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문장, "사물의 원인을 아는 자는 행복하여라(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 클리프턴 패디먼


 * * *


대략 30년쯤이나 잊고 지내던 사람을 최근에야 우연히 다시 만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선은 몹시 반가울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다시 보는 구나, 라는 노인네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는 잠시나마 서로 어색할 것이다. 서로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하고 풋풋했던 그 옛날의 모습을 찾아내려 더러 애쓰기도 할 것이고, 세월의 풍파에 얼마만큼이나 시달렸는지도 몰래 살필 것이다. 어쨌든 서로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몹시 놀랄 게 틀림없다. 정작 자신이 상대방을 더 놀라게 만든다는 사실도 잠시 까맣게 잊은 채.


그런데 30년쯤 전에 우연히 책을 통해 만난 인물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문득 그 인물을 다른 책에서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그것도 몇몇 책들을 통해 거듭해서 자주 만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인물을 다시금 쳐다보게 될 것이다. 설사 그 인물은 조금도 변치 않았을지 몰라도 내가 그만큼 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책을 통해 만나는 옛 인물은 현실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살아있는 인물을 만나는 경우와는 너무 다르다. 세월의 간극 때문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크게 변한 나 자신이 전혀 변치 않은 책 속의 인물을 다시 알아보고 놀라는 꼴이 얼마나 놀라운가.


어디 책 속에서 만난 인물에 대해서만 그럴까.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속의 가공인물들도 오랜만에 다시 읽는 경우에는 틀림없이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숱한 사람들이 이미 그런 경험을 우리에게 자주 들려준다. 심지어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전혀 다른 의미와 색조로 다가오는 걸 경험할 때도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동안에 그 책 속에서 '달리 보고 느끼고 있는 자신'을 다시 만난다고 얘기하는 모양이다.


이제 시덥잖은 뻔한 얘기는 저만치 밀쳐 두고 내 얘기를 해 보자. 내가 오래 전에 만났던 책 속 인물 가운데에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어디서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 사람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한 권 남긴 고대 로마의 시인이라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건 순전히 몽테뉴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끊임없이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싯구절을 끝도 없이 책 속에 쏟아놓았기 때문이다. 몽테뉴를 만난 사람이라면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를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라는 사람을 새까맣게 잊고 지낸지 대략 30년쯤 지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아마도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통해서도 가끔씩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던 듯하다. 그 사람은 그때만 해도 내가 알던 예전 그대로의 인물일 뿐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담은 시집『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저자일 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건 몽테뉴의 책을 다시 읽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가 남긴 그 유명한 책이 드디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몇 해 전에 듣고 잽싸게 책을 사들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책을 그저 구경꾼처럼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를 다시 쳐다보게 된 건 아주 최근에 내가 마키아벨리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난 영향이 컸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알고 보니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필사할 만큼 열광적으로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군주론』과 『로마사론』곳곳에 루크레티우스로부터 받은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걸 직접 내눈으로 확인할 때에는 묘한 느낌도 받곤 했다.



(책을 쌓은 순서는 시대순을 따랐다. 가장 오래된 책인『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대략 1,000년 이상 먼지 속에 묻혀 있다가 '포조'에 의해 1417년에 발굴된 귀중한 책이다. 이 철학시집이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에피쿠로스학파의 물리학,우주론,윤리학'이다. 에피쿠로스는 무려 300여 권의 책을 썼다고 하나 지금 전해지는 것으로는 세 통의 편지와 40개의 금언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유일한 책인 셈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도 '에피쿠로스'가 맨 마지막 순서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그 어느 곳에서도 결코 루크레티우스의 이름을 단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였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교도 신앙'에 물든 사람들을 배격하는 풍토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후 세계에서의 복된 삶'을 교리 전파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카톨릭 사회가 '영혼 불멸'부터 부정하는 루크레티우스의 불온한 저서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현실을 명민한 마키아벨리가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곧바로 야콥 부르크하르트를 만났다.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마치 '본격적인 중세말 여행'을 떠난 듯 내내 즐겁고 유쾌했다. 그런데 그의 책 속에서도 루크레티우스는 어김없이 다시 얼굴을 내밀고 빼곰히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 부르크하르트를 통해 다시 만난 그는 그리 말쑥한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그는 천 년 이상이나 캐캐묵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갑자기 중세말의 이탈리아인들 앞에 불쑥 다시금 나타났던 것이다. 그를 독일 수도원의 먼지 속에서 건져 올린 사람은 포조 브라치올리니였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맨 처음엔 그저 포조가 '크세노폰의 『키루스 대왕의 교육』을 라틴어로 번역한 대가로 금화 500냥을 받은 사람'쯤으로, 그러니까 당대의 전제군주들이 문예부흥에 앞을 다퉈 크게 선심을 쓸 때 운좋게 대박을 터뜨린 학자의 한 사람 정도로 소개하는데 그쳤다.


그런데 나중에 부르크하르트가 포조를 본격적으로 소개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결코 단순히 책이나 번역하고 희귀본이나 찾아 다닌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일찍부터 '묘비명 수집가'로 활약했으며 '흉상 수집가'로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부르크하르트가 포조의 두 번째 등장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르네상스에 정통한 역사가인 그보다 더 나은 적임자가 없을 듯하다.


포조의 로마 탐방과 더불어 유적 연구는 처음으로 고대 작가 연구 및 비문 연구와 밀접히 연관되어 진행되었다(포조는 덤불을 샅샅이 헤치며 비문을 조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밀어내고 기독교적 로마라는 개념도 고의로 배제시켰다. 단지 그의 연구가 좀더 광범위하고 삽화까지 곁들여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53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3부 고대의 부활> 중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마침내 포조의 손길을 거쳐 먼지구덩이에서 빠져나올 무렵의 '이탈리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얘기를 마치 우리의 코 앞에서 바라보듯 생생하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매번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페트라르카는 읽을 줄도 모르는 그리스어판 호메로스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숭배한 사람이다. 보카치오는 칼라브리아에 사는 한 그리스인의 도움을 받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최초로 라틴어로 정성껏 번역했다. 이윽고 15세기가 되자 비로소 새로운 발견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필사를 통해 도서관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그리스어 저작들도 왕성하게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당시 가난에 몰릴 때까지 책을 사서 모은 소수 수집가들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현재 전해지는 저작물들, 특히 그리스 작가들의 저작물 가운데 일부만 갖고 있을 것이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수도사 시절부터 고사본을 사들이고 그것을 필사시키느라 빚에 허덕였다. 이때 그는 이미 르네상스의 2대 정열인 책과 건축에 헌신하겠다고 공언했고 교황이 된 뒤에는 이 약속을 지켰다. 필사가들은 필사를 했고 도서 수집가들은 그를 위해 세계의 절반을 돌며 고서를 찾아 다녔다.(263∼264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3부 고대의 부활> 중에서

필사와 번역, 도서관과 장서에 대한 당대의 흥미로운 얘기들까지 여기에 인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루크레티우스와 포조는 부르크하르트의 방대한 연구 대상에서 보자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쨌든 포조는 부르크하르트의 책에서 제법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정작 루크레티우스는 불쌍할 정도로 홀대받는다. 그는 딱 두 번만, 그것도 단지 그의 이름만 겨우 언급될 뿐이다. 그래도 나는 그 정도로도 몹시 반가웠다. 어쨌든 부르크하르트가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묘사한 첫 번째 대목을 잠시 살펴 보자.

고서 채집가인 구아리노와 포조 가운데 포조는 잘 알려져 있듯이 콘스탄츠 종교회의 때 남독일의 여러 수도원에서 활동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니콜리의 대리인 자격으로 일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키케로의 연설집 여섯 권과, 지금은 취리히 사본이 되어 있지만 그때는 장크트갈렌 사본이었던 퀸틸리아누스의 최초 완본을 발견하여, 이것들을 32일만에 모두 완벽하고 아름다운 서체로 필사했다고 한다. 그는 또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마닐리우스, 루크레티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아스코니우스 페디아누스, 콜루멜라, 아울루스 겔리우스, 스타티우스 등의 저작을 증보했고, 레오나르도 아레티노와 공동으로 플라우투스의 마지막 희극 열두 편과 키케로의 「베레스에 반대하는 연설」도 세상에 내놓았다.(265쪽)


이제나 저제나 루크레티우스가 쓴『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얽힌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가 등장할까 하고 눈이 빠지도록 부르크하르트의 글을 세심하게 읽은 나같은 독자들은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몹시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의 이름이 겨우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그마한 글자로 쓰여진 각주(脚註)에서 그에 관한 내용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책에 딸린 수많은 주석은 대부분 부르크하르트 자신이 붙였는데, 하필이면 루크레티우스의 책에 대한 각주 내용은 아쉽게도(?) 훗날의 편집자와 번역자가 붙인 별도의 주석에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이다.)


단테나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고대 철학은 바로 기독교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에서 가장 먼저 이탈리아인의 삶을 파고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에피쿠로스 학파가 부흥한 것이다. 물론 그때는 에피쿠로스의 저술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고대 후기에도 사람들은 그의 학설에 대해 다소 편향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이 없는 세계를 아는 데에는 루크레티우스*나 키케로를 통해 배운 에피쿠로스주의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어느 만큼 글자 그대로 이해했는지, 혹시 이 불가사의한 그리스 현자의 이름이 대중에게 편리한 유행어가 된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도미니쿠스회의 종교재판소가 다른 방도로는 옭아넣을 길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이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대개 일찍부터 교회를 경멸하고 있던 자들이지만, 특별히 이단적 교리나 발언을 문제삼아 고소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사치스러운 생활만 보여도 그들을 고소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단테는 「지옥편」의 제9곡과 제10곡에서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화염에 휩싸이고 반쯤 열린 석관에서 처절한 비탄 소리가 올라오는 끔찍한 무덤 안에는 13세기에 교회에 의해 격파되고 파문된 두 부류의 인간들이 누워 있다. 하나는 교회에 맞서서 특정한 사설을 의도적으로 퍼뜨린 이단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육체와 함께 사라진다고 주장하여 교회에 죄를 범한 에피쿠로스 학파들이었다.(587∼588쪽)


[가이거의 주석: 루크레티우스는 포조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 Titus Lucretius Carus. 기원전 97∼55. 고대 라틴 시인. 6운각의 산문으로 지은 6권의 교훈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가 속한 에피쿠로스파의 철학사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 기초를 두고 인간을 신에 대한 공포, 미신,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으로 집필했다. 그의 유작에 남아 있는 것을 키케로가 발견하여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역자 주)


대략적인 사정이 이러한데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줄기찬 생명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르네상스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그를 홀대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비록 부르크하르트의 걸작에서는 '색인'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지만, 루크레티우스는 '인류의 생각의 역사'에서 아주 굳건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피터 왓슨이 쓴 『생각의 역사』라는 방대한 책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그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흔적에 두루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은『생각의 역사』의 '색인'에 담긴 인물들인 마키아벨리, 포조, 페트라르카, 몽테뉴, 야콥 부르크하르트 등를 통해서 가로질러 다가가는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과제는 루크레티우스와 몽테뉴를 연결시키는 것뿐이다. 이 어려운 난제를 내가 모두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건 무리이고 과욕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이미 피터 왓슨이 '생각의 역사'에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부분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몽테뉴가 자란 세계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지성의 주요 목적은 내세에서 구원을 얻는 데 있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므로 그 주요 기능은 말하자면 "인간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몽테뉴는 그것을 엉터리로 몰아붙이고, 지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현세에서 더 올바르게, 더 생산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당시 지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문의 여왕'인 신학과 철학의 비중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 대신 심리학, 민족학, 미학에 대한 관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인문학의 탄생을 초래했다.


