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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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어떤 식으로 이 책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지와는 크게 상관없이 이 책은 내게 실로 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좀 더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문예' 일반에 대해 예전에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새롭게 깨우쳐 주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에 대해 뚜렷한 선입관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가 고대 그리스 철학이 활짝 피어나 '만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던 시기, 다시 말해서 인류가 미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던 무렵을 대표하던 세 사람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계보의 맨 마지막 주자(走者)로서 막중한 임무를 분에 넘치게 수행했던 인물이었으며, 그가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학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까지 부여받았지만, 그 모든 위대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정적으로 '너무 무미건조하고 흥미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에 대한 그런 '폭넓게 지지받는 인물평'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의 책을 쉽사리 집어들 수 없었음을 나 스스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었고, 그의 이름이 숱한 고전에서 아무리 자주 언급되더라도 그건 '철학자'들이나 연구할 몫이지 나는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더구나 어떤 책에서 읽은 다음 대목은 그에 대한 흥미를 더욱 떨어뜨렸음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려면 고통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다르게, 그는 매력이 없다. ······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中에서


그런데 위의 책을 조금만 더 인용하면 우리는 금세 생각이 좀 바뀐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쓴『시학』을 무작정 못본 채 외면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고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분석한 책, 『시학』은 후대의 문학 평론에 엄청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가 인생에 접근하는 태도는 플라톤에 비하여 현실적이었고 덜 유토피아적이었으며 보통사람들의 성품과 능력에 더 관심이 많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역사상 최초의 '문예 비평'으로 널리 인정받는 책이다. 그러니 문학과 예술 일반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언젠가 한번쯤은 이 책을 꼭 읽어야만 될 듯한 까닭모를 의무감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책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은 얼마쯤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나는 이 책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시(詩)'를 다룬 책인 줄로만 알았다. 실로 엄청난 착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대체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BC384∼BC322년이다. 출생으로만 따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2,398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가 쓴 이 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기는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놀랐던 사실은 이 책이 쓰여질 당시만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의 '시'란 일반적으로 비극시와 서사시를 말하는 것이었고, 현대시의 주류를 이루는 서정시는 그 무렵에는 아예 싹도 제대로 트지 못했던 듯하다. 글쎄, 그땐 '문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분석한 책이다. 이 사실만 미리 제대로 알고 접근하더라도 우리는 많은 억측들을 물리칠 수 있으며, 이 책을 읽고 나면 혹시라도 그 어려운 '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앞으로는 더욱 좋은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까지도 슬그머니 거둬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고대 그리스 비극'을 여태까지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는데도 우리가 이 책을 굳이 읽어야만 할까? 아니면 우리의 그런 딱한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옳은 일일까? 이 책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도 아직까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비극작가들의 이름과 제목과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가끔씩 들어봤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내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이해'로까지 나의 얘기를 끌어올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미건조한 글쓰기'를 통해 고대 그리스 비극을 논한 '시학'을 읽어 보면 우리는 비극시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원된 온갖 형태의 '문화예술'이 어떻게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면서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 뿌리깊게 영향을 미쳐온 것인지에 대해 그 '연원'과 '원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도 있게 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출발한 공연 예술이 세월을 더해감에 따라 나중에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연극작품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수많은 공연 예술인 오페라와 뮤지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영화와 드라마로까지 이어져 왔음을 그 누가 자신있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스 비극이 인간의 모방 본능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뜻에서 그것이 '드라마'로 불렸다는 사실과,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목적이 감정의 순화와 배출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은 흔히 문학에서 다루는 이론의 골격이라고도 부를 만한데 그런 내용들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다루는 핵심이다.

그런데 '모방'이란 얼마나 놀라운 성질인가.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발전을 이끌어온 가장 중요한 추동력을 인간의 '모방하는 놀라운 힘'에서 찾았다. '모방'에 관해서는『역사의 연구』에서만 그 힘을 새삼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몽테뉴기 이미 옛 시인의 입을 빌어 '흉내의 귀재'인 원숭이를 보고 우리 인간을 떠올리며 감탄해 마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다윈은 마침내『인간의 유래』를 통해 인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 영장류 가운데서도 특히 협비류(狹鼻類) 긴꼬리원숭이임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결국 시(詩)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예술이고,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고 통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시의 탄생'을 연역한 것은 옳았다. 그런데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국가》를 통해 진실재인 '이데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대상을 화가처럼 '모방'하기만 하는 '모방자'에 불과한 시인을 명쾌한 논리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이 바로 이 책에 담긴 플라톤의 시론(詩論)이다.
 
플라톤 스스로 '시의 매력'에 한없이 이끌리면서도 결국 '이데아'를 추구하는 자신의 철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는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을 비판해야 하는 서글픈 처지를 지켜보노라면 솔직히 기분이 좀 묘하다. 플라톤의 이 유명한 '시인에 대한 비판적 철학 이론'은 나중에 결국 쇼펜하우어에 의해 '플라톤의 결함'으로 비판받게 되고, 니체는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까지 불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시'에 대해 서로 확연히 다른 철학적 입장 차이를 보인 점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시학』이 작시술(作詩術)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다룬 책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가 이 부분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파고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은 '자제해야 마땅할 감정에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는 시인을 못마땅히 여겨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달리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며 스승인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결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와 개연성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함으로써 결국 '보편적인 진리'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작품만 실려 실려 있는 게 아니다. 이 두 명의 철학자를 제외하고도 두 명의 저자가 더 있다. 호라티우스와 롱기누스가 나머지 저자들인데 그들이 쓴 글은 아무래도 철학자의 작품보다는 훨씬 더 쉽게 읽힌다.

호라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그가 남긴 《시학》은 비록 짧은 내용이지만 몹시 알차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 기법을 탁월하게 설명한다. 이 책 역시 서양 문학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는 비록 그리스 고대의 비극 작품과 서사시(특히 호메로스의 두 작품)라는 한정된 소재를 중심으로 쓴 책이긴 하지만, '훌륭한 글쓰기'에 대해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시가 풍성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실용적 조언들'이 가득하다. 가령 어떤 글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고 어떤 글이 유치한 글인지, 혹은 접속사와 은유는 어떻게 다뤄야 좋은지 등에 대한 설명은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들이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시를 잘 읽고 쓰기 위해 『시학』을 펼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아가 문예 비평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문예 창작에는 무관심한 나조차도 이 책에 반했다. 나는 이 책을 순식간에 두 번 읽었다. 처음엔 눈으로 읽었고 두 번째는 손으로 쓰면서 읽었다. 베끼면서 읽을 때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만큼 즐겁게 읽었다.

나는 이제껏 글쓰기에 관한 책을 몇 권 산 적은 있으나 여태껏 그런 책들을 붙들고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따분한 책들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그 시간에 훌륭한 작가가 쓴 훌륭한 책을 단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글쓰기'는 분명히 특별한 재능과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이 꼭 훌륭한 작품을 쓰고 싶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 더 훌륭한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글솜씨를 꾸준히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을 책이다. 2,000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이 책의 역사가 그걸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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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詩學

플라톤의 입장

예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국가』제10권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상(模像) 또는 영상(影像)을 모방하는 데 불과하므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가 시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는 우리의 자제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고삐를 풀어줌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시들어지게 해야 할 것에다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감정은 제거되어야 할 잡초와 같은 것이었다.(11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시인이 모방하는 것은 진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그 모상 또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 데, 다시 말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인 것이다. (13쪽)


카타르시스의 기능

시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억압될 경우 언젠가는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안전하게, 관례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출케 하는 도덕적 기능, 즉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드라마에 부여함으로써 간접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13쪽)


비극의 목적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얻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14∼15쪽)


『시학』의 명백한 결점 하나

『시학』의 명백한 결점 하나는 내용상 '시학'이라기보다는 '드라마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만큼 거의 드라마에 관해서만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사시조차 드라마와 비교하여 간단하게 논한 다음, 서사시는 비극보다 열등한 예술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서정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서정시를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은 그가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한 소수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19쪽)

모방의 대상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31∼32쪽)


모방한다는 것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 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 - 최상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그 사람을 그린 것이로구나' 하는 식으로 각 사물이 무엇인가를 추지(推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실물을 전에 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기교라든가 색채라든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원인에 의하여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방한다는 것과 화성과 율동에 대한 감각은(운율은 율동의 일종임이 명백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37∼38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열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詞, enkomion)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38쪽)


비극의 본질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란 말은 율동과 화성을 가진 언어 또는 노래를 의미하고,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는 말은 어떤 부분은 운문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노래에 의해서 진행됨을 의미한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연(實演)하기 때문에, 첫째 장경(場景, 또는 배우의 분장)이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다음은 노래와 조사(措辭)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방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다름 아니라 운문의 작성을 의미하며,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자에 의하여 행해지는 바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의 원인은 자연히 두 가지인데 사상과 성격이 그것이며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과 실패도 이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다.

······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49∼51쪽)


플롯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모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52쪽)


비극의 제1원리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이와 유사한 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초상화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53쪽)


플롯의 구성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을 훌륭하게 구성하려면 아무 데서나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 (56∼57쪽)


전체와 부분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61쪽)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저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62∼63쪽)


삽화적 플롯

단순한 플롯과 행동 중에서 최악의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도 없이 잇달아 일어날 때 이를 삽화적 플롯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졸렬한 시인들은 자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구성하고, 우수한 시인들은 배우에 대한 고려에서 구성한다. 경연을 위하여 작품을 쓰다 보면 우수한 시인들도 종종 무리하게 플롯을 연장하여 사건의 전후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6쪽)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러한 사건은 불의에, 그리고 상호간의 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은 이와 같이 발생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발생할 때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의도에 의하여 일어난 것 같이 보일 때 가장 놀랍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66쪽)


'인하여' '이어서'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자체로부터 발생해야만 하므로 선행 사건의 필연적 또는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68쪽)


훌륭한 비극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77쪽)


비극의 쾌감

비극의 쾌감은 연민과 공포에서 오는 쾌감인 바 시인은 이러한 쾌감을 모방에 의하여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모방하는 사건에는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85쪽)


플롯의 구성과 표현 방식

시인은 플롯을 구성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1) 되도록이면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시인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모순된 점을 간과하는 일이 가장 적을 것이다. ······

2) 또한 시인은 되도록이면 작중 인물의 제스처로 스토리를 실연(實演)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재능이 같을 경우에는 표현되어야 할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쪽이 더 설득력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3) 스토리에 관하여 말하자면, 기존의 것이든 시인 자신의 창작이든 간에 먼저 대체적인 윤곽을 잡은 다음 삽화를 삽입하여 늘여야 한다. ······

4) 모든 비극은 '분규' 부분과 '해결' 부분으로 양분된다. 드라마 밖의 사건과 그리고 종종 드라마 안의 사건 가운데 일부가 '분규'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해결을 구성한다. 나는 스토리의 시초부터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를 '분규'라 부르고, 운명의 전환이 시작된 뒤부터 마지막까지를 '해결'이라 부른다. ······ (104∼108쪽)


조사의 특징

조사(措辭)는 무엇보다도 명료하면서 저속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된 조사는 가장 명료하기는 하나 저속하다. 클레오폰과 스테넬로스의 시가 그 예다. 이에 반해 생소한 말을 사용하는 조사는 고상하고 비범하다. 생소한 말이란 방언과 은유와 연장어와 일상어가 아닌 모든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부가 이러한 말들로만 된 시는 수수께끼나 야만족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즉 은유로만 되었다면 수수께끼가 될 것이고 방언으로만 되었다면 야만족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129쪽)


비극과 서사시

따라서 비극이 이러한 모든 점에서 그리고 또 시적 효과를 산출함에 있어(왜냐하면 비극과 서사시는 임의의 쾌감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우수하다면 서사시보다 시의 목적을 더 훌륭하게 달성하므로 더 우수한 형식의 예술임이 명백하다. (162쪽)




호라티우스 / 詩學

호라티우스의 시학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경험적 사실을 분석하여 시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규명해보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는 달리, 호라티우스 자신의 경험과 당시의 라틴 문학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 기법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67쪽)

위대한 시인이 쓴 라틴 문학의 유일한 시론인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론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 문학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서양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읽어야 할 이론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괴상한 그림

가령 어떤 화가가 사람의 머리에다 말의 목을 이어 붙이고 몸통은 다채로운 깃털로 장식하는 등 온갖 동물에서 그 지체(肢體)를 빌려온 결과 위쪽은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맨 아래쪽은 보기 흉한 잿빛 물고기가 되어버린 괴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대들을 자신의 화실로 불렀다고 한다면,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과연 이런 그림을 보고도 폭소를 금할 수 있을까요? (171쪽)


단일성과 통일성

이거야말로 도공이 손잡이가 둘 달린 큰 항아리를 만들고자 녹로(轆轤)를 돌렸지만 겨우 조그마한 단지 하나가 만들어진 경우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대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단일성과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73쪽)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

우리들 시인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거기에 현혹되고 맙니다. 간결함을 추구하다 보면 모호해지고, 유려함을 추구하다 보면 박력과 불길이 꺼져버립니다. 장엄함을 찾다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너무 소심하게 감정의 비약을 피하다 보면 땅바닥 위를 기는 꼴이 되고 맙니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통하여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이는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습니다. 그러나 예술 감각이 결여된 경우에는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173쪽)


능력에 맞는 소재

작가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시라. 그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이며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오랜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시라.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한 작가는 조사(措辭)와 언어의 명쾌한 배열 때문에 곤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명쾌한 배열의 장점과 매력은 내가 알기로는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뒤로 미루어 지금은 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174쪽)


사멸을 면치 못하는 법

계절이 바뀌면 나뭇잎도 바뀌어 옛 것은 떨어지고 새 것이 돋아나듯 단어도 낡은 것은 시들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들처럼 생을 구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생존과 행적은 사멸을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어떤 왕이 큰 공사를 일으켜 해신 넵투누스를 육지에 가두어놓고 그로 하여금 함대를 북충으로부터 지키게 하든, 오랫동안 배 없이는 다닐 수 없던 불모의 늪이 인근 도시를 부양하고 쟁기의 무게를 느끼게 되든, 곡식을 위협하던 강물이 진로를 바꾸어 보다 순탄한 길로 흘러가게 되든, 인간이 해놓은 일은 언젠가는 퇴락하게 마련이거늘 어찌 언어만이 유독 변함없는 효력과 영광을 누려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사멸했던 많은 것들이 다시 태어나고 지금 영광을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소멸할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인즉 필요야말로 언어의 법칙과 규범을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176∼177쪽)

(나의 생각)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불멸의 고전' 속에서 발견했던 '호라티우스의 말'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몹시 반갑다.

