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거기에 자기의 행복과 위대함과 슬픔과 굴욕을 예상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축도. 전 인류의 생활의 축도. 「전쟁과 평화」는 참으로 그러한 명작이다.”

 - N. N. 스뜨라호프(1828∼1895)

 

 * * *

 

(동서문화사 판『전쟁과 평화』는 1권 834쪽, 2권까지 포함하면 1,724쪽에 달한다.『전쟁의 역사』는 1,038쪽.)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어떻게 몽테뉴에게 접근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그 책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어쩌면 톨스토이에게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도 이 말이 제법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톨스토이가 쓴 작품들 가운데 특히『전쟁과 평화』에 '어떻게' 접근할지 몰라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라면 더욱더.

 

내가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은 다 마다하고 『전쟁과 평화』부터 대뜸 붙잡고 읽기 시작한 건 최근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은 덕분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전쟁과 평화』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두 작품 모두 여간해서는 완독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방대한 분량 때문에라도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유사한 공통점을 빼고는 말이다. 아무튼 나는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작품을 훌쩍 뛰어넘고 나니 웬만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차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괜한 걱정'으로부터 거의 해방된 느낌을 일순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험준한 고산준봉을 정복하고 난 뒤에 슬며시 찾아오는 까닭모를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좋은 책은 열심히 읽으면 그 대가가 있다. 가장 좋은 책이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다. 책으로부터 받는 것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 어렵고 좋은 책을 붙잡고 씨름한 대가로 책을 읽는 기술을 향상시켜준다. 둘째, 좋은 책은 이 세상과 독자 자신에 대해 가르쳐준다. 이것이 훨씬 중요한 대가일 것이다. 인생을 배우는 것, 즉,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만 제공해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더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하고 위대한 진리를 보다 깊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360쪽)

 - 모티머 J. 애들러,『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中에서

 

『전쟁과 평화』는 그동안 언젠가 한 번은 꼭 읽어봐야지 하는 막연한 느낌만 가져 봤을 뿐 좀처럼 이 책을 읽을 계기를 찾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도록 강력하게 부추기는 직접적인 계기는 거의 없었을지 몰라도, 막연한 계기조차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톨스토이'를 발견했던 일, 『평생독서계획』에 담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매혹적인 소개글을 만난 일,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에 담긴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속 문장들을 둘러싼 이야기 등이 이 작품에 다가서는 희미한 계기들이었다면, 몇 년 전 어느 날(아마도 틀림없이 '재활용'이 있었던 날이었으리라) 아내가 동네 아파트에서 주워 온 묵직한 '세계문학전집' 판『전쟁과 평화』는 이 작품에 실제적으로 다가서는 '시각적 자극'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강력한 것이어서 마침내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었던 듯하다.

 

('아내가 주워 온 책들'의 외관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노인처럼 비록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저 유명한 작품들을 굳이 '까마득한 옛날 버전'으로 읽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가끔씩 저 책의 '앞부분'에 담겨 있는 '그림들'을 살펴보는 재미만큼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아내가 주워온 책에서도 재삼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저 위대한 작품들이 대개 그저 '장식용'으로만 소비된다는 게 너무 아쉽다. 저들 가운데 그나마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그 얼마나 심오하고 위대한 예술품이던가 말이다. 가령 호메로스, 신곡, 돈키호테, 파우스트,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등만 놓고 보더라도...)

 

 

그런데 톨스토이는 왜 하필이면 '전쟁과 평화'라는 거대담론과도 같은 제재를 '소설 형식'에 담아내려고 했을까? '전쟁과 평화'는 오히려 역사가나 군인 또는 철학자들에게나 훨씬 더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어쩌면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나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형식에 훨씬 더 적합한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 미리 작품 해설을 꼼꼼이 살펴본 바로도 그렇고, 또 소설 속으로 직접 들어간 이후로도 나의 예상이 그리 틀렸던 건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인『전쟁과 평화』는 결코 그저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역사상으로 실제 벌어졌던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거대한 전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와도 닮은 데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결정적인 증거들은 이 책 속에 담긴 '전투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1805년의 '제1차 나폴레옹 전쟁'은 총 4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 내용 가운데 제1편 주요 배경이다. '울름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뮌헨을 거쳐 빈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쉔부른 궁전에 머물고, 오스트리아 황제는 황급히 빈을 떠나 브륀으로 천궁한다. 보헤미아 지방의 유서깊은 도시 브륀은 마침 밀란 쿤데라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농담』의 주무대이기도 하다.(남자 주인공 루드비크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루치에를 무려 15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는 곳이다) 어쨌든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하고, 안드레이는 이 전투에서 '전사자'로 분류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끝에 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이른바 '삼제회전(三帝會戰, Battle of the Three Emperors)'으로도 불리는데, 프랑스에 대항해 동맹을 맺은 러시아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가 이 전쟁터에 동시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파리에 '개선문'을 세워 자신의 마음 속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카이사르를 그대로 따랐다. 아우스터리츠는 브륀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금의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 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나폴레옹'이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당대 유럽의 지도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좌우할 만큼 막강한 위세를 떨치며 생생하게 우리의 눈 앞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전쟁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위대한 문학 작품의 반열에 올랐을까?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막연하게나마 이런 엉뚱한 의문을 늘 마음 한켠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런 막연한 억측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판 일리아스'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마치 놀랍도록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대건축물 앞에 섰을 때 받게 되는 압도감을 느낄 정도였다. 무려 500명이 훨씬 넘는 숱한 인물들이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들에 대한 묘사와 서사 자체도 놀랍지만, 작가 스스로 온갖 인물들과 사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가다듬어 길게 서술해 놓은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 등이 여기에 한데 녹아 있어, 일찍이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파노라마의 장관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데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35세에 '나폴레옹 전쟁 시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869년 41세 때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대전쟁'을 아주 깊이 연구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자세히 탐구함으로써 '자신이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을 이 작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으리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혁명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전 유럽을 정복하기로 마음 먹은 보나파르트와, 그에 맞서 자신들의 '국가의 명예'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의 많은 국가의 황제들과 군사령관들과 외교관들과 민중들이 벌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벌어진 전쟁인지, 그토록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간 숱한 인물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했는지, 그러한 '행위들'은 심지어 우연이었는지 혹은 필연이었는지를 아주 진지하게 탐색해 보는 일이야말로 톨스토이가 진정으로 이 소설을 쓴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토록 지난하면서도(제1부를 완성하는데 6년이나 걸렸고, 아내는 창작에 몰두하는 남편을 위하여 일곱 번이나 원고를 정서하였다.) 진지한 성찰들을 거친 끝에 마침내 방대한 전쟁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며 '위대한 문학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집필하는 톨스토이_레닌그라드 러시아 미술관 소장. 이 그림 역시 주워 온 '학원세계문학전집' 앞부분에 담겨 있다.)