그 과정에서 몽테뉴는 세속 세계, 다양성의 의미와 가치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리스도교의 '내세'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서도 불신의 시선을 던졌다. "철학의 임무가 우리에게 죽는 방법과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데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가능한 한 최대의 정보를 수집한 다음 그 자료를 차분하고 현명하게 분석해야 한다." …… 이리하여 몽테뉴는 내세보다 현세를 중시했고, 그리스도교의 또 한 가지 기본적 요소인 영혼의 비중도 크게 낮추었다. 아울러 영혼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좋고 건강하며 신체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나쁘고 저열하다는 선입견도 힘을 잃었다. 그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영혼의 운명을 중재하는 성직자의 위상이 하락했다. 둘째, 성행위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는 중세의 사고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몽테뉴가 보기에 성은 고결한 것이므로 성에 관해 죄의식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743쪽)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Ⅰ』, <25. '무신론의 위협'과 불신의 시대> 중에서


이 정도로까지 일을 진척시키고 나니 내 어깨가 한결 가볍다. 몽테뉴 - 루크레티우스 - 쇼펜하우어와 니체 - (다시) 몽테뉴 - 마키아벨리 - 야콥 부르크하르트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책읽기를 통해 '내 머리 속의 루크레티우스'가 어떤 인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대충이나마 해명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루크레티우스와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이 '근대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주장을 담은 스티븐 그린블랫의『1417년, 근대의 탄생』을 읽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더 깊이있는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도 제쳐두고 그 책부터 읽겠다는 건 아무래도 루크레티우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나는 그 책을 사지도 않았다. 그 책마저 욕심내는 건 나의 우선과제는 아니다.(<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이 루크레티우스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 한 권을 너무 '침소봉대'한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도 나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 책의 영향을 지금보다 더 낮춰 평가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내가 애초에 이런 내용들을 붙잡고 길게 씨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몽테뉴를 통해 알게 된 루크레티우스의 참모습을 여기에 소개하는 일도 내겐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증명하고도 남을 '차고 넘치는 증거들'을 확인하기 위해 '미리 저장해 놓은 글뭉치'에 접근하여 '검색 엔진'을 돌렸더니 과연 그 자료들이 방대하다! 저 많은 자료들이 끌려나오는 동안에 '그르륵'하는 미세한 거부의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저 자료들을 보기좋게 살짝 다듬는 일 뿐이다.(끌려나온 글뭉치는 이 글과 함께 펼쳐놓기엔 민망스러울 정도로 길어서 일부러 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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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뭉치'에 대해 덧붙이는 말)


이 방대한 자료들을 한번 슥 읽어보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이걸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몽테뉴 사상의 핵심이 루크레티우스의『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머릿속을 들어가 보지 않으면 진실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추측의 영역'을 두고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집이 몽테뉴의 구미에 여간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하나의 독해법일지 모르겠다. 나 또한 몽테뉴가 내 구미에 잘 맞는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집을 직접 읽어보면 몽테뉴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해학과 재치가 느껴지지 않고 꽤나 딱딱한 철학서처럼 읽힌다. 차라리 내겐 몽테뉴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말 속에 루크레티우스를 절묘하게 끼워놓은 비빔밥 같은 구수한 맛이 훨씬 더 좋다. 


그의 장시는 딱딱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리학과 우주론을 시의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이 당초 어려웠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정도로 그 사상을 잘 표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뜻이 불분명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나, 그래도 힘들여 읽어 나가면 힘찬 웅변과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비전을 완벽하게 집어놓고, 아주 구체적이고 인상적인 이미지들로 그것을 풀어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는 루크레티우스의 이런 능력을 단테 이전에는 만나보기 어렵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알려진 부분(제4권 중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은 나도 '구경삼아' 대충 읽어 봤다. 거기서 몽테뉴의 철학과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연애의 형이상학'과 심지어 니체의 생각과도 빼닮은 '여러 원형들'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와 몽테뉴가 남긴 두 권의 책은 모두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이유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이 잔뜩 스며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역시 '금서'였다(마키아벨리는 카톨릭 교회와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 국가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었다).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구호는 예나 오늘이나 진리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 * *


만족해서 물러가라 102∼103

그대가 인생에서 소득을 보았다면, 그대는 거기에 포만했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어째서 마음껏 먹은 손님처럼 인생을 뜨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인생을 이용할 줄 몰랐다면, 인생이 쓸데없었다면
그까짓 것 잃었다고 서러울 것 있나? 무엇 때문에 삶을 또 바라나?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 199

나는 이성으로 어떤 사물을 이렇게 결단적으로 그릇되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우리 어머니인 대자연의 힘에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우월한 처지에 두는 수작이며, 그리고 이런 일을 우리의 능력과 역량의 척도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일은 세상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나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 손에 잡히는 대부분의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장님이 손으로 더듬듯 얼마나 컴컴한 구름 속을 거쳐서 잡게 되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참으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습관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도 보아 싫증이 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빛나는 창공을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런 사물들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이 사물이 처음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마치 그것이 갑자기 그들 눈앞에 놓여졌다고 상상하라.
이보다 더 기적에 비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것을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루크레티우스)

강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자가 처음으로 강 앞에 나왔을 때에, 그는 그것이 대양인 줄 알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사물들은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극한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큰 강이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을 못 본 자에게는 크게 보인다.
한 나무와 한 인간을 두고도 그러하니, 모든 종류에게
각자가 본 가장 큰 것은 거대하게 보인다.      (루크레티우스)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 282∼283

천성은 우리들에게 고통 없는 신체와
걱정이나 공포 없는 행복의 심정을 누릴 수 있는
마음밖에 요구하는 바가 없음을 보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군중이 어리석고 천하고 비굴하고 지조 없이 잡다한 정열의 폭풍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끊임없이 떠돌고 있는 꼴과, 이 현자의 자태를 비교해 보라.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맹목적이 되어서 이러한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농군과 왕, 귀족과 상민, 관리와 개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관찰해 보면, 갑자기 극도의 불평등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입은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이다.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331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이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그것은 다른 일보다 중대하게 보이며
그것을 향유하게 되면, 다른 갈망이 솟아나와서
우리는 똑같은 갈증에 사로잡힌다.    (루크레티우스)


서적에 대하여 433∼434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이솝 우화는 대부분이 여러 가지 의미와 해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그 이야기와 격이 맞는 어떠한 모습을 골라낸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유치하고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더 살아 있고 본질적이며 내면적인 의미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뚫어보지 못한다. 나 역시 그 꼴로 읽는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라면 시가(詩歌)에서는 베르길리우스·루크레티우스·카툴루스, 그리고 호라티우스가 유달리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가운데 전원시는 완벽한 시가 작품이라고 행각한다. 여기에 비교해 보면 그의 《아에네이스》의 어느 구절은, 작가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손질해야 될 점이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다. 내게는 《아에네이스》의 제5권이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또 루카누스를 좋아해서 즐겨 읽는다. 문체보다도 그의 고유한 가치와 사상과 판단의 진실함을 즐긴다. 저 선량한 테렌티우스로 말하면 그 라틴어의 애교와 우아미가 우리 심령의 움직임과 풍습의 조건들을 탄복할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어느 시각에나 우리 행동을 살펴보면, 나는 그의 시가 생각난다.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에게는 새로운 미와 아담한 풍치가 발견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살던 시대 가까이에 생존했던 사람들은 루크레티우스를 그에게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내 생각에도 이 비교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좋은 시구에 부딪히면 이 신념을 고집하기가 힘들다.

우리 시대에 희극을 써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이 방면에 재간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에 나오는 재료를 서너덧 합쳐 자기 것 하나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 문장의 매력이 너무나 우리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이야기의 맛은 잊어버리고 만다.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454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그것이 모두 악덕스럽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런 논법을 잘 본다. 즉, 악덕이 가장 큰 노력을 할 때에는 이성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제압한다고 하며,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그 경험을 끌어서 말한다.

육체는 쾌락을 재촉하고
비너스가 여자의 밭에 파종하려고 할 때에    (루크레티우스)

그때에 쾌락은 우리를 너무 심하게 혼미시켜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력은 그 힘을 상실하고 완전히 탐락 속에 오그라들어 정신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이 다르게도 될 수 있으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마음이란 긴장시켜서 경계심으로 굳게 다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쾌락의 충격을 억제할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품행이 단정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증언한 바와 같이, 나는 비너스를 강압적인 여신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나는 나바르 여왕이 《일곱 밤 이야기》의 하나에서 말하듯(이 작품은 그런 제재로는 묘하게 꾸며진 것이다), 한 남자가 오래 갈망해 오던 애인과 며칠 밤을 보내는데, 모든 기회와 자유를 가지고 함께 지내며 단지 키스와 접촉만으로 만족하라는 약속의 신의를 지켰다는 것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장소와 위치에 따라 489 

락탄티우스는 짐승들에게 말뿐 아니라 웃는 능력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라가 다르므로 언어가 다른 것은, 같은 종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서, 장소와 위치에 따라 메추리의 노랫소리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때로 잡다한 조류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는 소리가 대단히 달라지며,
그 중에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목소리도 변하여
목쉰 소리로 노래하는 것도 있다.      (루크레티우스)

(나의 생각)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490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위에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는다고 현자(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루크레티우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질서와 단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본성의 모습 아래에서의 일이다.