 * * *
또한, 세월은 수많은 변화와 반전을 불러온다. 여기서 권두에 실은 호라티우스의 인용문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원래 시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우리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업의 일생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Multa renascenyur quae cecidere, cadentque Quae nunc sunt in honore.
"지금은 실패했지만 회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지금은 축하받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 호라티우스Horace <시론 Ars Poetica>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는 물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웃는 자와 더불어 웃고,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법입니다. 그대가 나를 울리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 자신이 고통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텔레포스여 그리고 펠레우스여, 그대의 불행이 나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대가 남이 시키는 말만 서투르게 늘어놓는다면 나는 하품과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비장한 말은 슬픈 얼굴에 어울리고, 위협적인 말은 성난 얼굴에 어울립니다. 그리고 변덕스런 말은 익살스런 얼굴에 어울리고, 진지한 말은 엄숙한 얼굴에 어울립니다. 자연은 그때그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격동시키키도 하며, 무거운 근심으로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불안으로 마음 조이게도 합니다. 그런 연후에 영혼의 감동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데 이때 혀가 그 통역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화자의 말이 그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로마 인들은 교양의 유무를 막론하고 폭소를 터뜨릴 것입니다. (180쪽)


만인의 공유물

소재가 만인의 공유물인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그대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처리하거나, 통역관처럼 글자를 한 자 한 자 그대로 옮긴다거나, 모방자로서 궁지에 빠진 나머지 원전에 대한 외경심과 원전의 특이성으로 인하여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2쪽)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바란다면

만일 그대가 공연이 끝난 뒤 다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배우가 박수를 청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관객들의 갈채를 바란다면 나와 더불어 모든 관객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으시라. ······ 보호인으로부터 갓 해방된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젊은이는 말이나 개나 양지바른 연병장의 잔디밭을 좋아합니다. 이 시절에는 밀랍처럼 유연하기 때문에 쉽사리 나쁜 길로 유혹되며, 좋게 타일러도 잘 듣지 않으며, 이해 타산에 어둡고 금전 낭비가 심합니다. 그리고 포부가 크며, 사랑하던 것을 금세 단념해버립니다. 그러나 장년이 되면 성향이 달라져서 권력과 명예를 중시하고 세도가와 친분을 맺고 싶어하며 차후에 애써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될 모험은 조심스레 피합니다. 노년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법입니다. 고생을 하면서도 저축한 것이 아까워 감히 쓰지 못합니다. 만사를 냉정하고 소심하게 처리하되 시간이 지나면 다소 나아지리라는 생각에서 뒤로 미루기가 일쑤고, 무기력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며, 성미가 까다롭고 괴팍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년이었던 시대를 찬양하며 젊은이들을 꾸짖고 훈계합니다. 오는 세월은 많은 선물을 가져다주지만 가는 세월은 많은 것을 빼앗아가버립니다. ······ 우리는 연령별로 그 특성을 잘 알아서 거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185∼186쪽)


그리스인들의 작품

그대들은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으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은 플라우투스의 시구와 재치를 듣고 감단해 마지않았습니다. (193쪽)


물리치시라

그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손질하면서 잘 깎은 손톱으로 열 번씩 음미해보지 않은 시일랑 물리치시라.
(195쪽)


만인의 갈채를 받을 작가

시인은 이익을 주려 하거나 또는 쾌감을 주려 하거나 또는 쾌감과 인생에 유익한 것을 동시에 주려 합니다. 그대의 교훈은 간결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혼이 재빨리 포착하여 깊이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일단 충만하게 되면 나머지는 모두 흘려버리게 마련입니다. ······ 투표권이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무익한 작품을 비난하고, 거만한 젊은 기사들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익한 것에 달콤한 것을 가미하여 쾌감과 교훈을 동시에 주는 작가는 만인의 갈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책은 소시우스 형제들에게 돈을 벌게 해줄 뿐 아니라 해외로 나가 작가에게 불멸의 명성을 보장해줄 것입니다. (198쪽)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시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습니다. 어떤 것은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평가의 형안(炯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장소에서 관람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것은 한 번만 보아도 마음에 들지만 어떤 것은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마음에 듭니다. (199∼200쪽)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200∼201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예술'을 논하는 부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시에 대하여>에서 '플라톤의 詩論'을 비판함과 동시에 시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인용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776쪽)



9년 동안

그대는 언행에 있어서 결코 미네르바의 정신을 거역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언젠가 무엇을 쓰게 되면 그대의 부친과 나의 면전에서 비평가 마이키우스에게 낭독해주시오. 그리고 그 원고를 9년 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시오. 발표하지 않은 것은 없애버릴 수 있지만 일단 입 밖에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쪽)


여우껍질을 뒤집어쓴 거짓 친구

그대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었거나 주려고 한다면 그가 환희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대의 시를 내놓지 마시오. 그는 감격하여 '오,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확합니까!' 하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우정의 눈물로 시구를 적시기도 하고, 기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할 것입니다. 마치 장레식 때 돈 받고 곡하는 자들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자들보다 더 애절한 말을 하고 더 슬픈 표정을 짓듯이 마음속으로 조소하는 자일수록 진심으로 찬양하는 자보다 더 감격한 체하는 법입니다. 왕들은 자신들의 총애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고 싶으면 괴로울 정도로 술을 많이 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시를 쓴다면 여우 껍질을 뒤집어쓴 거짓 친구가 그대를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204쪽)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퀸틸리우스에게 무엇을 낭독해주면 그는 '이것은 더 손질하시오. 그리고 이것도'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그 잘못된 시구를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시정하는 대신 옹호하려고 들면 그는 그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도취될 수 있도록 일언반구의 헛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비예술적인 시구는 지적하고, 딱딱한 것은 나무라고, 무미건조한 것은 새까만 횡선을 치고, 지나친 장식은 잘라내고, 어두은 것은 밝게 하고, 모호한 것은 분명하게 하고, 고칠 것은 고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그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될 것이며, '사소한 일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게 뭐람?' 하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로 말하자면 언젠가 그가 관객들로부터 조소와 비난을 받게 되는 날 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205쪽)


시켈리아 시인의 최후에 관하여

나병이나 황달이나 무도병(舞跳炳)이나 월야방황증(月夜彷徨症)에 걸린 사람을 보면 모두들 피하듯이 현명한 사람은 광기에 사로잡힌 시인을 보면 무서워 달아납니다. 아이들만이 야유하며 멋모르고 따라다닙니다. 그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 시구를 토하다가 실족하여 지빠귀 사냥꾼처럼 우물이나 구덩이 속에 빠지는 날에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보았자 그를 구해줄 사람은 좀처럼 없을 것입니다. 누가 그를 구하려고 새끼줄을 내려보낸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 이 자가 고의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시오. 그는 어쩌면 구조를 원치 않을는지도 모르오.' 나는 그에게 시켈리아 시인의 최후에 관하여 이야기해줄 것입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신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서 냉정하게 아이트네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소. 사람들은 시인들에게 자살할 권리와 자유를 허용해야 하오. 삶에 지친 자들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소. 이런 짓은 여기 이 자가 처음이 아니오. 그리고 그를 끄집어내보았자 그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죽음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할 것이오. 게다가 그가 어떻게 해서 시를 짓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해를 모독했거나 아니면 신성불가침한 낙뢰(落雷) 자리를 제거했기 때문에 부정을 탔을지도 모를 일이오. 아무튼 그는 제정신이 아니오. 이 지긋지긋한 시인은 우리의 창살을 부수고 뛰쳐나온 곰처럼 무시한 사람이건 유식한 사람이건 모두 쫓아버립니다. 그러다가 혹시 누구라도 붙잡는 날에는 꼭 붙들어놓고 자신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지루해 죽게 만듭니다. 거머리는 피를 잔뜩 빨아먹기 전에는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는 법이거든요.' (206∼207쪽)




플라톤 / 詩論

시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플라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이온 Ion』과 『파이드로스 Phaidros』와 『국가』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국가』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211쪽)


모방의 종류

모방의 문제는 특히 『국가』제10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거기서 플라톤은 모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침대의 경우 첫째로 이데아(idea)의 세계에 있는 신이 만든 불변의 침대 또는 침대 그 자체가 있고, 둘쨰로 이것을 모방하여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가 있고, 셋째로 화가 또는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즉 이데아 또는 진리로부터 세 단계나 떨어져 떨어져 있는 가상의 모상(模像)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또는 예술은 모방술(模倣術)이며 "모방술은 그 자신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만큼" 시인들은 당연히 이상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쪽)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

플라톤 자신도 가끔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과 시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들이 고대 그리스를 넘어 서양 산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시공을 초월한 숭고한 주제들뿐만 아니라 신화와 비유 같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풀어나가는 표현 방법, 즉 시적 요소들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야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13쪽)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그러나 우리는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즉 전쟁이나 원정이나 국가의 통치나 인간의 교육에 대해서는 물어서 알 권리를 갖고 있네. (228쪽)


시인들은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

"그렇다면 이런 점들에 관하여 우리의 의견이 꽤 일치된 셈이네. 즉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모방은 일종의 유희이며 진지한 것이 못 된다는 점, 그리고 비극 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든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든 간에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일세." (236쪽)


화가를 닮은 시인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붙들어다가 화가의 한짝으로서 그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혼의 열등한 부분과 교제하고 가장 훌륭한 부분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를 닮았기 때문이네. 따라서 훌륭한 제도를 가져야 할 국가 안으로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은 정당하네. 그것은 그가 혼의 열등한 부분을 일깨워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을 손상하기 때문이네. 그것은 마치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악당들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고 보다 선량한 자들은 파멸케 하는 것과도 같네." (244∼245쪽)


플라톤이 시인을 비판하는 이유

"그러면 내 말을 듣고 잘 생각해보게나.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영웅이 비탄에 빠져 장탄식을 늘어놓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괴로워서 가슴을 치는 장면을 호메로스나 다른 비극시인이 모방할 때면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이에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잊고 공감하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기분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시인일수록 훌륭한 시인이라고 진지한 태도로 칭찬하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면, 자네도 알다시피, 그와는 반대로 침착하게 잘 견뎌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네. 그것이 남자다운 행동이고 우리가 방금 칭찬했던 것은 여자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에서 말일세."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칭찬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될 그런 인간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기뻐서 칭찬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우스 신에 맹세고,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246∼247쪽)


억압되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본래는 실컷 울고불고 탄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에는 억압되어 이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바로 이 부분이 시인들로부터 만족과 쾌감을 얻는 부분이네. 한편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성과 습관에 의하여 충분히 교육되어 있지 못하므로 눈물이 많은 부분에 대한 감시를 늦춰버리네. 왜냐하면 그것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남의 고통이고 또 선량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슬퍼할 때 그 자를 칭찬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그에게는 조금도 수치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네. 오히려 그는 거기서 얻는 쾌감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네. 왜냐하면 남의 것을 즐기면 그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자기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247∼248쪽)


시의 모방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는 일

"또한 애욕과 분노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는 욕망과 고통과 쾌락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의 모방은 이런 것들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고 있으며, 사악하고 비참하게 되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까 말일세." (249쪽)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우리는 시로부터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왜냐하면 '주인을 향하여 깽깽 짖어대는 개'라든가, '바보들의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나 위대한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머리의 오합지졸'이라든가, '어떻게 하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 세심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에 다른 많은 험담들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입증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볼 때 말일세." (251∼252쪽)




숭고에 관하여 / 롱기누스

이 책의 저작 시기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 비평서가 기원후 1세기 또는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58쪽)


유럽의 문예 비평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책

······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각각 근대인과 고대인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이 비평서를 내세운 뒤로 이 비평서는 유럽 여러 나라들, 특히 영국의 문예 비평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비평서가 흠 없는 범용보다는 흠 있는 천재를, 이를테면 아폴로니오스(Apollonios)보다는 호메로스(Homeros)를,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보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를, 박퀼리데스(Bakchylides)보다는 핀다로스(Pindaros)를, 이온(Ion)보다는 소포클레스(Sophokles)를 택하겠다며 그리스 문학의 걸작들인 호메로스, 삽포(Sappho), 핀다로스, 아이스퀼로스(Aischylos),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플라톤(Platon),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작품들을 자주 인용하고 이를 정확히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259쪽)


숭고

숭고는 일종의 완벽함 또는 탁월한 표현이고 가장 위대한 시인들과 산문작가들도 다름 아닌 이것을 통하여 일인자들이 되고 자신들을 위하여 영원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라고 장황하게 서론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웅대한 것은 듣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하게 하기 때문이오. 우리를 경탄케 하는 것이 단순히 설득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보다 언제 어디서나 더 우세한 것은 그것의 놀라게 하는 힘 때문이오. 왜냐하면 우리가 설득되느냐의 여부는 대체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경탄케 하는 것과 놀라게 하는 것은 대항할 수 없는 권세와 힘을 행사하여 듣는 이를 모두 제압하기 때문이오. 숙달된 창작의 재능과 소재를 정돈하고 배열하는 능력은 한두 구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만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오. 그에 반해 숭고는 제때에 출현하기만 하면 마치 벼락처럼 모든 것을 흩어버리고 단번에 연설가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오. (266∼267쪽)


행운과 좋은 판단

데모스테네스는 인생 일반에 관하여 논하며 가장 큰 행복은 행운이고 그 다음이 좋은 판단인데 이것이 결여되면 행운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점에서 이것도 행운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소. (269쪽)


어린애 장난

그들은 가끔 자신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영감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273쪽)


과장

과장은 대체로 가장 피하기 어려운 실수 가운데 하나인 것 같소.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하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장대한 것을 좇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니까요. 그들은 '큰 목표에 못 미치는 것은 역시 고상한 실수이다'라는 명제를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경우에도 부종(浮腫)은 나쁜 것으로서, 이 공허하게 부어오른 불성실은 아마도 의도했던 것과 상반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오.


