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제8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머물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7편 가운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는 유별나게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서도 매우 드물게 몇몇 남자들만 무대에 등장하지만 그 어떤 소설 못지않은 독특한 재미가 넘쳐난다. 비극경연대회에서 이 드라마로 우승했을 때 소포클레스의 나이가 아흔이 다 된 노인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가 장작더미 위에서 화장될 때 불을 붙여준 댓가로 활을 물려받은 명사수였으나 그는 그리스군이 트로이아로 원정을 가던 도중에 무인도에서 그만 독사에 물리고 만다. 독이 퍼져 심한 악취를 풍기며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결국 무인도인 렘노스 섬에 버려지고 만다.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된 병든 필록테테스가 느꼈을 배신감과 절망감이 어떠했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렘노스 섬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가 치른 고역들은 실로 끔찍했다. 석굴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비둘기를 활로 쏘아 잡아 간신히 허기를 채우기 바빴고 병마뿐 아니라 절망과도 싸워야 했으며 오로지 파도와 바위들과 밤하늘의 별들만 친구로 삼을 수 있을 뿐이었다.

영영 구원받을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던 필록테테스였지만 그래도 섬으로부터 탈출할 기회는 기어이 찾아왔다. 그를 버리고 스카만드로스 강변으로 원정을 떠났던 그리스군이 트로이아를 함락하기 위해서 그를 꼭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신탁에 따르면 '필록테테스와 그가 헤라클레스로부터 물려받은 활의 도움'이 없으면 트로이아는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새롭게 퍼졌던 것이다. 그리스군 진영에서 필록테테스를 데려올 임무를 자청하고 나선 인물은 꾀많은 오뒷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였다.

그 두 사람이 렘노스 섬에 도착한 이후 필록테테스와 예전부터 사이가 나빴던 오뒷세우스는 배후에 남아 필록테테스를 유인할 꾀를 짜내기에 바쁘다. 반면 사나이답고 의리가 많았던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는 완강하게 버티는 필룩테테스를 직접 만나 끈질기게 회유와 설득을 거듭한다. 그러는 사이에 그 둘은 결국 '사나이다운 우정'이 싹트고, 어느덧 친구 사이가 된 네옵톨레모스와 필룩테테스는 서로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들 두 사람이 '우정과 배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동안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완력이냐 설득이냐'를 사이에 두고 계속 고민한다. 각자의 처지가 묘하게 얽힌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늘상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대목에서 시인이 들려주는 '설득과 포기, 우정과 배신, 희망과 절망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은 대화'는 이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이나 읽는 독자들을 하여금 극도의 긴장과 몰입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다니엘 디포의 걸작『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싶은 생각이 절로 솟는다. 디포의 소설이나 이 작품이나 둘 모두 '홀로 살아가는 어려움'이 얼마만큼 새롭고 절실한 여러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는지, 또 무인도처럼 고립된 장소에 오랫동안 격리된 채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알려줌으로써 우리가 매일처럼 마주하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간절히 깨달을 수 있도록 환기시킨다.



 - 기욤 기용 르티에르, <렘노스 섬의 필록테테스>, 18세기∼19세기, 루브르 박물관


 - 루이 샤를 앙리 메르시에 뒤파티, <상처입은 필록테테스>, 콩피에뉴 성

 

 - 장 팝티스트 카르포, <고통에 빠진 상처입은 필록테테스>, 1852년경, 발랑시엔 미술관

 
* * *


 네옵톨레모스

라에르테스의 아들이여, 듣기도 거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니, 나는 싫소이다. 간계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내가 타고난 본성이 아니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도 그렇지 않으셨다고 했소.
나는 그 사람을 계락이 아니라 완력으로 데려가고 싶소.

······

그래도 왕이여, 나는 비열한 방법으로 이기느니
차라리 옳은 일을 하다가 실패하고 싶소.


    오뒷세우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군. 나도 그대처럼
젊었을 적에는 혀는 느리고 손은 빨랐다오. 하지만
지금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요, 인생 제반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을.

- 《필록테테스》86∼99행 





         코로스

나는 그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구나.
돌보아줄 사람 하나 없이
다정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늘 혼자서
몹쓸 병을 앓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없을 때마다

당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아, 신들의 계략이여!
아아, 가혹한 운명이 주어진
불쌍한 인간 종족이여!


- 《필록테테스》169∼179행 


 

   필록테테스

그때 내가 파도에 심하게 들까불리다가 바닷가
바위 동굴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자, 그자들은
옳다꾸나 하고 나를 두고 떠나갔소. 거지를
위해서인 양 약간의 누더기와 얼마 안 되는 양식을
남겨두고는. 그자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젊은이여, 한 번 생각해보시오, 그때 잠에서 깨어나
그자들이 떠나고 없는 것을 보았을 때 내 심정이
어떠했겠는지. 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내 불행을
슬퍼했겠는지! 내가 거느리던 함선들은 모두 가고 없고,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았을 때 말이오. 나를 도와주거나 병고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짐을 덜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고통뿐이었소.
하지만 고통만은 아주 넉넉했소이다, 젊은이여!
그렇게 세월이 가고 계절들이 바뀌었소.
이 좁은 집에서 나는 필요한 것을 모두 혼자
해결해야 했소. 내 배(腹)에 필요한 것은
날개 달린 비둘기들을 쏘아 떨어뜨림으로써
이 활이 대주었소. 하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이
무엇을 맞히든 나는 비참하게도 그것을 향해
아픈 발을 질질 끌며 몸소 멀리 기어가지
않으면 안 되오. 또는 물을 길어 와야 하거나,
겨울철에 서리가 내려 장작을 패 와야 할 때도,
나는 힘겹게 기어가 그 일을 하곤 했소.
그리고 불이 없으면 나는 돌에 돌을 문질러
그 속에 숨어 있는 불꽃을 기어코 끌어내곤 했는데,
그 불꽃이 여지껏 내 목숨을 지켜주었소.

