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할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빈둥대던 새벽. 시급한 일을 하기 싫어 비교적 덜 시급한 일을 반쯤 끝내고 나니, 비로소 할 마음이 생겨 결국 아침에 잠들고 말았다. 문득 정겨운 후배 녀석이 생각났는데, 신년 초에 전화를 걸어 와 "그런 일이 있으면 제발 남한테 듣게 하지 마!"라고 나를 윽박지르던 녀석이었다. 나는 나를 윽박지르는 남자를 좋아하므로, 물론 여자는 더 좋아하지만 어쨌거나 녀석은 남자였으므로, 하지만 최근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나를 윽박지르는 인간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였으므로, 그 녀석을 생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언제나.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합정에 나갔고 두 친구를 만났고 갈비탕을 먹었고 책 선물을 받았고 커피를 마셨고 잡담을 나누었다. 책 이름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한 친구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나는, 그러니까 남은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을 남겨두고 향한 곳은 또 다른 커피숍이었고, 아는 후배와 선배가, 그러니까 둘은 부부였는데, 운영하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작년에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이름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여전히 마음속 한 구석으로는 후배를, 커피숍을 운영하지만 나를 윽박지르지는 않는 후배가 아닌 전화를 통해 나를 윽박지르던 정겹고 윽박지르는 후배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생각일까. 시간은 항상 빠르거나 늦고, 대개는 늦다. 그런데 늦이라는 글자는 이상하다. 무척 게으르고 나른하면서도 어딘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까 나다. 나는 어떤 시인이었고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늦었다. 무엇에? 성애가 낀 창에 고양이 한 마리를 그렸다. 이름 없는 고양이. 창밖으로 고양이가 지나간다. 이름을 지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생각일까. 문득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내 모든 일은 예정에 벗어나있지만 그 자체로 조화로웠다. 어떻게? 그리고 그 자리엔 후배가, 윽박지르는 후배가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없이 조화롭게. 몇 잔의 술을 마셨고, 몇 잔의 술을 마셨고,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커피도.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각각의 질서에 따라 차례로 흘러나왔다. 세 번째의 커피숍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제 알라딘에서 도착한 열네 권의 책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같이 중고였다. 내가 펼쳐보지 않았는데도. 언제부터? 그리고 나는 책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 생각이다. 도무지 생각이 없다.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어쩌면 정말 그때의, 의, 의, 의, 의, 의 생각이리라.


나는 조금 모르겠다.



 
 
구차달 2012-01-12 02:30   댓글달기 | URL
그냥 구보씨가 생각나네요. 쉬세요. ^^

poptrash 2012-01-13 13:58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의 구보 씨가 문득 부럽네요...

2012-01-13 09:21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이 글이 참 좋구나.

poptrash 2012-01-13 13:58   URL
이런 댓글도 좋은데요.

다락방 2012-01-13 13:23   댓글달기 | URL
책 이름을 밝혀주십시오.

poptrash 2012-01-13 14:02   URL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까진 그럴 수 없습니다!

다락방 2012-01-13 15:05   URL
오늘 칼 가지고 갑니다.

poptrash 2012-01-13 17:12   URL
저는 책 싸들고 도망갑니다...

뽀숑 2012-01-13 16:11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보고 感 잡았.. 누피:)

poptrash 2012-01-13 17:12   URL
무슨 감을 얼마에 잡으셨습니까

김토끼 2012-01-16 14:26   댓글달기 | URL
ㅎㅎ 다락방vs 팝트레쉬 재미나요-
시 쓰시나요? 저도 시 썼는데/혹은 쓰다가 안쓰다가 하는데- 등단에 목 매다가 이제는 힘 탈려서 아아..못 하겠네요

poptrash 2012-01-16 14:33   URL
시는요 무슨 ㅎㅎ 참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날들이에요

뽀숑 2012-01-20 17:21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3억이면 되는 거지?

poptrash 2012-01-22 06:32   URL
3억이면 됩니다 물론...
 

새해 들어 처음 받은 책 선물은 <바틀비와 바틀비들>이었다.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너무 노골적인 제목이라 어쩐지 읽기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었는데, 그래서 사지 않고 빌려 볼 생각이었으나 이 책의 존재 자체를 처음으로 알려준 친구가 새해의 첫날에 선물해주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읽었던 대부분의 책들은 벌써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새해의 첫 책으로는 무척이나 적절했다는 기억이다.


두 번째로 받은 책 선물은 이승훈의 <해체시론>과 김상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이었다. 전자는 다시 나올 가능성이 없는 품절도서고, 후자는 제 값 주고 사기는 아까운, 이미 시기가 지나 버린 책이다(나는 언젠가부터 이렇게 계산적인 독자가 되었다). 사실 이 책들에는 조금의 사연이 있는데, 사연 없는 책은 세상엔 없다는 생각이므로 길게 쓰는 일은 피곤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이주 남짓 계속했더니 이 시간만 되면 머릿속이 혼곤하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 무렵에 더욱 배가 고프고, 담배를 끊으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목이 더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생활은 나를 더 피곤하게 하는 모양이다.


