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 같은 독서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 * *

 

몽테뉴가 쓴 에세이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용문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는 보르도 시장과 고위 법관까지 지냈지만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일'을 훨씬 더 좋아했기 때문에, 불과 서른여덟 살에 '조기 은퇴'를 선택했다. 바쁜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몽테뉴 성'에 틀어박혀 지내며,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나 더 흥미로운 '책 속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던 셈이다.

 

그가 책을 통해 만났던 숱한 인물들과 작품들을 어떻게 일일이 나열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와 작품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좋아한 작가는 누가 뭐래도 플루타르코스였고, 그가 쓴 <영웅전>과 <윤리론집>은 그가 가장 즐겨 읽는 애독서였다.

 

나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먼저 읽은 뒤에 한참이나 있다가 뒤늦게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선집)과 <윤리론집>(선집)을 읽는 바람에, 그 두 인물이 책을 통해 서로 주고 받았던 영향을 이제서야 좀 더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실 몽테뉴가 쓴 <수상록>의 목차만 살펴보더라도 그가 플루타르코스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가령, <작은 카토에 대하여>, <키케로에 대한 고찰>, <카이사르의 말 한마다>,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하는 방법에 대하여> 등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영웅들'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을 따로 풀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아예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호>라는 에세이도 <수상록>에 포함시켰다. 물론 그 에세이는 세네카보다는 플루타르코스에 대해 훨씬 더 상세하고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내가 이 인물들에 대해서 품는 친밀감과, 그들이 내 노령기에 그리고 순수히 그들에게서 약탈해 온 재료로 엮어 내는 내 작품에게 주는 도움 때문에 , 나는 그들의 영광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호> 중에서

 

 

뒤늦게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선집)을 읽으면서 <몽테뉴 수상록>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묘한 일이다. 왜냐하면 <윤리론집>은 대략 1,900년 전의 저작이고, <몽테뉴 수상록>은 대략 400년 저작이기 때문이다. 1,500년이나 앞서 나온 책을 읽다가, 그 책 보다 1,500년 뒤에 나온 책 속의 여러 구절들을 떠올린다는 게 너무나 묘한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에 나오는 '이웃에게 불씨를 얻으러 간 이야기'를 읽다가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왔던 바로 그 똑같은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두 인용문을 비교해 보라. 나는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저 얘기가 여태까지도 몽테뉴가 최초로 지어낸 '독창적인 비유'인 줄로만 알았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 되고 우리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학식이 많아서 경험이 없이도 그렇게 위대한 장수가 되었던 루쿨루스는 우리들의 방식으로 지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너무 심하게 남의 팔에 매달려 다니다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마저 없애고 만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대비할 생각을 가지면? 나는 겨우 세네카의 사상에서 꺼내올 뿐이다. 내가 자신이나 또는 남을 위해서 위안의 말을 찾아보고 싶으면? 나는 그 말을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사람들이 나를 그 지식으로 단련시켜 주었던들,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찾아 가졌을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학식이 있음을 자랑함에 대하여> 중에서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서 불씨를 얻어 큰불을 지피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머무른다고 상상해 보게

 

지력(智力)은 병처럼 채울 필요가 없는 것이 오히려 목재와 같다고나 할까. 그것은 단지 나무에 불을 붙여 독립적으로 생각하도록 자극을 주고 진리를 참구하려는 열망을 창출하면 되는 것이기에 말이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서 불씨를 얻어 큰불을 지피고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며 머무른다고 상상해 보게. 그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강의를 듣고 이득을 얻으려고 왔는데, 그가 강의에서 그 자신과 그의 사고를 계발하기 위해 불씨를 지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강의 내용을 즐기며 황홀경에 빠져 앉아 있는 거나 같은 것이지. 말하자면 그는 강의 내용으로 그에게 전달된 의견의 형태로 밝고 벌겋게 달아오른 불을 얻지만, 그의 마음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곰팡냄새와 암흑을 뜨거운 철학의 열기로 없애거나 추방하지는 못하는 것이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중에서


 

이쯤 되면 네이버 검색창에서 '몽테뉴 플루타르코스'를 입력해서 뭔가를 더 찾아볼 생각을 억누르기 어렵다. 클릭하자 말자 금세 '책 본문 검색'이 눈 앞에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우연히 발견한『몽테뉴의 엣세』라는 책에서 내가 인용하고 싶은 대목은 다음 구절이다.

