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체험 문학

 

 

cyrus 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어서 먼댓글로 달아 봅니다.

 

"내 생각에 영국인들에게는 괴테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cyrus 님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제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견해는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견해가 아닐까 싶어서요.

 

저로서는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듯한 표현 자체'가 너무나 놀랍고 또 생경스럽기만 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추측을 '영국인들에게'까지 적용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견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cyrus 님의 글 때문에 오늘 제가 일부러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자격이 충분한 '랄프 왈도 에머슨'의 글까지 다시 찬찬히 읽어 봤습니다. 에머슨이 마침 토머스 칼라일의 절친이기도 했기 때문에 괴테보다 셰익스피어에게 훨씬 더 이끌렸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에머슨이 그렇게나 편협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여기서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작품을 통해 '인류를 빛낸 대표적인 위인' 가운데 괴테를 포함시키는 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그가 다룬 위인은 단 여섯 명이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 시인 셰익스피어, 세속의 영웅 나폴레옹, 문학가 괴테, 신비가 스베덴보리, 철학자 몽테뉴가 그들인데, 괴테를 이들과 같은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머슨이 괴테를 얼마만큼 존경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괴테가 셰익스피어를 얼마만큼 우러러 보았는지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책을 사두기만 하고 여태까지 읽어 보진 못했습니다만,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연구자가 쓴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라는 책을 통해 그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보니, cyrus 님께서 '가벼운 농담조로 지나치듯이' 말씀하신 대목을 두고 제가 너무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어쨌든 오늘 제가 다시 책을 펼쳐 찾아 읽은 대목을 참고삼아 덧붙입니다.

 

 * * *

 

괴테의 예술론은 에커만이 지은 <괴테와의 대화>에 나와 있다. 거기에서 괴테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조금 소개하겠다.

 

"그는 인간생활의 모티브란 모티브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려냈고, 또 모두 표현해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선명함과 자유로움으로 넘쳐난다."

 

"무대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그뿐인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마저 그에게는 너무나도 좁았다."

 

괴테의 이런 견해, '선명하고 자유로움으로 넘쳐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것을 써냈고,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표현해냈다.

 

그가 정말 대단한 부분은 인간 세상의 모든 사건, 특히 감정적 부분인 사랑, 증오, 질투 등의 희로애락 전부를 써냈다는 사실이다. 사랑만 해도 연인 간의 사랑뿐 아니라, 부부, 부모자식, 형제, 사제, 친구의 사랑을 모두 그려냈다. 그것이 만약 교과서처럼 규정화해 써내려간 것이었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반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글은 정말 '선명함과 자유로움으로 넘쳐나고' 있다. 거기에는 정말 당할 재간이 없다.

 

 - 오디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게 찾아왔다』, <03.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괴테의 이 말을 인용했을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극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셰익스피어의 세일즈맨'이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테의 말대로 더 이상 쓸 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극작가, 소설가, 시인은 사라져야 하는가? 사실 그렇지는 않고,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괴테의 말 뒤에 얼마든지 번안을 하거나, 자극을 받아 새로운 것을 쓰려고만 하면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 오디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게 찾아왔다』, <03.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 * *

 

괴테는 결코 만인에게 친숙해질 수 있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순수한 진리에 몸을 바치고 있다기보다는 자기수양·인간완성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한 것은 보편적인 자연·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해 위대한 자아완성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그를 이익으로 꾀거나 속임수에 빠뜨리거나 위협을 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자제심과 극기심이 많아 누구에게나 단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까'라는 시점에서만 평가를 내리고 모든 것을 자신을 성장시키는 양식으로서 계속 흡수하는, 끝없는 자아완성의 화신ㅡ그것이 괴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지위도 명예도 건강도 시간도, 더없이 높은 실재조차도 그에게 있어서는 단지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아완성의 달인이고 모든 예술과 과학, 그 밖에 무엇이건 왕성하게 관심을 나타내는 위대한 아마추어였다. 예술을 사랑했지만 전문적인 예술가가 되지는 못하고, 영적인 센스는 충분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엄격한 심령주의자가 되지는 못했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제2장, 위대한 자아완성의 초인, 문학가 괴테>

 

 

대부분의 현자는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이럭저럭 어림짐작 내에 들 정도인데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인류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열심히 읽으면 그의 사고회로를 뒤쫓는 것은 어떻게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손을 들게 된다. 어떻게 그와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조차 상상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그 걸출한 묘사력, 창조력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셰익스피어처럼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제3,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 시인 세익스피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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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3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국 문학에 자부심 강한 영국인이 제 글을 본다면 펄쩍 뛸 수 있겠군요.. ^^;;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 반영된 제 문장이 본의 아니게 읽는 이에게 왜곡된 의미로 전달될 수 있으니 문제의 표현을 삭제하겠습니다.

oren 2017-12-13 12:03   좋아요 0 | URL
비단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한테도 cyrus 님의 표현은 쉽게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게 저의 솔직한 판단입니다. 문학의 거장들을 두고 ‘우열‘을 판단하는 일은 전문가들에게도 몹시 어려운 문제일 수 있을 텐데, 제가 아는 한 그 어떤 사람도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판단은 여태껏 접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cyrus 님께서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나 판단 근거들‘이 너무 궁금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데, cyrus 님께서 표현 자체를 삭제하시겠다니 제가 도리어 뻘쭘해지는군요...

