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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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저녁 8시 무렵, 해가 지고 있었다.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악취와 먼지에 가득 찬 도시의 공기를 탐욕스럽게 흠뻑 들이마셨다. 약간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야수적인 에너지가 그의 타는 듯한 눈동자와 누렇게 뜬 해쓱한 얼굴에서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몰랐고, 또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단번에 지금 당장.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슨 수로 끝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지니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념을 쫓아 버렸다. 상념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다만 이렇게든 저렇게든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상관없어.> 그는 필사적이고 질긴 자기 확신과 결단성을 가지고 이런 말을 되뇌고 있었다.(225∼226쪽)

 

(나의 생각)

 

전당포 여주인과 그녀의 여동생까지 도끼로 살해한 뒤 극도의 혼란과 공포 때문에 실신하고 마는 라스꼴리니꼬프는 며칠 만에 간신히 깨어난 후 라주미힌과 조시모프에게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관심과 염려로부터 그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절망에 휩싸여 그들을 자기 방에서 내쫓는다. 절규하면서.

 

「나를 내버려 둬! 나를, 모두 다!」 라스꼴리니꼬프는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언제쯤 나를 내버려 둘 거야, 이 고문자들아! 나는 너희들 따윈 두렵지 않아! 나는 아무도, 아무도 이젠 두렵지 않아! 저리 나가! 난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다고! 제발!」

 

그들을 모두 내쫓고 간신히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무작정 거리로 나선 라스꼴리니꼬프가 마땅히 찾아갈 만한 데가 과연 어디 있으랴.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무슨 수로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지도 모른 채 방황하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은 살인을 저지른 죄인에 대한 분노보다는 까닭모를 연민과 동정에 훨씬 가깝다.

 

 

 * * *

 

 

<그게 어디였더라.>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인간은 비열하다……! 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비열하다고 하는 놈도 비열하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230∼231쪽)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제2부>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여기서 인용한 책 속 내용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문득 떠올린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 이야기조차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사형수 체험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라스꼴리니꼬프조차 저토록 간절히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데, '벨린스끼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죄목'으로 체포되어 졸지에 사형 직전까지 내몰렸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얼마만큼 더 간절하게 삶을 이어가고 싶었을까.

 

 

 * * *

 

 

벌써

코사크 사람 하나가 성급하게 다가와

총을 보지 못하게 두 눈을 묶는다.

그리고ㅡ그는 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ㅡ

그의 눈길은 이제 눈멀기에 앞서

탐욕스럽게 저쪽에 펼쳐진

저 작은 한 조각 세상을 바라본다.

아침빛 속에 교회가 타오르는 것을 본다.

최후의 행복한 만찬을 위해서인 듯

그 접시는 성스런 아침노을로

가득 채워져 불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갑작스러운 행복감에 넘쳐

죽음 뒤의 신의 삶을 그리워하듯 교회를 바라본다….

 

그 때 그들이 그의 눈 위로 밤의 띠를 둘렀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피가 색깔을 가지고 돌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물 속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삶이

피로부터 솟구쳐 나온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바쳐진 이 순간이

한 번 더 자기 영혼을 통과하며

모든 잃어 버린 과거를 씻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전 일생이 다시 깨어나서

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유령처럼 스쳐간다.

창백하고 잃어 버린 잿빛 유년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아내,

세 개의 파편 같은 우정, 두 잔의 즐거움,

명성의 꿈, 한 더미의 수치.

그리고 그림으로 된 충동이 잃어 버린

청년 시절을 혈관을 따라 굴린다.

그들이 자신을 기둥에 묶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전 존재를

그는 한 번 더 깊은 내면으로 느낀다.

사려 깊은 생각이 어둡고 무겁게

그 자신의 그림자들을 그의 영혼 위로 던진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검고, 침묵하는 걸음걸이를 느낀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그가 손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는 것을,

심장은 점점 약하게…  약하게…  그러다가 이제 더는

뛰지 않는다.

