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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의무론』을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평일엔 책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틈날 때마다 계속 붙잡고 읽고 있다. 책을 펼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의 다 읽었다. '도덕'을 다룬 옛 고전 가운데 이토록 재미있는 책도 다 있었나 싶다. 어느새 스무 쪽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이토록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명백히 '요즘 뜨는 뉴스들' 덕분이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역사적 사례들이나 비유들을 읽으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실 속 인물들과 상황들'이 자꾸만 겹쳐 떠오르니 어찌 책 읽는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이 <도덕적 선에 대하여>, 제2권이 <유익함에 대하여> 제3권이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이다. 이렇듯 겉으로만 살피면 책의 내용이 여간 따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3권의 중반부에 실린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을 다루는 부분까지 읽게 되면 너무나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망라되다시피 실려 있어서 책 읽는 재미가 정말 '깨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런 책을 읽는 재미를 두고 저런 표현을 한다는 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줄 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오늘 읽은 구절 가운데 정말 인상적인 대목 하나는 바로 다음 내용이다.(이 대목의 앞부분부터 인용하자면 너무 많은 부분을 끌어와야 하겠기에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전혀 그렇지 않다. 바다 한 가운데에를 항해할 때 선주는 배가 자기 소유라 해서 배에서 승객을 깊은 바다물 속에 절대로 내던져 버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객들이 운임을 냈을 때 그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승객들이 빌린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선주의 것이 아니라 승객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을 무렵에 떠오른 '새로운 뉴스'는 바로 다음 내용이었다.(이 뉴스에 대한 인용 역시 앞부분과의 '형평'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저 쓸데 없이 내 글이 자꾸만 길어질까 두려워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또 "'주기장 내에서 겨우 17m 후진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항로 변경이 아니라는 말은 법을 제일 잘 아는 변호사들이 할 말이 아니다"며 "모든 변호사는 음주운전을 1m를 했든 10km를 했든 음주운전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항 중인 항공기를 위력으로 돌린 건 명백한 사실이며 팩트"라고 강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8&aid=0003405783&date=201501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1

 

물론 내가 책에서 인용한 내용과 뉴스에서 인용한 내용이 서로 정확히 맞대응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가지 모두 '땅콩 회항'을 연상시킨다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나는 이 두 대목을 그저 억지로 연결시켜 보느라 이 글을 쓰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키케로가 이 책에서 극구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그건 바로 '도덕적 선과 유익함은 결코 상충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 진다. 더군다나 키케로의 이 책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더더욱 헷갈리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그 얘기이니 이 글을 계속 써 보겠다.)

 

이쯤에서 이 책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물론 이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인 만큼 등장 인물들이나 속담 조차도 생소하게 들리는 대목이 적지는 않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곤 했다. 콘술을 지낸 바 있는 가이우스 핌브리아가 정말로 도덕적으로 선한 로마의 기사인 마르쿠스 루타티우스 핀티아의 소송사건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핀티아는 그의 재산을 내걸고 "만약 법정에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재산을 몰수당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핌브리아는 핀티아에게 자신은 절대로 그 사건의 재판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만약 그가 핀티아를 유죄로서 판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에게서 그의 명성을 빼앗는 것이 될까 두렵고, 또 반대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면 이미 수많은 의무 이행과 찬양받을 만한 업적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진 그를 새삼스레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핌브리아가 알고 있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은 무엇이건 간에 절대로 유익한 것으로 보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선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감히 행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말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농부들조차도 의심이라고는 전연 하지 않는 이 윤리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이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부끄러운 불명예의 일이 아닌가? 농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미 진부해진 오래된 속담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의 신의와 착실함을 칭찬할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과는 함께 어두운 데에서 손가락 수를 맞추는 놀이를 할 만해.'43)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다름이 아니라 비록 네가 나쁜 짓을 해도 전연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데코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속담에 비추어 볼 때, 저 기게스나 내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손가락을 움직여 모든 상속자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그런 자에게는, 어떤 변명이나 용서의 여지가 전연 없다는 사실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 바로 그것이 아무리 잘 은폐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은 자연을 거역하고 자연과 상충하면서 유익한 것이 될 수가 없다.

 

43) 현대 이탈리아의 morra. 어두운 데에서 한 사람이 재빨리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펼쳐 보이면서 맞추기를 원하면, 동시에 상대방도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펴서 맞추어 보는 놀이.

 

인용문이 몹시도 길고 낯선 내용들이라 키케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속속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키케로가 무슨 뜻으로 저런 글을 썼는지는 누구라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옮겨 보았다. 더군다나 그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뛰어난 언변과 변론과 웅변술로 '법정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땅콩 회항'을 두고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이는 바로 지금의 '서울의 한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억울한 당사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차원에서, 결코 아무나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묘수'까지 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약자' 신세로 내몰린 채 앞으로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될 그 사람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재벌 총수'까지 재판정으로 불러낸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판 '솔로몬의 판결'이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키케로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는 결국 '도덕적으로 선함'을 포기하고 얻는 '유익함'은 결코 유익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상충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유익함'을 먼저 앞세우기 쉬운가. 그런데 키케로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무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다 보면 결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키케로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고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익함이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신의와 정의로움을 빼앗아 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그 유익함이 너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야수로 바뀌는 것과 사람의 외형만을 지닌 채 야수와 같은 잔인함과 야비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반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파렴치한 권력을 소유한 카이사르를 심지어 장인으로 모시려고 하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장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자기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하며 무익한 것인가를 그는 알지 못했다. 반면 장인 자신은 항상 포에니의 처녀들이라는 그리스의 시를 읊곤 했는데, 나는 정리는 잘 안되지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해 보겠다.

 

법이 범해져야 한다면,

왕이 되기 위해서나 범법이 행해져야 하리라.

다른 경우에는,

경건한 마음을 품고 범법하지 말지니.47)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추악한 한 가지를 취한 사람은 에테오클레스48)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49)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47) Euripides: Phoenissae, 5, 524 

 

48) Eteocles: Thebes의 왕, Oedipus의 아들인 Eteocles와 Polynices 형제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통치하기로 하고 먼저 형인 Eteocles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혼자 통치하기 위해 약속된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동생 Polynices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추방하였다. 그 결과 형제가 전쟁을 하다가 서로의 손에 둘 다 죽었다.

