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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 서툰 활잡이 바보

 

활을 쏘려는가? 잘 겨냥해서 명중시키게!

과녁에 빗맞으면

화살이 바보배로 날아갈 테니까.

 

궁수들을 싸잡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바보 활잡이가 활쏘기하는 이야기도 다루어보세.

내가 이곳 바닷가에 활터를 벌였다네.

과녁에서 빗나가면 꽝일세.

활쏘기 시합에 걸린 상금은

과녁 정중앙에 가장 가까이 맞히고

마지막 경합에서 우승한 궁사가 차지할 몫일세.

목표를 정확히 노리고 신중하게 쏘아야지,

화살이 밑으로 빠지거나

들떠서는 안 된다네.

서둘지 말고 침착하게 과녁을 겨냥하게나!

대개는 화살을 너무 높이 날려서 실패를 보지.

활이 부러지고, 활시위가 끊어지고,

격발장치가 튕겨나가네.

활시위 으랏차, 당기다가 아차차, 놓치고,

용을 끙끙 쓰다가 의자나 석궁 받침대가 뒤틀리네.

살짝 건드렸는데 석궁이 격발되는 건

활시위가 기름범벅이라 그렇다네.

과녁이란 놈이 어디로 달아났나?

어디를 겨냥해야 할지도 헷갈려 하네.

무작정 시위를 당겨라, 소나기처럼 화살을 날려보지만

하나같이 과녁에서 빗나가니,

경품으로 암퇘지나 받아갈 모양일세.

세상천지에 무수한 궁수들을 보았어도

핑계 없는 무덤은 하나도 없더군.

이 구실, 저 구실 쥐어짜면서

체면 세울 변명거리만 찾아내더군.

정말 아슬아슬했다면서, 그것만 보완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큰소리친다네.

······

(208∼209쪽)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중에서

 

 

재앙을 가볍게 여기는 바보

 

재앙이 손끝에 스치는데도

눈치 못 채는 사람은 바보라네.

불행은 업신여김을 싫어하니

부디 지혜롭게 처신하기 바라네.

 

불행을 당하고 속상해하면서

불행을 쫓아다니는 정신 나간 바보들이 있다네.

그러니 배가 가라앉는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네.

불행은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홀로 오는 법이 드물지.

옛 선인들 말씀과 속담이 말한다네.

"불행과 머리카락은 매일 자란다."

불행은 어떻게 끝장날지 모르니

애초부터 싹을 잘라야 하네.

무릇 바다로 나가려는 사람은

행운과 순풍이 필요하다네.

역풍을 거슬러서 항해한다는 것은

달리기를 거꾸로 하는 셈일세.

현자는 바람을 온순하게 다루는 법을 가르치지만,

바보는 굳이 뱃머리를 뒤로 돌린다네.

지혜로운 사람은 손에

노를 쥐고 어려움 없이 육지로 나아가네.

그러나 바보는 어디로 갈까 갈팡질팡하다가

배 한 척 결딴내고 만다네.

현자는 자신과 이웃을 바른 길로 이끌지만,

바보는 어어 하다가 엉겁결에 목숨을 잃지.

······

(315∼316쪽)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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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보배'의 항해일지이다. 어리석음의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의 바다를 지나서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로 향하는 바보배에는 바보들이 가득 타고 있다. 이들은 무지와 죄악의 승선권을 지참하고 바보배에 올랐다. 출항의 설렘과 즐거움에 들떠서 쾌락의 노래를 합창하던 바보들은 타고 있던 바보배가 침몰하고 죽음에 임박해서야 세상의 가치들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바보배'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추는 밝은 거울이다. 글쓴이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세상의 바보들을 모두 끌어 모아서 배에 태우고, 자신도 배에 오른다. 바보배의 뱃머리에서 바보깃발을 붙들고 있는 박식한 바보가 바로 글쓴이의 자화상이다.

 

《바보배》는 1494년 2월 12일 바젤에서 처음 출항했다. 독일어로 쓰인 브란트의 《바보배》는 바젤의 베르크만 폰 올페의 인쇄소에서 출간되었다. 도회의 시민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했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플루타르코스 그리고 성서의 잠언과 시편 등 시대를 뛰어넘는 해박한 인용과 교훈들로 채워진 브란트의 《바보배》는 동시대와 후대의 인문주의적 글쓰기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다. '바보'가 16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의 상징적 열쇠 개념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로테르담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바보 예찬Lobder Torheit》을 쓰면서 브란트의 《바보배》를 사표로 삼았고, 토마스 무르너의 《사기꾼 조합Schelmenzunft》,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e Pantagruel》도 바보들의 유형을 《바보배》에서 빌려왔다.

 

브란트의 제자 야콥 로허가 '호메로스라도 따르지 못할' 스승의 글 솜씨를 칭송하면서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와 페트라르카에 비길 만한 문재로 꼽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또 수도원장 요한네스 트립테미우스가 단테의 《신곡Divina Comedia》에 빗대어 브란트의 《바보배》를 '신성한 사티로스극divina satyra'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동물적 삶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바보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브란트의 《바보배》는 괴테의 《파우스트Faust》와 더불어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바보배》가 출간된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2년 후였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부분 발췌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이 안경은 주인을 책망하고 있다. 여기, 세상을 직접 보려 들지 않고 책장의 죽은 단어를 응시함으로써 세상을 간접적으로 살피려는 사나이가 있노라고. 브란트가 그린 그 얼빠진 독서가는 "내가 바보선(船)에 가장 먼저 오르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책이 인생의 전부여서 황금보다 더 귀중하다. 여기 나는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비록 한마디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백하기를 학문적인 책에서 이것저것 인용하는 유식한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책은 많이 긁어모았지만 지식은 쌓지 못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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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보르헤스가 알베르토 망겔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많은 운명적인 만남이 그러하듯이.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어느 날 오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여든여덟 살 된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 서점을 찾아왔다. 당시 그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는데도 나는 그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는 않던 때였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도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월터 윌리엄 스키트의 사전과 주해가 붙은 『몰던의 전투Battle of Malden』를 주문해 주었다. ······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나에게 책 몇 권을 주문했다. 나는 그 중 몇 권을 찾아 줬고 나머지 책은 서지 사항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는 서점을 떠날 때쯤 나에게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 왔다. ······

 

그 후 2년 동안 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듯, 저녁 시간이나 또 학교가 허락할 때는 아침 시간에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31∼32쪽)

 

 

 

비록 망겔에게는 보르헤스에게 읽어 줄 '책을 선택할 자유'까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자연스레 얻게 된 소득이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보르헤스에게 글을 읽어 주는 일을 두고 나는 그저 하루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 경험은 일종의 행복한 포로처럼 느끼게 했다.' 그런데 망겔이 보르헤스로부터 배운 책 읽기 방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건 바로 '간통 같은 독서'였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나는 나 혼자 읽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까지도 이제는 마치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촌평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 보르헤스는 체계적인 도서 목록을 불신하고 그런 간통 같은 독서를 권장했다.(37쪽)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그런데 보르헤스가 권장했던 '간통 같은 독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간통의 심리'에 대해서까지도 얼마간 살필 요량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려 봐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 내가 고작 찾아낸 건 스티븐 핑커의 책 속에 담긴 다음의 몇 구절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

이 모든 이야기는 단 하나의 성차이, 즉 남자들이 다수의 파트너를 더 많이 원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자라고 해서 완전히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제아무리 독재적인 사회라도 여성의 발언권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못한다. 양성은 각자 간통 파트너와 결혼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을 갖고 있다. 인간의 다른 견고한 취향들처럼 그 기준들도 적응특성일 것이다.

