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때로는 간단한 대사 한 구절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가령 "이 한심한 화상아!(Alas, poor caitiff)"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4막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나는 이 대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후 고부 갈등으로 중간에 끼어 힘들었을 때, 첫 직장에서 타의로 퇴직하게 되었을 떄,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돈마저 떼었을 때, 나는 이 대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불쌍해지면서 그런 나 자신을 격려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평생 독서 계획』은 소포클레스 항목에서, 연극은 운명 앞의 절망과 가능성 앞의 희망이 충돌하는 긴장이며 그 긴장의 해소에서 커다란 즐거움이 온다고 말한다. 그런 연극적 상황 속에 나 자신을 설정하면 기이하게도 긴장이 이완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런 간단한 대사에서 삶의 활력을 얻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Egom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배울 때에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대사의 심오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젊은 대학생에게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벅찬 독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읽고 또 배울까? 어릴 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그 가르침의 선견지명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숙을 촉진하는 교육의 본령이고, 『평생 독서 계획』의 원대한 취지이며,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인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 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5∼476쪽)

 

 -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카시오(오셀로가 '연적'이라고 오해한 자신의 부관)가 말한 대사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평생 독서 계획』을 번역한 분(이종인)은 그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라고 해석했지만, 민음사판 전집 시리즈(최종철 번역)에서는 "아, 딱한 천것!"이라고 번역했다. 두 번역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매우 크다. 내가 가진 또다른 오래된 책(『학원 세계문학전집』(전30권), 김재남 번역, 1993년 1월)에서는 "흥, 그까짓 게!" 라고 번역해 놓았다. 도대체 저 대사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걸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조금 복잡하다.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이렇다.

 

온갖 수작을 다 부려서 오셀로를 '질투심으로 미치게 만드는 공작'을 꾸미던 이아고는 4막 1장에 이르러 마침내 비앙카(매춘부, 카시오의 연인)를 끌어들여 '오셀로의 질투심'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이아고는 오셀로를 잠시 물러나게 하고 '카시오의 행동'을 관찰하도록 만든다. 이아고는 카시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비앙카'를 화제에 끌어들여 오셀로가 오해하기 딱 좋은 '카시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데,  오셀로는 그런 카시오의 행동을 자신의 아내인 데스데모나에 대한 카시오의 반응으로 완전히 오해한다. 이아고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둘(카시오와 오셀로) 사이에 끼어들어 '질투심'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아고가 카시오한테 말하기를, '비앙카의 능력'을 이용하여 데스데모나에게 '복직 문제'를 부탁하면 어떻겠냐고 하자, 카시오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Alas, poor caitiff"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비앙카를 "딱한 천것" 혹은 "그까짓 게"로 여긴다는 투다. 그러면서도 카시오의 입가엔 웃음이 걸린다. 오셀로는 카시오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질투심을 더욱 활활 태우는' 연료로 쓰는 데 여념이 없다.

 

극중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의 내용이나 극의 흐름으로 판단해 볼 때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으로는 까마득한 옛날에 나온 책에서 오늘 우연히 발견한 번역인 "흥, 그까짓 게!"라는 표현이 가장 이해하기 쉬워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평생 독서 계획』의 번역자가 말한 내용이 조금 이상해진다. "흥, 그까짓 게!"라는 뜻의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 라고, 다시 말하자면 '자책하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는' 대사로 잘못 받아들인 셈이 되고, 결국 번역하신 분이 오랫동안 그 대사 덕분에 여러 차례 위안을 얻게 되었다는 말도 우습게 변하기 때문이다. 기껏 글을 쓰고 나니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굳이 이런 점까지 말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말이다.

 

"흥, 그까짓 게!"

 

그까짓 대사 한 줄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든다.

 

 

오셀로

알겠나, 이아고?

난 아주 교묘하게 참겠지만 ㅡ 알겠지? ㅡ

아주 잔인할 테야.

 

 

이아고

빗나간 건 아니지만

다 때를 맞추세요. 물러나시겠어요? (오셀로 물러난다.)

난 이제 카시오에게 비앙카 얘기를 물어야지.

그 계집은 자신의 욕망을 팔아서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사는데 고것이

카시오에게 혹했다. ㅡ 많은 사람 속이고

하나에게 속는 것이 그 갈보의 저주니까.

카시오는 그녀 얘길 들으면 넘치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여기 그가 오는군.

 

카시오 등장.

 

그가 지을 미소에 오셀로는 미칠 테고

무식한 질투심을 품었으니 불쌍한 카시오의

미소와 몸짓과 경박한 행동을 완전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부관님, 기분이 어때요?

 

카시오

내 직위를 불러 주니 더욱 나빠지는군,

그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까.

 

이아고

데스데모나를 다그치면 확보하실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런데 이 청이 비앙카의 능력에 달렸다면

얼마나 빨리 성공하겠어요!

 

카시오

아, 딱한 천것!

 

오셀로

봐, 놈이 벌써 웃고 있어!

 

이아고

남자를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는 못 봤어요.

 

 카시오

아, 딱한 잡것, 정말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오셀로

이젠 그걸 살짝 부인하면서 웃어 넘겨.

 

 이아고

들었어요, 카시오?

 

오셀로

이젠 그가 그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네. 허 참, 잘했다, 잘했어.

 

 

이아고

당신이 자기와 결혼할 거라고 하는데

그럴 작정이세요?

 

카시오

하, 하, 하!

 

오셀로

환희한단 말이지, 로마인아, 환희해?

 

 카시오

내가 결혼해! 뭐, 고객이! 제발 내 판단력을 자비롭게

봐 주게, 너무 부실하다고 생각하진 말게나. 하, 하, 하!

 

오셀로

그래, 그래, 이긴 자가 웃는다.

 

이아고

사실, 소문에는 결혼하실 거랍니다.

 

카시오

제발, 올바로 말하게!

 

 

이아고

아니라면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오셀로』, <4막 1장, 90∼125행>

 

 

 * * *

 

 

OTHELLO

 

Dost thou hear, Iago?
I will be found most cunning in my patience;
But--dost thou hear?--most bloody.

 

IAGO

That's not amiss;
But yet keep time in all. Will you withdraw?

OTHELLO retires

Now will I question Cassio of Bianca,
A housewife that by selling her desires
Buys herself bread and clothes: it is a creature
That dotes on Cassio; as 'tis the strumpet's plague
To beguile many and be beguiled by one:
He, when he hears of her, cannot refrain
From the excess of laughter. Here he comes:

Re-enter CASSIO

As he shall smile, Othello shall go mad;
And his unbookish jealousy must construe
Poor Cassio's smiles, gestures and light behavior,
Quite in the wrong. How do you now, lieutenant?

CASSIO

The worser that you give me the addition
Whose want even kills me.

IAGO

Ply Desdemona well, and you are sure on't.

Speaking lower

Now, if this suit lay in Bianco's power,
How quickly should you speed!

CASSIO

Alas, poor caitiff!

OTHELLO

Look, how he laughs already!

IAGO

I never knew woman love man so.

CASSIO

Alas, poor rogue! I think, i' faith, she loves me.

OTHELLO

Now he denies it faintly, and laughs it out.

IAGO

Do you hear, Cassio?

OTHELLO

Now he importunes him
To tell it o'er: go to; well said, well said.

