름진 음식에 술마시는 것만 읽고 이렇게 노르웨이를 앓게 되는 것인가.... 인간 뭐지? 나는 뭘까? 역시나 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것...




그런데 뇌조는... 먹기 싫어.....이름이........먹으면 안되는 이름같아..... 뇌조...........



저 음식들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검색해봤는데 이 책 읽으면 다 나와 있을까?















마침 이번 알라딘 굿즈 식판이던데...나 식판 탐나..... 해당도서는 다른 거 있으니까, 이 책 같이 사서 식판 받을까? 나는 요리 만들 줄도 모르면서 음식 사진 보면 왜이렇게 좋지. 내년 여름에 노르웨이 갈까?





지난 주말을 보내면서 토요일에 운동을 좀 격하게 해가지고 일요일에 근육통이 진짜 엄청 심하게 왔더랬다. 술병에 근육통까지 아주 그냥 돌아버릴 뻔 했는데, 마침 트위터를 보는데 생강이 그렇게나 근육통에 좋다는 거다. 오오? 생강차를 사다놓고 근육통 있을 때마다 마셔야겠네? 생각하면서 엄마한테 


'엄마, 나 지금 근육통 심한데 근육통에 생강이 좋대! 생강차 사다놓을게'



했더니 우리 엄마... 아아 우리 엄마.....진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가,



'야, 내가 어제 생강차 만들었어! 지금 끓여줄까?'



하시는 게 아닌가! 와!! 대박!! 아니 무슨 ㅋㅋㅋㅋㅋㅋㅋㅋ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짱이다 우리 엄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엄마가 생강차 끓여줘가지고 맛있게 마셨다. 움화화화핫. 이게 엄청 사랑하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같다. 후훗. 



그나저나 크리스마스...

나는 왜이렇게 크리스마스 다가오면 가슴이 벌렁거리지.

정작 그 날이 되면 아무 일도 없는데.

크리스마스가 특별했던 적은 진짜 없었던 것 같은데, 왜 늘 항상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러지?

왜 이 나이를 먹어도 계속 그러지? 두근두근....




크리스마스 파티를 혼자 하든 둘이 하든 여럿이 하든,

노래는 이거 틀어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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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7-11-1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다락방님 글을 읽으니 노르웨이의 여름이라고 로맨스소설이 생각나네요.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판타지스럽긴 해요 ㅎㅎ 노르웨이 이야기는 별로 나오질 않는다는게 흠이죠... 노르웨이 노르딕... 락피스크 상상만 해도 소름이에요. 덴마크나 스웨덴에서 청어 소금에 졸여다 바로 먹는 그거 생각나는데요? 락피스크 먹으면 와인이 절로 들어갈 듯 ㅠㅠ 벌써 트리의 계절이... 오늘 아침은 미리 크리스마스입니다! ^^

다락방 2017-11-17 10:10   좋아요 0 | URL
아니 에이바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청어 소금에 졸여다 바로 먹는... 아 그거 너무 싫다 ㅋㅋㅋㅋㅋㅋ 저 어디꺼였지..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는데 샌드위치에 생선 넣는 거 나왔었거든요. 진짜 기절하는 줄 ㅋㅋㅋㅋㅋㅋㅋㅋ저도 제가 락피스크를 먹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홍어 삭힌 것도 못먹는데 ㅋㅋ 냄새도 싫은데 ㅋㅋㅋㅋㅋ 락피스크 하나 먹으면 와인 한 병 마셔서 입 씻어낼듯요 ㅋㅋㅋㅋㅋㅋ

노르웨이의 여름 뭐지? 로맨스 소설이라니 제가 한 번 검색해보겠습니다. 안그래도 내일 로맨스 영화 하나 예매해뒀어요. 예매는 했는데 제목은 생각이 안나네요 ㅋㅋㅋㅋㅋ

자주 봬요, 에이바님. 완전 반갑잖아욧!! >.<

비연 2017-11-1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락방님은... 책을 지르게 하고 여행을 가고 싶게 하는 글을 자꾸만 올리셔서... 저를 혼란에 빠뜨리심다..ㅜ
내년엔 길게 어딘가 여행가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중인데요..ㅜㅜㅜㅜ 스페인? 포루투갈? 이러고 있는데...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어디서 할까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되네요..ㅎㅎㅎ;;;