양성은 모두 배우자를 원하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간통을 더 많이 원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자들이 간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희롱하는 남성 충동은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고(혼인을 빙자하는 경우에는 보상을 받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혼한 여자는 남자를 희롱하거나 희롱의 목표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진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의 정액은 수적으로 불리해질 위험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고환은 고릴라의 신체 대비 크기보다 더 크게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를 향한 질투 감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겠지만 남편들의 질투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지학의 기록을 보면 모든 사회에서 양성 모두 간통을 저지르고, 그때마다 여자들이 항상 비소를 먹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 5시 2분발 열차에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735쪽)

 

 

간통의 심리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중에서

 

 

스티븐 핑커의 다소 과학적인(?) 주장으로부터 '간통 같은 독서'와 관련해서 무슨 시사점을 얻으려는 자체가 너무 엉뚱하긴 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얻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싶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륜 관계'를 맺을 때 '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알베르토 망겔이 『독서의 역사』에서 언급한 수많은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어쩌면 책의 저자들과 독자들 사이에 벌어진 '온갖 흥미진진한 간통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혹은 '어디선가 분명히 읽은 듯한' 대목들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늘 먼저 읽었던 책의 '바로 그 대목'을 찾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좀체로 거기서 헤어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곤 한다. 분명히 어느 책에선가 읽은 듯한데 바로 그 '은밀한 간통 현장'을 찾아내지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이란 너무나 개인적이고도 독특한 것이어서, 이 세상 누구에게도 감히 하소연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런 경험들은 늘 예고없이 불쑥 찾아들게 마련이겠지만, 내가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으면서도 그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 그 철학자가 자신보다 더 앞선 시대를 살았던 '고대의 명망 있는 애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고, 또 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후세의 수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간통 현장'들을 찾으려 애쓴 결과 수없이 많은 '주석'들이 그의 책에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그런 '간통의 흔적'을 굳이 애써 찾으러 나설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독서를 통해 많은 작가들의 은밀한 '간통 현장'들을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사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확보하지 못할 땐 늘 괴롭다. 그나마 어젯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 구절을 훔친 몽테뉴의 흔적을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낸 건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비록 두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사뭇 다르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이상한 사례'를 두 사람의 책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야릇하기만 하다.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

 

이제 분노(thymos)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epithymia)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달려 나가 지시와는 다르게 행하는 실수를 범하는 성급한 하인들처럼. 혹은 개들이 친한 사람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소리만 나면 짖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렇게, 분노는 그 본성의 열기와 빠르기로 말미암아 듣기는 하되 해야 할 바를 듣지 않은 채 복수로 돌진하는 것이다. 모욕이나 멸시를 당했다고 이성이나 상상이 보여 주고 나면 [분노를 관장하는 부분이] 그런 일에는 마땅히 싸워야 한다고 추론해 낸 것처럼 대뜸 성을 내고 나서는 것이다. 반면에 욕망은, 이성이나 지각이 즐거운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것을 즐기는 일로 돌진하는 것이다. 결국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을 따르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더 창피한 것이다. 분노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에 지는 것이지 이성에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본성적인 욕구를 따르는 것을 보다 쉽게 용서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욕망들에 따르는 것은 더 쉽게, 또 공통적일수록 더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노와 화를 잘 내는 성질은 지나침에 대한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보다 더 본성적이다. 마치 자기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 즉 "이 사람도 자기 아버지를 때렸고, 그렇게 맞은 사람도 그의 아버지를 때렸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식을 가리키면서 "얘도 어른이 되면 나를 때릴 겁니다. 우리 집안 내력이니까요"라고 변명하는 사람의 경우가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 아들에 의해 끌려 나가다 문간에서 자신도 자기 아버지를 거기까지만 끌고 갔으니 거기에서 멈추라고 명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251∼25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6장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중에서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127쪽)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몽테뉴를 나는 딱 '여기까지만' 끌고 오겠다. 이것이 나의 한계이니까.

 

 

 

 

 



 
 
mira 2014-10-16 10:40   댓글달기 | URL
독서와 간통 절묘하게 연결시키셨네요

oren 2014-10-16 15:15   URL
그 둘 -독서와 간통- 사이를 연결시키는 게 말이 될까 싶어 많이 주저했었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몽테뉴는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라는 섬뜩한 경고를 내놓은 적이 있었지요. 몽테뉴를 여기까지 함부로 끌고 오다 보니 문득 그 구절이 생각나 겁도 좀 납니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는 말도 그가 남겼으니 제가 좀 떠든다고 `여기까지` 와서 책망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ㅎㅎ


* * *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마찬가지로 애써 가며 사실에 대비하는 자를 비웃는다. 마누라를 새치기당한 수치는 지워질 수 없다. 한번 걸리면 영원히 걸린 것이다. 그것에 징벌을 주면 잘못한 일 자체보다도 더 사실을 드러내 놓게 되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의문을 풀어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불행을 드러내고 비극의 무대 위에 나발을 불어 대면 보기 좋은 꼴이다. 그것은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착한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고도 쓸모없는 지식은 피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는 먼저 집에 사람을 보내서 아내에게 자기의 도착을 알려 주며 엉겁결에 들이닥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 * * * *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찰스 다윈과 앙리 베르그송의 생각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홉스의 '야만인'과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도 함께 떠오른다.)

스스로 '때로는 삼류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소로우는 하버드 대학교의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교사-개인 가정교사, 측량사-정원사, 농부-페인트공, 목수, 벽돌공, 일용 노동자, 연필 제조공, 사포 제조공, 작가, 때로는 삼류시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그가 찰스 다윈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이 내겐 몹시 흥미롭다.

『월든』이 출간된 1854년까지만 하더라도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출간)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로우는 다윈의 첫 작품인 『비글호 항해기』는 무척 감명깊게 읽었던 듯하다. 그런 흔적이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는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듬해인 1860년 1월에 다윈의 주저를 읽었다고 한다. 1860년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해였고, '노예제도'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낸 그가 죽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다윈의『종의 기원』을 읽고 난 느낌들을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깝다. 

소로우의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뿐만 아니라 그의 막힘없는 생각들과 드넓은 안목에 비춰보면, 소로우는 이미 '다윈의 생각'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다윈의『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어느 탁월한 자연과학자의 '당연한 귀결'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내 주제넘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소로우 또한 뛰어난 자연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다윈의 그 책에 대해 반응했던, 그리 대수롭지는 않다는 식의 '딱 그만큼'에 가까운 호의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 * *


 

 

동물적 속성

우리는 내면에 동물적 속성이 감춰져 있어, 고결한 본성이 잠들 때 그 속성이 깨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동물적 속성은 파충동물처럼 비열하고 도덕적으로 방종하며, 결코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인 듯하다. 말하자면, 동물적 속성은 건강한 삶을 살아갈 때도 우리 몸에서 기생하는 벌레와도 같다. 우리가 그런 동물적 속성을 멀리할 수는 있지만 속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동물적 속성이 고유한 활력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더라도 순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 맹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지극히 사소한 부분 때문이다. 범인은 그 차이를 금세 잃어버리나 군자는 그 차이를 조심스레 유지한다."39 우리가 순수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에게 순수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욕망을 억제하고 몸의 외적인 감각을 억제하는 힘과 좋은 행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력만으로 잠시나마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지배해서, 천박한 감각에 따르는 형태를 띤 것을 순수하고 경건한 것으로 바꿔갈 수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나태할 때 생산적인 에너지는 헛되이 낭비되며 우리를 불결하게 만들지만, 절제할 때는 그 에너지가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영감을 준다. 순결은 인간성을 꽃피우기 위한 조건이다. 천재적 재능, 영웅적 자질, 신성함 등은 모두 순결의 결과로 얻는 다양한 열매에 불과하다. 인간은 순수의 항로가 열릴 때 하느님에게 곧장 다가갈 수 있다. 순수한 행실은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불순한 행실은 우리를 낙담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다. 우리 삶은 이러한 부침의 반복이다. 내면에서 동물적 속성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반면 신성한 면은 굳건해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의 열등하고 동물적인 속성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파우누스와 사티로스41처럼 신이나 반신반인半神半人, 즉 신성과 수성이 결합된 존재고 탐욕으로 가득한 피조물일까 봐 두렵다. 또한 우리 삶 자체가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300∼302쪽)


주석

39. 포티에의 프랑스어 번역판 『공자와 맹자』에서 「맹자」부분을 소로가 직접 번역해 인용한 것이다.

