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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에 있어서 ‘남천참묘의 공안’이 갖는 의미



yamoo 님께서 이번에 소설 『금각사』를 무려(?) 세 번째로 읽고 나서 쓰신 '남천참묘의 공안'이라는 글 내용이 한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비록 그 소설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yamoo 님께서 올려주신 흥미로운 글들을 읽으니 마치 그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금방이라도 제 눈 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그런데 저는 yamoo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제가 최근에 읽었던) 막스 베버의 글 내용 가운데 일부가 희미하게 겹쳐 떠올라 약간은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막스 베버 또한 '근대적 인간의 삶'을 바로 '행위와 체념'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쌍'에 입각해서 접근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우연하게도 yamoo 님의 글 내용과 갑작스레 어떤 연관을 맺게 된 모양이니까 말이지요. 더군다나 베버가 그렇게 꿰뚫어 본 내용 가운데 일부는 그 유명한 '괴테의 걸작 소설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서 yamoo 님의 글과 일말의 '선택적 친화력'을 지닌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yamoo 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막스 베버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신 기억도 새삼 떠오르고 해서 이렇게 무턱대고(?) 먼댓글 형식으로나마 제가 떠올린 그 부분을 '밑줄긋기' 하듯이 올려 볼까 합니다.

 * * *

 

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자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행위에 의해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스스로 창조하는데, 이는 괴테가 『잠언과 성찰』에서 한 다음과 같은 격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안 되고, 행위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네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써라.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 그런데 너의 의무는 무엇인가? 일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 베버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 칼뱅주의는 다른 어떤 신앙 형태보다 사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이 역시 수동적인 관조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에 칼뱅주의 윤리의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괴테의 명제가 적용되었다. "행위하는 자는 언제나 비양심적이다. 양심을 가진 자는 관망하는 자뿐이다." 결국 베버는 칼뱅주의의 행위윤리와 괴테의 행위윤리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인의 인격 및 근대의 문화와 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대한 베버의 논리 전개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즉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마지막 부분에서 '행위'(Tat, Handeln)를 '체념'(Entsagen)과 결합하고 있다. 체념이란 개인의 삶을 전문적 직업노동에 한정하며 다방면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행위와 체념은 근대인의 특성이자 숙명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베버가 보기에 이 둘의 관계는 괴테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와 희곡 『파우스트』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근대적 직업노동이 일종의 금욕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다방면에 걸친 삶을 살려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위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되며, 따라서 '행위'와 '체념'은 오늘날 불가피하게 서로를 조건 짓고 제약한다. 시민계층적 생활양식의 이러한 금욕주의적 기조─이 생활양식이 무(無)양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양식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기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는 이미 괴테도 그 삶의 지혜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통해 그리고 희곡의 주인공 파우스트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괴테에게 이러한 인식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시대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그러한 시대 역시 우리의 문화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 비단 직접적으로 경제적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5)

35) Max Wever,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P. 203[364∼365쪽]

 


베버에 따르면 행위는 각 개인이 세계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정립하고 이 세계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전제한다. 그는 이러한 의지와 능력을 인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인격은 불가피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한정적이고 일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바로 괴테가 그의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한 내용이다. 이처럼 베버의 인격 개념과 괴테의 인격 개념은 본질적으로 '선택적 친화력'을 보여준다. 선택적 친화력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밖에도 베버는 1917년의 강연 '직업으로서의 과학'(Wissenschaft als Beruf)에서 괴테같이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한 시도는 예술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행위와 체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가의 인격도 이 행위와 체념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베버에게 괴테가 가지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 방금 언급한 ─ '선택적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이라는 개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인식 과제를 "일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 사이에 과연 그리고 어떤 점에서 특정한 '선택적 친화력'이 인식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경우 종교적 이념이 생활양식의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사실 일견 하등의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 범주 사이에 이처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진술일 따름이다. 인간의 문화적 삶에서는 내적·정신적 요소들과 외적·물질적 요소들 사이에 아주 다양한 관계가 성립한다. 즉 저해하는 관계, 중립적인 관계 또는 정초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방적 관계나 상호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이처럼 경험적으로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다양한 양태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역사적 개연성에 대한 방법론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베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선택적 친화력'인 것이다.