IAGO

She gives it out that you shall marry hey:
Do you intend it?

CASSIO

Ha, ha, ha!

OTHELLO

Do you triumph, Roman? do you triumph?

CASSIO

I marry her! what? a customer! Prithee, bear some
charity to my wit: do not think it so unwholesome.
Ha, ha, ha!

OTHELLO

So, so, so, so: they laugh that win.

IAGO

'Faith, the cry goes that you shall marry her.

CASSIO

Prithee, say true.

IAGO

I am a very villain else.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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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짧은 대사 하나 속에 작품 전체의 내용이 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7-07-09 00:24   좋아요 1 | URL
『오셀로』의 4막 1장에 나온다는 ˝Alas, poor caitiff!˝에 대한 번역이 출판사마다 서로 다르더군요. 『평생 독서 계획』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흔히 쓰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오랫동안 장식품처럼 책장에 꽂혀 있던 ‘학원 세계문학전집판‘ 『셰익스피어』에서 그 대목에 대한 ‘보다 정확한 뜻‘을 알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생 독서 계힉』을 번역하신 분의 말대로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이나 ‘주석‘을 붙이는 이유 또한 궁극적으로는 ‘말이 지닌 결핍과 과잉‘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묘한 '말', 묘한 '욕망'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 몽테뉴

 

 * * *

 

'미처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분을 소포클레스만큼 재치있게 말한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주인'은 물론 '여자와 동침하고 싶은 욕망'을 의인화한 표현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얼마나 그 욕망에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쁨을 격하게 표현했는데, 마침 그 '대화의 현장'엔 케팔레스 옹도 있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그런 얘기가 나오니 말이다.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그래서 내가 말했네. "케팔레스 옹, 나는 연로하신 분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오. 우리는 그분들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치 어쩌면 우리도 지나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 거칠고 험한지, 아니면 쉽고 순탄한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한테서 배우듯이 말이오. 그대는 지금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연세가 되신 만큼, 나는 무엇보다도 그대의 심경이 어떠하신지 듣고 싶어요. 산다는 것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케팔로스 옹이 말했네. "제우스에 맹세고, 내 심정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하겠소, 소크라테스 선생. 나는 또래의 늙은이들 몇 명과 가끔 모이곤 하는데, 옛 속담 그대로지요.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해요. 그들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연애하고 술 마시고 잔치에 참석하던 일 등등을 회상하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화를 내곤 하지요. 그때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들 중 몇몇은 자기들이 늙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괄시받는다고 투덜대며, 그래서 온갖 참상이 다 노년 탓이라고 읊어대곤 하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이들은 탓해서는 안 될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해요. 그게 정말 노년 탓이라면, 나도 노년과 관련하여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테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하겠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소. 예컨대 누가 시인 소포클레스에게 '소포클레스 선생, 그대의 성생활은 어떠시오? 그대는 아직도 여자와 동침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소포클레스 님은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때도 그분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그렇다고 생각하오. 노년이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감정들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지니까요. 욕망들이 한풀 꺾여 귀찮게 조르기를 멈추면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에서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나 탓할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노년이 아니라 성격이라오, 소크라테스 선생. 사람 됨됨이가 반듯하고 자족할 줄 알면 노년도 가벼운 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크라테스 선생, 노년뿐 아니라 젊음도 견디기가 힘들다오."

 

- 플라톤, 『국가』제1권

 

 

우리가 책을 늘 옆에 끼고 살고 싶은 욕망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곁에 쌓아놓고 살아야 만족할까. 나도 한때는 '책으로 빙 둘러싸인 내 서재'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그런데 책이 방안에 자꾸 쌓이니 불편한 점도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책을 재빨리 찾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책이 많아지면 '책탑'이 독버섯처럼 자꾸 생겨나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침 어젯밤에 그 중 하나가 너무 웃자랐던지 마침내 '꽈다당'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잠자던 아내마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놀라 물었을 정도였다. 책탑이 여럿 생기니 '원하는 책'을 빼낼 때마다 힘도 든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책탑 저 밑에 깔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는 도대체 '몇 권의 책'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릴까. 내가 가진 책들은 많은가? 적은가? 가끔씩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둘러 보노라면 '내가 가진 책들'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시내에 있는 초대형 서점에 들러도 마찬가지다. 이 많은 책들이 도대체 언제 다 팔릴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들과 비교해서 내가 지닌 책들이 차지하는 부피가 너무나 자그마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어쨌든 사람은 마음 속으로나마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전세계에 널린 그 수많은 도서관에 쌓여 있는 엄청난 규모의 책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진 책들이 지닌 '초라함'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먼가? 가까운가?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우리는 이런 것을 더 가까이하기를 원한다. 들에 있으면 먼 것인가? 반나절쯤의 거리라면? 뭐? 40km 떨어져 있으면 먼가? 가까운가? 그것이 가깝다면 44km는? 48km는? 52km는?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책을 파는 알라딘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을 많이 팔기 위해 애쓴다. 과거의 구매 기록, 현재의 지역별 연령대별 랭킹뿐만 아니라 미래의 연장선까지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도록 도와준다. 달리 말하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사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는 말이다. 책을 많이 샀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라는 생각을 품은 적은 별로 없다. 내 곁에 두는 책이 많을수록 좋은 점도 많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미 사 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 책, 새 책'을 외치며 책을 사들이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제 손아귀에 움켜쥔 걸 놓지 못해 사람에게 붙잡히고 마는 아프리카 원숭이도 어리석지만, 내 손에 이미 들어 있는 책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꾸만 갖지 못한 다른 책을 끝없이 탐내는 것도 어리석긴 매일반이 아닐까.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문득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에뤼식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탐욕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더 큰 탐욕을 부르기 마련이다. 책이든 무엇이든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결국 더 큰 '허기'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책은 좀 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와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에뤼식톤과 그의 딸)

 

책도 일정한 한계 수준을 넘으면 결국 '짐'으로 뒤바뀌는 수도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한 어느 농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그 농부의 '진흙수렁 같은 생활방식'이 가난의 원인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결코 그같은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로우는 범인들과는 판단이 너무나 달랐던 사람이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것도 제발 '간소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독서를 아주 많이 했던 그도 자신의 서재에 있는 몇백 권의 책으로 만족할 줄 알았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책 짐'에 대해서라면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여태까지 이사를 다니면서 '책'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활용을 하는 날 산더미처럼 내다버리는 책들을 보면 옛날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책이 결국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과감하게 자신이 빠진 '궁지'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지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고 달아난 여우는 운 좋은 놈이었다. 덫에 걸린 사향쥐는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 다리라도 물어서 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전진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런 생각에 대해 '심각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불쑥 나타날까 자못 두렵다. 물론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철학자의 말이 맞다. '읽은 책'이 아니라 '구매한 책'에 대해서도 '다다익선'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을 하지 못할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달'을 보라고 말하는 데도 기어이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책'을 보라는 데도 '구매한 책'이 많으니 적으니, '읽은 책'이 많으니 적으니를 따진다. 나 또한 그런 '통계'에 마음이 흔들린다. 알라딘은 책 장사꾼이니 응당 그렇다 치더라도 알라디너마저 거기에 너무 동조하거나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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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맨 처음으로 떠올렸던 '책 속 구절'은 아래와 같다. 이 대목을 본문에 인용할 만큼 '강한 글'을 쓸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 '접어서' 덧붙인다.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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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있는 책들을 보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을 얼마나 온전하게 아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진정한 친구 1명을 사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비단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듯 합니다...

