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책 한 권으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다 ㅡ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 ······

 

 - 니체, 『우상의 황혼』중에서

 

 

 * * *

 

다음의 격언은 오랫동안 내 좌우명이었는데, 나는 이 격언의 출처를 식자적 호기심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솓는다increscunt animi, virescit volnere virtus.

 

 

어떤 경우에는 나는 다른 회복 방식을 더 환영한다. 우상들을 캐내는 방식을 ······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 이것이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못된 눈길'이자, 나의 '못된 '이다 ······ 여기서 한번 망치를 들고서 의문을 제기해본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부풀어오른 창자가 울려대는 그 유명하지만 공허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ㅡ 그 소리는 귀 뒤에 다른 귀를 또 갖고 있는 자를 어찌나 황홀하게 하는지 ㅡ 늙은 심리학자이면서 민중의 유혹자인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하는지. 내 앞에서는 계속해서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것도 소리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

 

 

 * * *

 

뭐라고? 네가 찾고 있다고? 너를 열 배, 백 배로 늘리고 싶다고? 추종자를 찾는다고? ㅡ 차라리 를 찾아라!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만족하면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는다. 잘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감기 걸리던가?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이전에 양심은 물어뜯을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얼마나 좋은 이빨을 가졌던가?그런데 오늘날은? 뭐가 부족한 것일까?" ㅡ 어떤 치과의사의 의문.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한 번만 경솔한 경우는 드물다. 첫 번째 경솔한 행동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너무 지나치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통상 두 번째 경솔한 짓을 한다 ㅡ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너무 미약하게 행동한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밟힌 지렁이는 꿈틀거린다. 똑똑한 일이다. 지렁이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것에게 밟힐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도덕언어로 말하면 : 순종한다.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거짓과 가장에 대한 예민한 명예관념에서 나오는 증오가 있다 : 거짓이 신의 계명에 의해 금지되는 경우에 그 증오는 겁에서 연유한다. 거짓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겁이 많아서 ······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네가 앞서서 달리고 있다고?목자로서? 아니면 예외자로서? 세 번째 경우는 탈주자일 것이다 ······ 양심에 관한 첫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네가 진짜인가? 아니면 배우일 뿐인가? 대변자인가? 아니면 대변된 것 자체인가? ㅡ 결국 너는 한갓 모방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 양심에 관한 두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너는 방관자인가? 아니면 관여하는 자인가? ㅡ 아니면 눈길을 돌리는 자, 외면하고 가는 자인가?  ······ 양심에 관한 세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너는 같이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앞서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홀로 가기를 원하는가?  ······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심에 관한 네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자기 방어 본능

 

이 모든 것에서 ㅡ 영양 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에서 ㅡ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스스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자기 보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 ㅡ 이것은 첫째가는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점에 대한 첫째가는 증거이다. 이런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다. 이것은 긍정이 곧 '무사(無私)'를 의미할 때에는 부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뿐 아니라 가능한 한 부정을 하지 말라고도 명령한다. 계속 되풀이되는 부정을 필요로 하게 될 만한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분리하라고 명령한다.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 하더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며 엄청나면서도 전적으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시킨다는 합리적 이유에서다. 우리가 하는 중대한 지출은 지극히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이 모인 것이다. 방어하는 것, 다가오지-못하게-하는 것은 하나의 지출이며 ㅡ 여기서 혼동하지 마시라 ㅡ , 너무 부정적인 목적들을 위해 낭비되는 힘이다. 지속적인 방어의 필요 때문만으로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버릴 수 있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8 

 

 * * *

 

모든 피토레스크한 인간들을 주의하라!

 

꾸며진 포즈의 파토스는 위대함에 속하지 않는다 ; 누군가가 포즈를 필요로 한다면 그는 가짜······ 모든 피토레스크한 인간들을 주의하라! ㅡ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유희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아주 최소한이더라도 압박, 우울한 표정, 목소리의 거친 음조들, 이런 것들은 전부 한 인간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강한 이의 제기인 것인지! ······ 튼튼한 신경을 가져야 한다 ······ 고독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역시 하나의 이의 제기다. ㅡ 언제나 내가 겪은 괴로움은 오로지 '다수' 때문이었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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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22 21:24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니체 전집이 엔날에 청하에서 나온 거 하고 책세상에서 나온 두 판본이 있는데요, 청하 전집 중 한 권인 <서광>은 책세상 본에서는 어디 있는지요? 제목을 찾아봐도 <서광>이 없는 거 같아서 다른 책에 껴 있는 거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

글구 저는 청하본 전집을 7권 갖고 있는데요, 책세상 본의 가독성이 어떤지 몰라 청하본을 버리고 새 판본을 사야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읽은 적이 없어 고민이 됩니다. 이 부분도 문의드려 봅니당~

oren 2016-05-23 16:07   URL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서광』은 책세상에서 나온 전집의 『아침놀』과 같은 책이랍니다. 원제목을 번역하는 사람마다 달리 표현하다보니 너무나 다른 책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저는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읽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무의미의 축제』라는 작품을 두고 어떤 저명한 문학가는 자신의 글 속에서 <하찮은 것들의 잔치>라고 언급해 놓았더군요. 똑같은 작품을 두고 저렇게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지만 두 제목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결코 적잖다는 점에서 제법 놀랬답니다. 다시 니체로 돌아와서 얘기하자면, 저도 여태껏 니체의『아침놀』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어쨌든 그 책의 내용을 짐작케 할 만한 대목을 참고삼아 여기에 덧붙여봅니다.

* * *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화약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 전투가 : ㅡ 예민한 코를 가지고 있는 자는 화약 냄새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훨씬 더 좋은 냄새를 맡을 것이다. 이 전투에는 큰 포격도 없고 작은 포격도 없다 : 이 책의 효과가 부정적이라도, 그 수단이 그만큼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수단의 효과는 포격의 경우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추론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경외되고 심지어는 숭배되기까지 했던 모든 것을 어려워하며 조심스러워했던 일이 이 책으로 작별을 고한다. 이런 식의 작별과, 그리고 이 책 전체에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으며 공격도 악의도 없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ㅡ 그리고 그 책이 심지어는 태양 아래 놓여 있다는 것, 완숙하고 행복하게, 바위 틈에서 햇볕을 쪼이는 어떤 바다동물과도 같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결국 나 자신이 바로 이 바다동물이었다 :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이 제노바 근처의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위들 사이를 종횡무지 쏘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다. 거기서 나는 혼자 있었으며 바다와 비밀을 공유했었다. 지금도 우연히 그 책을 들추면, 거의 모든 문장이 내게는 저 깊은 곳에서 비할 바 없는 어떤 것을 다시 끌어올리게 하는 뾰족한 끝이다 : 이 책의 전 피부는 회상의 부드러운 전율로 떨고 있다. 이 책은 가볍고도 소리없이 스쳐가는 것들과 내가 신적인 도마뱀이라고 부르는 순간들을 어느 정도 고정시키는, 하찮치만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다 ㅡ 하지만 저 불쌍한 도마뱀을 간단히 꼬챙이로 꽂아버리는 젊은 그리스 신의 잔인함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즉 펜을 써야 했다 ……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ㅡ 이 인도의 비문이 이 책 출입구에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다시 새로운 아침을 여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은근한 붉은빛을 찾는가? ㅡ 아아, 새로운 날들의 연속과 새로운 날들의 세상 전체를 여는! 그것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아침놀> 중에서

oren 2016-05-25 21:37   URL
니체의 『아침놀』은 (제법 여러 곳에서) 『여명』으로도 번역되는가 봅니다. 오늘 우연히 펼친 책 속에서도 『여명』이라고 번역된 `생생한 현장`을 발견했답니다.
* * *
니체에 의하면 철학자는 ˝자신이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한 생각들과 사물들을 연역과 변증의 기만적인 배합으로 날조해서는 안 된다. (……) 우리 생각들이 우리에게 온 그 효율적인 방식을 변질하거나 감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심오하고 가장 무궁한 책들은 언제나 파스칼의 『팡세』의 그 급작스럽고 잠언적인 특성을 지닐 게 분명하다.˝

˝우리 생각들이 우리에게 온 그 효율적인 방식을 변질하지 말 것.˝ 나는 이 명령을 비범하게 여긴다. 또한 『여명』을 시작으로, 그의 모든 저서에서 모든 장이 단일 단락으로 기술되었음에 주목한다. 이는 어떤 생각이 단숨에 이야기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생각이 빠른 속도로 춤추듯 철학자에게 뛰어와 스스로를 드러낸 모습 그대로 고정되게 하기 위함이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6부 작품과 거미>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시종들은 모두가 그를 본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아첨꾼들은 그와 같이 근시안인 체하느라고, 그의 앞에서 잘 부딪치고 발끝에 걸리는 것을 차고 둘러엎곤 했다. 탈장(脫腸)까지도 때로는 으스대며 자랑할 거리가 되었다. 나는 귀먹은 것도 뽐낼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플루타르크는 왕이 왕비를 미워하자, 궁신들도 덩달아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것은 음탕한 버릇이 모든 버릇과 아울러 유행하고, 불충·모독·잔인성도 그렇고, 사교가 그렇고, 미신·무신앙·태만이 그렇다. 더 나쁜 일로, 도대체 더 나쁜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아첨꾼들은 그들의 왕이 명의(名醫)라는 영광을 얻고 싶어하자 자기들 몸을 째고 지지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본보기로 다른 자들은 몸의 가장 미묘하고 고귀한 부분인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 몽테뉴

