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담판으로 불려 왔던 '북미정상회담'이 하룻밤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듯하다. 어쩌면 아직도 불씨가 완전히 다 꺼진 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시시각각 다양한 속보가 아직도 잔불처럼 깜빡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회담 하나를 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입방아에 앞다투어 올렸을지를 생각하면 여간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다. 이 회담에 쏠린 사람들의 이목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으며, 또한 이 회담을 두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엄청난 텍스트만 하더라도 어떻게 그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소한 궁금증들은 어찌보면 너무나 한가롭고도 쓸데없는 '심심풀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 회담의 성사 내지는 성공 여부가 초래할 온갖 심대한 변화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 거대한 변화가 두고두고 숱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못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토록 거대한 판'이 산산조각난 결정적 동기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곰곰 되짚어 보게 되고, 그런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의 '내면 심리'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 전쟁이라는 끔찍한 참화를 겪은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따스한 기미'조차 없었던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이 연탄을 보고 노래했던 '너는 언제 한번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을 새삼 떠올릴 필요도 없을 만큼, 그들 둘 사이는 도대체 뜨거워지기는 커녕 미지근한 기미조차도 없이 언제나 찬 바람만 쌩쌩 불었고, 여차하면 '불바다' 내지는 '분노의 화염'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끔찍한 사이였다.

 

이토록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으니 '세기의 담판'이 성사되기 위한 '맨 처음 고백'이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또한 북미정상회담은 단지 북미간의 일도 아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서로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 '북한 비핵화'와 'CVID'만큼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도 따로 없는 셈이다. 그러니 김정은이 40여일 사이에 중국을 두 번이나 바삐 오가고, 폼페이오가 그 멀리서 평양을 두 번이나 들락거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또한 북미 수뇌들의 메신저 역을 떠맡은 온갖 사람들이 때론 거칠게, 때로는 달콤하게 온갖 다양한 언사를 거듭 주고받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깨진 판'을 다시 이어붙일 수 있다는 희망섞인 속보가 연일 날아들 정도로 숨가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긴 하지만, 적어도 '판'이 깨어질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은 인간의 심리 가운데 몇 가지는 결국 누군가의 분개, 혹은 누군가의 모욕감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들의 '도덕 감정'에 대한 훌륭한 교사였던 아담 스미스 교수님의 강의 한 대목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게 되고, '굴욕과 모욕 사이'를 절묘하게 간파한 우리의 세르반테스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다시금 펼쳐 보게 되었다.(『돈키호테』 속에 담긴 이런 대목 하나만 다시 꺼내 보더라도 이토록 훌륭한 걸작을 남긴 세르반테스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토록 재미나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어쩌면 이토록 심오한 인간 심리를 칼날같이 예리하게 파고들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 * *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65∼66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 알라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과 허영'에 관한 이야기

 

 

* * *

 

 

『돈키호테_2권』에 등장하는 '굴욕과 모욕의 차이'에 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배경 설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걸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615년에 발표된『돈키호테_2권』은 애시당초엔 세르반테스의 구상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1605년에 발표된 『돈키호테_1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사정이 돌변했다. 온갖 정체불명의 속편들이 난무했고, 범람하는 수많은 해적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도저히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가짜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과 더불어 독자들의 불같은 성화에 견디지 못한 세르반테스는 결국 속편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죽기 몇 달 전에 가까스로 출간된 그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무려 68세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어쨌든 세르반테스가 10년 만에 다시 속편으로 쓴 『돈키호테_2권』은 1권에서 이미 모험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고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다시 '모험'에 나서도록 만들어야 했다.(그나마 1권에서 돈키호테가 멀쩡히 살아서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2권에서 (숱한 해적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가 막힌 설정'을 도입한다. 2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이미 1권의 이야기가 시중에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 있다는 설정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돈키호테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겪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빤히 알고도 속이는 공작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공작부인은 사냥터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숲속을 헤매던 돈키호테와 산초를 공작의 궁전으로 데려온다. 공작은 궁궐에 있는 하인들을 '사전 교육'까지 시켜 돈키호테를 '진짜 중세의 기사'로 대접하도록 꾸민다. 드디어 꿈꾸던 모험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돈키호테와 산초는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지에 빠져든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바로 자신들의 꾐에 넘어간 돈키호테와 산초가 벌이는 기가 막힌 행동들을 보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바로 이 와중에 '굴욕과 모욕에 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이 등장한다.

 

어느 날, 돈키호테와 산초가 머물고 있는 공작의 궁전 만찬에 성직자가 한 명 초대되는데,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초대된 그 성직자가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직자는 거인이니 비겁자니 마법이니 하는 말을 듣고서야 저 사람이 바로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공작이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읽는 그 자체가 바로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몇 번이나 공작을 나무란 바 있었으니, 자기가 의심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는 마구 화를 내며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 나리, 나리께서는 이 알량한 자의 행동을 우리 주님께 보고드려야 합니다. 이 돈키호테인지, 돈 바보인지, 아니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작자는 나리가 바라는 만큼 그렇게 우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는 이 작자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짓을 하도록 쉽사리 기회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군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설교를 돈키호테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당신, 머리가 텅 빈 자여, 스스로 편력 기사이고 거인들을 이기고 악당들을 사로잡았다는 생각을 그 뇌 속에 집어넣은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좋게 말할 때 잘 가시오. 집으로 돌아가서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나 키우고, 재산이나 살피시오. 바보 짓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당신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은 그만두시오. 재수 없게 그런 편력 기사가 있었다느니, 오늘날도 있다느니 하는 것들을 대체 어디서 들은 거요? 에스파냐 어디에 거인이 있으며, 라만차의 어디에 악당이 있단 말이오?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니 뭐니, 당신과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있는 그 모든 잡동사니 같은 바보 짓거리들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이오?」

 

돈키호테는 존경받는 그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제 그가 입을 다물자, 공작 부부에 대한 존경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친 채 당황한 얼굴에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는 말했다.이 말만으로도 한 장을 이룰 만하다.(402∼403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2권』, <31장, 수많은 큰 사건들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31장이 끝난다. 곧바로 이어지는 32장에 '굴욕모욕의 차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과 산초 판사 특유의 입담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대목을 (다소 길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5쪽 분량으로 충분히 인용해 볼까 한다. 핵심적인 부분만 덜렁 떼어 옮기면 아무래도 '충분한 이해'를 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할 테고, 돈키호테가 느낀 '인간 심리의 여러 감정들'을 제대로 살필 수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난 돈키호테는 마치 수은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며 더듬대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와 지금 내 앞에 계신 분, 그리고 당신의 직분에 대해 내가 늘 가져 왔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존경심이 당연히 터뜨려야 할 내 분노의 손을 막으며 붙들어 매고 있소이다. 내가 방금 말씀드린 이유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무기는 여인들의 무기와 마찬가지로 혀이기에, 나 또한 혀로 나리와 똑같이 싸움을 벌일 작정이오. 나리에게는 그런 모욕적인 비난보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를 기대하고 있었소. 좋은 의도로 하는 성스러운 비난은 이와 다른 정황을 필요로 하며 다른 기회를 요구하오. 그러니까 적어도 공공연하게, 그것도 그토록 신랄하게 나를 비난한 것은 좋은 의도로 하는 비난의 한계를 죄다 넘는 일이오. 훌륭한 비난은 신랄함보다 부드러움 위에 훨씬 더 잘 안착하기 때문이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로 죄인을 얼간이니 바보니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오. 아니라면 말씀해 보시오. 나한테서 어떤 어리석은 짓을 보았기에 나를 지탄하며 모욕을 가하는 것이오? 게다가 내게 아내가 있는지 자식들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집으로 돌아가 집과 처자식 돌보는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다니. 덮어놓고 남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가 그 집의 주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거요? 어느 기숙사에서 궁핍하게 자라 고작해야 그 지역에서 20레과나 30레과 안에 있는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적이 없는 자가 갑자기 기사도 규정을 들먹이고 편력기사들을 판단하겠다고 끼어들어도 된단 말이오?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찾는 대신 혹독한 시련을 통해 불멸의 자리에 오른 훌륭한 분들이 간 길을 따르는 것을 설마 헛된 일이거나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보는 건 아니시겠지? 만일 기사나 뛰어나신 분이나 관대하신 분이나 태생이 높으신 분이 나를 바보 취급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하지만 기사의 길에 들어온 적도 없고, 그 길을 밟은 적도 없는 학생이 나를 멍청이로 본다면 난 콧방귀도 안 뀔 테요. 나는 기사이며,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기사로 죽을 것이오. 어떤 사람은 오만한 야심의 광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천하고 비굴한 아부의 광야로 가며, 또 어떤 이는 속임수 많은 위선의 광야로, 어떤 이는 참된 종교의 광야로 가지만 나는 나의 숙명에 따라 편력 기사도의 좁은 길로 가오. 그 길을 따르고자 나는 재산을 경멸하지만 명예는 아니오. 나는 지금까지 모욕을 갚고 굽은 것을 바로잡으며 무례함을 벌했고 거인을 이기고 괴물들을 짓밟았소이다. …… 나는 나의 의도를 늘 훌륭한 목적에 두고 있소이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오. 이러한 일을 이해하고 이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며 이러한 일을 떠받드는 자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지, 위대하신 공작 각하 내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와우, 정말 잘하십니다요!」 산초가 말했다. 「나리, 더 이상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요. 우리 나리, 우리 주인님, 설명도 필요없습니다요. 더 이상 말할 것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더 이상 세상에 참고 버틸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요. 더군다나 이분이 편력 기사들은 세상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부정하고 계시지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아는 것은 전혀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요?」

 

「혹시, 형제여 …….」 성직자가 말했다. 「자네가 주인으로부터 섬을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그 산초 판사인가?」

 

「예, 그렇습니다요.」 산초가 대답했다. 「어느 누구나처럼 저도 섬을 가질 만한 사람입니다요. 그리고 저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라. 그러면 너도 좋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함께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함께 풀을 뜯는 사람>들 중 하나이며, <좋은 나무에 기대는 자는 좋은 그늘을 쓴다>라는 걸 아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요. 저는 좋은 주인에게 기대어 그분을 모시고 다닌 지 몇 달이 되었습니다요.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저도 그분처럼 다른 인간이 될 겁니다요. 그분이 사시면 저도 사는 것이니, 주인 나리께서 통치하실 나라가 있을 것이므로 제가 다스릴 섬도 있을 겁니다요.」

 

「분명 있고말고, 산초 친구여.」 이때 공작이 말했다. 「내가 돈키호테 나리의 대리자로서, 내게 남아도는 꽤 괜찮은 섬을 하나 자네에게 통치하도록 하겠네.」

 

「무릎을 꿇게, 산초.」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리고 자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각하의 발에 입을 맞추게.」

 

산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성직자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불쾌한 듯 말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사제복을 두고 말하고자 합니다. 각하도 이 죄인들만큼이나 멍청하십니다. 이들이 미친 사람들인지 아닌지 제대로 좀 보시지요! 제정신인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들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마당이란 말입니다. 각하께서는 이 사람들과 계십시오. 이 사람들이 여기 있는 동안 저는 저의 집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않았고, 공작 부부의 간청과 만류도 소용없이 먹지도 않은 채 가버렸다. 비록 공작은 그가 당치 않을 정도로 화를 낸 것이 어찌나 우스운지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말도 많이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 돈키호테에게 말했다.

