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벚꽃이 한창인데 어느새 양지바른 화단엔 철쭉 꽃망울이 방긋~




 - 호수공원은 이제사 벚꽃이 모두 터졌다.





 - 벚꽃은 터졌으나 바람끝은 거꾸로 차갑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봄이다.





 - 봄바람이 불어도 꽃잎들은 아직 제몸에 딱 붙어 있다.





 - 목련은 어느새 터진 지 오래다.





 - 땅 속에선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기 바쁘고.





 - 처녀들은 일찌감치 꽃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 저마다의 봄.




 - 하늘의 별을 담은 벚꽃.





 - 무지개가 걸린 봄.





 - 온통 봄빛.





 - 고목에 핀 봄.





 - 여름이 엿보이는 봄.





 - 만개한 봄.





 - 꽃보다 처녀.





 - 팝콘처럼 터지는 봄.





  - 붐비는 봄.





 - 봄소풍.





 - 바람에 흔들리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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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4-04-0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부신 사진들이 정말 눈을 즐겁게 해주네요.. 감사 ^^

oren 2014-04-07 11:32   좋아요 0 | URL
어제는 날씨가 청명했던 덕분에 꽃들도 더욱 화사한 모습으로 보였어요.
오랜만에 댓글 남겨주셔서 더욱 반갑습니다.^^

야클 2014-04-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빠서 봄을 느낄 겨를도 없었는데 벌써 봄이 가고 있네요. oren님 서재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그간 안녕하셨나요? ^^

oren 2014-04-09 22:26   좋아요 0 | URL
바쁘다는 건 좋은 일이지 싶어요. 봄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면 더더욱 좋은 현상이 아닐까 싶네요.ㅎㅎ

아무튼 오랜만이고, 이렇게라도 소식을 주고 받으니 반갑네요. 바쁘시더라도 가끔씩 계절에 흠뻑 빠져 보는 즐거움도 누리시길 바랄께요. 야클님~
 

 

 “역사상 살라미스 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 헤겔


 * * *


 


<살라미스 해전> (빌헬름 폰 카울바흐, 1868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지휘했던 몽고메리 장군은 알라메인 전투(1942년)에서 '사막의 여우' 롬멜을 이집트에서 몰아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기도 하는 등 혁혁한 무공을 여러 번 쌓은 인물이지만 전쟁의 이론과 역사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그가 쓴 1,038쪽에 이르는 몹시도 두툼한 책인『전쟁의 역사』를 펼쳐보면 인류의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러왔는지 보다 더 생생하게 파악할 수도 있다. 그가 찾아낸 '초기 시대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어 보자.

인간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역사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우리는 인간 사회가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원전 7000년경으로 돌아가 예리코를 둘러보면, 1만여 평 지역이 높이 6미터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아주 튼튼한 요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해자(垓字)는 단단한 바위에 약 4.5미터의 폭과 2.7미터의 깊이로 패어 있다. 아마 2,500명쯤의 주민 가운데 500∼600명은 전사였을 것이다. 이들 주민들은 공학이나 요새 건축에 능하고 경험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돌로 만든 화살촉 유물로 보아 활과 화살까지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지역을 잘 알고 있고, 1931년에는 사해의 골짜기에 있는 고대 도시들의 성벽과 동굴을 탐사하며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처럼 대규모의 군사적 대비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는 무섭고 강력한 적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79쪽)


1908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한 그가 평생 동안 수많은 전쟁을 두루 겪는 와중에도 꾸준히 '전쟁의 역사'를 고찰하고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두루 살펴본 덕분에 그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현장감'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살라미스 해전>을 둘러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도 잠시나마 우리와 함께 살았던(그의 생몰연대는 1887∼1976년이다)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서양 역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 뻔했던 '마라톤 전투'와 '테르모퓔라이 협곡'에서 벌어졌던 그 유명한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제법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오래 전에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나서 한동안 '레오니다스 왕'이 이끈 300인의 전투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찾아본 일이 있었는데, 심지어는 마침 그때 그리스의 아테네 무역관에서 몇 년째 근무중이던 고교 동창 녀석과도 '테르모퓔라이 협곡'과 '레오니다스 왕'에 대한 이야기를 꼬치꼬치 물어볼 정도였었다.(그 친구는 테르모퓔라이 협곡을 '당연히' 가봤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직후에 바로 그 유명한 전투를 다룬 영화『300』이 개봉되는 바람에 나에겐 그 영화가 무슨 '특별한 선물'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내가 책으로만 접했던 그 유명한 협곡에서의 전투 이야기가 그 '영화'를 통해 과연 얼마만큼 생생하게 재현되었을까를 남달리 유심히 살펴보는 일도 몹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가 '테르모퓔라이 협곡'에서 느꼈던 감상이 너무나 무미건조한 듯해서 나로서는 적잖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그의 글을 여기서 약간 인용해 둘 필요가 있다.
 

······ 그때 그리스군에게 테르모필라이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7,000명의 장갑 보병 - 그 중 스파르타인은 300명뿐이었다 - 을 이끌고 사흘 동안 페르시아의 전 병력을 저지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에게 산길을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반역자가 있어 스파르타 왕의 군대는 모두 죽음을 당했다. 페르시아는 그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테네를 향해 남진했다. ······

나는 1933년에 테르모필라이를 방문하여 그 산길을 방어하다 죽은 스파르타군을 애도하는 기념비를 보았다. 비문을 번역하면 이렇다.

      이곳을 지나는 자,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스파르타의 군법에 복종해, 여기 누워 있노라고. (134쪽)


그런데 몽고메리가 들려주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내가 꼭 되짚고 넘어갔으면 싶은 게 한 가지 있다. 그 유명한 전투에서 300인의 전사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원인은 '협곡에 이르는 또다른 샛길' 때문임이 명백하지만, 정작 그 샛길을 가르쳐 준 사람은 몽고메리가 말한 '그리스군 진영의 반역자'가 아니라, 테르모퓔라이 협곡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이미 페르시아 군대의 수중으로 떨어진 '현지 사정에 밝은' 멜리스 토박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멜리스인의 고자질 때문에 난공불락의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무려 엿새 동안이나 끈질기게 버텨내며 페르시아를 곤경에 빠뜨린 일도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고, 그 멜리스인을 앞세우고 오솔길을 통해 느닷없이 나타난 페르시아군들 때문에 결국 스파르타의 용맹무쌍한 300인의 전사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멜리스인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페르시아에 부역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때, 에우뤼데모스의 아들 에피알테스라는 멜리스인이 그와 면담하러 왔다. 왕이 크게 포상하리라고 기대하고 그는 테르모퓔라이에 이르는 산속 오솔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곳 고갯길을 지키고 있던 헬라스인들을 죽였다. 나중에 그는 라케다이몬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텟살리아로 도망쳤는데,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인보동맹 회원국 대표들이 퓔라이에서 모임을 갖고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 그 뒤 그는 안티퀴라로 돌아갔다가 아테나데스라는 트라키스인에 의해 살해되었다.(744쪽)
  - 헤로도토스, 『역사』



레오니다스의 영웅적 면모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다시금 새삼스럽게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남겼던 리뷰 가운데 한 대목만은 여기서도 다시금 인용하고 싶다.



아래의 그림은 1814년에 다비드가 완성한 <테르모필라이에서의 레오니다스>라는 작품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레오니다스가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는 전쟁에서 패한 자라며 전쟁에 지는 장면을 그리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다비드에게 충고했다고 한다. 역사를 움직인 수많은 인물 가운데 예수 다음으로 많은 전기가 씌어졌다는 나폴레옹 조차 이 그림이 전시되던 바로 그 해에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만다. '제비꽃이 피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유배를 떠난 나폴레옹은 과연 영웅다웠다. 그는 이듬해 2월에 엘바섬을 탈출했으며,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에 걸맞게 결국 위대한 황제 폐하로 파리에 입성하게 된다.


Leonidas at Thermopylae(1814, Musée du Louvre, Paris)

여행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들의 명을 수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고.
(스파르타 전사자를 위해 세운 시모니데스의 비문) 

 - 헤로토토스의 『역사』에 대한 리뷰, 인류 최초의 동서간 대전쟁을 다룬 역사의 원전 中에서



레오니다스 왕에 얽힌 인상적인 이야기는 아마도 2,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책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에 틀림없겠지만, 내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발견한 몇몇 대목을 여기에서 인용하고 싶은 욕심도 억누르기 어렵다.
 

가장 용감한 자

가장 용감한 자는 때로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 그러므로 개선 못지않은 패배도 있는 것이다. 태양이 그의 눈으로 보아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 살라미스·플라타에아·미칼라·시칠리아 등 4대 승리의 영광 전부를 뭉쳐 보아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의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들이 전멸당한 영광에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234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오니다스의 딸

나는 스파르타 왕의 아내이며 딸인 켈로니스의 아름다운 마음을 얼마나 존경하고 싶은지. 그의 남편 클레옴브로토스가 혼란의 틈에 부친 레오니다스에게 대항해서 우세하던 동안, 그녀는 착한 딸 노릇을 하며 추방당한 부친의 어려움 속에 그의 편을 들며 승리자에게 반대했다. 그런데 운이 뒤집힌 다음 이 여자는 행운의 편을 들려고 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기 남편의 편을 들며 그가 패하여 달아나는 뒤를 따라간다. 그녀는 자기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며 자기가 가련하게 보아 주는 편으로 투신하는 것밖에 선택의 길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세도가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거만하게 굴던 피로스보다는 당연히 플라미니우스의 본을 더 좇고 싶다. 그는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빌려 주었다. (1230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그런데 키케로가 『법률론』에서 '역사의 아버지'라고 추켜세운 헤로도토스는 왜 그토록 드넓은 지역을 여행하면서 『역사』라는 방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을까? (그는 '여행 사정이 극도로 열악하던 그 시기에' 흑해 연안을 거쳐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지역과 에우프라테스 강과 바뷜론은 물론, 페르시아 전쟁과 관계가 있는 그리스 본토의 모든 지방과 소아시아, 남이탈리아, 시칠리아를 비롯한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그가 쓴 책의 서언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非) 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인들과 비그리스인들 사이에 있었던 오래된 갈등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소개되는데, 그때마다 각각의 민족들에 대한 지리학적·인종학적·민속학적·역사적 자료들이 수없이 덧붙여져 소개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놀랍도록 방대하게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994쪽에 달하는 이 두터운 책의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결국 마라톤 전투, 테르모퓔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이며, 이 책의 중심 인물들 또한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와 크세르크세스 두 대왕으로 모아지며, 그들의 탐욕과 교만이 결국 전쟁의 원인이었음을 헤로도토스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 또한 이 글을 통해 헤로도토스의『역사』에 나타난 3차레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 그 전개 과정'들을 얼마간 자세히 살피고 싶은 욕심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올해 초에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스퀼로스가 쓴 『페르시아인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 <살라미스 해전>을 둘러싼 풍경들이 새삼 눈앞에 생생히 떠올라 그 전쟁의 영웅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를 만나기 위해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물론,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새롭게 펼치게 되었는데, 특히『역사』에 기록된 여러 인상적인 대목들은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생생하고 놀라운 장면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이런 책들을 읽고 있을 무렵엔 마침 <살라미스 해전>을 다룬『300, 제국의 부활』이라는 영화가 조만간 개봉될 예정이라는 희소식까지 들려왔다. 그러니 나로서는 영화 『300』에서 맺었던 (책을 읽고 나자 곧바로 영화가 개봉되는) 묘한 인연을 다시금 반복해서 얻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개봉될 그 영화를 좀 더 흥미롭게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살라미스 해전'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되살펴볼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제목의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절로 생겼던 것이다.(보름쯤 전에 이 글을 쓰다가 잠시 게으름을 피운 사이에 이미 영화가 개봉되고 말았다. 아직 그 영화를 못 봤지만 아마 며칠 이내로 영화관으로 달려가지 싶다.)

다시 페르시아 전쟁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왕은 분에 못이겨 더욱 큰 전쟁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선대 왕이었던 퀴로스의 바빌로니아 정복과 캄뷔세스의 아이귑토스(현재의 이집트) 정복으로 크게 영토를 확장한 페르시아 제국이 도시국가 수준이었던 아테나이에게 어이없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페르시아 왕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출처:두산대백과)

그리하여 다레이오스는 '대규모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관습대로 자신의 후계부터 지명해야 했는데, 왕권의 향방을 두고 배다른 형제들인 그의 아들들 사이에 큰 분쟁이 벌어지는 등 혼란스러웠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 뒤 새로 얻은 부인인 '아톳사'가 낳아준 네 명의 아들 가운데 맏이였던 크세르크세스를 페르시아의 왕으로 지명했다.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 데는 퀴로스의 딸이었던 아톳사의 영향도 컸다고 한다.

다레이오스는 한동안 열심히 원정 준비에 열중했으나, 아이귑토스와 아테나이를 응징하기도 전에 재위 36년 만에 사망(기원전 486년)하고 만다. 뒤이어 왕위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는 정작 헬라스 원정에는 애당초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자신의 고종사촌이자 다레이오스의 생질인 마르도니오스와 같은 인물들의 끈질긴 부추김 때문에 결국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결심을 굳힌다.

페르시아인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르도니오스는 제1차 페르시아 전쟁때 대군을 이끌고 유럽 원정에 나선 총사령관이었는데, 그가 육군과 함께 마케도니아에 진을 치고 있던 중 페르시아의 함대가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다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수많은 함선들을 아토스에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3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자, 원정에 완전히 실패하고 아시아로 군대를 철수한 경험이 있었다. 그가 훗날 살라미스 해전에서 또다시 대패하자 '전쟁을 부추긴 주범'으로 몰려 처형될까 두려워 크세르크세스에게 '정예병 30만 명을 뽑아주면 헬라스를 빼앗아 왕께 바치겠다'고 선수를 친 뒤, 전쟁터에 남아 크세르크세스의 탈주를 돕는 것과 동시에 이듬해 재차 아테나이를 함락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국 플라타이아이 대전투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번에 3차 헬라스 원정에 나서기에 앞서 그가 크세르크세스를 전쟁에 나서도록 부추긴 여러 말들 가운데 한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전하, 페르시아인들에게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아테나이인들을 응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 지금 당장은 전하께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아이귑토스의 콧대를 꺽어놓으신 다음에는 아테나이로 진격하소서. 전하께서 후세에 길이 남을 명성을 얻으시고,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전하의 나라로 침공할 엄두를 못 내도록 말이옵니다." (633쪽)


이밖에도 크세르크세스에게 전쟁을 부추긴 인물들은 여러 사람이 더 있었지만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기는 힘들다. 그대신 크세르크세스가 선왕이 죽은 이듬해 아이귑토스를 정복한 뒤 아테나이 원정에 착수하기 직전에 페르시아의 요인들을 회의에 소집한 후 자신의 의도를 직접 밝힌 대목도 한번쯤 들어볼 만하다.
 

"페르시아인들이여, 나는 여기서 새로운 관행을 도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옛 관행을 따르고자 할 뿐이오. 옛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퀴로스께서 아스튀아게스를 권좌에서 축출하시고 왕권이 메디아인들에게서 우리에게 넘어온 뒤로 우리는 한시도 무위도식하지 않았다고 하오. ······ 그래서 나는 왕위에 오르자, 어떻게 하면 내가 선왕들에게 뒤지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페르시아인들의 권력을 그분들 못지않게 늘려줄 수 있을지 고민했소.  ······

나는 헬레스폰토스에 다리를 놓고 에우로페를 지나 헬라스로 진격하여, 아테나이인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내 선친께 저지른 모든 악행의 대가를 치르게 할 참이오." (635∼636쪽)


그의 말에 이어 마르도니오스가 왕의 제안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다음과 같은 말을 덧보탰다. "전하,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태어났던 페르시아인들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페르시아인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분이시옵니다.  ······  듣자 하니 헬라스인들은 무식하고 무능하여 아주 어리석게 교전하는 버릇이 있다 하옵니다. ······  하거늘 전하, 전하께서 막강한 육군과 전 함대를 이끄시고 아시아에서 진격하신다면 누가 전하에 맞서 싸우려 하겠사옵니까?"

이런 말들을 듣고 아무도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할 용기가 없어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자신이 크세르크세스의 숙부라는 것을 믿고 아르타바노스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그러실 필요도 없으신데 그런 위험을 자초하시지 마시고 제 진언을 받아들이오서. 지금은 이 회의를 파하소서. 그리고 혼자 심사숙고해보시고 적기라고 여겨질 때 전하께서 상책이라고 생각하시는 바를 저희들에게 통고해주소서. 심사숙고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좋은 계획을 세운 자는 설사 어떤 방해를 받는다 해도 계획이 휼륭했다는 사실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계획은 우연에 의해 좌절된 것이옵니다. 하오나 나쁜 계획을 세운 자는 설사 행운의 도움으로 횡재를 한다 해도 계획이 나빴다는 사실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사옵니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마르도니오스에게도 경고를 잊지 않았다.

"자네는 헬라스인들을 비방하기를 삼가시게. 그런 비방은 그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네. 자네는 헬라스인들을 폄하함으로써 그자들을 징벌하시도록 전하를 부추기고 있으며, 자네의 모든 열성이 노리는 것도 분명 그것이네. 제발 그러지 마시게. 모함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네. 모함은 두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고, 한 사람을 그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네. 모함하는 자가 범죄자가 되는 것은 그 자리에 없는 자를 고발하기 때문이며, 그의 말을 믿는 자가 범죄자가 되는 것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아보기 전에 판단하기 때문이네. 그 자리에 없는 자가 두 사람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것은, 한 사람은 그를 모함하고, 다른 사람은 그를 나쁘게 여기기 때문이네."

이밖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더 있었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아이귑토스를 정복한 뒤 만 4년 동안(기원전 484∼481년) 모병을 하고, 아토스 곶을 우회할 필요가 없도록 3년에 걸쳐 대규모 운하를 파는 등 원정에 필요한 준비를 갖춘 후 5년째 되던 해, 대군을 이끌고 마침내 원정길에 올랐다. 헤로도토스의 표현대로 '그것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다.
 

크세르크세스가 아시아에서 헬라스로 이끌고 가지 않은 부족이 있었던가? 큰 강들을 제외하고 그들이 마셔버려 고갈되지 않은 물이 있었던가? (648쪽)


페르시아의 대군이 진군하는 길목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이 있었는데, 페르시아 왕은 그 해협에 포이니케인들과 아이귑토스인들을 동원하여 다리를 놓도록 했다. 그런데 해협에 다리들이 놓였을 때 세찬 강풍이 일더니 다리를 덮쳐 산산이 부숴버리고 말자, 크세르크세스는 노발대발하며 헬레스폰토스에게 매 300대를 치고 바닷물에 족쇄 한 쌍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이 일이야말로 크세르크세스가 얼마나 오만한 인물이었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가 헬레스폰토스에 낙인을 찍도록 낙인 찍는 자들도 보냈다고 들었다. 아무튼 그가 헬레스폰토스에 매를 치며 다음과 같은 야만스런 말을 하게 한 것은 확실하다. "이 쓴 물아, 네게 아무런 해코지를 하지 않으신 우리 주인께 네가 해코지를 한 죄로 우리 주인께서 네게 이런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 대왕께서는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너를 건너가실 것이다. 너처럼 탁하고 짠 강물에 아무런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크세르크세스는 바다를 그렇게 응징하게 하고 나서 헬레스폰토스에 다리를 놓는 일을 감독하던 자들의 목을 베게 했다. (655쪽)


군대가 아뷔도스에 도착하자 크세르크세스는 전군을 관병(觀兵)하고 싶어 언덕에 특별히 마련된 흰 대리석 단에 앉아 해안을 내려다보며 육군과 함대를 관병했는데, 그때 헬레스폰토스가 온통 함선으로 덮이고 아뷔도스의 해안들과 들판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처음엔 자신을 행복하다고 기리다가 나중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헬라스 원정을 만류했던 그의 숙부 아르타바노스가 그의 행동을 보고 놀라서 물었는데, 그들이 나눈 대화가 자못 인상적이다.
 