 

 * * *

 

몽테뉴가 쓴 『수상록』의 원조격 작품은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이다. 몽테뉴보다 무려 1,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쓴 작품이 『몽테뉴 수상록』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몽테뉴의 작품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심지어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선정한 <세계의 결정적인 책 15권>에도 선정될 만큼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는 반면에, 정작 그 작품의 밑바탕이 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하여 안타까운 느낌이 적지 않다. 무려 1,900년 전쯤에 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진 그 방대한 작품이 '원전 완역'되기를 바라는 일 자체가 아직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저자가 쓴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조차도 '그리스어 원전 완역'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판국이니, 하물며『윤리론집』원전 완역은 언감생심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미리 읽고 나서 뒤늦게야 플루타르코스가 쓴 『윤리론집』을 거꾸로 접하고 보니, 두 작가가 서로 주고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새록새록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고도 놀랍다.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윤리론집』에 담긴 에세이는 모두 합하면 무려 78편에 달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고작 11편밖에 번역되어 나오지 않은 실정이다. 기껏해야 11편의 에세이를 읽었을 뿐인데도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속에서 '몽테뉴의 냄새'를 흠뻑 맡았을 정도이니, 플루타르코스의 나머지 작품들까지 모조리 다 읽어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두 인물을 번갈아 쳐다보고 서로를 비교했을까 자못 궁금하다.

 

어쨌든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플루타르코스의 에세이 11편'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두 편이다. 첫 번째는 <수다에 관하여>라는 작품이고, 두 번째는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이다.(앞에 든 작품은 천병희 번역, 『수다에 관하여』라는 책에 실려 있고, 뒤에 든 작품은 허승일 번역,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 담겨 있다.)

 

사실 나는 <수다에 관하여>를 읽는 동안 '수다'에는 일가견이 있는 '숱한 알라디너들'을 떠올리고 속으로 무척이나 웃었더랬다. 왜냐하면 그 작품 속엔 '똑같은 얘기를 지치지도 않고 떠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수다쟁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면모가 마치 5년 혹은 10년이 지나도 조금도 변치 않고 '언제나 자신의 스타일대로 굳세게, 한결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는 수많은 알라디너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딴 사람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우선 나부터 '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몽테뉴는 "되풀이해서 하는 말은 호메로스에 나오더라도 지루해진다."고 그다운 재치있는 말을 남겼다. 플루타르코스의 에세이 가운데 하나인 <수다에 관하여>에 나오는 대목들은 어느 한 대목도 그른 말이 없을 정도로 귀에 쏙쏙 박힐 정도였다. 그 가운데 두 대목만 여기에 옮겨 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 말고도 속이 뜨끔한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호메로스에 관한 가장 진실한 발언은, 호메로스만이 언제나 새롭고 매력이 넘쳐흘러 사람들이 싫증을 내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자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분명하게 말한 것을

재차 말한다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소.

 

말하자면 호메로스는 이야기란 으레 지루해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듣는 이들을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인도하는가 하면,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듣는 이들이 포만감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 그러나 수다쟁이는 마치 글자를 지우고 다시 사용하는 서판(書板)을 펜으로 긁듯이, 같은 이야기를 자꾸 하고 또 함으로써 우리의 귀를 고문한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중에서

 

어디 이것뿐이랴. 수다쟁이의 폐해는 도무지 필설로 다하지 못할 지경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인용문에 다시금 속이 뜨끔할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누구보다도 바로 나 자신이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어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다.

 

그러나 수다쟁이는 이야기할 때 전혀 화제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화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히 조심하고, 되도록 그런 화제는 피해야 한다. 그런 화제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살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경험이나 재능에서 남들을 능가한다고 생각되는 화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그런 사람은 허영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이 가장 능숙하다고

믿는 일들에 바칠 것이다.

 

독서광은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문학자는 문법에 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널리 떠돌아다닌 여행가는 낯선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러한 기호도 조심해야 한다. 수다는 언제나 짐승처럼 낯익은 풀밭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때문이다. 소년 퀴로스의 처신이 높이 평가받는 까닭은, 그가 자신이 더 잘하는 종목이 아니라 덜 숙달된 종목에서 경쟁하자고 동년배들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동년배들을 능가함으로써 고통을 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수다쟁이는 정반대이다. 그가 배울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대화가 시작되면, 한쪽으로 밀쳐버리거나 방향을 틀어버린다. 그는 침묵이라는 얼마 안 되는 보수마저 지불할 여유가 없어, 자꾸만 빙빙 돌며 대화를 지루하고 진부한 수다로 몰아가는 것이다. 우리 고향에는 에포로스의 책을 두세 권 읽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듣는 사람을 지루해 죽게 만들었고, 레욱트라 전투와 그 결과를 매번 이야기함으로써 번번이 만찬장의 판을 깨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에파메이논다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중에서

 

이 정도로 끝일까? 플루타르코스의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건 약과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다를 그런 무해한 이야기로 유도해야 한다. 유식한 주제에 관한 수다는 덜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자기들끼리 토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스토아학파 철학자 안티파트로스는 스토아학파를 격렬하게 공박하는 카르네아데스와 논쟁을 벌일 자신도 없고 의사도 없어 그를 반박하는 글로 여러 권의 책을 가득 채웠으며, 그래서 '소리치는 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런 종류의 펜과의 그림자 싸움은 수다쟁이를 사람들에게서 떼어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점점 덜 부담이 되게 할 터인데, 그것은 마치 개가 막대기나 돌멩이에 분풀이를 하면 사람들에게 덜 사나워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다쟁이는 자기보다 더 나은 연장자들과 자주 교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침묵하는 버릇을 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런 버릇을 들이고 나면 조심하고 성찰하는 버릇도 들여야 한다. 말하고자 할 때나 말이 혀로 몰려들면, 자문해보아야 한다. "대체 어떤 말이기에 이렇게 억지로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하지? 내 혀는 왜 이리 안절부절못하지? 내가 말해서 이로운 점은 무엇이며, 말하지 않아서 해로운 점은 뭐지?" 말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더는 것과는 다르다. 말은 해도 여전히 남아 있기 떄문이다.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자신을 위해 말하거나,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말하거나, 소일거리나 그때그때의 활동에 양념을 쳐 서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말한다. 그러나 말이 말하는 사람에게 쓸모가 없고, 듣는 사람에게 불필요하며, 즐거움도 우아함도 없다면, 왜 말을 하는가? 말도 행동과 마찬가지로 무익하고 무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중에서

 

 

<수다에 관하여>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정작 내가 이 글을 쓴 '본래의 목적'은 아직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플루타르코스의 '11편의 에세이' 가운데 내가 두 번째로 꼽은 에세이 제목을 이쯤에서 한번 더 꺼내야 옳을지 모르겠다. 첫 번째 에세이에 대해 너무나 많은 '수다'를 떠는 바람에 그만 두 번째 에세이의 제목으로부터 우리가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두 번째로 에세이는 바로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였다. 플루타르코스가 이 문제에 얼마나 천착했는지는 '에세이의 길이'만 살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이 에세이 한편에 할애된 쪽수가 무려 118쪽에 달한다.(물론 우리말로 번역된 책의 쪽수를 말한다. 이 하나의 에세이에 딸린 번역자의 주석 또한 무려 210개에 달한다.)

 

어쨌든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가운데 '에세이'만 놓고 보면, 그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전기작가의 면모보다는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에서 제대로 공부한 '엘리트 철학자'의 풍모가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가 '아첨꾼과 친구'를 구별하기 위해 쓴 '깊이있는 글'은 여느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면모와 깊이를 지니고 있어 매력적이다.

 

이 두 번째 에세이를 읽으면서 우리가 그 누구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건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총선'이라는 커다란 정치 이벤트를 치른지 고작 한 달도 지나지 않았고,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맹활약을 펼친 '정치판의 아첨꾼들'을 지겹도록 생생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권력자에게 아첨을 떨기 위해 소위 '진박 감별사'를 자처하는 한심스런 인물까지도 등장했던 판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아첨꾼들과 한통속'으로 놀아난 위정자의 모습 또한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들뿐이랴. 어떤 조직에서나 늘상 있게 마련인 '교묘한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했던 숱한 아첨꾼들'이 참 많이도 떠올랐다. '알라딘 마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틀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는 바로 이곳 또한 '친구인지 아첨꾼인지 도대체 아리송한 인물들'이 너무나 자주 눈에 띄기에 하는 말이다. 혹시라도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플루타르코스가 1,900년 전에 쓴 다음의 글들을 한번쯤 찬찬히 읽어 보라. '친구와 아첨꾼'은 구별하기가 몹시 힘든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감별 능력'만 확보할 수 있으면 아첨꾼들을 구별해 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아첨꾼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혹시라도 '아첨꾼'에 대해 한동안 경계를 게을리 해왔다면 이참에 다시 한번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하여 '적지 않은 분량'을 아래에 인용해 보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플루타르코스의 글들이 오늘날에도 딱히 손볼 게 별로 없구나 싶고, 그런 사실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할 뿐이다.