1분이 지나면…  그러면 끝이다.

코사크 사람들은

저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을 이룬다… .

총을 맨 벨트는 흔들리고…

손들은 방아쇠 소리를 내고…

북이 울려서 공기를 가른다.

그 1초는 수천 년 나이를 먹게 한다.

 

그 때 외침소리 하나,

멈추어라!

장교가 앞으로

나선다. 종이 한 장이 하얗게 펄럭인다.

그의 음성은 맑고도 분명하게

기다리는 적막 속으로 파고든다.

차르(러시아의 황제)께서

그 성스러운 의지의 은총으로

판결을 취소하셨다. 이제

판결은 감형되었다.

 

그 말들은 아직

낯설게 들린다. 그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혈관 속을

흐르는 피는 다시 붉어지고,

솟구쳐 흐르며 다시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망설이면서 마비된 관절에서 물러서고

두 눈은 아직 캄캄하지만 영원한 빛이

둘러싸며 인사하는 것을 느낀다.

형리는

말없이 묶은 끈을 풀어주고

두 손이 갈라진 자작나무 껍질 벗기듯

하얀 천을

타오르는 관자놀이에서 벗겨낸다.

비틀거리며 두 눈은 무덤에서 빠져 나온다.

아직도 약하게 눈이 먼 채로

이미 사라졌던 존재 속으로

다시 서투르게 더듬으며 들어간다.

(201∼204쪽)

 

 -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죽음에서 건져올린 삶-사형 직전의 도스토예프스키

 

(나의 생각)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1849년 12월 22일이었다. 황제의 특사로 형 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강제 노동형으로 감형되고, 시베리아의 비참한 수용소에서 4년 동안 유형 생활을 보낸다. 젊은 시절부터 이토록 드라마틱한 체험을 겪은 사람이었으니, 그의 작품이 지옥을 넘나드는 것처럼 생생하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법하다. 도스토에프스키의 많은 작품들 속에 작가의 체험이 핏빛처럼 선연하게 뿌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싶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필연을 두고 우연을 가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탄생한 데에도 무수한 우연이 개입되어 필연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어쩌면 이같은 생각조차도 '우연과 필연' 사이의 불가해한 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심리의 '참을 수 없는 구분의 욕망'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숭고와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어느 위인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연과 필연 사이의 거리도 그만큼 바싹 붙어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어째서 이것이 이런 형태로 생겼고 다른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것은 이런 형태로 생겼기 때문이다. "우연이 상황을 만들고 천재가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우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천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연이나 천재라고 하는 말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이 말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단계를 나타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지를 못한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알려고 하지 않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인간의 성질로부터 동떨어진 행위를 일으키는 힘을 본다. 왜 그것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다.(1542-1543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에필로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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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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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존경하는 선생.」 그는 득의만면해서 말문을 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極貧)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25쪽)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과연 어느 누가 이런 대화를 들려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그들은 이토록 통절한 가난을 느낄 정도의 표현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 어쩌면 그에게서라면 이 정도로 처절하고 절박한 느낌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는? 찰스 디킨스? 혹은 발자크? 작가의 형편상으로는 이 두 작가의 표현이 그나마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도 뭔가 이토록(!) 비장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좀체 느끼기 어려운 뭔가가 느껴진다. 뭔가 찌르는 듯한 혹은 깊숙히 찔리는 듯한. 그런 느낌만을 강조한다면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에 훨씬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를 찌르는 것이 있구나. 애석하게도, 심장을? 심장을!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 한 가지만 묻지요, 젊은 선생, 혹시 …… 음, 음, 선생은 아무 희망도 없이 돈을 꾸러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꾸러 가본 적은 있지요 ……. 그런데 희망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조금도 희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꿔줄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는 거니까요. 아주 선량하고 사회에 유익한 그 시민이 결단코 선생에게 돈을 꿔줄 리 만무하다는 점을 선생은 확실히 아신다는 겁니다. 제가 묻지요, 그가 무엇 때문에 꿔주겠습니까? 그는 내가 갚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동정 때문이라고요?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을 좇고 있는 레베쟈뜨니꼬프 씨는 동정이 우리 시대의 과학으로도 금지되어 있고, 정치경제학이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왜 꿔주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꾸러 가는 겁니다. 그리고…….」

 

「대체 왜 가는 거지요?」 라스꼴리니꼬프가 끼어들었다.