 

그의 독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역시 고대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그가 어려서부터 라틴어를 익혔고 모국어와도 같은 라틴어를 통해 고대와 친숙해졌었다는 것을 보아 왔지만 실로 라틴 세계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물론 그는 고대 사가들, 전기 작가들도 만났지만 더 많이 시인들, 철학자들과 교류했다. 그중에는 비르길리우스Virgile, 루크레시우스Lucrèce, 카툴루스Catulle, 호라티우스Horace, 루카누스Lucian가 있는가 하면 플라우투스Plaute, 테렌티우스Tèrence와 같은 극작가도 있다. 한때 그는 오비디우스Ovide에 심취했었지만 그 후에는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듯 시기적으로 독서의 경향이 바뀌기도 했는데, 가령 1571년에서 1572년에 걸쳐 세네카Sénèque에 열중했던 그는『루실리우스 서한Lettres a Lucilius』을 탐독했다. 또한 라틴어는 그에게 고대 그리스를 발견하게 했다. 이 무렵 그리스 작가들의 라틴어 번역이 속속 출간됨으로써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Diogenes Laerce, 크세노폰Xénophon, 플라톤Platon 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때를 같이하여 프랑스어 번역도 선보였다. 몽테뉴는 시실의 디오도로스Diodore de Sicile의 역사물, 특히 아미요Amyot에 의해 번역된(1572년) 플루타르코스Plutarque의 『영웅전Vies』과『윤리서 Oeuvres Morales』를 애독했다. 그는 아미요를 프랑스 작가 중 최고의 인물로 치켜세우면서, "만약 이 책이 우리를 수렁에서 일으켜 세우지 않았더라면 무식한 우리들은 영영 구제받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는 1578년경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론'이라는 제목의 장을 쓰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도 플루타르코스에 대한 그의 각별한 존경과 찬양의 마음은 『엣세』를 쓰는 동안 줄곧 변함이 없었다.

 

 -이환, 『몽테뉴의 엣세』(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고전총서 서양문학 22) 중에서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전체 작품들 가운데 고작 6편과 5편의 에세이만 골라 번역한 두 권의 책(천병희 번역 『수다에 관하여』와 허승일 번역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을 최근에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꼈던 건 '양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희비극 작품들을 쓴 시인들'의 위대성이다. 두 권의 『윤리론집』 번역본에 붙은 수많은 주석들은 거의 대부분 '호메로스' 아니면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에 대한 '원전 출처와 약간의 부연 설명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비롯한 수많은『대화편들』 또한 작품들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사정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소위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은 독특한 양면성을 지닌 듯하다. 알면 알수록 더욱 재미있지만, 모르면 모를수록 영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특별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도리어 책을 쉽게 읽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꼴이다.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8권 260∼546행 참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옮긴이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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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에 대하여...

 

(밑줄긋기)

 

젊은이는 시가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젊은이가 시에 입문할 때, 우리가 작시술이 모방술과 그림 그리기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것이라는 총체적 서술을 해 준다면, 그 젊은이는 더욱더 견실한 자세를 취하게 되겠지. 젊은이에게,

 

시는 말하는 그림, 그림은 말 없는 시 58

 

라고 흔히 인용되는 말을 숙지시킬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그림 속에서 도마뱀이나 원숭이 또는 테르시테스59의 얼굴을 볼 때,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사한 것으로서 즐기며 찬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그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네. 본질상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모방은 다르네. 모방은 천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관계없이 그 유사성만 나타낼 수 있다면 되네. 한편, 만약 추한 신체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내면, 이는 그 고유성과 개연성이 요구하는 것을 간과하게 되네. 어떤 화가들은 심지어 수치스런 행위를 묘사하기까지 하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있네. 티모마코스60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메데이아의 그림을, 테온61 자기 어머니를 죽이는 오레스테스의 그림을, 파라시오스62가 미치광이로 가장한 모습의 오뒷세우스의 그림을, 카이레파네스63는 유부녀의 남자와의 추잡한 성관계의 그림을 그렸네. 여기서 특별히 젊은이가 훈련받아야 할 점은 모방한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화제(畵題)가 정확하게 모방했는지 그 기술에 관한 것이네. 시 역시 흔히 천박한 행동, 사악한 경험과 등장인물을 모방적 암송으로 들려주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는 그 안에 있는 찬미의 대상이나 성공적 요소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더욱이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해서도 안 되네. 젊은이는 오직 등장인물들과 사물에 대해 적합하고 고유하게 그 유사성이 제대로 모방했는지 하는 그러한 것들을 칭찬해야 하겠지.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닻을 감아올리는 권양기의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 스치는 소리, 그리고 포효하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네. 그러나 파르메논64이 돼지 소리를 모방하고 테오도로스65가 권양기 소리를 모방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이런 소리를 그럴듯하게 모방한다면, 우리는 즐겁다네. 우리가 병들고 위궤양으로 몹시 아픈 사람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피하지만, 무대에서 슬퍼하거나 죽는 것으로 나타나는 아리스토폰66의 <필록테테스>와 실라니온67의 <이오카스테>를 보면 재미를 느끼게 되네. 익살꾼 테르시테스나 여인들을 유혹하는 시쉬포스, 포주 바트라코스, 이런 사람들의 언행을 읽을 때 젊은이는 이런 것들을 모방하는 기능과 기술을 권장하는 것은 몰라도 역시 그것이 모방하는 성향과 행동은 거부하고 비난하는 것을 배워야 하네. 그 이유는 아름다운 어떤 것을 모방하는 것과 어떤 것을 아름답게 모방하는 것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아름답게'의 의미는 '알맞게', 그리고 '고유하게'이고, 추한 것들은 추한 것에 '알맞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네.