 

선택적 친화력이란 개념이 처음 사용된 곳은 화학이다. 화학자들은 이 개념으로 원소들 사이의 결합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다가 1809년에 출간된 괴테의 소설 『선택적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에 의해 인간 세계에 적용되었다. 베버는 바로 이것을 역사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사유에 도입했던 것이다.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옮긴이 해제 <종교 ·경제 ·인간 ·근대>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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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 몽테뉴

 

 * * *

책읽기 혹은 책 구매에도 엄연히 '순위'가 있다는 걸 늘상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다그치기도 하는, 그런 곳이 다 있을까? 정말 있다. 바로 이곳 알라딘이다. 잊을 만하면 '결코 잊지는 말라'고 애써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게 상술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 '순위표'를 들여다보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실망한다. 설마 거기에 분노하는 사람들까지야 없으리라 믿고 하는 얘기다.

'책읽기'를 둘러싼 (알라딘 내에서의) 제반 활동에 대한 '종합 명세서'는 아무래도 연말이 가장 알찬(?) 듯하다. 그렇다고 제 생일에 슬며시 내미는 중간 명세서가 그리 허접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 되기도 전에 뜬금없이 펼쳐보게 된 '중간 정산 내역'이 무려 16개 항목에 이른다. 그 가운데 내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항목 몇 가지만 '나'를 기준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싶다.

①  599권, 247,178페이지

 

대략 2003년에 알라딘에 둥지를 튼 셈 치고는 그리 많은 책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조리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책을 사는 데 꽤나 신중한 편이어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평균 쪽수가 412쪽에 이르는 점도 그리 기분나쁜 수치는 아니고.

 

 

② 8,380,120원, 7,530번째




책을 사들인 금액이 '많다'는 생각은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적으면 적었지 많다는 쪽으로는 좀처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책에 대해 지출하는 비용이라 여긴다. 그러니 저 금액에 대해서 내가 무슨 특별한 느낌이 들 리 있을까. 그런데 7,530번째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1번째(전국 수석?)일 테고, 또 분명 어느 누군가는 100,000번째일 텐데, 각자 자신의 '순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하다. 나는? 글쎄? 이 순위가 하필이면 왜 학력고사때 받아든 실망스러웠던 전국 석차와 비슷할까?


③ 50대, 1,494번째


나는 아직까지도 '50대'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책 구매 금액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노년의 주름살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④ 일산동구, 563번째


연령대별 분석에 뒤이어 지역별 분석까지 내놓으니 마치 '지역별 투표 성향'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내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다른 동네와 특별히 다를 건 없지 싶다.



⑤ 북플 마니아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뢰도'를 매우 낮게 평가하는 입장이어서 뭐라 말하기 곤란한데, 유독 생명과학/심리학/정신분석학/뇌과학 분야에서 '한 손' 안에 든다고 한다. 내가 저런 분야의 책을 그토록 열심히 읽었었나 싶다.

 


⑥ 80세까지 1,590권


이번에 알게 된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다. 나는 대략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1,000권의 책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자세히 따져보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도 '독서 의욕'이 차츰 떨어질 테고, 언젠가는 눈도 침침해 질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계속 책을 읽는다면 무려 1,59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쁘다. 아직도 늦지 않았구나, 앞으로 죽기 전까지 '이름만 들었던' 숱한 명저들을 차례차례 섭렵해보자, 이런 생각부터 앞선다. 알라딘이 아니라면 쉽게 내밀 수 없는 '잔존 독서량 예측'이 아닐 수 없다 싶다. 결론은 매번 뻔한 데도 이렇게 불쑥 내미는 명세서가 매번 궁금하니 나 원 참...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중에서

 

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150701_16th_records&custno=6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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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7-03 00:02   댓글달기 | URL
멋진 분석이십니다. 80세까지 쭈욱! 같이 읽어요^^

oren 2015-07-03 08:44   URL
보물선 님의 `명세서`는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님께서 80세까지 쭈욱 `지금처럼` 읽으시면 아마 100층도 쉽게 넘길 듯해요! 화이팅입니다.

2015-07-03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3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오오,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되돌아오는

이 지하 세계를 다스리시는 신들이시여. 거짓말과

애매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고

또 그대들이 허락해주신다면, 내가 이리로 내려온 것은

어두운 타르타라를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메두사 같은 괴물의,

뱀들이 친친 감고 있는 세 개의 목에 사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리로 온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발에 밟힌 독사가

그녀에게 독을 퍼뜨려 그녀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갔으니까요.

나는 참고 견딜 수 있기를 바랐고, 아닌 게 아니라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하나 아모르가 이겼습니다.