 

 * * *

 

아첨이 우정을 손상하거나 불신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아첨이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내어 검토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통찰력이 요구되는 사항이네. 해충은 죽어 가는 사람을 버리고 떠나지. 해충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피가 생명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네. 아첨꾼들도 그러해 즙과 온기가 없는 곳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명성과 권력이 있는 곳에 모여 득실거린다네. 그러나 여기에 변화가 오면, 그들은 재빨리 슬금슬금 빠져나가 사라지지. 그러나 우리는 무익하거나 오히려 해롭고 위험하기까지 한 이런 경험을 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네. 그 이유는 친구가 절실히 필요할 때 친구가 아닌 친구를 알아챈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인데, 그때에는 참되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위선적인 사람과를 맞바꿀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친구란 동전과 같아서, 필요로 하기 전에 검증을 받고 인정받는 것이지, 필요한 그때그때 입증하는 것이 아니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손해 볼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서 아첨꾼을 알아채고 찾아내는 방법을 배워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먼저 독약을 맛보고 나서야 독약의 치명적인 해를 알게 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네. 이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한 거라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닐세. 뿐만 아니라 친구를 고상하고 이로운 무언가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칭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교적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곧 아첨꾼들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니네. 친구란 즐겁거나 순수한 관계이며, 또한 우정에 품위를 주는 것은 쓰라림이나 준엄함이 아니라 우정 속에 들어 있는 바로 이 고결함과 존업성이 달콤하고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불운에 빠진 사람에 대해, 에우리피데스가 읊듯이,

 

정감 어린 남자의 두 눈을 응시하는 것은 달콤하다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할 때 우정은, 역경에 처했을 때 슬픔과 무력감을 싹 가시게 하고, 이에 못지않게 우리의 번영기에는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한다네.

 

에우에노스가 불에 쬐어야 최고의 양념이 된다고 말했던 것처럼, 신은 우리 생활에 우정을 엮어 놓음으로써 즐거운 일에 우정이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만사가 기분 좋고 달콤하고 유쾌하게 되게 하셨지. 정말, 우정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아차린 아첨꾼이, 어떤 방법을 써서 자신의 전매특허라 할 즐거움을 사용할 수 있을는지는 누구도 설명해 줄 수 없지. 그러나 가짜 금으로 된 모조품이 오로지 밝은 광채만 내는 것을 모방한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아첨꾼은 친구의 즐겁고 매력적인 성격을 모방함으로써 언제나 즐거운 기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조금도 상대방에게 거슬리거나 반대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네. 그렇다고 칭찬의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단순한 아첨꾼으로만 의심하는 것은 타당치 않은데, 제때에 칭찬하는 것은 비난에 못지않게 우정에 어울리기 때문이네. 또한 우리가 불평과 흠잡기는 일반적으로 비우호적이고 비사교적이나, 이에 반해서 고귀한 행동에 흔쾌히 칭찬하는 친밀감은 언젠가는 유쾌하고 부담 없이 훈계하고 솔직한 말을 털어놓으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해 줌으로써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네. 그도 그럴 것이 칭찬하기를 즐기는 사람은 꼭 필요한 때에만 칠책을 한다고 우리는 믿고 또 만족하기 때문이지.

 

 * * *

 

자!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아첨꾼은 어떤 사람일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첨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 부엌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는 사람, 식사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해시계를 절대 쳐다보지 않는 사람, 술에 만취해 마룻바닥에 절대로 눕지 않는 사람일세. 그는 정신이 말짱하지. 항상 바쁘고, 모든 일에 참견하고, 모든 비밀에도 신경을 쓰네. 연극에 비유하면 비극 배우의 무게를 지닌 친구 역할을 하고, 절대로 희극 배우나 어릿광대의 역할은 안 하네. 플라톤이 말하듯이,

 

누군가가 정직하지 않을 때 정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부정직의 극치이네.

 

그래서 우리가 취급하기가 어렵다고 간주해야 할 아첨은 본시 숨겨져 있는 것이라네. 이러한 아첨은 참된 우정까지도 불신으로 감염시키지. 만약 우리가 아첨이 우정과 부합되는 많은 점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페르시아 귀족 중에 고브뤼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네. 그는 도망치는 사제(司祭) 마고스를 추적해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 죽을 힘을 다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네. 그는 뒤따라와 그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다레이오스왕에게 외쳤지. 둘 다 죽이더라도 좋으니, 어서 칼로 치라고 말일세. 그러나 "친구를 죽이게 되더라도 적을 때려눕혀라"는 정서를 결코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서로 얽혀 닮은 점이 많은 친구와 아첨꾼을 구별하려 할 때에 크게 망설일 바가 하나 있네. 해를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선한 자와 악한 자, 즉 친구와 아첨꾼을 함께 버리든가 아니면 함께 취하든가 하지 않기 위해서지. 그래서 나는 밀의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독보리 같은 야생 씨앗들이 밀의 씨앗들과 섞였을 때, 야생 씨앗을 골라내는 일은 어렵다고 생각하네. 마찬가지로, 아첨은 모든 감정, 모든 동작, 필요, 그리고 습관과 얽혀 있기 때문에 우정과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네.

 

 * * *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우정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첨꾼은 즐거움을 주는 방법으로 유혹하고 또 즐거움에 관여하네. 호의와 유용함이 우정과 더불어 있다는 점 때문에(바로 이 이유 때문에 친구가 불과 물보다도 더 없어서는 안 된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네만), 아첨꾼은 끼어들어 우리를 도우려 하고, 언제나 성실하고 끈기 있고 부지런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싹튼 우정이 아주 각별하게 공고히 되는 것은 취미와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같은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같은 일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하고, 공감대를 통해서 친숙해지게 하므로, 아첨꾼은 이 사실에 유의해 몸소 이에 적응한다네. 마치 자기가 비활성의 물체인 것처럼 모방을 통해 자기가 공격하려는 사람들에게 맞게 자신을 맞추고 그들이 받아들이게끔 노력한다네. 그리하여 그가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너무나 복제를 그럴듯하게 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외치네.

 

그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아닌, 바로 아킬레우스 자신.

 

이라고.

 

그러나 그가 지닌 것 중 가장 파렴치한 속임수는 이것이네. 사회 일반의 평판과 소신에 따른 솔직한 언사가 우정 특유의 언어라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함의 결여가 우정이 없고 야비하다는 점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심지어 이것까지도 철저하게 모방하려 든다는 것이네. 그러나 영리한 요리사들이 단맛의 식상함을 없애기 위해 쓴 즙과 떫은 양념을 사용하는 것처럼, 아첨꾼들은 순수하거나 이롭지 않지만, 말하자면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에 윙크하고 오직 기쁘게만 하는 솔직함을 가하지.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 아첨꾼을 간파하기란 어렵네.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몸의 색깔을 똑같이 바꾸는 카멜레온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지. 아첨꾼이 유사성을 이용해 속이고, 또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에, 포장을 풀고 그를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위해 플라톤이 언급했듯이, 아첨꾼이 "그 자신의 어떤 결핍 때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깔과 모습으로 치장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차이점들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네.

 

 * * *

 

자, 그러면 처음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과 우정을 맺기 시작하는 것은 마음이 맞는 성향과 기질 때문이네. 그래서 습관과 특성이 거의 같은 사람을 서로 환영하고, 같은 일과 활동, 같은 취미를 즐기게 되지. 이 주제로 역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네.

 

노인은 노인에 대해 가장 달콤한 말을 하고,

아이는 아이에 대해,

여인은 여인끼리 잘 어울리고,

병든 이는 병든 이에게,

불행에 우는 이는 불운을 만난 이에게 끌리지.

 

그래서 아첨꾼은, 사람들이 같은 일들에서 기쁨을 맛볼 때 서로에게서 향락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앎므로, 희생자로 삼으려는 각각의 상대에게 처음 접근을 시도하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 과정을 택하네. 그는 마치 목장에서 마음껏 달리는 동물처럼 행동하고, 같은 오락 같은 취미를 가진 척하며, 같은 생활의 이해관계와 태토를 보이는 척함으로써, 그는 점점 그에게 밀착해 완전히 그와 같은 색깔을 띠게 하네. 그래서 마침내 희생자는 그에게 빌미를 주고 유순해지고 아첨꾼의 접촉에 친숙해지지. 아첨꾼은 눈치를 채 언제나 그의 희생자가 싫어하는 행동, 생활, 그리고 사람들을 달가워하지 않네. 반면에 상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있다면, 아첨꾼은 보통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분명히 당사자 이상으로 놀람과 경이로움으로 칭찬한다네. 동시에 그는 자기의 애증(愛憎)이 감정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네.

 

 * * *

 

그렇다면 아첨꾼의 가면을 벗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차이점에 근거해 아첨꾼이 실제로는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거나 심지어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될 가망성도 없는 자로서, 단지 이러한 성격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까? 첫째, 그의 취미가 단일하고 변함이 없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네. 다시 말하면 그가 항시 같은 것들에서 기쁨을 누리는지, 언제나 같은 것들을 칭찬하는지, 자유인 태생이자 유쾌한 우정과 친교의 애호가가 되는 한 가지 방식에 따라 자기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지를 말이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친구의 행위이기 때문이네. 그러나 아첨꾼은 특성상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자신의 선택인 인생이 아니라 남의 삶을 선택해 거기에 자신을 적응해 살아가기 때문에, 단순하지도 않고,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그 속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 있어 변화무쌍하지. 그리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그릇의 모양에 맞춰 부어지는 물처럼, 그는 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알맞게 변신한다네.

