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최근에 랄프 왈도 에머슨의 책을 세 권 내리 읽었다. 맨먼저 읽은 두툼한 책 덕분에 예전에 미처 끝까지 읽지 못하고 내려 놓았던 두 권의 얇은 책마저도 이번 기회에 읽게 된 건 정말 뜻밖의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에는 좀처럼 와닿지 않던 에머슨의 낯선 문장들이 어느새 내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점도 놀라웠다.

그의 책을 통해 다시 만나는 몇몇 인물들도 몹시 반갑다. 그런 인물들이 반드시 헨리 데이빗 소로우로 대표되는 콩코드 주변 사람들만은 아니다. 고전 작품들을 통해 내가 이미 만났던 여러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소개받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의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글로 쓰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었다.

단적인 경우가 필록테테스라는 인물이다. 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통해 그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을 만난 뒤로 여태 한 번도 그를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인물 때문에 내가『로빈슨 크루소』를 새삼 읽었다고 말한다면 그에 대한 엉뚱한 핑계가 되리라. 왜냐하면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내내 필록테테스를 어느새 새까맣게 잊어버린 탓에 그에 관한 어떠한 글도 새롭게 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머슨의 글을 통해 그 불쌍한 사나이를 다시 만나는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순전히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저 필록테테스(트로이 전쟁 때의 유명한 사수.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다. 역자 주) 극(劇)에 나타난 자연애(自然愛)를 찬탄한다. 그 잠과 별과 바위와 산과 파도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373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 자기신념의 철학』,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에머슨이 쓴 문장들이 가끔씩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문장들과 너무 닮은 느낌도 받곤 했는데, 그 두 사람의 문장이 그렇게 서로 닮은 점들에 대해 나는 조금도 놀랄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됐던 특별한 교감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하면서 도리어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어도, 누가 누구를 남몰래 모방했다는 속좁은 의심을 품을 계제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토록 독립심이 강한 인물들이, 서로를 남몰래 감화시키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누가 누구의 문장을 베낄 정도로 하찮은 생각을 어떻게 품을 수 있었겠는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주석달린 월든』말미에 끄적여 놓은 메모. 콩코드에 살았던 에머슨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너대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과도 친했다. 그런 흔적들이 『주석달린 월든』에 상세히 나온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작가들, 플루타르코스, 셰익스피어, 단테, 몽테뉴, 밀턴, 다니엘 디포 등도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주석달린 월든』에서 에머슨이 등장하는 대목은 내가 대충 헤아린 것만 따져도 21곳이다.)


간혹, 에머슨이 남겨 놓은 아주 생경한 문장들을 만날 땐 그가 낯설면서도 신비롭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런 문장들은 거듭 읽어도 그 뜻이 모두 독자에게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문장들을 거듭 읽으면 어느새 좁은 틀 안에 갇힌 생각들을 조금씩 더 확장시켜 주는 기분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에머슨의 책들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흔히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불확실한 미래로 미뤄 놓는 편이 더 안전할 듯싶다. 그가 남긴 예사롭지 않은 문장들을 거듭 곱씹어 재음미할 틈도 없이 서둘러 그에 대해 말하기란 여러 모로 여간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을 읽은 덕분에 오래 전에 사두고 끝까지 읽지 못했던 나머지 두 권의 책도 꼼꼼하게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자연』을 번역한 신문수 교수님은 예전에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잠깐 만난 적이 있는 분이다. 그 분은 원래 '허먼 멜빌'을 전공하신 분이다. 그분이 에머슨의 책을 번역한 이유가 허먼 멜빌과 에머슨과의 친분 때문이라면 더욱 반갑다. 사진에 담긴 세 권의 책 가운데는 그분의 번역이 단연코 가장 매끄럽다. ☞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둘러싼 이야기 ☞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 * *


(밑줄긋기)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이다. 아마 우리는 책의 가치만을 고찰하더라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ㅡ 즉, 보다 편리하게 그 영향의 양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가르침은 고귀하다. 초창기의 학자는 주위의 세계를 자기 속에 받아들였다. 그것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에 자기 정신의 새로운 배열을 부여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말하였다. 그것은 생명으로 그 안에 들어가, 진리가 되어 그에게서 나왔다. 그것은 단명한 생각으로 그에게 와서 불멸의 사상이 되어 그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업으로서 그에게 다가와서 시가 되어 그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죽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는 사상이다. 그것은 서 있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 그것은 이제 인내하고 비상하고 영감을 준다. 그것이 생겨난 정신의 깊이에 정확히 비례하여, 그것은 높이 날기도 하고, 오래 노래하기도 한다.(102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공기 펌프로도 완벽한 진공을 만들 수 없는 첫처럼,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저서에서 범속하고 국지적이고 사멸할 수 있는 것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동시대인, 아니 차라리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먼 후손에게, 모든 점에서, 호소력을 잃지 않는 순수한 사상으로 이루어진 책을 쓸 수는 없다. 사실, 모든 시대는 자기 자신의 시대의 책을 써야 한다. 아니, 각 시대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보다 오랜 시대의 책들은 오늘의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103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안내자가 폭군이 되는 것


창조의 행위, 사색의 행위 그 자체에 수반되는 성스러움이 씌어진 것으로 전이된다. 노래하는 시인이 신성하게 여겨졌었다. 그 때문에 그가 노래한 시도 또한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작가는 바르고 현명한 영혼의 소유자로 간주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책도 완벽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마치 영웅을 사랑하는 마음이 타락하여 그의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과 같다. 그리하여 책은 즉각 해악스러운 것이 된다. 안내자가 폭군이 되는 것이다. 아둔하고 편벽된 대중의 마음은 이성의 침투에 문을 여는 것이 더디지만, 일단 문이 열리면, 곧 책을 일단 받아들이면, 그것에 의지하여 서고, 그리하여 그것이 비판받으면 반항의 아우성을 지른다. 대학도 책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다. 사색하는 인간이 아닌 사상가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또 책을 써낸다. 이처럼 단순히 재능만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여 출발이 잘못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통찰한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통용되는 도그마로부터 출발하여 책을 써내는 것이다.(10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온순한 젊은이들


도서관에서 책에 파붇혀 자란 온순한 젊은이들은 키케로나 로크 혹은 베이컨이 제공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들은 키케로, 로크, 베이컨이 이 책들을 썼을 때, 그들 역시 도서관에 파묻힌 젊은 청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10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책벌레


이리하여 사색하는 인간 대신 책벌레가 생겨난다. 다시 말하여, 책을 순전히 책이라는 이유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책에 박식한 부류가 생겨난다. 그들은 책을 자연과 인간성에 관련된 사색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영혼과 함께 그것으로 3부 회의를 구성한다. 이리하여 원문 확정자, 교정가, 그리고 각종 서적 수집광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10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책의 바른 사용이란 무엇인가?


책은 잘 사용하면 최상의 것이나, 오용하면 그것처럼 나쁜 것도 없다. 책의 바른 사용이란 무엇인가? 모든 수단이 효과를 얻고자 하는 그 유일한 목적은 무엇인가?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커는 것으로써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책에 이끌려 자기 자신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의 체계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위성이 되어버린다면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살아 움직이는 심령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심령을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에 이르는 길이 막혀 있어서 아직 현동화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 살아있는 심령이 그의 내부에 잠재해 있다. 이 생기 있는 심령이 절대적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고 혹은 창조한다. 이러할 때에 그 심령은 천재성을 발휘한다. 천재는 결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견실한 자산이다. 그 본질에 있어서 살아 있는 심령은 진보적이다.(10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그러나 천재는 앞을 바라본다


책, 학교, 예술 유파, 그리고 제도는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과거의 천재가 토로한 생각에서 멈추어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이것이 좋다, 그러니 이것을 신봉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나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보기만 한다. 그러나 천재는 앞을 바라본다. 인간의 눈은 머리의 뒤쪽이 아니라 이마에 달려 있다. 인간은 미래를 전망하고, 천재는 창조한다. 어떤 재능을 소유하고 있건 간에, 인간이 창조하지 않는다면, 신성의 순수한 유출은 그의 것이 아니다 ㅡ 타다 남은 불기운이나 연기는 있을지 모르지만, 불꽃은 없다. 창조적인 태도, 창조적인 행동, 창조적인 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 행동, 말은 관습이나 권위의 흔적이 배어 있지 않고,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정신 그 자체의 감각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온 것이다.(10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바른 독서의 길

의심할 바 없이 바른 독서의 길이 있다. 독서을 엄격히 종속적인 것으로 삼는 것, 그것이 바른 길이다. 사색하는 인간은 자신의 도구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 책은 학자의 한가한 시간을 위한 것이다. 학자가 신을 직접 읽을 수 있다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읽은 기록을 읽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것이다. 간간이 찾아오는 암흑의 시간(그런 시간이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다)에 ㅡ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별들도 반짝임을 멈출 때, 그때 우리는 그들의 불빛으로 밝혀진 램프에 의지하여, 새벽이 다시 열리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는 것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아라비아에는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며 열매를 맺는다"는 속담이 있다.(106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곤충류의 경우와 흡사한 것

최상의 책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의 특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그것을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본성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들의 운문, 예컨대, 초서, 마블, 드라이든의 운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장 현대적인 기쁨에 젖는다. 다시 말하여, 그 기쁨의 대부분은 그들의 시에서 모든 시간이 추상회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우리는 꽤 먼 과거, 곧 이백 년 혹은 삼백 년 전에 살았던 이 시인들이 내 영혼에 밀접하게 다가온 바 있는 것, 나 역시 생각해본 바 있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경이의 기쁨을 맛보면서 동시에 얼마간의 외경심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철학적 주장은 그 증거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이 밖에도 우리는 어떤 예정된 조화, 곧 앞으로 태어날 심령에 대한 어떤 예견과 함께 이들이 장차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한 저축을 준비할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기 전에 보지도 못한 유충을 위하여 먹을 것을 비축해 두는 어떤 곤충류의 경우와 흡사한 것이다.(10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속담에도 있듯이, "서인도 제도의 부를 집으로 가져오길 원하는 자는 그것을 운반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마음이 노력과 창의성으로 분발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읽는 어떤 책이든 그 책장은 다의적인 암시로 빛날 것이다. 모든 문장은 겹으로 의미를 띠고, 그 저자의 의미는 세계 자체만큼이나 광대해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통찰자의 투시와 시간이 그 많은 둔중한 날과 달에 비하여 짧고도 드문 것이듯이, 책 속에 기록된 것은 아마 그 책의 최소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항상 진실인 것이다. 그리하여 분별 있는 자는 플라톤을 읽든 셰익스피어를 읽든, 그 안에서 그 최소의 부분 ㅡ 진정한 예지의 말씀 ㅡ 만을 읽을 것이다. 그는 나머지 부분을,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저서나 셰익스피어의 저서의 몇 배의 분량이라도, 모두 무시해버린다.(108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 * *



에머슨의 대표적인 시도 여기에 덧붙인다. 이미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다시 읽어도 새롭기만 하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지성인들에게 존경받고,

아이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것.


정직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분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한 뙈기 정원을 가꾸거나,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러한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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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늦게라도 링크 하나를 걸어 둔다. 먼 훗날에도 혹시 이 글을 보고 방송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라디오에서 '에머슨'에 대한 이야기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정말 우연이었겠지만, 마치 '에머슨'을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했다.

