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그대가 먼저 죽어야겠소.

그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삿바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주하여 마케도니아인들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나체 수도자 10명을 잡았다. 그들은 묻는 말에 적확하고 간결하게 답변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며, 먼저 틀린 답변을 하는 사람을 죽이고 이어서 나머지도 같은 순서에 따라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 한 명을 심판관으로 앉혔다. 첫 번째 수도자는 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산 자라고 답변하며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번째 수도자는 육지와 바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 짐승을 기르느냐는 물음에 육지라고 답변하며 바다는 육지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번째 수도자는 어떤 동물이 가장 교활하냐는 물음에 "지금까지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동물"이라고 답변했다. 네 번째 수도자는 어떤 이유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삿바스를 사주했냐는 물음에 "그가 살거나, 아니면 아름답게 죽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다섯 번째 수도자는 낮과 밤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 태어났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낮이 하루 먼저 태어났지요." 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왕이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어려운 질문에는 어렵게 답변해야 하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여섯 번째 수도자에게 알렉산드로스가 사람이 어떻게 해야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요." 라고 답변했다. 남은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무언가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면요." 라고 답변했다. 또 한 명은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력하냐는 물음에 "삶이죠. 삶은 그토록 많은 불행을 참고 견딜 수 있으니까요." 라고 답변했다. 마지막 수도자는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좋겠느냐는 물음에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지 않을 때까지요." 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으로 심판관 쪽으로 돌아서며 심판하라고 명령했다. 심판관이 그들은 저마다 먼저 사람보다 더 못한 답변을 했다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답변을 했으니 그대가 먼저 죽어야겠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심판관이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가장 못한 답변을 한 사람을 맨 먼저 죽일 것이라는 전하의 말씀이 허언이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이 수도자들에게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가장 큰 명성을 누리며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자들에게 오네시크리토스를 보내 한번 자기를 방문해주기를 청했다. 오네시크리토스는 철학자로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제자였다. 오네시크리토스의 말에 따르면, 수도자 중 한 명인 칼라노스는 그를 불손하고 거칠게 대했고, 옷을 벗고서 자기가 하는 말을 경청하라며 그러지 않으면 그가 설사 제우스에게서 왔다 하더라도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네시크리토스의 말에 따르면 단다미스는 더 온유한 사람인데, 소크라테스와 퓌타고라스와 디오게네스에 관해 충분히 듣고 나서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자질을 타고났으나 법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산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단다미스는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여기까지 그토록 먼 길을 왜 왔지?" 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340∼342쪽)



  

이 얼마 안 되는 땅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스 지방에 도착하자 맨 먼저 여자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 왕들의 관습을 따른 것으로 그들은 이 지방에 올 때마다 여자들에게 각각 금화 한 닢씩 주었던 것이다. ······

그다음 그는 퀴로스의 무덤이 파헤쳐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범인이 폴뤼마코스라는 펠라 출신의 이름 있는 마케도니아인이었지만 처형하게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퀴로스의 무덤가에 있는 비문을 읽어 보고는 그것을 헬라스 말로 옮겨 원문 아래에다 새겨두라고 명령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손이여, 그대가 누구든, 또 어디서 왔든 - 나는 그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노라 - 나는 페르시아인들을 위해 제국을 세워준 퀴로스다. 그러니 그대는 내 육신을 덮고 있는 이 얼마 안 되는 땅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알렉산드로스는 인생의 변화무상함을 일깨워주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346쪽)




 * * *

 

"그대는 곧 죽을 것이며, 지상에서 그대를 묻기에 충분한 넓이의 땅만을 소유하게 될 것이오."
 - 인도의 현자 단다미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했던 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4-02-0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자들이 명상에 잠기도록 하고는, 옷을 벗는 스승이 있다고 해요. 스승이 무엇을 하든 아랑곳하지 말고 명상에 잠기라는 뜻이라는데, 제자들은 스승이 옷을 벗는 줄 안다지요. ㅋㅋㅋ 그러니까, 제자들은 명상을 안 하고 스승이 뭘 하는지만 지켜보았다는 소리이니, 제자들이 스스로 할 일을 잊었다는 소리인데,

옷을 벗고서 내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으라고 하는 대목을 읽으니, 문득 이 얘기가 떠오릅니다.

oren 2014-02-04 11:05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의 말씀을 들으니 만화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드네요. 스승은 옷을 훌훌 벗고, 제자들은 명상에 잠기는 척 하면서 실눈을 뜨고 스승의 알몸을 감상하며 키득거리는 모습 말입니다. ㅎㅎ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 공부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이집트와 인도에 가서도 여러 철학자들을 만나려 애쓰고 또 그들로부터 강의도 듣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문예 일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책



(밑줄긋기)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견한 구절들
 

모방한다는 것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37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열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詞, enkomion)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38쪽)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발견한 구절들
 

볼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는 것을 생각하느라

한 번은 카이사르가 부유한 이방인들이 로마에서 강아지와 새끼 원숭이를 품에 안고 다니며 귀여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타고난 사랑과 정을 마땅히 사람에게 쏟아야 할 텐데도 동물에게 낭비하는 자를 나무라는 진실로 제왕다운 꾸지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혼은 본성상 배우기를 좋아하고 보기를 좋아하는 만큼, 볼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는 것을 생각하느라 아름답고 유익한 것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난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184쪽)



 

안티스테네스의 명언

우리의 감각은 외부 세계의 인상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므로 유용한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것이든 모든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자는 누구나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방향을 정할 수 있고, 일단 결정하면 힘들이지 않고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봄으로써 교화되기 위해 최선의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색채가 산뜻하고 쾌적해 시력을 증진시키게 되면 눈에 적합하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성적 능력도 자신을 매혹하여 자신의 고유한 미덕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대상들을 보도록 우리는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러한 대상은 미덕에서 우러나온 행위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러한 행위는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경탄과 모방하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다른 경우 행위에 경탄은 하되 곧바로 그 행위를 모방하려는 욕구는 수반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흔히 어떤 작품에서 쾌감을 느끼면서도 장인(匠人)은 멸시한다. 예컨대 우리는 향수와 자포(紫袍)를 좋아하면서도 염색공과 향수 제조자를 천한 기술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메니아스가 피리 연주의 달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안티스테네스가 "그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오. 그렇지 않다면 피리 연주의 달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오."라는 명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필립포스도 술자리에서 우아하고 능숙하게 현악기를 연주하던 아들에게 "그렇게 아름답게 현악기를 연주하다니, 너는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왕은 짬을 내어 다른 사람이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며, 그런 경연에 참관하기만 해도 무사 여신들에게 큰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185쪽)



 

보는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저급한 일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아름다운 일에는 무관심하다는것을 증명해 보인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라면 피사의 제우스 상이나 아르고스의 헤라 상을 보고 페이디아스나 폴뤼클레이토스가 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아나크레온이나 필레타스나 아르킬로코스의 시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들처럼 되고자 하지도 않는다. 어떤 작품이 우아하고 마음을 끈다고 해서 그것을 제작한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하고 싶다는 욕구와 동화되고 싶다는 충동과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들은 보는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186쪽)



 

단순히 행위를 고찰하는 것만으로도

그러나 탁월함에서 우러나온 행위는 당장 그러한 행위가 찬탄을 보내는 동시에 행위자들과 겨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우리는 우연히 주어지는 좋은 것들은 소유하고 즐기고 싶어 하지만, 탁월함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들은 실행하고 싶어 한다. 게다가 우리는 우연히 주어진 좋은 것들은 누군가에게서 받기를 원하지만, 탁월함에서 우러나온 행위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받기를 원한다. 선한 것은 우리를 능동적으로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당장 우리에게 행동하도록 촉구한다. 선한 것은 모방을 통해서만 보는 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행위를 고찰하는 것만으로도 결단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영웅전을 계속 써야 한다고 결심했다. ······ 특히 온유함과 올바름, 백성들과 동료 관리의 어리석음을 참는 능력에 힘입어 두 사람은 그들의 조국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평가가 옳은지의 여부는 내가 쓴 것을 읽고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186쪽)





*『몽테뉴 수상록』에서 발견한 구절들
 

비록 진창 속에 굴러도

내가 허약하다고 해도 그것은 평가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힘과 정력에 관해서 내가 가져야 할 의견을 변경하게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모방할 수 있는 것밖에 칭찬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키케로) 비록 진창 속에 굴러도, 나는 하늘 꼭대기에 이르듯 도저히 모방할 수 없게 고매한 몇몇 영웅적 심령들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51쪽)


 

군중

군중 속의 전파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람은 악인들을 모방하든지 미워하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다 위험하다. 그들의 수가 많으니 많아질까 두렵고, 우리와는 너무 다르니 너무 많이 미워할 일이 두렵다. (260쪽)


 

 

풋내기들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그는 단거리 질주를 시도한다.             
   (베르길리우스)                                                               (436쪽)

 



 

원숭이처럼 모방하는 버릇

나는 원숭이처럼 모방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시를 써 본다는 수작을 했을 때엔(라틴어로 밖에는 써 보지 않았다), 그 시는 당시 최근에 읽은 시인의 티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내 최초의 시도 중의 어떤 것은 외국풍의 냄새를 풍겼다. 나는 파리에서는 어딘가 몽테뉴에서와는 다른 말을 쓴다. 누구이건 내가 주목해서 관찰해 본 다음에는 무엇인지 그의 티가 내게 박힌다. 바보 같은 모습이건, 불쾌하게 웃는 꼴이건, 우스꽝스런 말투이건, 내가 유심히 본 것을 나는 몰래 빼앗아 온다. 그것이 악덕이면 더하다. 그것은 나를 찌르기 때문에 더 잘 내게 걸린다. 그리고 뒤흔들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나의 기질 때문이 아니라 남을 본떠서 욕질하는 것을 본다.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의 어느 곳에서 본 끔찍하게 키가 크고 힘이 세고 무서운 원숭이의 수작만큼이나 몸을 잡치는 모방이다. 이 원숭이들은 달리면 잡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남이 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본뜨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들을 잡는 방법을 빌려 주고 있는 셈이다. 사냥꾼들은 그것들이 보는 데서 끈이 많이 달린 구두를 꼭꼭 묶어 신고, 머리에 올가미가 달린 두건을 뒤집어 쓰고, 눈에 끈끈이로 바르는 체한다. 이렇게 하면 이 가련한 짐승들은 멋모르고 흉내를 낸다는 것이 제 눈에 끈끈이 칠을 하고 끈으로 몸을 묶어 얽어 놓는 것이다.
(968쪽)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