 

원숭이를 잡아 보면 알 수 있네. 원숭이는 사람이 하는 대로 움직이고 춤을 춤으로써 사람을 모방하려고 애쓰지. 그러나 아첨꾼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유인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을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하지. 어떤 때는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어떤 때는 레슬링을 하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하네.

 

 * * *

 

아첨꾼은, 즐겁고 동시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더 악한 일에서 더 큰 기쁨을 맛보는 척하네. 이는 마치 품고 있는 큰 사랑 때문에 천박한 것에 대해서조차도 차마 공세를 취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긴 하지만, 그러나 아첨꾼은 모든 일에서 친구와 공감하고 동참한다네. 이런 이유로 아첨꾼들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삶의 우연사까지도 한몫 끼기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지. 그래서 그들은 상대가 나쁜 병에 걸렸으면 그 병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고, 상대가 눈이 침침하거나 가는귀 먹었으면 자신도 분명히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제각각 아첨한다네. 이는 마치 참주 디오뉘시오스의 아첨꾼들과 같아서 그의 시력이 떨어지지 만찬 때 아첨꾼들은 서로서로 몸을 부딪쳐 접시들을 깨곤 했지.

 

오히려 고통과 함께 해서 좀 더 상대의 환심을 사고 동료애를 보여 상대방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비밀까지도 캐내는 사람들이 있네. 예를 들어, 상대방이 결혼이 불행하다거나 아들이나 가족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첨꾼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아이들이나 부인, 또는 친척이나 가족에 대해 개탄하며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른 특정 비밀까지도 다 얘기한다네. 왜냐하면 이런 것이 동료애를 더 강하게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상대방은 우정의 서약을 다짐 받았다고 생각하며 아첨꾼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경향이 늘어나는데,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들은 아첨꾼들을 옆에 붙들어 두는 격이 되네. 은밀한 관계를 포기하기가 두려운 거지.

 

 * * *

 

그러나 아첨꾼이 하는 일 모두와 그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항상 향료 같은 것으로, 그때그때 기분 맞추는 농담, 웃기는 소리, 재미있는 얘기를 해 가면서 서로서로 쾌락을 자극하는 데 있지. 두어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첨꾼은 기분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친구는 때로는 기분 좋은 일도 하고 때로는 기분 나쁜 일도 한다는 것이네. 항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기분이 나쁜 일을 하는 경우, 그것은 불쾌감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일을 그냥 덮어 두고 넘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지. 덮어 두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더 낫다고 하더라도 말이네. 말하자면 의사와 같은 것이지. 의사는 환자에게 좋다면 사프란이나 감송을 복용하게 하네. 그리고 때때로 쾌적한 목욕이나 몸에 맞는 식이요법을 권하지.

 

 * * *

 

그러므로 친구는 숙련된 음악가와 같은데, 현을 풀었다 조였다 하면서 고상하고 유익하게 변화의 효과를 주어 연주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친구는 자주 즐겁고 항상 유익하다네. 그러나 아첨꾼은 다르네. 아첨꾼은 오직 한 음조에만 맞춰 즐거움과 우아함의 반주곡을 줄곧 연주해 왔기 때문에 저항의 행동이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하나도 모르네. 그저 다른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가만 알려 하고 거기에 맞추어 매사 주의를 집중하고 언급을 하지. 자기를 질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칭찬 또한 받는 것이 참 기쁘다고 했던 아게실라오스에 관해 크세노폰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참된 우정으로 간주해야 하네. 간혹 질책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짓밟는다 하더라도 말이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움만 추구하는 교제, 사근사근 공손하기만 하고 가시 돋친 말은 전연 없거나 섞이지도 않은 교제가 아닌지 주의해야 하네. 그래서 우리는 스파르테인의 금언을 명심해야 하지. 카릴로스 왕이 칭찬을 받았을 때 했던 말,

 

악한에게조차 엄하지 못한 그가 어떻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 * *

 

파당 싸움과 전쟁 중에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네.

 

그들은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자신들이 행한 행동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의미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무모한 만용은 진정한 용기로, 신중한 기다림은 그럴듯한 비겁으로, 온건함은 겁쟁이의 구실로, 만사에 대한 명민한 이해는 어떤 일을 맡기에는 행동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누가 아첨하려고 할 때에 우리리는 주의 깊게 관찰하여 감시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되네. 낭비가 '베풂'으로, 비겁이 '자기 보전'으로, 충동이 '기민함'으로, 인색이 '검약'으로, 호색한이 '사교적이고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성 잘 내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기백이 있는 사람'으로, 미천하고 온순한 사람이 '친절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들이지. 플라톤도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애인의 아첨꾼이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부른다고 말했네. 사자코의 애인은 '매혹적'인 사람, 메부리코의 애인은 '왕과 같은' 사람,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사내다운' 사람, 살갗이 희고 금발인 사람들은 '신들의 아이들'로 말이지.

 

 * * *

 

그러나 악을 덕으로 취급해 칭찬하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네. 그는 악에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기뻐하지. 그래서 자기 잘못에 대한 온갖 수치심을 못 느낀다네. 이것이 일종의 큰 재앙을 초래했는데, 시켈리아 주민으로 하여금 디오뉘시오스와 팔라리스의 야만적인 잔학 행위를 '불의와 부정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로 부르게 함으로써 큰 고통을 당하게 했네. 아이귑토스를 파멸시킨 것 역시 이것이었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유부단, 그의 종교적 심취, 그의 찬가, 그가 두드리는 북소리에다가 '경건심'과 '신들에 대한 헌신'의 이름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공화정 말기 당시에 로마인들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훼손시킨 것이었네. 안토니우스의 사치, 그의 무절제한 행위, 화려한 전시를 "권력의 신과 행운의 여신의 손을 적절히 이용하는 그의 유쾌하고 친절하고 고상한 행동들"로 두둔하려 했기 때문이지. 프톨레마이오스로 하여금 주색잡기에 빠지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네로에게 비극의 무대를 설치해 주고 그에게 탈을 쓰게 하고 편상(編上) 반장화를 신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그의 아첨꾼들의 칭찬이 아니었는가?

 

어떤 왕이라도 노래 한 곡조 웅얼거리면 아폴론 신, 술 한 잔 하면 디오뉘소스 신, 레슬링을 하면 헤라클레스 신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왕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 그래서 왕은 아첨에 의해 기쁨을 얻고 온갖 종류의 불명예스런 일에 빠져 들지 않았는가?

 

 * * *

 

만일 상대가 글재주가 있음을 알아채면, 아첨꾼은 그에게 자기가 쓴 글 일부를 주며 읽고 고쳐 달라고 요청하네. 미트리다테스는 왕이었는데, 그는 아마추어 의사로 자처했지. 그의 친구 중 몇이 그에게 수술받고 수술 부위를 불로 지져 고쳐 줄 것을 자청하여,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에게 아첨했네. 왜냐하면 왕은 자기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곧 그의 의술에 대한 증거라고 느꼈기 때문이지.

 

여러 모습으로 신들은 나타나네.

 

더욱 약삭빠르고 주의를 필요로 하는 이런 부류의 거짓 칭찬은 의도적으로 만든 어처구니없는 조언과 제안들, 그리고 의식적인 교정들에 의해 밝혀지게 되어 있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어떤 것이든지 반박을 못하고, 만사에 다 동의하고 그걸 받아들이면서 모든 제언에 "좋소", "탁월해" 하고 외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하는 격이기 때문이네.

 

지나가는 말로 묻네만,

다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건지.

 

그가 실제로 바라는 것은 그의 희생자를 칭찬하여, 그가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하는 것이라네.

 

 * * *

 

이제 더 고심하지 않고 봉사와 도움의 화제로 들어서게 되었네. 아첨꾼이 자신과 친구 간의 차이에 관해서 큰 혼란과 불확실성을 야기하는 것이 바로 봉사와 도와주기에서인데, 그는 매사에 활기차고 열성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지. 친구의 특징은 무엇인가? 에우리피데스가 말하듯이, 그것은 '진리의 언어'처럼, '단순하고' 분명하며 가식이 없다네. 반면에 아첨꾼의 특징은 바로 그 진실이란 면에서

 

부패하고 병들어 있기 때문에,

좋은 비상 치유책이 많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과감히 주장하는 바이네.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하는 예를 들어 보겠네. 친구는 때로는 말은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으면서 단순히 힐끗 쳐다보고 미소 지으며 눈을 통해 마음속에 담겨 있는 호의와 친밀감을 넌지시 주고받고 지나치지. 그러나 아첨꾼은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그는 달려가 멀리서부터 손을 내밀고 따라가면서 인사한다네. 그리고 상대가 그를 먼저 보고 말을 걸어오면, 먼저 못 봐서 미안하다고 온갖 증거를 대고 맹세까지 해대며 야단법석을 떠는데 행동도 똑같다네. 친구들은 사소한 형식 같은 것은 많이 생략하지. 그래서 친구지간의 일 처리에서 너무 사무적이거나 꼼꼼히 따지지도 않고 할 일에 대해서도 일일이 간섭하지 않지. 그러나 아첨꾼은 크게 다르다네. 그는 일들을 처리할 때 상대방에 대해 순종의 자세를 취하네. 고집스럽게, 주도면밀하며, 지치지도 않은 채 일을 하면서 자기 외에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일 처리에 여유를 주지 않네. 그러나 그는 상대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열심히 기다리지. 그러다가 아무 명령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다가 의기소침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면서 큰 슬픔에 빠진다네.