사물들은 각각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이 정한 움직일 수 없는 차이를 지켜간다.                                                                      (루크레티우스)



기가 막힐 일이다 507

두 왕들 사이에
불화로 일어난 큰 투쟁이 벌어진다.
이때 전군(全軍) 의 생기 띤 전투적 열중과
군중의 진동하는 맹위가 어떠한가는 상상에 맡겨 둔다.   (베르길리우스)

나는 이 거룩한 묘사를 읽으면, 언제나 인간성의 졸렬한 허영을 읽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 공포와 경악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저 투쟁적인 동작, 저 음향과 고함소리의 폭풍우.

검광이 번쩍 하늘에 솟으니
주위 대지는 맞부딫치는 무기의 눈부신 빛으로 번쩍이고,
인간들의 굳센 걸음에 땅이 울리고,
그 난동에 충격받은 산악의 반향은 하늘의 별들에까지
그들의 소음을 치솟아 올린다.                                    (루크레티우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가장 위대하였고, 가장 승리하였고, 이 세상이 있은 이후로 가장 강력하던 황제가, 놀잇감 삼아서 아주 재미나고 극히 교묘하게 바다와 육지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50만 명의 생령과 피가 그의 운명을 좇아 사라지고, 세계의 동서 두 부분의 힘과 부가 그가 이루려는 계획을 위해 소진되게 한 일을 들어 보자.

안토니우스가 글라피라와 사랑을 했다고
풀비아는 자기도 사랑해 달라고 내게 의무를 부여한다.
풀비아와 사랑을 하라고! 마리우스가 청해 온다면
그도 사랑해 줘야 하나?
아니다. 내게 이성이 있다면! 사랑 아니면 전쟁을!
하며 그녀는 말한다
- 뭐라고 내 생명보다 내 남근이 더 중하도다 · · · · · ·
울려라! 나팔아!                                                      (아우구스투스, 마르티알리스의 인용)

이 팔도 많고 대가리도 많은 사나운 괴물은 어쨌든 인간들이다. 허약하고 참담하고 가련한 인간들이다. 그것은 다만 뒤흔들리며 열에 뜬 개미집일 뿐이다.

검은 부대는 평원을 횡단하며 행진한다.      (베르길리우스)

거꾸로 부는 바람결, 한숨, 까마귀가 날아가며 우는 소리, 우연히 지나가는 한 마리의 독수리, 말의 헛디딤, 꿈 하나, 목소리 하나, 징조 하나, 아침 안개 하나가 그 괴물을 쓰러뜨려 굴러 떨어지게 하기에 족하다. 단지 햇볕을 그의 얼굴에 쬐어 보라.

그는 바로 녹아서 기절하리라. 시인이 노래하는 꿀벌 떼처럼 그의 눈에 먼지 한 줌 불어 넣어 보라.

우리의 모든 군기(軍旗)들, 연들, 그 선두에선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까지도 패하여 흩어진다.



털도 뼈도 없는 토끼 515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우리의 심령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자기 사정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잡히는 모든 것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고 육체적인 소질을 벗겨 없애고, 자기가 알아 둘 가치가 있다고 보는 모든 사물들을 거기서 두께·길이·깊이·무게·빛깔·냄새·거칠음·매끈함·단단함·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소질은 전부 피상적인 비천한 재료인 양 치워 두고 정리하며, 그들을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로마와 파리, 내가 상상하는 파리를, 그것이 크기도 장소도 돌도 회도 나무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며, 그들을 영생 불멸의 정신적인 자기 조건으로 조절해 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우리 심령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팔소리나 총소리나 전투에 길들여진 말이 마구간에 누워서, 마치 지금 싸움터에 있는 것처럼 자다가 꿈틀거리고 부르르 떨고 하며, 그 마음속에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와 부대가 없는 한 군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그대는 강건한 준마들이 사지를 뻗고 잠들어 누워서도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자주 헐떡이며 마치 승리를 다투듯,
온 근육을 긴장시킴을 보리라.                                                                                            (루크레티우스)

사냥개가 꿈속에 토끼를 쫓고 있다고 상상하며, 잠 속에서 그 뒤를 쫓느라고 헐떡이며 꼬리를 뻗치고 오금을 흔들며, 그리고 달음질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때의 토끼란, 털도 뼈도 없는 토끼이다.



오로지 우리들만이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 519

그뿐더러 우리는 그 결함이 바로 동물들의 감정을 거스르는 단 하나의 동물이며, 오로지 우리들만이 본성에서 나오는 행동을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고려해야 할 만한 일은 이 방면의 대가(大家)들이 명령하기를, 사랑의 정열에서 치유되려면 욕심나는 대상의 육체를 자유로이 들여다볼 일이며, 애정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자는 상대편 신체의 음부를 보고는
불타오르던 흥분이 즉시 얼어붙었다.      (오비디우스)

이런 치료법은 아마도 좀 까다롭고 냉각된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로 터놓고 친교를 맺어 가다가 싫증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성이 지닌 결함의 두드러진 징조이다. 우리네 부인들이 사람들 앞에 나오려고 자신을 분칠하며 장식하고, 여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정숙한 마음보다는 기교와 조심성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 비너스들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의 올가미로 결박해 두려는 남자들에게
자기 사생활의 이면을 은닉하려고 매우 조심한다.      (루크레티우스)



어려운 사고방식, 난해성 546∼547

결국 이런 것은 허망한 제목을 가치 있게 보이려고 하며, 우리의 정신에 호기심으로 흥미를 돋운다. 또 우리 정신을 길러 가꿀 재료라고 내주는 것이 살점 없는 헛된 뼈다귀나 갉아먹으라고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런 어려운 사고 방식을 탐하는 것일까? 클리토마코스는 카르네아데스의 문장을 보고, 그가 무슨 의견을 가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어째서 평이한 문체를 피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까다로운 자'라는 별명을 받았던가? 난해성은 학자들이 요술쟁이처럼 그들 기술의 허황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잡술로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여기에 쉽사리 속아넘어간다.

난삽한 언어로 속물들에게 명성을 떨친다.(헤라클레이토스를 가리킴)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애매한 문구 속에
숨겨진 사상만을 애호하며 탄복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무한수 567

그대의 이성은 세상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밖에는 더 그럴듯하고 견고한 기초를 갖지 못한다.

대지·태양·달·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단일하기는커녕 반대로 무한수로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



미친 생각 602

사실 반드시 멸할 자를 영원자에게 결합시키고
둘 사이에 공통의 마음과 상호 반영이 있다고 상상함은 미친 생각이다.
당연히 멸할 자를 영원의 불멸자에게 협동하여
폭풍우의 사나운 위세를 감동하도록 결합시키는 시도보다
서로간에 더 반발적이고 이질적이고 더 충돌할 일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루크레티우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같이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은 나이의 무게 밑에 합해 쓰러진다.     (루크레티우스)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 나온다 625

이리하여 세월의 회전은 사물들의 운명을 변경시킨다.
전에 진귀하게 간주되던 것은 영광을 상실하고
마침내 다른 사물이 그것을 계승하여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나온다.
매일 평가는 높아지며, 이 발견의 찬사가 꽃처럼 만발하며
그것은 인간들에게 경이로운 신용을 누린다.      (루크레티우스)



먼 곳의 일처럼 느끼짐 656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면으로 추악하고 못난 여자들이
가장 큰 영광으로 숭배받고 총애받는 것을 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우리가 싫어하는 자는 더 못나 보인다. 괴로운 처지에 고민하는 자에게는 대낮의 빛도 흐리고 컴컴한 것같이 보인다. 우리의 감각은 심령의 정열 때문에 변질될 뿐 아니라 완전히 마비되는 수가 많다.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대가 똑똑히 보는 사물에 관해서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에 따라서 마치 시간적으로 먼 일인 듯, 또는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짐을 그대는 관찰할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675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당연한 일로, 안일에서 오는 포만보다 더 우리 취미에 역하는 것은 없고,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일보다 더 우리 취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에서 쾌락은 그것을 놓쳐 버릴 위험 때문에 더 증대한다."(세네카)

갈라여, 싫다고 해라.
쾌락에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포만을 느낀다.                                           (마르티알리스)

리쿠르고스는, 사랑을 생기있게 보존하려고 라케데모니아의 부부들이 숨어서밖에 자지 못하게 하였고, 부부가 함께 자다가 들키면 다른 사람들과 자는 것만큼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날 날짜 정하기의 어려움, 들킬 위험, 다음 날의 수치,

남모를 나의 생각, 나의 침묵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호라티우스)

이것이 소스에 쏘는 맛을 준다. 사랑이라는 수작의 얌전하고도 부끄러움 많은 방식에서 얼마나 얄궂게 음탕한 장난이 나오는 것인가! 탐락은 고통으로 자극받기를 원한다. 탐락은 찌르르 쑤시는 때에 더 달콤하다. 창녀 플로라는 폼페이우스와 동침할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신이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욕의 대상을 강력히 포옹하여 신체에 고통을 주며,
이빨은 흔히 입술에 자국을 남긴다.
그 대상이 무엇이건 이 대상 자체를 상해하려는
비밀스런 행동에서 사나움의 싹이 솟아난다.                                           (루크레티우스)

모든 일은 이렇게 돌아간다. 고통이 사물들에게 가치를 준다.

저 위대한 카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것인 동안은 싫어하더니,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다음에는 그 여자를 욕심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676

나는 내 종마장에서 늙은 말 한 필을 쫓아냈다. 이놈은 암컷 냄새만으로는 붙여 볼 도리가 없었다. 제 암컷들과는 일이 쉬우니까 바로 물려 버렸다. 그러나 다른 집 암컷들은 어느 것이 목장 부근을 지나기만 해도 귀찮게 이힝힝거리며 흥분하는 꼴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우리에게 무엇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을 욕심 내게 하는 일이다.

그대가 애인을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는 머지않아 내 관심을 잃으리라.                                                   (오비디우스)

그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 둔다는 것은 경멸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다. 결핍과 풍부는 똑같이 폐단이 되고 만다.