우리가 명예에 관한 모든 장점을 그들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결함과 악덕까지도 옳은 일이라고 인정할 뿐 아니라, 모방까지 해가며 그런 일하는 권한을 그들에게 주고 옹호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종들은 모두가 그를 본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아첨꾼들은 그와 같이 근시안인 체하느라고, 그의 앞에서 잘 부딪치고 발끝에 걸리는 것을 차고 둘러엎곤 했다. 탈장(脫腸)까지도 때로는 으스대며 자랑할 거리가 되었다. 나는 귀먹은 것도 뽐낼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플루타르크는 왕이 왕비를 미워하자, 궁신들도 덩달아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것은 음탕한 버릇이 모든 버릇과 아울러 유행하고, 불충·모독·잔인성도 그렇고, 사교가 그렇고, 미신·무신앙·태만이 그렇다. 더 나쁜 일로, 도대체 더 나쁜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아첨꾼들은 그들의 왕이 명의(名醫)라는 영광을 얻고 싶어하자 자기들 몸을 째고 지지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본보기로 다른 자들은 몸의 가장 미묘하고 고귀한 부분인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1019쪽)



 

재치가 아니라 심령이 문제될 때에

속이 가장 짜이고 현명한 작가들을 두고 보아라. 그들은 옳은 논법을 둘러서 얼마나 경박한 다른 논법들을, 그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이 빈 논법들을 뿌려 놓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언어만의 헛된 말재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유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달리 쓸데없이 너저분한 이론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서적 속에도 빌려 왔거나 모방했거나 해서, 이런 식의 문장이 상당히 여러 군데에 끼여 있다. 그러므로 좀 묘한 구절을 힘차다고, 날카로운 점을 견고하다고, '마시기보다도 맛보기에 더 좋은 것'(키케로)을 가지고 잘되었다고 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재치가 아니라 심령이 문제될 때에'(세네카) 마음에 드는 것 모두가 배불려 주는 것이 아니다.
(1156쪽)




  

 


 













 

 


댓글(6)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모방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6-04-27 13:42 
    (밑줄긋기) 젊은이는 시가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젊은이가 시에 입문할 때, 우리가 작시술이 모방술과 그림 그리기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것이라는 총체적 서술을 해 준다면, 그 젊은이는 더욱더 견실한 자세를 취하게 되겠지. 젊은이에게, 시는 말하는 그림, 그림은 말 없는 시 58 라고 흔히 인용되는 말을 숙지시킬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그림 속에서 도마뱀이나 원숭이 또는 테르시테스59의 얼굴을 볼 때,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사한 것으로
 
 
다크아이즈 2014-02-02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품이 우아하고 마음을 끈다고 해서 그것을 제작한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하고 싶다는 욕구와 동화되고 싶다는 충동과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들은 보는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모방을 무시할 수 없는, 아니 모방하는 이유가 이 문장 하나에 다 들어 있은 것 같습니다.
후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미리 다해버리는 대단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아니 대단한 고전들^^*

oren 2014-02-03 10:43   좋아요 0 | URL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만 하더라도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책인데, 그 책 속에도 그 이전에 쓰여진 또다른 고전들이 무수히 포함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새삼 놀랐어요. 그 책 속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물론이고, 고대 비극작가의 작품 속 싯구절들도 여러번 인용되어 있더군요. 거기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여러 작품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담긴 이야기들도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인용되어 있더군요. 그러니 그런 책들에는 '보편적인 교훈들'이 오롯이 담길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숲노래 2014-02-0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흉내내기(모방)와 배우기는
모두 똑같이 바라보는 '모습'이지만,
받아들이는 '삶'이 사뭇 달라요.

한쪽은 슬픈 빛이 되고
한쪽은 아름다운 사랑이 되면서..

oren 2014-02-03 10:4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방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모방하게 되는 숨겨진 힘도 지니고 있는 듯해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 가운데 그런 얘기를 찾으려면 한정도 없겠지만요.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진다. 소리가 고르면 음향도 맑게 울리고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도 곧아진다[近朱者赤 近墨者黑 聲和則響淸 形正則影直].'는 말도 비슷한 얘기가 아닐까 싶어요.

세실 2014-02-0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몽테뉴 수상록 읽으려고 꺼내놓았습니다.
새해에는 내적 성숙을 가져올 수 있는 책을 읽으려고요^^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최소한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 겠습니다^^

oren 2014-02-03 10:52   좋아요 0 | URL
세실 님께서도 이제 막 몽테뉴를 만나실 참이시군요. 그사람은 겉으로만 보면 몹시 따분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만나면 만날수록 은근히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랍니다. 재치가 번뜩이고 유쾌한 말장난과 해학도 가득 담긴 책이니 만큼 오래도록 즐겁게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랄께요~
 


그 나이에 해당된 재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나이에 해당된 불행을 맛보게 된다.
 - 볼테르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 * *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설날의 추억은 시골의 골목길을 가득 뒤덮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새벽 일찍 세배를 가는 풍경이다. 그때 우리집은 아마도 초가집이었을 테고 우리 형제들은 설빔조차 따로 차려 입을 형편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날 우리 형제들은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친척 할머니 집으로 세배를 하러 나섰다. 형을 맨 앞에 세운 우리 형제들은 아마도 고사리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한줄로 줄지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마치 병아리떼가 종종종 걸음을 옮기듯이 그렇게.

그해-아마도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 나온 때보다 몇 해 뒤였으리라- 설날 아침엔 새햐안 눈이 온통 세상을 눈부시게 뒤덮고 있었다. 내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는 데 습관이 붙었더라면 나는 그 새해 첫날 아침을 틀림없이 내가 여태껏 봤던 시골 풍경 가운데 가장 하얗게 빛났던 세상이라고 말했으리라.

그 설날 아침에 봤던 새하얀 눈을 나는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 형제들은 비록 때때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했지만 할머님께 세배를 드리고 나면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는 들뜬 마음을 앞세우고 뛸듯이 집을 나섰다. 한복을 차려 입으신 아버님이 미처 우리집 마루턱을 내려서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마당을 서둘러 벗어나 돌담길을 따라 주욱 이어진 황토길을 가득 뒤덮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리가 걸었던 골목길엔 그 어떤 발자국도 없었다. 오직 소복하게 쌓인 탐스런 새하얀 눈과 거기에 내리비치는 눈부신 아침 햇살만 있을 뿐이었다.

6형제 가운데 둘째였던 나는 형이 앞장서며 남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슬쩍 형을 앞질러 걸으며 내가 맨처음 남긴 첫발자국을 바라보며 몹시 흐뭇해 했던 기억도 나는 듯하다. 그때 내가 본 눈길에 뚜렷이 새겨졌던 자그마하고 예쁜 발자국들은 아마도 내가 여태껏 본 발자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그때만 회상하면 '내 발자국, 동생 발자국' 하던 동시를 항상 떠올린다.

우리가 항상 설날만 되면 가장 먼저 세배를 드리러 가는 친척 할머니는 한국전쟁 이후 늘 혼자 사셨다. 그 할머니는 아버님한테 당숙모였으니 우리가 큰집이었던 내 할아버님한테는 종수씨(從嫂氏) 되는 분이었다. 그 할머니의 남편분, 그러니까 내 할아버님의 사촌 동생이었던 그 분은 6.25 동란 때 인민해방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동안 그들의 일을 도운 전력 때문에 결국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들이 서둘러 북으로 쫓겨날 무렵 그만 인민군들을 따라 월북하고 말았다고 들었다.(어른들로부터 가끔씩 그 당시 얘기를 들으면 어김없이 이문열의 소설 『영웅시대』가 겹쳐 떠오른다.)

아버님한테 당숙모 되시는 그 할머님은 언제나 인자하신 모습으로 '큰집 손자들'인 우리 형제들을 반갑게 맞아주셨기에 그 할머님께 세배를 드리러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더군다가 그 할머님께서는 세뱃돈을 주실 때에도 우리 형제들을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셨다. 그때 받았던 세뱃돈은 주로 10원짜리 지폐였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10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나같은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겐 10원짜리 몇 장만 있어도 갑자기 생긴 '너무 많은 돈'을 어디다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될 정도로 큰 돈이었다. 그무렵 형한테 들었던 얘기지 싶은데 '형이 어렸을 때'는 세뱃돈을 주로 '십환짜리'로 받았다고 했던 것 같다. 10원은 그 열 배에 해당하는 고액권이었던 셈이다.

그해 겨울의 설날 아침은 지금 되돌아보니 아마도 내게 가장 행복한 설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만큼 나는 어느새 많은 세월을 살아왔고 또 그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제 내 나이는 쉰셋이다. 쉰으로도 까마득한 나이인데 거기다 셋을 더 보탰다. 문득 내 나이를 돌아보면 나 스스로도 놀랄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느 누구보다 더 빨리 나이를 먹은 건 결코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여러 평등한 사물들 가운데 나이만큼 공평한 것도 없지 싶다.