 

 

작품은 그저 단순한 역사소설에만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아무리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비켜나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기 마련이었고, 사실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숱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매번 태어나고 또 죽기 마련인 법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이야기 말고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대저택에서 생활하는 당대의 명문 귀족 집안 사람들이 소설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면서, 그들의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 좌절과 괴로움과 불행, 사랑과 배신, 소박과 탐욕을 놀랍도록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만이 아니라 가정소설 혹은 연애소설이나 심지어 성장소설처럼 읽히게 만든다. 전쟁의 와중에도 수시로 대저택에서 열리는 숱한 무도회와 파티와 만찬 테이블 주위에서 보고 듣는 화려한 무곡을 곁들인 왈츠와 떠들썩한 대화와 몸짓들을 통해 우리는 당대 러시아 귀족들의 온갖 허영과 위선과 허위에 찬 모습까지도 더없이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로스또프 백작 집안'의 '눈이 부시도록 맑게 빛나는 한 때'를 담은 그림. 톨스토이가 소설 속에서 이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생생해서 책을 읽으면서 절로 '한 폭의 그림'을 떠올렸었는데, 뒤늦게 주워 온 '세계문학전집' 속 『전쟁과 평화』에 마침 이토록 환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겨우 열두엇 남짓한 나따샤와 그의 어릴 적 남자 친구인 보리스, 꼬마 남동생인 뻬쨔, 사촌자매인 쏘냐와 그의 남자 친구이자 나따샤의 친오빠인 니꼴라이의 1805년 무렵의 그저 순수하고도 천진난만하기만 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들 앞에 놓인 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어디론가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로스또프 가문의 둘째 딸 나따샤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다. 그녀 곁에는 사촌자매인 쏘냐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언제나 단짝으로 더불어 지낸다.)

 

 

(사진 옆에 붙은 설명은 '파스테르나크의 그림'이다. 아마도 톨스토이의 『부활』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를 말하는 듯싶다.『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화가 파스테르나크의 장남이다.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엘렌'은 바씰리 공작의 딸이자, 약혼한 나따샤를 파혼에 이르도록 유혹한 아나똘리와 남매지간이다. 정략결혼을 한 삐에르와 엘렌은 서로 별거하다시피 지낸다.)

 

전쟁이 터지면서 숱한 젊은이들이 집안의 권유나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으로 고국을 떠나 '머나먼 전선'으로 바삐 이동하고  각자 낯선 군부대에 배치된다. 그들은 마침내 난생 처음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적병과 맞닥뜨리고, 각자 자신의 열망에 부응할 정도의 영웅적인 공을 세우거나 혹은 어리석은 만용 때문에 큰 부상을 당해 쓰러진다. 전쟁터의 실전 상황은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전투' 경험이 더해져 놀랍도록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젊은 장교들은 틈나는 대로 휴가 명령를 받아 그리운 가족들이 살고 있는 빼쩨르부르그 혹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잠시나마 '안온한 일상의 행복'으로 더러 복귀한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서로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어릴 적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쑥쓰러워하면서도 어느새 '예전에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랑의 감정에 일순 휩싸이고 번민하고 남모를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또다시 긴 이별과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그 가운데 갓 결혼한 안드레이 공작의 '군입대 장면'과 니꼴라이의 '첫 휴가 장면'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도 감동적이어서 그 장면을 읽노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자신의 '입영 전야'와 '첫 번째 휴가'를 떠올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이미 군대에 보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나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자식을 군에 들여보내던 그 때 그 가슴이 아리도록 먹먹한 이별의 순간들과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을 맞이하던 가슴 벅찬 재회의 순간들을 잠시나마 넋을 잃고 한참이나 회상할 지도 모르겠다.(『전쟁과 평화』가 유례없이 방대한 규모와 웅장한 스케일 때문에 곧잘 현대판 『일리아스』에 비견되곤 하는데,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아들을 궁녀들 틈에 숨겼던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나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놀라운 '병역기피 꼼수'를 부리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함께 떠올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두 작품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시공간적 간극 때문에 그 작품들이 다루는 전쟁의 원인이나 전개 양상이 서로 너무나 다르다고 미리부터 충분히 수긍하고 보더라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는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절대적인 영웅 숭배'인데 비해 톨스토이의 작품이 '민중의 힘'을 지극히 긍정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서로 완전히 정반대이다.)

 

'전쟁'과 '평화'를 사이에 두고 광할한 시공간적 배경 위에 벌어지는 온갖 인물들에 대한 놀랍도록 섬세한 심리 묘사와 온갖 연령대와 인물들, 온갖 서로 다른 지위와 재산과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 유전'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절로 톨스토이가 평생토록 고민했던 문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만큼 충분히 많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배치해 놓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 속으로 아주 수월하게 파고 들어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과 생각들을 마치 우리 눈앞에 금방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듯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한 섬세한 묘사 능력들이 바로 이 걸작을 자주 '영화화'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재삼 말할 필요가 없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가장 놀랐던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점이었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이토록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과 내면의 심리를 어쩌면 그토록 잘 그려내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전쟁과 평화』가 지닌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가 무려 599명에 달한다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이 작품 속엔 온갖 다양한 인물들이 얼키고 설켜 있다. 물론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이름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대함에 너무 곤혹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신기하게도 이 인물들은 '느린 호흡으로' 이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자연스레 그들의 용모와 성격을 보다 뚜렷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명문 귀족가문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이 점은 흔히『까라마조프 형제들』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가령『까라마조프 형제들』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라는 인물은 온갖 비열함과 추악함과 어두움을 상징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삐에르 베주호프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농노가 딸린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갑부이긴 하지만 선량함과 박애주의와 진리탐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귀족 중심의 인물 구성은 작가인 톨스토이 스스로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명문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데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이 소설을 집필한 배경 자체가 1825년에 일어났던 (명문 귀족가문 출신 젊은이들이 주도한)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근본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의도에 있었다는 점과, 그 탐구 노력이 결국은 거기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까지 닿았고, 결국 그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 가운데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아무래도 귀족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도 당연했다.

 

 

(그림 위_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저택 일부.  그림 아래_톨스토이 집의 깨끗하고 밝은 객실.)

 

 