oren 2017-07-06 23:1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한 번 읽은 책은 늘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우린 좀처럼 다시 만날 생각을 하질 못하죠.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렇게 홀대하진 않을텐데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도 ‘독서‘와 ‘우정‘이 매우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가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cyrus 2017-07-07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새 책을 소개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책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접하면 정작 제가 읽어야 할 책, 이미 산 책들을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 없이 ‘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만으로 작성된 게시물도 있습니다. 글이라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시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지도 못할 거면서 새 책(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성의 없이 소개하는 게시물이 있으면 못 보는 척하고 넘어갑니다. 그런 게시물을 쓰는 분들을 보면 오기가 생겨요. 저는 그분들과 반대로 절판된 책, 오래된 책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새 책을 읽었으면 ‘리뷰’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새 책이 포함된 페이퍼는 별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oren 2017-07-07 16:32   좋아요 0 | URL
cyrus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꼭 포함시키고 싶었던 내용이 ‘책을 건축물에 비유해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그런 내용을 일부 집어 넣었다가 결국엔 도로 뺐습니다만..)

인류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해 놓은 수많은 걸작들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아마도 ‘고전‘에 비유할 수 있겠지 싶어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걸작 건축물에 비유한 인물도 있었고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지어진 르네상스 시대나 고대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현대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걸작들도 숱하게 많지요. 인류가 남긴 위대한 고전 작품 가운데서도 그런 걸작들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뛰어난 건축술이 발휘된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이 드물진 않지만, 500년이나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건축물들에 비하면 어딘지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는 충분히 지니겠지만요. 그런데 정작 우후죽순 격으로 마구 지어지는 ‘조잡한 신축 건물‘을 닮은 듯한 ‘신간‘들은 ‘걸작 건축물‘에 비한다면 그 예술성과 가치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요. 건축물에서도 ‘인류의 문화유산‘과도 같은 탁월한 걸작이 있듯이, 책에서도 그런 걸작들이 분명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축물과 달리 책은 ‘아주 값싼 비용으로도‘ 그런 걸작들을 충분히 쉽게 만나볼 수 있고요. 마구 쏟아지는 신간들에 너무 눈길을 주다 보면 결국 탁월한 작품들을 만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새로운 책‘이 새로운 만큼 우리 눈에 반짝 빛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만큼 ‘빛나는 가치‘를 지닌 책인지는 늘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댓글로 달았다가 '인용문'이 너무 길어서 먼댓글로 다시 씁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들 느끼게 되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불편함‘을 미네 님께서 아주 자세히 피력해 주셨군요. 저도 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걸 느꼈는데 하물며 여성 독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었지요. 이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저는 ‘니체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져봤더랬습니다. 물론 그걸 말로 자세히 표현하기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요. 아무튼 카잔차키스는 그 자체로 ‘철저한 그리스인‘이었고, 특별하게도 ‘그리스인에 매우 정통했던 철학자 니체‘에 매우 심취했던 인물이었죠. 끝으로, 미네 님의 글을 읽는 동안에 제가 다시금 찾아 봤던 ‘니체의 말‘을 참고삼아 덧붙여 봅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8절


그리스인들 앞에 서면

"거기서 떠나지 말게,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말하는 것을 듣게나."

무엇이 디오니소스적인가?



 * * *


‘니체‘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그리스를 깊이 연구했던 랄프 왈도 에머슨도 ‘그리스인의 남다른 특징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에머슨의 글을 읽는 동안에도 ‘크레테 사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금 떠올렸던 듯합니다.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했으면서도 가장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고, 그런 삶을 ‘인류 역사상‘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이었으니까 말이지요.


위로는 영웅시대 내지 호머시대로부터, 내려와서는 4,5세기 후의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의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걸치는 그리스의 역사 · 문학 · 예술 · 시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느끼는 흥미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나가 몸소 그리스의 한 시기를 경과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스적 상황이란 육체적 본성의 시대, 관능 완성의 시대이다. 정신적 본성이 육체와 엄밀하게 일치하여 나타난 시대이다. 거기에는 조각가에게 헤라클레스, 피버스, 조브의 모델을 제공한 것과 같은 그러한 인간의 육체가 있었다. 근대 도시의 거리에서 많이 보이는, 막연히 이목구비가 뒤섞여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또렷이 윤곽이 잡힌 균형적인 용모로 이루어지고, 눈동자만 하더라도 이런 눈으론 곁눈질하거나 이쪽저쪽 흘겨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머리 전체를 돌려서 보아야만 되도록 틀이 잡혀 있었다.

이 시기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맹렬하다. 그러나 나타난 존경은 인간적 자질에 대한 것이다. 즉 용기 · 숙달 · 자제 · 공정 · 힘 · 민첩 · 고성(高聲) ·넓은 가슴 등에 대한 것이다. 사치와 우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구가 매우 적은 데다 부유하지도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이 시종(侍從)으로도, 요리인으로도, 도살자로도, 군인으로도 된다.

그리스인은 반성적이 아니다. 그러나 관능(官能)에 있어서, 건강에 있어서 완벽하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육체 조직을 가지고 있다. 어른은 애들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행동했다. 그들은 꽃병을 만들고, 비극을 쓰고 조상(彫像)을 만들었다. 그것도 건전한 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즉 좋은 취미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것은 계속하여 어느 시대에나 만들어졌고, 어디에서나 건전한 육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개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우수한 체격면에서 그리스인은 모든 다른 민족을 능가했었다. 그들은 어른의 활력과 어린이들의 매력 있는 천진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가 마음을 끄는 것은, 그것이 본래 인간의 것이고,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으므로 누구에게 그것이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이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어린이와 같은 천재와 타고난 활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인인 셈이고, 그는 헬라스의 시신(詩神)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소생시킨다.

나는 저 필록테테스(트로이 전쟁 때의 유명한 사수.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다-역자 주) 극(劇)에 나타난 자연애를 찬탄한다. 그 잠과 별과 바위와 산과 파도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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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 2017-06-1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먼댓글을 찾아 왔는데 깊은 지식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지식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와서 격하게 글을 올렸는데;;; oren님 글을 보며 그리스인에 대해, 디오니소스에 대해, 니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7-06-18 00:28   좋아요 0 | URL
저도 미네 님 덕분에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인‘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 보고, ‘책 속 구절들‘을 여럿 뒤적여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영 딴판인 소설이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한 때 ‘외설‘ 시비에 휘말려 오랫동안 ‘출판 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지요. 미국 울지 판사의 ‘명판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지만 말이죠. 그 중 한 대목을 참고삼아 인용해 봅니다.

