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학회 선배가 상을 당했다.

내가 갈 것을 알고 다른 분들이 조의금을 부탁했기에

상가에 간 뒤 봉투 네 개를 집어들고 조문실 밖 의자로 갔다.

의자에 봉투를 놓고 이름을 기입한 후 돈을 넣었다.

봉투를 챙겨 조문실에 왔더니 이상하게 봉투가 세 개밖에 없다.

하나가 어디갔지 하는 마음에 조문은 조금 있다 하겠다고 한 뒤 의자로 갔다.

그랬더니 세상에, 봉투는 의자 밑에 떨어져 있었다 (원래 위치는 이보다 훨씬 아래쪽이었다).

 


의자를 옮기려 했더니 의자는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채였고,

의자 밑으로 손을 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조문실로 가서 뭔가 기다란 것을 찾았더니 벽에 우산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접이식 우산 말고, 막 쓰는 비닐우산이었다.

그 우산을 의자 사이에 넣고 봉투를 맨 위쪽으로 옮겼고

벽과 의자 사이의 틈으로 손을 넣어 겨우 봉투를 꺼냈다.

한숨 돌리고 다시 봉투를 든 채 조문실로 갔더니

이번에도 봉투가 세 개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어 조문은 조금 있다 하겠다고 한 뒤 

밖으로 나가보니 복도에 봉투 하나가 떨어져 있다.

병원에 사람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조문을 마치긴 했지만, 접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날 좀 이상하게 봤을 것 같다.

두번이나 "조금 있다 올게요!"라며 봉투를 회수해 갔으니.

오늘의 교훈. 틈이 있는 의자에선 봉투를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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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08-23 08:13   댓글달기 | URL
저는...전혀 예상 혹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는 것 또한 인생이고 인간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한주였어요. ^^

마태우스 2015-08-23 12:51   URL
아 네....저도 순오기님 덕분에 즐거웠던 한주였어요. 떡갈비의 진수도 엿볼 수 있었구요. 마지막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했어요!

moonnight 2015-08-23 09:45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런! 당황스러우셨겠어요. 두 번이나ㅠㅠ 그런데 죄송하게도 너무 웃겨서 빵 터졌네요^^;

마태우스 2015-08-23 12:53   URL
헤헤, 저때는 정말 당황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는데 지나고나니 재미있는 추억이 되더라고요^^ 그나저나 요즘 알라딘 화재의 글에 싸움 페이퍼가 유독 눈에 띄더군요. ㅜㅜ 대주주가 방심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 듯??

moonnight 2015-08-23 13:24   URL
그러니 대주주님이 좀 더 관심보여주셔야^^

바람돌이 2015-08-24 00:45   댓글달기 | URL
ㅎㅎ 난감... 한번씩 이런 날들이 있죠. 어이없는 실수를 연짝으로 하게 되는....

마태우스 2015-08-24 23:57   URL
호호, 그래도 뭐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죠. 사실 엊그제는 제가 고속도로에서 트럭한테 받혔어요. 제 실수는 아니지만 아무튼 큰일날뻔했다는...다행히 안다쳤고 차만 작살났어요.

바람돌이 2015-08-25 01:11   URL
허걱! 정말 큰일날뻔 하셨네요. 천만 다행이에요.
고속도로에서 사고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운전 조심조심하세요.

Mephistopheles 2015-08-24 10:26   댓글달기 | URL
전 왜 이런 두번이나 연거푸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일보다는 이미지에 달린 저 빨간 화살표가 예전에 비해 훠얼씬~~~~ 깔끔하고 간결해보이는 것에더 눈이 갈까요......

마태우스 2015-08-24 23:58   URL
어그런가요 제가 좀 성숙해진 탓인가요 하하. 나이를 먹다보니 그렇게 됐나봐요. 그나저나 메피님 안녕하셨어요.
 

독서토론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다.

처음 한두번은 진지하게 책 얘기를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친목모임으로 변질돼 술만 마셨으니까.

내가 몸담았던 동아리의 '졸업생 모임'에서 독서모임이 만들어졌다고 했을 때도

그다지 참여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첫 모임을 간 이유는 거기서 다루는 책 세권 중에 내 책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었다.

