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인류 역사상 다시는 반복되기 어려우리만큼 영광스럽고 찬란하던 나날들을 뒤로 하고 마침내 오욕과 치욕으로 점철된 굴욕스런 날들을 견디다가 끝끝내 두 동강으로 영구히 갈라선 때가 395년이었다. 강력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나약한 두 아들이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두 제국은 어느 하나 제 앞가림조차 버거워 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로부터 대략 80년쯤 지난 뒤 나약했던 서로마 제국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거기서 다시 50년쯤 더 흐르고 나면 지리멸렬하던 동로마 제국에서 일순 카리스마 넘치는 걸출한 황제가 나타나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강렬한 열망을 드러낸다. 그 황제의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재위 527~565) (출처 : 위키백과)

 

이 황제가 무식하기 이를 데 없었던 농사꾼 출신의 삼촌 유스티누스 황제로부터 어떻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할 겨를은 없다. 어쨌든 그는 45세에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 받았고, 로마 제국을 38년 7개월 13일간 통치했다. 이 정열적인 황제가 기나긴 치세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벌였고,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을 치렀는지는 벨리사리우스라는 걸출한 장군의 비서가 자세한 기록을 남긴 덕분에 후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다. 유창한 말재주로 원로원 의원과 콘스탄티노플의 장관까지 지낸 이 비서의 이름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였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치렀던 페르시아, 반달족, 고트족과 벌인 전쟁을 여덟 권의 책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이 탁월한 장군의 빛나는 업적들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광을 흐리게 만드는 바람에 또다른 책을 써야 할 정도였다. 프로코피우스는 황제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려고 『건축사』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테미스토클레스와 키루스의 미숙함을 능가하는 입법자요 정복자라고 찬양했다. 그 책을 황제에게 바쳤으면서도 자신이 기대했던 바를 얻지 못한 프로코피우스는 황제에게 은밀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그 책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추악하고 비열한 폭군으로 돌변하고, 황제와 그 배우자인 테오도라는 인류의 파멸을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두 마리 악마로 표현된다.(국내에서는 프로코피우스의 대표작인 『전쟁사』와 『건축사』는 번역되지 못했지만 악명높은 그의 독설들이 가득 찬 『비사』는 번역되어 나와 있다. ☞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이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 동로마 최고의 장군이었던 벨리사리우스와 그의 비서이자 역사가였던 프로코피우스까지 조금씩이나마 소개했으니, 본격적으로 벨리사리우스 장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이 대목에서 일부 사람들은 그 유명한 테오도라 황후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왜 건너뛰느냐고 항의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자면 만화책 1권의 분량이 추가로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에서도 그녀를 소재로 엮은 책이 이미 나와 있다! (☞ 테오도라 - 천민에서 동로마의 황후가 된) 어쨌든 그녀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아내가 되기 전까지의 짧은 스토리만 읽어 보더라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나중에 동로마 제국을 손아귀에 움켜 잡고 자신의 성미가 이끄는 대로 마음껏 쥐락펴락 농락했을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세 딸은 나이가 듦에 따라 미모가 출중해졌고, 비잔티움 제국인들의 사적인 자리나 공적인 자리에서 즐거움을 주도록 계속해서 헌신하게 되었다. (…) 테오도라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플루트를 연주하지 못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기술은 오로지 무언극이었다. 테오도라는 익살꾼이나 광대의 흉내를 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테오도라가 익살스럽게 두 볼을 크게 부풀리고 웃기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다가 한 방 얻어맞는 시늉을 하면 콘스탄티노플의 극장에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테오도라가 받은 찬사의 진정한 대상이자 더욱 강렬한 기쁨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이었다. 테오도라는 섬세하고 균형 잡힌 외모를 갖고 있었다. 다소 창백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빛은 자연스러운 색감을 띠고 있었고, 그 생기 넘치는 두 눈동자는 숨김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지만 우아한 몸집에서 풍겨 나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은 품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의 비할 데 없는 뛰어난 외모를 시나 그림으로 제대로 그려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빼어난 자태는 대중의 눈에 노출되고 음탕한 욕망에 팔려 나갔다는 점에서 그 품위가 저하되었다. 테오도라의 아름다운 용모는 돈에 좌우되어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온갖 직종과 직급의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운 좋게 하룻밤의 즐거움을 약속받았다 하더라도 더 강하거나 더 부유한 자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테오도라의 침대에서 쫓겨나야 했다. 테오도라가 거리를 거닐면, 추문을 피하고자 하는 이나 유혹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세태를 비꼬는 풍자적인 역사가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비사』에서 테오도라가 극장에서 부끄럼도 없이 나체를 드러냈던 일에 대해 노골적으로 묘사헀다. 관능적인 쾌락을 느끼는 일에 체력을 모두 소진한 후에 테오도라는 불쾌한 얼굴로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투덜거렸다고 한다. 한동안 도시인들의 경멸과 기쁨으로 권세를 떨치던 테오도라는 티르 출신의 에케볼루스를 따라 살게 되었는데, 그는 아프리카의 펜타폴리스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결합은 허술하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에케볼루스는 곧 돈이 많이 들고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첩을 버렸고, 테오도라는 엘렉산드리아에서 극심한 곤궁에 빠져 지냈다. 마침내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 때 들른 동로마 제국의 모든 도시는 키프로스 섬의 이 아름다운 여인을 마음껏 즐기고 흠모한다.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은 베누스 여신의 혈통을 잇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성교를 애매하게 이끌고 정말 귀찮지만 필요한 피임 조치를 잘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는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다.(48∼4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Mosaic of Theodora - Basilica of San Vitale (built A.D. 547), Italy.(출처:위키백과)