 

「어쩌면 찾아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니면 더 이상 찾아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어떤 인간이든 아무 데라도 찾아갈 만한 곳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디든 반드시 가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처음으로 노란 딱지를 받고 거리로 나갔을 때, 나는 그때도 역시 갔었지요…….(내 딸은 노란 딱지로 산다오…….)」(26∼27쪽)

 

 

 * * *

 

 

「이게 내 모습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아시겠어요, 선생? 난 아내의 양말짝마저 술과 바꿔 마셔 버렸습니다. 신발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발로 마시는 건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양말이었습니다. 마누라 양말짝까지 마셔 버린 겁니다! 염소 털로 만든 아내의 목도리도 마셔 버렸지요. 전에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 물건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추운 구석방에서 살고 있는데, 아내는 이번 겨울에 감기가 들어서,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합니다. 애들은 어린것이 셋인데,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그 여자는 어릴 때부터 깨끗하게 자란 터라, 쓸고 닦고 아이들을 목욕시킵니다. 가슴이 약해져서 폐병기가 있는데, 난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마시는 겁니다. 마시면서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 한 가지, 비애만을 찾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배가시키려고 마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절망한 듯이 고개를 탁자에 떨궜다.(28∼29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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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 사 놓은지가 언제인데 싶네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처절한 가난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기에 그런 대작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불행이 성공의 이유이다”라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늘 해 봅니다

oren 2019-01-10 12:00   좋아요 1 | URL
<죄와 벌> 같은 책이 책장에 고시 모셔져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괜시리 이 책을 쓴 작가와 작품에 대해 까닭모를 불경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하더군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은 이후 아주 오랫동안 작가에 대한 외경심을 떨치기 어려웠는데, 언젠가 우연히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통해 그가 겪은 지독한 가난과 도벽은 물론 한 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얘기까지 접하고 나니 그가 경험했을 삶의 깊이가 도대체 얼마만큼 깊었던가를 새삼 헤아려보게 되더군요.^^

카알벨루치 2019-01-10 12:02   좋아요 1 | URL
저도 올해안에 꼭 읽고 리뷰 한번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 멋찐 하루 되십시오!~

oren 2019-01-10 12:39   좋아요 1 | URL
올해는 오늘 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열한 달도 더 남았으니 <죄와 벌>만큼은 아주 여유롭게 읽으실 듯합니다.^^ 카알벨루치 님의 멋진 리뷰 기대할께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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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득히 들려오는 장닭의 울음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졸음과 납덩어리 같은 아른함이 몰려오는 뜨거운 여름 한낮이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지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지는 그때, 그 우렁찬 계명(鷄鳴)이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다.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쾌적하게 울려온다. 이튿날 아침 풀밭에서 그 열매를 찾다가 눈에 띄었을 때의 기쁨이란!

 

아침나절 길다란 낫을 가는 망치 소리는 잠을 깨우는 울림이다. 공기에서는 취할 듯이 짙은 향내가 난다. 이제부터 뜨겁고 건조한 하루가 되리라. 이글이글 열을 지은 채원(菜園)의 풀줄기가 햇볕 속에서 찌듯이 익어가리라.