 

주석

 

58. 플루타르코스는 『모랄리아』, 「아테나이인들은 전쟁의 업적으로 더 유명한가 아니면 학문 때문에 더 유명한가 」라는 에세이에서 이 언급을 시모니데스가 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시모니데스는 그림을 침묵하는 시로, 시를 말하는 그림으로 일컫는다. 왜냐하면 화가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역사로서 표현하고 있는 저 모든 행동은 과거와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가 색채와 형상으로 꾸미는 것을 시인은 단어와 문장으로 연관 짓는다. 오직 그들은 모방의 자료와 방법에서만 다를 뿐이다.

 

또 호라티우스의 언급도 읽어 보기 바란다.

 

시는 그림과도 같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절정감을 느낀다. 어떤 것은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평가의 형안(炯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장소에서 관람 되기를 원한다. 어떤 것은 한 번만 보아도 마음에 들지만 어떤 것은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마음에 든다.(호라티우스, 『시학』)

 

59. Thersites :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군인. 『일리아스』에서 그는 안짱다리와 절름발이, 안으로 움츠러든 어깨, 머리카락으로 덮인 머리 모양을 하고, 저속하고 추하며 위트라고는 별로 없는 위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 나의 생각 : 이 인물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에도 등장한다. '그리스 최고의 활솜씨'를 지녔던 필록테테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함을 타고 항해하던 중 그만 몹쓸 병에 걸리고 만다. 전우들에 의해 홀로 렘노스 섬에 버려진 채 살아가던 그에게 훗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가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트로이아 전쟁 소식'을 주고받는다. 필록테테스가 이런저런 소식을 묻자, 네옵톨레모스가 "그 분도 세상을 떴소이다. 간단히 말해, 전쟁은 나쁜 사람은 마지못해 잡아가고 쓸 만한 사람들은 대놓고 잡아가지요." 라고 대답한다. 바로 그 대목에서 필록테테스가 떠올린 인물이 바로 테르시테스였다. "맞는 말이오. 그래서 묻겠는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나 말솜씨만은 빈틈없이 교활한 그 사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요?"라고 되물었던 것이다. 아주 가끔씩은 이와 비슷한 인물이 현실 세계에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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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시테스 (그리스어: Θερσίτη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의 병사였다. 다른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이 왕이나 장군인데 비해 그는 계급이 낮은 평민으로 지독한 독설가이자 수다쟁이였다.

 

일리아스 제2권에서 호메로스는 이례적으로 테르테시스의 못생긴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일리오스에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생긴 자로
안짱다리에 한 쪽발을 절었고 두 어깨는 굽어
가슴쪽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깨 위에는 원뿔 모양의
머리가 얹혀 있었고 거기에 가는 머리털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일리아스, 제2권 216~219행.

 

그는 수다장이로 자신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여러 영웅들과 왕들을 조롱하였다. 그는 아킬레우스는 "겁쟁이"로 욕하고 오디세우스를 공공연히 비난했고 아가멤논에게도 "욕심쟁이"에다가 "계집애 같은 겁쟁이"라고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다 오디세우스가 황금의 지팡이로 때리자 테르시테스는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는 결국 자신의 조롱과 독설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투에 나서고 한 전투에서 트로이 진영을 도와 전쟁에 참여한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를 죽였다. 아킬레우스는 펜테실레이아의 투구를 벗겼는데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시체를 가져와서 겁탈했는데 이를 보고 테르시테스가 네크로필리아라며 조롱했다. 이에 화가 난 아킬레우스가 테르시테스를 죽여버렸다. 테르시테스는 권력에도 굴하지 않은 비평적 인물의 상징으로 많은 철학자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자주 거론된다.