다만 이 책이 누군가의 손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온라인)을 거쳐, 나의 장바구니에 잠시 동안 머물러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주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 아니 도대체 세상에 누가 이런 책을, 하필 이 시점에, 그것도 중고로 구입했을까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간단한 검색을 거쳐 이 책이 알라딘 중고서점(부산_오프라인)에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 그날 나와의 약속을 미루고 부산에 내려간 누군가가 있어 그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다. (함께 장바구니에서 사라진 <길리아드>도 그곳으로 갔다고 하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결국 술잔을 앞에 두고 책을 받아들게 된 나는 책 값을 물어는 보았으나, 그냥 감사한 마음만 주었다. 살다보면 종종 신세를 지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 대비해 감사한 마음만은 항상 넉넉히 준비하는 편이다. 나는 그렇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그가 언젠가 내가 찾아 해맸던 어떤 '등'이 등장하는 정지용의 시를 찾아주었다는 것인데, 그 등의 정체는 '장명등'이었고, "혹시 프랑스가 들어간 제목에 장명등이 나오는 거 아냐?"라는 그의 질문에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등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므로 당연히 그 시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조금 전에 검색을 해본 결과 장명등이 맞았고 그 시가 맞았다(따라서 나는 아직 이것에 대해 적절한 감사를 표하지 못했다). 여전히 장명등은 난생 처음, 물론 이제는 한 두어번쯤, 들어본 것 같은 등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기억력의 문제다. 그것은 이런 시였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 · 프랑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 프랑스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롤서방! 꿋 이브닝!」

 

「꿋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기씨는 이밤에도

경사 커-틴 밑에서 조시는 구료!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


사실 처음 장명등이 나오는 부분까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에서 바로 이 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기 모더니스트들의 이국 취향에는 어딘지 모를 향수가 배어있으므로, 나는 분명히 그것을 기억한다. 향수란 표현은 이상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가진 적이 없는 어떤 나라를, 항상 상상 속에서만, 어떤 이미지로, 그려 왔으므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해체시론>이건 <해체론 시대의 철학>이건 학창시절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이라는 생각이지만, 지금 읽는 것에는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 세상 모든 독서에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 그러니 독서는 끊기 힘든 악이다. 세상 모든 일 또한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만, 사실 이만큼의 재미가 있는 일도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기를 먹고,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농담을 따먹었는데도 그렇다.



 
 
구차달 2012-01-10 15:02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정지용 전집 '시'편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시 '카페 프란스' 였을 줄이야. 뒷통수 한 대 맞은 기분인데요?

저도 그런 경험 있어요, 대체 이 따위를 누가 사겠나 싶어 중고 올라 온 사실만을 확인하고 게으름 피우다가 놓치는 경우가 발생하더군요. ^^

poptrash 2012-01-11 00:54   URL
정지용 전집 1권도... 한때 제 장바구니에 [중고]라는 말머리를 달고 들어 있다가 어느새 사라진 책이라지요. 혹시 그 책이 구차달 님 서재로?

벌써 십년도 전에, 현대시론 수업에서 배웠던 시에요. 좋아했고, 몇 번쯤 들여다보았겠지만, 그 이후로는... 그래도 여전히 기억 속 어딘가에 단어의 찌꺼기로나마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죠.

구차달 2012-01-11 01:05   URL
아, 전 아닌 것 같아요. 한때 품절이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풀렸거든요.

단어 조각의 형태로도 남아 있지 않다면 저 같은 인간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을 거에요. 기억력이 저렵해서 ^^

poptrash 2012-01-11 01:52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 기억력도 만만치는 않거든요 ㅎㅎ
 

벌써부터 나른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어떤 작위의 세계>라는 제목을 가진 어떤,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달리 부를 말이 없어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그렇기에 다른 어떤 소설보다 더욱 소설다운 책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곤한 졸음이 밀려온다. 뜻 모를 이국의 관념어들로 가득한 철학책이 선사하는 피로와는 다르다. 어느 따듯한 봄날,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반쯤 감은 눈으로 하늘을 떠도는 뜬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퍽 기분 좋은 나른함이다. 자신의 소설을 뜬구름에 비유한 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이 소설은 서울에 있는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0년 봄부터 여름까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쓴 것으로, 내게는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이다. 이 글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면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려 하지 않았는데 특별히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리기도 한 이야기들이 있는 이 글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의 부제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서문)

 

