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고 오래전 그날 내가 사전을 찾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p.51)




내가 페미니스트 라는 단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을 때 조차 나는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페미니스트가 무얼 뜻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때조차 나는 페미니스트였다. 나는 끊임없이 '왜 나만?', '왜 여자만?', '왜 나는 너(남자)랑 같은 행동을 하면 안돼?' 라고 의문을 가져왔고 그렇게 목소리를 내 발언했었다. 내가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페미니스트 였다. 그걸 인정하는데 꽤 오래 걸린 셈이다.


한편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있고, 그걸 드러내는 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불리한 위치에 여성이 놓여있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성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나는 하이힐을 신으면서 기분 좋아하고 예쁜 원피스를 나풀거리면서 걷는 걸 좋아한다. 요즘엔 눈화장에 관심이 많고 어떻게 하면 더 돋보이는 눈을 만들 수 있을까 섀도우를 바르며 갸웃갸웃 한다. 보습이 잔뜩 들어간 크림을 새로 샀고, 예쁜 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다. 


나는 남자들이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자기들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환상을 이제는 공공연한 기준으로 세워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성을 소비하는 사회에서 모델들은 전부 남자들이 바라는 바로 그런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육체를 바로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순간도 없다. 너네는 저렇게 마른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니네들이 세워놓은 니네들만의 기준이고, 나는 그렇게 살진 않겠다, 라고 늘 생각해왔다.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어. 그것이 비록 항아리처럼 배가 나온 모습이라도, 그게 내가 좋다면 나는 그런대로 살거야. 너네한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먹고 싶은 걸 참고 하루종일 운동하면서 살진 않을 거야. 만약 내가 먹고 싶은 걸 참고 운동하는 데 빡세게 노력한다면, 그건 내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어야 해. 혹여 '남자들은 그렇게 뚱뚱한 여자, 관리 안하는 여자 싫어해' 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싫어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남자가 있어야만 삶이 충족된다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가 함께할 때 불행한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나지만, 내 스스로 여전히 많은 고정관념들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나는 재이슨 스태덤의 근육을 볼 때마다 좋아 죽는 것이다. 이렇게 강한 남자를 보는 게 너무나 짜릿해, 이것은 사회가 맞춰놓은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에 그대로 굴복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단지 나는 미에 대해 나만의 기준을 가진 것인가... 내가 재이슨 스태덤의 근육가득한 몸을 보고 좋아하는 게, 그러니까, 그냥 나의 취향적인 문제인걸까? 아니면 나는 길들여진건가? 여기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있는데, 강한 남자가 그러니까 나만의 고유한 판타지인건지,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내가 갇혀있는건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쳐나가야 할 점이 있다면, 그건 내가 갇힌 고정관념에 대한 것일 거다. 그렇지만... 나는 재이슨 스태덤을 좋아하지만....너무나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내 연인에게 재이슨 스태덤처럼 되라고 말하진 않아, 재이슨 스태덤이 저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페티시즘에 더 가깝지 않을까? 단단한 근육, 강인함에 대한 페티시즘? 



그러면서 약간 갸웃하는게, 내 주변의 여자사람들은 나처럼 근육질의 강인한 남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보다는 잘생긴 얼굴, 마른 몸, 아름다운 미소 같은 것으로 남자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강동원한테 1도 관심이 없고(정말이다, 영화 개봉해도 안궁금하고 안본다) 오로지 재이슨 스태덤한테만 관심있다. 아, 이것은 그러니까 나의 취향의 문제인가..




내가 지금껏 써놓은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 작은 책 한 권에 그대로 들어가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자신의 남자사람 친구, 동료, 할머니의 얘기들을 풀어놓으며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한다. 실제의 사람들과 실제의 대화, 본인의 경험으로 풀어놓은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아주 쉽게 읽힌다. 스웨덴에서는 이 책을 전국의 청소년에게 모두 배부했다고 하니, 이 책에 대한 접근이 쉽다는 것을 굳이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될테다. 얼마전에 여자지인에게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선물했는데, 그 책 읽기가 어려워서 포기했다고 하더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읽어보면 사실 그간 자신이 느껴오고 생각한 게 정리되어 있었을테지만, 거기에 접근하는 용어라든가 그걸 툭툭 건드려서 꺼내놓는 걸 읽는 건, 쉽지 않았을 거라고 느낀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선물하기로 했다. 이 책이라면 접근하기가 더 쉬울 것 같아서. 페미니즘을 다룬 책에서 많이 등장하는 '타자화'라는 단어 자체부터 일반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거리감이 들게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는 그런 어려운 용어들로 페미니즘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기초적인 책이 될 것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남성들에게 읽으라고 권하기는 좀 더 꺼려지는데, 나는 이 책을 남동생에게 읽어보라 권했다. 이거 되게 짧아, 한 시간도 안걸릴거야, 그리고 쉬워, 그러니까 꼭 읽어봐, 라고 했더니 남동생은 읽었다. 다 읽고나서는, 이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이 책은 남자보다도 아직 이런 생각을 못하고 있는 여자들이 읽는 게 중요할 것 같아, 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김을동 같은 사람이 읽어야 되지 않겠냐고... 김을동.......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너무나 확고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크게 그 생각이 바뀔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아직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혹은, 이건 뭔가 이상해, 이건 좀 불공평하잖아? 라고 평소에 생각해왔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 그래 맞아! 라고 고개 끄덕이며, 그렇다면 나는 페미니스트야, 라고 생각하게 될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많아질 것 같다. 그래서 입문서로 권한다.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입문서. 이론으로 설명한 게 아니라 경험으로 접근한 책이라 책장을 넘기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 책을 많이 읽어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남동생이 다 읽은 이 책을 제부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또 한 권을 준비했다. 남동생의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여성들이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이 말한다면, 귀기울이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더 많은 사람이 말하게 하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정보들을 경험으로써, 제공한다. 