그대는 남은 재산에 골치를 앓고
나는 가난으로 골을 싸맨다.                                                                 (테렌티우스)



반쪽의 존재밖에 709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 간다.      (루크레티우스)

이제부터 내가 되어 갈 것은 반쪽의 존재밖에 없으며,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라지며, 내 자신에서 빠져나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나하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호라티우스)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 743

우리가 갖는 쾌락이나 재물들은 고통과 불편이 얼마간 섞여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쾌락의 샘 복판에 쓴 것이 솟아나와
꽃처럼 피어나는 연인들을 괴롭힌다.                                                                                   (루크레티우스)

우리의 탐락은 극도에 도달하면 어느 점에서 신음과 오열의 풍이 있다. 이 탐락이 고민 속에 사라진다고 말하지 못할 일인가? 진실로 우리가 그 모습을 절정 상태에 꾸며 볼 때에, 우리는 그것을 오뇌·유연·허약·실신·병태 등 병적이며 고통스런 소질의 접두사로 매흙질한다. 그들이 혈연성과 동질성으로 되었다는 두드러진 증거이다.

심각한 기쁨은 쾌활성보다 더 엄격함을 지닌다. 극도로 충만한 만족감에는 유쾌미보다도 한층 안정감이 있다. "절제 없는 행복감은 그 자체를 파괴한다." 안일은 우리들을 찢어발긴다.

그리스의 한 시구 첫머리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다. "신들은 우리에게 주는 모든 일들을 판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어떠한 좋은 일도 순수하고 완벽하게 주지 않으며, 그것을 우리는 대가를 치르고 산다는 말이다. 노고와 쾌락은 기본 성질상 대단히 다르지만, 그렇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자연스런 결합으로 서로 협력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신이 고통과 쾌락을 뭉쳐서 뒤섞어 놓으려고 했다가 그것을 잘 해낼 수 없자, 이들을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인 825∼828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호메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 인물을 감탄스럽고 거의 인간 조건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섞어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는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우며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크리시포스와 크란토르보다도 더 능란하게
더 완전하게 말한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다른 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무궁무진한 샘처럼
피에리아(詩神들의 고향)의 물에
시인들은 입술을 축이러 온다.                                                                                    (오비디우스)

또 다른 자는 말하기를-                            

헬리콘(보이오티아 접경의 산, 중턱에 시신(詩神)들의 제전이 있었다) 시신들의 길동무들을 더하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호메로스만이
별무리의 높이에 오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를-

그의 풍부한 원천에서 후세의 시인들은 그들 시가에 물을 길었고
단 한 사람의 재보로 부유해져서
감히 수많은 작은 하류로
물을 끌어대는 큰 강이다.                                                                                           (마닐리우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는, 호메로스는 군사 훈련에 대단히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라케데모니아 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나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마호메드라는 이름을 두 번째 가진 터키 황제가 교황 피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는 트로이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나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 인들에 대해서 헥토르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어째서 이탈리아 인들이 내게 대항해서 단결하는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961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무(無)만도 못한 일 1006

아가멤논 이전에도 영웅은 많았건만
오랜 어둠의 망각 속에 묻혀졌다.      (호라티우스)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의 멸망 전에도
많은 다른 시인들이 다른 사물들을 노래하였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집트의 제관(祭官)들이 그들 국가의 오랜 운명과 외국의 역사를 알아서 보존하는 방법에 관해서 말한 바를 듣고 솔론이 한 이야기에, "우리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 속에 사방으로 뛰어들어 뿜어져 나가며, 두루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의 진행을 저지하는 어떤 한계도 발견되지 않는 이 시간과 공간의 한도 없는 무한대를 관찰할 수 있다면, 이 무한 속에 우리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무수한 사물의 형체들을 발견할 것이다"(키케로)라고 전하는 것은, 이 고찰에 대한 반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 온 모든 것이 진실이고 그것을 어느 누가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비하면 무(無)만도 못한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흘러가는 모든 사물들의 모습을 두고 말해도, 우리 중의 가장 호기심 많은 자가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짧은 소견의 일들뿐인가!


한 방울의 물 1053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루크레티우스)


소크라테스의 변명 1172∼1175

"여러분, 내가 당신들에게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의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사물들에 관한 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다른 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는 내 고발자들의 밀고에 걸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나는 죽음과 사귄 것도 아니고, 죽음을 아는 것도 아니며, 아무도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자기 소질을 시험해 본 자를 본 일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죽음을 알고 있다고 미리 추측합니다. 나로서는 죽음이 무엇인지, 저승에서는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무관심한 일이고, 어찌 보면 죽음은 바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 가는 일이라면, 그렇게 많은 작고한 위인들과 같이 살러 찾아가서, 이승에서의 불공평하고 부패한 재판관들과 상관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은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소멸이라면, 그런 오래고 평화로운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한 좋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고요한 휴식과 꿈도 갖지 못하는 깊은 잠보다 더 감미로운 일은 느껴 볼 수 없습니다."

······

죽음은 삶과 똑같이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이다. 죽음이 대자연에게 그의 작품들의 계승과 변천을 가꾸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그리고 이 우주 공동체에서 죽음이 손실과 파멸보다도 출생과 증식에 더 봉사하고 있는 이상, 무엇 때문에 본성이 죽음에 대해 증오심과 공포심을 조성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이와 같이 만물이 새롭게 된다.      (루크레티우스)

많은 생명들은 죽음에서 출생한다.      (오비디우스)

한 생명의 쇠잔은 다른 생명으로의 통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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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한길그레이트북스 58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지음, 이기숙 옮김 / 한길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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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해하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전도이자, 모든 수단과 본능과 천재들을 가지고 수행되었으며, 그 반대되는 가치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를 ······ 위대한 싸움은 이제껏 바로 이것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의 문제 제기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 제기는 이제껏 없었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중에서

 * * *


이 책의 저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에 관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가다. 그는 개신교 성직자 집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학 공부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이내 역사학 분야로 눈길을 돌렸고, 주로 역사학, 예술사, 문헌학, 고전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원 클럽 맨'처럼 학자로서의 경력 대부분을 바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바쳤다.


1858년에 역사학 정교수로 부임한 그는 10년 후 고전문헌학 교수로 처음 그 대학에 부임하는 청년 니체를 만났고, 저자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어렸던 니체는 저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니체는 교수 생활 10년 만에 철학에 전념하기 위해 바젤 대학을 미련없이 떠나지만, 저자는 니체가 떠난 후로도 오랫동안(1893년까지) 그 대학에 남아 역사 강의에만 몰두했다. 저자는 니체로부터 '야콥 부르크하르트 때문에 인문학이 발전했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이 책은 저자가 바젤 대학의 역사학 정교수로 부임한지 불과 2년 만인 1860년에 발표한 책이지만, 저자가 이미 오랜 기간 이 책의 저술을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발표 즉시 기념비적 대작이 되었다. 이 책은 제목에 이미 세 가지 범주가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때는 르네상스이고, 장소는 이탈리아이며, 다루는 주제는 문화사다. 르네상스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하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는지, 또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문화, 더 나아가 유럽 전체와 근대 세계를 어떻게 광범위하게 변화시켰는지가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이다.


이 책과 저자에 대한 명성은 굳이 니체의 몇몇 철학책 후미진 구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정도로 광범위하게 계속 확산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르네상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창조물이다."(독일에서 편찬된 『세계사 대계』)라는 웅변적 문장이 단적으로 말해주듯이, 저자가 이 책에서 펼쳐놓은 르네상스 연구는 학계에서 하나의 정설로 통념화된지 오래다.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최초의 생각'을 떠올린 건 1847년에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였다. '고대의 부활'을 통해 '중세의 미망'에서 깨어나 '인간의 재발견'으로 이어진 문예부흥이 르네상스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저자가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떠올렸던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오래 전부터 '폐허의 도시 로마'는 숱한 시인들과 역사가들에게 '특별한 명상'에 잠기게 만든 도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인 페트라르카와 단테는 물론, 훗날『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나 니부어에 이를 때까지도 '폐허의 도시 로마'를 휘감던 공기와 저녁 노을은 '불현듯' 천재들로 하여금 웅편거작들을 쓸 결심들을 계속 불러일으켰다. 단테의 말대로, "로마 성벽의 돌들은 당연히 경외심을 품고 대해야 하고, 이 도시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귀중하다."


