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오이디푸스 사이클에서 소포클레스는 위대함의 몰락을 다룬다. 하지만 그는 위대함뿐만 아니라 몰락으로부터도 엄청난 영감을 얻는다. 소포클레스 드라마의 감동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그의 슬픈 인식과, 인간의 경이로운 힘에 대한 그의 존경심, 이 둘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나온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을 오이디푸스 3부작에서 찾는다고 해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3부작의 2부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며 마지막 3부를 장식하는 작품이 그 유명한『안티고네』이다.

사실 이 작품은 너무나 잘 알려져서 누가 무슨 설명을 덧붙이더라도 결국 군더더기만 더할 뿐이다. 이제야 겨우 이 작품의 '원전'을 읽어본 사람은 뭔가를 보탤 형편이 훨씬 열악하다. 그러니 나로선 명작에 대한 감상만 간직할 뿐 감상평은 아예 안 쓰는 게 내 처지에 알맞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이 주는 감동이 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들뜬 마음 때문에 뭐라도 '소감'을 조금 남겨두고 싶은 욕심을 끝내 억누르지 못한다.

어쨌든 나로부터 끌려나오게 마련인 진부한 얘기는 애써 감추는 대신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몇 가지 요소만이라도 간략하게 짚어보고 싶다. 우선 이 작품은 무엇보다 '위대한 걸작'으로 존숭받을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은 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그다운 평가를 내린 바 있고, 많은 인물들이 그 가운데 '안티고네'를 비극 작품의 최고봉이자 완벽에 가까운 예술작품이라고 극구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필요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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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시문학의 최고봉

그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성취가 어렵다는 점에서 비극은 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최고의 시적인 작업의 목적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과, 형언할 수 없는 인류의 고통과 비애, 악의의 승리, 우연의 횡포, 정당한 자나 죄 없는 자의 절망적인 파멸 등이 우리 눈앞에 전개된다는 것은 우리의 고찰에 아주 뜻깊은 것이고 또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계와 생존의 성질에 관한 중요한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최고 단계에 있어서, 의지와 의지의 충돌은 가장 완전하게 전개되고 무서울 정도로 나타난다. 이 충돌은 인간의 고뇌로 나타나는데, 이 고뇌는 일부는 우연과 오류에 의해서 초래되고, 또 일부는 인간에게서 생긴다. 우연과 오류는 세계의 지배자로서 등장하고, 고의라고 보여질 정도의 간계로 말미암아 운명으로 인격화되어 등장한다. 인간에게 생기는 충돌은 여러 개인의 의지적인 노력이 서로 교착하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의 악의나 부조리를 통해 나타난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시에 대하여>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 스티븐 핑커, 『빈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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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생명력이 강하다. 이 작품 또한 수많은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의 예술 작품을 낳고 또 낳았다. 나는 그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쉽게 옮겨 내걸 수 있는 회화 몇 점을 가지고 여기를 장식해 보고 싶다.



 - 베니녜 가녜로, [신께 자녀들을 맡기는 눈 먼 오이디푸스], 1784년,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1. 앙리 레비, [테베에서 벗어나는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9세기경, 랭스 미술관
2.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년, 루앙 미술관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댈러스 미술관




 - 나키포로스 리트라스, [죽은 폴뤼네이케스 앞의 안티고네], 1865년, 아테네 국립미술관




 - 프레데릭 레이튼, [안티고네], 1882년 개인 소장


세 번째로 꺼낼 이야기는『안티고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들의 대립'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네이버캐스트에 올라온 글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것만 읽어봐도 충분하다.

"학자들은 크레온과 맞서 대항하는 여인 안티고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여러 가지 분석을 시도했다. 특히 두 인물의 대결구도는 국가와 개인, 보편과 특수, 인간의 법과 신의 법, 남성 질서와 여성 윤리라는 이항으로 설정되곤 했다. 그러나 헤겔을 비롯해 정신분석학자 라캉, 그리고 여성학자들과 같은 많은 이들이 주목한 안티고네는 다양한 차이를 보이며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안티고네의 출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네이버캐스트 [명화 속 그리스 신화]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매력은 시인이 빚은 '언어예술의 아름다움'이다. 이 작품에 담긴 '인간의 위험천만한 위대성'을 노래한 대목은 특히 유명한데, 무려 2,500년 전쯤 살았던 옛시인이 도대체 무얼 봤길래 '인간'을 그렇게 위태롭게 바라보았는지 한번쯤 숙고할 필요가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얼마만큼 위험천만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 굳이 '시인이 쓴 비극시'까지 읽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 신문과 TV로 전달되는 거의 모든 뉴스들이 한꺼풀만 뒤집어 보면 시인이 걱정했던 바로 그 '인간의 위험천만한 위험성'을 다룬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의 간극이 좀 멀긴 하지만 이 시인의 노래와 2014년 1월에 어느 신문에 실린 눈밝은 학자의 얘기 한 꼭지를 비교해 보라. ☞ 
‘총균쇠’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 인터뷰 기사



이쯤에서 내 얘기를 서둘러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싶다. 더 길게 쓰다가는 이 노시인이 책 속에서 금방이라도 되살아 나와 크게 한번 호통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옛시인의 노래가 이미 오래 전부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시인(혹은 독자) : "모르겠느냐? 이제는 네 말소리도 듣기 싫다." 
                       나  : "귀가 아프신가요, 마음이 아프신가요?"
    시인(혹은 독자) : "어찌하여 너는 내 아픈 곳을 따지려드는 게냐?"
                        나 : (그만 베끼자. 이러다 한 대 얻어 맞겠다......)
 

졸지에 내 자리에서 내쫒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한마디는 더 하고 물러나야겠다. 이 작품을 읽으면 지금 한창 상영중인 영화 '변호인'도 떠오르고 심지어 '장성택 처형사건'까지도 떠오른다. 참 대단한 작품이다.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 * *


        크레온   모르겠느냐? 이제는 네 말소리도 듣기 싫다.
        파수꾼   귀가 아프신가요, 마음이 아프신가요?
        크레온   어찌하여 너는 내 아픈 곳을 따지려드는 게냐?
             파수꾼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범인이고, 저는 귀를 아프게 할 뿐이지요. 

 - 《안티고네》316∼319행



   (다음 대목은 '인간의 위험천만한 위대성'을 노래한 유명한 구절이다.)

        코로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무진장하며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馬의 후손으로
갈아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사람은 또 산속을 헤매는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갈기가 텁수룩한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법도.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사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사람은 고통스런 질병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발명의 재능에서
기대 이상으로 영리한 사람은
때로는 악의 길을 가고,
때로는 선의 길을 간다네.
그가 국법과, 신들께 맹세한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무모하게도 불미스런 것과 함께하는 자는
도시를 갖지 못하는 법이라네.

 - 《안티고네》332∼372행



 

      안티고네

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不問律)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 받고 싶지 않았어요.


 - 《안티고네》453∼459행




        크레온 

하지만 쓸모없는 자식들을 낳은 사람은 자신에게는
걱정거리 말고, 적들에게는 많은 웃음거리 말고
달리 무슨 씨를 뿌렸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니 내 아들아, 너는 향략에 끌려
한 여인 때문에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막상 한집에 살며 악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품안에서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 《안티고네》645∼651행




        하이몬

아버지, 제게는 아버지의 성공보다 더 소중한 재물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들에게 성공하는 아버지의 영광보다
더 자랑스러운 게 어디 있으며, 아버지들에게
성공하는 자식들보다 더 자랑스러운 게 어디 있겠어요?
하오니 앞으로는 아버지 말씀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한 가지 생각만 마음속에 품지 마세요.

누군가 자기만 현명하고, 언변과 조언에서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검증해보면 속이 비어 있음이 드러나지요.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양보할 줄 아는 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겨울철 급류 가에서 굽힐 줄 아는 나무들은
그 가지들을 온전히 보존하지만,
반항하는 나무들은 뿌리째 넘어지고 말지요.
마찬가지로 돛의 아딧줄을 당기기만 하고
늦춰주지 않는 사람은 배와 함께 넘어져
용골을 타고 항해를 계속하게 될 거예요.

 - 《안티고네》701∼717행



 

           하이몬   테바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아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 《안티고네》733∼739행



 

         코로스 

사랑이여, 싸움에 지지 않는 자여,
사랑이여, 재물을 결딴내는 자여,
너는 처녀의 부드러운 볼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가 하면, 바다와
들판의 농가들 사이를 헤매는구나.
불멸의 신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루살이 인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며,
네게 잡힌 자는 미쳐 날뛰는구나.


의로운 자들의 마음을 불의로,
치욕으로 인도하는 것도 너이며,
여기 이 남자들에게 집안싸움을
불러일으킨 것도 너로구나.

하지만 고운 신부의 두 눈썹 아래
환히 비쳐 나오는 매력이,
위대한 법규들과 나란히 지배하는 힘이
승리를 거두니, 이는 불패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유희하고 있음이로다.

 - 《안티고네》781∼800행




 

      안티고네

아아, 불행한 혼인을 하신 오라버니,
당신은 당신의 죽음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죽이셨어요!


        코로스 

경건한 행위는 나름대로 칭찬받아 마땅하오.
하지만 권력은, 그것을 누가 쥐든,
침범당하는 것을 용납지 않소. 그대를
망친 것은 그대의 자의적 기질이외다.

- 《안티고네》869∼875행



 

    테이레시아스   아아, 인간들 중 누가 알고 있으며, 누가 생각하고 있는가···
         크레온   무엇을 말이오? 무슨 보편적 진리를 말하려고?
테이레시아스   올바른 생각이 얼마나 값진 재산인지를!
         크레온   생각건대, 어리석음이 가장 큰 손실인 그만큼이겠지요.

 - 《안티고네》1048∼1051행


 

 

            사자 

한 인간이 사는 낙(樂)을 잃어버렸다면, 나는 그를
살아 있다고 생각지 않고 산송장으로 여기니까요.
원하신다면 집에 큰 재물을 쌓아두고 왕처럼
화려하게 살아보세요. 하지만 거기에 아무런 낙이 없다면,
행복이 아닌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위햬
나는 동전 한 푼 지불하지 않을래요.


 - 《안티고네》1166∼1171행



 

        코로스 

저기 왕께서 몸소 이리로 오고 계시오.
너무나도 분명한 기념비를 손에 들고.
하지만 이것은, 이런 말을 해도 좋다면,
남의 미망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실수 탓이오.

 - 《안티고네》1257∼1260행



 

        크레온 

오게 하라, 오게 하라!
내 운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나타나
나에게 마지막 날을 가져다주게 하라!
최고의 운명이 오게 하라, 오게 하라,
내가 더 이상 다른 날을 보지 않도록!


 - 《안티고네》1328∼1332행



  

        코로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 《안티고네》1348∼1353행(마지막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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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체험한 것인가?
    from Value Investing 2016-03-13 01:42 
    소위 '인류를 대표한다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내리 세 판을 불계패로 당하고 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러나,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 앞에서 우리가 옴짝달싹 못하고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당장 '북한 핵' 문제만 하더라도 어느 영특한 천재가 이미 오래 전에 찾아낸 '새로운 기술'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엄청난 계산능력'을 자랑하는 수퍼컴퓨터가 바둑의 최고수 한 명을 단지 내리 세 번 꺾었다고 해서 너무 호들갑
  2. 어떤 방법을 써도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 통했던 포키온
    from Value Investing 2017-01-15 14:06 
    “만일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에머슨이 유독『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심취했던 게 영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을 만난 영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칼라일은『영웅숭배론』까지 쓴 인물이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같은 텍스트도 금방 눈에 띄는 형편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오뒷세이아_11권 저승


  

 

 

 

 

 

 

 

 









그리스 비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소재는 어느 한 작가의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며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쓰기 전에도 이미 그 중요한 줄거리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보다 앞선 작가들인 핀다로스의 『올륌피아 송시』에도 '라이오스에게 주어진 신탁과 숙명적인 부자 상봉'이 등장하고,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에서도 오이디푸스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이 유명한 이야기의 근원을 조금 더 파고 들면 우리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훨씬 더 생생한 느낌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가 온전히 '전설 속의 인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어느 정도는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3,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화와 전설'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그 유명한 이야기가 실제로 19세기 말에 슐리만이 '트로이아와 뮈케네의 옛 성터'를 발굴한 뒤부터 역사적 사실에 훨씬 다 가까이 다가갔던 것처럼, 오이디푸스와 관련된 새로운 기록이나 유적이 발굴된다면 우리는 고대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한 '믿기지 않는 실재성'을 두고 다시금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쏟아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이 된 트로이아 전쟁이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에 힘입어 '어렴풋한 역사적 근거'를 얼마쯤 획득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고받는 온갖 흥미진진한 대화와 사건들까지도 모두 '사실'이라고 흔쾌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이리저리 숱하게 옮겨지면서 자연스레 허구가 보태지고 상상력을 더했음은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신화와 전설의 매력도 바로 그런 점에 기대고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 힘을 조금도 잃지 않았던 옛 이야기의 뿌리깊은 호소력은 결국 그것들을 꾸미고 전해온 사람들 모두가 느꼈던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실제와 허구'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조금도 흐트리지 않으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옛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그저 허황된 전설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를 나와 같은 풋내기 독자가 굳이 애써 찾아나설 필요는 없다. 다만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미 어느 유명한 역사가의 책 속에 실제로 등장한다는 사실 하나만 발견하고도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다른 이유를 더 찾을 생각조차 금세 사라졌다. 어느새 오이디푸스는 그저 수없이 되올려진 '무대 속의 배우'로만 머물지 않으며 또한 그가 그저 단순한 '비극 속의 주인공'으로만 여겨지지도 않는다.