    (KBS 제1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은 이튿날 새벽 1시에도 전날 저녁 방송을 다시 들려준다.)


http://radio.kbs.co.kr/player/player.html?title=세상의 모든 음악_(2017-04-07)&url=R2007-0077_S000_20170407_PS-2017054157-01-000_02_M4AA0012.mp4&type=303&kind=aod#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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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4-0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머슨에 대한 강의를 얼마전에 들었어요. Kant에 대한 것부터 강의 시작을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초월주의, 자연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도구적 이성에 대한 반향... 미국의 문화부흥, 문화적 독립 선언으로서 <자연>등등. 이후로 에머슨의 사상이 다음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주홍글씨를 쓴 나타니엘 호손도 에머슨의 사상을 흠모하여 에머슨이 살던 곳에서 살아보기까지 했을 정도라고요. 에머슨 다음에 나타니엘 호손, 그 다음으로 허먼 멜빌 순서로 이어지는 강의를 듣고 와서 마침 oren님의 이 페이퍼를 보니 반갑습니다.

oren 2017-04-08 13:54   좋아요 0 | URL
hnine 님께서 들으신 ‘강의 내용‘을 전해 듣고 보니 저도 그 강의 내용을 다시 듣고 싶을 정도네요. 에머슨의 철학과 사상이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우리는 정작 그의 저작조차 제대로 읽고 소화해 내기 벅차다는 생각도 듭니다. 월트 휘트먼이 ˝나는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에머슨이 나를 펄펄 끓도록 했다.‘고 말한 게 제가 가진 책의 날개에도 적혀 있더군요. 우리가 휘트먼처럼 에머슨에 대해 공감하기란 여간 벅찬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cyrus 2017-04-0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시가 마음에 듭니다. ‘많이 웃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안할 수 없는 일입니다.

oren 2017-04-08 13:59   좋아요 0 | URL
저는 저 시를 읽으면서 어느새 ‘아이들처럼 많이 웃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반성부터 하게 되더군요.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도 ‘성공‘이라는 에머슨의 말에 다시금 용기를 내봅니다^^

포스트잇 2017-04-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앞문장, ‘정직한 비평가‘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
에머슨....이름은 알고 있지만 한번도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덕분에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oren 2017-04-08 14:30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소로우와 에머슨 사이의 우정과 갈등‘이 떠오릅니다. <소로우의 일기>에도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겪는 고통이 몇 군데 등장하고, <콩코드강과 매리멕 강에서의 일주일>에도 ‘우정‘에 대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심각한 고찰‘이 나오는데, 아마도 틀림없이 에머슨을 염두에 두고 쓴 대목인 듯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갈등에 대해서는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네요.

프레이야freyja 2017-04-0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적 읽기에 대한 문장도 눈에 듭니다. 최소 부분, 진정한 예지의 말씀만 담기.

oren 2017-04-08 14:32   좋아요 0 | URL
에머슨의 말들은 참 인상적인 표현들이 많은 듯해요. 그가 말한 ‘최소 부분‘,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매번 그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찾아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캐모마일 2017-04-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머슨은 <세상의 중심에서 너 홀로 서라>(원제 : Self-Reliance)로 알게 되었는데, 에머슨이 살았던 시대나 사상적 맥락을 몰라서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하지? 하고 읽었습니다.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상황과 초월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보고 아 그렇구나 정도만 알고 그냥 넘어갔었네요...이번에 동서문화사 책을 통해서 에머슨의 사상을 좀더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oren 2017-04-08 14:58   좋아요 0 | URL
캐모마일 님의 말씀처럼 ‘에머슨‘이 미국의 문학과 철학 등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에머슨의 저작들은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드물고, 에세이처럼 가볍게 편집되어 나온 얇은 책들이 대부분인 형편도 한 몫 거든 듯합니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말한 대로, ˝책은 그것이 처음 씌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읽혀져야˝ 하는데, 에머슨의 작품에서는 특히 번역 문제가 그걸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듯합니다.

blueyonder 2017-04-08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한 뙈기 정원을 가꾸거나,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 이런 생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좋은 포스트 감사합니다.

oren 2017-04-08 14:54   좋아요 1 | URL
에머슨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대단하게 여기는 성공이 사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듯합니다. 숱한 성공 스토리를 쓴 사람들이 과연 진짜로 성공한 게 맞을까 싶기도 하고요. 에머슨이 25세때 쓴 일기 한 대목도 이와 연관지어 음미해 볼 만한 내용이 있더군요.
* * *
대중의 무지에 관한 대화나 민중의 마음에 맞는 장황한 웅변이나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늘 불안을 느낀다. 그런 대화야말로 현학적이고 무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은 알고 있고 우리만큼 잘 판단할 줄 안다. 타고날 때부터 지닌 뛰어난 재능이나 훌륭한 재주를 그들보다 더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다. 흔히 이러한 말투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은 모두 범인의 이해력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문장, "사물의 원인을 아는 자는 행복하여라(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 클리프턴 패디먼


 * * *


대략 30년쯤이나 잊고 지내던 사람을 최근에야 우연히 다시 만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선은 몹시 반가울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다시 보는 구나, 라는 노인네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는 잠시나마 서로 어색할 것이다. 서로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하고 풋풋했던 그 옛날의 모습을 찾아내려 더러 애쓰기도 할 것이고, 세월의 풍파에 얼마만큼이나 시달렸는지도 몰래 살필 것이다. 어쨌든 서로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몹시 놀랄 게 틀림없다. 정작 자신이 상대방을 더 놀라게 만든다는 사실도 잠시 까맣게 잊은 채.


그런데 30년쯤 전에 우연히 책을 통해 만난 인물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문득 그 인물을 다른 책에서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그것도 몇몇 책들을 통해 거듭해서 자주 만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인물을 다시금 쳐다보게 될 것이다. 설사 그 인물은 조금도 변치 않았을지 몰라도 내가 그만큼 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책을 통해 만나는 옛 인물은 현실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살아있는 인물을 만나는 경우와는 너무 다르다. 세월의 간극 때문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크게 변한 나 자신이 전혀 변치 않은 책 속의 인물을 다시 알아보고 놀라는 꼴이 얼마나 놀라운가.


어디 책 속에서 만난 인물에 대해서만 그럴까.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속의 가공인물들도 오랜만에 다시 읽는 경우에는 틀림없이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숱한 사람들이 이미 그런 경험을 우리에게 자주 들려준다. 심지어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전혀 다른 의미와 색조로 다가오는 걸 경험할 때도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동안에 그 책 속에서 '달리 보고 느끼고 있는 자신'을 다시 만난다고 얘기하는 모양이다.


이제 시덥잖은 뻔한 얘기는 저만치 밀쳐 두고 내 얘기를 해 보자. 내가 오래 전에 만났던 책 속 인물 가운데에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어디서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 사람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한 권 남긴 고대 로마의 시인이라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건 순전히 몽테뉴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끊임없이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싯구절을 끝도 없이 책 속에 쏟아놓았기 때문이다. 몽테뉴를 만난 사람이라면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를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라는 사람을 새까맣게 잊고 지낸지 대략 30년쯤 지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아마도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통해서도 가끔씩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던 듯하다. 그 사람은 그때만 해도 내가 알던 예전 그대로의 인물일 뿐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담은 시집『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저자일 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건 몽테뉴의 책을 다시 읽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가 남긴 그 유명한 책이 드디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몇 해 전에 듣고 잽싸게 책을 사들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책을 그저 구경꾼처럼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를 다시 쳐다보게 된 건 아주 최근에 내가 마키아벨리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난 영향이 컸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알고 보니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필사할 만큼 열광적으로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군주론』과 『로마사론』곳곳에 루크레티우스로부터 받은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걸 직접 내눈으로 확인할 때에는 묘한 느낌도 받곤 했다.



(책을 쌓은 순서는 시대순을 따랐다. 가장 오래된 책인『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대략 1,000년 이상 먼지 속에 묻혀 있다가 '포조'에 의해 1417년에 발굴된 귀중한 책이다. 이 철학시집이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에피쿠로스학파의 물리학,우주론,윤리학'이다. 에피쿠로스는 무려 300여 권의 책을 썼다고 하나 지금 전해지는 것으로는 세 통의 편지와 40개의 금언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유일한 책인 셈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도 '에피쿠로스'가 맨 마지막 순서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그 어느 곳에서도 결코 루크레티우스의 이름을 단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였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교도 신앙'에 물든 사람들을 배격하는 풍토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후 세계에서의 복된 삶'을 교리 전파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카톨릭 사회가 '영혼 불멸'부터 부정하는 루크레티우스의 불온한 저서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현실을 명민한 마키아벨리가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곧바로 야콥 부르크하르트를 만났다.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마치 '본격적인 중세말 여행'을 떠난 듯 내내 즐겁고 유쾌했다. 그런데 그의 책 속에서도 루크레티우스는 어김없이 다시 얼굴을 내밀고 빼곰히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 부르크하르트를 통해 다시 만난 그는 그리 말쑥한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그는 천 년 이상이나 캐캐묵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갑자기 중세말의 이탈리아인들 앞에 불쑥 다시금 나타났던 것이다. 그를 독일 수도원의 먼지 속에서 건져 올린 사람은 포조 브라치올리니였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맨 처음엔 그저 포조가 '크세노폰의 『키루스 대왕의 교육』을 라틴어로 번역한 대가로 금화 500냥을 받은 사람'쯤으로, 그러니까 당대의 전제군주들이 문예부흥에 앞을 다퉈 크게 선심을 쓸 때 운좋게 대박을 터뜨린 학자의 한 사람 정도로 소개하는데 그쳤다.


그런데 나중에 부르크하르트가 포조를 본격적으로 소개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결코 단순히 책이나 번역하고 희귀본이나 찾아 다닌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일찍부터 '묘비명 수집가'로 활약했으며 '흉상 수집가'로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부르크하르트가 포조의 두 번째 등장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르네상스에 정통한 역사가인 그보다 더 나은 적임자가 없을 듯하다.


포조의 로마 탐방과 더불어 유적 연구는 처음으로 고대 작가 연구 및 비문 연구와 밀접히 연관되어 진행되었다(포조는 덤불을 샅샅이 헤치며 비문을 조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밀어내고 기독교적 로마라는 개념도 고의로 배제시켰다. 단지 그의 연구가 좀더 광범위하고 삽화까지 곁들여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53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3부 고대의 부활> 중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마침내 포조의 손길을 거쳐 먼지구덩이에서 빠져나올 무렵의 '이탈리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얘기를 마치 우리의 코 앞에서 바라보듯 생생하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매번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페트라르카는 읽을 줄도 모르는 그리스어판 호메로스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숭배한 사람이다. 보카치오는 칼라브리아에 사는 한 그리스인의 도움을 받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최초로 라틴어로 정성껏 번역했다. 이윽고 15세기가 되자 비로소 새로운 발견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필사를 통해 도서관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그리스어 저작들도 왕성하게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당시 가난에 몰릴 때까지 책을 사서 모은 소수 수집가들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현재 전해지는 저작물들, 특히 그리스 작가들의 저작물 가운데 일부만 갖고 있을 것이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수도사 시절부터 고사본을 사들이고 그것을 필사시키느라 빚에 허덕였다. 이때 그는 이미 르네상스의 2대 정열인 책과 건축에 헌신하겠다고 공언했고 교황이 된 뒤에는 이 약속을 지켰다. 필사가들은 필사를 했고 도서 수집가들은 그를 위해 세계의 절반을 돌며 고서를 찾아 다녔다.(263∼264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3부 고대의 부활> 중에서

필사와 번역, 도서관과 장서에 대한 당대의 흥미로운 얘기들까지 여기에 인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루크레티우스와 포조는 부르크하르트의 방대한 연구 대상에서 보자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쨌든 포조는 부르크하르트의 책에서 제법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정작 루크레티우스는 불쌍할 정도로 홀대받는다. 그는 딱 두 번만, 그것도 단지 그의 이름만 겨우 언급될 뿐이다. 그래도 나는 그 정도로도 몹시 반가웠다. 어쨌든 부르크하르트가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묘사한 첫 번째 대목을 잠시 살펴 보자.

고서 채집가인 구아리노와 포조 가운데 포조는 잘 알려져 있듯이 콘스탄츠 종교회의 때 남독일의 여러 수도원에서 활동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니콜리의 대리인 자격으로 일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키케로의 연설집 여섯 권과, 지금은 취리히 사본이 되어 있지만 그때는 장크트갈렌 사본이었던 퀸틸리아누스의 최초 완본을 발견하여, 이것들을 32일만에 모두 완벽하고 아름다운 서체로 필사했다고 한다. 그는 또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마닐리우스, 루크레티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아스코니우스 페디아누스, 콜루멜라, 아울루스 겔리우스, 스타티우스 등의 저작을 증보했고, 레오나르도 아레티노와 공동으로 플라우투스의 마지막 희극 열두 편과 키케로의 「베레스에 반대하는 연설」도 세상에 내놓았다.(265쪽)


이제나 저제나 루크레티우스가 쓴『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얽힌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가 등장할까 하고 눈이 빠지도록 부르크하르트의 글을 세심하게 읽은 나같은 독자들은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몹시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의 이름이 겨우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그마한 글자로 쓰여진 각주(脚註)에서 그에 관한 내용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책에 딸린 수많은 주석은 대부분 부르크하르트 자신이 붙였는데, 하필이면 루크레티우스의 책에 대한 각주 내용은 아쉽게도(?) 훗날의 편집자와 번역자가 붙인 별도의 주석에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이다.)