 

49)Euripides(B.C. 480∼406): 아테네의 비극시인. Anaxagoras의 제자이며 Socrates의 친구.

 

위의 인용문에서 '키케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포이니케 여인들』을 조금 더 들여다 봐야 한다. 그 작품을 소개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의 글만큼 명료한 것도 드물다.

 

『포이니케 여인들』작품 소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번갈아 가며 테바이를 통치하기로 약속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자 아르고스로 망명한 폴뤼네이케스가 이른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하러 온다.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가 두 아들을 화해시켜보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인 크레온의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면 에테오클레스와 테바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다. 아르고스군의 공격이 격퇴되자, 두 형제가 일대일로 결투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결투에서 두 형제가 서로 죽이자 이오카스테가 절망하여 칼로 자결하고, 그들의 누이 안티고네가 이 소식을 오이디푸스에게 전한다. 크레온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지 말고, 눈먼 오이디푸스는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결혼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랑길에 오르며 돌아와서 폴뤼네이케스를 몰래 묻어주겠다고 말한다.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 유명한 비극이 바로 스티븐 핑커가 문학 작품에서 '영원한 공식'이라고 말한 그 '형제간의 비극'을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이다. 키케로의 책에서 인용된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겨우 네 줄만 인용된 저 '짧은 대목'만 읽으면 얼핏 '왕이 될 정도로 대단한 야심을 가졌을 경우에나 법을 무시할 일이지, 그 외의 다른 경우라면 그저 법을 지키며 조용히 살 노릇'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의 참뜻은 그게 아니다. 자신의 동생에게 절대로 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그 대목을 조금 더 끌고 와 보면 이렇다.

 

이오카스테

······

내 아들 폴뤼네이케스야,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너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다나오스 백성들의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말이다. 제발 신들 중에

한 분이 재판관이 되시어 이 불화를 중재해주시기를!

 

폴뤼네이케스

진리의 말은 원래 단순하며, 정당한 요구에는

현란한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 요점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당한 주장은 속으로 병들어 있어

그것을 치유해줄 궤변이 필요하지요.

······

 

에테오클레스

······

제가 통치할 수 있는데, 저더러 이자의 노예가 되라고요?

그러니 불을 가져오고, 칼을 가져오고, 네 말들에

멍에를 얹고, 들판을 네 전차들로 메워보려므나.

그래도 나는 왕권을 너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불의한 짓을 해야 한다면, 왕권 때문에 불의한 짓을 하는 게

가장 아름답지.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경건해야 해.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인용문'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알고 보니 삼모자(三母子)가 '왕권'을 다투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코 앞에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형국에서 나온 '절박한 말들' 가운데 일부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이었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들 형제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오라비들의 싸움 때문에 어머니마저 잃고 졸지에 비극의 한가운데로 곧장 내던져진 저 가엾은 안티고네는 눈 먼 장님이 된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머나먼 방랑길'을 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키케로가 저 대목에서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하는 말이 이쯤에서 좀 더 확실하게 이해되고 나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더욱 커진다.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댈러스 미술관

 

 

어쨌든 나로서도 키케로의 책에서 등장한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할 때'의 얘기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땅콩 회항 사건의 그 '문을 닫고 비행에 나서기 시작한 때'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명쾌하게 정리는 잘 안 되지만 약간이나마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키케로의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현실 속의 뉴스가 서로 뒤엉켜 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독자는 늘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이나 상황을 함께 떠올리면서 그 책을 읽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함께 떠오른 여러 현재의 상황들 때문에 이 따분해 보이는 책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마침 이 책은 키케로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수감된 딸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딸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도 '책'이 빠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책도 좀 읽고 수양의 기회로 삼아라'는 소식이 들려오니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서양의 논어'라고 불릴 정도이니 '수양'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라 할 만하다. 가끔씩 너무 완벽한 '도덕 군자'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우긴 하지만 말이다. 끝으로 '옮긴이의 말' 가운데 일부를 덧붙인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이 책에 대해 '볼테르가 한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서 코웃음을 칠 뻔 했는데,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부터는 그 사람의 말이 정말 틀린 게 조금도 없구나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어서 차마 그 얘기를 빼놓기 어려웠다. 이렇게 주렁주렁 책 속의 글을 끊임없이 덧붙이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욕심'인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그럼 이만 총총...

 

··· 그리하여 이 책은 서양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로서 서양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특히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키케로의 연구자 내지 찬양자들이었고, 근대 정치 사상가인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도 키케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볼테르가 1771년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나, 프레데릭 대왕이 "지금까지 씌어졌거나 씌어질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한 말은 모두가 진실이다.

 

아, 참,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적어도 볼테르가 한 말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 가운데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아예 없었던 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극소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도덕감정론』을 쓴 아담 스미스였고, 또 한 사람은 아마도『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이 사람들이 쓴 책까지 이 글에서 언급한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고, 이 글을 정말 웃기게 만드는 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글은 여기서 정말 '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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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식

자연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감정을 살짝 어긋나게 조율하는 잔인한 장난을 쳤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시대의 소설가와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두 명의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세 가장 강한 끈으로 묶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때때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적 가능성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비극적 이야기가 가족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 명의 형제가 서로 싸우다 죽는 이야기에 비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 마이클과 프레도, 제이알과 바비, 프레지어와 나일스, 요셉과 형제들, 리어왕과 딸들, 한나와 자매들 ·······, 수세기에 걸친 드라마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가의 증오"와 "일가의 적대"는 영원한 공식이다." (466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467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755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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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5-01-24 13:06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yamoo 2015-01-23 15:19   댓글달기 | URL
헐~ 오렌님의 이 글을 읽으니 키케로의 <의무론>을 바로 읽어야 겠습니다. 책도 바로 잡히는데 있거든요..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1-24 13:05   URL
yamoo 님께서는 이미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놔두고 계셨군요.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후딱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라틴어 원문`을 빼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지요..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제 생각으로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겪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는 보통 사람들`의 손과 가슴까지 뜨겁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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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붉은돼지 2015-01-29 05:49   댓글달기 | URL
빈서판도 읽어봐야겠어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여러분이 추천하고 있지만 왠지 손이 안갔는데 오렌님 글을 보니 문득 읽고 싶은 생각이...ㅎㅎ
키케로도 물론이구요.

oren 2015-01-29 16:48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oren 2015-01-29 16:48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솜씨 서툰 활잡이 바보

 

활을 쏘려는가? 잘 겨냥해서 명중시키게!