- 《필록테테스》271∼297행




      필록테테스

아아, 그대는 죽었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지 않던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구려. 그 두 사람이 죽고
이번에도 오뒷세우스가 살아남았다면, 아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한단 말인가? 이번에는 그자가
그들 대신 사자(死者)들에 포함되었어야 하는 건데.

- 《필록테테스》426∼430행

 


 

네옵톨레모스

그분도 세상을 떴소이다. 간단히 말해,
전쟁은 나쁜 사람은 마지못해 잡아가고
쓸 만한 사람들은 대놓고 잡아가지요

 

   필룩테테스

맞는 말이오. 그래서 묻겠는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나 말솜씨만은 빈틈없는 교활한
그 사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요?

 

네옵톨레모스

그대가 말하는 자가 오뒷세우스가 아니면 누구지요?

 

  필록테테스

그자를 말하는 게 아니오. 테르시테스란 자가 있었는데,
그자는 다들 짜증을 내는데도 짤막하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지요. 그대는 그자의 생사를 알고 있소?

네옵톨레모스

보지는 못했으나, 아직 살아 있다고 들었소.

   필룩테테스 

그럴 줄 알았소. 악한 것은 쉬이 소멸되지 않는 법이니까.
신들은 악한 것은 잘 돌봐주시지요. 신들은 악랄하고
비열한 것들은 기꺼이 하데스에서 돌려보내시는 반면,
올바르고 쓸 만한 것은 항시 이 세상에서 내보내시지요.
신들의 처사를 존중하면서도 신들이 나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런 일을 나는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신들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오?

 - 《필록테테스》435-452행


 

 

 

필록테테스

내 이제 그대를 호송인 겸 사자(使者)로 만났으니,
그대가 나를 구해주시고, 그대가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협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치 않도록.

- 《필록테테스》500∼506행



 

네옵톨레모스

제우스시여, 어떡하지요? 숨겨서는 안 될 것을 숨기고,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함으로써 두 번이나 악당으로 드러나야 하나이까?
 

   필룩테테스

이 사람은, 내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나를 배신하고 뒤에 버려둔 채 출항할 것 같구먼.

 

네옵톨레모스

내가 버리다니요? 하지만 내가 그대를 호송하는 것이 그대에게
더 괴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소.

 

  필록테테스

그게 무슨 말이오, 젊은이여?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소이다.

네옵톨레모스

털어놓겠소이다. 그대는 배를 타고 트로이아로,
아카오이족과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의 군대로 가야 하오.

   필룩테테스 

아니, 뭐라 했소, 지금?

 - 《필록테테스》908-917행




 

      필록테테스

그대 화염이여, 완전한 괴물이여, 온갖 비열함의
가장 가증스런 걸작품이여, 이게 무슨 짓이며,
무슨 속임수란 말이오? 무정한 자여, 그대에게 애원하는
탄원자인 나를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소? 그대는
내 활을 빼앗음으로써 내 목숨을 빼앗은 것이오.
활을 돌려주시고, 제발, 활을 돌려주시고, 젊은이여!
······
오오, 너희들 만(灣)들과 갑(岬)들이여, 오오, 너희들
나와 함께 사는 산속의 야수들이여, 오오, 너희들
가파른 암벽들이여, 달리 말을 건넬 사람이 없는
나의 말을 항상 들어주곤 하던 너희들에게 호소하노라,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맹세해놓고 트로이아로
데려가고 있구나. 그는 오른손으로 약속까지 해놓고 내게서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갖고 다니던 신성한 활을
빼앗아 아르고스인들에게 자랑 삼아 보이려 하는구나.

- 《필록테테스》927∼944행





      필록테테스

하지만 그대는 계략과 강요에 의해 멍에를 지고서야
그들과 함께 항해했지만, 더없이 비참한 나는 자진하여 함선
일곱 척을 이끌었다네. 한데도 그대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나를 수치스럽게 내던졌지.
하거늘 이제 와서 그대들이 왜 나를 끌고가는가? 무엇을 위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대들에게는 오래전에 죽었거늘,
신들께 미움 받는 자여, 어째서 지금은 내가 그대에게 절름발이가
아니며 악취가 나지 않는가? 내가 그대와 함께 출항하면,
어떻게 그대들은 제물을 태워드리거나 헌주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나를 내팽개친 핑계가 아니었던가!