단테나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고대 철학은 바로 기독교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에서 가장 먼저 이탈리아인의 삶을 파고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에피쿠로스 학파가 부흥한 것이다. 물론 그때는 에피쿠로스의 저술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고대 후기에도 사람들은 그의 학설에 대해 다소 편향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이 없는 세계를 아는 데에는 루크레티우스*나 키케로를 통해 배운 에피쿠로스주의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어느 만큼 글자 그대로 이해했는지, 혹시 이 불가사의한 그리스 현자의 이름이 대중에게 편리한 유행어가 된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도미니쿠스회의 종교재판소가 다른 방도로는 옭아넣을 길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이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대개 일찍부터 교회를 경멸하고 있던 자들이지만, 특별히 이단적 교리나 발언을 문제삼아 고소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사치스러운 생활만 보여도 그들을 고소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단테는 「지옥편」의 제9곡과 제10곡에서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화염에 휩싸이고 반쯤 열린 석관에서 처절한 비탄 소리가 올라오는 끔찍한 무덤 안에는 13세기에 교회에 의해 격파되고 파문된 두 부류의 인간들이 누워 있다. 하나는 교회에 맞서서 특정한 사설을 의도적으로 퍼뜨린 이단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육체와 함께 사라진다고 주장하여 교회에 죄를 범한 에피쿠로스 학파들이었다.(587∼588쪽)


[가이거의 주석: 루크레티우스는 포조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 Titus Lucretius Carus. 기원전 97∼55. 고대 라틴 시인. 6운각의 산문으로 지은 6권의 교훈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가 속한 에피쿠로스파의 철학사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 기초를 두고 인간을 신에 대한 공포, 미신,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으로 집필했다. 그의 유작에 남아 있는 것을 키케로가 발견하여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역자 주)


대략적인 사정이 이러한데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줄기찬 생명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르네상스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그를 홀대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비록 부르크하르트의 걸작에서는 '색인'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지만, 루크레티우스는 '인류의 생각의 역사'에서 아주 굳건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피터 왓슨이 쓴 『생각의 역사』라는 방대한 책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그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흔적에 두루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은『생각의 역사』의 '색인'에 담긴 인물들인 마키아벨리, 포조, 페트라르카, 몽테뉴, 야콥 부르크하르트 등를 통해서 가로질러 다가가는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과제는 루크레티우스와 몽테뉴를 연결시키는 것뿐이다. 이 어려운 난제를 내가 모두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건 무리이고 과욕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이미 피터 왓슨이 '생각의 역사'에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부분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몽테뉴가 자란 세계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지성의 주요 목적은 내세에서 구원을 얻는 데 있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므로 그 주요 기능은 말하자면 "인간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몽테뉴는 그것을 엉터리로 몰아붙이고, 지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현세에서 더 올바르게, 더 생산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당시 지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문의 여왕'인 신학과 철학의 비중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 대신 심리학, 민족학, 미학에 대한 관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인문학의 탄생을 초래했다.


그 과정에서 몽테뉴는 세속 세계, 다양성의 의미와 가치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리스도교의 '내세'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서도 불신의 시선을 던졌다. "철학의 임무가 우리에게 죽는 방법과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데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가능한 한 최대의 정보를 수집한 다음 그 자료를 차분하고 현명하게 분석해야 한다." …… 이리하여 몽테뉴는 내세보다 현세를 중시했고, 그리스도교의 또 한 가지 기본적 요소인 영혼의 비중도 크게 낮추었다. 아울러 영혼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좋고 건강하며 신체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나쁘고 저열하다는 선입견도 힘을 잃었다. 그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영혼의 운명을 중재하는 성직자의 위상이 하락했다. 둘째, 성행위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는 중세의 사고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몽테뉴가 보기에 성은 고결한 것이므로 성에 관해 죄의식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743쪽)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Ⅰ』, <25. '무신론의 위협'과 불신의 시대> 중에서


이 정도로까지 일을 진척시키고 나니 내 어깨가 한결 가볍다. 몽테뉴 - 루크레티우스 - 쇼펜하우어와 니체 - (다시) 몽테뉴 - 마키아벨리 - 야콥 부르크하르트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책읽기를 통해 '내 머리 속의 루크레티우스'가 어떤 인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대충이나마 해명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루크레티우스와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이 '근대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주장을 담은 스티븐 그린블랫의『1417년, 근대의 탄생』을 읽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더 깊이있는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도 제쳐두고 그 책부터 읽겠다는 건 아무래도 루크레티우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나는 그 책을 사지도 않았다. 그 책마저 욕심내는 건 나의 우선과제는 아니다.(<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이 루크레티우스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 한 권을 너무 '침소봉대'한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도 나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 책의 영향을 지금보다 더 낮춰 평가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내가 애초에 이런 내용들을 붙잡고 길게 씨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몽테뉴를 통해 알게 된 루크레티우스의 참모습을 여기에 소개하는 일도 내겐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증명하고도 남을 '차고 넘치는 증거들'을 확인하기 위해 '미리 저장해 놓은 글뭉치'에 접근하여 '검색 엔진'을 돌렸더니 과연 그 자료들이 방대하다! 저 많은 자료들이 끌려나오는 동안에 '그르륵'하는 미세한 거부의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저 자료들을 보기좋게 살짝 다듬는 일 뿐이다.(끌려나온 글뭉치는 이 글과 함께 펼쳐놓기엔 민망스러울 정도로 길어서 일부러 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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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뭉치'에 대해 덧붙이는 말)


이 방대한 자료들을 한번 슥 읽어보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이걸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몽테뉴 사상의 핵심이 루크레티우스의『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머릿속을 들어가 보지 않으면 진실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추측의 영역'을 두고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집이 몽테뉴의 구미에 여간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하나의 독해법일지 모르겠다. 나 또한 몽테뉴가 내 구미에 잘 맞는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집을 직접 읽어보면 몽테뉴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해학과 재치가 느껴지지 않고 꽤나 딱딱한 철학서처럼 읽힌다. 차라리 내겐 몽테뉴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말 속에 루크레티우스를 절묘하게 끼워놓은 비빔밥 같은 구수한 맛이 훨씬 더 좋다. 


그의 장시는 딱딱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리학과 우주론을 시의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이 당초 어려웠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정도로 그 사상을 잘 표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뜻이 불분명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나, 그래도 힘들여 읽어 나가면 힘찬 웅변과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비전을 완벽하게 집어놓고, 아주 구체적이고 인상적인 이미지들로 그것을 풀어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는 루크레티우스의 이런 능력을 단테 이전에는 만나보기 어렵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알려진 부분(제4권 중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은 나도 '구경삼아' 대충 읽어 봤다. 거기서 몽테뉴의 철학과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연애의 형이상학'과 심지어 니체의 생각과도 빼닮은 '여러 원형들'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와 몽테뉴가 남긴 두 권의 책은 모두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이유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이 잔뜩 스며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역시 '금서'였다(마키아벨리는 카톨릭 교회와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 국가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었다).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구호는 예나 오늘이나 진리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 * *

 


만족해서 물러가라 102∼103

그대가 인생에서 소득을 보았다면, 그대는 거기에 포만했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어째서 마음껏 먹은 손님처럼 인생을 뜨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인생을 이용할 줄 몰랐다면, 인생이 쓸데없었다면
그까짓 것 잃었다고 서러울 것 있나? 무엇 때문에 삶을 또 바라나?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 199

나는 이성으로 어떤 사물을 이렇게 결단적으로 그릇되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우리 어머니인 대자연의 힘에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우월한 처지에 두는 수작이며, 그리고 이런 일을 우리의 능력과 역량의 척도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일은 세상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나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 손에 잡히는 대부분의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장님이 손으로 더듬듯 얼마나 컴컴한 구름 속을 거쳐서 잡게 되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참으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습관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도 보아 싫증이 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빛나는 창공을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런 사물들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이 사물이 처음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마치 그것이 갑자기 그들 눈앞에 놓여졌다고 상상하라.
이보다 더 기적에 비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것을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루크레티우스)

강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자가 처음으로 강 앞에 나왔을 때에, 그는 그것이 대양인 줄 알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사물들은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극한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큰 강이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을 못 본 자에게는 크게 보인다.
한 나무와 한 인간을 두고도 그러하니, 모든 종류에게
각자가 본 가장 큰 것은 거대하게 보인다.      (루크레티우스)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 282∼283

천성은 우리들에게 고통 없는 신체와
걱정이나 공포 없는 행복의 심정을 누릴 수 있는
마음밖에 요구하는 바가 없음을 보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군중이 어리석고 천하고 비굴하고 지조 없이 잡다한 정열의 폭풍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끊임없이 떠돌고 있는 꼴과, 이 현자의 자태를 비교해 보라.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맹목적이 되어서 이러한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농군과 왕, 귀족과 상민, 관리와 개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관찰해 보면, 갑자기 극도의 불평등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입은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이다.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331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이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그것은 다른 일보다 중대하게 보이며
그것을 향유하게 되면, 다른 갈망이 솟아나와서
우리는 똑같은 갈증에 사로잡힌다.    (루크레티우스)


서적에 대하여 433∼434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이솝 우화는 대부분이 여러 가지 의미와 해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그 이야기와 격이 맞는 어떠한 모습을 골라낸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유치하고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더 살아 있고 본질적이며 내면적인 의미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뚫어보지 못한다. 나 역시 그 꼴로 읽는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라면 시가(詩歌)에서는 베르길리우스·루크레티우스·카툴루스, 그리고 호라티우스가 유달리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가운데 전원시는 완벽한 시가 작품이라고 행각한다. 여기에 비교해 보면 그의 《아에네이스》의 어느 구절은, 작가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손질해야 될 점이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다. 내게는 《아에네이스》의 제5권이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또 루카누스를 좋아해서 즐겨 읽는다. 문체보다도 그의 고유한 가치와 사상과 판단의 진실함을 즐긴다. 저 선량한 테렌티우스로 말하면 그 라틴어의 애교와 우아미가 우리 심령의 움직임과 풍습의 조건들을 탄복할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어느 시각에나 우리 행동을 살펴보면, 나는 그의 시가 생각난다.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에게는 새로운 미와 아담한 풍치가 발견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살던 시대 가까이에 생존했던 사람들은 루크레티우스를 그에게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내 생각에도 이 비교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좋은 시구에 부딪히면 이 신념을 고집하기가 힘들다.

우리 시대에 희극을 써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이 방면에 재간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에 나오는 재료를 서너덧 합쳐 자기 것 하나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 문장의 매력이 너무나 우리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이야기의 맛은 잊어버리고 만다.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454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그것이 모두 악덕스럽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런 논법을 잘 본다. 즉, 악덕이 가장 큰 노력을 할 때에는 이성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제압한다고 하며,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그 경험을 끌어서 말한다.

육체는 쾌락을 재촉하고
비너스가 여자의 밭에 파종하려고 할 때에    (루크레티우스)

그때에 쾌락은 우리를 너무 심하게 혼미시켜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력은 그 힘을 상실하고 완전히 탐락 속에 오그라들어 정신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이 다르게도 될 수 있으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마음이란 긴장시켜서 경계심으로 굳게 다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쾌락의 충격을 억제할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품행이 단정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증언한 바와 같이, 나는 비너스를 강압적인 여신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나는 나바르 여왕이 《일곱 밤 이야기》의 하나에서 말하듯(이 작품은 그런 제재로는 묘하게 꾸며진 것이다), 한 남자가 오래 갈망해 오던 애인과 며칠 밤을 보내는데, 모든 기회와 자유를 가지고 함께 지내며 단지 키스와 접촉만으로 만족하라는 약속의 신의를 지켰다는 것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장소와 위치에 따라 489 

락탄티우스는 짐승들에게 말뿐 아니라 웃는 능력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라가 다르므로 언어가 다른 것은, 같은 종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서, 장소와 위치에 따라 메추리의 노랫소리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때로 잡다한 조류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는 소리가 대단히 달라지며,
그 중에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목소리도 변하여
목쉰 소리로 노래하는 것도 있다.      (루크레티우스)

(나의 생각)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490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위에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는다고 현자(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루크레티우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질서와 단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본성의 모습 아래에서의 일이다.

사물들은 각각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이 정한 움직일 수 없는 차이를 지켜간다.                                                                      (루크레티우스)



기가 막힐 일이다 507

두 왕들 사이에
불화로 일어난 큰 투쟁이 벌어진다.
이때 전군(全軍) 의 생기 띤 전투적 열중과
군중의 진동하는 맹위가 어떠한가는 상상에 맡겨 둔다.   (베르길리우스)

나는 이 거룩한 묘사를 읽으면, 언제나 인간성의 졸렬한 허영을 읽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 공포와 경악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저 투쟁적인 동작, 저 음향과 고함소리의 폭풍우.

