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이 말했던 '어떤 과감한 소설가'는 결국 프루스트가 아니었을까?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대우고전총서 1
앙리 베르그손 지음, 최화 옮김 / 아카넷 / 200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생각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환원된다. 즉,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 - 거기에 우리는 대답한다. 흘러간 시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그런데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들 중에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문제의 모든 난점들과 문제 자체는 지속에서 연장성과 동일한 속성을 찾으며, 계기를 동시성으로 해석하고, 자유의 관념을, 그것을 번역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언어에 의해 번역한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272쪽)

 * * *

베르크손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하 『시론』)을 발표한 때는 그가 아직 총각 신세였던 1889년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때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892년 1월 7일에 촉망받는 철학교수였던 그는 서른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루이즈 뇌뷔르제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참석한 여러 하객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신부의 친척으로 결혼식의 들러리를 섰던 마르셀 프루스트였다.(베르크손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프루스트가 훗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의 제1부 <스완네 집 쪽으로>를 발표한 건 그로부터 21년이 더 흐른 1913년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날 결혼식의 신랑이었던 베르크손과 하객으로 참석했던 프루스트 둘 모두 '시간'에 대해서 놀라운 사유를 보여준 인물이라는 점이다. 결국 베르크손은 이 책을 통해 '지속'이라는 '전정한 시간'을 발표함으로써 서양철학사의 체계를 근본으로부터 뒤흔들게 되었고, 프루스트는 베르크손의 영향을 받아 '잃어버린 시간' 곧 '진정한 시간'을 찾아 나서는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썼다. 그 둘에게 '진정한 시간'이란 곧 '진정한 자아'에 다름이 아니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제목부터 좀 더 쉬운 말로 풀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혹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어느 철학자가 '우리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십중팔구 칸트의 철학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주저인『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밝혔듯이 우리가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갖게 된,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형식틀로서의 '시간과 공간' 말고 철학적으로 또다른 무엇이 또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책은 맞되 칸트의 철학적 입장과는 전혀 새로운, 오히려 칸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놀라운 책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풀어서 쓰면 '의식이란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 아니 바로 우리 자신 그 자체이지만, 너무도 가깝게 있기에 오히려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고 항상 외부세계로부터 빌려온 형식과 틀, 특히 공간적 사유방식에 의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한 공간적 사유 방식을 털어 내어 내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그대로의 의식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서 써놓고도 여전히 그 뜻이 알듯말듯하고 알쏭달쏭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에 관한 얘기를 조금 덧붙일 필요가 있다. 베르크손이 훗날 자신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어느 부인의 질문을 받고 내놓은 대답부터 들어보자. 그는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였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시간이 공간적이 아니라는 말'은 사실상 그의 철학의 완벽한 요약인데 그 대답은 사실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베르크손이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발견한 '진정한 시간'에 대한 고백도 흥미롭다. 그것에 대해 '말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진실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이 논문을 발표할 때 '지속'(베르크손이 발견한 진정한 시간)에 관해 설명해야 했다면 정말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으리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일수록 항상 설명하기는 더 어렵기 마련'인 법이다. 그러니 그가 발견한 '지속'을 이 서평을 통해 '설명'하는 일도 지난한 일이 되기는 마찬가지일 듯싶다.(그래서 부끄럽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역자가 쓴 '해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서평을 쓰기로 했으니 잡힐듯 말듯한 베르크손의 생각에 대한 '나만의 감상'을 조금이라도 피력할 수 있게 된다면 나로선 힘에 부치는 무거운 짐을 조금은 내려놓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베르크손의 어려운 철학을 풀어놓기에 앞서 그의 '천재적인 면모'부터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다. 그 자신이 '한 철학자의 삶은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빛도 던져주지 않는다'고 항상 주장했지만, 그리고 '내 작업의 출판이 내 생애에 대한 선전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출판한 것을 영원히 후회했을 것'이라고도 거듭 밝혔지만, 그의 생각을 굳이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호기심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외면하기 힘들게 한다.

그는 9살에 국비장학생이 되었고, 꽁도르세 고교시절에는 교내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공인된 학생이었다. 고교때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수학, 라틴어 작문, 프랑스어 작문, 영어에서 1위, 기하학에서 2위, 그리스어 작문과 역사에서 4위를 차지했다. 특히 수학문제에 대한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는데, 그런 면모는 수학과 철학에서 동시에 재능을 보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파스칼을 연상시킨다. 그가 프랑스 지적 엘리트들의 집합소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선택한 전공은 '철학'이었다.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수학을 버리고 철학을 택하게 된 것은 고교때 라셜리에의 철학책을 '열광에 차서' 읽으면서 철학에도 뭔가 '심각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이 책『시론』은 라셜리에에게 헌정된 책이다.)

베르크손이 고등사범학교에 '3위'로 입학했을 때 동기생 가운데는 프랑스 사회주의를 이끈 장 조레스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도 있었다. 입학 당시 수석은 조레스의 차지였다. 조레스와 베르크손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는 베르크손의 면모를 눈앞에서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교수가 두 학생에게 한 명은 망실된 키케로의 변론을 재구성하게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그것을 반박하게 했다. '조레스가 먼저 그의 유창한 언술로 온갖 미사여구와 비유와 이미지를 섞은 웅변을 토하며 키케로를 대신해 변론했을 때,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반론자가 일어나 아무런 웅변적 음율도 없이 차분히 상대방의 주장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는데, 그 타격점이 너무나 정확하고 그 표현의 선택이 너무나 섬세하며 폐부를 찌르는 것이어서 키케로의 대변자가 세운 대건축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장내에는 정적이 감돌았으나, 내심으로는 모두 그 논리의 힘과 사유의 섬세함을 경탄했다'고 한다.

그는 37세가 되던 1896년에 두번째 주저인 물질과 기억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1900년부터 1921년까지는 꼴레즈 드 프랑스의 철학교수를 맡았는데, 그의 강의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만원을 이뤘고 심지어는 창문에 매달려서 듣는 사람도 있어서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온갖 상을 휩쓸던 '버릇'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간 끝에, 뢰지옹 도뇌르 훈장은 물론 1928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고, 1921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퀴리 부인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하는 국제연맹 산하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오늘날 유네스코의 전신) 의장을 맡기도 했다.

베르그송이 '지속'의 개념을 발견한 것은 '스펜서'를 읽으면서였다고 한다. '시간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일 수가 없고 거기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은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히 보지 못했어요. 그것은 아직 매우 모호한 출발점이었어요 어느 날 칠판 앞에서 학생들에게 엘레아의 제논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탐구해야 할지를 좀더 분명하게 보기 시작했지요. ······ 그러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내가 출발한 것은 과학적 시간 개념이었지 절대로 심리학이 아니었어요. ······ 요약하자면 지속을 의식하기 전까지 나는 내 자신의 밖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 순수 지속을 살고 거기에 다시 잠기는 것이 나에게만큼 모든 사람에게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몇 해가 걸렸어요. ······ 말해 주기만 하면 다 이해하리라고 믿었죠. 그후 나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베르크손의 일기, 1922년 2월 22일자)
 
그것은 '일종의 발견'이었다. 그가 '시간'에 대해 '작은 틈새'를 발견하고 의심하면서 점점 더 파고 들어가자 그것은 '철학사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통로'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운좋게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착각을 표현한 역설인 '제논의 역설'을 깰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지성의 발현인 철학사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길'도 찾았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지속의 발견'을 담은 이 논문이 출판 당시부터 크게 주목받은 것은 아니고 나중에 물질과 기억이 성공하고나서야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은 모두 세 개의 장과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양과 질, 연장적인 것과 비연장적인 것을 구별하는 서론이며, 제2장은 공간이나 공간적 시간과 다른 지속 그 자체를 밝히는 핵심 부분이고, 제3장에서는 그 지속의 개념을 자유의 문제에 적용하여 <결정론>과 <자유론> 사이의 오랜 난점을 해소하는 부분이다.