사실 부르크하르트 이전에도 르네상스라는 용어와 개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이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은 바사리,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클로드 졸리, 볼테르, 괴테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 볼테르와 괴테는 거의 '르네상스의 역사'를 쓸 뻔했던 인물로 꼽힐 만큼 '르네상스 개념'에 정통했던 인물들이다. 훗날 네덜란드의 역사가 호이징가는 볼테르가 『르네상스의 시대』또는 그와 유사한 제목의 역사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테르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정적으로 '이탈리아'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는, 부르크하르트야말로 르네상스 개념을 가장 먼저 학술용어로, 또 일반적인 교양언어로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부르크하르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사와 문화사를 결합하고자 하는 웅대한 구상을 품고 방대한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야심찬 연구 작업이 끝내 완결에 이르지 못찬 채 교착 상태에 머물던 중, 그는 결국 예술사 부문(회화,건축,조각)을 따로 떼어내고 문화사를 다룬 책으로 체계를 바꿔 이 책의 출간에 이른다. 그 과정이 몹시도 지난했던 모양이다. 저자 스스로 이 작품을 두고 '역경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별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는 이 작품에 특별히 시론(試論)이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언제나 스스로 비전문가임을 자처하면서 전체에 대한 조망 능력을 지닌 '딜레탕티즘'을 강조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이 작품 초판본을 두고 고교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한 대로, '기존의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마치 거친 들에 피어난 야생화와도 같으며, 저자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가졌고 사료의 기록을 멋지게 활용하고 있다고 믿을 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은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역사서라고까지 내세우는 듯한 태도를 취할 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자신의 사후 출간된 작품인『세계사적 고찰』에서 제시한 포텐츠론(Potenzenlehre)으로 설명된다. 즉 역사는 국가 · 종교 · 문화라는 세 개의 잠재력들(Potenzen) 사이의 규제 · 견제 · 대립 · 포괄 · 보완 등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인 상을 형성해간다는 내용의 역사이론이다. 이 책에서 크게 6부로 나눈 구성 또한 저자의 역사 서술 방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에서 다루고, 문화 상황은 제2부에서 제5부에 이르는 '개인의 발전' '고대의 부활' '세계와 인간의 발견' '시교와 축제'에서 다룬다. 당시의 사회 풍습과 종교 상황은 제6부 '관습과 종교'에서 다룬다.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은 주로 '문화'를 다루는 장들에 담겨 있다. 고전과 고대의 부흥을 통한 인간의 자아와 세계의 발견, 그에 따른 개성의 성장, 자유주의와 인문주의의 발전 등은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 개념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부르크하르트의 서술이 빛나는 점은 '르네상스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 상황과 도덕적 풍조와 윤리 관념을 포함한 '관습과 종교'를 함께 고려하여 입체적으로 세세히 조명한다는 점이다. 수많은 교황과 황제가 끊임없이 반목과 견제를 주고 받으며 대립하는 당시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 상황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연구와 묘사는 독자들을 단번에 르네상스 시대의 궁전과 교황청 안으로 바싹 끌어당길 만큼 자세하고 생생하다. 굳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단테의 『신곡』가운데 유명한 대목들을 따로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당시 이탈리아의 극도로 혼란스럽고 드라마틱한 정치적 격변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숱한 암살 음모, 교황의 사생아였던 체사레 보르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악무도한 학살극, 온갖 잔혹한 군소국가 폭군들의 횡포와 만행, 용병대장들의 천인공노할 배반과 찬탈 등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르네상스의 문화가 봄을 맞은 자연처럼 사방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던 시대에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정신적인 풍토와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도 중요하다. 언어와 관습, 사교와 축제, 가족과 결혼, 음식과 질병 등 아주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듯한 저자의 설명은 '관습과 종교'에 더없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우자의 부정에 대한 복수극, 수도사와 참회 설교사들의 타락, 점성술과 마법이 만연하던 풍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확산, 갈수록 타락하는 종교에 대한 불신과 세속화 등은 숱한 풍속화와 전기(傳記) 또는 문학 작품 속 묘사 등에 대한 설명과 전거 자료를 통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핵심으로 내세우는 주제는 '이탈리아인들의 내면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주로 도출된다. 왜 하필 이탈리아 사람들이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유럽의 근대를 탄생시킨 원동력'으로 이어졌느냐 하는 문제를 단순히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몇몇 천재들, 가령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문예활동을 적극 지원한 몇몇 탁월한 교황과 군주들의 존재 덕분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은 개인이 권력을 얻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환경을 만들었다. 전통적 기준이나 권위로부터의 해방이 곧바로 개인주의가 싹트고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개인의 가치가 중시되면서 수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과 개성 넘치는 다양한 인간들이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와 자극이 그들에게 비로소 주어졌던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내면 깊숙하게 자리잡은 '개성 강한 민족성'이 이런 경향을 다른 인접국가 사람들보다 더욱 예민하게 자극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중세 암흑시대에 교회 건축물의 무게에 깔려 땅속에 묻히고 질식했던 수많은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재발견 만으로도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라틴어가 광범위하게 학습된 점도 이점이었다. 빛나는 로마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들, 가령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리비우스 등이 남긴 탁월한 작품들도 '개성의 발견'에 중요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고대 로마'가 그들의 영광스러운 과거였다는 '끈끈한 유대감'부터 남들과 달랐던 셈이다. 제노바 사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일로 대표되는 지리적 탐험 외에도 갈릴레오로 이어지는 자연 과학의 진보 또한 이탈리아에서 유독 눈부셨다.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와 인간의 발견'은 일견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총·균·쇠』의 일부 대목들을 연상시킬 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국민들의 '세계와 인간의 발견'에 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다이아몬드 교수와 유사한 방식으로 쉽게(?)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점은 도리어 매력적이다. 주로 '이탈리아의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이탈리아인들이 그런 식으로 움직였던 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가령 베네치아와 나폴리, 피렌체와 제노바 등이 지중해를 가까이 끼고 있는 덕분에 일찍부터 드넓은 세계와 활발히 접촉할 수 있었다는 점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줄곧 이탈리아 사람들의 내면 세계에 자리잡은 독특한 민족성과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심리 등을 보다 더 근본적인 '르네상스의 원동력'으로 예민하게 포착한다.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 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방대하고 세세한 문헌 자료까지 모조리 들춰보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이뤄졌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 대한 예비 지식을 미리 어느 정도 갖추지 못한 일반 독자들에겐 저자가 쓴 평범한 문장들을 읽을 때조차 편안한 호흡으로 따라가기 벅찰 때가 많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그래서 저자가 경쾌한 속도로 가볍게 서술하는 문장들을 읽을 때조차 우리에게는 몹시 생경한 인물이나 지명 혹은 낯선 용어들 때문에 방해받고 당황할 때도 많다. 또한 문장들과 행간 곳곳에 숨겨진 의도적인 생략과 압축뿐 아니라 다양한 함축과 비약들도 독자들이 쉽게 흡수하기 벅찰 때가 있다. 이런 측면들은 아무래도 독자와 저자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 수준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니 결국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때로는 저자가 수십 권 혹은 수백 권의 책들을 샅샅히 찾아 읽고 연구한 내용들조차 불과 몇 줄의 문장 속에 뭉뚱그려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때도 적지 않은 듯하다. 숱하게 옆길로 샐 수 있는 '군더더기 설명의 유혹들'을 저자는 매번 단호하게 뿌리치고 잘도 넘긴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우리에게 친절한 안내를 덧붙이곤 한다. 그런 부분들까지 세세하게 탐구하고 분석하는 일은 이 책의 과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저자가 읽은 책이 족히 수백 권을 넘어 수천 권에 이를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고 저자의 끝모를 탐구심과 놀라운 상상력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독자가 몇이나 될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만사를 이룰 것이니, 그는 수고도 위험도 손해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나 자신을 통해 시험해본 결과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강렬한 원동력에서 출발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은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물론 구이차르디니의 일생을 기록한 다른 문헌들을 읽어볼 때, 그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명성이 아닌 명예심이라는 점을 덧붙여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 어떤 이탈리아인보다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은 라블레이다. 물론 나는 이 이름을 우리의 연구에 끌어대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이 비상하고 언제나 괴이쩍은 프랑스인이 남긴 글들은 형식과 미가 없는 르네상스가 어떤 모습일지를 대략이나마 알게 한다. 하지만 텔렘 수도원의 이상향을 그려낸 그의 글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서, 여기에 들어간 최고의 상상력이 없었다면 16세기의 모습은 불완전했을 것이다.

라블레의 작품에 나오는 자유의지의 수도회 남녀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규칙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자유로운 사람들은 덕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본능과 충동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 그들은 명예라고 불렀다."

이것은 18세기 후반기를 고무하여 프랑스 혁명에 길을 터준,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바로 그 믿음이었다. 이탈리아인도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고귀한 본성에 눈을 돌렸다. …… (519∼520쪽)

결국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일반화해서 얘기하자면 '무엇에 대해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몹시 전문적인 책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인 '르네상스'가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한번쯤 심각하게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르네상스'에 대해 충분히 방대한 연구와 예리한 관찰들을 놀라운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전문적이면서도 방대하고 예리하지만 읽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는 점은 이 책의 단점이자 또한 장점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생각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놀라운 시기였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숱한 놀라운 이야기가 이 책에 거의 다 담겨 있다고 봐도 좋다. 무려 1,16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은 부르크하르트의 연구의 깊이를 방증하고도 남는다.(이처럼 방대한 주석이 딸린 책으로는 막스 베버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빼놓기 어렵다. 그 책에 딸린 저자와 역자의 주석을 모두 합하면, 내가 읽은 번역본으로는 1,242개다. 막스 베버도 그 책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이 책을 인용했다. 베버는 '이 한 줄이 너의 해석을 천 년 동안 기다려 왔다, 라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학문을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물론 그 말은 부르크하르트에게 적용해도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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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봄이다. 그런데 봄은 언제나 더디게 온다.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럴 게 틀림없다. 봄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봄이 더디게 오는 게 느껴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봄은 온다. 틀림없다. 그래도 봄은 온다. '하루 견디면 하루 견딘 만큼 우리는 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며칠이 멀다 하고 '봄 소식'을 알리는 곳도 있었다.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요즘 라디오는 문명이 발달해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 인터넷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도, 출근길 차 안에서도, 사무실에서도 틈만 나면 라디오를 듣는다. 그러니 봄에 대한 소식뿐 아니라 '봄 노래'도 꽤나 자주 듣게 된다. 어디 봄 노래 뿐이겠냐마는 그래도 계절이 바뀔 땐 노래도 계절을 탄다.

봄 노래를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 봄을 상징하는 종달새 한 마리만 떠올리더라도 벌써 여러 곡이다. 하이든이나 베토벤뿐만 아니라 평생 '겨울'만 노래했을 것 같은 슈베르트의 작품 가운데서도 봄을 노래한 가곡이 여럿이다.

뭔가 좀 알아낼까 싶어 클래식을 소개한 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펼쳐 봤더니 약간은 엉뚱한 느낌도 든다. <1 봄, 세상의 모든 사랑을 위하여>에 선곡된 곡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봄 노래는 별로 눈에 띄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거기에 나열된 '봄을 노래하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쇼팽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2번_백건우
차이코프스키 : 플로렌스의 추억_브로딘 4중주단
비발디 : 사계_파비오 비온디
스메타나 : 교향시 나의 조국_라파엘 쿠벨릭
브람스 : 교향곡 제1번, 제3번_귀도 칸텔리
베토벤 : 교향곡 제5번, 제7번_카를로스 클라이버
슈만 : 가곡집 시인의 사랑, 미르테_이안 보스트리지
테오도라키스 : 발레 모음곡 그리스인 조르바_미키스 테오도라키스
토스티 : 가곡집 이상 외_레나토 브루손

곡마다 '봄'을 느끼지 못할 특별한 이유는 없겠지만 저렇게 골라놓은 곡들이 모두 '봄 노래'가 맞느냐고 누가 질문을 한다면 대답하기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혹은 저 곡들에 일일이 번호를 메긴 다음에, <봄을 노래한 곡을 모두 고르시오>라는 문제를 낸다면 과연 몇이나 1,2,3,4,5,6,7,8,9까지 다 헤아려 낼까 궁금하기도 하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을 땐 매번 '여름 해변가'를 상상하곤 했는데, 사람마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정이란게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며칠 전에도 그 음악을 들었는데, 그때도 '아, 봄이로구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저 목록을 두고 왜 거기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가 빠져 있냐고 시덥잖은 항의를 할 생각은 없다. 음악이야말로 취향의 문제이니까. 섭섭한 생각조차도 아예 없다. 사실《봄의 소리 왈츠》는 너무 익숙하다 못해 조금 진부한 느낌까지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그 음악을 들으면 여전히 '봄'이 샘솟듯 힘찬 발걸음으로 갑자기 우리곁에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확연히 든다.