검광이 번쩍 하늘에 솟으니
주위 대지는 맞부딫치는 무기의 눈부신 빛으로 번쩍이고,
인간들의 굳센 걸음에 땅이 울리고,
그 난동에 충격받은 산악의 반향은 하늘의 별들에까지
그들의 소음을 치솟아 올린다.                                    (루크레티우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가장 위대하였고, 가장 승리하였고, 이 세상이 있은 이후로 가장 강력하던 황제가, 놀잇감 삼아서 아주 재미나고 극히 교묘하게 바다와 육지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50만 명의 생령과 피가 그의 운명을 좇아 사라지고, 세계의 동서 두 부분의 힘과 부가 그가 이루려는 계획을 위해 소진되게 한 일을 들어 보자.

안토니우스가 글라피라와 사랑을 했다고
풀비아는 자기도 사랑해 달라고 내게 의무를 부여한다.
풀비아와 사랑을 하라고! 마리우스가 청해 온다면
그도 사랑해 줘야 하나?
아니다. 내게 이성이 있다면! 사랑 아니면 전쟁을!
하며 그녀는 말한다
- 뭐라고 내 생명보다 내 남근이 더 중하도다 · · · · · ·
울려라! 나팔아!                                                      (아우구스투스, 마르티알리스의 인용)

이 팔도 많고 대가리도 많은 사나운 괴물은 어쨌든 인간들이다. 허약하고 참담하고 가련한 인간들이다. 그것은 다만 뒤흔들리며 열에 뜬 개미집일 뿐이다.

검은 부대는 평원을 횡단하며 행진한다.      (베르길리우스)

거꾸로 부는 바람결, 한숨, 까마귀가 날아가며 우는 소리, 우연히 지나가는 한 마리의 독수리, 말의 헛디딤, 꿈 하나, 목소리 하나, 징조 하나, 아침 안개 하나가 그 괴물을 쓰러뜨려 굴러 떨어지게 하기에 족하다. 단지 햇볕을 그의 얼굴에 쬐어 보라.

그는 바로 녹아서 기절하리라. 시인이 노래하는 꿀벌 떼처럼 그의 눈에 먼지 한 줌 불어 넣어 보라.

우리의 모든 군기(軍旗)들, 연들, 그 선두에선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까지도 패하여 흩어진다.



털도 뼈도 없는 토끼 515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우리의 심령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자기 사정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잡히는 모든 것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고 육체적인 소질을 벗겨 없애고, 자기가 알아 둘 가치가 있다고 보는 모든 사물들을 거기서 두께·길이·깊이·무게·빛깔·냄새·거칠음·매끈함·단단함·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소질은 전부 피상적인 비천한 재료인 양 치워 두고 정리하며, 그들을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로마와 파리, 내가 상상하는 파리를, 그것이 크기도 장소도 돌도 회도 나무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며, 그들을 영생 불멸의 정신적인 자기 조건으로 조절해 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우리 심령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팔소리나 총소리나 전투에 길들여진 말이 마구간에 누워서, 마치 지금 싸움터에 있는 것처럼 자다가 꿈틀거리고 부르르 떨고 하며, 그 마음속에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와 부대가 없는 한 군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그대는 강건한 준마들이 사지를 뻗고 잠들어 누워서도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자주 헐떡이며 마치 승리를 다투듯,
온 근육을 긴장시킴을 보리라.                                                                                            (루크레티우스)

사냥개가 꿈속에 토끼를 쫓고 있다고 상상하며, 잠 속에서 그 뒤를 쫓느라고 헐떡이며 꼬리를 뻗치고 오금을 흔들며, 그리고 달음질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때의 토끼란, 털도 뼈도 없는 토끼이다.


 


오로지 우리들만이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 519

그뿐더러 우리는 그 결함이 바로 동물들의 감정을 거스르는 단 하나의 동물이며, 오로지 우리들만이 본성에서 나오는 행동을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고려해야 할 만한 일은 이 방면의 대가(大家)들이 명령하기를, 사랑의 정열에서 치유되려면 욕심나는 대상의 육체를 자유로이 들여다볼 일이며, 애정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자는 상대편 신체의 음부를 보고는
불타오르던 흥분이 즉시 얼어붙었다.      (오비디우스)

이런 치료법은 아마도 좀 까다롭고 냉각된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로 터놓고 친교를 맺어 가다가 싫증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성이 지닌 결함의 두드러진 징조이다. 우리네 부인들이 사람들 앞에 나오려고 자신을 분칠하며 장식하고, 여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정숙한 마음보다는 기교와 조심성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 비너스들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의 올가미로 결박해 두려는 남자들에게
자기 사생활의 이면을 은닉하려고 매우 조심한다.      (루크레티우스)



어려운 사고방식, 난해성 546∼547

결국 이런 것은 허망한 제목을 가치 있게 보이려고 하며, 우리의 정신에 호기심으로 흥미를 돋운다. 또 우리 정신을 길러 가꿀 재료라고 내주는 것이 살점 없는 헛된 뼈다귀나 갉아먹으라고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런 어려운 사고 방식을 탐하는 것일까? 클리토마코스는 카르네아데스의 문장을 보고, 그가 무슨 의견을 가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어째서 평이한 문체를 피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까다로운 자'라는 별명을 받았던가? 난해성은 학자들이 요술쟁이처럼 그들 기술의 허황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잡술로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여기에 쉽사리 속아넘어간다.

난삽한 언어로 속물들에게 명성을 떨친다.(헤라클레이토스를 가리킴)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애매한 문구 속에
숨겨진 사상만을 애호하며 탄복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무한수 567

그대의 이성은 세상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밖에는 더 그럴듯하고 견고한 기초를 갖지 못한다.

대지·태양·달·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단일하기는커녕 반대로 무한수로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



미친 생각 602

사실 반드시 멸할 자를 영원자에게 결합시키고
둘 사이에 공통의 마음과 상호 반영이 있다고 상상함은 미친 생각이다.
당연히 멸할 자를 영원의 불멸자에게 협동하여
폭풍우의 사나운 위세를 감동하도록 결합시키는 시도보다
서로간에 더 반발적이고 이질적이고 더 충돌할 일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루크레티우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같이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은 나이의 무게 밑에 합해 쓰러진다.     (루크레티우스)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 나온다 625

이리하여 세월의 회전은 사물들의 운명을 변경시킨다.
전에 진귀하게 간주되던 것은 영광을 상실하고
마침내 다른 사물이 그것을 계승하여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나온다.
매일 평가는 높아지며, 이 발견의 찬사가 꽃처럼 만발하며
그것은 인간들에게 경이로운 신용을 누린다.      (루크레티우스)



먼 곳의 일처럼 느끼짐 656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면으로 추악하고 못난 여자들이
가장 큰 영광으로 숭배받고 총애받는 것을 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우리가 싫어하는 자는 더 못나 보인다. 괴로운 처지에 고민하는 자에게는 대낮의 빛도 흐리고 컴컴한 것같이 보인다. 우리의 감각은 심령의 정열 때문에 변질될 뿐 아니라 완전히 마비되는 수가 많다.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대가 똑똑히 보는 사물에 관해서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에 따라서 마치 시간적으로 먼 일인 듯, 또는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짐을 그대는 관찰할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675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당연한 일로, 안일에서 오는 포만보다 더 우리 취미에 역하는 것은 없고,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일보다 더 우리 취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에서 쾌락은 그것을 놓쳐 버릴 위험 때문에 더 증대한다."(세네카)

갈라여, 싫다고 해라.
쾌락에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포만을 느낀다.                                           (마르티알리스)

리쿠르고스는, 사랑을 생기있게 보존하려고 라케데모니아의 부부들이 숨어서밖에 자지 못하게 하였고, 부부가 함께 자다가 들키면 다른 사람들과 자는 것만큼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날 날짜 정하기의 어려움, 들킬 위험, 다음 날의 수치,

남모를 나의 생각, 나의 침묵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호라티우스)

이것이 소스에 쏘는 맛을 준다. 사랑이라는 수작의 얌전하고도 부끄러움 많은 방식에서 얼마나 얄궂게 음탕한 장난이 나오는 것인가! 탐락은 고통으로 자극받기를 원한다. 탐락은 찌르르 쑤시는 때에 더 달콤하다. 창녀 플로라는 폼페이우스와 동침할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신이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욕의 대상을 강력히 포옹하여 신체에 고통을 주며,
이빨은 흔히 입술에 자국을 남긴다.
그 대상이 무엇이건 이 대상 자체를 상해하려는
비밀스런 행동에서 사나움의 싹이 솟아난다.                                           (루크레티우스)

모든 일은 이렇게 돌아간다. 고통이 사물들에게 가치를 준다.

저 위대한 카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것인 동안은 싫어하더니,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다음에는 그 여자를 욕심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676

나는 내 종마장에서 늙은 말 한 필을 쫓아냈다. 이놈은 암컷 냄새만으로는 붙여 볼 도리가 없었다. 제 암컷들과는 일이 쉬우니까 바로 물려 버렸다. 그러나 다른 집 암컷들은 어느 것이 목장 부근을 지나기만 해도 귀찮게 이힝힝거리며 흥분하는 꼴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우리에게 무엇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을 욕심 내게 하는 일이다.

그대가 애인을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는 머지않아 내 관심을 잃으리라.                                                   (오비디우스)

그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 둔다는 것은 경멸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다. 결핍과 풍부는 똑같이 폐단이 되고 만다.

그대는 남은 재산에 골치를 앓고
나는 가난으로 골을 싸맨다.                                                                 (테렌티우스)



반쪽의 존재밖에 709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 간다.      (루크레티우스)

이제부터 내가 되어 갈 것은 반쪽의 존재밖에 없으며,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라지며, 내 자신에서 빠져나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나하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호라티우스)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 743

우리가 갖는 쾌락이나 재물들은 고통과 불편이 얼마간 섞여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쾌락의 샘 복판에 쓴 것이 솟아나와
꽃처럼 피어나는 연인들을 괴롭힌다.                                                                                   (루크레티우스)

우리의 탐락은 극도에 도달하면 어느 점에서 신음과 오열의 풍이 있다. 이 탐락이 고민 속에 사라진다고 말하지 못할 일인가? 진실로 우리가 그 모습을 절정 상태에 꾸며 볼 때에, 우리는 그것을 오뇌·유연·허약·실신·병태 등 병적이며 고통스런 소질의 접두사로 매흙질한다. 그들이 혈연성과 동질성으로 되었다는 두드러진 증거이다.

심각한 기쁨은 쾌활성보다 더 엄격함을 지닌다. 극도로 충만한 만족감에는 유쾌미보다도 한층 안정감이 있다. "절제 없는 행복감은 그 자체를 파괴한다." 안일은 우리들을 찢어발긴다.

그리스의 한 시구 첫머리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다. "신들은 우리에게 주는 모든 일들을 판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어떠한 좋은 일도 순수하고 완벽하게 주지 않으며, 그것을 우리는 대가를 치르고 산다는 말이다. 노고와 쾌락은 기본 성질상 대단히 다르지만, 그렇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자연스런 결합으로 서로 협력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신이 고통과 쾌락을 뭉쳐서 뒤섞어 놓으려고 했다가 그것을 잘 해낼 수 없자, 이들을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인 825∼828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호메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 인물을 감탄스럽고 거의 인간 조건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섞어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는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우며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크리시포스와 크란토르보다도 더 능란하게
더 완전하게 말한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다른 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무궁무진한 샘처럼
피에리아(詩神들의 고향)의 물에
시인들은 입술을 축이러 온다.                                                                                    (오비디우스)

또 다른 자는 말하기를-                            

헬리콘(보이오티아 접경의 산, 중턱에 시신(詩神)들의 제전이 있었다) 시신들의 길동무들을 더하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호메로스만이
별무리의 높이에 오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를-

그의 풍부한 원천에서 후세의 시인들은 그들 시가에 물을 길었고
단 한 사람의 재보로 부유해져서
감히 수많은 작은 하류로
물을 끌어대는 큰 강이다.                                                                                           (마닐리우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는, 호메로스는 군사 훈련에 대단히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라케데모니아 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나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마호메드라는 이름을 두 번째 가진 터키 황제가 교황 피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는 트로이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나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 인들에 대해서 헥토르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어째서 이탈리아 인들이 내게 대항해서 단결하는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961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무(無)만도 못한 일 1006

아가멤논 이전에도 영웅은 많았건만
오랜 어둠의 망각 속에 묻혀졌다.      (호라티우스)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의 멸망 전에도
많은 다른 시인들이 다른 사물들을 노래하였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집트의 제관(祭官)들이 그들 국가의 오랜 운명과 외국의 역사를 알아서 보존하는 방법에 관해서 말한 바를 듣고 솔론이 한 이야기에, "우리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 속에 사방으로 뛰어들어 뿜어져 나가며, 두루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의 진행을 저지하는 어떤 한계도 발견되지 않는 이 시간과 공간의 한도 없는 무한대를 관찰할 수 있다면, 이 무한 속에 우리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무수한 사물의 형체들을 발견할 것이다"(키케로)라고 전하는 것은, 이 고찰에 대한 반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 온 모든 것이 진실이고 그것을 어느 누가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비하면 무(無)만도 못한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흘러가는 모든 사물들의 모습을 두고 말해도, 우리 중의 가장 호기심 많은 자가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짧은 소견의 일들뿐인가!