 

「<사자의 기사> 나리, 나리께서는 나름대로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셨소. 그러니 그 굴욕에 대해 더 이상 유감은 없을 것이오. 사실 그것이 굴욕으로 보일지 모르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소. 나리도 잘 알다시피, 여자의 말로 굴욕을 당할 수 없듯이 성직자의 말로도 굴욕을 당할 수 없으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굴욕을 당할 수 없는 자는 아무도 모욕할 수 없지요. 여자들이나 어린애들이나 성직자들은 모욕을 당해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굴욕당할 수가 없습니다.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굴욕모욕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모욕모욕을 줄 수 있고 모욕을 주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자로부터 옵니다. 반면 굴욕모욕을 주는 일 없이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한 사람이 길에서 딴 데 정신이 팔려 서 있는데, 무기를 든 사람 열 명이 와서 그를 두들겨 팼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칼을 뽑아 들어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삳대방의 수가 많아서 복수하겠다는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을 때, 이런 경우 그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랍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면 더 확실시될 것입니다.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때렸다고 합시다. 그러고는 가디리지 않고 도망을 가고 맞은 사람이 그 사람을 쫓아가지만 붙들지 못할 때, 이 맞은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욕은 그에 맞서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때린 사람이 불시에 때렸더라도 그 후에 멈춰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상대와 맞서려고 했다면, 맞은 사람은 모욕굴욕을 함께 당한 겁니다. 굴욕스러운 건 기습적으로 맞은 것 때문이며 모욕적인 건 자기를 때린 사람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스스로의 행동을 지지하며 그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저주스러운 결투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굴욕은 당했을 수 있지만 모욕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나 여자들은 도망갈 필요도 느끼지 않고, 도망갈 수도 없으며, 버티고 서서 기다릴 이유도 없지요. 성스러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이들과 같으니, 이 세 부류의 인간들은 공격을 위한 무기나 방어를 위한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라 해도 누구를 모욕하는 일은 의무화되어 있지 않지요. 아까 전에 내가 굴욕을 당했을 수는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다시 어떤 의미에서든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모욕을 당할 수 없는 자야말로 어떤 모욕도 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훌륭하신 분이 내게 하신 말씀을 유감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며 그렇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분이 이 자리에 좀 더 계셨더라면 좋았겠다 싶을 뿐입니다. 그분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깨우치게 해드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

 

 - 『돈키호테_2권』, <32장,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돈키호테가 한 대답과 다른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 그림과 함께 읽는 돈키호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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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다.

 - 헤럴드 블룸

 

 * * *

 

보르헤스의 소설집 한 권을 뚝딱(?) 읽고 나서 그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이고 또 어떤 것일까?

 

어쨌든 그의 소설들을 읽고 나서 뭔가를 어떤 식으로든 얘기하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런데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얘기할 수 있을까? 도무지 손아귀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지금에?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뚝딱' 읽고 났을 때만 하더라도 제법 할 이야기가 많은 줄 알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희귀한 아이템'들만 하더라도 제법 수두룩했으니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내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 자주 마주친 사물들이나 사람들이었다.(난생 처음 들어보는 희귀하고도 기억해 둘 만한 지명이나 장소들도 아주 많았지만, 여기에 펼쳐 놓기엔 너무 많아서 일부러 생략했다.)

 

아주 다양한 책들, 낯선 여러 지역과 도시들, 신비주의 철학자와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

미로, 거울, 칼, 백과사전, 애매모호한 시간과 공간들.

기억, 불면증, 꿈.

무한함, 우주, 신.

기하학, 숫자, 원, 직선.

문학, 작가, 도서관, 사서, 잡지, 출판사, 보르헤스, 눈 멈.

(자주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드는) 복도들과 계단들…

그 밖에 여러 철학자들, 가령, 쇼펜하우어, 니체, 칸트, 라이프니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데이비드 흄, 존 로크, 헤겔, 스피노자, 제논, 엘레아 학파, 피타고라스, 야콥 뵈메, 비코, 조지 버클리 등등

그 밖에 여러 작가들, 가령,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토머스 칼라일, 아서 코난 도일, 윌키 콜린스, G.K.체스터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호메로스, 러디어드 키플링, T.S.엘리엇, 리처드 버턴, 폴 발레리, 알퐁스 도데, 랭보,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플로베르, 윌리엄 제임스, 베르길리우스, 제임스 조이스, 루이스 캐럴, 프란츠 카프카, 아가사 크리스티, 사무엘 존슨, 존 던, 오스카 와일드, 아폴로도로스, 헤로도토스, 타키투스, 드 퀸시, 레온 블로이, 클라우제비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로버트 브라우닝, 빅토르 위고, 꽁도르세, 헤시오도스, 슈펭글러, 에드거 엘런 포,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등등. 

 

이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양 손에 가득 움켜쥐고 나서도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그래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를 다시 펼쳐 읽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읽은 그 소설은 처음 한두 번 억지로(?) 읽을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픽션들』에 담긴 17편의 단편소설들을 다 읽고 난 뒤여서 어느새 내 몸이 보르헤스에게 제법 적응된 때문일까. 틀륀…이 갑자기 너무나 쉽고도 재미있게 읽혔다. 아하, 이게 이래서 이런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저런 걸 등장시켜서 저렇게 이어가는구나 싶은 느낌이 아주 생생했다. 흡사 어두컴컴한 '미로' 속으로 갑자기 끌려 들어갔던 낯선 여행자가 맨 처음엔 천지간에 아무 것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혼동을 겪다가, 나중에야 차츰 어두운 미궁 속에서 서서히 시력을 회복하면서 '미로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난 뒤에 느끼는 깊은 안도감을 맛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보르헤스 소설의 특징은 아주 많다. 이른바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은 가짜 사실주의, 환상적인 허구, 탐정소설 구조, 책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은유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혼돈스런 의식들, 언어 유희 등등

 

가령 『픽션들』에 담긴 첫 번째 단편 소설인「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나오는 다음 문장들이야말로 어쩌면 '보르헤스 작품의 특징들'에 대한 자진 신고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그의 많은 작품에는 일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치 작가 '보르헤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인칭 화자를 바탕으로 한 소설작법에 관해 긴 시간의 논쟁을 벌였었다. 이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흐트러뜨리고, 단지 몇 명의 독자들ㅡ손을 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독자들ㅡ에게만 경이로울 수도 있고, 하잘것없기도 한 현실을 간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양한 모순 속에 개입한다.(18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르헤스의 많은 소설들에서 '화자'는 이처럼 독자들을 경이롭게 만들기 위해, 아주 다양한 모순들을 개입시킨다. 또한 그가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많은 이름들은 '근원적인 애매모호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다시 한 차례 더 읽은 우리는 그 딱딱한 산문의 저변에 깔려 있는 매우 근원적인 애매모호성을 발견했다. 지형에 관한 부분에서 명시하고 있는 열세 개의 이름들 중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은 단지 셋뿐이었다. 쿠라산, 아르메니아, 에르제륨.(21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이처럼 보르헤스의 소설은 '아주 다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작품 속에서 '화자'가 말하는 '가상의 작품에 대한 비평' 그 자체가 소설의 내용을 이루면서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이 혹성(틀뢴)에 있는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 그들에게 있어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30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실체가 전혀 없는 '가상의 세계'는 아니다. 틀뢴이라는 그 찬란한 역사는 17세기쯤 스위스의 루체른 혹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동을 시작했고, 1814년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혹성을 하나 창조하라'는 제안이 이뤄지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약 300명에 달하는 공동저자들에게 「틀뢴의 백과사전」제1판이 전달된다. 틀뢴이 현실세계에 침입한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는 건 1942년이다. 이처럼 '틀뢴'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모호한 세계이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이 보이는 태도야말로 작가 보르헤스의 관점에 가깝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은 진리, 심지어 그럴 듯한 진실성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놀라움을 찾는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환상문학의 한 지류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체계란 어떤 한 관점에 온 우주의 모든 관점들을 종속시키는 오류에 다름 아니다.(34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틀뢴은 상상의 세계이지만 끊임없이 현실에 개입한다. 맑시즘과 아르헨티나의 파시즘 모두를 거부했던 보르헤스는 틀뢴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도리어 '현실'보다 더 우위에 있을 가능성을 탐색한다.

 

거의 순식간에 현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ㅡ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ㅡ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현실 또한 질서정연하다고 반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리라.(48∼49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틀뢴은 어쩌면 인간을 그저 골탕먹이려고 만들어 놓은 '미노타우로스가 갇힌 미로'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해독할 수 있는 미로다. 그러나 그것을 해독할 만한 독자들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틀뢴은 방대한 암호처럼 모호하며, 환상으로 가득 찬 문학적 우주 그 자체이다.

 

확실히 틀뢴은 미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미로, 인간에 의해 해독되도록 운명지어진 그런 미로이다.(49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 * *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은 '삶의 순환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멋진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작중인물>인 봄베이의 변호사 미르 바하두르 알리가 1932년 말 봄베이에서 출판한 작품의 이름이다. 그 책 속의 주인공은 봄베이에 살고 있는 한 법과대학생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 사이에 벌어진 소동의 한가운데에 있다가 유혈참극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한 힌두교인을 죽인다. 그리고는 피신과 방황과 구도로 점철되는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유랑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갑자기ㅡ'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모래사장에 박혀 있는 한쪽 발뿐인 사람의 발자국 앞에서 경험했던 그런 신비스러운 공포감과 함께'ㅡ어떤 신비스러운 인식에 도달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로부터 이러한 깨달음이 유래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이 깨달음 자체인 어떤 사람이 있다.> 

 

그 대학생은 그를 찾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알모따심이라 불리는> 그 인물과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법과대학생이 <안쪽에 문과 수많은 구슬들이 달린 돗자리와 후광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 낭하에 도달하지만,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소설이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알모따심(여덟 번의 전쟁에서 이기고, 여덟 아들과 여덟 딸을 낳았고, 8천 명의 노예들을 남겼고, 왕국을 8년, 8일 밤낮의 기간 동안 통치했던 아바시다 왕국의 여덟 번째 왕의 이름)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피난처를 찾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32년판에서 주인공이 수행한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였다는 사실은 비유로 따져볼 때 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희백했음을 설득력 있게 말해 준다.(61∼62쪽)

 

 

이 소설은 작중 가상의 인물이 쓴 가상의 작품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해 소설 속 화자인 '내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알모따심에 대한 비밀은 엉뚱하게도 보르헤스의 소설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작가 자신이 덧붙인 '기나긴 주석' 끄트머리에서 발견된다.