평생에 한 번 읽기도 벅찬 이 거대한 스토리를 '세 번씩이나' 읽은 어느 독자가 칭찬한 이 소설의 세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포괄성이고 둘째, 자연스러움이며 셋째, 무시간성이다." 그 독자가 세 번째로 다시 읽고서 느낀 이 소설의 미덕은 "톨스토이는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말대로, 인생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이 『전쟁과 평화』의 주제이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좀 괴상하고 시대가 좀 멀어서 그렇지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얘기에 다름아닌 만큼 누구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유명한 고전이니만큼 당장에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언젠가 적당한 계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서 아주 적당한 시간들이 찾아오면 꼭 한번 붙잡고 읽어보시길 바란다. 그저 장식용으로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탁월한 예술작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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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몽고메리 장군(1887∼1976) 이 쓴『전쟁의 역사』에는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유명한 전투'들이 총망라되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톨스토이가『전쟁과 평화』에서 다뤘던 '나폴레옹 전쟁'에 관련된 몇몇 대목들만 적당히 골라 담아봤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유럽 곳곳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 병력 배치도. 이 책에 서술된 내용과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속 묘사 내용이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가령 전투 당일의 날씨라든가,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야릇한 사건-우연히 밀짚에 불이 붙었는데,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으로 생각한 프랑스 병사들이 더 큰 불을 놓았고, 이 불길이 맹렬하게 불타오르자 감정에 북받친 3만 병사들이 맹렬히 나폴레옹의 이름을 연호한 일-까지도 '너무나 똑같이'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전쟁의 역사』 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한 그림. 오스트리아군 수석 참모인 바이로더는 잘못된 '작전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역사적인 대참패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전쟁의 역사』앞부분에 담긴 컬러판 '보로디노 전투'. 나폴레옹 군대에서 수훈을 세운 장군이자 화가인 르죈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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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역사상 사건에서 이른바 위대한 인물은 그 의미가 작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실로 비극적이고 방대한 사건들로 넘쳐나며, 우리에게 친근하고 다양한 구전이 아직 생생한 시대를 연구하는 가운데, 나는 역사상 사건의 원인에 우리의 이성적 이해가 미치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1812년에 일어난 여러 사건의 원인이 나폴레옹의 침략 야욕이나 알렉산드르 황제의 애국심 때문이라는 말은 (이는 누구라도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데), 로마제국의 몰락 원인이 이런저런 야만인이 자신의 민족을 서쪽으로 이끌고 온 데다 이러이러한 로마황제의 국가 통치가 나빴기 때문이라든가, 파내려가던 거대한 산이 무너진 것은 노동자가 삽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무의미하다.

 

수백만 명이 서로 죽이려 들었고, 그 가운데 오십만이 죽은 사건의 원인이 한 사람의 의지일 리 없다. 한 사람이 산을 파서 무너뜨릴 수 없듯이, 한 사람이 오십만 명을 죽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원인일까? 일부 역사가는 그 원인이 프랑스인의 침략 야욕과 러시아인의 애국심이라고 한다. 또 다른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의 대군이 퍼뜨린 민주적 요소나, 러시아가 유럽과 연대해야 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왜 수백만 명이 서로 죽이기 시작하였으며 누가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이 무의미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 과거를 더듬어 무수한 사변(思辨)이 가능하며 그 작업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양에 이르는 설명과 그 모든 설명이 단 하나의 목적에 맞춰지고 있는 점은, 그 원인이 무수히 많아서 단 하나만 지적할 수 없음을 반증한다.

 

무엇 때문에 수백만 명이 서로를 죽였을까?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그것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악행임을 알면서도 …….

 

그것이 필연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가을이 될 무렵의 꿀벌처럼, 혹은 동물의 수컷들처럼 서로를 죽이는 저 자연의 동물학적 법칙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는 이 두려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로서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그러하다. 만약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감각과 의식이 인간에게 없었다면 이 진리는 증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전체적인 견지에서 역사를 고찰하면, 우리는 다양한 사건의 발생 원인인 태고의 법칙을 의심 없이 확신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믿음은 정반대이다.

 

타인을 죽이는 인간, 네만 강을 건너라고 명령하는 나폴레옹,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청원하거나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할 때의 당신이나 나 ㅡ 우리는 모두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이성적인 원인과 자유의지를 기초로 하며 어떤 행동을 할지 우리 나름대로 결정한다고 확신한다. 이 확신은 누구에게나 본질적이고 소중하여, 행위의 부자유성에 관한 확실한 논거나 범죄 통계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식이 모든 행위에 미치게 한다.

 

이 모순은 해결할 수 없을 듯하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한다고 확신한다. 이 행위를 전 인류의 생활에 참여하는 의미(그 역사적 의이)로 고찰하면 나는 그 행위가 미리 결정되었으며 필연적이었음을 확신한다. 어디에 잘못이 숨어 있을까?

 

발생한 사실에 적합하도록, 존재하지도 않는 수많은 자유로운 사변을 한 순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억지로 갖다 붙이는 인간의 능력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하면(이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다), 어떤 행위를 할 때의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은 잘못되었다는 추측이 확실해진다. 그러나 역시 심리학적 관찰이 증명하는 바에 따르면, 자유로운 의식이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의심을 물리치는 다른 종류의 행위가 있다. 나는 의심 없이, 예컨대 유물주의자가 뭐라고 하든, 오직 나에게 관련된 행위라면 당장 그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의심 없이 내 의지만으로 방금 손을 올리고 내렸다. 나는 당장 글쓰기를 중단할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즉시 읽기를 중단할 수 있다. 의심 없이 내 의지 만으로 모든 장애를 넘어 지금 즉시 머릿속으로 미국에 갔다가 어떤 수학 문제를 떠올렸다. 나는 자유를 시험하면서 손을 올려 힘껏 우주로 내리쳤다.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내 옆에 아이가 서 있다. 그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치켜들어 방금처럼 아이에게 내리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아이에게 개가 달려든다. 나는 개를 향해 손을 치켜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전선에 서 있다면 연대의 움직임에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전쟁터에서 연대와 함께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고, 모두가 도망칠 때는 나도 도망칠 수밖에 없다. 내가 피고의 변호인으로서 법정에 서 있다면 말을 하지 않거나 내가 떠드는 말을 모르면 안 된다. 무언가가 내 눈앞을 스치면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두 종류의 행위가 있다. 하나는 내 의지의 지배를 받고 다른 하나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모순을 야기하는 잘못이 생기는 이유는 '자아', 즉 가장 고도로 추상화된 내 존재와 관련된 모든 행위에 당연히 뒤따르는 자유로운 의식이 나와 타인의 자유의지를 일치시키려는 행위에까지 잘못 미치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와 부자유의 경계를 밝히기란 심히 어려우며, 그것이 곧 심리학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과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와 부자유의 조건을 관찰해 보면 우리 행위가 추상적일수록, 즉 타인의 행위와 결부되지 않을수록 자유에 가깝고, 반대로 우리의 행위가 타인과 결부되면 결부될수록 부자유에 가까워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떼어낼 수 없으며 답답하고 부단한 타인과의 결부는 타인에 대한 권력이라 일컬어질 뿐, 그 참된 의미는 단지 타인에게 가장 많이 속박되는 것이다.

 

집필하는 동안 시비를 불문하고 나는 이상과 같은 것을 확신했다. 이에 이 예정된 법칙이 가장 또렷이 나타나는 1807년, 특히 1812년의 역사적인 여러 사건의 묘사에 즈음하여, 사건을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다른 관련자에 비해 자유로운 인간적 행위를 그다지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에 의의를 부여할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이 내 흥미를 끈 것은 역사를 지배하는 예정된 법칙의 예증이라는 의미, 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무수한 사변을 공상 속에 만들어내는 심리적 법칙의 예증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더할 나위 없이 부자유스러운 행위를 하는 인간에게 나는 내 자유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1714∼1717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몇 마디 말들>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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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飛翔體)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중에서

 

 * * *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 S. 엘리엇의『황무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아홉 번째 권 『소돔과 고모라Ⅱ』,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두이노의 비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이런 걸작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이들 작품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해에 쏟아져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1922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해 5월 18일 저녁에 파리에서 있었던 놀라운 에피소드 하나가 후세 사람들의 흥미를 더욱 자극한다. 그날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연히 '난생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났다.