그렇지만 곤란하다. 이 지면은 돗자리가 아니고(신문이라고는 하지만 깔고 누울 수는 없고), 나는 지금 소풍을 나온 게 아니다. 좋은 걸 단지 좋다고만 말하고 끝낼 수 있는 독자의 사치를 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줄거리를 적당히 요약하고, 몇몇 구절들을 먹기 좋게 썰어 발췌한 후 몇 스푼의 분석과 감상(기호에 따라서 서평자 본인의 개인사를 함께 넣으셔도 좋겠다)을 버무린다는 일반적인 ‘레시피’도 통하지 않는다. 뜬구름을 요약(혹은 요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기껏해야 구름을 닮은 솜사탕을 조금 떼어내, 마치 그것이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만지작거린 후, 더 이상 솜사탕이라고 부를 수 없을 그것의 잔해를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후련함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어딘가로 튕겨 버리는 정도의 일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구차한 변명. “따라서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자유연상의 핵심적 사유를 이루는 것, 몇 가지를 파편적으로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문학동네 2011 겨울호, 645쪽)는 평론가 이도연의 문장은 같은 변명의 조금 덜 구차한 버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여기 몇 가지 단서가 있다. 1) 뜬구름 2) 표류기 혹은 체류기 3)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4) 재미에 대한 그의 생각. 더없이 적확함에도 불구하고 1)의 비유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에겐 말 그대로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2) 또한 작품의 탄생 배경에 대한 부족함 없는 설명이지만 그것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하지는 않는다. 3)은 정영문이라는 작가의 DNA를 이루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충동으로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전작 <바셀린 붓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문제는 4)다. 재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는 이렇게 쓴다.

 

잠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재미없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면, 모든 종류의 소음, 거의 모든 음악, 폭력적인 것, 우울, 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그런 소설들에 낯간지러운 찬사를 늘어놓는 평론가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재미없으니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평론가로서 소양이 없거나 한 인간으로서 위엄과 자존이 없거나 두 가지 다일 거라는 얘기만 하도록 하자), 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잠언 풍의 시, 상식적인 것, 뻔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 구김살이 없는 사람, 묘한 구석이 없는 사람, 권위를 온몸으로 풍기는 사람, 부지런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구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말이 많은 사람들,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들, 유머는 알지 못하고 우스개밖에 모르는 사람들, 뭐라 말할 수 없게 말할 수 없이 재미없는 사람들(이들은 정말 재미없다) … (중략) (94쪽)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작위의 세계>를 두고 “전통적이지 않은 소설,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소설, 등장인물의 행위보다 생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소소한 소설, 감동을 주지 않는 소설(그런 소설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평론가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재미없으니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평론가로서 소양이 없거나 한 인간으로서 위엄과 자존이 없거나 두 가지 다일 거라는 얘기만 하도록 하자), 반(反)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하지는 않은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 소설이 뭔데? 좋은 질문. 그것은 바로 이런 것들로 채워진 소설이다.

 

그림자, 구름, 바람, 안개, 어떤 이유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세상의 모든 물고기들, 땅속에 굴을 파고 사는 모든 동물들, 짝짓기 철이 되어 예민해진 동물들, 날씨, 나무들, 주정뱅이(이들은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없기도 하다), 어린 개구쟁이들과 어른이 되어서도 개구쟁이 같은 데가 있는 사람들,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들 가운데는 재미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동냥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지들, 꿈이 너무 크지 않은 아이들, 나체주의자, 여자에게 퇴짜 맞거나 퇴짜 놓은 기억들, 복수에 대한 어떤 생각들, 말로 하는 놀이,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병, 가난(부유함이 재미있을 수도 있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하지만 그 자체는 재미없는 데 반해 가난은 가난해서 떨 수밖에 없는 궁상으로 인해 재미있을 수도 있다), 잔뜩 게으름 피우기, 자유자재로 말들을 갖고 놀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 아무것도 아닌 뭔가에 대해 혼자만의 이론을 펼치는 것, 혼자서 세상의 이런저런 것들을 조용히 비웃으며 험담하기, 그리고 뭔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생각하기와 같은 것들… (중략) (95쪽)

 