 

이 시와 미르 바하두르 알리의 소설과의 접촉이 아주 과대한 것은 아니다. 제20장에서 한 페르시아 서적상이 알모따심이 했던 말이라고 한 그 말은 알모따심이 했던 다른 말들의 과장 해석인 듯싶다. 이러저러한 유사성들은 <찾음을 당하고 있는 자>와 <찾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찾는 자>가 <찾음을 당하는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책의 다른 장은 알모따심이 바로 그 법대생이 죽였다고 믿었던 <힌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원주]

 

 

 

 * * *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책 속의 책 이야기'로서는 더할나위없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야말로 '액자 소설'의 진정한 창조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소설 속의 화자인 '나'는 프랑스어로 『돈키호테』를 쓴 작가 삐에르 메나르와 아는 사이이다. 화자인 '나'는 그의 작품 목록을 무려 4쪽에 걸쳐서 19개나 길게 나열한다. 물론 그 작품 목록들은 '사실'과 교묘하게 비틀어 놓은 허구적인 작품들이다. 목록 나열을 끝낸 화자의 다음 말이야말로 또다른 『돈키호테』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제 다른 작품에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지하에 묻혀 있고, 진정으로 위대하고, 탁월한 작품 말이다. 아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란 게 얼마나 무한한 것인가! 미완성 작품. 이 작품, 아마 우리들 시대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일지도 모를 이 작품은 『돈키호테』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넌센스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넌센스를 정당한 것으로 논증해 보이기 위한 것이 바로 이 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74쪽)

 

 

보르헤스의 이런 시도야말로 어쩌면 가장 돈키호테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돈키호테야말로 '기사도 책 속에 푹 빠져 지내다가' 책 속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험을 시작한 인물이었으니까.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

 

사실 『돈키호테』의 원저자는 (세르반테스에 따르면) 아랍 사람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였다. 세르반테스는 그가 쓴 소설을 독자들에게 다시 전달하는 '전달자'일 뿐이었다. 작품의 원저자가 따로 있고, 그 사람이 쓴 이야기를 다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서사 구조를 단숨에 획득한다. 그런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속에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1부의 9장과 22장'에 들어 있다.

 

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가장 큰 경이로움과 흥미를 느꼈던 부분도 바로 이러한 '세르반테스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였다, 여기서 잠시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로 되돌아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어떤 인물인지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겸.

 

한편으로는 돈키호테가 읽은 책 가운데 「질투의 환멸」이니, 『에나레스의 요정과 목동』과 같은 최신작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돈키호테에 대한 이야기도 최근에 일어난 일이며, 따라서 아직 글로 옮겨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을 사람이나 이웃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유명한 에스파냐의 용사이자 라만차 기사의 빛이요 거울인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전 생애와 기적들을 반드시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어지럽혔다. 돈키호테야말로 이 재난 많은 시대에 편력 기사의 임무와 그 수행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를 바로잡고, 과부를 돕고, 채찍을 휘두르고, 말을 타고 산에서 산으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다니던 처자들이 어느 비열한 놈이나 촌놈이나 가공할 만한 거인들에게 순결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지난날에는 그런 놈들에게 당하는 처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80년 동안 단 하루도 남의 지붕 밑에서 자지 않고 어머니가 낳아 준 그 상태 그대로 무덤으로 간 처자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의 멋진 돈키호테는 이런저런 이유로 기억되고 찬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고, 나 역시 여기에 들인 노력과 열성을 생각해서라도 이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찾아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늘과 우연과 행운이 나를 돕지 않는다면 세상은 부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며,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을 사람은 두 시간 남짓이나마 누릴 수 있었던 재미와 즐거움을 영원히 잃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책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비단 장수에게 잡기장이며 낡은 서류뭉치들을 팔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길바닥에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인지라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집어 들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랍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랍 글자인 것은 알겠는데 읽을 수는 없어서 근처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무어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번역가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훌륭하고 더 오래된 다른 언어를 해독해 줄 사람이라 해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운좋게도 한 사나이를 찾아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잡기장을 넘겨주었다. 그는 책 중간을 펼쳐 보더니 잠깐 읽다가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물었더니 이 책의 여백에 쓴 주석이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것을 좀 읽어 달라고 하자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읽어 주었다.

 

「내가 말한 주석은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여자는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솜씨만큼은 라만차를 통틀어 어느 여자보다도 뛰어났다고 한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듣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잡기장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리 첫 부분을 읽어 보라고 독촉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즉석에서 아랍 말을 에스파냐 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아라비아의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타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비단 장수를 제치고 그 소년에게 돈 반 레알을 줘 종이 뭉치와 잡기장을 모조리 사들였다. 만일 소년이 빈틈없는 아이라 내가 얼마나 그 물건들을 원했는지 알았더라면 6레알 이상은 확실히 받아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어인과 함께 성당의 본당 회랑으로 가서 돈키호테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모조리, 더하거나 빼는 것 하나 없이 에스파냐 말로 고쳐 주면 원하는 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건포도 2아로바와 밀 2파네가로 만족하며 짧은 시일 내에 충실하게 잘 번역해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을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 훌륭한 물건을 손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우리 집에서 한 달 보름 조금 더 걸려 전부 번역했다. 다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140∼142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1부』, <제9장>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약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면, 작가가 아랍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민족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불구대천 원수이기 때문에 마땅히 써야 할 것들을 쓰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토록 훌륭한 기사를 칭찬하는 데 펜을 더 놀릴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그 칭찬거리들을 빠트리고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나쁜 행동에 나쁜 생각이다. 역사가란 사실을 정확하게 그대로 기록해야지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개인의 욕심이나 두려움이나 한이나 편애와 같은 감정으로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요 시간의 경쟁자이자 모든 행위의 창고이며 과거의 증언이고 현재의 본보기이자 깨우침이며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이 이야기에 무엇인가 좋은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물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의 작가인 개 같은 무어인의 책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제2부는 번역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143∼144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1부』, <제9장> 

 

 

여기서 다시 보르헤스의 『픽션들』로 되돌아 오자. 보르헤스의 소설 속 가상의 작가인 삐에르 메나르는 과연 어떤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는 게 아니었다ㅡ그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그 자체였다. 물론 그가 절대로 원작을 문자 그대로 옮겨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탄할 만한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일치하는ㅡ단어와 단어, 그리고 행과 행ㅡ그런 몇 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의도는 단지 놀랍게 만들려는 것뿐이지.」(76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17세기의 스페인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정도로 노력한다.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는 일, 무어인 또는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그의 목표에 포함되었다.(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 직접 뛰어들어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왼 팔을 잃은 '참전 용사'였다.)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에 대해 잊어버리는 일도 포함되었다. 그의 목표는 일단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곧 그런 방식을 포기한다. '설사 어떻게 해서든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삐에르 메나르이면서, 삐에르 메나르의 경험들을 통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덜 야심적인 작업'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문학이 추구하는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닌가.

 

삐에르 메나르가 추구하려는 목표에는 이보다 훨씬 원초적인 장벽이 하나 더 있었다.

 

17세기 초에 『돈키호테』를 쓴다는 것은 근거가 있었고, 불가피했고, 그리고 거의 운명적인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사정이 다르지. 극단적이리만치 아주 복잡한 사건들로 가득 찬 300년이란 세월이 그냥 헛되이 흘러간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말이네. 그러니까 그 사건들 중 하나만 언급한다 해도 그것은 곧바로 『돈키호테』 그 자체가 돼버리니까 말이네.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삐에르 메나르는 소설을 완성한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그 자신만의 『돈키호테』를.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전혀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문자 그대로 베껴져 있는 것>을 보았고, 바꾸르 남작 부인은 니체의 영향을 보았다는 식이었다. 이런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이야말로 '책 읽기'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에 다름 아니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삐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언어상으로는 단 한 글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삐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그의 반박론자들은 전자에 비해 보다 애매모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84∼85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결국 그 어떤 텍스트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가치가 쓸모없게 혹은 더욱 훌륭하게 바뀐다는 얘기는 어떤 작품이나 작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20세기에 프랑스 사람이 쓴 메나르의 작품이 아무리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고어체ㅡ무엇보다 외국어 문체적인ㅡ라는 '작위적인 흔적'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테고,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에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章)ㅡ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ㅡ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 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86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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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책들 가운데 '보르헤스'가 직접 쓴 책은 유감스럽게도 『픽션들』뿐이다. 지금에서야 그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등장할 만한 '책에 대한 책'을 몇 권 끄집어 냈다. 그 책들은 알베르토 망겔의 『독서의 역사』,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 매튜 배틀스의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등이었다. 그 가운데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글들은 이탈로 칼비노가 (보르헤스가 살아 있던) 1984년에 쓴 다음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보르헤스라는 한 작가가 우리 모두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통된 느낌을 설명하려면, 그것의 범주를 구분하기보다는 글쓰기의 기술과 보다 정확히 직결된 어떤 동기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 첫 번째로 작문을 경제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들고 싶다. 보르헤스는 간결함의 대가다. 그는 단 편 페이지에 극도로 풍부한 개념과 시적인 요소들을 응축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텍스트 안에서 사건들은 서술되거나 암시되며, 무한성, 그리고 이어지는 개념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빛을 발한다. 이러한 밀도 높은 서술은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겁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투명하다 할 정도로 명확하며, 장식이 없으며,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시적이면서도 짧은 문체가 다양한 리듬, 문장의 운동감,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형용사들을 사용함으로써 정확하고 구체적인 보르헤스 특유의 언어에 이르게 되는 것은 스페인 언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문체가 이룬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만이 이러한 문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

 

(중략)

 

간결하게 쓰기 위해 보르헤스가 결정적으로 착안한 방법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소 간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착안한 이 결정적 방법은 보르헤스 자신을 작가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거의 마흔에 가깝도록 그가 에세이가 아닌 허구적인 산문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 준 그 방법은, 쓰고 싶었던 책을 이미 누군가가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보르헤스가 꾸며 낸 다른 언어, 다른 문화 속에서 나온 미지의 작가가 쓴 책, 그러고 나서 그러한 상상 속의 책을 다시 묘사하거나 요약, 비평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썼던 기이한 이야기인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은 보르헤스와 관련된 신화를 남겼다. 그것은, 이 작품이 《수르(Sur)》에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이 모두 이 작품이 한 인디언 출신의 작가가 쓴 책을 보르헤스가 훌륭하게 비평한 글로 알았다는 일화다. 이와 유사하게 매번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모든 보르헤스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한 겹 혹은 여러 겹으로 텍스트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음을 지적해 왔다. 즉 가상의 도서관이나 현실 속의 도서관에서 꺼내어 인용한 다른 책을 통해, 고전 작품이나 혹은 박식한 지식이 나오는 작품, 아니면 단순히 꾸며 낸 작품들을 통해 확장한다는 것이다.(346∼348쪽)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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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은 발표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현대에 와서 대단한 호평을 받는 작품으로 자리매김된 걸작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독자들은 어쩌면 '당대의 혹평'을 재빨리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와 막장으로 흐르는 듯한 온갖 비도덕적 내용들이 소설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인간의 격정'을 너무나 독창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달리 견줄 작품을 찾기 어렵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도 묶인다. 그러나 이 세 작품이 지닌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비극성'이 서로 아무리 상통하는 면이 크다고 하더라도, 이들 작품들은 이야기의 내용이나 주제 자체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한 데 묶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작품처럼 여겨진다.