 

두 작가는 그날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초연을 축하하는 파리의 저녁 만찬에 우연히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찬 주최자로부터 서로 소개를 받은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 훗날 조이스가 친구에게 밝힌 내용이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다.

 

우리의 대화는 "아니요"라는 말로만 이루어졌네. 프루스트는 나더러 아무개 공작을 아느냐고 묻더군. 내가 그랬지. "아니요." 여주인은 프루스트에게 『율리시스(Ulysses)』의 이런저런 대목을 읽어보았는지 물어보더군. 그러자 프루스트가 말했지. "아니요." 이런 식이었지.(154쪽)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중에서

 

 

물론 두 사람의 만남은 이런 식의 대화로 싱겁게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그날 저녁에 택시까지 함께 타고 귀가할 정도로 잠시나마 무척 가까워졌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책에서 좀 더 끌어와 보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는 1922년 5월 18일 처음 만났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여우』초연이 끝난 날 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위한 파티에서였다. 무대 장식을 맡은 파블로 피카소도 참석한 자리였다. 나중에 프루스트는 택시로 조이스를 집에까지 태워다줬다. 가는 길에 술에 취한 아일랜드 작가는 프루스트에게 그가 쓴 것은 단 한 단어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떠들었다. 프루스트는 대단히 불쾌해서 차에서 내려 리츠 호텔로 갔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프루스트에게는 식사가 되는 곳이었다.

 

 - 피터 왓슨, 『생각의 탄생Ⅱ』중에서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얽힌 공통점은 무엇을까. 결국 둘 모두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는 1922년 2월 2일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프루스트는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1922년 11월 18일에 영면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파리에서 살았고, 그들이 발표한 걸작들이 당연히 온통 '파리의 화제'였을 터인데도 왜 그들은 상대방의 걸작을 읽지 않았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다시 오늘날로 되돌려 보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들 두 작가들을 두고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공통점은 어떤 게 있을까. 문학 고전에 얼마쯤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세 가지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는 점.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을 지닌 소설이라는 점, 셋째, 두 작품 모두 읽기 힘든 작품이어서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나도 여태껏 두 작가의 걸작들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부터 읽기 시작했다. 과연 익히 알려진 그대로였다. 벼르고 별러서 집어든 책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어느 독서 대가의 충고대로, 나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을 먼저 읽었고 그 직후에 곧바로 『율리시스』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독서 대가의 충고가 무색하리만치 '제임스 조이스의 앞선 두 작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율리시스』는 '너무나 방대하고도 난해한' 책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천재성이 이토록 놀랍고도 비상(非常)한 것이었던가를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나는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판본으로 읽다가, '제4개역판'이 나오자 말자 서둘러 새로 나온 책으로 바꿔서 읽고 있다. 솔직히 두 판본 간의 번역의 차이는 잘 느끼기 어렵다. 새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책의 무게'가 훨씬 거벼워졌다는 점이다. 이제야 비로소 겨우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도대체『율리시스』읽기의 난해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들은 대략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겠지 싶다. 우선, 이른바 에피파니로 불리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른 서술 방식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혹은 '하루 종일 의식을 적시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아무 데서나 작가가 불쑥불쑥 꺼내 놓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의 '의식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보지 못하는 독자들로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는 수많은 다른 작품 속에 담긴 내용들에 대한 '인유' 때문에 겪는 난해함이다. 사실 제임스 조이스는 '독자의 평균적인 독서 형편'을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숱한 문학작품들이나 음악(주로 오페라 또는 민요)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이 겪을 고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중될 게 뻔하다.

 

세 번째로는 숱한 언어 유희를 포함한 '언어의 창의적 표현 기법'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엔 물론 원작에 쓰인 다양한 언어 유희를 적당한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번역의 근본적인 한계' 또한 포함된다. 이외에도 이 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를 몇 가지 더 내세울 수 있겠지만(가령, 숱한 성경 대목에 대한 인유를 통한 다양한 종교적·신학적 문제 제기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얽힌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 부족 등) 그런 점들은 어느 작품에서든 흔히 대두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로 볼 수도 있기에,『율리시스』만의 고유한 난해성으로 언급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간과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런 '다양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주제'가 누구에게라도 예외없이 적용할 수 있는 '인생의 온갖 문제들'을 엄청나게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어쩌면 '우리의 놀랍도록 다채로운 삶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싶다. '인간 삶의 온갖 다양하고 풍요로운 모습들'이 총망라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의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온갖 생리적이고도 심리적인 요소들 가운데 이 소설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가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을 만큼 풍성하다. 그러니 제임스 조이스가 그 방대한 '인간 삶의 온갖 요소들'을 이 작품 속에 모조리 쏟아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이 작품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썼을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르겠다.

 

소설의 외관상의 형식은 어쩌면 극히 단순하다. 주인공인 신문 광고업자 블룸이 1904년 6월 16일 하루(이른바 '블룸스데이') 동안 더블린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겪는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따라가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블룸의 하루'가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것도 아니다. 비록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오뒷세우스의 놀라운 방황과 극적인 귀환'에 그 구조를 빌린 형식이긴 하지만, 블룸의 일상은 영웅 오뒷세우스보다는 훨씬 더 일상적이고 평화스럽고 평범하기만 하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친구의 장례식에 들렀다가, 사회생활(신문 광고업)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만나고, 주점에 들러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변에서 산책도 하고, 밤늦게 다시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와 아내가 깰까 봐 살며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 옆에 눕는 것으로 블룸의 하루는 끝난다. 거기서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유명한 마지막 장이 길게 이어지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건 바로 블룸의 아내 '몰리의 독백'이다. 몰리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전에 그녀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묘사하는 부분은 구두점 하나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Yes로 시작하여 Yes로 끝날 때까지 무려 4만 단어가 끝없이 펼쳐진다. 결국 이 방대한 작품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가 마음껏 표현하고자 했던 건 '하루하루의 삶 속에 담긴 놀라운 인생의 풍요 그 자체'였다.

 

(쉼표나 마침표 하나 없이 깨알같은 글씨가 끝없이 이어지는 '몰리의 독백' 부분. 제4개역판으로 37쪽 분량.)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과 시인이 되기를 지망하는 스티븐 데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동일 인물이며 작가 자신의 분신)의 '눈'과 '의식'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계는 가히 '요지경'이라 부를 만큼 풍성하지만,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그런 '삶의 풍요'와 '삶의 다양한 외관과 내면'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물론 앞서서 미리 언급했던 '율리시스 읽기의 난해함'을 끊임없이 극복하기 위해 독자가 끙끙거리며 애를 쓰는 수고가 따를 수밖에 없다. 나도 아직 이 난해하고도 풍성한 소설을 미처 다 읽지 못했지만 여태까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끄적거린 노트 몇 쪽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지닌 방대한 넓이와 깊이에 대해 거듭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총 18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을 11장까지 읽은 뒤에 잠시 본문 읽기를 멈췄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12장 이후부터의 '주석'부터 끝까지 미리 읽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특징이 주로 '본문 읽기의 어려움'에 있고, 그 이유 또한 어떤 장은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길이가 길 정도로, '본문과 주석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결국 '본문을 한꺼번에 쭈욱 읽어나가는 맛'을 도대체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울러, '주석'을 통해 끊임없이 샘솟는 듯한 '조이스의 풍성한 정신 세계'를 계속 뒤적이고 추적하는 즐거움 또한 적지 않았기에, 차라리 '주석'부터 미리 예습삼아 읽고 난 뒤에 나중에 본문을 좀 더 경쾌한 호흡으로 읽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물론 '주석'을 한번 미리 읽었다고 해서 나중엔 본문만 쭈욱 읽겠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주석'을 미리 '예습' 삼아 한번 읽고 나서 본문을 읽으면 아무래도 '본문'과 '주석'을 번갈아 읽느라 너무나 쉽게 끊기고 마는 책읽는 호흡이 그보다는 훨씬 덜 끊기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스티븐 데덜러스가 '국립도서관'에서 자신의 '셰익스피어 이론'을 펼치는 제9장의 대목들)