여기서 잠시 이 유명한 비극을 쓴 소포클레스에 대해 약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는 호메로스와 달리 여러 문헌에 다양한 활동 기록들이 남아 있고 또 90세까지 오래도록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 때 겨우 6, 7세의 어린아이였지만 10년 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쳤을 땐 '전쟁의 승리'를 신에게 감사드리는 찬신가를 선창한 소년합창단 멤버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끝날 무렵까지도 살아 있었다. 쉽게 얘기하면 그는 '아테나이의 욱일승천과 서산낙일'을 모두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한 인물이었다.

그가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참가한 비극경연대회에서 기존의 챔피언이었던 아이스퀼로스를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한 뒤로 그는 통산 18번이나 우승했고(아이스퀼로스가 13번, 에우리피데스는 5번) 3등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123편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이 책에 실린 비극 7편이 전부다. 그만큼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음에도 그는 높은 관직에도 자주 취임했고 어떤 전쟁에서는 델로스 동맹을 대표해서 페리클레스와 함께 '10인의 장군'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된 적도 있었다. 여기서 이 책의
'옮긴이 해설'에 담긴 한 대목을 인용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소포클레스는 당시의 여러 저명인사들과 접촉했는데, 당시 아테나이 시의 규모나 그의 인기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
로 보인다. 그는 페리클레스와 함께 관직에 있었고, 55세에는 역사가 헤로도토스에게 비가를 한 편 지어 헌정했다고 하며, 소크라테스는 이 노(
)
시인에게서 애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얘기는 플라톤의 『국가』1권에 담긴 내용인데, 나는 정작 플라톤의 그 책을 읽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런 대목이 나오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언젠가 나는 이 노시인의 얘기를 엉뚱하게도 키케로의 책을 읽다가 발견한 적이 있었고 마침 그때 용케도 어디다 붙들어 매어 놓은 덕분에 이름마저 비슷한 두 사람(소크라테스와 소포클레스) 사이의 대화를 아무때라도 생생하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 · · · ·
노년에, 말하자면 육욕과 야망, 투쟁, 적대감, 그리고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는, 이른바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 키케로, 『노년에 대하여』


내 얘기가 어느새 '불행한 오이디푸스의 손아귀'에서 너무 벗어난 듯하다. 다시 그에 관한 얘기로 되돌아 오는 길에 우리는 '옮긴이의 해설'에 슬며시 등장하는 역사가 헤로도토스를 놓치면 안 된다. 그가 '역사의 현장'에서 발굴한 '오이디푸스'에 관한 생생한 얘기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역사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받는 인물인데 그가 바로 자신이 쓴『역사』에서 '오이디푸스 가문'에 대한 얘기를 두 번씩이나 자세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왕가는 [오이디푸스-폴뤼네이케스-테르산드로스-테이사메노스-아우테시온-테라스-오이올뤼코스-아이게우스]로 이어지고, 스파르테의 주요 씨족인 이 가문의 남자들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늘 '요절'했으며, 그 때문에 후손들은 결국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원혼(怨魂)들'에게 사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드넓은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역사 자료'를 손수 채집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보이오티아의 테바이 신전에서 직접 보았다는 세발솥에는 오이디푸스의 또다른 손자가 남긴 게 분명한 '라오다마스 왕이 아폴론 신전에 손수 봉헌했나이다'라는 기록까지도 '카드모스 시대의 문자'로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바로 그 무렵 테라스가 다른 곳에 식민시를 건설하려고 라케다이몬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우테시온의 아들로 테이사메노스의 손자요 테르산드로스의 증손이요 폴뤼네이케스의 고손이었다. 또한 테라스는 카드모스 가(家) 출신으로 아리스토데모스의 아들들인 에우뤼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의 외숙이었는데, 생질들이 아직 어릴 때는 섭정으로서 스파르테의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

테라스의 아들이 아버지와 동행하려 하지 않자, 테라스는 아들을 '늑대 떼 속의 양'으로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말 때문에 젊은이는 '오이올뤼코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더 잘 통했다. 이 오이올뤼코스의 아들이 아이게우스였는데, 스파르테의 주요 씨족인 아이게이다이 가(家)는 그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이 가문의 남자들에게 태어난 자식들은 늘 요절했다. 그래서 신탁의 조언에 따라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원혼(怨魂)들에게 사당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제명대로 살았는데 테라에 살던 아이게이다이 가의 후손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 헤로도토스, 『역사』제Ⅳ권 147장∼149장

나는 실제로 보이오티아의 테바이에 있는 아폴론 이스메니오스의 신전에서 카드모스 시대의 문자를 본 적이 있다. 그 문제는 세발솥들에 새겨져 있었는데 대체로 이오네스족의 문자와 비슷했다. ······

세 번째 세발솥에도 다음과 같은 헥사메트론 시행이 새겨져 있었다.

    라오다마스 왕이, 시력이 뛰어나신 아폴론 신이시여, 그대의 신전에 

    더없이 아름다운 장식이 되게 나를 손수 그대에게 봉헌했나이다.


에테오클레스의 아들인 바로 이 라오다마스의 치세 때 카드모스의 자손들은 아르고스인들에게 쫓겨나 엔켈레이스족에게 피신했고, 한편 뒤에 남았던 게퓌라이오이 가는 후일 보이오티아인들을 피해 아테나이로 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신전들을 세웠는데, 다른 아테나이인들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그중 하나가 데메테르 아카이아의 신전인데 그곳에서는 비밀 의식이 행해졌다.


 - 헤로도토스, 『역사』제Ⅴ권 59장∼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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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되는 오이디푸스

 


 - 그리스 비극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오이디푸스 왕과 그의 딸 안티고네

 


 - 테바이 왕가의 가계도.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 및 두 딸이 맨 끝줄에 등장한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아내로 '두 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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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비극 작품으로 되돌아 올 차례다.『오이디푸스 왕』은 기원전 420년대에 초연된 작품이다. 무대장치와 음악은 물론 무대 위의 배우도 겨우 세사람쯤 등장할까 말까 한 이 고대의 비극이 디오뉘소스 비극경연대회에서 무려 15,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관객들 앞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공연되었을지를 상상해 보는 일도 즐겁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이 비극시를 쓴 시인의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음미하는 일이 가장 흥미롭다.

사실 오이디푸스로서는 '단순 과실' 말고는 다른 잘못이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포클레스의 또다른 작품인『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만나게 되는 '오이디푸스의 변명'을 통해 누구나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굳이 그의 죄를 추궁하자면 애초에 그가 스핑크스가 던지는 놀라운 질문에 대해 '감히' 너무 쉽게 덤벼들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왜 신탁은 오이디푸스 뿐만 아니라 안티고네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힘든 가혹한 운명의 쇠사슬로 그토록 억세게 옭아 맸을까.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운명에 맞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옳은 일일까.
 
소포클레스의 이 유명한 비극은 불행한 인간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드러내 준다. 곧 진실을 외면하고 파멸을 피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예와 내면적 가치를 위해 결연히 운명과 맞서 싸우는 불굴의 의지를 인간은 결코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인간의 의지와 신이 내린 운명의 대립' 속에서 저항하고 절망하고 고뇌하고 다시 일어서려다 끝내 파멸하지만 그래도 결국 '인간이 주역'임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그런 드라마다.

소포클레스의 일곱 작품에서 만난 인상적인 싯구절을 가득 베껴 놓았는데 오이디푸스 왕에게 너무 쎄게 붙들려 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독자가 주절거리는 얘기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단 한 가락의 운율조차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위대한 옛시인이 들려주는 노래조차 우리는 이미 그 옛날의 멋진 운율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토록 곤란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고대 시인이 쓴 멋진 시'를 통해 오이디푸스의 목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어볼 수는 있다.  그의 목소리를 얼마나 뚜렷하게 들을 수 있을지는 오로지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 * *
 

 테이레시아스

아아, 슬프도다!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아무 쓸모없는 곳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잘 알면서 내가
왜 잊었던가!

 - 《오이디푸스 왕》316∼318행



 

 테이레시아스

단언하건대, 그대가 위협적인 말로
라이오스의 피살 사건을 규명하겠다고 공언하며
아까부터 찾고 있던 그 사람은 바로 여기 있소이다.

그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머지않아 토박이 테바이인임이 밝혀질 것이오.
하지만 그는 그런 행운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오.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고 부자 대신 거지가 되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이국땅으로 길을 떠날 운명이니까요.
그리고 그는 같이 살고 있는 그의 자식들의 형이자
아버지이며, 그를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그의 아버지의 침대를 이어받은 자이자 그의 아버지의
살해자임이 밝혀질 것이오. 안으로 드시어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오. 그러고도 내 말이 틀렸거든
그때부터는 내가 예언에 관해 무식하다고 말하시오.
(테이레시아스는 소년에게 인도되어 퇴장하고 오이디푸스는 궁전으로 퇴장한다)

 - 《오이디푸스 왕》449∼462행



 

        코로스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 오만은 시의에
적합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부(富)로
헛되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가
가파른 파멸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네.
거기서는 두 발도 무용지물이라네.

 - 《오이디푸스 왕》872∼878행



 

    오이디푸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 《오이디푸스 왕》1182∼1185행

 



        코로스 

아아, 그대들 인간 종족들이여,
헤아리건대, 그대들의 삶은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노라.
대체 누가 행복으로부터,
잠시 보이다 사라져버리는
행복의 그림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는가?
그러니 불행한 오이디푸스여,
내 그대의 운명을 거울 삼아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않으리라!

 - 《오이디푸스 왕》1186∼1195행



 

        코로스 

하나 지금은 누구의 이야기가 이보다
더 비참할까? 누가 삶의 굴곡에서
이보다 더 잔혹한 재앙과 고통의 동거인이
될 수 있을까? 명성이 자자한 오이디푸스여,
그대에게는 단 하나의 항구가
어찌나 넓었던지 아들과 아버지가
신랑으로서 들어갈 수 있었노라.
아아, 어찌하여 그대의 아버지가
씨 뿌리던 밭이 아무 말 없이,
가련한 자여, 그대를
그토록 오래 견딜 수 있었을까?

 - 《오이디푸스 왕》1204∼1212행



 

           사자 

그분께서 마님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드시더니
자신의 두 눈알을 푹 찌르시며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예요.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
이런 노래를 부르시며 그분께서는 손을 들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기 눈을 찌르셨어요.

 - 《오이디푸스 왕》1268∼1274행



 

   오이디푸스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오!

 - 《오이디푸스 왕》1331∼1335행


 

 

   오이디푸스 

모든 재앙을 능가하는 재앙이 있다면,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몫으로 주어졌던 것이오.

 - 《오이디푸스 왕》1365∼1366행



 

   오이디푸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오이디푸스 

그러나 불쌍하고 가여운 내 두 딸들은
밥상을 따로 차리지 않고 늘 이 아비와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내가 먹는 것을
나눠 먹었으니, 그 애들은 자네가 잘 돌봐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 이 두 손으로 그 애들을
만져보고 내 슬픔을 실컷 울도록 해주게. 허락해주게.
왕이여! 허락해주게, 마음이 고상한 자여. 내 이 두 손으로
그 애들을 만질 수만 있다면, 내 눈이 보이던 때처럼
그 애들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련만!

 - 《오이디푸스 왕》1462∼1470행



 

   오이디푸스 

재앙이 빠짐없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느냐! "너희들의
아비는 제 아비를 죽이고, 저를 낳아준 여인에게
씨를 뿌려 제가 태어난 바로 그 밭에서 너희들을
거두었지." 이런 비난이 너희들에게 쏟아지겠지.
그러니 누가 너희들과 결혼하겠느냐? 천만에.
그럴 사내는 아무도 없지. 얘들아, 필시 너희들은 자식도
못 낳고 처녀의 몸으로 시들어가겠구나.

 - 《오이디푸스 왕》1496∼1502행



 

        코로스 

내 조국 테바이 주민들이여, 보시오.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하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 《오이디푸스 왕》1524∼1530행(마지막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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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은 물론 이거니와 정성만으로도 어머이징하시네요.. 우아. .. ~~

oren 2014-01-18 13:13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 님께서 반가운 첫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이번에『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나서 이 글 속에 '스핑크스'를 둘러싼 얘기를 조금 더 늘어놓고 싶었는데 너무 길까봐 생략했어요. 사실 오이디푸스 왕이 스핑크스와 만나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도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듣거나 읽은 듯한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2008년 봄에 이집트로 여행을 갔을 때 저는 이집트의 그 어떤 유물보다도 스핑크스에 가장 호기심을 느꼈더랬어요.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와 피라밋, 파라오의 무덤과 아부심벨 대신전도 스핑크스보다는 기대가 덜 될 정도였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나니 과연 '그리스의 스핑크스'가 먼저냐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먼저냐 하는 궁금증이 문득 생기더군요. 그런데 막상 알고 봤더니 두 스핑크스는 똑같은 괴물이 아니더라구요.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파라오를 수호하는 태양신 라의 사자'였고, 오이디푸스가 퇴치한 스핑크스는 이집트를 여행한 그리스 사람들이 그걸 보고 힌트를 얻어 만들어낸 것일지 모른다고 하구요. 사실 이집트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 되었으니 충분히 수긍이 가는 얘기인 듯해요.