* * *

˝만일 우리들이 조이스가 서술한 이러한 사람들과 사귀고 싶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의 문제다. 그들과 간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율리시스』를 읽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조이스와 같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한 예술가가 언어를 통해 한 유럽 도시의 중하위급 인물들의 참된 그림을 그리기를 원할 때, 아메리카의 대중들이 그러한 그림을 보는 것이 법률상으로 있을 수 없단 말인가?˝

(제 생각엔 아마도 이런 대목들이 문제가 되었던 듯합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8929272)

그랜드슬램 2017-06-18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견디기 힘들 정도의 불편함이라는 말에 일부 동감합니다! 워낙 마초적인 성격이 강한 책인지라.... 카잔차키스의 필력과 내용전개야 말이 필요 없겠지만 그 불편함이라는 표현에 동감합니다, 조르바를 자유인으로 말해야 할지,무능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느껴야 할지, 가끔 혼돈이 옵니다!

oren 2017-06-18 11:22   좋아요 0 | URL
우리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흔히 느끼는 그런 불편함 또한 작가가 일부러 의도했지 싶은 생각도 들어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그의 묘비명 자체가 그에 대한 증명이라고도 여겨지고요.
* * *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무대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그뿐인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마저 그에게는 너무나도 좁았다."

 - 괴테


 * * *


위의 말은 요한 페터 에커만이 지은 『괴테와의 대화』에 담긴 말이다. 물론 저 문장 속에서 말하는 '그'는 셰익스피어를 가리킨다.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격찬한 에커만의 그 유명한 책을 내가 직접 읽고 저 문장을 여기서 인용한 건 아니다.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오다시마 유시의 책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어쨌든 저 문장 덕분에 마침내 이번에『괴테와의 대화』를 실물로 구경할 수 있었다. 1,2권으로 나온 민음사판을 장만하고 보니 책이 장난이 아니게 두껍다. 두 권을 합하면 무려 1,140쪽이다.)


내게도 뒤늦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온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말고도 이런 저런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책들'도 함께 읽어 보고 있는데, 마침 도쿄대학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오다시마 유시의 책 덕분에 셰익스피어를 읽는 재미가 훨씬 배가되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는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인정받는 인물인데, 일본에서 인정받는『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어릿광대의 눈』,『어릿광대의 귀』, 『마음은 언제나 셰익스피어』등 숱한 셰익스피어 관련 책들을 썼고 국내에도 그가 쓴 책들이 적잖이 번역되어 나올 만큼 권위있는 인물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셰익스피어가 얼마나 '굉장한 눈'을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숱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 우리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거듭 놀라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쏟아내는 경이로운 문장들 때문이고, 그런 문장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놀랍도록 풍부한 상상력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극작가이면서 동시에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를 했던 배우였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세상이 있었고, 그런 세상을 볼 수 있었던 '어릿광대의 눈'과 '어릿광대의 귀'가 너무나 광대무변하면서도 초능력적인 데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가 떠올렸던 '놀라운 영상들'이 다시금 고스란히 '빛나는 문장들'로 변환되어 영롱한 보석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우리의 눈앞에서 반짝거리니 어찌 거듭 놀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면 때로는 밋밋하거나 단조로운 세상도 갑자기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진짜로 겪고 있는 '실제 세계'도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의 세계'처럼 정반대로 뒤집어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우리에게도 셰익스피어처럼 잠시나마 '어릿광대의 눈'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를 마치 연극 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어쨌든 굉장한 경험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반드시 연극의 연출자나 배역을 맡은 배우여야 할 필요는 없다. 연극의 관객이나 구경꾼의 입장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 세계'를 마음껏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또 '흥미롭게' 즐길 수도 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 세계'를 이런 방식으로 마치 '연극적 상황'인 것처럼 쉽게 뒤바꿔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만한 작품들이야말로 참다운 희곡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인간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들을 '오래 전부터 미리 넉넉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숱한 작품들 속에 아주 풍부하게 묘사해 놓았다. 괴테가 괜히 저런 엄청난 말을 한 게 결코 아니었다.(에머슨도 셰익스피어에 관한 괴테의 특별한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셰익스피어 정신의 지평은 끝없이 펼쳐져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게 직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미지를 적절한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리지와 괴테 정도"라고 말했다.)


이쯤에서 '셰익스피어의 눈과 귀'를 '오늘날의 현실'과 연결짓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흥미로운 현실 문제' 몇 가지에 셰익스피어를 끌어들이자는 말이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자주 떠올렸던 현실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전세계적 뉴스로 급부상한 사드 추가 배치에 관한 '보고 누락' 문제였다. 이 문제는 결코 아무나 함부로 '떠들 만한'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국내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워낙 첨예한 이해 관계가 걸린 '극도로 예민한 이슈'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문제가 한창 뜨거웠을 때 이 글을 끄적거리다가 말았다. 몇 번씩이나 다시 꺼냈다가 '중도 포기'를 거듭한 끝에 이제야 겨우 다시 꺼내 어설픈 마무리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예민한 입장 차이는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눈과 귀'를 빌린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문제를 바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토록 예민한 문제에 괜시리 존숭받는 극작가를 억지로 끌어들여 첨예한 문제를 '희화화'하자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나는 단지 그의 희곡 작품이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예민하게 호소하는 힘을 지녔는지를 되살펴 보고 싶을 뿐이다. 문학 작품이 지닌 이런 힘을 확인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를 새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말이다.


이토록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내가 처한 곤란한 입장에 대해 조심스러운 얘기를 몇 가지 더 늘어놓고도 싶지만 시간이 아깝다. 이쯤에서 본론으로 넘어 가자.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걸작은 단연『햄릿』이다. 그 유명한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명대사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누가 뭐래도 (심지어 책과는 담을 쌓은 사람도 다 아는) 다음 대사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의 이 유명한 독백 하나가 수많은 세월에 걸쳐서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는지를 여기서 따질 이유는 없다. 다만 이 짧은 대사 하나가 그토록 논란을 빚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반증하는 결정적인 증좌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기본으로 살짝 되돌아 가자.『햄릿』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이런 물음엔 아무래도 전문가의 '깔끔하게 정리된' 대답에 기대는 게 최고다.


햄릿의 핵심 주제는 복수다. 그러나 이는 형식상의 주제이고 내용상으로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복수심과 양심의 대결이다. 그리고 양심은 복수를 지연시키는 힘으로서 무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나고 복수심은 살인을 실행시키는 힘으로서 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또한 복수심은 햄릿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힘을 대표하고 양심은 그가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을 대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극의 핵심 주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존재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 최종철 옮김,『셰익스피어 전집 4』, 『햄릿』, <역자 서문> 중에서

『햄릿』의 확장성은 놀랍다. 꼭 『햄릿』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대개 '놀라운 확장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이 하나같이 칭송받는 것도 어느 작품이든 '누구에게나 마음 속 깊이 호소하는 목소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면에 기대어 나는 여기서 '햄릿'을 과감하게 '고뇌하는 문재인 대통령'으로 치환해서 해석해 보고 싶었다. 문학 작품이 '현실'을 일찌감치 미리 내다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문학이 얼마나 놀라운 신축성을 발휘해서 현실을 사로잡는가를 고려해 보면 이 문제는 누구나 '대입해 보고 싶은 매혹적인 방정식'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가?


우선, '사드'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처한 곤란한 입장 자체가 햄릿과 너무나 닮았다.