41. 파우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사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양半人半羊으로 숲과 산을 지배하는 신이며, 탐욕스럽고 주색을 즐긴다.

 

 

 

도덕 감각

도덕 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그외의 다른 모든 척추동물들이 동일한 보편적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고, 왜 그들의 배발생 초기 단계가 모두 동일하며, 또 왜 그들이 특정한 흔적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들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어떠한 견해가 있더라도 우리 자신과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놓은 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전체 동물 계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동물의 인척 관계와 분류, 그리고 지리적 분포와 지질학적 계통에서 얻은 증거들을 다 함께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론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선천적인 편견이며 우리의 조상이 반신반인에서 유래되었다고 선언하는 오만불손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여러 포유동물의 비교해부학과 발생 과정에 박식했던 박물학자들이 각각의 생물을 독자적인 창조 활동의 작품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다.(70∼71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1장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 中에서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

이 작품에서 도달한 주요 결론, 즉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개인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야생의 황폐한 해안에서 처음으로 푸에고 제도 원주민 무리를 보고 느꼈던 그 경악스러움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내 마음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고 온몸에는 얼룩덜룩 칠을 한 채였다. 그들의 긴 머리털은 헝클어진 채였고 흥분하여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그들의 표정은 거칠고 놀라움과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먹고 살았다. 정부도 없었고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구성원이 아니면 누구에게나 무자비했다. 토착지의 미개인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혈관 속에 비천한 생물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큰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적을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엄청난 희생을 바치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아를 살해하고 아내를 노예처럼 취급하며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고 천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미개인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무서운 적에게 당당히 맞섰던 영웅적인 작은 원숭이나 산에서 내려와 사나운 개에게서 자신의 어린 동료를 구해 의기양양하게 사라진 늙은 개코원숭이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란다.

인간은 비록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의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귀한 자질, 가장 비천한 대상에게 느끼는 연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하등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비심, 태양계의 운동과 구성을 통찰하고 있는 존엄한 지성 같은 모든 고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신체 구조 속에는 비천한 기원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571∼572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동물과 식물

"우리는 동물을 감수성과 깨어난 의식으로, 식물을 잠든 의식과 무감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다른 한편 동물계의 진화는 식물적 삶에 보존되어 있는 경향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거나 멈추거나 아니면 뒤로 돌아가기도 한다. 실제로 한 동물 종의 활동이 아무리 충만하고 넘치는 것처럼 보여도 마비나 무의식이 언제나 노리고 있다. 동물의 활동은 노력에 의해 피로를 대가로 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 동물이 진화한 길을 따라 수없는 쇠퇴와 퇴락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대부분 기생적 습관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의 식물적 삶을 향한 방향전환들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

고상한 야만인의 학설은 새로운 진화적 사고에 의해 그 오류가 더욱 무자비하게 노출된다. 자연 선택의 산물 중에는 그야말로 고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다음 세대의 발현을 위한 유전자들의 경쟁 속에서 고상한 것들은 도태되기 때문이다. 두 동물이 한 물고기를 먹을 수 없고 같은 짝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위한 투쟁은 모든 생명체에 편재한다. 사회적 동기가 자신의 복제를 최대화하려는 유전자들의 적응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투쟁에서 경쟁자들을 이기도록 설계되어야 하는데, 이기는 방법에는 경쟁을 중화시키는 방법도 포함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화려한 표현에 따르면,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도살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자들의 직계 후손인 우리는, 아무리 평화로운 미덕을 소유했을지라도 여전히 어느 한 순간에 화염처럼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학살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휘둘렀던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이다."
 (112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 中에서

 

 

 



 
 
구차달 2013-12-19 16:34   댓글달기 | URL
'빈 서판'에서 발췌한 문단의 파란색으로 강조되어 있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절로 수긍이 가네요. 그게 옳든 그르든...

oren 2013-12-19 16:50   URL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은 너무 음울하고 불길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찰스 다윈도 그런 점을 지적했고요.
* * *
"생존 투쟁에 관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신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소 위안도 된다. 즉 자연의 싸움은 그칠 새 없이 일어나지는 않으며, 공포가 느껴지지도 않으며, 죽음은 보통 신속하게 이루어지며, 원기 있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은 모두 살아남아 증식한다."

pek0501 2013-12-20 09:26   댓글달기 | URL
누가 누구의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글을 접하면 신기해서 한 번 더 읽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에겐 똑같이 위대하게 생각되는 저술가라도 그 당시엔 혹평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

oren 2013-12-20 10:09   URL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들의 계보'처럼, 수많은 책들 속에서 '누구는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서로 주고받은 영향들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경우가 참 많은 듯해요.

소로우 또한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출판했던 첫 작품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이후, 9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끝에 『월든』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내놓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듯해요. 물론 작가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세상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했던 듯하고요.
 



책이라고 해서 덫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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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자주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 이런 덫들이341 우리 허리띠에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에게 정해진 거친 땅에서 한 발짝을 내밀 때마다 우리는 덫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 차라리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버린 여우가 운이 좋은 여우였다. 사향쥐는 덫에 걸리면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서라도 도망치려고 한다.343 우리 인간이 융통성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잠깐만요, 무례한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진퇴양난이란 말을 쓴 겁니까?" 당신이 천리안을 지닌 사람345이라면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뒤로 감추고 자기의 것이 아닌 척하는 것, 예컨대 부엌 가구와, 그가 아끼면서 불태워버리지 못하는 하찮은 것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의 몸은 어렵사리 옹이구멍이나 대문을 빠져나갔지만 가구를 실은 썰매는 뒤따라 나오지 못해 꼼짝 못하고 서 있다는 뜻에서 나는 그 사람이 진퇴양난이라고 말한 것이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옹골차게 보이며, 겉으로는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사람이 잔뜩 긴장해서 자기 입으로 자기 가구가 보험에 들어 있다느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며 떠들어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 가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화려한 나비는 이미 거미줄에 걸려든 것이다. 오래 전부터 어떤 가구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꼬치꼬치 따져 물으면, 다른 사람의 헛간에 적잖은 가구를 보관해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보기에 요즘의 영국은 엄청난 짐을 끌고 다니며 여행하는 노신사와 비슷하다. 오랫동안 살림살이를 하면서 축적된 하찮은 것들도 불에 태워버릴 용기가 없어 거추장스럽게 짐으로 끌고 다닌다. 큰 여행가방, 작은 여행가방, 모자 상자, 꾸러미 따위 등등. 적어도 앞의 세 가지는 버려도 상관없다. 요즘에는 건강한 사람도 자기 침대를 등에 지고 걷기는 힘들다.347 따라서 나라면 병든 사람에게 침대를 내려놓고 뛰라고 충고해줄 것이다. 나는 자신의 모든 재산이 담긴 보따리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걷는 이민자를 보았다. 보따리가 마치 그의 목덜미에서 자라는 거대한 혹처럼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 보따리가 그의 전 재산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전 재산을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덫을 끌고 다녀야할 처지가 된다면, 덫을 가볍게 처리해서 덫에 내 중요한 부분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애초부터 발을 덫에 넣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짓일 것이다.
(112∼113쪽)


주석

341. 말장난이 섞여 있다. 여기에서 '덫'은 올가미라는 뜻이기도 하며, 외적인 장식물이나 세간을 뜻하기도 한다.

