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거기에 자기의 행복과 위대함과 슬픔과 굴욕을 예상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축도. 전 인류의 생활의 축도. 「전쟁과 평화」는 참으로 그러한 명작이다.”

 - N. N. 스뜨라호프(1828∼1895)

 

 * * *

 

(동서문화사 판『전쟁과 평화』는 1권 834쪽, 2권까지 포함하면 1,724쪽에 달한다.『전쟁의 역사』는 1,038쪽.)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어떻게 몽테뉴에게 접근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그 책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어쩌면 톨스토이에게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도 이 말이 제법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톨스토이가 쓴 작품들 가운데 특히『전쟁과 평화』에 '어떻게' 접근할지 몰라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라면 더욱더.

 

내가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은 다 마다하고 『전쟁과 평화』부터 대뜸 붙잡고 읽기 시작한 건 최근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은 덕분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전쟁과 평화』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두 작품 모두 여간해서는 완독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방대한 분량 때문에라도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유사한 공통점을 빼고는 말이다. 아무튼 나는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작품을 훌쩍 뛰어넘고 나니 웬만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차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괜한 걱정'으로부터 거의 해방된 느낌을 일순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험준한 고산준봉을 정복하고 난 뒤에 슬며시 찾아오는 까닭모를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좋은 책은 열심히 읽으면 그 대가가 있다. 가장 좋은 책이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다. 책으로부터 받는 것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 어렵고 좋은 책을 붙잡고 씨름한 대가로 책을 읽는 기술을 향상시켜준다. 둘째, 좋은 책은 이 세상과 독자 자신에 대해 가르쳐준다. 이것이 훨씬 중요한 대가일 것이다. 인생을 배우는 것, 즉,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만 제공해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더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하고 위대한 진리를 보다 깊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360쪽)

 - 모티머 J. 애들러,『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中에서

 

『전쟁과 평화』는 그동안 언젠가 한 번은 꼭 읽어봐야지 하는 막연한 느낌만 가져 봤을 뿐 좀처럼 이 책을 읽을 계기를 찾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도록 강력하게 부추기는 직접적인 계기는 거의 없었을지 몰라도, 막연한 계기조차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톨스토이'를 발견했던 일, 『평생독서계획』에 담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매혹적인 소개글을 만난 일,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에 담긴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속 문장들을 둘러싼 이야기 등이 이 작품에 다가서는 희미한 계기들이었다면, 몇 년 전 어느 날(아마도 틀림없이 '재활용'이 있었던 날이었으리라) 아내가 동네 아파트에서 주워 온 묵직한 '세계문학전집' 판『전쟁과 평화』는 이 작품에 실제적으로 다가서는 '시각적 자극'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강력한 것이어서 마침내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었던 듯하다.

 

('아내가 주워 온 책들'의 외관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노인처럼 비록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저 유명한 작품들을 굳이 '까마득한 옛날 버전'으로 읽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가끔씩 저 책의 '앞부분'에 담겨 있는 '그림들'을 살펴보는 재미만큼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아내가 주워온 책에서도 재삼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저 위대한 작품들이 대개 그저 '장식용'으로만 소비된다는 게 너무 아쉽다. 저들 가운데 그나마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그 얼마나 심오하고 위대한 예술품이던가 말이다. 가령 호메로스, 신곡, 돈키호테, 파우스트,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등만 놓고 보더라도...)

 

 

그런데 톨스토이는 왜 하필이면 '전쟁과 평화'라는 거대담론과도 같은 제재를 '소설 형식'에 담아내려고 했을까? '전쟁과 평화'는 오히려 역사가나 군인 또는 철학자들에게나 훨씬 더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어쩌면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나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형식에 훨씬 더 적합한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 미리 작품 해설을 꼼꼼이 살펴본 바로도 그렇고, 또 소설 속으로 직접 들어간 이후로도 나의 예상이 그리 틀렸던 건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인『전쟁과 평화』는 결코 그저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역사상으로 실제 벌어졌던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거대한 전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와도 닮은 데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결정적인 증거들은 이 책 속에 담긴 '전투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1805년의 '제1차 나폴레옹 전쟁'은 총 4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 내용 가운데 제1편 주요 배경이다. '울름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뮌헨을 거쳐 빈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쉔부른 궁전에 머물고, 오스트리아 황제는 황급히 빈을 떠나 브륀으로 천궁한다. 보헤미아 지방의 유서깊은 도시 브륀은 마침 밀란 쿤데라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농담』의 주무대이기도 하다.(남자 주인공 루드비크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루치에를 무려 15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는 곳이다) 어쨌든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하고, 안드레이는 이 전투에서 '전사자'로 분류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끝에 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이른바 '삼제회전(三帝會戰, Battle of the Three Emperors)'으로도 불리는데, 프랑스에 대항해 동맹을 맺은 러시아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가 이 전쟁터에 동시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파리에 '개선문'을 세워 자신의 마음 속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카이사르를 그대로 따랐다. 아우스터리츠는 브륀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금의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 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나폴레옹'이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당대 유럽의 지도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좌우할 만큼 막강한 위세를 떨치며 생생하게 우리의 눈 앞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전쟁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위대한 문학 작품의 반열에 올랐을까?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막연하게나마 이런 엉뚱한 의문을 늘 마음 한켠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런 막연한 억측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판 일리아스'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마치 놀랍도록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대건축물 앞에 섰을 때 받게 되는 압도감을 느낄 정도였다. 무려 500명이 훨씬 넘는 숱한 인물들이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들에 대한 묘사와 서사 자체도 놀랍지만, 작가 스스로 온갖 인물들과 사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가다듬어 길게 서술해 놓은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 등이 여기에 한데 녹아 있어, 일찍이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파노라마의 장관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데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35세에 '나폴레옹 전쟁 시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869년 41세 때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대전쟁'을 아주 깊이 연구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자세히 탐구함으로써 '자신이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을 이 작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으리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혁명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전 유럽을 정복하기로 마음 먹은 보나파르트와, 그에 맞서 자신들의 '국가의 명예'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의 많은 국가의 황제들과 군사령관들과 외교관들과 민중들이 벌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벌어진 전쟁인지, 그토록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간 숱한 인물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했는지, 그러한 '행위들'은 심지어 우연이었는지 혹은 필연이었는지를 아주 진지하게 탐색해 보는 일이야말로 톨스토이가 진정으로 이 소설을 쓴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토록 지난하면서도(제1부를 완성하는데 6년이나 걸렸고, 아내는 창작에 몰두하는 남편을 위하여 일곱 번이나 원고를 정서하였다.) 진지한 성찰들을 거친 끝에 마침내 방대한 전쟁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며 '위대한 문학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집필하는 톨스토이_레닌그라드 러시아 미술관 소장. 이 그림 역시 주워 온 '학원세계문학전집' 앞부분에 담겨 있다.)

 

 

작품은 그저 단순한 역사소설에만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아무리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비켜나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기 마련이었고, 사실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숱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매번 태어나고 또 죽기 마련인 법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이야기 말고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대저택에서 생활하는 당대의 명문 귀족 집안 사람들이 소설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면서, 그들의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 좌절과 괴로움과 불행, 사랑과 배신, 소박과 탐욕을 놀랍도록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만이 아니라 가정소설 혹은 연애소설이나 심지어 성장소설처럼 읽히게 만든다. 전쟁의 와중에도 수시로 대저택에서 열리는 숱한 무도회와 파티와 만찬 테이블 주위에서 보고 듣는 화려한 무곡을 곁들인 왈츠와 떠들썩한 대화와 몸짓들을 통해 우리는 당대 러시아 귀족들의 온갖 허영과 위선과 허위에 찬 모습까지도 더없이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로스또프 백작 집안'의 '눈이 부시도록 맑게 빛나는 한 때'를 담은 그림. 톨스토이가 소설 속에서 이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생생해서 책을 읽으면서 절로 '한 폭의 그림'을 떠올렸었는데, 뒤늦게 주워 온 '세계문학전집' 속 『전쟁과 평화』에 마침 이토록 환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겨우 열두엇 남짓한 나따샤와 그의 어릴 적 남자 친구인 보리스, 꼬마 남동생인 뻬쨔, 사촌자매인 쏘냐와 그의 남자 친구이자 나따샤의 친오빠인 니꼴라이의 1805년 무렵의 그저 순수하고도 천진난만하기만 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들 앞에 놓인 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어디론가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로스또프 가문의 둘째 딸 나따샤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다. 그녀 곁에는 사촌자매인 쏘냐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언제나 단짝으로 더불어 지낸다.)

 

 

(사진 옆에 붙은 설명은 '파스테르나크의 그림'이다. 아마도 톨스토이의 『부활』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를 말하는 듯싶다.『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화가 파스테르나크의 장남이다.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엘렌'은 바씰리 공작의 딸이자, 약혼한 나따샤를 파혼에 이르도록 유혹한 아나똘리와 남매지간이다. 정략결혼을 한 삐에르와 엘렌은 서로 별거하다시피 지낸다.)

 

전쟁이 터지면서 숱한 젊은이들이 집안의 권유나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으로 고국을 떠나 '머나먼 전선'으로 바삐 이동하고  각자 낯선 군부대에 배치된다. 그들은 마침내 난생 처음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적병과 맞닥뜨리고, 각자 자신의 열망에 부응할 정도의 영웅적인 공을 세우거나 혹은 어리석은 만용 때문에 큰 부상을 당해 쓰러진다. 전쟁터의 실전 상황은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전투' 경험이 더해져 놀랍도록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젊은 장교들은 틈나는 대로 휴가 명령를 받아 그리운 가족들이 살고 있는 빼쩨르부르그 혹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잠시나마 '안온한 일상의 행복'으로 더러 복귀한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서로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어릴 적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쑥쓰러워하면서도 어느새 '예전에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랑의 감정에 일순 휩싸이고 번민하고 남모를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또다시 긴 이별과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그 가운데 갓 결혼한 안드레이 공작의 '군입대 장면'과 니꼴라이의 '첫 휴가 장면'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도 감동적이어서 그 장면을 읽노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자신의 '입영 전야'와 '첫 번째 휴가'를 떠올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이미 군대에 보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나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자식을 군에 들여보내던 그 때 그 가슴이 아리도록 먹먹한 이별의 순간들과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을 맞이하던 가슴 벅찬 재회의 순간들을 잠시나마 넋을 잃고 한참이나 회상할 지도 모르겠다.(『전쟁과 평화』가 유례없이 방대한 규모와 웅장한 스케일 때문에 곧잘 현대판 『일리아스』에 비견되곤 하는데,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아들을 궁녀들 틈에 숨겼던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나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놀라운 '병역기피 꼼수'를 부리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함께 떠올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두 작품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시공간적 간극 때문에 그 작품들이 다루는 전쟁의 원인이나 전개 양상이 서로 너무나 다르다고 미리부터 충분히 수긍하고 보더라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는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절대적인 영웅 숭배'인데 비해 톨스토이의 작품이 '민중의 힘'을 지극히 긍정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서로 완전히 정반대이다.)