참석자 중 한 명이 "그래도 첫 모임은 우리 동아리 사람이 쓴 책으로 해야지 않겠느냐"고 우겼다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도 안가면 나쁜 놈 같아서 마지못해 가겠다고 했다.


막상 가보고 나서 놀랐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을 줄 알고 대충 앉아있다 밥이나 사야지 했는데,

이게 웬걸. 열명의 참석자 중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다섯명이나 됐고, 

가장 젊은 후배도 마흔을 넘겼다.

나이가 많은 것의 좋은 점은 살아온 경험이 많다보니 책을 읽고 난 뒤

자기 경험과 결부시키기가 쉽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 중 몇 명은 어린 시절 몇 트럭분의 책을 읽은 독서광이었기에

토론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나도 모르게 '다음 모임에도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해 버렸다.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은 박범신의 <소금>에 대한 얘기를 할 때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소금>은 가족들한테 헌신만 하다가 버려지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 소설이다. 

몇트럭의 책을 읽었던 이의 말, "사건을 너무 많이 배치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재미는 있을지언정 소설로서의 가치는 낮다."

그와 필적할 책을 읽은 이 역시 이 점에 동의했는데,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소설을 읽을 때 늘 비판적으로 읽어요. 이 소설의 문제점은 뭐다, 이런 것만 눈에 들어와요."

이유가 뭘까. 어릴 때 소설의 전범이라 할 고전을 너무 많이 읽다보니

웬만한 책이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리라. 

반면 적당한 양의 독서를 한 친구의 말은 이랬다.

"어릴 적 아버지가 우리한테 그리 잘해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원망만 했는데,

이 책을 보니 아버지한테 좀 잘할 걸 그랬다 싶네요."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아버지한테 맞고만 자라서 원망만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저도 이 책을 보면서 아버지가 저한테 잘해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됐어요."

독서광들과는 달리 윗 친구와 나는 그닥 고전을 많이 읽지 않았고,

그 덕분에 소설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게 이 소설이 가슴에 와닿은 이유였다. 

서른까지 거의 책을 읽지 않고 지냈다는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데,

그게 유리한 점도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다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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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08-22 23:59   댓글달기 | URL
우와 본인의 책이 토론되는 모임에 참석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재미있었다 하시니 역시 마태우스님이시네요. 저라면 초긴장될 것 같은데요^^;

마태우스 2015-08-23 02:08   URL
앗 달밤님이닷. 그 책이 집나간 책이었는데요, 뭐 친한 사이에 설마 나쁜 말 하겠나 싶었어요. 독서광들은 그닥 좋지 않았던 표정이었고 아예 언급을 안하더군요 ^^ 아는 사이가 좋아요!

오로라^^ 2015-08-23 12:19   댓글달기 | URL
제 요즘의 고민은 책을 읽으면 좋은 점만 보이고 비판할 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직 내공이 쌓이질 않아서 그런거겠죠. 좀 폼나게 비판도 해가며 이른바 독후감에서 서평으로 진보해야 하는거 아닌가 싶은데.. ㅎㅎ 아직까지도 모든 작가들은 다 위대해만 보입니다. 저는 한페이지 감상을 쓰는 것 조차 어려우니까요^^ 독서모임에서도 작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훨씬 똑똑해보이는데 저는 그저 여기가 좋았네 저기가 좋았네 말해주는 수준이에요^^ 마태우스님 글을 읽고나니 묘하게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마태우스 2015-08-23 12:50   URL
저도 사실 책을 읽고나서 씨니컬하게 비판하는 게 멋져 보여요. 책 많이 읽으면 그게 될 줄 알았는데, 아무리 읽어도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좌절하고 그랬는데, 책이란 게 자기 느끼기 나름이잖냐 이러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지요. 우리같은 사람도 있어야 저자도 행복하지 않겠어요^^ 암튼 반갑습니다! 동지님.

자몽사랑 2015-08-23 13:40   댓글달기 | URL
저는 거의 마흔까지 책을 읽지 않았다는 컴플렉스
때문에 독서토론이나 글쓰기에 엄청난 부담을...하지만 중년이되어 즐거운일을 발견했기에 잘하고픈 욕심을 버리지 못하네요
그래서 독서토론은 맘편히 얘기하며 제게는 힐링하는 시간이랍니다.