이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8,820원에 판매되고 있다. 음, 조금만 더 저렴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가 어떤 기념일에, 명절연휴에, 크리스마스에, 그리고 때로는 아무 일도 없이 상대에게 건네며 선물하기에 좋은 가격 아닌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책의 말미에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p.52) 라고 말한다. 이 책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읽어도 좋을 책이다. 아니,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나라에서 뭐하냐, 역사교과서 가지고 지랄하지말고 이 책을 청소년 모두에게 배부하라!!




다른 사람의 페미니즘 테드 강연까지 더해서 책을 이거보다 살짝 두껍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생겨 별을 하나 뺀다.


그는 내게 사람들이 내 소설을 두고 페미니즘적이라고 수군거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충고하기를,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슬픈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요, 나더러 절대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란 남편을 얻지 못해서 불행한 여자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행복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p.13)

나는 간절히 반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험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반장은 남자아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선생인믕 그 점을 사전에 밝히는 걸 잊었는데, 어차피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시험에서 이등을 한 아이는 남자아이였습니다. 그러니 그 남자아이가 반장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욱더 재미있었던 점은, 그 남자아이는 회초리를 들고 교실을 순찰하는 데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상냥하고 온화한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너무너무 그러고 싶었지요.
하지만 나는 여자였고, 그 아이는 남자였으므로, 그 아이가 반장이 되었습니다. (p.15-16)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아이만 계속해서 반장이 되면, 결국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장은 남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p.16)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호르몬이 다르고, 성기가 다르고, 생물학적 능력이 다릅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 있지만 남자는 못 낳습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테스토스테론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일반적으로 여자보다 육체적으로 더 강합니다. 세상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약간 더 많습니다. 세계 인구의 52퍼센트가 여성입니다. 하지만 권력과 명예가 따르는 지위의 대부분은 남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고한 케냐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마타이 Wangari Muta Maathai 는 이 형산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묘사했지요. ˝높이 올라갈수록 여자가 적어진다.˝ (p.20)

얼마 전에 나는 라고스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가 그 글을 읽고는 성난 글이었다며, 그렇게 성난 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p.23)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그 취약한 자아에 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p.31)

한번은 알고 지내는 어느 나이지리아 사람이 내게 나 때문에 남자들이 위축될까봐 걱정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걱정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나한테 위축될 남자라면 애초에 내가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할 타입이니까요. (p.33)

나는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심지어는 직장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을 하도 많이 받은 나머지 등 떠밀리듯이 나쁜 선택을 하고 만 젊은 여자들을 많이 압니다.
우리 사회는 일정 연령에 다다른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심각한 개인적 실패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p.34)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라는 말은 남자든 여자든 공히 자주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 말을 할 때는 보통 어차피 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포기한 경우입니다. 남자들은 짐짓 부아가 난 척하면서, 사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 우리 마누라가 매일 밤 클럽에 가는 건 안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이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주말에만 가기로 했어.˝
반면에 여자들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할 때는 보통 직장이나 경력이나 꿈을 포기한 경우입니다. (p.35)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회화가 그 차이를 더 강화합니다. (p.39)

내가 아는 한 여성은 남편과 똑같은 학위를 받았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집안일을 거의 도맡는데, 이건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죠. 내가 그보다도 놀란 점은 남편이 아기 기저귀를 갈 때마다 아내가 ˝고마워요˝라고 말한다는 거였습니다. 만일 그녀가 남자가 자기 자식을 돌보는 것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면 어떨까요? (p.41)

나는 내 여성성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여성스러움을 간직한 나 자신으로서 존중받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만하니까요. 나는 정치와 역사를 좋아하고, 사상에 관해서 훌륭한 논쟁을 벌일 때 행복합니다. 나는 하이힐을 좋아하고, 립스틱을 바릅니다. 남자에게 받는 칭찬도 여자에게 받는 칭찬도 다 좋지만(솔직히 털어놓자면 스타일 좋은 여자들의 칭찬이 더 기쁘긴 합니다), 가끔은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옷을 입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옷을 좋아하고, 그 옷을 입으면 내 기분이 좋으니까요. ˝남성의 시선˝이 내 삶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바는 대체로 부수적입니다. (p.42-43)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묹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p.44)