- 《필록테테스》1025∼1034행





      필록테테스

너 석굴(石窟)이여,
뜨거운가 하면 얼음처럼 찬 방이여,
아아, 가련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못할 운명인 게로구나. 아니, 너는
내 죽음의 목격자가 되리라.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너, 내 고통으로 꽉 찬
슬픈 거처여, 무엇이 앞으로
내 일용할 양식이 될 것인가?
어디서 가련한 나는 생계를 이을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내 머리 위에서는 겁 많은 비둘기들이
윙윙거리는 바람을 헤치고 제 갈 길을 가겠지.
내가 그것들의 비상을 제지하지 못할 테니까.

- 《필록테테스》1081∼1094행



 

      필록테테스

생명을 주는 대지가 베푸는 온갖 것들 중에
한 가지도 가진 게 없다면,
누가 이렇게 바람만 먹고 살 수 있겠느냐?

- 《필록테테스》1160∼1162행




      필록테테스

오오, 가증스런 삶이여, 어째서 너는 나를 여기 햇빛 속에
붙들어두고는 저승으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좋은 뜻에서 충고하는
이 사람의 말을 어떻게 귓등으로 듣는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양보한다면? 그때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누가 내게 말을 건넬 것인가? 눈물들이여, 너희들은
내 모든 불행을 보아왔거늘, 나를 파멸시킨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이나 철저히 타락한 라에르테스의 아들과 내가
함께하는 것을 차마 어떻게 눈뜨고 볼 수 있겠는가?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지난날의 수모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그자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할지 예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마음에 한번 악의를
품게 된 사람은 그때부터 매사에 악당이 되니까요.

- 《필록테테스》1148∼1361행




      필록테테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말로 그대를
설득할 수 없다면,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나는 말을 중단하고, 그대는
아무 구원도 없이 종전처럼 살아가는 것이오.

- 《필록테테스》1393∼1396행



 

      헤라클레스

먼저 나는 그대에게 내 운명을 일깨우고자 하오.
그대도 보다시피, 불멸의 영광을 얻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노고를 참고 견뎠는지 말이오.
잘 알아두시오. 그대는 이 고통들을 통하여
그대도 영광스런 삶을 얻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대는 저 사람과 함께 트로이아 땅으로 가서
먼저 쓰라린 병을 치유받게 될 것이오. 그런 다음
그대는 군대에서 가장 탁월한 전사로 인정받아,
이 모든 재앙의 장본인인 파리스를 내 활로 쏘아 죽이고
트로이아를 함락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군대에서 감투상(敢鬪賞)을 받아가지고
그 전리품들을 그대의 부친 포이아스가 기뻐하도록
고향으로, 그대의 조국 오이테의 언덕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오. 그대는 군대로부터 어떤 전리품을 받게 되든,
그중 일부를 내 활에 대한 기념물로 내가 화장된
곳으로 가져가시오. 아킬레우스의 아들이여, 그대에게도
나는 이렇게 충고하오. 그대는 그의 도움 없이, 그는 그대의
도움 없이 트로이아 들판을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함께 먹이를 찾는 두 마리 사자처럼
서로를 지켜주도록 하시오. 나는 아스켈리피오스를
일리온으로 보내 그대의 병을 치유하게 할 것이오.
그 도시는 내 활에 두 번 함락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대들은 그 나라를 함락할 때,
명심하고 신들께 경의를 표하도록 하시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들은 아버지 제우스의 눈에는
덜 중요한 편이오. 경건함은 인간과 함께 죽지 않고,
인간이 살아 있든 죽었든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오.

- 《필록테테스》1418∼1444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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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3 0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며 혀가 손보다 빨라진다고도 할 테지만,
시골 할매와 할배는 늘 혀보다 손으로 움직이며 살아가시지 싶어요.
곰곰이 헤아려 보면, 흙을 만지는 이들은
늘 손으로 살아가는구나 싶습니다.

oren 2014-01-23 14:32   좋아요 0 | URL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혀가 바쁠 일이 없을 듯해요.
손이 혀보다 빠르지 않다면 흙을 일구고 농사를 짓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노릇이겠지요.

다크아이즈 2014-01-2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가 이토록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는 건 몰랐어요.
고전 희곡 보면 우리가 하고픈 말 다 나오잖아요. 그게 신기해요. 내 하고픈 말 이미 옛말에 있었도다!!
예를 들면 위의 밑줄 그은 말
"혀는 느리고 손은 빨랐다", "전쟁은 나쁜 사람은 마지못해 잡아가고
쓸 만한 사람들은 대놓고 잡아간다." 뭐 이런 기막힌 말들이요.
전쟁 대신 죽음도 그렇더군요. 나쁜 사람보다 쓸만한 사람을 먼저 잡아가대요.ㅠ

한 번도 고전 희곡을 구경해보지 않았는데 오렌님 덕에 시도해볼까요?
희곡이니 제본이 눈 아프진 않을 것 같아요.