 

테오도라가 단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낳은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성장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서야 아들에게 황후의 아들임을 알렸다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던 이 젊은이는 희망에 부풀어 서둘러 콘스탄티노플의 궁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를 알현했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모습은 그 이후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테오도라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감추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도 앗아 갔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녀가 유스니티니아누스 황제의 아내가 된 스토리를 짧게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장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될 것임을 깨달은 테오도라는 파플라고니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는 노련한 배우답게 얌전하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가장하고 지냈다. 기특하게도 양모를 자아 털실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 곤궁한 생활을 해결하고, 나중에 거대한 사원으로 변모하게 될 작은 집에서 혼자서 지내며 정절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책략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오도라의 아룸다움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미 유스티니아누스는 숙부의 이름을 빌려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마도 테오도라는 이전에 가장 비천한 남자들에게도 마구 뿌려 댔던 그녀의 타고난 매력의 가치를 한껏 올리는 방법을 용케도 찾아냈던 모양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아주 신중하게 몸을 사리는 것으로 남자를 자극하고, 마지막에는 관능적인 매력으로 연인의 욕망을 자극했를 것이다. 그래서 지극한 신앙심 또는 원래 타고난 성품 탓으로 오랜 철야 기도와 절제된 식사에만 익숙해 있던 젊은이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첫 번째 무아지경이 진정되고 난 후에도 테오도라는 뛰어난 분별력과 침착함으로 여전히 그의 마음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수느는 기꺼이 사랑하는 여인을 부유하게 해 주고 신분을 높여 주었다. 동로마 제국의 온갖 보물을 테오도라의 발치에 쏟아 부었다. 결국 유스티누스의 조카는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이 내연의 처에게 신성하고도 적법적인 아내의 신분을 부여할 결심을 굳혔다.(50∼5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예전에는 창녀였던 여인이 이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움켜 쥔 여제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음은 쉽게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녀가 그런 비난 때문이었든지 자신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든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황제와 함께 제국의 공동 통치권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잔인함을 드러낸 악행들도 수없이 저질렀다.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타고난 매력과 후천적으로 익힌 기교를 통해 유스티니아누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누린 끝에 제국을 다스린지 22년 되던 해에 암으로 시들고 만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몹시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일국의 황제라면 얼마든지 동로마 제국에서도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처녀를 골라 보란 듯이 배우자로 맞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극장에서 일하던 창녀였던 아내를 그토록 애달파했던 것이다. 테오도라 얘기는 이만 하고 다시 벨리사리우스에게로 돌아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즉위했을 때는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도 50년쯤 지난 뒤였다. 이때 고트족과 반달족이 세운 왕국은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든든한 기반을 다진 끝에 어느 정도 합법적인 통치권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위에 오른 뒤 처음 5년 동안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정열을 쏟다가 적잖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불안정한 휴전을 얻어냈다. 제국의 동쪽이 안전을 보장받게 되자 황제는 마침내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고, 때마침 로마 군대에게 알맞은 동기를 부여해 준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토벌하는 임무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는 트라키아의 농가에서 태어난 미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서기 529∼532년 동안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공을 쌓은 벨리사리우스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콘스탄티노플로 물러나 있었다. 마침내 아프리카 전쟁이 많은 이들의 화제에 오르내리면서 전쟁의 참여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벨리사리우스가 최고사령관으로 낙점되었다. 이때 그 전쟁을 반대했던 다른 장군들의 시기심이 컸으며, 이런 분위기는 벨리사리우스라는 영웅이 그 아내의 음모에 의해 은밀히 지원받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키웠다.