 

화려한 농촌의 소음으로는 길다란 장대에 달린 나무 갈퀴로 마른 풀을 뒤적거릴 때 들려오는 메마른 바삭거림이 있다. 그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어느덧 경건한 기도 소리 들리는 밤을 생각하게 된다. 초원 사이로 열린 오솔길을, 그리고 마주 걸어오는 쟈네트의 어깨 위로 드리워진 새하얀 수건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사랑스러운 끄적임.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라는 구절 다음에 한동안 막혀버린다.(14∼15쪽)

 

(나의 생각)

 

장닭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 너무 오래다. 한겨울 새벽을 힘차게 열어젖히던 그 우렁찬 목소리가 그립다. 까마득한 옛날,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던 암탉들이 소 외양간이며 마루 밑에도 숨겨 놓곤 하던 달걀의 따스한 감촉도 그립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을 때마다 괜스레 훼방이나 놓곤 하던 그 옛날, 그 암탉들은 우리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 * *

 

 

마을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나는 즐겨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웃에서 들려와서는 안 된다. 얼마간 바람결을 타고 불어와 조화된 소리여야 한다. 그 금속성은 내 어린 가슴을 한껏 설레게 했었다. 프랑켄의 장터에 자리잡은 대장간에서는 섬뜩한 느낌의 풀무가 훨훨 타오르는 석탄 불길 속에서 용해되고 있었고, 시커먼 칠을 묻힌 대장장이가 멀찌감치 서서 쇠망치로 달아오른 쇳덩이를 때리면, 불똥의 빗줄기가 꿈처럼 아름답게 곡선을 그으며 어두운 대장간 창고 안으로 비산(飛散)하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분수의 낙수 소리. 중세풍의 슈바벤 할 시(市)의 어느 주막 앞에는 분수가 하나 서 있어 온 달밤을 지새우도록 전설과 동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15∼16쪽)

 

(나의 생각)

 

까마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우리 마을에도 대장간이 있었다. 그 대장간은 마을의 신작로를 살짝 벗어나 냇가로 이어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대장간 바로 옆에 '상여'를 보관하던 곳집이 있어서 어린 아이들에겐 괜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대장간은 주로 여름철에 바빴던 것 같다. 우리가 대장간 구경을 실컷 즐길 수 있었던 때도 주로 '매미'를 잡기 위해 그곳까지 진출했던 여름방학 때였으니까. 아무튼 대장간 구경은 소리 보다는 빛이 중심이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두드릴 때마다 불똥이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좋은 구경거리도 없었다. 

 

 

 * * *

 

 

폭풍이 몰아칠 때 소나무 수관(樹冠)을 휙휙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도 노래를 한다. 이 두 개의 소리에 나는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 있다. 바람 부는 날 고성(古城)이나 농장의 뜰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도깨비라도 나올 듯 매우 기묘한 것이다.

 

거울처럼 잔잔하게 잠든 호면(湖面)에서 보트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 보라. 끌어올린 노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구원의 물방울. 알아보기도 힘든 자디잔 물체와 들릴 듯 말 듯한 소음. 그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스러져가는 것이다.

 

바다의 소음. 칠흑 같은 밤, 그것이 그윽하게 성난 듯이 백사장의 조약돌이나 해변의 암석에 탄식하듯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를 야릇한 그리움과 설렘 속에 몰아넣는다. 그것은 속세의 음성이 아니라 해신(海神)의 음성이며, 수정(水精)의 유혹하는 호소이며, 인어의 노래이다.

 

산골짜기에서 와르릉 꽝꽝 바위 구르는 소리. 저 푸른 절벽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무시무시하게 쿵쾅거리는 굉음! 다시 한번 이 죽음의 음성은 바로 곁에까지 왔다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깊고 탐욕스럽게 가슴 깊숙이까지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던가.(16∼17쪽)

 

(나의 생각)

 

몹시도 추운 한겨울, 썰매를 타러 나간다거나 연을 날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 닥치면, 문풍지 바른 문틈 사이로 '우웅~ 우웅~' 하는 겨울바람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그런 날에는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하루종일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든다거나 자전거를 만들며 놀곤 했다. 그런 날 점심 매뉴는 으레 김치와 콩나물이 적당히 버무려진 질펀하면서도 뜨끈뜨끈한 비빔밥이었는데, 거기다 고추장을 적당히 비벼 먹으면 이내 후끈하게 땀이 났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수수깡 놀이는 저녁나절까지 계속 되곤 했다. 그런 날에는 '우웅~ 우웅~'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도 온종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리곤 했었다.