유치함, 무의미한 감정 또는 무절제한 감정

과장은 숭고를 능가하려고 하는 반면에 유치함은 장대함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오. 그것은 모든 점에서 저열하고 편협하고 정말이지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이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유치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나치게 공들이다가 냉담함으로 끝나고 마는 현학적 사고가 아닐까요? 비범하고 정교하고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어 값싸고 야한 겉치레라는 암초에 걸리게 되는 법이오. 이와 관계가 있는 것이 감정의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 실수인데, 이것을 테오도로스는 가짜 주신제(酒神祭)라고 부르고 있소. 그것은 감정이 불필요한 곳에서의 때아닌 무의미한 감정 또는 절제된 감정이 필요한 곳에서의 무절제한 감정을 말하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주제와 무관한, 순전히 개인적이라서 따분하기만 한 감정을 터뜨리곤 하오. 그럴 경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청중에게 그들의 태도는 부적절해 보이지요. 그럴 것이 그들 자신은 황홀하지만 청중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오. (274쪽)


가장 심한 유치함

냉담함은 티마이오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소. 그는 다른 점에서는 재능 있는 작가이고 가끔은 장대한 표현을 쓰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박식하고 독창적이지만, 남의 실수는 꼬치꼬치 따지기 좋아하면서 자기 실수는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언제나 기발한 착상을 좇다가 가장 심한 유치함에 빠지곤 하지요. (275쪽)


부적절한 표현의 원인

이 모든 품위 없는 것들은 문학의 경우 단 한 가지 원인에서, 말하자면 새로운 발상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오. 우리의 미덕과 악덕은 같은 바탕에서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미려한 문체와 숭고한 표현들과 여러 가지 매력들은 모두 성공적인 글쓰기에 기여하지만 바로 이것들이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의 원인과 토대가 되는 것이오. (280쪽)


경탄의 대상

친구여, 일상생활에서도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위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오. 예컨대, 부와 명예와 명성과 권력과 기타 겉보기에 매우 화려한 것들이 그렇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을 큰 선(善)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오. 그런 것들을 경시하는 것 자체가 적잖은 선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들보다는 가질 수 있는데도 경멸할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사람들이 더 경탄의 대상이 되는 법이오. (282쪽)


진실로 위대한 것

사려 깊고 문학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어떤 구절을 몇 번이나 들어도 그것이 그의 마음에 어떤 고양감을 주지 않거나 아무리 숙고해 보아도 말해진 것 이상을 그의 마음에 남기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유심히 살펴볼수록 아래로 처지고 진부해진다면, 그것은 진실로 숭고한 것일 수 없소. 그것은 귀에 들리는 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오. 진실로 위대한 것은 거듭된 검토도 견뎌내고, 그 호소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강력하고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마음속에 남기기 때문이오. 간단히 말해서, 그대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진실로 그리고 아름답게 숭고하다고 생각하시오. 직업과 생활 방식과 취미와 나이와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작품들에 대하여 똑같은 의견을 갖는다면 그토록 목소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치된 판단은 그들의 경탄이 정당하다는 우리의 신념을 강하고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법이오. (283쪽)


숭고의 다섯 가지 원천

숭고한 문체의 가장 생산적인 원천은 다섯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다섯 가지의 공통된 토대는 언어 구사력이고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소.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크세노폰에 관한 나의 저서에서 설명했듯이, 위대한 구상 능력이오. 두 번째는 강력하고도 열광적인 감정이오. 숭고의 이 두 가지 원천은 대체로 타고나는 것이오. 나머지 세 가지는 예술에 의하여 습득될 수 있으니, 문채의 - 여기에는 사상의 문채와 언어의 문채 두 가지가 있소 - 적절한 구성과 이에 덧붙여 고상한 표현법이 그것인데, 여기에는 또 어휘의 선택, 은유의 사용, 언어의 조탁이 포함되오. 위대함의 다섯 번째 원인은 앞서 말한 것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서 품위 있고 고상한 조사(措辭)가 그것이오. (284쪽)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생각건대, 그는 같은 이유에서 그의 재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쓴 『일리아스』는 작품 전체를 극적인 행동과 투쟁으로 가득 채운 반면, 『오뒷세이아』는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년기의 특징이오. 따라서 사람들은 『오뒷세이아』에서의 호메로스를 크기는 그대로지만 힘이 없는 지는 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오. 『오뒷세이아』에서는 그는 이미 『일리아스』의 노래들에서와 같은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니, 그곳에는 결코 범용으로 떨어지지 않는 숭고도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격정도, 다재다능함도, 현실성도, 일상생활에서 끌어온 풍부한 심상도 없기 때문이오. 그것은 마치 오케아노스가 자신 속으로 도로 흘러들어 자신의 경계 안에 조용히 머무는 것과도 같소. (295쪽)


구멍과 틈

······ 이들 작가들이 한 것은 말하자면 가장 탁월한 것만을 갈고 닦아 함께 이어붙이되 과장되고 품위 없고 현학적인 것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소. 이런 것들은 전체를 망쳐놓게 마련인데, 그것은 이런 것들이 상호 관계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조화롭고 인상적인 건축물들에 말하자면 구멍과 틈을 만들기 때문이오. (301쪽)


숭고와 확장

대체로 깍아지른 듯한 숭고가 데모스테네스의 특징이라면 키케로의 그것은 확산이오. 우리 동향인은 자신의 힘과 속도와 기세로 자기 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말하자면 한꺼번에 불태우며 흩어버릴 수 있소. 그래서 그는 번개와 벼락에 비유될 수 있소. 키케로는, 내가 보기에, 사방으로 번지며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요원의 불길과도 같소. 그의 내면에는 지칠 줄 모르는 불이 활활 타며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번지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소. (305쪽)


'소리 없는 강물'처럼 숭고에 도달하는 플라톤

플라톤으로 되돌아가, 그는 그렇게 '소리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데도 숭고에 도달하고 있소. 그대는 그의 『국가』를 읽었으니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하고 그는 말하고 있소. "지혜와 덕을 모르고 언제나 연회 같은 것에 열중해 있는 자들은 아마도 아래를 향하여 움직이며 그곳에서 평생 동안 헤매게 될 것이네. 그들은 진리를 쳐다본 적도 없고 위를 향하여 움직인 적도 없으며 확실하고 순수한 쾌락을 맛본 적이 없다네. 그들은 가축처럼 언제나 아래만 내려다보며 대지와 식탁 위로 머리를 숙이고는 먹이를 먹고 교미한다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무쇠의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서로 떠받다가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서로 죽인다네." (307쪽)

(나의 생각)
이 부분은 플라톤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다. 『평생독서계획』의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 * *
"독자는 플라톤의 핵심 사상 세 가지를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첫째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데, "탐구하지 않는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상이 플라톤의 모든 저작에서 핵심을 이룬다. 두 번째는 지식은 미덕이라는 것이다. 충분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충분히 선량한 사람이다."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

이 작가는,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던 것들 외에도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소. 그것은 대체 어떻게 생긴 어떤 종류의 길일까요? 그것은 과거의 위대한 산문 작가들과 시인들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친구여, 이 목표를 부단히 추구하도록 합시다. 많은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김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오. (308쪽)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상을 다툰 플라톤

헤로도토스만이 가장 호메로스적이었을까요? 천만에 그 이전에 스테시코로스와 아르킬로코스가 있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있었소. 그는 호메로스라는 샘으로부터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개천을 냈던 것이오. 나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암모니오스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간추려 기록해두지 않았더라면 말이오. 그런 것은 표절이 아니오. 그것은 조각이나 그 밖에 다른 예술에 의하여 아름다운 형상들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소. 그리고 생각건대, 플라톤은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제우스 신께 맹세코, 온 마음을 다해 상을 다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철학 이론들을 그렇게까지 꽃비우지 못했을 것이고, 시의 주제와 언어에 그렇게 자주 함께 승선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아마도 경쟁심에서 지나치게 투지에 넘쳐 있지만, 그런 다툼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었소. 헤이오도스에 따르면, "그런 불화는 인간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선배들에게 지더라도 그것이 불명예가 아닌 곳에서는 명성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영관은 정말이지 그 무엇보다도 다투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309쪽)


실용적 조언

따라서 우리도 숭고한 표현과 고매한 사상을 요구하는 구절을 쓸 때는, 호메로스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플라톤이나 데모스테네스나 또는 역사에서 투퀴디데스는 이것을 어떻게 숭고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좋소. 왜냐하면 경쟁심은 이 위대한 분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줄 것이고, 그러면 그 분들이 우리의 생각들을 우리가 정해놓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줄 것이기 때문이오. 나아가 호메로스나 데모스테네스가 여기 있었다면 나의 이 구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또는 나의 이 구절이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하고 자문해본다면 그것은 더욱더 그러할 것이오. 우리가 그러한 배심원들과 청중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웅적인 심사원들과 증인들에게 우리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도록 맡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큰 경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대가 "내가 이렇게 쓰면 후세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더 고무적일 것이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와 시대보다 오래 지속될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의 마음속 구상들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발육이 부전하여 유산되고 말 것이며, 후세의 명성의 날을 위하여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못할 것이오. (310∼311쪽)


문채와 숭고

회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요. 빛과 그림자가 색채로 재현되어 같은 화면 위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도 빛이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빛이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오. 그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도 감정과 숭고는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깝소.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친화력과 광채 때문에 언제나 문채에 앞서 우리의 주의를 끌어 문채의 기교를 가림으로써, 말하자면 그것이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오. (325쪽)


접속사의 몇 가지 불리한 점

그대가 이렇듯 접속사를 계속해서 삽입할 경우 감정의 긴박함과 울퉁불퉁함이 접속사의 사용으로 매끈하고 평탄해져서 찌르는 맛이 없어지고 금세 열기를 잃게 되오. 달리는 사람이 몸이 묶이면 속력을 빼앗기듯이, 마찬가지로 감정도 접속사와 다른 군더더기에 의하여 방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소. 그럴 경우 그것은 운동의 자유를 잃게 되어 나는 무기가 발사된 듯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오. (332쪽)


인칭 바꾸기

친구여, 그대는 보이지 않으시오. 어떻게 그가 마음속으로 그대를 데리고 그곳을 통과하며 그대가 들은 것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지 말이오? 그런 구절들은 실제 인물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듣는 이를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오. (343쪽)


우회적 표현

음악의 경우 이른바 반주에 의하여 주선율이 더 감미로워지듯이, 우회적 표현은 가끔 직접적 표현과 조화를 이루며 그것이 더 아름답게 들리게 해주는데, 우회적 표현이 과장되거나 몰취미하지 않고 쾌적하게 섞일 때에는 특히 그러하오. (347쪽)


적절하고 장대한 말들의 선택

사상과 표현법은 대체로 밀접한 관계가 있소. 따라서 우리는 표현법의 영역에서 아직도 고찰되어야 할 요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적절하고 장대한 말들의 선택은 놀랄 만큼 청중을 유인하고 매료하며, 연설가들과 산문 작가들은 모두 그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소.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써 우리의 말들에 마치 가장 아름다운 조각에게처럼 대번에 장대함과 아름다움과 매력과 무게와 기운과 힘을 주기 때문이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들에 생명과 목소리를 불어넣는 것이오. (351쪽)


은유

앞서 문채들에 관해서도 말했듯이, 강력하고 시의에 맞는 감정과 진정한 숭고야말로 중첩된 또는 대담한 은유에 대한 특효약이라는 것이오. 그것들은 급한 물살로 모든 것을 휩쓸어가거나 앞으로 내모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오. 아니, 그것들은 필수적으로 대담한 심상들을 요구하오. 그것들은 청중에게 은유의 수를 세어볼 여유를 주지 않소. 청중도 연설가의 열광에 참여하기 때문이오. (356쪽)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내가 알기로 가장 위대한 천재들은 흠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오. 완벽한 정확성은 진부해질 위험이 있으나, 위대한 저술에서는 큰 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간과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오. 아마도 저급하고 평범한 재능들은 모험하지 않고 높은 곳을 노리지 않는 까닭에 대체로 실수로부터 안전할 수밖에 없는 반면, 위대한 재능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든 그 본성상 언제나 더 나쁜 측면이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오. 실수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남지만, 탁월성에 대한 기억은 금세 녹아 없어지는 법이오. (360∼361쪽)


정신의 위대성 때문에

나 자신도 호메로스와 다른 위대한 작가들의 적잖은 실수를 지적한 바 있지만 이는 이들 실수들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흐뭇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도적인 실수라기보다는 천재의 부주의와 소홀함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간과(看過)라고 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탁월성들이야말로 설사 그것들이 작품 전체에 걸쳐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더라고 언제나 상을 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것들이 보여주는 정신의 위대성 때문에라도 말이오. (362쪽)


데모스테네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건대, 휘페레이데스의 아름다움들에는 비록 그 수는 많지만 위대성이 결여되어 있소. 그것은 정신이 맑은 사람의 태작(駄作)으로서 청중을 감동시키지 못하오. 휘페레이데스를 읽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천재의 탁월성들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니, 숭고한 말의 긴장감, 생동감 넘치는 감정, 충만, 준비성, 필요한 곳에서의 속도 그리고 그 자신의 접근하기 어려운 맹렬함과 힘이 곧 그것이오. 내 말하노니, 그는 신이 보낸 이 모든 재능들을 - 그것들을 인간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경한 짓일 테니까요. - 자신 안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이 갖지 못한 장점들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도 자신이 가진 장점들로 경쟁자들을 모두 이기며 말하자면 천둥과 번개로 모든 시대의 연설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오. 그래서 그의 지속적인 감정의 분출을 태연히 지켜보느니 차라리 떨어지는 벼락을 향하여 눈을 뜨는 편이 더 수월할 것이오. (365쪽)


신들과 같은 작가들이 의도했던 것

그렇다면 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을 추구하고 세세한 정확성을 경멸했던 저 신과 같은 작가들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은 열등하고 품위 없는 동물이 되도록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의 관람객이자 명예를 사랑하는 경쟁자가 되도록 마치 큰 축제에 초대하듯 우리를 생명의 세계와 전 우주 속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그래서 자연은 처음부터 무엇이든 위대하고 우리 자신보다 더 신적인 것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욕구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았다는 인식이오. 따라서 전 우주도 인간의 고찰과 사고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사고는 때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오. 그리고 인생을 두루 살펴보고 만물 속에서 비범한 것과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우세한지 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목적을 금세 알게 될 것이오. (366∼367쪽)