 

 * * *

 

그런데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은, 순수하거나 고상한 우정의 표현이 아니라 창녀가 남자를 유혹하고 포옹하는 것 이상의 철면피한 우정의 표현이네.

 

그렇지만 우리는 첫째, 봉사하는 두 사람이 보여준 차이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네. 옛부터 작가들이 말하는 친구가 제공하는 봉사의 형태는 이런 것들이지.

 

물론 내 힘이 닿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 주겠네.

 

반면에 아첨꾼은 이렇다네.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속 시원히 다 말해 보게.

그 부탁을 꼭 들어 주겠네.

 

 * * *

 

자네는 원숭이를 본 적이 있겠지. 원숭이는 개처럼 집을 지킬 수도 없고, 말처럼 짐을 나를 수도 없고, 소처럼 밭을 갈 수도 없지. 원숭이는 학대와 욕도 감내하고 짖궂은 장난도 참아가면서 웃음의 노리개가 되네. 아첨꾼도 마찬가지, 그는 말이나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없고 싸움에서 남을 지원할 수 없고, 힘들거나 중대한 일을 맡기에는 적임자가 아니지. 하지만 그는 비열한 행동을 할 때에는 아무 군소리도 없고, 정사(情事)에는 충실한 조력자이며, 창녀에게 지급할 금액을 정확히 알고 있고, 술이 곁들인 저녁 식사 값을 계산할 때는 실수가 없으며, 여자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네. 그러나 부인의 친척들을 냉대하라거나 부인을 집 밖으로 내쫓을 때 도우라는 부탁을 받으면, 아첨꾼은 가차 없이 태연스럽게 수행하지. 결론으로 말하자면, 역시 아첨꾼은 이런 방법으로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네. 왜냐하면 만약 자네가 하고자 하는 어떤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도록 아첨꾼에게 부탁한다면, 그는 그 일을 맡긴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

 

 * * *

 

아첨꾼과 친구 사이의 큰 차이점은 친구의 친구를 대하는 그의 성향에서 아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네. 친구는 수많은 친구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지. 그의 친구도 다른 많은 친구를 사귀게 하고 명예롭게 되도록 언제나 끊임없이 노력한다네.

 

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

 

고 믿기 때문에 친구들만큼 공유되는 것도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지. 그도 그럴 것이 우정을 해치는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자신도 충분히 알기 때문이라네. 우정이 그의 손에 들어가면, 이를테면 위조 동전으로 변한다는 것뿐이지. 아첨꾼은 천성적으로 질투심이 많네. 그래서 자기 본분을 망각하면서까지 나불나불 수다를 떨거나 익살을 부리면서 험담을 늘어놓아 남들을 능가하려고 끊임없이 애쓴다네. 그러나 아첨꾼은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경외심을 품고 있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정말로 그는,

 

뤼디아인의 전차와 경주하며 허덕이는 보병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모니데스가 표현한 것처럼, 그는

 

정제된 순금과 비교되기 때문이지.

 

그런데 아첨꾼은 가벼운 가짜 도자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돈독한 우정과 비교되거나 면밀히 검사받을 때는 언제나 들통이 나 불합격 통지를 받게 되지. 그래서 그는 발각되면 수탉들을 엉망진창으로 그리는 화가처럼 똑같이 행동한다네. 화가는 하인에게 명하여 모든 진짜 수탉들을 겁을 주어 가능하면 아주 멀리 화포/그림에서 쫓아 버리게 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아첨꾼들도 그렇게 진짜 모든 친구를 겁주어 다 쫓아 버리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지. 그런데 만약 아첨꾼이 이런 짓을 할 수 없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아는가? 친구들에게 그는 대놓고 굽실거리고, 상냥하게 대하며, 상급자처럼 아주 존경하는 척 거대한 겉치레를 부린다네. 그렇지만 이걸 알아 두게. 그는 암암리에 친구들을 중상 모략하는 말을 넌지시 암시하거나 퍼뜨린다는 걸 말이네. 비록 아첨꾼은 시작 초에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밀리에 말하는 것이 언젠가는 아픈 염증을 유발하기 마련이므로 메디오스의 교훈을 되새기며 결과를 지켜본다네. 굳이 그 작자를 거명하자면, 이 메디오스란 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선한 모든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아첨꾼 패거리의 수완 좋은 우두머리겪이었지. 이 메디오스란 자가 자기 수하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가?

 

중상모략으로 공격하고 고통을 안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대왕의 상처는 다 아물어도 중상모략의 상처 자국은 여전히 남는 법이니까.

 

 * * *

 

이 글의 시작에서 권유했듯이 지금 우리는 자기애와 자만심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촉구하는 바이네. 왜냐하면 이것들이 미리 앞질러 우리 자신에게 아첨하게 함으로써 실제로 외부로부터 오는 아첨꾼들에 대한 저항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네. 우리가 아첨꾼들을 받아들일 완전한 자세가 되어 있어서네.

 

그러나 만약 신에게 복종하는 가운데 '너 자신을 알라'는 교훈이 우리 작자에게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주의 깊에 우리 자신의 본성과 훈육, 그리고 교육을 되짚어, 자기애와 자만심이 정말 덕을 쌓는 데 갖가지 방법으로 얼마나 부족하게 되는지, 뿐만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도 경솔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데서 얼마나 맣은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성찰해 본다면, 아첨꾼들이 그렇게 쉽게 우리를 깔아뭉개려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런데 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던 자들을 불신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두가지였다고 말했네. 그 두 가지는 숙면을 취하는 것과 여인과 잠자리를 하고픈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었지. 사실상 그는 이런 일들에서 자신의 감추어진 정에 무른 면이 더 드러난다고 느꼈기 때문이네. 우리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만약 우리가 직무 소홀과 직무 수행 모든 면에서 많고 많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본다면 부끄럽고 슬퍼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을 것이네. 우리를 좋게 봐 주고 격찬하는 친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솔직하게 대하며, 진정 우리의 행동이 잘못될 때 꾸짖는 친구에게서 말이네. 친구에게 호의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솔직성을 보여주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은 자 가운데 정말 몇이 안 되는 극소수이기 때문에네. 그런데 극소수 가운데서도 이렇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네. 오히려 남이 잘못하거나 잘못한 것을 알아챘을 때 솔직하게 질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솔직함이란, 약효가 다른 의약품과 같아서, 적시에 써먹지 않으면 무익하고 고통과 혼란만 야기시키지. 그래서 사람들은 솔직함은 고통스러우나 아첨은 즐거움을 가져온다고 말하기도 하지. 사람들은 때가 아닌 때에 칭찬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때가 아닌 때에 책망을 받게 되면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네. 바로 이것이 친구들이 아첨꾼들에게 몰려가 그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는 특별한 이유네. 물이 너무 험준한 언덕들을 피해 편편한 골짜기를 찾아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

 

솔직함은 따라서 좋은 태도가 수반되어야 하네. 그리고 거기에 솔직함이 지나쳐서도 또 너무 강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있네. 이것은 빛의 노출도와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과도하게 노출되면 누구나, 매사에 결함을 찾아 매도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로 인해 곤란을 겪고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아첨꾼의 그늘로 도피하게 되지. 그래서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방향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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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 같은 독서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 * *

 

몽테뉴가 쓴 에세이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용문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는 보르도 시장과 고위 법관까지 지냈지만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일'을 훨씬 더 좋아했기 때문에, 불과 서른여덟 살에 '조기 은퇴'를 선택했다. 바쁜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몽테뉴 성'에 틀어박혀 지내며,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나 더 흥미로운 '책 속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던 셈이다.

 

그가 책을 통해 만났던 숱한 인물들과 작품들을 어떻게 일일이 나열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와 작품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좋아한 작가는 누가 뭐래도 플루타르코스였고, 그가 쓴 <영웅전>과 <윤리론집>은 그가 가장 즐겨 읽는 애독서였다.