˝당신은 왜 자신을 여성으로만 봅니까? 왜 그냥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은 한 사람의 구체적인 경험들을 침묵시키는 방편입니다. 물론 나는 인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겪게 되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p.4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월마야 2016-02-12 10:45   댓글달기 | URL
역사교과서 대신 이걸 읽게 하자는 다락방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는 모든 남성들에게 선물하려구요. 모두가 평화롭게 존재하고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서요^^

다락방 2016-02-12 15:20   URL
네네, 저도 쟁여두고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회사 동료에게 한 권 선물했어요. 히힛. 좋은 책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레와 2016-02-12 17:20   댓글달기 | URL
주문완료! 땡큐!

2016-02-12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일들은 전혀 가혹하다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돌로레스가 남편 조를 죽인 일이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살인은 나쁜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게 더 나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가 그랬다. 조가 돌로레스를 '패는' 남편이어서가 아니다. 그것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나쁜 짓을 그는 저질렀고, 그래서 그의 살아있음이 누군가에게 내내 두려움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라면, 나는 일말의 동정심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렇게 옷의 먼지를 털듯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말끔하게 지워낼 수도 잊혀지는 종류의 일도 아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돌로레스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 



오래전에 스티븐 킹의 단편선을 한 권 읽고는 우앗, 너무 무서워서 나는 앞으로 스티븐 킹을 읽지 않을 거야, 라고 결심했더랬다. 그때의 그 공포라니! 기억하기로는 <옥수수밭 아이들>이 가장 무서웠다. <트럭>도 무서웠고, <금연 주식회사>도 무서웠고 ㅠㅠ 아아, 이 사람이 쓰는 소설을 나는 읽어낼 수 없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해서 이 책도 사두고 몇 년을 그냥 꽂아두기만 했는데, 하필이면 연휴끝인 어젯밤 집어 들었고, 아아, 스티븐 킹 아저씨가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게 쭉쭉 빨려들어가게 글을 써주셔서 ㅠㅠ, 아니, 그랬기 때문에!! 나는 새벽녘까지 책을 한 순간도 덮지 않고 다 읽어버리고 만것이다. 덕분에 세 시에 잤어요. ㅠㅠ 잠들기전에 이런 책을 읽으면 안되는데.. ㅠㅠ 오늘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 힘들었겠어, 안힘들었겠어.


게다가 세 시에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오지도 않았다. 이 책에서 느꼈던 공포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에. 무서워 ㅠㅠ 그래서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자꾸 끄집어내야 했다.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킹 아저씨 작품을 이제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겠다. 공포물은 좀 빼고 ㅜㅜ


곳곳에 명문들이 있다. 이런 문장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의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자네는 항상 착한 아이였지. 남자 아이치고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가 공정한 사람이라는 얘기야. 게다가 이제는 버젓한 남자가 됐어. 하지만 너무 으스대지는 말라고. 자네도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이 자랐으니까.빨래를 해 주고, 콧물을 닦아 주고, 자네가 잘못된 쪽을 향하고 있을 때 돌려세워 줄 여자가 항상 옆에 있었다는 얘기야. (p.16-17)

우리 아버지가 벌을 내리면 엄마는 그걸 받아들였어. 하지만 아버지나 엄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어. 어쩌면 엄마는 남편의 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엄마를 벌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으면 항상 같이 일하는 남자들한테 얕잡아 보였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절이 달랐으니까.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하지만 말이야, 내가 애당초 얼간이처럼 조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그 인간이 그런 짓을 하는 것까지 참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을 하는 거냐, 나무 상자에서 꺼낸 장작개비로 매질을 하는 건 절대 가정 바로잡기가 아냐. 그래서 나도 조 세인트 조지 같은 사람, 아니 그 어떤 남자라도 나한테 그런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p.98-99)

내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까 그 여편네가 좀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마치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p.212)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6-02-11 12:14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은 대단한 작가이지요. 저도 가끔 그의 작품을 손에 들면 그대로 끝까지 갑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6-02-12 15:15   URL
맞아요. 아, 새벽까지 읽느라 고생했어요. 그리고 내내 감탄하며 읽었답니다. 명문이 가득한 좋은 소설이었어요!

moonnight 2016-02-11 13:48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예요. ^^

다락방 2016-02-12 15:15   URL
저도 기꺼이 엄지를 줄 수 있는 작가에요! 다른 작품들도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스티븐 킹의 작품이 많아서 좋아요! 꺅 >.<

hnine 2016-02-11 15:10   댓글달기 | URL
아주 옛날, 극장 (영화관이 아니라 극장이라고 부르던 시절)에서 봤어요. 미저리의 여주인공, 누구더라...캐시 베이츠! 그녀가 돌로레스 클레이본으로 나오지요? 미저리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도 꽤 무서웠던 기억이 나네요. 스티븐 킹이 쓰고 재미없는 책이나 영화도 있을까 싶어요.