oren 2014-01-23 14:49   좋아요 0 | URL
소포클레스는 123편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진 작품은 7편에 불과하다고 해요. 3대 비극 작가가 쓴 작품들을 모두 합하면 300편이 넘을 텐데 온전히 남은 작품은 33편(아이스퀼로스 7편, 소포클레스 7편, 에우리피데스 19편)이고요. 세 사람이 쓴 작품들이 모두 다 전해졌더라면 그걸 모두 읽는 데만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뻔 했겠다 싶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아마도 작가 한 사람마다 '셰익스피어 전집' 만큼만 썼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들이 지금껏 모두 전해 내려왔더라면 숱한 사람들이 그 작품들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읽느라 곤욕을 치렀겠지요. 세 사람이 쓴 33편은 누구나 도전해 볼 만한 분량이지 싶어요. 대사가 모두 시로 쓰여져 있어서 페이지마다 여백도 많은 편인데, 빼곡히 달린 '주석'만 아니라면 훨씬 더 편하게 읽어 내려갈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귀국하던 날, 그는 어이없게도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게 피살되고 만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원수가 된 엘렉트라는 그후 7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계부 아이기스토스로부터 끊임없는 학대를 받는다. 그녀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머나먼 타국을 떠도는 동생 오레스테스뿐. 마침내 두 오누이는 극적으로 다시 만나 복수에 성공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엘렉트라가 '혼자서'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데서 시작하여 유랑하던 오레스테스가 친구와 함께 귀국길에 올라 변장한 모습으로 궁정으로 잠입한 뒤 누이와 함께 거사를 완수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은 『엘렉트라』말고도 몇 편이 더 있다. 소포클레스의 스승격인 아이스퀼로스는 이 비극을 온전한 3부작으로 완성하여 비극경연대회에서 자신의 마지막 우승을 장식한다.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3부작)'로 불리는 이 작품들은『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는데, 그 작품들의 주인공 역시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를 비롯한 아가멤논 집안 사람들이다. 괴테는『아가멤논』에 대해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고, 그리스 비극 전작을 우리말로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오레스테스 3부작이야말로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그리스 정신이 낳은 최대 걸작이며, 그 웅장한 구상과 사상의 심오함에서 미켈란젤로의 벽화 정도가 이에 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를 그린 예술작품 또한 무수히 많이 나왔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가멤논 왕가'의 전설 역시 토로이아 전쟁의 전설처럼 '고대 유적 발굴'을 통해 조금씩 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아가멤논 왕가의 비극 역시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한 이야기이고, 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어서 결국 얼마만큼 믿느냐는 각자의 판단력과 상상력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다 싶다.



 - 『소포클레스 비극전집』에 담긴 사진



 -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죽음과 그녀의 죽음을 기뻐하는 크뤼소테미스
   (
소포클레스 비극에 기초한 후고 폰 호프만스틸의 오페라 작품 [엘렉트라]의 한 장면)


※ 아래의 사진들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찾아낸 자료들이다. 사진에 딸린 설명글 또한 원문 그대로다.


 - 왕족의 길을 올라 내려다본 뮈케나이의 왕묘.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은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 뮈케나이 성의 왕묘에서 출토된 금제 가면.
    뮈케나이 왕이자, 트로이아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것으로 추정된다.


 

 

  -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기스토스를 찌르는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 뒤에는 결연한 얼굴을 하고 오레스테스를 응원하는 한 여인과, 환호작약하는 두 여인이 있다.
   오레스테스의 어깨에 팔을 얹은 여인이 엘렉트라인 것 같다.



 
* * *

 

     엘렉트라

···························································· 한데 내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하면,
너는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나더러 행동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하면 우리는 비참한데다 비겁하기까지
한 거야. 내가 비탄을 그친다고 내게 무슨 덕이되는지
네가 가르쳐다오. 아니면 내가 가르쳐줄까?
나는 살이 있지 않니? 물론 비참하게 살고 있지. 하지만
내게는 충분해. 나는 그자들을 괴롭힘으로써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니까, 그곳에도 기쁨이란 것이 있다면.

 - 《엘렉트라》348∼356행

 

 

 

 크뤼소테미스

아녜요. 그 무덤의 장식물은 오레스테스가 바친 거예요.
그러니 용기를 내세요, 언니! 같은 인간들을 같은 신께서
언제까지나 도와주시지는 않아요. 여태까지는
신께서 우리 두 자매에게 적대적이었지만, 오늘 이날은
아마도 좋은 일들이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거예요.

 - 《엘렉트라》915∼919행



 

     엘렉트라

네가 내 말을 따르면 너와 나를 위해 네가 얼마나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인지 보이지 않니?
시민들이나 이방인들 가운데 누군가 우리를
보게 되면 이런 찬사로 우리를 맞지 않을까?
"친구들이여, 이 두 자매를 보시오.
이분들은 아버지의 집을 구출했고,
아직 원수들이 기세등등할 때
목숨을 걸고 살인의 원수를 갚았소이다.
이분들은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하오.
이 두 분은 용감했던 만큼 축제 때와 만인이
모인 곳에서 존경받아 마땅하단 말이오."
만인이 우리 두 자매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얘, 너는 내 말대로 아버지를 위해 애쓰고,
오라비를 위해 수고하고, 나를 이 불행에서 구해주고,
너 자신을 구하도록 해.
치욕적인 삶은 고귀하게
태어난 자들에게 치욕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명심하고.

 - 《엘렉트라》973∼989행



 

 크뤼소테미스

조심하세요, 그러잖아도 불행한 우리가
더 큰 불행을 당하게 될 거예요. 누군가 이런 말을
듣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훌륭한 명성을 얻는다 해도
불명예스럽게 죽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익도
도움도 되지 않아요.
죽는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죽고 싶을 때 죽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법이니까요.