내가 까마득한 옛날의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날을 떠올리면 겹쳐 떠오르는 또다른 풍경 가운데 하나가 연말연시면 주고받던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장식하던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날 아침'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들이다. 이젠 그런 연하장조차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어젯밤 문득 까마득한 옛날에 내가 경험했던 설날 아침의 그 눈부셨던 고향 풍경과 연하장을 수놓았던 그 아름다운 겨울 풍경들이 너무나 그리워 부랴부랴 책장 서랍 안에 수북히 쟁겨둔 편지 뭉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내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연하장 그림들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그 색바랜 연하장들을 펼쳐보며 잠시나마 옛 추억들에 푹 잠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어릴 땐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는 게 무에 그리 좋아 설날만 되면 내 나이가 몇 살이 되었다고 자랑하며 마냥 의기양양해 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어릴 때와는 정반대의 마음이 드는 것도 '나이'가 지닌 묘한 속성이 아닐까 싶다. 이래저래 '나이'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는 섣달 그믐 하루 전이다.




(2001년 연말에 받은 연하장)
 


 


(1994년 겨울에 받은 연하장)



(1992년 겨울에 받은 연하장)


 

접힌 부분 펼치기 ▼

 


다음은 내가 이 책 저 책 속에서 찾아낸 '나이에 대한 글들'이다. 마침 이 뭉치들을 꺼낼 때가 되었다.


* 『몽테뉴 수상록』에서 발견한 글들

 

20세가 되면

나로서는 우리 심령은 20세가 되면, 그것이 장차 될 싹수는 다 풀려져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약속해 준다고 본다. 이 나이에 자기 능력의 명백한 징조를 보여 주지 않은 심령으로서, 그 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증거를 보여 준 일은 없었다. 자연의 소질과 덕성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심령이 가진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시를 보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보여 주지 않는다.(349쪽)



 

30세 이후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 행동들 중에서, 그것이 무슨 종류이건, 옛 시대나 오늘날에나 대부분은 30세 이후보다 그 전에 이루어진 것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 인간의 생애를 두고 보아도 그렇다. 한니발의 생애와 그의 위대한 적수인 스키피오의 생애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생애의 아름다운 반생을 그들은 젊었을 때에 얻은 영광으로 살아 보았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비교해 보니 위대하였다.(349쪽)



 

마지막 쾌락

노령에 이르면 몸이 불편해져서 어디건 의탁하고 싶어지며 마실 것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 내가 이런 재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마지막 쾌락인 까닭이다. 좋은 친구들의 말로 인간 천성의 열기가 처음으로 발에 오른다고 하나, 그것은 어릴 때의 일이다. 그 열기는 몸의 중허리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거기에 박혀서 내가 보기에는 육체 생활의 유일하고 진실한 쾌락을 지어 준다. 다른 쾌락은 거기에 비하면 잠자는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에는 그것이 올라가서 날아가는 김과 같이 열기는 목구멍에 도달하며, 거기서 마지막 자리를 잡는다.

플라톤은 18세 전에 술 마시는 것을 금하고 40세 전에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은 자들에게는 취하기를 즐기며, 식사 때 인간에게 쾌활을 주고 노년에게 청춘을 돌려 주며, 마치 쇠가 불에 물러지는 것처럼 심령의 정열을 무르고 부드럽게 해 주는 착한 신 디오니소소의 영향을 많이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의 《법률편》에서는 술 마시는 모임을(그 집단에 우두머리가 있어 전부를 통제하고 조절한다면) 유익하다고 본다. 술에 취함은 각자의 본성을 다루기에 좋고 확실한 시련이며, 그와 아울러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제정신을 가지고는 해 볼 생각도 못하는 춤과 음악을 즐기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술이 마음에 절도를 주고 신체에 건강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부분적으로 카르타고 인들에게서 빌려온 다음의 제한 규칙을 마음에 들어했다. 즉, 전쟁에 나갈 때는 삼갈 것, 모든 재판관들이 직무를 처리하는 때나 국무를 토의할 때는 술을 들지 말 것, 일을 보아야 할 낮 동안에는 거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또 어린애를 만들기로 작정한 밤에도 들지 말 것을 권한다.(364쪽)



 

35세 결혼설

나는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35세 결혼설에 찬성합니다. 플라톤은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55세 뒤에 결혼을 하려는 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소생은 먹여살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옰습니다.

탈레스는 여기에 진실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모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넘은 다음에는 이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귀찮은 행동에는 좋은 기회를 거절해야 할 일입니다.
(412쪽)



 

반쪽의 존재밖에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 간다. 
 
    (루크레티우스)


이제부터 내가 되어 갈 것은 반쪽의 존재밖에 없으며,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라지며, 내 자신에서 빠져나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나하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호라티우스)                                      
(709쪽)



 

나이 탓

나는 나이 탓으로 일어나는 우발적인 후회감을 혐오한다. 옛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나이 탓으로 탐락에 끌릴 필요도 없어졌다고 고마워하던 사고방식은 내 의견과는 다르다. 나는 결코 나이 때문에 좋은 일을 누릴 수 없음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약점까지도 최선의 사물들의 열(列)에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의 뜻은 그 피조물에 적대적이 아니다."(퀸틸리아누스) 우리의 정욕도 노년기에는 희박해진다. 끝난 다음에는 심한 포만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 점에서 양심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침울과 허약은 우리에게 류머티즘에 걸린 비굴한 덕성밖에는 남겨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판단력을 변질시킬 정도로 자연적인 변화(늙음)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지금 힘주어서 이성을 조심스레 진작시키고 있는 나는, 이제 늙어 가며 약화하여 못 쓰게 된 것이 아니라면, 내 이성은 더 방자하던 시절과 같은 상태로 있다고 본다. 신체의 건강에 해로울까를 고려해서 이성이 나를 이 탐락의 도가니 속에 집어넣기를 거절하는 것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정신 건강을 위해도 그런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성이 전투력을 잃었다고 해서 더 용감해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의 유혹받은 마음은, 너무 시달리고 부서졌기 때문에 이성으로 대항할 거리가 못 된다. 나는 오히려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이런 유혹을 간청할 뿐이다. 누가 그 옛날의 색욕을 내 이성 앞에 내어 준다면, 나는 이 이성이 옛날에 가졌던 만큼 거기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나는 이성이 그때 판단하던 것을 벗어나서 달리 판단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그것이 어떤 새로운 광명을 얻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 때문에 거기에 무슨 회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나빠지게 된 회복이다.
(897쪽)



 

나는 내 계절의 풀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내 육체 상태의 경과가 모든 일을 그 계절에 맞추어 이끌어갔다는 것은, 내가 운명에게 고맙게 여기는 중요한 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내 계절의 풀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라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어 온 노릇이니 다행한 일이다. 나의 질병들은 모두 제철에 왔으며, 그들은 지난 날의 오랜 행복을 더 쉽게 회상시키는 만큼, 이 불행들을 더 수월하게 참아 넘긴다.
(898쪽)



 

노년의 주름살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899쪽)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

나는 노년기가 수많은 내 친지들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보았던가! 노년이란 자연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이다. 노년이 우리에게 짋어지우는 결함을 피하려면, 적어도 그 진전을 막으려면, 대단히 많은 연구와 조심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몸을 아껴도 이 노년이 한걸음 한걸음 나를 이겨감을 느낀다. 나는 힘 닿는 대로 버티어 볼 뿐이다.
(899쪽)



 

노령기의 상태

노령기의 상태는 너무나 내 정신을 경계하여 타이르고 나를 사리 분별을 할 능력이 있게 만들고, 내게 설교한다. 과도한 쾌활성을 가졌던 나는 이제 반갑지 않게 지나친 근엄성에 빠져 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일부러 좀 방자하게 생각을 바꿔 본다. 그리고 때로는 경박한 젊은 생각에 마음을 쓰며, 마음만은 거기에 머문다. 나는 이제 너무 침착하고 둔중하고 노숙해졌다. 나이는 날마나 내게 냉철과 절제를 가지고 훈계한다. 이 몸은 무절제한 생활을 피하며 두려워한다. 이번에는 육체가 정신을 개선하도록 지도할 차례이다. 신체는 제 차례로 더한층 혹독하게 강압적으로 지배한다. 신체는 자나깨나 죽음과 인내와 금욕을 가르치기에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는 옛날에 탐락에 대해 하던 식으로 지금은 절제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절제는 얼떨떨해질 정도로 나를 뒤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미로서나 내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예지에도 지나침이 있어서 어리석음 못지않게 절제가 필요하다.
(925∼926쪽)



 

우리는 자연에서 이탈한다

나는 빨리 늙는 것보다는 노년이 짧은 편이 낫다.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장 조그만 쾌락의 기회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여러 가지 신중하고 강력하고 영광스런 쾌락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문 때문에 여간해서 나는 그런 욕심을 내지 못한다. 나는 이런 쾌락이 광대하고 장엄하고 호화롭기보다는, 달콤하고도 바로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것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연에서 이탈한다. 우리는 어느 점으로도 좋은 지도자가 못 되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세네카)
(927쪽)



 

오십 고개를 넘은 자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자연은 이 나이를 꼴사납게 만들 것 없이, 가련하게 만든 것만으로 만족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일주일에 세 번쯤 허약한 힘으로 일어나며, 뱃속에 당연히 해낼 어떤 위대한 힘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꼴이 보기도 싫다.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그리고 지금 둔중하게 얼어붙어서 볼이 꺼진 이 나이에 이렇게도 생기 있게 팔딱거리는 자극이 놀랍다. 이런 욕망은 청춘의 꽃다운 시절에나 가질 일이다. 이런 충동을 믿고, 그대에게 있는, 이 피로할 줄 모르게 꾸준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열기를 한번 거들어 보라. 좋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982쪽)



 