 

(출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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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Timomachos of Byzantium : 헬레니즘 시대의 유명한 화가. 그의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자기 아이들을 죽이는 메데이아와 광기를 부리는 아이아스이다.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두 그림을 80탈란트의 거금을 주고 구매해 베누스 신전에 헌납했다고 한다.

 

61. Theon of Samos :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헬라스 화가. 오레스테스의 광기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62. Parrhasios of Ephesus : 고대 헬라스의 유명한 화가.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399년 전후에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기원전 400∼380년에 활약했던 제육시스 화가와의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잘 그려 새들을 속였는데, 그는 커튼을 잘 그려 제욱시스를 속였다고 한다. 그의 가장 정평 있는 그림은 거지로 분장한 오뒷세우스의 그림이다.

 

63. Chaerephanes of Euboea : 니코파네스로 더 알려져 있는 헬라스의 화가. 춘화도(春畵圖)로 유명했다.

 

64. Parmenon : 기원전 4세기의 희극배우로서 돼지의 성대모사가 유명했다. 그는 무대에서 가짜 돼지 새끼를 들고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어 반 시간 이상이나 청중을 웃겼다고 한다. 얼마나 잘했던지 시골 소년이 진짜 돼지 새끼를 가져와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게 했지만, 관중은 파르메논의 돼지 소리만 못하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65. Theodoros : 원래는 엘렉트라를 연기하는 비극배우였으나, 천부적인 성대모사의 기술을 발휘하여 사람뿐만 아니라 무생물의 시끄러운 소리도 잘 냈다고 한다. 특히 배의 닻을 감아올리거나 풀어 내리는 데 사용하는 장치인 권양기의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 <젊은이는 시가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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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작인『돈키호테』를 남긴 세르반테스는 죽기 며칠 전에 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내 목숨이 끝나 가고 있다. 내 맥박이 달려온 기록을 보면 아무리 늦어도 이번 일요일이면 끝날 것이고, 나는 나의 삶의 여정을 마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 일요일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616년 4월 23일 금요일, 마드리드 레온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의 일이다.

 

그가 죽은 날 셰익스피어도 함께 죽었다. 유네스코는 1995년부터 이 날을 '세계 책의 날'로 정했다고 한다. 올해 '책의 날'이 유난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그 두 인물이 작고한지 꼭 400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역사'에서 400년은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지만, 두 거장들이 숨을 거둔지 400년씩이나 흘렀다고 생각하니, 문득 짧게 열렸다가 금세 닫히고 만 '작가의 유한한 삶'과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듯한 '작품의 무한한 생명'이 새삼 뚜렷이 대비되는 듯해서 그 느낌이 자못 새롭다.

 

이만 각설하고, 올해는 특별한 기념일이니만큼 무엇보다 <10문 10답>이라도 우선 성실하게 채우고 보자. '책의 날'이 하루 이틀 지났다고 해서 '책을 기념하는 일'마저 그렇게 빨리 서둘러 마감되었다고 여길 필요는 없을 테니...

 

 * * *

 

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언제가 좋냐구요? 우선 계절부터 말씀드리지요. 저는 아주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치는 날씨도 좋아하고, 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도 좋아합니다. 날씨에 따라서도 책을 읽는 기분이 조금씩은 다른데, 그저 맨숭맨숭한 날씨보다는 폭우가 엄청 쏟아질 때를 더 좋아하고, 폭설이 내릴 때도 좋아합니다. 그럴 때 책을 읽으면 정말 특별히 '묘한 쾌감'이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듯하거든요.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냐구요? 그 어떤 곳 보다도 저는 동네 도서관이 좋습니다. 저는 주말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습관적으로 동네 도서관으로 책을 읽으러 갑니다. 사실, 제가 최근 10여 년 동안 읽은 책들의 9할 이상은 동네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이지요. 저는 동네 도서관에 갈 때 우리 동네 교회와 성당 앞을 지나쳐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성당을 찾아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곤 할 때 저는 '동네 도서관'에서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특별히 선택해서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집을 나섭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만나왔던 고대의 인물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연이어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도 더러 있고, 어서 빨리 지금 만나는 작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 내가 미리 점찍어 둔 또다른 옛 인물을 서둘러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주 가끔씩은, 내가 만나러 가는 그 유명한 인물과 곧 마주치게 되리라는 설레임 때문에,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를 때조차 있답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파수꾼   귀가 아프신가요, 마음이 아프신가요?
        크레온   어찌하여 너는 내 아픈 곳을 따지려드는 게냐? 
        파수꾼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범인이고, 저는 귀를 아프게 할 뿐이지요. 