과녁에 빗맞으면

화살이 바보배로 날아갈 테니까.

 

궁수들을 싸잡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바보 활잡이가 활쏘기하는 이야기도 다루어보세.

내가 이곳 바닷가에 활터를 벌였다네.

과녁에서 빗나가면 꽝일세.

활쏘기 시합에 걸린 상금은

과녁 정중앙에 가장 가까이 맞히고

마지막 경합에서 우승한 궁사가 차지할 몫일세.

목표를 정확히 노리고 신중하게 쏘아야지,

화살이 밑으로 빠지거나

들떠서는 안 된다네.

서둘지 말고 침착하게 과녁을 겨냥하게나!

대개는 화살을 너무 높이 날려서 실패를 보지.

활이 부러지고, 활시위가 끊어지고,

격발장치가 튕겨나가네.

활시위 으랏차, 당기다가 아차차, 놓치고,

용을 끙끙 쓰다가 의자나 석궁 받침대가 뒤틀리네.

살짝 건드렸는데 석궁이 격발되는 건

활시위가 기름범벅이라 그렇다네.

과녁이란 놈이 어디로 달아났나?

어디를 겨냥해야 할지도 헷갈려 하네.

무작정 시위를 당겨라, 소나기처럼 화살을 날려보지만

하나같이 과녁에서 빗나가니,

경품으로 암퇘지나 받아갈 모양일세.

세상천지에 무수한 궁수들을 보았어도

핑계 없는 무덤은 하나도 없더군.

이 구실, 저 구실 쥐어짜면서

체면 세울 변명거리만 찾아내더군.

정말 아슬아슬했다면서, 그것만 보완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큰소리친다네.

······

(208∼209쪽)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중에서

 

 

재앙을 가볍게 여기는 바보

 

재앙이 손끝에 스치는데도

눈치 못 채는 사람은 바보라네.

불행은 업신여김을 싫어하니

부디 지혜롭게 처신하기 바라네.

 

불행을 당하고 속상해하면서

불행을 쫓아다니는 정신 나간 바보들이 있다네.

그러니 배가 가라앉는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네.

불행은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홀로 오는 법이 드물지.

옛 선인들 말씀과 속담이 말한다네.

"불행과 머리카락은 매일 자란다."

불행은 어떻게 끝장날지 모르니

애초부터 싹을 잘라야 하네.

무릇 바다로 나가려는 사람은

행운과 순풍이 필요하다네.

역풍을 거슬러서 항해한다는 것은

달리기를 거꾸로 하는 셈일세.

현자는 바람을 온순하게 다루는 법을 가르치지만,

바보는 굳이 뱃머리를 뒤로 돌린다네.

지혜로운 사람은 손에

노를 쥐고 어려움 없이 육지로 나아가네.

그러나 바보는 어디로 갈까 갈팡질팡하다가

배 한 척 결딴내고 만다네.

현자는 자신과 이웃을 바른 길로 이끌지만,

바보는 어어 하다가 엉겁결에 목숨을 잃지.

······

(315∼316쪽)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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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보배'의 항해일지이다. 어리석음의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의 바다를 지나서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로 향하는 바보배에는 바보들이 가득 타고 있다. 이들은 무지와 죄악의 승선권을 지참하고 바보배에 올랐다. 출항의 설렘과 즐거움에 들떠서 쾌락의 노래를 합창하던 바보들은 타고 있던 바보배가 침몰하고 죽음에 임박해서야 세상의 가치들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바보배'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추는 밝은 거울이다. 글쓴이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세상의 바보들을 모두 끌어 모아서 배에 태우고, 자신도 배에 오른다. 바보배의 뱃머리에서 바보깃발을 붙들고 있는 박식한 바보가 바로 글쓴이의 자화상이다.

 

《바보배》는 1494년 2월 12일 바젤에서 처음 출항했다. 독일어로 쓰인 브란트의 《바보배》는 바젤의 베르크만 폰 올페의 인쇄소에서 출간되었다. 도회의 시민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했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플루타르코스 그리고 성서의 잠언과 시편 등 시대를 뛰어넘는 해박한 인용과 교훈들로 채워진 브란트의 《바보배》는 동시대와 후대의 인문주의적 글쓰기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다. '바보'가 16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의 상징적 열쇠 개념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로테르담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바보 예찬Lobder Torheit》을 쓰면서 브란트의 《바보배》를 사표로 삼았고, 토마스 무르너의 《사기꾼 조합Schelmenzunft》,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e Pantagruel》도 바보들의 유형을 《바보배》에서 빌려왔다.

 

브란트의 제자 야콥 로허가 '호메로스라도 따르지 못할' 스승의 글 솜씨를 칭송하면서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와 페트라르카에 비길 만한 문재로 꼽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또 수도원장 요한네스 트립테미우스가 단테의 《신곡Divina Comedia》에 빗대어 브란트의 《바보배》를 '신성한 사티로스극divina satyra'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동물적 삶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바보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브란트의 《바보배》는 괴테의 《파우스트Faust》와 더불어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바보배》가 출간된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2년 후였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부분 발췌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이 안경은 주인을 책망하고 있다. 여기, 세상을 직접 보려 들지 않고 책장의 죽은 단어를 응시함으로써 세상을 간접적으로 살피려는 사나이가 있노라고. 브란트가 그린 그 얼빠진 독서가는 "내가 바보선(船)에 가장 먼저 오르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책이 인생의 전부여서 황금보다 더 귀중하다. 여기 나는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비록 한마디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백하기를 학문적인 책에서 이것저것 인용하는 유식한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책은 많이 긁어모았지만 지식은 쌓지 못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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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보르헤스가 알베르토 망겔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많은 운명적인 만남이 그러하듯이.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어느 날 오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여덟 살 된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 서점을 찾아왔다. 당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는데도 나는 그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던 때였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도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월터 윌리엄 스키트의 사전과 주해가 붙은 『몰던의 전투Battle of Malden』를 주문해 주었다. ······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나에게 책 몇 권을 주문했다. 나는 그 중 몇 권을 찾아 줬고 나머지 책은 서지 사항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