요한 슈트라우스까지 등장시켰으니 이쯤에서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 요즘 내가 가장 '봄'을 타며 듣는 노래는 단연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예전부터 그 곡을 들으며 봄을 느끼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단 한 번의 여행 경험'이 그 음악과 아주 단단히 결합하고 난 이후부터는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매번 특별한 감동으로 '봄'이 다가온다. 이제부터 그 얘길 좀 늘어놓을까 싶다.

우리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가장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때는 봄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몇 달 앞선 신년초가 더 잦을지도 모르겠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빈 필 신년음악회'의 단골 레퍼토리가 바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라데츠키 행진곡>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아버지(요한 슈트라우스)의 노래가 언제나 앞뒤로 연이어 연주되는 이유도 자세히 알고 보면 '오스트리아의 국민 감정'에 절묘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작곡한 그 왈츠곡은 포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고, 아버지가 작곡한 그 행진곡은 '군대의 사기 앙양'을 위해 라데츠키 장군의 이름을 붙여 지은 곡이었으니 말이다.

재작년 봄에 난생 처음으로 동유럽 여행을 떠나기 한 달쯤 전, 여행 준비사항 가운데 가장 어려운 미션 한 가지 때문에 잠시나마 가슴을 졸였던 일이 있었다. 음악 도시로 유명한 빈에서 2박 3일 동안 머무를 예정이니, 그때 '음악 연주회'를 듣고 싶은 여행객들은 각자 알아서 '음악 티켓'을 미리 예약해 놓으라는 당부를 여행사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물론 '연주장'까지 가는 길은 동반할 가이드가 당연히 안내해 줄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친절하게 덧붙였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서 곧바로 '핵심'에 다가갔다. 빈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빈 무지크페라인>과 빈 국립오페라극장인 <빈 슈타츠오퍼>에 접근한 것이다. 이 또한 인터넷이 발달한 덕분에 내 방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다.

그렇게 가슴 벅찬 기대를 품고 빈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빈 무지크페라인>의 황금홀을 찾았다. 감격스러웠다. 여기야말로 TV로 늘 지켜만 봤던 '세계 음악의 중심'이 아닌가 싶었다. 지휘자 프란츠 뵐저-뫼스트는 "음악가들에게 무지크페라인은 카톨릭에서 바티칸 성당과도 같다'라는 말로 그곳을 간결하게 요약했다지만, 비단 음악가뿐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황금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비숫하지 않을까 싶다.

 - 빈 무지크페라인을 정면에서 올려다본 모습이다.

    정초마다 전세계에서 5,000만 명 이상이 지켜본다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무대다.
    빈의 `음악애호가협회`는 1812년에 탄생했고, 무지크페라인은 1870년에 건축됐다고.

 

 

 - 이 공연장이 유럽 최고의 명문 음악당으로 명성을 공고하게 다진 바탕이 된 대공연장 `황금홀`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여기서 처음으로 지휘한 뒤에야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다고.

 

 

 - 로린 마젤, 카라얀,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같은 명지휘자들이 지휘했던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이곳에서 직접

   듣지 못해 몹시 아쉬웠지만, 여기서 모짜르트의 음악을 직접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이었고 가슴이 벅찼다.

   여기서 들었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는 아마도 평생 동안 잊기 힘들 듯하다.

 


이쯤에서 서양 음악을 듣기 위해 빈을 자주 찾는다는 서경식 박사의 얘기를 잠시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그가 한겨울에 빈 외곽에 위치한 장크트 맑스 묘지에서 찾은 '모차르트의 주검을 던쳐 넣었던 구덩이'에서 밝힌 소회다.


이토록 쓰리고, 그래서 투명한 곡은 없다


나는 이럴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망자의 소리가 들려오지나 않을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 대신 멀리서 아련하게 부르는 것 같은 귀에 익은 어떤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였다. 다른 어떤 곡보다 그 장소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1791년 10월, 즉 죽기 2개월 전에 완성한 것으로, 벗이자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안톤 슈타들러를 위해 쓴 것이다. 작곡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요시다 히데까즈는 이렇게 썼다. "이토록 쓰리고, 그래서 투명한 곡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음악을 몇 번이나 듣는 건 내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듣는 이한테서 자아내고야 만다. 특히 이것이 밝은 장조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인만큼 단조 때보다도 통절함은 더 전면적이다."


더 덧붙여야 할 말을 나는 모르겠다.(223쪽)


 - 서경식, 『나의 서양 음악 순례』, <모짜르트가 내던져진 구덩이>

 

 

- 빈 중심가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가운데 하나인 빈 국립 오페라 극장.
   1869년에 완성되어 모짜르트의 <돈 조반니>를 개관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다.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카라얀, 칼 뵘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총감독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 아내와 둘이서 가슴 설레며 찾은 빈 국립 오페라극장. 공연을 앞두고 저녁도 극장내 1층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줄지어 선 창구 앞에서 기다렸다가 미리 예약한 `예약번호`를 내밀자 2초도 안 걸려 미리 인쇄된 표를 바꿔준다.
   여행복 차림에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갔지만 `짐`들은 보관소에 맡겨지는 바람에 핸드폰으로만 몇장 찍었다.

 

 

 - 이곳에서 모짜르트의 작품 <피가로의 결혼>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도 우리가 비엔나에 머물

   동안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은 롯시니의 `체네렌톨라` 뿐이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예약을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그래도 예약하길 잘했다 싶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가수들의 연주도 정말 놀랍도록 완벽했지만, 관객들의
   감상 태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나같이 쥐죽은 듯 고요했고 미동도 없었다. 웃고 박수칠 때 빼고는.

 


가장 정선된 귀를 가진 자들에게 한마디

 

 ㅡ 가장 정선된 귀를 가진 자들에게 한마디 더 하겠다 : 내가 음악에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 나는 음악이 10월의 오후처럼 청명하고 깊이 있기를 바란다. 음악이 개성 있고 자유분방하며 부드럽기를, 비열과 기품을 모두 갖춘 달콤한 어린 여자이기를 바란다 ······ 나는 롯시니 없이 지낼 수는 없다. 음악에서의 나의 남쪽, 즉 내 베네치아의 거장인 피에트로 가스티의 음악 없이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내가 알프스 너머라고 말할 때는, 나는 진정 베네치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표현할 다른 단어를 찾아보면, 나는 언제나 베네치아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눈물과 음악을 구별할 수 없다. 나는 행복과 남쪽을 공포의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중에서

 


빈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쉔부른 궁전 관람'이었다. 웅장한 외관을 거의 두 시간에 걸쳐 실컷 구경하고 나서 '궁전 내부'로 막 들어갈 즈음에 하필 그날이 '임시 휴관'이라는 게 알려졌다. 아뿔싸 싶었지만 '위기는 늘 새로운 기회'인 법, 나는 몇몇 일행들을 붙잡고 빈 외곽에 위치한 '공동묘지'로 가자고 꼬드겼다. 비록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겠지만, 거기 가면 숱한 위대한 음악가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몇몇은 쇼핑할 게 남았다며 백화점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최후의 6인'이 무덤을 찾아 길을 나섰다.



 - ‘음악가들’ 묘역의 중심에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있다. 아쉽게도 모차르트의 무덤은 실제 무덤이 아닌 기념비다.
    모차르트 기념비 뒤 양쪽으로 그를 흠모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슈베르트는 아예 “죽으면 모차르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의 묘가 나란히 서 있다.

 


  - 이 사진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무덤 뒤쪽엔 <라데츠키 행진곡>을 쓴 그의 부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역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요제프 등 음악가 형제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경기병 서곡>의 프란츠 폰 주페, 지휘자인 요한 헤르베크의 묘도 발견할 수 있다고.

 


이런 여정을 거쳐 빈을 떠날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듣지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저 잘츠부르크에 들렀을 때 그 도시를 휘감아 흐르던 '도나우 강'을 살짝 엿보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 일정도 고작 '1박 2일'만 남기고 있을 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모든 여행일정의 마지막이 크루즈선을 타고 도나우강을 유람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 `도나우 강 크루즈`를 위해 수백 명이 너끈히 탈 수 있는 커다란 유람선에 딸랑 우리 일행만 승선했다.
    가이드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미리 준비한 `토카이 와인`을 테이블 위로 내놓고 있다.

 


 - 저녁 8시에 승선해서 10여 분쯤 달리자 어느새 헝가리 국회의사당 건물이 나타난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기엔 아직 주위가 너무 밝다.

 


 

 -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고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6세기 중반에 토카이 지방에서 세계 최초의 귀부 와인(botrytised wine, ~ )이 개발되어 일약 유명해졌다.

 


 

 - `도나우 강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에 저녁 노을이 차츰 물들기 시작했다.
    유람선에서는 아까부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토카이 와인과 도나우강의 물결 위로 시원하게 부딪혀오는 저녁 강바람에 취해 우리는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도나우강은 알프스에서 흘러 내려 오스트리아의 평원을 건너 북쪽 빈을 지나 멀리 동쪽 흑해로 흘러가는
    매우 긴 강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왈츠곡 가운데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곡으로, 유유히 흐르는 
    이 강의 양쪽 언덕의 아름다운 물 위에서 즐겁게 노니는 온갖 새들과 사람들과 강바람까지 연상케 한다.

 


 - 세체니 다리 아래를 지날 때쯤 부다페스트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을 `야간 조명`이 막 켜지기 시작했다.