카스피 2017-12-13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두분다 넘 대단하세요^^

oren 2017-12-13 15:54   좋아요 0 | URL
다소 심각하게 쓴 글인데, 제 글의 논지를 너무 벗어난 댓글 같아서 할 말이 없습니다요. ㅠㅠ

cyrus 2017-12-1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생각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삭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실존 인물이 아닐 거라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괴테는 평생 동안 글을 많이 남겼고, 활동적으로 살아온 작가입니다. 셰익스피어보다 괴테의 삶이 워낙 뚜렷해서 저는 셰익스피어보다 괴테에 더 끌리게 됐고, 제 개인적인 생각이 반영된 문장이 나온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 봐도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근거가 빈약했습니다. 그러니 문장을 삭제한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oren님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드백을 한 것입니다.

oren 2017-12-14 01:09   좋아요 1 | URL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일수록 ‘작가의 삶에 관한 기록‘은 당연히 부실하기 마련이라고 봅니다. 문학 역사상 가장 우뚝한 두 사람으로 평가받는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와 같은 작가의 삶이 괴테보다는 훨씬 흐릿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그들의 문학적 성과가 더 낮게 평가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문득, 문학 비평계의 거목인 헤럴드 블룸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었는지, ‘세익스피어를 둘러싼 음모론‘은 또 어땠는지 궁금해서 다시 찾아 읽어보게 됩니다.

* * *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 * *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 * * * *

“설마 이 모든 것을 윌리엄이 썼다고 믿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내뱉은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문인집안 출신도 아니고,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적도 없는 시골 출신 청년이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갑자기 그토록 많은 걸작을 쏟아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진짜로 원작자가 맞느냐는 논쟁을 키운 건 미국 여성 델리아 베이컨이었다. 그녀는 영리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열다섯에 소녀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채 교사로 일하던 즈음에 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빠져들었다. 각종 기록을 세밀히 검토한 그녀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작자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이 유명한 얘기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도 등장한다.

선량한 베이컨: 곰팡이 냄새 어린 채.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이라는 황량한 논법.251) 한 길을 걸어가는 암호의 사기꾼들. 위대한 탐색의 탐정가들. 무슨 도시로, 위대한 명사들이여?

251) Shakespeare Bacon‘s wild oats. 미국의 여류 소설가 델리아 베이컨(1811∼1859,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과 인척관계라 주장함)은 그녀의 저서인 『드러난 셰익스피어 연극의 철학(Philosophy of the Plays of Shakespeare Unfolded』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다고 주장함.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은 그보다 학식이 많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씌어졌을 것이라는 부정적 설도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9장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조차 델리아 베이컨의 의견에 대해 동조 내지는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대표적 인물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단정 짓지는 못해도 프랜시스 베이컨 등 주변 인물의 도움이 분명 있었을 거라며 델리아의 의견을 옹호했다. 에머슨과 오랜 우정을 쌓았던 토머스 칼라일도 델리아의 작업을 지지했다. 에머슨과 소로우 등과 함께 콩코드에서 함께 살았던 너대니얼 호손은 델리아의 책 출간을 은밀하게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니 마크 트웨인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닌 셈이다. ‘음모론적 시각‘은 무슨 일에든 개입하기 좋아하는 법이다. 그런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자.
(http://blog.aladin.co.kr/oren/9415937)

 

 

 

 

 

 

 

 

 

 

 

 

 

 

 

루크레티우스가 대략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사람의 시인을 더 필요로 한다면 그는 바로 베르길리우스(BC70∼19)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지만 후세의 기록 가운데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죽던 바로 그 해에 베르길리우스가 때마침 '성인식'을 치렀다는 사실이. 말하자면 그 두 시인은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두고 서로 '바톤 터치'를 주고 받은 사이였던 셈이다.

 