 

『폭풍의 언덕』은 '운명적으로 엮인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여러 뛰어난 다른 비극 작품들을 함께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극찬한 그 드라마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폭풍의 언덕』과 닮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뜻 생각해 보더라도 그들 사이의 공통점이 한둘이 아니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이 완전히 베일에 싸인 채 버림받은 아이였다가 나중에 양떼를 치는 목자의 손에 의해 길러지는데, 이런 배경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의 사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히스클리프 역시 '자신의 출생'을 전혀 모르는 떠돌이였다. 소설의 주무대인 워더링 하이츠의 큰 주인인 언쇼가 무려 60 마일이나 떨어진 리버풀에 여행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치는 바람에 데려오게 된, 다시 말하자면 '주워 온 아이'였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와 언쇼 가문과의 '운명적인 사슬'은 그렇게 아주 우연한 동기에서 비롯된 셈인데, 이 대목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친 바로 그 '운명의 삼거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히스클리프의 비중이나 역할은 단연 압도적이다. 히스클리프는 언쇼 집안의 또래 아이들인 힌들리 언쇼와 캐서린 언쇼 남매와 함께 자라고, 캐서린 언쇼를 운명적으로 사랑한다. 나중에 캐서린은 이웃마을 대저택에 사는 드러시크로스 집안의 장남인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고,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와 결혼하지만, 이사벨라와의 결혼은 정작 자신이 사무치게 사랑하는 연인인 캐서린과의 결혼이 좌절된 데 따른 반발이자 부작용일 뿐이요, 숙명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어긋나는 운명'의 본격적인 서곡일 뿐이다.

 

『오이디푸스 왕』이야기도 꼭 그렇다. 남자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이 지속적으로 스토리를 지배한다는 점이 너무나 흡사하다. 또한 오이디푸스의 '잘못된 결혼'으로부터 본격화된 비극이 자식대까지 아주 길게 이어진다는 점도 『폭풍의 언덕』을 꼭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과 이오카스테와의 결혼이야말로 단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단발적인 사건인 '부친 살해'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못된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들이 서로 뿌리 깊은 증오를 품거나 고결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점도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 다툼 끝에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오이디푸스 왕의 딸인 안티고네는 국법을 어기고 오라비의 장례를 치러주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게 바로 소포큭레스의 또다른 비극인 『안티고네』이야기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자식들도 오이디푸스의 자식들과 엇비슷한 운명을 걷는다.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허약한 린튼은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강요받는 삶'으로 점철된 끝에 일찍 죽는다. 에드거 린튼과 캐서린 언쇼 사이에서 태어난 캐시('캐서린 린튼'으로 자라서 나중에 '캐서린 히스클리프 부인'이 된다)가 히스클리프의 아들인 린튼과 결혼할 뿐만 아니라, 린튼이 죽고 미망인이 된 이후에도 끝내 외삼촌의 아들인 힌들리 언쇼까지 사랑으로 포용하는 모습은 일견 안티고네의 모습과 닮았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유독 오래 살아남은 히스클리프가 생애 막바지에 '나흘 동안이나 끼니를 굶은 끝에' 스스로 죄 많은 삶을 마감하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늙은 오이디푸스 왕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한 끝에 방랑길을 떠나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눈먼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콜로노스에 있는 복수의 여신들, 일명 '자비로운 여신들'의 성역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평화를 얻고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는 이야기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담겨 있는데, 히스클리프가 죽기 직전 며칠 동안에 보인 모습인, '그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기쁨에 찬 빛이 서려 있었고, 그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히스클리프는 그때 이미 죽기로 작정하고 곡기를 끊기 시작한지 이틀째였다.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젯밤엔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어. 오늘은 내 천국이 보이는 곳에 있지만. 난 지금 천국을 눈앞에 보고 있어. 불과 3피트도 떨어져 있지 않아!"(548쪽)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길었다. 애당초 나는 『폭풍의 언덕』을 읽는 동안에 소포클레스의 작품까지 떠올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폭풍의 언덕』에서 다뤄지는 사랑과 질투가 끝내 극도의 분노와 뒤섞여 마침내 '광기어린 복수'로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를 닮은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두 비극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색이 까맣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죄 없는 데스데모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오셀로는 무어인 용병대장이었고, 캐서린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다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히스클리프도 '얼굴색이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온갖 격정이 광풍처럼 휘몰아친 뒤 마침내 거센 폭풍이 잦아들 무렵, 히스클리프가 자조섞인 투로 소설 끄트머리에서 내뱉는 말인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 라는 말은 일견 카프카의 소설 『소송』의 결말 부분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 그는 방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의 맹렬한 노력이 이렇게 끝장난단 말인가?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 나의 숙적들은 나를 넘어뜨리지는 못했어. 이제야 말로 바로 그들의 후손에게 복수를 할 때지. 내 힘으로 할 수 있지. 그리고 아무도 막지 못해. 하지만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아.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귀찮아졌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니 마치 오직 아량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 이제까지 애를 써온 것처럼 들리는데,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 난 그들의 파멸을 즐길 만한 힘도 없어졌고 쓸데없이 남을 파멸시킬 생각도 없어졌단 말이야.(538쪽)

 

 

불과 서른 살에 죽은 에밀리 브론테(1818∼1848)는 여러모로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과 비교된다. 둘 다 목사의 딸이었고 독신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들의 세계'는 사뭇 달랐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성(性)에 속한 것 같지도 않을 정도다.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제인에게는 열정이 없지만 브론테는 열정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브론테의 소설은 격정적인데, 그녀가 살아생전에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요크셔의 거친 황무지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폭풍이 부는 바람 많은 언덕과 그녀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삶 말고는 다른 세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그녀는 순전히 '공상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셈인데, 소설의 분위기도 오스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백일몽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멜로드라마처럼 처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러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막장 드라마처럼 읽힌다고 해서 비난받았던 '당대의 혹평'은 브론테가 추구한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때문이었다.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진실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진지함이야말로 '도덕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뚜렷한 근거는 그녀의 다음 시에서도 발견된다.(에밀리는 언니인 샬럿과 여동생 앤과 함께 필명을 써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펴냈다. 『폭풍의 언덕』이 출판되기 1년 전이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에밀리에게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나는 걷노라, 하지만 옛 영웅들의 발걸음이나

높은 도덕의 길,

오랜 과거의 역사가 보여 주는 희미한 형태들,

반쯤 두드러진 얼굴들 사이를 걷는 것은 아니리니.

 

나는 걷노라, 나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ㅡ

또 다른 안내를 택하는 것은 성가신 일인 것을ㅡ

양치식물 계곡에 회색의 양떼들이 풀을 뜯는 곳,

거친 바람이 산허리에 불어 오는 곳.

 

저 외로운 산들은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영광과 슬픔이겠지:

한 인간의 마음에 감정을 일깨우는 대지는

천국과 지옥의 두 세계 가운데 있을 테니.

 

 

그렇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두 세계가 맞닿아 있는 '바람부는 대지 위의 세계'였다. 리버풀에서 집시처럼 떠도는 부랑아로 살던 히스클리프는 어느 날 우연히 '주변에서 두 번째로 멋진' 워더링 하이츠의 저택으로 이끌려 오지만, 거기에서 여섯 살 꼬마 아가씨인 캐서린 언쇼라는 천국과 끊임없이 그를 학대하는 그녀의 오빠 힌들러 언쇼라는 지옥을 만난다. 언제나 거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언덕 주변의 삶에서 히스클리프에게 유일한 삶의 기쁨은 언제나 다정하고 발랄하고 살갑게 대하는 캐서린뿐이었다.

 

(2012년에 개봉된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 감독: 안드리아 아놀드, 주연: 카야 스코델라리오_캐서린 언쇼)

 

 

친아들 힌들리보다 자신을 더 아껴주던 언쇼 영감이 죽고 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잠시 유학을 떠났던 힌들리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워더링 하이츠로 급작스레 되돌아온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하루 아침에 '헛간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새로운 포악한 주인인 힌들리로부터 걸핏하면 폭행 당하고 모진 냉대를 받는다. 이때부터 히스클리프에게는 깊은 증오와 복수심이 싹튼다. 게다가 캐서린은 이웃 마을 대저택에 사는 에드거 린튼 도련님에게 '시집갈 마음'이 생긴다. 그녀가 아무리 히스클리프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결혼 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좌절한 히스클리프는 갑자기 워더링 하이츠에서 사라지고 만다.

 

3년 만에 다시 폭풍이 부는 언덕을 홀연히 찾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한 캐서린이 살고 있는 드러시크로스의 대저택을 주저없이 찾아간다. 그녀의 남편인 에드거의 존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들 둘 사이의 대화야말로 앞으로 닥칠 '엄청난 폭풍우와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일쯤이면 꿈같다는 생각이 들 거야!" 아씨는 외쳤어요. "다시 너를 보고 만지고 이야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거야. 잔인한 히스클리프! 사실은 이렇게 맞이해 줄 것도 없지. 삼 년 동안이나 자취도, 소식도 없이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네가 나를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널 생각했을 거야!" 그는 중얼거렸어요. "캐시,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리고 저 밑 뜰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지. 아마 놀랄 것이고 기쁜 척하겠지만, 그러는 너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그 뒤에는 힌들리에 대한 원한을 풀고, 그러고는 자살을 해서 법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러나 네가 이렇게 반겨줘서 그러한 생각이 내 마음에서 사라져버렸어. ……" (159∼160쪽)

 

 

히스클리프는 어느새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채 도박에 빠져 지내던 힌들리에게 찾아가 1년치 방세를 미리 건네 주면서 다시 워더링 하이츠에 눌러 앉는다. 사라진 3년 동안에 히스클리프는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졌고 돈도 많이 벌어온 듯했고, 집주인인 힌들리를 제압할 정도로 건장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히스클리프가 차츰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찾아갈 수 있는 어엿한 손님이 되자 엉뚱하게도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 린튼이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든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의 본심을 꿰뚫어보고 "만약 아가씨가 귀찮다고 생각되면 그는 아가씨를 참새 알처럼 쥐어서 터뜨릴걸. 그가 린튼 집 사람을 사랑할 리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어." 라고 경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히스클리프가 성가실 정도로 캐서린을 자주 찾아오고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까지 넘보게 되자 에드거는 마침내 폭발한다. 힘으로는 도저히 그를 제압할 수 없게 되자 에드거는 하인들을 시켜 그를 강제로 집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지만 캐서린이 도리어 나약한 남편의 그런 행동을 비웃고 방해한다.