그런데 햄릿이 '복수'를 꿈꾸도록 도와준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당연히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을까. 묘하게도 그에겐 친구이자 '선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존재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을 여태껏 '아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설사 유령의 모습으로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늘 대통령의 마음 한 켠에 '그 분의 존재'를 자주 떠올리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한편, 햄릿의 복수심을 더욱 부추긴 요인 중엔 어머니 거트루드와 작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사이의 '근친상간적인' 빠른 결혼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문재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이명박근혜 정부'와 '미국' 사이에 진행된 너무나 빠른 '근친상간적 결합'도 마음 속으로 그리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더군다나 이명박 정부는 '선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게다가 노 전 대통령의 수사를 맡았던 우병우는 하필이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수족을 맡으면서 '묘한 악연'을 계속 이어 왔다.)


더군다나 『햄릿』에서는 '선왕 햄릿'의 서거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왕' 클라우디우스의 '나쁜 인간성'도 햄릿의 복수를 부추겼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나쁜 인간성'이 '착한 문재인'에게 복수심을 자극했으리란 건 어찌 보면 추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약관화한 사실로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햄릿 1막 5장에 나오는 재미있는 대사 하나만 인용해 보자.


"소중한 네 아버질 사랑한 적 있다면 (중략)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 다오."


이제는 이런 대사마저 그저 단순한 햄릿만의 대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되짚어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일어났던 돌발 상황 때문에 자칫 험한 꼴을 당할 뻔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도리어 먼저 다가가 사과를 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는 점도 '착한 햄릿'이 새로운 왕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무척이나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과『햄릿』과의 또다른 유사점은 '성급한 복수의 실패'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햄릿은 유령으로부터 '진실'을 알고 난 뒤에 '즉각적인 복수'를 맹세한다. 그러나 복수는 생각만큼 빨리 이뤄지지 못하고 계속 미뤄진다. '극중극'을 통해 '클라우디우스의 반응'을 살핀다든지, 「쥐덫」상연을 통해 왕의 죄를 확인한 뒤에도 (끝내 스스로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기도하는 왕'을 죽이지 못하고 놔주기 때문이다.("아냐. 아서라 내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햄릿의 '성급한 복수'는 결국 엉뚱하게도 휘장 뒤에 숨어 있던 폴로니우스(오필리아의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휘장을 뚫고 검을 찌르면서 햄릿이 내뱉은 대사가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자극한다.

"이건 뭐냐? 쥐새끼다! 죽어 싸다, 죽어라."

주저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햄릿'이 마침내 무서운 결단을 내려 실행에 옮겼는데 결국 알고 보니 '쥐새끼' 같은 클라우디우스의 신하 폴로니우스였던 것이다. 쥐새끼 하면 MB도 떠오르고, 뒤이어 속담 하나도 곧바로 더 떠오른다. 이번 '사드 보고 누락 사태'로 숱한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들먹인 말이 바로 '태산명동 서일필'이었으니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대해 시종일관 '모호한 전략'을 취해 왔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갈수록 심각해 지고 있는 상황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결같이 '사드 배치'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계속 유지해 왔다. 무엇보다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보수 우파 진영'이나 군사 동맹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다. 미국이 '자신들의 부담'으로 '한국'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첨단 방어 무기를 설치해 주겠다는데도 '애매한 태도'를 계속 취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문재인 대톨령이 계속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복잡한 사정'이 깔려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드 배치'와 꼭 닮은 문제가 바로 노무현 정부 초기의 '해외 파병 문제'였음을 상기해 보면 의외로 문제가 간단해 보인다. 해외 파병이나 사드 배치나 '군국주의 미국'에 '맞장구치는 일'일 뿐, 오랜 지지기반인 '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 문제까지 얽힌 복잡한 정치 얘기는 이쯤에서 살짝 접어두고 여기서 다시 햄릿의 독백으로 돌아와 보자.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를 쓴 오다시마 유시는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런 '신선한 해석'을 접하면서 나는 바로 이 해석이야말로 '사드 보고 누락'에 대해 '충격과 분노'와 더불어 즉각적인 '진상 조사'를 엄명한 문재인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드는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오다시마 유시의 책 속 구절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번역했다. (…)


나중에 나의 이 번역이 신문에 소개됐을 떄, 나카노 교수님은 "자네가 드디어 해냈구먼"이라며 전화로 칭찬을 해주셨다. …… 셰익스피어는 중요한 독백을 할 때는 모호한 말투를 쓴 다음에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꼭 이어서 확실한 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는 다음 행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당당한 삶인가. 이대로 마음속에서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인가, 아니면 다가오는 고난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인가. ……"


이처럼 상당히 중요한 내용으로 자문을 하고 있다.


분명히 to be는 '이대로 마음속에서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며, not to be는 '다가오는 고난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즉 햄릿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관념론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110∼111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비단 '사드 문제' 뿐만은 아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여러 조치' 때문에 그동안 몹시도 혼란스러웠던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 보고 누락'을 보고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심정이야말로 '햄릿'의 심정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둘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햄릿'은 끊임없이 심사숙고하면서 '복수'를 계속 미뤘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톨령이 '만약' 햄릿처럼 행동했더라면 아마도 '사드 추가 배치 보고 누락'에 대해 그토록 급작스러우면서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는 식으로' 호통을 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문제가 당초 의도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방향으로 '여러 반향'을 불러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에겐 햄릿이 연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읊는 유명한 대사 하나를 앞으로도 계속 떠올려야 하는 '과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사드 배치 문제'는 그저 잠시 지연시켰을 뿐, 결국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와야 할 것이 지금 오면 나중에는 오지 않는다. 나중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오겠지. 지금은 아니라도 반드시 올 것은 언젠가 온다."


 - 『햄릿』, <5막 2장> 중에서



이쯤에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 마침 오늘 서울국제도서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흘러나온 뉴스 하나가 내 눈에 번쩍 띄었다. 문재인 대톨령이 "책 선물을 많이 받는 편인데 꼭 다 읽는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문재인 대통령한테 '셰익스피어의 책'을 선물한 사람은 없었을까, 그게 갑자기 궁금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셰익스피어 마니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모처럼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맞이한 국민의 입장에서 '세익스피어 읽는 대통령'을 바라는 게 너무 무리한 욕심일까.


한 나라의 지도자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면


판단보류, 즉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바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바로 '만약'의 중요한 예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만약에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어떨까. 간단히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만약 내가 해낼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상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 어떤 부모자식이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화를 내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이 '만약'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부모자식과 부부는 물론이고, 이웃, 나아가 이웃나라와의 외교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결투는 그만두고 악수를.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다.(25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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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정치 현실'을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치'만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도 드물다. 그런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조차 셰익스피어는 놀랄만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이 글에서 좀 더 엮어보려 했던 내용들도 있었지만 부족한 능력 탓에 더 이상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미 글 밖으로 빠져 나왔지만 원래의 글 속에 포함시키고 싶었던 '책 속 내용들'을 덧붙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 * *

역사라는 톱니바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폴란드의 얀 코트라는 비평가가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그들을 한데 묶어서 바라보면 역사는 '위대한 기계장치Grand Mechanism'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군이든 폭군이든 어차피 역사라는 톱니바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헨리 5세는 프랑스를 무찌르고 프랑스의 왕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끝을 맺지만, 다음으로 왕이 된 헨리 6세는 금방 무능함이 드러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한명의 인간, 한 명의 왕은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는 여러 일이 벌어져도 한 개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인다.(67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민중은 지배자가 공정한 정치를 하고 있다면 그에 조용히 따른다. 그러나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그 균형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폭군이 등장하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리처드 2세>에 정원사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리처드 2세는 정치능력도 없으면서 간신배 때문에 국가의 재산을 전부 써버린다. 그러다 결국 볼링브룩(뒤에 헨리 4세)에게 왕위를 뺴앗긴다. 그런 정치 상황을 서민은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정원사 스승은 제자에게 나무란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야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에서 자기들이 잘난 줄 알고 날뛰는, 지나치게 자라버린 그런 자잘한 가지들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려야 하느니라. 우리들의 정치란 모두가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68∼69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리처드


내게 왕관을 건네라. 자, 사촌, 왕관을 받게나.