 

그 후 2년 동안 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듯, 저녁 시간이나 또 학교가 허락할 때는 아침 시간에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31∼32쪽)

 

 

 

비록 망겔에게는 보르헤스에게 읽어 줄 '책을 선택할 자유'까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자연스레 얻게 된 소득이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보르헤스에게 글을 읽어 주는 일을 두고 나는 그저 하루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 경험은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느끼게 했다.' 그런데 망겔이 보르헤스로부터 배운 책 읽기 방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건 바로 '간통 같은 독서'였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나 혼자 읽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까지도 이제는 마치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37쪽)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그런데 보르헤스가 권장했던 '간통 같은 독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간통의 심리'에 대해서까지도 얼마간 살필 요량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려 봐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 내가 고작 찾아낸 건 스티븐 핑커의 책 속에 담긴 다음의 몇 구절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

이 모든 이야기는 단 하나의 성차이, 즉 남자들이 다수의 파트너를 더 많이 원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자라고 해서 완전히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제아무리 독재적인 사회라도 여성의 발언권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못한다. 양성은 각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을 갖고 있다. 인간의 다른 견고한 취향들처럼 그 기준들도 적응특성일 것이다.

양성은 모두 배우자를 원하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간통을 더 많이 원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희롱하는 남성 충동은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고(혼인을 빙자하는 경우에는 보상을 받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혼한 여자는 남자를 희롱하거나 희롱의 목표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진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의 정액은 수적으로 불리해질 위험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고환은 고릴라의 신체 대비 크기보다 더 크게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를 향한 질투 감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겠지만 남편들의 질투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지학의 기록을 보면 모든 사회에서 양성 모두 간통을 저지르고, 그때마다 여자들이 항상 비소를 먹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 5시 2분발 열차에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735쪽)

 

 

간통의 심리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중에서

 

 

스티븐 핑커의 다소 과학적인(?) 주장으로부터 '간통 같은 독서'와 관련해서 무슨 시사점을 얻으려는 자체가 너무 엉뚱하긴 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얻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싶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륜 관계'를 맺을 때 '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알베르토 망겔이 『독서의 역사』에서 언급한 수많은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어쩌면 책의 저자들과 독자들 사이에 벌어진 '온갖 흥미진진한 간통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혹은 '어디선가 분명히 읽은 듯한' 대목들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늘 먼저 읽었던 책의 '바로 그 대목'을 찾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좀체로 거기서 헤어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곤 한다. 분명히 어느 책에선가 읽은 듯한데 바로 그 '은밀한 간통 현장'을 찾아내지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이란 너무나 개인적이고도 독특한 것이어서, 이 세상 누구에게도 감히 하소연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런 경험들은 늘 예고없이 불쑥 찾아들게 마련이겠지만, 내가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으면서도 그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 그 철학자가 자신보다 더 앞선 시대를 살았던 '고대의 명망 있는 애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고, 또 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후세의 수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간통 현장'들을 찾으려 애쓴 결과 수없이 많은 '주석'들이 그의 책에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그런 '간통의 흔적'을 굳이 애써 찾으러 나설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독서를 통해 많은 작가들의 은밀한 '간통 현장'들을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사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확보하지 못할 땐 늘 괴롭다. 그나마 어젯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 구절을 훔친 몽테뉴의 흔적을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낸 건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비록 두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사뭇 다르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이상한 사례'를 두 사람의 책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야릇하기만 하다.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

 

이제 분노(thymos)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epithymia)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달려 나가 지시와는 다르게 행하는 실수를 범하는 성급한 하인들처럼. 혹은 개들이 친한 사람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소리만 나면 짖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렇게, 분노는 그 본성의 열기와 빠르기로 말미암아 듣기는 하되 해야 할 바를 듣지 않은 채 복수로 돌진하는 것이다. 모욕이나 멸시를 당했다고 이성이나 상상이 보여 주고 나면 [분노를 관장하는 부분이] 그런 일에는 마땅히 싸워야 한다고 추론해 낸 것처럼 대뜸 성을 내고 나서는 것이다. 반면에 욕망은, 이성이나 지각이 즐거운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것을 즐기는 일로 돌진하는 것이다. 결국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을 따르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더 창피한 것이다. 분노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에 지는 것이지 이성에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본성적인 욕구를 따르는 것을 보다 쉽게 용서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욕망들에 따르는 것은 더 쉽게, 또 공통적일수록 더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노와 화를 잘 내는 성질은 지나침에 대한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보다 더 본성적이다. 마치 자기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 즉 "이 사람도 자기 아버지를 때렸고, 그렇게 맞은 사람도 그의 아버지를 때렸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식을 가리키면서 "얘도 어른이 되면 나를 때릴 겁니다. 우리 집안 내력이니까요"라고 변명하는 사람의 경우가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 아들에 의해 끌려 나가다 문간에서 자신도 자기 아버지를 거기까지만 끌고 갔으니 거기에서 멈추라고 명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251∼25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6장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중에서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127쪽)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몽테뉴를 나는 딱 '여기까지만' 끌고 오겠다. 이것이 나의 한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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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2014-10-16 10:40   댓글달기 | URL
독서와 간통 절묘하게 연결시키셨네요

oren 2014-10-16 15:15   URL
그 둘 -독서와 간통- 사이를 연결시키는 게 말이 될까 싶어 많이 주저했었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몽테뉴는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라는 섬뜩한 경고를 내놓은 적이 있었지요. 몽테뉴를 여기까지 함부로 끌고 오다 보니 문득 그 구절이 생각나 겁도 좀 납니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는 말도 그가 남겼으니 제가 좀 떠든다고 `여기까지` 와서 책망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ㅎㅎ