343. 소로는 일기에서 "사향쥐는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내는 대단한 녀석이다. 언젠가 나는 사향쥐 한 마리를 잡았는데 녀석은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냈다. 그런데 그때가 세 번째로 덫에 걸린 때였다. 하지만 한 다리로는 도망칠 수가 없어 녀석은 덫 옆에 죽어 있었다"라는 콩코드의 덫 사냥꾼 조지 멜빈의 말을 인용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소로는 "이런 비극이 이 지역에서, 또 우리의 평화로운 강가에서 일어나며, 사냥꾼은 그런 용기를 보여주는 사냥감에 경외감을 표하며, 결국에는 사냥감을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라고 말했다. 소로는 1854년 2월 5일 일기에서도 이 야야기를 언급하며 "자기의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내는 사향쥐를 어떻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동정심은 사향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똑같이 유한한 목숨이기 때문에 사향쥐의 엄청난 고통과 영웅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345. seer. 이 단어는 직역하면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뜻이 확대되어 예언자와 시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 에머슨은 「신학교 강연」에서 "천리안을 지녔다는 예언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는 전령이다. 자신의 꿈을 어떤 식으로든 알린다. 그 꿈을 어떻게든 신성한 즐거움으로 알린다. 따라서 때로는 캔버스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서, 떄로는 끌로 돌을 조각해서, 때로는 화강암으로 탑을 쌓거나 건물을 지어서, 때로는 송가를 통해서 그의 영혼이 숭배하는 것을 표현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347. 「요한복음」5장 8절의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들고 걸어가거라"를 빗댄 표현이다.



 

단순하게, 소박하게, 수수하게!

우리 삶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왕좌왕한다. 정직한 사람은 열 손가락 넘게 헤아릴 게 거의 없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열 발가락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충 하나로 뭉뚱그리면 충분하다. 단순하게, 소박하게, 수수하게!69 당신의 일을 둘이나 셋으로 줄이고, 100가지나 1,000가지로 늘리지 마라. 100만 대신에 여섯까지만 세라. 장부를 엄지손톱에 기록하라. 문명화된 삶이라는 변덕스런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구름과 폭풍과 유사流砂 등 온갖 것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침몰해 바닥에 가라앉아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추측항법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성공한 사람은 뛰어난 계산가인 것이 분명하다. 단순화하라, 단순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꼭 먹어야 한다면 한 끼만 먹어라. 100가지 요리 대신 다섯 가지로 만족하라. 다른 것들도 같은 비율로 줄여라.
(142∼143쪽)

주석

69. 1848년 3월 27일,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블레이크에게 보낸 서간에서 소로는 "나는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네. 안타깝고도 놀라운 일이지만, 지혜롭기 그지없는 사람도 하루에 사소한 문제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나. 그 때문에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지. 수학자가 어려운 문제를 풀 때를 생각해보게. 방정식에서 거추장스런 것을 없애 간단한 식으로 만들지 않나. 이처럼 우리도 삶을 단순화해야 하네. 정말 필요한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의 중요한 뿌리가 어디로 뻗는지 철저히 탐구해봐야 하네"라고 썼다. 1853년 9월 1일 일기에서 소로는 두 유형의 단순함을 구분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개인은 무지하고 나태하며 게으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지만, 철학자는 지혜롭기 때문에 단순하게 산다. 따라서 미개인의 경우에는 단순함에 나태라는 결함이 동반되지만, 철학자의 단순함은 최상의 경지까지 발달한 삶의 모습이다. 미개인과 태반의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뭔가를 심고 꾸미고 만들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철학자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능력을 최고의 상태로 함양하며, 뭔가를 심고 꾸미며 만드는 데 최소한의 시간을 사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미개인은 삶에 불필요한 물건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못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단순함은 잘못된 것이지만, 철학자는 사치품을 얻으려고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단순함은 바람직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유를 누리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소로우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의 삶으로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책'이라고 해서 별다른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비록 무수히 많은 책들을 '빌려'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의 '서고'는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주석

102. 소로는 1853년 10월 27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가 아직 팔리지 않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재고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겠느냐고 묻는 편지를 지난 한두 해 동안 가끔 보내다가, 재고들이 차지한 공간을 그들이 급히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전부 여기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책들이 속달로 오늘 도착했다.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4년 전에 먼로에게 사서 그 이후로 조금씩 값을 치렀지만 아직 완납하지 못한 1,000권 중 남은 706권이었다. 그 책들이 마침내 내게 보내졌고 이제야 내 물건들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그 책들을 등에 짊어진 채 층계참을 돌고 두 계단을 올라, 그것들이 원래 있었을 곳과 비슷한 공간까지 옮겼다. 290권 남짓한 책들 중 75권은 기증하고 나머지가 겨우 팔린 것이었다. 이제 나는 거의 900권에 달하는 서고를 갖게 됐지만, 그 중 700권 이상이 내가 쓴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기울인 노고의 열매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책들이 내 방 한 귀퉁이에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다. 내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 모든 저작물-옮긴이)다. 내가 원작이고, 내가 머리를 짜내 빚어낸 작품이다.




그가「독서」에 대해 쓴 훌륭한 문장들을 굳이 여기까지 길게 덧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글의 제목에 어울리는 그의 글들을 조금쯤 옮겨 오는 수고는 너무 아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기계다.

우리는 이미 문자를 배웠기 때문에 기왕 책을 읽을 바에는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24  평생 4학년이나 5학년 교실에서, 혹은 학교 앞에 있는 가장 낮은 벤치에 앉아 에이 비 에이와 단음절 단어를 끝없이 반복할 수는 없잖은가. 대부분의 사람은 읽거나 누군가 읽어주는 걸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한 권의 좋은 책, 예컨대 『성경』에 담긴 지혜에 의해 죄인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 이후 평생을 무기력하게 지내며, 이른바 쉬운 읽을거리를 읽으면서 그들의 능력을 헛되이 날려버린다. 우리 순회도서관에는 몇 권으로 구성된 책이 있다. 그 책에는 『리틀 리딩』이라는 제목이 붙어, 나는 그 제목이 내가 가보지 못한 어떤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가마우지와 타조처럼 고기와 야채로 실컷 배를 채우고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너끈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하찮은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면, 그들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기계다. 그들은 제불론과 세프로니아31에 대한 9,000번째 이야기를 읽는다. 두 연인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격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그들의 진정한 사랑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한다는 이야기32, 그들의 사랑이 잘나가다 장애물에 부딪혀 비틀거리지만 다시 일어서서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또 종탑까지는 결코 올라가지 말았어야 할 어느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이 교회의 첨탑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도 읽는다. 그럼 그 사람을 쓸데없이 그곳까지 올려놓고 희희낙락하는 소설가는 종을 시끄럽게 울리면서 세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 그 사람이 다시 내려왔습니다!" 라며 어떻게 내려왔는지 들으라고 떠벌린다.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주인공들이 별자리에서 활약했듯이 지금의 일반적인 소설 세계에서는 그런 향상심에 불타는 주인공들을 인간 풍향계로 바꾸어 그들이 못된 장난으로 정직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녹슬 때까지 어딘가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소설가가 다음에 종을 울리면 나는 교회당이 불타 없어지더라도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티틀 톨 탄Tittle-Tol-Tan』을 쓴 유명 작가의 신작인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 『살금살금 펄쩍-뛰어넘기The Skip of the Tip-Toe_Hop』가 매달 분책으로 출간될 예정. 혼잡이 예상되오니 한꺼번에 오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원초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런 소설을 읽는다. 그들의 모래주머니는 지치지도 않아 주름37을 예민하게 다듬을 필요도 없다. 마치 네 살배기 꼬마가 벤치를 지키고 앉아 금박을 입힌 2센트짜리 『신데렐라』를 열심히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보기에, 그런 소설을 통해서는 아무리 읽어도 발음이나 말투 혹은 강조하는 법에서 어떤 향상도 이뤄내지 못한다. 또한 교훈을 끌어내고 끼워넣는 능력을 키우지도 못한다. 눈이 침침해지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순환 능력이 떨어지며 지적 능력이 전반적으로 저해되면서 서서히 감퇴하는 결과를 빚을 뿐이다. 이처럼 말초적인 신경만 자극하는 생강 빵이 거의 모든 집의 화덕에서 순수한 밀이나 호밀과 옥수수로 만든 빵보다 더 부지런히 매일 구워지며, 시장에서도 더 확실하게 팔린다.
(158∼160쪽)


주석

24.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소로는 "가장 좋은 책을 먼저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책들을 읽을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 영혼을 맑게 하는 건강한 책을 읽어야 한다

31. 제불론은 『성경』에서 야곱과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창세기」30장 19-20절, 『성경』에서는 스불론이라 표기한다). 세프로니아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인 타소(Torquato Tasso, 1544-1595)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소프로니아라는 인물의 이름을 약간 변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32.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진정한 사랑은 결코 순조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를 빗댄 표현이다.