분명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이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소설이고, 다른 어떤 소설보다 더욱 소설답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책의 뒤표지에 적힌 “세계의 무의미에 예술의 무의미로 대적하는 것은 이 세계가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전혀 없다는 권태롭고 절망적인 인식에 도달한 작가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비타협적 저항의 방법일 것이다. 정영문은 진정한 무와 무의미의 원천으로서 유아적 세계관과 상상력에 기대어 세상이 강요하는 가짜 의미들과의 대결을 시도한다”는 평론가 김태환의 문장은 비슷한 말의 평론가 버전이다. 문제적 자아와 거대하고 또 무자비한 세계의 대결. 그것이야말로 근대문학의 골수가 아니던가. 물론 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고, 나는 그것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로, 아마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 이야기겠지만, 나는 그런 책을 쓸 생각이 없다. 그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 동시에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고, 그런 일을 자진해서 하는 능력과 인내가 있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하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나는 여전히 이 책에 대해 쓰고 있고, 그렇게 여전히 쓰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고,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거의 늘 내가 별 이유 없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하며,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고, 그런 상태는 내게 아늑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는 약간 난감하다. 문득 어떤 누군가가 숲 속에서 난감해하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는 정영문이 쓴 어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지금 나와 비슷한 상태에 처한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 좀 더 다가가보려 했지만 그 인물이 느꼈을 난감함만 다시 느꼈다. 정영문은 이렇게 썼다.


나는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었고,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거의 늘 내가 별 이유 없이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며,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고, 그런 상태는 내게 아늑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는 약간 난감했다. 문득 어떤 누군가가 숲 속에서 난감해하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는 내가 쓴 어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지금 나와 비슷한 상태에 처한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 좀 더 다가가보려 했지만 그 인물이 느꼈을 난감함만 다시 느꼈다. (187쪽)

 

나는 계속해서 내가 읽은 것들에 대해 두서없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 나자 점차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멍한 상태에 있었고, 그런 상태에 있을 때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치 모든 생각을 씻어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할 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있었고, 그런 상태에 빠지기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잠시 생각한 후 다시 아무 생각 없이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한동안 있는데, 조금씩 어떤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대단히 작위적으로 여겨졌다. 그 순간에도 이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글로 옮기려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순간의 경험을 글로 옮기기에 유리하게 조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189쪽)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나의 독서 경험을, 그로 인해 발견한 그의 문장을, 다시금 이 글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처럼. 굳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정영문은 계속 쓴다.

 

언젠가부터 그런 식으로, 어떤 순간을 순수하게 경험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의식하며, 의식과 감정까지 조작하며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어떤 잘못처럼 여겨졌고, 나 자신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뻔한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편안함은 내가 어떤 작위의 세계 속 한가운데 있기에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

 

완벽한 작위의 세계가 그 숲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작위를 통해서만 가 닿을 수 있는, 막연하고 난처하고 혼란스러우며, 부자연스럽고 어둡고 가망이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깊어지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고, 작위로써 완성해갈 수밖에 없는 삶이 내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무위의 허구의 세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완벽한 작위의 세계가 그 숲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이미 내가 그 세계 속에서 지내온 지 너무도 오래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190쪽)

 

결국 이것은 우리가 만들었고, 스스로 갇혔으나 이미 익숙해졌기에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며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그 모든 작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것을 흔한 자연예찬/문명비판 따위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작위적인 세계를 작위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이중의 작위이고, 그에게는 더 이상 작위가 아닌 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역설적 작위이며,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어떤 작위다. 결국 그것은 그가 쓰고 또 추구하는 소설의 세계, 부당하고 또 무거운 의미들이 사라진 가벼운 언어들의 세계다(그리고 이것은 할 말이 떨어진 궁한 서평가가 억지로 조립한 문장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 아닌 뜬구름이고, 이제 우리는 1)로 돌아올 수 있다. 정영문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 마지막 장은 오직 구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결국에는 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도, 이 소설 전체도 사실은 구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의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70쪽)

 

이것은 다름 아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고,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이 반드시 던져야 할 그런 질문이다. “좋아, 필사적으로 말하는 당신의 성의를 봐서라도 이 소설이 뜬구름 같은 소설이라는 건 인정해주겠어. 그런데 이봐, 이 자리는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잖아. 2011년 올해의 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혹해서 이 지루한 글을 끝까지 보고 있는 거라고. 도대체 이 책이 올해의 책이라는 근거가 뭐야?”

 

사실 당신보다는 내가 더 지쳤다. 때론 엉터리 같은 글을 쓰는 일이 더 힘든 법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나는 ‘적절한 권위에의 호소’라는 비장의 무기를, 여전히 효과적이고 어쩌면 작금의 현실에서야말로 진정으로 효과적인 ‘기계 장치의 신’을 꺼내들 작정이다. 당신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직접 물어본 바에 의하면) 정영문도 좋아하는 박민규의 말이다. 2010년 출간된 <바셀린 붓다>의 추천사를 박민규는 이렇게 썼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금 당신의 손에 들려진 이 책이 단순한 한 권의 소설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이것은 정영문의 소설이고, 지금 당신은 정영문과 함께하고 있다. 대체 한국문학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게야! 훗날 분통을 터트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말없이 정영문의 소설을 그에게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영문은 - 지금 이 순간 - 결정적인 - 많은 판결을 뒤엎을 만한 - 한국문학의 ‘알리바이’다.