노년의 사랑

나는 숨가쁘게 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떠한 다른 정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면 나처럼 일정한 직업이 없을 경우, 탐욕·야심·싸움·소송 사건 같은 일에 마음이 잘 매여 지내지만, 나로서는 사랑에 매여 지내는 편이 더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은 다시금 내게 주의력과 소박성과 우아미와, 내 인품에 대한 생각을 가꾸게 하고, 이 늙음의 얼굴 찌푸림이, 이 측은할 만큼 비뚤어진 찌푸림이 나의 용모를 타락시키지 않게 보장해 주고, 나에게 다시 건전하고 현명한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그래서 내 정신이 자신과 자신의 쓸모에 관해서 절망하는 심정을 없애고, 자신에게 다시 정이 붙게 하여 더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게 해 줄 것이고, 할 일은 없고 건강 상태는 나빠지기 쉬운 이런 나이의 수천 가지 불쾌한 생각과 우울한 번뇌를 흝어 준다. 또 적어도 공상으로라도 대자연에 버림받기 시작하는 이 피에 다시 따스함을 넣어 주며, 이제 마지막 파멸을 향해 줄달음치는 가련한 인간에게 턱을 괴어 주고, 근육과 심령의 정력과 쾌활성을 조금은 연장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여간해서는 회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몸은 허약해지고, 오랜 경험으로 우리 취미는 한층 더 연약하고 꾀까다로워져서, 내놓는 것도 별로 없이 요구만 많아지며, 용납될 만한 가치가 아주 없는 터에 가장 좋은 상대만 고르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젊었을 적만큼 과감하지도 못하며, 사람을 더 믿어 주지도 못한다. 우리 조건과 여자들의 조건을 알고 있는 만큼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받을 자신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저 피끓는 새파란 청춘들 사이에 끼여 있기가 부끄럽다.
(990쪽)



 

서른 살

나바르의 여장 마르그리트는 여자이니 여자의 장점을 한껏 연장시키며, 서른 살에 이르면 그 칭호를 '예쁜'에서 '착한'으로 바꾸라고 명령한다.
(993쪽)



 

40이나 50세 전에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1085쪽)



 

60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내가 학문을 가지고 말하고 싶었더라면 더 일찍이 말했을 것이다. 즉, 내가 재치도 있고 기억력도 더 좋았고 공부하던 때에 가깝던 시절에 써 보았을 것이다. 그때에 이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들, 그때의 젊은 패기에 지금보다는 더 자신을 가졌을 것이다. 게다가 운이 이 작품을 통해서 내게 베풀어 주는 이런 우아한 혜택이, 그때에는 더 유리했을 것이다. 이 소질을 크게 가진 내 친지들 중의 두 사람은 60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40대에는 글 쓸 생각을 않고 있다가, 재질의 반은 잃었다고 나는 본다. 성숙기에는 청춘기처럼 그때의 결함이 있고, 그 결함이 더 심해진다. 그리고 노년기가 이런 일에는 다른 어느 시절보다도 나쁘다. 아무라도 자기 노쇠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그가 나이의 은총을 잃은 자이고 몽상가이며 정신이 잠든 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기분으로 표현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미친 수작이다. 우리 정신은 늙어 가면서 변비증에 걸리고 오그라든다.
(1177∼1178쪽)



 

지난 날의 내 그림에서 얼마나 더 멀어진 것인가!

죽음은 사방에 우리의 생명과 섞이며 혼동된다. 쇠퇴가 그 시간에 앞서 오며, 바로 우리가 나아가는 길 속에 섞여 든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지금의 내 그림은 나의 죽음의 그림자보다도 지난날의 내 그림에서 얼마나 더 멀어진 것인가!
(1232쪽)



 

50세

나는 지난번에 50세를 넘어섰다. 50세란, 어떤 국민들은 이 나이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인생의 아주 적당한 종점으로 정해 놓았던 나이로, 이것은 이유 없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불확실하고 짧기는 하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이 나이를 훌쩍 넘었기 때문에, 젋었을 떄의 건강과 안일을 못 가졌다고 불평할 거리는 거의 없다. 나는 정력과 쾌활성은 말하지 않는다. 정력이 이 한계 너머까지 나를 따라올 이유는 없다.

이제부터는 애인의 집 문턱에서
궂은 날을 무릅쓰고 기다려 볼 기운조차 없다. 
     (호라티우스)                                                 
(1226쪽)



 

인간 수명의 한계는 70

내 죽음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이제부터는 운명에게 혜택을 요구하거나 바란다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내 죽음에 관해서 생각하며, 여기서 위안을 느낀다. 사람들은 옛날에는 인간이 키가 컸던 만큼 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옛날 사람이던 솔론은 인간 수명의 한계를 70으로 잡고 있다. 옛날의 그 '탁월한 중용'을 그렇게도 찬양하며, 중용의 절도를 가장 완벽한 것으로 간주하던 내가, 어이없게도 내 수명은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해야 할 일인가? 자신의 흐름에 거꾸로 되어 가는 것은 모두 불쾌해야 할 일이며, 자연대로 되어 가는 것은 항상 유쾌해야 할 일이다. "자연과 합치하여 생성하는 사물과 형상은 모두 선(善)이라는 수(數) 중에서 계산되어야 한다."(키케로) 그 때문에 플라톤은 부상이나 질병이 가져오는 죽음은 횡사라고 불러도 좋으며, 노령이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해서 닥쳐오는 죽음은 모든 것 중에 가장 가볍고 어느 점에서 감미로운 죽음이라고도 하였다. "청년에게는 난폭이, 노년에게는 성숙이 생명을 빼앗아 간다."(키케로)
 
(1231쪽)




 * 쇼펜하우어의 『삶의 예지』에서 발견한 글들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람의 두뇌는 일곱 살쯤 되면 상당히 커지며, 지능도 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외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생기발랄해 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사실 모든 시와 예술의 본질은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이데아(사물의 실체)를 붙잡는 일, 다시 말해서 개체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 일이다.

또한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무렵에는 외부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하나하나의 사물이 대표적으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그 종류 가운데서 유익한 실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인식보다는 의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므로 외부의 사물은 대부분 고뇌를 안겨 준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인식의 눈으로 보면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의지의 눈으로 보면 무척 사나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자보다는 전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유년시절의 특징이다.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이 무렵의 인간은 사물의 아름다운 일면만을 알고 두려운 점을 모르며, 우리 자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에 순수한 그 사물 자체 또는 예술에 묘사된 것과 흡사하여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으레 행운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을 벗어나면 차츰 인식보다 의지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생활의 대상으로서 선과 미를 의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사물과 의지의 여러 가지 반작용이 일어나 괴로운 운명에 시달리면서 '삶의 난동'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사물과 또 다른 일면, 즉 의욕의 대상으로서 무서움을 알게 되며, 의욕적인 생활에 따르는 모든 장해와 근원을 체험하고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깨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환상을 즐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고 한탄하여 회한에 잠기게 되는데, 이런 실망은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유년시절의 인생은 먼 데서 바라본 극장의 장식물과 같지만, 노년기의 인생은 그 장식물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밖에 유년시절에 평온과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미래의 영웅이나 학자, 농부, 시골사람 할 것 없이 서로 조용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개인차가 심해지고, 그 차이는 중심에서 원주까지 점점 멀어져 가는 원의 반지름처럼 점점 더 커진다.

우리 생애의 후반기보다 전반기가 더욱 이상적으로 보이고 후반기가 대체로 불쾌하고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생애의 초기에 행복의 실제를 믿고 이를 손에 넣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실망과 재앙의 근원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실패와 실망, 그리고 이에 따르는 불만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행복의 그림자가 여러모로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이것은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손에 넣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것은 결국 인생 자체가 공허하고 비참한 데 원인이 있다. 청년들은 그것을 처지나 환경 탓으로 본다. 그들은 나중에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자기 처지나 입장의 탓으로 돌리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만일 올바른 교육을 받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행복과 만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이와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인생의 참된 모습을 알기 전에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눈에는 문학에 표현된 인생이 매우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자기도 한번 그처러머 실제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자기 생애를 하나의 소설처럼 실현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무지개를 붙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대문소리......

인간의 전반기 특징이 이와 같이 행복에 대한 충족될 수 없는 동경이라면, 후반기의 특징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다. 후반기에 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행복은 하나의 망상이요, 고통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상식이 있고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행복보다는 차라리 견디어 나가기 쉬운 상태를 원하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처지를 원하게 된다. 나는 젊어서는 대문 소리가 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뻐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부터는 대문 소리가 들리면,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려나?'하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생명력, 즉 체력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36세까지는 그 이자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아서 오늘 소모한 체력은 내일이면 회복된다. 그러나 이 무렵을 고비로 그 후로는 자기 자본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자본가가 된다.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아 지출의 대부분은 자연히 원상복구가 되어 이 무렵의 손실은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손실이 점점 늘어가면 눈에 띄게 된다. 그것은 날마다 팽창하여 점점 뿌리를 깊이 박고, 오늘이라는 하루가 돌아올 때마다 어제보다 가난해진다. 그 동안에 그 감퇴는 물체의 낙하처럼 더욱 속도를 내고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처럼 생명력과 재산이 날로 줄어든다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은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년에 도달하고 나서 몇 해까지는 생명력에 관해 말하자면 이자 중에서 얼마간은 자본에 보태는 사람과 같다. 그렇게 하면 지출한 금액이 다시 자연히 충당될 뿐더러 자본도 늘어간다. 오, 행복한 청춘! 오, 서글픈 늙은이······. 어쨌든 인간은 청춘의 힘을 소중히 간수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하나의 끝없이 긴 미래로 보이며,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짧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청년시절에는 그처럼 크게 보이던 인생이 꿈과 같이 덧없고, 다만 급격한 현상의 무의미한 교체로 생각되어 허무와 무상이 뚜렷이 들여다보이고 또 마음에 스며든다.