집나간책 너무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읽는내내 혼자 빵빵 터졌습니다.읽고나니 유쾌하신 인간 마태우스님이 궁굼해지더군요..
나오신 tv프로그램 다시보기해야 할까봐요..

마태우스 2015-08-23 13:44   URL
어머나 반갑습니다. 저는 서른이니 저보다도 십년 더 늦게 시작하셨군요. 나이가 어떻든간에 살아생전 책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글구 저기 소개 안한 제 책이 집나간 책이라는 거 어케 아셨어요. 부끄럽네요^^ TV 프로그램 다시보기 하시면 실망하실 거예요. 전 TV에선 하나도 못웃겼거든요. 글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자몽사랑 2015-08-23 13:56   댓글달기 | URL
어찌 서민 교수님을 모를 수가있나요!!(교수님 의 재치있는 글들은 읽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집나간책 읽다가 알라딘 서재에서 활동하시는것 같길래 반가운 마음에 친구 신청을.. ㅋㅋ
반갑습니다^^
 
범인에게 고한다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0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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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천안에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은 인천이다.

거리로 따지면 더 먼 곳도 많지만,

부산과 울산, 여수 등 웬만한 곳은 다 기차로 갈 수 있는 반면

인천은 오직 버스로 가는 수밖에 없다 (터미널까지만 1시간 반이 걸린다).

버스는 기차보다 몇 배 더 피곤한 느낌을 주는지라

체감상 울산보다 인천이 더 멀게 느껴진다. 

어제, 그 인천을 갔다 왔다.

전날 경북대병원 모친상에 다녀온 것까지 겹쳐,

몸살이 나버렸다.


몸이 안좋을 때는 되도록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끙끙 앓는 와중에 전날 읽었던 책 생각을 하며 버티는 중이다.

<범인에게 고한다>라는 책으로,

저자인 시즈쿠이 슈스케는 내가 처음 접하는 작가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어떻게 범인을 잡느냐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재미를 준다.

제목에 나온 것처럼 TV를 통해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나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내부정보를 흘리는 경찰 내부의 스파이와의 싸움이 더 재미있었다.

그 스파이가 정보를 유출하는 이유는 그걸로 좋아하는 여자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인데,

그런다고 해서 여자가 넘어올 리도 없지만,

이 가느다란 끈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게 남자들의 일면인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점들.

1) 청문회 때 시종일관 ‘모른다’로 일관하는 정치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 대기업 총수가 고위직 공무원이 해명 기자회견에 임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

...왜 저런 추태를 보이나 하고 의아했는데, 지금 자신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마음은 이미 자취를 감췄고 이제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돌변한 뒤틀린 심사밖에 남지 않았다.“ (128쪽)

2) 내가 그렇게까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326쪽을 읽다보니 갑자기 주인공 형사가 이렇게 묻는다.

아리가는 어떻지?”

질문을 받은 형사가 대답한다.

최근에는 밖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리가’가 도대체 누구였지? 그새 까먹다니 난 바보야, 바보!

마구 자책을 하다가 할 수 없이 그전 페이지를 다 뒤져가며 ‘아리가’를 찾으려 했다.

다행히도 ‘아리가’는 326쪽에 이르러서야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었고,

그 인물에 대한 정보는 책 맨 마지막에 나왔다. 

3) ‘청출어람’의 의미에 대해 새삼 알게 됐다.

주인공이 묻는다.

남색 (쪽빛)과 청색 (파란색) 중 어느 게 더 진한 색일까?”

이 질문에 부하 형사가 대답한다.

남색 말씀이시죠? 청출어람이라고, 쪽은 푸른 물감보다 더 푸르다, 라는 말이 있으니 파란색보다 진한 색이겠네요.” (394쪽)

이 구절을 읽고 난 그게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주인공은 나와 부하 형사의 무지를 깨우쳐 준다.