 - 소포클레스,《안티고네》316∼319행

 

이번 질문은 마치 제게는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고대 그리스 비극 가운데『안티고네』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저는 전자책은 그저 '제 눈을 아프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당연히 종이책을 좋아합니다.

 

읽으면서 메모를 할 때도 많습니다만, 저는 주로 밑줄을 자주 긋는 편입니다.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 가끔씩은 '밑줄을 그을 형편이 못 되는 상태로' 글을 읽을 때는 심리적으로 약간 불편할 때조차 있을 정도입니다. 밑줄을 긋기 위해 청색 '모나미 수성 플러스펜'을 몇 자루씩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12개 들이 한 다스를 매번 통째로 사는 편인데, 어떤 해에는 두세 다스를 살 때도 있답니다. 물론 독서노트에 메모할 때도 적잖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요만.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침대 머리 맡에는 책이 없습니다. 아주 가끔씩 침대 위에서 책을 읽다가 잘 때도 있지만, 이튿날 아침이면 읽던 책을 도로 내 책상 위로 가져가거나 책가방으로 서둘러 옮깁니다. 침대에서 책을 읽는 일은 제겐 몹시 드문 일입니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책장에 꽂는 책들은 제법 분류가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고전, 역사, 철학, 과학, 경제, 경영, 투자, 문학, 에세이, 자기계발, 독서, 여행, 취미 등등으로 나누어 배열해 둡니다. 새로 산 책들은 한 켠에 별다른 분류없이 임시로 쌓아둘 때도 있습니다. 자주 들춰보는 책들은 책상 위나 컴퓨터 책상 오른켠 책꽂이 등 손을 뻗으면 금세 닿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둡니다. 저는 책을 구입할 때 몹시 신중을 기하는 편이라 일부러 책을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쓸 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읽을 가능성이 없는 책들은 가끔씩 한꺼번에 와장창 내다버릴 때도 있습니다. 읽지도 않을 책들 때문에 읽고 싶은 책들을 찾는 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은 저로서는 몹시 견디기 힘든 일이니까요.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땐 모험소설을 아주 좋아했더랬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 읍내 '군립도서관'까지는 편도로 시오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지만, 방학때 책을 빌리러 갈 때나, 책을 빌려서 집으로 되돌아 오는 길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걸리버 여행기』,『십오소년 표류기』, 『보물섬』,『80일간의 세계일주』,『톰 소여의 모험』,『셜록 홈즈 시리즈』등등을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적 '모험 소설'을 즐겨 읽던 그때가 가끔씩 떠오르는데, 그런 작품들은 아마도『노인과 바다』,『모비딕』,『돈키호테』,『파리대왕』, 『인듀어런스』, 고대 그리스 신화 가운데『아르고호 원정대 이야기』, 고전 작품들 가운데『오이디푸스 왕』, 『필록테테스』,『오뒷세이아』등을 읽을 때였지 싶습니다.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웬만큼 특별한 책이 아니고서는 '책을 보고 놀랄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네요. 그래서 선뜻 내세울 책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네요. 어릴 때 동네 훈장어르신 한테서 무릎을 꿇고 배웠던 '문종이에 붓으로 직접 쓴 천자문'이 혹시라도 여태까지 남아있었더라면, 그 책이 여러 사람들을 꽤나 놀라게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을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10가지 질문 가운데 제게 가장 구미가 당기는 게 바로 이 질문이었다고 해도 결코 빈말이 아닐 겁니다. 꽤나 오랫동안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자주 떠올렸더랬습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흥분될까요? 그를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저는 그냥 아무 말없이 그저 '월든 호숫가'를 그와 함께 거닐어 보고 싶습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보트를 함께 타고 '콩코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낚시도 함께 하고 야영도 함께 하고 싶고요.(제 서재 대문에 내걸어둔 '글귀' 또한 소로우의 책에서 옮겨놓은 말입니다.)