그나저나, 책 주문 또 했는데 요즘 책이 너무 안 읽혀요! ㅜ

다락방 2017-11-17 10:29   좋아요 0 | URL
저 10월달에 책 두 권 읽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 진짜 너무 안읽히고 책을 펼치면 잠이 쏟아져요. 이래가지고 어떻게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나...스스로 참 거시기한 기분이예요. 하하하핫

저는 오늘 식판을 받기 위한 지름을 할겁니다. 하핫. 식판 넘나 탐나고요. 동그란 식판 받을까 네모난 식판 받을까 고민고민중입니다. 장바구니에 들어있는 저 많은 책들중에 어떤 걸 선택해서 식판을 받을까요. 최종 승리자는 누구? 하하하하하.


저는 여름 휴가가 제가 쓸 수 있는 가장 긴 휴가인데, 그 때 미국 갈까 뉴질랜드 갈까 고민중이었는데 노르웨이를 후보군에 또 넣어봅니다. 아, 하고싶은 거 많으니 회사를 계속 다녀야겠죠. 흙 ㅠㅠ

순오기 2017-11-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욜에 북유럽에선 공간구성을 어떻게 하는지 강연 들으며 부러웠는데...음식 때문에 가고 싶은 나라에 등극하는 다락방님 페이퍼도 좋아요!!♥

다락방 2017-11-19 15:47   좋아요 0 | URL
북유럽에선 공간구성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강의라니.... 와- 세상엔 정말 제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강연이 많은가 봅니다. 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어요. 하핫.
실제로 먹어보면 다 제 입맛에 안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북유럽에 가서 낯선 음식들 먹어보고 싶어졌어요. 언젠가는 갈 기회가 있겠지요.
추운데 잘 지내셔요, 순오기님!!

심술 2017-11-1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께서 생강차 준비하셨다는 데서 나온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옛날 어느 광고에서 많이 듣던 건데 하고 찾아보니 오리온 초코파이였군요. tv를 없앤 지 오래라 요즘 초코파이 광고에도 이 노래 쓰이는지는 모르겟네요.

다락방 2017-11-19 15:48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텔레비젼을 안봐서 초코파이 광고가 지금도 나오는지, 나온다면 이 노래가 쓰이는지는 전혀 모르겠네요. 그건그렇고, 이 페이퍼를 쓸 때 쵸코파이 광고의 그 부분을 생각하며 쓴 건 맞습니다. 후훗.

독서괭 2017-11-2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판 받으시면 감상 올려주세요! 저도 고민고민 중이라..ㅎㅎㅎ
그나저나 저번 오뎅탕도 그렇고 어머니 센스 최고시네요!!

다락방 2017-11-20 10:07   좋아요 0 | URL
그쵸. 저희 엄마 좀 짱인듯요.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그런데 식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술안주 담아 먹을까요... 하하하하하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루페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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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소재로 한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뭘까. 아마도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일것이다. 우리는 서점이나 책을 다룬 책에서 내가 읽은 책이 나오면 작가와 나의 감상을 비교하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내가 이미 읽은 책인데!'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또한 모르는 책이 나오면 메모를 하며 다음 읽을 책으로 점찍어두기도 하고. 이 책은 앨리스라는 섬에 있는 유일한 서점의 이야기이다. 서점 주인 에이제이는 2년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사는 39세의 남자인데, 싫어하는 책의 종류가 아주 많고 성격은 까탈스러우며 사람들한테도 잘 대하지 못하고 사실 아내를 잃은 슬픔 때문에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책은 파는둥 마는둥 저녁마다 술에 취해 잠들고 아내의 환영을 보게 되는데, 이럴때 출판사 직원 어밀리아가 책을 영업하러 왔다가 좀 안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가게 된다. 