 

'전쟁'과 '평화'를 사이에 두고 광할한 시공간적 배경 위에 벌어지는 온갖 인물들에 대한 놀랍도록 섬세한 심리 묘사와 온갖 연령대와 인물들, 온갖 서로 다른 지위와 재산과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 유전'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절로 톨스토이가 평생토록 고민했던 문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만큼 충분히 많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배치해 놓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 속으로 아주 수월하게 파고 들어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과 생각들을 마치 우리 눈앞에 금방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듯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한 섬세한 묘사 능력들이 바로 이 걸작을 자주 '영화화'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재삼 말할 필요가 없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가장 놀랐던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점이었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이토록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과 내면의 심리를 어쩌면 그토록 잘 그려내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전쟁과 평화』가 지닌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가 무려 559명에 달한다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이 작품 속엔 온갖 다양한 인물들이 얼키고 설켜 있다. 물론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이름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대함에 너무 곤혹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신기하게도 이 인물들은 '느린 호흡으로' 이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자연스레 그들의 용모와 성격을 보다 뚜렷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명문 귀족가문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이 점은 흔히『까라마조프 형제들』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가령『까라마조프 형제들』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라는 인물은 온갖 비열함과 추악함과 어두움을 상징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삐에르 베주호프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농노가 딸린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갑부이긴 하지만 선량함과 박애주의와 진리탐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귀족 중심의 인물 구성은 작가인 톨스토이 스스로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명문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데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이 소설을 집필한 배경 자체가 1825년에 일어났던 (명문 귀족가문 출신 젊은이들이 주도한)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근본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의도에 있었다는 점과, 그 탐구 노력이 결국은 거기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까지 닿았고, 결국 그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 가운데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아무래도 귀족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도 당연했다.

 

 

(그림 위_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저택 일부.  그림 아래_톨스토이 집의 깨끗하고 밝은 객실.)

 

 

평생에 한 번 읽기도 벅찬 이 거대한 스토리를 '세 번씩이나' 읽은 어느 독자가 칭찬한 이 소설의 세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포괄성이고 둘째, 자연스러움이며 셋째, 무시간성이다." 그 독자가 세 번째로 다시 읽고서 느낀 이 소설의 미덕은 "톨스토이는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말대로, 인생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이 『전쟁과 평화』의 주제이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좀 괴상하고 시대가 좀 멀어서 그렇지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얘기에 다름아닌 만큼, 누구라도 제대로 붙잡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당장에 너무 빨리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언젠가 적당한 계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서 아주 적당한 시간들이 찾아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유해 본다. 그저 장식용으로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탁월한 예술작품이기에.

 

 

접힌 부분 펼치기 ▼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몽고메리 장군(1887∼1976) 이 쓴『전쟁의 역사』에는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유명한 전투'들이 총망라되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톨스토이가『전쟁과 평화』에서 다뤘던 '나폴레옹 전쟁'에 관련된 몇몇 대목들만 적당히 골라 담아봤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유럽 곳곳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 병력 배치도. 이 책에 서술된 내용과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속 묘사 내용이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가령 전투 당일의 날씨라든가,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야릇한 사건-우연히 밀짚에 불이 붙었는데,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으로 생각한 프랑스 병사들이 더 큰 불을 놓았고, 이 불길이 맹렬하게 불타오르자 감정에 북받친 3만 병사들이 맹렬히 나폴레옹의 이름을 연호한 일-까지도 '너무나 똑같이'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전쟁의 역사』 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한 그림. 오스트리아군 수석 참모인 바이로더는 잘못된 '작전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역사적인 대참패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전쟁의 역사』앞부분에 담긴 컬러판 '보로디노 전투'. 나폴레옹 군대에서 수훈을 세운 장군이자 화가인 르죈의 작품.)

 

펼친 부분 접기 ▲

 

 * * *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밑줄긋기_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from Value Investing 2016-10-10 20:1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펼쳐 든지도 시간이 꽤나 흘렀다. 내가 읽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의 경우,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724쪽에 이르는데 이제 고작 백여 쪽만 남겨두고 있으니 이번 대장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다. 그런데 마침 오늘 문학동네 판 『전쟁과 평화』가 박형규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으로 드디어(?) 나온 모양이다.(그래서 짤막한 글이라도 하나 쓰고 싶어 이러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판본인 1993년에 나온 '학
 
 
붉은돼지 2016-10-0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대하소설이군요 저도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았다 합니다 ㅋ
그런데 이 전쟁과 평화는 왜 민음사, 문동이나 열린책들 혹은 펭귄 세계문학전집 목록에는 없는지 전에도 궁금해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oren 2016-10-02 00:09   좋아요 0 | URL
정말 대하소설이라는 말에 썩 잘 어울리는 소설이지요. ˝지금까지 씌어진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이라는 평가도 자주 받는 작품이구요. 너무 길다는 게 단점이면서도 정말 장점인 그런 소설인 듯해요. 격류처럼 요동치는 세월 속에서 온갖 등장 인물들이 저마다 성장하고 변모하고 혹은 늙어가면서 제각각 `나이에 따라 변해 가는 선명한 특징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걸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높다란 언덕 위에 서서 유유히 굽이치며 흐르는 대하(大河)를 바라보며 `지난 세월에 내가 겪고 보았던 온갖 사건과 인물들`을 길게 회상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게 되는 듯한, 그런 느낌도 갖게 되더라구요. 유명한 작품 치고는 번역본이 별로 많지 않은 게 좀 이상하긴 하더군요. 앞으로 좋은 판본들이 차츰 새로 나오겠지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영국이 설마 EU에서 '진짜로' 탈퇴하리라고까지 예상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충격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난 듯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이면서 하루 사이에 2,440조원이 증발했다"고 한다. 저 천문학적인 숫자 하나만 보더라도, '영국인들'이 이번에 정말 큰 일을 저지르긴 저지른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나서 오늘 낮에 우연히 '니체의 책'을 펼쳤더니 그 속에는 마치 '오늘날'을 예견한 듯한 글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과연 니체의 예견은 정확했다!  그는『선악의 저편』이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1886년 질스마리아에서 쓴 한 편지에서 '미리' 말했던 것이다!

 

 

 * * *

 

조국애나 애향심의 그와 같은 격세유전적인 발작

 

우리보다 더욱 둔중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우리의 경우에 몇 시간에 한정되어 몇 시간 안에 끝내게 될 일을 그들이 소화해내고 '신진대사'를 하는 속도와 힘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반 년 만에, 어떤 사람은 반평생에 걸쳐 훨씬 긴 시간을 들임으로써 비로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조국애나 애향심의 그와 같은 격세유전적인 발작을 극복하고 다시 이성으로, 말하자면 '선한 유럽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급속히 변해가는 우리의 유럽에서도 반세기 정도가 필요할지 모르는 우둔하고 머뭇거리는 인종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1절

 

 * * *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은 모차르트에 의해 다 노래로 불리었다 : ㅡ 그의 로코코풍은 아직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의 '훌륭한 사교'와 그의 부드러운 열광이, 중국적인 것이나 당초무늬 장식에 대한 그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중함이, 우아한 것, 사랑스러운 것, 춤추는 것, 눈물 어릴 정도의 황홀한 것을 향한 그의 갈망이, 남국적인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무엇에 아직은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아, 언젠가는 이러한 것도 사라지게 되리라! ㅡ 그러나 베토벤에 대한 이해와 감상이 더 빨리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실로 양식의 변화와 양식 파손의 여운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처럼 수세기에 걸친 위대한 유럽적 취미의 여운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끊임없이 부서지는 흐늘흐늘해진 옛 영혼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미래의 너무 젊은 영혼 사이의 중간 사건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영원히 상실해가는 것과 영원히 무절제한 희망 사이의 희미한 빛이 비추고 있다. ㅡ 루소와 더불어 꿈꾸고 혁명이라는 자유의 나무 주위에서 춤추고 마침내 나폴레옹을 거의 떠받들다시피 되었을 때, 유럽을 흠뻑 적셨던 빛이 이와 똑같았다. 그러나 이제 바로 이러한 감정은 얼마나 빨리 퇴색되어가고, 오늘날 이러한 감정에 대해 아는 것마저 이미 얼마나 어렵게 되었는가, ㅡ 저 루소, 실러F.Schiller, 셸리Shelley, 바이런Byron의 언어가 우리의 귀에는 얼마나 생소하게 들리는가, 베토벤에게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유럽의 똑같은 운명이 이들 모두에게서 함께 언어의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5절

 

 * * *

 

영국인들이란 

 

영국인들이란 ㅡ 철학적 종족이 아니다 : 베이컨F.Bacon은 철학적 정신 일반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며, 홉스Th.Hobbes, 흄D.Hume, 로크J.Locke는 한 세기 이상이나 '철학자'라는 개념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가치를 약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흄에 반항하여 일어나 스스로 높아졌다. 로크는 셸링이 "나는 로크를 경멸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영국의 기계론적 세계의 우매화와 투쟁하는 가운데 헤겔과 쇼펜하우어는 (괴테와 더불어) 한마음이 되었고, 철학에서 이 두 적대적인 천재 형제들은 서로 독일 정신의 대립적인 양극을 추구했고, 오직 형제들만이 서로 잘못하듯이, 이때 서로 잘못했던 것이다. ㅡ 영국에 결여되어 있고 언제나 결여되어 있었던 것을 저 반 정도는 배우이자 충분히 훌륭한 수사가이며 멍청하며 정신이 혼란한 사람 칼라일Carlyle은 알고 있었다. 칼라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즉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을, ㅡ 정신의 본래적 과 정신적 통찰의 본래적 깊이를, 간단히 말해 철학을 ㅡ 정열적인 찌푸린 얼굴 아래 숨기고자 했다. ㅡ 굳게 기독교에 매달린다는 것은 이렇나 비철학적 민족의 특징이다. 그들에게는 '도덕화'하고 인간화하기 위한 기독교적 훈육이 필요하다. 독일인보다 더 음울하고 관능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잔인한 영국인은 ㅡ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 민족 가운데 더 저속하고, 또한 독일인보다 더 경건하다 : 영국인에게는 여전히 기독교가 더욱 필요하다. 좀 더 예민한 콧구멍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영국의 기독교 자체에도 변덕과 술로 인한 방탕이라는 실로 영국적인 냄새가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는데, 기독교를 그러한 것에 대한 치유제로 사용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ㅡ 즉 조야한 독에는 정교한 독이 사용된다 : 좀더 정교하게 독에 중독된다는 것은 실로 우둔한 민족에게는 이미 진보요, 정신화되기 위한 한 단계이다. 영국인의 우둔함과 농부 같은 진지함은 기독교적인 몸짓 언어이나 기도와 찬송으로 여전히 가장 잘 견딜 수 있게 위장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석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전에는 감리교의 지배 아래 그리고 요즘에는 다시 '구세군'으로 도덕적으로 투덜댈 줄 아는 저 동물 같은 술꾼과 방탕한 자들에게 실로 참회의 떨림은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비교적 최고의 '인간애'의 성과일 수 있다 : 이 정도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가장 인도주의적인 영국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이것은 비유로 (또한 비유 없이 ㅡ ) 말하자면, 음악이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 영국인은 정신과 몸의 움직임에 박자나 춤이 전혀 없으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박자와 춤에 대한, '음악'에 대한 욕구를 가진 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가장 아름다운 영국 여성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아라 ㅡ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비둘기와 백조는 없다. ㅡ 마지막으로 그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보라! 그러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단 말인가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2절

 

 * * *

 

그들의 다양하고 격정적인 예술을 통해 열망하는 것이 유럽, 바로 이 하나의 유럽인 것

 