이왕 얘기가 이집트까지 흘러갔으니 제가 직접 찍은 '이집트의 스핑크스' 사진도 몇 장 덧붙여 봅니다.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스핑크스의 이미지




 


 - Gustave Moreau 작품

<이집트의 스핑크스>

  










 


다크아이즈 2014-01-18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재앙을 능가한 재앙이 오이디푸스의 몫, 맞는 말이네요.
서재 올라오는 고전들을 정리, 분석하시다 보면 막 헛갈리실 것 같은데, 어쩜 그리 적재적소에 알맞는 얘기들을 배치하시는지... 오렌님이 전하는 고전이라, 이제 안 올라오면 서운해질지경이 되었어요.^^*
주말 알차게 보내시어요.

oren 2014-01-18 13:26   좋아요 0 | URL
팜므 님 반갑습니다. 저도 이번에 『시학』을 읽고 나서 '플롯'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알았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는 말을 염두에 두면서 저도 '미약한 플롯'이나마 꾸며볼 궁리를 해 본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여러 비극작품들을 읽어보니 과연 '플롯'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겠더군요. 제가 『시학』에서 인상깊게 읽은 몇 대목을 이 비좁은 공간에 옹색하게나마 조금 덧보태 봅니다.

* * *

비극의 제1원리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이와 유사한 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초상화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53쪽)


플롯의 구성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을 훌륭하게 구성하려면 아무 데서나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 (56∼57쪽)


전체와 부분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61쪽)

페크pek0501 2014-01-1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구경 하고 갑니다, 오렌 님...
그동안 글을 많이 올리셨군요.
천천히 구경하러 다시 와야겠어요. ^^

우리가 새해 인사를 나눴던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님의 필력을 많이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oren 2014-01-19 15:43   좋아요 0 | URL
페크 님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제가 쓴 글들은 마치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잔뜩 등에 떠메고 다니는 모양이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조차 얼마쯤 함께 '낑낑거려야 할 수고'를 부담시키지 못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니 한가할 때 힘이 좀 나시거든 쉬엄쉬엄 읽으셔도 좋아요. ㅎㅎ

기왕 댓글을 늘리기로 작정한 마당이니, 페크님께도 '대화 한 편'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새해 인사를 대신하면 어떨까 싶어요. 페크 님께서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좋은 글도 자주 많이 올려 주세요~

* * *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그래서 내가 말했네. "케팔레스 옹, 나는 연로하신 분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오. 우리는 그분들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치 어쩌면 우리도 지나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 거칠고 험한지, 아니면 쉽고 순탄한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한테서 배우듯이 말이오. 그대는 지금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연세가 되신 만큼, 나는 무엇보다도 그대의 심경이 어떠하신지 듣고 싶어요. 산다는 것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케팔로스 옹이 말했네. "제우스에 맹세고, 내 심정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하겠소, 소크라테스 선생. 나는 또래의 늙은이들 몇 명과 가끔 모이곤 하는데, 옛 속담 그대로지요.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해요. 그들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연애하고 술 마시고 잔치에 참석하던 일 등등을 회상하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화를 내곤 하지요. 그때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들 중 몇몇은 자기들이 늙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괄시받는다고 투덜대며, 그래서 온갖 참상이 다 노년 탓이라고 읊어대곤 하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이들은 탓해서는 안 될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해요. 그게 정말 노년 탓이라면, 나도 노년과 관련하여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테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하겠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소. 예컨대 누가 시인 소포클레스에게 '소포클레스 선생, 그대의 성생활은 어떠시오? 그대는 아직도 여자와 동침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소포클레스 님은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때도 그분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그렇다고 생각하오. 노년이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감정들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지니까요. 욕망들이 한풀 꺾여 귀찮게 조르기를 멈추면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에서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나 탓할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노년이 아니라 성격이라오, 소크라테스 선생. 사람 됨됨이가 반듯하고 자족할 줄 알면 노년도 가벼운 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크라테스 선생, 노년뿐 아니라 젊음도 견디기가 힘들다오."
- 플라톤, 『국가』제1권

yamoo 2014-01-2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국가에 소포클레스의 내용이 나오는 줄은 첨 알았네요. 국가 읽은지가 10년도 넘으니까 세부적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렌님 때문에 언제나 몰랐던 걸 아주 많이 알아 고맙습니다~^^

oren 2014-01-20 17:5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뒤늦게나마 이런 저런 고전이나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플라톤'을 가끔씩 혹은 자주 만나다 보니까 겨우 그 철학자의 낯을 이제 조금쯤 익힐까 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yamoo 님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주 옛날에 그를 민낯으로 대뜸 만나러 갔다가 '소크라테스의 변명' 말고는 그리 큰 소득을 얻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국가' 또한 1981년에 철학개론 리포트를 쓸 요량으로 그의 책을 빌려 봤다가 1983년이 되어서야 그 책을 직접 사서 읽었었는데 쉽게 읽히는 '대화체'여서 고개를 끄덕이며 술술 읽었던 듯한데 그가 전하려고 했던 '끝도 모를 깊은 뜻'을 헤아리는 데는 정말 여러모로 모르는 게 너무 많았던 듯싶어요.

ssjo223 2014-04-1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과제때문에 검색하다 들어왔는데 너무 유익하네요! 스핑크스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해주셨다면 좋았을텐데!
아무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주 들릴게요^^

oren 2014-04-14 15:29   좋아요 0 | URL
무슨 과제인지는 몰라도 유익하다고 하시니 그저 다행입니다.
아무튼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문예 일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책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면 그 원인은 필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글 속에 자체적으로 '가려움'이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 '가려움'을 느꼈거나.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가려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옳을까. 이런 선택이 특히 어려운 경우는 그 '가려움'을 어떤 강도로 긁든지 관계없이 긁는 대상이 특정한 일반인으로 귀착될 경우이다. 우리가 긁고 싶은 대상이 가령 어떤 국가나 기업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주저없이 그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경험이 충분히 알려준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가 긁고 싶은 대상이 책임있는 자리를 떠맡은 공인일 경우에도 우리는 재빨리 그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려움'은 우리가 그만큼 가볍게 접근해도 좋을 만큼 가벼운 증상이기 때문이며, 긁히는 대상은 스스로 '가려움'을 제공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긁혀도 남들로부터 반감을 사기 보다는 공감을 얻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려움 때문에 긁히는 대상이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가 쉽게 긁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가려움을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당신의 글은 '여기'가 특히 가려우니, 앞으로는 제발 그런 가려움을 좀 없애주면 좋겠소" 라고 당사자에게 속시원히 얘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내가 그런 '가려움'을 결국 참지 못하고 남들이 보란 듯이 '새로운 글'을 통해 그런 가려움을 해소한다면? 아마도 나는 자칫 너무 옹졸한 사람으로 내몰려 금세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질지도 모르겠다. 옛부터 내려오는 속담처럼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게 뭐람' 하는 핀잔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런 무모한 시도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바로 그 '가려운' 글을 쓴 사람을 살짝 꼬집어 준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몹시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정작 내가 아무리 '살짝' 꼬집고 싶더라도 막상 '긁히는' 당사자로서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쎄게 꼬집힌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건 꼬집히는 게 아니라 예리한 칼로 후벼댄다고까지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여러 어려운 난점들을 포함하고 있더라도 내가 꼭 그런 가려움을 해소해야 옳은 일일까. 그 가려움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남들이 별로 공감하지 못할 하찮은 '가려움'으로 판명난다면 그건 십중팔구 나만 바보가 될 게 뻔하다. 아무튼 그런 '가려움'을 언제 기회가 될 때 가볍게라도 한 번 꼬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 가려움이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듯한 느낌마저 든다면 내가 그걸 앞으로도 계속해서 참고 견디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듯하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어떤 대상을 좀 시원하게 긁어볼 작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미 어디론가 찾아가서 내가 느꼈던 그 '가려운 대목'을 슬쩍 긁어왔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런 가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얼마간 필요하다싶은 '따끔함'까지도 이 글 속에 집어넣을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데 글을 이렇게 써내려 가다 보니 어느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좀 가렵다고 해서 그 부분을 너무 쉽게 긁었다가는 긁히는 사람에게 너무 큰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자꾸만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왕 여기까지 이런 글을 써 내려온 마당에 이번에 이 점 하나만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무리 세상이 분초를 다투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제발 좀 이곳 공간에서만이라도 '뜸'을 좀 들이고 글을 썼으면 어떨까 싶다. 한 눈에 보더라도 '졸속'이 철철 넘쳐 흐르는 글을 어찌 아무런 '가려움'조차 느끼지 않고 그냥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꼭 옛날 선비들처럼 의관을 정제하고, 연적에 담긴 물을 벼루에 옮겨 붓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갈 필요까지는 없다손 치더라도, 최소한의 '밀고 두드림 사이의 고민' 즉 얼마간의 '퇴고'는 좀 했으면 싶다는 얘기다. 무슨 당나라 때 달빛 소나타 같은 얘기를 들먹거리느냐고 누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같이 편리한 시대에 하도 어이가 없는 '졸속'을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하도 보기에 딱해서 하는 말이다. 도대체 퇴고(推敲)도 아니고 추고(推敲) 도 아니어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검색한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그런 황당한 답변이 나오는 '엉뚱한 창작'은 제발 좀 하지 말자는 얘기다.
 
'가려움'에 대한 나의 유별난 감정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 발견한 여러 주옥같은 글귀들에 자극을 받아서 그 정도가 약간 더 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200∼201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가 그의 주저인『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시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펼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그가 '호라티우스의 시론'을 인용한 부분이 바로 위의 대목이다.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776쪽)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인용글은 꼭 '시'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 믿고 옮겨본 내용이다)


9년 동안

그대는 언행에 있어서 결코 미네르바의 정신을 거역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언젠가 무엇을 쓰게 되면 그대의 부친과 나의 면전에서 비평가 마이키우스에게 낭독해주시오. 그리고 그 원고를 9년 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시오. 발표하지 않은 것은 없애버릴 수 있지만 일단 입 밖에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쪽)


 * * *


내가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그 '가려운 부분'을 좀 긁기 위해 이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려움을 좀 더 확실하게 느낀 이후에 막연히 어떤 글로라도 좀 표현하고 싶다는 걸 느끼고 난 시점에 가장 먼저 떠올렸던 '책 속 구절들'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내가 예전에 썼던 어느 글
에서도 인용한 적이 있었지만 '알라딘의 풍경'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점과 '졸속'이 너무 만연해 있다는 점이 떠올라 찾아본 대목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정치학자들은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라고 부른다. 경제 문제, 교육 문제, 교통 체증 문제, 혹은 그 어떤 문제가 매우 천천히 악화되고 있을 경우 한 해의 평균 수준이 그 전 해에 비해 아주 약간 낮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며, 따라서 미세하지만 한 사람이 정상(normalcy)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매년 조금씩 변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까지 수십 년간 계속 진행되어 어느 순간 몇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으며, 현재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가 사실은 악화된 상태임을 알게 되고는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와 관련 있는 또 다른 용어는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이다. 이는 변화가 매년 매우 느리게 진행됨으로써 50년 전의 풍경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랐는지 깨닫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몬태나 빙하 및 설원의 용해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581쪽)

 

 

분노와 졸속

 

생각건대 분노와 졸속은 깊고 신중한 생각과 전혀 상반된 것으로, 분노는 어리석음을 동반하기 쉽고, 졸속은 조잡함과 짧은 생각을 낳기 쉽습니다. 또 토론이 실제 행동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혹은 뭔가 개인적인 이익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장래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지 않은 채 뭔가 다른 방법으로 장래의 지침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사리사욕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불명예스런 일을 설득하려 하며, 좋지 않은 일에 관해 교묘하게 잘 둘러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반대자나 청중을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기 때문입니다.(271쪽)



내가 가끔씩 속으로 자꾸 주저하면서 '꾸물거릴 때' 생각나는 책이 피터 번스타인이 쓴 리스크이다. '위험, 기회, 미래가 공존하는' 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인데, '결과가 불확실할수록 그만큼 지연(꾸물거림)의 가치는 커진다'는 대목이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얼마쯤 꾸물거리면서 개인적인 '가려움'을 반쯤은 참아내고 '긁는 일'도 얼마쯤 포기하면서 내 스스로 떠안을 위험은 얼마쯤 피하게 되었다.
 
'위험, 기회, 미래가 공존하는' 곳엔 언제나 리스크도 함께 공존한다. 알라딘 역시 예외가 아니며 알라딘에서 글을 읽고 쓰는 사람도 한 배를 탔으니 가끔씩 '풍경 기억'을 떠올리며 자주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마다 '공유지의 비극'이나 '공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런 '가려운'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 뿐이다. 나의 가려움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내 글이 또다른 '가려움'을 유발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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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쓰기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6-01-29 17:08 
    나는 작문법에 대해서 별도로 훈련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12년 동안 꼬박 '국어 수업'을 받았지만 '글쓰기' 과제 때문에 끙끙거렸던 기억 또한 거의 없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받았던 국어 교육은 누가 뭐래도 '읽기'와 '쓰기'가 중심이었던 듯하다. '읽기'에 관해선 누구라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과거의 경험들'이 얼마쯤 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어 시간에 국어책을 읽지도 않고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쓰기
 
 
숲노래 2014-01-13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속으로 썼구나 싶은 글이나 책을 읽은 뒤,
이 이야기를 글로 쓸 적에
뜻하지 않게 비아냥이나 비꼬는 말을 듣곤 해요.
이 때문인지 몰라도,
시집을 읽고 나면 시집 끝에 붙은 '추천글'이나 '발문'이라는 글 가운데
'시 비평'을 하는 글은 거의 없어요.
하나같이 주례사 칭찬만 해요.
참말 모든 한국시 작품이 그렇게 주례사 칭찬을 들을 만한지 아리송하지만,
날마다 그런 시집이 꾸준히 새로 나오니
잘 모르겠어요.