한 방울의 물 1053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루크레티우스)


소크라테스의 변명 1172∼1175

"여러분, 내가 당신들에게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의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사물들에 관한 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다른 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는 내 고발자들의 밀고에 걸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나는 죽음과 사귄 것도 아니고, 죽음을 아는 것도 아니며, 아무도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자기 소질을 시험해 본 자를 본 일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죽음을 알고 있다고 미리 추측합니다. 나로서는 죽음이 무엇인지, 저승에서는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무관심한 일이고, 어찌 보면 죽음은 바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 가는 일이라면, 그렇게 많은 작고한 위인들과 같이 살러 찾아가서, 이승에서의 불공평하고 부패한 재판관들과 상관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은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소멸이라면, 그런 오래고 평화로운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한 좋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고요한 휴식과 꿈도 갖지 못하는 깊은 잠보다 더 감미로운 일은 느껴 볼 수 없습니다."

······

죽음은 삶과 똑같이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이다. 죽음이 대자연에게 그의 작품들의 계승과 변천을 가꾸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그리고 이 우주 공동체에서 죽음이 손실과 파멸보다도 출생과 증식에 더 봉사하고 있는 이상, 무엇 때문에 본성이 죽음에 대해 증오심과 공포심을 조성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이와 같이 만물이 새롭게 된다.      (루크레티우스)

많은 생명들은 죽음에서 출생한다.      (오비디우스)

한 생명의 쇠잔은 다른 생명으로의 통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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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거기에 자기의 행복과 위대함과 슬픔과 굴욕을 예상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축도. 전 인류의 생활의 축도. 「전쟁과 평화」는 참으로 그러한 명작이다.”

 - N. N. 스뜨라호프(1828∼1895)

 

 * * *

 

(동서문화사 판『전쟁과 평화』는 1권 834쪽, 2권까지 포함하면 1,724쪽에 달한다.『전쟁의 역사』는 1,038쪽.)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어떻게 몽테뉴에게 접근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그 책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어쩌면 톨스토이에게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도 이 말이 제법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톨스토이가 쓴 작품들 가운데 특히『전쟁과 평화』에 '어떻게' 접근할지 몰라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라면 더욱더.

 

내가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은 다 마다하고 『전쟁과 평화』부터 대뜸 붙잡고 읽기 시작한 건 최근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은 덕분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전쟁과 평화』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두 작품 모두 여간해서는 완독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방대한 분량 때문에라도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유사한 공통점을 빼고는 말이다. 아무튼 나는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작품을 훌쩍 뛰어넘고 나니 웬만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차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괜한 걱정'으로부터 거의 해방된 느낌을 일순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험준한 고산준봉을 정복하고 난 뒤에 슬며시 찾아오는 까닭모를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좋은 책은 열심히 읽으면 그 대가가 있다. 가장 좋은 책이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다. 책으로부터 받는 것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 어렵고 좋은 책을 붙잡고 씨름한 대가로 책을 읽는 기술을 향상시켜준다. 둘째, 좋은 책은 이 세상과 독자 자신에 대해 가르쳐준다. 이것이 훨씬 중요한 대가일 것이다. 인생을 배우는 것, 즉,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만 제공해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더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하고 위대한 진리를 보다 깊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360쪽)

 - 모티머 J. 애들러,『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中에서

 

『전쟁과 평화』는 그동안 언젠가 한 번은 꼭 읽어봐야지 하는 막연한 느낌만 가져 봤을 뿐 좀처럼 이 책을 읽을 계기를 찾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도록 강력하게 부추기는 직접적인 계기는 거의 없었을지 몰라도, 막연한 계기조차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톨스토이'를 발견했던 일, 『평생독서계획』에 담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매혹적인 소개글을 만난 일,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에 담긴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속 문장들을 둘러싼 이야기 등이 이 작품에 다가서는 희미한 계기들이었다면, 몇 년 전 어느 날(아마도 틀림없이 '재활용'이 있었던 날이었으리라) 아내가 동네 아파트에서 주워 온 묵직한 '세계문학전집' 판『전쟁과 평화』는 이 작품에 실제적으로 다가서는 '시각적 자극'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강력한 것이어서 마침내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었던 듯하다.

 

('아내가 주워 온 책들'의 외관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노인처럼 비록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저 유명한 작품들을 굳이 '까마득한 옛날 버전'으로 읽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가끔씩 저 책의 '앞부분'에 담겨 있는 '그림들'을 살펴보는 재미만큼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아내가 주워온 책에서도 재삼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저 위대한 작품들이 대개 그저 '장식용'으로만 소비된다는 게 너무 아쉽다. 저들 가운데 그나마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그 얼마나 심오하고 위대한 예술품이던가 말이다. 가령 호메로스, 신곡, 돈키호테, 파우스트,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등만 놓고 보더라도...)

 

 

그런데 톨스토이는 왜 하필이면 '전쟁과 평화'라는 거대담론과도 같은 제재를 '소설 형식'에 담아내려고 했을까? '전쟁과 평화'는 오히려 역사가나 군인 또는 철학자들에게나 훨씬 더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어쩌면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나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형식에 훨씬 더 적합한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 미리 작품 해설을 꼼꼼이 살펴본 바로도 그렇고, 또 소설 속으로 직접 들어간 이후로도 나의 예상이 그리 틀렸던 건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인『전쟁과 평화』는 결코 그저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역사상으로 실제 벌어졌던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거대한 전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와도 닮은 데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결정적인 증거들은 이 책 속에 담긴 '전투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1805년의 '제1차 나폴레옹 전쟁'은 총 4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 내용 가운데 제1편 주요 배경이다. '울름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뮌헨을 거쳐 빈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쉔부른 궁전에 머물고, 오스트리아 황제는 황급히 빈을 떠나 브륀으로 천궁한다. 보헤미아 지방의 유서깊은 도시 브륀은 마침 밀란 쿤데라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농담』의 주무대이기도 하다.(남자 주인공 루드비크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루치에를 무려 15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는 곳이다) 어쨌든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하고, 안드레이는 이 전투에서 '전사자'로 분류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끝에 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이른바 '삼제회전(三帝會戰, Battle of the Three Emperors)'으로도 불리는데, 프랑스에 대항해 동맹을 맺은 러시아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가 이 전쟁터에 동시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파리에 '개선문'을 세워 자신의 마음 속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카이사르를 그대로 따랐다. 아우스터리츠는 브륀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금의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 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나폴레옹'이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당대 유럽의 지도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좌우할 만큼 막강한 위세를 떨치며 생생하게 우리의 눈 앞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전쟁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위대한 문학 작품의 반열에 올랐을까?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막연하게나마 이런 엉뚱한 의문을 늘 마음 한켠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런 막연한 억측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판 일리아스'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마치 놀랍도록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대건축물 앞에 섰을 때 받게 되는 압도감을 느낄 정도였다. 무려 500명이 훨씬 넘는 숱한 인물들이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들에 대한 묘사와 서사 자체도 놀랍지만, 작가 스스로 온갖 인물들과 사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가다듬어 길게 서술해 놓은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 등이 여기에 한데 녹아 있어, 일찍이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파노라마의 장관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데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35세에 '나폴레옹 전쟁 시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869년 41세 때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대전쟁'을 아주 깊이 연구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자세히 탐구함으로써 '자신이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을 이 작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으리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혁명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전 유럽을 정복하기로 마음 먹은 보나파르트와, 그에 맞서 자신들의 '국가의 명예'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의 많은 국가의 황제들과 군사령관들과 외교관들과 민중들이 벌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벌어진 전쟁인지, 그토록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간 숱한 인물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했는지, 그러한 '행위들'은 심지어 우연이었는지 혹은 필연이었는지를 아주 진지하게 탐색해 보는 일이야말로 톨스토이가 진정으로 이 소설을 쓴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토록 지난하면서도(제1부를 완성하는데 6년이나 걸렸고, 아내는 창작에 몰두하는 남편을 위하여 일곱 번이나 원고를 정서하였다.) 진지한 성찰들을 거친 끝에 마침내 방대한 전쟁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며 '위대한 문학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집필하는 톨스토이_레닌그라드 러시아 미술관 소장. 이 그림 역시 주워 온 '학원세계문학전집' 앞부분에 담겨 있다.)

 

 

작품은 그저 단순한 역사소설에만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아무리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비켜나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기 마련이었고, 사실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숱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매번 태어나고 또 죽기 마련인 법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이야기 말고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대저택에서 생활하는 당대의 명문 귀족 집안 사람들이 소설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면서, 그들의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 좌절과 괴로움과 불행, 사랑과 배신, 소박과 탐욕을 놀랍도록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만이 아니라 가정소설 혹은 연애소설이나 심지어 성장소설처럼 읽히게 만든다. 전쟁의 와중에도 수시로 대저택에서 열리는 숱한 무도회와 파티와 만찬 테이블 주위에서 보고 듣는 화려한 무곡을 곁들인 왈츠와 떠들썩한 대화와 몸짓들을 통해 우리는 당대 러시아 귀족들의 온갖 허영과 위선과 허위에 찬 모습까지도 더없이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로스또프 백작 집안'의 '눈이 부시도록 맑게 빛나는 한 때'를 담은 그림. 톨스토이가 소설 속에서 이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생생해서 책을 읽으면서 절로 '한 폭의 그림'을 떠올렸었는데, 뒤늦게 주워 온 '세계문학전집' 속 『전쟁과 평화』에 마침 이토록 환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겨우 열두엇 남짓한 나따샤와 그의 어릴 적 남자 친구인 보리스, 꼬마 남동생인 뻬쨔, 사촌자매인 쏘냐와 그의 남자 친구이자 나따샤의 친오빠인 니꼴라이의 1805년 무렵의 그저 순수하고도 천진난만하기만 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들 앞에 놓인 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어디론가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로스또프 가문의 둘째 딸 나따샤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다. 그녀 곁에는 사촌자매인 쏘냐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언제나 단짝으로 더불어 지낸다.)

 

 

(사진 옆에 붙은 설명은 '파스테르나크의 그림'이다. 아마도 톨스토이의 『부활』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를 말하는 듯싶다.『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화가 파스테르나크의 장남이다.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엘렌'은 바씰리 공작의 딸이자, 약혼한 나따샤를 파혼에 이르도록 유혹한 아나똘리와 남매지간이다. 정략결혼을 한 삐에르와 엘렌은 서로 별거하다시피 지낸다.)