 

나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먼저 읽은 뒤에 한참이나 있다가 뒤늦게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선집)과 <윤리론집>(선집)을 읽는 바람에, 그 두 인물이 책을 통해 서로 주고 받았던 영향을 이제서야 좀 더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실 몽테뉴가 쓴 <수상록>의 목차만 살펴보더라도 그가 플루타르코스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가령, <작은 카토에 대하여>, <키케로에 대한 고찰>, <카이사르의 말 한마다>,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하는 방법에 대하여> 등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영웅들'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을 따로 풀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아예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호>라는 에세이도 <수상록>에 포함시켰다. 물론 그 에세이는 세네카보다는 플루타르코스에 대해 훨씬 더 상세하고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내가 이 인물들에 대해서 품는 친밀감과, 그들이 내 노령기에 그리고 순수히 그들에게서 약탈해 온 재료로 엮어 내는 내 작품에게 주는 도움 때문에 , 나는 그들의 영광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호> 중에서

 

 

뒤늦게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선집)을 읽으면서 <몽테뉴 수상록>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묘한 일이다. 왜냐하면 <윤리론집>은 대략 1,900년 전의 저작이고, <몽테뉴 수상록>은 대략 400년 저작이기 때문이다. 1,500년이나 앞서 나온 책을 읽다가, 그 책 보다 1,500년 뒤에 나온 책 속의 여러 구절들을 떠올린다는 게 너무나 묘한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에 나오는 '이웃에게 불씨를 얻으러 간 이야기'를 읽다가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왔던 바로 그 똑같은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두 인용문을 비교해 보라. 나는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저 얘기가 여태까지도 몽테뉴가 최초로 지어낸 '독창적인 비유'인 줄로만 알았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 되고 우리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학식이 많아서 경험이 없이도 그렇게 위대한 장수가 되었던 루쿨루스는 우리들의 방식으로 지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너무 심하게 남의 팔에 매달려 다니다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마저 없애고 만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대비할 생각을 가지면? 나는 겨우 세네카의 사상에서 꺼내올 뿐이다. 내가 자신이나 또는 남을 위해서 위안의 말을 찾아보고 싶으면? 나는 그 말을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사람들이 나를 그 지식으로 단련시켜 주었던들,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찾아 가졌을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학식이 있음을 자랑함에 대하여> 중에서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서 불씨를 얻어 큰불을 지피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머무른다고 상상해 보게

 

지력(智力)은 병처럼 채울 필요가 없는 것이 오히려 목재와 같다고나 할까. 그것은 단지 나무에 불을 붙여 독립적으로 생각하도록 자극을 주고 진리를 참구하려는 열망을 창출하면 되는 것이기에 말이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서 불씨를 얻어 큰불을 지피고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며 머무른다고 상상해 보게. 그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강의를 듣고 이득을 얻으려고 왔는데, 그가 강의에서 그 자신과 그의 사고를 계발하기 위해 불씨를 지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강의 내용을 즐기며 황홀경에 빠져 앉아 있는 거나 같은 것이지. 말하자면 그는 강의 내용으로 그에게 전달된 의견의 형태로 밝고 벌겋게 달아오른 불을 얻지만, 그의 마음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곰팡냄새와 암흑을 뜨거운 철학의 열기로 없애거나 추방하지는 못하는 것이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중에서


 

이쯤 되면 네이버 검색창에서 '몽테뉴 플루타르코스'를 입력해서 뭔가를 더 찾아볼 생각을 억누르기 어렵다. 클릭하자 말자 금세 '책 본문 검색'이 눈 앞에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우연히 발견한『몽테뉴의 엣세』라는 책에서 내가 인용하고 싶은 대목은 다음 구절이다.

 

그의 독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역시 고대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그가 어려서부터 라틴어를 익혔고 모국어와도 같은 라틴어를 통해 고대와 친숙해졌었다는 것을 보아 왔지만 실로 라틴 세계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물론 그는 고대 사가들, 전기 작가들도 만났지만 더 많이 시인들, 철학자들과 교류했다. 그중에는 비르길리우스Virgile, 루크레시우스Lucrèce, 카툴루스Catulle, 호라티우스Horace, 루카누스Lucian가 있는가 하면 플라우투스Plaute, 테렌티우스Tèrence와 같은 극작가도 있다. 한때 그는 오비디우스Ovide에 심취했었지만 그 후에는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듯 시기적으로 독서의 경향이 바뀌기도 했는데, 가령 1571년에서 1572년에 걸쳐 세네카Sénèque에 열중했던 그는『루실리우스 서한Lettres a Lucilius』을 탐독했다. 또한 라틴어는 그에게 고대 그리스를 발견하게 했다. 이 무렵 그리스 작가들의 라틴어 번역이 속속 출간됨으로써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Diogenes Laerce, 크세노폰Xénophon, 플라톤Platon 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때를 같이하여 프랑스어 번역도 선보였다. 몽테뉴는 시실의 디오도로스Diodore de Sicile의 역사물, 특히 아미요Amyot에 의해 번역된(1572년) 플루타르코스Plutarque의 『영웅전Vies』과『윤리서 Oeuvres Morales』를 애독했다. 그는 아미요를 프랑스 작가 중 최고의 인물로 치켜세우면서, "만약 이 책이 우리를 수렁에서 일으켜 세우지 않았더라면 무식한 우리들은 영영 구제받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는 1578년경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론'이라는 제목의 장을 쓰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도 플루타르코스에 대한 그의 각별한 존경과 찬양의 마음은 『엣세』를 쓰는 동안 줄곧 변함이 없었다.

 

 -이환, 『몽테뉴의 엣세』(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고전총서 서양문학 22) 중에서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전체 작품들 가운데 고작 6편과 5편의 에세이만 골라 번역한 두 권의 책(천병희 번역 『수다에 관하여』와 허승일 번역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을 최근에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꼈던 건 '양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희비극 작품들을 쓴 시인들'의 위대성이다. 두 권의 『윤리론집』 번역본에 붙은 수많은 주석들은 거의 대부분 '호메로스' 아니면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에 대한 '원전 출처와 약간의 부연 설명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비롯한 수많은『대화편들』 또한 작품들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사정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소위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은 독특한 양면성을 지닌 듯하다. 알면 알수록 더욱 재미있지만, 모르면 모를수록 영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특별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도리어 책을 쉽게 읽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꼴이다.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8권 260∼546행 참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옮긴이 해제>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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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에 대하여...

 

(밑줄긋기)

 

젊은이는 시가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젊은이가 시에 입문할 때, 우리가 작시술이 모방술과 그림 그리기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것이라는 총체적 서술을 해 준다면, 그 젊은이는 더욱더 견실한 자세를 취하게 되겠지. 젊은이에게,

 

시는 말하는 그림, 그림은 말 없는 시 58

 

라고 흔히 인용되는 말을 숙지시킬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그림 속에서 도마뱀이나 원숭이 또는 테르시테스59의 얼굴을 볼 때,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사한 것으로서 즐기며 찬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그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네. 본질상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모방은 다르네. 모방은 천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관계없이 그 유사성만 나타낼 수 있다면 되네. 한편, 만약 추한 신체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내면, 이는 그 고유성과 개연성이 요구하는 것을 간과하게 되네. 어떤 화가들은 심지어 수치스런 행위를 묘사하기까지 하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있네. 티모마코스60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메데이아의 그림을, 테온61 자기 어머니를 죽이는 오레스테스의 그림을, 파라시오스62가 미치광이로 가장한 모습의 오뒷세우스의 그림을, 카이레파네스63는 유부녀의 남자와의 추잡한 성관계의 그림을 그렸네. 여기서 특별히 젊은이가 훈련받아야 할 점은 모방한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화제(畵題)가 정확하게 모방했는지 그 기술에 관한 것이네. 시 역시 흔히 천박한 행동, 사악한 경험과 등장인물을 모방적 암송으로 들려주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는 그 안에 있는 찬미의 대상이나 성공적 요소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더욱이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해서도 안 되네. 젊은이는 오직 등장인물들과 사물에 대해 적합하고 고유하게 그 유사성이 제대로 모방했는지 하는 그러한 것들을 칭찬해야 하겠지.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닻을 감아올리는 권양기의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 스치는 소리, 그리고 포효하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네. 그러나 파르메논64이 돼지 소리를 모방하고 테오도로스65가 권양기 소리를 모방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이런 소리를 그럴듯하게 모방한다면, 우리는 즐겁다네. 우리가 병들고 위궤양으로 몹시 아픈 사람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피하지만, 무대에서 슬퍼하거나 죽는 것으로 나타나는 아리스토폰66의 <필록테테스>와 실라니온67의 <이오카스테>를 보면 재미를 느끼게 되네. 익살꾼 테르시테스나 여인들을 유혹하는 시쉬포스, 포주 바트라코스, 이런 사람들의 언행을 읽을 때 젊은이는 이런 것들을 모방하는 기능과 기술을 권장하는 것은 몰라도 역시 그것이 모방하는 성향과 행동은 거부하고 비난하는 것을 배워야 하네. 그 이유는 아름다운 어떤 것을 모방하는 것과 어떤 것을 아름답게 모방하는 것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아름답게'의 의미는 '알맞게', 그리고 '고유하게'이고, 추한 것들은 추한 것에 '알맞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네.

 

주석

 

58.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 「아테나이인들은 전쟁의 업적으로 더 유명한가 아니면 학문 때문에 더 유명한가 」라는 에세이에서 이 언급을 시모니데스가 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시모니데스는 그림을 침묵하는 시로, 시를 말하는 그림으로 일컫는다. 왜냐하면 화가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역사로서 표현하고 있는 저 모든 행동은 과거와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가 색채와 형상으로 꾸미는 것을 시인은 단어와 문장으로 연관 짓는다. 오직 그들은 모방의 자료와 방법에서만 다를 뿐이다.

 

또 호라티우스의 언급도 읽어 보기 바란다.