제대로 쓰고 제대로 읽으며 제대로 나누려는 마음이
자꾸자꾸 흐리멍덩해지지 않나 하고 느끼곤 합니다.

oren 2014-01-13 21:49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일언반구의 헛수고'도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그토록 다방면에서 폭넓게 퍼져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요. 건전한 미래는 정말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인가 보군요.

* * *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퀸틸리우스에게 무엇을 낭독해주면 그는 '이것은 더 손질하시오. 그리고 이것도'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그 잘못된 시구를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시정하는 대신 옹호하려고 들면 그는 그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도취될 수 있도록 일언반구의 헛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비예술적인 시구는 지적하고, 딱딱한 것은 나무라고, 무미건조한 것은 새까만 횡선을 치고, 지나친 장식은 잘라내고, 어두운 것은 밝게 하고, 모호한 것은 분명하게 하고, 고칠 것은 고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그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될 것이며, '사소한 일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게 뭐람?' 하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로 말하자면 언젠가 그가 관객들로부터 조소와 비난을 받게 되는 날 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 호라티우스, 『시학』 중에서

2014-01-13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4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4-01-20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 주신 2책이 집에 고이 모셔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읽지 않았어요. 언제 읽게 될지 기약이 없어요^^;;

긴 호흡의 글을 읽는다는 거....아마도 알라딘에서만 가능한 거 같습니다!

oren 2014-01-20 18:19   좋아요 0 | URL
이제는 알라딘도 여느 인터넷 포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진 듯해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법칙이 여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아마도 갈수록 그 증세가 더욱 심화될 게 불보듯 뻔해 보입니다. 지나온 경과가 그걸 증명하고도 남지요.

그래도 여기선 그런 경향이 좀 덜했으면 싶어요. 모두들 너무나도 즉흥적인 글쓰기에 매몰되는 듯한 풍경도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글의 소재와 주제'조차 없는 글들도 너무 많고, 질서와 체계 혹은 몸통과 뼈대조차 찾기 힘든 너저분한 글쓰기가 너무 만연되는 듯해서 글을 읽기조차 민망할 때도 많더군요. 결국 그런 글들이 넘칠수록 여길 외면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빠르게 늘어나면서 '공유지의 비극'의 경로를 더욱 빠르게 뒤따르겠지요.

제가 처음에 쓰려고 했던 글의 제목은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가벼움'이었는데, 너무 직설적으로 알라디너들을 싸잡아 몰아세우는 듯해서 결국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글의 제목도 살짝 비틀었고 내용 역시 매우 가려운 부분만 아주 살살 긁는 데만 그쳤답니다.
 
문예 일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책
『키케로의 의무론』에 대하여...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떠밀려 갈지도 모르겠다는 착각마저 떠올린다. 그럭저럭 이런저런 풍문으로 간신히 그 이름은 한때 들어 보았을지 모르나 갑자기 내 눈앞에 들어온 낯선 바닷가 모래톱을 보면 나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질지도 모르겠다. 어서 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뭍으로 기어 올라,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도 잠시 잊은채 나는 서둘러 그 땅에 사는 옛 그리스 사람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길을 물어 고대 원형 극장이나 아카데미아까지 둘러볼 욕심도 부리고 싶다.

그런 급작스럽고도 무모한 여행이라도 바다의 여신이 우리의 뱃길을 보살펴 폭풍우에 좌초되지도 않고,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멋진 모험과 낭만을 곁들여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몹시도 흥미진진한 이런 모험이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건 순전히 이토록 무모한 항해에 나서도록 오래 전부터 나를 부추겨 왔던 여러 인물들, 가령 몽테뉴나 헨리 데이빗 소로우, 혹은 쇼펜하우어나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이라고 허풍스레 말할 수도 있을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그들은 단지 나더러 그런 가슴 벅찬 여행길을 나서는데 너무 오래 주저하지 말도록, 혹은 그들 자신이 겪고 배우고 느꼈던 여행담들을 내게 너무 진지하게 들려주면서 어서 여행을 떠나라고 부지런히 격려하고 독려한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이런 여행에 나설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도와준 사람은 따로 있다. 그 분은 천병희 선생님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작가와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우리는 그 분에 대한 고마움을 너무 과소평가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런 경향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양에서조차 최근에서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름난 고전들이 '현대어' 즉 영어 등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주석달린 월든』에 딸린 '주석'에 의하면 호메로스의 작품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조지 채프먼에 의해 영어로 처음 번역되었고 1624년 책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은 1777년에 로버트 포터에 의해 처음 영어로 번역되었고,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은 1513년에 가빈 더글러스에 의해 번역되었다고 한다. 소로우도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았지만 항상 그리스어 원전을 읽은 것은 아니었고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로 번역된 책을 읽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이미 예전에 가끔씩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다른 고전들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분의 친절하면서도 성실하고 묵묵한 안내가 그리 낯설지도 않을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이번 '고대로의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미리 그분에게 가이드 비용으로 얼마간의 셈도 치렀다. 물론 내가 그분을 직접 만나 수고비를 건넸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마도 내가 며칠 전에 '알라딘'이라는 여행사에 지불한 얼마간의 책값 속에 그분의 몫까지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내멋대로 꾸며보고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내가 차가운 겨울의 낮과 밤을 도와 코끝으로 맡은 고전의 향기가 나를 얼마나 세게 자극했던지 나는 에게해 앞바다를 춤추게 만드는 지중해 바람의 유혹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고, 그래서 내가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알라딘이라는 여행사에 지불한 여행 경비의 명세는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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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아마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여행 일정'으로 꽉 찬 항해를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의 옛 도시를 둘러보고, 그 유명한 비극들이 무대에 올려지는 원형극장을 찾아가고, 또 그런 '모방'의 원형이 되는 전쟁터와 영웅들을 만나는 일이 어찌 하루 아침에 쉽게 이뤄지기야 하겠는가. 나는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오솔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간신히 이 여행길에 오르는 행운을 붙잡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적이 제법 드문 숲 속의 어느 희미한 안개 속에서 '이런 여행'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속삭임을 듣고 난 이후 아직까지 용케도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고대로의 항해'가 시작되는 이곳 항구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하다. 이런 낯선 출발이 아무리 급작스럽더라도 거기에 무슨 허물이나 잘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늦었다는 걸 아는 것과 더 늦추지 않고 곧바로 항해를 시작하는 것, 두 가지면 나는 충분하다.

함선의 뱃고동 소리가 울린지 이미 오래다. 어서 서둘러 옛 영웅들의 용기와 좌절, 적대와 증오, 운명의 사슬과 우연의 횡포, 고통과 비애, 절망적인 파멸이 이어지는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보자.

 


아가멤논을 살해하기 직전의 클뤼타임네스트라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작)

10년 만에 트로이아를 함락하고 귀향하던 날 아가멤논은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게 무참하게 살해된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요한 페테르 크라프트 작)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파헤쳐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장님이 된 후, 안티고네는 떠돌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든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아테나이 근교 콜로노스에 있는 복수의 여신들, 일명 '자비로운 여신들'의 성역에 도착한다.


 


분노하는 메데이아 (외젠 들라크루아 작)

헌신과 사랑의 대가로 남편 이아손에게 버림받은 메데이아는 남편을 자식 잃은 아비로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식을 살해하는 질투와 분노의 화신이 된다. 




박코스 (카라바조 작)

그리스 비극은 포도 재배와 포도주의 신 디오뉘소스(일명 박코스)를 기리는 축제 대大 디오뉘소스 제祭의 하이라이트로,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에서 공연되었다. 



 





(늘 뭔가 허전하던 책장이었는데 이번에 사들인 '불멸의 고전들' 덕분에 아쉬움을 조금 달랠 수 있게 되었다)


 

 


























 














 * * *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라티우스가 『詩學』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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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저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62∼63쪽)

 - 아리스토텔레스 / 詩學



 

그리스인들의 작품

그대들은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으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은 플라우투스의 시구와 재치를 듣고 감단해 마지않았습니다. (193쪽)

 - 호라티우스 / 詩學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우리는 시로부터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왜냐하면 '주인을 향하여 깽깽 짖어대는 개'라든가, '바보들의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나 위대한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머리의 오합지졸'이라든가, '어떻게 하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 세심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에 다른 많은 험담들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입증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볼 때 말일세." (251∼252쪽)

 - 플라톤 / 詩論



 

진실로 위대한 것

사려 깊고 문학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어떤 구절을 몇 번이나 들어도 그것이 그의 마음에 어떤 고양감을 주지 않거나 아무리 숙고해 보아도 말해진 것 이상을 그의 마음에 남기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유심히 살펴볼수록 아래로 처지고 진부해진다면, 그것은 진실로 숭고한 것일 수 없소. 그것은 귀에 들리는 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오. 진실로 위대한 것은 거듭된 검토도 견뎌내고, 그 호소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강력하고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마음속에 남기기 때문이오. 간단히 말해서, 그대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진실로 그리고 아름답게 숭고하다고 생각하시오. 직업과 생활 방식과 취미와 나이와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작품들에 대하여 똑같은 의견을 갖는다면 그토록 목소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치된 판단은 그들의 경탄이 정당하다는 우리의 신념을 강하고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법이오. (283쪽)
 - 롱기누스 / 숭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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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들려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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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결점

······ 또한 이 기회에 우리의 이데아설과 플라톤의 것은 대단히 다르다는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플라톤은 미술이 그리려고 하는 대상, 즉 그림, 시의 모범은 이데아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때까지의 설명을 통해 이것의 정반대를 주장했다. 그런데 그 설이 바로 이 위대한 철인 플라톤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크고 널리 알려진 결점의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 설에는 조금도 현혹되지 않는다. 즉 그의 결점이란 예술, 특히 시에 대한 경멸과 비난이다.  (738∼739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데아를 구현하는 아름다움> 中에서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776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시에 대하여> 中에서




 

비극은 시문학의 최고봉

그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성취가 어렵다는 점에서 비극은 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최고의 시적인 작업의 목적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과, 형언할 수 없는 인류의 고통과 비애, 악의의 승리, 우연의 횡포, 정당한 자나 죄 없는 자의 절망적인 파멸 등이 우리 눈앞에 전개된다는 것은 우리의 고찰에 아주 뜻깊은 것이고 또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계와 생존의 성질에 관한 중요한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최고 단계에 있어서, 의지와 의지의 충돌은 가장 완전하게 전개되고 무서울 정도로 나타난다. 이 충돌은 인간의 고뇌로 나타나는데, 이 고뇌는 일부는 우연과 오류에 의해서 초래되고, 또 일부는 인간에게서 생긴다. 우연과 오류는 세계의 지배자로서 등장하고, 고의라고 보여질 정도의 간계로 말미암아 운명으로 인격화되어 등장한다. 인간에게 생기는 충돌은 여러 개인의 의지적인 노력이 서로 교착하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의 악의나 부조리를 통해 나타난다. (784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시에 대하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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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들려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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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

학생은 호메로스나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읽더라도 방탕과 사치에 빠질 위험이 없다. 영웅을 다룬 책들을 읽고 학생은 영웅을 어느 정도 본받고, 그런 책을 읽는 데 아침 시간을 할애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 저렴한 가격에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된 책도 많지만, 고대의 영웅을 그린 작가들은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의 작품을 인쇄한 문자는 희한하고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고대 언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암시와 자극이 될 만한 몇 마디를 배워 길거리의 천박함을 딛고 일어선다면, 젊은 날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농부가 어딘가에서 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반복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할 것은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결국에는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학생이라면 어떤 언어로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결코 썩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어서, 지금 이 시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담겨 있다. 델포이와 도도나도 그 시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153∼154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2,000번의 여름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을 떠날 때마다 『일리아드』를 귀중품 보관함에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조금도 놀랍지 않다. 글로 기록된 문헌은 가장 소중한 유물이다. 문헌은 어떤 예술 작품보다 우리에게 친밀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문헌은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까운 예술 작품이다. 문헌은 어떤 언어로나 번역되어 읽힐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입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캔버스나 대리석만으로는 표현되지 않지만, 생명의 숨결로는 조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옛사람의 생각을 상징하던 문자가 현대인의 말이 된다. 그리스의 대리석 조형물에 그랬듯이 2,000번의 여름은 그리스의 기념비적인 문학에도 한층 성숙해진 황금빛과 가을빛을 전해주었을 뿐이다. 그 기념비적 문학이 잔잔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온 땅에 전해주며 시간의 부식에서 스스로 보호한 덕분이었다.(156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그들의 작품은 아침 못지않게 정묘하고 옹골차게 완벽하며 아름답다

옛 고전을 원래의 언어로 읽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를 제대로 모를 수밖에 없다. 어떤 고전도 현대어로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문명 자체가 그런 고전의 번역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아직 영어로 인쇄된 적이 없고, 아이스킬로스의 작품과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작품은 아침 못지않게 정묘하고 옹골차게 완벽하며 아름답다. 후세 작가들의 천재적 재능에 대해 우리가 뭐라 말하더라도 그들은 옛 고전 작가들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완성도 및 평생 문학에 바친 영웅적인 노고에 견줄 바가 못 된다. 설령 있더라도 무척 드물다. 고전 작가들의 이름조차 몰랐던 사람들은 그들을 아예 잊을 작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학문적 능력과 천분을 갖춘 후에 그들을 잊자고 말하는 것도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157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기왕 책을 읽을 바에는