 

(제9장은 본문이 29쪽이지만 주석은 무려 34쪽에 달한다. 제9장에 딸린 주석만 613개.)

 

이렇게 '주석'을 미리 끝까지 다 읽고 나니 과연『율리시스』라는 작품 하나에 녹여낸 제임스 조이스의 '리스트'가 어느 정도는 윤곽이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따로 독서노트에 끄적거린 내용들도 결국 작가가 수도 없이 끌어들인 '다른 작품들의 목록과 해당 쪽수'였다. 그 내용 가운데 제임스 조이스가 '인유'한 작품 리스트만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물론 내게 지나치게 낯선 작가와 작품들은 물론 대거 생략했다.)

 

 * *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일리아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농경시』,『목가(Eclogue)』

오비디우스, 『변신』

크세노폰, 『아바나시스』

니체,『안티 크리스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밀턴,『실락원』,『리시다스』

셰익스피어, 『햄릿』,『템페스트』,『줄리어스 시저』,『멕베드』,『리어왕』,『헨리 4세』,『로미오와 줄리엣』,

                  『오셀로』,『심벨린』,『12야()』,『헨리 8세』,『페리클레스』,『사랑의 헛수고』,

                  『비너스와 아도니스』,『말괄량이 길들이기』,『뜻대로 하세요』,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루크리스의 강간』,『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겨울 이야기』,『베니스의 상인』,『헨리 5세』,

                  『과오의 희극』,『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리처드 2세』,『리처드 3세』,『한여름밤의 꿈』,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헨리 6세』, 『소네트』

테니슨, 『5월의 여왕』,『이녹 아든』,『경기병의 공격』,『인 메모리엄』,『담 틈에 핀 꽃』,『율리시스』

매튜 아놀드, 『교양과 무질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물리학』,『시학』,『영혼에 관하여』,『감각과 지각에 관하여』,『걸작』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11월의 나뭇가지들』, <셰익스피어에 관한 고찰>

단테, 『신곡』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전 아일랜드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 <예의 바른 대화>

베르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모차르트, 오페라『돈지오반니』, 『마술피리』

플라톤, 『국가』, 『소크라테스의 변명』,『파이돈』

에밀 졸라, 『대지』

도니제티, 오페라 『루치아』

찰스 디킨즈, 『올리버 트위스트』,『피크윅 클럽의 사후의 문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두 도시 이야기』

아이소포스, 『이솝우화』

마이클 발프, 오페라 『카스틸의 장미』, 『보헤미아의 처녀』, 『로첼의 포위』

토머스 무어, 『아일랜드 노래』, 『노예는 어디에』,『에린이여 옛시절을 기억하라』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파우스트』,『시와 진실』

예이츠,『퍼거스와 함께 가는 자 누구냐』,『장미』, 『이니스프리 호수』, 『캐슬린 백작부인』,『오이신 방랑기』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복카치오, 『데카메론』

조지 버나드 쇼, 『소네트의 흑부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애』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조르주 비제, 오페라 『카르멘』

뒤마, 『나는 어떻게 극작가가 되었던가』, 『몽테크리스토 백작』

플로토, 오페라 『마르타』

하이드, 『코노트의 연가』

스피노자, 『스피노자 사상집』

베네딕트, 오페라 『베니스의 신부』

메르카단테, 오라토리오 <일곱 가지 최후의 말>

알렉산더 포프, 『도덕 수필』,『머리카락 약탈』,『최초의 풍자』,『비평에 관한 에세이』

잉그럼, <사자의 기억>

새무얼 로버, <등 낮은 마차>

토머스 그레이, <비가(Elegy)>

타키투스, 『아그리콜라』

에드가 앨런 포우, <헬렌에게>

『아라비안 나이트』

벤 존슨, 『연금술사』

바이런,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돈 주앙>

놀리즈, 비극『윌리엄 텔』

워싱턴 어빙, 『스케치 북』,『졸리는 골짜기의 전설』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도』, 『풍자시』

키케로, 『투스쿨룸 논쟁』

조지 무어, 『젊은이의 고백』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종의 기원』

마크 트웨인, 『미시시피강의 생활』

플로베르,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보바리 부인』

피츠제럴드,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아트』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제신의 황혼』,『전쟁의 여신』,『니벨룽겐의 반지』

빅토르 위고, 『원시의 인간』

뒤 모리에, 『트릴비』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을 통하여』

입센, 『사랑의 희극』, 『인형의 집』

프란츠 레하르, 『유쾌한 과부』

존 드라이든, 『알렉산더의 향연』

월리스, 오페라 『마리타나』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

T. C. 콜리지, <노수부의 노래>

제임스 쿠퍼, 『모히칸 족의 최후』

롯시니, <성모가 일어섰도다>

찰스 구노, 『아베마리아』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유명한 몰 플랑드르의 행운과 불행』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람 샨디』

폰키엘리, 오페라 <지오콘다>

안티스테네스, 『헬렌과 페넬로페에 관하여』

윌리엄 새커리, 『펜데니스의 역사』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더블린 사람들』, 『영웅 스티븐』, 『피네간의 경야』

그밖에 (특별한 작품을 지칭하지 않고) 이름만 인용된 인물들

소크라테스, 테렌티우스, 칼 마르크스, 에드워드 기번, 윌리엄 블레이크, 월터 페이터, 존 러스킨, 로스차일드,

맬더스, 파스퇴르, 메치니코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멘델스존, 존 다울랜드, 로스챠일드, 구겐하임, 록펠러 등

 

 * * *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 '뜻밖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더러 '내가 읽은 책들'이 심심찮게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현장을 발견하는 재미 덕분이었다. 위에서 나열한 '리스트'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정리할 수 있을까 싶어 그런 책들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담긴 '다이달로스 신화'는『젊은 예술가의 초상』뿐만 아니라 『율리시스』에서도 여러 곳에서 거듭 인유된다. '예술가로 비상하려는' 스티븐 데덜러스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미지가 곧바로 '다이달로스의 날개'와 '이카루스의 비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 담긴 책들은 일부러 작가의 생몰연대 순으로 오래된 책들부터 맨 아래에 놓고 쌓았는데, 이들 중엔『변신』이 '최신작'이다.)