 

이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당신이 ‘정영문’의 목격자가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그때 나는 정영문을 읽었어, 라고 언젠가 당신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며 일본이며, 단체여행 사진을 잔뜩 늘어놓은 자리에서 난 모로코를 다녀왔어, 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로코라고? 바셀린처럼 끈적한 누군가의 질문을, 혹은 부러움을 당신은 분명 받게 될 것이다. 잘 짜인 인생의 알리바이란 모쪼록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깐, 그래 나도 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작’에 붙여진 추천사라고. 비록 권위로 치자면 박민규의 발톱의 때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 무리에서 가장 작아 왕따를 당하곤 하는 한 불행한 친구의 몸통에 돋은 작은 돌기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작위의 세계>가 <바셀린 붓다> 보다 더 ‘재미’있다고. 박민규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추천사를 다시 한 번 쓰는 일을 반대하진 않을 거라고. 다 떠나서, 이런 소설을 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당신의 불행이라고. 물론 이 책의 매력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무능이다. 그리고 정영문은 당신의 불행과 나의 무능에는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그러니까 조금 느린 걸음으로, 어떤 작위의 세계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1223172026



 
 
한수철 2012-01-09 20:05   댓글달기 | URL
만약 정영문 작가가 어떤 경로로든 이 글을 읽고 난 뒤 술 한잔 사고 싶군 하는 식으로 입장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내가 볼 땐 거의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ㅎ

poptrash 2012-01-10 00:55   URL
언젠가는 한수철 님이 술 한잔 사고 싶은 글을 쓸 테야요 ㅎㅎ

ARS)031-2020 2012-01-09 20:14   댓글달기 | URL
만약 행님이 술 한 잔 마시지도 않고 이 글을 쓴 거라면 행님은 이뻐~ 섹시해~ (개콘을 참조하세요) 근데 모로코라고? 저는 그게 모나코와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어요. 정영문이 각인된 인생의 알리바이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지기는 했으나 저는 게으르니까 당장은 읽지 않겠습니다. 사실, 책이야 어찌됐든, 술 한 잔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poptrash 2012-01-10 00:56   URL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한데... 아마 한 잔쯤은, 마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인데. 병원 생활에 너무 길들여지다보니 이젠 이 시간만 되면 졸려서 눈을 못 뜨겠네. 사실, 세상 많은 일이야 어찌됐든, 대개는 술 한 잔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구차달 2012-01-09 23:49   댓글달기 | URL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재미없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면' 에서 주욱 열거 되는 것 중에 이 놈이 가장 눈에 들어 오네요. '자의식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자의식 과잉의 밀도가 높은 소설임을 증명해 줄런지 어떨런지 어떤 작위로 뜬구름 잡는 소릴 하는지 무척 궁금해지네요. ^^

poptrash 2012-01-10 00:56   URL
구차달 님은 분명 좋아하실 것 같아요. 내기를 해도 좋아요. ㅎㅎ

후와 2012-01-10 01:21   댓글달기 | URL
액땜 한 번 크게 하셨더군요. 이젠 완쾌된 건가요? 싱거운 얘기겠지만 올해 좋은 일이 많을 모양이네요. 아무튼 돌아오셨으니 다행입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는 책만 가지고 있고 아직 보진 못했는데 팝님이 추천하시니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네요^^

poptrash 2012-01-10 01:25   URL
네. 사실 어느 순간 이후로 항상 나빠지기만 한 몸이라, 이 정도면 ㅎㅎ 후와 님 이 책 전부터 읽는다고 말씀만 하시고, 빨리 읽어주세요!

영구 2012-01-10 19:28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엉 어디 아프셨나요? 송년회와 신년회의 나날을 보내시느라 업데이트가 없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poptrash 2012-01-11 01:52   URL
본격 송년회 시즌을 눈앞에 둔 24일 오전에 하필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를 지나다 90중 추돌사고를 온 몸으로... -_-; 덕분에 술 없는 연말을 보냈지만, 굴하지 않고 새로운 해의 새로운 술을 마시고 있답니다.

영구 2012-01-11 19:14   수정 | 삭제 | URL
헉 오래 입원하신 것 같은데 많이 다치셨나 봐요. 혹시 앞으로 흐린 날마다 여기저기 쑤시는 그런 ㅠㅠ

poptrash 2012-01-12 00:43   URL
아무래도 그런 날에는 술을 마셔야 할 듯 합니다.
 