우리는 이미 문자를 배웠기 때문에 기왕 책을 읽을 바에는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생 4학년이나 5학년 교실에서, 혹은 학교 앞에 있는 가장 낮은 벤치에 앉아 에이 비 에이와 단음절 단어를 끝없이 반복할 수는 없잖은가. (158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플라톤이 나와 같은 마을에 사는데도

고대 세계의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말했고, 그 이후로 모든 시대의 현인들이 그 가치를 확실히 보증한 황금처럼 빝나는 가르침이 우리 옆에 있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쉬운 읽을거리' 및 『초급 독본』과 『교과 독본』까지만 읽는 법을 배우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미숙한 사람과 초보자를 위한 『리틀 리딩』과 이야기책을 읽는다. 따라서 독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대화와 사고까지 지극히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소인족과 난쟁이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나는 이 콩코드 땅이 지금까지 배출한 사람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 즉 여기서는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그들이 플라톤의 이름을 거론하는 걸 듣고서도 내가 플라톤의 저서를 읽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플라톤이 나와 같은 마을에 사는데도 내가 그를 만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그가 바로 옆집에 사는데도 그가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거나 그의 말에 담긴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플라톤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지혜가 담긴 『대화편』이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지만 나는 그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교양이 없고 천박하며 무지하다.(161∼162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독서> 中에서



 

높이 떠 있는 별과 별자리 사이를 거니는 고요한 여행길

나는 어떤 연구보다도 고전 연구에서 가장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 고전을 곁에 놓고 앉아 있으면 삶이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아주 고요하고 차분해진다. 문학의 경우에 그렇듯, 고전도 부풀리지 말고 널리 통하는 참된 터전에서 보아야지, 버릇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요한 시간에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의 유람여행을 찬찬히 생각해보면서, 유람객들이 아름다운 그리스나 이탈리아 풍경을 바라볼 때보다 더 커다란 기쁨을 느끼곤 한다. 이처럼 잘 다듬어진 사회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호머, 헤시오도스에서 호라티우스, 유베날리스에 이르는 저 대로는 아피아가도보다 훨씬 매혹적이다. 옛 고전을 읽거나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남긴 저작을 통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높이 떠 있는 별과 별자리 사이를 거니는 고요한 여행길과 같다. (293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강』중에서



 

시는 인류의 신비

시는 인류의 신비이다.

시인이 시에 쓴 말은 분석할 수 없다. 시인에게는 낱말 하나하나가 글월이고, 소리마디 하나하나가 낱말이다. 그의 음악에 노랫말로 쓸 만한 말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음악을 듣는다면, 말이 들리지 않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놀라울 정도로 음악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운문이 수없이 많을지 모르나, 고비가 닥친 바로 그 순간에 쓰여진 것은 아닌 탓에 정말 시가 되지는 못한다. 시가 쓰여지는 것 자체가 기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는 다시 끄집어낼 수 있는 생각이 아니라, 아주 빠르게 희미해지는 생각에서 붙잡아낸 어떤 빛깔이다.

시는 온전하면서도 거칠 것 없는 그 무엇이 나타나 무르익어 문학으로 떨어진 것이고, 잘 익은 그것을 즐기는 독자들 역시 무엇에도 거칠 것 없이 온전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425∼426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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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의 과학자 스티븐 핑커가 들려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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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전 세계의 소설과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줄거리는 소수에 불과한데, 조르주 폴티 교수는 모든 줄거리의 목록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80% 이상의 줄거리가 적에 의해(종종 살인이 일어난다), 친족이나 사랑의 비극, 또는 둘 모두의 비극으로 전개된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대부분 갈등 이야기, 즉 부모, 형제자매, 자식, 배우자, 연인, 친구, 경쟁자 때문에 생기는 상처, 죄의식, 경쟁의 이야기다. (568쪽)

 - 스티븐 핑커,『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에서



 

영원한 공식

자연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감정을 살짝 어긋나게 조율하는 잔인한 장난을 쳤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시대의 소설가와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두 명의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세 가장 강한 끈으로 묶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때때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적 가능성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비극적 이야기가 가족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 명의 형제가 서로 싸우다 죽는 이야기에 비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 마이클과 프레도, 제이알과 바비, 프레지어와 나일스, 요셉과 형제들, 리어왕과 딸들, 한나와 자매들 ·······, 수세기에 걸친 드라마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가의 증오"와 "일가의 적대"는 영원한 공식이다." (466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467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755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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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
    from Value Investing 2014-01-17 15:28 
    그리스 비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소재는 어느 한 작가의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며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쓰기 전에도 이미 그 중요한 줄거리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보다 앞선 작가들인 핀다로스의 『올륌피아 송시』에도 '라이오스에게 주어진 신탁과 숙명적인 부자 상봉'이 등장하고,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에서도 오이디푸스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했다는 대목
  2.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from Value Investing 2014-01-22 01:21 
    오이디푸스 사이클에서 소포클레스는 위대함의 몰락을 다룬다. 하지만 그는 위대함뿐만 아니라 몰락으로부터도 엄청난 영감을 얻는다. 소포클레스 드라마의 감동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그의 슬픈 인식과, 인간의 경이로운 힘에 대한 그의 존경심, 이 둘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나온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을 오이디푸스 3부작에서 찾는다고 해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3부작의 2부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3.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from Value Investing 2014-01-22 17:20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그리스 비극은 모두 33편인데, 그 가운데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다룬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3부작' 말고도 세 편이 더 있는 셈인데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과 『탄원하는 여인들』이 나머지 작품들이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시기적으로 『오이디푸스 왕』바로 다음을 배경으로 삼고, 이 작품을 뒤따르는 얘기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로 이어
  4.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from Value Investing 2014-01-22 17:20 
    이 작품은 트로이아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일어난 일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죽고 난 뒤 그의 무구를 둘러싼 장수들 간의 쟁탈전에서 오뒷세우스에게 패한 아이아스가 심한 모멸감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스스로 '완전한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담았다. 무구재판에 패한 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극도의 딜레마에 빠진 그는 결국 미친듯이 아군인 그리스 군 진영을 습격하는 만행을 저지
  5.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 여인들』
    from Value Investing 2014-01-22 17:21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데이아네이라와 헤라클레스 두 사람이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테바이에 사는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와 몰래 동침하여 얻은 아들이다. 제우스의 정실부인인 헤라는 남편과 딴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몹시 미워하여 틈이 날 때마다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헤라클레스는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여 테바이의 왕 크레온의 딸 메가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곧 헤라의 저주를 받아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6.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from Value Investing 2014-01-22 17:21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귀국하던 날, 그는 어이없게도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게 피살되고 만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원수가 된 엘렉트라는 그후 7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계부 아이기스토스로부터 끊임없는 학대를 받는다. 그녀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머나먼 타국을 떠도는 동생 오레스테스뿐. 마침내 두 오누이는 극적으로 다시 만나 복수에 성공한다.
  7.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from Value Investing 2014-01-22 17:22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7편 가운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는 유별나게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서도 매우 드물게 몇몇 남자들만 무대에 등장하지만 그 어떤 소설 못지않은 독특한 재미가 넘쳐난다. 비극경연대회에서 이 드라마로 우승했을 때 소포클레스의 나이가 아흔이 다 된 노인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이 작품의 주인공인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가 장작더미 위에서 화장될 때 불을 붙여준 댓가로 활을 물려받은 명사수였으나 그는 그리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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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어떤 식으로 이 책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지와는 크게 상관없이 이 책은 내게 실로 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좀 더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문예' 일반에 대해 예전에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새롭게 깨우쳐 주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에 대해 뚜렷한 선입관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가 고대 그리스 철학이 활짝 피어나 '만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던 시기, 다시 말해서 인류가 미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던 무렵을 대표하던 세 사람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계보의 맨 마지막 주자(走者)로서 막중한 임무를 분에 넘치게 수행했던 인물이었으며, 그가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학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까지 부여받았지만, 그 모든 위대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정적으로 '너무 무미건조하고 흥미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에 대한 그런 '폭넓게 지지받는 인물평'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의 책을 쉽사리 집어들 수 없었음을 나 스스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었고, 그의 이름이 숱한 고전에서 아무리 자주 언급되더라도 그건 '철학자'들이나 연구할 몫이지 나는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더구나 어떤 책에서 읽은 다음 대목은 그에 대한 흥미를 더욱 떨어뜨렸음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려면 고통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다르게, 그는 매력이 없다. ······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中에서


그런데 위의 책을 조금만 더 인용하면 우리는 금세 생각이 좀 바뀐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쓴『시학』을 무작정 못본 채 외면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고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분석한 책, 『시학』은 후대의 문학 평론에 엄청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가 인생에 접근하는 태도는 플라톤에 비하여 현실적이었고 덜 유토피아적이었으며 보통사람들의 성품과 능력에 더 관심이 많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역사상 최초의 '문예 비평'으로 널리 인정받는 책이다. 그러니 문학과 예술 일반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언젠가 한번쯤은 이 책을 꼭 읽어야만 될 듯한 까닭모를 의무감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책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은 얼마쯤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나는 이 책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시(詩)'를 다룬 책인 줄로만 알았다. 실로 엄청난 착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대체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BC384∼BC322년이다. 출생으로만 따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2,398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가 쓴 이 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기는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놀랐던 사실은 이 책이 쓰여질 당시만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의 '시'란 일반적으로 비극시와 서사시를 말하는 것이었고, 현대시의 주류를 이루는 서정시는 그 무렵에는 아예 싹도 제대로 트지 못했던 듯하다. 글쎄, 그땐 '문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분석한 책이다. 이 사실만 미리 제대로 알고 접근하더라도 우리는 많은 억측들을 물리칠 수 있으며, 이 책을 읽고 나면 혹시라도 그 어려운 '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앞으로는 더욱 좋은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까지도 슬그머니 거둬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고대 그리스 비극'을 여태까지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는데도 우리가 이 책을 굳이 읽어야만 할까? 아니면 우리의 그런 딱한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옳은 일일까? 이 책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도 아직까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비극작가들의 이름과 제목과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가끔씩 들어봤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내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이해'로까지 나의 얘기를 끌어올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미건조한 글쓰기'를 통해 고대 그리스 비극을 논한 '시학'을 읽어 보면 우리는 비극시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원된 온갖 형태의 '문화예술'이 어떻게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면서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 뿌리깊게 영향을 미쳐온 것인지에 대해 그 '연원'과 '원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도 있게 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출발한 공연 예술이 세월을 더해감에 따라 나중에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연극작품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수많은 공연 예술인 오페라와 뮤지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영화와 드라마로까지 이어져 왔음을 그 누가 자신있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스 비극이 인간의 모방 본능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뜻에서 그것이 '드라마'로 불렸다는 사실과,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목적이 감정의 순화와 배출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은 흔히 문학에서 다루는 이론의 골격이라고도 부를 만한데 그런 내용들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다루는 핵심이다.

그런데 '모방'이란 얼마나 놀라운 성질인가.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발전을 이끌어온 가장 중요한 추동력을 인간의 '모방하는 놀라운 힘'에서 찾았다. '모방'에 관해서는『역사의 연구』에서만 그 힘을 새삼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몽테뉴가 이미 옛 시인의 입을 빌어 '흉내의 귀재'인 원숭이를 보고 우리 인간을 떠올리며 감탄해 마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다윈은 마침내『인간의 유래』를 통해 인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 영장류 가운데서도 특히 협비류(狹鼻類) 긴꼬리원숭이임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결국 시(詩)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예술이고,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고 통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시의 탄생'을 연역한 것은 옳았다. 그런데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국가》를 통해 진실재인 '이데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대상을 화가처럼 '모방'하기만 하는 '모방자'에 불과한 시인을 명쾌한 논리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이 바로 이 책에 담긴 플라톤의 시론(詩論)이다.
 
플라톤 스스로 '시의 매력'에 한없이 이끌리면서도 결국 '이데아'를 추구하는 자신의 철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는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을 비판해야 하는 서글픈 처지를 지켜보노라면 솔직히 기분이 좀 묘하다. 플라톤의 이 유명한 '시인에 대한 비판적 철학 이론'은 나중에 결국 쇼펜하우어에 의해 '플라톤의 결함'으로 비판받게 되고, 니체는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까지 불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시'에 대해 서로 확연히 다른 철학적 입장 차이를 보인 점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시학』이 작시술(作詩術)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다룬 책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가 이 부분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파고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은 '자제해야 마땅할 감정에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는 시인을 못마땅히 여겨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달리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며 스승인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결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와 개연성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함으로써 결국 '보편적인 진리'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작품만 실려 실려 있는 게 아니다. 이 두 명의 철학자를 제외하고도 두 명의 저자가 더 있다. 호라티우스와 롱기누스가 나머지 저자들인데 그들이 쓴 글은 아무래도 철학자의 작품보다는 훨씬 더 쉽게 읽힌다.