 

재치있는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도 만나고 싶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가 수상록을 통해 보여줬던 해박한 지식과 해학이 넘치는 말솜씨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많은 책 속에 박혀 있던 주옥같은 대목들을 그토록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아는 그와 같은 인물과 함께라면,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내더라도 도무지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와 베르그송의 책을 한창 열심히 읽을 땐 '그들을 만나러' 도서관으로 가는 발걸음이 흥분될 때조차 있었는데, 막상 그 철학자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네요.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어서 저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도저히 만나 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만나고 싶은 작가가 셀 수도 없이 여럿 남아 있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더 꼽아보라면 저는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를 빼놓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토록 '심오한 웃음'을 우리 앞에 내보였던 작가의 '실제 웃는 모습'은 과연 얼마나 심오할 수 있을지, 저는 그게 너무나도 궁금하니까 말입니다.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그런 책들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셀 수조차 없습니다만, 당장에 떠오르는 책들이라도 주르륵 마구 나열해 보고 싶네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플루타르코스의『영웅전』, 에드워드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 박경리의『토지』정도는 여기에 꼭 남겨놓아야 옳지 싶습니다. 여러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도 여태 못 읽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플라톤의 『대화편』가운데서 빠트린 작품들도 숱하게 남아 있군요.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저는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별로 많지는 않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왜냐하면 저는 책을 읽기 전부터 매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게 꼭 던지거든요. '내가 정말 간절히, 지금 바로, 이 책을 읽기를 원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 질문과 대답 끝에, 단단한 결심을 앞세우며 읽기 시작한 책들은 웬만해서는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놓을 일이 별로 없더군요. 그래도 가끔씩은 책의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갈 때도 있답니다. 그 책을 붙잡기 전에 내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 스스로 어느새 살짝 비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지요. '지금 당장 이 책을 계속 읽기 보다는 조금 나중에 다시 읽는 게 훨씬 더 낫겠어...' 라고 말하면서 슬쩍 그 책을 내려놓은 기억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최근에 붙잡았던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니체의 탁월한 작품들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안티 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등에 비해서는 뭔가 약간은 '맥이 빠지는 듯한 기분'을 그 작품을 읽으며 살짝 느꼈기 때문이었지요. 잠시 니체로부터 얼마쯤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그가 다시 절박하게 그리워질 때, 그 때 다시 읽기 위해서라도 니체의 그 작품은 좀 남겨뒀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일 뿐이겠지만, 제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다른 어누 누구도 말릴 사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

 

이 질문은 다른 책에서도 이미 만났던 질문 같군요. 오래 전에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미리 그 책 속에 적어뒀는지 어떤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말이지요. (퇴근한 후에) 뒤늦게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책 속에 별도로 적어 놓은 뚜렷한 대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밑줄과 별표만 잔뜩 표시해 두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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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천 권 안 되는 그런 책들 가운데, 아무리 훌륭하게 읽었다 해도 다시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뭔가를 주는 책들이 있다. 아마 100권도 채 안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책을 알아낼 수 있을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지만, 최상의 능력을 발휘해서 그 책을 모두 분석하며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도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드는 책이 있다. 놓치고 지나간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즉시 그 책을 다시 읽어보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마침내 다시 꺼내 들고, 거기서 또 다른 놀라움을 맛보는 그런 책을 말한다. …… 가장 훌륭한 책으로 분류되는, 극소수의 책들은 다시 펼쳐 들었을 때 "그 책도 독자와 함께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처음 읽듯,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전에 읽고 이해한 내용이 모두 무효화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에도 진실했던 내용은 지금도 진실하다. 다만 다른 면에 있어서도 진실해진 것이다.

 

책이 어떻게 독자와 함께 성장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한번 씌어지고 출판되면 끝이다. 하지만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은 책이 독자보다 한 수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한 수 위일 수 있다. 정말 위대한 책이기 때문에 여러 수준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전보다 이해력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책이 정말 독자를 끌어올린 것이다. 좀더 지혜로워졌고 좀더 아는 게 많아졌다 해도, 여전히 더 이끌어줄 수 있다. 죽을 때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이런 책은 분명 많지 않다. 100권도 채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독자에 따라 더 적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가지고 있는 정신의 능력외에도 다른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즉, 각자 취향이 다르다. 어떤 사람 마음에 드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책이 확실히 위대하다고 단정지으며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가치를 지닌 몇 권도 채 안 되는 책을 독자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책 읽기와 인생에 대해 가장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책, 읽고 또 읽고 싶은 책, 당신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을.

 

어떤 책이 이런 책인지 알아내는 오래된 문제가 하나 있다. 남은 여생을 무인도에서 살게 되어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중 10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그 목록을 정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인데,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던 즐거움과 정보, 이해를 주는 원천이 단절된다면, 그 인생은 어떨지 상상해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일이다. 라디오도, 텔레비젼도, 도서관도 없는 섬에 달랑 단 10권의 책만 있다면?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비현실적일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조금씩은 무인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부딪힐 일과 비슷한 일, 훌륭한 인생을 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일에 도전 받으며 살고 있다.