라캉으로 시 읽기 - 이승훈의 해방시학 
이승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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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글을 씁니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글을 쓸 필요가 없잖아요. 아니면 글쓰기가 고통스러우면서 행복하니까 쓰겠지요. 즐거운 고통, 이런 소리를 하면 미쳤다고 해요. 그럼 시를 미쳤다고 씁니까? 미쳤기 때문에 쓰지, 미치지 않았는데 미쳤다고 씁니까?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어요? 그럼 이것도 미친 소립니까? 고통스러우면서 즐거운 게 어디 있습니까? 주이상스, 곧 고통과 쾌락이 같이 있기 때문에 시 쓰고 그림 그리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돈도 안 생기는데 미쳤다고 씁니까? – 308쪽
그러나 이 시대에도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많은데 모두 낭만주의자들입니다.– 186쪽


 
 
구차달 2011-12-19 13:36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저도 언젠가 생활이 바닥을 기어 다닐때 오히려 이런 저런 단상들이 마구 떠 올랐고 그것을 노트에 다 정리하고 났을때의 개운함과 알 수 없는 가타르시스는 잊을 길이 없어요. 중독현상 같아요. 결국 미친거지요. ^^;

poptrash 2011-12-20 02:30   URL
이 책 무척 재미있어요,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읽어보세요. ㅎㅎ 우리는 모두 미쳤지만 아무튼 살고 있고, 잘 살아야겠지요. 화이팅!

손님 2011-12-19 17:25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그래요. 고통과 쾌락이 함께하지요.

poptrash 2011-12-20 02:31   URL
그래요. 때론 좀 슬프죠. 슬퍼도 살고, 살아서 슬프고.
 

  보르헤스의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이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다. 기존에 출간된 책을 전집에 넣어 다시 출간하거나, 번역을 다듬어 개역판을 내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한 출판사에서 기존의 번역본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번역으로 병행 출판하는 일은 여간해선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와 <노르웨이의 숲>(임홍빈 옮김, 문사미디어 펴냄) 정도. 그런데 보르헤스라니, 황병하 판의 빼곡한 각주와 까만 표지의 질감을 빼놓고 어떻게 보르헤스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새로운 번역을 세상에 내놓는 역자의 변은 이렇다. “<픽션들>이 보여 주는 허구적 이야기의 참맛, 즉 독자들의 호기심 유발, 교묘하게 구성된 서스펜스, 뜻하지 않은 결말 등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번역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판단하에 독자들의 기대 지평선의 변화에 부응하여 보르헤스 사망 25주년을 맞이한 새로운 번역본을 선보이게 되었다. 덧붙여 각주는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으로 조정했음을 밝혀 둔다.”(232쪽) 황병하 역의 보르헤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본문이 다섯 줄, 각주가 스물여덟 줄인 페이지(이를테면 64쪽)와 본문이 두 줄, 각주가 서른세 줄인 페이지(심지어 65쪽)를 보면서 장르적 쾌감을 좇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과연 새로운 <픽션들>에는 각주가 많지 않고, 문장의 결도 다르다. 조금 날렵해졌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조에 있어서 최근에 번역된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여전히 보르헤스고, 그의 문장이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의 문장처럼 바뀌는 일(그야말로 보르헤스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작품의 뉘앙스가 달라졌을 뿐이다. 두 번역을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는 분명하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새로운 번역본에서의 제목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의 한 부분을 역자들은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그 어떤 징조나 조짐도 없이 그날이 나의 무자비한 죽음의 날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의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한때 하이 펭의 대칭형으로 된 한 정원에서 놀던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죽게 된단 말인가? 그리고 나서 나는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세기들의 시간,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육지와 바다 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략) 틀림없이 안절부절 못하고 들떠 있을 그 군인이 내가 <기밀>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치 않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앙크르 강변에 주둔한 새로운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 (황병하 역, 147~148쪽)

 

  나는 아무런 조짐이나 전조도 없이 그날이 내게 무자비한 죽음의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한때 하이펭의 대칭형 정원에서 놀던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다음 내 머릿속에는 모든 일이 바로 한 사람에게,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태곳적부터 언제나 일어나는 일들, 그런 일들은 오로지 현재에 일어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는 것이다……. (중략) 나는 그 용사가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틀림없이 행복해하고 있을 것이며, 내가 ‘기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밀’은 바로 앙크르 강변에 주둔한 새로운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였다. (송병선 역, 111~112쪽)

 

