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대우고전총서 12
김인곤.강철웅.김재홍.김주일.양호영.이기백.이정호.주은영 옮김 / 아카넷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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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가 데모크리토스를 두고 한 말들

 

그러므로 대중적인 명성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서도 안 되고 명성을 얻지 못한다고 크게 안달이 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내가 아테네에 왔는데, 거기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견실하며 진중한 사람, 그런 사람은 명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투스쿨룸 논쟁집』)

 

나는 데모크리토스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재능의 크기에서 뿐만 아니라, 사고력의 크기에서 그를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는 대담하게도 "나는 우주(universum)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라는 말로 시작했던 자이다. 그는 자신이 취급하지 않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nihil)으로 배제한다. 우주를 제외하고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아카데미카』)

 

그래서 내가 보기에 플라톤과 데모크리토스가 하는 말은 시행의 형식은 결하고 있으나, 시보다도 더 기운차고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한 어휘의 광채를 지니고 있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극 시인들의 시보다도 오히려 더욱 시다운 시로 여겨지고 있다.(『연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데모크리토스를 두고 한 말

 

일반적으로 사물의 생성소멸과 운동변화에 관한 모든 문제들에 관해서 데모크리토스 이외의 그 어떤 사람도 피상적인 것 이상으로 깊이 고찰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문제에 대해 고찰했으며, 그 당시에 이미 고찰 방식에서 아주 남달랐던 것이다.(『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데모크라테스 교훈집의 격언들*

(* 데모크라테스의 격언들은 12세기 필사본에서 뽑은 것으로, 스토바이오스가 인용하는 것들과 종종 일치하며, 따라서 분명 데모크리토스의 것으로 돌려져야 한다. ······)

 

만약 누구든 지성(nous)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나의 판단(gnōmē)에 귀 기울인다면, 훌륭한 사람에게 걸맞은 많은 행동들을 하게 될 것이고, 많은 나쁜 행동들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혼의 좋은 것들을 선호하는 사람은 더욱 신적인 것들을 선호하지만, 몸의 좋은 것들을 선호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것들을 선호한다.

 

나쁜 짓을 하는 자를 못하도록 막는 것은 훌륭한다. 그러나 만약 막지 못한다면, 같이 나쁜 짓을 하지는 말아라.

 

휼륭한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훌륭한 사람을 모방하거나 해야 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몸도 재물도 아니고, 올바름(orthosynē)과 폭넓은 분별력(polyphrosynē)이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하기 때문에 잘못에서 벗어나라.

 

불행(symphora)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분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수치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후회는 삶을 구제해 준다.

 

참된 것을 말해야 하며,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

 

나쁜 짓을 하는 자가 나쁜 짓을 당하는 자보다 더 불행하다.

 

잘못(plēmmeleia)을 온화하게 참아주는 것이 관대함(megalopsychiē)이다.

 

법(nomos)과 통치자(archōn)에게, 그리고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절도 있는 행동이다.

 

훌륭한 사람은 하찮은 사람들이 책잡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자신보다 더 열등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

 

재물에 완전히 노예가 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설득하는 데는 말(logos)이 여러모로 황금보다 더 강하다.

 

분별(nous)을 지녔다고 자신하는 자에게 훈게하는 사람은 헛수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치(logos)를 배우지 못했으면서도 이치에 따라서 산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말들을 해댄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행을 겪고서야 분별을 갖추게 된다.

 

훌륭한 말이 아니라 훌륭한 일과 행위를 추구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에 걸맞은 성품을 타고난(euphyees)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알아보고 추구한다.

 

가축의 우수함(eugeneia)은 신체의 강건함에 있고, 사람의 우수함은 좋은 성향(eutropiē)과 품성(ēthos)에 있다.

 

바르게 분별하는 자들의 희망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어리석은 자들의 희망은 그럴 수 없다.

 

기술(technē)도 지혜(sophiē)도 누군가가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남의 실수보다는 자신의 실수(hamartēma)를 따지는 것이 더 낫다.

 

잘 정돈된 성품(tropos)을 가진 사람들이 삶도 짜임새 있게 꾸려간다.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훌륭하다.

 

아름다운 행위들(ergmata)에 대해 칭송하는 것은 아름답다. 나쁜 행위들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자와 협잡꾼의 행위(ergon)이기 때문이다.

 

박식한(polymatēs) 많은 사람들이 분별(nous)을 갖고 있지 않다.

 

박식(polymathiē)이 아니라 높은 분별(polynoiē)에 힘써야 한다.

 

뉘우치기보다는 행하기에 앞서 미리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모든 사람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들을 신뢰하라. 전자는 어리석은(euēthes) 일이지만, 후자는 분별 있는 사람(sōphroneōn)의 일이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람과 믿을 만하지 않는 사람은 행하는 일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들을 통해서도 판별될 수 있다.