 - 《엘렉트라》1003∼1008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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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22 0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더라도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금지하는 구절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대에 그런 일들이 빈번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있었다는 추측을 하게됩니다. 그리스 문명과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명 등이 인접 문명권임을 고려한다면, oren님 말씀처럼 옛날 이야기로 넘기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헤르쿨레스의 죽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데이아네이라와 헤라클레스 두 사람이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테바이에 사는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와 몰래 동침하여 얻은 아들이다. 제우스의 정실부인인 헤라는 남편과 딴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몹시 미워하여 틈이 날 때마다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헤라클레스는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여 테바이의 왕 크레온의 딸 메가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곧 헤라의 저주를 받아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자식마저 죽이게 된다. 그후 제정신을 차린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테바이를 떠나 델포이에서 받은 신탁이 그 유명한 '12 공업(功業)'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듯하던 임무를 모두 마친 헤라클레스가 두 번째 정식 결혼에서 만난 여자가 칼뤼돈의 왕 오이네우스의 딸 데이아네이라였다. 헤라클레스가 명부(冥府)에 내려갔을 때 멜레아그로스로부터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지상으로 돌아와 하신(河神) 아켈로스와 싸워 이긴 끝에 얻은 아내다.


이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는 헤라클레스가 죽기 직전, 그가 집을 떠나 바깥세상을 전전한지 15개월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데이아네이라와 결혼한 후에도 모험을 일삼던 헤라클레스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데이아네이라는 아들 휠로스를 보내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마침내 전령이 한 무리의 여자 포로를 끌고 나타나 헤라클레스의 근황을 알린다. 전령이 데려온 노예 포로들 가운데는 아름답고 젊은 이올레도 끼어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말자 자신의 남편이 첩으로 데려온 여자임을 알아차린 데이아네이라는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넷소스의 피를 미약인 줄 알고 남편의 옷에 발라 남편에게 보낸다.

결국 '넷소스의 피'를 바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옷섶에 숨어 있던 독기 때문에 살갗이 타들어가는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오이테 산으로 올라가 스스로 장작더미 위에서 산 채로 화장해 달라고 간청한다. 데이아네이라의 '본의 아닌 과실' 때문에 가장 힘이 세고 용감했던 영웅도 결국 아내의 질투심에 희생되고 마는 것이다. 그토록 용맹무쌍하고 힘이 쎈 영웅이었지만 아주 사소한 실수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마는 영웅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선의든 악의든 인간의 의지는 결국 '인간이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제다.



 - 『소포클레스 비극전집』에 실린 사진




 - 『소포클레스 비극전집』에 실린 사진



  

 - 구이도 레니, <데이아네이라의 납치> 1621년


 

 * * *


 데이아네이라

내 미모가 결국 내게 고통을 안겨주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두려움에 넋이 나가 거기 앉아 있었으니 말예요.
하지만 마침내 싸움을 주관하시는 제우스께서 좋게
정리해주셨지요. 그게 좋은 것이라면. 헤라클레스의 아내로
선택된 뒤로 나는 자꾸만 그이가 걱정이 되어 애를
태우고 있으니 말예요. 한 밤이 괴로움을 가져다주면

다른 밤은 그 괴로움을 도로 몰아내곤 하니까요.

그 뒤 우리 둘 사이에 아이들도 태어났지만,
그이는 그 애들 보기를, 마치 농부가 멀리 떨어진 밭을
파종 때 한 번, 수확 때 한 번 보듯 하지 뭐예요.

그이는 그런 생활을 하며 잠시 집에 들렀다가
금세 길을 떠나곤 하지요. 남의 밑에서 봉사하려고.

 - 《트라키스 여인들》24∼35행

 

 

 

 데이아네이라

그대들은 내가 괴로워한다는 말을 듣고
이리 온 것 같은데, 아직은 나를 애타게 하는
번민을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청춘은 안전한
곳에서 자라며 추위에도 따가운 햇볕에도,
비에도 폭풍에도 시달리지 않지요.
그렇게 고생 없이 즐거운 세월을 보내다가
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라고 불리며
밤이면 밤마다 제 몫의 근심을 갖게 되어
남편 걱정에 자식 걱정에 안절부절못하지요.

그때는 어떤 불행이 나를 짓누르는지 알게 되겠죠.
제 불행으로 내 불행을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 《트라키스 여인들》141∼152행



 

 데이아네이라

사랑의 신 에로스에 맞서 권투라도 할 것처럼
주먹을 휘두르는 자는 현명한 자가 못 돼요.
에로스는 신들조차도 제 멋대로 다스리니까요.
에로스는 나도 지배하는데 다른 여인들은 왜
지배하지 못하겠소? 나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겠죠,
만약 이런 증세를 두고 내 남편을 나무라거나 또는
그녀에게는 수치스럽지 않고 내게는 해롭지 않는 일에
그이와 한패인 그녀를 나무란다면 말이오.

 - 《트라키스 여인들》441∼448행




 데이아네이라

그녀의 젊음은 피기 시작하고, 내 젊음은 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사람의 눈은 피는 꽃은 따 모으기를
좋아하지만, 시든 꽃들로부터는 발걸음을 돌리는 법이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헤라클레스가 이름만
내 남편이지, 실은 더 젊은 여인의 남자가 되는 거요.