호라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그가 남긴 《시학》은 비록 짧은 내용이지만 몹시 알차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 기법을 탁월하게 설명한다. 이 책 역시 서양 문학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는 비록 그리스 고대의 비극 작품과 서사시(특히 호메로스의 두 작품)라는 한정된 소재를 중심으로 쓴 책이긴 하지만, '훌륭한 글쓰기'에 대해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시가 풍성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실용적 조언들'이 가득하다. 가령 어떤 글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고 어떤 글이 유치한 글인지, 혹은 접속사와 은유는 어떻게 다뤄야 좋은지 등에 대한 설명은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들이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시를 잘 읽고 쓰기 위해 『시학』을 펼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아가 문예 비평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문예 창작에는 무관심한 나조차도 이 책에 반했다. 나는 이 책을 순식간에 두 번 읽었다. 처음엔 눈으로 읽었고 두 번째는 손으로 쓰면서 읽었다. 베끼면서 읽을 때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만큼 즐겁게 읽었다.

나는 이제껏 글쓰기에 관한 책을 몇 권 산 적은 있으나 여태껏 그런 책들을 붙들고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따분한 책들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그 시간에 훌륭한 작가가 쓴 훌륭한 책을 단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글쓰기'는 분명히 특별한 재능과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이 꼭 훌륭한 작품을 쓰고 싶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 더 훌륭한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글솜씨를 꾸준히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을 책이다. 2,000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이 책의 역사가 그걸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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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詩學

플라톤의 입장

예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국가』제10권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상(模像) 또는 영상(影像)을 모방하는 데 불과하므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가 시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는 우리의 자제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고삐를 풀어줌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시들어지게 해야 할 것에다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감정은 제거되어야 할 잡초와 같은 것이었다.(11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시인이 모방하는 것은 진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그 모상 또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 데, 다시 말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인 것이다. (13쪽)


카타르시스의 기능

시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억압될 경우 언젠가는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안전하게, 관례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출케 하는 도덕적 기능, 즉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드라마에 부여함으로써 간접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13쪽)


비극의 목적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얻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14∼15쪽)


『시학』의 명백한 결점 하나

『시학』의 명백한 결점 하나는 내용상 '시학'이라기보다는 '드라마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만큼 거의 드라마에 관해서만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사시조차 드라마와 비교하여 간단하게 논한 다음, 서사시는 비극보다 열등한 예술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서정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서정시를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은 그가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한 소수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19쪽)

모방의 대상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31∼32쪽)


모방한다는 것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 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 - 최상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그 사람을 그린 것이로구나' 하는 식으로 각 사물이 무엇인가를 추지(推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실물을 전에 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기교라든가 색채라든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원인에 의하여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방한다는 것과 화성과 율동에 대한 감각은(운율은 율동의 일종임이 명백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37∼38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열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詞, enkomion)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38쪽)


비극의 본질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란 말은 율동과 화성을 가진 언어 또는 노래를 의미하고,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는 말은 어떤 부분은 운문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노래에 의해서 진행됨을 의미한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연(實演)하기 때문에, 첫째 장경(場景, 또는 배우의 분장)이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다음은 노래와 조사(措辭)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방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다름 아니라 운문의 작성을 의미하며,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자에 의하여 행해지는 바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의 원인은 자연히 두 가지인데 사상과 성격이 그것이며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과 실패도 이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다.

······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49∼51쪽)


플롯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모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52쪽)


비극의 제1원리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이와 유사한 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초상화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53쪽)


플롯의 구성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을 훌륭하게 구성하려면 아무 데서나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 (56∼57쪽)


전체와 부분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61쪽)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저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62∼63쪽)


삽화적 플롯

단순한 플롯과 행동 중에서 최악의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도 없이 잇달아 일어날 때 이를 삽화적 플롯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졸렬한 시인들은 자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구성하고, 우수한 시인들은 배우에 대한 고려에서 구성한다. 경연을 위하여 작품을 쓰다 보면 우수한 시인들도 종종 무리하게 플롯을 연장하여 사건의 전후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6쪽)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러한 사건은 불의에, 그리고 상호간의 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은 이와 같이 발생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발생할 때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의도에 의하여 일어난 것 같이 보일 때 가장 놀랍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66쪽)


'인하여' '이어서'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자체로부터 발생해야만 하므로 선행 사건의 필연적 또는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68쪽)


훌륭한 비극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77쪽)


비극의 쾌감

비극의 쾌감은 연민과 공포에서 오는 쾌감인 바 시인은 이러한 쾌감을 모방에 의하여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모방하는 사건에는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85쪽)


플롯의 구성과 표현 방식

시인은 플롯을 구성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1) 되도록이면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시인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모순된 점을 간과하는 일이 가장 적을 것이다. ······

2) 또한 시인은 되도록이면 작중 인물의 제스처로 스토리를 실연(實演)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재능이 같을 경우에는 표현되어야 할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쪽이 더 설득력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3) 스토리에 관하여 말하자면, 기존의 것이든 시인 자신의 창작이든 간에 먼저 대체적인 윤곽을 잡은 다음 삽화를 삽입하여 늘여야 한다. ······

4) 모든 비극은 '분규' 부분과 '해결' 부분으로 양분된다. 드라마 밖의 사건과 그리고 종종 드라마 안의 사건 가운데 일부가 '분규'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해결을 구성한다. 나는 스토리의 시초부터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를 '분규'라 부르고, 운명의 전환이 시작된 뒤부터 마지막까지를 '해결'이라 부른다. ······ (104∼108쪽)


조사의 특징

조사(措辭)는 무엇보다도 명료하면서 저속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된 조사는 가장 명료하기는 하나 저속하다. 클레오폰과 스테넬로스의 시가 그 예다. 이에 반해 생소한 말을 사용하는 조사는 고상하고 비범하다. 생소한 말이란 방언과 은유와 연장어와 일상어가 아닌 모든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부가 이러한 말들로만 된 시는 수수께끼나 야만족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즉 은유로만 되었다면 수수께끼가 될 것이고 방언으로만 되었다면 야만족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129쪽)


비극과 서사시

따라서 비극이 이러한 모든 점에서 그리고 또 시적 효과를 산출함에 있어(왜냐하면 비극과 서사시는 임의의 쾌감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우수하다면 서사시보다 시의 목적을 더 훌륭하게 달성하므로 더 우수한 형식의 예술임이 명백하다. (162쪽)




호라티우스 / 詩學

호라티우스의 시학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경험적 사실을 분석하여 시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규명해보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는 달리, 호라티우스 자신의 경험과 당시의 라틴 문학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 기법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67쪽)

위대한 시인이 쓴 라틴 문학의 유일한 시론인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론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 문학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서양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읽어야 할 이론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괴상한 그림

가령 어떤 화가가 사람의 머리에다 말의 목을 이어 붙이고 몸통은 다채로운 깃털로 장식하는 등 온갖 동물에서 그 지체(肢體)를 빌려온 결과 위쪽은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맨 아래쪽은 보기 흉한 잿빛 물고기가 되어버린 괴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대들을 자신의 화실로 불렀다고 한다면,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과연 이런 그림을 보고도 폭소를 금할 수 있을까요? (171쪽)


단일성과 통일성

이거야말로 도공이 손잡이가 둘 달린 큰 항아리를 만들고자 녹로(轆轤)를 돌렸지만 겨우 조그마한 단지 하나가 만들어진 경우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대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단일성과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73쪽)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

우리들 시인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거기에 현혹되고 맙니다. 간결함을 추구하다 보면 모호해지고, 유려함을 추구하다 보면 박력과 불길이 꺼져버립니다. 장엄함을 찾다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너무 소심하게 감정의 비약을 피하다 보면 땅바닥 위를 기는 꼴이 되고 맙니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통하여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이는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습니다. 그러나 예술 감각이 결여된 경우에는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173쪽)


능력에 맞는 소재

작가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시라. 그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이며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오랜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시라.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한 작가는 조사(措辭)와 언어의 명쾌한 배열 때문에 곤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명쾌한 배열의 장점과 매력은 내가 알기로는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뒤로 미루어 지금은 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174쪽)


사멸을 면치 못하는 법

계절이 바뀌면 나뭇잎도 바뀌어 옛 것은 떨어지고 새 것이 돋아나듯 단어도 낡은 것은 시들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들처럼 생을 구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생존과 행적은 사멸을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어떤 왕이 큰 공사를 일으켜 해신 넵투누스를 육지에 가두어놓고 그로 하여금 함대를 북충으로부터 지키게 하든, 오랫동안 배 없이는 다닐 수 없던 불모의 늪이 인근 도시를 부양하고 쟁기의 무게를 느끼게 되든, 곡식을 위협하던 강물이 진로를 바꾸어 보다 순탄한 길로 흘러가게 되든, 인간이 해놓은 일은 언젠가는 퇴락하게 마련이거늘 어찌 언어만이 유독 변함없는 효력과 영광을 누려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사멸했던 많은 것들이 다시 태어나고 지금 영광을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소멸할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인즉 필요야말로 언어의 법칙과 규범을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176∼177쪽)

(나의 생각)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불멸의 고전' 속에서 발견했던 '호라티우스의 말'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몹시 반갑다.

 * * *
또한, 세월은 수많은 변화와 반전을 불러온다. 여기서 권두에 실은 호라티우스의 인용문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원래 시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우리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업의 일생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Multa renascenyur quae cecidere, cadentque Quae nunc sunt in honore.
"지금은 실패했지만 회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지금은 축하받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 호라티우스Horace <시론 Ars Poetica>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는 물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웃는 자와 더불어 웃고,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법입니다. 그대가 나를 울리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 자신이 고통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텔레포스여 그리고 펠레우스여, 그대의 불행이 나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대가 남이 시키는 말만 서투르게 늘어놓는다면 나는 하품과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비장한 말은 슬픈 얼굴에 어울리고, 위협적인 말은 성난 얼굴에 어울립니다. 그리고 변덕스런 말은 익살스런 얼굴에 어울리고, 진지한 말은 엄숙한 얼굴에 어울립니다. 자연은 그때그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격동시키키도 하며, 무거운 근심으로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불안으로 마음 조이게도 합니다. 그런 연후에 영혼의 감동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데 이때 혀가 그 통역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화자의 말이 그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로마 인들은 교양의 유무를 막론하고 폭소를 터뜨릴 것입니다. (180쪽)


만인의 공유물

소재가 만인의 공유물인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그대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처리하거나, 통역관처럼 글자를 한 자 한 자 그대로 옮긴다거나, 모방자로서 궁지에 빠진 나머지 원전에 대한 외경심과 원전의 특이성으로 인하여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2쪽)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바란다면

만일 그대가 공연이 끝난 뒤 다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배우가 박수를 청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관객들의 갈채를 바란다면 나와 더불어 모든 관객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으시라. ······ 보호인으로부터 갓 해방된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젊은이는 말이나 개나 양지바른 연병장의 잔디밭을 좋아합니다. 이 시절에는 밀랍처럼 유연하기 때문에 쉽사리 나쁜 길로 유혹되며, 좋게 타일러도 잘 듣지 않으며, 이해 타산에 어둡고 금전 낭비가 심합니다. 그리고 포부가 크며, 사랑하던 것을 금세 단념해버립니다. 그러나 장년이 되면 성향이 달라져서 권력과 명예를 중시하고 세도가와 친분을 맺고 싶어하며 차후에 애써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될 모험은 조심스레 피합니다. 노년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법입니다. 고생을 하면서도 저축한 것이 아까워 감히 쓰지 못합니다. 만사를 냉정하고 소심하게 처리하되 시간이 지나면 다소 나아지리라는 생각에서 뒤로 미루기가 일쑤고, 무기력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며, 성미가 까다롭고 괴팍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년이었던 시대를 찬양하며 젊은이들을 꾸짖고 훈계합니다. 오는 세월은 많은 선물을 가져다주지만 가는 세월은 많은 것을 빼앗아가버립니다. ······ 우리는 연령별로 그 특성을 잘 알아서 거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185∼186쪽)


그리스인들의 작품

그대들은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으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은 플라우투스의 시구와 재치를 듣고 감단해 마지않았습니다. (193쪽)


물리치시라

그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손질하면서 잘 깎은 손톱으로 열 번씩 음미해보지 않은 시일랑 물리치시라.
(195쪽)


만인의 갈채를 받을 작가

시인은 이익을 주려 하거나 또는 쾌감을 주려 하거나 또는 쾌감과 인생에 유익한 것을 동시에 주려 합니다. 그대의 교훈은 간결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혼이 재빨리 포착하여 깊이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일단 충만하게 되면 나머지는 모두 흘려버리게 마련입니다. ······ 투표권이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무익한 작품을 비난하고, 거만한 젊은 기사들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익한 것에 달콤한 것을 가미하여 쾌감과 교훈을 동시에 주는 작가는 만인의 갈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책은 소시우스 형제들에게 돈을 벌게 해줄 뿐 아니라 해외로 나가 작가에게 불멸의 명성을 보장해줄 것입니다. (198쪽)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시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습니다. 어떤 것은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평가의 형안(炯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장소에서 관람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것은 한 번만 보아도 마음에 들지만 어떤 것은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마음에 듭니다. (199∼200쪽)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200∼201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예술'을 논하는 부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시에 대하여>에서 '플라톤의 詩論'을 비판함과 동시에 시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인용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776쪽)



9년 동안

그대는 언행에 있어서 결코 미네르바의 정신을 거역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언젠가 무엇을 쓰게 되면 그대의 부친과 나의 면전에서 비평가 마이키우스에게 낭독해주시오. 그리고 그 원고를 9년 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시오. 발표하지 않은 것은 없애버릴 수 있지만 일단 입 밖에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쪽)