 

 

(단테의『신곡』은 '인유 횟수'로만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여러 대목에서 거듭 자주 인유되는 중요한 책이다. 그에 비하면 『돈키호테』는 세 번,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은 한 번 인유될 뿐이다.)

 

 

(나는 엉뚱하게도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나서 드디어 '제임스 조이스'에 다가갈 때가 왔음을 느꼈다. 둘 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임스 조이스는 조너선 스위프트로부터 실제로 아주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테니슨의 경우, 대표작『율리시스』(詩)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도 많이 인유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녹아든 작품들을 일일이 모두 찾아내는 일만 하더라도 크나큰 '문학적 연구과제'가 된 지 오래다. 나로서는 이 사진에 담긴 작품들이나마 '조이스'와 함께 읽었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이 사진에서 눈에 띄는 가장 큰 결핍은 아무래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통독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가 그 길로 통하는 훌륭한 안내자로 분명하게 내 앞에 다가온 느낌이 든다. 뜻밖의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어느날 제임스 조이스에게 『율리시스』는 읽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제임스 조이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율리시스』읽기가 어렵다면, 인생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인생이 불합리하다고 느낄수록 우리는 더욱더『율리시스』읽기에 도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것은 인생~' 이라는 걸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을 얻을 듯한 느낌은 확실히 든다. 아무튼 대단히 흥미롭고 놀라운 소설임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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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oo 2016-08-1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개역판이 새로 출간되었네요. 전 생각의나무 책이 있는데 아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ㅎ

oren 2016-08-11 23:50   좋아요 0 | URL
4개역판과 `생각의 나무` 판본의 `번역상의 차이`는 크게 없는 듯해요. 심지어 주석의 갯수까지 정확히 일치하니까요. 다만, `생각의 나무` 판은 각주 형식이어서 읽기는 편한데, 책 자체가 `너무나 무거워서` 한 손으로 받치고 책장을 넘기기가 너무나 힘든 단점이 있더군요. 저는 그 점 때문에 제4개역판으로 읽게 되었구요. boooo 님께서도 나중에 기회가 닿는 대로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cyrus 2016-08-1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이 나왔어도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ㅎㅎㅎ <율리시스> 절반까지 읽는 것도 대단한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

oren 2016-08-11 23:58   좋아요 0 | URL
스티븐 데덜러스라는 이름 자체가 `다이달로스`에서 따왔듯이, `미궁(迷宮) 속에 갇혀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암담한 기분`을 자주 절감하게 되면 또다시 그리로 선뜻 뛰어들어갈 용기를 쉽게 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래도 책을 거듭 읽다 보면 가끔씩 `아하, 작가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로구나` 싶은 대목을 발견하면 짜릿한 희열 같은 걸 느낄 때도 더러 있더라구요. ㅎㅎ
* * *
˝나는 『율리시스』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 제임스 조이스

yamoo 2016-08-11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악! 저 빽빽한 <율리시스>를 읽으셨습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제 <잃어버린시간을 찾아서>만 읽으시면 범접할 수 없는 문학텍스트의 봉우리를 오르시겠네요. 뭐, 그 등극은 시간 문제로 보입니다. 이런 텍스트을 꾸준히 읽으시는 오렌 님이 진정한 그레이트북스 매니아십니다!

전 몇 페이지 읽어봤는데, 다시는 읽고 싶지 않더이다..ㅎ 영문판도 있습니다만...어디다 쳐박아 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ㅎㅎ

oren 2016-08-12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랫동안 벼르다가 덜컥 『율리시스』에 뛰어들었는데, 미궁 속을 계속 더듬거리며 헤매다 보니 차츰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희미하게나마 `조이스의 문체`에 차츰 적응되는 느낌도 슬쩍슬쩍 찾아오더군요. 그럴 땐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짜릿한 희열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마치 `희박한 공기` 속을 뚫고 가쁜 숨을 물아쉬며 오르는 히말라야의 고봉을 올랐을 때 맛봤던 그런 심정 비스무리한 감정 말이지요.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런 짜릿한 쾌감을 맛보기 위해 이 책에 도전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포스트잇 2016-08-16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천개드리고 싶네요. ㅎㅎ 워낙 기본(?)이 탄탄하시니 미로를 따라 출구를 찾을 수 있으셨을 듯 싶어요.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율리시스에 담긴 다채로운 삶의 모습들을 하나씩 풀어주실거죠?
1920년대 파리에는 프루스트, 조이스, 라캉, 피카소, 카뮈... 또 기억은 안나지만 초현실주의자들도 함께 모여 연극도 하고 그랬다지요. 지금도 예술가들은 어딘가에서 서로 스치고 협연도 하고 함께 겪고... 그러고 있겠죠. .....

oren 2016-08-23 16:04   좋아요 1 | URL
포스트잇 님 반갑습니다. 제게 `좋아요`를 무려 천 개나 선사해주고 싶어하시는 크나큰 호의를 외면한 채 무려 일주일이나 흘렀군요. 제가 이 글을 올리고 난 뒤에 곧바로 바다 건너 `제주도`로 건너가서 휴가를 즐기느라 알라딘에 너무 신경을 쓰지 못했나 봅니다. 부디 너그러이 봐 주시길 바랄께요~

그런데 `프랑스 파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깊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놀라운 그 무엇인가가 늘 감도는 도시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거기서 직접 생활해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말이지요..

* * *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제시할 수 있는 세 가지

자의적이거나 의도하지 않은 온갖 취미의 독일화나 천박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인들이 자신의 유산이나 소유물로, 그리고 유럽에 대한 옛 문화적 우월함의 없어지지 않은 증거로 자랑스럽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 그 하나는 예술가적 정열을 지닐 수 있는 능력과 `형식`에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인데,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용어를 비롯하여 그 밖에 무수히 많은 다른 용어들이 창안되었다 : ㅡ 이와 같은 능력은 프랑스에서 지난 3세기 동안 결핍된 적이 없으며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 덕분에 항상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다시 구할 수 있게 된 일종의 문학의 실내음악을 가능하게 했다 ㅡ. 프랑스인들이 유럽에 대한 우월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두 번째 것은 그들의 오래되고 다양한 도덕주의적 문화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신문의 하찮은 소설가나 우연히 마주친 파리의 한량들에게서조차 심리적인 자극이나 호기심을 찾게 하는데, 예를 들면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어떤 개념도 없다(하물며 그러한 사실이 있단 말인가!). 그러한 것을 찾기에는 도덕주의적 방식의 몇 세기가 독일인들에게는 결핍되어 있는데, 이미 말했듯이 프랑스는 그것을 찾는 노력을 아낀 적이 없다. 그 때문에 독일인을 `소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독일인의 결점을 칭찬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우월함을 주장하는 세 번째 요구가 있다 : 프랑스인들의 본질에는 반쯤 성공한 북방과 남방의 종합이 있어, 이것이 그들에게 영국인들이라면 결코 파악하지 못하는 많은 일을 이해하게 만들며 다른 일들을 행하도록 만든다. {프랑스인에게는} 주기적으로 남방으로 향하거나 등을 돌리는 기질이 있으며, 거기에는 때때로 프로방스나 리그리아해(海)의 피가 가득 넘쳐 흐르는데, 이 기질은 소름끼치는 북방의 잿빛 음울함과 햇빛을 받지 못하는 개념의 유령과 빈혈증에 그들이 빠지지 않도록 방지한다. ㅡ 즉 우리의 독일적인 취미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방지하는데, 그 병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순간적으로 피와 철이라는 큰 결단으로, 말하자면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위험한 치료법에 따라서 ㅡ) `큰 정책`이 처방되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프랑스에서는 어떤 조국애에서 만족을 찾기에는 그리고 북방에 있을 때는 남방을, 남방에 있을 때는 북방을 사랑할 줄 알기에는 너무 폭이 넓은, 아주 드물고 거의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ㅡ 즉 타고난 내륙인과 `훌륭한 유럽인` ㅡ 에 대한 사전 이해와 호의가 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4절

aria 2016-09-0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서문화사판이 가독성이 더 좋다는데 어느게 더 좋은 번역일까요?