 


 

 - 도나우 강변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건물이 바로 이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건설하는 데 20년(1884∼1904)이나 걸렸으며 `내부의 모든 것들이 현란함으로 매혹된다`는데,
    우리는 그저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야경만 봐도 충분히 매혹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 정면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빈의 의사당을 능가하기 위해` 더욱 현란하고 호화롭게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 크루즈가 끝날 무렵 문득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도나우 강 위로 펼쳐진 온갖 건물들이 마치 `동화속`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했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도 잠시나마 나의 뇌리에서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 우리 일행은 도나우 강 크루즈가 끝난 뒤에도 도나우 강변을 오르내리는 트램을 떠나기 싫어서 계속 머물렀다.
    한참 후에 트램에서 내린 우리는 천천히 산책하며 도나우 강가로 다가가 아름다운 야경을 좀 더 즐겼다.
    이 왕궁이 최초로 지어진 것은 13세기 중반이지만 몽골 군의 습격, 오스만투르크 군의 공격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마침내 큰 궁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헝가리 국립 갤러리, 부다페스트 역사 박물관, 세체니 도서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고.

 


 

 - 세체니 다리의 야경. 다리 너머로 저 멀리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도 보인다.
    길이 375m, 너비 16m인 이 다리는 중앙에 있는 48m의 돌 아치와 사슬에 의해 지탱된다고.

 


 

 - 마침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다. 오랫동안 흐렸던 날씨가 그치고 드디어 햇살이 환하게 다시 비친다.
    부다페스트를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 다시 한번 바쁜 걸음을 서둘러 도나우 강과 세체니 다리를 찾았다.

 


 

 - 세체니 다리 위에서 바라본 왕궁과 그 앞을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 강.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문인들과 예술가를 불러들여 르네상스 문화를 개화시킨 주무대 역할'을 했던,

    저 이름난 왕궁보다 내게 더욱 인상깊은 건 아무래도 '갈색빛 도나우강'이었다.

 



 - 실로 오랫만에 다시 본 푸른 하늘과 흰 뭉개구름. 
    강물만은 여전히 `오랫동안 내린 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비 온 뒤 불어난 한강`을 꼭 닮아 있었다.

 


 

 - 이 낯선 여행객은 또 어디에서 와서 이곳 세체니 다리 위에서 저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을까.
    여행이 끝나는 이 순간마저 어느새 또다른 여행을 꿈꾸는 건 왜일까. 그건 바로 여행만큼 우리의 삶에 
    본질적이면서도 항구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도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도착하기만 바란다면, 역마차를 집어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걸어가야 한다."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작《에밀(Emile)》에서 한 말이다. 나도 `도착하기` 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디에 도착한다는 말인가?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얘기했던 것처럼, `가는 것` 그 자체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 中에서



 

그렇게 나의 동유럽 여행은 끝났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함께 한 순간이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도 미처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음악과 여행'과의 결합이 상상 이상으로 강렬한 힘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발휘한다는 사실을.


2년 전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흘러나올 때마다 이 글에서 다시금 꺼내고 반복해서 보여준 여러 풍경들과 꿈같은 순간들을 매번 되살려 내곤 한다. 그때 들었던 음악과 함께. 어쩌면 여행을 통해 눈으로 봤던 여러 풍경들이 귀로 들었던 익숙한 음악과 다시 만나면서 순식간에 눈앞에서 재생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라는 음악이 내게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이 음악이 어느새 내게는 '봄'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깊숙히 자리잡고 만 셈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가 위해서라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연주 영상을 덧붙이지 않을 순 없다. 아무래도 이 글에 어울리는 연주 영상이 낫겠다 싶어 여럿 가운데 좀 특별한 걸 골랐다. 연주 단체와 때와 장소는 빈 필하모닉의 빈 무지크페라인 신년음악회다.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인데, 이 영상은 그가 '빈 필 신년음악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영상이다. 카라얀도 오스트리아 태생이고, 도나우강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지난번 동유럽 여행때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나는 그의 생가를 그냥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바쁘게 다른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 스치듯 지나치며 얼떨결에 '한 컷' 담은 사진을 오늘에야 비로소 되살려 낼 줄은 차마 몰랐다.





 

도나우 강의 물빛은 푸른색이 아니다. 하지만 유럽을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라본 낭만적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눈에 비친 강은 어느새 어느 시대에나 사랑 받는 아름다운 선율로 변했다. 강을 노래한 유명한 왈츠는 더 이상 강이 아닌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중략)


이 곡은 스튜디오에서 연주해도 그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사무친 감정이 곡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연주회를 들어 보아야 한다. 빌리 보스코프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로린 마젤, 카를로스 클라버, 리카르도 무티 등 쟁쟁한 지휘자들의 음반 중에서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2003년 연주회의 실황 음반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푸른 도나우 강》과 여러 행진곡, 폴카와 왈츠에서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디테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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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7-03-12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살 고운 봄날 아침에 본 페이퍼 사진과 음악동영상~ 모두 감동입니다!♥♥

oren 2017-03-14 00:38   좋아요 0 | URL
아직도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지만, 그래도 어느새 봄이 가득 밀려온 기분이네요.
순오기 님께서도 화창한 봄날처럼 나날이 새로운 기분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겨울호랑이 2017-03-1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멋진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도 Oren님과 같은 일정으로 여행하고 싶네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우리에게도 ‘한강‘이라는 멋진 소재가 있는데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드네요..^^: Oren님 상쾌한 일요일 봄볕 즐기시는 하루 되세요

oren 2017-03-14 00:48   좋아요 1 | URL
한강도 잘 가꾸기만 한다면 여느 강 못지 않게 아름다울 테지요. 몹시도 무더운 한여름 저녁에 상하이 와이탄의 야경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화려한 유람선보다 훨씬 더 부러운 건 ‘그저 강가에 나와 한가로운 저녁 한 때를 즐기는 그들의 평온한 일상‘이었답니다.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서울의 한강이 왜 그런 장소로 활용되지 못하는지, 그게 그때처럼 안타까운 적도 없었답니다. http://blog.aladin.co.kr/oren/5794193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1860년에 출간된 '르네상스에 관한 결정적인 책'이다. 그런데 저자가 바젤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오랫동안 몸담고 있을 때(1858년∼1893년) 만난 인물 가운데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인물 한 사람을 그냥 모른 체 지나치긴 어렵다. 그사람은 독일 철학자 니체였다.

바젤 대학에 '고전문헌학 교수'로 부임하기 전부터 '고전과 고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니체로서는 부르크하르트를 만나게 된 것도 크나큰 행운이었던 듯하다. 니체가 바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주로 연구했던 인물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의 저자), 호메로스, 데모크리토스, 아리스토텔레스, 헤시오도스 등이었고, 철학자들 가운데는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있었다. 그리스 문헌학에 관계되는 교수자격논문과 칸트와 관련된 철학박사논문 등을 계획하던 니체는, 박사학위나 교수자격논문 없이도 바젤의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그리로 옮긴다. 향후 '독일 문헌학계를 이끌어갈 선두적 인물이 될 것'이라는 리츨의 적극적인 천거 덕분이었다.

니체의 연보를 보면, 1869년에 바젤 대학으로 부임한 첫 해부터 부르크하르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는 '부르크하르트를 존경하여 그와 교분을 맺는다'고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니체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고 부르크하르트는 그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많았다. 그 두 사람은 동료 교수라기보다는 사제지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형편이었다. 니체 또한 바젤 대학에서 10년간 교수로 일했으나 '철학'에 전념하기 위해서 결국 교수직을 그만두게 된다. 부임하던 첫해부터 부르크하르트와 교분을 쌓았던 니체가 그의 예술사 강의를 외면했을 리는 없었다. 니체는 부르크하르트의 강의를 직접 들었고,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라며 존숭해 마지 않았다.

니체의 저작을 통해서 니체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관계를 짐작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니체는 말년의 저작인『안티 크리스트』에서 <르네상스가 무엇인지 드디어 이해하였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이 대목이야말로 자신뿐만 아니라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목소리를 직접 대변하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그렇다고 니체가 그 대목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책세상에서 나온 니체전집에서는 극히 한정된 '주석'이 딸려 있는데, 거기에서 겨우 부르크하르트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라는 대목 뒤에 다음과 같은 간략한 주석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J.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Leipzig, 1869), 91∼95)

니체가 부르크하르트의 이름을 일부러 꽁꽁 숨겼던 건 아니다. 그는『안티 크리스트』에 뒤이어 출판한『우상의 황혼』에서는 아예 드러내 놓고 야콥 부르크하르트를 칭찬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예외 중의 예외를 제외하고 보면, 교육의 첫 번째 선결 조건인 교육자들이 결여되어 있다 : 그래서 독일 문화가 하강하는 것이다. ㅡ 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중에서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와의 인연을 다소 장황하게 소개한 건 '고대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그 두 사람이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그토록 르네상스의 의미를 강조한 것도,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라는 거작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것도 '고대의 부활을 통한 인간 본연의 가치 재발견'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가 깡그리 부정되었다'고 외친 니체의 울부짖음은 다시 들어봐도 가슴 저릿한 울림이 있다. ☞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많이 늦었지만, 이제 다시 이 글을 쓰게 된 '맨처음 동기'로 되돌아 오자. 우리가 자주 듣는 <카르미나 부라나>는 어쨌든 우리가 대충(?) 알기로는 칼 오르프가 1936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작품이라는 정도다. 그런데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 담긴 <카르미나 부라나>에 관한 내용은 칼 오르프의 작품보다 무려 76년이나 앞선 것이다. 칼 오르프가 <카르미나 부라나>를 작곡하기 전에도 일부 사람들은 그 음악을 제법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카르미나 부라나>에 관한 상세한 언급을 1860년에 발간된 책에서 발견하는 건 아무래도 좀 놀랍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놀라운 음악을 야콥 부르크하르트도 생생하게 미리 상상해서 우리처럼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쨌든 '고대의 부활'은 '어떤 경로'를 통하든 놀랍도록 매혹적이다. 그것이 책이든 음악이든 말이다. 앞으로 <카르미나 부라나>를 들을 때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다음 설명을 늘 함께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이탈리아인, 그것도 롬바르디아 사람'이라는 부르크하르트의 예감을 쉽게 거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 * *


거기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인, 그것도 롬바르디아 사람이라는 예감


이탈리아에서는 고대가 북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하였다. 야만의 시대가 끝나자마자 아직 절반쯤 고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이 민족의 마음속에 과거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를 찬양했고 그것을 재생하고자 했다. 다른 나라는 학문과 성찰의 목적으로 몇 가지 고대의 요소를 이용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학자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까지 고대 문화 전반에 실제적인 흥미를 보였다. 고대는 그들의 위대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아직 남아 있는 수많은 과거의 기억과 기념물들이 이 같은 흐름을 강하게 밀고 갔다.