 - 《트라키스 여인들》547∼551행




        코로스

보라, 소녀들이여, 오래된 예언의
신성한 말씀이 얼마나 갑작스레
우리에게 이루어졌는지!
그 말씀에 따르면, 달수가
다 차서 열두 번째 해가 지나면
제우스의 친아들의 노고들도
끝날 것이라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이 확실히 이행되었구려.
눈을 감고 햇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죽고 난 뒤에도
힘든 노고의 짐을 지겠어요?

 - 《트라키스 여인들》821∼830행



 

            유모

…그러니 누군가 이틀 또는
 그보다 많은 날들을 미리 내다보려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오늘을
 무사히 넘기기 전에 내일은 없으니까요.

 - 《트라키스 여인들》943∼946행

 

 

    헤라클레스 

손들이여, 내 손들이여,
가슴과 등과 언제나 충실하던 나의 두 팔이여,

너희들이 과연 전에 목자들의 악령인, 네메아의
거주자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사나운
괴물인 사자를 힘으로 제압했더란 말인가!
너희들이 과연 레르나의 휘드라와, 반인반마의
잡종으로 거칠고 뻔뻔스럽고 힘이 절륜한 무법자들인
켄타우로스으들의 군사들과, 에뤼만토스 산의 멧돼지와,
무시무시한 에키드나가 낳은 제압할 수 없는 괴몰로서
저승에서 하데스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 머리 셋 달린
번견(番犬)과, 이 세상 맨 끝에서 황금 사과들을
지키고 있던 용을 제압했더란 말인가!

 - 《트라키스 여인들》1089∼1100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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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아킬레스의 무구를 두고 벌이는 아이약스와 울릭세스의 설전
오뒷세이아_11권 저승



















이 작품은 트로이아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일어난 일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죽고 난 뒤 그의 무구를 둘러싼 장수들 간의 쟁탈전에서 오뒷세우스에게 패한 아이아스가 심한 모멸감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스스로 '완전한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담았다. 무구재판에 패한 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극도의 딜레마에 빠진 그는 결국 미친듯이 아군인 그리스 군 진영을 습격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다음날 아침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헥토르의 칼을 땅바닥에 거꾸로 꼽고 그 위에 엎어져 목슴을 끊는다.

이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한 대목인 "적들을 비웃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웃음이 아닐까?"(79행)라는 물음에서 오뒷세우스가 보여주는 놀라운 행동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기는커녕 추락한 적대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며 그의 운명에서 자신의 운명을 본다.'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아는 것이야말로 신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곧 시인의 생각이고 또한 이 작품의 주제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과 '무구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호메로스가 쓴『일리아스』에도 풍성하게 담겨 있다. 여기서는 '아이아스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얼마간 필요하다싶은 대목, 즉 그의 빛나는 무용과 위상을 동시에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아이아스와 헥토르의 대결 장면' 일부분을 인용해 본다. 헥토르는 훗날 아이아스에게서 선물로 받은 혁대로 전차 난간에 묶여 질질 끌려가다가 죽었고, 아이아스는 이 작품에서도 거듭 이야기되는 것처럼 '무구재판'에서 지고 난 뒤 헥토르가 건네준 '칼' 위에 엎어져 숨을 거둔다.


그에게 투구를 번쩍이는 위대한 헥토르가 말했다.

"아이아스여! 신은 그대에게 큰 체구와 힘과 지혜를 주셨고
또 창에서는 그대가 아카이오이족 중에서 가장 뛰어나니,
오늘은 전투와 결전을 중지하도록 합시다.
신이 우리를 심판하여 어느 한쪽에 승리를 내리실 때까지
우리는 차후에도 얼마든지 다시 싸울 수 있을 테니까요.
벌써 밤이 바가왔으니 밤에게 복종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
그러니 자, 우리 두 사람은 서로 훌륭한 선물을 교환하여
아카이오이족과 트로이아인들이 더러 이렇게 말하도록 해줍시다!
'두 사람은 마음을 좀먹는 불화 때문에 서로 싸웠지만
다시 화해하고 친구가 되어 헤어졌도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은못을 박은 자신의 칼을
칼집과 보기 좋게 자른 가죽 끈과 함께 건네주었다.
그래서 아이아스는 자줏빛 찬란한 혁대를 주었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제7권

 
그리스의 이름난 장수 중에서도 아킬레우스 말고는 그 누구도 그에 비견되는 인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략이 뛰어난 후발주자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빼앗기고 만 아이아스는 과연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았을까?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는 얼마만큼 희생되어야 하는가? 적장 헥토르가 선물로 건네준 칼이 자신의 죽음을 장식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 슬픈 영웅은 '아이아스의 딜레마'라는 책 속에서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자신의 딜레마를 풀어 달라고 또다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담긴 사진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담긴 사진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담긴 사진



 - <아이아스의 자살> 에트루리아의 적색 상크라테르 도기, BC 400∼350년 



 
* * *
 

 

          아테나

오뒷세우스여, 신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대는 보고 있는가?
그대는 저자보다 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을, 또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저자보다 더 민첩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오뒷세우스

그런 사람을 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가 내 적이긴 하지만 저는
사악한 미망에 빠져든 그의 불행을 동정합니다.
그의 운명이 내 운명으로 여겨지니까요.
제가 보기에,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환영이나
실체 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테나

그대는 그런 통찰력을 지녔으니 신들에게
절대로 주제넘은 말을 내뱉지 말고,
체력과 재력에서 그대가 누군가를
능가한다 하여 우쭐대며 뻐기지 마라.