물론 루크레티우스가 (나중에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될 가능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는 누가 뭐래도 호메로스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로마 최고의 국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본받아 『아이네이스』라는 '로마 건국 신화'를 빚어 냄으로써 무려 이천 년 동안이나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드높은 영예를 굳건히 지켜 왔다. '지상 최고의 국가 탄생'을 장엄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로마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빛나는 문장으로 빚은 웅혼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를 뛰어넘은 로마의 시인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에 반해 루크레티우스는 '민족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철학'을 시로 노래했다. 그것도 단순한 곁가지 철학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기원과 사물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파고드는 심오한 철학을 담은 시였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애국시와는 얼마나 서로 '차원'이 다른 작품이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로마의 영광'이 극치에 다다른 시기에 쓰여진 베르길리우스의 빛나는 예술작품이 결국 '로마인'들을 향한 '애국의 노래'였다면,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바로 인류 전체를 향해 '사물의 근본 원인'을 긍구하도록 깨우치는 '진리의 노래'였던 셈이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극소수의 독자들에게나 겨우 읽힐 정도로 몹시 어렵고도 희귀한 작품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시인의 명성'과 직결되는 '대중성'과는 오래도록 담을 쌓고 지낼 운명이었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표현대로 '긴 세월을 통해 어떤 것도 손실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이치' 가운데서도 그의 시는 꿋꿋이 살아 남아 어느새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을 도리어 하찮은 것쯤으로 여기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베르길리우스에게 넘겨줬던 그 바톤이야말로 앞선 주자에게나 뒤따르는 주자에게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끝끝내 서로의 '우열'을 다툴 여지가 많았던 탁월한 주자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오직 붓끝을 통해서 오래도록 종이 위를 내달렸을 뿐인 재주이긴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오로지 독창적이기만 했다면 그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데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대부분 그보다 몇백 년 앞서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로부터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에피쿠로스의 철학으로까지 거술러 올라가는 건 너무 샛길로 깊숙히 빠져드는 일이기에 피하고 싶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흔히 통념적으로 말하는 '쾌락의 추구'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에피쿠로스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인'에 대하여 깊이 천착한 '신과 같은' 철학자였고, 엄청난 저작을 저술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그가 쓴 '세 통의 편지'가 『그리스 철학자 열전』(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술)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해질 뿐인데, 그 책이 집필된 시기가 2세기말이나 3세기 초엽이어서 도리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보다 250년쯤 뒤처지는 형편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시가 탁월한 건 그의 이론이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주 만물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뤄져 있고, 사물의 씨앗이나 마찬가지인 원자의 크기는 극히 작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공간 또한 무한하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원자들의 만남과 연결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며, 거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조금도 없다. 우주는 '펼연'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도 개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원자들이 일탈하여' 생기는 결과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원자들의 결합'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육신이 흩어지면서 함께 소멸한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와 함께 죽는다. 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요약하자면 '유물론적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지닌 또다른 놀라운 점은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또한 '몹시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원자론의 기본 원리'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무한함까지 설명하는 부분은 고작 제1권의 내용일 뿐이다. 원자의 운동으로부터 '자유의지'를 찾아 내고, '물질의 근원'과 '신의 부존재 증명'까지 나아가는 내용까지도 제2권으로 족하다. 제3권에서 다루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불가능 증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제4권에서 다루는 '감각과 사고'는 '현대 과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상들과 시지각(視知覺)에 대한 통찰들'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주장하는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밖에 '수면과 꿈에 대한 내용'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직접 맞닿아 있고, 성욕(性慾)과 성애(性愛)에 대한 놀라운 통찰은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주장한 논리의 원형을 보는 듯 생생하다. 

 

제5권에서 설명하는 '천문 현상들'은 '첨단 우주물리학'과 사뭇 현격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설명들이 많지만 결코 허황된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갈릴레이와 아인슈타인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겠는가. 이어지는 '생명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문명의 발전'을 다룬 온갖 시적 표현들은 마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빼닮았다. 문명의 시작, 언어의 기원, 불의 기원과 사용, 금속의 발견과 사용, 농업의 기원과 발달, 기술의 발달 등이야말로 루크레티우스가 제5권에 다루는 소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제6권에서 다루는 '대기의 현상들'과 '지상의 현상들'은 오늘날 기상학과 지질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천둥, 번개, 벼락, 구름의 형성을 다루고, 화산과 지진 현상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서로 깊은 교감을 주고 받은 책들. 책이 최초로 쓰여진 순서대로 쌓았다_나중에 보니 마키아벨리의 책이 너무 높이 올라갔다. 그 책은 무려 『그리스철학자열전』 바로 위에 놓여야 옳다. 비록 그 두 책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이 '천 년'도 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몽테뉴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도 이 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맥베스』의 2막 2장에는 셰익스피어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싯구 일부가 등장한다. 맥베스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시에서 옮겨졌던 셈이다.)

 

이토록 방대한 내용들을 한 권의 시로 다 담아내다니, 루크레티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이 지닌 '엄청난 위험성'을 직감한 쪽이 '종교계'였음을 추정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책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이 지구상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책은 말 그대로 구전을 통해서나 희미하게 그 존재가 전해지는 '전설적인 신비의 책'이 되고 말았다. 어느 고서 수집광이 그 책을 먼지 속에서 다시 찾아낼 때까지는.

 