이 흐름과 더불어 그 사이 변화한 게르만족과 롬바르드족 국가의 민족정신, 보편적인 유럽의 기사도, 북유럽 문화의 영향 그리고 종교와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의 본보기가 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 근대 이탈리아 정신이었다.


야만 상태가 끝난 뒤 고대가 얼마나 조형미술에서 활기를 띠었는지는 12세기의 토스카나 건축과 13세기의 조각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시문학에도 같은 사례가 없지 않은데, 그 근거로 우리는 12세기 최고의 라틴 시인이자 그 무렵 라틴 시의 모든 장르를 주도했던 사람이 이탈리아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이른바 『카르미나 부라나』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들을 지은 인물이다. 현세와 현세적인 향락에서 얻어지는 끝없는 기쁨이 압운(押韻)된 시구를 통해 화려하게 흐르고 현세의 수호자로 고대 이교의 신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단숨에 읽어보면, 거기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인, 그것도 롬바르디아 사람이라는 예감을 그 누구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또다른 확실한 근거들이 있다. 12세기의 방랑성직자들이 읊은 이 라틴 시들은 그 두드러진 외설까지 포함하여 어느 만큼은 유럽 공동의 산물이다. 하지만 「필리스와 꽃」이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며」를 지은 사람은 추측하건대 북유럽인이 아니고, 「투명한 달빛이 늦게 올라오는 동안」을 지은 섬세하고 향락적인 관찰자도 북유럽 사람은 아니다. 이 시들에 나타나 있는 것은 고대 세계관의 부활이며, 그것도 중세풍의 운율에 실려 표현됨으로써 그만큼 더 우리의 눈길을 끈다. 12세기부터 몇 세기에 걸쳐 6운각과 5운각을 세심하게 모방하고 내용에서도 갖가지 고대의 소재들, 특히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 많이 나왔지만 고전 시대의 느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귈리엘무스 아풀루스가 쓴 6운각의 연대기를 비롯해 그후의 작품들에서는 가끔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루카누스, 스타티우스, 클라욷아누스를 열심히 연구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고전 형식들은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에서만 사용되었을 뿐이고, 보베의 뱅상 같은 편찬자나 인술리스의 알라누스 같은 신화학자 겸 우의작가가 원용한 고대의 소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수집이 아니라 부활이었다. 또한 그 부활은 12세기의 무명 성직자들이 지은 저 시편 속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48∼249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3부 <고대의 부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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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3-0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까르미나블라나를 대학시절 첨 접하고 좋아하는데, 카르미나 블라나를 저급한 음악 취급했던 사람이 있었더랬죠.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도 제가 이쪽으로 지식이 소박하여 그리하지 못했는데 님의 페이퍼를 보니 위안이 됩니다. 고밉습니다.

oren 2017-03-05 23:41   좋아요 0 | URL
중세 시대에 숨막히는 수도원 생활을 견디다 못해 그곳을 박차고 떠난 방랑성직자들이 부른 노래들이고, 아무래도 ‘현세의 향락‘을 담은 외설적인 노래가 많다 보니 ‘저급하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더러 있게 마련이겠지요.
 
간통 같은 독서



탄핵을 코앞에 둔 까닭일까? 책 속 구절들도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한 줄의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 연관된 다른 책을 떠올리고, 거기서 다시 또다른 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게 다 '대통령 탄핵'을 코앞에 둔 '썩어빠진 나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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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나 나폴리가 공화국이 되기에는

 

마키아벨리처럼 사려 깊은 사람들은 밀라노나 나폴리가 공화국이 되기에는 너무 '부패'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5. 전제정치의 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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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속들이 썩어버렸기 때문


로마의 실례만큼 이 점에 꼭 맞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가를 멸망시킨 뒤 로마는 곧바로 자유를 획득하여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나 가이우스 칼리굴라, 그리고 네로가 죽고 카이사르의 혈통이 완전히 절멸한 뒤에 로마는 자유를 유지하기는 커녕 그에 한 발도 접근할 수 없었다. 같은 도시를 무대로 해서 같은 조건 아래 생긴 일인데도 결과가 아주 정반대로 되어 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인이 아직 그다지 타락해 있지 않았던 데 비해, 카이사르 시대에는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의 민중으로 하여금 국왕의 압제 정치를 물리치고자 굳게 결의시키는 대신, '로마에서는 앞으로 어떤 왕도 통치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민중에게 맹세시키는 일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전 오리엔트의 지지를 배경으로 가진 브루투스의 권력이나 가혹함을 가지고도 로마 민중을 분기시켜서 자유를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브루투스는 초대 브루투스를 본받아서 로마 민중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이처럼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때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가 민중에게 심어 놓은 타락한 풍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평민당 수령이 된 카이사르는 교묘하게 민중의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목에 칼을 쓰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상과 같은 로마의 실례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예를 꺼낸다 해도 맞설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이 점을 둘러싸고 현대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생생한 실례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즉 천지가 뒤집힐 대소동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밀라노나 나폴리가 두 번 다시 자유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국민은 속속들이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참주였던 필립포 비스콘티가 죽자 밀라노는 자유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유를 유지해 나갈 역량도 없거니와 방법도 알지 못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그간의 사정에 대해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에서는 왕 제도가 금방 타락해서 추방되는 바람에 국왕의 부패한 양상이 로마의 골수에까지 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었다. 이런 부패와 타락은 로마에 대해 혼란을 초래했으나,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단단했기 때문에 공화국은 전화위복이 될 수 있었다.


이제 결론을 내릴 단계가 되었다. 민중들만 건전하면 어떤 소동이나 내분이 일어난다 해도 국가 자체가 손상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민중이 부패했을 경우에는 법률이 잘 벙비되어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최고 권력을 가진 한 인물이 나서서 민중이 건전한 사회의 부활을 위해 법률을 성실하게 지키게끔 만들지 않는 한 전혀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다지 길지 않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서는 장기간을 통해 심어져 온 도시의 부패한 풍조를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에는 도저히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즉 장수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정무를 보살필 수 있는가, 아니면 우연히 2대를 계속해서 명군이 나타나 뛰어난 통치를 하게 되지 않는 한, 지금 말한 것처럼 지배자가 죽으면 곧바로 파멸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비록 말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한 숱한 유혈의 희생을 치러서 성립된 국가라 할지라도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즉 부패라든가 자유로운 정치 형태를 유지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원인을 밝히면 그 국가 속에 배어 있는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등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비상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과감한 개조법을 몇몇 사람이 알고 사용하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히 말하기로 하겠다.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1권 제7장 <퇴폐한 민중은 해방된다 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해 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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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는 없다! 그는 공적(公敵)이다.


군주권이 절대적이었고 일체의 법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웠듯이 그 대적자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보카치오는 다음처럼 노골적으로 얘기한다. "폭군을 왕이라고, 군주라고 부르면서 나의 왕으로 모시듯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공적(公敵)이다. 나는 그에게 대적하여 무기, 모반 간첩, 복병, 술수, 그 어느 것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신성하고 불가피한 일이다. 폭군의 피보다 더 유쾌한 희생은 없다."


이와 관련한 사건들의 전모를 여기에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론』의 저 유명한 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참주 시대에서 시작하여 고금의 모반사건을 다루면서 그것들을 다양한 특성과 결과에 따라 냉철하게 평가해놓았다.(120∼121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5. 전제정치의 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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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안녕의 본보기로 시민들이 세우다


메디치 일가를 몰아내려 했고 실제로 여러 차례 몰아낸 피렌체 시민들은 폭군 살해를 일반인이 인정하는 이상으로 생각했다. 1494년 메디치 일가가 도주하자 사람들은 그 궁에서 도나텔로의 청동 군상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딧」상을 들고 나와 지금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서 있는 시노리아 궁 앞에 갖다 놓고 '국가 안녕의 본보기로 시민들이 세우다. 1495년'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피렌체 시민들은 특히 로마제국을 배신한 죄로 단테의 작품에서 카시우스와 유다스 이스카리오(예수의 제자 유다를 가리킨다-옮긴이)와 함께 지옥의 나락에 빠진 것으로 묘사된 브루투스를 이상으로 삼았다.(124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5. 전제정치의 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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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조상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왕정을 몰락시킴으로, 로마인들은 그가 칼을 빼들고 선 동상을 카피톨리움에 있는 왕들 동상 사이에 세웠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한 그는 남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학문으로도 그런 성격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독재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독재자와 공모한 자기 아들들까지 모두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제부터 쓰려는 브루투스는 성격이 유순한 데다가 철학과 학문을 갈고닦아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나랏일에 헌신했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나쁘거나 잔인한 일들은 브루투스의 친척이자 친구인 카시우스 잘못으로 돌렸다. 그만큼 카시우스는 정직함이나 동기의 순수함에서 브루투스를 따라가지 못했다.(177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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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


카시우스는 어릴 때부터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술라의 아들 파우스투스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날 파우스투스가 아이들 앞에서 자기 아버지 권력을 내세워 한 껏 자랑을 늘어놓자 카시우스는 갑자기 그에게 달려가 뺨을 갈겼다. 이 일로 파우스투스 친척들은 카시우스의 잘못을 철저히 조사해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으나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가로막으며 두 아이를 함께 불러서 이 문제를 조사하려 했다. 그때 카시우스는 파우스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파우스투스! 다시 한 번 지껼여 봐. 똑같이 때려줄 테니까."


이 이야기만으로도 카시우스가 얼마나 날카로운 성미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 까닭은 카시우스와는 좀 다르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익명의 편지들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옛날에 왕정을 뒤엎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 동상에 이런 글을 새기기도 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브루투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법무관인 브루투스가 법정에 나갈 때면, 그의 자리에는 다음 같은 글이 적힌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자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한 브루투스인가?"


하지만 브루투스가 카이사를 암살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을 빌려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 했고, 한밤에 몰래 카이사르 동상 위에 왕관을 씌워놓아, 집정관을 넘어서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카이사르 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1778∼177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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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4 1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국도 우리나라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부패가 심각한 사실을 아는데도,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박사모 회원들이 부끄럽습니다. 박사모가 최순실이 인권 침해를 받는다면서 유엔에게 호소한답니다. 이제는 그들을 비웃고, 욕할 힘도 없어요.

oren 2017-03-04 17:36   좋아요 0 | URL
나라를 부끄럽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도리어 나라를 구한다고 태극기까지 흔들고 외치고 있으니 이런 희비극도 없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