‘청출어람’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청어람(而靑於藍)’이고,

이걸 종합하면 이런 뜻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

즉 남색보다 더 진한 건 청색이다.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기시감이 들 수도 있지만,

범인과의 싸움 말고도 공을 가로채기 위해 경찰끼리 다투고,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사랑을 위해 배신을 일삼는 등 인간사의 온갖 면들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소설이니,

장거리 여행을 떠날 분들이 챙겨가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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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07-26 13:40   댓글달기 | URL
엥 댓글이 사라져버렸다는ㅠㅠ;
어쨌든;;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경북대병원까지 다녀가셨다니, 그이후 인천ㅠㅠ 몸살날 만도 해요ㅠㅠ
책은 바로 보관함으로^^

마태우스 2015-07-26 23:03   URL
네 덕분에 쾌차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낮잠을 좀 잤어요. 자는 동안 악당한테 쫓기는 꿈을 꿨지만, 몸은 한결 낫습니다 역시 잠이 보약...! 그나저나 경북대 근처엔 달밤님이 계셨군요 어째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했더니ㅣ...!!!

곰곰생각하는발 2015-07-26 16:44   댓글달기 | URL
역시 차 안에서는 추리소설보다 좋은 것도 없지요.
차 안에서 < 제2의 성 > 읽어보십시오. 가뜩이나 짜증나는 데 더 짜증이 납니다.. ㅎㅎㅎ
저도 사람 이름을 까먹곤 해서 아예 사람 이름만 나오면 노란 색연필로 밑줄을 긋습니다.
그래서 어라 ? 아리가 ???! 아리가가 누구지 ? 라고 할 때 읽었던 부분을 다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 이름에 밑줄을 안 그으면 아리가 가 나오는 대목 찾느라 한참 걸리더라고요...

마태우스 2015-07-26 23:04   URL
맞아요 추리소설 짱입니다. 글구 사람이름 나올 때마다 표시를 해놓으면 도움이 되겠군요! 이래서 나이 젊을 때 한권이라도 많이 읽어야 하는데, 나이들면 색연필이네요^^ 팁 감사합니다

보슬비 2015-07-27 00:09   댓글달기 | URL
방콕하는 사람을 위한 책도 권해주세요~~ ㅎㅎ
 
차단
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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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6년간 내가 구입한 책은 1658권이다.

1년에 100권 가량으로, 한 달에 열권도 채 읽지 못한다는 얘기다.

산 책을 모두 읽은 게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내 독서량은 더 떨어지는데,

가장 슬픈 얘기는 내가 80까지 살아도 5천2백권을 더 만나볼 수 있단다.

눈이 밝고 체력이 좋을 때 한 권이라도 더 읽자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본다.

또한 이 통계는 내가 제일 즐겨 읽는 분야가 한국소설이고, 2위가 추리/미스터리소설이라는 걸 알려 줬는데,

이 정보를 접하기 전까지 난 추리/미스터리가 내가 제일 선호하는 분야인 줄 알았다. 


엊그제 부산에 갈 때 집어든 책도 스릴러에 속하는 <차단>이었다. 

이 책은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의 자문을 얻어 쓴 스릴러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 놓고도 오랫동안 책장에서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책을 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이 책에 흠뻑 빠졌고,

그날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을 왕복하는 4시간여 동안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 남친이자 변태인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20대 여자가 있고,

자기 딸이 납치된 40대 남성 법의학자가 있다.

딸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죽은 시체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시체가 하필이면 20대 여성이 피신해 있는 섬에 있다.

그래서 법의학자는 우연히 연락이 닿은 그 여성에게 부검을 의뢰한다.

생전 안해본 부검과 스토커 양쪽을 상대해야 하는 여성 쪽이나,

온갖 어려움을 헤쳐가며 그 섬에 가야 하는 남성이나 어느 쪽이 더 어려운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지경. 

책은 마지막까지 스릴이 넘쳤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이었다.

‘차단’보다는 ‘처단’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책에 나온 의미있는 대목들을 짚어보자.

1) 저자 피체크는 사귀는 남자가 스토커인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웨이터의 의미 없는 겉치레 인사에 화를 낸다거나, 문자메시지에 더 빨리 대답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때에도, 그녀는 그의 사소한 질투심을 단순히 웃고 즐기며 흘려보냈다.” (25쪽)

내가 아는 분 중에도 이런 분이 있었다.