문장 구조

말해진 것에 장대함을 부여하는 데 여러 가지 구성 요소들의 결합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 그것은 신체의 경우와 같소. 개개의 사지는 다른 것과 분리되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나 전체가 결합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오. 마찬가지로 장대함의 효과들도 서로 분리되면 그것들 자체는 물론이고 전체적인 숭고의 효과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지만, 하나의 전체로 결합되고 화음의 띠들로 둘러싸이면 하나의 완전문(完全文)으로 완결되는 것 자체에 의하여 살아 있는 목소리를 얻게 되는 것이오. (381쪽)


숭고를 저해하는 것들 : 젠체하는 저질 리듬

나약하고 흥분된 리듬만큼 숭고한 구절을 해치는 것은 없소. 이것들은 순수한 무도 리듬으로 변질되고 마오. 지나치게 리듬화된 것은 무엇이든 가장 미세한 감정적 효과도 없이 단조로이 반복됨으로써 금세 부자연스럽고 싸구려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오. 그러나 가장 나쁜 점은, 마치 노래가 청중의 주의를 드라마의 줄거리로부터 억지로 자기에게로 끌듯이, 지나치게 리듬화된 산문도 청중에게 말의 효과가 아니라 리듬의 효과만을 전달한다는 것이오. 그리하여 청중은 가끔 끊어지게 되어 있는 부분들을 미리 알고는 무용에서처럼 연설가보다 한발 앞서 그를 위하여 발로 박자를 맞춰주는 것이오. 난도질해놓은 문체 마찬가지로 너무 촘촘하거나 작은 단편들과 짧은 음절들로 잘라놓은 구절들도 장대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소. 그런 구절들은 말하자면 군데군데 나무못으로 거칠고 울퉁불퉁하게 이어 붙여놓은 듯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오. (384∼385쪽)


간결과 장황

지나치게 간결한 표현도 숭고를 저해하오. 숭고는 너무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면 손상되기 때문이오. 이 말은 적절한 압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작은 조각들로 절단하는 것을 의미하오. 절단은 의미를 저해하지만 간결은 곧장 핵심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오. 반대로 장황한 표현은 때 아니게 늘이는 까닭에 생기가 없소. (386쪽)


여담 : 문학 쇠퇴의 여러 가지 원인

······ 호메로스의 말처럼, "예속의 날은 미덕의 반을 앗아가버리기 때문이오. 그래서" 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퓌그마이오이 족 또는 난쟁이족을 가두어두는 새장들이 그 안에 갇힌 자들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사슬들로 그들을 불구자로 만들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예속도 설사 그것이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영혼의 새장과 공동의 감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답했소.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의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393∼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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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4-01-10 17:58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2. 참을 수 없는 글읽기의 '가려움'
    from Value Investing 2014-01-13 14:51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면 그 원인은 필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글 속에 자체적으로 '가려움'이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 '가려움'을 느꼈거나.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가려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옳을까. 이런 선택이 특히 어려운 경우는 그 '가려움'을 어떤 강도로 긁든지 관계없이 긁는 대상이
  3. 모방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4-02-01 00:16 
    (밑줄긋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견한 구절들 모방한다는 것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37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
 
 
함께살기 2014-01-10 19:07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생각하고 돌아볼 이야기가 많이 있네요.
이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으면서
아름다운 새 이야기를 환하게 빚을 수 있겠지요.

oren 2014-01-10 19:36   URL
아주 오래 전에 쓰여진 옛날 책이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어서 더욱 놀라운 책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득 담긴 옛 시인이 쓴 책들을 읽어볼 생각을 하니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 들려달라고 조를 때의 심정을 새삼 알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1. 드디어 네팔이다.
2. 히말라야로 들어서다.
3. 트레킹 첫날, 발걸음도 가볍다.
4. 둘째날, 랑탕계곡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5. 랑탕빌리지에서 체르코리까지
6. 캉진 곰파에서 라마호텔로
7. 샤브루베시를 거쳐 다시 카트만두로
8. '여행자의 천국' 포카라를 가다
9. 포카라의 '낮술'에 모두가 쓰러질 뻔.
10. 다시 카트만두로, 스와얌부나트와 왕궁을 둘러보다
11. 타멜에서 아침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주석 달린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강주헌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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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 *


(『주석달린 월든』 31쪽)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필요가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들과 함께 걷는 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던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문명'에서 오롯이 벗어난 그곳 히말라야와는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겨졌다.

히말라야로 떠나는 준비물 가운데 '몇 권의 책'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일찍 산행을 끝내고 롯지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별 보는 일'과 '책 읽는 일' 말고는 별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 능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진 '시대의 반항아' 알버트 머메리가 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비롯해 소로우의 책도 세 권씩이나 챙겼다.(2년 전에 실크로드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걷는다 1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네 권을 들고 갔다가 깔끔하게 다 읽고 돌아온 기억도 그런 '무모한 욕심'에 보탬이 되었다. 사실 올리비에의 책은 걷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지만 나는 정작 '날아다니며' 거의 다 읽었던 듯싶다. 인천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오가는 비행시간이 제법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경 속에 잠겨 '시대의 반항아'이자 '참된 등산가'였던 머메리의 책과 '문명의 반항아'이자 '참된 철학자의 삶'을 살았던 소로우의 책을 읽는 재미는 얼마나 짜릿할까. 기대가 무척 컸었다. 실제로 네팔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를 벗어나 히말라야에 접어든 첫날 밤에는 (다음날부터 만나게 될 히말라야의 눈덮힌 산봉우리들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머메리의 책을 두세 시간쯤 읽다가 잠들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책을 펼치는 일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내 얘기를 히말라야의 여러날 밤 속으로 더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서 빨리 소로우에 대한 얘기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올해 봄에 사들였던 소로우의 책은 나와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던 목사님(네팔 카트만두에 거주)께서 '여긴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으니 다 읽은 책들은 좀 남겨두고 가라'는 부탁까지도 애써 외면한 채 고스란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나는 그때 무사히 되돌아온 그 책들을 다행히 요 몇 달 동안 거의 다 읽었다.

엊그제 마침내 제법 두툼한-그리고 주석도 제법 많이 달린-『소로우의 강』(원제는『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다 읽고 나니 이제야『주석달린 월든』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움마저 생겨났다. (이 책은 진작에 사 두고 가끔씩 드문드문 펼쳐보기만 했다. 왠지 소로우의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만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다시 펼치는『월든』이지만 빼곡하게 '주석이 달린' 이 책은 역시나 처음에 읽었던 그냥『월든』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월든』에 왜 이토록 방대한 주석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월든』에 필요한 주석을 쓰느라 오랜 시간을 바쳤던 제프리 S. 크래머는 말한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라고. 그래서 '이 책은 신화처럼 읽힌다.'라고. 나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싶다.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월든』을 한번 읽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물론 늦지 않다. 영웅을 그린 신화는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소로우 스스로 이 책 속의 한 장인 「독서」에서 그 방법을 미리 밝혀 놓았다.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처럼' 여기고 있다. 『월든』은 어느덧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격상된지 얼마쯤 지났고, 어떤 독자들에게는 신화처럼 읽혀야 하는 책으로 바뀌었다.『주석달린 월든』은 괜히 나온 책이 결코 아니었다.

이 책 속에 담긴 주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두 번씩이나 두드린 내 계산기는 정확하게 1,640개라고 두 번 말한다. 놀라운 숫자이고 이렇게 주석이 많이 달린 책은 여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내게는 더욱 놀라운 책이다.

소로우 형제와 함께 '일주일 동안'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으로 보트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콩코드의 숲속으로 되돌아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놓인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소로우가 말하는 대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아 가면서 들어야겠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이 없었더라면 새까맣게 놓치고 말았을 얘기들이 과연 얼마나 많을지 몹시 궁금하다.



(『주석달린 월든』 52쪽)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85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88
(52쪽)


주석

85. ['시간의 홈'은 'the nick of time'을 번역한 것이다-옮긴이] 이 표현은 16세기에 'in the nick'으로 처음 사용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nick'이라는 단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나 막대에 새겨진 눈금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면 그는 용케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들어간 것이며 따라서 '시간의 홈'에, 즉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것이 된다.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88.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라toe the line'는 선원들에게 갑판 점호 시간에 두 판재를 이은 자리에 발끝을 대고 서라는 지시였다. 그래야 열이 반듯하게 정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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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쓴  제프리 S. 크래머의 머리말 가운데 소로우가 쓴 편지에 실린 '등산에 대한 숙제'도 무척 흥미롭다.)

                                               머리말

"『월든』출간."  『월든』이 출간된 1854년 8월 9일, 소로가 일기에 쓴 내용의 전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이주한 후 9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쓴 후에 맺은 결실이었다.

(중략)

월든 호수로 이주한 날의 일기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7월 5일 토요일. 월든-어제 이곳에 살려고 왔다."

(중략)


소로는 일기에서 언급하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되풀이했듯이, 자서전이 전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나이겠는가?" 라고 묻고, 『월든』을 출간한 후인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월든』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서전이 아니라, 소로가 자신이 만들어간 신화적인 삶에 예술적인 완전함을 더하기 위해 자유롭게 써내려간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소로가 쓰고 있던 것은 분명히 신화였다. 『월든』을 의도된 방향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읽는 독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소로는「독서」에서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월든』을 월든 호숫가에 잠시 살았던 사람의 기록으로 생각해서 자서전으로 읽는다면, 소로가 에머슨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어머니와 누이들이 빨래를 대신 해주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쓸데없이 트집 잡는 사람들의 주장에 귀가 솔깃해질 수 있다.

소로는 「독서」에서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도와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소로는 먼 옛날의 책, 동서양의 정신적인 고전에 대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소로는 지금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책에 대해 쓴 것이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중략)

소로가 경험에서 진실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1857년 11월 16일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네에게 숙제 하나를 내겠네. 산을 오르는 게 궁극적으로 자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고 빠짐없이 적어보게. 그렇게 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자네 경험의 중요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만족할 때까지 고쳐 써보게. 인간은 앞으로도 산에 올라야 할 테니 자네가 산에 올랐던 이유를 먼저 자네 자신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게. 처음 열두 번 정도를 시도해서 정확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끈기 있게 반복해보게. 특히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에 자네가 문제의 핵심이나 정점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도전해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자네 자신에게 설명해보게. 이야기가 꼭 길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네. 산에 오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자네가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에서 무얼 보았는지 묻고 싶군. 자네도 알겠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입증되는 걸세. 산 정상에 올라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네.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오르지 않으니까. 대신 점심 같은 걸, 여하튼 집에서처럼 푸짐하게 먹네. 어쩌면 집에 돌아온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네. 산이 뭐라고 말하던가? 산이 무엇을 하던가?


『월든』을 읽는 독자에게도 똑같은 충고가 주어질 터다. 『월든』을 읽는 데는, 즉 산을 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월든』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은 시대마다, 또 개인에게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산에 오르고 월든 호수로 되돌아가며 『월든』을 다시 읽는다. 『월든』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설득력 있게 와 닿는 글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스승의 우화처럼 보편성을 띤다는 증거이며, 우화를 만드는 선각자이자 시인이었던 소로에게 보내는 찬사다.

 - 제프리 S. 크래머(주석을 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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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0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0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3-12-10 01:34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는 그 소식만 듣고, 그 이후 '간다, 온다' 소식을 듣지 못한 어느 알라디너 분께서, 그 먼 데까지 '링크'를 걸어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해주신 덕분에, '먼댓글'이 제법 '멀리까지' 내려간 점을 부디 양해해 주세요~

함께살기 2013-12-10 05:57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시골이웃이리라 하고 생각해요.
어느 책으로 돌아보더라도
호미와 연필을 손에 쥐고 즐겁게 삶을 지은
시골이웃.

이러한 시골이웃, 영웅 아닌 시골이웃이 차츰차츰 늘어날 때에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이 감돌 수 있으리라 느껴요.

oren 2013-12-10 09:50   URL
비록 콩코드에 사는 이웃 사람들 대부분은 소로우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소로우 또한 지역 잡지에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마다 이웃 주민들이 '재미없어 할까봐' 고민했던 흔적도 여러차례 드러냈지만, 그런 점들은 소로우에게 결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지요. 그는 시골 이웃 사람들로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던 '전혀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지요.
* * *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월든』중에서

oren 2013-12-10 10:20   URL
저는 월든을 처음 읽을 때 소로우에게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제 생각을 적어둔 게 있는데,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아직도 가끔씩 그때 떠올렸던 시골 할아버지 생각이 난답니다. 그분은 손수 호미를 들고 밭을 가꾸시기 보다는 주로 꿀벌을 키우셨지만요.

* * *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P189)

(나의 생각)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집성촌이었던 때문에 그 할아버지도 집안 어른이셨는데, 학문의 깊이로는 이웃 수십킬로 이내에서는 따라올 만한 분이 없다고 할 정도였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라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지만 사서삼경에 통달하셨고,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대한 깊이가 대단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할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우리 마을에서 2∼3km쯤 떨어진 강 건너 산 아래에 홀로 사셨다. 머리도 백발이셨고 콧수염과 턱수염도 백발이셨기 때문에 어떨 땐 산신령을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우리가 가끔씩 강을 건너 산으로 땔깜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한 겨울에 토끼나 꿩을 잡으로 다닐 때나, 농삿일을 도우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그 할아버지는 언제나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늘 '혼자 산 밑에 사시면 깜깜한 밤이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분의 삶 또한 소로우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늘 옛 성현들과 만나고 또 그 분들과 대화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 데 평생을 보냈던 것 같다.

마녀고양이 2013-12-10 11:41   댓글달기 | URL
이유를 모르겠으나,
오늘 제 어깨에 지나치가 힘이 들어가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잠시 힘을 빼봅니다. 하아.......
한때 소로우를 정말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실은 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와 맞물려 있음을 깨달으면서
소로우처럼 순수하게 그 자연 속에서 사는 목적이 아니었구나 싶더군요. 언젠가
저도 소로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여행 궁금합니다. 곧 올려주실거죠? ^^
다시 보니 먼댓글에 다 있었군요.... 와아,

oren 2013-12-10 13:47   URL
소로우는 월든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일기에서 "삶! 삶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을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썼을 정도로 '삶 자체를 모험 속에 내던진' 사람이었죠.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일 때였으므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누구나 한때 집을 떠나 홀로 살고 싶은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래저래 여러 '삶의 굴레' 속으로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더욱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지도 모르구요.