민족주의의 망상이 유럽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가져다주었고 아직도 가져다주고 있는 병적인 소외 탓에,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망상에 힘입어 기운차고,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상호 분리 정책이 필연적으로 과도기적 정책밖에 될 수 없음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근시안적이고 성급한 정치가들 탓에, ㅡ 오늘날에는 말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모든 수많은 것 탓에, 이제 유럽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가장 명백한 징조들이 간과되거나 제멋대로 기만적으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이 세기의 좀더 깊이 있고 생각이 넓은 모든 인간의 경우에는, 이 새로운 종합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시험삼아 미래의 유럽인들을 앞당겨 생각해보는 것은 그들의 영혼의 신비적인 작업에 깃들인 본래의 전체 방향이었다 : 그들이 '조국'에 속했던 것은 그들이 전면에 있었을 때, 약해졌을 때, 노령에 있었을 때이다. ㅡ '애국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휴식을 취했던 것에 불과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폴레옹, 괴테, 베토벤, 스탕달, 하인리히 하이네, 쇼펜하우어 같은 인간들이다 : 내가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를 그들 가운데 포함시킨다고 해도 나에게 화내지 말기 바란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해에 유혹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ㅡ 그와 같은 유의 천재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오늘날 프랑스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반항하고 저항할 때 생겨나는 품위 없는 소란에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대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서로 내면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이 양자는 그 요구의 높이와 깊이 모두에서 유사하며 근본이 유사하다 : 그들의 다양하고 격정적인 예술을 통해 그 영혼이 밖으로 위로 치닫고 이를 열망하는 것이 유럽, 바로 이 하나의 유럽인 것이다. ㅡ 그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새로운 광명을 향하고 있는가? 새로운 태양을 열망하는가? 그러나 새로운 언어 수단을 가진 이 모든 장인이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누가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확실한 사실은 같은 질풍노도가 그들을 괴롭혔다는 것이고, 이 최후의 위대한 탐구자들인 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탐구했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는 눈과 귀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ㅡ 세계 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는 최초의 예술가들이며 ㅡ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 작가이자 시인이고, 예술과 감각의 매개자이자 교배자이기조차 했다. (바그너는 음악가로서는 화가에 속하며, 시인으로서는 음악가에, 예술가 일반으로서는 배우에 속한다.) 이들 모두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표현의 광신자들이다 ㅡ 내가 강조하는 사람은 바그너와 가까웠던 들라크루아Delacroix이다 ㅡ . 이들은 모두 숭고한 것, 그리고 또한 추한 것과 잔혹한 것의 영역에서 위대한 발견자였고, 효과와 전시, 진열의 기술에서 더욱 위대한 발견자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천재성을 훨씬 넘어서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유혹하고 유인하며 강제하고 전복시키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섬뜩한 통로를 지닌 철저한 대가였으며, 논리와 직선의 타고난 적이었고, 이질적인 것, 이국적인 것, 기괴한 것, 구부러진 것, 자기 모순적인 것을 갈구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의지의 탄탈로스들이며, 인생과 창작에서는 고상한 템포, 즉 렌토lento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떠오르기 시작한 천민이었고 ㅡ 예를 들어 발자크를 생각해보라 ㅡ 무절제한 노동자였으며 거의 노동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자였다. 풍속에서는 이율배반자이자 반역자이며, 균형과 향유를 모르는 야심가요 탐욕자였다. 이들은 모두 결국에는 기독교 십자가에 매달려 부서지고 침몰했지만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그 누가 반그리스도의 철학에 이를 만큼 충분히 깊이 있고 근원적이었단 말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대담하고 모험적이며 뛰어난 힘이 있고 높이 비상하며 솟구쳐 날아가는 유의, 보다 높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세기에 ㅡ 이는 대중의 세기이다! ㅡ '보다 높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야만 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6절

 

 * * *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ㅡ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ㅡ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ㅡ 나 자신에 의해서도. ㅡ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삶에서 '악의'는 거의 입증되지 않는다 ; 문학적 '악의'에 대해서도 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순수한 바보는 너무도 많이 들어 있다 ······ 누군가가 내 책 한 권을 손에 든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존경 표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ㅡ 그가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신발조차 벗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ㅡ 장화는 말할 것도 없고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님께서도 지적했듯이, '맥락' 없이 인용하는 글들은 곧잘 '말도 안되는 소리'로 매도될 때가 자주 있는 듯합니다. 저 역시 (바로 그런 '표현'을 앞세운 지인의 글을 보고) 대뜸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지요.

 

 

'연도 멸도 없는 해탈의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저도 한동안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해탈'이 곧 불교도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 해탈에 이르면 곧 '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일진대, 왜 거기서 다시 '새로운 연을 이루고 그 연을 따라 보살이 되고...' 라는, 곧 '윤회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듯한 과정이 다시 '불교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거듭 생각해 보게 되었고요. 제게는 (양철나무꾼 님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대목이 아직까지도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해탈'이 무슨 뜻인지를 네이버에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려주더군요.

 

해탈 [解脫, Vimukti, Vimoka]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 자유 등을 의미하는 말. 원래 인도 바라문교에서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후에 불교에 도입되었다. 불교에서의 해탈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로, 업과 윤회를 벗어난 상태를 일컫는다. 업()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인과()의 법칙이 절대적으로 적용되어 선업()인지 악업()인지에 따라 낙과()와 고과()가 따른다. 즉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윤회()는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서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이 번뇌와 업에 따라 생사()의 세계를 거듭하며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해탈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나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네이버가 들려주는 대답이 어찌 '궁극적인 해답'을 던져줄 수 있을까요. 그저 '용어사전'을 옮겨놓은 것일 뿐인데 말이지요. 결국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깊이 고민했던 몇몇 철학자들의 생각까지 다시 뒤져보게 되었고, 그들의 말을 천천히 다시 반추해 봤습니다. 과연 그들의 책은 여전히 '얼음을 깨는 도끼'로 남아 있었고, 저는 '다시, 도끼'를 펼친 듯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저도 양철나무꾼 님의 말씀처럼, '불교 용어'를 가지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꼬치꼬치 따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전히 '뗏목'과 '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직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요.

 

 

* *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ㅡ 예술가들에게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거나, 또는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에게는 높은 정신성을 위한 유리한 선행 조건들을 냄새맡는 후각이나 본능을 의미한다. 여성들에게는 잘 해야, 더욱 유혹하기 위한 애교나 아름다운 육체가 보이는 약간의 부드러움이나 포동포동 살쪄 예쁜 동물의 천사 같은 것을 의미한다. 생리적인 실패자나 부조화자(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대다수의 인간들)에게는 이 세계에 '너무 선하게' 존재하려는 시도이자, 방탕의 성스러운 형식이며, 만성적인 고통이나 권태와 싸우려는 그들의 주요한 무기를 의미한다. 성직자들에게는 본래의 성직자적인 믿음이나, 그들의 권력의 최상의 도구, 또는 권력을 지향하는 '최고의' 면허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성자(聖者)들에게는 동면을 하기 위한 구실이며, 그들의 가장 최후의 영예욕이자, 허무('신') 속에서의 안식이고, 그들의 착란의 형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 사실, 즉 인간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ㅡ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내 말을 이해하겠는가?……내 말을 이해했는가?……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ㅡ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451∼452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절

 

 * * *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폭행하고 있다. 우리는 영혼의 호두를 까는 사람들이며, 마치 인생이란 바로 호두를 까는 것일 뿐이라는 듯 질문하며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매일 더욱 의심을 품는 자,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하며, 따라서 아마도 또한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는가?…… 모든 좋은 것은 전에는 나쁜 것들이었다. 하나하나의 원죄에서 어떤 유전적인 덕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결혼은 오랫동안 공동체의 법을 침범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옛날에는 매우 불손하게도 한 여성을 홀로 독점할 경우에는 배상을 했다 (예를 들어, 초야권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는 캄보디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낡은 미풍양속'의 수호자인 승려들의 특권이다). 부드럽고 호의적이고 관대하며 동정적인 감정들은 ㅡ 이것은 점차 높은 가치로 높이 자리잡게 되어, 거의 '가치 자체'가 되었다 ㅡ 오랫동안 그 자신에 대한 자기 경멸을 지녀왔다 : 사람들은 오늘날 가혹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온순함을 부끄럽게 여겼다(《선악의 저편》, 260절). 에 대한 복종 : ㅡ 지상 곳곳에 있는 고귀한 종족들은 스스로 복수를 단념하고 스스로에 대한 권한에 폭력을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데 얼마나 양심의 저항을 느꼈던 것일까! '법'이란 오랫동안 하나의 금기였으며, 불법이었고, 혁신이었다. 그것은 폭력으로 나타났고, 그 폭력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치욕으로만 여겼다. 지상에서 그 어떤 가장 작은 발자국이라 할지라도 이전에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과 싸워왔던 것이다 : 이러한 전체적 관점, 즉 "전진뿐만이 아니다. 그렇다! 걸음걸이, 움직임, 변화는 무수히 많은 고문의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다"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주 낯설게 들린다. ㅡ 나는 이것을《아침놀》18절에서 밝혔다.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자부하고 있는 약간의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 감정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인류의 성격을 확정짓는 진정한 결정적인 주요 역사로 '세계사'에 선행하는 '풍습의 윤리'의 저 어마어마한 시대적 거리를 느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 여기에서는 고통이 덕으로, 잔인성이 덕으로, 꾸밈이 덕으로, 복수가 덕으로, 이성의 부정이 덕으로 통용되었고, 이에 반해 평안이 위험으로, 지식욕이 위험으로, 평화가 위험으로, 동정이 위험으로, 동정받는 것이 모욕으로, 노동이 모욕으로, 광기가 신성으로, 변화가 부도덕적이고 불행 자체를 품고 있는 것으로 어디서나 통용되었던 것이다!" ㅡ (474∼476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9절

 

 * * *

 

금욕주의적 삶의 경우에 삶이란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된다. 금욕주의자는 삶을 결국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미로처럼 취급한다. 또는 행위에 의해 반박당하고 ㅡ 반박당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한다 :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가기를 요구하며, 할 수 있다면, 생존에 관한 자신의 가치 평가를 함께 하기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와 같은 기괴한 평가 방식은 예외적인 경우나 진기한 일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폭 넓고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멀리 떨어진 천체에서 읽는다면, 우리 지구상의 생존이라는 대문자는 아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게 될 것이다. 즉 지구는 본래 금욕주의적인 별이다. 자신에 대해, 지구에 대해, 모든 생명에 대해 깊은 불만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면서,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면서 ㅡ 아마도 유일한 즐거움으로 여기면서, 가능하면 스스로에게 많은 고통을 주는 불만에 차고 오만하며 불쾌한 피조물의 은둔처일 것이라고. 어쨌든 우리는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얼마나 규칙적이고도 보편적으로, 거의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지 생각해보자. 그는 개별적인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는 모든 계층에서 자라나온다. 그는 자신의 평가 방식을 유전에 의해 배양하여 증식시키지 않는다. 실상은 반대의 경우이며, ㅡ 대체로 말해서, 어떤 깊은 본능이 오히려 그의 번식을 금지시킨다. 이러한 삶에 적대적인 종족을 되풀이하여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증식시키는 것은 최고급의 필요성임이 틀림없다. ㅡ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유형이 소멸되지 않는 것은 삶 그 자체의 관심사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적 삶이란 하나의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는 생리적인 발달 자체에, 특히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나 아름다움과 기쁨에 대해 서툴고 음험한 눈초리가 쏠린다. (……) "바로 마지막 죽음의 고통 속에서의 승리" : 이 최상의 기호 아래 옛날부터 금욕주의적 이상은 싸워왔다. 이러한 유혹의 수수께끼 속에서, 이러한 환희와 고통 속에서 그 이상은 자신의 가장 밝은 빛을,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마지막 승리를 인정했던 것이다.(479∼481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1절

 

 

 * * *

 