그분은 여기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계(上界)에서는

잘 알려진 신이지요. 아마 여기서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옛날의 납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아모르는 그대들도 맺어주었습니다. 공포로 가득 찬 이 장소들과,

이 거대한 카오스와, 이 광대한 침묵의 왕국의 이름으로 청하옵건대,

너무 일찍 풀린 에우뤼디케의 운명의 실을 다시 짜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대들에게 귀속됩니다. 잠시 지상에서

머문다 해도 머지않아 우리는 한곳으로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는 이곳으로 향하고,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거처이니

그대들이 인간의 종족을 가장 오랫동안 통치합니다.

그녀도 명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그대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내 아내에게 그런 특혜를 거절한다면 나는 단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죽게 되니 그대들은 기뻐하실런지요!"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 * *

 

어느날 느닷없이 뻥 터져나온 '신경숙 표절 사건'도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난 듯하다. 그동안 내가 이 사건을 바라보며 떠올린 '낱말들'만 여기에 주욱 나열하더라도 아마 몇 줄은 족히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나는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여러 글들을 틈날 때마다 제법 열심히 찾아 읽었다. 물론 내가 온갖 다양한 매체에 올라온 글들을 '심각한 이해당사자'가 된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핀 건 아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멀찍이 떨어져 이번 사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구경꾼'의 심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번 일을 바라보며 떠올렸던 낱말들이라고 해봐야 다른 대다수 사람들의 마릿속에 떠오른 그것들과 그리 다를 리는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나고, 한심스럽고, 참담하고, 어이없는' 그런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들, 가령 거짓말, 사기, 속임수, 분개, 오만, 몰염치... 와 같은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도 결국 그 오랜 유래를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유달리 남의 흉내를 내는 데 타고난 소질을 발휘한다. 모방 본능은 사람의 본성 가운데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뿌리깊은 본능이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글쟁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몽테뉴가 이미 오래 전에 '인류의 모방 본능'에 대해 유난히 깊은 관심을 쏟은 끝에 그 점에 대해 아주 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 놓았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사실 몽테뉴보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학의 기원 또한 '모방'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명백히 밝혀 놓았을 정도이다. 훌륭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인류 역사 발전의 근원적인 힘을 결국 '모방'에서 찾을 정도였다. 그러니 도대체 참을 수 없는 뿌리깊은 욕망인 '모방 본능'을 그 누가 무작정 탓할 수가 있겠는가.

 

모방한다는 것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에서 


그런데 다른 일도 흔히 그렇지만 '본능' 또한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긴 인간의 욕망 가운데 타고난 본능대로 몸을 움직일 경우 대략 낭패를 보지 않을 욕망이 과연 얼마쯤이나 있을까마는.

 

어쨌든 우리 모두는 결국 필멸의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결국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떠올리기조차 싫어하는 그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애써 찾아간 인물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문학 역사상' 아주 걸출한 주인공들 가운데 아주 가끔씩 나타났다. 굳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쓴 위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던 오뒷세우스나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그런 인물들의 '중차대한 임무'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그들의 절박한 얘기조차 우리들 가슴에는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오르페우스이다. 노래 하나로 온 우주를 감동시켰다는 전설의 가인 오르페우스만큼 '절절한 심정'으로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인물이 또 있었을까.

 

물의 요정들을 데리고 풀밭을 거닐다가 뱀 이빨에 복사뼈를 물려 꽃다운 나이에 덜컥 딴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아내 에우뤼디케의 신랑이 바로 전설의 가인(佳人) 오르페우스였다. 아내를 잃고 살아갈 의욕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에게 남겨진 일이란 오로지 '저세상 끝까지 다 뒤져서라도' 기어코 아내를 다시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에우뤼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부분)
장 레스투(Jean Restout), 18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그가 저승에 당도하자말자 '사랑스럽지 못한 왕국'을 다스리는 명부의 신들에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히는 대목이 자못 인상적이다. '거짓말과 애매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자신은 바로 아내 때문에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도대체 얼마나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많았으면, 그래서 지하 세계의 신들조차도 허구헌 날 지겹도록 들어야만 했을 지 모를 바로 그 '거짓말과 애매한 말'을 자신은 결코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부터 먼저 꺼내는 오르페우스를 보라.