 

영민하면서도 아름다운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미움을 샀다가 다시 신임을 얻기를 반복하는 여자였다. 안토니나는 출생이 비천했다. 전차 경기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고 가장 창피스러운 치욕을 당해 정절도 더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저명한 남편의 마음을 오랜 기간 단단히 사로잡고 있었다. 안토니나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정절의 미덕을 업신여겼다고는 하더라도, 벨리사리우스와 남성적인 우정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녀가 군 생활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단호하게 벨리사리우스이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1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가 얼마만큼의 함선과 얼마만큼 많은 말과 무기, 병기, 군수품들을 준비한 끝에 얼마만큼의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로 저 머나먼 카르타고를 수복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항구를 떠났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겨를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에드워드 기번의 말대로, 아프리카 원정 준비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겨룸이라는 위상에 걸맞은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병사 1만 5000명에 뱃사람 2만 명과  5000마리의 말로 꾸려진 600척의 원정대는 15만 이상을 헤아리는 반달족 군대와는 숫적으로 명백한 열세임은 분명했다. 기대반 우려반으로 그들이 동로마의 수도를 떠난 때는 533년 6월이었다.

 

때마침 반달족의 군사력이 사르디니아 정복 작전 때문에 적잖이 분산된 데다가, 벨리사리우스의 탁월한 통솔력 덕분에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기대 이상으로 우호적인 협력을 얻어 냈고, 거기에 용의주도한 작전 전개와 용맹성을 발휘한 덕분에, 동로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반달족을 무찔러 나갔다. 무어인 같은 적군에만 익숙하던 반달족은 로마군의 규율 잡힌 군사력과 뛰어난 무기를 버텨낼 수가 없었다. 서기 533년 9월에는 카르타고가 함락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반달족의 우두머리인 겔리메르를 굴복시키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의 원정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지도는 아래와 같다.

 

Map of the Vandalic War(출처:위키백과)

 

 

반달족을 이끌던 겔리메르는 용케 도망쳐 잡히지 않았는데, 얼마 후 에스파냐를 안전한 망명처로 삼아 도피하던 중에 로마군에 발각되었고, 추격당하던 반달족의 왕은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파푸아 산으로 숨어들었다. 로마군 추격부대는 가파른 산을 기어오르다가 110명의 병사를 잃은 끝에 '기근과 고통'으로 적을 포획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포위된 군주와 포위군의 지휘자는 이때 서로 서신까지 주고받으며 항복을 권유했는데, 반달족 왕은 비참한 마음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답장을 쓸 수가 없다면서 이런 글을 보내왔다.

 

"친애하는 파라스여, 간청하오니, 나에게 리라와 스펀지, 그리고 빵 한 덩어리나 좀 보내 주시오."

 