이 책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이 책의 재발견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태까지도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직접 사서 읽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책이 오늘날에 와서야 엄청난 재조명을 새로이 받게 된 건 결코 아니다.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은둔을 계속하던 이 책을 독일의 수도원에서 마침내 구출해 낸 포조의 노력 덕분에 1417년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곧장 이 책에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중세의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였다. 르네상스를 활짝 열어젖혔던 숱한 천재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키아벨리 또한 그런 인물들이었다. 고대 철학에 정통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이 책을 탐독했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장시는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자칫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적지 않다. 또한 오늘날의 엄청나게 축적된 온갖 과학적 지식들에 비춰보면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낼 만한 대목들도 아예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사물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끈질긴 열정'과 더불어 여느 문학작품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찬 문장들과 아름다운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이 오로지 물질과 공간만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구축하고 그걸 빼어난 시로 노래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예술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인생에 대해서 느끼는 기이한 우울감'을 좀처럼 숨기지 못했는데,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멜랑코리에 가까운 그 느낌으로부터 'lacrimae rerum(사물에 대한 눈물)'이라는 유명한 용어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시인이 남겼던 유명한 문장인 "사물의 원인을 아는 자는 행복하여라(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는 후세 사람들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를 향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루크레티우스를 읽는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로지 사물의 근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끝없이 탐색에 몰두하는 놀라운 열정,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하는 신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 때로는 난해하고 투박하지만 오롯이 진실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성 넘치는 시적 표현 등은 고대의 여느 다른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질의 근원과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숱한 도구들을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까마득한 그 옛날에, 오로지 '관찰'과 '상식'과 '추론'에만 의지한 채 이토록 '지극히 현대적인 자연과학적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빚어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다.

 

오늘날 우상 숭배나 다름없을 만큼 맹목적인 종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대해 격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에 대해 아주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았다. 아주 가끔씩 만나게 되는 '고대의 진귀한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 옛날의 현자(賢者)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혹시나 이 책이 바로 그 책이 아닐까, 하면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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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2-11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책이 쌓인 순서가 시대순이었군요. oren님의 섬세한 자리 배치에 깊은 뜻이 있었다는걸 뒤늦게 알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관련해서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책을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oren님 덕분에 꺼내 놓게 됩니다^^:

oren 2017-12-11 09:42   좋아요 1 | URL
제가 루크레티우스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였답니다. 몽테뉴가 얼마나 자주 그 시인의 이름과 싯귀를 인용하는지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요.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지만 그에 관해 자세히 알 도리가 없더군요. 제가 수상록을 처음 읽은 때가 1983년이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 흔한 인터넷조차 아예 없었으니까요. 34년 만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책을 직접 읽고, 책탑까지 시대순으로 쌓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루크레티우스가 새삼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찾아낸 인문학자 ‘포조 브라치올리니‘는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서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고문서 수집가로서의 활약‘이 참으로 대단했던 인물이더군요. 이미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고요.

nodiggety 2017-12-11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을 읽은 후 관심이 생겨 루크레티우스를 읽고 그 후 Epictetus의 철학에 관한 Penguin에서 나온 The Art of Happiness을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Swerve (1417년 근대의 탄생)도 The Art of Happiness도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비해 좀 미흡한 점이 많아서 관심 있으면 읽어볼만하지만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oren 2017-12-11 09:54   좋아요 0 | URL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이 나온 덕분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예전보다 훨씬 더 높은 관심을 끌게 된 분위기도 있는 듯합니다. 저도 이번에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읽고 나서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에피쿠로스 편」을 다시 읽어 봤지만, 루크레티우스의 탁월한 시적 표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더군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 책에서 ‘에피쿠로스‘가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더군요.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인물들이 무려 73명인데 말이지요.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디오게네스, 데모크리토스 등등 그 숱한 걸출한 철학자들을 다 제쳐두고 에피쿠로스에게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맙기까지 하더군요.

2017-12-11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돈키호테 성찰』이라는 작은 책 한 권에 이토록 많은 책들이 담겨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이 가운데 내가 읽은 책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그런 책들이 몹시 반갑기만 하다.

이 책들마저 읽지 않았더라면 『돈키호테 성찰』은 내게 참으로 낯설고 이상한 책이 될 뻔했다.

 

 * * *

 

p22, 헤겔, 『논리학』

p32, 셰익스피어,『자에는 자로』

p33, 칸트, 『인류학』

p33, 아이스킬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

p189,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p195, 라미로 데 마에스투, 『돈 키호테, 돈 후안, 그리고 라 셀레스티나』

p197, 스피노자, 『에티카』

p200, 마테오 알레만, 『구스만 데 알파라체』

p200, 플라톤, 『향연』

p200, 『길가메시 서사시』

p201, 플라톤, 『파이드로스』

p202, 니체, 『도덕의 계보』

p203, 리들리 스콧, 『글레디에이터』

p203, 아소린, 『스페인의 시간, 1560∼1590』, 『카스티야의 영혼』, 『돈키호테의 길』

p203, 호세 대 캄포스, 『논리학 체계』, 『시민사회에서의 인간 불평등에 대하여』, 『단어의 은총』

p204, 플로베르, 『감정교육』, 『보바리 부인』, 『부바르와 폐퀴세』

p205, 딜타이, 『기술 및 분석 심리학 사고』

p206, 유스튀스 립시위스, 『평상심에 대하여』

p208, 헤이든 화이트, 『메타 역사 :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p209,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파우스트』

p211, 뉴턴, 『프린키피아』

p211, 칸트, 『순수이성비판』

p213, 라이프니츠, 『단자론』

p213, 니체, 『즐거운 학문』

p216, 아인슈타인,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

p217,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p217, 호아킨 로드리고, 『아랑후에스 협주곡』