oren 2016-09-11 13:43   좋아요 0 | URL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율리시스』판본도 있었군요. 저는 실물을 살펴보지 못해서 그 책의 번역이나 주석이 어떤지를 감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다만, 동서문화사 판본의 번역을 맡으신 분이 김성숙 님으로 나오던데, 그 분은 제가 예전에『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동서문화사)이라는 책을 통해 접해본 바로는 번역이 매우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김종건 님 번역본이 비문이 다소 많다는 얘기도 간혹 있는 모양이던데, 제가 읽은 바로는 `번역상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번역한 문장 말고, 실제로 비문인지도 모르고 비문으로 번역한 곳은 딱 한 곳 정도로밖에는 발견할 수 없었답니다.『율리시스』는 워낙 `언어유희`와 `문체실험`이 가득한 작품이라 `매끄러운 의역`이 오히려 조이스가 의도한 `형식이 주는 미학` 자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동서문화사 판`을 기회가 닿으면 한번 구해서 살펴보고 싶네요. 가령 Nes, Yo(김종건 님은 `아래, 그니`로 번역)를 김성숙 님은 과연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해서요..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가 15장에서 `God`를 뒤집어 (제 생각으로는 분명히 하느님을 욕하는 뜻으로 표현한) Dooooooooooog!를 김종건 님은 `하느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님`으로 번역했는데 그런 부분도 어떻게 번역했는지 서로 비교해서 살펴보면 재미있을 듯해서요~ 우리말로는 `개새애애애애끼이이이이이!` 가 훨씬 더 알맞은 번역일 듯한데 말이지요. ㅎㅎㅎ
* * *
이러한 언어의 초현실주의적(of surrealism) 중첩은, 언어 ˝잡채(chop suey)˝로서, 그것의 함축어의 실체는 모체(matrix)와 그 측음적(側音的)(부차적) 요소(later element)로 구성되는 동음이의(homonym)이요, 표의문자(ideogrm)이다. 이는 『피네간의 경야』언어의 구성상 주맥을 이룬다. ˝치즈˝란 말의 ˝불가피한 가청성˝(귀)과 ˝불가피한 가시성˝(눈)이 상호 동시에 여기 작용한다. ˝Who`s is getting up(누가 그의 주최하는가)˝는 비어(卑語)로서, 기호상 ˝성적으로 발기시키다˝가 되는데, 문맥상으로 하자가 없다. 『율리시스』의 「키르케」장에서 사냥꾼이 매(鳥)를 유혹하기 위해 ˝Hola! Hillyho˝를 외친다. 이는 부왕의 비밀을 듣고, 햄릿이 갖는 실신의 아우성과 일치한다. ˝Hillo, ho, ho…….˝는 또한 스티븐의 부친과의 부정(父情) (paternity, consubstantiality)을 암시하는 신호이다.(『율리시스』, <역자 후기> 중에서)

나뭇잎처럼 2016-09-0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퍽 재미나게 읽고 덜컥 <율리시스>를 사놨는데 그게 벌써 십여 년이 흐른 것 같네요. 늘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한 호흡으로 읽고 싶어서 어디가 부러지지 않는 한 (알랭 드 보통도 푸르스트를 어딘가 아프지 않으면 완독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했던 것 같네요 ㅋㅋ) 언제 끝낼까 싶었는데. <율리시스>와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어느 쪽을 먼저 읽을까 늘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어요. ㅋㅋㅋ 윌리엄 포크너 <소리와 분노>를 무척 재미나게 읽어서 <율리시스>가 겁나진 않지만 시간, 늘 시간이 난제네요. 참고로 태평양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율리시스를 오래된 흑백 영화로 봤는데, 무지 재밌었어요!

oren 2016-09-11 13:36   좋아요 0 | URL
나뭇잎처럼 님 반갑습니다. 『율리시스』를 사 놓고서도 죽을 때까지 영영 다시는 꺼내 읽지 않는 사람들도 정말 많을 테지요. 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여태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래도 분량상으로는 『율리시스』가 더 읽기 쉽지 않을까요? 『율리시스』를 마침 다 읽고 난 저로서는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부터 읽어보시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네요. 『율리시스』엔 <더블린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 속에 등장했던 인물들도 정말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쨌든 `진입장벽`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관문만 잘 참고 지나가면 아주 기기묘묘한 요지경들을 실컷 만끽할 수 있는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거든요.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더더욱 『율리시스』를 아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듯합니다~
* * *
제네트의 구조주의 분석은, 예를 들면,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에서 대표적 모더니스트요, `인공두뇌학적 주인공(Cybermetic hero)`인 퀸틴(Quentin)의 의식의 구조를 닮았다. 이런 주인공은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이나, 『피네간의 경야』의 회고적(Shem)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의 숙명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Marcel)은 그가 메더란(madeleine) 케이크를 먹은 이래로 잃어버린 과거의 회고적 영웅(retrospective hero)이 된다..(『율리시스』, <역자 후기> 중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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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 빠진 인간은 결코 진실을 추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리아드네만 찾으려 할 뿐이다.

 - 니체

 

 * * *

 

 

 

 

 

(밑줄긋기)

 

그리고 그는 미지의 기술에 마음을 쓰고자 한다.
Et ignotas animum dimittit in artes.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Ⅷ, 188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題詞 중에서

 

 * * *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飛翔體)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題詞 중에서

 

 

 

 

('題詞'에 대한 나의 생각)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크레테의 크노소스 궁전에 얽힌 '다이달로스 신화'에 매료되었던가. 니체도 그랬고(왜 아니 그랬겠는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왕국에 찾아온 테세우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달아준 여인, 자신의 조국과 아버지 미노스 왕보다도 아테네에서 건너온 아름다운 왕자 테세우스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공주, 끝내 낙소스 섬에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고 만 가련한 처녀, 그런 아리아드네를 구해준 남자가 바로 디오니소스였으니 말이다.) 크레테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랬다.(이번 기회에 그동안 눈길만 주곤 했던 카잔차키스의『크노소스 궁전』을 결국 사고 말았다. 내친 김에 카잔차키스의 대표적인 작품『오디세이아』까지도 함께 샀다. 카잔차키스의『오디세이아』는 너무 방대하고 거창한 작품이어서 솔직히 겁은 좀 나지만, 언젠가는 결국 읽게 되지 않을까?) 