37. 씨를 먹는 새의 모래주머니 벽에는 주름이 있어 소화하는 데 유리하다.




내가 혹시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모른다'고 누군가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지네'를 닮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좇는 병아리가 혹시 독수리가 아닌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암탉과 지네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실제로는 병아리가 아니라 새끼 오리였다. 반면 오만 생각을 하고 텁수룩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 마리의 벌레를 쫓아다니는 100마리의 병아리를 돌봐야 하고, 매일 아침 이슬에 병아리 20마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통에 그 녀석들을 찾아다니느라 애를 태우고 온 몸이 더럽혀지는 암탉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리 대신 머리를 앞세우는 사람, 즉 지능을 지닌 지네로 어떤 것에나 집적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화이트 산맥에서 그렇게 한다면서 방문객들이 이름을 적어놓는 방명록을 준비해두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46
(216쪽)


주석

46. 1824년 초, 화이트 산맥의 워싱턴 산 정상에는 그곳까지 올라온 관광객들을 위한 방명록이 실제로 있었다. 소로가 "누군가 당신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한다면, 그의 이름이라도 남겨야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일기)라고 쓴 1852년 1월 22일 일기를 기초로 이 구절을 쓴 것 같다.




 



 
 
팜므느와르 2013-12-16 20:17   댓글달기 | URL
아래께 책이 배달되어 왔어요.
이 책 보자마자 만족해서 주석달린 빨간머리 앤도 사고 싶어졌어요.
소로가 문학적 글쓰기를 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오렌님 감사합니다.^^*
주석달린 시리즈 중 괜찮은 것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재는 빨간머리 앤만 욕심 나네요.
오렌님은 남자분이라 취향이 아니실 듯.

oren 2013-12-18 09:14   URL
『주석달린 월든』을 마침내 받으셨군요. 책이 만족스럽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책이 생각보다 너무 크고 해서 어디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없다는 게 좀 아쉽더라구요. 어제 저녁에 (흔히 그렇듯이 '슬픈' 일로) 갑자기 안동엘 다녀왔는데, 마침 '오가는 길'에 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둘러보니 딱 이 책밖에 없어서 대략 난감하더군요. 이렇게 큰 책을 아무데서나 태연하게 펼쳐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구요.

『월든』에서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들은 정말 감동적인 구절들이 많지요.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는 『주석달린 월든』보다는 강승영 님이 번역하신 『월든』이 훨씬 뛰어난 듯해요. 팜므님 말씀대로 저는 '주석 안 달린' '빨간머리 앤'조차 그다지 취향이 아니긴 해요. ㅎㅎ

팜므느와르 2013-12-18 08:10   URL
그렇네요. 두껍습니다.ㅋ
하지만 판형이 이뻐서 (주석 달아야 되니 그렇게 했겠지요.)용서가 되어요.
이걸 밖에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건 어차피 제 머리로는 무린 걸요.

강승영 번역의 월든도 찾아나서 볼게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12-16 23:20   댓글달기 | URL
제 페이퍼의 짧은 댓글 대신
이 페이퍼를 열심히 읽고 있네요... 책도 덫이 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벌써 눈을 떼지 못하고...

이후 단순하라! 에서 한숨을 쉽니다. 다른 것은 노력하겠는데
밥 한끼만은 도저히 못 먹을거 같아요. ^^

oren 2013-12-17 16:05   URL
『월든』의 매력이 소로우 님의 '과격한 표현' 내지는 '모순어법'에 있기도 하지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ㅎㅎ

모순어법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반성하는 빛을 내보이기도 했어요.

* * *

1852년 9월 2일

나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패러독스 - 정반대의 것만을 말함 - 모방일지 모르는 방법.
착상의 교묘함.
말로 희롱함 - 되웃어주는 것 - 단순 - 강건 - 명료하지 않을 때도 있음.
나 자신의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유명한 표현이나 격언을 사용함.
진지하지 못할 때도 있음. '요컨대', '사실', '참으로!' 등. 의식의 결여.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131쪽)


 * * *

철학자 베르그송은 수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분야에 두루 뛰어난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가 쓴 네 권의 주저 가운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년), 『물질과 기억』(1896)에 이어 세 번째로 발표한 책은『창조적 진화』(1907년)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창조'와 '진화'라는 모순된 두 개념을 '생명의 도약'이라는 개념을 통해 '화해'시킨다. 어쨌든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윈의『종의 기원』과 파브르의 『곤충기』를 비롯한 여러 수많은 생물학자들의 방대한 저서들은 물론이고 물리학과 심리학에 이르는 당대까지의 여러 자연과학적 지식을 방대한 범위에 걸쳐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생명 진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에게 창조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무로부터의 창조'라기 보다는 '무기물로부터의 유기체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창조'를 의미한다. 그는 끊임없이 지속하는 존재인 생명체의 '연속적 변화 속에 나타나는 질적 비약으로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생명의 도약'에서 찾았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생명의 기원과 미래'를 진화론의 바탕 위에서 논의하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과학자가 찾아낸 진화의 매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볼 수도 있겠다. 베르그송의 시도는 '다윈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용어'로는 결코 설명할 길이 없는 '생명의 진화에 대한 철학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생명 진화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깊이 파고 들어간 '생명'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는 필연적으로 철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으로까지 확장되며, 결국 이 책은 '인간과 생명,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방대한 사색의 공간'으로까지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베르그송을 국제적 철학자로 만든 동시에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의 무대를 프랑스로 되돌려 놓은' 것으로까지 평가받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온갖 다양한 상을 휩쓸었던 타고난 우등생 베르그송에게 이 책은 노벨문학상까지 안겨주게 된다. 그는 과학과 철학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실력도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철학책 속에는 그 어떤 뛰어난 문학작품 못지 않게 빛나는 명문장들을 여러 대목에서 마주치게 된다.

사실 여기까지 살펴본 이 책에 대해 개괄적인 언급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끄는 내용들에 접근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나의 관심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특별한 관점'과 그것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박의 '시대별 전개'에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친절한 다윈氏'가 지극히 조심스럽고도 겸손한 자세로 쓴『종의 기원』을 굳이 펼쳐보지 않더라도, 이미 '부모의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전'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증명을 내놓은 '멘델의 유전법칙'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200년쯤 전에 최초로 제기되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設)'까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라마르크는 그 자신의 엄청난 노력에 힘입은 여러 선구적인 발견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생명의 진화' 이야기 속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바보같은 인물이 되고 말았을까. 그의 '놀라운 발견'에 따르면 여러모로 명백하게 보였던 (자꾸만 길어지고 싶어서 그렇게 길어진 게 분명해 보였던) '기린의 목'에 대해 그가 저질렀던 실수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진 바대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주장이 이토록 늦은 시기에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사실은 또한 그만큼 많은 인물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를 끊임없이 자극해 왔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문제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증명'과는 별도로, 피상적으로는 제법 그럴듯해 보였던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한 라마르크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나섰던 인물들은 비단 생물학자들만이 아니었다는 점이 특별히 흥미롭다.