 

좋은 것(agathon)과 참된 것(alēthes)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만, 즐거운 것(hēdy)은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과도하게(ametrōs) 욕구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어른이 할 바가 아니다.

 

때에 맞지 않는 쾌락(akairoi)은 불쾌를 낳는다.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의욕(orexis)은 혼을 눈멀게 하여 다른 것들을 봇 보게 한다.

 

올바른 사랑(erōs)은 아름다운 것들을 방자하지 않게(anybristōs) 갈망하는 것이다.

 

이롭지 않다면 어떤 쾌락도 받아들이지 말아라.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다스리는 것보다 다스림을 받는 것이 더 낫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nēpioi)에게는 말(logos)이 아니라 불행(symphorē)이 선생이다.

 

평판과 부(富)는 사리분별(xynesis) 없이는 안전한 재산이 못된다.

 

돈을 버는 일이 쓸모없지는 않지만, 부정하게 돈을 버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쁘다.

 

못된 자들을 모방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훌륭한 자들을 모방하려 하지 않는 것도 곤란하다.

 

남의 일로 분주하면서 자신의 일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매번 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은 행위를 마무리 짓지 못한다.

 

말로는 모든 것을 다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하며 겉보기만 훌륭하다.

 

재산과 분별을 모두 가진 사람이 복 있는 자다. 그는 재산을 마땅히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더 좋은 것에 대한 무지가 잘못의 원인이다.

 

부끄러운 짓들을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반대를 일삼고 말을 많이 늘어놓는 사람은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는 데 걸맞은 성품을 타고난 자가 아니다.

 

모든 것을 말하면서 아무 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거만(倨慢, pleonexiē)이다.

 

못된 자가 호기(好期, kairos) 잡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질시하는 자는 적을 괴롭히듯 자신을 괴롭힌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가 적이 아니라, 저지르려 마음먹는 자가 적이다.

 

친척들의 적의가 타인들의 적의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자가 되지 말고, 신중하며(eulabēs) 흔들림 없는 자(asphalēs)가 되라.

 

그보다 더 나은 보답을 하기로 마음먹고 호의(charis)를 받아들여야 한다.

 

호의를 베풀 때 그대는, 받는 자가 사기꾼이어서 좋은 것 대신 나쁜 것으로 갚지나 않을지, 받는 자를 미리 살펴보라.

 

작은 호의도 때가 적절하면 받는 이들에게 지극히 큰 것이다.

 

명예는 분별 잘 하는 사람들에게서 큰 힘을 발휘한다. 그들은 명예를 얻으면서 그 까닭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답에 눈독들이는 이가 아니라, 잘 해주려고 마음먹는 이가 후한 사람이다.

 

친구(philos)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친구가 아니며, 친구처럼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친구이다.

 

이해 깊은 한 사람의 우정(philia)이 어리석은 모든 사람들의 우정보다 더 낫다.

 

쓸만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믿을 만한(peiranthes) 친구들이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사람들은 성미가 까탈스럽다.

 

많은 사람들은 친구들이 부유하다가 궁핍해지면 외면한다.

 

균등(to ison)은 모든 것에서 아름답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나침(hyperbolē)과 모자람(elleipsis)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다.

 

매력 있는 노인은 감미로운 말로 마음을 사로잡으며(haimylos)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spoudaiomythos)이다.

 

신체의 아름다움은, 지성(nous)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동물적인(zōōdēs) 것이다.

 

운이 트일 때[일이 잘 될 때]는 친구를 찾기 쉽지만, 불운할 때는 무엇보다 힘들다.

 

친척들 모두가 친구는 아니고, 유익한 것에 관해 같은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친구이다.

 

우리가 사람인 한에서는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 비웃지 않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 온당하다.

 

좋은 것들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힘들게 생기지만, 나쁜 것들은 그것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생긴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정에 걸맞은 성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여자가 말(logos)을 연습하지 않게 하라. 그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여자의 지배를 받는 것은 남자에게는 극도의 모욕(hybris)일 것이다.

 

아름다운 어떤 것을 늘 생각하는 것은 신적 지성(nous)의 일이다.

 

만일 누구든 신들이 모든 것을 살피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숨어서든 드러내 놓고든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력이 없는 자들을 칭찬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큰 해를 입힌다.

 

자신에게서 보다 다른 사람에게서 칭찬받는 것이 더 낫다.

 

칭찬받는 이유를 네가 알지 못한다면, 아첨받고 있다고 생각하라.

 

세계(kosmos)는 연극무대(skēnē), 삶은 한편의 연극(parodos), 그대는 와서, 보고, 떠나네.