다락방 2016-02-12 15:16   URL
저도 오래전에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을 읽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아 정말 읽기를 잘했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책이었어요. 영화를 본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영화도 좋다고 칭찬하더라고요. 저도 기회가 되면 영화를 봐야겠어요. 물론 책으로도 충분했지만요.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clavis 2016-02-11 22:48   댓글달기 | URL
백만개의 좋아요를 던집니다용♡♡

다락방 2016-02-12 15:17   URL
백만개의 좋아요를 기꺼이 받습니다용 ♡♡

2016-02-12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2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배익화시인 2016-02-12 22:05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한다는
소설의 한 구절이 인생의 한 단면을 축소시킨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한번씩 못된 사람이 되어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인 것 같아서... *^^
 

왜 수키시리즈 그 다음은 나오고 있지 않는거죠? 심지어 왜 나와있는 것들까지 죄다 품절인겁니까? 네? 왜죠? 제가 얼마나 수키를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열린책들의 책들중 절반이 수키 시리즈인 거, 보이십니까??? 제가 아무리 중고샵에 책을 팔아도, 수키 시리즈는 팔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그 다음 시리즈도 계속 내달란 말입니다, 열린책들!!

 

 

 

 

 

 

 

난 당신이 수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건 들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당신이 이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수키가 다른 사람에게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나보다 수키를 더 원한다는 것도 알아요. 난 나를 동정하는 남자와 섹스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와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보다는 더 가치가 있어요. 내 생의 나머지 시간이 다 걸린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앨 거예요. 당신이 여기 조금 더 머물 거라면, 나는 당신 집에 돌아가서 내 물건을 싸서 사라질게요.(pp.212-213)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말하건 그건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내게 당신을 위해 시체를 묻어 달라고-아니면 시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할 겁니다.
우리 사이에는 안 좋은 과거가 있어요, .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할 거예요.  (
p.48) 

 

 

 

 

 

 

 

 

 

「내 육체적인 욕망은 무척 강해요. 정말정말 강한 육체적 욕망을 갖고 있죠. 하지만 난 하룻밤 자고 마는 그런 여자는 아니에요.」 (p.50)

 

 

 

 

 

 

 

 

 

 

 

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즐거워해요. 나는 내 침대 안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너무 심해서 아플 지경이에요. 우리가 함께 더 지내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당장 살 곳이 필요하잖아요. 내게는 슈리브포트에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214

 

 

 

 

 

 

 

 

 

 

 

당신 바쁘네요. 전화하지 말걸.
나는 금세 주눅이 들어 말했다.
농담해요? 당신 전화는 하루 종일 내가 겪은 일 중에서 최고로 좋은 일이었어요!(
p.139)

 

 

 

 

 

 

 

아, 이벤트 참가 페이퍼까지 썼더니 배가 고파졌다. 어떡하지..

놋북이 느려졌네.. 제부가  ssd를 교체하면 빨라진다고 하는데, 뭔말인지..그냥 맥북.. 살까.. 할부..같은 걸로 ??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른 2016-02-10 20:43   댓글달기 | URL
나는 그보다는 더 가치가 있어요!!!멋져요!! 수키 읽어볼까요????저도 놋북이 넘느려서 어케 방법없을까했더니 옆방남자가 새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ㅠㅠ

다락방 2016-02-11 12:19   URL
저도 저 문장 정말 좋아해요! 저건 수키가 한 말은 아니지만, 정말 좋았어요. 샬레인 해리스 좋구나! 했어요. 수키가 여자주인공인데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이 느낀 바를 거리낌없이 말하고자 하거든요. 그런 점들이 저는 정말 좋았어요. 저 위의 인용문에 `내 육체적 욕망은 무척 강해요` 같은 말을 보시면 짐작 가능하시죠? 아하핫. 욕 할 때는 욕도 잘해요! 수키 좋아요!

단발머리 2016-02-10 21:03   댓글달기 | URL
수키시리즈, 올려주신 인용글들이 완전 멋진대요.
수키시리즈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수키인거죠? ㅎㅎ
책 사진 올리려면 다락방님 정도는 되줘야~~ 각도나오고, 구도 나오는데....

저도 노트북 없어서 하나 사고 싶은데, 산다면 맥북으로 사고 싶어요.
엄청 폼나더라구요.
근데 생각보다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윈도우랑 많이 다르다고요.

다락방 2016-02-11 12:20   URL
네, 수키 시리즈의 주인공은 수키입니다! 매력이 철철 넘쳐요. 저는 수키가 너무 좋아요. 수키가 한 번은 냉장고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리는데 저도 울고 싶었어요. ㅠㅠ 수키의 감정들이 저는 저한테 너무 잘 전달되어서 수키를 좋아해요. 자기 욕망을 인정하는 것도 너무 좋아요. 헤헷.