최초의 반박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던 영국인 에라스무스 다윈, 독일인 괴테, 프랑스인
조프루아 셍틸레르의 3인방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등장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진화론의 종결자 찰스 다윈이었고, 다윈이 죽고 난 뒤로도 여러 인물들이 라마르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애썼다. 이들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을 제외하면, '획득형질의 유전'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드러낸 철학자는 앙리 베르그송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종의 기원』이 발표된 지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또다시『창조적 진화』를 통해 라마르크를 재등장시켰다. 그 당시까지는 라마르크의 주장이 완전하게 폐기된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진화'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그에게도 결국 라마르크에 관한 언급을 제쳐두고는 자신의 논의를 제대로 진전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의 힘을 빌어 최종적인 '과학적 증명'에 다다른 '용불용설'은 내가 알기로는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쇼펜하우어가 명쾌하게 그 '천재적 오류'를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36년에 출간한『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 문제에 관해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훌륭한 답안'을 도출해 냈다. 쇼펜하우어의 그 책은 다윈의『종의 기원』보다 무려 23년이나 앞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창조적 진화』를 읽으면서 자꾸만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너무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록 베르그송이 그의 책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명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결국 베르그송 때문에 예전에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책『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다시 한번 더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베르그송이 매우 엄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이르렀던 여러 주장들이 고스란히 쇼펜하우어의 책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훨씬 더 풍성하고도 명쾌한 방식으로.

쇼펜하우어도 '과학적 지식'에 관해서라면 어느 철학자와 비교해 보더라도 별로 뒤질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의학도로 대학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 속의 많은 내용들은 고대의 자연철학은 물론이고 그 당시까지 밝혀낸 여러 과학적 연구성과들을 거의 빠짐없이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 책의 목차는 생리학과 병리학, 비교해부학, 식물생물학, 물리천문학, 언어학 등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중국의 철학자였던 주자(朱子)에까지 이른다. 어쨌든 그는 '경험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의 본래적 핵심에 이르는 서술방식을 통해 자신의 형이상학이 자연과학과 공통의 경계지점을 갖는 유일한 것'임을 증명했다. 자신의 철학체계는 '실재성과 경험을 초월하여 허공에 떠다녔던 이전의 철학체계와 달리 현실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자, 당시까지의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라 불린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주저인『의지와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이후 '17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이 책 역시 안타깝게도 세상의 관심을 별로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미리부터 '자연과학을 통해 형이상학을 증명하려는' 자신의 시도는 '다음 시대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자연과학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면 대중과 다를 바 없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과학의 한계를 자주 지적하면서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은 고유의 탐구 과정에서 설명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고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말하면서, '자연과학은 이제부터 그 연구 대상을 형이상학에 넘겨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속에 움직이며 작용하고 있는 모든 힘의 본질은 물리적인 힘을 넘어서는 의지'라는 것을 과학자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의 결론에서 '모든 언어로 그렇게 활발하게 계발되는 자연과학 서적 중 그것을 알기 위해 개인이 시간, 기회, 인내를 충분히 갖는 부분은 매우 적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진 것도 이미, 내 철학의 시대가 접근한다는 확신을 나에게 준다. 자연과학이 해가 감에 따라 서서히 어떤 학설을 위한 믿을 만한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나는 마음 깊이 기쁨을 느끼며 바라본다'고 말했다. 나로서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라는 책에 부여된 '단순히 사변적 기초 위에서 형성된 이론이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충실하면서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한 데 있다'는 평가가, 그보다 70년 전에 출간된 쇼펜하우어의 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기쁨을 느끼며'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하의 내용은 내가 '획득형질의 유전'에 관한 '라마르크의 오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그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내가 특별히 공감했던 그의 여러 주장들을 일부러 제외하기가 어려웠고, 또 예전에 미리 필사해 놓은 부분들이 있어서 여기에 다시 옮기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린의 목'이 왜 길어졌는지 궁금해서 시작한 내 얘기 또한 너무 길어졌다. 내 글은 '자꾸만 쓰다보니 길어진' 라마르크의 '기린의 목'을 닮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베르그송의 말대로 '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에 '길게 늘어난' 글임을 읽는 분들이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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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형질의 유전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의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일탈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

그러므로 우리는 일탈(逸脫
)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는 개체는 이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형태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배들 또는 종종 반쪽의 배들이 발달하면서 재생하였을 혀애로부터 일탈한다. 이 변형[일탈]으로부터 배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물질이 산출되지 않거나 영양의 공급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 배의 요소들중 어떤 것들이 결핍되지 않는다면, 그 변형은 개체의 후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아마 생식질에서 야기되는 화학적 변화를 매개로 해서일 것이다. 이 화학적 변화는 배가 발달시킬 유기체 안에 예외적으로 본래의 변형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기회가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이 후자의 경우 자식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만큼이나 정상적 유형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겠지만, 그 일탈은 [부모 유기체와는] 상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식 유기체에게 유전되는 것은 일탈이지 형질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개체가 들인 습관들은 자기 자손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반향이 있을 때는 자손들에게 생겨난 변형은 본래의 변형과 아무 유사성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어쨌든 반증이 있기까지는 그리고 뛰어난 한 생물학자가 요구하는 결정적 실험이 확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138∼139쪽)



 * * *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나는 종(種)의 기원에 관한 학설 진보에 대해 그 개요를 쓰고자 한다. 최근까지 박물학자들이 종은 불변하는 것이며 저마다 각각 창조된 것으로 믿어왔다. 이 견해는 여러 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왔다. 한편 몇몇 박물학자들은 종은 변화하는 것이고, 현존하는 생물의 종류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진정한 생식에 의해 태어난 자손이라 믿고 있었다. ······

라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주목을 끄는 결론을 내린 최초의 사람이었다. 탁월한 박물학자로서 1801년 자신의 견해를 처음 발표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그 뒤 1815년에는 《무척추동물지》 서론에서 좀 더 폭넓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들 저서에서 라마르크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는 최초로 생물계는 물론 무생물계에 있어서도 모든 변화는 법칙의 결과이며, 결코 기적적인 어떤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라마르크가 종은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주로 종과 변종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어떤 유(類)에 속하는 여러 종류는 거의 완전한 단계성을 보여준다는 것, 또 사육하고 재배하는 생물의 상이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변화의 방법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것은 생활의 물리적 조건에, 어떤 것은 기존 종류의 교잡에, 그리고 대부분의 것은 쓰임과 쓰이지 않음, 즉 습성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훌륭한 적응-이를테면 나뭇가지에 난 연한 나뭇잎을 먹고 사는 기린의 긴 목-을 이 마지막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또한 전진적 발달의 법칙도 믿고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생물은 이와 같이 진보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에도 단순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생물은 지금도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

*2 나는 라마르크가 최초로 이 학설을 발표한 날짜를 이 문제에 관한 이시도르 조프루아 셍틸레르 씨의 탁월한 저서 《일반 박물학사》에서 알아냈다. 그의 저서에는 이 문제에 대한 뷔퐁의 결론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나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 박사가 1794년에 간행한 《동물생태론》에서 라마르크의 견해 및 그의 의견이 틀린 근거를, 그보다 먼저 대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시도르 조프루아에 의하면 괴테(Goehte)도 1794년과 1795년에 써 두었으나, 훨씬 뒤에 이르기까지 간행하지 않았던 저작의 서론을 통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열심히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건대 소는 무엇 때문에 뿔을 사용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뿔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박물학자에게 있어서 장래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독일에서는 괴테, 영국에서는 다윈 박사, 프랑스에서는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1794∼95년에 종의 기원에 대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체로 유사한 학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매우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종의 기원에 대한 학설 진보의 역사적 개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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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라마르크는 진보주의를 열렬히 옹호했다. 화석의 생물종이 지금도 살고 있는 생물과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여기에 착안한 그는 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물은 아마 "우리가 식별하지 못할 만큼 크게 변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윈 이전에 나온 적응의 개념이다. 라마르크는 지구의 나이가 무척 오래며, 생명 형태도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이 진보의 최종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라마르크의 진화 관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자연이 복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둘째, 그는 생물체의 기관이 사용할수록 강해지고 강화되며, 이 획득형질은 후대에 전해진다고 믿었다. "획득된 변화는 양성에 공통적이며,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이런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다윈의 자연선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생존경쟁의 개념은 이미 1797년에 맬서스가 제기한 바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종은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으며, 경쟁에서 뒤처지면 멸종했다. "최근에는 맬서스만이 아니라 다윈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기타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지혜를 얻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분화를 통한 분기의 개념은 분업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통한다."(914∼915쪽)