 

 

"아! 세상에! 옛날 같으면 이 정도 용기로도 기사가 됐을 텐데! 그래요. 우리가 졌어요. 우리가 졌어! 히스클리프는 왕이 생쥐 떼에게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거예요. 기운 내요.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양 새끼가 아니라 젖먹이 토끼 세끼예요." 캐서린 아씨가 소리쳤어요.

 

"이 젖내 나는 겁쟁이를 남편으로 둔 행복을 즐기기를 빌어, 캐시! 당신의 취향을 치하하지. 나보다도 이렇게 침 흘리고 벌벌 떠는 녀석을 좋아하는 취향 말이야! 이런 녀석은 주먹이 아니라 발로 뻥 차줘야 속이 후련하겠는데. 그가 울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서 까무러치려고 하고 있는 거야?"(190쪽)

 

 

대소동 끝에 히스클리프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쫓기듯 도망쳐 나오고, 에드거와 캐서린의 사이는 회복할 수 없는 파탄지경으로 내몰린다. 에드거는 서재에 박혀 지내고 캐서린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사흘씩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계속했다. 급속도로 쇠약해진 캐서린은 절망적인 발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며 한탄한다.

 

 

"오, 내 몸이 불덩이 같아! 밖으로 나갔으면, 다시 야만에 가까운, 억세고 자유로운 계집아이가 되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미치거나 하지 않고 깔깔 웃을 수 있었으면! 왜 나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조금만 뭐라고 해도 내 피는 끓어오를까? 저 언덕 무성한 히스 속에 한번 뛰어들면 틀림없이 정신이 날 텐데. 다시 창을 활짝 열어줘, 빨리.(206쪽)

 

 

그러는 와중에 이사벨라 린튼은 히스클리프와 함께 몰래 마을에서 달아난다. 큰 병을 얻은 끝에 악성 뇌막염까지 시달렸던 캐서린은 에드거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간신히 병을 이겨낸다. 달아난지 두 달이 지난 뒤에야 에드거는 여동생으로부터 '용서해 달라'는 짤막한 편지를 받는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했으며 지금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하녀 엘렌에게도 따로 편지가 왔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신부가 쓴 편지와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히스클리프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에 인간이라면 미친 것인지,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귀신인지?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나 엘렌이 알고 있다면 대체 내가 결혼한 상대가 무엇인지 설명해 줬으면 해."

 

시집간 이사벨라 아가씨를 만나보러 급히 워더링 하이츠로 찾아간 하녀 넬리(엘렌 딘)은 도리어 히스클리프에게 애원하고 부탁하는 처지가 된다. 제발 더이상 캐서린 아씨를 만나러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그러나 에드거를 향한 복수심에 끓어 넘치는 히스클리프를 제지할 방법은 없다. 더구나 캐서린을 다시는 만나지 말라는 경고와 종용을 받자 히스클리프는 도리어 강력하게 반발한다.

 

 

"당신은 그녀가 나를 거의 잊었다고 생각해? 아, 넬리! 그렇지 않다는 건 당신이 알잖아! 린튼을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나를 천번이나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잖아! 내 평생 가장 비참했던 시기엔 나도 캐서린에게 잊혀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작년 여름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줄곧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캐서린 자신이 그렇다고 단언하지 않는 한 다시는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그러면서도 한때는 어리석게도 캐서린이 나의 애정보다도 에드거 린튼의 애정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설사 그가 그 빈약한 몸집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한대도 그의 팔십 년 동안의 사랑은 내 하루 동안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캐서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속이 깊은 사람이지. 그러니 그 애정을 에드거가 송두리째 차지한다는 것은 바닷물을 말죽통에 담을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야."(243∼244쪽)  

 

 

캐서린을 향한 무서운 집념은 끝내 히스클리프를 폭주하게 만든다. 에드거가 집을 비운 틈을 노려 그는 또다시 캐서린을 찾아가고, 위중한 병세 때문에 더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는 그녀를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어느새 에드거가 돌아올 시간이다. "안 돼! 아, 가지 마. 가지 마. 이게 마지막이야. 에드거도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거야. 히스클리프, 나는 죽어! 죽는다고!" 라고 외치는 절규 앞에 히스클리프는 다시 그녀를 꼭 껴안고, 그 모습을 본 에드거는 그 불청객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에 휩싸여 덤벼든다. 캐서린은 혼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지만 그날밤 자정 무렵 딸 캐시를 낳다가 숨을 거둔다.


여기까지가 총 34장 가운데 16장까지의 내용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은 여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사이에 폭풍처럼 휘몰아친 사랑이 '캐서린의 죽음'으로 모두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여운이 많이 남는 얘기가 더욱 길게 남아 있었다. 남은 이야기들은 캐서린이 낳은 딸 캐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사랑과 복수를 향한 뜨거운 정념은 조금도 꺾일 줄 모른다. 에밀리 브론테가 히스클리프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치밀하고도 촘촘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는 정작 이제부터라고 말할 정도로,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더욱 촘촘해지고 히스클리프는 더욱 뚜렷이 부각될 뿐 조금도 힘을 잃는 법이 없다.

 

그러나 아쉽지만 이쯤에서 이야기를 훨씬 더 줄여야 마땅하지 싶다. 나머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편인 히스클리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이사벨라는 홀로 아들을 낳아 기르다가 세상을 떠난다. 캐서린이 죽은 뒤 13년쯤 뒤의 일이었다.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리 언쇼는 그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캐서린이 죽은지 반 년도 못 되어서였고,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에 불과했다. 이제 워더링 하이츠에는 히스클리프와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 언쇼만 남았고, 그 집의 실소유주는 히스클리프였다.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 거칠게 자라난 헤어튼은 히스클리프한테 딸린 하인 신세나 다름없었다. 식객이던 사람이 마침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된 셈이었다.

 

'언쇼 집안의 아름다운 검은 눈에다 린튼 집안의 고운 살결과 오밀조밀한 생김새와 노란 곱슬머리를 물려받은 정말 예쁜 아가씨' 캐시는 열세 살이 되도록 숲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고, 워더링 하이츠와 히스클리프 씨에 대한 존재조차도 모르고 자란다. 캐서린과 사별한 에드거가 워더링 하이츠 쪽으로는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기간이야말로 워더링 하이츠 주변에 살던 사람들에겐 짧으나마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캐시는 페니스턴 절벽 쪽으로 가보고 싶은 오랜 열망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홀로 그곳으로 다가가다가 우연히 워더링 하이츠에 발을 들여놓고 거기서 자신의 외사촌인 헤어튼을 난생 처음으로 만난다. 그녀는 이제 막 '워더링 하이츠의 거친 바람' 속에 뒤섞인 '처절한 사랑과 뿌리깊은 원한과 복수와 갈등'의 초입에 겨우 첫발을 들여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여동생 이사벨라는 죽기 직전에 홀로 키우던 아들 린튼을 부탁하기 위해 오빠인 에드거에게 편지를 띄우고, 외삼촌인 에드거는 기꺼이 린튼을 떠맡아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데려 오지만, 이내 낌새를 알아차린 히스클리프에게 발각되어 조카를 강제로 빼앗기고 만다. 고종사촌 린튼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캐시는 하루 아침에 린튼이 집안에서 사라진 걸 알고 몹시 실망한다.

 

호시탐탐 드러시크로스 대저택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궁리를 하던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병약한 아들 린튼을 캐시와 결혼시키기 위해 온갖 간계를 꾸미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병약한 아들 린튼이 자신의 계획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무서운 협박과 강요를 마다 않는다. 오랜 노력 끝에 그 두 사람을 서로 사귀게 만들고, 결국 워더링 하이츠에 억지로 감금하는 데까지 성공한 히스클리프는 그 둘을 강제로 결혼시킨다. 그러나 병약한 린튼은 결혼하자 말자 이내 세상을 떠난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변호사를 미리 매수해 둔 히스클리프는 린튼이 죽고 난 이후에도 드러시크로스 저택이 자신에게 귀속되도록 빈틈없이 일을 꾸민다.

 

히스클리프의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젊은이라고는 '언쇼 집안'의 마지막 인물인 헤어튼 언쇼와 '린튼 집안'의 마지막 인물인 캐시밖에 남지 않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그토록 처절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과 사별한 이후 끔찍스러울 정도로 잔혹하게 진행된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거의 완성된 셈이었다. 워더링 하이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했던 힌들리는 주정뱅이로 전락한 끝에 노름빚으로 재산까지 몽땅 히스클리프에게 빼앗기고 빈털털이로 삶을 마감했고, 캐서린과 결혼한 에드거 역시 딸 캐시를 히스클리프의 아들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온갖 괴로움과 시름을 겪다가 서른아홉 살에 일찍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에드거마저 죽고 그의 딸 캐시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게 되자 그는 곧장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주인 자격'으로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그는 넬리에게 다음과 같은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젯밤에 린튼의 무덤을 파고 있는 교회 머슴을 시켜 캐서린의 관 뚜껑에 덮인 흙을 치우게 하고 관을 열어보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참 악독하기도 하군요, 히스클리프! 죽은 이를 괴롭히다니 부끄럽지도 않던가요?" 저는 큰 소리로 말했어요.

 

"난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어, 넬리. 내 마음이 다소 안정되긴 했지. 이젠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질 거야. 내가 죽더라도 땅속에 조용히 누워 있게 될 테니까. 그녀를 괴롭혔다고? 천만에! 그녀야말로 십팔 년 동안을 밤낮으로 나를 괴롭혀 왔어. 늘 끊임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바로 어젯밤까지도 말이야. 어젯밤에서야 내 마음이 가라앉은 거야. 난 어젯밤, 심장이 멎은 채 차디찬 내 볼을 그녀의 볼에 맞대고 그녀 옆에서 마지막 잠을 자는 꿈을 꾸었지." 하고 그는 말했어요.

 

"그럼 만약 아씨가 썩어 흙이 되어버렸다든가 그보다 더한 상태에 있었더라면 그땐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제가 물었어요.