크세르크세스가 대답했다. "인생이란 얼마나 짧은 것인가 생각하다가 비감에 잠겼다오. 여기 있는 저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앞으로 100년 이상 살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오." 아르타바노스가 대답했다. "살다 보면 그보다 더 슬픈 일도 많사옵니다. 짧은 인생이지만 저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 중에 더 오래 사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싶은 생각이 한 번이 아니라 가끔씩 들지 않을 만큼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사옵니다. 그리하여 죽음이 인간에게는 괴로운 인생으로부터의 가장 바람직한 도피처가 되는 것이옵니다. 그것을 보면 신께서 시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사옵니다. 신께서는 인생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맛만 보여주시기 때문이옵니다."
(660쪽)


페르시아의 대군이 어느 부족에서 얼마나 참가했고, 함대는 어느 부족에서 얼마나 제공했는지,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누가 맡았는지를 헤로도토스가 꼼꼼하게 기록한 건 제쳐두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헬라스 원정에 참가한 '여전사 아르테미시아'에 대해서는 나도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밖에 다른 지휘관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으나, 아르테미시아만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의 몸으로 그녀가 헬라스 원정에 참가한 것은 감탄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의 사후(死後) 정권을 장악했고, 다 자란 아들이 있고 전혀 강요받지 않았음에도 자진하여 용맹심에서 원정에 참가했으니 말이다. 이름이 아르테미시아인 그녀는 뤽다미스의 딸로 친가 쪽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이고, 외가 쪽은 크레타 출신이었다. ······ 그녀의 함선들은 시돈인들의 함선들 다음으로 전 함대에서 가장 훌륭했다. 크세르크세스의 동맹군 중에 그에게 그녀보다 더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681∼682쪽)


페르시아의 대군들이 육지와 바다 양쪽 방향으로 거침없이 진격해 오자 전 헬라스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 아테나이에서 델포이로 파견된 사절단이 '신탁'을 통해 예언녀로부터 들은 대답도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련한 자들이여, 왜 여기 앉아 있는가? 그대들은 집과,
그대들의 도시로 둘러싸인 높은 언덕들을 떠나 대지의 끝으로
도망쳐라. 머리도 몸도 굳건하게 버티지 못할 것이며,
아래쪽의 두 발과 두 손과 그사이에 있는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불과 쉬리아의 전차를 타고 질주하는
날카로운 아레스가 모든 것을 끌어내리리라.
그는 그대들의 성채뿐 아니라 다른 성채도 수없이
파괴하리라. 그는 수많은 신전을 파괴적인 불에 넘겨줄 것인즉,
신전들은 지금 벌써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서서
두려움에 떨고, 지붕에서 검은 피를 쏟고 있으니,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예견했기 때문이니라.
자, 그대들은 이 신전에서 나가 마음속으로 실컷 슬퍼하라!
(701∼702쪽)


그런 신탁을 듣자 아테나이인들은 크게 낙담했고, 델포이에서 명망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재차 신탁에 물어본 끝에 '조금 더 나은' 두 번째 예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신탁은 먼젓번 신탁보다 더 온건했기에 사절단은 그걸 적어서 아테나이로 돌아갔다.
 

······
그래서 나는 재차 그대에게 강철처럼 단단한 말을 하리라.
케크롭스 언덕과 신성한 키타이론 산 골짜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게네이아여,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 그대는 대륙에서
기병과 보병의 대군이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등을 돌려 도망쳐라. 언젠가는 적군과 맞설 날이 다가오리라.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여, 데메테르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 너는 여인들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
(702∼703쪽)


이 신탁의 해석을 둘러싸고 온갖 해석이 난무했지만, 그 무렵 아테나이에서 요인들 중의 한 명으로 부상하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벽'이 함선들을 가리키는 만큼 '해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에도 테미스토클레스의 판단은 중요한 순간에 최상의 판단으로 인정된 적이 있었다. 라우레이온 은광에서 국고로 큰 수입이 들어오자 그 돈을 분배하는 대신 전쟁에 대비해 함선 200척을 건조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헬라스인들이 '어디서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지를 의논한 뒤 육군은 '테르모퓔라이 고갯길'을 지키고, 해군은 아르테미시온에 배치하기로 했는데, 육군과 해군이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페르시아의 대군이 여러 지역들을 두루 거쳐 세피아스와 테르모퓔라이에 도착하기까지는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는데, 이때 그들의 병력 규모를 자세히 언급해 놓은 대목을 보면 페르시아 대군의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 새삼 놀라게 된다.

추산컨대, 이때 그들의 병력 수는 여전히 다음과 같았다. 아시아에서 온 함선들은 1,207척인데, 함선당 200명으로 계산하면, 원래 각 부족들로부터 차출한 선원은 241,400명이다. 이들 함선들마다 토착민 선원들 외에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과 사카이족 선원이 30명씩 타고 있었는데, 이들 추가 인원을 합하면 36,210명이 된다. 이 수치에 나는 오십노선의 선원을 추가할 텐데, 1척당 약 80명으로 산정하면, 앞서 말했듯이 오십노선은 3,000척이 집결했으므로 이 함선들의 선원 수는 240,000명쯤 될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온 해군의 수는 총 517,610명에 이른다. 보병은 1,700,000명이고, 기병은 80,000명이었다. 여기에 나는 아라비아의 낙타 기수들과 리뷔에의 전차병을 추가할 텐데, 그들의 수는 20,000명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해군과 육군을 둘 다 합하면 2,317,610명에 이른다. 이는 크세르크세스가 아시아에서 데려온 전투원들만 언급한 것이고, 종군한 하인들과 군량 수송선 선원은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에 에우로페에서 징용되어 온 군사들도 가산되어야 하는데, 그 수는 어림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트라케와 트라케 앞바다의 헬라스인들이 120척의 함선을 제공했으니, 이 함선들의 승선 인원은 24,000명이다. 트라케인들, 파이오니아인들, 에오르디아인들, 봇티아이아인들, 칼키디케인들, 브뤼고이족, 피에리아인들, 마케도니아인들, 페르라이비아인들, 에니에네스족, 돌로피아인들, 마그네시아인들, 아카이아인들, 그리고 트라케의 해안 지대에 사는 자들이 제공한 보병들이 짐작컨대 300,000명에 이를 것이다. 이들을 아시아에서 온 자들에 보태면 전투원은 총 2,641,610명이 된다.

전투원의 규모가 이 정도라면, 종군한 하인들과 군량 수송용 소형 선박들의 선원들과 그 밖에 군대와 동행한 다른 선박들의 선원들도 전투원들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전투원들과 동수였던 것으로 잡더라도 그 수는 전투원들과 마찬가지로 수백 수십 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다레이오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세피아스 곶과 테르모퓔라이까지 인솔해 온 인원수는 5,283,220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729∼730쪽)


이상이 크세르크세스 원정대 전체의 '남자들' 숫자고, 여자 요리사, 첩, 내시의 수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헤로도토스는 말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 어마어마한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에 다가서는 도중에 페르시아로서는 첫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어이없는 큰 손실을 입었는데, 페르시아 함대의 규모가 너무나 컸던 탓에 안전하게 정박할 항구조차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

그들의 함대가 '카스타나이아 시와 세피아스 곶 사이의 마그네시아 해안'에 도착했을 때, 구름 한 점 없던 날씨가 갑자가 돌변하더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바다가 들끓기 시작하여 페르시아의 함대들이 도저히 손쓸 겨를도 없이 세피아스 곶과 카스타나이아 해안에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이때의 조난으로 최소 400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명 피해가 나고 막대한 재산이 없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크세르크세스와 육군은 멜리스에 도착했고, 뒤이어 테르모퓔라이 협곡에서 진을 치고 있던 헬라스인들과 충돌했다. 헤로도토스는 그 유명한 전투에 참가한 '300명 전원의 이름'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던 만큼 그 전투에 얽힌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20쪽 가까이 자세히 밝혀 놓았지만 나로서는 앞에서 미리 꺼내놓은 이야기도 적지 않은 만큼, 레오니다스가 일부 동맹군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전사한 이들을 위해' 직접 세운 기념비에 새겨진 명문 하나만 더 소개하고 다음 전투 장면으로 넘어가고 싶다.
 

이곳에서 전에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4,000명이
3백만의 적군과 맞섰노라.

(751쪽)


테르모퓔라이에서 헬라스인들이 그렇게 싸우는 동안, 페르시아군에 맞서 아르테미시온에 포진한 그리스군의 함선은 스파르테인 에우뤼비아데스가 최고 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 수는 총 271척이었다. 두 진영의 해군은 처음에 아르테미시온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페르시아인들은 200척의 함선을 따로 파견하여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본 함대는 정면공격을 함으로써 그리스군을 함정에 빠뜨릴 참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우보이아 섬을 우회하도록 파견된 페르시아 함선들은 적들 몰래 움직이려다 난바다에서 밤을 맞게 되었고, 항해하던 중 폭풍과 폭우를 만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밀려 다니다가 대부분 바위들에 좌초했기 때문이었다. 

첫 교전 이후 3일째 되던 날에도 해전이 벌어졌는데 그리스 함대는 에우리포스 해협을 지키려 애썼고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을 섬멸하려고 선제공격에 나섰는데, 함선과 인명 피해는 페르시아 측이 훨씬 더 컸으나 그리스도 많은 함선들이 파괴되는 등 피해가 컸다. 그리스군 진영에서 좀 더 헬라스 안쪽으로 후퇴하는 방안을 고민하던 사이에, 테르모퓔라이에 있던 정찰병이 도착하여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대가 당한 일을 알려주었고, 이 소식을 듣자 그리스 함대들은 서둘러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때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인들의 함대와 싸운 전투는 전쟁 전체의 결과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헬라스인들은 이 전투에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고 플루타르코스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싸워봄으로써 그들은 육박전을 벌이며 용감하게 싸울 줄 아는 전사들에게는 수많은 함선도, 찬란한 선수(船首) 장식도, 요란한 호언장담도, 야만적인 전투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핀다로스는 아르테미시온 해전에 관해 다음의 시를 지었을 때,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아테나이인들의 아들들은 자유의 찬란한 초석을 놓았도다.

승리는 역시 용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테미스토클레스 전> 中에서


크세르크세스와 육군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전사한 약 2만 명의 전사들을 구덩이에 파고 묻은 뒤 포키스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의 여러 지역을 지나가며 닥치는 대로 태우고 베었고, 도시와 신전들에 불을 지르며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델포이의 성역을 향했는데, 그곳에 봉헌된 보물들을 약탈하여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바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델포이의 전 주민이 도시를 떠나고 60명의 남자와 신탁 사제 한 명만 남아 신전을 지키고 있을 때 놀라운 이변이 일어났다고 헤로도토스는 전하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나 프로나이아의 신전으로 서둘러 다가왔을 때 이미 일어난 것보다 더 놀라운 이변이 일어났다. 무기들이 저절로 신전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도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지금까지 일어난 놀라운 일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나 프로나이아의 신전에 접근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파르낫소스 산에서 바위 봉우리 두 개가 떨어져 나와 굉음을 내며 그들에게 돌진해 그들을 상당수 죽이는가 하면, 프로나이아의 신전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쟁의 함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778쪽)


헤로도토스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으나 그가 일부러 지어낸 얘기 같지는 않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곤혹스럽다. 그의 말을 마저 들어보면 '파르낫소스 산에서 굴러떨어진 바윗덩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아테나 프로나이아의 성역에 보존되어 있는데, 페르시아인들 사이를 휩쓸며 그곳으로 굴러 내려왔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의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을 떠난 뒤 살라미스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아테나이 본토에 있는 아이들과 부녀자들과 노인들을 피난시킬 필요도 있었고, 상황이 뒤바뀐 만큼 새로운 작전 계획을 세울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초의 예상대로였다면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총동원되어 보이오티아에서 페르시아인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그 대신 펠로폰네소스인들은 이스트모스를 가로질러 방벽을 쌓고 있으며 그들은 펠로폰네소스만 지키려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무렵 테미스토클레스는 여러가지 꾀를 내어 아테나이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포기하고 피난을 떠나도록 설득했는데, 그가 앞서 얘기했던 그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을 다시 들먹이며, 그 신탁에서 말하는 '나무 성벽'이란 자신들의 함대를 두고 하는 말이며, 아폴론 신이 이 신탁에서 살라미스를 '무섭다'거나 '잔인하다'고 하지 않고 '신성하다'고 한 것은 이 섬이 언젠가는 헬라스인들에게 큰 행운을 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단 자신의 의견이 우세해지자 그는 '장정들은 삼단노선에 오르게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이 통과되자 아테나이인들은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도시 전체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니, 참으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용감한 행위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부모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눈물과 포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라미스 섬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노인들이 여행하기에는 너무 늙어서 뒤에 남고,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들이 배에 오르는 주인 옆을 뛰어다니며 애타게 짖어대는 광경도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테미스토클레스 전> 中에서



헬라스인들의 함대가 살라미스에 도착하자 나머지 도시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속속 살라미스에 함대를 보내 그곳에 집결했다. 그리하여 살라미스에는 아르테미시온 해전 때보다 더 많은 도시들에서 파견된 훨씬 더 많은 함선들이 집결했는데, '함선의 수는 오십노선들을 제외하고 모두 378척'이었다.

 

<그리스의 주력 함대였던 삼단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앞서 말한 도시들에서 파견된 장군들이 살라미스에 모이자 일단 회의를 열었다. 에우뤼비아데스는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헬라스인들이 장악한 지역 중 어느 곳이 해전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지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라고 제안했다. 앗티케는 이미 포기한 상태라 제외되었다. 발언자 대부분은 이스트모스로 항해해 가서 펠로폰네소스 앞에서 해전을 벌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의 논지는, 그들이 살라미스에 머물다가 패하면 섬에서 포위 공격당해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지게 될 것이나, 이스트모스 근처에는 자신들의 해안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783쪽)


회의가 열리는 중에도 새로운 소식들이 속속 들어왔는데, 페르시아군이 이미 앗티케 전역에 불을 지르고 있고, 크세르크세스와 그의 군대는 여러 도시를 불지르고 나서 아테나이에 도착하여 닥치는 대로 유린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이 도성을 점령했을 때 도시는 비어 있었고 소수의 아테나이인들만이 신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어렵사리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진입로를 발견함으로써 이들을 모두 도륙한 뒤 신전을 약탈하고 아크로폴리스 전체에 불을 질렀다.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살라미스에 있던 헬라스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몇몇 장군은 작전 계획에 관한 최종 결정을 기다리지도 않고 함선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신속히 철수하려고 돛을 올렸다. 한편 남아 있던 장군들은 이스트모스 앞에서 해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밤이 되자 그들은 회의를 파하고 각자 자기 함선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786쪽)


일이 그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아마도 그리스 군대는 지리멸렬하고 말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아찔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드디어 영웅이 등장하고 놀라운 묘책이 나오게 되는데, 페르시아군 앞에서 꽁무니를 내뺄 궁리만 하던 그리스 해군을 그곳에 붙잡아 두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테미스토클레스'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살라미스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은 정작 그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회의를 파하고 자기 함선으로 돌아오자 므네시필로스라는 아테나이인이 '장군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냐'고 그에게 물었는데, 함대를 이스트모스 쪽으로 이끌고 가 펠로폰네소스 앞에서 해전을 벌이기로 결정되었다고 테미스토클레스가 말하자, 므네시필로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안 됩니다. 함대가 일단 살라미스를 떠나게 되면, 장군님께서 해전을 벌여 지켜야 할 조국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제각기 제 고향으로 흩어질 것이며, 에우뤼비아데스도 그 밖에 어느 누구도 함대가 분산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작전 때문에 헬라스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장군님께서 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면, 어떻게든 에우뤼비아데스가 마음을 바꿔 이곳에 머물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787쪽)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제안에 마음이 크게 움직여 곧바로 에우뤼비아데스의 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사령관과 면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므네시필로스가 한 말을 마치 자기 의견인 양 되풀이하며 거기에 살을 붙였고, 에우뤼비아데스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여 장군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거기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사태가 다급한 만큼'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고, 그리스 연합군이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할 이유들을 조목조목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군 함대의 일부라도 이탈한다면 아테나이 함대들도 '이탈리아의 시리스로 도망갈 것'이라는 협박까지도 곁들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이 말을 듣고 에우뤼비아데스는 결국 생각을 바꿨다. 만약 그가 함대를 이스트모스로 이동시키면 아테나이인들이 그들 곁을 떠나지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고, 아테나이인들이 떠난다면 나머지 헬라스인들만으로는 도저히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기 대문이었다. 여러 논쟁 끝에 살라미스에서 싸우기로 결정되자 그들은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크세르크세스의 함대가 에우리포스 해협을 경유하여 팔레론에 입항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여러 부족의 왕들과 함장들을 한데 모아놓고 마르도니오스를 보내 '자기가 해전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차례차례 묻게 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싸우라고 말했으나, 아르테미시아는 유독 의견이 달랐다.
 

"마르도니오스여, 에우보이아 앞바다의 해전에서 결코 비겁하지도 않았고 전공(戰功)이 가장 미약하지도 않았던 내가 이런 진언을 하더라고 전하께 전해주시오. '전하, 전하께 가장 이롭다고 생각되는 바를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이 제 의무이옵니다. 하여 드리는 말씀이온데, 함선을 아끼시고 해전을 피하소서. 바다에서는 마치 남자가 여자보다 더 강한 것만큼이나 이곳 백성들이 전하의 백성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전하께서 굳이 해전을 하셔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나이까? 이번 원정의 목표였던 아테나이는 전하의 수중에 있으며, 나머지 헬라스도 전하의 것이 아니옵니까? 전하의 길을 가로막을 자는 이제 아무도 없나이다. ······

하오나 전하께서 당장 해전을 벌이려 하신다면 함대의 패배가 육군의 파멸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렵나이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이 점을 명심하소서. 좋은 주인의 종은 나쁘고, 나쁜 주인의 종은 대개 좋은 법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주인이시지만, 전하의 동맹군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나쁜 자들이옵니다. 이들 아이귑토스인들, 퀴프로스인들, 킬리키아인들, 팜퓔리아인들은 아무 짝에도 못 쓸 자들이옵니다."
(793∼794쪽)


크세르크세스는 이런 훌륭한 조언을 듣자 아르테미시아의 의견이 마음에 들어, '전에도 그녀를 현명하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녀를 더욱 존중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전쟁을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에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러는 동안 페르시아 육군은 펠로폰네소스로 진격했고, 펠로폰네소스인들은 전사한 레오니다스의 동생인 클레옴브로토스가 총사령관이 되어 이스트모스를 가로지르는 방벽을 쌓는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다. 그들은 살라미스의 함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이다.