 

'말만 하면 곧바로 시가 되는 바람에' 수입이 좋은 변호사 직업조차 포기할 만큼 타고난 시인이었던 오비디우스조차도 '남을 속이는 거짓말'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의 입에서 떨어지기 힘든 지를 결코 모르지 않았다. 오르페우스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아내인 에우뤼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찾아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혹여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끼어들어 (신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망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조바심을 내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신화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신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임엔 다르지 않다. 그리고 누구라도 살아가는 동안 얼마쯤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그게 심각한 거짓말이든 사소한 거짓말이든 별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그 거짓말을 얼마쯤 할 수밖에 없을 당시의 '상황'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속담을 꺼낼 필요까지도 없다. 백주대낮에,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자신이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도 남들이 전부 바보가 되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이 결국 그렇게 풀리고 나면 그 자신은 아마도 평생을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심지어는 죽고 난 이후까지도 '영원히'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자주 거짓말쟁이들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 '허황된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만과 허영'이 그런 거짓말을 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종용하기 마련일 테고 끝내 사람들은 나약하게도 거짓말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명망있던 사람들이 '거짓말' 때문에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줄기세포 가짜 논문으로 온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립 서울대 박사와 숨겨놓은 아들을 두고 유전자 검사까지 자청했던 전직 검찰총장은 '그날 이후'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행방조차 묘연할 정도이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경제학자보다는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훨씬 더 명망이 높았던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도덕 감정'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인물이다 .'인간의 유래와 진화'에 대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찰스 다윈조차도 그에게 한 수 배웠을 정도이다. 그런 아담 스미스가 '수치심'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형태로 끝없이 타오를 '보복의 화염'을 놓쳤을 리는 만무하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어쨌든 '거짓말과 애매한 말'로 남을 속이는 '배반과 기만'은 참으로 몹쓸 악덕이다. 그에 따른 악영향 또한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자연히 '치욕'이라는 관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핑커 또한 인간 심리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거짓말쟁이를 구별하는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에게 치명적으로 나쁜 것이었던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 아담스미스, 『도덕감정론』 중에서


 

오래 전에 진작 내려졌어야 마땅할 어느 작가의 작품에 대한 '표절 확진 판정'이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을 끌고 나서도 여전히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그 작가는 도대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을 두고도 그토록 애써 '진실'을 감춘 채 앞뒤조차 맞지 않는 거짓말을 태연히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거짓말쟁이들을 넓은 아량(?)으로 계속 용서해줘야 할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가짜'에 대한 판별이 이토록 어리숙하고 흐리멍덩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애살수(懸崖撒水)라는 말이 있다. 벼랑(崖)에 매달려(懸) 잡고 있는 손(手)을 놓는다(撒)는 뜻이다. 찾아보니 송(宋)나라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偈頌)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 '붙잡은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방하착(放下着)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꾸로 '단축'하고 만다. 마치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는 원숭이가 호리병 속에 담긴 먹이를 손에 움켜쥔 채 '아침이 될 때까지' 손을 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알제리 농부에게 붙잡히는 꼴과도 닮았다. 스스로도 표절한 사실조차 모른다고 발뺌을 하는 작가를 보니 자꾸만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손에 움켜쥔 먹이는 끝내 놓치기 싫어하는 우리의 머나먼 옛 조상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느낌을 좀처럼 떨쳐내기 어렵다.

 

원숭이의 욕심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내버리는 방식은 원숭이의 욕심을 연상시킨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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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무거워질까 두려워 끝내 이 글에 담아내지 못한 책 속 구절들)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트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737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손에 든 무기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
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유감이오, 친애하는 선생. 정말 유감이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건 원칙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오.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당신은 정말 멋진 소장품들을 갖고 있소. 그러니 이번엔 솔직하게 당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난 작품의 진위 문제에 대해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소. 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확실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 ······. 당신의 반 고흐 작품은 가짜요. 그 불행한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배반을 맛보았소. 적어도 사후에는 우리가 그를 배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잖소."

"말 다했소?"

 

"놀라운 일이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이 내게 그런 조작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 로맹 가리,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짜>  중에서

 

 