* * *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마찬가지로 애써 가며 사실에 대비하는 자를 비웃는다. 마누라를 새치기당한 수치는 지워질 수 없다. 한번 걸리면 영원히 걸린 것이다. 그것에 징벌을 주면 잘못한 일 자체보다도 더 사실을 드러내 놓게 되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의문을 풀어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불행을 드러내고 비극의 무대 위에 나발을 불어 대면 보기 좋은 꼴이다. 그것은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착한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고도 쓸모없는 지식은 피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는 먼저 집에 사람을 보내서 아내에게 자기의 도착을 알려 주며 엉겁결에 들이닥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 * * * *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찰스 다윈과 앙리 베르그송의 생각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홉스의 '야만인'과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도 함께 떠오른다.)

스스로 '때로는 삼류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소로우는 하버드 대학교의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교사-개인 가정교사, 측량사-정원사, 농부-페인트공, 목수, 벽돌공, 일용 노동자, 연필 제조공, 사포 제조공, 작가, 때로는 삼류시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그가 찰스 다윈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이 내겐 몹시 흥미롭다.

『월든』이 출간된 1854년까지만 하더라도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출간)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로우는 다윈의 첫 작품인 『비글호 항해기』는 무척 감명깊게 읽었던 듯하다. 그런 흔적이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는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듬해인 1860년 1월에 다윈의 주저를 읽었다고 한다. 1860년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해였고, '노예제도'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낸 그가 죽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다윈의『종의 기원』을 읽고 난 느낌들을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깝다. 

소로우의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뿐만 아니라 그의 막힘없는 생각들과 드넓은 안목에 비춰보면, 소로우는 이미 '다윈의 생각'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다윈의『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어느 탁월한 자연과학자의 '당연한 귀결'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내 주제넘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소로우 또한 뛰어난 자연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다윈의 그 책에 대해 반응했던, 그리 대수롭지는 않다는 식의 '딱 그만큼'에 가까운 호의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 * *


 

 

동물적 속성

우리는 내면에 동물적 속성이 감춰져 있어, 고결한 본성이 잠들 때 그 속성이 깨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동물적 속성은 파충동물처럼 비열하고 도덕적으로 방종하며, 결코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인 듯하다. 말하자면, 동물적 속성은 건강한 삶을 살아갈 때도 우리 몸에서 기생하는 벌레와도 같다. 우리가 그런 동물적 속성을 멀리할 수는 있지만 속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동물적 속성이 고유한 활력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더라도 순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 맹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지극히 사소한 부분 때문이다. 범인은 그 차이를 금세 잃어버리나 군자는 그 차이를 조심스레 유지한다."39 우리가 순수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에게 순수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욕망을 억제하고 몸의 외적인 감각을 억제하는 힘과 좋은 행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력만으로 잠시나마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지배해서, 천박한 감각에 따르는 형태를 띤 것을 순수하고 경건한 것으로 바꿔갈 수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나태할 때 생산적인 에너지는 헛되이 낭비되며 우리를 불결하게 만들지만, 절제할 때는 그 에너지가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영감을 준다. 순결은 인간성을 꽃피우기 위한 조건이다. 천재적 재능, 영웅적 자질, 신성함 등은 모두 순결의 결과로 얻는 다양한 열매에 불과하다. 인간은 순수의 항로가 열릴 때 하느님에게 곧장 다가갈 수 있다. 순수한 행실은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불순한 행실은 우리를 낙담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다. 우리 삶은 이러한 부침의 반복이다. 내면에서 동물적 속성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반면 신성한 면은 굳건해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의 열등하고 동물적인 속성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파우누스와 사티로스41처럼 신이나 반신반인半神半人, 즉 신성과 수성이 결합된 존재고 탐욕으로 가득한 피조물일까 봐 두렵다. 또한 우리 삶 자체가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300∼302쪽)


주석

39. 포티에의 프랑스어 번역판 『공자와 맹자』에서 「맹자」부분을 소로가 직접 번역해 인용한 것이다.

41. 파우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사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양半人半羊으로 숲과 산을 지배하는 신이며, 탐욕스럽고 주색을 즐긴다.

 

 

 

도덕 감각

도덕 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그외의 다른 모든 척추동물들이 동일한 보편적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고, 왜 그들의 배발생 초기 단계가 모두 동일하며, 또 왜 그들이 특정한 흔적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들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어떠한 견해가 있더라도 우리 자신과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놓은 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전체 동물 계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동물의 인척 관계와 분류, 그리고 지리적 분포와 지질학적 계통에서 얻은 증거들을 다 함께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론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선천적인 편견이며 우리의 조상이 반신반인에서 유래되었다고 선언하는 오만불손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여러 포유동물의 비교해부학과 발생 과정에 박식했던 박물학자들이 각각의 생물을 독자적인 창조 활동의 작품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다.(70∼71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1장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 中에서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

이 작품에서 도달한 주요 결론, 즉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개인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야생의 황폐한 해안에서 처음으로 푸에고 제도 원주민 무리를 보고 느꼈던 그 경악스러움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내 마음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고 온몸에는 얼룩덜룩 칠을 한 채였다. 그들의 긴 머리털은 헝클어진 채였고 흥분하여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그들의 표정은 거칠고 놀라움과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먹고 살았다. 정부도 없었고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구성원이 아니면 누구에게나 무자비했다. 토착지의 미개인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혈관 속에 비천한 생물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큰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적을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엄청난 희생을 바치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아를 살해하고 아내를 노예처럼 취급하며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고 천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미개인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무서운 적에게 당당히 맞섰던 영웅적인 작은 원숭이나 산에서 내려와 사나운 개에게서 자신의 어린 동료를 구해 의기양양하게 사라진 늙은 개코원숭이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란다.