p219, 파브르, 『파브르 곤충기』

p221, 셰익스피어, 『자에는 자로』

p221, 칸트, 김종환 역,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p221, 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 『페르시아인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p223,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p225,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p226, 플라톤, 『카르미데스』, 『에우리데모스』

p227, 헤르만 코헨, 『순수의지의 윤리학』,

p228, 헤르만 코헨, 『미학』

p231, 후설, 『논리학 연구』,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고안』

p232, 훌리안 마리아스, 『철학 입문』

p233, 하이데거, 『숲속의 오솔길』

p234, 이정우, 『시뮬라르크의 시대 - 들뢰즈와 사건의 철학』

p235,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p240, 후안 벨레라, 『페피타 히메네스』

p241,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론』

p242,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

p245, 신정환 · 전용갑, 『두 개의 스페인』

p246, 루소, 『신 엘로이즈』, 『에밀』, 『사회계약론』, 『참회록』

p247, 잠바티스타 비코, 『신과학』

p247, 괴테, 『이탈리아 기행』

p249, 단테, 『신곡』

p250,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p251, 고티에, 『낭만주의의 역사』

p255, 정영도, 『오르테가의 철학사상』

p256, 플라톤, 『향연』

p260, 플라톤, 『메논』

p260, 후설, 『경험과 판단』

p267,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기원』

p268,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p269,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처녀지』

p275, 메넨데스 펠라요, 『스페인 미학 사상사』

p275, 호세 가오스, 『스페인의 철학』, 『스페인어권 사상』

p276,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예술의 비인간화』

p276,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어려운 시절』

p277, 도스토예프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 형제들』

p280, 세르반테스, 『모범 소설』

p280, 아메리코 카스트로, 『세르반테스의 사상』

p283, 바흐친,  『문학과 미학의 문제들』(한국어 번역서의 제목은『장편소설과 민중언어』)

p283,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p204,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p291, 헤로도토스, 『역사』

p292, 루카치, 『소설의 이론』

p293,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p293,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

p293,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예술의 비인간화』

p295,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 일주』, 『해저 2만리』

p298, 아이소포스, 『이솝 우화』

p302, 보르헤스, 『픽션들』

p304, 미셸 푸코,  『말과 사물』

p307, 사르트르, 『구토』

p308, 아리스토파네스, 『개구리』, 『구름』

p314, 칼데론, 『지조 있는 왕자』, 『인생은 꿈』, 『살라메아 촌장』, 『인생은 커다란 극장』

p315, 라신,  『앙드로마케』

p315, 코르네유,  『르 시드』,『시나』, 『폼페이우스의 죽음』

p316, 베르그송,  『웃음』

p318, 헤겔, 『미학』

p319, 에우리피데스, 『이온』

p320, 플라톤, 『향연』

p321, 모파상, 『여자의 일생』, 『벨아미』

p322, 스탕달, 『적과 흑』, 『파름의 수도원』

p322, 콩트, 『실증 철학 강의』

p323, 다윈,  『종의 기원』

p323, 에밀 졸라,  『목로주점』, 『나나』, 『제르미날』, 『실험소설론』

p323,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p342,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

 

 

(바로 이 책들 덕분에 『돈키호테 성찰』을 거듭 읽게 되었고,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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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때로는 간단한 대사 한 구절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가령 "이 한심한 화상아!(Alas, poor caitiff)"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4막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나는 이 대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후 고부 갈등으로 중간에 끼어 힘들었을 때, 첫 직장에서 타의로 퇴직하게 되었을 떄,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돈마저 떼었을 때, 나는 이 대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불쌍해지면서 그런 나 자신을 격려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평생 독서 계획』은 소포클레스 항목에서, 연극은 운명 앞의 절망과 가능성 앞의 희망이 충돌하는 긴장이며 그 긴장의 해소에서 커다란 즐거움이 온다고 말한다. 그런 연극적 상황 속에 나 자신을 설정하면 기이하게도 긴장이 이완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런 간단한 대사에서 삶의 활력을 얻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Egom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배울 때에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대사의 심오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젊은 대학생에게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벅찬 독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읽고 또 배울까? 어릴 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그 가르침의 선견지명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숙을 촉진하는 교육의 본령이고, 『평생 독서 계획』의 원대한 취지이며,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인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 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5∼476쪽)

 

 -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카시오(오셀로가 '연적'이라고 오해한 자신의 부관)가 말한 대사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평생 독서 계획』을 번역한 분(이종인)은 그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라고 해석했지만, 민음사판 전집 시리즈(최종철 번역)에서는 "아, 딱한 천것!"이라고 번역했다. 두 번역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매우 크다. 내가 가진 또다른 오래된 책(『학원 세계문학전집』(전30권), 김재남 번역, 1993년 1월)에서는 "흥, 그까짓 게!" 라고 번역해 놓았다. 도대체 저 대사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걸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조금 복잡하다.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이렇다.