여우껍질을 뒤집어쓴 거짓 친구

그대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었거나 주려고 한다면 그가 환희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대의 시를 내놓지 마시오. 그는 감격하여 '오,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확합니까!' 하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우정의 눈물로 시구를 적시기도 하고, 기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할 것입니다. 마치 장레식 때 돈 받고 곡하는 자들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자들보다 더 애절한 말을 하고 더 슬픈 표정을 짓듯이 마음속으로 조소하는 자일수록 진심으로 찬양하는 자보다 더 감격한 체하는 법입니다. 왕들은 자신들의 총애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고 싶으면 괴로울 정도로 술을 많이 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시를 쓴다면 여우 껍질을 뒤집어쓴 거짓 친구가 그대를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204쪽)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퀸틸리우스에게 무엇을 낭독해주면 그는 '이것은 더 손질하시오. 그리고 이것도'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그 잘못된 시구를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시정하는 대신 옹호하려고 들면 그는 그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도취될 수 있도록 일언반구의 헛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비예술적인 시구는 지적하고, 딱딱한 것은 나무라고, 무미건조한 것은 새까만 횡선을 치고, 지나친 장식은 잘라내고, 어두은 것은 밝게 하고, 모호한 것은 분명하게 하고, 고칠 것은 고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그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될 것이며, '사소한 일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게 뭐람?' 하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로 말하자면 언젠가 그가 관객들로부터 조소와 비난을 받게 되는 날 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205쪽)


시켈리아 시인의 최후에 관하여

나병이나 황달이나 무도병(舞跳炳)이나 월야방황증(月夜彷徨症)에 걸린 사람을 보면 모두들 피하듯이 현명한 사람은 광기에 사로잡힌 시인을 보면 무서워 달아납니다. 아이들만이 야유하며 멋모르고 따라다닙니다. 그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 시구를 토하다가 실족하여 지빠귀 사냥꾼처럼 우물이나 구덩이 속에 빠지는 날에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보았자 그를 구해줄 사람은 좀처럼 없을 것입니다. 누가 그를 구하려고 새끼줄을 내려보낸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 이 자가 고의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시오. 그는 어쩌면 구조를 원치 않을는지도 모르오.' 나는 그에게 시켈리아 시인의 최후에 관하여 이야기해줄 것입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신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서 냉정하게 아이트네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소. 사람들은 시인들에게 자살할 권리와 자유를 허용해야 하오. 삶에 지친 자들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소. 이런 짓은 여기 이 자가 처음이 아니오. 그리고 그를 끄집어내보았자 그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죽음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할 것이오. 게다가 그가 어떻게 해서 시를 짓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해를 모독했거나 아니면 신성불가침한 낙뢰(落雷) 자리를 제거했기 때문에 부정을 탔을지도 모를 일이오. 아무튼 그는 제정신이 아니오. 이 지긋지긋한 시인은 우리의 창살을 부수고 뛰쳐나온 곰처럼 무시한 사람이건 유식한 사람이건 모두 쫓아버립니다. 그러다가 혹시 누구라도 붙잡는 날에는 꼭 붙들어놓고 자신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지루해 죽게 만듭니다. 거머리는 피를 잔뜩 빨아먹기 전에는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는 법이거든요.' (206∼207쪽)




플라톤 / 詩論

시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플라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이온 Ion』과 『파이드로스 Phaidros』와 『국가』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국가』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211쪽)


모방의 종류

모방의 문제는 특히 『국가』제10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거기서 플라톤은 모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침대의 경우 첫째로 이데아(idea)의 세계에 있는 신이 만든 불변의 침대 또는 침대 그 자체가 있고, 둘쨰로 이것을 모방하여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가 있고, 셋째로 화가 또는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즉 이데아 또는 진리로부터 세 단계나 떨어져 떨어져 있는 가상의 모상(模像)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또는 예술은 모방술(模倣術)이며 "모방술은 그 자신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만큼" 시인들은 당연히 이상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쪽)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

플라톤 자신도 가끔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과 시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들이 고대 그리스를 넘어 서양 산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시공을 초월한 숭고한 주제들뿐만 아니라 신화와 비유 같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풀어나가는 표현 방법, 즉 시적 요소들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야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13쪽)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그러나 우리는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즉 전쟁이나 원정이나 국가의 통치나 인간의 교육에 대해서는 물어서 알 권리를 갖고 있네. (228쪽)


시인들은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

"그렇다면 이런 점들에 관하여 우리의 의견이 꽤 일치된 셈이네. 즉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모방은 일종의 유희이며 진지한 것이 못 된다는 점, 그리고 비극 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든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든 간에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일세." (236쪽)


화가를 닮은 시인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붙들어다가 화가의 한짝으로서 그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혼의 열등한 부분과 교제하고 가장 훌륭한 부분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를 닮았기 때문이네. 따라서 훌륭한 제도를 가져야 할 국가 안으로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은 정당하네. 그것은 그가 혼의 열등한 부분을 일깨워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을 손상하기 때문이네. 그것은 마치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악당들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고 보다 선량한 자들은 파멸케 하는 것과도 같네." (244∼245쪽)


플라톤이 시인을 비판하는 이유

"그러면 내 말을 듣고 잘 생각해보게나.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영웅이 비탄에 빠져 장탄식을 늘어놓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괴로워서 가슴을 치는 장면을 호메로스나 다른 비극시인이 모방할 때면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이에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잊고 공감하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기분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시인일수록 훌륭한 시인이라고 진지한 태도로 칭찬하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면, 자네도 알다시피, 그와는 반대로 침착하게 잘 견뎌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네. 그것이 남자다운 행동이고 우리가 방금 칭찬했던 것은 여자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에서 말일세."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칭찬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될 그런 인간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기뻐서 칭찬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우스 신에 맹세고,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246∼247쪽)


억압되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본래는 실컷 울고불고 탄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에는 억압되어 이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바로 이 부분이 시인들로부터 만족과 쾌감을 얻는 부분이네. 한편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성과 습관에 의하여 충분히 교육되어 있지 못하므로 눈물이 많은 부분에 대한 감시를 늦춰버리네. 왜냐하면 그것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남의 고통이고 또 선량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슬퍼할 때 그 자를 칭찬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그에게는 조금도 수치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네. 오히려 그는 거기서 얻는 쾌감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네. 왜냐하면 남의 것을 즐기면 그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자기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247∼248쪽)


시의 모방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는 일

"또한 애욕과 분노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는 욕망과 고통과 쾌락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의 모방은 이런 것들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고 있으며, 사악하고 비참하게 되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까 말일세." (249쪽)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우리는 시로부터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왜냐하면 '주인을 향하여 깽깽 짖어대는 개'라든가, '바보들의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나 위대한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머리의 오합지졸'이라든가, '어떻게 하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 세심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에 다른 많은 험담들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입증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볼 때 말일세." (251∼252쪽)




숭고에 관하여 / 롱기누스

이 책의 저작 시기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 비평서가 기원후 1세기 또는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58쪽)


유럽의 문예 비평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책

······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각각 근대인과 고대인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이 비평서를 내세운 뒤로 이 비평서는 유럽 여러 나라들, 특히 영국의 문예 비평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비평서가 흠 없는 범용보다는 흠 있는 천재를, 이를테면 아폴로니오스(Apollonios)보다는 호메로스(Homeros)를,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보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를, 박퀼리데스(Bakchylides)보다는 핀다로스(Pindaros)를, 이온(Ion)보다는 소포클레스(Sophokles)를 택하겠다며 그리스 문학의 걸작들인 호메로스, 삽포(Sappho), 핀다로스, 아이스퀼로스(Aischylos),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플라톤(Platon),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작품들을 자주 인용하고 이를 정확히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259쪽)


숭고

숭고는 일종의 완벽함 또는 탁월한 표현이고 가장 위대한 시인들과 산문작가들도 다름 아닌 이것을 통하여 일인자들이 되고 자신들을 위하여 영원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라고 장황하게 서론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웅대한 것은 듣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하게 하기 때문이오. 우리를 경탄케 하는 것이 단순히 설득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보다 언제 어디서나 더 우세한 것은 그것의 놀라게 하는 힘 때문이오. 왜냐하면 우리가 설득되느냐의 여부는 대체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경탄케 하는 것과 놀라게 하는 것은 대항할 수 없는 권세와 힘을 행사하여 듣는 이를 모두 제압하기 때문이오. 숙달된 창작의 재능과 소재를 정돈하고 배열하는 능력은 한두 구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만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오. 그에 반해 숭고는 제때에 출현하기만 하면 마치 벼락처럼 모든 것을 흩어버리고 단번에 연설가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오. (266∼267쪽)


행운과 좋은 판단

데모스테네스는 인생 일반에 관하여 논하며 가장 큰 행복은 행운이고 그 다음이 좋은 판단인데 이것이 결여되면 행운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점에서 이것도 행운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소. (269쪽)


어린애 장난

그들은 가끔 자신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영감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273쪽)


과장

과장은 대체로 가장 피하기 어려운 실수 가운데 하나인 것 같소.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하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장대한 것을 좇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니까요. 그들은 '큰 목표에 못 미치는 것은 역시 고상한 실수이다'라는 명제를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경우에도 부종(浮腫)은 나쁜 것으로서, 이 공허하게 부어오른 불성실은 아마도 의도했던 것과 상반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오.


유치함, 무의미한 감정 또는 무절제한 감정

과장은 숭고를 능가하려고 하는 반면에 유치함은 장대함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오. 그것은 모든 점에서 저열하고 편협하고 정말이지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이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유치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나치게 공들이다가 냉담함으로 끝나고 마는 현학적 사고가 아닐까요? 비범하고 정교하고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어 값싸고 야한 겉치레라는 암초에 걸리게 되는 법이오. 이와 관계가 있는 것이 감정의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 실수인데, 이것을 테오도로스는 가짜 주신제(酒神祭)라고 부르고 있소. 그것은 감정이 불필요한 곳에서의 때아닌 무의미한 감정 또는 절제된 감정이 필요한 곳에서의 무절제한 감정을 말하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주제와 무관한, 순전히 개인적이라서 따분하기만 한 감정을 터뜨리곤 하오. 그럴 경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청중에게 그들의 태도는 부적절해 보이지요. 그럴 것이 그들 자신은 황홀하지만 청중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오. (274쪽)


가장 심한 유치함

냉담함은 티마이오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소. 그는 다른 점에서는 재능 있는 작가이고 가끔은 장대한 표현을 쓰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박식하고 독창적이지만, 남의 실수는 꼬치꼬치 따지기 좋아하면서 자기 실수는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언제나 기발한 착상을 좇다가 가장 심한 유치함에 빠지곤 하지요. (275쪽)


부적절한 표현의 원인

이 모든 품위 없는 것들은 문학의 경우 단 한 가지 원인에서, 말하자면 새로운 발상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오. 우리의 미덕과 악덕은 같은 바탕에서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미려한 문체와 숭고한 표현들과 여러 가지 매력들은 모두 성공적인 글쓰기에 기여하지만 바로 이것들이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의 원인과 토대가 되는 것이오. (280쪽)


경탄의 대상

친구여, 일상생활에서도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위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오. 예컨대, 부와 명예와 명성과 권력과 기타 겉보기에 매우 화려한 것들이 그렇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을 큰 선(善)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오. 그런 것들을 경시하는 것 자체가 적잖은 선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들보다는 가질 수 있는데도 경멸할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사람들이 더 경탄의 대상이 되는 법이오. (282쪽)


진실로 위대한 것

사려 깊고 문학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어떤 구절을 몇 번이나 들어도 그것이 그의 마음에 어떤 고양감을 주지 않거나 아무리 숙고해 보아도 말해진 것 이상을 그의 마음에 남기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유심히 살펴볼수록 아래로 처지고 진부해진다면, 그것은 진실로 숭고한 것일 수 없소. 그것은 귀에 들리는 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오. 진실로 위대한 것은 거듭된 검토도 견뎌내고, 그 호소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강력하고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마음속에 남기기 때문이오. 간단히 말해서, 그대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진실로 그리고 아름답게 숭고하다고 생각하시오. 직업과 생활 방식과 취미와 나이와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작품들에 대하여 똑같은 의견을 갖는다면 그토록 목소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치된 판단은 그들의 경탄이 정당하다는 우리의 신념을 강하고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법이오. (283쪽)


숭고의 다섯 가지 원천

숭고한 문체의 가장 생산적인 원천은 다섯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다섯 가지의 공통된 토대는 언어 구사력이고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소.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크세노폰에 관한 나의 저서에서 설명했듯이, 위대한 구상 능력이오. 두 번째는 강력하고도 열광적인 감정이오. 숭고의 이 두 가지 원천은 대체로 타고나는 것이오. 나머지 세 가지는 예술에 의하여 습득될 수 있으니, 문채의 - 여기에는 사상의 문채와 언어의 문채 두 가지가 있소 - 적절한 구성과 이에 덧붙여 고상한 표현법이 그것인데, 여기에는 또 어휘의 선택, 은유의 사용, 언어의 조탁이 포함되오. 위대함의 다섯 번째 원인은 앞서 말한 것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서 품위 있고 고상한 조사(措辭)가 그것이오. (284쪽)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생각건대, 그는 같은 이유에서 그의 재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쓴 『일리아스』는 작품 전체를 극적인 행동과 투쟁으로 가득 채운 반면, 『오뒷세이아』는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년기의 특징이오. 따라서 사람들은 『오뒷세이아』에서의 호메로스를 크기는 그대로지만 힘이 없는 지는 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오. 『오뒷세이아』에서는 그는 이미 『일리아스』의 노래들에서와 같은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니, 그곳에는 결코 범용으로 떨어지지 않는 숭고도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격정도, 다재다능함도, 현실성도, 일상생활에서 끌어온 풍부한 심상도 없기 때문이오. 그것은 마치 오케아노스가 자신 속으로 도로 흘러들어 자신의 경계 안에 조용히 머무는 것과도 같소. (295쪽)