우선, 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대하여>를 통하여 베르크손은 심리상태들은 '비연장적'이며 각각 질적으로 달라서 그 강도를 '연장적인 것'과 같이 양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흔히 기쁨과 슬픔, 욕망과 희망 등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하게 '양적으로 표현'하는 '심리상태들의 강도'는 사실상 잴 수 있는 게 아니며, 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질과 양을 혼동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깊은 감정들' 뿐만 아니라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느낌과 같은 미적 감정, 연민과 공감등의 도덕감정, 격렬한 감정들(격렬한 욕망, 분노, 사랑, 증오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견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바로 그 고통에 동조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이다. 즉 고통이 크다는 것은,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신체가 그만큼의 다양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라는 명령이라면, 쾌락은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다. 그것의 크기는 거기에 빠져 다른 감각을 거부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 모든 단계는 따라서 거기에 관여된 신체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오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들이다.(335쪽)

감각의 크기를 잴 수 있다는 이론이 이른바 '정신물리학'인데, 베르크손은 두 감각을 측정하려면 그 질적인 면을 제거해야 하고, 그 질적인 면이야말로 바로 측정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측정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결국 '의식의 상태들'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에 양을 집어넣거나 결과에 원인을 집어넣어 해석한 결과일 뿐임'을 밝힌 것이다.

제2장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 지속의 관념>은 이 책의 핵심인데, 베르크손 철학의 핵심인 '지속'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이라는 것은 외부 사물의 공간적, 수적 다수성과는 다르며, 그것은 '삼투압'처럼 상호 침투하며 서로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는 '질적 다수성'임을 밝힌다.

'수'는 단위들의 집합이지만, 그 단위들은 모두 동질적이며, 동시에 동일한 공간 위에서 장소만을 달리하며 '벙치'되어야 한다. 수를 시간 속에서 셀 때도 하나하나 세어갈 때마다 항상 지금까지 센 것을 공간 속에 병치시켜야 한다. 결국 수의 관념에는 항상 공간의 관념이 들어간다. 그리고 수의 단일성은 이미 다수성을 내포하는 단일성이다. 또 각 단위들의 단일성도 이미 그 단위들이 무한히 나뉠 수 있다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연장적'임을 뜻한다. 수 또는 단위가 단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정신에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수가 그러한 것이라면 거기에 '다수성'이라는 의미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수를 형성하는 물질적 대상들의 다수성이며, 다른 하나는 '수의 모습'을 띨 수 없는 '의식적 사실들의 다수성'이다. 가령 종소리를 여러 번 듣는 '물질적 다수성'과 그것이 주는 '질적인 인상'에서의 다수성은 '수적, 공간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시간'이 만약 구별하고 세는 장소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공간일 뿐이며, 그것과 순수한 지속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순수한 지속'은, 우리 자아의 각 상태들이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선율의 음들처럼 서로 속에 녹아들어가 상호 침투하여 내적,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를 이룰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적 사유에 사로잡힌 우리는 그 각 상태들을 서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옆에 병치시키고, 계기를 연속적인 선으로 표상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하나가 온 뒤에 다음 것이 오는 계기'를 단번에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지속을 연장에 투사하고 시간을 공간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베르크손이 2장에서 '운동의 운동성'을 설명할 때 등장시킨 유명한 사례는 '별똥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별똥별의 움직임처럼 '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것인 한 정신의 종합이자 심리적이며 불가분적인 과정'이다. 공간 속에는 공간의 부분, 즉 움직이는 물체가 차지하는 위치밖에 없다. 의식이 그 이외의 것을 거기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정신이 계속적인 위치를 기억해서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종합, 즉 선율의 통일성과 흡사한 종합이다. 바로 그러한 질적 종합이 운동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가령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 눈에 남은 잔상은 별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이며, 그 궤적을 지나간 운동 그 자체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불가분적인 느낌으로 감각될 뿐이다.'

제논의 역설은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과 '운동 그 자체'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킬레스가 지나간 공간은 무한히 나뉠 수 있는 성질이지만 바로 그러한 공간을 단번에 지나가는 아킬레스의 운동은 나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 그 자체를 '공간과 혼동하여 공간처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제논의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과학은 시간에서 '지속'을 빼고서야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운동들이 두 배, 세 배 빨라지면, 의식은 거기에 대해 어떤 질적인 느낌을 가질 것이지만, 물리적 공식이나 거기에 들어갈 '수'는 수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적 방정식이 표현하는 것은 항상 '완성된 사실(동시성과 위치)일 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지속과 운동 그 자체'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수학이 자리잡는 양 끝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속과 운동'은 항상 방정식 밖에 있다. '지속과 운동'은 정신적 종합이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공간만이 동질적이고, 공간에 위치한 사물들은 상호 병치되어 <구별되는 다수성>을 이루며, 모든 <구별되는 다수성>은 공간에서의 전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의식의 다수성은 <질적 다수성>이며, 그것을 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과 언어의 혼동에 의해 <질적 다수성>에 양적, 공간적 요소를 개입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적 삶의 두 측면, 즉 자아의 두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주장이다.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비인격적 자아의 이면에, 한없이 움직이고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이며 살아있는 자아가 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끊임없이 변하며 모든 것은 진행 중에 있고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사상하고 한 사물을 그에 대응하는 동일한 말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이 항상 동일하며 불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상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하는 역할을 맡은 언어는 순간순간 변하는 개인의 섬세하면서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덮어 버린다.' 왜냐하면 언어와 사유는 통약 불가능한 incommensurable 것이므로. 그래서 '유능한 소설가는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그물을 찢고 우리를 본래적 자아 앞에 세움으로써 그 섬세한 질적 느낌을 다시 살게 해준다.'

제3장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 자유>에서는 '지속의 관점에서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물리적 결정론, 심리적 결정론, 자유로운 행위, 실재 지속과 우연성, 실재 지속과 예견, 실재 지속과 인과성 등을 다루고 있다.

우선 물리적 결정론은 한 유기체의 원자와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을 안다면 그 유기체의 심리상태도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생명체에까지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비가역적이다. '물질들은 영원한 현재에만 머무르지만 의식적 존재자에게 과거는 하나의 실재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명체나 의식적 존재에게는 덧부임(과거가 자꾸 불어나니까)이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은 그들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자유로운 행위란 무엇인가. '각 개인의 심적 상태는 각자의 인격 전체가 반영된 것이다. 그에 반해 언어는 서로 다른 의식상태의 객관적, 비인격적인 측면만을 붙잡은 것이므로, 그것을 병치한다고 해서 구체적 상태 자체를 번역할 수 없다. 자아를 그 전체가 녹아들어간 고유의 색채에서 파악할 때, 그러한 고유한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이 바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오직 자아만이 그것의 작가이고, 그것이 바로 자아 전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정도차가 있다고 해야 한다. 모든 의식상태가 인격 전체에 스며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자아의 표면에는 독립적인 심리상태들이 떠다닌다. 최면이나 갑작스러운 분노, 간질 발작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에는 각각의 요소들이 섞이기는 하지만 자아 전체에 완전히 녹아든 것은 아닌 상태들이 있다. 잘 이해되지 못한 교육으로부터 오는 관념이나 느낌들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기생적 자아를 형성하며,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모른 채 그 속에서 살다가 죽어간다. 마지막으로 근본적 자아가 있는데, 자유로운 결정일수록 거기에 가까워진다.'