데이트 도중 아는 선배를 만나 잠시 얘기를 했더니 남자가 주저앉아 울더란다.

어떻게 다른 남자와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그 결과 그녀는 매우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런 단서가 나오면 잘 달래서 헤어지자.


2) “그 늙은 마녀가 그놈에게 3년 반을 선고했어.”(179쪽)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중심에는 

십대 여자애를 성폭행한 뒤 죽음으로 몬 파렴치범이 3년 반 징역형을 받은 데 있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독일도 마찬가지라는 게 놀라운데,

혹시나 안믿을까봐 피체크는 책 맨 뒤에 실제 판결 사례들을 적어놨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동 성폭행범은 재범을 저지를 확률이 무지 높기 때문이다.

일산 어린이 납치 미수사건은 여자 어린이 3명을 성추행해 10년을 징역살이하고 출소한 지 2년인 전과자의 소행이다. 지난 2006년 용산의 10세 여자 어린이 성폭행 살해 범인도 50대 성추행 전과자였다. 그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5개월 만에 사건을 저질렀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아동상대 성폭행범의 재범률이 일반 범죄보다 10% 포인트 높은 50%나 된다.”(2008. 4. 2. 매일신문 사설)

혜진. 예슬이가 죽고 난 뒤 여기에 대한 대책을 만든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막상 이루어진 건 별 게 없었고,

그 뒤 조두순이란 범죄자는 술을 마셨다는 게 정상참작돼 12년의 형량을 받았다 (5년 뒤 출소다!)

사회를 정상적인 곳으로 만들려면 비정상적인 놈들은 영원히 격리하는 게 답이 아닐까?


3) 사건의 주인공 법의학자는 조수를 자청한 재벌에게 이런 말을 한다.

법의학자: 자네에게 누가 이런 말 한 적 있나? 자네 지나치게 목을 꼿꼿이 세우고 상대와 이야기한다고 말일세.

재벌: 그럼 교수님께도 누가 이런 말을 드린 적이 있나요? 사춘기 소녀들처럼 아주 유치한 수준의 유머감각을 가지고 계신다고요. (196-197쪽)

재벌의 말도 근거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 상황에서는 부적절하다. 

너무 거만하다고 했으면 거기에 대해 반박을 해야지, 

“너도 유머감각이 유치하다”라고 물타기를 시도하다니!

내가 물타기에 민감한 건, 메르스 대처를 잘 못했다고 대통령을 욕했을 때

연평해전 어쩌고 하면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에 질린 탓이다. 


책 뒷날개를 펴보니 피체크의 소설이 2권이나 더 나와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란다.

피체크의 책들은 내가 앞으로 만날 5천여권 중 일부가 될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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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015-07-19 10:43   댓글달기 | URL
눈이 밝고 체력이 더 좋을 때...ㅠ

마태우스 2015-07-19 15:02   URL
저도 이거 쓰면서 슬펐어요 흑흑.

재는재로 2015-07-19 11:38   댓글달기 | URL
눈알사냥꾼의작가의신작이네요언제발매됗지 정보감사 나중에읽어봐야겠네요
공소시효도그렇고 소년법도 그렇고 얼마전소녀살인사건을저지른가출소녀에게엄중한처벌을했죠 죄를저지른사람에게는 그만큼 의합당한처벌이
최근읽은 검찰측죄인을봐도 법을테두리를빠져나가는인간이많아서 유전무죄무전유죄

마태우스 2015-07-19 15:03   URL
그죠 눈알사냥꾼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썼더라고요. 무조건 사서 읽으려고요. 유전무죄라는 것도 있지만, 일단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너무 낮아요. 조두순도 그리 많이 가진 자는 아닌 듯한데, 5년 후에 출소한다니 무섭지 않나요... 제가 아버지면 나오는 순간 어떻게든 했을텐데,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도 방황하는 칼날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너무 봐준다고요...