 

"그녀와 함께 썩어서 더욱더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겠지!" 그는 대답했어요. "넬리는 내가 그따위 변화를 무서워할 줄 알아? 난 그 관 뚜껑을 열 때 이미 그런 변화를 기대했던 거야. 그러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욱이 그녀의 생기 없는 용모에서 강렬한 인상만 받지 않았던들 그 묘한 감정은 여간해선 가시지 않았을 꺼야. 그건 이상하게 시작됐지. 알다시피 난 그녀가 죽은 뒤로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늘 그녀가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어.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말이야. 난 유령의 존재를 믿어. 유령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고 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단 말이야!"(479∼480쪽)

 

 

나는 『폭풍의 언덕』 속에 이처럼 격정적이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줄은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워더링 하이츠를 배경으로 무척이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가 끝없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소설의 제목에서 풍기는 낭만적인 느낌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처녀가 쓴 작품이라는 두 가지 선입견이 어우러져 빚어낸 엄청난 오해와 무지 때문이었다.


세계 10대 소설이라고 해서 누구나 10대 혹은 20대쯤에는 그 작품들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폭풍의 언덕』 같은 야성이 넘실대는 강렬한 소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거센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언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처절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그 소설을 읽는 나이가 반드시 '폭풍의 세월'을 살고 있는 10대나 20대에 한정될 이유도 없다. 이 소설을 10대 혹은 20대의 아주 어린(?) 나이에 읽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이 소설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기쁜 게 아니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만큼 이 소설은 강력하다. 요크셔의 황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워더링 하이츠에 부는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지 싶다. 예전에 에밀리 브론테가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던 그때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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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이 쓴 『고양인의 책읽기』에서는 에밀리 브론테를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윗 글에서 인용한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그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시에 뒤이어 나오는 내용 일부를 추가로 덧붙여 본다.

 

팝 발라드 가운데 시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소란한 무덤The Unquiet Grave」이 있는데, 이는 18세기 후반에 쓴 듯하다.

 

내 사랑이여, 오늘 바람이 불고,

  몇 방울의 비도 내리는구려;

진정한 사랑 외에 내 가진 것이 무엇이겠소,

  차디찬 무덤 속에 그녀가 누워 있으니,

 

내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서는 무엇이든 하겠소.

  그 어떤 젊은 연인보다도;

그녀의 무덤 앞에 앉아 언제까지나 서러워하리오.

  열두 달 하루라도.

 

열두 달 하루가 끝나자

  죽은 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오 내 무덤 앞에 흐느끼며

  그리하여 날 잠들지 못하게 하는 분은 누군가요?"

 

"내 사랑, 그대 무덤 앞에 앉은 자는 나요.

  그대 잠들지 못하게 하는 자는:

진흙처럼 차가운 그대의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해 주길 갈망하오.

  그것이 내가 구하는 전부일 테니."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저 건너 아래 초록의 정원,

  사랑, 우리가 걷던 그곳에,

이전에 보았던 그 멋진 꽃도

  시들어 줄기만 남으리니."

 

"줄기가 시들어 마르듯, 내 사랑,

  그렇듯 우리의 심장도 썩어갈 거예요;

그러니 내 사랑, 이제는 단념하세요.

  신이 그대를 부를 때까지."

 

 

이 연인들이 주고받는 냉담한 대화는 가히 필적할 데가 없는 듯하다. 많은 속설에 따르면 사랑의 애도를 일 년 이상 지속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소란한 무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더욱 강조한다. 일 년에서 하루 더 애도가 계속되자 죽은 연인이 놀라 영면에서 깨어난다. 애인을 읽은 젊은 남자가 자신의 위험을 정확히 안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그에게 아무런 환상도 주지 않고 단지 죽음만을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사악한 즐거움이다.

 

어느 편에도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 년하고 하루 더 애도하는 것은 산 자에게는 위험이 되고 죽은 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두 연인 사이의 인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시가 나타내는 어둡고 무거운 의미는 즐거우면서도 병적인 발라드가 들려주는 육감적 음악과 어느 정도 대립해 있다. "나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한다"는 죽은 여인의 불평을 듣는 순간, 독자는 처음으로 충격에 빠진다.

 

또 젊은 남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갈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진흙처럼 차가운 입술의 키스"라는 표헌이 시 전체를 압도하며, 다음 연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우리는 죽은 여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진실을 토로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진다.(149∼152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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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살에 이런 대작을 쓰고 운명을 달리한 에밀리 브론테,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우는 모짜르트, 「도덕경」「주역」에 주석을 단 왕필 등을 보면서 짧은 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운 이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oren 2018-05-14 15:01   좋아요 1 | URL
에밀리 브론테는 단 한 편의 소설만 남겼는데도 저런 걸작을 남길 정도였으니, 다른 자매들과 더불어 특출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소설의 내용으로나 더없이 강렬한 필치로 보나 말이죠..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사람인 소포클레스는 아흔이 넘도록 장수하고도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니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hnine 2018-05-1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비극이 갖춰야 할 요소에 대해 조목조목 잘 설명이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아직 직접 읽어보진 못했어요). 이상적인 비극이 되기 위한 소재, 플롯, 성격, 주제는 물론이고 어떤 배경을 거쳐 어떻게 주제를 전달하느냐 까지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작가라면 고대 비극, 그것도 유명한 비극 작품과 언뜻언뜻 연상되는 장면이 그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게 무리는 아닐 듯 싶어요. 아마 예리한 독자 눈에만 발견되겠지만요 ^^
그런 이야기로 시작하셔서 그런지, 올려주신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는데 전 또 문득 세익스피어의 소넷이 떠오르네요. 제가 따라쟁이죠? ^^

oren 2018-05-14 15:11   좋아요 0 | URL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주로 고대의 서사시와 비극시를 다루지만, 의외로 현대 사람들의 글쓰기에도 참고할 만한 유익한 내용들이 아주 풍성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고 나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떠올리셨다니, hnine 님께서도 예사롭지 않은 시적 감각을 지니신 듯합니다. 저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전부 읽어봤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시와 닮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답니다.^^
 
황폐한 집 동서문화사 월드북 231
찰스 디킨스 지음, 정태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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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헤럴드 블룸)

 

 * * *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수긍해야 옳지 싶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된다.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통해 그런 기분을 풀어냈다.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셰익스피어가 슬쩍슬쩍 엿보일 때가 자주 발견되고,  때로는 그 너머에 아스라히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이 체험이 그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다.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된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다.(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초기 작품인 『피크위크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다.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다.)

 

『황폐한 집』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쉽게 잡히는 빤한 주제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진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함께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식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식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다.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이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진다.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다.(번역본에는 따로 설명이 없지만, 여기서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오후에야말로'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수법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5막 1장>에서 로렌초와 제시카가 달밤에 나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와 너무나 닮았다. 거기서 두 연인은 '이런 밤에'를 '후렴'처럼 무려 일곱 번이나 주고 받는다. 디킨스는 유독 이 작품에서 이같은 '후렴'을 반복하는 수법을 여러 곳에서 자주 구사한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이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다.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끈다. 윌리엄 포크너는 찰스 디킨스를 모방한 셈이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맞닿지는 않는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진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다.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된다.

 

독자들은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계속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아주 흡사하다. 이런 이야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긴장감을 갖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까닭을 금세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을 때쯤이다.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하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도 든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한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만 하더라도 다 읽기 벅찬 게 사실이지만 디킨스를 아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은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계속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덧붙이고 싶다. 출판시장 자체가 갈수록 황폐한 모습으로 변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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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04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어두운 면을 깊이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 불평등, 억압 등 사회 부조리에 대한 수많은 이론을 다룬 책들보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 작품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oren님의 글을 통해 디킨스의 다른 저작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5-05 20:17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찰스 디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많은 작품들이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니까요. TV와 영화가 대세인 시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작가로 당당히 인정받는 사람이 찰스 디킨스인데 말이지요. 좀 더 알아 보니, 그의 작품 가운데 『위대한 유산』, 『리틀 도릿』,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황폐한 집』등이 이미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심지어 찰스 디킨스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까지 나와 있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는 『황폐한 집』만이라도 기필코 ‘영화‘로 다시 한번 감상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풍경들과 인물들의 ‘영화 속 모습‘이 너무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요.

혜덕화 2018-05-04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재미있게 읽었어요.아주 오랫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고전을 만나는 기쁨을 님 덕분에 누릴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oren 2018-05-05 20:22   좋아요 0 | URL
혜덕화 님께서 『위대한 유산』을 아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작품은 커녕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는데, 그 작품 덕분에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잇따라 읽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더랬지요.^^

* * *

……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헤럴드 블룸)
 

 

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두꺼운 책들을 조금씩 넘보기 시작했더랬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거의 맨 처음으로 도전했던 두꺼운 책들은 지금 되돌아 보더라도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책이었던 듯하다. 설사 조금 더 후하게 쳐준다고 하더라도 '괜한 의무감' 때문이었다는 말을 덧보탤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으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두꺼운 책들은 무려(!)『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몽테뉴 수상록』,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이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치자면 겨우 5,6급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되는 초급자가 프로 기사에게 맞바둑을 두자고 덤빈 꼴이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상당히 기나긴 '특별 무소속 기간' 동안 이들과 거친 씨름을 벌이기로 작정을 했더랬다. 비록 자세는 영 볼품없었지만 말이다. 197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탓에 나에게 두발 자유화는 그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다. 입시가 끝나고 입학이 다가올 때까지 겨울 내내 무방비 상태로 무럭무럭 자라도록 내버려둬도 두발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까까머리에서 차츰 벗어나는 듯한 어중간한 모습으로, 대학생으로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그런 어설픈 시골 총각의 머리 모양새로(한 마디로 말하자면 '촌놈'으로) 나는 용감하게도 '트로이 전쟁'에 뛰어들었던 셈이다. 군불을 넉넉히 지핀 시골집 온돌방에 배를 깔고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엎드렸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입시 과목과는 전혀 다른 책들인지라 어쨌든 꽤 여러 날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오랫동안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남겨 주었다.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온갖 흥미로운 얘기들이 그 당시에 나에게 얼마나 재미있게 다가왔었는지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고대의 이름 모를 신들과 지명들과 인명들만 하더라도 내겐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순간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는 독서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는 데 방해될 만한 요소는 일부러 찾을래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TV라고 해봐야 기껏 서너 채널밖에 없었고 그것도 밤 시간에만 볼 수 있었다. 신문조차 구독하는 게 없었고, 흔해빠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그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환경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그 두꺼운 책들을 꽤나 오래도록 붙들고 읽었더랬다.