 

다윈은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며 요크셔의 일클리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1859년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생물학적 진화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새로운, 그 시대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접근 방식"을 소개했다. 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설명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을 낳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말을 빌리면 "단지 하나의 과학 이론을 대체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념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의 이론은 오랫동안 많은 서양인들이 떠받들고 소중히 여겼던 믿음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917쪽)

다윈은 월리스의 전갈을 받은 이후 『종의 기원』을 출판하겠다는 각오를 굳혔으나 진화론의 관념을 처음 구상한 것은 1830년대 비글 호 항해를 마친 뒤부터였다. ······ 책이 발행된 1859년 11월 24일 첫날에 1250부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다윈은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며 요크셔의 일클리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과연 금세 폭풍이 몰아쳤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에른스트 마이어는 다윈의 이론에서 여섯 가지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확인했다. ⑴ 정적인 세계를 진화하는 세계로 바꾸었다. ⑵ 창조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⑶ 우주의 목적론을 논박했다. ⑷ 세계의 목적이 인간의 등장에 있다는 절대적 인간 중심주의를 무너뜨렸다. ······ (917∼9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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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완전히 잘못

우리는 우선 "세계는 인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래서 또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계의 '핵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 그러나 물론 의지가 모든 것을 실현하고 그 각각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현상이라고 지칭하면서 도처에서 근원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그로 인해 목적론적인 모든 사실은 그 사실들이 발견되는 존재 자체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희귀한 오류에 빠진 라마르크

이 진리는 사려 깊은 동물학자와 동물해부학자에게 명백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의 정신이 더 심오한 철학을 통해 정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진리로 인해 희귀한 오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잊히지 않는 일류 동물학자인 라마르크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이라는, 동물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따른 구분을 발견함으로써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말하자면 『동물 철학』제1권 7장과 『무척추동물의 자연사』제1권 서문에서 그는 모든 류(類), 모든 동물종의 형태, 고유한 무기, 외부로 작용하는 기관은 결코 이 종들의 원천에서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물들의 위치와 환경의 성질을 불러일으킨 동물들의 의지 지향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반복적 노력과 그것에서 나오는 습관을 통해 시간의 과정에서 서서히, 그리고 계승되는 세대를 통해 비로소 발생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주장하고 상세히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새와 포유류는 헤엄치면서 발가락을 따로따로 뻗음으로써 서서히 물갈퀴를 획득했고, 붉은 뇌조는 물 위를 걸어서 건넘으로써 긴 다리와 긴 목을 얻었다. 뿔 달린 가축은 쓸모 있는 치아 없이 머리로만 싸웠고 이 투지가 서서히 뿔을 만들었으므로 비로소 서서히 뿔을 얻었다. 달팽이는 처음에는 다른 연체동물과 같이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 앞에 놓인 대상을 만져야 하는 필요성에서 그와 같은 것이 서서히 발생했다. 모든 고양이과 동물은 노획물을 갈기갈기 찢어야 하는 필요성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발톱을 획득했고, 이 발톱을 걸을 때 보호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필요성에서 발톱 집과 민첩성을 획득했다. 기린은 건조한 풀 없는 아프리카에서 높은 나무의 잎을 얻기 위해 앞다리와 목을 길게 뻗어서 20피트 높이의 놀라운 키를 획득했다. (100쪽∼10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

그리고 그렇게 라마르크는 많은 동물종을 동일한 원리에 따라 발생하게 하여 검토한다. 여기서 그는 사실상, 동물종이 그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무수한 세대의 과정에서 자신의 보존에 필수적인 기관을 서서히 산출하기 이전에 그 기관이 없어서 그동안 죽고 멸종했어야 한다는, 눈에 띄는 반론을 주목하지 않았다. 받아들여진 하나의 가설은 그렇게 통찰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가설은 자연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다. 이 오류는 그 안에 놓인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에게 여전히 명예로운 일이다. 그 안에 있는 참된 것은 자연 탐구자인 그에게 귀속된다. 그는 동물의 의지가 근원적인 것이며 그 조직체를 결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았다. 반면에 틀린 것은 프랑스에서 형이상학의 낙후된 상황에 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원래 여전히 로크와 그의 나약한 추종자 콩디야크가 대세를 이루었고, 그래서 물체가 사물 자체이고 시간과 공간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어서, 그곳에는 아직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의 관념성에 대한 그렇게 매우 중요한 위대한 학설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라마르크는 존재에 대한 해석을 시간 안에서, 즉 계열을 통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02쪽∼10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독일에서 유래한 칸트의 깊은 영향은 프랑스 인들의 부조리한 극단적 원자론과 영국인들의 감동적인 자연신학적 고찰을 그렇게 했듯이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영원히 추방했다. 위대한 정신의 영향은, 허풍선이와 사기꾼을 추종하기 위해 그 정신을 떠날 수 없었던 국가에서조차 유익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나 라마르크는 동물의 의지가 사물 자체로서 시간 밖에 놓이고 그런 의미에서 동물 자체보다 더 근원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결정적인 기관 없이, 또한 결정적인 지향도 없이 지각으로만 무장된 동물을 가장 먼저 설정한다. 이 지각이 그 동물에게 살아야 하는 상황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인식으로부터 그 동물의 지향, 즉 그 동물의 의지가 발생하고, 이 의지로부터 최종적으로 그 동물의 기관이나 특정한 체현(體現, Korporisation)이, 게다가 세대의 도움으로 그래서 무한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그는 어떤 형상도 기관도 갖지 않아야 할, 그리고 이제 기후와 지역적 상황 및 그에 대한 인식에 따라 모기에서 코끼리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무수한 동물 형태로 변화했을 어떤 원초동물을 가정했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원초동물이 생명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 이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모든 동물종은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통해, 그러나 시간 속에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시간 밖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그것이 살려고 하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형태와 조직을 결정했다. 의지는 인식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의지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서, 심지어 제3의 것으로서 나타나기 전에 동물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가 최초의 것이고 본질 자체다. 의지의 현상(인식하는 지성과 그 형식인 공간과 시간에 있는 단순한 표상)은 이 특별한 상황에서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모든 기관들로 무장된 동물이다. 이 기관에는 지성 즉 인식 자체도 속한다. 그리고 이 지성은 나머지 것들과 같이 모든 동물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의지가 형성되도록 했다. (103∼104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동물의 무수한 형태를 고찰해보라. 그 모든 형태가 철두철미 그 동물이 의욕하는 것에 대한 모사일 뿐임을, 그 동물의 특성을 만드는 의지 지향의 가시적인 표현일 뿐임을 보라. 형태의 다양성은 특성들의 이 다양성에 대한 그림일 뿐이다. 싸움과 약탈에 주의를 기울이는 맹수들은 무서운 이빨과 발톱 그리고 강한 근육을 갖고 있다. 맹수들의 시력은, 특히 독수리나 콘도르 같이 현기증 나는 높이에서 자신의 노획물을 정찰해야 할 때 먼 곳까지 이른다. 싸움에서가 아니라 도피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의지를 갖는 겁 많은 동물들은 무기 대신 가볍고 빠른 다리와 예민한 청각을 갖고 나타난다. 그들 중 가장 겁 많은 토끼에게서 청각은 심지어 귀가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을 요구했다. 내부는 외부에 상응한다. 육식동물은 짦은 내장을,  초식동물은 더 긴 동화과정을 위해 긴 내장을 갖는다. 강한 호흡과 빠른 혈액 순환은 적합한 기관을 통해 표현되어, 더 큰 근력과 자극성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제공되면, 어디에서도 모순은 가능하지 않다.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획물이 있는 곳이 추적자의 형태를 결정했다. 노획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활동 영역, 먼 은신처, 밤이거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있다면, 추적자는 그곳에 맞는 형태를 갖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생명에의 의지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 안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만큼 기이한 일은 없을 것이다.(104쪽∼10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솔잣새, 붉은 뇌조, 개미귀신, 펠레컨, 부엉이,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 맵시벌