그런 퉁명스런 에이제이의 서점에 갓난 아이가 놓여진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서점에서 자랐으면 좋겠다며 부탁한다를 쪽지를 남겨놓고 가버린 후다. 꼬박 주말을 그 아기 '마야'와 보낸 에이제이는 위탁가정에 보내려던 마야를 자신이 키우기로 하고 입양한다. 갑자기 에이제이는 두 살난 마야의 아빠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에이제이는, 계절마다 한번씩 출판사 직원 어밀리아를 만나다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난 이런 책 싫어!' 하고 버럭거렸던 책,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 꼭 읽어보라고 추천했던 책을 4년만에 읽고서는 엉엉 운다. 아 이 책이 좋은 책이었구나. 그 책을 소재로 어밀리아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같이 식사도 하게 되고 그렇게 조금 더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어밀리아는 그에게 애인이 있다고 말한다. 에이제이는 절망해서 소개팅을 몇차례 해보지만, 대부분의 소개팅이 그렇듯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지나치게 착하고 뻔하다. 그러니까 서점에서 일어나는 일, 그 서점 혹은 섬에서 일어나는 로맨스라고 해봐야 충분히 짐작가능한데, 그렇다고 그 착하고 뻔한게 싫다는 건 아니다. 인생이란 게 어차피 뻔한 거 아닌가. 가끔 착하기도 하면서. 또한 이 책을 읽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가 혹은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물론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책에 얽힌 이야기일텐데, 이 책은 그걸 충실히 채워준다. 다른 책들의 이야기, 다른 책속의 주인공이나 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내가 각주를 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야기가 뭔지 내가 알 수 있다는 거 진짜 너무 신나지 않는가! -언젠가도 한 번 얘기했지만,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여러분 꼭 읽어보시라. 외국 소설에서 핍과 해비셤 부인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주석을 볼 필요가 없어!!- 게다가 《클로디아의 비밀》로 마야와 동네 경찰관이 나누는 대화는, 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웃을 수 있다. 내가 읽은 책들이 다른 책 속에서 소재로 사용된다는 건 너무 신나는 일인데, 이 책이 그걸 해준다. 이것만으로도 뻔하지만 즐거운데, 뻔하고 즐거운 게 이뿐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로맨스!



로맨스 역시도 뻔하고 즐겁다. 


연애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함께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여자가 함께 살 애인에게 자신의 책장 반을 비워주는데 거기에 각종 트로피만 진열한 걸 보고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침묵과 대화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건 비극임을 알고 있기에.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어밀리아는 출판사의 책들을 서점에 소개하는데 에이제이가 그 책들을 부지런히 열심히 읽고, 읽을 때마다 어밀리아에게 메일로 혹은 문자로 감상을 얘기하며 그에 대한 대화(당연히 농담이 섞인!)를 나눈다. 에이제이는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도 보고 그에 대한 농담도 그녀랑 나누게 되는데, 한 계절을 보내고난 후 어밀리아는 그에게 애인과 헤어졌음을 얘기한다. 




저녁을 먹고 두번째 와인병을 딴 후에야 드디어 에이제이는 그녀와 브렛 브루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용기를 냈다.

어밀리아는 슬몃 웃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당신이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안 그럴게요. 약속합니다."

어밀리아는 남은 와인을 쭉 들이켰다. "지난 가을에, 우리가 내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을 때…… 저기, 당신 때문에 내가 브렛과 깨졌다고 생각지는 말아줬으면 싶군요. 그런 게 아니니까. 내가 브렛과 헤어진 건, 당신과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과 감수성을 공유하고 열정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기억해냈기 때문이에요. 바보 같죠." (p.159)



나는 저것, 감수성과 열정을 공유한다는 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항상 함께할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필요한 것도 바로 저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돈이 더 중요하다, 외모가 더 중요하다 등등 다른 조건들을 더 중요하게 내세울 수 있지만, 그래서 그런 상대를 맞춤하게 찾았다 하더라도, 결국 감수성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 관계가 좋은 상태로 오래갈 수는 없다. 그러다보면 내 애인, 내 배우자는 아니지만 감수성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관계'가 생기게 되는데, 어밀리아가 만약 애인 브렛과 헤어지지 않고 애인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면 어밀리아는 에이제이와 정서적 유대관계를 찐하게 맺게 됐을거다. 브렛으로부터 충족할 수 없었으니까. 에이제이가 어밀리아를 좋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관계는 그러니까, 부조리하지 않은가.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 남는 관계가 될 수가 있어. 그런 점에서 어밀리아가 브렛과 헤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어밀리아와 에이제이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데, 버스 타고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에 사는 에이제이와 도시에 사는 어밀리아의 거리는 멀고도 멀어서, 주변에서는 이들의 연애를 말린다. 그리고 그들도 그들 사이의 이 물리적으로 먼 거리가 그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한 쪽도 자신의 일인 '출판사 영업직원'과 '서점 주인'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개인적인 얘기로 들어가보자면,