저도 맥북으로 사고 싶은데 사용이 쉽지 않다고 해서 갈등중이에요. 물론 가장 큰 갈등은 돈.. 이지만요. 아하하하 ㅜㅜ

북깨비 2016-02-11 01:47   댓글달기 | URL
어쩌다보니 저는 죽음의 계산부터 안 읽고 있어요. 그전까진 신나게 읽었는데 ㅠ 아무래도 트루블러드가 종영되고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16-02-11 12:21   URL
전 번역되어 나온 건 다 읽었는데, 어쩐 일인지 1권 빼고 지금 다 품절로 떠요. 그 다음 시리즈도 나오질 않고. 저 수키 좋아하는데 ㅠㅠ 트루블러드는 안봤어요. 도무지 안나 파킨에게 몰입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1편 보고 안봤어요. ㅎㅎㅎㅎㅎ

북깨비 2016-02-11 16:35   URL
저는 안나 파킨을 좋아하지만 다락방님 심정 이해해요. ㅠㅠ 저도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제가 상상한 이미지와 맞지 않으면 못 보거든요. 하지만 좀만 참고 보시면 에릭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시즌이 더할수록 포텐 터지는 에릭의 매력. 마력! 결코 후회하시지 않을 거에요. ㅎㅎㅎㅎ 보시다시피 제가 에릭한테 완죤 미춋습니다아. ^^;;

아무개 2016-02-11 08:43   댓글달기 | URL
제 책장에 열린책들은 <그리스인 조르바> 한권뿐이군요.

저는 요새 안읽은 아니 못읽은 양서들 다 내다 팔아서 먹고 삽니다 쿨럭~

다락방 2016-02-11 12:22   URL
저도 저기에 그리스인 조르바 보이네요. ㅎㅎ
저도 요즘 안읽은, 못읽은 책들 팔아서 근근히 먹고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더 내다팔 책 없나 눈을 부라리며 책장을 보곤 하죠. ㅋㅋㅋ

그저좋은휘모리 2016-02-11 09:55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네요. 딱 반정도 저도 가지고 있는데 이 사진을 보니 그리워서 다시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16-02-11 12:23   URL
그러게요. 그립네요, 휘모리님. 아니 대체 다음 시리즈가 왜 안나오고 있나 몰라요. -_-

북깨비 2016-02-11 16:41   URL
저도 얼마전에 갑자기 이 시리즈가 그리워져서 다시 읽으려고 전에 마지막으로 읽은거 다음권을 딱 폈는데. ㅠㅠ 앞에 뭔일이 있었는지 완전 가물가물해져 가지고요 어디서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겠어요. 막 트루블러드 내용이랑 머릿속에서 막 뒤죽박죽. ㅠㅠ

inblossom 2016-02-11 18:45   댓글달기 | URL
아.. 수키를 그리워하시는 분이 계셔서 넘 반갑네요.
저 열린책들 네이버 카페에 두 권인가 마저 번역해달라고 했는데, 계획에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뭔가 연판장이라도 돌려얄 듯 ㅋㅋㅋㅋ
 

 

 

 

 

 

 

영화 [캐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결국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간단해 보이지만, 보이는것만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내가 '내가'되는 일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인데, 영화속 캐롤은 그러나, 결국은, 내 예상을 깨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나는 캐롤이 울면서, '나는 나를 부정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할 때, 함께 울었다. 아, 그렇게 말하기까지, 그러니까, '내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기까지,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녀에게 당신 자신이 되어도 된다고, 결국 그게 맞는 거라고, 일어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해 나는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라서.

 

내가 나 자신이 되기도 힘이 들고, 비슷한 크기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이 든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내는 것은 어떠한가. 그러나 캐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임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나와 함께 살지 않을래요?'

 

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결국 이렇게 늙어가는가 보다. 이렇게 나이들어가는가 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그들이 결국은 함께 살고 싶어한다는 걸 보면서, 아, 결국은 함께 살고 싶어하는거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서, 그렇게 깨달으면서 늙어가는구나. 나는 어쩐지 예전의 내가 아닌 것 같다.

 

'당신을 놓아줄게요' 라는 말에서는 엉엉 소리내서 울고 싶어졌다. 도저히 그 말을, 등장인물들만의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랑을 놓고야 마는, 아니 잃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놓지 말아요, 라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싶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놓아준다고 말할 때,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나를 놓지 말아요, 라고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왜 놓는다는 거야, 왜. 놓는다고 말하지마.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친구랑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좋지, 참 좋지, 했다. 나는 나를 부정하지 않을거야,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친구 J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 친구라면 이 영화를 좋아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함께 사는 이야기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아내와 오래 함께 살았던 것이라든가, 함께 살고 싶어서 결혼하기로 결심한 친구라든가, 그리고 함께 살자고 제안하는 남자가 나오는 수키 시리즈라든가.

 

 

 

 

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즐거워해요. 나는 내 침대 안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너무 심해서 아플 지경이에요. 우리가 함께 더 지내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당장 살 곳이 필요하잖아요. 내게는 슈리브포트에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214쪽

 

 

 

 

 

 

 

 

 

친구 한 명은 이 영화의 엔딩씬을 언급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오래전에 '우마 써먼'이 나오는 영화 [프라임 러브]의 엔딩씬이 좋다고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맞먹는 엔딩씬이다. 엔딩씬이 너무 완벽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ㅜㅜ

아름다운 엔딩보다 더 아름다운 '나는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거에요' 때문에, 그 장면을 대체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해서, 나는 책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2016년에 책 한 권도 사지 않기, 같은 계획은 다 무의미해..