무릇 인간사란 하루아침에 넘어질 수도 있고,
하루아침에 다시 일어설 수도 있느니라. 하지만 신들은
신중한 자들을 사랑하고 사악한 자들은 싫어하지.

 - 《아이아스》118∼133행


 

      아이아스

아아, 슬프도다!
너희들 바다의 물길들이여,
너희들 바닷가 동굴들과 해변의 작은 숲들이여!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너희들은
나를 이곳 트로이아에 붙들고 있었구나.
하지만 이제 더는 숨 쉬는 나를 붙들지 못할 것인즉,
아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리라.

 - 《아이아스》412∼417행




      아이아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은 감추어진 모든 것을
드러내고, 이미 드러난 것은 도로 감추는 법.
세상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엄숙한 맹세도 철석같은 마음도 스러지고 마니까.

전에는 그토록 굳건하고 담금질한 무쇠처럼
단단하던 나도 저 여인의 말에 날이 무뎌졌어.
그녀를 내 적들 사이에 과부로, 그리고 내 아들을
고아로 남겨두자니 측은한 생각이 드는구나.

 - 《아이아스》646∼653행




            사자

예언자의 말인즉,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는 과도한 생각을 품게 되면,
너무 웃자라 못 쓰게 된 그런 자들은 필시
하늘이 보낸 재앙에 쓰러진다고 했소.

 - 《아이아스》758∼761행


 

      아이아스

죽음이여, 죽음이여, 이제는 와서 나를 보라!
하지만 그대에게는 나중에 저승에 가서
말하리라. 지금은 찬란한 햇빛이여, 내 그대와,
마차를 모는 헬리오스에게 말하리라, 마지막으로.
그리고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라.
오오, 햇빛이여, 내 조국 살라미스의 신성한
땅이여! 내 아버지의 화로가 놓인 터전이여,
이름난 아테나이여, 우리와 친척간인 도시여!
이곳의 샘들과 강물들이여, 트로이아의 들판들이여,
내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잘 있어라! 내 유모들이여!
이것이 아이아스가 너희들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다.
나머지는 하데스의 집에 가 있는 자들에게 말하리라!

 - 《아이아스》854∼865행




   테우크로스

이 광경이야말로 일찍이 내 눈으로 본 것
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광경이로구나!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이아스 형님! 형님의
발자국을 찾아다니다가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듣고는 지금 형님 곁으로 돌아온 이 길이 내게는
모든 길 가운데 가장 슬픈 길이었어요.


 - 《아이아스》992∼997행



 

   테우크로스

보세요, 헥토르는 죽었지만 결국 형님을 죽일 운명이었어요.
(코로스에게)
그대들은 제발 두 사람의 운명을 잘 살펴보구려!
헥토르는 여기 이분에게서 선물로 받은 혁대로
전차 난간에 묶여 질질 끌려가다가 결국에는
숨을 거두었소. 한편 이분은 헥토르한테서
이 칼을 선물로 받았다가 이 칼 위에 엎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소. 쇠를 불려 이 칼을 만든 것은
복수의 여신이고, 그 혁대를 만든 것은
잔혹한 장인인 하데스가 아니었을까?

 - 《아이아스》1027∼1035행




   오뒷세우스

한때 이 사람은 내게도 군대에서 가장 고약한 적이었소.
내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손에 넣은 뒤로 말이오.
그가 나를 그렇게 대했지만, 나는 트로이아에 온
모든 아르고스인들 중에 아킬레우스 말고는
그만이 가장 탁월한 전사임을 부인할 만큼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지는 않았소이다.

그대는 그의 명예를 정당하게 실추시킬 수 없소이다.
그대는 이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법도를 해코지하는
것이니까요. 용감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모욕하는 것은
옳지 못하오. 설사 그를 미워했다 하더라도 말이오.

 - 《아이아스》1336∼1345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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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뭉치들이 담긴 자루를 꺼내며 드는 생각
    from Value Investing 2014-01-25 15:22 
    고전을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을 자주 경험한다. 마치 옛 사람들이 빤히 알고나 있었다는듯이 천연덕스럽게 '지금' 막 우리들 눈 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헉. 과연 이 사람이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다는 그 사람이 맞아?'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정말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떨 땐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건들에 부닥쳐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고전을 쓴 저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그리스 비극은 모두 33편인데, 그 가운데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다룬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3부작' 말고도 세 편이 더 있는 셈인데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과 『탄원하는 여인들』이 나머지 작품들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시기적으로 『오이디푸스 왕』바로 다음을 배경으로 삼고, 이 작품을 뒤따르는 얘기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작품은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공연은 그가 죽은 뒤인 기원전 401년에 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엔 아흔이 넘은 시인이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한 대목이 담겨 있어 유난히 눈길을 끈다. 그가 코로스의 입을 빌려 노래한 다음 대목은 그리스 비극을 매우 높이 평가했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되도록 일찍 죽는 것이 차선이며, 가장 어리석은 것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온갖 세파에 시달리는 저 노인을 보라! 오래 살면 칭찬도 사랑도 친구도 멀어지고 남는 것은 고생뿐이며, 그것의 구원자는 죽음뿐이다."