 

 

 * * *

 

 

전차바퀴의 덜컹거리는 운율을 나는 더없이 사랑한다.

 

또 그르릉거리는 뱃고동과 추진기 주변을 소용돌이치는 물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닻의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 배를 정박시키는 말뚝의 삐걱대는 소리. 투박한 시골의 우편마차 위에서 철썩 내리치는 채찍의 울림. 비행기 모터의 성급한 붕붕거림. 이것은 귀가 겪는 순수한 음향의 모험들이다. 고도(古都)의 아치 성문을 덜그럭덜그럭 지나는 말발굽 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방랑하는 시인 아이헨도르프를 생각하고, 마리안네 폰 빌레머(장년기 괴테의 애인)의 여행복에서 풍기는 라벤더의 방향(芳香)을 생각하게 된다.(17쪽)

 

 

 * * *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와 그 위에 얹힌 물주전자의 노랫소리는 나를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부엌, 파란 그릇들로 가득 찬 할머님의 부엌, 곡식과 과일 냄새 풍기는 농촌의 부엌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와 같은 소음인 것이다.

 

헤센과 프랑켄의 작은 마을들, 고향에서의 잊을 수 없이 화려한 밤의 소음들이 있다. 밀가루 덮인 농촌의 물방앗간 방파제 위로 단조로운 파도를 치면서 끊임없이 좔좔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버릇에 젖은 어느 주정뱅이가 포도(鋪道) 위를 비틀비틀 비척거리고 걸어가며 끊임없이 끄륵대는 트림 소리. 돌풍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이의 손마디인가, 덧문을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 문간 구석에서 새어나오는 어느 처녀와 총각의 입맞춤 소리. 그리고 교회 탑의 시계가 뚝딱거릴 때마다 녹이 슨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18쪽)

 

(나의 생각)

 

언제나 쌀가루가 뽀얗게 덮여 있던 우리 마을 방앗간은 언제 없어지고 말았던가. 벼베기도 다 끝난 초겨울쯤, 볏가마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방앗간에 갈라치면, 그곳엔 언제나 곡식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아저씨가 계셨다. 온갖 벨트들이 바삐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새하얀 쌀알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던 그 풍경들이 새삼 그립다. 가끔씩 바삐 돌던 벨트가 멈춰 서면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참았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엔 소음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방앗간이 멈춰 설 때마다 방앗간 뒤켠에 있던 큼지막한 발동기의 시동 거는 소리만큼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도 드물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던 백남봉의 소리 모사에서도 언제나 백미는 발동기 시동 거는 소리였다.  ‘돼지가 새끼를 납니다. 그때 나는 소리입니다. 꿀꿀’, ‘부산에서 인천으로 날아온 지친 기러기입니다. 끼룩 끼룩’ 하면서 온갖 소리를 멋지게 흉내 내던 그 옛날의 소리 모사꾼들의 목소리도 이젠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 * *

 

 

풀베기를 끝낸 초원 위를 구름처럼 떼지어 나르는 뇌명(雷鳴) 같은 찌르레기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는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벌써 여름이 갔구나, 철새들이 먼 여행을 준비하는구나, 또 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ㅡ 하는 가슴 속의 일말의 울적함을 떨칠 수가 없다.(18∼19쪽)

 

 

 * * *

 

눈(雪)이 일으키는 소음도 내가 사랑하는 소리에 속한다. 섬세하고 알알한 싸라기 내리는 소리에서부터 봄철 높새바람에 무너져내리는 눈사태의 우레 소리까지. 마을 우편배달부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걸어오는 발소리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ㅡ 반갑고 궂은 소식, 아득히 먼 세계가 이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차역의 덜커덕대는 소리. 도시의 왁자한 소음. 해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뜨거운 그리움이 사박거리며 함께 들려오는 것이다. 미움과 사랑, 환희,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죽음의 발소리까지.