오만(傲慢)한 사람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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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의무론』을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평일엔 책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틈날 때마다 계속 붙잡고 읽고 있다. 책을 펼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의 다 읽었다. '도덕'을 다룬 옛 고전 가운데 이토록 재미있는 책도 다 있었나 싶다. 어느새 스무 쪽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이토록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명백히 '요즘 뜨는 뉴스들' 덕분이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역사적 사례들이나 비유들을 읽으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실 속 인물들과 상황들'이 자꾸만 겹쳐 떠오르니 어찌 책 읽는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이 <도덕적 선에 대하여>, 제2권이 <유익함에 대하여> 제3권이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이다. 이렇듯 겉으로만 살피면 책의 내용이 여간 따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3권의 중반부에 실린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을 다루는 부분까지 읽게 되면 너무나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망라되다시피 실려 있어서 책 읽는 재미가 정말 '깨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런 책을 읽는 재미를 두고 저런 표현을 한다는 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줄 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오늘 읽은 구절 가운데 정말 인상적인 대목 하나는 바로 다음 내용이다.(이 대목의 앞부분부터 인용하자면 너무 많은 부분을 끌어와야 하겠기에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전혀 그렇지 않다. 바다 한 가운데에를 항해할 때 선주는 배가 자기 소유라 해서 배에서 승객을 깊은 바다물 속에 절대로 내던져 버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객들이 운임을 냈을 때 그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승객들이 빌린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선주의 것이 아니라 승객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을 무렵에 떠오른 '새로운 뉴스'는 바로 다음 내용이었다.(이 뉴스에 대한 인용 역시 앞부분과의 '형평'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저 쓸데 없이 내 글이 자꾸만 길어질까 두려워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또 "'주기장 내에서 겨우 17m 후진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항로 변경이 아니라는 말은 법을 제일 잘 아는 변호사들이 할 말이 아니다"며 "모든 변호사는 음주운전을 1m를 했든 10km를 했든 음주운전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항 중인 항공기를 위력으로 돌린 건 명백한 사실이며 팩트"라고 강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8&aid=0003405783&date=201501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1

 

물론 내가 책에서 인용한 내용과 뉴스에서 인용한 내용이 서로 정확히 맞대응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가지 모두 '땅콩 회항'을 연상시킨다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나는 이 두 대목을 그저 억지로 연결시켜 보느라 이 글을 쓰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키케로가 이 책에서 극구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그건 바로 '도덕적 선과 유익함은 결코 상충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 진다. 더군다나 키케로의 이 책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더더욱 헷갈리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그 얘기이니 이 글을 계속 써 보겠다.)

 

이쯤에서 이 책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물론 이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인 만큼 등장 인물들이나 속담 조차도 생소하게 들리는 대목이 적지는 않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곤 했다. 콘술을 지낸 바 있는 가이우스 핌브리아가 정말로 도덕적으로 선한 로마의 기사인 마르쿠스 루타티우스 핀티아의 소송사건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핀티아는 그의 재산을 내걸고 "만약 법정에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재산을 몰수당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핌브리아는 핀티아에게 자신은 절대로 그 사건의 재판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만약 그가 핀티아를 유죄로서 판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에게서 그의 명성을 빼앗는 것이 될까 두렵고, 또 반대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면 이미 수많은 의무 이행과 찬양받을 만한 업적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진 그를 새삼스레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핌브리아가 알고 있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은 무엇이건 간에 절대로 유익한 것으로 보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선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감히 행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말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농부들조차도 의심이라고는 전연 하지 않는 이 윤리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이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부끄러운 불명예의 일이 아닌가? 농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미 진부해진 오래된 속담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의 신의와 착실함을 칭찬할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과는 함께 어두운 데에서 손가락 수를 맞추는 놀이를 할 만해.'43)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다름이 아니라 비록 네가 나쁜 짓을 해도 전연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데코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속담에 비추어 볼 때, 저 기게스나 내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손가락을 움직여 모든 상속자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그런 자에게는, 어떤 변명이나 용서의 여지가 전연 없다는 사실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 바로 그것이 아무리 잘 은폐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은 자연을 거역하고 자연과 상충하면서 유익한 것이 될 수가 없다.

 

43) 현대 이탈리아의 morra. 어두운 데에서 한 사람이 재빨리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펼쳐 보이면서 맞추기를 원하면, 동시에 상대방도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펴서 맞추어 보는 놀이.

 

인용문이 몹시도 길고 낯선 내용들이라 키케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속속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키케로가 무슨 뜻으로 저런 글을 썼는지는 누구라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옮겨 보았다. 더군다나 그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뛰어난 언변과 변론과 웅변술로 '법정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땅콩 회항'을 두고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이는 바로 지금의 '서울의 한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억울한 당사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차원에서, 결코 아무나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묘수'까지 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약자' 신세로 내몰린 채 앞으로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될 그 사람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재벌 총수'까지 재판정으로 불러낸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판 '솔로몬의 판결'이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키케로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는 결국 '도덕적으로 선함'을 포기하고 얻는 '유익함'은 결코 유익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상충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유익함'을 먼저 앞세우기 쉬운가. 그런데 키케로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무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다 보면 결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키케로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고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익함이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신의와 정의로움을 빼앗아 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그 유익함이 너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야수로 바뀌는 것과 사람의 외형만을 지닌 채 야수와 같은 잔인함과 야비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반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파렴치한 권력을 소유한 카이사르를 심지어 장인으로 모시려고 하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장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자기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하며 무익한 것인가를 그는 알지 못했다. 반면 장인 자신은 항상 포에니의 처녀들이라는 그리스의 시를 읊곤 했는데, 나는 정리는 잘 안되지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해 보겠다.