 

그 책들을 끝까지 다 읽었는지는 자세히 알 도리가 없지만 아마도 완벽하게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독후감까지 끄적거려 놓은 게 지금까지도 남아 있긴 하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무모한 도전이 내심 흐뭇하기도 하고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 나이에 도대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런 책들을 붙잡고 그토록 낑낑댔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내게 '두꺼운 책들'은 그저 호기심이나 의무감의 대상이었지 처음부터 흥미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숱한 걸작 소설들 가운데 하필이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선택한 이유 또한 별 다른 건 딱히 없었다. 그저 우리집에 남자 형제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진 1_호메로스, 몽테뉴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은 당연히(?)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없다.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새 책으로 장만하지도 못했다. 그토록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 당시의 독서 경험이 두고두고 나에게 지속적으로 어떤 영향들을 끼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아주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 책들만 보면 이내 '고향집, 1980년 겨울'로 곧장 달려가곤 한다. 거기가 내 몸과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므로.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도 '두꺼운 책들'에 대한 괜한 욕심이 다시 발동했다. 그래서 찾아 읽은 책들이 (다시) 『몽테뉴 수상록』, 홉스의 『리바이어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허먼 멜빌의 『모비딕』, 스탕달의 『적과 흑』, D.H.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이었다. 플라톤의 『국가』,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등도 읽었다. 다른 얇은 책들도 더러 읽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보잘 것 없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왠지 나는 그 나이에 그다지 썩 어울리지 않게(?) 웅편거작들에 꽤나 욕심을 냈던 것 같다.

 

사진 2_플라톤, 막스 베버

군대에서 읽은 책들도 이제는 단 한 권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 때의 경험 때문에 다시 읽은 책들도 플라톤과 베버 정도다. 그래도 그 당시의 독서 경험이 내겐 소중했다. 심지어 알라딘에 처음으로 글을 올린 것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성립.발생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 대작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한 이후로는 아주 오랫동안 이상한 담을 쌓기 시작했다. 책과 나 사이에 쌓인 담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저절로 계속 높아만 갔다. 이래저래 '사회생활'로 아주 바빴던 탓도 있었고, 책 없이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들이 제법 많았는지도 모른다. 술 마시는 데만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었으니 말이다. 그런 시기에 대작들을 읽는다는 건 아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시기에 내갸 읽은 '장편'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문열의 『 삼국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때는 『소설 목민심서』, 『소설 동의보감』까지도 괜스레 대작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때의 독서 편력은 이를테면 '중세의 암흑기'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다시 책읽기에 살금살금 빠져든 게 대략 10여 년 전부터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너무나 흥미롭게 읽혔고, 그 여세를 몰아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쓰인 작품들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던 듯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세계사 책에서나 가까스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쓴 아주 오래된 고전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갑자기 '르네상스'를 맞이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를 만나고 나니 내가 새로이 만나야 될 흥미로운 인물들이 책 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를 만나고, 키케로와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를 만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를 잇따라 만났다.

 

 

 

사진 3_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타키투스, 카이사르, 에드워드 기번

고대 서양의 역사뿐 아니라 서양 세계의 '온갖 다양한 뿌리들'이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의 책 속 곳곳에 박혀 있다. 그들이 '역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이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사진 4_헤시오도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렐리우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세네카, 아폴로도로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빛낸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생각보는 것보다는 훨씬 뿌리가 깊다.

 

사진 5_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

숱한 문학 작품의 '발원지'와 같은 작품들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거듭 탐구했고, 플라톤 또한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어찌 삶을 견딜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그쯤에 이르니 두꺼운 책들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가시는 대신에 책 속에 담긴 묘한 비밀들이 차츰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아닌 '텍스트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데,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차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간통 같은 독서) 가령 단테의 『신곡』속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만 만나는 게 아니라, 트로이 전쟁에서 맹활약하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를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몽테뉴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 등장한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식이었다.

 

사진 6_단테, 베르길리우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톨스토이

단테는 타락한 민중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신곡』을 썼다기 보다는 탁월한 '문학작품'으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그려냈다. 그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평생의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책'이 지닌 마법과도 같은 위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토록 서로 다른 태양과 공기 속에서 살았던 낯선 인물들을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스승과 제자 사이' 혹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경험들은 차츰 철학으로도 번졌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무수한 고대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니 자연스레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을 찾아 읽게 되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쇼펜하우어와 헤어지자 말자 이내 니체를 찾게 되고, 니체의 작품들 속에서 다시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들과 철학자들을 다시 만나는 식이었다.

 

사진 7_쇼펜하우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크레티우스

 

 

사진 8_니체

니체는 언제나 강인하고 격렬하면서도 과격하다. 그러나 니체를 만나고 나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왜곡'인지에 대해 훨씬 더 깊이 배울 수 있다. 그만큼 수많은 분야를 아주 활기차게 자유자재로 훨훨 넘나든 철학자도 드물다. 철학, 종교, 도덕, 역사, 음악, 문학 등등등.

 

 

이런 경험이 극한까지 치달았던 건 무엇보다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만났을 때였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런 사전 준비작업도 없이 무모하게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곧장 뛰어든 건 아니었다. 누군가로부터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소개받은 적이 이미 있었고, 그 풍요로운 『월든』 속에서 다시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오비디우스, 소포클레스는 물론 몽테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허먼 멜빌 등등을 다시 만났고, 그런 교유 덕분에 비로소 나는 어른들이 읽는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런 얽히고 설킨 만남 덕분에 나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어렵사리 그를 만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웅편거작에 대한 공포심'이 거의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그토록 어려운 난관마저 뚫고 나왔는데 내 앞을 가로막을 책들이 더이상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싶은 '엄청난 자신감'이 와락 다가왔다고나 할까.

 

사진 9_제임스 조이스,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제임스 조이스에게는 너무 일찍 다가갈 필요가 없다.『율리시스』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럴 만나기 위해 너무 늦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클리프턴 패디먼의『평생 독서 계획』속에 담긴 책을 대략 3할 정도 읽고 나서 『율리시스』를 만나는 건 꽤나 좋은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다. http://blog.aladin.co.kr/oren/8597281

 

 

사진 10_헨리 데이빗 소로우, 랄프 왈도 에머슨

소로우는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콩코드에서 살았지만 '독서'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과 아주 활발한 교류를 나눴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같은 콩코드 주민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었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P150)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나는 우리 콩코드 땅이 배출한 인물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이 이곳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듣고도 끝내 그의 저서를 읽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마을 사람인데도 내가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가 바로 옆집 사람인데도 그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 말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영원불멸한 지혜를 담은 책이며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는데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들추지 않는다.(P154)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나서는 '두꺼운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에 모조리 제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 속에만 담아 왔던 대작들을 향해 겁없이 뛰어들 수 있었다. 단김에 소뿔 빼듯이 덥석 붙잡은 게 『전쟁과 평화』였다. 이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통해 '무모한 용기'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를 충분히 맛본 터여서 더더욱 『전쟁과 평화』가 '전쟁 보다는 평화 쪽으로' 아주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사진 11_세르반테스, 톨스토이

이들 두 작가는 인류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불려도 결코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 두 작품 모두 어머어마하게 긴 분량을 자랑하지만 책의 두께보다 훨씬 더 거대한 감동을 지닌 걸작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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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외교관이자 웅변가로 맹활약했던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그린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오마주이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저항'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다면, 후세 사람으로부터 영광스럽게도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린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이들 두 작품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왜냐하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야말로 고대의 무수한 전쟁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불굴의 용기와 지혜를 발휘한 위대한 인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탁월한 문장력에 대한 명성은 이미 『몽테뉴 수상록』을 통해서도 눈과 귀가 아프도록 익히 들어왔던 터였고, 이미 발췌 번역본인 천병희 선생님의『플루타르코스 영웅전』까지 읽었던 터라 '영웅전 전집'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토록 방대한 책을 단숨에(?) 완독하고 나서 곧바로 다시 집어들고 나서 (두 번째인 만큼) 아주 느긋하게 즐기면서 재독했던 일은 다른 책들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사진 12_플루타르코스

도서출판 숲에서 펴낸『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영웅 10명'만 담은 발췌 번역본이다. 완역본을 읽으면 발췌본에서 모자이크식으로 따로따로 움직이던 인물들이 어느새 여기저기서 동시에 한꺼번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루쿨루스, 세르토리우스, 술라, 키케로, 카토, 브루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동선이 겹치는데 『영웅전 전집』에는 이들의 전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두꺼운 책들'에 대해 여전히 미진한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셰익스피어 때문이었다. 인류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는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도저히 메울 길이 없을 듯했다. 더군다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내가 셰익스피어를 미리 만나지 못했던 일을 가슴 깊이 통탄했던 일들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셰익스피어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 쓴 『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자세히 소개 받은 터였고, 에머슨이 남긴 명언까지도 심심찮게 떠올렸던 터였다.(☞ 기어이 만날 수밖에 없게 된 셰익스피어)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사진 13_셰익스피어

최종철 교수가 '전10권'을 목표로 출간한 『셰익스피어 전집』시리즈. 전집 1권, 4권, 5권 , 7권에 담긴 작품들(모두 16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걸작들이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무엇보다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의 '운율을 살린 운문 번역'이면서 '가장 최신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사진 14_셰익스피어

민음사 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들은 다른 번역자의 판본으로 읽었다. 신정옥 교수가 '전작품'을 완역한 '전예원' 판은 번역된지 너무 오래된 상태여서 '외국어 표기'가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고, 산문체 번역이어서 '시적인 대사'를 감상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동서문화사의 번역들도 대체로 무난했다.

 

 

셰익스피어를 읽고 나니 아주 잠깐 동안은 '두꺼운 책들에 대한 갈망'이 일순 가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착각일 뿐이었다. 그건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 나오는 주인공인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의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인 베르크호프에서 자주 겪었던 '수은주의 변덕'을 닮았을 뿐이었다.

 

10월도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 자체로는 완전히 겸손하고 소리 없는 시작이다. 신호도 표시도 없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지 않으면 이를 쉽사리 놓쳐 버리게 된다. 시간에는 사실 눈금이 없고, 새로운 달이나 해가 시작될 때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예포를 쏘거나 종을 치는 것도 인간뿐이다.(434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_수은주의 변덕> 중에서 

 

 

그랬다. 셰익스피어를 때론 힘겹게, 때론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오르는 희열로 신나게 내달리는 기분으로 읽을 때도 있었으나, 현실 속의 나는 아직도 기껏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구경하지 못한 터였다. 아,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곧장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마의 산』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찰스 디킨스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들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을 내처 읽었다.