인생...

 

 

 

 

 

 

 

 

 

 

 

 

 

 

 

 

 

작년에 툭 튀어나와서 나를 놀래켰던 새치 하나가, 늘 그자리에서 나를 신경쓰이게 만들었다. 저걸 뽑아 말어, 하고 내내 고민하다가 뽑지 않고 여태 두었었는데, 볼 때마다 고민하는 나를 두고 여동생이 그냥 뽑아 버려, 하고는 툭, 뽑아주었다. 뭔가 앓던 이 빠지는 기분이라, 좋았어! 나는 이제 새치 없는 여자사람이야! 라고 꺅꺅 거렸는데, 오늘 보니 그 자리에 다시 새치가 있더라.... 이건....... 뭐야? 이렇게 늙어가는거야? 아, 벌써 2016년 2월이구나.

 

 

일요일엔 친구를 만나 영화 캐롤을 보고, 충무로에서 합정까지 세 시간을 걸었다. 합정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는 와인 두 병을 마시고 피자와 스파게티, 피시앤칩스를 먹었다. 우리는 2016년에 우리의 계획들을 얘기했다. 이런 굵직한 계획들을 소화해내다 보면, 어느틈에 올해도 빨리 가게 될 것 같다고. 그 계획들 중에는 친구와 내가 함께 하는 것도 있었다. 3월달에 있을 결혼식엔 함께 참석할거라 2박3일로 강원도에 가기로 했고, 7월달엔 매튜본을 함께 보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의 굵직한 계획들을 얘기하다보니, 정말 빨리 가겠더라, 올해도. 그렇게 나이를 한 살 또 먹겠지. 나는 널 만나는 게 즐겁고 좋다, 라고 얘기하고 친구 역시 네가 즐거운만큼 나도 즐겁다, 라고 답했다. 다음날엔 다리통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지만, 우리가 걷는 내내 즐거웠으므로, 봄이 오면 또 여름이 오면 이 길을 이렇게 또 걷자, 라고 말했다. 여름엔 수건도 꼭 준비해서 수시로 땀 닦으면서 걷자고도 말했다.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소매 바깥으로 나의 겨털이 뭉쳐 있어도 놀라지 말아....-0-

 

 

 

설 당일에는 우리집에 왔던 여동생네 가족을 따라 남동생과 내가 여동생네 집엘 갔다. 가는 길에 내가 쟁여둔 와인을 한 병 가져갔다. 평소에 여동생과 조카들이 잠들고 제부와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술자리를 갖다가 파하곤 했는데,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술 마시던 제부가 첫째 조카를 데리고 들어가 잠들었고 여동생이 둘째조카를 데리고 들어가 재우고서는 혼자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삼남매가 모여앉아 술자리를 갖게 된 것.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여동생이지만, 그날은 잘도 마시더라. 내가 가져간 와인을 다 마시고 내가 지난번에 남겨둔 와인까지 꺼내와 다 마셨는데도 모자라, 제부가 우리엄마랑 마시려고 뒀던 와인까지 가져와 다 마셨다. 소주와 맥주는 냉장고에 있었지만, 1차로 소주를 마신 터라 계속 와인을 마시고 싶어, 이제는 없는 와인 대신 정종을 따서 마셨다. 우리는 작게 신해철의 음악을 틀어두었다. 여동생이 듣고 싶다던 신해철의 노래들을 듣다가, 에메랄드 캐슬의 노래를 듣다가,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가 어릴적부터 함께 했었기에 같이 들었던 노래들이었고, 신해철에 대해서라면 우리 삼남매는 공통적 감정을 가진 터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조카들 이야기 그리고 직장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와 각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사소하고도 사소한 이야기들을 자정이 넘어서까지 도란도란 나누다가, 각자 자러 들어갔는데, 여동생은 따라 들어와서는 내 다리며 어깨를 모두 안마해주었다. 덩치는 내 절반밖에 안되는데 손목 힘은 나의 두 배가 넘는 것 같다. 언니 그렇게 많이 걸어서 아픈 거 다 풀어야 해, 하면서는 아주 꾸욱꾸욱 주물러 줬다. 나는 괴성을 질렀다. 그 야밤에...

 

그 시간 내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아 이 시간이 정말 좋다, 오랜만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가보았다. 여동생은 다음날 우리가 돌아가고나서 단톡방에 메세지를 보냈다. 정말 좋더라, 라고.

 

 

 

아직 쟁여둔 와인이 세 병이나 남았고(후훗), 와인과 먹으려고 사둔 촉촉한 초코칩과 칙촉도 내 방 책장에 있다. 방금전에 남동생이 가지고 나가려는 걸 '그거 제자리에 둬' 라고 말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지켜냈다, 내 초코칩!!!!! 냉장고엔 체다치즈도 있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른 2016-02-10 20:24   댓글달기 | URL
ㅠㅠ 너무 좋아요~전부 다~ 마지막으로 체다치즈까지!!!