히말라야에 다녀온지 겨우 일곱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겐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네요. ㅎㅎ

팜므느와르 2013-12-11 10:57   댓글달기 | URL
주석달린 월든, 보관함에 담았어요.
제가 이해하든 못하든 오렌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책은 관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지요.
소로우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살지도 못해요.
다만 소로우 내면의 행적과 그 삶을 존중하고 알고 싶습니다.

논술 교재로 주석 없는 월든 읽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렌님 안내를 보니 다시 읽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oren 2013-12-11 15:38   URL
『주석달린 월든』을 찬찬히 읽어 보니 한 권의 책 속에 무수히 많은 신화와 전설, 역사와 문화, 경제와 철학, 자연과 과학, 소설과 시를 비롯한 문학 등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삶'에 대한 거의 모든 부분이 빼곡히 들어차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불쑥 내던지는 원대한 생각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에 구름에서 번갯불을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소로우 님이 스스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만큼 지혜롭지 못한 걸 항상 한탄한다'면서 무려 9년 동안이나 묵히고 다듬어 쓴 글이니, 팜므님이 다시 읽어보시면 틀림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이 많으리라 믿어요.

함께살기 2013-12-14 06:01   댓글달기 | URL
이육사 위인전을 읽으니,
이육사 님도, 이녁 형제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집안이 넉넉한 살림이었어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학문도 함께 하면서 지내셨더라고요.

oren 2013-12-14 12:15   URL
아하.. 이육사 님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시를 쓴 시인이었군요. 『소로우의 강』에서 소로우 님이 글을 잘 쓰려면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고 했던 깊은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 * *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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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들려주는 '우정'은 자연을 쏙 빼닮았다. 담백하면서 거짓없이 해맑고 순수하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면서 이슬처럼 영롱하다. 바람처럼 부드럽고 강물처럼 꾸준히 흐르며 호수처럼 깊게 잠긴다. 마침내 대양에 이르러 대륙을 이어주는 드넓은 길을 안내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하게 일렁이는 성난 물결과, 비바람과 함께 일어나는 드높은 파도와도 맞서 싸우며, 야자수가 자라는 섬을 찾아 기나긴 항해를 오랫동안 함께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뛰어난 것들은 희귀한 만큼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우정'에도 역시 예외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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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우리는 벗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나서도, 슬기롭고 다정한 말보다는 자신에게 기억나는 쌀쌀한 낯빛이나 생각 없이 한 행동을 거듭거듭 되새겨보곤 한다. 한참 지난 후에 어떤 친절을 깨달으면서, 벗이 대단히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기에 하늘의 바람처럼 주의를 끌지 못한 채 지나갈 적이 있었음을,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하지 않고 우리가 되기 바라는 모습으로 대할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잊혀진 것도 아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닌 고귀한 무언의 행동이 그저 우리에게로 온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차가운 마음에 어떻게 그런 것이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서 몸을 떨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싶은 마음에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너무 때 늦은 시간에 말이다.(339쪽)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좋은 벗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개개인을 이야깃거리로 삼게 되면 으레 메마르고 하찮은 사실이나 이야기하게 된다.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우주가 파산한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헐뜯기로 기울기 쉽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야기의 테두리는 더욱더 좁아진다. 새로운 벗과 사귀게 되면 오래된 벗은 불친절하게 대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가정주부는 말한다. 나는 평생 도자기를 새로 장만한 적은 없으나 낡은 도자기를 보면 깨트리게 된다고. 나는 차라리 숲의 나무와 버섯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용히 혼자서 여유를 갖고 벗을 기억하게 될 때가 있다.(340쪽)

 

 

 

벗이란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누구에게나 우정은 지나고 나면 덧없는 것으로, 지난 여름철에 먼 하늘을 밝히던 번개처럼 희미하게 생각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우정은 아름답지만 휙 지나고 마는 여름철의 구름과 같다. 하지만 가뭄이 오래 가더라도 대기 중에는 늘 수증기가 남아 있는 법이고, 봄 소나기까지 있지 않은가. 그 흔적은 정년 사라지지 않기에, 그것이 이따금 우리 주위를 감돈다. 해와 달처럼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법칙이 있어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에 식물이 자라나듯 수많은 모습으로 움터온다. 그 본질을 경험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날에 반짝이는 양털구름처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각을 속이는 일 없이 마법에 의해서인 듯 조용히 몰려온다. 벗이란 뱃사람들을 교묘히 피해 태평양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그는 적도 근처에서 부는 강풍, 산호초와 같은 많은 위험과 맞서고 나서야 항구적인 무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세찬 비바람을 뚫고, 더욱이 대서양 성난 물결까지 헤치고 나가 금욕하는 사람이 틀어박힌 바닷가에까지 이르려 하겠는가?(343쪽)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우정만큼 사람들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도 없다. 사실 사람들은 우정을 가장 간절히 바란다고 믿는다. 누구나 우정을 꿈꾸기에, 날마다 무대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올려진다. 우정은 우주의 비밀이다. 당신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온 나라를 헤매도 우정에 대해 어떤 말도 듣지 못할 터이나, 우정에 대한 생각만은 어디에서나 왁자지껄하다. 낯선 남녀든, 오래 만나온 남녀든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정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문헌을 통틀어 내가 기억하는 이 주제를 다룬 에세이는 고작 두어 편에 불과하다.

우리가 신화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 셰익스피어, 스콧의 소설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 우리 스스로가 시인이자 우화작가이고,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드라마에서 한 역을 맡아 연기한다.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벗이란 우리가 벗하기로 언약한 이들과는 그저 먼 사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있는 그대로 우러나는 말 세 마디 이상을 벗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반갑네, 벗이여!" 라고 말할 채비를 갖추고서 만나나, 헤어지면서 나누는 인사라는 게 고작 "망할 놈"이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겁쟁이들은 참된 벗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 벗이여, 진정 네가 내 벗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네 벗이라는 게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정에 들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중요하지 않은 의무와 관계가 영원히 우위에 있다면, 아무리 친절한 성격이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우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지만 우리가 벗을 잊는 일이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벗으로 하여금 우리의 숭고한 목적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사실상 벗과 동행하게 된다. 우리는 상상으로 그려온 벗의 사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정작 벗으로부터 얼마나 자주 등을 돌리게 되는가. 내가 어떤 사람의 벗이 될 만한 값어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347∼348쪽)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벗이라고 말하더라도 대개는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정이 주는 우연하면서도 자그마한 이득, 예컨대 벗이 재산이나 영향력이나 조언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그런 이득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벗과의 관계에서 이런 이득을 내다보는 사람은 실제 이득은 보지 못하거나, 이 관계 자체에 전혀 경험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런 기여는 우정 자체의 지속적이면서 포괄적인 기여에 비하면 하찮고 비천한 것이다. 우정은 서로 화합하고, 신의를 다하고, 실제 친절을 베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벗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이웃들도 충분히 친절하다-우리의 영혼의 일이라 할 그런 일을 맡아 하길 바란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든, 그것만으로도 넉넉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리석게도 어떤 사람을 또 다른 사람과 혼동하곤 한다. 아둔한 이는 인종이나 국적, 기껏 잘해야 계급이나 식별하지만 슬기로운 이는 개개인을 식별한다. 한 사람의 독특한 성격은 갖가지 특징과 행동으로 벗에게 나타나므로, 그의 성격이 벗에게 드러나 고쳐지게 된다.

인간의 교육에서 우정이 지닌 중요성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면서 가릴 줄 아는 이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정이 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어 주고,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성자로도 만들어준다. 우정은 공정함으로 공정함을, 관대함으로 관대함을, 참됨으로 참됨을 대하며, 인간됨으로 인간됨을 대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갖가지 미덕 가운데 사랑이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온갖 미덕을 하나로 줄여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349∼350쪽)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만나지만, 고귀한 재능을 쓰지 않고 버려두어 녹이 슬고 있다. 아무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귀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가 이웃 사람에게 참으로 성실하고 고귀하게 대할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하더라도, 그는 귀가 먹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바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천하고 불성실하고 이기적인 "그런 나 그대로" 대접해주면 만족한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대접하고 대접받으면 만족한다. 진실하고 고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도, 그런 관계를 맺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른바 좋은 이웃과 친지가 있을 터이고, 이런 태도로만 서로를 대하는 좋은 일벗, 아내, 부모, 형제, 누이, 자식까지 있을 터이다. 이런 형편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에 정당함이 필요치 않고, 불량배의 짓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변변찮은 일들만 하면서도 대단히 잘되어간다고 생각하며, 이웃과 가족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정마저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불량배끼리 중시하는 체면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그와 맺은 관계가 참되기에 그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그로부터 최선의 것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둘 사이에는 따뜻한 진실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참되다는 확신을 갖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고, 기적이 되며, 높은 뜻을 좇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사귈 때는 애정에서 굴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사귐은 세속의 삶을 넘어서서 천당의 삶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예언서에서는 배우지 못한다. 어느 신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고프스타운의 그저 그런 하루 한가운데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속된 눈에는 우주에 먼지 한 알이 내려앉을 때, 구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아름답고, 신선하고, 영원한 신계계를 찾아내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달리 해서는 이 세계가 다다르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하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말보다 기억할 만한 소중한 말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들이 계속해서 널리 퍼졌음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그런 말들은 무척 드물지만, 음악의 곡조처럼 조바꿈되면서 끊임없이 기억에 되새겨진다. 그렇지 않은 말들은 사랑을 꾸며놓은 벽토와 더불어 모조리 부서져 내린다. 우리는 감히 그런 말들을 큰소리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늘 들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350∼351쪽)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우정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뛰어난 미덕에 있다."지만, 우리는 벗을 전혀 칭찬할 수 없고, 칭찬받을 만하다고 여길 수도 없으며, 그가 어떤 행위를 통해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넉넉히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다른 경우에는 훌륭하다고 칭찬받는 이런 친절이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벗에게는 그의 본성에 필요치 않은 선의나 상냥함과 같은 무례를 행해서는 안 된다. (353쪽)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남녀끼리는 어떤 체질상의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게 마련이고, 대개의 경우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게 된다. 남성이 자신과 관련된 일들로 여성의 주의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가 얼마나 쉬운가. 남녀가 대등한 문화에서는 우연히 만난 남녀끼리라도 남성 대 남성에 견주어볼 때 더 나은 어떤 값어치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청렴함과 관대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존재하므로, 나는 남자라면 누구나 남성들의 모임보다는 지적인 여성들의 모임에 더 자신 있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가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남성을 찾아가면 방해가 되는 경우가 흔한 반면에, 남녀끼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남녀 사이의 우정은 동성인 두 사람 사이에서보다 드문 편일지 모른다. (354쪽)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공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 말라."고 말했다. 우정에 이로움이 있고 우정이 지속되는 까닭은, 양 당사자의 실제 성격으로 미루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수준보다 높은 수준에서 우정이 맺어지기 때문이다. 우정의 빛줄기는 만나는 사람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그런 곡선을 그리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바탕은 정중함이다.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그와 더불어 무슨 일을 할 때보다는 내가 없을 때 그에게 더 고귀한 임무를 맡긴다. 그러면서 그가 더 고귀한 만남에 써야 할 시간을 내게 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벗이 값싸게 오래 얼굴을 익혔을 경우에나 허물이 덮어질 그런 버릇없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여전히 다정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이제까지 벗과 맺은 관계에서 가장 쓰라린 업신여김을 느꼈다. 당신의 벗이 당신의 나약함을 너그러이 대하는 법을 배워 결국 사랑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벗을 꽤나 허물없이 대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욕되게 할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럴 때는 차라리 종교적 고독과 침묵으로 물러남으로써 고결하게 사귈 마음을 갖추는 편이 낫다. 벗과의 사귐에서 침묵은 아주 향기로운 밤으로, 그 안에서 진심이 되돌아오고,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355쪽)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서로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벗이기를 바라서 나를 알고 싶어 하는가? 게다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각별한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말이다.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가장 순수한 상상력과 희귀한 믿음의 발현이다. 우정은 감동을 주는 무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만큼, 심지어 네가 믿는 그대로 너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나는 네게 진실을, 즉 나의 모든 부를 바칠 것이다" 라고. 그리고 벗은 말없이 자신의 본성과 삶으로 그 행동을 받아들이면서, 마찬가지의 거룩한 정중함으로 나를 대한다. 나의 벗은 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남김없이 잘 안다. 그는 사랑의 증표를 바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관계의 특징으로 사랑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다. 그가 찾아올 때 지나치게 그의 체면을 살펴줄 필요는 없다. 내가 오라고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는 말아다오. 하지만 내게로 올 때는 내가 당신을 기꺼이 맞이하는지 살펴다오. 찾아와 달라고 하면 그 때문에 당신이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벗이 있는 곳에는 갖가지 부와 마음을 끄는 물건이 있고,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걸림돌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없게 해다오. 우리의 사귐이 우리보다 온전히 높은 곳에 있어 우리를 그리로 끌어올리게 해다오.(356쪽)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은 언어 위에 있는 지성이다. 사람들은 벗과는 혀가 풀릴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머뭇거리지 않고 다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우정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서로를 아는 데 불과한 사이라면 서로 오갈 때마다 미리 준비된 말이 있지만, 호흡이 바로 생각이자 뜻인 벗이 변변찮은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여행을 떠나는 벗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그와 악수 나누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외적인 표현을 알고 있는가? 그를 위해 어떤 수다를 준비해 놓았단 말인가? 어떤 아첨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것인가? 그를 통해 특별히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도 가끔 깜빡 잊을 적이 있다는 듯,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어떤 말을 그에게 할 터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손을 잡고 '안녕' 하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자주 잊어먹고 하지 못하던 인사로 충분하다. 이 점에서는 관습이 우위에 있다.

그가 가야 한다면, 오랫동안 그가 우물쭈물하며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가야 한다면, 빨리 보내줘라. 아직 하지 못한 어떤 마지막 말이라도 남아 있단 말인가. 아, 슬프도다. 그 마지막 말은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온 말 중의 말인데도, 아직 그 첫 낱말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조차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이 딸린 개인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부를 수 있고, 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 자리에서는 연인 사이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바탕이 싸늘하고 무관심한 관계에 대해 미뤄두는 까닭은 마음이 맞고 사이가 좋은 관계에 길을 터주기 위해서이다(356∼357쪽)

 

 

 

우정은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과 같다.