 

시는 그림과도 같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절정감을 느낀다. 어떤 것은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평가의 형안(炯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장소에서 관람 되기를 원한다. 어떤 것은 한 번만 보아도 마음에 들지만 어떤 것은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마음에 든다.(호라티우스, 『시학』)

 

59. Thersites :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군인. 『일리아스』에서 그는 안짱다리와 절름발이, 안으로 움츠러든 어깨, 머리카락으로 덮인 머리 모양을 하고, 저속하고 추하며 위트라고는 별로 없는 위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 나의 생각 : 이 인물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에도 등장한다. '그리스 최고의 활솜씨'를 지녔던 필록테테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함을 타고 항해하던 중 그만 몹쓸 병에 걸리고 만다. 전우들에 의해 홀로 렘노스 섬에 버려진 채 살아가던 그에게 훗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가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트로이아 전쟁 소식'을 주고받는다. 필록테테스가 이런저런 소식을 묻자, 네옵톨레모스가 "그 분도 세상을 떴소이다. 간단히 말해, 전쟁은 나쁜 사람은 마지못해 잡아가고 쓸 만한 사람들은 대놓고 잡아가지요." 라고 대답한다. 바로 그 대목에서 필록테테스가 떠올린 인물이 바로 테르시테스였다. "맞는 말이오. 그래서 묻겠는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나 말솜씨만은 빈틈없이 교활한 그 사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요?"라고 되물었던 것이다. 아주 가끔씩은 이와 비슷한 인물이 현실 세계에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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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시테스 (그리스어: Θερσίτη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의 병사였다. 다른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이 왕이나 장군인데 비해 그는 계급이 낮은 평민으로 지독한 독설가이자 수다쟁이였다.

 

일리아스 제2권에서 호메로스는 이례적으로 테르테시스의 못생긴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일리오스에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생긴 자로
안짱다리에 한 쪽발을 절었고 두 어깨는 굽어
가슴쪽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깨 위에는 원뿔 모양의
머리가 얹혀 있었고 거기에 가는 머리털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일리아스, 제2권 216~219행.

 

그는 수다장이로 자신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여러 영웅들과 왕들을 조롱하였다. 그는 아킬레우스는 "겁쟁이"로 욕하고 오디세우스를 공공연히 비난했고 아가멤논에게도 "욕심쟁이"에다가 "계집애 같은 겁쟁이"라고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다 오디세우스가 황금의 지팡이로 때리자 테르시테스는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는 결국 자신의 조롱과 독설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투에 나서고 한 전투에서 트로이 진영을 도와 전쟁에 참여한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를 죽였다. 아킬레우스는 펜테실레이아의 투구를 벗겼는데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시체를 가져와서 겁탈했는데 이를 보고 테르시테스가 네크로필리아라며 조롱했다. 이에 화가 난 아킬레우스가 테르시테스를 죽여버렸다. 테르시테스는 권력에도 굴하지 않은 비평적 인물의 상징으로 많은 철학자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자주 거론된다.

 

(출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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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Timomachos of Byzantium : 헬레니즘 시대의 유명한 화가. 그의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자기 아이들을 죽이는 메데이아와 광기를 부리는 아이아스이다.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두 그림을 80탈란트의 거금을 주고 구매해 베누스 신전에 헌납했다고 한다.

 

61. Theon of Samos :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헬라스 화가. 오레스테스의 광기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62. Parrhasios of Ephesus : 고대 헬라스의 유명한 화가.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399년 전후에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기원전 400∼380년에 활약했던 제육시스 화가와의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잘 그려 새들을 속였는데, 그는 커튼을 잘 그려 제욱시스를 속였다고 한다. 그의 가장 정평 있는 그림은 거지로 분장한 오뒷세우스의 그림이다.

 

63. Chaerephanes of Euboea : 니코파네스로 더 알려져 있는 헬라스의 화가. 춘화도(春畵圖)로 유명했다.

 

64. Parmenon : 기원전 4세기의 희극배우로서 돼지의 성대모사가 유명했다. 그는 무대에서 가짜 돼지 새끼를 들고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어 반 시간 이상이나 청중을 웃겼다고 한다. 얼마나 잘했던지 시골 소년이 진짜 돼지 새끼를 가져와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게 했지만, 관중은 파르메논의 돼지 소리만 못하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65. Theodoros : 원래는 엘렉트라를 연기하는 비극배우였으나, 천부적인 성대모사의 기술을 발휘하여 사람뿐만 아니라 무생물의 시끄러운 소리도 잘 냈다고 한다. 특히 배의 닻을 감아올리거나 풀어 내리는 데 사용하는 장치인 권양기의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 <젊은이는 시가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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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작인『돈키호테』를 남긴 세르반테스는 죽기 며칠 전에 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내 목숨이 끝나 가고 있다. 내 맥박이 달려온 기록을 보면 아무리 늦어도 이번 일요일이면 끝날 것이고, 나는 나의 삶의 여정을 마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 일요일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616년 4월 23일 금요일, 마드리드 레온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의 일이다.

 

그가 죽은 날 셰익스피어도 함께 죽었다. 유네스코는 1995년부터 이 날을 '세계 책의 날'로 정했다고 한다. 올해 '책의 날'이 유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그 두 인물이 작고한지 꼭 400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역사'에서 400년은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지만, 두 거장들이 숨을 거둔지 400년씩이나 흘렀다고 생각하니, 문득 짧게 열렸다가 금세 닫히고 만 '작가의 유한한 삶'과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듯한 '작품의 무한한 생명'이 새삼 뚜렷이 대비되는 듯해서 그 느낌이 자못 새롭다.

 

이만 각설하고, 올해는 특별한 기념일이니만큼 무엇보다 <10문 10답>이라도 우선 성실하게 채우고 보자. '책의 날'이 하루 이틀 지났다고 해서 '책을 기념하는 일'마저 그렇게 빨리 서둘러 마감되었다고 여길 필요는 없을 테니...

 

 * * *

 

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언제가 좋냐구요? 우선 계절부터 말씀드리지요. 저는 아주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치는 날씨도 좋아하고, 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도 좋아합니다. 날씨에 따라서도 책을 읽는 기분이 조금씩은 다른데, 그저 맨숭맨숭한 날씨보다는 폭우가 엄청 쏟아질 때를 더 좋아하고, 폭설이 내릴 때도 좋아합니다. 그럴 때 책을 읽으면 정말 특별히 '묘한 쾌감'이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듯하거든요.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냐구요? 그 어떤 곳 보다도 저는 동네 도서관이 좋습니다. 저는 주말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습관적으로 동네 도서관으로 책을 읽으러 갑니다. 사실, 제가 최근 10여 년 동안 읽은 책들의 9할 이상은 동네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이지요. 저는 동네 도서관에 갈 때 우리 동네 교회와 성당 앞을 지나쳐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성당을 찾아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곤 할 때 저는 '동네 도서관'에서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특별히 선택해서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집을 나섭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만나왔던 고대의 인물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연이어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도 더러 있고, 어서 빨리 지금 만나는 작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 내가 미리 점찍어 둔 또다른 옛 인물을 서둘러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주 가끔씩은, 내가 만나러 가는 그 유명한 인물과 곧 마주치게 되리라는 설레임 때문에,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를 때조차 있답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파수꾼   귀가 아프신가요, 마음이 아프신가요?
        크레온   어찌하여 너는 내 아픈 곳을 따지려드는 게냐? 
        파수꾼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범인이고, 저는 귀를 아프게 할 뿐이지요. 

 - 소포클레스,《안티고네》316∼319행

 

이번 질문은 마치 제게는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고대 그리스 비극 가운데『안티고네』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저는 전자책은 그저 '제 눈을 아프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당연히 종이책을 좋아합니다.

 

읽으면서 메모를 할 때도 많습니다만, 저는 주로 밑줄을 자주 긋는 편입니다.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 가끔씩은 '밑줄을 그을 형편이 못 되는 상태로' 글을 읽을 때는 심리적으로 약간 불편할 때조차 있을 정도입니다. 밑줄을 긋기 위해 청색 '모나미 수성 플러스펜'을 몇 자루씩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12개 들이 한 다스를 매번 통째로 사는 편인데, 어떤 해에는 두세 다스를 살 때도 있답니다. 물론 독서노트에 메모할 때도 적잖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요만.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침대 머리 맡에는 책이 없습니다. 아주 가끔씩 침대 위에서 책을 읽다가 잘 때도 있지만, 이튿날 아침이면 읽던 책을 도로 내 책상 위로 가져가거나 책가방으로 서둘러 옮깁니다. 침대에서 책을 읽는 일은 제겐 몹시 드문 일입니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책장에 꽂는 책들은 제법 분류가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고전, 역사, 철학, 과학, 경제, 경영, 투자, 문학, 에세이, 자기계발, 독서, 여행, 취미 등등으로 나누어 배열해 둡니다. 새로 산 책들은 한 켠에 별다른 분류없이 임시로 쌓아둘 때도 있습니다. 자주 들춰보는 책들은 책상 위나 컴퓨터 책상 오른켠 책꽂이 등 손을 뻗으면 금세 닿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둡니다. 저는 책을 구입할 때 몹시 신중을 기하는 편이라 일부러 책을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쓸 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읽을 가능성이 없는 책들은 가끔씩 한꺼번에 와장창 내다버릴 때도 있습니다. 읽지도 않을 책들 때문에 읽고 싶은 책들을 찾는 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은 저로서는 몹시 견디기 힘든 일이니까요.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땐 모험소설을 아주 좋아했더랬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 읍내 '군립도서관'까지는 편도로 시오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지만, 방학때 책을 빌리러 갈 때나, 책을 빌려서 집으로 되돌아 오는 길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걸리버 여행기』,『십오소년 표류기』, 『보물섬』,『80일간의 세계일주』,『톰 소여의 모험』,『셜록 홈즈 시리즈』등등을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적 '모험 소설'을 즐겨 읽던 그때가 가끔씩 떠오르는데, 그런 작품들은 아마도『노인과 바다』,『모비딕』,『돈키호테』,『파리대왕』, 『인듀어런스』, 고대 그리스 신화 가운데『아르고호 원정대 이야기』, 고전 작품들 가운데『오이디푸스 왕』, 『필록테테스』,『오뒷세이아』등을 읽을 때였지 싶습니다.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웬만큼 특별한 책이 아니고서는 '책을 보고 놀랄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네요. 그래서 선뜻 내세울 책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네요. 어릴 때 동네 훈장어르신 한테서 무릎을 꿇고 배웠던 '문종이에 붓으로 직접 쓴 천자문'이 혹시라도 여태까지 남아있었더라면, 그 책이 여러 사람들을 꽤나 놀라게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을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10가지 질문 가운데 제게 가장 구미가 당기는 게 바로 이 질문이었다고 해도 결코 빈말이 아닐 겁니다. 꽤나 오랫동안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자주 떠올렸더랬습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흥분될까요? 그를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저는 그냥 아무 말없이 그저 '월든 호숫가'를 그와 함께 거닐어 보고 싶습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보트를 함께 타고 '콩코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낚시도 함께 하고 야영도 함께 하고 싶고요.(제 서재 대문에 내걸어둔 '글귀' 또한 소로우의 책에서 옮겨놓은 말입니다.)