삶은 이 이상 속에서 그러한 이상을 통해 죽음과 싸우며 죽음에 대항하여 싸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상이 인간을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 특히 문명과 인간의 순화가 성취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랬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대로이지만, 그 사실 안에는, 지금까지의 인간 유형에는, 적어도 길들여진 인간의 유형에는 병적인 것이, 인간의 죽음과의 생리학적 싸움(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삶의 권태와의, 피로와의, '종말'을 바라는 소망과의 싸움)이라는 중요한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다르게 되고 싶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싶은 체화된 소망이며, 실은 이러한 소망의 최고점이며, 이 소망의 진정한 열정이자 정열이다 : 그러나 그 소망의 이야말로 그를 여기에 붙잡아 매는 질곡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여기에 존재하고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좀더 유리한 조건들을 만들어내도록 작업해야만 하는 도구가 된다. ㅡ 이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종류의 덜된 자, 부조화자,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한 자, 실패자, 자기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들의 전체 무리를 생존에 묶어 두게 되는데, 이때 그는 본능적으로 목자로 그들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484∼485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3절

 

 * * *

 

그러나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진정 의사란 말인가? ㅡ 우리는 그가 아무리 스스로를 '구원자'로 느끼고, '구원자'로 존경받고자 한다 해도, 그를 의사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허용되지 않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가 싸우는 것은 단지 고통 자체일 뿐이며, 고통받는 자의 불쾌일 뿐이지, 그 원인이나 진정한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 좀더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이야말로 온갖 정신 착란에 이르는 길을, 예를 들면 아토스산의 헤쉬카스트파처럼, '내적인 광명'에 이르는, 환청이나 환시에 이르는, 음탕하게 넘쳐흐르는 관능의 황홀(성녀 테레사의 이야기)에 이르는, 길을 열고, 또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와 같은 상태로 부여하게 되는 해석이 가능한 한 언제나 열광적이고 잘못된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해석을 하려는 의지에서 이미 울려나오고 있는 맹신적 감사의 어조를 단지 건성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상태, 해방 그 자체, 마침내 이르게 된 저 완전한 최면 상태와 정적은 그들에게는 언제나 최고의 상징으로도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신비 그 자체로, 사물의 근거 속으로 들어가고 귀환하는 것으로, 온갖 망상에서의 해방으로, '앎'으로, '진리'로, '존재'로, 모든 목적이나 모든 소망이나, 모든 행위에서 벗어남으로, 또한 선과 악의 저편으로도 여겨진다. 불교도는 "선과 악 ㅡ 이 두 가지는 결박이다. 완전한 자는 이 두 가지를 지배했다"고 말한다. 베단타의 신도는 "행해진 것이나 행해지지 않은 것이나 그에게 고통을 주지 못한다. 현자인 그는 선과 악을 자신의 몸에서 흔들어 털어낸다. 어떤 행위로도 그의 영역은 고통받지 않는다. 그는 선과 악, 이 두 가지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 이것은 즉 인도 전체에 나타나는 견해인데, 바라문교적인 견해도, 불교적 견해도 이와 마찬가지다. (……) 최면에 걸린 허무의 감정, 가장 깊은 잠의 휴식, 간단히 말해 고통이 없는 상태 ㅡ 고통 받는 자나 근본적인 부조화자는 이것을 이미 최고의 선으로, 가치들 가운데 가치로 여기며, 이것을 그들은 적극적으로 평가해야만 하고, 적극적인 것 자체로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동일한 감정의 논리에 의해 모든 염세주의적 종교에서 허무란 신을 의미한다.)(497∼503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7절

 

 

 * * *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ㅡ 이것은 해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다!' 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머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ㅡ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로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 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ㅡ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 ㅡ 의심의 여지 없이 ㅡ 해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더 깊고, 좀더 내면적인, 좀더 독이 있는, 삶을 갉아먹는 고통을 가져 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ㅡ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ㅡ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ㅡ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539∼541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28절

 

 

 * * *

 

참다운 구원, 즉 생과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모두들 이 의지 자체에 불과한 것이고, 의지의 현상은 덧없는 존재다. 그리고 언제나 공허하고 끊임없이 좌절되는 노력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불가항력적으로 속해 있으며, 우리가 묘사하는 고뇌에 찬 세계다. 왜냐하면 앞서 보아 온 것처럼, 생에 대한 의지에서 생은 언제나 확실하고, 생의 유일하고 현실적인 형식은 현재며, 현상 속에서는 탄생과 죽음이 지배하는 것처럼 아무도 이 현재에서 도피할 수 없다. 인도의 신화는 이것을 표현하여 "그들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942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4권」, <68. 생에 대한 의지의 부정> 중에서

 

 

 * *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6-06-2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정성된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근데, 정말 죄송한데...저 님의 이런 페이퍼의 문제제기에 논리적으로 댓글을 달 깜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제가 페이퍼에서 말씀드렸듯, 전후 문맥에서 오는 어법상의 문제를 제시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꾸벅~(__)

oren 2016-06-21 19:02   좋아요 0 | URL
많은 사람들이 `불멸`이나 `영원한 삶`을 꿈꾸고, 심지어 많은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복된 삶`을 꿈꾸기도 하지요. 그런데 유독 불교는 그와 정반대로 `완전한 無`를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는 게 늘 제게는 인상적이었답니다. 그런데 박웅현 님의 책 속에서 바로 그런 점에 대해 언급한 대목(`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멸이랍니다`)을 두고, 어떤 분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제게는 마치 `어리석은 중생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일갈`하는 듯이 들리는) 표현한 대목에서 저는 솔직히 적잖은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글을 읽고 나서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여러 번 망설이다가 끝내 `괜한 댓글`까지 달게 되었구요. 사실 오늘 이 글에 덧붙인 `책 속 구절들`은 지난 주말에 내내 살펴봤던 글들인데, 양철나무꾼 님께서 거듭 `뗏목에 관한 글`을 올려주셔서 저도 (생략해도 충분했을 법한 이 글을 또다시 참지 못하고) 기어이 글로 쓰고 말았네요. 굳이 문제 제기라기 보다는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하는 가벼운 심정으로 쓴 글이었는데, 너무 부담을 드렸다면 저 역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암튼 오늘은 날씨가 몹시 덥네요. 한 줄기 시원한 장대비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2016-06-22 09:48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3 11:38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6-06-2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아닙니다만 모처럼 흥미로운 글을 읽었기에 관심을 가져봅니다 oren님
덕분에 불교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점 감사드립니다

불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니체, 쇼펜하우어 등이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겠습니다.
특히 니체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물론 고대 인도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서구의 지식인들이 한 둘이 아니겠습니다만)

제가 그들의 저서에서 느꼈던 점은 그들의 사유가 싯다르타 이후의 이후의 불교 정심에 접근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그들의 저서를 통해 불교에 대한 그들의 앎이 지식에 그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그들의 동양적사유가 대부분 우파니샤드에 닿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파니샤드가 불교의 전신에 해당하는 것은 지당하지만 싯다르타의 존재는 인도의 정신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는 도구로서 불교를 이용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 특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러한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하는 대표작이라 느꼈습니다. 불교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니체의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결과적으로 그들이 체화한 불교의 정신에 대한 저의 느낌은 겉멋이 들었다, 정도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이에 해당한다고 느낍니다. 그의 사유가 허무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하겠습니다.
(이는 불교에 관한한 그들의 사유가 그리 깊은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열병처럼 퍼졌던 현상 중 하나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의 수준은 얄팍한 것이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지 여타의 사유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물론 그들의 목적과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다만 그들의 프리즘으로 불교에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가는 느낌이라 몇자 드렸사오니
저의 무례함을 부디 용서하세요 oren님


oren 2016-06-23 13:47   좋아요 0 | URL
차트랑 님 반갑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불교의 심오한 사상`까지도 서양철학자들이 온전히 흡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싶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쇼펜하우어나 니체처럼 천재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사실 쇼펜하우어만 하더라도 그 당시 `이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불교 사상을 공부했다고 하니, 제아무리 산스크리트어까지 공부해가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니체 또한 서양 철학이나 성경 해석 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지만, 불교 사상에 대해서는 불교 경전으로부터 직접 얻어낸 `원문`에 대한 심오한 해석을 내놓는 모습을 구경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불교를 일종의 `염세주의 철학`으로 잘못 이해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기독교의 구원 신앙에 깊이 물든 `서양 정신 세계`에 `혁명`을 일으킨 공로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지 싶습니다. 그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서양 철학은 아직도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숱한 `미망`에 사로잡혀 있을 뻔했을 테니까 말이지요.

차트랑 2016-06-2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을 주시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oren님

저 역시 니체의 혁명적 사고와 그 위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는 바이고 또한 그의 저술들을 사랑하는 일인입니다.

니체가 고대 인도 철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상당한 이해도를 가졌던 것은 전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력 하에 방대한 우파니샤드의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니체는 그 번역된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만 해도 서구인들에게 고대 인도의 사상이란 거의 새로운 것이었지요. 어쩌면 충격적인 것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토마스 만, 바그너, 하이데거, 베버등)이 너도 나도 인도 철학에 관심을 보였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실 인도철학 전공자가 아닌 니체가 그 방대한 원전 하나 하나를 죄다 짚어가며 공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우리가 중국 고전을 알기위해 갑골이나 백서 혹은 죽간에 쓴 글들을 하나하나 짚을 필요가 없는 이유와 같다고 봅니다. 물론 니체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니체가 붓다의 가르침을 원어로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이 돌림병을 앓듯 접한 것은 붓다 이전의 인도철학 중심축인 우파니샤드 였다는 점은 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를 알게해주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제가 지난 글을 드린 것은 니체의 위대한 혁명적 사유를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이 성공적이었음을 언급했습니다만...) 바로 위에서 말씀 드렸듯, 당시 그들(쇼펜하우어, 니체)이 공부한 주된 경전은 우파니샤드였고 그들의 불교에 대한 사상은 얄팍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점입니다(어쩌면 의도적 왜곡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군요). 붓다의 출현은 인도의 사상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이후로 나누었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였습니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접근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인도철학(우파니샤드)에 대한 접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렌님께서 언급하신 용어인 ‘염세’가 그들의 사유 속에 향기를 피운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이 우파니샤드를 중심축으로 공부했기 때문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파니샤드가 불교의 전신이지만 결코 불교의 경전은 아닙니다. 그리고 붓다 이후 불교는 커다란 사유의 변화를 거듭합니다. 우파니샤드가 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경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을 붓다의 가르침과 구별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참고로 독일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제대로 접하기 시작한 것은 1892년이 지난 후에서야 입니다. 노이만이 불교의 원전을 번역하면서 부터인 것이지요. 이는 쇼펜하우어가 죽은지는 수십 년이 흐른 뒤였고 니체가 죽기 바로 2년 전의 일입니다 (니체가 원전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집에 불상을 모셔놓았을 정도로 심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해도가 그리 밝지 못했던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관한 자료의 부족이었던 것이지 불교의 경전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헤세가 불교에 밝았던 것은 오로지 노이만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독일의 불교를 노이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보는 일입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우파니샤드를 접한 서구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불충분했던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결과적으로 우파니샤드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불교에 대해서라면 자연스럽게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결코 불교의 깊은 사유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불교사상에 대한 그들의 미성숙한 이해를 근거로 불교를 사유하고자 함은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가는 느낌이라는 것이 요지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며 논점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더불어 오렌님 덕분에 당시 서구 지식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점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오렌님.

