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역사의 회고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판결이다. 이 영화는 편히 앉아서 감상하기에는 뭔가 너무 불편하다. 자꾸만 가슴 저 밑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무엇보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이 영화에서 자주 듣게 되는 '국가'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 국가를 무력으로 움켜 잡았던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 스크린 속에서만 어른거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분노 속으로 떠밀어 넣는다.

이 영화가 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그건 어느 인권 변호사가 '한때는 내 친구들'이나 다름없는 듯한 모습으로 푸른 수의를 입은 피고인들을 위해 역사에 남을 만한 변호를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변호인이 비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감했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후 그를 더욱 애타게 그리워하고 칭송하면서 그를 향한 흠모와 추모의 열정이 더욱 뜨겁게 확산되고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사실 나도 그의 급작스런 비극적 결말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본 적은 있지만 그를 흔쾌하게 지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영화속 인물들이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제멋대로 끌어들이며, 필사적으로 죄없는 국민들을 향해 호통치고 고함치며 단죄하려는 '그들'에 대한 공분이 우리를 공감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떠올리기 싫은 끔찍스런 과거가 아직도 여전히 과거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아서 우리를 더욱 공감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 저들은 저토록 오만한가?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판단을 최고의 표준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국가'도 자신들의 것이라는 태도에 우리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오히려 경악할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국가'와 '통치자'가 얼마나 위험스런 대상인지 깨닫지 못할 바보는 없다. "그들은 이러한 오만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무한히 우월하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행하는 데 반대되는 장애물들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을 경멸하면서,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이토록 불편한 감정을 느껴보기도 쉽지 않다. 오래 가슴 속에 묵혀 두었던, 자꾸만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둔 수많은 죄없는 '죄수들'을 여기서 다시금 떠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몸소 헤쳐나왔던 세상이 저토록 어이가 없고 가혹했던가 싶은 생각조차도 차라리 집어 치우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끔찍한 과거조차 너무나 빨리 잊기 쉽고 또 너무 쉽게 미화하기 마련이라고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런 말을 함부로 못 하겠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두 번' 이루어지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것이라고 어느 저명한 정치학자가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국보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간신히 살아나온 어느 선배에게 그 얘기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 때가 아마도 영화속 '변호인'의 실제 인물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어느 겨울이지 싶다. 오늘 문득 그 정치학자가 누군지 찾아 봤더니 어이없게도 이런 기사가 뜬다. [기고] 국가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용납될 수 없다

저 기고문이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폭압적인 군부 독재 이후 얼마나 여러번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어왔던지 간에, 우리가 아직도 '벽'에다 대고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숨죽이듯 웅성거리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보노라면 '평화적 정권교체의 횟수'로만 민주화를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가를 금세 알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81년 부터 87년 민주화 항쟁 때까지 고스란히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래도 감옥까지 가는 불운에서는 용케 비켜났던 나조차 마음이 이토록 불편한데, 영화속 피고인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운명을 맞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더 괴롭고 불편할까. 그리고 스크린 속에서 시종일관 목소리를 드높혀 호통치던 그 많은 원고들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버젓이 '국가'를 들먹이며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걸까. '국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다.'라고 말한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가와 국민과의 관계'는 충분히 권위를 갖춘 '헌법'에 이미 오래전부터 명백하게 정의되어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함부로 단죄하지 말라.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외칠 수 있는 말 가운데 나는 이것보더 더 단순하고도 명백한 진리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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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21쪽) 



 

오늘날 이 미국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 나는 대답한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이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이다.(25쪽)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대중은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이 느린 진짜 이유는 그 소수마저도 다수의 대중보다 실질적으로 더 현명하거나 더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디엔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29쪽)

 


 

오늘날 정직한 애국자의 시세는 얼마인가? 사람들은 망설이고 후회하는가 하면 때로는 탄원서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추진하여 효과를 거둘 정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악을 몰아내어 더 이상 자신이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게 되기를 호의적인 자세로 기다린다. 기껏해야 그들은 선거 때 값싼 표 하나를 던져주고, 정의가 그들 옆을 지나갈 때 허약한 안색으로 성공을 빌 뿐이다.(29쪽)

 

 

 

한 인간의 의무가 어떤 악을(비록 그것이 엄청난 악일지라도) 근절하는 데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는 물론 할 수 없다. 그는 그 밖에도 다른 할 일들이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추구할 온당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그 악과 관계를 끊을 의무가 있으며, 비록 더 이상 그 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29쪽)

 

 

 

만약 불의가 정부라는 기계의 필수 불가결한 마찰의 일부분이라면 그냥 내버려두라, 그냥 내버려두라. 모르긴 하지만 그 기계는 매끄럽게 닳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닳아 없어질 것이다. 만일 그 불의가 그 자체를 위한 스프링이나 도르래, 로프나 크랭크를 가지고 있다면 치료법이 병보다 더 나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게 좋으리라.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38쪽)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메사추세츠 주가 보다 자유분방하고 풀이 덜 죽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유일한 장소, 또 현 시점에서 가장 떳떳한 장소는 감옥이다.(42쪽) 

 


 

부자는(불유쾌한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하는 바이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그의 목적물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위해 그것들을 획득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가지게 된 것도 무슨 큰 덕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일한 새로운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문제뿐이다.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44쪽) 

 


 

엄정하게 말하면, 정부는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내가 허용해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입헌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진보해온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향해 온 진보이다. 중국의 철인조차도 개인을 제국의 근본으로 볼 만큼 현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민주주의가 정부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진보일까?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고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한 걸은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국가가 개인을 보다 커다란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에 알맞은 대접을 개인에게 해줄 때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는 나올 수 없다.

나는 마침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가져본다. 그런 국가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익는 대로 떨어지게 허락해주는 국가는, 그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내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줄 것이다.(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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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직 대통령인 분이나 그이를 둘러싼 분들도 이 영화를 볼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아이들도 어려
저희 식구는 극장에 갈 수 없습니다만,
극장도 많은 서울에서 정치를 하는 분들은
어떠할까 궁금하네요.

oren 2013-12-28 16:39   좋아요 0 | URL
그들이 이 영화를 보든 말든 사실 저는 별다른 관심도 없답니다. 위정자들의 위선이야말로 우리가 매일같이 TV나 신문을 통해 가장 지겹도록 보는 일인데, 그들이 항상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내세우니, 그만큼 자주 반복되는 거짓말도 없지 않나 싶어요.

함께살기 님께서는 한적한 시골에 사시니 이런 영화도 제때 보실 수가 없군요. 나중에라도 기회가 닿으면 이 영화 놓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