 

전쟁이 터지면서 숱한 젊은이들이 집안의 권유나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으로 고국을 떠나 '머나먼 전선'으로 바삐 이동하고  각자 낯선 군부대에 배치된다. 그들은 마침내 난생 처음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적병과 맞닥뜨리고, 각자 자신의 열망에 부응할 정도의 영웅적인 공을 세우거나 혹은 어리석은 만용 때문에 큰 부상을 당해 쓰러진다. 전쟁터의 실전 상황은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전투' 경험이 더해져 놀랍도록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젊은 장교들은 틈나는 대로 휴가 명령를 받아 그리운 가족들이 살고 있는 빼쩨르부르그 혹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잠시나마 '안온한 일상의 행복'으로 더러 복귀한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서로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어릴 적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쑥쓰러워하면서도 어느새 '예전에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랑의 감정에 일순 휩싸이고 번민하고 남모를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또다시 긴 이별과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그 가운데 갓 결혼한 안드레이 공작의 '군입대 장면'과 니꼴라이의 '첫 휴가 장면'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도 감동적이어서 그 장면을 읽노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자신의 '입영 전야'와 '첫 번째 휴가'를 떠올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이미 군대에 보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나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자식을 군에 들여보내던 그 때 그 가슴이 아리도록 먹먹한 이별의 순간들과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을 맞이하던 가슴 벅찬 재회의 순간들을 잠시나마 넋을 잃고 한참이나 회상할 지도 모르겠다.(『전쟁과 평화』가 유례없이 방대한 규모와 웅장한 스케일 때문에 곧잘 현대판 『일리아스』에 비견되곤 하는데,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아들을 궁녀들 틈에 숨겼던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나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놀라운 '병역기피 꼼수'를 부리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함께 떠올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두 작품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시공간적 간극 때문에 그 작품들이 다루는 전쟁의 원인이나 전개 양상이 서로 너무나 다르다고 미리부터 충분히 수긍하고 보더라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는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절대적인 영웅 숭배'인데 비해 톨스토이의 작품이 '민중의 힘'을 지극히 긍정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서로 완전히 정반대이다.)

 

'전쟁'과 '평화'를 사이에 두고 광할한 시공간적 배경 위에 벌어지는 온갖 인물들에 대한 놀랍도록 섬세한 심리 묘사와 온갖 연령대와 인물들, 온갖 서로 다른 지위와 재산과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 유전'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절로 톨스토이가 평생토록 고민했던 문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만큼 충분히 많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배치해 놓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 속으로 아주 수월하게 파고 들어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과 생각들을 마치 우리 눈앞에 금방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듯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한 섬세한 묘사 능력들이 바로 이 걸작을 자주 '영화화'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재삼 말할 필요가 없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가장 놀랐던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점이었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이토록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과 내면의 심리를 어쩌면 그토록 잘 그려내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전쟁과 평화』가 지닌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가 무려 559명에 달한다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이 작품 속엔 온갖 다양한 인물들이 얼키고 설켜 있다. 물론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이름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대함에 너무 곤혹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신기하게도 이 인물들은 '느린 호흡으로' 이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자연스레 그들의 용모와 성격을 보다 뚜렷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명문 귀족가문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이 점은 흔히『까라마조프 형제들』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가령『까라마조프 형제들』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라는 인물은 온갖 비열함과 추악함과 어두움을 상징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삐에르 베주호프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농노가 딸린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갑부이긴 하지만 선량함과 박애주의와 진리탐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귀족 중심의 인물 구성은 작가인 톨스토이 스스로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명문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데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이 소설을 집필한 배경 자체가 1825년에 일어났던 (명문 귀족가문 출신 젊은이들이 주도한)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근본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의도에 있었다는 점과, 그 탐구 노력이 결국은 거기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까지 닿았고, 결국 그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 가운데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아무래도 귀족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도 당연했다.

 

 

(그림 위_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저택 일부.  그림 아래_톨스토이 집의 깨끗하고 밝은 객실.)

 

 

평생에 한 번 읽기도 벅찬 이 거대한 스토리를 '세 번씩이나' 읽은 어느 독자가 칭찬한 이 소설의 세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포괄성이고 둘째, 자연스러움이며 셋째, 무시간성이다." 그 독자가 세 번째로 다시 읽고서 느낀 이 소설의 미덕은 "톨스토이는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말대로, 인생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이 『전쟁과 평화』의 주제이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좀 괴상하고 시대가 좀 멀어서 그렇지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얘기에 다름아닌 만큼, 누구라도 제대로 붙잡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당장에 너무 빨리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언젠가 적당한 계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서 아주 적당한 시간들이 찾아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유해 본다. 그저 장식용으로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탁월한 예술작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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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몽고메리 장군(1887∼1976) 이 쓴『전쟁의 역사』에는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유명한 전투'들이 총망라되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톨스토이가『전쟁과 평화』에서 다뤘던 '나폴레옹 전쟁'에 관련된 몇몇 대목들만 적당히 골라 담아봤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유럽 곳곳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 병력 배치도. 이 책에 서술된 내용과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속 묘사 내용이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가령 전투 당일의 날씨라든가,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야릇한 사건-우연히 밀짚에 불이 붙었는데,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으로 생각한 프랑스 병사들이 더 큰 불을 놓았고, 이 불길이 맹렬하게 불타오르자 감정에 북받친 3만 병사들이 맹렬히 나폴레옹의 이름을 연호한 일-까지도 '너무나 똑같이'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전쟁의 역사』 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한 그림. 오스트리아군 수석 참모인 바이로더는 잘못된 '작전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역사적인 대참패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전쟁의 역사』앞부분에 담긴 컬러판 '보로디노 전투'. 나폴레옹 군대에서 수훈을 세운 장군이자 화가인 르죈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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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밑줄긋기_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from Value Investing 2016-10-10 20:1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펼쳐 든지도 시간이 꽤나 흘렀다. 내가 읽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의 경우,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724쪽에 이르는데 이제 고작 백여 쪽만 남겨두고 있으니 이번 대장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다. 그런데 마침 오늘 문학동네 판 『전쟁과 평화』가 박형규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으로 드디어(?) 나온 모양이다.(그래서 짤막한 글이라도 하나 쓰고 싶어 이러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판본인 1993년에 나온 '학
 
 
붉은돼지 2016-10-0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대하소설이군요 저도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았다 합니다 ㅋ
그런데 이 전쟁과 평화는 왜 민음사, 문동이나 열린책들 혹은 펭귄 세계문학전집 목록에는 없는지 전에도 궁금해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oren 2016-10-02 00:09   좋아요 0 | URL
정말 대하소설이라는 말에 썩 잘 어울리는 소설이지요. ˝지금까지 씌어진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이라는 평가도 자주 받는 작품이구요. 너무 길다는 게 단점이면서도 정말 장점인 그런 소설인 듯해요. 격류처럼 요동치는 세월 속에서 온갖 등장 인물들이 저마다 성장하고 변모하고 혹은 늙어가면서 제각각 `나이에 따라 변해 가는 선명한 특징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걸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높다란 언덕 위에 서서 유유히 굽이치며 흐르는 대하(大河)를 바라보며 `지난 세월에 내가 겪고 보았던 온갖 사건과 인물들`을 길게 회상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게 되는 듯한, 그런 느낌도 갖게 되더라구요. 유명한 작품 치고는 번역본이 별로 많지 않은 게 좀 이상하긴 하더군요. 앞으로 좋은 판본들이 차츰 새로 나오겠지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영국이 설마 EU에서 '진짜로' 탈퇴하리라고까지 예상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충격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난 듯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이면서 하루 사이에 2,440조원이 증발했다"고 한다. 저 천문학적인 숫자 하나만 보더라도, '영국인들'이 이번에 정말 큰 일을 저지르긴 저지른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나서 오늘 낮에 우연히 '니체의 책'을 펼쳤더니 그 속에는 마치 '오늘날'을 예견한 듯한 글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과연 니체의 예견은 정확했다!  그는『선악의 저편』이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1886년 질스마리아에서 쓴 한 편지에서 '미리'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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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애나 애향심의 그와 같은 격세유전적인 발작

 

우리보다 더욱 둔중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우리의 경우에 몇 시간에 한정되어 몇 시간 안에 끝내게 될 일을 그들이 소화해내고 '신진대사'를 하는 속도와 힘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반 년 만에, 어떤 사람은 반평생에 걸쳐 훨씬 긴 시간을 들임으로써 비로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조국애나 애향심의 그와 같은 격세유전적인 발작을 극복하고 다시 이성으로, 말하자면 '선한 유럽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급속히 변해가는 우리의 유럽에서도 반세기 정도가 필요할지 모르는 우둔하고 머뭇거리는 인종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1절

 

 * * *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은 모차르트에 의해 다 노래로 불리었다 : ㅡ 그의 로코코풍은 아직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의 '훌륭한 사교'와 그의 부드러운 열광이, 중국적인 것이나 당초무늬 장식에 대한 그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중함이, 우아한 것, 사랑스러운 것, 춤추는 것, 눈물 어릴 정도의 황홀한 것을 향한 그의 갈망이, 남국적인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무엇에 아직은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아, 언젠가는 이러한 것도 사라지게 되리라! ㅡ 그러나 베토벤에 대한 이해와 감상이 더 빨리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실로 양식의 변화와 양식 파손의 여운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처럼 수세기에 걸친 위대한 유럽적 취미의 여운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끊임없이 부서지는 흐늘흐늘해진 옛 영혼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미래의 너무 젊은 영혼 사이의 중간 사건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영원히 상실해가는 것과 영원히 무절제한 희망 사이의 희미한 빛이 비추고 있다. ㅡ 루소와 더불어 꿈꾸고 혁명이라는 자유의 나무 주위에서 춤추고 마침내 나폴레옹을 거의 떠받들다시피 되었을 때, 유럽을 흠뻑 적셨던 빛이 이와 똑같았다. 그러나 이제 바로 이러한 감정은 얼마나 빨리 퇴색되어가고, 오늘날 이러한 감정에 대해 아는 것마저 이미 얼마나 어렵게 되었는가, ㅡ 저 루소, 실러F.Schiller, 셸리Shelley, 바이런Byron의 언어가 우리의 귀에는 얼마나 생소하게 들리는가, 베토벤에게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유럽의 똑같은 운명이 이들 모두에게서 함께 언어의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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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이란 

 

영국인들이란 ㅡ 철학적 종족이 아니다 : 베이컨F.Bacon은 철학적 정신 일반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며, 홉스Th.Hobbes, 흄D.Hume, 로크J.Locke는 한 세기 이상이나 '철학자'라는 개념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가치를 약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흄에 반항하여 일어나 스스로 높아졌다. 로크는 셸링이 "나는 로크를 경멸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영국의 기계론적 세계의 우매화와 투쟁하는 가운데 헤겔과 쇼펜하우어는 (괴테와 더불어) 한마음이 되었고, 철학에서 이 두 적대적인 천재 형제들은 서로 독일 정신의 대립적인 양극을 추구했고, 오직 형제들만이 서로 잘못하듯이, 이때 서로 잘못했던 것이다. ㅡ 영국에 결여되어 있고 언제나 결여되어 있었던 것을 저 반 정도는 배우이자 충분히 훌륭한 수사가이며 멍청하며 정신이 혼란한 사람 칼라일Carlyle은 알고 있었다. 칼라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즉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을, ㅡ 정신의 본래적 과 정신적 통찰의 본래적 깊이를, 간단히 말해 철학을 ㅡ 정열적인 찌푸린 얼굴 아래 숨기고자 했다. ㅡ 굳게 기독교에 매달린다는 것은 이렇나 비철학적 민족의 특징이다. 그들에게는 '도덕화'하고 인간화하기 위한 기독교적 훈육이 필요하다. 독일인보다 더 음울하고 관능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잔인한 영국인은 ㅡ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 민족 가운데 더 저속하고, 또한 독일인보다 더 경건하다 : 영국인에게는 여전히 기독교가 더욱 필요하다. 좀 더 예민한 콧구멍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영국의 기독교 자체에도 변덕과 술로 인한 방탕이라는 실로 영국적인 냄새가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는데, 기독교를 그러한 것에 대한 치유제로 사용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ㅡ 즉 조야한 독에는 정교한 독이 사용된다 : 좀더 정교하게 독에 중독된다는 것은 실로 우둔한 민족에게는 이미 진보요, 정신화되기 위한 한 단계이다. 영국인의 우둔함과 농부 같은 진지함은 기독교적인 몸짓 언어이나 기도와 찬송으로 여전히 가장 잘 견딜 수 있게 위장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석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전에는 감리교의 지배 아래 그리고 요즘에는 다시 '구세군'으로 도덕적으로 투덜댈 줄 아는 저 동물 같은 술꾼과 방탕한 자들에게 실로 참회의 떨림은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비교적 최고의 '인간애'의 성과일 수 있다 : 이 정도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가장 인도주의적인 영국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이것은 비유로 (또한 비유 없이 ㅡ ) 말하자면, 음악이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 영국인은 정신과 몸의 움직임에 박자나 춤이 전혀 없으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박자와 춤에 대한, '음악'에 대한 욕구를 가진 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가장 아름다운 영국 여성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아라 ㅡ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비둘기와 백조는 없다. ㅡ 마지막으로 그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보라! 그러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단 말인가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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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다양하고 격정적인 예술을 통해 열망하는 것이 유럽, 바로 이 하나의 유럽인 것