PS. 제가 지난 번에 드린 댓글에 오자가 보여 그 오자 하나만 정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것 멋 ⟶ 겉멋 ㅠ.ㅠ.)



oren 2016-06-24 15:54   좋아요 0 | URL
차트랑 님께서 상세하고도 깊이 있는 해석을 곁들여주시니 훨씬 더 이해하기 쉽군요. 사실 서양 철학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등장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협소한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더군요. 비록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불교 사상의 진수에까지 온전히 닿지는 못했더라도, 그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고대 인도 철학과 불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서양철학이 그 때 이후로 갑자기 엄청난 사유의 확장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지요.

쇼펜하우어가 언젠가 `전세계의 절반이 훨씬 넘는 인구`가 `수천 년 동안` 성서와 예수의 존재조차도 까마득히 모르고도 아주 태평스럽게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왔던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술회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야말로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도리어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동양과 서양 사이에는 켜켜이 쌓인 두터운 `생각의 장벽` 같은 게 존재하는 듯합니다. 동양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반대로 서양 철학자들이야말로 2천 년 이상이나 인도 철학이나 불교 사상을 제대로 모른 채 `그들만의 철학`을 연구해 왔으니 말이지요. 그러니 차트랑 님의 말씀대로, 불교에 적잖이 심취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통해 `불교`에 대한 해석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프리즘`에서 벗어나기 힘든 한계를 지닐 수밖엔 없다고 봅니다. 우파니샤드에 대한 무수한 언급에 비해 여타 불교 경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거의 없는 점 또한 그런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일 테지요.

아무튼 차트랑 님께서 남겨주신 댓글 덕분에 서양 사람들 가운데 특히 독일 철학자들과 몇몇 작가들이 `불교에 다가갔던 길들`을 아주 소상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정말 유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병자는 그 치유 방법을 손에 쥐고 있는 경우, 가련하게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 내가 서적들에서 끌어내는 모든 성과는 이런 어구의 실천과 적용으로 되어 있다. 사실 나는 책을 모르는 자들만큼이나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책을 가지고 즐긴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그것을 즐길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몽테뉴

 

 * * *

 

책을 읽는 데에도 어떤 '질서'가 필요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려 봤다. 우리 속담에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이 있고, 비슷한 뜻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책유서(冊冊有序)라는 말은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면 책과 책 사이에는 아무런 순서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는 걸까.

 

꼭 그렇게 단정지을 일은 아닌 듯하다. 어릴 때 동네에서 훈장 어르신한테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운 기억이 있는데, 그 때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먹은 형들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웠더랬다. 책을 배우는 '순서'가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얘기다. 천자도 모르는 아이가 그 '기본서'를 뛰어 넘어 곧바로 명심보감을 배워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동이나 청소년이 성인들이 읽는 어려운 책들을 읽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나면 책에서 느껴지는 어떤 '난이도'가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슬쩍 사라지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책에 내재된 '난이도'는 여전히 남는다. 어떤 책들은 펼쳐서 몇 쪽도 채 넘기지 못하고 황망히 덮고 말 때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당혹감을 느꼈던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다.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을 배울 때의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책들을 가끔씩 만났다. 니체의 책들도 한 때는 '딴 세계의 언어'로 쓰인 것처럼 느껴졌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 오비디우스의 『변신』등도 한때나마 내게 그런 당혹감을 안겨줬던 책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험한 산'처럼 느껴지는 책들을 어떤 식으로든 힘겹게 넘고 보니 차츰 '요령'이 생기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책을 읽는 '알맞은 순서'라고나 할까, 혹은 '알맞은 타이밍'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을 내 스스로 알아서 맞추는 식으로 책을 읽을 때가 생기더라는 얘기다.

 

어떤 책들이 '알맞은 때'를 만나게 되면 정말 여느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가슴에 팍팍 파고들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책들은 도대체 내가 왜 하필 '지금 꼭' 이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할까 싶은 느낌이 드는 책도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아예 작정을 하고 씨름을 하듯 맞붙어 씩씩거리더라도 결국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나 자신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날 때조차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를 두고 어찌 책 탓만 할 수 있을까. 그게 바로 어쩌면 그 책을 읽는 '알맞은 타이밍'이 아직은 아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떤 일들을 진척시키다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때가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제 머지 않아 어떤 결실을 맛볼 때가 임박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찾아 온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만하면 때가 무르익었지 싶은 데도 도대체 감감무소식인 상태가 지속될 때가 있다. 말하자면 '감'이 무르익어 곧 떨어질 때가 된 듯싶은데 도대체 그 감이 언제 떨어질지 도무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될 때, 다시 말하자면 감나무 아래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벌린 입만 아플 때,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벌린 입을 그만 다물고 감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덜 익은 감'이라도 따 먹어야 옳은 일일까. 아니면 감이 언제 무르익을지 좀 더 확실하게 살핀 뒤에 '알맞은 때'를 기다려 나중에 다시 감나무를 찾아야 옳은 일일까.

 

대략 10년 전쯤의 일이 생각난다. 언젠가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내가 발견했던 사자성어 하나가 이런 고민에 딱 맞는 해답을 제시해 주는 듯해서 무릎을 치며 경탄한 적이 있었다. 졸탁동시()라는 말이었다. 벽암록(碧巖錄)이라는 책에 그 말이 나온다고 해서 서둘러 도서관으로 냉큼 달려가 그 책을 빌려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이야말로 내게는 언감생심이었다. 도대체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책이 결코 아니었다.『벽암록()』은 중국 당나라 이후 불교 선승()들이 전개한 대표적 선문답을 가려 뽑아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설두중현(, 980~1052) 선사가 펴낸 『송고백칙()』에 원오극근(, 1063~1135) 선사가 또다시 문제 제기와 해석을 첨가했다고 한다. 책의 유래만 살펴 봐도 마치 무림고수들이 간난신고 끝에 얻게 되는 기서(奇書)처럼 들린다. 

 

동양의 선문답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서양의 이름난 고전들도 읽기 난해한 책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령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만 해도 '신들의 계보'와 '신들의 행각'을 미리 알지 않으면 제대로 읽기 어렵다. 그 두 서사시를 읽기 위해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와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 혹은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작품들도 여전히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미리 읽을 필요가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과 같은 작품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책들 속에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담긴 이야기들이 마치 기본 텍스트처럼, 혹은 독자들이 이미 당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운율을 가미한 서사시'로 '노래'한다. 그러니 압축과 비약과 비유가 난무하는 '고대 시인의 노래'를 곧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당연지사일지 모르겠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 때 경연을 벌였던 '그리스 비극'을 먼저 읽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애기인지 전혀 감을 잡기 어렵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헛수고일 뿐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지만 무딘 도끼로 거목을 쓰러뜨리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몰리에르의 작품까지 두루 섭렵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정도는 미리 읽는 게 아무래도 그 책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운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서양의 이름난 고전들도 더러는 서로 난마처럼 얽혀 있어서 적당한 '선행 독서'가 결여된 채 그 책들에 다가서는 독자들을 여간 당혹스럽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음악'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 때도 있다. 사실 음악은 다른 '선행 과목들'에 비해선 부수적인 요소일지도 모른다. 니체의 책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도 적잖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비롯한 숱한 철학자들도 미리 알아야 한다. 어쨌든 니체의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슈만, 쇼팽, 리스트, 드뷔시, 비제, 롯시니의 음악도 함께 알면 더욱 좋다. 그들의 음악을 모른 채 니체의 책을 읽는다면, 그가 들려주는 숱한 음악 얘기들이 결국 '소 귀에 경읽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마침 오늘 아침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니체가 작곡했다는 가곡도 들을 수 있었다. 디트리 피셔 디스카우의 음성이었다. 그 해설자는 심지어 '니체의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회에도 한두 차례 참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 * *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 세 권과 그가 쓴 에세이『배신당한 유언들』을 읽으면서 '책 읽는 순서'에 대해 거듭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을 펼치자 말자 나오는 제1부의 제목부터가 나에겐 몹시 낯설었다.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는 날>이라니, 쿤데라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파뉘르주가 도대체 누굴까? 얼핏 사람 이름인 듯하기도 하고... 어쨌든 그 책의 첫 문단을 여기에 인용해 보자.

 

마담 그랑구지에르는 임신 후 내장 요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수렴제를 복용해야 했다. 이 약이 너무 독해 태반엽이 풀려 버렸고, 태아 가르강튀아는 정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맥을 타고 올라 어머니의 귀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이 책은 첫 문장에서부터 자신의 수법을 내보인다. 즉, 여기서 하는 얘기는 진실하지 않다는 것,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진실(과학적이거나 신화적인)을 주장하지 않으며, 사실들을 현실 그대로 묘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어도 파뉘르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가르강튀아는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에 등장하는 거인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건만,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하다. 다음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찾기 시작한다.

 

행복한 라블레 시대. 소설이라는 나비가 번데기 잔해들을 짊어진 채 날아오른다. 거인 형상을 한 팡타그뤼엘이 여전히 환상적 콩트들의 과거에 속했다면, 파뉘르주는 당시 소설이 아직 모르는 미래에서 온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이라는 이 특별한 순간은 라블레의 책에 놀랄 만한 풍요로움을 부여한다. 모든 것이 거기 있다. 사실임 직한 것과 사실임 직하지 않은 것, 알레고리, 풍자, 거인과 일반인, 일화, 명상, 실제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여행, 현학적인 언쟁, 순수한 말재간으로 이루어진 여담 등. 19세기의 후예인 오늘날의 소설가는 초기 소설가들의 이 멋들어지게 혼합된 세계에, 그들이 누리는 유쾌한 자유에 시기심 어린 향수를 느낀다.

 

이제야 조금 더 뚜렷해진다. 쿤데라는 1534년에 처음 발표된 라블레의 풍자 소설을 통해 '소설의 화려한 비상'을 발견했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소설의 무한한 가능성'을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뒤이어 쿤데라는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인용하고, 파블레의 『팡타그뤼엘-제4서』를 인용하면서 '소설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음의 인용문을 내세우면서.

 

옥타비오 파스는 말한다. "호메로스도 베르길리우스도 유머를 알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머를 느낀 듯하지만, 유머는 다만 세르반테스에 이르러서야 형태를 취한다. (……) 유머는 현대 정신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유머는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인간이 실천해 온 게 아니라 소설의 탄생과 관계된 하나의 발명이라는 것, 이는 대단히 중요한 발상이다. 유머는 웃음이나 조소, 풍자가 아니라 희극성의 특별한 한 종류라는 것. 이에 대해 파스는(이야말로 유머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인데) 이것은 "자신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라고 말한다. 파뉘르주가 후생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으며 양 상인들을 익사시키는 장면을 즐거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는 소설 예술에 대해 영원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겨우 이 책의 4쪽까지의 내용이다. 아직 갈 길이 까마득히 남았다는 얘기다. 쿤데라는 다음 단락에서 곧바로 자신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이별의 왈츠』를 꺼내 든다. 그 작품을 설명하면서 『팡타그뤼엘 - 제4서』의 내용과 연결한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를 내세워 설명을 이어간다. 그 다음 단락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내세우며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멋진 문장을 인용한다. 그 다음엔? 곧바로 자신의 작품 『농담』과 『삶은 다른 곳에』와 『불멸』을 꺼내 든다. 그 다음엔 다시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로 되돌아 가고, 뒤이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다시 잇따라 나온다. 곧이어 류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나오고, 다시 『악마의 시』와 『팡타그뤼엘』이 나오고 나서서야 겨우 제1부가 마무리된다. 1부의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게 끝난다.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에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면 유머는 "현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늘 여기 있었던 게 아니요, 늘 여기 있을 것도 아니다.

 

나는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을 날을 생각하며 가슴 졸인다.