전나무 열매의 표피에서 정충(精蟲)을 끄집어내기 위해 솔잣새(Loxia curvirostra)는 비정상적 형태의 먹이 섭취 기관을 갖고 있다. 습지에서 파충류를 찾기 위해 붉은 뇌조는 너무 긴 다리, 너무 긴 목, 너무 긴 부리를 갖는 가장 놀라운 형태로 나타난다. 흰개미를 파내기 위해 네 발의 긴 개미귀신은 짧은 다리와 강한 발톱, 그리고 실 모양의 끈적끈적한 혀를 지닌, 길고 좁고 치아 없는 주둥이를 갖고 나타난다. 펠리컨은 상당히 많은 물고기를 담기 위해 기괴한 주머니를 갖고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부엉이는 밤에 자는 것들을 기습하려고 어둠 속에서 보기 위해 굉장히 큰 동공을 가지며, 날 때 나는 소리가 자는 것들을 깨우지 않도록 매우 부드러운 깃털을 갖고 날아간다.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는 노획물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을 마비시키기 위해, 또한 자신들의 추적자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완벽한 전기기구까지 갖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것이 숨 쉬는 곳에는 그것을 삼키기 위해 다른 것이 동시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예측되고 계산되었듯이, 심지어 가장 상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다른 것을 제거하려고 든다. 예를 들어 곤충 중에서 맵시벌은 나중에 자신의 알이 먹잇감을 갖도록 특정한 나비 유충이나 그에 유사한 애벌레의 몸에 침으로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다. 자유롭게 기어 돌아다니는 애벌레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1/8인치쯤 되는 매우 짧은 침을 갖고 있다. 반면에 애벌레를 고목 깊숙이 숨겨두는 벌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고목 안에 닿기 위해 2인치 길이의 침을 갖는다. 전나무 열매에 사는 애벌레에 알을 낳는 맵시벌도 거의 마찬가지로 긴 침을 갖는다. 이로써 그 맵시벌들은 애벌레에까지 파고들어서 찌른 후 그 상처에 알을 둔다. 그 알에서 나온 것이 나중에 이 애벌레를 갉아먹는다(커비와 스펜스, 『곤충학 입문』). (105쪽∼10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고슴도치, 아르마딜로, 천산갑, 거북이, 오징어, 나무늘보, 청개구리, 벼룩

마찬가지로 추적당하는 것에게서도 그 적을 피하려는 의지가 방어적인 장치에서 명백히 표현된다. 고슴도치와 호저(豪猪)는 빽빽한 창을 공중에 내민다. 아르마딜로, 천산갑(穿山甲), 거북이는 이빨도 부리도 발톱도 접근할 수 없도록 머리에서 발까지 털로 뒤덮여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작은 것들 중에는 가재의 모든 종이 그렇다. 다른 것들은 물리적 저항을 통해 방어하지 않고 추적자를 속임으로써 방어한다. 그래서 오징어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주변에 퍼뜨릴 먹구름을 만드는 재료를 지니고 있다. 나무늘보는 자신을 이끼 낀 큰 가지로, 청개구리는 자신을 나뭇잎으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무수한 곤충들이 자신들을 그 거주지로 보이게 한다. 흑인의 머릿니는 까맣다. 백인의 벼룩도 까맣지만, 그것은 유례없이 강력한 장치인 자신의 폭넓고 불규칙적인 뛰기를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들에서 예견되는 것을 우리는 예술적 충동에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어린 거미와 거미귀신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덫을 놓은 노획물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방어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에르 당드레 라트라일에 따르면, 누에나방은 전갈파리를 침으로 죽인다. 누에나방을 먹지도 않고 그것으로부터 공격받지도 않지만 그것이 나중에 자신의 둥지에 알을 낳아서 자신의 알이 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에나방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예견에서 시간의 관념성이 다시 입증된다. 이것은 대체로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언급되는 즉시 언제나 나타난다. 여기서 다루어진 관점에서는 다른 많은 관점에서와 같이 동물의 예술적 충동과 생리학적 기능들이 설명을 위해서 서로 도움이 된다. 이 둘에서 의지는 인식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107쪽∼108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

이 기회에 누군가, 자연이 곤충에게도 최소한 초의 불꽃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오성을 나누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은 이렇다. 물론 그럴 것이다. 다만 인간이 초를 만들고 불을 붙이리라는 것을 자연은 알지 못한다. "자연은 어떤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비자연적 환경에 대해 곤충의 오성은 충분하지 않는 것이다.(111쪽)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최초의 것인 의지로 언제나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 의지의 필요와 목적이 모든 현상에서 수단을 위한 척도를 주며, 이 수단들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112쪽)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오성은 부가되는 이성(비직관적 표상 능력, 즉 개념 능력인 반성과 사유능력)에 의해 지원된다. 그렇지만 그 지원은 오직, 한편으로는 동물의 욕구를 훨씬 넘어서고 무한히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무기와 자연적 엄호의 전적인 결여와 크기가 같은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비교적 약한 인간의 근력에 비례한다. 동시에 그 지원은 도피에서 인간의 무능함에 비례한다. 인간은 달리기에서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원은 또한 인간의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개별자의 확실한 보존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큰 요구들은 지적 능력을 통해 충족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이 인간에게 그렇게 뛰어난 것이다. (112∼11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의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그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116∼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언제나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

자연산물에서 물질은 형식의 단순한 가시성이므로, 우리는 또한 형식이 물질의 단순한 소산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즉 물질의 내부로부터 결정화 속에서, 식물적·동물적 "자연발생"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적으로 목격한다. 이 자연발생은 기생 동식물에게서도 의심될 수 없다. 이 이유로부터 또한 추측되는 것은, 어떤 곳에서도, 어떤 행성이나 위성에서도 물질이 끝없는 정지 상태에 빠져 있지 않고 물질에 내재하는 힘(즉 의지, 물질은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은 시작된 휴식을 언제나 다시 끝내고, 기계적·물리적·화학적·유기적 힘으로서 그 놀이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언제나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언제나 오직 계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12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 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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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느와르 2013-01-09 04:25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대단하시어요.
덕에 저도 철학책 좀 읽으려구요.
언제나 핑계는 시간...
오래오래 알라딘을 지켜서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 해주시길...
자세한 건 내일 다시 와서 읽을게요. 밤이 깊어서리...

oren 2013-01-09 13:18   URL
동지섣달 차디찬 새벽에 귀한 발걸음 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도 딱딱한 철학책은 좀 집어치우고, 아늑하고 포근하거나 혹은 따사로운 봄햇살 같은 문학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그런데 철학책에는 히말라야의 빙벽을 오르는 듯 사방이 낯설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듯해도 그걸 뚫고 기어오르는 희열 같은 걸 느낄 수도 있어서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도 있답니다. ㅎㅎ
* * *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1855~1895)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pek0501 2013-01-10 16:27   댓글달기 | URL
여러 서재를 다니다 보면 각각 서재 님들이 즐겨 보는 책이 다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어요.
제가 요즘 심리서적이나 에세이를 즐겨 보는 것처럼 오렌 님도 같은 계통의 책들을 즐겨 보시는 것 같아요.
저도 한땐 철학 책만 집중해서 읽은 적이 있긴 해요. 철학을 모르면 문학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에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동서문화사 - 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좋더군요. 우선 이 책부터 읽어야겠단 생각이,
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하게 됩니다. 덕분이 좋은 글 많이 구경?하고 갑니다. ^^

oren 2013-01-11 13:25   URL
정말 다양한 분들이 온갖 종류의 책들을 읽고 또 그 내용들과 감상들을 옮겨 놓는 공간 있다는 것 때문에 책 블로그는 그 수명이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는 이름만 들어본 책인데, 어느 분의 서평글을 보니 "이 책을 읽고 철학도로 빠진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고들 합니다. 또한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어졌다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라고 되어 있네요. 저도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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