살라미스의 펠로폰네소스인들 또한 방벽 공사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자 가족들이 남아 있는 후방이 염려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회의가 소집되어도 수많은 이견들이 노출되었는데, 그곳에 머물러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진 아테나이를 위해 싸우느니 차라리 펠로폰네소스로 물러나서 거기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테미스토클레스는 몰래 회의장을 빠져나와 페르시아안들의 군영으로 자신의 하인이었던 시킨노스를 밀사로 보냈다.
 

시킨노스는 그때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가 페르시아 장군들에게 말했다. "저는 아테나인들의 장군께서 다른 헬라스인들 몰래 보내신 밀사입니다. 그분께서는 저더러, 헬라스인들은 겁에 질려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으니, 그들이 도망치도록 수수방관하지만 않는다면 그대들이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그대들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분열되어 있어 그대들에게 대항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797쪽)


페르시아인들은 이 전언이 사실인 줄 알고 '살라미스와 본토 사이에 있는 작은 섬 프쉿탈레이아'에 다수의 페르시아인들을 상륙시켰고, 한밤중이 되자 헬라스인들을 포위하기 위해 함대의 서쪽 날개를 살라미스로 진출시키는 한면, 케오스와 퀴노수라 가까이 포진하고 있던 함선들도 전진하여 무니키아에 이르기까지 해협 전체를 봉쇄하게 했다. 그들은 헬라스인들이 도주하는 것을 막고, 적군을 도륙하기 위해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이런 준비들을 했던 것이다.



『전쟁의 역사』135쪽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무수한 신탁들을 들려주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사의 일들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나는 신탁의 진실성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신탁의 말씀이 명명백백한데 내가 어찌 불신하고 싶겠는가! 다음의 시행들을 생각해보시라"고 말하며 다음의 신탁을 들려주는데, 그는 "이 말의 진실성을 나는 감히 부인하고 싶지 않거니와 남이 부인하는 것도 용납하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들이 자랑스러운 아테나이를 함락하고 나서 광기 어린
희망에 들떠 황금 칼을 차신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해안과
바다로 둘러싸인 퀴노수라 섬을 선교(船橋)로 연결한다면,
고귀하신 정의의 여신께서 교만의 아들을, 무엇이든
할수 있다고 믿고 광란하는 강력한 포만(飽滿)을 제압하시리라.
(798쪽)


살라미스의 그리스 함대가 밤 사이에 페르시아 함대에 포위된 줄도 모르고 여전히 격론을 벌이고 있을 무렵에, 민중에 의해 도편추방되었던 훌륭한 인물 아리스테이데스가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살라미스로 찾아왔는데, '헬라스 함대가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걸 자신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그에 대비하라'고 조언해 주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주하고 바라던 대로 일이 진척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테이데스더러 직접 그 상황을 회의장에 들어가 전하도록 했다. 

헬라스의 장군들은 대부분 그의 보고를 의심하였지만 나중에 탈주해온 테노스인들의 '진상 보고'까지 듣고 나자 꼼짝없이 살라미스에서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비로소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날이 새자 전 해군이 소집되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때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는 시종일관 인간 본성과 기질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대비시키며 그들에게 좋은 면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나서 승선하라는 명령으로 연설을 끝냈다. ······ 그러자 헬라스인들의 전 함선이 발진했고, 그러자 페르시아인들이 즉시 그들을 공격했다. (801쪽)


그렇게 시작된 살라미스에서의 해전은 널리 알려진 대로 페르시아의 참패로 끝났는데, 헬라스인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유지하며 해전을 벌였지만, 페르시아인들은 무엇보다도 교만에 가득찬 상태에서 자신들의 함대 숫자만 믿고 대열이 무너진 채 어느새 작전 계획도 없이 싸웠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해협이 좁아 페르시아 함선들은 모두가 한꺼번에 공격하지 못하고 서로가 방해가 된 까닭에, 나머지 헬라스인들은 대등한 싸움을 벌이며 저녁이 될 때까지 저항하던 적군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모니데스의 말처럼, 헬라스인들이든 비헬라스인들이든 해전 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더없이 찬란한 업적이라고 할 저 멋지고 유명한 승리를 쟁취했으니, 이는 해전에 참가한 전사들의 용기와 하나로 뭉친 열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현명한 판단 덕분이기도 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테미스토클레스 전> 中에서


이 해전에서 페르시아인들이나 헬라스인들 개개인이 어떻게 싸웠는지 확실히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쟁은 그만큼 혼전의 연속이었고 수많은 전사들이 제각기 자신의 조국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가 결국 거기에서 죽고 또 더러는 살아남아 돌아왔을 것이다. 정작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었던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맞은편 이른바 아이갈레오스 언덕의 기슭에 앉아' 편안하게 관전했지만 말이다. 헤로도토스가 해전의 결과를 두루 요약한 여러 대목 가운데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해전에서 헬라스인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날린 것은 아이기나인들이었고, 그 다음이 아테나이인들이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 가장 이름을 날린 것은 아이기나의 폴뤼크리토스와, 아나퀴로스 구역의 에우메네스와 팔레네 구역의 아메이니아스라는 아테나이인들이었는데, 아메이니아스는 아르테미시아를 추격했던 자다. 아메이니아스는 그 배에 아르테미시아가 타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녀를 사로잡든지, 아니면 자신이 사로잡힐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아테나이의 함장들에게는 그녀를 생포하라는 특명이 내려졌고, 그 밖에 그녀를 생포하는 자는 10,000드라크메의 상금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나이인들은 한갓 여인이 자신들의 도시를 공격하는 것에 분개했던 것이다.(806∼807쪽)


해전이 끝난 뒤 자신의 실패에 여전히 분통을 터트리고 있던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로 건너갈 둑길을 만들게 했다. 해협을 막은 다음 살라미스로 육군을 이끌고 가 헬라스인들을 모조리 도륙할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사실 그는 헬라스인들이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거나 스스로 생각해내어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다리들을 해체하지 않을까 겁을 먹은 나머지 자신의 안위가 너무나 걱정되어 몰래 퇴각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적군에게도 아군에게도 자신의 의도가 노출되지 않도록 다시 전쟁 준비를 갖추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만은 크세르크세스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터라 거기에 속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자들'을 시켜 '아테나이를 점령했다는 첫 번째 소식'을 페르시아에 전한 이후에 뒤이어 충격적인 두 번째 소식을 다시 전하자 페르시아인들은 모두들 입고 있던 옷을 찢고 하염없이 울며불며 마르도니오스에게 책임을 돌리기 바빴다. 마르도니오스는 크세르크세스가 해전의 결과에 몹시 상심해 있는 것을 보고 '헬라스를 원정하도록 자신이 왕을 설득한 만큼 처벌받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번 기회에 헬라스를 정복하든지, 아니면 큰일을 위해 명예롭게 생을 마감하는 모험을 시도하는 쪽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크세르크세스에게 "전하께서 이곳에 머물지 않기로 결심하셨다면, 군대의 대부분을 이끌고 귀국하시되, 제게 30만 정병을 뽑게 해주신다면 헬라스를 노예로 만들어 전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크세르크세스는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보고' 결과를 알려주겠다면서 회의를 열었고, 도중에 아르테미시아도 회의에 소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녀를 불러들였다. 그가 마르도니오스의 제안을 그녀에게 들려주며 조언을 청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 어느 것이 상책인지 전하께 말씀드리기가 어렵사옵니다. 하오나 현재 상황에서는 전하께서는 철군하시고, 마르도니오스에게는 그가 자원해 그렇게 하겠다면 그가 원하는 병력과 함께 이곳에 남게 하시는 것이 상책인 것 같사옵니다. 그가 정복하고 싶어 하는 것을 실제로 정복하고, 그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전하, 그것은 전하의 업적이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전하의 종들이기 때문이옵니다. ······ 마르도니오스에게 불상사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헬라스인들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없앤 것은 전하의 종이므로, 승리한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는 아테나이를 불태우시겠다는 원정의 목적을 이미 달성하셨으니 귀국하셔도 될 것이옵니다.(812쪽)


크세르크세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르테미시아를 칭찬하고 나서 그녀로 하여금 '원정길에 동행한 자신의 서자 몇 명'을 데리고 에페소스로 돌아가게 했다. 이때 크세르크세스는 자기 아이들을 돌보도록 '헤르모티모스'라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페사다 출신 내시를 딸려 보냈다. 그런데 이 내시가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거세당한 일)에 대해 얼마나 무섭게 복수를 했는지는 한 번쯤 들어볼 만하다.

헤르모티모스가 내시가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그는 전쟁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가 억세게도 운이 나빠 '파니오니오스'라는 키오스인에게 팔렸는데, 그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시들이 온전한 남자들보다 값이 더 나가는 점'을 이용해서 '거세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그에게 걸려든 많은 노예들 가운데 한 명이 헤르모티모스였던 것이다. 그는 파니오니오스에게 거세당한 후 내시로 팔렸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내시들 중에 크세르크세스에게 가장 총애받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군을 아테나이로 출동시키기 위해 사르데이스에 머물고 있는 동안 헤르모티모스는 공무(公務)로 뮈시아 지방의 아타르네우스라는 지역에 갔다가 그곳에서 파니오니오스를 만났다. 헤르모티모스는 그를 알아보고는 정담(情談)을 길게 늘어놓으며 먼저 그의 덕분에 받게 된 여러 가지 혜택을 열거하더니 이어서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아타르네우스로 이사해 오면 그의 은혜에 빠짐없이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파니오니오스는 헤르모티모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자식들과 아내를 데려왔다. 헤르모티모스는 그와 그의 전 가족이 수중에 들어오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너만큼 불경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나 내 가족 가운데 한 명이 너나 네 가족 가운데 한 명에게 대체 무슨 몹쓸 짓을 했기에 네가 남자였던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냐? 그 당시 네가 한 짓을 신들께서 모르실 줄 알았더냐? 하지만 불경한 짓을 한 너를 정의와 법을 따르시는 신들께서 내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네게 복수하더라도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마라." 헤르모티모스는 이렇게 꾸짖고 나서 아이들을 방 안으로 데려오게 하더니 그에게 네 아들을 손수 거세하도록 강요하자,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헤르모티모스는 아들들을 강요하여 아버지를 거세하게 했다. 헤르모티모스는 파니오니오스에게 그렇게 복수했던 것이다. (813∼814쪽)


크세르크세스가 자기 아들들을 아르테미시아에게 맡긴 다음 마르도니오스를 불러 '원하는 만큼' 인원을 선발해 그곳에 남겨 놓고 난 후 크세르크세스와 측근들은 밤에 몰래 헬레스폰토스로 회항하기 시작했는데, 철군하는 왕이 건널 수 있도록 선교를 지키기 위해 각자 최대한 빨리 달렸다. 헬라스의 함대가 뒤늦게 안드로스 섬까지 추격했는데도 크세르크세스의 함대가 눈에 띄지 않자 테미스토클레스는 '곧장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가서 그곳에 놓여 있는 선교를 파괴하자'고 제의했다. 그때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자 도편추방되었다가 되돌아온 아리스테이데스는 그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야만인과 싸웠소.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많은 군세를 거느린 자를 헬라스에 가두고 두려움 때문에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그는 더 이상 황금 일산(日傘) 아래 편안히 앉아 전쟁을 구경만 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무슨 짓이든 감행하고, 위험 때문에 만사를 친히 감독하고, 이전의 잘못을 바루고 , 매사에 더 나은 조언에 귀를 귀울일 것이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 테미스토클레스여, 우리는 그곳에 이미 놓여 있는 다리를 끊을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그 옆에 다리 하나를 더 놓아야 할 것이오. 그자를 되도록 빨리 헬라스 땅에서 내쫓으려면 말이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테미스토클레스 전> 中에서


테미스토클레스도 이 말에 곧바로 동의했는데 그들 두 사람이 똑같이 현명했다는 것은 나중에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입증되었다. 왜냐하면 펠라스인들은 플라타이아이에서 마르도니오스가 지휘하던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일부와 싸웠을 뿐인데도 자칫 모든 것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마르도니오스는 '30만 정예군'을 선발하고 나서 텟살리아에서 겨울을 보낸 이듬해 전쟁을 재개했다. 마르도니오스가 마케도니아인을 아테나이로 보내 '강화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으나 아테나이인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결사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도록 우리를 설득하려 애쓰지 마시오. 우리는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마르도니오스에게 아테나이인들의 전언을 전하시오. 태양이 현재의 궤도를 유지하는 한 우리는 결코 크세르크세스와 강화조약을 맺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그가 무엄하게도 그 신전과 신상들을 불태워버린 신들과 영웅들의 도움을 믿고 나가서 그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킬 것이오."(836∼837쪽)


이런 회답을 전해듣자 마르도니오스는 곧장 군대를 이끌고 텟살리아를 출발하여 신속히 아테나이로 진격했다. 그는 크세르크세스에게 자신이 재차 아테나이를 함락했음을 알리겠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번에도 아테나이인들은 대부분 살라미스로 가 있거나 함선 위에 있어서 마르도니오스는 빈 도성을 손쉽게 함락했는데,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나이를 함락한 지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때 마르도니오스는 살라미스로 재차 사절을 보내 강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는데, 그때 의회 의원들 중 한 명인 뤼키데스가 마르도니오스의 제안을 '민회에 회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아테나이인들은 이 말에 격분하여 뤼키데스를 애워싸더니 돌로 쳐 죽였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아테나이 여인들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떼 지어 뤼키데스의 집으로 몰려가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돌로 쳐 죽였다.

앗티케에 머물며 아테나이인들이 강화조약을 맺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던 마르도니오스는 결국 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깨달은 데다가, 스파르테인들이 파우사니아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아테나이를 돕기 위해 스파르테에서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서둘러 아테나이를 불태우고, 성벽이건 집이건 신전이건 똑바로 서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허문 다음 철수했다. 그들은 전투를 벌이기 유리한 플라타이아이의 아소포스 강을 따라 포진했다. 라케다이몬인들도 이스트모스에 도착하자 그곳에 진을 쳤고 나머지 펠로폰네소스인들도 그 소문을 듣고 합류했다. 그들은 진격을 계속한 끝에 엘레시우스에 도착했고 거기서 살라미스에서 건너온 아테나이인들과 동행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이 아소포스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맞은편 키타이론 산기슭에 진을 쳤다. 페르시아 대군에 맞선 헬라스인들은 중무장보병들이 38,700명, 경무장보병들이 68,700명으로 도합 107,400명이었다.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정예 보병들과 맞선 그리스 육군의 총지휘관은 스파르테의 파르사니아스였는데, 그는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스파르테를 이끈 클레옴브로토스의 아들이었고, 클레옴브로토스는 레오니다스의 아우였다. 그 전투에서 격전 끝에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고 그를 에워싸고 있던 '불사 부대'로 불리던 1,000명의 최정예부대마저 궤멸하자 나머지들은 결국 등을 돌려 뿔뿔이 도주했는데, 숫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던 그들이 궤멸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페르시아 전쟁의 대미를 마무리짓는 역할은 파우사니아스에게 주어졌고, 그 전투의 더없이 영광스러운 승리 덕분에 파우사니아스는 결국 큰아버지였던 레오니다스 왕의 원수를 몇 배로 되갚을 수 있었던 셈이다.
 

침략군의 승패는 전적으로 페르시아인들에게 달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동맹군들은 페르시아인들이 달아나는 것만 보고 적군과 맞붙어보지도 않고 달아났기에 하는 말이다. ······ 헬라스인들은 승승장구하며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크세르크세스의 군사들을 도륙했다. ······

······ 일단 방벽이 무너지자 침략군은 대열을 재정비하기는커녕 항전할 생각도 않고 좁은 공간에 수만 명이 갇힌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헬라스인들이 마음껏 도륙할 수 있게 되자, 아르타바조스가 달아날 때 데려간 40,000명을 빼고 300,000명 중에서 3,000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881∼882쪽)


플라타이아이의 빛나는 승리 뒤에 람폰이라는 아이기나의 요인 가운데 한 명이 파우사니아스를 찾아와 실로 불경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했다. "마르도니오스와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퓔라이에서 전사하신 레오니다스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았나이다. 마르도니오스에게 똑같은 벌을 내리신다면 그대는 전 스파르테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헬라스인들에게 칭송받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런 제안을 하면 파우사니아스가 좋아할 줄 알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이기나 친구여, 그대의 호의와 배려는 고마우나 그대는 잘못 판단했소. 그대는 처음에 나와 내 조국과 내 업적을 치켜세웠다가, 나더러 시신을 모욕하라고 권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명성이 드높아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도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하하고 말았으니 말이오. 그런 짓은 헬라스인들이 아니라 야만인들에게나 어울리며, 야만인들이 그런 짓을 저질러도 우리는 불쾌하오. 그런 짓까지 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아이기나인들과 그런 짓을 좋아하는 자들의 칭찬은 포기하겠소. 도리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한다고 스파르테인들이 나를 칭찬해주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오. 그리고 일러두건대, 그대가 나더러 원수를 갚아드리라고 하는 레오니다스 님의 원수는 충분히 갚았소. 그분과 테르모퓔라이에서 전사한 모든 분들은 여기 누워 있는 무수한 목숨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오." (887∼888쪽)


크세르크세스는 헬라스에서 도주할 때 자신의 집기들을 마르도니오스에게 남겼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는 마르도니오스의 빵 굽는 하인들과 요리사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마르도니오스에게 올리던 것과 똑같은 식사를 차리게 했다고 한다. 화려한 덮개로 덮은 금과 은으로 만든 긴 의자들과 금과 은으로 된 식탁들과 진수성찬을 보고 파우사니아스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장난 삼아 자신의 하인들에게 명하여 라코니케식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고 한다. 식사가 준비되자 파우사니아스는 두 가지 식사가 판이한 것을 보고 웃으며 헬라스 장군들을 불러오게 하더니 그들이 모이자 두 가지 식사를 가리키며 말했다고 한다.
 

"헬라스인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이리로 불러 모은 것은 페르시아 왕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대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오. 그는 이런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의 이런 빈약한 식사를 빼앗으러 왔으니 말이오." (889쪽)


페르시아인들은 플라타이아이에서 패하던 바로 그날 이오니아의 뮈칼레에서도 패했다. 그 전투에서 도망친 페르시아인들은 사르데이스로 돌아갔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패배를 현장에서 목격했던 다레이오스의 아들 마시스테스도 있었다. 그런데 사르데이스에는 해전에서 패하여 아테나이에서 도망쳐 온 페르시아 왕이 줄곧 체류하고 있었는데 결국 나중에 커다란 화근이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사르데이스에 체류하는 동안 역시 그곳에 와 있던 마시스테스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자기의 아들을 그녀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렇게 하면 그는 마시스테스의 아내를 더 쉽게 유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을 약혼시킨 다음 왕궁이 있던 수사로 돌아가서 며느리를 집 안으로 맞아들이자 그는 마시스테스의 아내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마시스테스의 딸을 사랑하기 시작해 그녀를 손에 넣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르타윈테였다.