사랑의 폭력은 증오의 그것만큼이나 무섭다. 사랑이 계속 이어지려면 조용하고 한결같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사랑의 고통조차 사랑이 쇠퇴하면서 시작되는데, 누구나 기꺼이 연인이길 바랄지라도 실제 사랑하는 사이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쉽게 애욕에 빠지는 값싼 사랑 없이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우정을 나누기에 걸맞다는 한 증거이다. 참된 우정은 부드러우면서 슬기롭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사랑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 어떤 다른 법칙이나 친절도 알지 못한다. 참된 우정은 미칠 만큼 엄청나지는 않더라도, 그 이후로부터 확립될 어떤 것을 나타내기에, 그것이 낡아지더라도 견딜 터이다. 이것이 더 참된 진실이고, 더 낫고 올바른 소식이다. 어느 때건 이런 일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바로 이것이 여름과 겨울이 갈리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이다.

벗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벗끼리는 수수한 바닥에서 만난다. 즉 자연의 소박한 법칙을 따르면서 양탄자나 방석이 아니라 땅이나 바위에 앉는다. 그들은 소리치지 않고 만나고, 떠들썩한 슬픔 없이 헤어진다. 우정에는 전사戰士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런 특성이 들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성문을 여는 것에 못지않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동정이나 상호 위안이 아닌, 열망과 노력의 영웅적인 공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357∼358쪽)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친절하지 않다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즉 인간의 혈기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의 성취, 기독교적 의무와 박애 같은 것들은 가볍게 여기는 반면, 전기처럼 공기를 깨끗하게 만든다. 고결한 천성에 도달하는 깨끗하고 참된 관계를 맺었음에도 호된 비극마저 생길지 모른다. 우정은 본디 자유롭고, 책임이 없으며, 아무 값없이 온갖 미덕을 실천하는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사귐이다. 그것은 높은 경지의 공감이 아니라, 아직도 가끔씩 지켜지는 어떤 순수하고 고결한 사귐이다. 즉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짤막하면서 거룩한 사귐으로, 그 자체를 기억하면서 인류의 비천한 권리와 의무를 업신여기길 머뭇거리지 않는다.

우정은 티 없이 거룩한 특성들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정중함과 먼 앞날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선하기만 하고 아름답지는 않은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자연은 열매 맺히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먼저 꽃을 피우지, 열매 맺힌 뒤에 그저 꽃받침만 자라게 하지는 않는다. 벗이 어떤 새로운 신약新約의 가르침에 따라 개종해서는 자신의 이교와 미신에서 벗어날 때, 그가 자신의 신화를 잊고 기독교인처럼 친구를 대하거나 대하려 할 때, 우정은 우정이길 그치고 자선이 되고 만다. (359∼360쪽)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이가 더 사랑받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그 아닌 다른 이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정은 숫자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벗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벗을 세지는 않는다.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관계로 들어올수록-그들이 진정으로 들어온다면 말이다-그들을 한데 묶는 사랑의 질은 더욱더 귀하고 거룩해진다. 나는 둘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셋 사이에서도 개인적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벗을 그지없이 많이 둘 수는 없다. 인생의 갖가지 관계에 보다 알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정하는 미덕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속된 우정은 남을 물리치면서 좁아지려 하지만 고귀한 우정은 남을 물리치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흘러넘치고 흩어지는 사랑이 사회를 향기롭게 하고, 다른 나라의 아픔을 위로한다. 우정은 개개인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은 공적인 일이자 이득으로, 참된 벗은 한 가족의 가장 이상으로 나라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360∼361쪽)

 

 

 

가장 좋은 사이는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우정에서 단 한 가지 위험은 언젠가는 끝이 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정은 토박이식물인데도 무척 민감하다. 자신의 자아마저도 잘 깨닫지 못하는 그런 조그마한 비열함에도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흠집이 벗에게서 드러나는 그런 흠집을 끌어당긴다는 점을 벗에게 일러줘라. 의심하게 되면 그 의심이 사실로 드러난다는 변치 않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좁고 치우친 소견에서 벗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벗이여, 나는 네가 이런저런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라고. 길이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너그럽고, 고르고, 슬기롭고, 귀하고, 꿋꿋한 기운이 늘 흘러넘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벗들로부터 자신의 좋은 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불평하는 말을 듣곤 한다. 실제로 내가 그런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다. 그들은 좋은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공식적으로 감사 표시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말과 행동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빈틈없이 값어치가 매겨졌다. 어쩌면 당신의 침묵이 가장 섬세한 인정일지 모른다. 인간이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있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 훨씬 좋다. 우리는 참으로 숭고한 전갈을 들으면 그 순간 오로지 침묵으로 귀를 기울인다. 가장 좋은 사이는 그저 침묵을 지키는 사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게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서로 얼굴조차 모를 수도 있다. 사람끼리의 사귐에서 비극은 말을 오해했을 때가 아니라,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도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그런 사랑은 저주나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침묵이 벗의 침묵보다 늘 뜻이 깊다고 생각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부류의 벗인가? 얼마나 미련하고, 방정맞고, 당치 않기에 침해한 쪽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듯 그렇게 행동하는가! 자신의 벗이 언제나 같은 까닭에서 불평을 말하지는 않는가? 벗들이 이따금 내게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무엇을 듣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말한 그들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자주 실망시키곤 한다. 나는 벗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가 기대하는 사람, 즉 귀가 달린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들은 당신더러 차갑다고 불평할 것이다. 야자열매를 까뒤집으려는 오 그대들이여, 내가 다음번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대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겠다. 어찌 보면 참된 관계란 말과 행동인데도, 그들은 이런저런 말과 이런저런 행동을 해주길 바란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느낌을 털어놓기 꺼려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애정의 증거를 달라고 조르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361∼362쪽)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나는 내 천성에 걸맞으면서 내게 동등한 대우를 바라는 벗과 동행하길 바란다. 그러한 벗은 늘 치우침 없이 너그러울 것이다. 이보다 못한 어떤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행위이고, 좋은 관계들을 타락시킨다. 나는 내 성취보다는 내 포부를 사랑하고 높이 쳐주는 사람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믿는다.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정녕 나는 당신과 동행함으로써 더욱더 나아질 것이다. (364쪽)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당신이 실제로 벗을 잘 알지 못하면,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가 생길 때 질 낮고 변변찮은 기여 말고는 벗을 도울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어떤 사람과 사회적, 영적 이유로, 무척 가깝게 지내는데, 그는 내게 어떤 실무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에서 그가 내게 도움을 구할 경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기에 그 문제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내 능력을 쓰지 않고 나의 일손만을 쓴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서 판단력이 아주 뛰어나면서 자신의 재능이 모자랄 때는 다른 이의 재능을 쓸 줄 알며, 언제 상대를 보살피지 않고 내버려둬도 좋은지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 모든 품꾼이 이야기하듯, 그의 일을 해주게 되면 좀체 없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와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면 대단히 큰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무척 다정하고 높은 사귐을 갖고 난 후에,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벗이 당신을 망치처럼 사용하여 당신 머리로 못을 박아 넣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의 좋은 벗일 뿐 아니라, 꽤나 유능한 목수여서 그를 도와 즐겁게 망치질을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366쪽)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를 벗함은 자신의 미덕을 벗함과 같다. 우정에는 이 밖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벗이 자신의 악덕과도 사귀길 바란다. 내 벗 중에는 내가 그릇된 줄 뻔히 아는데도 옳다고 해주길 바라는 벗이 한 사람 있다. 하지만 우정이 내게서 눈을 앗아가고 낮을 어두워지게 한다면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겠다.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참된 우정은 참된 슬기를 가져다준다. 우정은 어두움과 어리석음에 기대지 않는다. 분별력의 결여가 우정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벗의 미덕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벗의 흠집 또한 그만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벗을 미워할 건전한 권리가 있다. 흠집은 그것과 통하는 미덕으로 기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흠집은 흠집이고, 실제보다 여러모로 두드러지게 보일지라도 흠집이기에 구실을 붙일 나위가 없다. 나는 비판을 참아내고 아첨에 우쭐하지 않으며, 재판관을 꾀어 제 편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보다 진리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367쪽)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두 여행자가 사이좋게 길을 가려면 둘 다 비슷한 정도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동행하는 길이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장님과도 유익하고 즐겁게 길을 갈 수 있다. 그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이 경치를 이야기할 때 자신은 장님이지만 당신은 볼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당신 또한 그가 시력을 잃었지만 청각은 더 뛰어날지 모른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오랫동안 동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장님과 시력이 좋은 사람이 함께 걷다가 벼랑 끝에 이르렀다. 시력이 좋은 사람이 "조심하게나, 여기는 가파른 절벽이니 이리로는 갈 수가 없네"라고 말하자, 그 장님은 "내가 더 잘 아네"라고 말하면서 발을 내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더없이 참다운 친구 사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말할 수는 없다. 불평하느니 차라리 영원히 작별을 고하는 편이 낫다. 불평은 너무나도 근거가 확실하여 입 밖에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한쪽이 상대의 흠집을 심각하게 지적하면 그 지적이 신랄할수록 서로의 오해는 더욱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설사 온전히 우정을 맺는 데 방해가 될지라도 늘 존재하는 기질상의 차이는 영원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다. 자신의 행위 전체로 타이르고 격려해야 한다. 사랑 말고는 어떤 것도 둘을 화해시길 수 없다. 설명해야 하고 적처럼 흥정하게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누가 벗에게 용서를 빌겠는가? 벗끼리의 사죄는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사라지고 마는 이슬이나 서리와 같다. 사람은 누구나 진심으로 인정을 베풀어야 함을 알고 있다. 설명의 필요성에 대해 한 마디만 더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죄가 씻기겠는가 말이다.

참된 사랑이라면 하찮은 일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익히 아는 잘못은 쉽게 풀려 나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겉으로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결코 얕볼 수 없는 심각하고 오래가는 까닭들이 있다. 그런 까닭이 있다면 무지개가 아무리 아름답고 비가 갠다는 틀림없는 조짐이라 해도 맑은 날씨를 영원히 약속하지 못하고 잠깐에 그치고 말듯, 눈물에 쉼 없이 금박을 입히는 애정의 빛에도 다툼은 여전히 되풀이된다. 내가 잘 아는 두어 쌍이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데, 한순간의 하찮은 문제 말고는 충고가 이로운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쪽은 상대가 모르는 것을 잘 알지 모르나, 아무리 친절하게 일러주더라도 그 충고가 보람을 거두지는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물리쳐야 한다.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그는 어떤 광산 장비로도 다룰 수 없는 광물질과 같다. 벌거벗은 야만인은 관솔로 떡갈나무를 넘어뜨리고, 손도끼를 바위에 문질러 바위를 닳게 한다. 그러나 나는 벗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서든, 바뀌기를 바라서든 벗의 인격에서 조그마한 한 조각이라도 떼어낼 수 없다.

연인 사이라도 온전히 맑고 믿을 만한 사람은 결국 없음을 알게 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악령이 있어 길게 보면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동양학자가 말하듯, "선인善人끼리도 우정이 끊길 수 있으나, 그들의 원칙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연꽃줄기도 꺽이나, 그 안에 섬유질은 이어져 있듯."(367∼369쪽)

 

 

 

벗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사랑이 있는 어리석음과 서투름이 사랑이 없는 슬기와 재간보다 낫다. 어떤 경우에는 점잖고 치우치지 않으면서 위트와 재능이 있고, 재기가 번득이는 대화도 있으며, 선한 뜻까지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도 가장 거룩한 인간적 능력은 안타깝게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랑이 없는 삶은 타지 않는 해탄骸炭이나 재와 같다. 페르시아 대리석이나 설화석고에 못지않게 순수하고, 토스카나식 빌라처럼 우아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뒤지지 않는 웅장한 성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람을 청해놓고서 우유 섞인 포도주를 내놓지 않는다면, 기쁘게 맞아주는 고트족이나 반달족을 찾아가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벗은 나와는 다른 종족이나 가문이 아니라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나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벗의 본성도 저쪽에서 나를 더듬어 찾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는 내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비슈누 푸라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결한 우정을 맺기까지 통틀어 일곱 발짝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나는 그대와 더불어 살아왔다.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빵을 나누고, 같은 샘의 물을 마시고, 사시사철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같은 열기와 추위를 느끼고, 같은 과일을 즐겨 먹으며 기운을 되찾아왔다. 서로 바탕이 다른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369∼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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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살기 2013-12-07 08:12   댓글달기 | URL
너른 냇물을 타고 형과 둘이서 조용히 삶을 누리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 조곤조곤 떠올렸겠지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살가운 형제나 부모,
또는 사랑스러운 님과
숲속 냇물을 천천히 흐르며
숲노래 듣는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oren 2013-12-09 10:50   URL
저도 어릴 땐 우리 동네를 빙 둘러 흐르던 '강줄기'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꼬박 '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소로우의 강>을 읽으면서 어릴 적 그 시절들이 손에 잡힐듯이 떠올라,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이들이 어딘가엔 분명 살고 있으리라 저도 믿습니다.

pek0501 2013-12-07 18:43   댓글달기 | URL
우정도 지키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조건 사귄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우정이 지켜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위의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읽어야 할 듯해요. ^^

oren 2013-12-09 10:57   URL
'우정'에 대해 쓴 글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소로우 님의 '우정'에 대한 글은 정말 깊디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글이어서 정말 감동적이더라구요. 말을 너무 잘 하기로 소문난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쓴 '윤기나는' 글이나, 몽테뉴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우정에 대한 멋진 글'보다 소로우의 글이 제게는 훨씬 더 가슴깊이 다가오더라구요. 앞으로도 가끔씩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때, 이 글을 다시금 읽어볼 요량으로 '기나긴 내용'이지만 아낌없이 옮겨 적어 봤어요. ㅎㅎ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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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가장 슬기로운 보수주의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마누43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관습은 법률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즉 그때의 관습은 인간이 정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들의 관습인 것이다. 우리 뉴잉글랜드의 관습은 정한 날을 기릴 수 있다는 흠이 있다. 도덕이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어어져온 관습 말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양심이 보수주의자들의 우두머리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44 "너는 네게 맡겨진 일을 행하여라. 행함은 행함이 없는 것보다 낫다. 행함이 없이는 네 몸조차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45-"타고난 본바탕에서 맡겨진 의무는 설사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지니, 모든 일은 다 흠집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길이 연기에 싸여 있듯,"46-"전체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해서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놓아서는 안 된다."47-"오, 아르주나야, 일어나라, 싸우기를 결심하여라"48가 참으로 아끼는 친족들을 죽이기 두려워하여 싸움에 나서기 망설이는 전사에게 주는 하느님의 충고이다. 그것은 마음에 나타난 그대로의 우주를 아시아적 염원으로 간직하려는, 온 누리만큼 넓고 시간만큼 지칠 줄 모르는 장엄한 보수주의이다.