자, 사촌, 이쪽엔 내 손, 그리고 그쪽엔 자네 손.

이제 이 황금 왕관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물통 둘을 번갈아 채우며 들락거리게 하지 ㅡ

빈 통은 허공에서 흔들흔들 춤추고,

다른 통은 물이 꽉 차 내려가 안 보이지.

눈물로 채워져 내려간 통은 나인데,

슬픔 마시는 중이고, 자넨 높이 오르는 중이야.


 - 『리처드 2세』, <4막 1장> 중에서


(나의 생각)


『리처드 2세』는 '무능한 왕이었던 '리처드 2세'가 실정을 거듭한 끝에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버림받는 내용을 다룬다. '리처드 2세'가 추락을 거듭할 때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인물은 랭커스터 왕조를 연 '헨리 4세'였다. 비극의 주인공 '리처드 2세'가 백성들로부터 쫓겨난 끝에 폐위되고 결국 감옥에 갇혔다가 헨리 4세의 부하로부터 살해되기 까지의 과정이 눈물겹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 시절에 벼슬깨나 했던 사람들이나 '태극기 부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집권하는 과정만 보면 얼핏 '반역'일지 몰라도 일단 '민심'을 얻은 이후의 헨리 4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어쨌든 이 사극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리처드 2세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물려주는 소위 '탈관식 장면'이다. '눈물로 채워져 내려간 통'과 '허공에서 흔들흔들 춤추는 통'을 대비시킨 것도 놀랍지만, 진정한 절정은 리처드 2세가 '거울'을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거울'을 좋아했던, 지금은 감옥에서 재판을 받느라 몹시도 초췌한 박근혜를 떠올리지 못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눈'은 참으로 놀라운 데가 있다.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던 헤럴드 블룸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리처드


그자들은 내가 만족시켜 주지. 내 죄상이 다 기록된

바로 그 문서를 내가 보게 되는 순간,

다 읽어 주마 ㅡ 그게 바로 나이니까.


(시종 하나 거울 들고 등장)


거울을 다오. 그걸 보고 읽으련다.

아직 주름이 덜 잡혔어? 슬픔이 이 내 얼굴 위에

그 숱한 가격(加擊)을 하였으되, 더 깊은 상흔을

남기지 못했나? 아, 거울도 아첨을 하는구나 ㅡ

나 한창 좋은 세월이었을 때 날 따르던 무리처럼,

거울도 날 속이는구나. 이 얼굴이, 날이면 날마다

왕실 지붕 아래에서 일만 명을 거느리던

바로 그 얼굴인가? 이 얼굴이, 마치 태양인 양,

보려는 사람 눈부셔 눈 감게 하던 그 얼굴인가?

이것이, 그 숱한 망동(妄動)들을 눈감아 주다가 마침내

볼링브로크가 들고일어나도록 한 그 얼굴인가?

부서지기 쉬운 영광 이 얼굴에 빛나는구나.

이 얼굴도 영광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 (거울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저것 보아, 일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걸.

말씀 없으신 임금, 잘 새겨 두시오. 이 장난의 의미를 ㅡ

내 슬픔이 내 얼굴을 얼마나 빨리 깨뜨렸는지.


『리처드 2세』, <4막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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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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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17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15일날 빨리 보고 나중에 정독해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이런 글은 오렌 님처럼 세익스피어를 탐독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인 듯합니다. 이런 글을 알라딘에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글이 이달의 당선작이 안 된다면 참으로 문제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글에 당선작이라도 안 주면 알라딘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접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암요~!

oren 2017-06-17 13:37   좋아요 0 | URL
yamoo 님 반갑습니다. yamoo 님께서 얼핏 스쳐 읽은 뒤에 나중에라도 기어코 다시 찾아와 정독해주시니 글쓴이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사실 글의 소재로 삼은 ‘사드 배치 보고 누락‘은 너무 예민한 문제여서 그 분야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글로 쓴다는게 여간 주저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두번 끄적거리다 말았는데, 그 뒤로 ‘쥐새끼 한 마리‘도 자주 언급되고, 중국도 ‘꼼수 부리지 말라‘는 식으로, ‘결국 언젠가 결정할 때가 올 것‘이니 그때까지 예의주시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니 햄릿 이야기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더군요. 저 역시 햄릿처럼 이 글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to be ot not to be˝ 문제에 붙잡힌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yamoo님의 고무적인 댓글 만으로도 글쓴 보람을 충분히 맛보았으니, 알라딘이 ‘당선작 누락 시비‘로 생존이 위협받는 일까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요^^
 


나는 셰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가를 알지 못한다 : 어릿광대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만 했단 말인가! ㅡ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 *


셰익스피어에 빠져 지낸지 어느새 한 달 가까이 흐른 듯하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동안에 다른 책들을 전혀 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흙 속으로 돌아간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머리 주위를 맴돌았을까를 떠올려 보면, 마침내 이토록 멀리 떨어진 나에게까지 찾아온 그토록 귀한 손님을 내가 먼저 함부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그를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희귀한 천재인 그와 만날 기회가 반드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을 붙잡고 읽는 독자'에게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워낙 고명하고 저명한 분이어서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분을 서로 다투듯이 열심히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세계 어디에선가는 틀림없이 '연극 무대'에 올려져 있을 것이다.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숱하게 재방영되고 있을 것이다. 숱한 그림으로 여러 화랑의 벽면을 장식한지도 이미 오래일 것이며,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전파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방금 전에도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인터넷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바로 그 음악에 자극을 받아 기어이 셰익스피어와 음악을 연결짓는 이런 글쓰기에 이제 막 나선 참이다.


물론 내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다. 살다 보면 '세익스피어의 음악'은 절로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가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그 애틋한 주제가를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80년대 초반에 서울 시내 개봉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홀로' 몰래 '숨어서 보는 기분으로' 숨을 죽이며 봤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죽였던 숨이 다시금 멎는 듯한 순간들을 정말 여러 번 느꼈었다. 그토록 격한 감동을 안겨주는 러브스토리는 그 후로 영영 다시는 만나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 영화에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주제음악이 없었더라도 그 영화가 여전히 우리에게 그토록 매혹적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A time for us>가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마치 <라라의 테마> 없는『닥터 지바고』를 떠올리는 것만큼 쉽게 상상하기도 어렵다.