나 역시 먼 거리에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어떤 함께살 미래를 꿈꾸거나 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 연애는 즐겁게 유지됐었는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너네 그렇게 멀리 있어서 어떤 가능성도 없는데 그 여자를 놔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내게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게 부질없는 거냐, 이게 의미없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매우 화가 났었다. 왜 다른 사람의 연애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걸까? 우리가 지금 이대로 잘하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이 놔주라 마라 하는거지?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지 혹은 없을지는 제삼자가 판단할 몫이 아니지 않은가. 안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가끔 그런 고민에 놓이게 된다. 어차피 이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지 못할거라면 우리가 지금 이러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그런 고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지내는 것에 기쁨과 행복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내고 있는데, 거기에 왜 끼어들어서 놔주라 마라 하는걸까. 어떻게든 결론은 우리 스스로, 당사자가 내려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만약 멀어서 헤어졌다면 그것도 내 몫이요, 먼 거리를 극복하고 누군가가 이동했다면 그 역시 우리 몫이란 말이다.



어밀리아는 페리에 올라서 에이제이에게 전화했다. "난 프로비던스에서 못 움직여. 당신은 앨리스에서 못 나오고.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

"그렇지." 에이제이는 동의했다. (p.168)



"이건 너한테 불공평한 일이야. 넌 서른여섯이고, 앞으로 더 어려질 리는 없잖니. 네가 진심으로 애를 갖고 싶다면, 불가능한 관계에 시간을 낭비하면 안돼, 에이미." (p.168)



"제부가 그 어밀리아란 사람하고 정말 진지한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제부 인생에 그렇게 큰 부분을 차지하게 만드는 건 마야한테 불공평한 일이야."

그리고 대니얼이 에이제이에게 말했다. "여자 때문에 삶을 바꾸다니 안 될 일이지." (p.168)



에이제이는 이 먼 거리와,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직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결혼합시다." 그는 거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난 섬에 처박혀 있고, 가난하고, 애도 딸렸고, 수익이 점점 줄어드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당신 어머니가 나를 싫어하고, 작가 이벤트를 주최하는 일에는 영 젬병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이한 청혼이네." 어밀리아가 말했다. "당신의 장점부터 시작해야지, 에이제이."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p.193)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건,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라는 말보다 더 힘든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내가 다른 걸 포기하고 너에게 갈게' 가 아니라, 상대에게 다른 걸 포기하고 내게로 오라는 걸 뜻하는 거니까. 상대에게 포기하게 만드는 건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걸 건네는 것 또한 사랑이고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쉽게 낼 수는 없는 용기. 내가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연애했을 때, 나는 그가 오라고 하면 언제든 가겠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이런 마음을 가진 나라도, 아무리 나라도, 그에게 '당신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라는 말을 할 순 없었다. 그건 해서는 안되는 말로 내게 여겨졌다.




어밀리아는 미간을 찡그렸고, 에이제이는 그녀가 거절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오코너의 단편을 말하는 거야? 당신 책상 위에 있던. 이런 순간에 떠올리기엔 지독히 어두운 건데."

"아냐, 당신을 말하는 거야. 나는 끝없이 찾았는데. 겨우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였군."

"차로 다니면 기차는 좀 생략해도 돼." 에이제이가 말했다.

"당신이 운전에 관해 뭘 아는데?" 어밀리아가 물었다. (p.194)




버스 타고 배 타고 기차 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차 두 번과 배 한 번 이었구나. 고현정과 조인성이 나왔던 드라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도 아주 먼 거리에 있었더랬다. 조인성이 슬로베니아에 있었지 아마. 그래서 그들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었는데, 어느날 충동적으로 고현정이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 티켓을 끊고서는, 그래봤자 열여섯시간(이 맞나 모르겠다)이면 갈 수 있는데, 그 시간이면 되는데!! 하는 거다. 에이제이와 어밀리아도 마찬가지.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라고 말해버리니, 뭐 괜찮아지는 것 같은 거다. 물론 실질적으로 이동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게다가 저 장면에서도 우리 책 읽는 사람들은(책부심 독서부심 가득만땅), 으하하핫, 플래너리 오코너,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내가 알지, 읽었지, 할 수 있게 되어 몹시 즐겁다. 게다가 나 역시 '어? 이건 이럴 때 가져올 수 있는 책이 아닌데? 어두운데?' 하게 되는데, 역시나 그런 식의 대화가 이어지는 거다. 크-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대한 책을 읽는다는 건 이렇게나 짜릿한 기쁨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즐겁지 아니한가. 