'결정론은 동일한 자아가 그 역시 동일한 채로 남는 두 개의 대립되는 감정 사이를 오고가다가 어느 한 쪽을 택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것이 동일한 채로 있다면 어떻게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내리겠는가? 숙고의 모든 순간 자아는 바뀌며 그 자아는 또한 그를 흔드는 두 감정을 바꾼다. 그 모든 과정들이 상호 침투하고 서로를 보강하여 자유로운 행위에 도달할 동적 연쇄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하며 그러한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 녹아들고, 그 전체가 바로 우리이다. 결국 나로부터 그리고 오직 나로부터만 나오는 모든 행동이 자유로운 것이라면, 우리 인격의 징표를 지닌 모든 행동은 분명히 자유롭다. 오직 우리의 자아만이 그것을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활동을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예견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루는 시간이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단축할 수 있는 시간이고, 다시 말해 '진정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의 시간은 그것과 완전히 다른 질서이며 단 일초라도 단축하면 전체가 달라지는 지속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불행히도 우리는 자연과학의 압도적 영향을 받아 인과관계를 절대적 필연성의 방향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의식은 절대적 필연성 같은 것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원래 의식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힘의 관념이 일단 자연에 투여된 후에는 거기에 오염되어 절대적 필연성과 혼동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두 외부 현상의 기계적 결정과 우리 행위의 동적인 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의식이 자기자신을 직접 보지 못하고 외부세계를 보는 눈을 통해 굴절되게 본 결과이다.'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가 수행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분석되지만 진행은 분석되지 않으며 연장성은 분해되지만 지속은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하려면 그것을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진행은 사물로, 지속은 연장으로 그리고 자발성은 타성으로, 자유는 필연으로 변해 버린다.'

'결국 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환원된다. 흘러간 시간은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자유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유는 따라서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 중에 더 이상 명확한 것은 없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칸트 철학과 대결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논문이 출판될 당시만 하더라도 '칸트 철학'이 포함되지 않으면 아예 논문 취급을 받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사실 베르크손의 철학은 칸트 철학을 비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칸트의 철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식'을 통해 사물을 본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면, 베르그송의 입장은 거꾸로 우리 자신을 '외부세계의 형식'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물에 적용하는 형식은 우리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사물 사이의 타협의 결과이며, 외부세계를 돈 다음 우리 자신을 다시 파악하려 할 때는 이미 외부세계의 형식에 물들어 있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우리의 심적 상태는 그러한 외부세계의 특성, 특히 공간성을 제거했을 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칸트의 잘못은 '시간을 동질적 장소로 간주한 것'에 있었다. '지속과 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자유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유롭고 실재하는 자아를, 지속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식 능력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시간과 공간이 인식형식이라면 안과 밖이라는 구별 자체가 시공의 작품일 것이므로, 시공 자체는 우리 속에도 밖에도 있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시간이 질료가 들어올 형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곧 공간성을 띤다는 것인데, 시간이 공간과 같은 동질적 장소라면 과학은 시간에 대해 공간에서와 같은 효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베르크손은 이 책을 통해 누누이 밝혔다. '칸트는 지속이 공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유를 시간 밖에, 즉 우리에게 입장이 금지된 물자체의 세계로 넘겨 버렸다. 의식의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떨어져 응고된 결정체로 보는 순간, 연상주의자와 결정론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금지하거나, 칸트주의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신비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그 독특한 삶의 순간들의 입장에 선다면, 즉 동적인 통일성과 질적 다수성의 구체적이고도 살아 있는 지속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계기와 동시성, 지속과 연장성, 질과 양을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베르크손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속의 철학'이다. 이 책『시론』은 '지속을 방금 발견한 베르크손이 그것을 널리 공표하고 설명하는 자리인 셈'이다. 지속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진정한 운동' 그 자체이다. 우리는 외부의 물질계를 자르고 재단하여 '숫자화'하고 '양화(量化)'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관심은 물질계와 그 존재방식으로 향해 있으며, 진정한 운동인 '지속'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또 가질 필요도 없고, 실제로 '숫자화'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양화(量化)'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늘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전면적인 앎(sophia)을 알 수는 없지만 거기에 무한히 가까이 가려고 추구한다(philo)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때, 이 책의 제목은 결국 <모든 의식 외적인 요소들을 걷어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직접적·내적 직관에 드러나는 대로의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것들에 충실했을 때, 그것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앎, 즉 철학>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렇게 주어지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진정한 시간으로서의 지속'이며, 지속의 상하에서 자유의 문제를 풀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므로 베르크손 자신이 직접 번역한 영어 번역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 Time and Free Will>였다.

'자유의지'가 베르크손이 발견한 진정한 시간인 '지속'을 통해 충분히 해명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독자로서는 정말 근사한 경험이다. 아직까지도 '의지의 자유'와 '자유로운 행위'에 관한 숱한 논의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베르크손이 해명했던 '자유의지'의 문제는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의식' 뿐만 아니라 더 깊숙한 곳에 감춰진 '무의식'으로까지 탐구범위를 계속 넓혀나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가 이 책에 뒤이어 물질과 기억을 통해 해명하고자 했던 '물질과 생명의 구분'이나, 창조적 진화를 통해서 찾고자 했던 '더욱 자유로운 생의 비약'에 대한 탐구의 여정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로서는 이 책이 베르크손과의 첫 대면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책 속에는 이상하리만치 '쇼펜하우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베르크손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에 가깝고 실제로 후설도 베르크손의 철학이 자신의 철학과 매우 비슷하다고 감탄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면에서는 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이 오히려 베르크손의 '지속의 철학'과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해명하려고 시도했던 '존재와 시간'에 대한 물음 또한 베르크손이 '진정한 시간'을 찾아냄으로써 찾고자 했던 '존재의 본질'인 '참 나'와 별 다를 게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을 통해 내가 발견했던 쇼펜하우어의 그림자는 어디서부터 찾아질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야말로 '칸트를 통해 칸트를 뛰어넘은,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인 인물이고 베르크손의 철학은 '칸트의 물자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철학이 아니던가.