A time for us Romeo and Juliet 1968


이쯤에서 한번쯤 '셰익스피어의 작품 목록'을 들춰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열 손가락을 가지고도 몇 번씩이나 오므렸다 폈다를 거듭해야만 간신히 셀 수 있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하루에 꼬박 열 시간씩' '드라마'로 본다면 과연 며칠이나 걸릴까. 이미 권위를 인정할 만한 곳에서 명백한 '견적서'를 내놓은 적이 있다. 자료들에 따르면 셰익스피어가 쓴 37편의 드라마는 러닝타임이 총 5947분(99.1시간)이다. 하루에 꼬박 열 시간씩 '중지 버튼' 한 번도 누르지 않고 쉼없이 돌려도 꼬박 열흘은 지나야 끝을 볼 수 있는 셈이다.


01. Antony and Cleopatra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비극 170 분
02. Coriolanus (코리올라누스) - 비극 145 분
03.
Hamlet (햄릿) - 비극 212 분
04. 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저) - 비극 150 분
05. King Lear (리어왕) - 비극 183 분
06. Macbeth (맥베스) - 비극 146 분
07.
Othello (오셀로) - 비극 205 분
08. Romeo And Juliet ( 로미오와 줄리엣) - 비극 168 분
09. Timon of Athens (아테네의 타이먼) - 비극 128 분
10. Titus Andronicus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 비극 168 분

11. Henry IV, Part 1 (헨리 4세 - 1) - 시대극 148 분
12. Henry IV, Part 2 (헨리 4세 - 2) - 시대극 150 분
13. Henry V (헨리 5세 ) - 시대극 - 166 분
14. Henry VI, Part 1 (헨리 6세 - 1) - 시대극 188 분
15. Henry VI, Part 2 (헨리 6세 - 2) - 시대극 213 분
16. Henry VI, Part 3 (헨리 6세 - 3) - 시대극 210 분
17. Henry VIII (헨리 8세) - 시대극 165 분
18. Richard II (리차드 2세) - 시대극) 158 분
19.
Richard III(2DISC) (리차드 3세 (2 DISC)) - 시대극 230 분
20. Richard III

21. The Life and Death of King John (존 왕) - 시대극 155 분
22. A Midsummer Night's Dream (한여름밤의 꿈) - 희극 115 분
23.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으면 다 좋아) - 희극 142 분
24. As You Like It (뜻대로 하세요) - 희극 150 분
25. Cymbeline (심벨린 ) - 희극 175 분
26. Love's Labour's Lost (사랑의 헛수고) - 희극 120 분
27. Measure for Measure (법에는 법으로) - 희극 145 분
28. Much Ado About Nothing (헛소동) - 희극 148 분
29. Pericles, Prince of Tyre (페리클레스) - 희극 178 분
30. The Comedy of Errors (코미디 오브 에러스) - 희극 108 분

31. The Merchant of Venice (베니스의 상인) - 희극 157 분
32. The Merry Wives of Windsor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 희극 170 분
33. The Taming of the Shrew (말괄량이 길들이기) - 희극 128 분
34. The Tempest (태풍) - 희극 125 분
35. The Two Gentlemen of Verona (베로나의 두 신사) - 희극 137 분
36. The Winter's Tale (겨울이야기) - 희극 173 분
37.
Troilus and Cressida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 희극 190 분
38. Twelfth Night (십이야) - 희극 128 분


이 많은 작품들을 오로지 '연극 대사'로만 이루어진 희극으로 읽을라치면 사정은 어떻게 달라질까. 대략 한 작품을 읽는 데 5시간씩만 잡더라도 총 185시간(37편×5시간)이 걸린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루에 다섯 시간을 꼬박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데 쏟아붓는다면 그는 대략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는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전부 다 독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으랴마는.

책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다시 음악 얘기로 얼른 되돌아 오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음악가들을 일일이 다 헤아리는 건 물론 나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음악이라는 예술 장르에도 얼마나 놀랍도록 광범위하게 스며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단순한 작업에만 주의를 기울일 작정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어떤 음악가에 의해 어떤 배경과 창작 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그 음악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얼마나 훌륭하게 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겨를이 없다. 또한 그럴 능력이나 재주도 없다. 그런 주제는 내 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난다. 나는 그저 내게 알맞는 정도로 이 둘을 '슬쩍 건드려 보는 데' 만족할 것이다.

이제 본론인 '셰익스피어 음악의 목록'을 잠시 나열해 보자. 거듭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가 아는 범위내일 뿐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베토벤

<템페스트>(원작 또한『템페스트』인데, 흔히『태풍』이나 『폭풍우』로도 번역된다. 작가 말년의 대표작이다.)
<코리올란 서곡>(원작은『코리올라누스』, 코리올라누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자신의 전기'를 가진 고대 로마의 유명한 장군인데 셰익스피어가 '사극의 마지막 작품'으로 썼다. 코리올라누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T.S.엘리엇의 『황무지』에도 등장할 정도로 여러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http://blog.aladin.co.kr/oren/9121191)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소개하는 마당에 셰익스피어의『템페스트』한 대목조차 인용하지 않고 지나가기는 어렵다.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많은 작품에서 스스로 '음악'을 끌어들여 자신의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장식한다.

     페르디난드
이 음악은 어디 있지? 공중에? 땅속에?
더 이상 안 들린다, 틀림없이 이 섬의
어떤 신을 시중든다. 해안에 앉아서
부왕의 파선을 울면서 다시 슬퍼했을 때
이 음악이 파도 타고 내 곁으로 기어와
격랑과 내 격통을 아름다운 곡조로
가라앉혀 주었다. 그걸 따라 왔는데
(오히려 나를 끌고 왔겠지.) 사라졌다.
아냐, 또 시작한다.

『태풍』, <1막 2장>


Ludwig van Beethoven "Tempest" Piano Sonata No. 17. / Daniel Barenboim



Beethoven - Coriolan Overture, Op 62 - Muti

(지휘자인 무티의 모습이 2년 전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내한했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서 깜짝 놀랐다. 한참이나 어린 그의 모습을 보니 마치 '무티의 아들' 같은 느낌도 든다. 베토벤이 살았던 빈의 '황금홀' 연주라 더욱 반갑다.)



차이코프스키

환상 서곡 <햄릿>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템페스트>

Tchaikovsky Hamlet Overture, London Symphony Orchestra, Valery Gergiev Proms 2007

(베르디조차『햄릿』을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끝내 작곡을 포기했다는데, '셰익스피어 마니아'였던 차이코프스키는 정말 멋지게 성공했다. 나는 이 음악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악당에서 만난 게르기에프는 두 번 모두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만 들려줬는데 이렇게 우연히 <햄릿>으로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갑다.)