 

내가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은 건 고작 네 권밖에 안 된다.(『정체성』, 『생은 다른 곳에』는 아직 읽지 못했다.) 또한 밀란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제1부를 마칠 때까지 언급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책은 이때까지만 해도 딸랑 『돈키호테』한 작품뿐이었다.(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그 책을 읽고 나서 읽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지는 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책을 너무 일찍 집어든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참고 읽다 보면 좀 더 익숙한 작품들도 더러 나오겠지 하는 생각과,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 세 권의 후광(?)에 막연히 기댄 채 어쨌든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갈수록 태산이었다. 내가 모르는 책들, 내기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봇물처럼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끔씩 위로를 받을 일이 있었다면, 앞서 얘기했던 쿤데라의 3부작(『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과 더불어 (결정적으로)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 유언을 둘러싼 얘기가 아주 흥미롭게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카프카의 작품들을 읽었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카프카를 다시 만나는 일이 내심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사실 카프카와 쿤데라의 작품은 작년 봄에 프라하에 갈 때만 하더라도 내게는 겨우 '이름만 아는 작가'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프라하에 갔을 때조차 이 유명한 작가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체코의 서점' 같은 델 들를 생각조차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라하'는 내게 '음악의 도시'로 더 친근했다. 오래 전에 프라하 필하모닉 내한 공연 연주회가 열릴 때에도 '프라하의 음색'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고, 체코 출신의 음악가들인 드보르작, 바르토크, 스메타나의 작품들도 즐겨 들었었다. 더군다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태생인 모차르트를 (그의 주무대였던) 빈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각별히 사랑한 도시로도 이미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이쯤에서 작년 봄에 프라하에 갔을 때 담았던 풍경들을 조금 소개하는 것도 그리 나쁠 건 없지 싶다. 어쨌든 나는 그 도시에 한번 발을 디딘 후로는 좀체로 그 도시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나는 '프라하' 하면 금새 떠오르는 그 유명한 두 작가(카프카와 쿤데라)의 작품들을 그때까지 전혀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들을 이미 감명깊게 읽은 독자들이 느낄 법한 '독특한 감정'을 전혀 맛볼 수 없었다. 나의 경우엔 오히려 '순서'가 정반대였다. 프라하를 다녀온 후에 카프카의 『성』, 『소송』, 『변신』, 『심판』등을 읽었다.(특히 그의『성』은 내가 봤던 '프라하 성'과는 여러모로 너무나도 달라서 깜짝 놀랐다.) 어쨌든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서 내가 찾았던 '프라하의 이미지'를 떠올릴 일은 거의 없었다.(카프카의 소설 속엔 프라하, 블타바 강, 프라하의 봄 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쿤데라의 작품 속으로 들어선 이후에는 어느새 '프라하'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있는 도시처럼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농담』에서 루드비크가 오스트라바에서 루치에를 황망하게 잃어비린 후 오랜 세월 뒤에 프라하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때로는 이처럼 '책을 읽는 순서'가 묘하게 뒤바뀌어도(그러니까 작가의 출신지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시를 직접 다녀온 직후에 그 작품들을 읽는 경우) 책을 읽는 재미가 갑자기 몇 배나 부풀어 오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 프라하에 도착한 첫날밤, 가이드와 함께 '맥주나 한잔' 마시러 나갔다가 '제대로' 만난 '프라하 성'의 야경.

 

 

 - 우리가 묵은 호텔이 마침 카를교 바로 옆이었다.(이 사진을 찍은 곳이 호텔 바로 앞이다.)

    밤늦게 카를교를 지나 호텔 앞까지 다 왔는데도 프라하의 야경에 반해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 이튿날 아침, 카를교 교각 너머의 한산한 아침 풍경.

 

 

 - '영화 또는 소설 속의 한 장면'이 절로 연상될 만큼 건물들이 이색적이고 아름답다.

 

 

 - 프라하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프라하 성에 올랐다. 체코 경비병들의 표정이 사뭇 엄숙하다.

    프라하 성은 1천 년이 넘은 고성이지만, 현직 대통령 관저도 여기에 함께 있다.

 

 

 - 프라하 성에서 내려다본 프라하 시내 전경. 한가운데 카를교와 교탑이 보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가 토마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올랐던 언덕이 바로 이 근처였을까?

 

 

 - 프라하 성을 대표하는 성 비투스 성당의 모습. 24mm 광각렌즈로도 간신히 담을 만큼 몹시 웅장했다.

    보헤미아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바츨라프가 10세기에 지은 교회를 재건축하고 나중에 고딕 양식을 더했다.

 

 

 - 프라하 성 안쪽 광장에 가득 모인 관광객들

 

 

 - 황금소로.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해 모여들었던 곳이다. 우리말 안내 간판이 눈에 띈다.

 

 

 - 프란츠 카프카가 살았던 그의 여동생의 집도 보존돼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카프카는 바로 이곳에서『성』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황금소로에서 만난 풍경. 혹시나 '카프카'가 아닐까 싶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 프라하 성에서 내려와 바츨라프 광장을 찾았다.

    여기가 바로 1968년에 소련 탱크가 시위대를 깔아뭉갰던 '프라하의 봄' 현장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여주인공 테레자도 '바로 그 당시' 사진기자로 여기에 있었다!

 

 

 - 바츨라프 광장 한 켠에 서 있는 건물들과 흰 구름들.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 프라하 시내 중앙시장 풍경. 맨 왼쪽 청년은 이제 보니 마치 '카프카'를 닮은 듯하다. 나만의 착각인가?

 

 

 - 구시청사 광장에서 가장 명물은 단연 이 '천문시계'이다. 무려 15세기에 만들어진 시계.

 

 

 -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쇼'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초침이 정각을 알리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인형이 움직이며 종을 치고, 두 개의 창문에서는 12사도가 등장한다.

   허영을 상징하는 거울을 보는 자, 돈지갑을 움켜쥔 유대인, 음악을 연주하는 터키인도 등장하여

   죽음 앞에 이 모든 것이 쓸데없음을 보여준다고.

 

 

 - 유대인이었던 카프카는 어린 시절 이 시계 속의 탐욕스러운 유대인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한다.

 

 

 - 소설 『블멸』에 등장하는 '쿤데라 선생님'은 이 시계탑 앞을 '천 번도 더 지나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 구시청사 광장 한가운데는 얀 후스(Jan Huss)의 동상이 있다.(왼켠 붉은 지붕 건물 앞에 어둑하게 보이는 동상)

   후스는 체코의 종교개혁가로, 체코의 철자법을 개량하고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한 사람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카를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쿤데라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도 등장한다.

 

 

 - 오후 4시 정각을 가리키자 또다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짧은 쇼지만 인생의 교훈을 준다고 한다.

 

 

 - 구시청사는 1338년에 지어졌고, 마주 보이는 틴 성당은 1365년에 세워졌다고.

    이 성당은 종교개혁 당시에 후스파의 거점 역할을 떠맡았다고 한다. 두 개의 탑은 아담과 이브를 상징한다고.

 

 

 - 카를교 교탑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

 

 

 - 카를교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린다.

    600년 전에 만들어졌고, 다리 위에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 블타바강 너머로 보이는 프라하 성의 웅장한 모습. 전장 약 435km. 독일 명칭으로는 몰다우강이라고 한다.

    스메타나의 교향시《블타바》는 이 강의 아름다운 흐름을 묘사한 체코의 대표적인 음악 작품이다. 

 

 

 - 일행들과 함께 한 관광 일정이 모두 끝난 뒤 홀로 구시청사 시계탑을 다시 찾았다.

   시계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내려다 보니 '프라하의 심장'이라는 '구시청사 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 시계탑 꼭대기에서 프라하 여행 책자에서 미리 봤던 '익숙한 풍경'을 담아 봤다.

 

 

 - 창틀 너머 건너편으로 틴 성당의 두 개의 탑이 빤히 바라다 보인다.

 

 

 - 시계탑에서 내려와 일행들이 머무는 술집을 홀로 찾아갔다. 족히 한 시간 이상은 헤맨 듯하다.

    우플레쿠(U Fleku)라는 술집으로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비어홀'이다.

    체코 국민들은 스메타나를 최고의 작곡가로 여긴다.

    보헤미아 집시처럼 보이는 아코디언 연주자에게 스메타나의 <블타바> 연주를 직접 부탁해서 들었다.

 

 

 -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본 카를교 교탑 주변 야경.

 

 

펼친 부분 접기 ▲

 

 

다시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로 되돌아 오자. 그 작품에는 숱한 소설가들의 소설 작품만 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쿤데라 자신이 한때 음악에 깊이 몰두했던 작가였던 만큼 체코의 음악 영웅인 야나체크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야나체크는 소설 『농담』에도 야로슬라프라는 인물을 통해 여러 차례 등장했던 바로 그 음악가다. 야나체크의 음악은 특히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 때문에 곧잘 작곡가의 진정한 의도가 무시된 채 의도적으로 '편곡'되어 연주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작곡가가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태연스레 벌어지곤 했다. 작곡가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쿤데라가 말하고 싶었던 '배신당한 유언들'은 카프카 등 몇몇 소설가의 작품 뿐만 아니라 음악가의 작품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기쁨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일종의 서글픔을 느꼈다면 그건 대부분 나 자신의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비롯된 문제였다. 야나체크의 음악에 대해 쿤데라는 심지어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악보'까지 그려가면서 매우 친절한 설명을 제시해 주었지만, 그걸 만족할 만큼 알아들을 수 없는 내 처지를 절감할 때마다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었다. 쿤데라는 참으로 매혹적인 작가이지만 때때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해 우리가 미리 음악 공부까지 따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접근이야말로 어쩌면 본말이 전도된 일일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의 범위 내에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배신당한 유언들』에 나오는 숱한 걸작들을 모두 언급한다면 그런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쿤데라를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쿤데라는 이 책 속에서 '소설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감동적일 정도로 아주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작가의 그런 심오한 뜻을 내가 이 글에서 제대로 전달하기란 애시당초에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그런 뜻을 내가 얼마간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작가가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뜻을 왜곡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로서는 그의 책 속에서 새삼스레 알게 된 숱한 매혹적인 작품들을 조금이나마 더 소개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다.