사실 쇼펜하우어 역시 '칸트 철학'의 많은 부분들을 폭넓게 비판한 인물이며, 그의 비판은 결국 여러차례에 걸쳐 플라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나로서는 쇼펜하우어가 찾아냈던 '의지의 철학'이 상당부분 베르크손이 발견한 '순수 지속'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진정한 자아'와 매우 닮은 것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나의 깊은 곳으로부터의 느낌'이기 때문에 그걸 쉽게 설명하는 일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내가 두 철학자의 닮은 점을 좀 더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은 베르크손의 나머지 주저들 때문이다. 베르크손의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은 쇼펜하우어의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과 '탐구하려는 방향'이 매우 닮아 보였다. 두 책 모두 '물질계'와 '생명계'를 구분하거나 혹은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철학자 모두 '물질계에 관한 자연철학' 즉 '과학'에 대해 매우 폭넓고도 깊은 탐구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까지도 지니고 있다. 베르크손이 나중에 창조적 진화를 통해 찾아낸 '생의 비약' 또한 쇼펜하우어의 '지칠줄 모르고 잠시도 쉬지 않는 의지'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지금껏 나온 철학논문들을 두루 찾아본다면 틀림없이 두 철학자의 공통점을 논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베르크손이 칸트를 비판하면서 언급한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형식이 완전히 우리의 작품일 수 없고, 물질과 정신의 타협으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없으며, 우리가 물질에 많은 것을 준다면 우리도 틀림없이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받고 있으며······>와 같은 대목은 사실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매우 닮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결론부분에 등장하는 다소 심오한 베르크손의 언급을 하나만 더 끌어오자. <우리 밖에는 지속 중의 무엇이 존재하는가? 오직 현재만 또는 원한다면 동시성만이 있다. 물론 외부 사물들도 변화하지만, 그것들의 순간들은 기억하는 의식에 대해서만 이어진다. 우리는 주어진 한순간에 우리의 밖에서 동시적 위치들의 총체를 관찰하며, 이전의 동시성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속을 공간 속에 놓는다는 것은 진정한 모순을 범하면서 계기를 동시성의 바로 한가운데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 사물이 지속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우리 지속의 계기하는 매순간 그 사물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변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사물들 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 대목 역시 쇼펜하우어가 '시간의 심오한 차원'을 설명하는 부분과 매우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 생각으로는 심지어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베르크손이 여기서 말한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이유'야말로 '시공의 공통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겨우 한 권의 책을 읽고 글을 너무 지나치게 멀리까지 밀고 나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철학책을 읽는 독특한  즐거움은 '철학자들의 생각'이 '우리 자아에 대한 끝모를 깊이'에까지 우리를 쉽게 이끌고 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베르크손의 철학을 읽는 즐거움은 거기에 더하여 '과학적 엄밀성'과 '문체의 아름다움'까지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한 당대까지의 많은 생물학자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쓴 『창조적 진화』는 '철학적 성과'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도 완벽한 문체' 때문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이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탐구를 통해 '철학과 자연과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하는 창조적 진화는 오래 전부터 '제목'만 알고 있었던 책인데, 그 책을 통해 여러 천재들의 생각을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쇼펜하우어는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통해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과 공통의 경계점을 갖는 유일한 철학'임을 밝혔고,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가 '철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모색하는 쪽으로 방향잡은 사실도 쇼펜하우어와 닮은 점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베르크손 철학의 핵심은 <지속의 철학>이며,  이 책 『시론』(1889년)에서 출발한 그의 철학은 그의 4대 주저 가운데 나머지 3권인 『물질과 기억』(1896년), 『창조적 진화』(1907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년)에 걸쳐서 '대상'만 달리할 뿐 근본 기저이자 동력으로 계속 작동하고 있다. 이하는 '지속의 대체적인 의미와 형이상학적 의의'를 살펴보기 위해 이 책 『시론』의 말미에 딸린 '역자 해제' 가운데 『시론』의 서평글을 읽는 분들께도 참고가 될 만한 부분만 간단히 인용한 것이다. 최대한 서평글과 연결되는 부분만 골라서 인용했지만, 아무래도 베르크손의 철학을 이해하는 첩경은 그의『시론』을 직접 읽는 데 있음은 명백하다.

 * * *

실재하는 것은 운동 자체

지성은 그 풍부한 실재로부터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추상해 내고 그것을 자신에게 편리하게 공간 속에 배치한다. 그 추상물은 사물의 표면에서 추출해 낸 것이며 오직 그것에만 관계한다. 표면에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사물을 쪼개보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보이는 것은 쪼개진 표면일 뿐이다. 결국 각 추출물은 하나의 <사물>로서 실체화한다. 지성의 그러한 습관은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그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운동(공간운동) 조차도 운동 자체는 사상하고 그것의 공간적인 측면, 즉 죽어 있는 공간적 궤적만을 보며, 거기서도 또 운동체를 추상해 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사물>인 운동체가 죽은 공간의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작 실재하는 것은 운동 자체이며, 운동체와 운동의 궤적은 지성의 표피적 추출물일 뿐이다. ······ 상호 병치적이며 동질적이어서 무한히 분할할 수 있는 공간과는 다르게 운동 자체는 상호 침투적이며 이질적이어서 분할할 수가 없다. 그 불가분의 움직임으로 무한히 분할 가능한 공간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 그 자체, 즉 지속을 발견한 베르그송은 이제 모든 것을 진정한 존재인 <지속의 상하 sub species durationis>에서 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시론』은 자유의 문제를,  『물질과 기억』은 심신관계를, 『창조적 진화』는 우주와 생명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행동의 문제를 지속으로부터 해결하려는 시도들이다.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단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 ······ 그 변혁은 너무도 근본적인 것이라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것은 서양철학사가 겪은 가장 큰 지각변동이었다.
(311∼312쪽)


사실 운동을 지속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전통 형이상학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진정한 존재는 운동이 가능한 한 다 빠진 영원한 정지체였다. 진정한 존재는 존재 아닌 것, 즉 무적인 것이 모두 빠져야 하는데, 생성과 변화와 운동은 완전히 존재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도 아닌 그 중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런 것들도 다 빠져야 진짜 존재를 얻을 수 있고, 그렇게 하여 확보되는 진정한 존재는 영원 불변의 정지체로서(운동이 다 빠졌으므로) 타자의 어떠한 간섭도 없이 무간섭, 무감동의 상태에서 존속하게 된다(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하라). 즉 정지야말로 참된 존재이며 거기에 운동이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무에 가까운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정지가 운동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 전통 형이상학의 핵심 직관이었다. 그러나 베르크손에 와서는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실재이며, 정지는 운동으로부터 끊어낸 추출물에 불과하므로, 운동이 정지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완전히 뒤집힌다.(312쪽)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

<운동이 존재>라는 것은 <존재는 운동>이라는 말과 다르다. 가령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흐른다>고 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하나도 고정적인 것은 없고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며, <존재는 운동>이라는 말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그 사실만은 변하지 말아야 하고, 따라서 그와 같은 주장은 자기 파괴적임을 간파한 플라톤은 이미 존재는 운동과 정지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 바 있지만, 어쨌든 베르크손의 <운동이 존재>라는 철학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운동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로 지속인데, 지속한다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운동하여 자기동일성을 잃고 변해 버렸으면 그것은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을 말한다. ······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 까닭은 설탕이 물에 들어가자 마자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으려고 뜸을 들이다가 결국은 자신을 포기하고 물 속으로 녹아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니 그 <뜸> 자체가 바로 시간이다. 그러니까 물질도 어느 정도는 지속하는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간이 걸리는 것은 모두 지속하고, 모든 운동은 시간 속에서 시간이 걸려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모두 지속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지속하는 것은, 종국에 가서는 자기자신임을 잃어버리는 물질적 지속을 넘어서서 한사코 자기동일성을 버리지 않고, 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자신임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완벽한 존재> 또는 <능동자>라 부르고 베르크손이 생명 또는 순수 지속이라 부른 것으로, 물질과 만나서 물질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타자화의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때 비결정성은 물론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무규정성이나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무원칙성이 아니라, 비결정성 자체의 자기동일성은 한사코 유지하는 비결정성이다. 필연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대항하여 자신의 비결정성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낼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더 큰 비결정성을 구현하려는 비결정성이다. 비결정적인 것은 비약한다. 결정적인 것은 필연의 사슬을 따라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지만, 비결정적인 것은 다음 순간에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으며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비약하는 자기자신의 동일성은 항상 유지하는 비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크손은 그것을 <생의 비약>이라 부른다. 비약은 비약이지만 <생>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유지하는 비약이라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라는 그의 책제목도 동일한 사태를 표현한다. 생을 종단면으로 잘라보면 매순간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는 새로운 것의 <창조>이지만, 횡단면으로 잘라보면 그 창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진화>라는 것이다. 생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자이다. 자기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순율에 위배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존재자가 실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한다. 모순율은 사실 물질계에서 정지체를 끊어내고 그것의 자기동일성에 기반을 두고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지성의 그리고 오직 그것만의 최고 법정이다. 진정한 운동은 매순간 모순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314∼315쪽)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바로 기억