그러나 그 일은 얼마 뒤 결국 탄로가 났는데, 왕비인 아메스트리스가 다채롭고 멋진 옷을 한 벌 손수 짜서 크세르크세스에게 선물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그 옷을 입고 아르타윈테를 찾아갔고, 그녀가 베푼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주겠다고 했을 때 아르타윈테는 겁도 없이 그 겉옷을 요구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선물로 받은 그 옷을 그녀에게 내주고 말았다.

아메스트리스는 아르타윈테가 그 옷을 입고 뽐내며 다니는 걸 보고 모든 걸 눈치챘으나,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어머니인 마시스테스의 아내 탓이자 소행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녀의 목숨을 노렸다. 그녀는 매년 한 번씩 개최되는 왕의 생일에 열리는 '튁타'라고 하는 연회가 열리기만 기다렸는데, 왕은 그 연회에서 어떤 요구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관습이 있었고, 아메스트리스는 그날 크세르크세스에게 마시스테스의 아내를 선물로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왕은 결국 마지못해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아우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시스테스야, 너는 다레이오스의 아들이자 내 아우일 뿐 아니라 신사야. 너는 지금의 아내와 헤어지도록 하라. 그 결혼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시스테스는 그 말을 듣고 제발 자신의 아내와 계속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아우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아메스트리스는 크세르크세스의 호위병들을 불러와 그들의 도움으로 마시스테스의 아내를 절단했다. 아메스트리스는 그녀의 두 젖가슴을 잘라내어 개 떼에게 던져주고, 그녀의 코와 두 귀와 두 입술과 혀를 잘라낸 다음 절단된 그녀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마시스테스는 아직 이 일에 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집으로 달려갔다. 아내가 망가진 것을 보자 그는 먼저 아들들과 의논한 다음 아들들과 몇몇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박트라로 출발했는데, 반기를 들도록 그곳 주민들을 선동해 왕에게 되도록 큰 피해를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제때에 박트리아인들과 사카이족에게 도착했더라면 아마도 그의 계획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좋아했고, 그는 박트리아의 태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가 그의 의도를 알고는 그가 그곳으로 가고 있을 때 군대를 보내 그와 그의 아들들과 추종자들을 죽이게 했다. 이것이 크세르크세스의 사랑과 마시스테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906∼907쪽)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는 도무지 끝이 없을 듯해도 결국 이쯤에서 끝난다. 사실 나는 헤로도토스의 <살라미스 해전>에 얽힌 이야기를 얼마만큼 짧게 압축해서 쓸 수 있을까에 대해 적잖이 고민해 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을 시도할 능력도 부족할 뿐 아니라 이런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줄이다 보면 결국 숱한 사람들이 '살라미스 해전'을 두고 쓴 다른 글들과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던 탓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이 글을 마무리짓자니 적잖이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꾀많은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해서도 제법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전 헬라스인들로부터 엄청난 영광을 누렸으나 '너무나 잘난 체하는 버릇 때문에' 결국 정적들로부터 도편추방을 당했는데, 그때부터 펼쳐진 제2의 인생이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그가 추방을 당한 후 온갖 난관과 누명과 모함을 신출귀몰한 솜씨로 극복하고, 끝내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후의 선택지로 자신을 철천지 원수로 여길 게 너무나도 뻔한 페르시아로 건너가는 모험은 실로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처세술과 말솜씨를 믿었던 게 틀림이 없었다. 페르시아 왕이 엄청난 현상금을 그의 목에 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으로 건너가 '차일을 치고 사방에 장막을 친 사륜거를 타고' 왕궁 앞까지 이동했다. 그의 수행원들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물어올 때마다 '자신들은 이오니아 출신의 헬라스 계집을 왕의 조신 가운데 한 명에게 데려가는 중'이라고 대답하게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뱀같이 교활한 이 헬라스 놈아, 대왕의 수호신께서 너를 이리로 데려온 것이로구나!"라고 소리치며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덤벼드는 페르시아의 조정 대신들을 간신히 지나쳐 왕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때는 이미 크세르크세스가 죽은 뒤여서 테미스토클레스가 만난 것은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였다고 한다. 그는 전매특허인 '기막힌 말솜씨와 꾀'를 통해 결국 페르시아에 눌러 앉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사냥 나갈 때나 실내에서 소일할 때도 함께 시간을 보냈고, 모후(母后)도 알현하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후의 페르시아 왕들은 자신들의 재위 기간 동안 페르시아와 헬라스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자, 헬라스인 조언자를 구할 때마다 각자에게 궁정에서 테미스토클레스보다 더 유력한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다고 한다. 테미스토클레스 자신도 이때 이미 거물이 되어 많은 사람이 그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한번은 잘 차려진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얘들아, 우리가 전에 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에 따르면, 빵과 포도주와 고기를 대주도록 그에게 세 개의 도시, 즉 마그네이아와 람프사코스와 뮈우스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퀴지코스 사람 네안테스와 파니아스는 두 개의 도시, 즉 페르코테와 팔라이스켑시스를 덧붙이며, 이 도시는 그에게 침구와 의복을 대주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 플루타르코스, 『플르타르코스 영웅전』<테미스토클레스 전> 中에서


내가 이 긴 글의 마지막에 덧붙일 이야기는 아이스퀼로스가 쓴 고대 그리스 비극 『페르시아인들』이다. 사실 그 작품이야말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믿기지 않는 참패 직후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기억될 만한 최고조의 멘붕'에 빠진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있었던 '비탄에 빠진 왕궁 풍경'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어서, 설사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전쟁에 패배한 느낌'이 얼마만큼 비통한 것인지를 실감케 하는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트로이아 여인들』과도 일견 닮았다.

『페르시아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이 끝나고 8년이 지난 뒤인 기원전 472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아이스퀼로스는 이 작품이 포함된 4부작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우승을 차지한다. 비록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의 왕궁을 무대로 그린 작품이지만 그리스인들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 그만큼 깊은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 코로스의 의상과 훈련 비용을 담당하는 후원자를 일컫는 '코레고스'는 25세의 페리클레스였던 점도 흥미롭다.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中에서


신화가 아닌 당대의 역사에서 비극의 소재를 구하는 일은 아이스퀼로스 이전에도 있었는데, 프뤼니코스는 기원전 476년에 살라미스의 패전이 페르시아 궁정에 불러일으킨 충격을 주제로 한 『포이니케 여인들』이란 작품을 써 우승을 차지한 바 있었고, 그 작품의 코레고스는 다름 아닌 테미스토클레스였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 나타난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자세한 전황 보고'를 들으면 일견 헤로도토스의 『역사』와도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들이 등장하는데, 그 부분은 아마도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책을 쓸 때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을 어느 정도 참고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작품 사이의 그런 '사실적 일치'보다 더욱 중요하면서도 명백한 공통점 하나는 결국 '페르시아의 파멸은 분수를 모르는 오만, 즉 히브리스(hybris)의 결과이며, 이러한 히브리스의 의미는 자연의 질서를 바꾸어 바다를 육지로 만들고 강력한 선교(船橋)의 사슬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제압하려던 크세르크세스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아이스퀼로스는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졌던 기원전 480년에 45세의 나이로 그 해전에 직접 참가하여 조국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고, 또 그보다 10년 전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감격적인 승리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가 직접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묘비명에는 '마라톤 전투 때 페르시아인들과 싸운 사실만' 언급되는데, 그가 시인으로 기억되기보다 '마라톤의 전사'로 기억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이 위대한 전쟁에 참가한 것을 그가 평생 동안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를 짐작케 한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작품과 시인 아이스퀼로스의 세계관은 앞서 얘기했던 '히브리스'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많은 공통점이 느껴진다. 그것은 주로 '그리스의 승리를 힘에 대한 정의의 승리로, 굴종에 대한 자유의 승리로, 교만에 대한 자제의 승리로 보았다는 점' 등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도 '승리에 대한 도취'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의의 실현을 체험한 한 인간의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신과 인간 사이의 깊은 연관성, 국가와 개인 사이의 의미심장한 연대, 신과 인간이 공생 공영하는 세계 내에서의 신의 의미' 등은 비단 두 작가의 작품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들의 여러 다양한 작품 속에 폭넓게 나타난 공통점이기 때문에 '그리스 정신의 위대한 유산'이라고까지 부를 만하다.

이미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정신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의 유명한 언급을 일찌감치 내세웠지만, 『전쟁의 역사』에서 발견한 영국 철학자의 얘기도 <살라미스 해전>에 더없이 어울린다 싶어 덧붙이며 긴 글을 마친다.

높이 둘러친 성벽, 그득한 병기고, 혈통 좋은 말, 전차, 코끼리, 대포와 포병 등 그 모든 것은 단지 사자의 탈을 쓴 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품종과 기질이 호전적이고 용맹스럽지 않다면.

 - 프랜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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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이스퀼로스가 쓴 고대 그리스 비극『페르시아인들』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목들을 모은 것이다.)
 

        코로스

신의 뜻에 따라 운명은 먼 옛날부터
권세를 휘두르며,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성벽을 허무는 지상전과, 싸움터로
말을 내닫는 일과, 도시들을
함락하는 일에 전념하게 했노라.


- 《페르시아인들》103∼107행 


 


        코로스

침상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에 젖고,
저마다 용감한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야 했던
페르시아의 부인들은 남편이 그리워

부드럽게 흐느끼며 독수공방하고 있구나.

- 《페르시아인들》134∼137행 


 
 

           아톳사  누가 그들의 목자(牧者)로서 군대를 지휘하지요?
        코로스장  그들은 누구의 노예라고도, 누구의 신하라고도 불리지 않사옵니다.
           아톳사  그렇다면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 그들은 어떻게 대항하죠?

        코로스장  다레이오스의 잘 훈련된 대군이 그들에게 패할 정도로요.

                           - 《페르시아인들》241-244행



 

 

              사자 

           코로스

쓰라리고 쓰라린 이 고통, 자꾸 도지는 파괴적인
이 고통. 페르시아인들이여,
이런 흉보를 들었으니 눈물을 흘려라!


            사자

그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되었사옵니다. 나 자신도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사옵니다.

 - 《페르시아인들》249-261행

오오, 전 아시아 땅의 도시들이여!
오오, 페르시아 나라여, 부의 큰 항구여!
어떻게 단 일격에 너의 막대한 부가 무너져 내리고,
페르시아의 꽃이 져서 사라졌단 말인가!
아아, 맨 먼저 불행을 알려야 하는 이 괴로움!
그래도 우리가 당한 일을 모두 털어놓지 않을 수 없구나.
페르시아인들이여, 우리 편 군대가 전멸했사옵니다.

 

 


 

 

            코로스 

             사자

활은 아무 쓸모가 없었사옵니다. 군대가
함선들의 충각에 제압되어 전멸했사옵니다.


          코로스

오오, 가련한 페르시아인들을 위해
비통한 곡소리를 울려라.
그들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아아 슬프도다, 군대는 전멸했구나.


             사자

오오, 살라미스, 내게는 가장 듣기 싫은 이름이여.
오오, 아테나이여, 너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는구나.


 - 《페르시아인들》274-285행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소중한 이들의 시신이 바닷물에 잠겨
소용돌이치며 페르시아의 겉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밀려 다닌단 말인가?
 

 


 

          사자

수만 따진다면 우리 함대가 틀림없이
이겼을 것이옵니다. 헬라스인들의 함선은
모두 합하여 열 척의 서른 배밖에 안 됐고,
그 외에 열 척의 별동대가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 휘하에는, 제가 알기로, 일천 척의
함선이 있었고, 그 밖에 쾌속선이 이백하고도
일곱 척이었사옵니다.
셈을 하자면 그러하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가 열세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 어떤 신이 불공평한 무게로 우리의 저울접시를
기울어지게 함으로써 우리 군대를 망가뜨린 것이옵니다.


- 《페르시아인들》337∼346행 


 

 

          사자

마마, 이 모든 재앙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복수의 정령이나 악령에 의해 시작된 것이옵니다.
아테나이인들의 군대에서 찾아온 한 헬라스인이
마마의 아드님 크세르크세스께 말했사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둠이 내리자마자
헬라스인들은 이곳에 머물지 않고
함선의 노 젓는 자리로 달려가서는 각자 은밀하게
뿔뿔이 달아나 제 목숨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 《페르시아인들》353∼360행 

 

 

          사자

그러나 낮이 백마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나타나
온 대지를 찬란히 빛나는 빛으로 채웠을 때,
맨 먼저 헬라스인들 쪽으로부터 노랫소리와도
같은 함성이 들려왔는데, 거기에 화답하여
섬의 바위들로부터도 메아리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왔사옵니다.
크게 실망한 우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사옵니다. 헬라스인들은 도주하려고
신성한 전투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싸움터로 돌진하며 불렀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요란한 나팔 소리가 그들의 전 대열을
활활 타오르게 했사옵니다. 즉시 노들이 요란하게 물에
잠기며 그들은 박자에 맞춰 깊은 바닷물을 쳤사옵니다.
그리고 금세 그들 모두가 눈에 환히 보였사옵니다.
먼저 우익이 질서정연하게 앞장서서 이끌었고,
그 뒤로 전 함대가 공격하러 다가왔는데,
그와 동시에 요란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사옵니다.
"오오, 헬라스인들의 아들들이여, 진격하라!
우리의 조국을 해방하라!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과,
조국의 신들의 처소들과, 조상들의 무덤을 해방하라!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페르시아 말로 요란하게
응수했사옵니다.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사옵니다.
곧장 전함들이 청동 부리들로 서로 들이받았사옵니다.


- 《페르시아인들》386∼408행 

 

 

 

          사자

원정에 참가했다가 살아남은 페르시아의 함선은
저마다 노를 저어 무질서하게 황급히 도망쳤사옵니다.
마치 다랑어나 그 밖에 다른 물고기를
잡을 때처럼 헬라스인들이 부러진 노와
난파선의 부서진 잔해로 줄곧 우리를 치고
찔러대니 온 바다에 신음 소리와 곡성이
가득했사옵니다. 밤의 어둠이 가려줄 때까지.
우리가 당한 재앙으로 말하자면 하도 많아
열흘 동안 이야기해도 못 다할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명심해두소서, 단 하루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은 없기 때문이옵니다.


- 《페르시아인들》422∼432행 

 

 

 

          사자

마지막에는 헬라스인들이 일제히 돌격하여
마구 치며 불쌍한 적군의 사지를 난도질했사옵니다.
모든 적군이 완전히 숨을 거둘 때까지.
재앙의 심연을 보시고 크세르크세스께서는
통탄하셨사옵니다.
전군을 볼 수 있게 바다 가까운
높은 언적에 옥좌를 갖다놓게 하셨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입고 계시던 옷을 찢고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시더니, 급히 보병부대에 명령을 내리시고는
황급히 도주하셨사옵니다.

- 《페르시아인들》462∼470행 

 


 

          아톳사

오오, 가증스런 악령이여. 어찌 페르시아인들을
그렇게 속인단 말인가. 이름난 아테나이를 치려다
내 아들이 쓰라린 복수를 당하는구나. 전에 마라톤이
죽인 페르시아인들로는 충분하지 않더란 말인가!
이들을 위해 내 아들은 배상을 요구하려다가
그토록 엄청난 화를 스스로 불러들였구나.

- 《페르시아인들》472∼477행 

 

 

 

          코로스

수많은 여인들이
슬픔을 함께하며
부드러운 손으로 면사포를 찢으니
흐르는 눈물이 가슴을 적시는구나.

갓 결혼한 신랑이 보고 싶어
부드럽게 흐느끼는 페르시아 여인들,
이불이 푹신한 침상과 잠자리를 잃고,
청춘의 환희와 환락을 잃고
괴로워 하염없이 울고 있구나.
나도 고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진심으로 만가를 부르노라.

이제는 전 아시아 땅이

텅 빈 채 탄식하는구나.
크세르크세스가 인솔해 가서, 아아,
크세르크세스가 도륙했고, 아아,
크세르크세스가 지각없이 모든 것을
함선들에 태워 보내 다 잃고 말았구나.

- 《페르시아인들》537∼553행 

 


 

          아톳사

그만큼 나는 재앙에 놀라 제정신이 아니오.
그래서 나는 아까처럼 성장도 하지 않고
마차도 없이,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이오.
내 아들의 아버지에게 사자(死者)들의 마음을
달랠 만한 헌주의 선물을 바치려고 말이오.
흠 없는 암소의 마시기 좋은 흰 우유와,
꽃에서 일하는 벌의 분비물인 반짝이는 꿀과,
정결한 샘에서 길어 온 정화수와, 들판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대로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이 오래된 포도덩굴의 영액 말이오.

- 《페르시아인들》606∼615행 

 


 

                         (다레이오스의 혼백이 무덤에서 일어선다.)
     다레이오스 

오오, 심복 중에 심복들이여, 내 죽마고우들이여,
페르시아의 노인들이여, 도시에 무슨 어려움이 닥쳤기에
온 도시가 비탄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고 있소?
나는 아내가 내 무덤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여 아내의 헌주를 자애롭게 받아들였소이다.
한데 그대들은 내 무덤 옆에 서서 비찬하고
사자를 깨우려고 큰 소리로 통곡하며
애처로이 나를 부르는구려. 하지만 이리로 올라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리고 지하의 신들은
놓아주기보다는 붙잡는 데 더 능한 편이라오.
하나 나는 저들 사이에서 힘이 있는지라 이렇게 왔소이다.
자, 서두시오. 내가 지체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무슨 새로운 재앙이 페르시아인들을 짓누르고 있지요?

- 《페르시아인들》681∼693행 

 


 

       다레이오스 

           아톳사

복을 타고난 당신은 모든 인간들 중에 월등히 행복하셨고,
햇빛을 보고 계시던 동안에는, 페르시아인들의 눈에
신이 누릴 복된 삶을 사셨으니 부러움을 사셨지요.
지금은 당신의 죽음이 부러워요. 고통의 심연을 보시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모든 것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페르시아인들의 나라가 완전히 망했어요.

 - 《페르시아인들》703∼714행

마음속의 오래된 경외심이 그대를 제지한다고 하니,
(아톳사에게) 내 침상의 연노한 동반자여, 고귀한 부인이여,
당신이 비탄과 울음을 그치고 내게 분명히 말하시오.
인간이면 누구나 고통 받기 마련이오, 인간이니까.
필멸의 인간들은 너무 오래 살다보면 바다로부터도,
육지로부터도 숱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지요.


 

          아톳사

담찬 크세르크세스는 못된 자들과 사귀다 그렇게 배우게
된 것이지요. 그자들의 말인즉, 당신은 창으로 큰 재산을
모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으나 그 애는 비겁하게도
집 안에서나 창을 휘두르며, 아버지의 유산을 전혀 늘리지
못했다는 거예요. 못된 자들의 입에서 그런 비난을 듣게 되자
그 애는 헬라스로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 《페르시아인들》753∼758행 

 


 

     다레이오스

플라타이아이 땅에서 도리에이스족의 창에 의해
그만큼 큰, 핏방울이 듣는 제물용 케이크가 마련될 것이오.
그리고 뼈 더미들은 죽게 마련인 인간들 눈에
다음 세 세대에 이르기까지 말없이 증언해줄 것이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제우스께서는 지나치게 오만불손한 마음의
응징자이시자 준엄하신 판관이시기 때문이오.

- 《페르시아인들》816∼828행 




                         (크세르크세스,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등장)
  크세르크세스

아아!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생각도 못할 가증스런 운명이
내게 주어지다니!
한 악령이 얼마나 잔인하게
페르시아인들의 종족을 짓밟았는가!