 

민족주의의 망상이 유럽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가져다주었고 아직도 가져다주고 있는 병적인 소외 탓에,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망상에 힘입어 기운차고,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상호 분리 정책이 필연적으로 과도기적 정책밖에 될 수 없음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근시안적이고 성급한 정치가들 탓에, ㅡ 오늘날에는 말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모든 수많은 것 탓에, 이제 유럽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가장 명백한 징조들이 간과되거나 제멋대로 기만적으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이 세기의 좀더 깊이 있고 생각이 넓은 모든 인간의 경우에는, 이 새로운 종합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시험삼아 미래의 유럽인들을 앞당겨 생각해보는 것은 그들의 영혼의 신비적인 작업에 깃들인 본래의 전체 방향이었다 : 그들이 '조국'에 속했던 것은 그들이 전면에 있었을 때, 약해졌을 때, 노령에 있었을 때이다. ㅡ '애국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휴식을 취했던 것에 불과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폴레옹, 괴테, 베토벤, 스탕달, 하인리히 하이네, 쇼펜하우어 같은 인간들이다 : 내가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를 그들 가운데 포함시킨다고 해도 나에게 화내지 말기 바란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해에 유혹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ㅡ 그와 같은 유의 천재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오늘날 프랑스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반항하고 저항할 때 생겨나는 품위 없는 소란에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대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서로 내면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이 양자는 그 요구의 높이와 깊이 모두에서 유사하며 근본이 유사하다 : 그들의 다양하고 격정적인 예술을 통해 그 영혼이 밖으로 위로 치닫고 이를 열망하는 것이 유럽, 바로 이 하나의 유럽인 것이다. ㅡ 그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새로운 광명을 향하고 있는가? 새로운 태양을 열망하는가? 그러나 새로운 언어 수단을 가진 이 모든 장인이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누가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확실한 사실은 같은 질풍노도가 그들을 괴롭혔다는 것이고, 이 최후의 위대한 탐구자들인 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탐구했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는 눈과 귀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ㅡ 세계 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는 최초의 예술가들이며 ㅡ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 작가이자 시인이고, 예술과 감각의 매개자이자 교배자이기조차 했다. (바그너는 음악가로서는 화가에 속하며, 시인으로서는 음악가에, 예술가 일반으로서는 배우에 속한다.) 이들 모두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표현의 광신자들이다 ㅡ 내가 강조하는 사람은 바그너와 가까웠던 들라크루아Delacroix이다 ㅡ . 이들은 모두 숭고한 것, 그리고 또한 추한 것과 잔혹한 것의 영역에서 위대한 발견자였고, 효과와 전시, 진열의 기술에서 더욱 위대한 발견자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천재성을 훨씬 넘어서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유혹하고 유인하며 강제하고 전복시키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섬뜩한 통로를 지닌 철저한 대가였으며, 논리와 직선의 타고난 적이었고, 이질적인 것, 이국적인 것, 기괴한 것, 구부러진 것, 자기 모순적인 것을 갈구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의지의 탄탈로스들이며, 인생과 창작에서는 고상한 템포, 즉 렌토lento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떠오르기 시작한 천민이었고 ㅡ 예를 들어 발자크를 생각해보라 ㅡ 무절제한 노동자였으며 거의 노동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자였다. 풍속에서는 이율배반자이자 반역자이며, 균형과 향유를 모르는 야심가요 탐욕자였다. 이들은 모두 결국에는 기독교 십자가에 매달려 부서지고 침몰했지만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그 누가 반그리스도의 철학에 이를 만큼 충분히 깊이 있고 근원적이었단 말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대담하고 모험적이며 뛰어난 힘이 있고 높이 비상하며 솟구쳐 날아가는 유의, 보다 높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세기에 ㅡ 이는 대중의 세기이다! ㅡ '보다 높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야만 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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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ㅡ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ㅡ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ㅡ 나 자신에 의해서도. ㅡ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삶에서 '악의'는 거의 입증되지 않는다 ; 문학적 '악의'에 대해서도 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순수한 바보는 너무도 많이 들어 있다 ······ 누군가가 내 책 한 권을 손에 든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존경 표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ㅡ 그가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신발조차 벗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ㅡ 장화는 말할 것도 없고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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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님께서도 지적했듯이, '맥락' 없이 인용하는 글들은 곧잘 '말도 안되는 소리'로 매도될 때가 자주 있는 듯합니다. 저 역시 (바로 그런 '표현'을 앞세운 지인의 글을 보고) 대뜸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지요.

 

 

'연도 멸도 없는 해탈의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저도 한동안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해탈'이 곧 불교도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 해탈에 이르면 곧 '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일진대, 왜 거기서 다시 '새로운 연을 이루고 그 연을 따라 보살이 되고...' 라는, 곧 '윤회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듯한 과정이 다시 '불교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거듭 생각해 보게 되었고요. 제게는 (양철나무꾼 님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대목이 아직까지도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해탈'이 무슨 뜻인지를 네이버에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려주더군요.

 

해탈 [解脫, Vimukti, Vimoka]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 자유 등을 의미하는 말. 원래 인도 바라문교에서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후에 불교에 도입되었다. 불교에서의 해탈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로, 업과 윤회를 벗어난 상태를 일컫는다. 업()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인과()의 법칙이 절대적으로 적용되어 선업()인지 악업()인지에 따라 낙과()와 고과()가 따른다. 즉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윤회()는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서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이 번뇌와 업에 따라 생사()의 세계를 거듭하며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해탈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나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네이버가 들려주는 대답이 어찌 '궁극적인 해답'을 던져줄 수 있을까요. 그저 '용어사전'을 옮겨놓은 것일 뿐인데 말이지요. 결국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깊이 고민했던 몇몇 철학자들의 생각까지 다시 뒤져보게 되었고, 그들의 말을 천천히 다시 반추해 봤습니다. 과연 그들의 책은 여전히 '얼음을 깨는 도끼'로 남아 있었고, 저는 '다시, 도끼'를 펼친 듯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저도 양철나무꾼 님의 말씀처럼, '불교 용어'를 가지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꼬치꼬치 따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전히 '뗏목'과 '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직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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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ㅡ 예술가들에게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거나, 또는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에게는 높은 정신성을 위한 유리한 선행 조건들을 냄새맡는 후각이나 본능을 의미한다. 여성들에게는 잘 해야, 더욱 유혹하기 위한 애교나 아름다운 육체가 보이는 약간의 부드러움이나 포동포동 살쪄 예쁜 동물의 천사 같은 것을 의미한다. 생리적인 실패자나 부조화자(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대다수의 인간들)에게는 이 세계에 '너무 선하게' 존재하려는 시도이자, 방탕의 성스러운 형식이며, 만성적인 고통이나 권태와 싸우려는 그들의 주요한 무기를 의미한다. 성직자들에게는 본래의 성직자적인 믿음이나, 그들의 권력의 최상의 도구, 또는 권력을 지향하는 '최고의' 면허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성자(聖者)들에게는 동면을 하기 위한 구실이며, 그들의 가장 최후의 영예욕이자, 허무('신') 속에서의 안식이고, 그들의 착란의 형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 사실, 즉 인간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ㅡ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내 말을 이해하겠는가?……내 말을 이해했는가?……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ㅡ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451∼452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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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폭행하고 있다. 우리는 영혼의 호두를 까는 사람들이며, 마치 인생이란 바로 호두를 까는 것일 뿐이라는 듯 질문하며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매일 더욱 의심을 품는 자,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하며, 따라서 아마도 또한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는가?…… 모든 좋은 것은 전에는 나쁜 것들이었다. 하나하나의 원죄에서 어떤 유전적인 덕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결혼은 오랫동안 공동체의 법을 침범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옛날에는 매우 불손하게도 한 여성을 홀로 독점할 경우에는 배상을 했다 (예를 들어, 초야권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는 캄보디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낡은 미풍양속'의 수호자인 승려들의 특권이다). 부드럽고 호의적이고 관대하며 동정적인 감정들은 ㅡ 이것은 점차 높은 가치로 높이 자리잡게 되어, 거의 '가치 자체'가 되었다 ㅡ 오랫동안 그 자신에 대한 자기 경멸을 지녀왔다 : 사람들은 오늘날 가혹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온순함을 부끄럽게 여겼다(《선악의 저편》, 260절). 에 대한 복종 : ㅡ 지상 곳곳에 있는 고귀한 종족들은 스스로 복수를 단념하고 스스로에 대한 권한에 폭력을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데 얼마나 양심의 저항을 느꼈던 것일까! '법'이란 오랫동안 하나의 금기였으며, 불법이었고, 혁신이었다. 그것은 폭력으로 나타났고, 그 폭력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치욕으로만 여겼다. 지상에서 그 어떤 가장 작은 발자국이라 할지라도 이전에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과 싸워왔던 것이다 : 이러한 전체적 관점, 즉 "전진뿐만이 아니다. 그렇다! 걸음걸이, 움직임, 변화는 무수히 많은 고문의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다"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주 낯설게 들린다. ㅡ 나는 이것을《아침놀》18절에서 밝혔다.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자부하고 있는 약간의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 감정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인류의 성격을 확정짓는 진정한 결정적인 주요 역사로 '세계사'에 선행하는 '풍습의 윤리'의 저 어마어마한 시대적 거리를 느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 여기에서는 고통이 덕으로, 잔인성이 덕으로, 꾸밈이 덕으로, 복수가 덕으로, 이성의 부정이 덕으로 통용되었고, 이에 반해 평안이 위험으로, 지식욕이 위험으로, 평화가 위험으로, 동정이 위험으로, 동정받는 것이 모욕으로, 노동이 모욕으로, 광기가 신성으로, 변화가 부도덕적이고 불행 자체를 품고 있는 것으로 어디서나 통용되었던 것이다!" ㅡ (474∼476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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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적 삶의 경우에 삶이란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된다. 금욕주의자는 삶을 결국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미로처럼 취급한다. 또는 행위에 의해 반박당하고 ㅡ 반박당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한다 :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가기를 요구하며, 할 수 있다면, 생존에 관한 자신의 가치 평가를 함께 하기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와 같은 기괴한 평가 방식은 예외적인 경우나 진기한 일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폭 넓고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멀리 떨어진 천체에서 읽는다면, 우리 지구상의 생존이라는 대문자는 아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게 될 것이다. 즉 지구는 본래 금욕주의적인 별이다. 자신에 대해, 지구에 대해, 모든 생명에 대해 깊은 불만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면서,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면서 ㅡ 아마도 유일한 즐거움으로 여기면서, 가능하면 스스로에게 많은 고통을 주는 불만에 차고 오만하며 불쾌한 피조물의 은둔처일 것이라고. 어쨌든 우리는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얼마나 규칙적이고도 보편적으로, 거의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지 생각해보자. 그는 개별적인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는 모든 계층에서 자라나온다. 그는 자신의 평가 방식을 유전에 의해 배양하여 증식시키지 않는다. 실상은 반대의 경우이며, ㅡ 대체로 말해서, 어떤 깊은 본능이 오히려 그의 번식을 금지시킨다. 이러한 삶에 적대적인 종족을 되풀이하여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증식시키는 것은 최고급의 필요성임이 틀림없다. ㅡ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유형이 소멸되지 않는 것은 삶 그 자체의 관심사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적 삶이란 하나의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는 생리적인 발달 자체에, 특히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나 아름다움과 기쁨에 대해 서툴고 음험한 눈초리가 쏠린다. (……) "바로 마지막 죽음의 고통 속에서의 승리" : 이 최상의 기호 아래 옛날부터 금욕주의적 이상은 싸워왔다. 이러한 유혹의 수수께끼 속에서, 이러한 환희와 고통 속에서 그 이상은 자신의 가장 밝은 빛을,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마지막 승리를 인정했던 것이다.(479∼481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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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이 이상 속에서 그러한 이상을 통해 죽음과 싸우며 죽음에 대항하여 싸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상이 인간을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 특히 문명과 인간의 순화가 성취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랬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대로이지만, 그 사실 안에는, 지금까지의 인간 유형에는, 적어도 길들여진 인간의 유형에는 병적인 것이, 인간의 죽음과의 생리학적 싸움(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삶의 권태와의, 피로와의, '종말'을 바라는 소망과의 싸움)이라는 중요한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다르게 되고 싶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싶은 체화된 소망이며, 실은 이러한 소망의 최고점이며, 이 소망의 진정한 열정이자 정열이다 : 그러나 그 소망의 이야말로 그를 여기에 붙잡아 매는 질곡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여기에 존재하고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좀더 유리한 조건들을 만들어내도록 작업해야만 하는 도구가 된다. ㅡ 이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종류의 덜된 자, 부조화자,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한 자, 실패자, 자기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들의 전체 무리를 생존에 묶어 두게 되는데, 이때 그는 본능적으로 목자로 그들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484∼485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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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진정 의사란 말인가? ㅡ 우리는 그가 아무리 스스로를 '구원자'로 느끼고, '구원자'로 존경받고자 한다 해도, 그를 의사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허용되지 않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가 싸우는 것은 단지 고통 자체일 뿐이며, 고통받는 자의 불쾌일 뿐이지, 그 원인이나 진정한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 좀더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이야말로 온갖 정신 착란에 이르는 길을, 예를 들면 아토스산의 헤쉬카스트파처럼, '내적인 광명'에 이르는, 환청이나 환시에 이르는, 음탕하게 넘쳐흐르는 관능의 황홀(성녀 테레사의 이야기)에 이르는, 길을 열고, 또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와 같은 상태로 부여하게 되는 해석이 가능한 한 언제나 열광적이고 잘못된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해석을 하려는 의지에서 이미 울려나오고 있는 맹신적 감사의 어조를 단지 건성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상태, 해방 그 자체, 마침내 이르게 된 저 완전한 최면 상태와 정적은 그들에게는 언제나 최고의 상징으로도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신비 그 자체로, 사물의 근거 속으로 들어가고 귀환하는 것으로, 온갖 망상에서의 해방으로, '앎'으로, '진리'로, '존재'로, 모든 목적이나 모든 소망이나, 모든 행위에서 벗어남으로, 또한 선과 악의 저편으로도 여겨진다. 불교도는 "선과 악 ㅡ 이 두 가지는 결박이다. 완전한 자는 이 두 가지를 지배했다"고 말한다. 베단타의 신도는 "행해진 것이나 행해지지 않은 것이나 그에게 고통을 주지 못한다. 현자인 그는 선과 악을 자신의 몸에서 흔들어 털어낸다. 어떤 행위로도 그의 영역은 고통받지 않는다. 그는 선과 악, 이 두 가지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 이것은 즉 인도 전체에 나타나는 견해인데, 바라문교적인 견해도, 불교적 견해도 이와 마찬가지다. (……) 최면에 걸린 허무의 감정, 가장 깊은 잠의 휴식, 간단히 말해 고통이 없는 상태 ㅡ 고통 받는 자나 근본적인 부조화자는 이것을 이미 최고의 선으로, 가치들 가운데 가치로 여기며, 이것을 그들은 적극적으로 평가해야만 하고, 적극적인 것 자체로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동일한 감정의 논리에 의해 모든 염세주의적 종교에서 허무란 신을 의미한다.)(497∼503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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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ㅡ 이것은 해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다!' 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머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ㅡ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로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 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ㅡ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 ㅡ 의심의 여지 없이 ㅡ 해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더 깊고, 좀더 내면적인, 좀더 독이 있는, 삶을 갉아먹는 고통을 가져 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ㅡ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ㅡ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ㅡ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539∼541쪽)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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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구원, 즉 생과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모두들 이 의지 자체에 불과한 것이고, 의지의 현상은 덧없는 존재다. 그리고 언제나 공허하고 끊임없이 좌절되는 노력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불가항력적으로 속해 있으며, 우리가 묘사하는 고뇌에 찬 세계다. 왜냐하면 앞서 보아 온 것처럼, 생에 대한 의지에서 생은 언제나 확실하고, 생의 유일하고 현실적인 형식은 현재며, 현상 속에서는 탄생과 죽음이 지배하는 것처럼 아무도 이 현재에서 도피할 수 없다. 인도의 신화는 이것을 표현하여 "그들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942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4권」, <68. 생에 대한 의지의 부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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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06-2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정성된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근데, 정말 죄송한데...저 님의 이런 페이퍼의 문제제기에 논리적으로 댓글을 달 깜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제가 페이퍼에서 말씀드렸듯, 전후 문맥에서 오는 어법상의 문제를 제시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꾸벅~(__)