 

썰매를 끄는 말방울 소리. 그것 역시 신비스럽다. 들리는가 하면 어느덧 지나쳐버린다. 그렇게 불현듯 스쳐 불어가는 것이면서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리이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연주할 때, 그것은 얼마나 묘한 일인가! 꽥꽥 긁어대며 활주(滑奏)하는 불협화음 뒤에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의 장려하고 거창한 음(音)의 바다가 높이 펼쳐지는 것이다.(19쪽)

 

(나의 생각)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겨울방학때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빨간 색 자전거를 타고 오던 우편배달부였다. 그 아저씨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달려오다가 우리집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소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우편물 가방을 열어젖히면, 거기선 어김없이 '연재 만화'가 실린 소년동아일보가 특유의 신문지 냄새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 당시엔 어린이용 '연재 만화' 만큼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도 드물었다. 연재 만화 속의 풍경들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아득히 먼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 * *

 

 

뚝…… 뚝……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지난날 수업 시간에 들리던 납같이 무거운 소음. 교실에서는 선생님의 피로에 지친 울먹한 음성이 들려왔다. "Nemo ante mortem beatus" ㅡ 어느 누구도 죽음에 직면해서 행복을 구가할 수는 없다. 소년은 노(老) 교수의 육중한 지혜에는 아랑곳없이 창 앞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비스듬히 걸려 있는 전선줄 위로 수백 개의 물방울이 나란히 매달려 있어서, 일순간 가만히 방울 지어 있다가는 다음 방울에 밀려 곧 부서져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뚝…… 뚝…… 그것은 대자연의 언어이며, 구름의, 하늘의, 무한한 세계의 언어이다. 또한 그것은 바다의 인사이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넘쳐흐르는 샘물의, 돌 고드름 열린 종유동으로부터의 인사이다. 소곤거리는 분수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인사이며, 나이아가라와 라인 강의 뇌성(雷聲)이며, 아득한 해안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이다 ㅡ 이렇듯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야성과 위대함, 충만함과 풍요함이 이 단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20쪽)

 

 

 * * *

 

 

봄날 저녁 떼지어 들끓는 풍뎅이의 붕붕거림. 이제 곧 붉은 만월이 떠오르리라. 거리는 어느덧 시골 처녀들의 다감한, 조금은 구슬픈 노랫소리로 가득 찬다. 하모니카의 부드러운 선율이라도 끼어든다면, 그곳에야말로 깊어가는 밤의 알 수 없는 고뇌와 감미로움이 자리잡는 것이다.

 

아코디언 켜는 소리. 그 소리를 못 들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깊은 밤, 방 안에서 무엇인가 가구에 딱 부딪히는 소리. 누가 오는 것일까? 아니면 가는 걸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었을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들의 잠자리를 굽어보시는 어머니였을까? 요정이었을까? 겁 많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밤중 방 안에서 나는 유령 같은 소리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환희에 겨운 두 연인의 잔 부딪치는 소리. 춘삼월, 습기 찬 풀밭에서 연주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 ㅡ 그것은 목신(牧神)이 새로이 인생의 불멸을 구가하는 소리였다.(20∼21쪽)

 

 

 * * *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눈 녹은 물줄기가 홈통으로 흐느낌처럼 후둑후둑 쏟아지는 소리. 물고기가 잔잔한 수면으로 팔딱 뛰어오르는 소리. 어린아이의 종종거리는 발소리. 바람 잠든 날, 전선줄의 윙윙거리는 소리 ㅡ 이것은 마을 소년들이 먼 곳의 사람들의 욕설처럼 변덕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스런 기상의 신호이다.