 

법이 범해져야 한다면,

왕이 되기 위해서나 범법이 행해져야 하리라.

다른 경우에는,

경건한 마음을 품고 범법하지 말지니.47)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추악한 한 가지를 취한 사람은 에테오클레스48)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49)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47) Euripides: Phoenissae, 5, 524 

 

48) Eteocles: Thebes의 왕, Oedipus의 아들인 Eteocles와 Polynices 형제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통치하기로 하고 먼저 형인 Eteocles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혼자 통치하기 위해 약속된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동생 Polynices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추방하였다. 그 결과 형제가 전쟁을 하다가 서로의 손에 둘 다 죽었다.

 

49)Euripides(B.C. 480∼406): 아테네의 비극시인. Anaxagoras의 제자이며 Socrates의 친구.

 

위의 인용문에서 '키케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포이니케 여인들』을 조금 더 들여다 봐야 한다. 그 작품을 소개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의 글만큼 명료한 것도 드물다.

 

『포이니케 여인들』작품 소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번갈아 가며 테바이를 통치하기로 약속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자 아르고스로 망명한 폴뤼네이케스가 이른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하러 온다.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가 두 아들을 화해시켜보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인 크레온의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면 에테오클레스와 테바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다. 아르고스군의 공격이 격퇴되자, 두 형제가 일대일로 결투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결투에서 두 형제가 서로 죽이자 이오카스테가 절망하여 칼로 자결하고, 그들의 누이 안티고네가 이 소식을 오이디푸스에게 전한다. 크레온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지 말고, 눈먼 오이디푸스는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결혼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랑길에 오르며 돌아와서 폴뤼네이케스를 몰래 묻어주겠다고 말한다.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 유명한 비극이 바로 스티븐 핑커가 문학 작품에서 '영원한 공식'이라고 말한 그 '형제간의 비극'을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이다. 키케로의 책에서 인용된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겨우 네 줄만 인용된 저 '짧은 대목'만 읽으면 얼핏 '왕이 될 정도로 대단한 야심을 가졌을 경우에나 법을 무시할 일이지, 그 외의 다른 경우라면 그저 법을 지키며 조용히 살 노릇'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의 참뜻은 그게 아니다. 자신의 동생에게 절대로 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그 대목을 조금 더 끌고 와 보면 이렇다.

 

이오카스테

······

내 아들 폴뤼네이케스야,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너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다나오스 백성들의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말이다. 제발 신들 중에

한 분이 재판관이 되시어 이 불화를 중재해주시기를!

 

폴뤼네이케스

진리의 말은 원래 단순하며, 정당한 요구에는

현란한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 요점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당한 주장은 속으로 병들어 있어

그것을 치유해줄 궤변이 필요하지요.

······

 

에테오클레스

······

제가 통치할 수 있는데, 저더러 이자의 노예가 되라고요?

그러니 불을 가져오고, 칼을 가져오고, 네 말들에

멍에를 얹고, 들판을 네 전차들로 메워보려므나.

그래도 나는 왕권을 너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불의한 짓을 해야 한다면, 왕권 때문에 불의한 짓을 하는 게

가장 아름답지.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경건해야 해.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인용문'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알고 보니 삼모자(三母子)가 '왕권'을 다투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코 앞에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형국에서 나온 '절박한 말들' 가운데 일부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이었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들 형제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오라비들의 싸움 때문에 어머니마저 잃고 졸지에 비극의 한가운데로 곧장 내던져진 저 가엾은 안티고네는 눈 먼 장님이 된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머나먼 방랑길'을 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키케로가 저 대목에서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하는 말이 이쯤에서 좀 더 확실하게 이해되고 나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더욱 커진다.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댈러스 미술관

 

 