 

온갖 수작을 다 부려서 오셀로를 '질투심으로 미치게 만드는 공작'을 꾸미던 이아고는 4막 1장에 이르러 마침내 비앙카(매춘부, 카시오의 연인)를 끌어들여 '오셀로의 질투심'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이아고는 오셀로를 잠시 물러나게 하고 '카시오의 행동'을 관찰하도록 만든다. 이아고는 카시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비앙카'를 화제에 끌어들여 오셀로가 오해하기 딱 좋은 '카시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데,  오셀로는 그런 카시오의 행동을 자신의 아내인 데스데모나에 대한 카시오의 반응으로 완전히 오해한다. 이아고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둘(카시오와 오셀로) 사이에 끼어들어 '질투심'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아고가 카시오한테 말하기를, '비앙카의 능력'을 이용하여 데스데모나에게 '복직 문제'를 부탁하면 어떻겠냐고 하자, 카시오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Alas, poor caitiff"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비앙카를 "딱한 천것" 혹은 "그까짓 게"로 여긴다는 투다. 그러면서도 카시오의 입가엔 웃음이 걸린다. 오셀로는 카시오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질투심을 더욱 활활 태우는' 연료로 쓰는 데 여념이 없다.

 

극중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의 내용이나 극의 흐름으로 판단해 볼 때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으로는 까마득한 옛날에 나온 책에서 오늘 우연히 발견한 번역인 "흥, 그까짓 게!"라는 표현이 가장 이해하기 쉬워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평생 독서 계획』의 번역자가 말한 내용이 조금 이상해진다. "흥, 그까짓 게!"라는 뜻의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 라고, 다시 말하자면 '자책하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는' 대사로 잘못 받아들인 셈이 되고, 결국 번역하신 분이 오랫동안 그 대사 덕분에 여러 차례 위안을 얻게 되었다는 말도 우습게 변하기 때문이다. 기껏 글을 쓰고 나니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굳이 이런 점까지 말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말이다.

 

"흥, 그까짓 게!"

 

그까짓 대사 한 줄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든다.

 

 

오셀로

알겠나, 이아고?

난 아주 교묘하게 참겠지만 ㅡ 알겠지? ㅡ

아주 잔인할 테야.

 

 

이아고

빗나간 건 아니지만

다 때를 맞추세요. 물러나시겠어요? (오셀로 물러난다.)

난 이제 카시오에게 비앙카 얘기를 물어야지.

그 계집은 자신의 욕망을 팔아서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사는데 고것이

카시오에게 혹했다. ㅡ 많은 사람 속이고

하나에게 속는 것이 그 갈보의 저주니까.

카시오는 그녀 얘길 들으면 넘치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여기 그가 오는군.

 

카시오 등장.

 

그가 지을 미소에 오셀로는 미칠 테고

무식한 질투심을 품었으니 불쌍한 카시오의

미소와 몸짓과 경박한 행동을 완전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부관님, 기분이 어때요?

 

카시오

내 직위를 불러 주니 더욱 나빠지는군,

그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까.

 

이아고

데스데모나를 다그치면 확보하실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런데 이 청이 비앙카의 능력에 달렸다면

얼마나 빨리 성공하겠어요!

 

카시오

아, 딱한 천것!

 

오셀로

봐, 놈이 벌써 웃고 있어!

 

이아고

남자를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는 못 봤어요.

 

 카시오

아, 딱한 잡것, 정말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오셀로

이젠 그걸 살짝 부인하면서 웃어 넘겨.

 

 이아고

들었어요, 카시오?

 

오셀로

이젠 그가 그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네. 허 참, 잘했다, 잘했어.

 

 

이아고

당신이 자기와 결혼할 거라고 하는데

그럴 작정이세요?

 

카시오

하, 하, 하!

 

오셀로

환희한단 말이지, 로마인아, 환희해?

 

 카시오

내가 결혼해! 뭐, 고객이! 제발 내 판단력을 자비롭게

봐 주게, 너무 부실하다고 생각하진 말게나. 하, 하, 하!

 

오셀로

그래, 그래, 이긴 자가 웃는다.

 

이아고

사실, 소문에는 결혼하실 거랍니다.

 

카시오

제발, 올바로 말하게!

 

 

이아고

아니라면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오셀로』, <4막 1장, 90∼125행>

 

 

 * * *

 

 

OTHELLO

 

Dost thou hear, Iago?
I will be found most cunning in my patience;
But--dost thou hear?--most bloody.

 

IAGO

That's not amiss;
But yet keep time in all. Will you withdraw?

OTHELLO retires

Now will I question Cassio of Bianca,
A housewife that by selling her desires
Buys herself bread and clothes: it is a creature
That dotes on Cassio; as 'tis the strumpet's plague
To beguile many and be beguiled by one:
He, when he hears of her, cannot refrain
From the excess of laughter. Here he comes:

Re-enter CASSIO

As he shall smile, Othello shall go mad;
And his unbookish jealousy must construe
Poor Cassio's smiles, gestures and light behavior,
Quite in the wrong. How do you now, lieutenant?

CASSIO

The worser that you give me the addition
Whose want even kills me.

IAGO

Ply Desdemona well, and you are sure on't.

Speaking lower

Now, if this suit lay in Bianco's power,
How quickly should you speed!

CASSIO

Alas, poor caitiff!

OTHELLO

Look, how he laughs already!

IAGO

I never knew woman love man so.