인간은 비록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의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귀한 자질, 가장 비천한 대상에게 느끼는 연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하등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비심, 태양계의 운동과 구성을 통찰하고 있는 존엄한 지성 같은 모든 고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신체 구조 속에는 비천한 기원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571∼572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동물과 식물

"우리는 동물을 감수성과 깨어난 의식으로, 식물을 잠든 의식과 무감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다른 한편 동물계의 진화는 식물적 삶에 보존되어 있는 경향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거나 멈추거나 아니면 뒤로 돌아가기도 한다. 실제로 한 동물 종의 활동이 아무리 충만하고 넘치는 것처럼 보여도 마비나 무의식이 언제나 노리고 있다. 동물의 활동은 노력에 의해 피로를 대가로 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 동물이 진화한 길을 따라 수없는 쇠퇴와 퇴락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대부분 기생적 습관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의 식물적 삶을 향한 방향전환들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

고상한 야만인의 학설은 새로운 진화적 사고에 의해 그 오류가 더욱 무자비하게 노출된다. 자연 선택의 산물 중에는 그야말로 고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다음 세대의 발현을 위한 유전자들의 경쟁 속에서 고상한 것들은 도태되기 때문이다. 두 동물이 한 물고기를 먹을 수 없고 같은 짝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위한 투쟁은 모든 생명체에 편재한다. 사회적 동기가 자신의 복제를 최대화하려는 유전자들의 적응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투쟁에서 경쟁자들을 이기도록 설계되어야 하는데, 이기는 방법에는 경쟁을 중화시키는 방법도 포함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화려한 표현에 따르면,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도살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자들의 직계 후손인 우리는, 아무리 평화로운 미덕을 소유했을지라도 여전히 어느 한 순간에 화염처럼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학살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휘둘렀던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이다."
 (112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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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달 2013-12-19 16:34   댓글달기 | URL
'빈 서판'에서 발췌한 문단의 파란색으로 강조되어 있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절로 수긍이 가네요. 그게 옳든 그르든...

oren 2013-12-19 16:50   URL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은 너무 음울하고 불길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찰스 다윈도 그런 점을 지적했고요.
* * *
"생존 투쟁에 관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신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소 위안도 된다. 즉 자연의 싸움은 그칠 새 없이 일어나지는 않으며, 공포가 느껴지지도 않으며, 죽음은 보통 신속하게 이루어지며, 원기 있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은 모두 살아남아 증식한다."

pek0501 2013-12-20 09:26   댓글달기 | URL
누가 누구의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글을 접하면 신기해서 한 번 더 읽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에겐 똑같이 위대하게 생각되는 저술가라도 그 당시엔 혹평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

oren 2013-12-20 10:09   URL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들의 계보'처럼, 수많은 책들 속에서 '누구는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서로 주고받은 영향들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경우가 참 많은 듯해요.

소로우 또한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출판했던 첫 작품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이후, 9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끝에 『월든』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내놓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듯해요. 물론 작가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세상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했던 듯하고요.
 



책이라고 해서 덫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 * *

 

인간은 얼마나 자주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 이런 덫들이341 우리 허리띠에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에게 정해진 거친 땅에서 한 발짝을 내밀 때마다 우리는 덫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 차라리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버린 여우가 운이 좋은 여우였다. 사향쥐는 덫에 걸리면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서라도 도망치려고 한다.343 우리 인간이 융통성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잠깐만요, 무례한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진퇴양난이란 말을 쓴 겁니까?" 당신이 천리안을 지닌 사람345이라면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뒤로 감추고 자기의 것이 아닌 척하는 것, 예컨대 부엌 가구와, 그가 아끼면서 불태워버리지 못하는 하찮은 것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의 몸은 어렵사리 옹이구멍이나 대문을 빠져나갔지만 가구를 실은 썰매는 뒤따라 나오지 못해 꼼짝 못하고 서 있다는 뜻에서 나는 그 사람이 진퇴양난이라고 말한 것이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옹골차게 보이며, 겉으로는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사람이 잔뜩 긴장해서 자기 입으로 자기 가구가 보험에 들어 있다느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며 떠들어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 가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화려한 나비는 이미 거미줄에 걸려든 것이다. 오래 전부터 어떤 가구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꼬치꼬치 따져 물으면, 다른 사람의 헛간에 적잖은 가구를 보관해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보기에 요즘의 영국은 엄청난 짐을 끌고 다니며 여행하는 노신사와 비슷하다. 오랫동안 살림살이를 하면서 축적된 하찮은 것들도 불에 태워버릴 용기가 없어 거추장스럽게 짐으로 끌고 다닌다. 큰 여행가방, 작은 여행가방, 모자 상자, 꾸러미 따위 등등. 적어도 앞의 세 가지는 버려도 상관없다. 요즘에는 건강한 사람도 자기 침대를 등에 지고 걷기는 힘들다.347 따라서 나라면 병든 사람에게 침대를 내려놓고 뛰라고 충고해줄 것이다. 나는 자신의 모든 재산이 담긴 보따리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걷는 이민자를 보았다. 보따리가 마치 그의 목덜미에서 자라는 거대한 혹처럼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 보따리가 그의 전 재산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전 재산을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덫을 끌고 다녀야할 처지가 된다면, 덫을 가볍게 처리해서 덫에 내 중요한 부분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애초부터 발을 덫에 넣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짓일 것이다.
(112∼113쪽)


주석

341. 말장난이 섞여 있다. 여기에서 '덫'은 올가미라는 뜻이기도 하며, 외적인 장식물이나 세간을 뜻하기도 한다.