 

제임스 조이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구나. 이 훌륭한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 이름으로 스티븐 디덜러스('다이달로스'의 영어식 표기가 바로 '디덜러스'이다.)를 내세운 것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결국『율리시스』에서도 스티븐 디덜러스를 다시 한번 더 등장시켰으니 말이다. 

 

차마 두려워서 여태껏 제대로 집어들지 못한『율리시스』를 그래도 듬성듬성 눈길 가는 대로 펼쳐 읽는 것만으로도, 그 소설 속에 크레테 궁전에 얽힌 매혹적인 이야기와 인물들이 적잖이 담겨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명장(名匠) 다이달로스가 나무로 빚어낸 암소 덕분에 마침내 황소를 유혹하여 자신의 음탕한 욕망을 채울 수 있었던 파시파에, 거기서 탄생한 괴물 미노타우로스, 자신이 만들었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도로 거기에 갇히게 된 바로 그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던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 제임스 조이스가 마침내 '자유'를 찾아 미궁 같은 음울한 도시 더블린을 떠난 것도 다이달로스를 너무 닮았다. 그런데 조이스의 책을 읽는데 왜 자꾸 니체가 슬며시 겹쳐 떠오를까? 제임스 조이스가 '고대 그리스'에 너무나 정통했기 때문일까? 니체에 정통했던 그리스인 카잔차키스는 또 어떻고?

 

 

 

Daedalus, Pasiphae and wooden cow.

Roman fresco from the northern wall of the triclinium in the Casa dei Vettii (VI 15,1) in Pompeii.

 

 

 

《잠든 아리아드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8년, 캔버스에 유채, 91×151㎝, 개인소장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티치아노. 1522∼1523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툴리오 롬바르도, 1520-1525년경, 대리석, 높이 56cm,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카루스의 추락, 토마소 단토니오 만추올리(Tommaso d'Antonio Manzuoli), 1570 ~ 1571, 베키오 궁전

 

 

 

  * * *

 

언젠가 그 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상황에 따라 나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ㅡ 이때 그 신은 그 자리에 있었던 아리아드네Ariadne를 넌지시 암시했다 ㅡ : 나에게 인간이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은둔자의 저술에서는 언제나 황야의 메아리 같은 어떤 것, 고독의 속삭임이나 두려워하며 주의를 살펴보는 태도와 같은 것을 듣게 된다. 그의 가장 강한 말과 외침소리에서까지도 어떤 새로운 좀더 위험한 종류의 침묵이, 비밀스러운 침묵이 울려온다. 해마다 밤낮으로 홀로 자신의 영혼과 은밀히 다투거나 대화하면서 함께 앉아 있었던 자, 자신의 동굴에서 ㅡ 그것은 미궁일 수 있지만, 황금 갱도일 수도 있다 ㅡ 동굴의 곰이 되거나 보물 채굴자가 되거나 보물 수호자와 용이 되어버린 자, 이러한 사람의 상념 자체에는 마침내 어떤 특이한 어스름 빛을 띠고, 심연의 냄새와 함께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그 곁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찬 기운을 내뿜는, 무어라 전달하기 어렵고 불쾌한 것이 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독립한다는 것

 

독립한다는 것은 극소수 사람의 문제이다 : ㅡ 그것은 강자의 특권이다. 독립을 시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독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에 대한 훌륭한 권리를 가지고, 그가 강할 뿐 아니라 자유분방한 상태에 이를 정도로 대담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는 미궁으로 들어가며, 삶 자체가 이미 동반하고 있는 위험을 천 배나 불리게 된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길을 잃고 고독에 빠져 양심이라는 동굴의 미노타우루스Minotaurus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위험 가운데서도 결코 사소한 위험이 아니다. 그러한 사람이 밑바닥으로 내려간다고 할 때, 이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하게 된다 : ㅡ 따라서 그는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의 동정으로도 되돌아올 수 없다! ㅡ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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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6-07-12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잔차키스의 `크노소스궁전`을 읽어보고 싶네요. 그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부터 삐걱걸린 1인입니다. 위대하다 칭찬해마지 않는 이 작품이 물론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건 아니지만 .... 저는 이상하게 걸리더군요. ......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다시 한번 시도해봐야겠습니다.

oren 2016-07-12 15:57   좋아요 1 | URL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뭔가 삐걱거리는 느낌을 받으셨다면 그건 아마도 주인공이 `우리의 삶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조르바처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조금만이라도 닮고 싶은데, 그런 자유조차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 도리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 소설 작품을 미워하게 만드는 느낌 또한 아예 없지는 않지 싶습니다. <돈키호테>와 같은 작품에서는 도저히 맛보기 어려운, 주인공을 향한 묘한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동안에 언뜻언뜻 끼어드는 듯한 느낌을 저 또한 떨쳐내기 힘들었던 기억이 슬며시 다시 떠오르는군요. <크노소스 궁전>은 그에 비한다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지 싶습니다. `다이달로스`가 과연 어떤 성격과 행동을 지녔는지도 궁금하고 말이지요.

yamoo 2016-08-1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읽을만한가요? 조이스의 작품은 대체로 지루함을 느껴 완독한 책이 없습니다..이 책은 소장하고 있는데, 언제쯤 읽을 지 모르겠어요~

oren 2016-08-12 00:07   좋아요 0 | URL
네. 민음사판의 번역은 제 기준으로는 아주 좋았습니다. 지나치게 번역투로 흐르지도 않고 나름대로 순 우리말로 절묘하게 옮겨놓은 어휘들과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들도 많구요. `조이스 입문용`으로서가 아니라 `대작가의 처녀작`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라 봅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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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 가자! 가자!

 

팔과 목소리의 마력. 하얀 팔처럼 뻗어난 길들, 꼭 껴안아줄 것을 기약하는 길들. 그리고 달을 배경으로 서 있는 높다란 배의 검은 팔들과 먼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 그 팔들은 <우리는 외롭다. 이리 오렴>이라고 말하듯 펼쳐져 있다. 그리고 목소리들은 팔들과 함께 <우리는 그대의 혈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혈친인 나를 부르고, 떠날 채비를 하며 그 기고만장하고 무서운 젊음의 날개를 흔들 때 허공은 그것들로 가득하다.

 

4월 26일 ── 어머니는 내가 새로 구한 중고 옷가지들을 정돈하고 있다. 내가 고향과 친구들을 떠나 내 자신의 삶을 살면서 심정이란 무엇이며 심정으로 느끼는 바는 또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도록 어머니는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아멘. 그렇게 되어야지. 다가오라, 삶이여! 나는 체험의 현실을 몇백만 번이고 부닥쳐보기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의 대장간 속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리어내기 위해 떠난다.

 

4월 27일 ── 그 옛날의 아버지여, 그 옛날의 장인(匠人)이여,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소서.

 

 

         더블린, 1904년.

   트리에스테, 1914년.

 

 

(389∼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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