청년시젏에는 시간이 가는 것이 무척 더디다. 그러므로 일생의 4분의 1은 행복한 시기고 또 가장 길게 생각되는 부분이며, 그 동안에 기억하는 일들은 어느 시기의 기억보다 훨씬 많다.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누구나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그 밖의 4분의 3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계절에 있어서 봄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해가 너무 길어 지루하게 생각될 정도지만,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낮이 무척 짧아지는 대신에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노년기에는 왜 과거의 생애가 그처럼 짧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도 소중할 것 없는 대부분의 불쾌한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극히 작은 부분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길이도 짧아지는 데서 오는 것이다.





 * 케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에서 발견한 글들

나는 불평하지 않고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네. 그런 사람들은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지도 않는다네. 그런 종류의 불평은 모두 성격 탓이지 나이 탓이 아니야. 절제할 줄 알고 괴팍하지 않으며 인정이 있는 사람은 노년을 쉽게 견디지만, 가혹하고 몰인정한 사람은 어느 나이에나 괴로운 법이지.


 


인생의 행로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이고, 게다가 되짚어올 수 없는 길이라네. 그리고 인생의 각 단계에는 각각 그때에 어울리는 성질이 주어져 있네. 소년의 나약함, 젊은이의 패기, 안정기에 든 자의 중후함, 노년기의 원숙함, 모두 제 때에 거둬들여야 하는 자연의 결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법이라네.


 

 

건강을 생각해야 하네. 적당한 운동을 하고 음식은 체력을 해칠 정도가 아니라 체력이 회복될 정도로 섭취해야 하네. 또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더욱 보살펴야 하네. 이 두 가지 또한 램프에 기름을 보충하듯이 해주지 않으면 늙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지. 육체는 단련하는 동안 피로가 쌓이면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단련할수록 가벼워는 법이라네..

 


 

"자연이 인간에게 준 병독 가운데 육체의 쾌락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 쾌락을 손에 넣기 위해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욕망이 부추김을 받기 때문이다. 조국에 대한 배신, 국가의 전복, 적과의 밀통이 모두 여기서 생겨난다. 요컨대 모든 범죄와 악행은 다 쾌락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간통과 음행 같은 온갖 악행은 다름 아닌 쾌락의 유혹에 의해 유발된다.

또한 인간은 자연 또는 신으로부터 정신보다 더 귀한 것은 받지 않았다. 이 신성한 선물에 쾌락만큼 유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자제력이 나설 무대가 없고, 쾌락의 왕국에서는 덕이 설 자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려면,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육체의 쾌락에 빠져 있는 인간을 상상해 보면 된다. 그런 기쁨에 잠겨 있는 동안 정신을 작용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성과 사색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도 아무것도 없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쾌락이 점점 커지고 점점 장기화함에 따라 영혼의 빛은 완전히 꺼져버리니, 쾌락만큼 혐오스럽고 유해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쾌락에 대해 내가 왜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일까? 쾌락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년에 대한 비난이 아닐 뿐만 아니라 최고의 찬사이기 때문이라네. 노년은 연회와 잔뜩 차려놓은 식탁과 자꾸자꾸 돌아오는 술잔과는 거리가 멀지만, 바로 그 덕분에 술주정과 소화 불량, 불면과도 거리가 멀다네. 그러나 쾌락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면 - 그것은, 인간이 마치 물고기처럼 그것에 낚여버린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절묘하게도 쾌락을 '악의 미끼'라고 부른 것처럼, 쾌략의 매력에 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네만 - 노년에는 무절제한 연회는 안 되지만 절도 있는 술자리를 즐길 수는 있는 거라네.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 · · · ·
노년에, 말하자면 육욕과 야망, 투쟁, 적대감, 그리고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는, 이른바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4-01-30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에는 올해대로 아름다운 설 누리셔요.
그러고 보니, 참말
요사이는
강원도나 경북 또는 전북이나 충북
깊은 시골로 들어가지 않으면
눈 덮인 설을 누리지 못하네요.

그렇네요.

oren 님 어릴 적 그림들이
오늘날 아이들 마음속에도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모두들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oren 2014-01-31 22:42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께서도 설 잘 쇠셨는지요? 떡국도 맛있게 드셨고요?

요즘엔 눈 덮인 설도 누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황토길도 구경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졌지요.
참 안타깝고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설날을 앞두고 제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그런 푸념들을 늘어놓았더니 어떤 친구가 '시'를 하나 보내줬더라구요. 인터넷에도 올라온 게 없어서 직접 타이핑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시를 좋아하시는 함께살기 님께서도 한번 감상해 보셔요~

* * *

내 유년의 황토길

김혜숙

흙먼지가 봄바람에 쓸려가던
내 유년의 황토길

마른 햇살에 입술이 터진 아이들이
떨어진 신발을 끌며
상여 뒤를 따르던,

며칠에 한 번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덩치 큰 황소가
하늘을 쳐다보고 슬프게 울던
슬프게 울며 뒷발질하던,

고향집
대문 열면
언제나 거기
묵묵히 엎디어 있던
그길

어디서 시작되어
거기 와서 엎디어 있던 길이었을까
그 황토길

무너져 내린 서당방집 담모롱이를 돌아서
재봉틀 소리 끊이지 않던 과부집 마당을 가로질러
오슬오슬 추워 떨던 파란 보리밭을 가르며
입 다물고 기어가던,

느릿느릿 기어가서
첩첩산중, 저 먼 산 뒤쪽으로
막막하게 사라져 버리던 길,

오부자집 소실댁이 드디어 미쳐서
너울너울 춤추며 발가벗고 달려가던,
떡고물 무치듯 온 몸에 황토흙 바르고
미쳐서 달려가던 길,

어스름 해질녘이면
식만지 시대의 나의 아버지
아직도 젊은 나의 아버지
그 마디 굵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바라보던 길,

실눈을 뜨고서
그렇게 바라보던 길,
그길,

어디로 가던 길이었을까
내 유년의 길
그 슬픈 황토길은

<잠깨우기, 문학세계사, 1988>

2014-01-30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4-01-31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2002년 말띠해를 맞았을 무렵만 해도 연하장을 50통은 족히 받았던 듯한데, 어느새 연하장 한 통 받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서글픈 세월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놀라 흠칫했어요...

알라딘 서재는 참 독특한 곳이에요. 저도 2003년부터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6개월씩, 1년씩, 어떨 땐 1년 6개월 동안이나 단 한 번도 알라딘을 찾지 않은 경우가 있었지요. 살다보면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들러야 할 데도 많고 신경써야 할 곳도 많은 때가 있더라구요. 어떤 사물에든 너무 악착스럽게 매달리지 않는 쪽이 오히려 스스로 편안해지고 좀 더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듯해요.

설날 저녁에 쓰는 댓글이라 느낌이 또다르네요. 올 한 해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 건필하시고요!

2014-02-03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4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뭉치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오래 전에 썼던 글들을 새삼 읽게 된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렇지만 참으로 많은 분들께서 내가 오래 전에 썼던 글까지 찾아오셔서 추천을(얼마 전부턴 공감을) 꾹꾹 눌러 주셨고, 거기에 더해 정말 많은 분들이 열정적으로 수많은 댓글을 달아 주셨다는 사실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분명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반복되어온 패턴이지만 추천 한 방, 댓글 하나 달리지 않았던 글들도 무수히 많았고, 그런 시간도 꽤나 오래였지만 그게 그리 서운한 일만도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생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많은 분들의 훌륭한 글들이 지금도 여전히 어디선가 조용히 싹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혹은 이미 활짝 꽃이 피어 향기조차 그윽한데 아무도 그 향기를 맡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가지 않는 뒤안길에 꽃길이 있다’라는 격언이 알라딘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얘기라고 누가 자신있게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보잘것없는 제 글에 과분한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재삼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여기에 슬쩍 덧붙이고 싶은 말들은 내게 붙은 습관대로 진작에 다른 분께 맡기기로 했다. 그분은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해줄 뿐만 아니라 내가 언젠가 미래에 하고 싶어하는 말까지도 대신 해준다. 그분은 참 성격이 좋으시다. 내 필요에 의해 숱하게 끌려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불평 한마디 없으시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좁은 홈통

웅변이 자유롭고 유쾌하게 굴러가지 않으면 쓸모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 어떤 작품들은 애써서 지은 품이 박혀 있어 어딘가 투박하고 무뚝뚝한 맛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등불과 기름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잘 지어 보려고 애를 쓰며 자기 일에 너무 긴장하고 억눌린 마음 때문에 자연스러운 웅변을 억누르고 꺽어 빽빽하게 만들고,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48쪽)



 

이책, 저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우리는 기억력을 채울 생각만 하고, 이해력과 양심은 빈 채로 둔다. 마치 새들이 모이를 찾으러 나가서 그 모이를 새끼에게 먹이려고 맛보지 않고 입에 물어 오는 것과 똑같이, 우리 학자님들은 여러 책에서 학문을 쪼아다가 입술 끝에만 얹어 주고, 뱉어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은 수작이 얼마나 내 경우에 들어맞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내가 여기 글을 쓰는 것도 똑같은 수작이 아닐까? 나는 이책 저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그것을 담아 둘 곳도 없어서, 내게 저장해 두지 못하고 여기다 옮겨놓는 것이다. 사실 이 문장들은 전에 있던 자리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지식으로만 배우는 것이고, 과거의 것은 미래의 것과 똑같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151쪽)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뭐라고 말하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이다.(152쪽)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 되고 우리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학식이 많아서 경험이 없이도 그렇게 위대한 장수가 되었던 루쿨루스는 우리들의 방식으로 지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너무 심하게 남의 팔에 매달려 다니다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마저 없애고 만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대비할 생각을 가지면? 나는 겨우 세네카의 사상에서 꺼내올 뿐이다. 내가 자신이나 또는 남을 위해서 위안의 말을 찾아보고 싶으면? 나는 그 말을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사람들이 나를 그 지식으로 단련시켜 주었던들,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찾아 가졌을 것이다.(152∼153쪽)