 

세계는 변화(alloiōsis)에 불과하고, 삶은 상념(hypolēpsis)일 뿐이네.

 

작은 지혜(sophia)도 큰 어리석음(aphrosynē)으로 인한 평판보다는 가치가 있다.

 


 



  1. '술 한 잔' 사주지도 못하는 '친구'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4-12-04 16:28 
    어젯밤에 어떤 책을 읽다가 묘한 구절을 발견하고는 어느날 갑자기 눈덩이처럼 불어난 '북플 친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도 페북이니 북플이니 하는 서비스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북플이라는 어플에서는 여태껏 '친구 신청' 버튼 한 번 누른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북플은 나에게 '우정상'까지 쥐어 주었다. 갑자기 '술' 생각도 나고, 서로 '술 한 잔' 사주지도 못하는 '친구'도
 
 
2014-12-04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 곽재구의 달빛으로 읽은 시
곽재구 엮음, 지성배 사진 / 이가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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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金秀映)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신이 최초의 일주일 동안 창조한 것은 빛이 아니라 여행이었다"고 말한 이는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 풀러스이다. 한 인간은 한 생애 동안 하나의 여행가방을 지닌다. 길 위에서 여행가방은 점점 낡아가며 때로는 쓸모없는 욕망의 꿈들로 부푼다. 점점 누추해져 가는, 점점 비릿해져 가는 여행가방이 아닌, 꽃향기가 솔솔 풍겨 나오는 여행가방, 구름이나 바람이 한참 머물다 가고 싶은 여행가방, 지혜와 신념과 헌신의 시간들이 묵은 때 속에 반질반질 드러나는 여행가방··· 길 위에서 오래 아파하며 그 여행가방의 주인이 된 이의 영혼이여, 축복 있으라.

 

 

            - 곽재구 엮음,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중에서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 곽재구의 달빛으로 읽은 시
곽재구 엮음, 지성배 사진 / 이가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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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줄에는

 

 

김영남

 

 

 

내복의 검정 고무줄을

잡아 당겨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고무줄에는 고무줄 이상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이상의 무얼 끌어안은 손,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으로 무엇을 묶어본 사람이면 또 알 겁니다

어머니란 늘어났다 줄더들었다 한다는 것을

그래야 사람도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한 어머니일수록 그런 신축성을 오래오래 간직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고무줄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어머니란 리어카 바퀴처럼 둥근 모습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둥근 등을 굴려 우리들을 큰 세상으로 실어낸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지상 모든 고무줄를 비교해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고무줄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어머니가 내복의 검정 고무줄 속에 앉아 계신다.

검정 고무줄 속의 어머니는 환히 웃으시며 새벽밥을 짓고, 바느질을 하고,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굽은 등으로 삶의 리어카 바퀴를 끝없이 굴려가면서 한 줄 검정 고무줄로 삭아 가는 어머니.

지신이 지닌 모든 피와 땀과 뼈를 기꺼이 내주고 한 줄 검정 고무줄로 남은 어머니.

다음 생에도 또 다음 생에도 고무줄의 삶을 살아갈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고무줄인 아, 우리들의 어머니!

 

 

            - 곽재구 엮음,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중에서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나의 고전 읽기 1
손택수 지음, 정약전 원저 / 아이세움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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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얼과 말을 지키기 위해 활동한 백석의 시에 김이 나온다.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귤 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 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 백석, 「통영統營」

 

백석의 시에서 천희라는 여성은 통영이라는 지리적 공간과 겹쳐져서 형상화되고 있다. 시인은 어촌의 풍경을 그리듯 천희를 그린다.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는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여성의 외모를 보여 주는 동시에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통제사가 우리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강탈당한 모국을 떠올리면서 슬픔의 정서를 낳는다. 그래서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 껍데기 같은 방에서 흘러나오는 등불 빛 아래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비는 통제사와 나라를 잃어버린 통영의 울음이기도 하고, 순정을 저버리지 못하는 천희의 울음이기도 하고, 통영과 천희와 잃어버린 나라를 겹쳐서 생각하는 시인의 울음이기도 하다. 시인은 여기서 이 비를 "김 냄새 나는 비"라고 했다. 김 냄새가 묻어나는 비, 어쩌면 이 특별한 이미지는 마루방에 둥글게 모여 앉아 김에 밥을 싸서 먹던 가족들에 대한 향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시는 민족 공동체와 가족 공동체가 깨어져 버린 시대에 대한 비애를 한 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천희'를 비유하고 있는 시어 중의 하나가 미역이다. 김처럼 미역은 우리 민족의 밥상을 장식하는 친숙한 해조류이다. 이 친숙함이 천희를 보다 살갑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약전은 미역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길이는 열 자 정도로서 한 뿌리에서 잎이 나오고

그 뿌리 가운데에서 한 줄기가 나온다.