에이제이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고, 어밀리아 역시 마흔을 곧 앞둔 나이라는 것, 그런데 짝을 만나 결혼했다는 게 나는 너무 좋다. 나이 들어 결혼하는 부부가 반드시 더 잘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삼십대 중반에 만나 결혼한 내 친구 부부를 보면 되게 이상적인 것 같은 거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하다가 만나 각자가 맡은 역할을 역시 잘해내면서 둘이 조화롭게 지내는 것. 나이 든다고 반드시 성숙해지는 건 아니지만, 성숙한 관계란 건 바로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에이제이와 어밀리아의 결혼식에 섬의 경찰관 어머니가 참석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결혼식이라면 원래 다 좋아하긴 하지만, 성숙한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결심하니까 유독 멋스럽지 않아?" (p.195)



그러자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요, 엄마. 눈 감고 달려드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죠. 여자는 남자가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둘 다 세상에 완벽이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죠." (p.195)




보통의 책이었다면 에이제이와 어밀리아가 결혼하면서 끝났을 거다. 마치 결혼하는 순간 이야기는 끝, 행복 끝이라는 듯이. 그러나 결혼하면서 이책의 겨우 절반 조금 넘는 부분을 지났을 뿐이다. 결혼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어밀리아는 여전히 출판사의 영업직으로 일하고 에이제이는 서점을 운영하고, 마야는 쑥쑥 자란다. 아이가 자라면서 집도 늘려가야 했고 서점은 섬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가고 서점은 여전히 섬에 존재한다.


착하고 뻔하네, 라고 읽으면서 좀 심드렁했는데, 응 그렇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나는 정서적 교감, 감수성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무척 좋다. 그거면 된 것 같고 그거면 충분하다. 우리는 결국 우리와 감수성을 공유할 사람을 찾아 시간을 보내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어밀리아가 말했듯이 그렇게나 찾아 헤맸는데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에 그가 있었다. 이왕 찾을 거라면, 내 옆집에 살면 얼마나 쉬울까마는, 인생이란 게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행기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곳에 떠억- 하니, 감수성을 나눌 사람을 숨겨 두기도 한다. 내 감수성이 열세시간 날아가야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다면, 뭐 어쩌겠는가.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만나야지. 그러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출근해 돈 벌고 있는 거 아닌가.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든데, 열시간이든 스무시간이든 걸려 어떻게든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생에 있어서 큰 행운을 쥐게 된 셈이라 봐도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좋은데 후훗, 읽으면서 혼자 계속 으쓱하고 잘난척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나 그거 알아, 나 그 주인공 알아, 나 그 이야기 알아, 나 그 제목 말아, 하면서 연신 혼자 잘난척 하는 기분이 정말이지 좋단 말이야? 앞으로 읽는 책들에서도 계속 더 잘난척 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 그나저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도 내가 백자평을 써둔 것 같으니 뭐라고 썼나 찾아봐야겠다.



착하고 뻔한 이야기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겨울에 읽기 좋겠다고 한다. 착하고 뻔한 이야기인데, 착하고 뻔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야 그나마 삶이 좀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이 년전쯤 어쩌다 「로링 캠프의 행운」을 다시 들춰보게 됐는데 하도 펑펑 울어서 내 도버 염가 문고판이 수해를 이은 걸 볼 수 있을 거다. 생각건대, 중년이 되니 물러진 것 같구나. 그러나 또한 생각건대, 근자의 내 반응은, 인생의 시기마다 그에 딱 맞는 이야기를 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는 구나. 명심해라, 마야. 우리가 스무 살 때 감동했던 것들이 마흔 살이 되어도 똑같이 감동적인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나 인생에서나 이건 진리다. (p.57)