 

아, 한 잎 가랑잎이 살그머니 떨어질 때, 가슴 아프도록 지친 소리. 아직도 나무에는 여름이 달려 있는데 어느덧 한 잎이 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팔락거림이나 출발을 앞둔 말의 울음소리는 얼마나 우렁차고 자랑스러운 소리이며 승리의 소리인가! 대목을 앞둔 장터에서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목쉰 음성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희가 막 사이로 미끄러져 나와 감사와 축복, 자랑과 기쁨의 미소를 띄울 때, 터져 나오는 갈채 소리는 얼마나 감동적인가.(21∼22쪽)

 

(나의 생각)

 

불현듯 스치며 떠오르는 옛 추억들은 섬광처럼 반짝 빛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게 특징이다. 그처럼 짧게 스쳐 지나가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누구에겐들 없겠냐마는, 그런 느낌들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포착하고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수필가였던 안톤 슈낙의 글 솜씨가 참으로 부럽다.

 

 

 * * *

 

 

찾아오는 여인의 발소리는 온 심장과 기대를 끌어당긴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정원에 깔린 자갈 위로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온다. 가볍고 날렵하게 사뿐사뿐 걷는 우아하고 경쾌한 발소리. 축복의 발소리, 후광을 지닌 발걸음, 그것은 걸음 중의 걸음 소리이다.

 

정적의 소리야말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무위(無爲)로부터, 근원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심연의 흐름 ㅡ 바로 오르간의 음악 소리요, 조개껍질의 소리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 속을 흐르는 피의 음악이다. 심실(心室)의 노래이며, 자체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인 것이다.

 

한껏 부풀어 격동하는 심장을 가진 자는 축복을 받은 자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입맞춤은 심장을 그렇게 고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질주하며 울리는 격동을 듣고 있다. 이 이중창을 듣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축복단은 일이란 지상에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이다.(22∼23쪽)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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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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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 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많은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10∼12쪽) 

 

 

 * * *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찌기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2쪽)

 

(나의 생각)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마을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던 풍경이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이었다. 그곳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에는 연을 날리는 장소였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눈싸움 장소였다. 추운 겨울에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기엔 너무나 따분한 날, 거기선 개구장이 녀석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훔쳐 낸 성냥불로 불장난도 치곤 했다. 어른들처럼 몰래 잎담배를 말아 피워보기도 했다. 내가 입대하기 전까지 살았던 고향 마을 우리 집에는 30여 년 전에 우리 식구가 서울로 떠나올 때 이웃 마을에서 이주해 온 그 식구들이 아직도 거기서 눌러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옛날에 우리 집이었던 그 집을 찬찬히 둘러 보고 오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옛날 우리 집이었던 그 집 안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 집은 이미 남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미 30년 이상이나 남의 집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남의 집으로 남아 있을 그 집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슬프기보다는 안타깝고 아련한 느낌부터 맛본다. 내가 한 때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 다른 낯선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 * *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짓는 소리. '크루트 함순'(1859∼1952: 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ㅡ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3쪽)

 

(나의 생각)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를 바라보는 느낌은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게 아닐까. 한 해 동안의 고된 노동이 비로소 마무리되고, 이제는 거기서 무언가를 불에 태울 정도로 한결 여유롭다는 느낌부터 들지 않는가. 고요한 한밤중에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들려 오던 '컹컹' 개짖는 소리 또한 슬프기보다는 뭔가 아련한 느낌부터 먼저 떠오르는 소리가 아닐까. 그 개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짖는 지와는 상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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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oren 2019-01-01 13:45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네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9∼10쪽)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

 

 