 

 - 모티머 에들러,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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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이런 예상 질문'에 대해 미리 마음 속으로 조금씩 생각해 둔 책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무인도이니만큼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담긴 작품은 꼭 있어야겠지요. 더군다나 언젠가는 기필코 이뤄내야 할 '귀향'에 대한 열망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맨 첫 번째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고르고 싶습니다. 그 다음엔 비슷한 책이긴 하지만 여태 읽어보지 못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두 번째로 고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무인도에서 읽기에 더할 나위없이 어울릴 만한 '엄청나게 기나긴 소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꼭 챙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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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4-26 00:40   댓글달기 | URL
완전 좋아합니다 :-)

oren 2016-04-26 13:41   URL
초딩 님께서 분에 넘치도록 좋아해 주시니 글을 쓴 보람을 느낍니다. ㅎㅎ
(대충 마음 속으로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갈까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초딩 2016-04-26 13:42   URL
ㅎㅎㅎ 북플 포스트를 최초로 메일 공유해서 링크 저장해뒀습니다 :-)

oren 2016-04-26 14:00   URL
그런 기능도 다 있군요. 초딩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hnine 2016-04-26 07:20   댓글달기 | URL
책의 날 유래를 oren님 덕분에 알았습니다.
이 문항에 답을 적으면서도 왜 그걸 알아볼 생각을 못했을까요.
열개의 식상한 문항에, 전혀 식상하지 않은, 멋진 답변을 쓰셨어요!

oren 2016-04-26 20:59   URL
안영옥 교수님이 번역한 『돈키호테』의 맨 끝에 붙은 `번역 후기`를 읽어 보니, 스페인에서는 `돈키호테`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23일에는 `소설 <돈키호테>를 24시간 동안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 이어가면서 읽는 행사`가 있다고 하더군요. `세계 책의 날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를 만날 수밖에 없는 셈이지요.

* * *
스페인에는 『돈키호테』읽기 행사가 있다. 책의 날인 4월 23일부터 만 하루, 총 스물네 시간을 쉬지 않고 누구나 교대로 읽을 수 있는 대국민 참여 행사이다. 또한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 마을 구석구석에도 『돈키호테』에 나오는 구절들을 새겨 놓은 타일들이 담에 붙어 있어서, 단순히 미관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문화 수준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스페인 사람이면 『돈키호테』를 모두 다 읽었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구어체 표현이나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어휘들, 역사, 문화적 배경이 포함된 이야기들을 다짜고짜 그들에게 묻고 다녔던 건 그런 믿음이 있어서였다. 마드리드 대학 스승에게나 책방 주인에게, 라만차 거리에 있던 아낙네에게, 연로하신 스페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하던 내 모습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돈키호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 안영옥, 『돈키호테』, <번역 후기> 중에서
 

 

(밑줄긋기)

 

사랑에 대한 내 정의를 들을 만한 귀를 갖고 있는가?

 