CASSIO

Alas, poor rogue! I think, i' faith, she loves me.

OTHELLO

Now he denies it faintly, and laughs it out.

IAGO

Do you hear, Cassio?

OTHELLO

Now he importunes him
To tell it o'er: go to; well said, well said.

IAGO

She gives it out that you shall marry hey:
Do you intend it?

CASSIO

Ha, ha, ha!

OTHELLO

Do you triumph, Roman? do you triumph?

CASSIO

I marry her! what? a customer! Prithee, bear some
charity to my wit: do not think it so unwholesome.
Ha, ha, ha!

OTHELLO

So, so, so, so: they laugh that win.

IAGO

'Faith, the cry goes that you shall marry her.

CASSIO

Prithee, say true.

IAGO

I am a very villain else.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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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짧은 대사 하나 속에 작품 전체의 내용이 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7-07-09 00:24   좋아요 1 | URL
『오셀로』의 4막 1장에 나온다는 ˝Alas, poor caitiff!˝에 대한 번역이 출판사마다 서로 다르더군요. 『평생 독서 계획』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흔히 쓰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오랫동안 장식품처럼 책장에 꽂혀 있던 ‘학원 세계문학전집판‘ 『셰익스피어』에서 그 대목에 대한 ‘보다 정확한 뜻‘을 알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생 독서 계힉』을 번역하신 분의 말대로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이나 ‘주석‘을 붙이는 이유 또한 궁극적으로는 ‘말이 지닌 결핍과 과잉‘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묘한 '말', 묘한 '욕망'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 몽테뉴

 

 * * *

 

'미처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분을 소포클레스만큼 재치있게 말한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주인'은 물론 '여자와 동침하고 싶은 욕망'을 의인화한 표현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얼마나 그 욕망에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쁨을 격하게 표현했는데, 마침 그 '대화의 현장'엔 케팔레스 옹도 있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그런 얘기가 나오니 말이다.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그래서 내가 말했네. "케팔레스 옹, 나는 연로하신 분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오. 우리는 그분들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치 어쩌면 우리도 지나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 거칠고 험한지, 아니면 쉽고 순탄한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한테서 배우듯이 말이오. 그대는 지금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연세가 되신 만큼, 나는 무엇보다도 그대의 심경이 어떠하신지 듣고 싶어요. 산다는 것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케팔로스 옹이 말했네. "제우스에 맹세고, 내 심정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하겠소, 소크라테스 선생. 나는 또래의 늙은이들 몇 명과 가끔 모이곤 하는데, 옛 속담 그대로지요.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해요. 그들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연애하고 술 마시고 잔치에 참석하던 일 등등을 회상하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화를 내곤 하지요. 그때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들 중 몇몇은 자기들이 늙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괄시받는다고 투덜대며, 그래서 온갖 참상이 다 노년 탓이라고 읊어대곤 하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이들은 탓해서는 안 될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해요. 그게 정말 노년 탓이라면, 나도 노년과 관련하여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테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하겠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소. 예컨대 누가 시인 소포클레스에게 '소포클레스 선생, 그대의 성생활은 어떠시오? 그대는 아직도 여자와 동침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소포클레스 님은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때도 그분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그렇다고 생각하오. 노년이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감정들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지니까요. 욕망들이 한풀 꺾여 귀찮게 조르기를 멈추면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에서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나 탓할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노년이 아니라 성격이라오, 소크라테스 선생. 사람 됨됨이가 반듯하고 자족할 줄 알면 노년도 가벼운 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크라테스 선생, 노년뿐 아니라 젊음도 견디기가 힘들다오."

 

- 플라톤, 『국가』제1권

 

 

우리가 책을 늘 옆에 끼고 살고 싶은 욕망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곁에 쌓아놓고 살아야 만족할까. 나도 한때는 '책으로 빙 둘러싸인 내 서재'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그런데 책이 방안에 자꾸 쌓이니 불편한 점도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책을 재빨리 찾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책이 많아지면 '책탑'이 독버섯처럼 자꾸 생겨나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침 어젯밤에 그 중 하나가 너무 웃자랐던지 마침내 '꽈다당'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잠자던 아내마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놀라 물었을 정도였다. 책탑이 여럿 생기니 '원하는 책'을 빼낼 때마다 힘도 든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책탑 저 밑에 깔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는 도대체 '몇 권의 책'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릴까. 내가 가진 책들은 많은가? 적은가? 가끔씩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둘러 보노라면 '내가 가진 책들'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시내에 있는 초대형 서점에 들러도 마찬가지다. 이 많은 책들이 도대체 언제 다 팔릴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들과 비교해서 내가 지닌 책들이 차지하는 부피가 너무나 자그마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어쨌든 사람은 마음 속으로나마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전세계에 널린 그 수많은 도서관에 쌓여 있는 엄청난 규모의 책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진 책들이 지닌 '초라함'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먼가? 가까운가?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우리는 이런 것을 더 가까이하기를 원한다. 들에 있으면 먼 것인가? 반나절쯤의 거리라면? 뭐? 40km 떨어져 있으면 먼가? 가까운가? 그것이 가깝다면 44km는? 48km는? 52km는?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책을 파는 알라딘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을 많이 팔기 위해 애쓴다. 과거의 구매 기록, 현재의 지역별 연령대별 랭킹뿐만 아니라 미래의 연장선까지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도록 도와준다. 달리 말하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사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는 말이다. 책을 많이 샀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라는 생각을 품은 적은 별로 없다. 내 곁에 두는 책이 많을수록 좋은 점도 많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미 사 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 책, 새 책'을 외치며 책을 사들이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제 손아귀에 움켜쥔 걸 놓지 못해 사람에게 붙잡히고 마는 아프리카 원숭이도 어리석지만, 내 손에 이미 들어 있는 책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꾸만 갖지 못한 다른 책을 끝없이 탐내는 것도 어리석긴 매일반이 아닐까.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문득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에뤼식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탐욕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더 큰 탐욕을 부르기 마련이다. 책이든 무엇이든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결국 더 큰 '허기'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책은 좀 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와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에뤼식톤과 그의 딸)