2015-07-19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9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남희돌이 2015-07-21 06:33   댓글달기 | URL
오호~ 부산 내려오실 때 피체크의 [차단]을 읽으며 오셨군요.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좀 잔인하긴 하지만 가독력은 끝내주죠. 메스를 들이대는 이런 류의 스릴러를 더 좋아하시려나^^
http://blog.aladin.co.kr/fineday/7659691
부산 강연 후기 남겼습니다.
제 블로그에도 발자취를 남겨 주시죠~~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 당신이 피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질문
데이비드 에드먼즈 지음, 석기용 옮김 / 이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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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에 다섯 명이 묶인 채 누워있다.

하필이면 기차는 제동장치가 고장났으니, 그대로 간다면 그 다섯 명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다섯명이 묶인 곳 직전에 지선이 하나 있어서,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기차의 방향을 그 지선 쪽으로 바꿀 수 있다.

문제는 그 지선에도 한 사람이 묶여 있는 것.

이럴 때 어떻게 해야만 할까? 

벤담 식으로 단순히 숫자만 따지면 기차를 지선으로 돌리는 게 맞지만,

그 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나 아는 사람일 경우에도 그게 가능할까? 


명확하게 판명이 나지 않는 딜레마를 다루는 학문을 트롤리학이라고 부르며,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는 이 트롤리학에 대한 책이다.

골치아프게 이런 걸 왜 생각하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쏜 미사일은 런던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떨어졌지만,

처칠은 그것들이 런던의 중심부를 정확히 타격한 것처럼 정보를 흘렸다.

물론 런던 남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처칠은 런던과 런던 시민을 택했던 것. 

홍수가 나서 양쯔강이 범람할 위기에 처했을 때,

중국정부는 대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양쯔강의 댐을 폭파하기도 했다. 

다음은 어떨까.

1884년 배가 침몰해 세 명이 구명보트에서 표류하게 됐는데,

마침 먹을 것이 떨어졌다.

일행 중 한 명인 17세 소년은 원래 몸이 약했기에 그냥 놔두어도 죽을 판이었다. 

그 소년을 잡아먹지 않으면 세 명 모두 죽고,

소년을 잡아먹으면 나머지 두 명은 살 수 있는 상황.

결국 둘은 소년을 잡아먹었고, 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다.

그때 잡아먹힌 소년의 이름이 바로 리처드 파커였으니,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뱅갈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인 게 우연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헷갈리는 상황들이 잔뜩 나오는지라

시종일관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난 느낌은 정의나 윤리라는 게 정말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

그러니 내가 믿는 게 오로지 옳다, 이렇게 주장해서는 안되겠다 싶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엔 짐이 곧 국가고, 짐에게 반항하는 건 위헌이다, 이런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꼭 한번 이 책을 읽으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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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7-16 07:35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은 그 분으로 생각하셨겠지만, 저는 그 분이 마립간인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정의나 윤리라는 게 정말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 그러니 내가 믿는 게 오로지 옳다. ; 이 문장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문장이군요.

마태우스 2015-07-16 09:13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저 책은 자기 확신을 가진 모든 분들께 다 해당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비록 옳다 하더라도 한번쯤 성찰을 할 필요가 있을 테니깐요. 근데 요즘 페미니스트 분들과 무슨 일이 있으신가봐요...?? 제가 사정을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아무튼 힘내십시오.

마립간 2015-07-16 11:27   URL
저는 자기 확신이 없지만, 자기 확신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페미니스트 분과는 무슨 일이 있기 보다 ... 아마 제가 요즘 페미니스트 관련 도서 판매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기소침할 일은 없습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마태우스 2015-07-16 23:07   URL
아...페미니즘 도서에 도움을 주고 계시다면, 결국 페미니즘을 도와주고 계시는 거군요;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모든 결정은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는 게 실감나네요. 아무튼 더운 여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과거와 달리 나이가 드니까 더위보다 추위가 더 무서워졌어요 -.-

보슬비 2015-07-16 22:11   댓글달기 | URL
그분은 읽으셔도 왜 이게 딜레마인가? 하실것 같아 두려워요...
아주 명확한 판단을 하실것 같거든요.. -.-;;

마태우스 2015-07-16 23:08   URL
오오 제가 아는 그분을 님도 아시는군요^^ 딜레마가 뭔지도 잘 모를 것 같아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