다락방 2016-02-11 12:10   URL
책장에 초코칩 쿠키가 있고 냉장고에 체다치즈가 있고, 와인도 있는 제 방에, 제 집에 너무나 가고 싶습니다! 회사 싫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NaHoMyung 2016-02-10 20:37   댓글달기 | URL
굿

다락방 2016-02-11 12:10   URL
땡큐! ㅎㅎ

아무개 2016-02-10 21:14   댓글달기 | URL
엔딩장면에서 눈물콧물 찔찔ㅠㅠ

단발머리 2016-02-10 21:16   URL
아무개님도 그 영화 보셨군요.@@

강동원 보러 가겠다, 설레이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두 분의 코멘트에 심히 고민되는 상황이네요. ㅎㅎㅎ

아무개 2016-02-11 08:47   URL
단발님 검사외전은 나중에 걍 티비에서 공짜로 보셔도 무방하실듯 합니다만 ^^:::


단발머리 2016-02-11 08:50   URL
텔레비전 집에 없잖아요~~~
아흐.... 아시면서 ㅋㅎㅎㅎㅎㅎㅎㅎ

아무개 2016-02-11 08:52   URL
아...맞다...
ㅡ..ㅡ:::::::::::::::::

다락방 2016-02-11 12:11   URL
단발머리님, 굳이 한 편의 영화라면, 저는 검사외전을 보진 않았지만, 캐롤을 추천드립니다. (단호!)

단발머리 2016-02-11 12:13   URL
그렇다면..... 검사외전과 캐롤을 두 개 다 보는걸로 하죠~~~ ㅎㅎㅎ

단발머리 2016-02-10 21:15   댓글달기 | URL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게 너무 좋아요
다락방님도 그런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좋네요, 진짜... ㅎㅎㅎ

다락방 2016-02-11 12:11   URL
그치요? 우걀걀걀.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제일 좋아요, 최고 좋아요!! >.<

저도 단발머리님 좋아해요. 단발머리님은 어쩐지 그냥 좋아요.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좋아요. 꺅 >.<

단발머리 2016-02-11 12:14   URL
앗싸라비요 콜롬비요 닭다리잡고 뜯어뜯어~~~!!!

나와같다면 2016-02-10 23:57   댓글달기 | URL
일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오직 단 한번.. 축복같은 경험..

다락방 2016-02-11 12:12   URL
그런 경험을 해봤다면, 그건 정말 축복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님.
:)

아무개 2016-02-11 08:48   댓글달기 | URL
아참..다락님 캐롤 책은 번역이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다고.
캐롤을 남자 이성애자처럼 묘사해놓았다고 하더군요.
엄청 욕들어먹고 있다고 해요...

다락방 2016-02-11 12:13   URL
번역 얘기가 많은 것 같던데..그런가요 ㅠㅠ
그치만.. 읽어보고 싶은데 ㅠㅠ
제가 신뢰하는 리뷰어가 좋다고 해서 기대도 하고 있었는데 ㅠㅠㅠ
생각 좀 해볼게요. ㅜㅜㅜㅜ

2016-02-11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 - 소박한 미식가들의 나라, 베트남 낭만 여행
진유정 지음 / 효형출판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기는 좋을 확률이 적다. 내게는 그렇다.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알아볼까 싶어 찾아봤다가는 지루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과 사진들만 보게 되어서 심드렁해지곤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도무지 여행기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기란

 

1. 가보고 싶게 만들 것

2. 지나치게 자기 감상에 젖어있지 말 것

 

이었는데, 이 두가지의 조건을 충족하는 여행기를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우연히-도무지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 모르겠다 ㅎㅎㅎㅎㅎ- 읽게된 이 책은 내가 생각하는 이 두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켜 주었다. 나는 베트남에 대해 그간 관심이 1도 없었는데 베트남에 가고 싶어지는 거다. 게다가 글들이 정갈하고, 저자가 좋아하는 국수에 대해 성심성의껏 적어둔 터라, 아, 나는 면덕후도 아닌데, 심지어 면은 별로 좋아라 하지도 않는데!! 국수 먹으러 베트남 가고 싶어지는 거다. 꺅 >.<

 

책을 읽다 말고 달력을 펼쳐두고서는 언제쯤 가볼까, 가만가만 따져보았다. 비행기 가격이 저렴하다 싶으면 내가 시간이 안되는 때였고, 내가 시간이 되는 때에는 비행기 가격이 높더라. 에헤라디여~ 한 이박삼일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저자는 베트남을 사랑하는데,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수를 찬양한다. 국수 때문에 베트남에 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여행이며,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런 여행기가 아닌가. 이 여행기는 자신이 해야할 몫을 충실히 해냈다. 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갈것이다!!