- 《페르시아인들》908∼912행 


 

    크세르크세스  우리는 얻어맞았소. 그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만큼.

           코로스  우리는 얻어맞았나이다. 그것은 확연하옵니다.

           아톳사  생소하고도 생소한, 고통스러운 고통이지요.

                           - 《페르시아인들》1008∼1010행

 

 

           코로스  아아, 슬프도다.
   크세르크세스  그것은 '슬프도다'보다 더한 것이었소.
           코로스  그럼 두 배 세 배로 슬프도다.
   크세르크세스  우리에겐 슬픔이지만 적군에게는 기쁨이었소.

                           - 《페르시아인들》1031∼1034행



    크세르크세스  이제 내 외침에 화답하여 그대도 외치시오.

           코로스  아이고 아이고!
   크세르크세스  온 도성이 울리도록 '아이고 아이고' 외치시오.
           코로스 
'아이고 아이고' 외쳐야지요. 그렇고말고요.
   크세르크세스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통곡하시오.
           코로스 
아아, 페르시아 땅을 밟기가 뭣하구나.
   크세르크세스  아아 아아, 삼단노선들과 함께
                           아아 아아, 그들은 전멸했구나.
           코로스 
이제 나는 음울한 곡소리로 전하를 호송하겠나이다.
                           (코로스와 크세르크세스 퇴장)

                           - 《페르시아인들》1067∼1077행(마지막행)

   크세르크세스  울면서 집으로 가시오.

           코로스  아이고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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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3-10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서는 베리 스트라우스의 책이 가장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과 전투에 관한 책은 스피디한 전개가 생명인데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너무 질질 끄는 듯한 느낌이...신탁이나 기타 부분이 다 들어가 있으니 말입니다. 살라미스 해전은 육군국 페르시아와 해군국 그리스의 전쟁이었고, 결국 수적으로는 열세이나 함선을 유기적으로 활용한 그리스가 승리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르지요. 세계의 역사를 바꾼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느니만큼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있지요.

oren 2014-03-10 23:22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베리 스트라우스의 『살라미스 해전』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읽어보니 평가가 매우 좋더군요. 그래도 저는 헤로도토스의 '신탁'을 곁들인 얘기가 여전히 재미있더군요.

saint 님의 말씀처럼 절대적 우세에 있었던 육군의 전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페르시아의 치명적인 실수로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살라미스 해전>에서 여러모로 불리한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성급하게 그리스 함대에게 덤벼든 실수도 크지만요.

그런데, 크세르크세스가 아르테미시아의 훌륭한 조언('전하, 함선을 아끼시고 해전을 피하소서. 바다에서는 이곳 백성들이 전하의 백성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전하께서 굳이 해전을 하셔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나이까?')을 받아들였다면 과연 그리스가 '바다에 둥둥 뜬 상태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었을까 싶은 아찔한 생각도 들긴 합니다.

saint236 2014-03-20 20:16   좋아요 0 | URL
아마도 크세르크세스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겠지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이길 수 있고,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그 자만심이 아마도 패인이지 않을까요? 다리우스가 그리스를 침략하게 된 것은 그가 캄비세스의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캄비세스의 이집트 점령에 비견할 수 있는 그리스 점령은 그에게 혈통이 아닌 실력이라는 정당성을 제공해 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oren 2014-03-24 16:08   좋아요 0 | URL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 속에 '교만'이 가득 차 있었던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반면, 그리스 연합군들은 도시와 신전들을 모두 포기하면서도 끝까지 결사항전으로 버티며, '자유 아니면 죽음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식으로 맞서 싸운 게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아이스퀼로스가 《페르시아인들》에서 '다레이오스'의 입을 빌어 노래한 대목은 <살라미스 해전>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익숙한 패턴이라고도 생각됩니다.
* * *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제우스께서는 지나치게 오만불손한 마음의
응징자이시자 준엄하신 판관이시기 때문이오.

페크pek0501 2014-03-16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진을 보니 책이 참 잘 생겼어요. ㅋ

"가장 용감한 자는 때로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 -『몽테뉴 수상록』
이 문장을 읽으니 에밀 시오랑의 말이 생각나네요. "지식이 적으면 즐겁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이 뒤집어 보면 말이 되는 것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죠.^^


oren 2014-03-19 23:12   좋아요 0 | URL
pek 님 오랜만에 찾아와 주셨군요. 사진에 담은 책이 가끔씩은 실물보다 더 멋지게 보일 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 저는 책의 겉모습뿐 아니라 결코 만만치 않은 '책의 두께'까지도 사진으로나마 얼마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답니다. 혹시라도 저런 사진을 보고 '책의 무게'까지도 어렴풋이 짐작하시는 분이 더러 계신다면 기대밖의 소득일 수도 있겠구요.
 
고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 대해 쓴 기록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 몽테뉴

 * * *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들과는 다른 운명을 타고 났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잉태할 때는 물론이고 태어나고 자라면서 온갖 믿기 어려운 전설들을 쏟아낸다. 전쟁터에서의 기적같은 활약들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그들이 최후에 이르러 자신들의 찬란했던 생을 마감하는 절정의 순간은 위대한 시인과 예술가들의 작품 소재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재료가 되기에 언제나 부족함이 없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에서도 독자의 감정을 가장 고양시키는 순간들은 대개 영웅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이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고대 그리스의 몇몇 영웅들의 죽음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슈테판 츠바이크가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말한 '역사의 피뢰침이 작동하는 순간들'에 해당하는-보다 훨씬 더 어두운 종말을 맞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영웅들의 운명과 영광은 다소 역설적이다. 그들이 엄청나게 운이 좋아 결정적 대전투를 아무리 멋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전쟁이 그치고 평온한 일상이 한참이나 지속된 이후에 고요히 맞게 되는 영웅들의 죽음엔 희미한 어둠만이 깃들 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로마의 영웅들은 대부분 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비록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토니우스의 죽음은 '본받지 말아야 할 영웅의 표본'답게 너무 찌질하다보니 그가 죽은 후 뒤따라 세상을 버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이 훨씬 더 극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그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포위되자 자살 직전에 "클레오파트라여, 나는 그대를 잃었다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가슴 아파하는 것은 명색이 원수인 내가 한낱 여자보다 용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오."라고 말한 직후 자신의 칼로 배를 찔렀지만 자신이 방금 했던 말마따나 결국 마지막까지 '용기 부족'을 드러낸 셈이 되고 말았다. 자신을 노린 최후의 일격이 치명적이지 못했던 탓에 그는 몹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다가 시종에게 이끌려 클레오파트라한테 옮겨진 끝에 그녀 앞에서 죽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겨왔듯이 나 또한 고대 영웅들의 죽음 가운데 가장 극적이었던 장면은 카이사르의 암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주된 이유도 결국 그의 죽음을 둘러싼 몇몇 흥미로운 이야기들 속에서 뭔가 새삼 느껴지는 바를 얘기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지만, 그 '유명한 장면'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미 너무나 익히 알려진 터여서 갑자기 불쑥 내놓기엔 어딘가 민망하다. 내 생각으로는 '카이사르의 죽음'이 그토록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보다 앞선 영웅들, 곧 아킬레우스와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그보다 훨씬 '덜' 극적이었다는 점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참에 그들의 얘기를 '카이사르의 죽음'에 앞서 얼마간 펼쳐 놓음으로써 이 글의 진부함을 얼마쯤 희석시켜보려는 헛된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다.

서양 문학의 최고봉에서 영원히 내려올 줄 모르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아닐까 싶다. 그 작품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이고, 그를 가장 닮고 싶어했던 영웅은 알렉산드로스다. 그의 영웅적 면모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그려지는데, 그가 무수한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즐겨 읽으며 '전쟁의 교범'으로 삼은 얘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2천 번의 여름' 이 지난 지금도 좀체로 그칠 줄 모른다.


하루는 다레이오스의 재물과 짐을 맡고 있던 자들이 그중에서 가장 값져 보이는 작은 상자 하나를 그에게 보내왔다. 그래서 그는 측근들에게 어떤 값진 물건을 그 안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의견이 분분하자 알렉산드로스는『일리아스』의 팔사본109을 그곳에 안전하게 보관하겠다고 말했다. 다수의 신뢰할 만한 역사가들이 이 일화가 사실임을 증언하고 있다. 알렉산드레이아110인들이 헤라클레이데스를 근거로 내세우며 주장하는 바가 사실이라면, 알렉산드로스에게 호메로스는 게으르거나 쓸모없는 원정길의 동반자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아이귑토스를 정복한 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크고 인구가 많은 헬라스의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건축가들의 조언에 따라 부지를 선정하여 측량하고 울타리를 치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점잖게 생긴 한 백발 노인이 다가서더니 다음의 시행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귑토스의 맞은편 큰 너울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섬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 섬을 파로스라고 부르지요.
111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금은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카노보스 하구 조금 북쪽에 있는 섬이었던 파로스113로 갔다. 그리고 그곳 지형의 빼어난 점을 보고-그곳은 바다와 커다란 석호(潟湖) 사이로 뻗어 있는, 널찍한 지협과도 비슷한 길고 가느다란 지대로, 끝 부분은 큰 포구를 이루고 있었다-그는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서도 찬탄받아 마땅하지만 더없이 현명한 건축가라고 말하며, 이 지형에 맞는 도시의 설계도를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282∼284쪽)

주석

109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열본을 말하는 것 같다.
110 알렉산드레이아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이름이다.
111 『오뒷세이아』4권 354∼355행
113 파로스는 나중에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팔각 등대가 세워졌던 곳이다.



어려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신 덕분에 철학을 깊이 공부했던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길에 나서며 여러 권의 책들을 챙겼음은 불문가지다. 그가 아시아 내륙으로 건너간 이후 다른 책들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하르팔로스에게 명해 책을 좀 보내오게 했는데 거기엔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도 포함되었다. 그만큼 학구열이 뜨거웠던 그가 전쟁 중에도 자주 마음 속으로 『일리아스』를 떠올리고, 또 그 작품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를 얼마나 여러 번 떠올렸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가 마케도니아를 떠나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자신의 우상이었던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방패가 번쩍였던 바로 거기, 트로이아 벌판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은 또 얼마나 감개무량한 것이었을까.


일단 일리온에 도착하자 그는 아테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영웅들에게 헌주했다. 그는 몸에 기름을 바르고 측근들과 함께 관습에 따라 알몸으로 경주를 한 다음 아킬레우스의 비석에 화환을 바치며 아킬레우스야말로 살아서는 성실한 친구66를 만나고,죽어서는 위대한 전령67을 만났으니 행복하다고 찬양했다. 그가 돌아다니며 시내를 구경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알렉산드로스68의 뤼라를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그 뤼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아킬레우스가 영웅들의 명성과 행적을 노래하던 뤼라69를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264쪽)

주석

66 파트로클로스를 말한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퓔라테스는 서양 문학에서 우정의 본보기다.
67 호메로스를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주인공이다.
68 여기서 알렉산드로스는 스파르테 왕비 헬레네를 납치해감으로써 트로이아 전쟁을 일으킨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의 별명이다.
69 아킬레우스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혼자 영웅들의 행적을 노래하던 일에 관해서는 『일리아스』9권 185∼191행 참조.

 


기원전 334년 봄에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로 건너갈 때만 하더라도 그의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그가 트로이아를 지나 잇소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집트로 건너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기원전 332년), 다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바빌론을 지나고 카스피해를 거쳐 인도의 탁실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때까지도 그의 나이는 서른을 넘어서지 못했다. 갠지스 강까지 건너려던 그가 결국 부하들의 만류에 발길을 되돌려 인더스 강을 따라 귀향길에 오르고, 파키스탄의 황무지를 통과하는 험난한 여정 끝에 마침내 바빌론에 안착했지만, 결국 그는 거기서 열병 때문에 고열에 시달리다가 갑작스레 죽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셋이었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에도 몇 가지 의혹이 없었던 건 아니나 다른 영웅들의 죽음에 비해서는 매우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그를 몹시도 닮고자 했던 대표적인 영웅이었던 로마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다. 그의 최후에 관한 그 유명한 얘기로 재빨리 넘어가기 전에, 나는 기원전 61년 봄으로 이야기의 무대를 슬쩍 옮길 필요를 느낀다. 그때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를 통치하라는 명을 받고 알프스를 넘어 인구도 얼마 안 되는 아주 초라한 야만족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한 번은 히스파니아에서 여가 시간에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읽다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측근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묻자,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는 내 나이에 이미 그토록 많은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이렇다 할 위업을 이룩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477쪽)



서른아홉 살에 알프스의 산자락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처지를 탄식했던 그는 결국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그의 조국이자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로 진군하는 결단을 내린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행위를 결코 '잘한 짓'으로 보지 않았다.


마침내 카이사르가 심사숙고하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운명에 내맡기는 양 일종의 격정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절망적인 모험을 감행하기 전에 흔히 내뱉곤 하던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강을 건넜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전속력으로 행군하여 날이 새기 전에 아리미눔으로 쳐들어가 점령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강을 건너기 전날 밤 해괴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가 친어머니와 근친상간하는 꿈을 꾸었기에 이르는 말이다.125 (506쪽)

주석

125 친어머니와 근친상간하는 꿈은 장차 나라를 얻을 것임을 뜻하는 꿈이라고 한다. 헤로도토스『역사』 6권 107장 참조. '친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플루타르코스는 arrhetosmixis('언어도단의 교합'이라는 뜻)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모국으로 쳐들어가는 행위를 일종의 폭행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매료되어 『수상록』을 썼던 몽테뉴는 확실히 플루타르코스의 견해에 동조한다. 몽테뉴는 자신의 책에서 옛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꺼내 놓는데, 그 가운데서도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비교한 대목'이 내겐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카이사르의 경우라면 그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로 보아야 한다."라고 추켜세우기도 하고, 역사를 만들고 이름을 남기려면 "한 제국이나 한 왕국을 정복하는 데에 대장이 되어 보았어야 한다. 카이사르 같이 늘 상대편보다 약한 군대를 가지고 52회의 지정된 전투에 승리를 거두었어야 한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결국 <가장 탁월한 인물에 대하여>라는 장(章)에서 몽테뉴는 호메로스와 알렉산드로스를 불러낼 뿐 끝내 카이사르는 곁다리로 제쳐 놓는다. 여기서 몽테뉴의 길고 긴 '알렉산드로스 우위론'을 적잖이 소개했다가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제때 만나기도 여려울테니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소개하고 다음 무대로 넘어 가겠다.


이 모든 것을 뭉쳐 생각해서

그의 학문과 능력의 탁월성, 그 순수하고 명쾌하고 오점과 시기심으로 더럽혀진 일이 없는 오랜 영광의 지속과 위대성,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그의 메달을 몸에 지닌 자에게는 행운이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경건한 신념으로 되었던 사실, 다른 역사가들이 어느 왕이나 왕공들의 공훈을 두고 쓴 것보다도 더 많이, 왕들과 왕공들 자신이 그의 공훈에 관해서 기술하였고, 다른 역사를 경멸하는 마호메트 교도들이 지금까지도 다만 그의 역사에는 특권을 주어 이것을 용인하고 숭앙하는 사실들을 고찰해 본 자이면, 그는 이 모든 것을 뭉쳐 생각해서 단 하나 내 선택에 의문을 품게 할 수 있었던 카이사르보다도 내가 역시 그를 택한 것이 옳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공훈에는 그 자신의 힘이 더 많았고, 알렉산드로스의 공훈에는 운의 힘이 더 많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몽테뉴는 어떤 판단에서건 어느 한쪽으로 명백히 기우는 일을 몹시도 어리석은 일로 여겼기 때문에 항상 그 반대의 이면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가 이 두 영웅을 두고 내리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자꾸만 토를 다는 이유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두 불덩이거나 또는 두 급류

그들이 여러 면에서 대등하였고, 카이사르가 어느 점에는 아마도 더 위대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여러 군데에서 황폐시켜 나간 두 불덩이거나 또는 두 급류였다.

소리내며 타는 마른 숲과 월계수 숲 속에
맹렬한 기세를 떨치며 번지는 화염과도 같고
신속히 고산 준령에서 떨어져 내려
물거품 던지는 급류가 소란스레 대해로 달려가며
모든 것을 파괴하여 그 통로를 터 나가듯. 
                     (베르길리우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야심엔 더 많은 절제가 있었다 하여도, 그것은 자기 나라의 궤멸과 세계의 전반적인 악화에 그의 낮고 추한 목적을 두었던 만큼, 너무 심한 불행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모든 점을 종합해 저울질해 보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편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다.



내 얘기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동안, 우리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고, 트로이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와 강과 황야를 지났고, 로마를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내가 다른 책에서 끌고 나온 인용문들까지도 헤쳐 나왔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마지막 '사다리'(그리스어로 klimax, 영어 'climax'의 어원)에 다다랐다. 나도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다. 원래 이 글은 '사다리' 부분만 쓸 작정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덜컥 내놓는 '뻔한 사다리' 하나를 어디에 걸친다 한들 도대체 누가 무슨 새로운 흥미가 생겨 그 사다리에 올라타 보겠는가 싶어 이렇게 멀고도 험난한 길을 내 스스로 꾸며본 것이다.
 

내가 만약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인『줄리어스 시저』를 미리 좀 읽었더라면 이 클라이맥스 부분을 훨씬 더 장황하게 장식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극에 나온다는 '브루투스의 명언'을 다른 책에서 몇 차례 접했으나 다행히 그게 전부였다. 몽테뉴가 유달리 좋아했던 브루투스를 위해서라도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나오는 그의 연설만은 여기에 다시 한번 인용하고 싶다. 내 이야기의 나머지는 고스란히 플루타르코스에게 맡긴다.

"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그를 죽였는지 이유를 요구한다면,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죽음으로써 모두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 카이사르가 살아서 모두가 그의 노예로 죽는 것을 원하십니까? 카이사르는 나를 사랑했기에, 나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행운을 타고났기에,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가 용감했기에,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기에,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눈물, 그의 행운에 대한 기쁨, 그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습니다." 

-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연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 마르쿠스 브루투스(기원전 85∼42년)


바로 그러한 자질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민중은 대부분 마르쿠스 브루투스 쪽으로 돌아섰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부계로는 왕정을 종식시킨 브루투스의 후손이고, 모계로는 또 다른 명문가인 세르빌리이가(家)의 후손으로 카토237의 사위이자 조카였다. 브루투스는 새로운 독재를 자진해 철폐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열망은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명예와 혜택 때문에 무너졌다.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유스가 도주한 뒤 카이사르는 그의 목숨은 물론이고 그가 탄원한 친구들의 목숨도 많이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특히 신임하고 있었다.

브루투스는 그해에 법정관들 중에서도 가장 요직에 있었고, 3년 뒤에는 같은 후보인 캇시우스에 앞서 집정관이 되게 되어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문제와 관련해 캇시우스의 후보의 변(辯)이 더 옳기는 하지만 자기로서는 브루투스를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음모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을 때 몇몇 사람이 브루투스가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으로 자기 몸을 만지며, 브루투스는 통치자가 될 만한 좋은 자질이 있지만 바로 그러한 자질 때문에 배은망덕한 악당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브루투스는 내 이 몸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오."라고 말했다.(543∼544쪽)


237 로마의 공화정을 사수하려던 스토아 철학자 소 카토를 말한다. 브루투스가 원로원을 중심으로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카이사를 암살하게 된 데에는 그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 왕정을 종식시킨 브루투스의 조상, ‘땅바닥에 입을 맞추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세바스티아노 리치, 1700~1704년

 

 


 -
브루투스의 외삼촌이자 장인인 카토(기원전 95∼46년).
   그는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한 후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자살했다.