 

책도 일정한 한계 수준을 넘으면 결국 '짐'으로 뒤바뀌는 수도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한 어느 농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그 농부의 '진흙수렁 같은 생활방식'이 가난의 원인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결코 그같은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로우는 범인들과는 판단이 너무나 달랐던 사람이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것도 제발 '간소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독서를 아주 많이 했던 그도 자신의 서재에 있는 몇백 권의 책으로 만족할 줄 알았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책 짐'에 대해서라면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여태까지 이사를 다니면서 '책'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활용을 하는 날 산더미처럼 내다버리는 책들을 보면 옛날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책이 결국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과감하게 자신이 빠진 '궁지'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지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고 달아난 여우는 운 좋은 놈이었다. 덫에 걸린 사향쥐는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 다리라도 물어서 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전진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런 생각에 대해 '심각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불쑥 나타날까 자못 두렵다. 물론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철학자의 말이 맞다. '읽은 책'이 아니라 '구매한 책'에 대해서도 '다다익선'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을 하지 못할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달'을 보라고 말하는 데도 기어이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책'을 보라는 데도 '구매한 책'이 많으니 적으니, '읽은 책'이 많으니 적으니를 따진다. 나 또한 그런 '통계'에 마음이 흔들린다. 알라딘은 책 장사꾼이니 응당 그렇다 치더라도 알라디너마저 거기에 너무 동조하거나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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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맨 처음으로 떠올렸던 '책 속 구절'은 아래와 같다. 이 대목을 본문에 인용할 만큼 '강한 글'을 쓸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 '접어서' 덧붙인다.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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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있는 책들을 보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을 얼마나 온전하게 아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진정한 친구 1명을 사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비단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듯 합니다...

oren 2017-07-06 23:1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한 번 읽은 책은 늘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우린 좀처럼 다시 만날 생각을 하질 못하죠.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렇게 홀대하진 않을텐데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도 ‘독서‘와 ‘우정‘이 매우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가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cyrus 2017-07-07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새 책을 소개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책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접하면 정작 제가 읽어야 할 책, 이미 산 책들을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 없이 ‘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만으로 작성된 게시물도 있습니다. 글이라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시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지도 못할 거면서 새 책(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성의 없이 소개하는 게시물이 있으면 못 보는 척하고 넘어갑니다. 그런 게시물을 쓰는 분들을 보면 오기가 생겨요. 저는 그분들과 반대로 절판된 책, 오래된 책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새 책을 읽었으면 ‘리뷰’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새 책이 포함된 페이퍼는 별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oren 2017-07-07 16:32   좋아요 0 | URL
cyrus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꼭 포함시키고 싶었던 내용이 ‘책을 건축물에 비유해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그런 내용을 일부 집어 넣었다가 결국엔 도로 뺐습니다만..)

인류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해 놓은 수많은 걸작들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아마도 ‘고전‘에 비유할 수 있겠지 싶어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걸작 건축물에 비유한 인물도 있었고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지어진 르네상스 시대나 고대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현대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걸작들도 숱하게 많지요. 인류가 남긴 위대한 고전 작품 가운데서도 그런 걸작들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뛰어난 건축술이 발휘된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이 드물진 않지만, 500년이나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건축물들에 비하면 어딘지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는 충분히 지니겠지만요. 그런데 정작 우후죽순 격으로 마구 지어지는 ‘조잡한 신축 건물‘을 닮은 듯한 ‘신간‘들은 ‘걸작 건축물‘에 비한다면 그 예술성과 가치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요. 건축물에서도 ‘인류의 문화유산‘과도 같은 탁월한 걸작이 있듯이, 책에서도 그런 걸작들이 분명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축물과 달리 책은 ‘아주 값싼 비용으로도‘ 그런 걸작들을 충분히 쉽게 만나볼 수 있고요. 마구 쏟아지는 신간들에 너무 눈길을 주다 보면 결국 탁월한 작품들을 만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새로운 책‘이 새로운 만큼 우리 눈에 반짝 빛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만큼 ‘빛나는 가치‘를 지닌 책인지는 늘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