어쨌든 나로서도 키케로의 책에서 등장한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할 때'의 얘기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땅콩 회항 사건의 그 '문을 닫고 비행에 나서기 시작한 때'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명쾌하게 정리는 잘 안 되지만 약간이나마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키케로의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현실 속의 뉴스가 서로 뒤엉켜 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독자는 늘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이나 상황을 함께 떠올리면서 그 책을 읽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함께 떠오른 여러 현재의 상황들 때문에 이 따분해 보이는 책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마침 이 책은 키케로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수감된 딸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딸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도 '책'이 빠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책도 좀 읽고 수양의 기회로 삼아라'는 소식이 들려오니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서양의 논어'라고 불릴 정도이니 '수양'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라 할 만하다. 가끔씩 너무 완벽한 '도덕 군자'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우긴 하지만 말이다. 끝으로 '옮긴이의 말' 가운데 일부를 덧붙인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이 책에 대해 '볼테르가 한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서 코웃음을 칠 뻔 했는데,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부터는 그 사람의 말이 정말 틀린 게 조금도 없구나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어서 차마 그 얘기를 빼놓기 어려웠다. 이렇게 주렁주렁 책 속의 글을 끊임없이 덧붙이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욕심'인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그럼 이만 총총...

 

··· 그리하여 이 책은 서양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로서 서양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특히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키케로의 연구자 내지 찬양자들이었고, 근대 정치 사상가인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도 키케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볼테르가 1771년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나, 프레데릭 대왕이 "지금까지 씌어졌거나 씌어질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한 말은 모두가 진실이다.

 

아, 참,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적어도 볼테르가 한 말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 가운데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아예 없었던 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극소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도덕감정론』을 쓴 아담 스미스였고, 또 한 사람은 아마도『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이 사람들이 쓴 책까지 이 글에서 언급한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고, 이 글을 정말 웃기게 만드는 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글은 여기서 정말 '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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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식

자연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감정을 살짝 어긋나게 조율하는 잔인한 장난을 쳤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시대의 소설가와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두 명의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세 가장 강한 끈으로 묶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때때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적 가능성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비극적 이야기가 가족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 명의 형제가 서로 싸우다 죽는 이야기에 비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 마이클과 프레도, 제이알과 바비, 프레지어와 나일스, 요셉과 형제들, 리어왕과 딸들, 한나와 자매들 ·······, 수세기에 걸친 드라마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가의 증오"와 "일가의 적대"는 영원한 공식이다." (466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467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755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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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5-01-24 13:06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yamoo 2015-01-23 15:19   댓글달기 | URL
헐~ 오렌님의 이 글을 읽으니 키케로의 <의무론>을 바로 읽어야 겠습니다. 책도 바로 잡히는데 있거든요..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1-24 13:05   URL
yamoo 님께서는 이미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놔두고 계셨군요.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후딱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라틴어 원문`을 빼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지요..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제 생각으로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겪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는 보통 사람들`의 손과 가슴까지 뜨겁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 * *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붉은돼지 2015-01-29 05:49   댓글달기 | URL
빈서판도 읽어봐야겠어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여러분이 추천하고 있지만 왠지 손이 안갔는데 오렌님 글을 보니 문득 읽고 싶은 생각이...ㅎㅎ
키케로도 물론이구요.

oren 2015-01-29 16:48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oren 2015-01-29 16:48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솜씨 서툰 활잡이 바보

 

활을 쏘려는가? 잘 겨냥해서 명중시키게!

과녁에 빗맞으면

화살이 바보배로 날아갈 테니까.

 

궁수들을 싸잡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바보 활잡이가 활쏘기하는 이야기도 다루어보세.

내가 이곳 바닷가에 활터를 벌였다네.

과녁에서 빗나가면 꽝일세.

활쏘기 시합에 걸린 상금은

과녁 정중앙에 가장 가까이 맞히고

마지막 경합에서 우승한 궁사가 차지할 몫일세.

목표를 정확히 노리고 신중하게 쏘아야지,

화살이 밑으로 빠지거나

들떠서는 안 된다네.

서둘지 말고 침착하게 과녁을 겨냥하게나!

대개는 화살을 너무 높이 날려서 실패를 보지.

활이 부러지고, 활시위가 끊어지고,

격발장치가 튕겨나가네.

활시위 으랏차, 당기다가 아차차, 놓치고,

용을 끙끙 쓰다가 의자나 석궁 받침대가 뒤틀리네.

살짝 건드렸는데 석궁이 격발되는 건

활시위가 기름범벅이라 그렇다네.

과녁이란 놈이 어디로 달아났나?

어디를 겨냥해야 할지도 헷갈려 하네.