(그런데 천병희 선생님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노래는 술에 취해 사로잡힌 반인반마의 실레노스(Silenos)가 미다스(Midas) 왕에게 말해주었다는 인생의 지혜를 소포클레스가 나름대로 부연한 것'이라고 한다.)

온갖 재앙을 다 겪고 난 다음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앞도 보지 못하고 이국 타향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부랑자 신세로 전락한 늙은 오이디푸스의 '비참한 노년'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라면 아마도 '효녀 심청'을 닮은 듯한 딸 안티고네가 늘 곁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지만, 일순간 '삶 자체가 비극'으로 뒤바뀌고 말았던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은 삶의 덧없음을 한탄할 겨를조차도 남겨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토록 완전한 파멸이 있었으므로 죽음이 진정 구원처럼 다가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 *



  오이디푸스

그리하여 친구들 사이에 변함없는 마음가짐도
오래 버티지 못하며, 도시와 도시 사이도 마찬가지요.
이 사람에게는 오늘, 저 사람에게는 내일
즐거움이 쓰라림으로, 그러다가 다시 사랑으로
변하니까요. 지금은 그대와 테바이 사이가
화창한 날씨지만, 다가오는 수많은 시간이
수많은 밤과 낮을 낳고 나면, 그 과정에서
오늘의 소중한 화목도 사소한 이유에서 창에 의해
깨지고 말 것이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612∼620행




  오이디푸스

하지만 원치 않는 친절이 무슨 즐거움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누군가 자네가 간절히 원할 때는
아무 선물도, 아무 도움도 주려고 하지 않다가
자네 마음의 욕망이 다 채워져 친절이 더 이상
친절일 수 없을 때 주는 것과 같은 것이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775∼779행



 ('오이디푸스의 변명'이라 불릴 만한 대목이다.)

  오이디푸스

후안무치한 자여, 자네의 그따위 말에 어느 쪽 노인이
더 망신스러울 거라 여기는가? 나일까, 자네일까? 자네는
자네 입으로 살인이니 근친상간이니 재앙이니 하는 말을
내게 내뱉고 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가련하게도
본의 아니게 참고 견뎠던 것이라네. 옛날부터 우리 집안을
미워하신 신들에게는 그러는 것이 즐거웠으니까 말일세.
사실 나만 떼어놓고 보면, 자네는 내게서 어떤 죄과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네. 그것을 갚기 위해 내가 이렇게
나 자신과 내 육친에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과 말일세.
자, 말해보게. 아들의 손에 죽을 운명이라는
어떤 신의 말씀이 신탁으로서 내 아버지께 다가왔기로서니,
그때는 아버지께서 낳으시지도 않고 어머니께서 잉태하시지도
않아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자네가
그 일 때문에 비난한다면, 어떻게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실제로 그랬듯이, 불행하도록 태어나
누구에게 무엇을 행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내 아버지와
치고받다가 아버지를 죽였기로서니, 이 본의 아닌 행위를
자네가 나무란다면, 어떻게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머니와의 결혼에 관해서도 말하겠네. 가련한 자여,
자네의 누이였던 그분과의 결혼에 관해 말하도록
나를 강요하디니 자네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렇게까지
자네가 불경한 입을 놀렸으니 나도 잠자코 있을 수 없네.
그분은 어머니였어. 그래, 내 어머니였어. 이 무슨 불행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몰랐고, 그분도 모르셨어. 그리고 그분은
자신에게 치욕이 되도록 자신이 낳으신 아들인 내게 자식들을
낳아주셨어. 하지만 나는 이 한 가지만은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의도적으로 나와 그분을 헐뜯고 있지만, 나는
본의 아니게 그분과 결혼했고, 이런 말도 본의 아니게 하는 것이네.
그분과의 결혼에 있어서도, 그리고 자네가
언제나 심한 욕설로 윽박지르는 친부 살해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나를 죄인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960∼990행



 

         코로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되도록 빨리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
그 다음으로 가장 좋은 일이라오.
경박하고 어리석은 청춘이 지나고 나면
누가 고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누가 노고(勞苦)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오?
시기, 파쟁, 불화, 전투와 살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난받는 노년이
그의 몫으로 덧붙여지지요.
힘없고, 비사교적이고, 친구 없고, 불행 중의
불행들이 빠짐없이 모두 동거하는 노년이.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1224∼1238행


 

         코로스

보라, 새로운 재앙들이, 운명으로 무거워진
재앙들이 새로이 닥치는구나, 눈먼 나그네로부터.
아니면 혹시 운명이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일까?
신들의 포고들을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없으니까.
시간은 언제나 그 포고들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다네, 어떤 것들은 넘어뜨리고,
어떤 것들은 다음날 도로 높이 일으켜 세우며.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늘의 저 천둥소리! 오오, 제우스시여!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1448∼1457행



 

      안티고네

불행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도 있나 봐요.
내가 이 손으로 아버지를 모시던 동안에는
즐거울 리가 없는 것도 즐거웠으니까요.

아아,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영원히 지하의 어둠을 입으셨지만,
그곳에 계셔도 저와 이 아우에게
사랑받지 못하시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1697∼1703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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