어떤 죽음이 가장 훌륭한 죽음이냐는 문제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

어떤 예언자가 카이사르에게 로마인들이 이두스라고 부르는, 3월의 그날 큰 위험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그날이 다가와 카이사르가 원로원으로 가던 도중 그 예언자를 만나 인사하며 농담 삼아 "3월의 이두스가 다가왔구려." 라고 말하자, 예언자는 "네,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지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라고 나직이 대답했다.

이두스 전날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레피두스 집에서 열리는 만찬에 초대받아 갔다가 긴 의자에 반쯤 기대 누운 채 여느 때처럼 서찰들에 서명하고 있는데, 어떤 죽음이 가장 훌륭한 죽음이냐는 문제가 갑자기 화두가 되자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예기하지 않은 죽음이지."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집에 돌아온 카이사르는 여느 때처럼 아내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침실의 문과 창문들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그 소음과 쏟아지는 달빛에 놀라 잠을 깨어보니 아내 칼푸르니아가 깊은 잠에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신음 소리를 토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죽은 남편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는 꿈을 꾸었던 것으로 밝혀졌다.(545∼546쪽)




 -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 17세기 경



 - 붉은색 망토를 입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켈트족의 수장 베르킨게토릭스



저 유명한 살인극과 사투가 벌어진 장소를 보게 되면

······ 이런 일들은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원로원 회의가 개최되고 저 유명한 살인극과 사투가 벌어진 장소를 보게 되면 하늘의 어떤 힘이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그곳으로 카이사르를 인도하고 소환했음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폼페이유스의 입상이 있었고, 또 그곳은 폼페이유스가 자신의 극장에 딸린 장식 건물의 하나로 지어 봉헌했기 때문이다.
······

체격이 건장한 카이사르의 심복 안토니우스를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일부러 장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바깥에 붙들어두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안으로 들어갔고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편 브루투스의 측근들은 더러는 카이사르의 의자 뒤에 둘러섰고, 더러는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형을 위해 카이사르에게 탄원하는 것을 지원하려는 듯 덩달아 탄원하며 카이사르의 의자가 있는 데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리에 앉은 뒤에도 여전히 그들의 탄원을 거절했고, 그들이 더욱더 뻔뻔스럽게 졸라대자 그들 중 몇 명에게 역정을 냈다. 그러자 틸리우스가 카이사르의 토가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목덜미 부분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것이 공격 신호였다. 단검으로 맨 먼저 카이사르의 목덜미를 가격한 것은 카스카였다. 그러나 카스카는 이런 엄청난 거사를 시작하면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그의 가격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경미했다. 카이사르는 몸을 돌려 단검을 잡고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는데, 가격당한 자는 로마 말로 "카스카! 이 악당 놈아, 이게 무슨 짓이야?" 라고 소리쳤고, 가격한 자는 헬라스 말로 자신의 형에게 "형님, 도와주시오!" 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사건이 시작되자, 음모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당황하고 놀라 도주하지도 카이사르를 도우러 가지도 못했다. 아니, 그들은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모두 칼을 빼어들었고, 카이사르는 사방으로 에워싸인 채 어느 쪽으로 돌아서든 그의 얼굴과 눈을 겨냥한 단검과 마주칠 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야수처럼 이리저리 쫓기다가 결국 그들 모두의 손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제물 바치는 일에 참가하여 피맛을 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브루투스도 카이사르의 아랫배에 일격을 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항하며 그들의 가격을 피해 이리 저리 몸을 틀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으나 브루투스가 단검을 빼어든 것을 보자248 머리에 토가를 뒤집어쓰고는 우연이었는지 살해자들에게 그리로 밀려갔는지 폼페이유스의 입상이 서 있던 대좌에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좌가 카이사르의 피로 흠뻑 젖었으니, 수많은 상처를 입고 부들부들 떨며 자기 발 앞에서 쓰러져 있는 정적에 대한 이 복수극을 다름 아닌 폼페이유스 자신이 연출한 것처럼 보였다. 카이사르는 스물세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암살자들도 한 사람의 몸을 그토록 많이 가격하려다 서로 부상을 입혔다.(548∼550쪽)

 

248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내 아들아, 너마저?"(kai su, teknon?)라는 유명한 그리스 말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중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 82장에 기록되어 있다. "브루투스여, 너마저?"라는 말은 셰익스피의 사극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다.




 - 원로원에서 암살당하는 카이사르

 

카이사르가 거둔 결실은 허명과 동료 시민들의 시기를 산 영광뿐

카이사르는 56세에 죽었으니, 폼페이유스보다 4년 조금 넘게 산 셈이다. 카이사르는 평생 동안 그토록 큰 위험들을 무릅쓰며 권력과 통치권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간신히 목표를 달성했으나, 카이사르가 거기에서 거둔 결실은 허명(虛名)과 동료 시민들의 시기를 산 영광뿐이었다. 그러나 생전에 그를 도와주던 위대한 수호신은 사후에도 암살의 복수자로서 그를 따라다니며 모든 육지와 모든 바다에서 암살자들을 색출하여, 마침내 암살에 직접 가담했거나 음모에만 가담한 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처벌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 중에 가장 놀라운 일은 캇시우스에게 일어났다. 그는 필립포이에서 패한 뒤 카이사르를 찔렀던 바로 그 단검으로 자살했던 것이다. 초자연적인 사건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거대한 혜성이었는데, 그 혜성은 카이사르가 죽은 뒤 이레 밤을 밝게 빛나다가 사라졌다. 햇빛이 희미해진 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해 내내 해는 창백하고 흐릿했으며, 해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약하고 무기력했다. 해의 열기가 증기를 흡수하여 공기를 정화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자 대기는 침울하고 무겁게 대지를 짓눌렀다. 그러자 찬 공기 때문에 열매들이 시들어 익기도 전에 땅에 떨어졌다.(553∼554쪽)


 

"브루투스여, 나는 네 악령이다."

그러나 브루투스에게 나타난 환영이야말로 카이사르의 암살을 신들이 달갑잖게 여긴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브루투스는 아뷔도스에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군대를 에우로파 대륙으로 인솔하려던 참이었는데, 밤에 여느 때처럼 자신의 천막에 누워 잠은 자지 않고 미래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장군들 중에 가장 잠이 적어 가장 오래 깨어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천막 입구에서 무슨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아 그가 등불 쪽을 바라보는데, 등불이 천천히 꺼지면서 엄청나게 크고 험상궂게 생긴 사내의 무시무시한 환영이 보였다.

처음에 브루투스는 겁이 났으나 방문객이 행동도 않고 말도 않고 조용히 자기 침상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그가 누군지 물었다. 그러자 환영이 그에게 "브루투스여, 나는 네 악령이다. 내일 필립포이에서 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브루투스가 용기를 내어 "나는 너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지 방문객은 곧 사라졌다. 그 뒤 때가 되어 브루투스가 필립포이에서 안토니우스와 젊은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서 진을 쳤다. 첫 번째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자기 앞에 버티고 섰던 적군을 무찌르고 뿔뿔이 패주시킨 다음, 젊은 카이사르의 진영으로 쳐들어가 약탈했다.

그러나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에 같은 환영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브루투스는 자신의 운명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리고 무턱대고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투 중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그의 군대가 패주한 뒤 가파른 언적으로 물러나 칼을 빼어들고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 이때 칼이 그의 몸에 제대로 꽂히도록 친구 한 명이 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554∼555쪽)

 

 

 - 칼을 거꾸로 꼽아 놓고 그 위에 쓰러져 자살하는 브루투스



이제 클라이맥스도 모두 지났다.  결국 이 대목에 이르러 케인즈가 말했던 그 유명한 말인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를 내 글의 결론으로 삼아야 할까. 그건 너무 싱거운 결말이다. 내가 몇몇 영웅들의 죽음을 장황하게 언급한 건 결국 애초부터 '그들의 운명'이 '운명'에 의해 미리 틀림없이 정해져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플루타르코스의 일관된 서술 태도 때문이었다. 영웅들의 운명은 확실히 필부들의 삶과는 너무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하늘이 내린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사물에 대한 지식이 그토록 풍부했다는 플루타르코스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거기에 반박할 수 있단 말인가.

고대의 영웅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놀랍도록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 풀어낸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대한 몽테뉴의 판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하나만 더 소개하고 이 글을 맺고 싶다. '운명'에 관한 몽테뉴의 생각은 이 글의 적잖은 분량을 고려해서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숨겨서 덧붙였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찾은 '운'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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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고 아무것도 우리들을 강제하지 않는다면, 병이나 궁색, 경멸 같은 것에도 좋은 맛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이고 형체를 지어 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괴로운 편으로 자기를 연결시키며, 그런 것에 쓰고 나쁜 맛을 준다는 것은 괴상하게도 어리석은 수작이다.(58쪽)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 (76쪽)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

운은 어떤 때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을 정확히 노리고,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건설해 준 것을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을 보여준다. 라베리우스(기원전 2세기의 로마의 풍자극 작가) 말처럼 "정히 나는 살아야 할 일보다 쓸모없이 하루를 더 살았다"(마크로비우스)라고 소리치게 하는 것 같다. (87쪽)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

나는 의술뿐 아니라 더 확실성 있는 여러 기술도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고 본다. 시상이 떠올라 작가가 황홀한 무아경에 실려가며 시를 읊는 경우에는 왜 운을 탔다고 하지 못할까? 이러한 영감은 자기 능력과 힘에 넘치는 일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 밖에서 오는 힘인 것을 작가 자신도 인정한다. 웅변가들도 비상한 동작과 흥분에서 자기가 의도하던 것보다 넘치는 말을 할 때에 그것이 자기 능력이 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미술도 그와 같으며, 때로는 화가의 필법을 벗어나서 그의 구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작품이 나오면 화가 자신도 감탄과 경악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운은 이런 모든 작품들에 그가 차지하고 있는 몫을 작가의 의도뿐 아니라 지식 없이 이루어지는 그 작품의 우아성과 아름다움 속에 더 명백하게 보여 준다. 능력 있는 독자는 흔히 다른 사람의 문장 속에 작가 자신이 그런 점을 알아보며 거기 넣은 것과는 다른 완벽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더 풍부한 의미와 양상을 찾아 준다. 군사적인 작전으로 말하면, 운이 거기에 얼마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는 각자가 보는 일이다.

우리의 충고와 고찰에도 그 속에 운과 요행이 섞여 있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못되며, 예지는 예민하고 생동할수록 그 자체에 더욱 허약성을 발견하며, 그 자체를 경계하게 되기 때문이다. (141쪽)
 



 

운명에 패한 것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여기 그의 진실한 영광이 있다. 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고, 마음과 심령의 견고성이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나 무기의 가치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자기 용기에 고집하여 쓰러지며, '쓰러져도 무릎으로 서서 전투하는'(세네카) 자, 아무리 죽음의 위험이 임박해도 태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 자, 숨을 넘기면서도 경멸하는 확고한 눈초리로 적을 쏘아보는 자는 패하여도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명에 패한 것이다. 그는 살해당한 것이지 패한 것은 아니다. (234쪽)
 



 

성격과 운

"각자의 성격이 각자의 운을 만드는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291쪽)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결과는, 특히 전쟁에서는 대부분 운에 달려 있고, 그 운은 우리 생각이나 조심성에 따라서 도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다음 시도 그것을 말한다.

흔히 소홀한 조치가 성공하고, 조심하다가 실수한다.
운은 반드시 행운을 받을 가치 있는 자에게
승인과 원조를 주는 일 없이, 피차를 가리지 않고 돌아간다.
그것은 우리들 위에 군림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특별한 힘이 있어
모든 인생의 사물들을 그의 법 아래에 두기 때문이다.
      (마닐리우스)
                                         (308쪽)
 



 

운명의 화살이 쏟아져 와도

현자들은 사건들의 성질을 잘 저울질해 보고 고찰하고 나서 건강한 용기의 힘으로 그 위를 뛰어넘는다. 그들은 강력하고 견고한 심령을 가졌기 때문에 인생의 재앙들을 경멸하며, 발밑에 짓밟는다. 그들에게는 운명의 화살이 쏟아져 와도 도로 튀어서 끝만 뭉툭해지고, 그 신체에 아무런 자국도 남겨 주지 않는다. (333쪽)
 



 

우연의 힘

어느 옛 사람(세네카를 말함)은 우리는 우연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에게 미치는 우연의 힘이 크다는 것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357쪽)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사색과 교양은 기꺼이 신임하는 것이지만, 그것 외에도 경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훈련시키지 않으면, 이 사색과 교양이 우리를 행동하게 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령이 실제 행동에 들어선 때에,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싸움에 서투른 상태에서 경험 없이 세파에 뜻하지 않게 습격당할까 봐, 혹독한 운명에서 은신하여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의 앞에 나가서, 진짜로 어려운 시련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떤 자들은 자진하여 춥고 배고픔에 단련받기 위해서 부귀를 버렸고, 어떤 자들은 불행과 노고에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힘든 노동과 혹독한 고생을 찾아 행동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너무 유쾌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이 해이해질까봐 두려워하며, 시각이나 생식기관 같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끊어 버렸다. (391쪽)
 



 

세평보다 더 운에 매인 일이 어디 있는가?

세평보다 더 운에 매인 일이 어디 있는가? "진실로 운은 모든 사물들에 지배력을 갖는다. 실제보다도 그의 변덕에 따라서 어떤 자는 올려 주고 어떤 자는 끌어내린다."(살루스투스) 행동이 세상에 알려지고 남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다.

자기 변덕대로 우리들에게 영광을 붙여 주는 것은 운이 하는 것이다. 나는 영광이 진실한 가치에 앞서 나가며, 흔히 상당한 거리로 가치를 초과하는 것을 보았다. 영광이 그림자를 닮았다고 맨 먼저 생각해 본 자는, 자기 생각보다 더한 일을 하였다. 이런 것은 두드러지게 헛된 일들이다.

영광은 어느 때는 본체보다도 훨씬 앞서 나간다. 그리고 어느 때는 본체보다 길이로 많이 넘친다.
 (686쪽)
 



 

출세하려면 운이 와서 내 손목을 끌고 갔어야 할 일이다

야심으로 말하면 교만과 이웃 간이랄까, 그보다는 딸 뻘이긴 하지만, 출세하려면이 와서 내 손목을 끌고 갔어야 할 일이다. 불확실한 희망 때문에 수고하며 인생 행로의 첫머리에 남의 신용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겪어 내는 일 따위는 나 같으면 못해 냈을 일이다.
 (713쪽)
 



 

행운과 불운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원인과 결과를 파악해 보며, 자기 손으로 자기 사업의 진전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의 기도는 허황된 일이다. 특히 전략의 고찰에 있어서 허황되다. 우리들 사이에 가끔 보이는 군사상의 예보다도 더 용의주도한 신중성은 없었다. 그것은 이 대도박의 마지막 결판에 대비해서 중도에 패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인가?

더 나아가, 우리의 예지와 사고력 자체가 대부분은 우연에 매여 있다. 내 의지와 사유는 이때는 이렇게, 저때는 저렇게 움직이며, 그 중에도 많은 움직임은 나 없이도 되어 간다. 내 이성에는 매일 돌발적인 충동과 동요가 있다.

심령의 모양은 변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속은 이때는 이 생각,
한 가닥 회오리바람이 구름을 밀고 가면,
그때는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베르길리우스)
                                                        (10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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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6-04-23 01:09 
    플루타르코스에게 붙은 별명은 '최후의 그리스인'이다. 그는 아폴론 신전으로 유명한 델포이에서 가까운 카이로네이아에서 태어나서 스무 살부터 아테네의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배웠다. 나중에 이집트와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로마에도 두세 차례 방문해 강의도 하고 집정관 등 여러 명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리스는 이미 로마의 속주가 된 지 2백 년이나 지난 때였다. 찬란했던 그리스 문학도 이미 쇠퇴기
  2. 코리올라누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2-10 09:16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장래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지 않은 채 뭔가 다른 방법으로 장래의 지침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사리사욕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불명예스런 일을 설득하려 하며, 좋지 않은 일에 관해 교묘하게 잘 둘러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반대자나 청중을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중에서 * * *자신과 조국을 함께 동시에 저울에 올려 놓고
  3.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7-01 19:23 
    "브루투스, 너 마저?" 이 짧은 대사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도 드물다. 이 말은 삼척동자도 웬만큼 안다. 왜?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금세 '상황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도 "아무개, 너 마저?" 라고 외칠 만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맞닥뜨렸던가. 나도 언젠가부터 저 짧은 대사를 듣고 알게 되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내가 품었던 생각은 이랬다. '브루투스는 '참 나쁜
 
 
숲노래 2014-02-13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삶이라면
죽음도 아름다울 테고,
아름답지 못한 삶이라면
죽음도 아름답지 못하리라 느껴요.

남들이 평가하거나 말거나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헤아릴 줄 알면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모두 스스로 즐거우며 아름답게 짓겠지요.

그나저나, 이 많은 '영웅'들은
스스로 '영웅'이어서
삶이 즐거웠을까요?

oren 2014-02-13 10:32   좋아요 0 | URL
저마다 자신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소중한 삶을 남들 때문에 억지로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살 필요는 없겠지요. 군인이나 정치가로 살든, 시인이나 철학자나 소설가로 살든, 혹은 농부나 어부나 예술가로 살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가장 아름답겠지요.

'영웅'이라고 해서 철학자의 삶을 비웃고 조롱할 필요도 물론 없겠구요.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삶을 거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해서 '영웅들의 죽음'을 살펴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군요.

함께살기 님의 댓글을 읽으니 알렉산드로스가 만들어낸 '유명한 일화'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가 스물두 살때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그러니까 그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기로 표결하고 그를 총사령관으로 공표한 직후의 일이었죠.