˝난 항상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터키시 딜라이트를 먹어보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으면서 에드먼드가 터키시 딜라이트 때문에 가족을 배신할 정도라면 그건 진짜 어마어마하게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에이제이가 말했다. ˝니콜한테 이 얘기를 했었나 봐요, 어느 해인가 아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박스를 줬거든요. 근데 가루를 잔뜩 묻힌 꾸덕꾸덕한 사탕이더라고. 내 평생 그때처럼 실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바로 그 순간 공식적으로 당신의 유년기가 끝난 거군요.˝
˝절대 전 같지 않았지요.˝ 에이제이가 말했다.
˝하얀 마녀의 터키시 딜라이트는 달랐을지도 몰라요. 마법의 터키시 딜라이트는 훨씬 맛있다거나.˝
˝아니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게 에드먼드가 가족을 배신하게 만드는 데는 그리 대단한 유혹이 필요치 않았다거나.˝
˝엄청 시니컬하네.˝ 어밀리아가 말했다.
˝터키시 딜라이트 먹어본 적 있어요, 어밀리아?˝
˝아뇨.˝ 그녀가 말했다.
˝좀 구해줘야겠군요.˝ 그가 말했다.
˝내가 그 사탕에 환장하면 어쩌려구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을 얕보게 되겠지.˝ (p.124-125)

˝난 어밀리아를 사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에이제이가 반박했다. ˝근데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아직 타이밍이 나쁜 거지. 그 무렵에는 당신 아내가 세상을 떠났어. 그러고 나서 당신한텐 마야가 생겼고.˝
˝별로 위로가 안되는데.˝ 에이제이가 말했다.
˝하지만 이봐, 심장이 여전히 뛴다는 걸 알게 된 건 좋은 일이 잖아, 안 그래? 내가 소개팅이라도 알아봐줄까?˝ (p.134)

˝아, 갈게. 거대한 초록 코끼리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요는,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여행을 간다고 할 때 실은 다른 종류의 여행일 때도 있거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단지 내가 어떤 여행을 가는 건지 하는 거야. 우리가 토피어리를 보러 가는 거야, 아니면 뭔가 다른 걸 보러 가는 거야? 가령 당신의 그 여자사람친구라든가?˝
에이제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잠깐 어밀리아를 보러 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맞아.˝ (p.154)

˝당신은 섬에 정착하면 안 되겠지. 일 때문에 출장을 무척 자주 가야 하니까.˝
어밀리아는 두 팔을 앞으로 쭉 편 채 에이제이를 붙들고 피식 비웃었다. ˝그렇지. 근데 나한테 앨리스 섬으로 이사와달라는 부탁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아니, 난…… 그게, 난 당신 생각해서.˝ 에이제이가 말했다. ˝앨리스로 이사하는 건 당신한테 현실성이 없는 얘기잖아. 요는 그렇다는 거지.˝
˝그치, 현실성이 없지.˝ 어밀리아가 말했다.그녀는 형광 핑크색 손톱으로 에이제이의 가슴에 하트를 새겼다.
˝그건 뭐라는 색조야?˝ 에이제이가 물었다.
˝장밋빛 안경.˝ 기적이 울렸고, 어밀리아는 배에 올랐다.
그해 봄,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기다리며 에이제이는 어밀리아에게 말했다. ˝일 년에 새 달만 앨리스에 있으면 안 되겠지.˝
˝아프가니스탄으로 통근하는 게 더 쉽겠다.˝ 그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그 얘기를 버스 정류장까지 갖고 와서 꺼내는 게 마음에 드는걸.˝
˝마지막 순간까지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려 애썼어.˝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긴 하군.˝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을게.˝ (p.165-166)

딱히 글 쓰기에 관련된 사항은 아니지만…… 언젠가 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할 날이 오겠지. 주변에 딴 사람이 있어도 너밖에 안보인다는 사람을 골라라. (p.199)

˝섹스는 진짜 오래간만인데.˝ 이즈베이는 자기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섹스를 해야 한다고요.˝ 이즈메이는 분명히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하고 싶다면.˝
˝하고 싶어요.˝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그게 두번째 데이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면요. 난 당신이 다른 남자를 얻을 때까지 준비운동 대상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p.252-253)

˝씨발!˝ 평생 욕하는 법이 없는 어밀리아였으므로, 에이제이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야?˝
˝흠, 문제는, 내가 당신 뇌를 좀 좋아했나봐.˝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 눈물은 됐어. 당신의 동정은 원치 않아.˝
˝당신 때문에 우는 게 아냐. 나 때문에 우는 거지. 당신을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 끔찍한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다시-˝이제 그녀는 숨이 찬다.˝-다시 데이트 사이트에 가입할 순 없어. 그럴 순 없다구.˝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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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7-11-1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왕 너무 좋은 이야기네요. 책도 리뷰도요. 저의 겨울 독서 리스트에 올리겠습니다. 코코아 마시며 읽겠어요. 책 다 읽고 이 리뷰도 다시 읽어야지! >.<