사람들은 강건하게 자기 자신을 잡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용감히 자신의 두 다리로 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사랑할 없다. 여자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 그들은 비이기적이면서도 한갓 객관적일 뿐인 남자의 사랑에는 악마처럼 군다 ······ 이 대목에서 내가 여자들을 알고 있다는 추측을 감히 해도 될까? 그런데 이것은 내 디오니소스적 지참금의 일종이다. 내가 영원한 여성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자일지 누가 알겠는가? 여자들은 모두 나를 사랑한다 ㅡ 이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 아이를 낳을 도구가 없는 '해방된' 여자들, 이런 사고를 당한 여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ㅡ 다행스럽게도 내 의지는 내가 갈갈이 찢기게 놔두지 않는다 ; 완벽한 여자가 사랑을 하면 갈갈이 찢어버린다 ······ 나는 이런 매혹적인 광란하는 여자들을 알고 있다 ······ 아아, 이 어떤 위험하고도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지하 세계의 작은 맹수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어찌 호감을 주는지! ······ 하지만 복수에 불타는 비소한 여자는 운명조차도 달려가 넘어뜨려버린다. ㅡ 여자는 남자보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악하며, 더 똑똑하기도 하다 ; 여자들의 친절은 이미 퇴화의 한 형태인 것이다. ······ 소위 말하는 '아름다운 영혼' 전부에게는 근본적인 생리적 지병이 있다, ㅡ 그 모든 지병을 다 말하지는 않으련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의학자처럼 되어버릴 테니. 그뿐 아니라 평등권에 대한 투쟁도 병의 한 증후이다 : 모든 의사가 알고 있다. ㅡ 더 여자다운 여자일수록 제 권리들을 위해 격렬히 항거한다 : 자연 상태, 양 성 사이의 영원한 싸움은 그녀들에게 전적인 우위를 부여한다. ㅡ 사랑에 대한 내 정의를 들을 만한 귀를 갖고 있는가? 사랑 ㅡ 그 수단은 싸움이고, 그 근본은 성에 대한 불구대천의 증오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된 사랑만이 철학자에게 적합한 유일한 사랑인 것이다. ㅡ 여자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ㅡ '구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들어보았는가? 아이를 갖게 한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여자는 자식들을 필요로 하고, 남자는 언제나 한갓 수단일 뿐이다 : 이렇게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ㅡ '여자들의 해방' ㅡ 이것은 여자로서는 실패작, 즉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의 아이를 잘 낳는 여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이다 ㅡ '남자'에 대한 싸움은 언제나 수단이고 구실이며 작전일 뿐이다. 자기네들을 '여자 그 자체', '고등한 여자', '여자 이상주의자'로 끌어올리면서 그녀들은 여자의 일반적 수준을 끌어내리고자 한다 : 그것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교육, 바지, 정치적 참정권보다 더 확실한 수단은 없다. 근본적으로 해방된 여자들은 '영원한 여성'의 세계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다. 그들은 복수를 가장 심층적인 본능으로 하는 처우를 잘 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 가장 악의에 차 있는 '이상주의' 족속 전체의 목표는 ㅡ 그런데 이런 것은 남자들에게서도 등장한다. 그 예로 전형적인 노처녀 헨릭 입센H. Ibsen이 있다 ㅡ 성적 사랑의 자연적인 부분, 성적 사랑에 대한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독살하는 것이다 ······ 이런 고찰에 있어서의 나의 점잖으면서도 엄격한 생각에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기 위해, 내 도덕 법전으로부터 악덕에 관한 한 항을 옮겨보겠다 : 악덕이란 말로 나는 모든 종류의 반자연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 아름다운 말을 더 좋아한다면 이상주의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그 항의 구절은 이러하다 : "순결에 대한 설교는 반자연으로의 공공연한 도발이다. 성생활에 대한 모든 경멸, 성생활을 '불결하다'는 개념으로 더럽히는 것은 다 삶에 대한 범죄 자체다 ㅡ 삶의 성령에 대한 진정한 죄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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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봉인(또는 "그렇다"와 "아멘"의 노래)

 

 

(밑줄긋기)

 

문체가 언제나 전제하는 것

 

문체 기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도 또한 언급해보겠다. 기호의 속도를 포함해서 그 기호를 통한 파토스의 내적 긴장 상태를 전달하는 것 ㅡ 이것이 문체의 의미이다 ; 그리고 나의 내적 상태들이 특출나게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내게는 수많은 문체의 가능성이 있다 ㅡ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다종 다양한 문체 기법들이 말이다. 내적 상태를 정말로 전달하는 문체, 기호와 기호의 속도와 제스처를 ㅡ 복합문Periode의 규칙들은 모두 제스처 기법이다 ㅡ 잘못 파악하지 않는 문체는 좋은 문체이다. 내 본능은 여기서 실수하지 않는다. ㅡ 좋은 문체 그 자체라고 하는 것 ㅡ 이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물 그 자체'처럼 하나의 순진한 우매함이자 '이상주의'에 불과하다 ······ 문체가 언제나 전제하는 것은 문체를 들을 귀가 있다는 것 ㅡ 그와 동일한 파토스를 가질 수 있고 또 그 파토스에 적합한 자들이 있다는 것, 자기를 전달할 만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내 차라투스트라도 우선 그런 자들을 찾는다 - 아아, 그는 더 오랫동안 찾아야 할 것이다! ㅡ 사람들이 우선 그의 말을 들을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기에 ······

 

(중략)

 

위대한 리듬 기법, 복합문의 위대한 문체가 숭고하고도 초인간적인 열정의 거대한 상승과 하락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이 나에 의해 비로소 발견되었다.; 《차라투스트라》3부 마지막 장인 <일곱 개의 봉인>이라는 표제의 송가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시라고 불리어온 것의 위로 천 마일이나 높이 날아올랐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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