 

사실 나는 일부러 '책을 소개하는 책'은 가급적 따로 찾아서 읽기를 몹시 주저하는 편이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내 스스로 어떤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자칫 잘못 판단하는 데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런 점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심지어 나는 니체의 책들을 읽는 동안에도 '니체를 설명하는 책들'은 여태껏 한 권도 들춰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로서는 니체의 정수를 오로지 니체를 통해서만 느끼고 싶은 욕심을 너무 앞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책세상 니체 전집』은 니체에 대한 오독을 방지하기 위해 '주석'조차 달지 못하도록 막았다. 쿤데라 또한 거의 똑같은 이유에서 자신의 번역본에 대해 '작품 해설'조차 싣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어쨌든 내 나름대로 세워 놓은 이런 책읽기 방식 또한 달리 생각해 보면 내 나름대로 고수하고 싶은 하나의 '책읽기 순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결코 나만의 독창적인 기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언젠가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발견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이토록 고집할 이유까지는 없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그런데 모방자, 꾸미는 자, 모조자, 맹목적인 모방자들은 예술을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참된 작품을 보면, 마음에 들거나 효과가 뚜렷한 점에만 관심을 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여 개념으로서, 즉 추상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교활한 생각을 품고 모방한다. 그들은 기생 식물처럼 타인의 작품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해파리처럼 그 양분의 색깔을 갖는다. 비유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끌어 넣은 것을 잘게 깨어 혼합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화할 수 없는 기계와 같다. 따라서 그 혼합물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성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거기에서 가려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천재는 유기체처럼 동화하고 변화하고 생산한다. 왜냐하면 천재도 선배나 그 작품에 의해 계발되고 교화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게 직접 직관적인 것의 인상에 의해 예술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생활과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양이 높아도 천재의 독창성엔 지장을 주지 않는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기교를 부린 작품에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2,3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즉 유행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근거는 이 유행의 개념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서

 

펼친 부분 접기 ▲

 

이왕에 쇼펜하우어까지 내세운 마당이니 여기서 니체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그리 나쁘진 않을 듯싶다. 니체의 작품들 가운데 제법 많은 작품들이 '음악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니체 스스로도 밝힌 적이 있었다. 음악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던 쿤데라가 이 점을 놓쳤을 리 없다. 그는 니체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여섯 권의 책(『여명』,『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 지식』,『선과 악을 넘어서』,『도덕의 계보』,『우상들의 황혼』)에서 '동일한 구성적 원형을 추구하고 전개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고 다듬는 모습'을 포작한다. 그와 더불어 그는 '니체 철학'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배신 당하는 현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역사가들이나 대학교수들은 니체 철학을 해설하면서 그의 철학을 축소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의 철학을 그의 철학과 정반대되는 것, 즉 하나의 체계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변형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이 체계화된 니체 속에도, 여성들에 관한, 독일인에 관한, 유럽에 관한, 비제에 관한, 괴테에 관한, 위고 키치에 관한, 아리스토파네스에 관한, 스타일의 경박성에 관한, 권태에 관한, 유희에 관한, 번역에 관한, 복종 정신에 관한, 타자 소유와 이 소유의 모든 심리적 전형들에 관한, 학자들과 그들 정신의 한계에 관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Schauspieler(코미디언들)에 관한 니체의 성찰들이 들어설 여지가 있을까? 보기 드문 몇몇 소설가들에게서가 아니면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수한 심리적 관찰들을 위한 자리가 과연 있을까?

 

 

 

 

쿤데라가 자신의 대표작『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화두로 꺼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니체의 책들을 미리 읽지 않았던 독자들은 『배신당한 유언들』속에 나오는 쿤데라의 짧은 문장 속에 가득 담긴 '니체의 성찰들'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니체의 책들을 미리 읽은 독자들이라면 쿤데라의 남다른 성찰에 대해 놀라워하며 니체의 작품들에 담겼던 여러 문장들을 새삼스레 떠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이런 대목들이야말로 '책을 읽는 순서'가 결정적으로 문제시되는 생생한 현장이 아닐까.

 

소설가가 들려주는 '소설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들'을 읽고 나니 내가 그동안 읽어 온 책들이 얼마나 협소한 범위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광범위한 책읽기가 선행되어야 하는지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언급된 책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율리시스』는 여전히 '때'가 아니라 여기고 독서를 미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율리시스』를 읽기 전에『젊은 예술가의 초상』부터 '먼저' 읽으라는 어느 대가의 충고는 거역하기가 힘들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을 적어도 서너 권쯤 읽고 나면 틀림없이 나도『율리시스』에 덤벼들 날이 오리라 믿고 있다.

 

 -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언급된 책들 가운데 내가 지닌 책들. 이 가운데 몇몇 책들은 여전히 읽지 않았다.

 

 

책읽기에 대해 '순서'를 강조하는 얘기는 내가 과문한 탓인지 여태껏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책읽기에 대한 책'을 별로 읽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책에 대한 전문가들이 생각하기로) 책읽기의 '순서'를 언급하는 일은 고작 '풋내기들이나 꺼낼 만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그 자체로 너무 어리석은 일이어서 별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책을 아주 많이 읽은 몽테뉴는 이런 말까지 남겼다.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 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두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주석하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런 하찮은 글을 장황하게 끄적거리고 있는 내게 위안을 주는 사람을 내가 전혀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니다.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이 했던 다음 말은 여전히 내 머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나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88∼89쪽)

 

 -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중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책이 그 책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또다른 읽지 않은 책들'을 거슬러 따라 올라가는 출입구 같은 역할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이런 '순서'는 누구라도 흔히 경험하게 되는 독서법이다. 그런데 캠벨은 다른 책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따라하기 힘든 제안'까지도 우리 앞에 내놓는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190쪽)

 

 - 조지프 캠벨, 『신화의 힘』중에서

 

비록 우리 모두가 캠벨의 지침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지만 얼마쯤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노력해 볼 수는 있지 싶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일은『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언급된 무수한 책의 리스트를 직접 한 번 작성해 보는 일이다. 이런 사소한 일이 결국은 '다음'에 읽을 책들을 미리 살피는 '또하나의 순서'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적절한 시간에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행운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필요하다

 

기다리는 자의 문제. ㅡ 어떤 문제의 해결점이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보다 높은 인간이 그래도 적절한 시간에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ㅡ 말하자면 '분출하기 위해서는' 행운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보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구석에는 앉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그러나 기다려도 헛되다는 사실을 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또한 그들을 깨우는 고함소리가,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저 우연이 너무 늦게 다가온다. ㅡ 그때는 조용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행동하기 위한 최상의 청춘과 힘을 이미 다 써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가 '벌떡 일어섰을' 때, 사지가 마비되고 정신이 이미 너무 무거워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놀랐던 것일까! "너무 늦었다" ㅡ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는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이제 영원히 쓸모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74절

 

펼친 부분 접기 ▲

 

 

 * * *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레프 2016-06-16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대단한 리뷰입니다

oren 2016-06-16 11:12   좋아요 0 | URL
리뷰는 아니고 페이퍼로 쓴 글인데, 재료를 너무 많이 집어 넣는 바람에 비빔밥 같은 글이 되고 말았지요.
어떤 재료는 너무 많이 들어가고, 어떤 재료는 아예 빠지기도 하고, 재료끼리도 서로 섞이다 말다가 해서 별로 만족스럽지도 못하고요. 애시당초에 리스트나 한번 만들어 볼까 하다가 글이 이상하게 변질된 듯해요.

알레프 2016-06-16 11:15   좋아요 0 | URL
리뷰라해서 죄송! 아직 알라딘의 페이퍼와 리뷰의 차이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겸양해 마시고 진심 감탄할 따름입니다

五車書 2016-06-1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법 강의를 들은 느낌이에요. 좋은 내용입니다! ^^

oren 2016-06-16 11:20   좋아요 1 | URL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시는 오거서 님께서 『배신당한 유언들』을 읽으시면 저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그 책을 읽으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五車書 2016-06-16 11:27   좋아요 0 | URL
저보다 내공이 깊은 oren 님께서 추천해주시는 책이라면 기억해두었다가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6-06-16 11:50   좋아요 1 | URL
저 책 속에는 14세기 음악가 기욤 드 마쇼도 나오던데, 마침 제가 즐겨 듣는 라디오 채널 프로그램(정경영의 클래식, 천년의 순간들)에서 그 음악가에 대한 해설과 작품 연주까지 들려주더군요. 물론 우연의 일치였지만 가끔씩은 책을 읽는 타이밍도 정말 중요하구나 싶었답니다.^^

五車書 2016-06-16 13:08   좋아요 0 | URL
중세 프랑스 작곡가 기욤 드 마쇼군요. 고음악을 들으면서 난생 처음 대하는 작곡가가 많지요. 기욤 뒤파이와 헷갈린 이름이라서 기억이 생생하네요. 책이 상당히 기대됩니다. 고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 같아요. ^^;

2016-06-16 18:14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6-06-17 17:24   좋아요 0 | URL
박웅현 님의 `인문학 강좌`는 저도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직접 들려주면서 곁들이는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강의 내용들 가운데 허투루 들리는 얘기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재미있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지요. 책을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으라는 주문은 쿤데라의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특히 좋은 음악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으면서 책은 왜 단 한 번만 읽고 내팽개치고 마느냐는 대목에선 정말 뜨끔했지요), 소설 또한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주문은 정말 특별하게 가슴에 와닿더군요.『배신당한 유언들』에 나오는 구절들 가운데 *****님의 댓글에 부응한다 싶은 대목들을 조금 덧붙여 봅니다.
* * *
아이러니가 뜻하는 바는 이렇다. 소설에서 보이는 어떤 단언도 그것만 따로 고려될 수는 없으며, 그 각각은 다른 단언들, 다른 상황들, 다른 몸짓들, 다른 관념들, 다른 사건들과의 무순적이고 복합적인 대조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오직 느린 독서, 두 번 세 번 거듭 읽는 독서만이 소설에 내재하는 모든 아이러니 관계들을 드러낼 수 있으며, 이것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소설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것이다.(303쪽)
- 「8부 안개 속의 길들」,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체계를 거부함으로써 니체는 철학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버린다. 해나 아렌트가 정의했듯이, 니체의 사유는 실험적 사유다. 그의 주된 충동은 굳어 버린 것을 부식시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체계들을 침식시키고, 미지로의 모험을 떠나기 위한 돌파구를 열어젖히는 데 있다. 미래 철학가는 실험가일 거라고 니체는 말한다. 부득이한 경우, 상반될 수도 있는 여러 방향으로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자 말이다.

소설에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을 내가 옹호하는 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소위 `철학 소설`이라는 것, 소설을 철학에 예속하는 것, 정치나 도덕 관념들의 `소설화`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진정으로 소설적인 사유(라블레 이후 소설이 알게 된 사유)는 언제나 체계와 규율에 반한다. 그것은 니체의 사유에 가깝다. 실험적이다. 그것은 우리를 에워싼 모든 관념체계들에 돌파구를 연다. 그것은 성찰의 모든 길들을 검토하면서(특히 등장인물들을 매개로) 그 길들 하나하나의 끝까지 가고자 애쓴다.

체계적인 사유에 관해 한 가지만 더 말하자. 사유하는 자는 체계화에 끌리게 마련이다. 언제나 그는 그런 유혹에 빠진다. 자기 아이디어의 모든 결과를 서술하고 싶고, 사람들이 제기할 모든 이의를 예견하고 사전에 그것들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싶은 유혹에 말이다. 한데 사유하는 자는 타인에게 자신의 진실을 납득시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체계의 길, `신념을 가진 사람`의 가련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정치가들은 그런 사람으로 불리길 좋아하지만,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 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체계화해야 하고, 그 자신이 자기 아이디어의 주위에 세운 바리케이드에 발길질을 가해야 한다.(259-260쪽)
- 「6부 작품과 거미」중에서


맨슨 2016-06-1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oren님의 블로거에서 본 『빈서판』이라는 책을 읽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책의 방대한 분량은 둘째치고서라도 책의 내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수가 없어.. 책을 덮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책또한 읽는 수준이 제각각 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oren 2016-06-18 10:15   좋아요 0 | URL
『빈 서판』은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 책의 초반부를 읽을 무렵에 약간은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소 난이도가 있는 책들은 일종의 `관문`이 딸린 `진입장벽`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정도 `저자와 주파수를 맞출 때까지는` 그런 고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그런 난관들만 무사히 통과하면 이내 평탄한 길이 나오고, 조금 더 걷다 보면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사뿐사뿐 걸을 수 있는 향기 그윽한 꽃밭도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말이지요.(스티븐 핑커의 3부작 가운데 『빈서판』이 너무 읽기 힘드시다면 그보다는 조금 더 읽기 쉬운『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부터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쿤데라의『배신당한 유언들』이라는 책 역시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비록 소설가가 쓴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깊이를 지니고 있어서 (작가가 마치 어느 정도의 `선행 독서`를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결코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닌 듯하더라구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도 이런 `책 읽는 순서`에 대한 장황한 글을 쓰게 된 것이구요. 이참에 제가 이 글에 포함시키려다가 결국 빼고 만 `니체의 말`도 덧붙여 봅니다.