생명은 기억(신체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을 포함하여)이 있기 때문에 탄생으로부터 성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생명체이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이 돌은 일 초 전과 일 초 후가 전혀 다르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자기자신임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돌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무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일 초에도 몇 조(兆) 번을 진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돌을 이 돌로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방식을 그 돌에 투영하여 의인화한 결과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들의 윤곽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나가서 끊어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모든 자기동일성의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모순율도 그 궁극적 원천은 우리 자신의 기능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그러한 모순율을 끊임없이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인 존재자이지만, 동시에 즉물적 자기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자인 것이다.

그런데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사실을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 바로 베르크손이며, 그와 동시에 기억은 타자화하는 물질을 거슬러 올라가 매순간 자신의 과거를 버리지 않고 끌고 감으로써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므로, 원리상 모든 것이 모조리 기억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확립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 그만큼은 자기동일성을 잃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은 타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뇌는 <기억의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원리상 이미 기억되어 있는 모든 것이 매순간 떠오르지 않도록 막아주는 <망각의 기관>이라는 이론 또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매순간 모든 것이 기억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뇌가 평소에는 기억들을 누르고 있다가 그때 그때 필요한 것에만 문을 열어주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밝힌 책이 바로 『물질과 기억』이며, 이 책에서 처음으로 기억이라는 현상이 생물 일반을 물질로부터 구별하게 해주는 원리로 부각된다. (316∼317쪽)


산다는 것 자체의 연속성만이 문제


정지체 중심에서 운동 중심의 철학으로 넘어왔다는 것은 불변의 본질에서 활동적 기능 중심의 철학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다시 형상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본질들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활동성이 전개되는 시간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무와 대비되어 가장 완벽한 도형(원)으로서의 완결적 형태를 이루는 닫힌 우주에서, 지금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형성될 것이므로 완결되지 않고 미래로 열려 있는 우주로 우주관 전체가 바뀌게 된다. 사실 처음에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결정론이나, 나중에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목적론이나 결국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며, 매순간 모든 것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중에 있는> 운동 자체를 보지 못한 닫힌 철학이고, 따라서 운동 자체에 자리잡은 열린 우주론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다. 생명도 그 기능에 따라 완결된 본질적 형태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의 연속성만이 문제이고 그 형태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전적 존재, 즉 진화하는 존재로 파악되며, 따라서 완결된 형태를 갖춘 성년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이 중심이 되고, 성년체는 그 씨앗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혹>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우주는 물질의 필연과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의 비약으로 이루어지며, 생은 각 상황에 따라 마비(식물), 본능(곤충), 지성(영장류)의 방향으로 갈라져 각자의 삶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거대한 나무와 같은 것으로서, 각 방향은 나름의 생을 추구할 뿐, 목적론과 같이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진화』는 그러한 생명과 우주의 모습을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묘사한 책이다.(317∼318쪽)


 

 

펼친 부분 접기 ▲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문학 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는 점.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의 소설이라는 점, 셋째, 읽기가 비교적 난해한 작품이어서 두 소설 모두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내가 여기에 재미있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건 (물론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프루스트가 죽었던 1922년 까지는 그랬다.

마침 1922년에 두 작가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초연을 축하하는 파리의 저녁만찬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두 사람이 만찬 주최자로부터 서로 소개를 받은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 훗날 조이스가 친구에게 밝힌 내용이 걸작이다. 
 

우리의 대화는 "아니요"라는 말로만 이루어졌네. 프루스트는 나더러 아무개 공작을 아느냐고 묻더군. 내가 그랬지. "아니요." 여주인은 프루스트에게 『율리시스(Ulysses)』의 이런저런 대목을 읽어보았는지 물어보더군. 그러자 프루스트가 말했지. "아니요." 이런 식이었지.(154쪽)


나 역시 방금 대화를 나눈 저 두 사람의 소설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도 "아니요."라는 대답밖에 내놓을 게 없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뭔가 주절주절 잡다한 얘기를 더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순전히 알랭 드 보통이 쓴 책『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낯설게만 느껴지던 프루스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건 앙리 베르그송의 책『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부터다. 그 후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매하면서 우연히 알랭 드 보통의 이 책도 함께 주문했는데, 그건 내가 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른채 순전히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궁금해서 금새 후딱 읽어버렸다.(사실 며칠은 걸렸다. 다만 KTX를 기다리던 때, 그리고 KTX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릴 때, 그리고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 그런 바쁜 틈만 골라서 말 그대로 '틈틈이' 읽었는데 금새 책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는 얘기다.) 근래에 읽은 책 가운데 이 책만큼 빨리 읽은 책도 없을 듯한데, 우연히 구입한 책이 이렇게 재치있고 세련되고 재미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가장 유쾌한 감정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 남몰래 추구한 '진부하지 않음에의 열망'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우리의 주인공 '프루스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그야말로 '진부한 표현' 즉 클리셰[Cliché]에 대해서는 극도로 싫어했던 인물이 아닌가. 그가 뭇 소설가들을 거의 절망에 빠트릴 만큼 놀라운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한 이 걸작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어찌보면 '클리셰에 대한 특유의 예민한 거부감'을 타고난 데 힘입은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진부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작품과 어쩌면 그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에 대해 쓴 책이며, 알랭 드 보통의 남다른 글솜씨 덕분에 '신선하고, 흥미롭고, 유머러스하고, 생기넘치고, 매력적이고, 눈부시다'는 온갖 진부한 찬사들을 역설적으로 얻게 된 듯싶다.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조금이나마 클리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데 나만큼 진부한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도 그런 진부함에서 벗어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쨌든 내가 손쉽게 떠올린 생각 하나는 카메라 셔터를 좀 누르면서 글을 써보자는 것이다. 그건 물론 이 책을 쓴 알랭 드 보통의 방식(그림이 많이 포함된 글쓰기)을 얼마간 모방하는 일이고, 또 그의 책으로부터 직접 '이미지'를 불러내 온 것이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고 본다.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의 중심 주제는 '시간의 소실과 상실 뒤에 놓인 원인에 대한 탐색'이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자신의 책 제목을 두고 '오해받기 쉽다'고 말한 것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이던 시대의 추이를 추적하는 회고록'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시간의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대해 쓴 소설을 기본 소재로 삼아 알랭 드 보통이 박학다식하고 장난스러울 정도로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음미하는 삶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림 1> 한 문장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진 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건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 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한 문장'이다. 프루스트 소설의 몇 가지 거북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문장 하나하나의 어마어마한 길이인데, 그걸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마치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기만 하다.