  전체적인 문단의 속도감에서도 차이가 나지만, 세세한 부분들, 이를테면 두 번째 문장 같은 경우 두 번역이 주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황병하의 “나의 아버지가 죽었는데도”는 조금 뜬금없어서 독자에게 어떤 추측을 요구하지만(아버지가 화자를 위해 대신 죽기라도 한 걸까?),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은 별 무리 없이 죽음을 앞둔 이의 탄식으로 읽히는 것이다. 특히 서로 다른 접속 부사의 사용이 눈에 띈다.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세기들의 시간,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와 “태곳적부터 언제나 일어나는 일들, 그런 일들은 오로지 현재에 일어난다”, 혹은 “육지와 바다 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와 “하늘과 땅과 바다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는 것이다”를 비교하면 차이는 분명하다. ‘그런데’가 사라지면서, 혹은 ‘그런데’가 ‘그리고’로 바뀌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문장이 된 것이다. ‘틀림없이 안절부절 못하고 들떠 있을’ 군인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틀림없이 행복해하고 있을’ 용사 또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 문장들도 존재한다. “일단 내가 죽어버리면 나를 난간 너머로 밀칠 경건한 손들 같은 것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황병하 역, 131쪽)와 “내가 죽으면, 자비로운 사람들이 나를 난간 위로 던져 버릴 것이다”(송병선 역, 98쪽)는 정반대의 문장이다. 둘 중 하나는 오역이라는 말인데,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이전에 번역된 황병하의 것이 오역일 가능성이 크겠다. (실제로 송병선은 2007년 3월 교수 신문의 ‘최고 번역본을 찾아서’라는 꼭지를 통해 황병하 본의 오역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고 송병선의 번역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보르헤스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번역본을 읽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하지만 황병하의 문장이 오히려 읽기 편한 경우가 종종 있고, 각주를 읽는 재미 또한 무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낡은 문장과 단어가 만들어 내는 고색창연함이 주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아는 보르헤스다. 어린 시절, 낡은 세계 문학 전집에서 우연히 읽게 된 고루한 번역의 셰익스피어가 그 이후의 어떤 셰익스피어보다도 셰익스피어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역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수준이 아닌 한, 그것은 오히려 작품의 의미를 더욱 더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것이 보르헤스의 작품이라면- 바벨의 도서관에 비치할 또 하나의 보르헤스를 만드는 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에서 다른 길을 걸어간 보르헤스를 만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처럼.

 

  허버트 쾌인은 로스커먼에서 죽었다. 나는 <타임스>지 문학 부록이 그에게 반 칼럼 크기의 추모 기사밖에 할애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 기사는 부사를 이용해 모든 수식 형용사들의 뜻을 고쳐놓고 있었다(또는 엄중히 훈계를 가하고 있었다). (황병하 역, 116쪽)

 

  허버트 퀘인은 로스커먼에서 죽었다. 나는 <타임스> 문학 부록에서 반 단짜리 추모 동정 기사밖에 할애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부사를 사용해 수정되거나 아니면 질책받지 않아도 될 찬미의 표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송병선 역, 88쪽)

 

  일단 두 번역은 뜻이 다르다(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신판의 번역이 옳을 것이다(비록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내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황병하의 문장이다. 부사를 이용해 모든 수식 형용사들의 뜻을 고쳐놓고 있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퍽이나(부사) 재미있는(형용사) 번역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에 더해 굳이 괄호를 친 후 ‘(엄중히 훈계를 가하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는 보르헤스를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라고 쓰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결국, 두 번역은 모두 장단점이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할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겠지만 함께 보면 더욱 재미있다는, 무척이나 뻔한 이야기. 맞는 말은 언제나 뻔한 법이다. 출판사의 제안에 의해 <호밀밭의 파수꾼>을 새롭게 번역, 기존의 번역본과 함께 병행 출판한 하루키도 언젠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 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흔히 ‘명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매우 뛰어난 하나의 대응’이라는 의미이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고전이라 불릴 만한 작품에는 몇 가지 얼터너티브(대안)가 필요하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263쪽)

 

  옳고 또 뻔한, 혹은 뻔하지만 옳은 그의 말은 어쩐지 내게 벤야민의 번역론을 연상시킨다.

 

  즉 어떤 사기그릇의 파편들이 다시 합쳐져 완성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파편 부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야 하면서 그 파편들이 서로 닮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도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대신 애정을 가지고 또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마치 사기그릇의 파편이 사기그릇의 일부를 이루듯이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외> 137쪽)

 

  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의 그릇으로 한데 접합되어질 조각들은 서로 닮을 필요는 없지만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도 서로 맞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번역은 원작의 의미를 닮기보다는 상세한 부분까지도 애정을 기울여 원작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양식을 통합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작과 번역은 여러 조각들이 한 그릇의 부분인 것과 같이 보다 더 커다란 언어의 조각들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작업’ <문예 비평과 이론> 95쪽)

 

  물론 이것을 오늘의 결론으로 삼기에는 약간의(사실은 엄청난) 무리가 있다. ‘사기그릇의 파편’ 혹은 ‘그릇의 조각들’이라는 비유를 원작과 번역의 관계가 아니라 번역과 번역의 관계로 고쳐야 하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순수 언어’라는 개념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한)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철저하게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오독이지만, 이 글의 어딘가에서 나는 오역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혔고, 오독에 대한 입장 또한 마찬가지다.