또한 그 줄기 양쪽에서 날개가 나오는데,

날개 안은 단단하고 바깥쪽은 부드럽다.

주름이 쌓여 있는 부분은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

그 잎은 옥수수 잎과 비슷하다. 1∼2월에 뿌리가 나고

6∼7월에 따서 말린다. 뿌리의 맛은 달고 잎의 맛은 담박하다.

임산부의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모자반과 같은 지대에서 자란다.

 

 

『초학기』라는 옛 문헌에 보면 새끼를 낳은 고래가 미역을 뜯어먹는 모습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미역은 정약전이 말한 대로 아기를 낳은 고통을 달래 주는 산후 최고의 건강식으로 통한다. 생일날 우리는 싫든 좋든 상에 오르는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 생일 밥상에 미역국이 오르는 것은 나의 생일이 어머니의 출산일이기도 함을 기억하라는 뜻이 아닐까. 미역국을 먹으며 우리는 아기를 낳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먹는다.(199∼202쪽)

 

 - 손택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김과 미역과 어머니> 중에서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나의 고전 읽기 1
손택수 지음, 정약전 원저 / 아이세움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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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같은 부리, 칼날 같은 이빨, 까마득한 절벽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는 담력 ······. 정약전은 가무우지를 '물고기의 매'라고 표현했다. 매처럼 가마우지는 실제로 한번 노린 먹잇감을 웬만해선 잘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감탄스런 낚시 솜씨가 자신에게 노예의 올가미를 씌우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어부의 배에 실려와

나는 망망한 바다 위로 내던져졌다

어부가 내 발목을 잡아메고 있다는 것도

나는 한순간 깜박 잊어버리고

다만 물속의 고기떼를 쫓아 두리번거린다

넓은 갈퀴로 물살 헤치며

발밑으로 달아나는 저 물고기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자맥질한다

내 큰 부리는

곧 한 마리의 물고기를 물고 떠오른다

눈부신 햇살에 어깨 으쓱이며

나는 내가 잡은 물고기를 대뜸 삼키려 한다

그러나 가늘고 긴 내 목에는

이미 노끈이 조여져

그 고기 결코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한다

이때 어부는 재빨리 줄을 당겨

내 목에 걸린 고기를 뽑아 바구니에 담는다

나는 또 빈털터리가 되어

막막한 바다 위로 내던져진다.

 

 - 이동순, 「슬픈 가마우지의 노래」

 

 

가마우지의 뺴어난 물고기잡이 광경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사람들은 그래서 '가마우지 낚시'를 고안해 냈다. 「슬픈 가마우지의 노래」는 이 낚시 법을 아직도 애용하고 있는 중국의 구이린(桂林)과 일본의 이누야마(犬山) 지방의 낚시 장면을 보고 쓴 시이다.

 

(······)

 

가마우지 똥이라니 좀 머쓱했지만, 가마우지 똥은 한약재로도 쓰고 외국에선 양질의 질소 비료로도 쓴다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가마우지 똥이 나온다.

 

 

새들이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 어떤 새들은 아직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새로 도착한 새들이었다. 그들은 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바다의 섬들은 새똥으로 덮여 있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평생 만들어 내는 새똥으로 같은 기간 동안 사람의 일가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수지 맞는 사업이다. 그렇게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새들은 이곳에 와서 죽는다

 

 

가마우지는 죽음조차 남다르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똥까지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한 뒤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친 가마우지들이 죽음을 맞는 해변을 그리고 있다. 이 해변이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가는 지상의 가난한 영혼들이 쉴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을 창조한다. 이 해변은 그런 점에서 영혼의 안식처라 할 수 있다. 인간들을 위해 평생 낚시를 하고, 자신의 분뇨마저 질소 비료로 쓸 수 있게 만든 다음 외롭게 죽어 가는 가마우지들의 바닷가 묘지가 우리들 마음 어닌가에도 있을지 모르곘다. 조용히 죽어 가는 가마우지를 가슴에 안고, 내 심장 박동 소리로나마 그를 위로하는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중국 구이린 지방에서는 가마우지들이 숨을 거둘 시간이 오면 어부들이 술잔을 들고 가마우지들의 마지막을 지킨다고 한다. 가마우지와 어부는 그들이 함께 한 강물을 내려다보며 함께 술을 마신다. 가마우지가 없었다면 어부의 삶은 곤궁을 면치 못했으리라. 이 가난한 어부를 위해 가마우지는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노역을 통해 어부의 집안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부가 부어 준 마지막 술을 마시며 가마우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어부의 눈에선 비로소 눈물이 떨어진다.(185∼190쪽)

 

 - 손택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가마우지, 페루에 가서 죽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