343. 소로는 일기에서 "사향쥐는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내는 대단한 녀석이다. 언젠가 나는 사향쥐 한 마리를 잡았는데 녀석은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냈다. 그런데 그때가 세 번째로 덫에 걸린 때였다. 하지만 한 다리로는 도망칠 수가 없어 녀석은 덫 옆에 죽어 있었다"라는 콩코드의 덫 사냥꾼 조지 멜빈의 말을 인용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소로는 "이런 비극이 이 지역에서, 또 우리의 평화로운 강가에서 일어나며, 사냥꾼은 그런 용기를 보여주는 사냥감에 경외감을 표하며, 결국에는 사냥감을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라고 말했다. 소로는 1854년 2월 5일 일기에서도 이 야야기를 언급하며 "자기의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내는 사향쥐를 어떻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동정심은 사향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똑같이 유한한 목숨이기 때문에 사향쥐의 엄청난 고통과 영웅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345. seer. 이 단어는 직역하면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뜻이 확대되어 예언자와 시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 에머슨은 「신학교 강연」에서 "천리안을 지녔다는 예언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는 전령이다. 자신의 꿈을 어떤 식으로든 알린다. 그 꿈을 어떻게든 신성한 즐거움으로 알린다. 따라서 때로는 캔버스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서, 떄로는 끌로 돌을 조각해서, 때로는 화강암으로 탑을 쌓거나 건물을 지어서, 때로는 송가를 통해서 그의 영혼이 숭배하는 것을 표현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347. 「요한복음」5장 8절의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들고 걸어가거라"를 빗댄 표현이다.



 

단순하게, 소박하게, 수수하게!

우리 삶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왕좌왕한다. 정직한 사람은 열 손가락 넘게 헤아릴 게 거의 없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열 발가락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충 하나로 뭉뚱그리면 충분하다. 단순하게, 소박하게, 수수하게!69 당신의 일을 둘이나 셋으로 줄이고, 100가지나 1,000가지로 늘리지 마라. 100만 대신에 여섯까지만 세라. 장부를 엄지손톱에 기록하라. 문명화된 삶이라는 변덕스런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구름과 폭풍과 유사流砂 등 온갖 것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침몰해 바닥에 가라앉아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추측항법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성공한 사람은 뛰어난 계산가인 것이 분명하다. 단순화하라, 단순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꼭 먹어야 한다면 한 끼만 먹어라. 100가지 요리 대신 다섯 가지로 만족하라. 다른 것들도 같은 비율로 줄여라.
(142∼143쪽)

주석

69. 1848년 3월 27일,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블레이크에게 보낸 서간에서 소로는 "나는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네. 안타깝고도 놀라운 일이지만, 지혜롭기 그지없는 사람도 하루에 사소한 문제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나. 그 때문에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지. 수학자가 어려운 문제를 풀 때를 생각해보게. 방정식에서 거추장스런 것을 없애 간단한 식으로 만들지 않나. 이처럼 우리도 삶을 단순화해야 하네. 정말 필요한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의 중요한 뿌리가 어디로 뻗는지 철저히 탐구해봐야 하네"라고 썼다. 1853년 9월 1일 일기에서 소로는 두 유형의 단순함을 구분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개인은 무지하고 나태하며 게으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지만, 철학자는 지혜롭기 때문에 단순하게 산다. 따라서 미개인의 경우에는 단순함에 나태라는 결함이 동반되지만, 철학자의 단순함은 최상의 경지까지 발달한 삶의 모습이다. 미개인과 태반의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뭔가를 심고 꾸미고 만들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철학자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능력을 최고의 상태로 함양하며, 뭔가를 심고 꾸미며 만드는 데 최소한의 시간을 사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미개인은 삶에 불필요한 물건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못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단순함은 잘못된 것이지만, 철학자는 사치품을 얻으려고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단순함은 바람직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유를 누리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소로우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의 삶으로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책'이라고 해서 별다른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비록 무수히 많은 책들을 '빌려'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의 '서고'는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주석

102. 소로는 1853년 10월 27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가 아직 팔리지 않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재고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겠느냐고 묻는 편지를 지난 한두 해 동안 가끔 보내다가, 재고들이 차지한 공간을 그들이 급히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전부 여기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책들이 속달로 오늘 도착했다.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4년 전에 먼로에게 사서 그 이후로 조금씩 값을 치렀지만 아직 완납하지 못한 1,000권 중 남은 706권이었다. 그 책들이 마침내 내게 보내졌고 이제야 내 물건들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그 책들을 등에 짊어진 채 층계참을 돌고 두 계단을 올라, 그것들이 원래 있었을 곳과 비슷한 공간까지 옮겼다. 290권 남짓한 책들 중 75권은 기증하고 나머지가 겨우 팔린 것이었다. 이제 나는 거의 900권에 달하는 서고를 갖게 됐지만, 그 중 700권 이상이 내가 쓴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기울인 노고의 열매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책들이 내 방 한 귀퉁이에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다. 내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 모든 저작물-옮긴이)다. 내가 원작이고, 내가 머리를 짜내 빚어낸 작품이다.




그가「독서」에 대해 쓴 훌륭한 문장들을 굳이 여기까지 길게 덧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글의 제목에 어울리는 그의 글들을 조금쯤 옮겨 오는 수고는 너무 아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기계다.