이 인도철학자들은 변치 않는 필연의 법칙들, 그리고 성향과 소질을 뜻하는 세 가지 구나49 곧 삼성三性과, 태어남과 그로 인해 얽힌 인연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들은 무한한 인식, 곧 브라흐마와의 영원한 합일을 간절히 원한다. 그런 만큼 그 사색은 높고도 넓지만, 인도 고원 너머로까지 모험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으신 이Unnamed'의 특성이기도 한 쾌활함, 자유로움, 부드러움, 다양함, 앞날의 가능성과 같은 일들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신의 풍성한 보답은 끝없이 단조로우면서 고된 일로 얻어내야 한다. 말하자면, 앞날에 대한 기약 없는 약속이라는 짐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의 보수주의는 효과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한 프랑스인 번역가는 중국과 인도 왕조들의 예스러움과 끝없이 이어짐, 그리고 입법자들의 슬기를 높이 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곳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영원한 법칙의 어떤 흔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도주의와 실천을 소중히 여기고, 넓게 볼 때 급진적이다. 저 동양의 현인들은 오래도록 신들의 시대를 살고 침묵 속에서 신비의 '옴Om'50을 토해내며, 자기 안에서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리 물러나고, 더 깊이 가라앉으면서 최고 실재Supreme Being의 본바탕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따라서 참으로 슬기로운데도 꽉 막혀 있어, 마침내 같은 아시아이기는 하나 먼 서쪽에서 브라흐마51에 빠지지 않고 브라흐마를 이 땅으로, 곧 인류에게로 끌어내린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으로부터 브라흐마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현대가 시작되었으니, 말하자면 하느님이 새롭게 몸을 입은 것이었다. 브라만52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인류의 형제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개혁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왕이다.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수많은 구절들은 자연스럽게 프로테스탄트의 입술로 옮아가고, 그것들이 가장 풍부하고 실천적인 교재들을 내놓는다. 그 안에는 순수한 공상이나 슬기로운 성찰은 없으되, 상식의 기틀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 가르침은 되비추지 않고, 단지 뉘우칠 따름이다. 그 안에는 시도 없고, 아름다움의 빛으로 바라본 것도 없으며, 도덕적 진실만이 그 목적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도덕관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두드러진 점이 순수한 도덕성이라면, 최고의 힌두경전에서 두드러진 점은 순수한 지성이다. 독자들이 참으로 높고, 순수하고, 드문 생각의 자리에까지 올라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직 『바가바드기타』뿐이다. 워렌 헤이스팅스53는 동인도회사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의 번역을 권하면서, 원전이 지닌 "개념과 추론과 표현의 숭고함은 어떤 문헌과도 견주기 어려운" 것임을 밝히고 나서, 인도 철학자들의 이 저술은 "영국 통치가 끝나고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도-한때 인도에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던 원천들이 말끔히 잊혀지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경전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책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보다는 얼마나 거룩한 주제를 다루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동양철학은 현대 서구철학이 다루는 주제들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주제들에 손쉽게 다가가므로, 이따금 동양철학이 이런 주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줄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동양철학만이 행동과 사색 양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니, 동양철학만이 사색을 올바로 본다. 서구철학자들은 사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헤이스팅스는 브라만이 받는 영적 훈련과 그들이 다다르는 놀라운 추상능력의 몇 가지 예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느껴지는 감각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놓는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써야 그런 능력에 다다르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서반구에서는 지극히 신중하다는 이들조차 지금 느껴지는 대상이나 지난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그렇게 주의를 한 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소리에도 그의 주의는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보다 앞선 이들이 모아놓은 지식의 곳간에 일정한 지식을 덧붙이면서 날마다 마음 모으는 명상을 했음을 알게 된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해도 전혀 엉뚱한 짐작만은 아닐 것입니다. 몸을 단련시키는 일이 그러하듯, 그들이 꾸준히 마음을 단련시킴에 따라 저마다 바라는 힘을 얻어냈을지 모르고, 그런 집단 연구를 통해 다른 나라의 학자들에게 익숙한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흐르고 뒤섞이는 길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에 거의 휘둘리지 않는 원천에서 비롯된다는 이점을 지녔으므로, 깊이 생각해야 하는 미묘한 내용일지라도 사실상 우리 자신의 가장 단순한 진리에 못지않게 진리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슈나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행위 속에서의 포기"를 가르쳤고, 그것이 대대로 전해지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요가가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구나, 오 아르주나여."
54 "모든 행위는 빠짐없이 슬기에 이르러서야 그 마루터기에 이른다"55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악인 중에서 가장 악독한 악인일지라도 슬기의 배에 의지하면 온갖 죄악을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56

"이 세상에 슬기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다."57

"슬기를 쓰는 일에 비기면 행동은 아득히 먼 밑자리에 있다."58

"성자59의 슬기는 거북이가 팔다리를 끌어들이듯, 제 감각기관을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슬기가 튼튼히 섰느니라."60

"어린아이들은 학식과 요가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진 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에만 올바로 서더라도 양쪽 열매를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61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기에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행동을 내버림으로써 온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도 한 순간이나마 행동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구나 타고난 성품에서 일어나는 충동으로 말미암아 아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행동의 감각기관을 억누르면서도 그 마음이 감각 대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무언가에 혼이 홀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을 떠나 결과야 어떻든 마음에 두지 말고 맡겨진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가 높이 떠받들어질 것이다."62

"네가 할 일은 행함에만 있지, 조금도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하는 까닭을 결과에다 두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행하지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63

"언제나 집착을 떠나 해야 할 일을 하는 이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다."64

"행위 속에서 무위를, 무위 속에서 행위를 보는 자가 인류 가운데 슬기롭다. 그는 모든 의무의 온전한 실행자이다."65

"모든 몫이 욕망과 탐욕을 떠났으며, 모든 행위가 슬기의 불로 태워져 버린 사람을 어진 이라 부른다. 행함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만족할 줄 알며,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아무리 행함 속에 있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66

"행함이 결과에 매이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탁발승이요, 요기이다. 그는 제사 불을 피우지도 않고 행함도 없는 사람과는 다르다."67

"희생을 바친 뒤에 남은 음식이 감로이니, 그 음식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흐마에 들어가느니라."68


결국 삶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몸소 하는 일들이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나는 이 메뚜기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내가 무엇을 했거나 하고자 작정한 일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어느 한순간의 생각, 비전, 꿈이다. 나는 하나의 참된 비전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부, 온갖 영웅들의 온갖 행위까지도 기꺼이 치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서 연필제조업자이고, 제정신인 내가 어떡하면 신들과 교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오든 나는 그를 받아준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내 길을 따르는 것이다."69라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신약성서에 비춰보면, 이런 가르침은 실제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현실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 적지 않다. 브라만은 용감하게 악을 무찌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단지 악을 끈기 있게 굶겨 죽이라고 말할 뿐이다. 카스트 관념,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시대라는 거칠고 사나운 정치가 움직임에 써야 할 그들의 힘을 굳어지게 했다. 크리슈나의 주장은 흠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주나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그의 판단은 "상키야샤스트라70가 깊이 생각해서 다다르는 신앙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직 슬기에서만 피난처를 구하"라지만, 서구 정신에서 슬기란 무엇인가? 크리슈나가 말하는 의무는 그에 타당한 이유가 빠져 있다. 그 의무는 언제 정해지는가? 브라만의 미덕은 옳은 일을 하는 데서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하는 데서 생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행함"이란 무엇인가? "맡겨진 의무"란 무엇인가? 다른 이의 종교보다 훨씬 좋은 "그 사람 자신의 종교"란 무엇인가? "그 사람 자신만의 특별한 소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카스트 제도의 옹호, "싸움터에서 달아나지 않고", "전투에 참여하는" 크샤트리아, 곧 전사의 의무와 같은 "자연스러운 의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옹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행함의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행함에 대해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보라. 동양은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서양은 행함으로만 가득 차 있다. 동양은 눈이 멀 때까지 해를 쳐다보고, 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부지런히 쫓아간다. 서양에도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들이 있으나, 동양보다는 훨씬 힘이 약하다. 그것이 이곳 서양에서의 보수주의이다. 너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고, 어떤 제도도 어기지 말고, 어떤 폭력도 행하지 말고, 어떤 차용증도 찢어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곧 국가가 너의 부모이다. 그 미덕과 인격은 전적으로 자식으로서의 미덕과 인격이다. 모든 나라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갈등, 말하자면 해를 끊임없이 바라보려는 자와 해 지는 쪽으로 서둘러 가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전자의 부류는 후자더러, 너희가 해 지는 곳까지 이르더라도 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후자는,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루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놓지 않았느냐고 대꾸한다. 전자에 따르면, "깨달은 성자牟尼는 모든 산 것들이 밤 시간에 쉬러 가는 때인 밤에만 걷고, 모든 산 것들이 깨어 있는 낮 시간에만 잠을 잔다."71

나는 다음과 같은 산자야72의 말을 빌려 여기에 끌어 쓴 글월 전체의 요약으로 삼겠다.


오 대왕이시여,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저는 더욱더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대왕이시여, 저 놀라운 하리 신
73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기쁨과 놀람이 점점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가 계신 곳, 훌륭한 궁술가이신 아르주나가 계신 곳, 그곳에서는 언제나 행운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고, 굳건한 다스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74



경전을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이 좋은 책을 원한다면, 나는『마하바라타』75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4천 년도 더 지난 시기에-4천 년 전이든 3천 년 전이든 그 시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비야사76가 썼다고도 하고, 아무아무개가 썼다고도 하는, 찰스 월킨스77가 옮긴 『바가바드기타』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한 경건한 민족의 거룩한 전승의 한 부분으로서, 양키들이라도 존경심을 갖고 읽어볼 값어치가 있으며, 지성을 갖춘 히브리인이라면 그 안에서 히브리 경전에 못지않은 장엄하고 웅대한 도덕을 발견하고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참으로 뛰어난 영국의 학자 겸 비평가에 속하는 이조차 세계의 명사들을 추려내면서 유럽 문화가 옹졸하게 치우친 독서를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럽 문화의 아들딸 중에서 페르시아와 인도의 시인과 철학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전문적인 시인과 사상가들보다는 상인으로서 아마추어 학자인 이들이 그 시인과 철학자들을 더 잘 알아보았다. 영국 시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이 주제를 다룬 기억할 만한 단 한 편의 시도 찾기 어렵다. 독일이 문헌을 뒤지는 노력을 통해 철학과 시의 큰 줄거리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괴테가 어느 정도 인도철학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으나, 괴테도 인도철학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만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의 재능도 사물을 가리고 따지는 분야에 더 얼맞은 실제적인 재능이고, 명상의 영역에서는 저 현인들의 재능에 미치지 못한다.

페르시아의 힘이 줄어들고 나서야 유럽 문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도 현대 유럽의 명사 목록에서 동양인의 이름은 고작해야 호머와 히브리인 몇 사람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인류의 가장 훌륭한 명사이자 현대 사상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질 만하고, 아직까지도 그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살아 있는 저 인도의 현인들은-그들의 명상이 인류의 지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들이 화가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꿈에서는 철학이 희미하게나마 독특한 진실을 지니고서 동양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는데도, 서구 세계에서는 그것의 자리매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철학자들과 견주어 이제껏 현대 유럽은 어떤 철학자도 낳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의 셰익스피어조차 『바가바드기타』처럼 드넓게 우주를 껴안는 철학에 대보면 청년의 미숙함이자 실천만 앞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자라투스트라의 갈데아 신탁78처럼 수많은 변혁기를 치르고 번역까지 거치면서 살아남은 이 장엄한 글월 중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그 시적 형식과 의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보람 있고 꾸준한 생각을 나타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학자들은 여전히 '빛은 동방으로부터Ex oriente lux'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서구 세계는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모든 빛을 아직까지 끌어오지 못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히브리와 같은 나라의 경전들과 거룩한 글월들을 모아 '인류의 경전'으로 펴내는 일이 이 시대에 당장 서둘러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신약성서는 너무 자주 사람들의 입술과 심장을 오르내리고 있어, 어떤 면에서 보면 경전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나란히 놓고 견주어보면,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멍에에서 풀려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인쇄기의 노력에 한껏 영광의 관을 씌워줄, 시간이 편집해야 할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이야말로 선교사들이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바이블, 다시 말해 책 중의 책이다.

(중략)

앞은 물론 뒤에까지 눈을 달고서 그 자체를 굽어보는 즐거운 지혜인 『비슈누사르마의 히토파데샤』80와 같은 아주 오래된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닮은 생각들을 만나면 늘 기분이 야릇해지면서 자극을 받게 된다. 이런 책들을 통해 후세가 겪는 일들도 건강하고, 홀로 설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건전함의 증거는 어느 한 책에만 따로 떼어놓을 수 없으니, 그것이 이따금 즐겁게 그 자체를 돌이켜보기 때문이다. 『히토파데샤』의 줄거리와 그 안에 든 우화들은 사막의 수많은 오아시스처럼 글월에서 글월로 뻗어나가지만, 무르죽81과 다르푸르82 사이를 지나는 낙타의 자취처럼 희미해진다. 그것은 무수히 밀려오는 현대 서적들에 대한 논평이기도 하다. 읽는 이가 징검돌에서 징검돌로 건너뛰듯 글월에서 글월로 건너뛰는 동안, 줄거리는 급히 흘러가서 잊혀지곤 한다.