* * *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만일 이 저서가 어떤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해도, 그 책임이 반드시 내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먼저 이전의 내 저서들을 읽었고 이때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내 전제를 함께 전제한다면, 이 저서는 아주 분명하다 : 사실 이전의 나의 저서들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차라투스트라` 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깊이 상처받고 또 때로는 깊이 황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 책에 통달한 자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다 :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야 그는 이 작품이 태어난 평온한 경지에, 그 태양빛 같은 밝음, 아득함, 드넓음, 확실함에 존경심을 지니고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우 잠언 형식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 그것은 사람들이 이 형식을 충분히 진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새겨 넣으며 쏟아낸 잠언은 읽는다고 해도 `해독(解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에는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경우 내가 `해석`이라 부르는 하나의 모범을 이 책 세 번째 논문에서 보였다 : ㅡ 이 논문의 맨 앞에는 하나의 잠언이 놓여 있으며, 논문 자체는 이에 대한 주석이다. 물론 이와 같이 읽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는 가장 잘 잊혀진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ㅡ 이렇게 잊혀졌기 때문에 내 저서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ㅡ .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 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는 되새김하는 것[反芻]을 말한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맨슨 2016-06-1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을 `저자와 주파수를 맞출 때`까지 난이도가 덜한 책부터 읽어나가야겠습니다.
모든것에는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을 것인데... 순서를 건너띄고 읽는 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저자의 책들도 다같은 난이도가 아니고 어떤책을 먼저 읽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표시도 없기 때문에 그걸 찾는것도 쉽지만은 않을것 같습니다.)

단번에 어려운 책을 읽을려고 했던 것이 오판이었던 같습니다. (어차피 저에겐 어려운 책이라 몇장도 넘기지 못하고 덮었지만 말입니다.)

oren 2016-06-19 15:30   좋아요 0 | URL
어떤 분들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월든』같은 책조차 어려워 하는 경우도 있더군요.(이 책은 제가 한꺼번에 여러 권을 사 두고서, 주위에 가끔씩 `책읽기`을 좋아하신다는 분들을 만나면 선물로 드리기도 하는데, 나중에 `그 책이 어떻더냐`고 물어보면 `어려워서 읽다가 관뒀다`고 하는 경우를 종종 봤거든요.) 『월든』이 어려우면 『소로우의 일기』나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등을 읽고 난 뒤에 『월든』『주석달린 월든』『소로우의 강』으로 차츰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나 좋은 독서 경험`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소로우가 정작 가장 사랑했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했던 책은 <강>이었고, 어떤 독자든 알맞은 `출발점`를 골라 독서 여정을 정말 제대로 시작했더라면 무사히 `거기까지` 가 볼 수도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 * *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하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다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 『소로우의 강』뒷표지 중에서
 

 

 

나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책 한 권으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다 ㅡ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 ······

 

 - 니체, 『우상의 황혼』중에서

 

 

 * * *

 

다음의 격언은 오랫동안 내 좌우명이었는데, 나는 이 격언의 출처를 식자적 호기심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솓는다increscunt animi, virescit volnere virtus.

 

 

어떤 경우에는 나는 다른 회복 방식을 더 환영한다. 우상들을 캐내는 방식을 ······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 이것이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못된 눈길'이자, 나의 '못된 '이다 ······ 여기서 한번 망치를 들고서 의문을 제기해본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부풀어오른 창자가 울려대는 그 유명하지만 공허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ㅡ 그 소리는 귀 뒤에 다른 귀를 또 갖고 있는 자를 어찌나 황홀하게 하는지 ㅡ 늙은 심리학자이면서 민중의 유혹자인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하는지. 내 앞에서는 계속해서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것도 소리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

 

 

 * * *

 

뭐라고? 네가 찾고 있다고? 너를 열 배, 백 배로 늘리고 싶다고? 추종자를 찾는다고? ㅡ 차라리 를 찾아라!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만족하면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는다. 잘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감기 걸리던가?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이전에 양심은 물어뜯을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얼마나 좋은 이빨을 가졌던가?그런데 오늘날은? 뭐가 부족한 것일까?" ㅡ 어떤 치과의사의 의문.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한 번만 경솔한 경우는 드물다. 첫 번째 경솔한 행동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너무 지나치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통상 두 번째 경솔한 짓을 한다 ㅡ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너무 미약하게 행동한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밟힌 지렁이는 꿈틀거린다. 똑똑한 일이다. 지렁이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것에게 밟힐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도덕언어로 말하면 : 순종한다.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거짓과 가장에 대한 예민한 명예관념에서 나오는 증오가 있다 : 거짓이 신의 계명에 의해 금지되는 경우에 그 증오는 겁에서 연유한다. 거짓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겁이 많아서 ······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네가 앞서서 달리고 있다고?목자로서? 아니면 예외자로서? 세 번째 경우는 탈주자일 것이다 ······ 양심에 관한 첫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네가 진짜인가? 아니면 배우일 뿐인가? 대변자인가? 아니면 대변된 것 자체인가? ㅡ 결국 너는 한갓 모방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 양심에 관한 두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너는 방관자인가? 아니면 관여하는 자인가? ㅡ 아니면 눈길을 돌리는 자, 외면하고 가는 자인가?  ······ 양심에 관한 세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너는 같이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앞서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홀로 가기를 원하는가?  ······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심에 관한 네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자기 방어 본능

 

이 모든 것에서 ㅡ 영양 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에서 ㅡ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스스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자기 보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 ㅡ 이것은 첫째가는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점에 대한 첫째가는 증거이다. 이런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다. 이것은 긍정이 곧 '무사(無私)'를 의미할 때에는 부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뿐 아니라 가능한 한 부정을 하지 말라고도 명령한다. 계속 되풀이되는 부정을 필요로 하게 될 만한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분리하라고 명령한다.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 하더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며 엄청나면서도 전적으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시킨다는 합리적 이유에서다. 우리가 하는 중대한 지출은 지극히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이 모인 것이다. 방어하는 것, 다가오지-못하게-하는 것은 하나의 지출이며 ㅡ 여기서 혼동하지 마시라 ㅡ , 너무 부정적인 목적들을 위해 낭비되는 힘이다. 지속적인 방어의 필요 때문만으로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버릴 수 있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8 

 

 * * *

 

모든 피토레스크한 인간들을 주의하라!

 

꾸며진 포즈의 파토스는 위대함에 속하지 않는다 ; 누군가가 포즈를 필요로 한다면 그는 가짜······ 모든 피토레스크한 인간들을 주의하라! ㅡ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유희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아주 최소한이더라도 압박, 우울한 표정, 목소리의 거친 음조들, 이런 것들은 전부 한 인간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강한 이의 제기인 것인지! ······ 튼튼한 신경을 가져야 한다 ······ 고독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역시 하나의 이의 제기다. ㅡ 언제나 내가 겪은 괴로움은 오로지 '다수' 때문이었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10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6-05-2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니체 전집이 엔날에 청하에서 나온 거 하고 책세상에서 나온 두 판본이 있는데요, 청하 전집 중 한 권인 <서광>은 책세상 본에서는 어디 있는지요? 제목을 찾아봐도 <서광>이 없는 거 같아서 다른 책에 껴 있는 거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

글구 저는 청하본 전집을 7권 갖고 있는데요, 책세상 본의 가독성이 어떤지 몰라 청하본을 버리고 새 판본을 사야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읽은 적이 없어 고민이 됩니다. 이 부분도 문의드려 봅니당~

oren 2016-05-23 16:07   좋아요 0 | URL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서광』은 책세상에서 나온 전집의 『아침놀』과 같은 책이랍니다. 원제목을 번역하는 사람마다 달리 표현하다보니 너무나 다른 책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저는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읽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무의미의 축제』라는 작품을 두고 어떤 저명한 문학가는 자신의 글 속에서 <하찮은 것들의 잔치>라고 언급해 놓았더군요. 똑같은 작품을 두고 저렇게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지만 두 제목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결코 적잖다는 점에서 제법 놀랬답니다. 다시 니체로 돌아와서 얘기하자면, 저도 여태껏 니체의『아침놀』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어쨌든 그 책의 내용을 짐작케 할 만한 대목을 참고삼아 여기에 덧붙여봅니다.

* * *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화약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 전투가 : ㅡ 예민한 코를 가지고 있는 자는 화약 냄새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훨씬 더 좋은 냄새를 맡을 것이다. 이 전투에는 큰 포격도 없고 작은 포격도 없다 : 이 책의 효과가 부정적이라도, 그 수단이 그만큼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수단의 효과는 포격의 경우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추론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경외되고 심지어는 숭배되기까지 했던 모든 것을 어려워하며 조심스러워했던 일이 이 책으로 작별을 고한다. 이런 식의 작별과, 그리고 이 책 전체에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으며 공격도 악의도 없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ㅡ 그리고 그 책이 심지어는 태양 아래 놓여 있다는 것, 완숙하고 행복하게, 바위 틈에서 햇볕을 쪼이는 어떤 바다동물과도 같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결국 나 자신이 바로 이 바다동물이었다 :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이 제노바 근처의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위들 사이를 종횡무지 쏘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다. 거기서 나는 혼자 있었으며 바다와 비밀을 공유했었다. 지금도 우연히 그 책을 들추면, 거의 모든 문장이 내게는 저 깊은 곳에서 비할 바 없는 어떤 것을 다시 끌어올리게 하는 뾰족한 끝이다 : 이 책의 전 피부는 회상의 부드러운 전율로 떨고 있다. 이 책은 가볍고도 소리없이 스쳐가는 것들과 내가 신적인 도마뱀이라고 부르는 순간들을 어느 정도 고정시키는, 하찮치만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다 ㅡ 하지만 저 불쌍한 도마뱀을 간단히 꼬챙이로 꽂아버리는 젊은 그리스 신의 잔인함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즉 펜을 써야 했다 ……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ㅡ 이 인도의 비문이 이 책 출입구에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다시 새로운 아침을 여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은근한 붉은빛을 찾는가? ㅡ 아아, 새로운 날들의 연속과 새로운 날들의 세상 전체를 여는! 그것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아침놀> 중에서

oren 2016-05-25 21:37   좋아요 0 | URL
니체의 『아침놀』은 (제법 여러 곳에서) 『여명』으로도 번역되는가 봅니다. 오늘 우연히 펼친 책 속에서도 『여명』이라고 번역된 `생생한 현장`을 발견했답니다.
* * *
니체에 의하면 철학자는 ˝자신이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한 생각들과 사물들을 연역과 변증의 기만적인 배합으로 날조해서는 안 된다. (……) 우리 생각들이 우리에게 온 그 효율적인 방식을 변질하거나 감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심오하고 가장 무궁한 책들은 언제나 파스칼의 『팡세』의 그 급작스럽고 잠언적인 특성을 지닐 게 분명하다.˝

˝우리 생각들이 우리에게 온 그 효율적인 방식을 변질하지 말 것.˝ 나는 이 명령을 비범하게 여긴다. 또한 『여명』을 시작으로, 그의 모든 저서에서 모든 장이 단일 단락으로 기술되었음에 주목한다. 이는 어떤 생각이 단숨에 이야기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생각이 빠른 속도로 춤추듯 철학자에게 뛰어와 스스로를 드러낸 모습 그대로 고정되게 하기 위함이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6부 작품과 거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