의사였던 프루스트의 동생이 말한 것처럼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 말고도 우리는 또하나의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저토록 긴 문장들을 마주 대하는 어려움 말이다.

프루스트는 왜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고 돌아눕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무려 30쪽이나 할애하는' 파격을 시도했을까. 그건 어떤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문장에서 단어의 적절한 개수를 규정하는 길이의 근본 법칙을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들기에 관해서 무려 30쪽이나 쓰도록 프루스트를 인도한 정신'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생각보다 너무 만연되어 있고 뿌리가 깊다.

<그림 2> 기차시간표 

 


그는 일생의 마지막 8년 동안을 파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저 시간표를 마치 시골생활에 관한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읽고 즐겼다고 한다. '취향이 고상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기 짝이 없을 이 인쇄물에는 그가 어린 시절 이래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가득한 까닭에, 그에게는 훌륭한 철학책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자신은 할 '시간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바쁜' 사람들-그들의 일이 제아무리 어리석다고 하더라도-이 느끼는 자기만족'에 대항하라고.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의 삶은 한편으로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분별없는 극단적인 유대인 어머니의 문제("어머니에게 나는 항상 네 살짜리에 불과헀다"), 거북한 욕망(어릴 적부터의 동성애적 취향), 데이트의 문제들(여자친구들로부터의 숱한 퇴짜), 연극계 경력의 실패, 친구들의 몰이해(천재에게는 전형적인 문제), 그 밖의 신체적 고통(천식, 식단의 애로, 소화불량, 과민성 피부, 추위, 기침,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함, 이웃의 소음, 다른 질환들(감기,발열,시력 감퇴, 치통, 팔꿈치 통증, 현기증), 타인의 불신) 등등.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라는 그의 말에 담긴 암시로부터 생겨난 말은 '프루스트적 자극'이다.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할까? 연인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서 숙고해야 할까?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서 조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될까? 우직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불 밑에서 울부짖을 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도 같을 때에야 비로소.(96쪽)


 

걸작의 창조라는 야심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보다 성공적으로 고통을 체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비록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행복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사실은 적절하고도 생산적으로 불행해지는 방법을 추구하는 쪽에 훨씬 더 큰 지혜가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불행의 끈덕진 반복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접근방식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모든 유토피아적 추구의 가치를 거뜬히 능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의 베테랑이던 프루스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00쪽)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개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 능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프루스트의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제4장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의 말미에서 주장하는 '교훈'은 이렇다.
 

타인이 얘기치 못한 그리고 상처가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단순히 안경을 닦는 것보다는 더한 뭔가로 반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 행동을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비록 프루스트가 우리에게 경고한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을, 그러니까 보이는 세계 아래에 있는 현실 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마치 평범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과 고문실, 또는 해골이 가득 찬 집에 들어갔을 때처럼 상당한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116쪽)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프루스트를 가장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클리셰의 문제였다. 

 

클리셰의 문제란,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해질녘에 해는 종종 불타는 듯하고, 달은 은은하게 마련이지만, 만약 우리가 해나 달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그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되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후의 말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클리셰가 유해하지 않은 경우는, 그것들이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떤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믿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제시했을 때뿐이다.(124쪽)



좋은 친구가 되는 법

프루스트가 죽고 난 뒤 (상당히 많았던) 그의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프루스트야말로 교우관계의 모범이었으며, 우정의 화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정은 피상적인 노력'에 불과하며,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혼자는 아니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이라고 봤다. 그리고 대화 역시 쓸모없는 활동이라고 치부하며 "우리가 평생 동안 아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실제로 우정을 비호하는 예찬 위주의 주장들에 도전했고, 그건 앞에서 언급했던 1922년에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은 그날 저녁식사 후에 택시에 올라탔는데, 동승한 내내 그들은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프루스트의 아파트가 있는 아믈랭 거리에 도착하자, 프루스트는 동승했던 다른 만찬 주최자한테 "조이스씨께 이 택시로 집까지 모셔다 드려도 괜찮겠느냐고 여쭤봐주세요."라고 말을 건넸고, 택시는 부탁받은 대로 떠났으며, 그 이후 두 사람은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화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표현하는 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많은 한계를 지닌 셈이다. <저자와의 대화>를 너무 기대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인 셈이다.


<그림 3> 저자와의 대화



프루스트가 1913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을 간행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작품이 그렇게 어머어마한 분량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애당초 3부작이 될 것이라고 행각했지만 '말하고 싶은 새로운 것들을 상당수 발견'했고 결국에는 원래의 50만 단어가 100만 단어 하고도 25만 단어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일찍이 그가 완벽하다고 판단했던 요점들은 그가 들여다보자마자 다시 써달라고 또는 새로운 이미지나 은유를 이용하여 잘 다듬거나 더 발전시켜달라고 울부짖는' 듯했고, 그래서 결국 원고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림 4> 원고 ①




<그림 5> 원고 ②




프루스트는 친구와 사귀는 일과 독서 활동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관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우정을 독서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친구가 아주 많았던 그도 '우정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면서 '독서 쪽에 핵심적인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그림 6> 원래의 순수성 




<그림 7> 종이책과의 소통



눈을 뜨는 방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 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불만이 각자의 삶에 본래적으로 결여되었던 무엇인가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각자의 삶을 적절하게 바라보기에 실패한 결과일 가능성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밝혀준다. (193∼194쪽)



<그림 8> 프루스트의 핵심적인 구분


<그림 9> 전혀 다른 이미지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




<그림 10> 미숙한 화가의 봄그림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우리가 프루스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행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너무나 빠지기 쉬운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될 가능성'을 피하라는 것이다. (순전히 내 방식대로 진부하게 말하면) '결핍'을 겪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 간절히 소망하던 온갖 다양한 대상들 혹은 목표들을 이루고 난 뒤에 우리가 그 친숙한 대상들로부터 '눈을 떼는 속도'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하이데거式으로 말하자면 '호기심의 무정주성'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의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中에서


어쩌면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친숙함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진짜로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들'을 찾을 수 있도록 환기해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림 11> 창백한 모사품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참 동안이나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던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프루스트가 말하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소중한 대상들'을 떠올리게 하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내가 그토록 애써 가지려 했던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나는 지금 얼마나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잊고 지내왔는지, 혹은 얼마나 당연시 여기며 살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대상들은 가령 (진부한 표현으로 되돌아와) 내차, 내집, 내방,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나만의 서재, 일자리, 내 계좌의 잔고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소중한 대상들은 정작 나의 아내와 아이들,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늘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과 이웃들일 것이다.


<그림 12> 현존하는 어떤 것 




<그림 13> 거짓된 친숙함 




<그림 14> 음미와 부재간에 맺어진 관계




우리는 뭔가를 사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해야 했던가에 따라 그것을 성취했을 때 뒤따르는 만족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프루스트 역시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지연에 수반되는 이익'을 예시했다. 알베르틴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모두 패션에 관심이 있었고, 알베르틴은 돈이 없었고, 공작부인의 옷장에는 옷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그 결과 알베르틴은 비록 옷은 더 적었을지 모르지만, 옷에 대한 이해나 음미나 사랑은 훨씬 더 컸다.