 

먹고 싶은 국수에 대한 글들을 밑줄긋기 해놓고 이 책을 중고샵에 팔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옮겨 적다가 팔 빠질 것 같아 일단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와, 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가고 싶어지다니. 살면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여행은 결국 먹는 것인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만난다.
아무도 내가 당도할 것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는 낯선 정거장에서 버스나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그리운 얼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설사 그런 행운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떠나고 싶은 곳, 닿아야 하는 곳이 있다는 건
틀림없이 멋진 일이다. (p.25)

(분보후에) 살짝 데친 야채를 넣고 맛본 첫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힘줄이 섞여 쫄깃쫄깃한 소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 비워버렸다. 학교에 가기 전이라 땀을 그렇게 쏟으면 안 되는데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 이후로 분보후에를 혼자도 먹고, 학생들과도 먹고, 호찌민에 놀러 온 친구들과도 먹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먹으면서도 질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p.60)

뭐니 뭐니 해도 분짜의 가장 큰 매력은 직화에서 비롯된다. 불 맛을 풍기는 고기에 달콤한 소스가 살짝 스미면 그야말로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동남아시아 음식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 입만 먹어보면 앉은자리에서 두 그릇도 먹게 되는 음식이 바로 분짜다. 하노이를 여행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분짜 냄새와 연기에 꼼짝없이 이끌리게 될 것이다. 숯불에 굽는 맛있는 냄새와 연기에 사로잡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길모퉁이에 작은 선풍기가 놓여 있다면, 탄을 피우고 있다면, 석쇠에 무언가 굽고 있다면 일단 못 이기는 척 들어가라. 한번 맛보면 뿌리칠 수 없는 맛이 거기에 있다. (p.106)

이별 후에 무엇을 먹어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헤어진 그날에는 아무것도 넘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이란 존재는 간사해서 곧 허기를 채울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진짜 배고픔에서 기인하든 마음의 허기에서 비롯되든 말이다. 바로 그때, 아직은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힘은 없지만 어김없이 배가 고파와 당혹스러울 때 국수만큼 어울리는 음식은 없을 것이다. (p.120)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동네에 모여 가까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적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들이 나를 위해 모여 살아주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겠지만 상상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 허무맹랑한 그 바람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신 내가 사랑하는 나라들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행운을 얻었다.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테국이 모두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으니 여행자로서 나는 대단한 행운아다. 다정하게 옆에 붙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이웃 나라들로 언제라도 훌쩍 넘나들 수 있으니. (p.187)

손님이 그릇을 비우면 가인항은 의자를 한쪽에 걸고 유유히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눈앞에서 바로 요리해주는 따뜻한 음식이 길거리에 넘치는 나라, 베트남. 멋진 시설을 갖추고 빠르게 달리는 푸드트럭 부럽지 않은 수천 개의 `푸드 가인항`이 여기에 있다. 여행에 지쳐 걷기도 힘들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도 싫다면 가만히 그 자리에서 기다려보라. 푸드 가인항이 곧 당신에게로 걸어올 것이다. (p.155)

(퍼싸오보) 재빨리 소고기를 볶고, 라우까이라고 불리는 야채를 숨이 죽을 정도로만 살짝 볶고, 거기에 미리 볶아둔 면을 넣어 한 번 더 볶아 수분을 날려준다. 이 과정으로 면발은 더 쫄깃해진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삭힌 고추 소스를 더해주면 금상첨화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하고 매콤한 자극에 야채의 신선함까지.

안 되겠다.
아무래도 맥주 한 병 시켜야겠다. (p.150)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nnyL 2016-02-10 19:17   댓글달기 | URL
지금 베트남 호치민입니다 ㅋㅋ
이렇게 맛있는 국수는 못 먹고 귀국할 것 같지만... 다락방님 글을 보니 반갑네요ㅋㅋㅋ;;

다락방 2016-02-11 12:04   URL
아니, 호치민에 계십니까!!
저는 베트남에 다른 음식들은 뭐가 더 있는지 몰라서, 일단 국수 먹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국수를 못 드시고 귀국하신다뇨. ㅎㅎㅎㅎㅎ

반가워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힛.

프레이야freyja 2016-02-10 19:30   댓글달기 | URL
베트남쌀국수 좋아하는데‥훅 당기네요. ^^ 마음 먹으면 가까운 곳인데 말이죠

다락방 2016-02-11 12:04   URL
그러니까 우리가 간혹 먹는 그 쌀국수 말고 다른 국수들이 지천인가봐요! 어쩐지 신나요! 꺅 >.<
물론 언제갈지는 알 수 없지만 말예요. ㅎㅎ

단발머리 2016-02-10 21:28   댓글달기 | URL
설날 연휴에 아빠랑 단 둘이 만나 베트남 쌀국수를 후르룩 먹었다지요. ㅎㅎㅎ
역시 여행에는 음식이 가장 중요한가요?

다락방 2016-02-11 12:07   URL
여행에는 음식이 가장 중요하다기 보다는... 저는 음식 때문에 여행 가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6-02-1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