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글을 쓰면서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의 글에 감탄하곤 한다. 어떻게 내 머릿속에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렇다. 예전엔 아무리 글을 써도 글이 나아지지 않아서 절필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절필을 한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작하지 않겠지만.
그만큼 글에 자신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글이란 게 쓰면 쓸수록 발전하는 모양이다. 십 년 넘게 블로그에 글을 써 왔더니 어느 날부터 그녀의 글에 추천을 눌러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리하여 어떤 글에는 ‘추천 수 10’이 넘는 글도 있었다. 왜 이 글이 추천 수가 높을까, 생각하며 다시 글을 읽어 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골똘히 생각한 것은 이것이다.
‘왜 나보다 나의 글이 더 나을까.’
이 말은 ‘왜 나의 수준보다 나의 글 수준이 더 높을까.’라는 말과 같다. 글을 쓰고 나면 자신의 글 수준이 높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였다. 다시 말해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르지 못할 어떤 수준에 그 글은 가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고 신기했다.
혹시 밀란 쿤데라의 말이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제 생각에는 소설가보다 위대한 것은 소설인 것 같습니다. 소설은 소설가의 편견까지도 극복하게 해 준다고 말할 수 있어요. 소설을 쓰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를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헤르만 브로흐라는,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소설이 열어 주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했지요.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던 당시의 톨스토이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 박성창 외 저, <밀란 쿤데라 읽기>,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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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보다 위대한 것은 소설이다.’
그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봤다.
‘나보다 위대한 것은 나의 글이다.’
자신보다 자신의 글이 위대한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글을 쓰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져서, 글을 쓰기 전에 몰랐던 어떤 것들을 글을 쓰면서 알게 되기 때문.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면 ‘글 쓰는 시간’이란 다름 아닌 ‘공부를 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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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녀’는 제가 아닙니다...
다음엔 (3)번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