 

  너무 가난한 나머지 한 봉지에 2쿼트 분량의 주스를 만들게 되어 있는 쿨 에이드(설탕과 함께 물에 타서 각종 과일 맛을 내는 주스 분말)를 설탕도 없이 4쿼트 분량으로 만들어 먹는 쿨 에이드 중독자 소년의 이야기를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이런 문장으로 끝맺었다.

 

  그 애는 자신만의 쿨 에이드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걸로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았다. (<미국의 송어낚시> 30쪽)

 

  쿨 에이드를 만드는 회사도, 쿨 에이드를 파는 가게 아저씨도, 아마도 소년의 가난한 엄마 아빠도, 소년의 그런 행동이 썩 내키진 않았겠지만, 아무려나, 소년은 그렇게 했다.

 

  나는 당신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1216141734&Section=04

 

 

* 원래는 무라카미 하루키 번역을 중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파인더'와 정영문 번역의 '뷰파인더'를 비교/분석(?) 하려는 계획이었으나, 분량이 한없이 늘어나는 바람에 여기까지.

 

* 결론은 '나 까지 마'라고 할까, 상당히 직선적이고 심플한 이야기네요.



 
 
후와 2011-12-18 16:52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저만의 쿨 에이드 리얼리티를 만드는 재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ㅎㅎ 하루키의 말에도 공감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좋죠 뭐. 두 번역본을 마치 다른 책인 양 읽을 수 있을 테니까요^^

poptrash 2011-12-19 12:04   URL
마치 다른 책인 양 읽는 거, 저도 몇 번 해봤어요 ㅎㅎ 엉성한 기억력 때문이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어땠는지도 기억이 잘...

dreamout 2011-12-18 19:48   댓글달기 | URL
세계문학전집에서 나온 "픽션들"이 예전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과 번역가가 다르군요! 저는 같은 번역본을 세계문학전집에 그냥 넣은거려니 생각했었거든요. 새 번역본도 보고 싶어 지네요.

poptrash 2011-12-19 12:06   URL
네, 보통 그렇게 생각하게 마련인데 좀 신선했어요 ㅎㅎ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 재미있을 듯.

손님 2011-12-18 22:54   댓글달기 | URL
아..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싶었었는데..잘 보았어요..^^

poptrash 2011-12-19 12:06   URL
네... 고맙습니다 ^^

구차달 2011-12-19 01:24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는 `픽션들` 부터 시작해야지 하고 민음사판을 보관함에 담아 두었었는데... 규칙도 잘 지키지 않는 저라는 소인이 책 읽는데는 이상한 순서를 정해둬서 아직 보르헤스는 손에 들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제가 지나치게 고루한 인간이라 어쩌면 `황병하`역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팝님은 페이퍼 하나에도 엄청난 전문성이 느껴지네요. 아, 그 방면의 전문인이시니까 이건 오히려 실례될 말인가요. 아무튼 혀를 내두르며 잘 읽다 갑니다. ^^

poptrash 2011-12-19 12:10   URL
저라는 소인, 이라는 표현이 재밌어요. 단편소설의 제목 같기도 하고 ㅎㅎ 황병하 역의 장점은 다섯 권짜리 보르헤스 전집이 모두 그의 번역으로 나와있다는 거죠. 저는 그냥 이런저런 책에서 어떤 조각들을 찾아 이렇게 저렇게 연결시켜 보는 것밖에 없는데 항상 잘 봐주셔서 고마워요 ^^

faai 2011-12-21 04:06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새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아직 읽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선물용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고색창연함`이라는 표현은 특히 공감이 갑니다. 사실 각주 줄이고 오역만 바로잡아서 `완전판` 따위로 다시 내면 가장 좋을 듯한데 말이죠. 양장에 책값 올리면 적어도 손해는 안 볼 것 같은데... 뭐 저만의 바람이겠죠.ㅠㅠ

poptrash 2011-12-21 15:13   URL
네, 그런데 황병하 씨가 작고하신 마당에 오역을 수정해서 새로 내기는 좀 곤란했던 거 같아요. 전 양장으로 안나와서 너무 좋아요. 개인적으로 양장을 싫어하는지라 보르헤스 전집은 검은 표지의 질감 그대로 계속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 ㅎㅎ

영구 2011-12-21 22:55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툭하면 `오역` 타령! 번역에 정답은 없어! -> 이 타이틀은 오빠가 붙인 게 아니라는 데에 500원을 걸어봅니다. 잡문집은 나온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읽으셨군요.

poptrash 2011-12-22 01:20   URL
정답입니다. 500원은 프레시안에서... 주려나? 잡문집은 벌써 읽었는데... 헉, 나 설마 빠돌이? ㅜ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