 


나는 살아가는 데 쓸모없는 보배에는 결코 영수증을 떼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사람들과의 교섭을 포기하려는 이 시간에, 새로 나를 추천해서 그들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심정일 것입니다. 나는 살아가는 데 쓸모없는 보배에는 결코 영수증을 떼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어떠한 자이건, 나는 종잇장으로 된 일보다는 다른 일로 받고 싶습니다. 내 기술과 기교는 나 자신을 더 가치 있게 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내 공부는 행할 줄 알기 위한 것이지, 글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인생을 만드는 데 온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내 직분이고 내 사업입니다. 나는 다른 일꾼은 되어도 책 만드는 일꾼은 아닙니다. 나는 현재의 본질적인 편익에 소용되기 위해서 능력을 바란 것이지, 내 후계자들에게 저축과 예비 재산을 쌓아 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장점을 가진 자는 그것을 자기 행동 습관에, 여느 때의 말과 행동에, 사랑하거나 싸우는 행동에, 놀음에, 잠자리에, 식탁에, 자기 일처리에, 자기 집 세간살이에 드러낼 것입니다. 내가 보는 바 추레한 잠방이를 만들어 입고 좋은 책을 지어 내는 자들은, 내 말을 믿었더라면 먼저 잠방이를 만들어 입었을 것입니다. 스파르타 인에게 훌륭한 군인보다 훌륭한 수사학자가 되고 싶은가를 물어 보십시오. 나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내게 밥을 차려 주는 자가 없다면 차라리 익숙한 요리사가 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부인, 글 쓰는 데는 유능한 인간이고, 다른 데서는 쓸모없는 바보 인간이라는 따위의 칭찬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요. 나는 내 능력을 사용할 자리를 그렇게 못나게 골라잡았다기보다는 차라리 여기저기서 바보로 통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런 어리석은 수작으로 어떤 새로운 명예를 얻으려고 기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862∼863쪽)

 
 

 

펼친 부분 접기 ▲



 * * *


글제목 작성일

북마크하기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 (추천14 댓글10 먼댓글0) 2014-01-17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사진으로 되돌아본 2013년  (추천16 댓글21 먼댓글0) 2014-01-07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다시『월든』을 만날 시간 (추천13 댓글12 먼댓글0)
<주석 달린 월든>
2013-12-10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온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을 해부하다가 결국 '인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책 (추천17 댓글19 먼댓글1)
<몽테뉴 수상록>
2013-11-15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 (추천13 댓글12 먼댓글1) 2013-10-12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 방문 후기 (추천22 댓글18 먼댓글0) 2013-09-19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영화 '마지막 사중주'를 보고...... (추천13 댓글8 먼댓글0) 2013-08-16
북마크하기 월출산과 보길도를 거쳐 미황사와 선운사까지 (추천11 댓글13 먼댓글0) 2013-06-14
북마크하기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추천11 댓글12 먼댓글2) 2013-04-25
북마크하기 알라딘의 '안위'가 걱정이다 (추천22 댓글4 먼댓글1) 2013-01-23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추천10 댓글15 먼댓글1) 2013-01-11
북마크하기 해가 바뀔 즈음의 겨울 풍경 (추천11 댓글11 먼댓글0) 2013-01-03
북마크하기 사진으로 되돌아본 2012년 (추천15 댓글11 먼댓글1) 2012-12-29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사진에 담아본 두꺼운 책들 (추천40 댓글9 먼댓글0) 2012-12-24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생각의 역사] 도끼에서 싹튼 '생각'의 과거, 현재, 미래 (추천9 댓글2 먼댓글1) 2012-11-30
북마크하기 눈의 탐욕 (추천12 댓글6 먼댓글0) 2012-09-29
북마크하기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추천10 댓글11 먼댓글0) 2012-04-26
북마크하기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추천24 댓글13 먼댓글1) 2012-02-08
북마크하기 몽테뉴에 대한 추억...... (추천18 댓글6 먼댓글3) 2012-01-31
북마크하기 '참다운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 이유 (추천12 댓글5 먼댓글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12-01-24
북마크하기 사찰로 가는 길 (추천11 댓글15 먼댓글0) 2012-01-14
북마크하기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 (추천10 댓글8 먼댓글0) 2011-12-31
북마크하기 끝없는 가을...... (추천16 댓글11 먼댓글0) 2011-11-07
북마크하기 길따라 단풍따라 555km (추천11 댓글12 먼댓글1) 2011-10-25
북마크하기 하늘공원에 가 보세요~ (추천26 댓글16 먼댓글1) 2011-09-22
북마크하기 어떤 일몰 (추천24 댓글18 먼댓글0) 2011-09-20
북마크하기 몰염치, 분개, 오만에 관하여...... (추천14 댓글8 먼댓글0) 2011-09-07
북마크하기 지리산 종주 산행기 (추천12 댓글11 먼댓글1) 2011-08-26
북마크하기 인생이라는 모험에 찬 여행 (추천12 댓글4 먼댓글1) 2011-08-15
북마크하기 아버님 영전에 드리는 글 (추천11 댓글8 먼댓글0) 2011-05-31
북마크하기 워렌 버핏이 '투자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단언한 책 (추천14 댓글0 먼댓글2)
<증권분석>
2011-03-16
북마크하기 알라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과 허영'에 관한 이야기 (추천40 댓글6 먼댓글0) 2011-03-13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경제위기에 대해 쓴 책 가운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 (추천20 댓글6 먼댓글5)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2011-03-03
북마크하기 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추천12 댓글13 먼댓글5)
<평생독서계획>
2010-12-25
북마크하기 제3부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장 자크 루소 (추천13 댓글0 먼댓글0) 2010-12-25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추천27 댓글11 먼댓글2) 2010-10-10
북마크하기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시도한 심오한 통찰을 담은 책 (추천18 댓글5 먼댓글2)
<빈 서판>
2010-10-05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최근 500년 동안 지배적인 국가들의 경제적 상승과 쇠퇴에 대한 심오한 통찰 (추천15 댓글4 먼댓글0)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2010-09-23
북마크하기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추천16 댓글7 먼댓글2)
<월든>
2010-09-16
북마크하기 나의 꿈, 나의 서재 (추천24 댓글18 먼댓글0) 2010-09-02
북마크하기 인류 최초의 동서간 대전쟁을 다룬 역사의 원전 (추천12 댓글4 먼댓글0)
<헤로도토스 역사 - 상>
2007-01-11
북마크하기 부의 흐름을 추적하는 타임머신 여행 (추천22 댓글2 먼댓글0)
<부의 탄생 (양장)>
2005-07-15
북마크하기 필립 피셔의 혜안을 수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는 투자의 고전 (추천40 댓글5 먼댓글1)
<보수적인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
2005-07-05
북마크하기 주옥같은 교훈들로 가득찬 투자의 명저 (추천36 댓글8 먼댓글1)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
2005-06-13
북마크하기 나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여러 종류의 편견들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책 (추천19 댓글1 먼댓글1)
<인간에 대한 오해>
2005-03-28
북마크하기 위대한 역사가의 불후의 명저_인간과 인간 정신에 관한 문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추천23 댓글0 먼댓글0)
<로마제국쇠망사>
2005-02-15
북마크하기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토대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책 (추천22 댓글0 먼댓글0)
<인간 본성에 대하여>
2004-10-27
북마크하기 인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놓쳐서는 안 될 명저 가운데 한 권 (추천19 댓글1 먼댓글1)
<총 균 쇠>
2004-10-1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4-01-28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나눈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에 새록새록 남아서
두고두고 아름답게 흐르겠지요

oren 2014-01-28 11:18   좋아요 0 | URL
여기서 보낸 시간들도 즐거웠지만, 되돌아보니 '자연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훨씬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책을 읽을 시간들은 아직도 얼마든지 많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을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들 때도 있거든요. 사실 책을 읽는 데 조바심을 느끼기란 저로서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닌 듯해요.
 
온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을 해부하다가 결국 ‘인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책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고전을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을 자주 경험한다. 마치 옛 사람들이 빤히 알고나 있었다는듯이 천연덕스럽게 '지금' 막 우리들 눈 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헉. 과연 이 사람이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다는 그 사람이 맞아?'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정말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떨 땐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건들에 부닥쳐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고전을 쓴 저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그 문제를 명쾌하게 바라보며 시원스런 답변을 내놓는 듯한 느낌이 들 때조차 있다. 그들은 마치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전문가들이거든'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작년에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특히나 많이 받았었다. 그때 그 느낌이 얼마나 쎄게 다가왔던지 나는 한동안 그의 책에 나오는 참으로 재치있고 절묘한 구절들을 베끼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분량들을 베껴 쓰는 데도 나는 거기에 투자하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의 글들을 처음에 그저 눈으로만 싱겁게 만났을 때나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만남에서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머릿속에 아예 집어넣을 욕심으로 마구 덤벼들면서 그의 글들을 어딘가에 부지런히 퍼담을 때나 두 번 모두 그의 재치와 절묘함이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점에 한번 더 놀라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의 글들은 워낙에 질서가 없는 점이 한가지 뚜렷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질서정연하고 견고한 뼈대를 갖춘 글들, 가령 주춧돌과 기둥들과 지붕들이 저마다 제 역할을 뚜렷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그런 글보다 훨씬 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만큼 그의 글은 이리저리 제멋대로 술술 굴러다니는 듯하면서도 막힘이 없고, 방자하게 흐른다 싶다가도 금세 엄숙함과 근엄한 모습을 되찾는 솜씨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게 그사람의 타고난 재능이고 매력이었다.
 