무작정 시위를 당겨라, 소나기처럼 화살을 날려보지만

하나같이 과녁에서 빗나가니,

경품으로 암퇘지나 받아갈 모양일세.

세상천지에 무수한 궁수들을 보았어도

핑계 없는 무덤은 하나도 없더군.

이 구실, 저 구실 쥐어짜면서

체면 세울 변명거리만 찾아내더군.

정말 아슬아슬했다면서, 그것만 보완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큰소리친다네.

······

(208∼209쪽)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중에서

 

 

재앙을 가볍게 여기는 바보

 

재앙이 손끝에 스치는데도

눈치 못 채는 사람은 바보라네.

불행은 업신여김을 싫어하니

부디 지혜롭게 처신하기 바라네.

 

불행을 당하고 속상해하면서

불행을 쫓아다니는 정신 나간 바보들이 있다네.

그러니 배가 가라앉는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네.

불행은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홀로 오는 법이 드물지.

옛 선인들 말씀과 속담이 말한다네.

"불행과 머리카락은 매일 자란다."

불행은 어떻게 끝장날지 모르니

애초부터 싹을 잘라야 하네.

무릇 바다로 나가려는 사람은

행운과 순풍이 필요하다네.

역풍을 거슬러서 항해한다는 것은

달리기를 거꾸로 하는 셈일세.

현자는 바람을 온순하게 다루는 법을 가르치지만,

바보는 굳이 뱃머리를 뒤로 돌린다네.

지혜로운 사람은 손에

노를 쥐고 어려움 없이 육지로 나아가네.

그러나 바보는 어디로 갈까 갈팡질팡하다가

배 한 척 결딴내고 만다네.

현자는 자신과 이웃을 바른 길로 이끌지만,

바보는 어어 하다가 엉겁결에 목숨을 잃지.

······

(315∼316쪽)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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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보배'의 항해일지이다. 어리석음의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의 바다를 지나서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로 향하는 바보배에는 바보들이 가득 타고 있다. 이들은 무지와 죄악의 승선권을 지참하고 바보배에 올랐다. 출항의 설렘과 즐거움에 들떠서 쾌락의 노래를 합창하던 바보들은 타고 있던 바보배가 침몰하고 죽음에 임박해서야 세상의 가치들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바보배'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추는 밝은 거울이다. 글쓴이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세상의 바보들을 모두 끌어 모아서 배에 태우고, 자신도 배에 오른다. 바보배의 뱃머리에서 바보깃발을 붙들고 있는 박식한 바보가 바로 글쓴이의 자화상이다.

 

《바보배》는 1494년 2월 12일 바젤에서 처음 출항했다. 독일어로 쓰인 브란트의 《바보배》는 바젤의 베르크만 폰 올페의 인쇄소에서 출간되었다. 도회의 시민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했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플루타르코스 그리고 성서의 잠언과 시편 등 시대를 뛰어넘는 해박한 인용과 교훈들로 채워진 브란트의 《바보배》는 동시대와 후대의 인문주의적 글쓰기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다. '바보'가 16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의 상징적 열쇠 개념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로테르담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바보 예찬Lobder Torheit》을 쓰면서 브란트의 《바보배》를 사표로 삼았고, 토마스 무르너의 《사기꾼 조합Schelmenzunft》,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e Pantagruel》도 바보들의 유형을 《바보배》에서 빌려왔다.

 

브란트의 제자 야콥 로허가 '호메로스라도 따르지 못할' 스승의 글 솜씨를 칭송하면서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와 페트라르카에 비길 만한 문재로 꼽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또 수도원장 요한네스 트립테미우스가 단테의 《신곡Divina Comedia》에 빗대어 브란트의 《바보배》를 '신성한 사티로스극divina satyra'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동물적 삶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바보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브란트의 《바보배》는 괴테의 《파우스트Faust》와 더불어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바보배》가 출간된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2년 후였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부분 발췌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이 안경은 주인을 책망하고 있다. 여기, 세상을 직접 보려 들지 않고 책장의 죽은 단어를 응시함으로써 세상을 간접적으로 살피려는 사나이가 있노라고. 브란트가 그린 그 얼빠진 독서가는 "내가 바보선(船)에 가장 먼저 오르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책이 인생의 전부여서 황금보다 더 귀중하다. 여기 나는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비록 한마디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백하기를 학문적인 책에서 이것저것 인용하는 유식한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책은 많이 긁어모았지만 지식은 쌓지 못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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