 * * *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집어들고 여기 저기를 펼쳐 보다가 오늘은 문득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예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스쳐 지나갔을 게 분명한 어느 대목에서 갑자기 딱 멈추고 말았다. 안톤 슈낙이 말한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때문이었다. 비록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편지를 단 한 통도 간직하고 있진 않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괜시리 울컥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37년생인 아버지의 학력은 국졸이 틀림없다. 중학교까지 다녔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아 본 최초의 편지는 아마도 1978년 봄쯤이었던 듯하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 한기에 겨우 두 번쯤 고향엘 다녀왔을 뿐이었다. 중간 고사 끝나고 한 번, 기말고사 끝나고 또 한 번. 그 사이사이를 메꿔주는 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께 드리는 문안 편지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화기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물론 내가 자취하던 주인댁의 안방에도 떠억하니 전화기가 있었지만, 그래봐야 우리 동네엔 동장댁에만 딸랑 한 대의 전화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 당시 전화기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전보처럼 긴급히 사용하는 비상 통신 수단에 가까웠다. 내가 동장님댁으로 '내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달려갔던 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고입 시험 합격 통지를 받을 때였다. 내 앞으로 전화가 와 있다는 동장님의 방송을 듣고 그 전화를 받으러 종갓집 못둑 위를 마구 내달릴 때 내 얼굴에 부딪혀 오던 차디찬 겨울 바람의 느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안동에서 3년을 보낼 동안에 내가 아버님과 주고 받은 그 많은 편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 덕분에 어느새 익숙해진 아버님의 필체를 다시 마주한 건 삼척에서 신병 훈련을 받을 때였다. 6주 동안의 신병 훈련은 대체로 견딜 만했지만 생각보다는 몹시 빡센 것도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내 생일이었던 6월 29일에 입대해서 여름 더위가 절정을 넘긴 8월 14일이 되어서야 신병 교육대를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삼복 더위를 온통 거기서 다 보낸 셈이었다.

 

1983년 여름의 어느 밤, 삼척의 바닷가 후진 해수욕장에서는 보니 엠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밤바다를 훤히 밝히는 온갖 불빛들이 저 멀리서 산 아래 바닷가에서 아롱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에 우리 신병들은 이름도 모를 어느 야산의 훈련장에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아주 가혹한 '얼차례'를 받고 있었다. 야간 각개 훈련의 마지막 훈련이었는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철모 위에 원산 폭격'을 무려 1시간 가까이 받았던 것이다.(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텼지만, 결국 머리가 다 짓이겨져 그날 밤 의무대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나중에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야 반창고를 떼어냈고 이내 손바닥만 한 딱지가 앉았는데, 그 여파로 머리카락이 쏙 빠지는 바람에 한동안 발모제를 사다 발라야 했다.) 극한에 가까운 얼차례를 받고 난 뒤에 뒤따르는 카타르시스는 대개 '어머님 은혜'를 부르는 것이었다. 다들 첫 소절도 다 부르지 못하고 목이 메어 꺼이꺼이 울면서 그 노래를 겨우 따라 부르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훈련소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총기 수입까지 다 마치고 나서 잠깐씩 한가한 틈에 주어지는 '편지 쓰기 시간'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다들 효자 심정이 되는지, 볼펜만 붙잡으면 편지지를 너댓장씩 꽉꽉 채우며 온갖 참회의 심정들을 열정적으로 마구 쏟아냈더랬다. 매번 편지의 시작은 똑같았다. '아버님 전상서,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대소간의 어르신들도 두루 건강하시겠지요? ' 하는 투였다. 그때 부모님과 주고 받은 편지가 얼마나 구구절절했던지는 제대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들은 바로는, 내 편지를 받아보실 때마다 아버님께서 장문의 편지를 손수 어머님께도 읽어 주셨으며, 그 때마다 두 분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쓴 편지 때문에 부모님께서 눈물까지 흘리셨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더랬다. 군복무때 내가 쓴 편지가 몇 통이었는지, 내가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또 얼마만큼이었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편지들이 지금 단 한 통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그 옛날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 받는 편지 때문에 우표값도 적잖이 들었던 듯한데, 까마득한 옛날의 소인이 찍힌 그 많은 편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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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2-3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oren 2018-12-31 14:28   좋아요 1 | URL
한 해 동안 겨울호랑이 님 덕분에 서재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겨울호랑이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cyrus 2018-12-31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마지막 날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oren 2018-12-31 14:29   좋아요 0 | URL
cyrus 님께서도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에는 더욱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