우리는 이미 문자를 배웠기 때문에 기왕 책을 읽을 바에는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24  평생 4학년이나 5학년 교실에서, 혹은 학교 앞에 있는 가장 낮은 벤치에 앉아 에이 비 에이와 단음절 단어를 끝없이 반복할 수는 없잖은가. 대부분의 사람은 읽거나 누군가 읽어주는 걸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한 권의 좋은 책, 예컨대 『성경』에 담긴 지혜에 의해 죄인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 이후 평생을 무기력하게 지내며, 이른바 쉬운 읽을거리를 읽으면서 그들의 능력을 헛되이 날려버린다. 우리 순회도서관에는 몇 권으로 구성된 책이 있다. 그 책에는 『리틀 리딩』이라는 제목이 붙어, 나는 그 제목이 내가 가보지 못한 어떤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가마우지와 타조처럼 고기와 야채로 실컷 배를 채우고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너끈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하찮은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면, 그들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기계다. 그들은 제불론과 세프로니아31에 대한 9,000번째 이야기를 읽는다. 두 연인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격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그들의 진정한 사랑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한다는 이야기32, 그들의 사랑이 잘나가다 장애물에 부딪혀 비틀거리지만 다시 일어서서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또 종탑까지는 결코 올라가지 말았어야 할 어느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이 교회의 첨탑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도 읽는다. 그럼 그 사람을 쓸데없이 그곳까지 올려놓고 희희낙락하는 소설가는 종을 시끄럽게 울리면서 세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 그 사람이 다시 내려왔습니다!" 라며 어떻게 내려왔는지 들으라고 떠벌린다.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주인공들이 별자리에서 활약했듯이 지금의 일반적인 소설 세계에서는 그런 향상심에 불타는 주인공들을 인간 풍향계로 바꾸어 그들이 못된 장난으로 정직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녹슬 때까지 어딘가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소설가가 다음에 종을 울리면 나는 교회당이 불타 없어지더라도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티틀 톨 탄Tittle-Tol-Tan』을 쓴 유명 작가의 신작인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 『살금살금 펄쩍-뛰어넘기The Skip of the Tip-Toe_Hop』가 매달 분책으로 출간될 예정. 혼잡이 예상되오니 한꺼번에 오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원초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런 소설을 읽는다. 그들의 모래주머니는 지치지도 않아 주름37을 예민하게 다듬을 필요도 없다. 마치 네 살배기 꼬마가 벤치를 지키고 앉아 금박을 입힌 2센트짜리 『신데렐라』를 열심히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보기에, 그런 소설을 통해서는 아무리 읽어도 발음이나 말투 혹은 강조하는 법에서 어떤 향상도 이뤄내지 못한다. 또한 교훈을 끌어내고 끼워넣는 능력을 키우지도 못한다. 눈이 침침해지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순환 능력이 떨어지며 지적 능력이 전반적으로 저해되면서 서서히 감퇴하는 결과를 빚을 뿐이다. 이처럼 말초적인 신경만 자극하는 생강 빵이 거의 모든 집의 화덕에서 순수한 밀이나 호밀과 옥수수로 만든 빵보다 더 부지런히 매일 구워지며, 시장에서도 더 확실하게 팔린다.
(158∼160쪽)


주석

24.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소로는 "가장 좋은 책을 먼저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책들을 읽을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 영혼을 맑게 하는 건강한 책을 읽어야 한다

31. 제불론은 『성경』에서 야곱과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창세기」30장 19-20절, 『성경』에서는 스불론이라 표기한다). 세프로니아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인 타소(Torquato Tasso, 1544-1595)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소프로니아라는 인물의 이름을 약간 변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32.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진정한 사랑은 결코 순조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를 빗댄 표현이다.

37. 씨를 먹는 새의 모래주머니 벽에는 주름이 있어 소화하는 데 유리하다.




내가 혹시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모른다'고 누군가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지네'를 닮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좇는 병아리가 혹시 독수리가 아닌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암탉과 지네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실제로는 병아리가 아니라 새끼 오리였다. 반면 오만 생각을 하고 텁수룩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 마리의 벌레를 쫓아다니는 100마리의 병아리를 돌봐야 하고, 매일 아침 이슬에 병아리 20마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통에 그 녀석들을 찾아다니느라 애를 태우고 온 몸이 더럽혀지는 암탉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리 대신 머리를 앞세우는 사람, 즉 지능을 지닌 지네로 어떤 것에나 집적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화이트 산맥에서 그렇게 한다면서 방문객들이 이름을 적어놓는 방명록을 준비해두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46
(216쪽)


주석

46. 1824년 초, 화이트 산맥의 워싱턴 산 정상에는 그곳까지 올라온 관광객들을 위한 방명록이 실제로 있었다. 소로가 "누군가 당신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한다면, 그의 이름이라도 남겨야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일기)라고 쓴 1852년 1월 22일 일기를 기초로 이 구절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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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12-16 20:17   댓글달기 | URL
아래께 책이 배달되어 왔어요.
이 책 보자마자 만족해서 주석달린 빨간머리 앤도 사고 싶어졌어요.
소로가 문학적 글쓰기를 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오렌님 감사합니다.^^*
주석달린 시리즈 중 괜찮은 것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재는 빨간머리 앤만 욕심 나네요.
오렌님은 남자분이라 취향이 아니실 듯.

oren 2013-12-18 09:14   URL
『주석달린 월든』을 마침내 받으셨군요. 책이 만족스럽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책이 생각보다 너무 크고 해서 어디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없다는 게 좀 아쉽더라구요. 어제 저녁에 (흔히 그렇듯이 '슬픈' 일로) 갑자기 안동엘 다녀왔는데, 마침 '오가는 길'에 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둘러보니 딱 이 책밖에 없어서 대략 난감하더군요. 이렇게 큰 책을 아무데서나 태연하게 펼쳐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구요.

『월든』에서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들은 정말 감동적인 구절들이 많지요.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는 『주석달린 월든』보다는 강승영 님이 번역하신 『월든』이 훨씬 뛰어난 듯해요. 팜므님 말씀대로 저는 '주석 안 달린' '빨간머리 앤'조차 그다지 취향이 아니긴 해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12-18 08:10   URL
그렇네요. 두껍습니다.ㅋ
하지만 판형이 이뻐서 (주석 달아야 되니 그렇게 했겠지요.)용서가 되어요.
이걸 밖에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건 어차피 제 머리로는 무린 걸요.

강승영 번역의 월든도 찾아나서 볼게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12-16 23:20   댓글달기 | URL
제 페이퍼의 짧은 댓글 대신
이 페이퍼를 열심히 읽고 있네요... 책도 덫이 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벌써 눈을 떼지 못하고...

이후 단순하라! 에서 한숨을 쉽니다. 다른 것은 노력하겠는데
밥 한끼만은 도저히 못 먹을거 같아요. ^^

oren 2013-12-17 16:05   URL
『월든』의 매력이 소로우 님의 '과격한 표현' 내지는 '모순어법'에 있기도 하지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ㅎㅎ

모순어법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반성하는 빛을 내보이기도 했어요.

* * *

1852년 9월 2일

나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패러독스 - 정반대의 것만을 말함 - 모방일지 모르는 방법.
착상의 교묘함.
말로 희롱함 - 되웃어주는 것 - 단순 - 강건 - 명료하지 않을 때도 있음.
나 자신의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유명한 표현이나 격언을 사용함.
진지하지 못할 때도 있음. '요컨대', '사실', '참으로!' 등. 의식의 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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