 

재치있는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도 만나고 싶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가 수상록을 통해 보여줬던 해박한 지식과 해학이 넘치는 말솜씨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많은 책 속에 박혀 있던 주옥같은 대목들을 그토록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아는 그와 같은 인물과 함께라면,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내더라도 도무지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와 베르그송의 책을 한창 열심히 읽을 땐 '그들을 만나러' 도서관으로 가는 발걸음이 흥분될 때조차 있었는데, 막상 그 철학자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네요.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어서 저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도저히 만나 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만나고 싶은 작가가 셀 수도 없이 여럿 남아 있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더 꼽아보라면 저는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를 빼놓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토록 '심오한 웃음'을 우리 앞에 내보였던 작가의 '실제 웃는 모습'은 과연 얼마나 심오할 수 있을지, 저는 그게 너무나도 궁금하니까 말입니다.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그런 책들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셀 수조차 없습니다만, 당장에 떠오르는 책들이라도 주르륵 마구 나열해 보고 싶네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플루타르코스의『영웅전』, 에드워드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 박경리의『토지』정도는 여기에 꼭 남겨놓아야 옳지 싶습니다. 여러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도 여태 못 읽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플라톤의 『대화편』가운데서 빠트린 작품들도 숱하게 남아 있군요.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저는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별로 많지는 않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왜냐하면 저는 책을 읽기 전부터 매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게 꼭 던지거든요. '내가 정말 간절히, 지금 바로, 이 책을 읽기를 원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 질문과 대답 끝에, 단단한 결심을 앞세우며 읽기 시작한 책들은 웬만해서는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놓을 일이 별로 없더군요. 그래도 가끔씩은 책의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갈 때도 있답니다. 그 책을 붙잡기 전에 내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 스스로 어느새 살짝 비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지요. '지금 당장 이 책을 계속 읽기 보다는 조금 나중에 다시 읽는 게 훨씬 더 낫겠어...' 라고 말하면서 슬쩍 그 책을 내려놓은 기억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최근에 붙잡았던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니체의 탁월한 작품들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안티 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등에 비해서는 뭔가 약간은 '맥이 빠지는 듯한 기분'을 그 작품을 읽으며 살짝 느꼈기 때문이었지요. 잠시 니체로부터 얼마쯤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그가 다시 절박하게 그리워질 때, 그 때 다시 읽기 위해서라도 니체의 그 작품은 좀 남겨뒀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일 뿐이겠지만, 제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다른 어누 누구도 말릴 사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

 

이 질문은 다른 책에서도 이미 만났던 질문 같군요. 오래 전에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미리 그 책 속에 적어뒀는지 어떤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말이지요. (퇴근한 후에) 뒤늦게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책 속에 별도로 적어 놓은 뚜렷한 대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밑줄과 별표만 잔뜩 표시해 두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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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천 권 안 되는 그런 책들 가운데, 아무리 훌륭하게 읽었다 해도 다시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뭔가를 주는 책들이 있다. 아마 100권도 채 안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책을 알아낼 수 있을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지만, 최상의 능력을 발휘해서 그 책을 모두 분석하며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도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드는 책이 있다. 놓치고 지나간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즉시 그 책을 다시 읽어보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마침내 다시 꺼내 들고, 거기서 또 다른 놀라움을 맛보는 그런 책을 말한다. …… 가장 훌륭한 책으로 분류되는, 극소수의 책들은 다시 펼쳐 들었을 때 "그 책도 독자와 함께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처음 읽듯,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전에 읽고 이해한 내용이 모두 무효화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에도 진실했던 내용은 지금도 진실하다. 다만 다른 면에 있어서도 진실해진 것이다.

 

책이 어떻게 독자와 함께 성장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한번 씌어지고 출판되면 끝이다. 하지만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은 책이 독자보다 한 수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한 수 위일 수 있다. 정말 위대한 책이기 때문에 여러 수준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전보다 이해력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책이 정말 독자를 끌어올린 것이다. 좀더 지혜로워졌고 좀더 아는 게 많아졌다 해도, 여전히 더 이끌어줄 수 있다. 죽을 때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이런 책은 분명 많지 않다. 100권도 채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독자에 따라 더 적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가지고 있는 정신의 능력외에도 다른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즉, 각자 취향이 다르다. 어떤 사람 마음에 드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책이 확실히 위대하다고 단정지으며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가치를 지닌 몇 권도 채 안 되는 책을 독자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책 읽기와 인생에 대해 가장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책, 읽고 또 읽고 싶은 책, 당신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을.

 

어떤 책이 이런 책인지 알아내는 오래된 문제가 하나 있다. 남은 여생을 무인도에서 살게 되어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중 10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그 목록을 정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인데,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던 즐거움과 정보, 이해를 주는 원천이 단절된다면, 그 인생은 어떨지 상상해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일이다. 라디오도, 텔레비젼도, 도서관도 없는 섬에 달랑 단 10권의 책만 있다면?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비현실적일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조금씩은 무인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부딪힐 일과 비슷한 일, 훌륭한 인생을 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일에 도전 받으며 살고 있다.

 

 - 모티머 에들러,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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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이런 예상 질문'에 대해 미리 마음 속으로 조금씩 생각해 둔 책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무인도이니만큼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담긴 작품은 꼭 있어야겠지요. 더군다나 언젠가는 기필코 이뤄내야 할 '귀향'에 대한 열망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맨 첫 번째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고르고 싶습니다. 그 다음엔 비슷한 책이긴 하지만 여태 읽어보지 못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두 번째로 고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무인도에서 읽기에 더할 나위없이 어울릴 만한 '엄청나게 기나긴 소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꼭 챙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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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4-26 00:40   댓글달기 | URL
완전 좋아합니다 :-)

oren 2016-04-26 13:41   URL
초딩 님께서 분에 넘치도록 좋아해 주시니 글을 쓴 보람을 느낍니다. ㅎㅎ
(대충 마음 속으로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갈까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초딩 2016-04-26 13:42   URL
ㅎㅎㅎ 북플 포스트를 최초로 메일 공유해서 링크 저장해뒀습니다 :-)

oren 2016-04-26 14:00   URL
그런 기능도 다 있군요. 초딩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hnine 2016-04-26 07:20   댓글달기 | URL
책의 날 유래를 oren님 덕분에 알았습니다.
이 문항에 답을 적으면서도 왜 그걸 알아볼 생각을 못했을까요.
열개의 식상한 문항에, 전혀 식상하지 않은, 멋진 답변을 쓰셨어요!

oren 2016-04-26 20:59   URL
안영옥 교수님이 번역한 『돈키호테』의 맨 끝에 붙은 `번역 후기`를 읽어 보니, 스페인에서는 `돈키호테`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23일에는 `소설 <돈키호테>를 24시간 동안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 이어가면서 읽는 행사`가 있다고 하더군요. `세계 책의 날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를 만날 수밖에 없는 셈이지요.

* * *
스페인에는 『돈키호테』읽기 행사가 있다. 책의 날인 4월 23일부터 만 하루, 총 스물네 시간을 쉬지 않고 누구나 교대로 읽을 수 있는 대국민 참여 행사이다. 또한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 마을 구석구석에도 『돈키호테』에 나오는 구절들을 새겨 놓은 타일들이 담에 붙어 있어서, 단순히 미관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문화 수준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스페인 사람이면 『돈키호테』를 모두 다 읽었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구어체 표현이나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어휘들, 역사, 문화적 배경이 포함된 이야기들을 다짜고짜 그들에게 묻고 다녔던 건 그런 믿음이 있어서였다. 마드리드 대학 스승에게나 책방 주인에게, 라만차 거리에 있던 아낙네에게, 연로하신 스페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하던 내 모습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돈키호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 안영옥, 『돈키호테』, <번역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