oren 2016-06-21 19:02   좋아요 0 | URL
많은 사람들이 `불멸`이나 `영원한 삶`을 꿈꾸고, 심지어 많은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복된 삶`을 꿈꾸기도 하지요. 그런데 유독 불교는 그와 정반대로 `완전한 無`를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는 게 늘 제게는 인상적이었답니다. 그런데 박웅현 님의 책 속에서 바로 그런 점에 대해 언급한 대목(`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멸이랍니다`)을 두고, 어떤 분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제게는 마치 `어리석은 중생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일갈`하는 듯이 들리는) 표현한 대목에서 저는 솔직히 적잖은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글을 읽고 나서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여러 번 망설이다가 끝내 `괜한 댓글`까지 달게 되었구요. 사실 오늘 이 글에 덧붙인 `책 속 구절들`은 지난 주말에 내내 살펴봤던 글들인데, 양철나무꾼 님께서 거듭 `뗏목에 관한 글`을 올려주셔서 저도 (생략해도 충분했을 법한 이 글을 또다시 참지 못하고) 기어이 글로 쓰고 말았네요. 굳이 문제 제기라기 보다는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하는 가벼운 심정으로 쓴 글이었는데, 너무 부담을 드렸다면 저 역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암튼 오늘은 날씨가 몹시 덥네요. 한 줄기 시원한 장대비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2016-06-22 09:48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3 11:38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6-06-2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아닙니다만 모처럼 흥미로운 글을 읽었기에 관심을 가져봅니다 oren님
덕분에 불교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점 감사드립니다

불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니체, 쇼펜하우어 등이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겠습니다.
특히 니체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물론 고대 인도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서구의 지식인들이 한 둘이 아니겠습니다만)

제가 그들의 저서에서 느꼈던 점은 그들의 사유가 싯다르타 이후의 이후의 불교 정심에 접근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그들의 저서를 통해 불교에 대한 그들의 앎이 지식에 그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그들의 동양적사유가 대부분 우파니샤드에 닿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파니샤드가 불교의 전신에 해당하는 것은 지당하지만 싯다르타의 존재는 인도의 정신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는 도구로서 불교를 이용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 특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러한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하는 대표작이라 느꼈습니다. 불교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니체의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결과적으로 그들이 체화한 불교의 정신에 대한 저의 느낌은 겉멋이 들었다, 정도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이에 해당한다고 느낍니다. 그의 사유가 허무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하겠습니다.
(이는 불교에 관한한 그들의 사유가 그리 깊은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열병처럼 퍼졌던 현상 중 하나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의 수준은 얄팍한 것이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지 여타의 사유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물론 그들의 목적과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다만 그들의 프리즘으로 불교에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가는 느낌이라 몇자 드렸사오니
저의 무례함을 부디 용서하세요 oren님


oren 2016-06-23 13:47   좋아요 0 | URL
차트랑 님 반갑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불교의 심오한 사상`까지도 서양철학자들이 온전히 흡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싶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쇼펜하우어나 니체처럼 천재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사실 쇼펜하우어만 하더라도 그 당시 `이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불교 사상을 공부했다고 하니, 제아무리 산스크리트어까지 공부해가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니체 또한 서양 철학이나 성경 해석 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지만, 불교 사상에 대해서는 불교 경전으로부터 직접 얻어낸 `원문`에 대한 심오한 해석을 내놓는 모습을 구경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불교를 일종의 `염세주의 철학`으로 잘못 이해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기독교의 구원 신앙에 깊이 물든 `서양 정신 세계`에 `혁명`을 일으킨 공로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지 싶습니다. 그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서양 철학은 아직도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숱한 `미망`에 사로잡혀 있을 뻔했을 테니까 말이지요.

차트랑 2016-06-2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을 주시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oren님

저 역시 니체의 혁명적 사고와 그 위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는 바이고 또한 그의 저술들을 사랑하는 일인입니다.

니체가 고대 인도 철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상당한 이해도를 가졌던 것은 전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력 하에 방대한 우파니샤드의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니체는 그 번역된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만 해도 서구인들에게 고대 인도의 사상이란 거의 새로운 것이었지요. 어쩌면 충격적인 것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토마스 만, 바그너, 하이데거, 베버등)이 너도 나도 인도 철학에 관심을 보였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실 인도철학 전공자가 아닌 니체가 그 방대한 원전 하나 하나를 죄다 짚어가며 공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우리가 중국 고전을 알기위해 갑골이나 백서 혹은 죽간에 쓴 글들을 하나하나 짚을 필요가 없는 이유와 같다고 봅니다. 물론 니체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니체가 붓다의 가르침을 원어로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이 돌림병을 앓듯 접한 것은 붓다 이전의 인도철학 중심축인 우파니샤드 였다는 점은 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를 알게해주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제가 지난 글을 드린 것은 니체의 위대한 혁명적 사유를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이 성공적이었음을 언급했습니다만...) 바로 위에서 말씀 드렸듯, 당시 그들(쇼펜하우어, 니체)이 공부한 주된 경전은 우파니샤드였고 그들의 불교에 대한 사상은 얄팍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점입니다(어쩌면 의도적 왜곡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군요). 붓다의 출현은 인도의 사상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이후로 나누었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였습니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접근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인도철학(우파니샤드)에 대한 접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렌님께서 언급하신 용어인 ‘염세’가 그들의 사유 속에 향기를 피운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이 우파니샤드를 중심축으로 공부했기 때문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파니샤드가 불교의 전신이지만 결코 불교의 경전은 아닙니다. 그리고 붓다 이후 불교는 커다란 사유의 변화를 거듭합니다. 우파니샤드가 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경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을 붓다의 가르침과 구별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참고로 독일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제대로 접하기 시작한 것은 1892년이 지난 후에서야 입니다. 노이만이 불교의 원전을 번역하면서 부터인 것이지요. 이는 쇼펜하우어가 죽은지는 수십 년이 흐른 뒤였고 니체가 죽기 바로 2년 전의 일입니다 (니체가 원전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집에 불상을 모셔놓았을 정도로 심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해도가 그리 밝지 못했던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관한 자료의 부족이었던 것이지 불교의 경전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헤세가 불교에 밝았던 것은 오로지 노이만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독일의 불교를 노이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보는 일입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우파니샤드를 접한 서구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불충분했던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결과적으로 우파니샤드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불교에 대해서라면 자연스럽게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결코 불교의 깊은 사유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불교사상에 대한 그들의 미성숙한 이해를 근거로 불교를 사유하고자 함은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가는 느낌이라는 것이 요지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며 논점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더불어 오렌님 덕분에 당시 서구 지식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점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오렌님.

PS. 제가 지난 번에 드린 댓글에 오자가 보여 그 오자 하나만 정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것 멋 ⟶ 겉멋 ㅠ.ㅠ.)



oren 2016-06-24 15:54   좋아요 0 | URL
차트랑 님께서 상세하고도 깊이 있는 해석을 곁들여주시니 훨씬 더 이해하기 쉽군요. 사실 서양 철학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등장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협소한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더군요. 비록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불교 사상의 진수에까지 온전히 닿지는 못했더라도, 그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고대 인도 철학과 불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서양철학이 그 때 이후로 갑자기 엄청난 사유의 확장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지요.

쇼펜하우어가 언젠가 `전세계의 절반이 훨씬 넘는 인구`가 `수천 년 동안` 성서와 예수의 존재조차도 까마득히 모르고도 아주 태평스럽게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왔던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술회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야말로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도리어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동양과 서양 사이에는 켜켜이 쌓인 두터운 `생각의 장벽` 같은 게 존재하는 듯합니다. 동양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반대로 서양 철학자들이야말로 2천 년 이상이나 인도 철학이나 불교 사상을 제대로 모른 채 `그들만의 철학`을 연구해 왔으니 말이지요. 그러니 차트랑 님의 말씀대로, 불교에 적잖이 심취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통해 `불교`에 대한 해석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프리즘`에서 벗어나기 힘든 한계를 지닐 수밖엔 없다고 봅니다. 우파니샤드에 대한 무수한 언급에 비해 여타 불교 경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거의 없는 점 또한 그런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일 테지요.

아무튼 차트랑 님께서 남겨주신 댓글 덕분에 서양 사람들 가운데 특히 독일 철학자들과 몇몇 작가들이 `불교에 다가갔던 길들`을 아주 소상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정말 유익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