구멍과 틈

······ 이들 작가들이 한 것은 말하자면 가장 탁월한 것만을 갈고 닦아 함께 이어붙이되 과장되고 품위 없고 현학적인 것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소. 이런 것들은 전체를 망쳐놓게 마련인데, 그것은 이런 것들이 상호 관계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조화롭고 인상적인 건축물들에 말하자면 구멍과 틈을 만들기 때문이오. (301쪽)


숭고와 확장

대체로 깍아지른 듯한 숭고가 데모스테네스의 특징이라면 키케로의 그것은 확산이오. 우리 동향인은 자신의 힘과 속도와 기세로 자기 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말하자면 한꺼번에 불태우며 흩어버릴 수 있소. 그래서 그는 번개와 벼락에 비유될 수 있소. 키케로는, 내가 보기에, 사방으로 번지며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요원의 불길과도 같소. 그의 내면에는 지칠 줄 모르는 불이 활활 타며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번지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소. (305쪽)


'소리 없는 강물'처럼 숭고에 도달하는 플라톤

플라톤으로 되돌아가, 그는 그렇게 '소리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데도 숭고에 도달하고 있소. 그대는 그의 『국가』를 읽었으니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하고 그는 말하고 있소. "지혜와 덕을 모르고 언제나 연회 같은 것에 열중해 있는 자들은 아마도 아래를 향하여 움직이며 그곳에서 평생 동안 헤매게 될 것이네. 그들은 진리를 쳐다본 적도 없고 위를 향하여 움직인 적도 없으며 확실하고 순수한 쾌락을 맛본 적이 없다네. 그들은 가축처럼 언제나 아래만 내려다보며 대지와 식탁 위로 머리를 숙이고는 먹이를 먹고 교미한다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무쇠의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서로 떠받다가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서로 죽인다네." (307쪽)

(나의 생각)
이 부분은 플라톤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다. 『평생독서계획』의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 * *
"독자는 플라톤의 핵심 사상 세 가지를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첫째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데, "탐구하지 않는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상이 플라톤의 모든 저작에서 핵심을 이룬다. 두 번째는 지식은 미덕이라는 것이다. 충분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충분히 선량한 사람이다."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

이 작가는,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던 것들 외에도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소. 그것은 대체 어떻게 생긴 어떤 종류의 길일까요? 그것은 과거의 위대한 산문 작가들과 시인들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친구여, 이 목표를 부단히 추구하도록 합시다. 많은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김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오. (308쪽)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상을 다툰 플라톤

헤로도토스만이 가장 호메로스적이었을까요? 천만에 그 이전에 스테시코로스와 아르킬로코스가 있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있었소. 그는 호메로스라는 샘으로부터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개천을 냈던 것이오. 나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암모니오스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간추려 기록해두지 않았더라면 말이오. 그런 것은 표절이 아니오. 그것은 조각이나 그 밖에 다른 예술에 의하여 아름다운 형상들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소. 그리고 생각건대, 플라톤은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제우스 신께 맹세코, 온 마음을 다해 상을 다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철학 이론들을 그렇게까지 꽃비우지 못했을 것이고, 시의 주제와 언어에 그렇게 자주 함께 승선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아마도 경쟁심에서 지나치게 투지에 넘쳐 있지만, 그런 다툼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었소. 헤이오도스에 따르면, "그런 불화는 인간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선배들에게 지더라도 그것이 불명예가 아닌 곳에서는 명성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영관은 정말이지 그 무엇보다도 다투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309쪽)


실용적 조언

따라서 우리도 숭고한 표현과 고매한 사상을 요구하는 구절을 쓸 때는, 호메로스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플라톤이나 데모스테네스나 또는 역사에서 투퀴디데스는 이것을 어떻게 숭고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좋소. 왜냐하면 경쟁심은 이 위대한 분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줄 것이고, 그러면 그 분들이 우리의 생각들을 우리가 정해놓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줄 것이기 때문이오. 나아가 호메로스나 데모스테네스가 여기 있었다면 나의 이 구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또는 나의 이 구절이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하고 자문해본다면 그것은 더욱더 그러할 것이오. 우리가 그러한 배심원들과 청중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웅적인 심사원들과 증인들에게 우리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도록 맡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큰 경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대가 "내가 이렇게 쓰면 후세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더 고무적일 것이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와 시대보다 오래 지속될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의 마음속 구상들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발육이 부전하여 유산되고 말 것이며, 후세의 명성의 날을 위하여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못할 것이오. (310∼311쪽)


문채와 숭고

회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요. 빛과 그림자가 색채로 재현되어 같은 화면 위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도 빛이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빛이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오. 그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도 감정과 숭고는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깝소.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친화력과 광채 때문에 언제나 문채에 앞서 우리의 주의를 끌어 문채의 기교를 가림으로써, 말하자면 그것이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오. (325쪽)


접속사의 몇 가지 불리한 점

그대가 이렇듯 접속사를 계속해서 삽입할 경우 감정의 긴박함과 울퉁불퉁함이 접속사의 사용으로 매끈하고 평탄해져서 찌르는 맛이 없어지고 금세 열기를 잃게 되오. 달리는 사람이 몸이 묶이면 속력을 빼앗기듯이, 마찬가지로 감정도 접속사와 다른 군더더기에 의하여 방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소. 그럴 경우 그것은 운동의 자유를 잃게 되어 나는 무기가 발사된 듯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오. (332쪽)


인칭 바꾸기

친구여, 그대는 보이지 않으시오. 어떻게 그가 마음속으로 그대를 데리고 그곳을 통과하며 그대가 들은 것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지 말이오? 그런 구절들은 실제 인물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듣는 이를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오. (343쪽)


우회적 표현

음악의 경우 이른바 반주에 의하여 주선율이 더 감미로워지듯이, 우회적 표현은 가끔 직접적 표현과 조화를 이루며 그것이 더 아름답게 들리게 해주는데, 우회적 표현이 과장되거나 몰취미하지 않고 쾌적하게 섞일 때에는 특히 그러하오. (347쪽)


적절하고 장대한 말들의 선택

사상과 표현법은 대체로 밀접한 관계가 있소. 따라서 우리는 표현법의 영역에서 아직도 고찰되어야 할 요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적절하고 장대한 말들의 선택은 놀랄 만큼 청중을 유인하고 매료하며, 연설가들과 산문 작가들은 모두 그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소.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써 우리의 말들에 마치 가장 아름다운 조각에게처럼 대번에 장대함과 아름다움과 매력과 무게와 기운과 힘을 주기 때문이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들에 생명과 목소리를 불어넣는 것이오. (351쪽)


은유

앞서 문채들에 관해서도 말했듯이, 강력하고 시의에 맞는 감정과 진정한 숭고야말로 중첩된 또는 대담한 은유에 대한 특효약이라는 것이오. 그것들은 급한 물살로 모든 것을 휩쓸어가거나 앞으로 내모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오. 아니, 그것들은 필수적으로 대담한 심상들을 요구하오. 그것들은 청중에게 은유의 수를 세어볼 여유를 주지 않소. 청중도 연설가의 열광에 참여하기 때문이오. (356쪽)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내가 알기로 가장 위대한 천재들은 흠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오. 완벽한 정확성은 진부해질 위험이 있으나, 위대한 저술에서는 큰 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간과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오. 아마도 저급하고 평범한 재능들은 모험하지 않고 높은 곳을 노리지 않는 까닭에 대체로 실수로부터 안전할 수밖에 없는 반면, 위대한 재능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든 그 본성상 언제나 더 나쁜 측면이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오. 실수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남지만, 탁월성에 대한 기억은 금세 녹아 없어지는 법이오. (360∼361쪽)


정신의 위대성 때문에

나 자신도 호메로스와 다른 위대한 작가들의 적잖은 실수를 지적한 바 있지만 이는 이들 실수들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흐뭇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도적인 실수라기보다는 천재의 부주의와 소홀함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간과(看過)라고 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탁월성들이야말로 설사 그것들이 작품 전체에 걸쳐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더라고 언제나 상을 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것들이 보여주는 정신의 위대성 때문에라도 말이오. (362쪽)


데모스테네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건대, 휘페레이데스의 아름다움들에는 비록 그 수는 많지만 위대성이 결여되어 있소. 그것은 정신이 맑은 사람의 태작(駄作)으로서 청중을 감동시키지 못하오. 휘페레이데스를 읽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천재의 탁월성들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니, 숭고한 말의 긴장감, 생동감 넘치는 감정, 충만, 준비성, 필요한 곳에서의 속도 그리고 그 자신의 접근하기 어려운 맹렬함과 힘이 곧 그것이오. 내 말하노니, 그는 신이 보낸 이 모든 재능들을 - 그것들을 인간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경한 짓일 테니까요. - 자신 안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이 갖지 못한 장점들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도 자신이 가진 장점들로 경쟁자들을 모두 이기며 말하자면 천둥과 번개로 모든 시대의 연설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오. 그래서 그의 지속적인 감정의 분출을 태연히 지켜보느니 차라리 떨어지는 벼락을 향하여 눈을 뜨는 편이 더 수월할 것이오. (365쪽)


신들과 같은 작가들이 의도했던 것

그렇다면 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을 추구하고 세세한 정확성을 경멸했던 저 신과 같은 작가들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은 열등하고 품위 없는 동물이 되도록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의 관람객이자 명예를 사랑하는 경쟁자가 되도록 마치 큰 축제에 초대하듯 우리를 생명의 세계와 전 우주 속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그래서 자연은 처음부터 무엇이든 위대하고 우리 자신보다 더 신적인 것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욕구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았다는 인식이오. 따라서 전 우주도 인간의 고찰과 사고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사고는 때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오. 그리고 인생을 두루 살펴보고 만물 속에서 비범한 것과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우세한지 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목적을 금세 알게 될 것이오. (366∼367쪽)


문장 구조

말해진 것에 장대함을 부여하는 데 여러 가지 구성 요소들의 결합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 그것은 신체의 경우와 같소. 개개의 사지는 다른 것과 분리되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나 전체가 결합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오. 마찬가지로 장대함의 효과들도 서로 분리되면 그것들 자체는 물론이고 전체적인 숭고의 효과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지만, 하나의 전체로 결합되고 화음의 띠들로 둘러싸이면 하나의 완전문(完全文)으로 완결되는 것 자체에 의하여 살아 있는 목소리를 얻게 되는 것이오. (381쪽)


숭고를 저해하는 것들 : 젠체하는 저질 리듬

나약하고 흥분된 리듬만큼 숭고한 구절을 해치는 것은 없소. 이것들은 순수한 무도 리듬으로 변질되고 마오. 지나치게 리듬화된 것은 무엇이든 가장 미세한 감정적 효과도 없이 단조로이 반복됨으로써 금세 부자연스럽고 싸구려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오. 그러나 가장 나쁜 점은, 마치 노래가 청중의 주의를 드라마의 줄거리로부터 억지로 자기에게로 끌듯이, 지나치게 리듬화된 산문도 청중에게 말의 효과가 아니라 리듬의 효과만을 전달한다는 것이오. 그리하여 청중은 가끔 끊어지게 되어 있는 부분들을 미리 알고는 무용에서처럼 연설가보다 한발 앞서 그를 위하여 발로 박자를 맞춰주는 것이오. 난도질해놓은 문체 마찬가지로 너무 촘촘하거나 작은 단편들과 짧은 음절들로 잘라놓은 구절들도 장대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소. 그런 구절들은 말하자면 군데군데 나무못으로 거칠고 울퉁불퉁하게 이어 붙여놓은 듯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오. (384∼385쪽)


간결과 장황

지나치게 간결한 표현도 숭고를 저해하오. 숭고는 너무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면 손상되기 때문이오. 이 말은 적절한 압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작은 조각들로 절단하는 것을 의미하오. 절단은 의미를 저해하지만 간결은 곧장 핵심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오. 반대로 장황한 표현은 때 아니게 늘이는 까닭에 생기가 없소. (386쪽)


여담 : 문학 쇠퇴의 여러 가지 원인

······ 호메로스의 말처럼, "예속의 날은 미덕의 반을 앗아가버리기 때문이오. 그래서" 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퓌그마이오이 족 또는 난쟁이족을 가두어두는 새장들이 그 안에 갇힌 자들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사슬들로 그들을 불구자로 만들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예속도 설사 그것이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영혼의 새장과 공동의 감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답했소.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의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393∼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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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4-01-10 17:58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2. 참을 수 없는 글읽기의 '가려움'
    from Value Investing 2014-01-13 14:51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면 그 원인은 필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글 속에 자체적으로 '가려움'이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 '가려움'을 느꼈거나.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가려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옳을까. 이런 선택이 특히 어려운 경우는 그 '가려움'을 어떤 강도로 긁든지 관계없이 긁는 대상이
  3. 모방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4-02-01 00:16 
    (밑줄긋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견한 구절들 모방한다는 것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37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
 
 
숲노래 2014-01-10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생각하고 돌아볼 이야기가 많이 있네요.
이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으면서
아름다운 새 이야기를 환하게 빚을 수 있겠지요.

oren 2014-01-10 19:36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쓰여진 옛날 책이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어서 더욱 놀라운 책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득 담긴 옛 시인이 쓴 책들을 읽어볼 생각을 하니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 들려달라고 조를 때의 심정을 새삼 알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