다락방 2017-11-15 09:37   좋아요 0 | URL
이 시점에 로맨스가 등장하는 거 너무 전형적이고 뻔하지만, 근데 저는 그 로맨스가 무척 마음에 들더라고요. 역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차야 해요. 하하하. 코코아라니, 너무 좋아요, 네꼬님! 너무 잘어울려요! 저는 따뜻한 커피와 던킨 도넛츠 먹고 있어요. 후훗.

레와 2017-11-1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장바구니를 편집(?)하고 있어요. 이 책도 넣을까 우짤까 막 고민하고.. 어렵다요! ^^;;


다락방 2017-11-15 11:1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을 책 같아요. 히힛.
물론 막 착하기만 한 건 아니긴 한데 전반적으로 착한 책이고...우리는 가끔은 착한 책을 읽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고 말이지요. 후훗.

psyche 2017-11-15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뻔한 이야기인데 책 이야기다보니 밑줄긋고 싶은 부분은 많더라구요. 저도 저 터키쉬 딜라이트 항상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도대체 얼마나 맛있었길래 배신을! 하면서요. 먹어본 사람들이 실망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먹어보고싶어요

다락방 2017-11-15 15:04   좋아요 0 | URL
저도 터키쉬 딜라이트 궁금하긴 했었는데요 막 그렇게까지 먹어보고 싶거나 그러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걸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이 책에 존재하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게 이 책의 묘미인 것 같아요. 책 읽고 대화하는 게 가능한 거요.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았어요.

psyche 2017-11-15 22:35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큰딸이랑 그런 대화들을 했었는데 얘가 사는게 바쁜지 어쩐지 요즘 책을 잘 안읽더라구요. 그래서 외로웠던차에 이렇게 북플에서 이런 대화를 할 분들을 만나니 참 좋아요!! 책 많이 읽고 글도 잘쓰고 생각도 깊은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다락방 2017-11-16 09:34   좋아요 0 | URL
어떤 관계든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진짜 큰 기쁨이죠!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면에서 알라딘은 정말 최고의 장소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에 대해 얘기하고 감상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알라딘에 글을 쓰고 또 다른 분들의 글을 읽는 게 즐거운 것 같아요.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말이지요. 후훗.

단발머리 2017-11-1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착하고 뻔하면서도 그리고도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네요.
나는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면서 아직 안 읽은 책이 많다는 걸 확인하면서 더 열심히 읽자~~~이런 착한 결심을 하고야 말았어요.
지금 이런 책이 필요해요. 착한 로맨스, 달콤한 사랑 이야기^^
그나저나 나는 뭘 먹으면서 이 책을 읽게될까요?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11-15 15:0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착하고 뻔하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는 읽어줄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 즐거워하고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고 같이 사랑에 빠지고 그러는 순간이 필요하죠. 후훗.

네꼬님은 코코아 저는 도넛.... 단발머리님은....음.....케익 어떨까요? 아니면 호두파이 같은 것! 후훗.
아, 단팥빵도 좋을 것 같아요. 사실, 뭐든 좋죠. 뭐든 먹으면서 읽어요! 히히.

비연 2017-11-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망설임없이 보관함에 넣으며... (사실은 장바구니..)
락방님. 너무 합니다. 생각하게 되네요 ㅜ 며칠 전에 올해 마지막 책을 구입했었었었더랬는데요.
근데 안 넣을 수가 없어서 이 책을 넣으니.. 다른 책들도 함께 들어갈테고.
아. 전 아무래도 책더미와 함께 집에서 쫓겨날 거 같습니다..ㅜㅜㅜ

다락방 2017-11-16 14:04   좋아요 1 | URL
그런 비연님께 기쁜 소식 하나 전하자면, 이번에 새로 올라운 굿즈-식판입니다!!-를 받을 수 있는 해당도서입니다. 그러니 지르시고 식판 받으세요!! ㅎㅎㅎㅎㅎ
저도 식판 받으러 갑니다. 슝-

식판 받아서 거기다 밥 먹으며 다이어트 하려고요...(응?)

책도 사고 다이어트도 하고 일석이조!! (응?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