<그림 15> 부가 욕망을 성취시키는 속도



책을 내려놓는 방법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책을 내려놓는 방법'이다. 프루스트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

······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런 심오한 노력에서는 우리가 그의 생각과 함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246쪽)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은 어떤가. 그는 말한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 우리의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독서와 학문 전반에 '어딘가 속박된 차원'이 있다는 것이고 프루스트는 이 점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래서 좋은 책의 저자에게 '결론'이라고 불릴 수 것들이 결국 독자들에게는 다만 '자극'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림 16> 자극에 불과한 것


이 말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특정한 사물을 자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이런 대상에 대한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일 전체를 순순히 내팽개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큰지를 인식했던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책을 주의깊게 읽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립성을 예속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가 될 수밖에 없고,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272쪽)



십 년쯤 전에 가족과 함께 피렌체에 갔을 때 단테의 생가를 가본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실 아무것도 보고 느낀 게 없었다. 정작 단테를 제대로 만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신곡』을 온전히 다 읽고 나서였다. 무려 100곡에 달하는 대서사시의 서곡인 제1곡을 펼치면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는 주인공 단테가 등장한다. 그런데 천국을 향한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 그에게는 다행히도 친절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곁에 있었다. 그런데 그 서사시의 주인공인 단테는 '죽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다닌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생생히 살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또다른 세계를 두루 여행한 것이다. 단테는 그걸 통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역시 프루스트가 창조해 낸 또다른 세계이다. 그가 만들어낸 낯선 세계로 불쑥 들어서기가 조금은 두려운 나같은 사람에겐 이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이 어둠 속 베르길리우스처럼 반갑기 그저없는 훌륭한 안내자인 셈이다. 나는 아직 프루스트의 소설 마지막 제7부「되찾은 시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까마득한 길을 내 앞에 남겨두고 있지만 이제 그리 머지않아 잃어버린 무엇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프루스트가 만든 가상의 마을 콩브레로 나볼 생각이다.

이쯤에서 책들을 다 내려놓고 다시 되돌아 보는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이 책의 저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클리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그들만의 언어로 우리가 무심결에 놓치고 마는 삶의 온갖 다양한 측면들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그런 소설가들 가운데 프루스트는 분명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눈부신 역작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만난 철학자 베르그송은 '언어 예술'이 지니는 '통약 불가능한' 대목을 기어이 지적하고 만다. 그것이 철학자의 임무일 것이고 프루스트 또한 그점을 절실히 인식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갔을 것이다. 결국, 도대체 낯선 단어인 Cliché와 incommensurable이라는 두 단어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으며, 그러한 미움과 그러한 사랑은 인격 전체를 반영한다. 그러나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말로 그런 상태를 지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 증오, 그리고 영혼을 흔드는 수천의 감정들의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가는 다수의 세부들을 병렬함으로써 감정과 관념들에 그들의 원시적이고 살아 있는 개성을 되돌려 주려고 애쓰는데, 우리는 그 감정과 관념들을 공공의 영역-언어가 그처럼 그것들을 내려가게 했던-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에 의해 그의 재능을 판단한다. 그러나 한 운동체의 두 위치 사이에 점들을 무수히 끼워 넣어도 지나간 공간을 결코 메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관념들을 서로 연계시키며 그 관념들이 상호 침투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번역하는 데 실패한다. 즉, 사유는 언어와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남는다.
  -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3년 10월
품절




비즈니스맨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곧잘 인용하지만 사실상 시간은 그 이상의 것이다. 시간의 올바른 활용은 자기 수양이요, 자기 발전이며, 인격 도야이다. 날마다 하찮은 일이나 게으름 속에 낭비하는 1시간을 진정한 자기 발전에 쏟아 붓는다면 무지한 사람도 몇 년 안에 현자가 되고 좋은 일자리를 얻으며, 죽음마저 값진 행동의 수확기로 만들 수 있다. 또한 날마다 15분을 자기 발전에 투자한다면 1년 안에 그 효과를 확실히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심하게 모아진 좋은 생각과 체험들은 별도의 그 어떤 저장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니며,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다.– 263쪽
어떤 이들은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 돈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처럼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내다가 삶이 급속도로 피폐해지면 그때서야 시간의 현명한 활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무기력하고 게으른 습관이 이미 그들의 골수까지 파고들어 스스로 몸에 익힌 악습을 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잃어버린 재산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잃어버린 지식은 공부를 통해, 잃어버린 건강은 절제와 약을 통해 다시 되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영영 되돌릴 수 없다.– 263쪽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때를 놓치면 그것은 곧 불행의 기회가 된다."– 229쪽
옥스퍼드 대학의 올 솔즈 칼리지에 있는 시계 문자판에는 다음과 같은 젊은이들을 위한 엄숙하며 인상적인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라지는 시간은 우리의 책임이다.'– 138쪽
시간은 인간에게 속한 영원의 작은 파편에 불과하다. 삶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초상화가 존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지상의 보화를 탕진한다 해도 절약을 통해 과거에 저지른 낭비와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의 시간으로 오늘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겠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 138쪽
기회의 앞머리엔 털이 있지만 뒤는 대머리이다. 앞을 잡으면 잡을 수 있지만, 놓치면 제우스도 다시 잡지 못한다. - 라틴 문헌– 127쪽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3년 10월
품절




실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도 최고의 집단과 어울리고, 최고의 책들을 읽으며, 그 속에서 발견한 최고의 면모에 감탄하고 현명하게 모방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 하겠다. 더들리 경은 이렇게 말했다.

"문학에 있어서 나는 최고만 상대하길 좋아한다. 그것들은 내가 오래 전부터 읽어 왔고, 그럼에도 좀더 친숙해지고 싶은 책들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책을 읽기보다는 오래된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십중팔구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347쪽
지적인 오락으로 정보를 얻는 데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노력과 수고를 통해 주어지는 것들을 거부한다. 이처럼 장난하듯이 지식과 학문을 배운 이들은 그 둘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지적인 유흥은 당사자의 정신과 인격을 철저히 무력화시킨다. 윌리엄 로버트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두서없이 잡다하게 읽는 습관은 마치 흡연처럼 정신을 무력화시키고 발육 정지의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최악의 무기력을 몰고 오는 최악의 게으름이다."

이러한 악습은 점차 성장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그것은 천박한 소견을 가져다주고 최악의 경우에는 꾸준한 노동의 기피를 유도하며, 저급하고 나약한 정신 상태를 조장한다.– 309쪽
독서에 대한 벅스톤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읽기 시작한 책은 반드시 끝까지 다 읽고, 그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삼기 전까지 책을 다 읽은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249쪽
드류는 이렇게 회고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지를 깨달을수록 그걸 극복해야겠다는 결심 역시 더욱 더 강해졌다. 막노동을 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에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책을 읽었다. 나는 책을 앞에 놓고 밥을 먹었고 덕분에 한끼를 때울 때마다 대여석 페이지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나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을 읽고 철학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 그것은 나를 혼수 상태에서 일깨웠고 이전의 비굴한 견해를 단호히 버리도록 만들었다."– 121쪽
많이 알수록 겸허해지게 되어 있다. 언젠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 담당 교수를 찾아가 '공부를 마쳤으니' 그의 곁을 떠나겠다고 말하자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지혜롭게 꾸짖었다.