* * *

많은 정치가와 철학자들이 찾아와 축하 인사를 하자, 마침 코린토스에 머무르던 시노페 출신의 디오게네스도 인사하러 오리라고 그는 내심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외인 크라네이온에서 계속 여가를 즐길 뿐 이 철학자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알렉산드로스는 몸소 그를 보러 갔다. 가서 보니 그는 햇볕을 쬐며 누워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자 디오게네스는 몸을 좀 일으켜 알렉산드로스를 응시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에게 인사하며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예, 햇볕이 가리지 않게 조금만 비켜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자신을 그렇게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의 도도함과 당당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떠나면서 디오게네스를 비웃고 조롱하던 자신의 부하들에게 "정말이지, 내가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겨울호랑이 2017-05-19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oren님 서재에서 자주 보게 되는 책이 몽테뉴 <수상록>이네요. 아직 읽지 않았는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저작인 것 같습니다.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죽음도 눈에 들어오지만, 특히 카토의 죽음이 인상적입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연상하게 됩니다. 인상적인 영웅의 죽음을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7-05-19 18:17   좋아요 1 | URL
카토의 딸이자 브루투스의 아내였던 ‘포르키아의 죽음‘도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물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그녀의 죽음이 상세하게 나오고, 플루타르코스로부터 엄청나게 영향을 받은 셰익스피어도 <줄리어스 시저>에서 ‘포르키아의 죽음‘을 자세히 다루고 있고요. 그녀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의 ‘여주인공‘ 이름도 포르키아로 지었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이어준 인물이 바로 몽테뉴였죠. 몽테뉴는 플루타르코스를 가장 좋아했고, 그의 『윤리론집』을 흉내내어 『수상록』을 썼으니까요. 그리고 몽테뉴의 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셰익스피어였는데(셰익스피어는 1603년에 ‘영역본‘ 『수상록』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여러 희곡에서 ‘몽테뉴가 주장한 내용들과 쏙 빼닮은 구절들‘을 구경하는 것도 몹시 흥미롭더군요. 몽테뉴 수상록은 너무나 재미있는 책이니 겨울호랑이 님께서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7-05-19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항상 좋은 책과 좋은 저자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 남은 하루 마무리 즐겁게 하세요.^^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장관들이 생겨났음을 밝힌 책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지구상의 생명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종은 영속하지도 않으며, 지적 창조자의 완벽한 작업도 아니다.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경쟁을 통해 생존해온, 단순히 자연의 맹목적인 힘에 의해 선택된 순간적인 모습이다. 500쪽에 이르는 그 책에서 비록 갈라파고스는 단 한 줌 잠깐 언급되지만, 먼 청춘 시절 한 번 방문했던 매혹적인 작은 섬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다윈은 그곳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만큼 그 섬들은 그의 모든 견해의 기원이고, 『종의 기원』의 근원이었다. (61쪽)

과학의 착한 요정이 전 세계를 날아다니다가 그녀의 요술지팡이로 건드리고 싶은 가장 멋진 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을 과학의 낙원이자 지리학과 생물학의 에덴동산, 진화생물학자들의 아르카디아(이상향)로 바꿔놓았다. 아마도 여러분은 요정의 의도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요정이 빛을 비춘 그곳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의의가 없을 것이다. 그곳은 서경 91도 남위 1도로 에콰도르 해안에서 서쪽으로 1,170킬로미터, 동태평양에 위치한 다윈의 '적도공화국', 바로 갈라파고스다. ······ 『갈라파고스』는 내가 다음에 이곳을 방문할 때 귀중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나는 탑승할 배의 서가에 기증하기 위해 이 책 한 권을 더 가져가려 한다. 만약 여러분이 갈라파고스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고 감상하기를 권한다. - 리처드 도킨스


 * * *

미리 밝혀둬야 할 일이 있는데, 나는 이 책을 몇 번 펼쳐보긴 했지만 주로 사진만 살펴봤을 뿐 '글'을 다 읽지는 못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글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

사진으로만 보더라도 충분히 매혹적인 섬인 갈라파고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 욕심이 없었더라면 화려한 컬러 사진이 잔뜩 담긴 커다란 판형(260*200mm)의 저 책을 덥석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책을 읽고 싶은 때가 언젠가는 있겠지 싶은 막연한 생각도 있었고, 찰스 다윈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지닌 섬인 만큼 언젠가 혹시 저 섬에 가 볼 기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헛된(?) 망상도 저 책을 사는데 얼마간 힘을 보탰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저 섬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정말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그림으로나 살펴 보고 책으로나 읽어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언젠가 그 섬에 가게 되리라는 꿈같은 얘기가 현실로 어렴풋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나는 그동안 찰스 다윈이 쓴 책을 세 권쯤 읽었다. 세상을 바꾼 책으로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종의 기원』은 두 번 읽었는데, 사실 너무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인 데다가 천재 과학자의 심오한 사상을 다룬 책이어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더구나 다윈이 그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멘델의 유전법칙'이나 오늘날 일반상식이 된 'DNA'의 존재 여부도 정확히 모르던 때여서 가끔씩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으로 '유전'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답답함조차 느껴진다.(이 부분은 <
진화하는 진화론 - 종의 기원 강의>라는 책이 좋은 대안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다윈이 살아 있고 6판(1872년)으로 끝난 《종의 기원》의 최신판을 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다윈의 차례를 그대로 따라가며 최신 내용으로 버전업한 훌륭한 책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찰스 다윈이 '생명의 진화'에 대한 장엄한 광경을 발견하는 과정과, 그가 과학자로서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진지한 탐구 노력이 가득 담겨 있는『종의 기원』은 다른 책에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놀라운 독서 체험이었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은 흔히 '적자생존'으로 너무 쉽게 비약하거나 너무 좁게 해석되기도 했고, 가끔씩 '약육강식'을 합리화하는 이론으로까지 오용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은 그런 차원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것이며 생명의 경이와 창조의 놀라운 매커니즘을 보여주는 장엄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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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천재들이 쓴 무수한 책들 가운데 이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이 또 있을까. 조용히 머리숙여 경배를 드리고 싶은 이 책의 저자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하는 일도 부끄러운 일 같다. 과학철학을 전공했던 찰스 길리스피의 멋진 글솜씨가 이 책의 가치에 훨씬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즉 생존 투쟁에 있어서 적자생존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Survival of the Fittest in the Struggle for Life』(1859) - 이것은 유명한 제목이다. 이를 읽는 사람은 숨죽이며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읽는 사람에게 이처럼 은연중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고전"이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이토록 겸허한 외관을 쓰고 세상에 나타난 기초 과학 이론이 또 있을까? 이 책의 표현은 대단히 평범한 것이어서 책을 펼쳐 읽으면 마치 자연에서의 자조(自助)에 관한 전도사의 설교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설교단이나 회계부서에서 들을 수 있는 이익과 손실에 관한 잠언이 모두 거기에 있다.


"어떤 생물체나 나쁜 것은 배척하고 좋은 것은 모두 보존하고 축적하며 기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진보를, 묵묵히 그리고 서서히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경쟁을 통한 진보이다. "그러나 성공은 흔히 수컷의 특수한 무기 또는 매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이점이 승리를 결정한다." 이것은 성공에 관한 말이다. "겉모습이 생물에 유익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연은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관해서이다. "부지런한 벌이 얼마나 시간을 절약하는지, 많은 사례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근검절약에 관해서이다.

"생존 투쟁에 관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신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소 위안도 된다. 즉 자연의 싸움은 그칠 새 없이 일어나지는 않으며, 공포가 느껴지지도 않으며, 죽음은 보통 신속하게 이루어지며, 원기 있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은 모두 살아남아 증식한다."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보상에 관한 말이다.

 - 찰스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 中에서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장관들이 생겨났음을 밝힌 책

☆ 세계의 결정적인 책 15권(스텐포드 대학원에서 선정)
☆ 세계를 개혁한 16권의 명저(로버트 B.다운즈)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사진에 담아본 두꺼운 책들 中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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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밝혀낸 심오한 생각들은 오늘날 수많은 생물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을 너무나 자주 좌절시킨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첨단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 등에 힘입어 현대의 과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롭고도 탁월한 이론을 전개해 볼 욕심으로 눈에 번쩍 뜨이는 주제를 찾아 막상 연구에 착수하려고 하더라도, 그런 시도들의 대부분은 오래 전에 찰스 다윈이 내놓은『종의 기원』이나『인간의 유래』등에 '이미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도무지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는 일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 도착한 날은 1835년 9월 15일이었다. 그가 비글호에 몸을 싣고 영국 남단에 위치한 데번포트 항구를 떠난 지 4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에 복받쳐 있던 26세의 다윈'은 그날 자신의 일기에 '끊임없이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어두운 하늘'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다윈이 그곳에서 보낸 일주일이 결국 갈라파고스를 '세상을 바꾼 섬'으로 바꿔놓은 셈이다. 그는 1836년 10월 2일에 영국 해안의 팰머스에 도착해서 비글호에서 내렸지만, 그가 갈라파고스에서 봤던 풍경들은 무려 24년 동안이나 '놀라운 생각과 연구를 거듭하는 밑거름' 역할을 계속 한 끝에 마침내『종의 기원』으로 결실을 맺었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추해 낼 수 있었던 게 자신의 눈 앞에서 툭~ 떨어지는 '한 알의 사과'였다면 다윈이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찾아낸 건 멀고도 먼 항해 끝에 다다른 '갈라파고스에서의 일주일'이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다음 사진들은 『갈라파고스』라는 책 속에 담긴 갈라파고스의 풍경들이다.


"'다윈의 아치'는 제도의 최북단 입구에 서 있다. 파도와 바람의 침식이 화산의 잔재를 조각한 작품이다."




"산티아고 섬의 한 쌍의 응회암은 원추형이고 그곳에서 화산재의 미립자가 함께 섞인다."




"구애 중인 한 쌍의 갈라파고스앨버트로스. 이 아름다운 새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개체가 갈라파고스 제도의 가장 오래된 지역인 남동쪽 에스파뇰라 섬에 등지를 튼다."




"산티아고 섬 근처의 솜브레로 치노처럼 작은 화산섬은 일찍이 여행자들이 발견하고 싶어했던 '파라다이스 섬'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입내새는 육지이구아나에게 붙은 진드기와 각질을 쪼아 먹는다."




"코끼리거북을 들어올리기 위해선 남자 6명이 필요하다."




"뜨거운 용암색의 육지이구아나가 이른 아침 태양의 온기를 찾아서, 그들이 밤에 머물던 페르난디나 섬 화산 근처의 동굴에서 나오고 있다."




"갈라파고스매가 북쪽 가장자리 위 유황색의 분기공으로부터 알세도 화산의 칼데라 쪽을 지켜보고 있다."




"바다이구아나는 이웃한 갈라파고스붉은게와 바위를 공유한다. 갈라파고스붉은게는 용암해안을 따라 형성된 바위 웅덩이와 도랑 안의 폭이 좁은 수면을 가로질러 뛰어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파란발부비의 매력적인 구애행동. 수컷은 외관상의 동공동요에 의해 암컷과 아주 쉽게 구분된다. 외관상으로 암컷의 큰 눈동자는 실제로 홍채 안의 어두운 고리 때문인데, 수컷은 암컷에 대비 적게 나타난다."

 



"벤자리류는 공격받기 쉬운 열린 해양보다 암초의 보호를 더 선호한다."




"겁이 없고 친밀감이 있는 야생동물은 끊임없이 증가하는 많은 수의 관광객들을 매료시킨다."




"바르톨로메 섬. 독특하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화산의 광경"


 


"멀리 떨어진 칼데라에서 안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분화구 호수. 섬들은 끊임없이 자연적인 유동을 보인다."



 


 - 서경 91도, 적도와 남위 1도 사이에 위치한 갈라파고스 섬.



작년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모래폭풍과 폭염을 견디며 일하던 친구 한 녀석이 올해 초에 훌쩍 에콰도르로 건너갔다. 바그다드에서 진행되던 공사는 시행사의 부도로 갑자기 중지되었고, 그 공사를 관리감독하던 그는 새로운 건설현장을 물색하던 끝에 에콰도르가 좋겠다고 여겨 그리로 날라간 것이다. 가족들이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으니 집과도 그리 멀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그 친구가 올해 초 인천공항에서 떠난지 무려 26시간이나 걸려 에콰도르에 도착해 근무하는 곳은 수도 '키토'였다. 그곳은 적도 지방이지만 해발 고도가 2,600미터쯤 되는 고산지대여서 몹시 쾌적하고 생활하기 좋다고 한다. 바그다드에 비해선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그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만 보더라도 남미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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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친구가 거기에 도착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날라간 곳은 정말 놀랍게도 '갈라파고스'였다. 그것도 경비행기를 타고 '업무차' 거길 들른다고 했다. 앞으로도 가끔씩 들르게 될 것 같다고도 하고. 거기엔 코이카(KOICA)에서 국제교류 협력차 무상으로 짓고 있는 태양광 발전소가 있단다. 아이고 맙소사! 남들은 그리 애타게 가보고 싶어하는 섬을 그 친구는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아니 돈을 벌면서까지 그리 쉽게 가보게 되다니... 그 친구가 직접 갈라파고스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몇 장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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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키토' 시내에서 직접 본 풍경이라며 '화산 폭발' 장면도 보내 왔다. 이번엔 고교 동창들끼리만 볼 수 있는 네이버 밴드를 통해서였는데 친구들의 댓글이 여럿 달렸다. '불 쬐러 가자 너무 춥다 ㅋㅋ'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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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녀석이 에콰도르에 머무는 동안 '남미 여행'을 꼭 가고 싶다. 남미를 한바퀴 쭈욱~ 돌고 오면 내가 '죽기 전에 가야 할 50곳' 가운데 미답지도 팍팍 줄어 들고 얼마나 좋을까. 기다려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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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BBC 에서 '죽기 전에 가야 할 50군데' 라는 방송에서 추천한 세계의 여행지.

1 The Grand Canyon - 미국
2 Great Barrier Reef - 호주
3 Florida (디즈니 월드) - 미국
4 South Island - 뉴질랜드
5 Cape Town - 남아프리카 공화국
6 Golden Temple - 인도
7 Las Vegas - 미국
8 Sydney - 호주
9 New York - 미국
10 Taj Mahal - 인도
11 Canadian Rockies - 카나다
12 Uluru - 호주
13 Chichen Itza - 멕시코
14 Machu Picchu - 페루
15 Niagara Falls - 미국, 캐나다 어느쪽이었지?
16 Petra - 요르단
17 The Pyramids - 이집트
18 Venice - 이탈리아
19 Maldives - 몰디브 공화국
20 Great Wall of China - 중국
21 Victoria Falls - 짐바브웨
22 Hong Kong - 중국
23 Yosemite National Park - 미국
24 Hawaii - 미국
25 Auckland - 뉴질랜드
26 Iguassu Falls - 브라질
27 Paris - 프랑스
28 Alaska - 미국
29 Angkor Wat - 캄보디아
30 Himalayas - 네팔
31 Rio de Janeiro - 브라질
32 Masai Mara - 케냐
33 Galapagos Islands - 에쿠아도르
34 Luxor - 이집트
35 Rome - 이탈리아
36 San Francisco - 미국
37 Barcelona - 스페인
38 Dubai - 아랍 에미리트 연방(?)
39 Singapore - 싱가폴
40 La Digue - 세이셸 공화국
41 Sri Lanka - 스리랑카
42 Bangkok - 태국
43 Barbados - 바바도스 공화국
44 Iceland - 아이슬란드
45 Terracotta Army(진시황 병마용) - 중국
46 Zermatt - 스위스
47 Angel Falls - 베네수엘라
48 Abu Simbel - 이집트
49 Bali - 인도네시아
50 French Polynesia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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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본 곳 : 16 ....

1 The Grand Canyon - 미국
3 Florida (디즈니 월드) - 미국
7 Las Vegas - 미국
8 Sydney - 호주
 

9 New York - 미국
15 Niagara Falls - 미국, 캐나다 어느쪽이었지?
17 The Pyramids - 이집트
18 Venice - 이탈리아
20 Great Wall of China - 중국
27 Paris - 프랑스
30 Himalayas - 네팔
34 Luxor - 이집트
35 Rome - 이탈리아
42 Bangkok - 태국
45 Terracotta Army(진시황 병마용) - 중국
48 Abu Simbel - 이집트


■ 가보고 싶은 곳  : 나머지 전부, 그래도 여러번 생각해 본 곳은 ... 9

5 Cape Town - 남아프리카 공화국
10 Taj Mahal - 인도
14 Machu Picchu - 페루
19 Maldives - 몰디브 공화국
23 Yosemite National Park - 미국
24 Hawaii - 미국
29 Angkor Wat - 캄보디아
31 Rio de Janeiro - 브라질
33 Galapagos Islands - 에쿠아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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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0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호강하는 책이 있어요.
그나저나 중남미 나들이 다녀오셔서
아름다운 사진과 이야기 들려주소서~~

oren 2014-02-09 00:40   좋아요 0 | URL
사진책 도서관을 직접 꾸리시는 함께살기 님께서는 그동안 경이로운 사진들을 얼마나 많이 보셨을지 저로선 짐작조차 하기 힘드네요. ㅎㅎ

『갈라파고스』라는 책의 소개글을 보니 '다큐멘터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BBC의 자연사 프로젝트팀이 2년여 동안의 제작 기간에 걸쳐 40여 명의 전문 사진작가들이 찍고 선별한 160여 컷의 생생한 사진과 흥미롭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현장 기록'을 담았다고 하네요.

사진 한장 한장이 얼마나 힘든 노고를 거쳐 얻어진 것인가를 떠올려 보면 저런 사진들을 아낌없이 담아 놓은 책들은 정말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크아이즈 2014-02-1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중학 때던가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판에 갈라파고스 특집 편이 있었는데, 거기에 팍 꽂혀서 세상에 무신 이런 천국이 있단 말인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알바트로스를 처음 접했던 기억이^^
이러다가 정말이지 갈라파고스까지 접수하게 되는 오렌님 되는 거 아닌가요?

oren 2014-02-12 10:36   좋아요 0 | URL
팜므 님은 이미 오래 전에 갈라파고스 섬을 구경하셨군요. 게다가 알바트로스까지!

남미 대륙을 밟아보는 게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갈라파고스 섬까지 넘보는 건 보통 욕심이 아니다 싶지만 그래도 오매불망 언젠가는 꼭 그 섬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ㅎㅎ
 



키케로가 쓴『노년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인은 카토라는 인물이다. 키케로가 그 책을 쓴 나이가 대략 62세 무렵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굳이 카토를 대타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키케로가 쓴 책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장로이신 마르쿠스 카토의 입을 빌리기로 했고. 장소는 카토의 저택이오. 그가 노년을 그토록 편안하게 보내는 것을 보고,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가 감탄하자 카토가 그 두 사람에게 대답한다는 설정이라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152쪽 

 




그런데 키케로는 왜 하필 수많은 노인들 가운데 굳이 카토를 자신의 작품속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을까? 분명 카토의 노년이 그 어떤 사람에 못지 않게 부러움을 살 만했고 또 숱한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임엔 의심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키케로가 카토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킨 이유가 그런 표면적인 이유 말고도 최소한 두 가지 정도는 더 고려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로마인들은 선조의 업적과 영광에 기대지 않은, 소위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을 '신인(新人)'이라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문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 더 엄밀하게는 처음으로 집정관이 된 사람을 'novus homo'라고 불렀는데, 마르쿠스 카토, 일명 대(大) 카토와 키케로가 바로 자신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이 된 경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소(小) 카토 때문이다. 대(大) 카토(기원전 234∼149)와 키케로(기원전 106∼43)는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키케로는 카토의 증손자인 소(小) 카토(기원전 95~46)와는 동시대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깊은 유대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로마 공화정을 끝까지 수호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더 절박한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물론 키케로가 그런 최후를 미리 알고 자신의 작품을 썼다는 얘기는 아니다. 키케로의 정치적 입장이 목숨을 함께 할 정도로 소(小) 카토와 같았다는 얘기다. 결국 키케로는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전우였던 사람의 증조부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던 셈이다.)