Tchaikovsky: Romeo & Juliet / Gergiev · London Symphony Orchestra · BBC Proms 2007



Tchaikovsky: The Tempest / Abbado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
오페라 <오텔로>
오페라 <팔스타프>(『헨리 4세』과『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 등장하는 희극적 인물 '팔스타프'를 그린 작품)

Thomas Hampson - Perfidi!... Pietà, rispetto, amore (Verdi: Macbeth)



Verdi: Falstaff - Final Opera - Metropolitan . James Levine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그 가운데 특히 <꿈 속에 살고 싶어라>

Anna Netrebko "Je veux vivre" in Romeo and Juliet by Gounod (HD Paris 2007)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그 가운데 특히 <결혼 행진곡>

'한여름 밤의 꿈'중 '결혼행진곡' 변주곡_호로비츠_손열음



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Overture Op.21 by Masur, LGO (1997)



리스트

교향시 <햄릿>

Liszt - Symphonic Poem 'Hamlet'



드보르작

서곡 <오셀로>

Daniel Harding dirigerar Dvorak: Othello, ouverture



드뷔시

모음곡 <리어왕>


프로코피에프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Prokofiev Romeo & Juliet Suite



베를리오즈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극적 서곡 <리어 왕>

Berlioz: Roméo et Juliette - Radio Filharmonisch Orkest - Full concert in HD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맥베스>

Richard Strauss - Macbeth, Op. 23



쇼스타코비치


극 부수음악 <햄릿>


Shostakovich 'Hamlet' Film Music - Bernard Herrmann conducts



니콜라이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Otto Nicolai, The Merry Wives of Windsor, Overture - Gilberto Serembe, conductor

(오토 니콜라이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자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흔히 셰익스피어를 '뮤즈를 울린 극작가'로 표현한다. 뮤즈는 여신들이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조차 "노래하소서, 여신이여!"라는 말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그저 여신들로부터 '시적 영감'을 빌려올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여신들이 무려 아홉이었다. 이 숫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근거는 호메로스가 제공했다.『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장례식 풍경' 속에 여신들이 딱 그만큼 등장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oren/7137045)

…… 그리고 모두 아홉 명의
무사 여신들이 서로 화답하며 고운 목소리로 만가를 부르기 시작했소.
그곳에서 그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르고스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오. 낭랑한 무사 여신의 노랫소리가 그만큼
힘차게 일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열흘하고도 이레 동안 밤낮으로
불사신들과 필멸의 인간들이 그대를 위해 울었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24권, 저승 속편_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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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뮤즈 여신들은 세 명의 자매로 서로 속성이 유사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각각의 특성들이 나눠지고 구체화되어 갔으며 그 수도 아홉 명으로 늘었다. …… 뮤즈 여신들의 우두머리이자 ‘서사시’를 담당한 칼리오페(Calliope)는 서판과 펜을 든 모습으로 주로 그려졌다. ‘희극’의 여신 탈레이아(Thaleia)는 익살스러운 가면을 쓴 반면, ’비극’의 여신 멜포메네(Melpomene)는 슬픈 표정의 가면을 쓰고 그리스 비극배우들이 신는 반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장엄한 종교 찬가’를 담당한 폴리힘니아(Polyhymnia)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하거나 베일을 썼다. ‘에로틱한 시’의 여신 에라토(Erato)‘서정시’의 여신 에우테르페(Euterpe)는 각기 리라(lyre, 고대 발현악기)와 플루트를 상징으로 가졌다. 합창과 춤의 여신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는 손에 리라와 작은 채를 들고 춤을 추는 자태로 그려졌다. ‘역사’를 관장한 클레이오(Cleio)는 앉거나 기대서 긴 두루말이와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았으며, ‘천문학’을 관장한 우라니아(Urania)는 주로 막대기로 천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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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뮤즈를 울렸다면 그는 필시 음악도 울린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을 의미하는 ‘뮤직(music)’도 결국 뮤즈 여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작가가 "음악을 잘 들어봐"라고 '대사'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음악으로도' 듣지 않을 도리가 없다. 셰익스피어와 음악은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로렌초

그리고 악사들을 밖으로 데려오게.

언덕 위에 잠자는 달빛은 참 아름답구나!

우린 여기 앉아서 귓전으로 스며드는

음악 소리 들어 보자. 고요한 밤에는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게 제격이야.

앉아, 제시카. 저것 봐, 저 하늘 마루에

황금빛 접시들이 얼마나 촘촘히 박혔는지.

보이는 천체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도

운행할 땐 어린 눈의 케루빔들에게

언제나 합창하며 천사처럼 노래해.

불멸의 영혼에도 그런 화음 있다지만

부패하는 이 진흙 의복이 그것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한 우린 듣지 못하지.


 악사들 등장.


이리 오게, 찬가로 디아나를 깨워 보게,

최고 고운 가락에 마님 귀가 열리고

음악에 이끌려 집으로 오시도록.   (악사들이 연주한다.)



         제시카

고운 음악 들을 때면 난 절대 흥이 안 나.



         로렌초

네 정신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야.

야생에서 뛰노는 짐승 떼를 보거나

여리고 길 안 든 수말의 무리를 지켜보면

그들은 몸속에서 피가 끓기 때문에

미친 듯 날뛰면서 힝힝 킹킹 울어 대지.

하지만 혹시라도 나팔 소릴 듣거나

그 어떤 곡조라도 귀에 와 닿게 되면

사나운 시선이 감미로운 음악의 힘으로

얌전한 응시로 바뀌면서 다 함께

멈춰 서는 모습을 볼 거야. 그래서 시인은

오르페우스가 나무, 돌, 강물을 움직였다 꾸몄어.

음악이 잠시 그 본성을 못 바꿔 놓을 만큼

무감각하거나 광란에 찬 것은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음악이 없거나

아름다운 화음에 무감동한 사람은

역모와 계략과 약탈에나 어울려.

그자의 정신은 밤처럼 둔하게 움직이고

그자의 감정은 명부처럼 시커멓지.

못 믿을 건 그런 자야. 음악을 잘 들어 봐.


『베니스의 상인』, <5막 1장>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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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02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제로 한 모든 곡이 앨범으로 발매된다면, 앨범 CD 하나로도 부족하겠어요.

oren 2017-06-02 18:49   좋아요 0 | URL
설사 하나의 앨범 CD에 담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막상 ‘한정된 수요‘를 생각하면 발매하기 어렵겠지요.
그나저나 <셰익스피어와 음악>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혹시나 없나 살펴보니 역시 없네요.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라는 제목의 책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랜드슬램 2017-06-0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세한 설명과 자료,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세익스피어 작품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니고 즐겨야 할 산이군요^^

oren 2017-06-04 13:16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도 높은 산이기는 하지만 ‘즐기지 않으면‘ 그저 갈 길이 멀고 힘들고 따분하고 지치기 쉬운 산일 뿐이겠죠? 그런 면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의 표현만큼 셰익스피어를 적확하게 묘사한 인물도 드물다 싶습니다.

* * *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

셰익스피어도, 호메로스도, 단테도, 초서도, 눈에 보이는 세계 깊숙이 아득한 천상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수목조차도 단순히 사과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상의 존귀한 역할을 맡게 되고, 곡물도 단순한 식료 이상의 것이 되고, 이 지구라는 천구도 아득히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상의 온갖 것은 말하자면 더욱 섬세하고 묘한 ‘수확‘을 우리 혼에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 깃드는 이념을 상징하는 것이 되고, 천지자연의 다양한 영위는 모두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암시하는 ‘말없는 비밀문서‘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와 같은 대자연에 있는 일체의 것을 자신의 회화를 채색하기 위한 그림물감으로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다만 그는 그와 같은 현실세계의 현란한 고급의 두루마리에 넋을 잃은 나머지 그만한 대천재라면 당연히 가능했을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결국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상징으로서 자연미 속에 잠재한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어 있는 덕 그 자체의 의의를 그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근원적인 통찰이 결여되면 자연계가 말하는 실제의 이야기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천지만물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들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약간 짓궂게 표현한다면 그는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