아무튼 나는 한동안 그의 글들을 커다란 자루에 정신없이 주워 담기에 바빴는데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말로 빗대자면 맛있는 음식을 마구 '폭풍 흡입'하는 딱 그꼴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무질서하게 주워 담았던 방대한 글뭉치들은 결국 언젠가는 다시 좀 꺼내 보고 또 도로 집어넣어야 할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루에 담을 때마다 필요한 물목에는 적당한 번지수를 적어둘 필요를 느꼈다. 커다란 자루 속에 다양한 색깔과 무늬와 표식을 적은 또다른 자루를 여럿 만드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잡다한 자루들에는 가령 다음과 같은 제목들이 제대로 붙은 것들도 있고 어떤 자루들은 미처 자루를 만들 겨를조차 없어 그저 생각의 자루에만 그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자루를 마련하지 못한 글뭉치들은 아직도 커다란 자루를 제 집 삼아 거기서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그런 크고 작은 자루들을 굳이 체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주욱 나열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책에 대하여... 글쓰기에 대하여... 나이에 대하여... 노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친구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섹스에 대하여... 철학에 대하여... 운수에 대하여... 습관에 대하여... 용모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은퇴에 대하여... 부자에 대하여... 여행에 대하여... 본성에 대하여... 술에 대하여... 거짓말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등등등

그런데 저런 제목을 단 글뭉치를 담은 자루들은 내가 가끔씩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목적으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굳이 어디에 공개할 필요가 딱히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어떤 책을 읽다가 책 속의 글들이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어올 경우 그 내용들을 부지런히 베끼고 난 다음에 그걸 보따리째 내놓는 경우가 그동안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에 따로 만든 글뭉치 자루들은 그걸 굳이 남들이 두루 구경할 수 있도록 어디에 내놓기가 영 주저되기도 하고 또 '뭉치들을 담은 자루'의 특성상 그 모습을 공개된 장소에 펼쳐 보이기가 어딘가 민망스런 느낌도 들었다. 그 자루들은 그저 벽장 속 어두컴컴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고 내 생각에도 그런 자루들은 거기에 제멋대로 퍼진 상태로 머물러 있는 모습이 딱 좋았다.

그런데 어제 문득 그런 '숨겨진 글뭉치'를 담은 자루들을 혼자서 이리 저리 들추고 꺼내 보다가 제법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모양으로 널브러져 있는 자루 하나를 발견했다. 그 자루엔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다소 야릇한 제목이 붙어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자루의 존재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작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아주 묘하게 진행되면서 온갖 다양한 추리를 낳고 있을 때, 마침 내가 읽고 있던 몽테뉴의 책 속에서 그 사건에 관한 '절묘한 해답'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쉴 새 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 사건에 대한 얘기는 잠시만 뒤로 미뤄두고 아직은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루의 탄생에 관한 얘기를 조금은 덧붙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나는 몽테뉴가 쓴 매우 두툼한 그 책을 읽는 동안 별로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작년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이 예고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면서 내게 책을 읽는 데 독특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데 힘입은 바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째뜬 나는 아까부터 얘기한 그 '이상한 느낌' 때문에 서둘러 그런 제목을 붙이고 그런 글들을 끌어담을 자루를 하나 만들었을 뿐이지 달리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물론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자루를 한번쯤 꺼내 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이 글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분명 '거짓말'을 명백히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나는 이쯤에서 미리 그런 말을 해 둘 필요를 느낀다.

어쩌면 내가 다시 들춰낸 그 자루 속에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같은 야한 비디오 테이프가 한 개쯤 담겨 있을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주 오래 전에 봤던, 어디에서 봤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영화가 어떤 스토리를 담고 있었는지도 알아볼 겸 '이번 기회에' 찾아 봤더니, 그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딱 내가 찾은 자루 속 글뭉치들과 아주 절묘한 호응을 하고 있었다. 가령 내가 찾아낸 몇 줄의 글들은 눈에 번쩍 띄었다고까지 말해야 옳을 듯하다. "그래함이 가진 발기부전은 그가 행한 부정에 대한 처벌이었을 것이다. ······ " "비디오 테이프가 가진 의미는 아마도 거울과 일기장 두 가지일 것이다. 사람은 거울 앞에 설 때 거짓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 "

누구나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그냥 묻어두거나 심지어 아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 완전히 처박아 두는 경우가 가끔씩 있다. 오늘 문득 내가 그런 글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자루 하나를 발견한 탓에 내 글이 자꾸만 어디론가 딴 데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결국 내 글이 달릴 궤도는 내가 바로 잡을 일이고 내 글의 종착역은 결국 그 자루에 담긴 글뭉치들에게는 어둠에서 해방되는 곳임을 미리 예고해 놓아야 겠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내가 무엇하러 '자루' 얘기를 쓸데없이 이토록 길게 늘어 놓겠는가.

나는 그 이상한 자루에 담긴 글뭉치들을 꺼내 오랫만에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를 얼마쯤 세세히 비교해 보면서 말이다. 내가 작년 가을 무렵에 이런 제목을 자루에 몰래 붙여 놓고 몽테뉴의 책 속에서 발견한 '묘한 구절들'을 끌어모을 무렵엔 나라가 온통 '거짓말' 때문에 '두 번째로' 시끌벅적할 때였다. 먼저 일어났던 거짓말은 이른 봄에 있었다. 너무나 뻔뻔한 거짓말을 누구에게나 '거짓말처럼 들리도록' 온 국민 앞에서 생방송으로 떠들었던 그 인물은 '입'으로 먹고 산다는 묘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해외'에서 '공무수행중' 일어난 일들에 대해 늘어놓은 거짓말은 금세 들통나는 바람에 너무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일어난-어쩌면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거짓말' 사건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시원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앞선 '거짓말' 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풀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문제'를 잔뜩 떠안고 있었다. 좀 더 부풀려 얘기하자면 그 문제는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들과 수많은 언론 분야 종사자들이 일년 내내 붙들고 씨름할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였으며, 한때는 한 사람의 '과거 문제'가 거짓이냐 아니냐에 따라 실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처럼 보였고, 그 사건이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사건의 당사자조차 스스로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심을 거듭하는 동안 실로 많은 사람들을 '잠시나마' 오리무중 속으로 꼼짝없이 붙들어둘 정도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거짓말' 하나 때문에 온통 난리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뜨거운 관심을 보이던 그 문제도 어느새 '벽장 속으로' 깊숙히 자취를 감춘 지 꽤나 지난 듯한 줄 알았는데 그저께 문득 뉴스를 보다가 스쳐 지나가듯 '자막 형태'로 내 눈에 우연히 띈 게 결국 탈이 되고 말았다. 잡다한 뉴스에 관심을 끊은지 오래인 내게 그 자막은 결국 글뭉치를 담은 그 자루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게 나를 부추겼고, 오래 전에 내가 벽장 속에 처박아 둔 글뭉치들조차 드디어 세상 구경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며 내심 들뜬 분위기로 반기는 듯했다. 엊그제 내가 자막으로 봤다는 그 뉴스의 제목을 여기에 직접 옮길 필요까지는 차마 느끼지 못하겠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싶은 분들은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으시더라도 꾹꾹 눌러 참으시고 잠시만 시간을 내어 저 손가락을 따라 한번 다녀오시라. ☞ 여기

많은 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이와 같은 결과를 충분히 짐작했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남들이 '진실 혹은 거짓말'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옮겨 다닐 때 '진실'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태도로 그 사건을 말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나는 마침 그때 운이 아주 좋아서 그 사건을 둘러싸고 '거짓말 논란'이 한창 뜨거울 때 '거짓말의 묘한 얼굴'을 아주 절묘하게 밝혀 놓았던 몽테뉴의 글들을 발견했을 뿐이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몽테뉴의 글들이 너무 절묘해서 그 글뭉치들을 어떤 자루에 부지런히 옮겨놓는 일에 열중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 글이 혹여 남의 불행을 보고 묘한 쾌감을 느끼는 고약한 성미를 드러내는 글은 아닐까 싶어 공개하기가 몹시 주저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하나다. '거짓말'이 얼마나 놀라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특히나 그것이 '오입'과 결부되었을 경우에 대해서 몽테뉴가 얼마나 예리한 생각과 현명한 판단을 우리 앞에 내놓고 있는지 너무나 놀라서 내가 뒤늦게라도 적당한 때를 틈타 이런 식으로 말해 보고 싶은 것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권에 영합하는 언론사의 '특종 보도'에 어른거리는 비열함과 완력에 더해, 칼자루를 쥔 권력자들의 포악한 만행에 치를 떨며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었을 듯했던 우리들의 '슬픈 영웅'이자 '호위무사'를 자칭했던 그분만 너무 우스운 꼴이 된 게 아닌가 싶어 몹시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 여기


 

 

 

 

 

 

곱사등이를 보고

모든 일을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하는 자가, 자기의 진실한 존재는 사람들에게 감춰 두고 가면을 씌워서 보여 준다면,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곱사등이를 보고 체격이 잘생겼다고 추어올려 주어 보라. 그는 그것을 욕으로 들을 것이다. 그대가 겁보인데 사람들이 용감한 사람이라고 숭배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일까? 그대를 딴 사람으로 본 것이다. 누가 수행원 중의 가장 변변찮은 한 병사를 장수로 잘못 알고 올리는 인사를 그가 만족하게 받는다면, 나는 그 꼴을 똑같이 귀엽게 보아 줄 것이다.(933쪽)

(나의 생각)
장렬하게 전사한 어느 '호위무사'를 떠올리게 한다.                       (<---- 이 글은 2013. 9.21 기록임)


이번에 문득 든 생각은 그토록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 그 '호위무사'가 『몽테뉴 수상록』이나 혹은 내가 최근에 읽었던 고대 그리스 비극 가운데『아이아스』를 미리 읽어보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설사 그런 책들을 모두 읽었다손 치더라도 '분노'라는 무시무시한 무기 앞에서 결국 그 스스로 찔려 죽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이아스'의 분노에 아무리 깊은 감명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맞닥뜨리게 마련인 '불처럼 타오르는 분노' 앞에서는 결국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게 너무나 뻔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은 참 여러모로 나약한 존재이고, 자신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조차도 '수많은 벌판'을 지닌 무수한 거짓말로 막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들도 결국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약함만을 무턱대고 드러낸 꼴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글뭉치를 담은 자루를 꺼내 들고 긴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나 역시 어리석고 나약하긴 매한가지다.