이에 비해 『바가바드기타』는 시적이거나 간결한 면은 떨어질지 모르나, 줄거리가 훌륭하게 지탱되면서 발전한다. 그것은 병사나 상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만큼 건전하고 숭고하다. 위대한 시는 읽는 이가 성격이 조급하든 신중하든, 그 나름에 알맞은 비율로 그 뜻을 밝혀준다. 콸콸 흐르는 시내에서 여행자들은 목을 축이고 군인들은 수통에 물을 채우듯, 위대한 시는 실천적인 이에게는 상식일 터이고, 슬기로운 이에게는 지혜일 터이다.(195쪽)


주석
43. 힌두 신화에서 마누(Manu)는 절대존재이고, 대홍수 후 다시 인류를 번성시킨 인간의 시조이자 최초의 법 편찬자이다.
44. '거룩한 자의 노래'를 뜻하는 『바가바드기타』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의 일부를 이룬다. 두 형제 집안이 왕국을 놓고 싸움을 벌이기 직전, 그 한 집안의 셋째인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비슈누의 화신)가 깨우침을 베푸는 말씀이 주가 되어 있다.
45.『바가바드기타』3장 카르마요가 8절 참조.
46. 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48절 참조.
47. 3장 29절 참조.
48. 2장 삼캬요가 37절 참조. 삼캬는 학식이나 이론을 뜻한다.
49. 원문에는 goon: 오늘날은 구나(gunas)라고 표기한다(goon→gunas).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을 구성하는 성질을 말한다. 순수한 성질(善性), 사나운 성질(動性), 게으른 성질(暗性)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50. 영어로 aum이라고도 표기한다.ㅏ,ㅜ,ㅁ 세 음(音)이 합쳐져 우주의 틀을 이루는 체계를 총칭하고, 우주의 질대진리인 브라흐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51. 힌두교의 절대자는 브라흐마(거룩한 창조의 능력), 비슈누(유지의 신), 시바(파괴의 신)의 세 가지 인격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52. 인도의 승려 계급
53. Warren Hastings(1732∼1818): 1750년에 인도로 가서 1764∼1769년 사이의 귀국기간을 제외하고 20여 년을 인도 통치에 종사하고, 1773년 초대 벵골 총독이 되었다.
54. 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 2절 참조. 즈나나는 지식, 카르마는 행위, 산야사는 욕망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크리슈나는 『바가바드기타』전체에 걸쳐 아르주나에게 요가(요컨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55. 4장 33절 참조.
56. 4장 36절
57. 4장 38절.
58. 4장 37절.
59. Moonee → muni: 성자(牟尼)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즐거움 속에서도 집착이 없으며, 애욕도 두려움도 화도 다 벗어버린 현인을 일컫는다.
60. 2장 58절 참조.
61. 5장 내버림의 요가 4절 참조.
62. 3장 4∼7절 참조. 여기에서 무위는 얽매임 없는 행위를 일컫는다. 모든 함의 보이지 않는 근본이지만, 아무런 집착 없이 하기에 함이 없다 한다.
63. 2장 47절 참조.
64. 3장 19절 참조.
65. 4장 18절 참조.
66. 4장 19∼20절 참조. 여기에서 어진 이(Pandeel→pandita)는 자아실현에 이른 이를 뜻한다.
67. 6장 진정한 요가 1절 참조. 요기는 요가수행자를 일컫는다.
68. 4장 31절 참조.
69. 9장 최고의 지식과 신비 29절 참조.
70. Sankhya Sastra: 상키야 학파는 자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지식을 강조한다. 이에 비하면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믿음이 중시되어 있다.
71.『바가바드기타』2장 69절 참조.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면서 욕망에서 벗어나 참모습이 된다. 그러므로 잠잘 때 깨어 있다.
72. Sanjay: 왕의 마부로,『바가바드기타』는 그가 장님인 왕에게 전장의 모습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73. Haree: Hare Krishna로, 크리슈나 자신의 별칭이기도 하다.
74. 18장 76∼78절 참조.
75. Mahabharat: 옛 인도의 서사시, 세계에서 가장 길다.
76. Kreeshna Dwypayen Veias: Veias는 '편집자'라는 의미로, 그가 네 『베다』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77. Charles Wilkins(1749∼1836): 식자공이면서 작가로, 1785년에 처음으로 『바가바드기타』를 영역했다.
78. Chaldaean oracles: 갈데아, 즉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지는 단편적인 텍스트들.
79. Madeira: 포르투칼령의 한 대서양 군도.
80. Hitopadesa of Veeshnoo Sarma: 벵골에 전해진 설화집 『판차탄트라』의 이본(異本)으로서, 9세기에 지었다고 한다. 원본의 이야기 5편을 4편으로 개작하고 새로이 17가지의 설화를 추가했다. 이 책도 찰스 월킨스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했다.
81. Mourzouk: 리비아 서남부의 오아시스 마을.
82. Darfour: 수단 서부에 있는 주.

 

 

 













 






























 



 
 
팜므느와르 2013-12-05 11:58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덕에 철학적 사유가 깃든 책 더러 샀는데 이번에도 굿이네요.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행함이 행하지 않은 것보단 낫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습니다.
오렌님 서재는 알라디너들 영혼의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옵니다.

oren 2013-12-07 02:13   URL
<소로우의 강>은 <월든>에 못지 않게 깊이가 있고 좋은 책인 듯해요. 팜므님께도 강추합니다.

<바가바드 기타>와 <마하바라따>는 너무나 오래된 경전인데도 그동안 이 책 저 책에서 이름만 몇 번 들어봤을 뿐, 저도 여태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알라딘 상품소개'만 기웃거리고 있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사더라도 과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걱정되어 아직까지 선뜻 장바구니에 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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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여행하는 내내 강물 따라 흐르기를 바라는 독자는 내해內海를 다니는 자신의 작은 배가 큰 물결이 이는 바다에 이르면 바닷물이 자꾸 솟구쳐 올라와 멀미가 난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바다의 흐름은 배 쪽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으며 글이 지닌 흐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숨 쉴 때처럼 페이지마다에서 솟아오르고 드르릉 돌아가는 맷돌처럼 옳으니 그르니 따지는 생각들을 싹 씻어버리리라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물결이 자신의 앞이나 뒤에서 좀 더 높은 곳까지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홍수처럼 잔물결을 일으키고, 물방아 시내처럼 둑길 아래로 즐거이 흘러가는 글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가 마루터기에까지 닿을 때면 피타고라스, 플라톤, 얌블리코스155가 그 곁에 멈춰 선다. 그런 작가들의 길고 끈질기고 힘줄 많은 글월들은 꾸준히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그것은 군인이나 사업가를 위한 글처럼 읽히는데, 그 안에 신속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들과 비교할 때 엄숙한 사상가나 철학자들은 이제껏 배내옷을 벗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지난밤 선봉이 진을 친 곳에 오늘밤 후미가 다시 진을 치는 로마군대의 행진보다도 느리다. 슬기로운 얌블리코스는 물기 많은 늪지처럼 소용돌이치며 반짝인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하기만 한 글은 무척 보기 드문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글에 담겨진 생각에서 나오는 빛깔과 향기를 놓쳐버리기 일쑤이다. 빛깔이야 어떻든 아침이슬과 저녁이슬을 보면 기쁨을 느끼고, 색깔이야 어떻든 하늘을 보면 기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다.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는 듯, 탁 터놓고 잘라 말하기에, 슬기로운 글은 못 된다 해도 적어도 확실히 터득된 글이기는 하다.


월터 롤리 경161의 글은 대가 중에서도 눈에 확 뜨이므로, 글투가 뛰어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세히 살펴볼 값어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글투에는 사람의 발걸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강약이 있고, 현대 최고의 저술가도 내놓지 못하는 글월과 글월 사이에 숨 돌릴 공간이 있다. 그의 글은 영국의 공원, 좀 더 정확히 말해 높이 자란 나무들이 잔 나무들을 억눌러 빈 공간을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유럽의 숲과 같다.

당시의 모든 뛰어난 작가들은-우리 시대를 헐뜬는 말처럼 들리더라도 용서하기 바란다-오늘날의 작가들보다 훨씬 활기 넘치는 글을 척척 써냈다. 우리가 현대 작가를 읽던 중에 그들의 글에서 끌어온 구절들을 읽게 되면 돌연 흙질이 좋고 깊은, 싱싱한 초록의 땅을 만난 것처럼 느껴진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날에 뜻밖에 싱싱한 풋나무를 보게 되듯, 푸른 나뭇가지 하나가 페이지에 가로놓인 것처럼 보여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런 글들을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삶의 체험에 놓인 바탕을 알게 된다. 짧은 글에 담겨진 암시를 통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글은 사상과 경험에 뿌리를 내렸기에 상록수처럼 푸른 잎이 우거져 꽃처럼 피어나지만, 우리 시대의 꾸며낸 글들은 수액과 뿌리는 없이 꽃의 화려한 색깔만 띠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말이 지닌 꾸밈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마련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현란한 글투로 남을 흉내 낸 글을 쓴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을 화려하게 쓰고 싶어 한다.

(중략)

모든 글은 오래된 단련의 결과이다. 일반 서민들의 말이 아니면 어디에서 표준영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가장 좋은 말은 말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런 말은 글쓴이가 더 잘할 수 있었을 어떤 행위와 무척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급한 사정에 의해서든, 불운에 의해서든 그것이 행위를 대신한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결국 가장 진실한 작가는 사로잡힌 기사의 몸이어야 한다. 운명의 여신은 그런 계획을 갖고서 롤리로 하여금 실제의 삶을 넉넉히 겪어보도록 한 다음 그를 죄수로 만들어,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삼고, 자신이 했던 중요하고도 진실한 행동을 말로 옮기도록 한 것이 아닐까.

(중략)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뛰어난 표현과 관련하여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훌륭한 생각이 형편없는 의복에 싸여 있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지만, 훌륭한 생각이라면 월로프족166의 입술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뮤즈의 아홉 여신과 미의 세 여신이 맞들어서 그에 알맞은 옷을 입혀줄 것이다. 그런 교육이 바로 교양이고, 그 속에 든 재치가 대학에 기금을 가져다준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이렇게 배겨내지 못하는 온갖 장식들을 조금씩 없애버림으로써 이룩되었다. "시빌167이 오랜 세월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능력을 받아 진지하고 꾸밈없으며, 향내 풍기지 않는 영감을 받은 입술로 말했기 때문이다."

학자는 될수록 자주 농부가 소를 부르는 소리에서 강조하는 방법과 특징을 배우려 애써야 한다. 농부의 소 부르는 소리가 글로 쓰여진다면 공들인 자신의 글보다 훨씬 나을 것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누구의 글이 진정으로 공들인 글일까? 우리는 정치가나 문학가의 얄팍하고 나약한 미문美文에서 벗어나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들을 간단히 적어놓은 농부의 달력이나 작업일지와 같은 것들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활달한 기풍과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글이란 글쓴이가 펜 대신 쟁기를 집어든다면 끝까지 깊고 곧게 밭고랑을 낼 것이라는 느낌을 읽는 이에게 주어야 한다. 학자라도 활달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되고 진지한 노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 굳게 펜을 잡아야만 도끼나 칼을 휘두르듯이 펜을 품위 있고 효과적으로 휘두를 수 있다.

키가 자기 종족의 표준을 훌쩍 넘어서고, 허리둘레 또한 모자라지 않은 일부 문학가들이 갈겨대는 얄팍하고 생기 없는 미문을 생각할 때, 그 근력과 힘줄의 엄청난 낭비에 깜짝 놀라게 된다. 어떤가, 이러한 대비가! 엄청난 몸집과 나약한 글투 사이의 이러한 어긋남은 왜 생기는가? 황소도 내리쳐 쓰러뜨릴 수 있는 두 손으로 숙녀의 손으로도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무른 물건이나 자르다니! 이것이 등에 뼛골이 있고, 뒤꿈치에 아킬레스건이 있는 건강한 사내가 할 짓인가? 스톤헨지168에 커다란 돌을 세운 이들은 단 한 번 힘을 썼을 뿐인데도 온힘을 다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해냈다.

그렇지만 대단히 능률적인 노동자는 하루를 일에 치여 보내는 법이 없다. 오히려 어슬렁어슬렁 일하는 그는 안락하고 한가하다. 지극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그는 열매를 맺힐 시간의 알맹이만 성실하게 이용한다. 암탉이 왜 하루 종일 알을 품어야 하는가? 암탉은 하루 한 번 이상은 알을 낳지 않는다. 암탉은 또다시 알을 낳기 위해 모이를 쪼아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손톱 깍는 일과 같은 하잖은 일일지라도 그에게 시간을 넉넉히 갖게 해주자. 새싹은 짧은 봄날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돋아난다.

           그러니 자신의 욕구를 돋우는 데 한 시절을 보내라.
           꿋꿋이 서 있으면 서두르지 않아도 자라난다.

어떤 시간은 일을 하기에는 도무지 알맞지 않고, 숨을 들이쉴 작정이나 하기에 알맞은 것 같다. 그럴 때는 피가 끓어 당장 달려들려고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라, 반쁨은 벌써 이루어졌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리저리 거닐어야 한다. 씨앗이 자체에 들어 있는 배젖으로 싹을 틔워 땅 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야 햇빛을 향해 자라나듯, 우리의 결심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해진다.(130∼136쪽)


주석
155. Jamblichus(245∼325): Iamblichus Chalcidensis로도 알려져 있다. 후기 신(新)플라톤 철학과 서구 이교(異敎) 사상의 방향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아시리아의 철학자.

161. Sir Walter Raleigh(1552∼1618): 영국의 귀족, 시인, 작가, 군인,조신(朝臣),탐험가. 1591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여왕 시녀와 결혼한 죄로 런던타워에 갇힌다. 풀려난 후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나, 1594년 남미의 '황금 도시' 소식을 듣고 남미로 항해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엘도라도 전설에 큰 기여를 한 책을 썼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에 대항하는 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다시 런던타워에 갇히나 2차 엘도라도 탐험을 위해 풀려나지만, 이 탐험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 후 스페인을 달래려는 영국정부에 의해 살해된다.
166. Wolofs:세네갈과 감비아 대서양 연안에 사는 흔인 종족.
167. Sibyl: 델포이 신전이 세워지기 전 델포이 여자 예언자 시뷜레에서 온 말로, 예언자, 신탁을 전하는 사람의 뜻.
168. Stonehenge: 영국 Salisbury 평원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