 

사진 15_토마스 만, 찰스 디킨스 

 

아... 그런데...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너무나 재미있는 소설이면서도 예상 외로(?) 분량 또한 엄청났다. 도대체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얼마나 긴 걸까? 이렇게 긴 데도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어도 좋단 말인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생각보다 그리 많이 읽지 않는 걸까? 게다가 많은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찰스 디킨스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황폐한 집』은 또 어떻고? 말 그대로 '황폐한 집'으로 내팽겨 친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렇다고 이게 꼭 찰스 디킨스만의 문제일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 그렇다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그토록 악명높은 길이를 자랑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도대체 얼마나 긴 걸까? 여기에 대한 합리적인 공통의 잣대는 없을까?

 

이런 얄궂은 생각들이 마구 스쳐갔던 게 벌써 스무 날이나 지난 과거가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 번쯤 시도해 봤으면 싶었던 '나만의 작업'을 슬금슬금 시작했다. 굳이 이 작업에 대해 따로 제목을 붙이고자 한다면 '름난 웅편거작들의 작품 길이에 대한 소고'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그런 말은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니 그냥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재미삼아 만들어 본 결과물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이 도표를 만들 때 '나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자의적인 판단'이 상당히 많이 개입됐다. 그걸 미리 밝힌다. 이런 표는 결국 '나 자신의 과거의 독서 경험과 미래의 독서 계획'을 일정 부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점을 미리 충분히 확인한 뒤에 이 표를 살펴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을 듯하다.

 

1. 이 표는 이름난 걸작들을 똑같은 잣대를 써서 '물리적인 작품의 길이'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게 주목적이다.

   그래서 똑같은 판형으로 출판된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총 275권)'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2. 여러 작품을 '합본'한 경우는 최대한 배제했다.

    예),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1,023쪽),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824쪽),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정략론』(665쪽), 카프카의 『성/심판/변신』(610쪽) 등

 

3. 여러 작품을 모은 '합본'이지만 (너무 중요한 작가여서) 예외적으로 포함시킨 작품은 딱 둘만 넣었다.

   예), 셰익스피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655쪽), 니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1,030쪽)

 

4. 단일 작품으로서의 통일성이 부족하거나, 비평가들로부터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작품들은 제외했다.

   예) 『아라비안나이트』(전5권, 5,336쪽), 『솔로몬 탈무드』(810쪽), 『그림동화전집』(1,344쪽) 등

 

5. 분량이 방대한 작품을 중심으로 길이를 비교하는 게 주목적이어서 '인위적인 하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널리 알려진 세 작품(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위대한 유산』)이 모두 560쪽이었다.

 

6. 대작이지만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에 아예 없는 작품들은 제외되었다.

   ex)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등

   또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526쪽)는 축약본의 번역본이어서 제외했다.

 

7. 지나치게 어려운 작품이거나 지나치게 대중적이다 싶은 작품은 일부러 제외했다.

    ex) 칸트의 『순수이성비판』(770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686쪽), 밀턴의 『실낙원』(644쪽),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332쪽) 등

 

 

이렇게 도표로 어렵사리 비교한 결과를 '한 눈에' 볼 수는 없을까? 물론 있다! 챠트로 만들면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인류의 천재들이 빚어낸 불멸의 걸작들이 이 챠트 하나에 다 담기다니!

 

까마득한 옛날에 내가 처음으로 도전했던 '몹시도 두꺼운 책들'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혹은 『몽테뉴 수상록』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먼 미래에는 이런 그림까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혹은, 까마득한 옛날에 어느 책에서 얼핏 스치듯이 보았던 서머싯 몸의 <세계 10대 소설 목록> 가운데 내가 읽은 작품이 단 하나, 『까라마조프 형제들』밖에 없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어쩌면 나를 여기까지 몰래 이끌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에 와서 문득 뒤돌아 보니 <세계 10대 소설>에서 어느새 두 작품만 내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놀랍다.

 

어쩌면 내가 쓰는 이 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덥석 붙잡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책들이 아직까지도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보다 부담이 훨씬 덜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으로 살짝 방향을 틀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시도가 누군가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런 측정 불가능한 미래의 자그마한 가능성들이야말로 이런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일 테니까 말이다.

 

사진 16_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에 포함된 작품들

사진에 없는 '10대 소설' 작품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 허먼 멜빌의 『모비딕』, 헨리 필딩의 『톰 존스의 모험』등이다. 내가 여태껏 읽지 못한 두 작품은 『폭풍의 언덕』과 『톰 존스의 모험』이다.

 

 

카프카는 책이 얼음을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라면 왜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하느냐고 말했다. 너무나 좋은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랄 때는 '얼음'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는 데 시간을 보냈지 얼음을 깨는 데 애를 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릴 땐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기분만큼 신나고 상쾌한 일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가끔씩은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꽈당 넘어질 때도 있었다. 얼음이 너무 매끄러우면 넘어지기 싫은 데도 아주 쉽게 벌러덩 넘어지는 수가 있다. 그런데 정말로 얼음을 깨트려야 할 때도 가끔씩은 있었다! 얼음 아래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를 잡을 때였다!

 

그렇다. 그럴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무기가 바로 도끼였다! 도끼만 있으면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도 아주 쉽게 깰 수 있었다! 얼음이 너무 단단하다거나 너무 매끄럽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얼음은 결국 얼음일 뿐이다. 그 얼음을 깨트릴 도끼는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얼마만큼 훌륭한 도끼로 얼마만큼 두꺼운 얼음을 깨트릴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나는 몹시도 두꺼운 책들이 두꺼운 얼음을 깨트리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다. 이토록 두꺼운 책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수로 '얼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들을 지닌 『마의 산』 같은 데를 오를 생각이나 했겠으며, 장차 저토록 방대한 풍모를 자랑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쪽으로 나 있는 길을 찾아 나설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다시 책을 붙들 시간이 다가온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왜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을까. 이런 책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못내 그립고, 이런 두툼한 책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못내 고맙기 때문이다. 이 글에 담긴 책들이 나에게 안겨준 즐거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지만, 그들이 내게 고통을 안겨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어찌 내가 틈날 때마다 이 책들을 거듭 보듬고 쓰다듬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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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도 두꺼운 책들에 대해 기나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올렸던 음악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이었다. 그 음악은 들을 때마다 심장이 고동친다. 무슨 어려운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을 듯한 '대책없는 자신감'도 무럭무럭 솟는다. 이런 글을 쓸 때 괜히 덧붙이고 싶은 음악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 썼던 글 속에 담긴 책들 가운데 '그때까지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이제는 어느새 '나도' 읽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보람이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온갖 책들을 사진에 다시 담아 보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작업이 아무런 댓가조차 없는 건 아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 책들을 대하는 나 자신까지 조금씩 변해 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진에 담아본 두꺼운 책들 2012-12-24 20:16:00

밑줄긋기와 필사(筆寫)에 대하여... 2016-02-01 15:58:00

책을 읽는 순서에 대하여... 2016-06-16 00:03:00

평생 독서 계획 점검 2017-05-03 0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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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권에 대한 '알라딘 상품넣기'는 내가 읽은 책들 혹은 내가 앞으로 읽고 싶은 판본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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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4-15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거대한 스케일의 포스팅을 만날 때마다 움찔합니다. 이런 글 쓰라고 있는 공간에서 난 도대체 뭘 써대고 있나 싶어서.....

정말 잘 읽었습니다. 존경스럽네요. 읽으신 것도, 쓰신 것도 전부 다요!

oren 2018-04-15 21:00   좋아요 0 | URL
물론 처음부터 제가 이렇게 거대한(?)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이 책 저 책들을 살피며 쪽수를 계속 적다 보니 그만 일이 조금 커지고 말았던 거예요.

그리고, 알라딘을 이용하는 목적들은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을 듯해요. 저마다 자신들에게 알맞는 방식으로 알맞게 활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봐요. 다만, 예전에 비해 너무나 경박(輕薄)해지고 단소(短小)해지는 느낌을 떨치긴 어렵지만요...

겨울호랑이 2018-04-15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oren님의 독서 여정과 앞으로의 중장기 계획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저도 oren님처럼 정리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아직은 많이 모자라네요... 새벽 사이 내린 눈 위로 나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을 보면서 따라가는 것처럼 oren님의 계획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행복하 하루 되세요.!

oren 2018-04-15 21:07   좋아요 1 | URL
저 또한 겨울호랑이 님께서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읽고 쓰시는 다양한 책과 글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곤 한답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취향은 서로 다 다르게 마련이니, 제가 어지럽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내디딘 발자국만 믿고 너무 바싹 뒤따라오진 마시길요~

포스트잇 2018-04-15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장대하십니다..
겐지이야기가 저렇게 딱 두 권으로 정리되는군요.
번역과 출판사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접으면 선택지가 더 열리는 경지^^
동양권 저서들에 대한 oren님의 장정 계획도 있으신가요?
부럽습니다...

oren 2018-04-15 21:26   좋아요 0 | URL
<겐지 이야기>는 어떤 판본으로는 무려 10 권짜리로 나온 것도 보이더군요. 저도 동서문화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하는 편이 아닌데, 이름난 고전들 가운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이 아예 없거나 그다지 신통치 않을 경우에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닐 때도 많더군요.

동양권 저서들도 읽고 싶은 책들은 많은데 무슨 까닭인지 여태 좀처럼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더군요. 사마천의 『사기』를 펼쳐 보다가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보고 ‘이미 아는 식상한 얘기들뿐‘이라는 인상을 너무 강하게 받았던 것 같기도 해요. 아니면 40대에 다시 읽었던 ‘온갖 권모술수로 가득찬‘ 『삼국지』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탓인지도요. 그래도 <겐지 이야기>, <마하바라따> 등등 읽을 거리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고 봅니다.^^

혜덕화 2018-04-15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듭 되는 찰스디킨스 예찬에, 드디어 오늘 위대한 유산과 세익스피어 1권, 4권 주문했습니다.
요즘 농사 짓느라 거의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두꺼운 책 시도라도 해 봐야겠어요.
레미제라블은 대학 1학년때 학교 도서관에서 정말 두꺼운 책 3권짜리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것도 한 페이지에 삼단으로 다단 인쇄 되었던 것 같은데....
정말 눈물과 한숨과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제 인생의 책이었습니다.
님 덕분에 고전에 눈을 돌려 봅니다.

oren 2018-04-15 21:40   좋아요 0 | URL
아... <위대한 유산>은 결코 실망스럽지 않을 거예요. 셰익스피어 전집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전집 1』에 있는 <베니스의 상인>과 <좋으실 대로>는 특히 강추합니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포셔와 로잘린드가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이지요. 『전집 4』에 담긴 작품 중에는 <줄리어스 시저>가 <햄릿> 보다는 훨씬 더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세로쓰기에다가 ‘2단‘ 또는 ‘3단‘ 구성도 더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토록 두툼한 『레 미제라블』을 대학 1학년 때 독파하시고, 두툼한 고전에 대한 희열까지 만끽하셨다니 괜스레 동지애를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