격정이 지배하는 것

우리의 맥이 극도로 뛰며 흥분을 느끼는 동안은 일을 중지할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아 냉철해질 때에는 사물들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때에는 격정이 지배하고 격정이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격정을 통해서 보면, 마치 안개를 통하여 보는 물체와 같이 잘못들이 우리에게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배고픈 자는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징계를 사용하고자 하는 자는 벌 주고 싶은 생각에 굶주리고 목이 말라서는 안 된다.(785쪽)


분노라고 하는 무기


다른 무기를 가지고는 우리가 그 무기를 움직이지만, 분노라고 하는 무기는 반대로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의 손이 무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손을 조종한다. 이 분노라는 무기가 우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무기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792쪽)

(나의 생각)

최근에 읽었던 고대 그리스 비극 가운데 소포클레스가 쓴 『아이아스』가 생각난다. 그가 격분했을 때에는 그리스 병사들이 '트로이아에서 훔쳐온 가축들'조차 그가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던 그리스 병사들로 보였다. 그는 심지어 '말'을 기둥에 묶어 두고 채찍질을 하면서 그 말을 '오뒷세우스'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은 이번에 덧붙인 기록임)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

나라가 동란에 빠지고 국민이 분열되어 있는 마당에 박쥐같이 휘뚝거리며 마음이 어느 편으로 움직이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훌륭하다거나 명예롭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중도를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길도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운의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이다."(티투스 리비우스) (870쪽)

접힌 부분 펼치기 ▼

 


자루 속으로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래 인용문들은 작년 9월에 만든 '오입과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루에 쓸어담아 놓았던 글뭉치들이다. 이번 기회에 아무런 '가감없이' 그대로 들춰내 본다. 앞서 인용한 글뭉치들도 처음엔 여기에 함께 섞여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배치만 조금 바꿔서 자루 밖으로 꺼내 놓은 것이다.


 * * *


거짓말쟁이

그들은 지각 없게도 제 올가미에 자신이 걸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왜냐하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그렇게도 여러 가지로 말해 놓은 것을 무슨 기억력으로 모두 둘러맞출 재간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에 이런 훌륭한 기술을 가졌다는 평판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것은 명성이 뭔지 모르거나 성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44쪽)



 

진실과 거짓말

만일 진실과 같이 거짓말에도 얼굴이 하나밖에 없다면 우리의 사정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면 거짓말쟁이가 말하는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반대는 수없는 얼굴과 무한한 벌판을 가지고 있다.
(45쪽)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641쪽)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크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737쪽)



 

악의

악의는 그 자체의 독을 대부분 들이마시고 제 독에 중독된다. 악덕은 몸의 종기와 같이 영혼에 후회를 남긴다. 이 후회는 항상 제 상처를 긁어서 피를 흘린다.
(886쪽)



 

우리 따위

우리의 개인 생활을 자신에게밖에 보여 줄 데가 없이 살고 있는 우리 따위는, 주로 우리들의 행동을 검열하기 위해서 우리들 속에 모범을 세우고, 그것으로 행동을 심사하며, 거기에 따라서 우리를 칭찬하기도 하고 정제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887∼888쪽)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

나는 나를 판결하기 위해서 내 법률과 재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데보다도 거기에 호소한다. 나는 남의 의견을 잘 따라서 내 행동을 억제한다. 그러나 내 의견에 의해서밖에는 행동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믿음직하고 착실한지 신앙이 깊은지, 아는 것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에 매이지 마라. 그대 자신의 판결에 매여라. "그대가 자신에게 하는 판단을 그대는 사용해야 한다."(키케로) - "양심이 자신에게 해 주는 악덕과 도덕의 증명은 한층 더 막중하다.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키케로)
(888쪽)



 

후회

후회는 우리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를 아무 데로나 되는 대로 끌고 돌아다니는 미친 생각에 대한 반대 심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자에게 지난 날의 도덕과 순결성을 부정하게 한다.
(888쪽)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자기의 개인 생활에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훌륭한 인생에서 보는 일이다.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줄리우스 드루수스가 장인(匠人)들에게 한 말은 점잖은 말이었다. 장인들이 그에게 3천 에퀴만 내면 그의 집을 전과 같이 이웃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6천 에퀴를 주겠으니, 누그든 어느 기둥이나 주춧돌을 들여다보아도 좋게 만들어 놓으라."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888∼889쪽)



 

오입과 거짓말

나는 거짓을 꾸미기에 몹시 힘이 든다.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남의 비밀을 맡아 두기를 피한다. 침묵을 지킬 수는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을 부인하기는 괴롭고 속이 상한다. 정말 비밀이 되려면 그 본성으로 그래야 되지, 의무로 그래서는 안 된다. 왕을 섬기려면, 덮쳐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고는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가 오입한 일을 엄숙하게 부인해야 할 것이냐고 밀레토스의 탈레스에게 문의했던 자가 내게도 물어 보았더라면, 나는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오입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탈레스는 아주 다르게 충고하며, 작은 잘못으로 큰 잘못을 막기 위해서 맹세하며 부인하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충고는 악덕을 골라 내는 일이 아니고 늘려 가는 것이다.
(931∼932쪽)



 

이 사람아, 그는 내게 물을 끼얹은 것이 아니야

마케도니아 왕 아르케실라오스가 거리를 지나는데, 누가 그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의 부관이 그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이 사람아, 그는 내게 물을 끼얹은 것이 아니고, 나를 다른 누구로 오인하고 그 사람에게 끼얹은 것일세" 하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누가 그에게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자, "그 자가 말하는 것은 내게 관한 일이 아니고" 하고 말했다.(933쪽)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마찬가지로 애써 가며 사실에 대비하는 자를 비웃는다. 마누라를 새치기당한 수치는 지워질 수 없다. 한번 걸리면 영원히 걸린 것이다. 그것에 징벌을 주면 잘못한 일 자체보다도 더 사실을 드러내 놓게 되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의문을 풀어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불행을 드러내고 비극의 무대 위에 나발을 불어 대면 보기 좋은 꼴이다. 그것은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착한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고도 쓸모없는 지식은 피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960∼961쪽)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961쪽)


 

펼친 부분 접기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아이즈 2014-01-2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현실로) 윤회된다, 오렌님 페이퍼를 찬찬히 읽으면서 새삼 전율이 입니다.
그들이 남긴 말은 어쩌면 현실 속에서도 그토록 딱딱 들어맞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oren 2014-01-26 12:59   좋아요 0 | URL
몽테뉴만 하더라도 아주 옛날 사람이었는데 그사람의 말로는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내 상상력과 소원의 극한을 훨씬 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인지요.. ㅎㅎ

* * *

그들의 문장은 나를 놀라 넘어지게 하며 감탄으로 넋을 잃게 한다.

나는 늘 마음속에 한 상념과 뒤섞인 어떤 영상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와 같이 내가 써 내놓는 것보다 더 나은 형태를 보여 주는데, 나는 그것을 파악해서 전개시켜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상념 자체도 중간쯤밖에 못 된다. 내가 이것으로 추론해 보면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내 상상력과 소원의 극한을 훨씬 넘는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만족시켜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나를 놀라 넘어지게 하며 감탄으로 넋을 잃게 한다. 나는 그들의 미를 판단하며 그 미를 눈으로 본다. 전부를 이해하는 것이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그런 것을 써 보려고 갈망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정도까지는 이해한다.

* * *

분노라는 격정, 격정이 갑자기 꾸며낸 궤변

분노는 그 자체에 쾌락을 느끼며, 아부하는 격정이다. 얼마나 여러 번 우리는 그릇된 원칙 아래 혼동되어서, 누가 와서 우리들 앞에 정당한 변호와 변명을 제시하면, 우리는 진리나 실속 없는 일에 대해서 분개하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옛날의 한 경이로운 예를 기억하고 있다.

피소는 탁월한 도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부하 병사 하나가 꼴을 베러 갔다가 혼자 돌아왔고 같이 갔던 동료를 어디에 두고 왔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 자가 그를 죽인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하고 당장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래서 그를 사형대에 올려놓았을 때에 마침 길을 잃었던 동료가 돌아왔다. 군대 전체는 이것을 큰 경사로 여기고, 두 병사는 한참 서로 껴안고 어루만지면서 반가워했다. 그 다음 거기 와 있던 피소에게도 이 일은 대단히 기쁘리라고 기대하고, 사형 집행인이 이 두 병사를 그의 앞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사정은 거꾸로였다. 피소는 수치와 울분으로 아직도 속에서 치밀어오르던 화가 배로 터지며, 그의 격정이 갑자기 꾸며 댄 궤변으로, 홧김에 이 셋에게 죄를 씌우며 모두 형장으로 보내게 하였다. 첫번 병사는 그가 선고를 받았으니 유죄이고, 길을 잃었던 둘째 병사는 그의 동료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으니 그렇고, 사형 집행인은 그가 받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까닭에 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 『몽테뉴 수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