"저런, 난 공부를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

많은 것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 뿐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천박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만할 수 있겠지만 현자는 '내가 아는 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라고 겸허하게 고백하거나 뉴턴처럼 자신은 그저 해변의 조개껍질을 줍고 있을 뿐이며 눈앞에 펼쳐진 진리의 대양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고 선언하기 마련이다.
– 116쪽
젊은이들에게 조언하건대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어라.
책에서든 인생에서든 그것이야말로 가장 유익한 사귐이다.
올바른 대상에게 감탄하는 법을 배우라.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이 감탄한 것에 주목하라.
그들은 위대한 것에 감탄하는 반면 천박한 사람은
천박한 것에 감탄하고 그것을 숭배한다.
- W.M.새커리
– 17쪽
올바른 독서 습관은 크나큰 즐거움과 자기 개선의 동반자가 되며, 적당히 강제력을 발휘하면 사람의 인품과 행실 전반에 걸쳐 지극히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자기 수양은 부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고상한 생각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언젠가 한 귀족이 현자에게 경멸조의 어투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은 그 모든 철학으로 대체 얻은 게 뭡니까?
그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 상류 사회를 넣어 갖고 다니게 되었지요."
– 315쪽


 
 
pek0501 2012-10-15 12:40   댓글달기 | URL
"올바른 대상에게 감탄하는 법을 배우라." - 기억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 감탄 잘해요. ㅋㅋ

oren 2012-10-15 17:02   URL
감탄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커다란 자산이지요. ㅎㅎ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3년 10월
품절




부귀는 도덕적 가치의 증거가 될 수 없기에 그것의 화려함은 마치 반딧불이 개똥벌레의 모습을 비춰주듯 부자의 무가치함을 밝혀줄 뿐이다.– 298쪽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내버리는 방식은 원숭이의 욕심을 연상시킨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298쪽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젊은이는 삶이 너무 편해서 이내 거기에 질리게 된다. 그에겐 더 이상 바라고 원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루기 위해 발버둥칠 만한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시간이 남아 돌면서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사회에서 그의 위치는 부평초 같은 꼴이 될 뿐이다.

그의 유일한 노동은 시간 죽이기이니
참으로 비참하고 고달픈 노동이로다.
(제임스 톰슨의 《나태의 성》(1748년) 중에서)



– 298-299쪽
하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힌 부자는 게으름을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알고 물리치게 마련이다. 재물의 소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인간에 비해 일에 대한 소명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골(잠언 30장을 기록한 사람-역자주)의 완벽한 기도문은 어쩌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299쪽
인생의 최고 목적은 고결한 인격을 닦고 정신, 양심, 감정, 그리고 영혼을 가능한 한 최고조로 계발하는 데 있다. 이것이 진정한 목표이며, 이외의 것들은 그 수단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300쪽
따라서 가장 성공적인 인생은 최고의 쾌락, 최다의 재물, 최고의 권력이나 장소, 혹은 최고의 명예나 명성을 얻는 삶이 아니라, 최고의 인격을 닦고 자신이 맡은 일과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는 삶이라 하겠다. 돈이 일종의 힘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성, 공공심, 도덕심 역시 힘일 뿐만 아니라 돈보다 훨씬 고귀한 것들이다.– 300쪽
큰돈을 벌어 '상류 사회'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거기서 존경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신적 자질과 품격, 예절, 그리고 올바른 심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돈 많은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도 상류 사회에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처럼 부유하지만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욕심쟁이들이며, 그들의 힘은 금고에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301쪽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피니언 리더들, 즉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한결같이 믿음직한 인격과 훌륭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 토머스 라이트와 같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부귀는 별로 갖지 못했다 해도 훌륭한 인격과 올바르게 사용한 기회, 자신의 능력껏 선용한 인생을 만끽하면서 그저 세속적으로 성공했을 뿐인 욕심쟁이들을 한 치의 부러움 없는 눈길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다.– 301쪽
정직하게 돈을 벌고, 알뜰하게 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제대로 사용되는 돈은 고결한 인격의 진정한 기반인 검약, 신중, 극기를 나타낸다. 돈은 아무런 가치나 효용성이 없는 물체들의 집합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수많은 대상들, 즉 음식, 의복, 가정에서의 만족, 개인적인 자존심, 자립심을 상징한다.– 281쪽
시인 헨리 테일러(Henry Taylor)는 《인생 비망록》에서 이런 지혜의 말을 들려준다.

"돈을 벌고 쓰고, 빌리거나 빌려주며, 유산으로 남기는 기준과 방식이 올바르면 거의 완벽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276쪽
요컨대 한 사람의 인격은 수천 가지 미세한 영향력, 본보기, 인생과 독서, 친구와 이웃, 그리고 조상이 물려준 좋은 언행, 주변 환경 등을 통해 형성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 행복과 덕행의 능동적인 주체여야 한다. 남에게 아무리 많은 지혜와 미덕을 빚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스스로 돕는 자만이 성공한다.– 50쪽
노년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삶의 위안과 경제적 자립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명예롭고 추천할 만한 삶이다. 그냥 단순히 재산을 모으는 것은 편협하고 인색한 영혼들의 특징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우 경계할 필요가 있는 '과도한 저축 습관'이 몸에 배이게 된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는 단순한 절약이었던 것이 노년에는 탐욕으로 변질되고, 삶의 의무였던 것이 악습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 모든 죄악의 뿌리는 돈 그 자체가 아닌 돈에 대한 애착이다. 그것은 영혼을 위축시키고 편협하게 만들며 관대한 삶과 행실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월터 스콧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칼에 죽는 육체보다 돈에 죽는 영혼이 더 많다."– 295쪽


 
 
oren 2012-10-14 02:25   댓글달기 | URL
파이 스미스(Jon Pye Smith)는 제본공으로 아버지 밑에서 일할 때 자신이 읽은 책들을 발췌하거나 비평한 내용을 따로 자세히 기술해 놓곤 했다. 이처럼 불굴의 의지로 자료를 모으는 자세가 그를 평생 남다른 위인으로 만들어주었으니 전기 작가는 그를 '언제나 일하고, 항상 앞으로 전진하며, 늘 축적하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 기록들은 이후 리히터(Richter)의 '자료 출처'처럼 파이 스미스에게 정보의 보고로 사용됐다.

저명한 존 헌터도 동일한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기억력이 지닌 취약점을 보충한 것인데 평소 생각을 기록해 두는 습관의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상인이 재고 조사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없다면 무엇을 갖고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140쪽)

찬송가 작사가이자 유명한 종교 저술가인 린치(Thomas Toke Lynch)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현명한 습관은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애쓰는 습관이다."(365쪽)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中에서

pek0501 2012-10-15 12:29   URL
저도 그래서 좋은 글을 만나면 옮겨 적는 노트가 있어요. 나중에 반복해서 읽으려고요.
주로 책이나 신문에서 옮겨 적는데, 습관처럼 되어 버렸어요.
이 노트에서 글감을 얻을 때도 있답니다.

"가장 현명한 습관은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애쓰는 습관이다."(365쪽)

oren 2012-10-15 17:01   URL
'호리병의 주둥이를 이용한 원숭이 사냥법'은 가끔씩 다른 데서도 많이 인용하는 얘기인데, 저는 그 얘기를 2003년경 '어느 책'에선가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도대체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더라구요. '알제리 부족'의 얘기를 찾기 위해 (그 얘기가 담겨 있으리라 짐작되는) 여러 권의 책을 일일이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구요. 그런데 정말 '우연히' 그 구절을 저 책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정말 오랫동안 찾아볼려고 애썼던 '대목'이었는데 불과 몇십 분만에 그 대목을 이 책 속에서 찾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뻤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하면 독서노트에 옮겨적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도 너무 많이 쌓이다보니 '찾기'가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는 가급적 '검색'이 가능하고, '붙여넣기'까지 가능한 '디지털 방식'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