카토의 입상, 19세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소(小) 카토가 주도한 원로원의 결정, 즉 갈리아에 머물던 카이사르에게 내려진 '군대 해산 후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 복귀 명령'은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카이사르의 '명언' 하나로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루비콘 강'을 건너 시시각각으로 로마로 진군해 들어오던 카이사르를 막기 위해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 카토와 키케로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디라키움의 항구를 지키는 임무를 함께 맡았다. 그 전투에서 패배한 원로원파 군대는 퇴각을 거듭했고 소 카토는 결국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끝에 우티카에서 자결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지 3년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키케로는 내전 종식 후 정계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어 은퇴후 집필에 전념하는데, 『노년에 관하여』도 키케로의 다른 여러 작픔들과 함께 그 때 쓰여졌으며, 카이사르가 암살되던 때와 시기적으로 거의 겹친다. 그 작품의 집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 속에서도 '카토'가 등장한다.


 


그것은 B.C. 44년 5월 11일자로 되어 있는 키케로의 편지이다. 그 속에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암살은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경거망동이며 독재관이 살해되어도 그 뜻을 잇는 자(안토니우스)가 있지 않느냐고 분노한 뒤, 전쟁이 머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정세 속에서 노년이 점점 자신을 화를 잘 내는 노인으로 만드니 '당신에게 헌상한 《대 카토》를 더 자주 읽어야겠다.'고 쓰고 있다.

 

 - 『아우렐리우수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488쪽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공백 상태'에서 본래 카이사르파였던 안토니우스가 다시 득세하고, 카토가 죽은 뒤 원로원의 중심으로 떠오른 키케로는 '카이사르 독재를 타도한 구국적 행동을 일으킨 암살자들을 무죄로 해야 한다'며 안토니우스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키케로 자신은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를 '참주정은 살아있다. 단지 참주가 죽었을 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안토니우스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를 장식한 두 사람의 격돌은 결국 생명을 건 싸움으로 커졌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에게 독한 탄핵 연설을 퍼부었고, 안토니우스도 키케로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결렬'을 가져오게 한 악당으로 몰아세웠다. 이미 키케로가 주도한 '카탈리나 탄핵' 등으로 뿌리깊은 증오가 쌓여 있었던 두 사람의 대결은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손잡고 삼두정치를 출범시킨 안토니우스의 승리로 끝나고, 자신에게 추방형이 내려진 사실을 알고 피신길에 올랐던 키케로는 결국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게 피살되고 만다.

키케로의 《필리포스 왕 탄핵연설을 모방하여》는 B.C. 4세기 중반에 아테네 최대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에게 행한 공격을 염두에 두고 붙여진 것이다. 그 연설에서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규탄하는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여, 나는 그대에게 청한다. 이번에야말로 국가의 일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대의 동료들 일이 아니고 그대의 시조들 일을 생각하라. 나에 관해서는 그대의 생각대로 하라. 그러나 국가와는 손을 잡아라. 물론 그것은 그대가 정할 일이다. 나는 나를 위해 말하겠다. 나는 젊어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나는 늙어서도 공화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 만일 나의 죽음으로 국민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고 로마 민중의 고뇌가 오랜 세월 애써 온 것을 결국 낳게 될 수만 있다면, 약 20년 전, 바로 이 신전에서 나는 '집정관의 자리에 오른 자에게 죽음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지금 나는 노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에게 죽음은 바람직하기도 한 것이다. 결국 나는 도달하고 달성했다. 나는 단지 두 가지만을 소망한다. 하나는 내가 죽을 때에 로마 국민을 자유롭게 할 것. 그리고 국민 각자는 공화국에 대한 각자의 공적에 따라서 영광이 있기를. 이것이 제2의 소망이다.

 - 『아우렐리우수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419쪽 


키케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보고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한다.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아우구스투스라고 일컫고 로마의 단독 지배자가 되는데, 플루타르코스의 〈키케로 전〉은 다음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노경으로 접어든 아우구스투스는 손자가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 다가가자 손자는 놀라서 재빠르게 이 키케로의 책을 품에 숨겼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책을 빼앗아 걸으면서 다 읽고 나서 손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는 박력 있게 말을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애국자였다.'

 

 - 『아우렐리우수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425쪽 


 

 

카토 얘기를 하려다가 키케로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음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린 〈마르쿠스 카토 전〉의 일부다. 물론 대(大) 카토의 이야기이고, 그의 '생활인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만 따왔다.(플루타르코스가 쓴『영웅전』원전은 무려 50인의 그리스·로마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방대한 책이다. 그 속에는 이 짧은 페이퍼에 등장하는 인물도 여럿 들어 있다. 대 카토, 소 카토, 키케로,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그들이다.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그리스 영웅 다섯 사람과 로마 영웅 다섯 사람만 실려 있는데, 로마인 가운데 대 카토,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는 포함된 반면 소 카토와 키케로는 제외되어 아쉽다. 천병희 선생님께서 노령 때문에 번역하시는 일이 몹시 힘드시더라도 좀 더 수고하셔서 나머지 40인의 영웅들 얘기를 마저 번역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옛 로마를 대표하는 입지전적인 인물

최초의 라틴어 산문 작가인 카토(기원전 234∼149)는 사치에 물들기 전 옛 로마를 대표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 단련, 불굴의 정신력, 엄격한 도덕심,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힘입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재정관, 조영관, 집정관을 거쳐 기원전 184년에는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감찰관직을 어찌나 잘 수행하였던지 '감찰관 카토(Cato Censorius)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카르타고가 제1차 포에니 전쟁 뒤에 급속히 국력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원로원 연설을 항상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말로 끝냈다고 한다.

카토는 키케로의 에세이 『노년에 관하여』에 주 화자로 등장하여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듯 젊은이들에게 인생과 노년에 관한 아름다운 비밀을 들려준다. (359쪽)

  

땅은 사되 물을 뿌리거나 비로 쓸기 위해서는 아니다.

카토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100드라크메 이상의 값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으며, 재정관이나 집정관의 임기 중에도 자신의 노예들과 똑같은 포도주를 마셨으며, 저녁 식사를 곁들일 반찬은 장터에서 구하되 30아스 이상은 초과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군무에 이바지할 체력을 강화하고자 국가를 위해 그랬다고 했다. 또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놓은 바뷜론의 양탄자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지체 없이 내다 팔았으며, 그의 오두막 중 회반죽을 칠한 것은 한 채도 없으며, 노예 한 명을 위해 1,500드라크메를 지불한 적이 없는데, 그가 원하는 것은 섬세하고 잘 생긴 젊은이가 아니라 마부나 소 치는 목자 같은 건장한 일꾼들이며, 이들이 너무 늙어 쓸모가 없어지면 이들을 먹이느니 내다 파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로 그는 남아도는 것은 어떤 것도 싸지 않으며, 불필요한 것은 설사 그 비용이 1아스밖에 들지 않는다 해도 비싸다고 여겼으며, 땅은 사되 씨를 뿌리고 가축 떼를 먹이기 위해서이지 물을 뿌리거나 비로 쓸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했다.  (367∼368쪽)




고결한 정신에서 유래한 것인지 옹졸한 마음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

어떤 이들은 카토가 인색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한다고 여겼지만, 또 다른 이들은 카토가 그렇게 옹색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은 남들의 사치를 바루고 절제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그러한 행위들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하인들을 짐 싣는 짐승들처럼 혹사하다가 늙으면 내쫓거나 내다 파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유용성 외에는 어떤 관계도 인정하지 않는 냉혹한 성격의 특징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인정이 정의보다 범위가 더 넓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법과 정의는 그 본성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만, 선의와 자비는 마치 수량이 풍부한 샘물처럼 상냥한 마음에서 흘러넘쳐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상냥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들이 노쇠해도 보살펴 줄 것이고, 자신의 개들이 강아지 때뿐만 아니라 늙어 돌볼 필요가 있을 때도 보살펴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아테나이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지을 때 유난히 힘들게 일하는 노새들을 눈에 띄는 족족 모두 풀어주어 아무 제약 없이 마음 놓고 풀을 뜯게 했다. 그런데 그중 한 마리가 자진해 작업장으로 내려가 마치 고무하고 격려하듯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달구지를 끌던 노새들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길라잡이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테나이인들은 그 노새를 죽을 때까지 공금으로 부양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또 올륌피아 경기에서 세 차례 우승한 키몬의 말들은 그의 무덤 옆에 묻혔다. 개들도 길러준 주인과 가까워지고 친밀한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테나이인들이 도시를 포기했을 때 크산팁포스가 자신의 삼단노선을 따라 살라미스로 헤엄치던 애견이 죽자 지금도 '개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곶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생명 있는 것들을 신발이나 세간처럼 다루고, 다치거나 봉사하느라 피폐해졌다고 하여 팽개쳐서는 안 되며, 다른 이유가 없다면 같은 인간들에게 상냥해지는 실습을 하기 위해서라도 생명 있는 것들을 온유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나 같으면 나를 위해 일한 소가 늙었다고 팔지는 않을 것이며, 파는 사람에게 쓸모없듯 사는 사람에게도 쓸모없을 집승을 늙었다는 이유로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늘 살던 장소와 익숙한 생활 방식에서, 말하자면 고향에서 떼어놓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토는 그런 처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집정관으로서 히스파니아의 전쟁터에서 타고 다니던 군마조차도 나라에 그 운송비를 부담시키지 않으려고 그곳에 버리고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고결한 정신에서 유래한 것인지 옹졸한 마음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368∼369쪽)




* 카토가 뒤늦게 장가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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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네를 위해 좋은 사윗감을 찾아냈네.

그 자신은 건강과 체력에 관한 한 체질이 강철 같아서 오랫동안 노년의 공격에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노인이 되어서도 자주 여자를 가까이 하다가 결혼할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결국 재혼을 했다. 아내와 사별한 뒤 카토는 아들을 스키피오의 누이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과 결혼시키고, 자신은 홀아비로 지내며 매춘부를 몰래 불러들여 동침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갓 시집온 며느리가 함께 생활하는 작은 집에서 그런 일이 발각되지 않을 리 없었다. 한 번은 매춘부가 너무나 뻔뻔스럽게 아들의 침실 옆을 성큼성큼 지나가자, 뭐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아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는 것을 아버지가 보게 되었다. 카토는 자신의 처신을 아들과 며느리가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토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함께 광장으로 내려가다 전에는 그의 서기였으나 지금은 그를 수행하는 살로니우스를 큰 소리로 부르며 딸내미를 위해 신랑감을 구했는지 물었다. 살로니우스가 그와 먼저 상의하지 않고는 그럴 의사가 없다고 대답하자, 카토는 "내가 자네를 위해 좋은 사윗감을 찾아냈네. 나이 많은 것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말일세. 다른 점에서는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지만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일세."라고 말했다. 살로니우스는 그 자리에서 이 일을 그에게 맡기며 그가 마음에 둔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카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딸에게는 카토의 호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자 카토는 두말없이 다름 아닌 자신이 그 소녀에게 장가들고 싶다고 했다. 물론 처음에 살론니우스는 카토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카토는 재혼할 나이도 훨씬 지난 데다 집정관을 지내고 개선식을 올린 집안과 사돈이 되기에는 자신의 지체가 너무 낮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카토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리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들은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혼인 계약을 맺었다.

결혼식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카토의 아들은 몇몇 친구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가 혹시 자신의 처신이 못마땅하고 불쾌해서 억지로 계모를 집 안에 들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카토가 "얘야, 그럴 리가 있느냐! 내게 너는 전혀 나무랄 데 없는 효자다. 나는 나에게는 너 같은 아들을 더 많이 남기고, 나라에는 너 같은 시민을 더 많이 남기고 싶을 따름이다."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398∼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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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토가 여든 살에 얻은 차남의 손자인 소(小) 카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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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기원전 95년 ~ 기원전 46년)은 소 카토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대 카토의 증손자이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적하여 로마 공화정을 수호한 것으로 유명하고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부패가 만연한 로마의 정치 상황에서 완고하고 올곧은, 청렴결백함의 상징적 인물로 유명했다.

초기의 생애


아버지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어머니는 리비아 드루사 였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집에서 자랐는데 드루수스는 카토가 4살때 암살 당했다. 어린 시절부터 완고하고 강직함으로 유명하였다고 하며 술라는 어린 아이인 카토와 대화하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유산을 상속 받은 다음에 그는 삼촌의 집을 떠나 스토아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증조할아버지 대 카토처럼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춥고 비오는 날에도 최소한의 옷만 걸쳤고 꼭 필요할 때만 음식을 먹었고 시장에서 값싼 포도주만 먹었다고 하는데 충분한 유산이 있었음에도 철학적인 실천때문에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다.


기원전 72년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일개 병사로 참전했고 기원전 67년 군사호민관으로 마케도니아에서 복무했는데 그곳에서도 언제나 솔선수범하고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복무했다.

강직한 정치가


기원전 65년 로마로 돌아와
재무관이 되었고 이 때도 강직함으로 유명했는데 전임자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특히 술라 독재관 시기 악명높았던 부하를 공금횡령으로 고발하여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원로원에 진출한 카토는 한번도 회의에 빠지지 않는 성실함과 꼼꼼한 의정활동을 했고 원래는 술라의 부하들의 모임이었던 "원로원파" 를 공화정을 수호하는 정치집단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63년 이듬해의 호민관으로 당선된 그는 집정관 키케로를 도와 카틸리나 모반 사건을 해결하는 데 열중했는데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공격한 연애편지 사건의 일화는 유명하다. 카틸리나 사건이후 카토는 점점 그 세력을 키워가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도 인물들에 대한 반대에 앞장섰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토지개혁 시도를 반대했고, 특히 카이사르가 5년임기의 갈리아 총독으로 떠나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한편 원로원파인
키케로를 실각시키는데 카토가 방해물이 되자 삼두정치파는 기원전 58년 카토를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보냈다. 2년후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계속해서 삼두정치에 반대했고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죽고 삼두정치가 위기에 처하자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와 떼어놓는 데 전념했다. 기원전 51년 카토는 집정관직에 도전했으나 청렴한 선거운동으로 당선에 실패했다.

내전과 카토의 죽음


기원전 49년 카토는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에게 완전히 쏠리도록 지원했고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원로원에서 발의하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의 적으로 규정되었고
루비콘 강을 넘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카이사르의 기세에 눌려 "원로원파"는 로마를 버리고 달아났고 카토는 시칠리아 방어를 맡았으나 결국 디라키움으로 도망가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기원전 48년 디라키움 공방전과 이어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토는 키케로와 함께 디라키움의 항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하자 카토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패잔병을 이끌고 아프리카에 도착해 우티카에서 세력을 규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죽고 나머지 원로원파 군대는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맞섰다. 카토는 탑수스 전투에서 우티카의 항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탑수스의 패배를 알고나서 카토는 자신의 모든 가족과 요인들을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4월 12일 카토는 오랜 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지 않고 자살을 결정했다. 그는 연회를 주최한 뒤,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스스로 배를 갈라 죽었다.

이후에 미친 영향


카토는 그 강직함과 청렴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특히 로마 공화정의 이상을 구현하는 상징처럼 전설화 되었다. 키케로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카토〉를 썼고 이에 답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안티-카토〉를 썼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제정으로 넘어간 로마시대에도 베르길리우스루카누스같은 작가들은 카토를 영웅시하고 미화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도 그의 《신곡》에서 카토를 묘사하는데 여기서 카토는 연옥의 섬을 지키는 수호자로 묘사된다. 그 밖에 계몽주의 시대의 공화정 혁명시기에 카토는 다시한번 공화정의 우상으로 역사의 각광을 받게 된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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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토의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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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의 아들 교육법

카토는 좋은 아버지였고, 상냥한 남편이었으며, 유능한 살림꾼이었다. 그는 이재(理財)에 관한 일을 결코 사소하거나 무시해도 좋은 일로 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 관련된 카토의 처신에 관해 마땅히 몇 가지 적절한 예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토는 재산보다는 집안을 보고 아내를 골랐는데, 그것은 부유한 여자들이나 집안이 좋은 여자들이나 다 같이 위엄과 자긍심이 있지만, 가문이 좋은 여자들은 원래 수치스러운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모든 일에서 남편의 뜻을 더 잘 따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나 자식을 때리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것을 폭행하는 자이며,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 위대한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보다 더 칭찬받을 만하며, 옛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괴팍한 아내와 아둔한 아들들을 늘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카토는 급한 공무가 있을 때 말고는 아내가 아기를 목욕시키고 기저귀를 채울 때,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카토의 아내는 아이에게 몸소 젖을 먹였고, 가끔은 노예들의 아이들에게도 젖을 먹였는데,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자기 아들에게 우애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카토는 교사로서 많은 소년들을 가르치던 킬로라는 유식한 노예가 있는데도 손수 아들을 맡아 읽기를 가르쳤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기 아들이 이해력이 느리다고 해서 노예에게 꾸중을 듣거나 귀가 잡아당겨지기를 원치 않았고, 교육처럼 중요한 일을 노예에게 신세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토는 아들에게 읽기와 법률과 체육을 몸소 가르쳤고, 창던지기, 무장하고 싸우는 법, 말타기뿐 아니라 권투, 더위와 추위를 참고 견디는 법, 티베리스 강의 소용돌이와 급류를 헤엄쳐 건너는 법까지 가르쳤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큰 글자로 손수 로마의 역사서를 썼는데, 아들에게 집에서 선조들의 역사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카토는 또 자기는 아들이 있는 앞에서는 베스타 여신의 여사제들이라고 불리는 신성한 처녀들 앞에서처럼 상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아들과는 목욕도 같이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인들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옷 벗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 장인도 사위와 함께 목욕하기를 피했으니 말이다.  (391∼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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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 수상록』에서 찾아낸 '카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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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252쪽)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

여자들은 언제나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반대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며 모든 구실을 잡습니다. 한 꼬투리라도 변명할 재료가 있으면, 그녀들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헌금을 많이 내려고 남편에게서 잔뜩 훔쳐 내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참회사에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헌금의 분배를 말대로 믿어 보세요! 어떠한 행동도 남편의 양보를 얻어서 한 것이라면 충분한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에 우아미와 권위를 세우려면, 농간을 부려서건, 무례한 수작으로건 언제나 부당하게 남편들의 권한을 빼앗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서와 같이 가련한 늙은이에 대항해서 아이들 편을 드는 경우에는, 여자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고 영광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성정(性情)을 만족시킵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아이들과 결탁해서 걸핏하면 그의 지배와 지휘에 반항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사내아이가 성장해서 기운이 차면 그들을 강제로 매수해서, 요리사·회계원, 기타의 가족들을 손아귀에 넣어 버립니다.

 아내도 자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빠지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더 잔혹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습니다. 대 카토가 말하기를 "하인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적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던 그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아직 아내와 아들과 하인의 수만큼 적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노쇠한 경우에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받는 달콤한 이득입니다. 여기에 악을 쓰며 대들어 보았댔자, 특히 재판관들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야 할 때에는 대개 젊은이들과 같은 꿍꿍이속이며, 젊은이의 편을 드는 바에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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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키케로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1-15 17:35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 몽테뉴 * *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웅변가였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가『대비열전』에서 그의 짝으로 그리스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를 붙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와는 달리 뛰어난 웅변술뿐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남겨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가 쓴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
  2.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7-01 19:25 
    "브루투스, 너 마저?" 이 짧은 대사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도 드물다. 이 말은 삼척동자도 웬만큼 안다. 왜?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금세 '상황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도 "아무개, 너 마저?" 라고 외칠 만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맞닥뜨렸던가. 나도 언젠가부터 저 짧은 대사를 듣고 알게 되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내가 품었던 생각은 이랬다. '브루투스는 '참 나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