반달족의 사신으로부터 이런 서신을 받은 로마군 추격대장은 이렇게 단순한 부탁을 하게 된 동기를 파악했다. 아프리카의 왕이 빵을 맛본 지가 한참 되었으며, 극심한 피로와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로 인하여 안질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반달족 왕은 자신의 불운한 인생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수금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우울한 시간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물이 보내지자 포위를 당해 있던 군주도 마침내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판단을 내렸다. 마침내 겔리메르의 고집도 모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불가결한 필요에 의해 꺾이게 되었던 것이다.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사절은 신변의 안전과 명예로운 대접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황제의 이름으로 추인해 주었고, 반달족 왕은 산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공식 접견은 카르타고의 교외에서 열렸다. 포로가 된 국왕은 정복자의 이름을 크게 부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극단적인 슬픔이 겔리메르의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지적인 관찰자들에게는 이런 비통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때아닌 환희와 웃름은 헛되고 일시적인 인간의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사건이었다.(15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권력을 지닌 자에게는 아부가 따르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에게는 시기가 따른다는 통속적인 진리는 벨리사리우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 전쟁을 치렀던 로마군의 지휘관들이 개인적으로 사절을 보내어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가 명성이 자자한 것에 자만하여 그 스스로 반달족을 다스리는 왕위에 앉으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말들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런 은밀한 말들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나자 벨리사리우스에게는 아프리카에 남느냐 아니면 수도로 돌아가느냐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굳게 확신한 벨리아리우스는 현명하게도 제국의 수도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충성심에 감격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단 한 번도 개최되지 않은 성대한 개선식까지 열어줬다. 온갖 볼거리가가 제국의 수도를 누비는 동안 반달족의 귀족들도 전리품의 일부가 되어 로마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겔리메르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줏빛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왕의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았고 한숨도 한 번 쉬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솔로몬의 말을 되뇌면서 자신의 자존심 또는 경건한 신심에 은밀한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겸손한 정복자는 말 네 필이나 코끼리가 끄는 개선 마차에 타는 대신 자신의 용감한 동료들의 맨 앞에 서서 걸어갔다.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벨리사리우스는 일개 신하에게는 참으로 이목을 끄는 명예라고 거절한 듯하다. (…)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은 대경기장 문을 들어섰고,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호를 받다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가 앉아 있는 옥좌 앞에서 멈춰 섰다. 황제와 황후는 포로가 된 왕과 승리한 영웅에게서 충성의 맹세를 듣기 위해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관례에 따른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 칼 한 번 빼 보지 않은 군주와 극장에서 춤추던 창녀의 발치에 입술을 대었다. (…) 천성적으로 예속과 복종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더라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벨리사리우스 역시 은밀히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156∼157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는 535년 12월에는 어느덧 시칠리아를 침공해 그곳을 정복한다. 이탈리아는 정복자 테오도리크의 딸인 아말라손타가 오랫동안 훌륭하게 통치하다가 어느새 사촌인 테오다투스에게 왕권이 넘어가 있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갑자기 죽고 나자 일부러 테오도리크의 남자 혈족을 찾은 끝에 테오다투스에게 왕권을 나눠 맡겼는데, 도리어 그에게 배반당한 끝에 볼세나 호수에 있는 작은 섬에 투옥된 후 목욕을 하던 중에 질식사했다.) 여왕의 의심스러운 죽음과 왕위를 강탈한 새로운 군주의 죄가 유스티니아누스의 군사력이 개입하는 걸 정당화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때에도 아주 작은 병력만으로 뛰어난 작전을 펼쳐 위풍당당하게 시라쿠사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었다.

 

테오다투스는 동로마 황제와 치욕스러운 화평 조약을 협상하다가(고트 왕국과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남은 여생을 철학과 농경 연구로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비참한 절망과 맹목적인 좌절감에서 비롯된 변덕을 부렸고,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에 충분한 주둔군을 남긴 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나폴리를 함락하기까지는 20일 이상의 지리한 포위 작전이 필요했지만 400명의 로마 병사들이 수로를 타고 숨어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간단히 정복되었다. 그 와중에 로마에 숨어 있던 테오다투스는 군주로서의 품성이나 능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바람에 부하들로부터 배척당했고, 비티게스 장군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병사들의 선택을 받은 비티게스는 승승장구하며 다가오는 동로마 군대가 두려워 로마는 주민들의 손에 맡기기로 하고 라벤나로 숨어들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아시나리아 성문을 통해 로마로 입성했을 때는 536년 12월이었다. 그리하여 60년간 예속당하고 있던 로마 시는 야만족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완전한 수복까지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 3월이 되자, 비티게스는 겨울 동안 궁리한 용의주도한 계획을 부지런히 실행에 옮겼다. 무려 15만이나 되는 군사가 왕의 깃발 아래 모여 로마로 진군했다. 테베레 강을 건넌 고트족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해서 1년 이상 엄청난 공격을 지속했다. 로마에 있던 열네 개의 성문 가운데 일곱 개가 포위된 상태였다. 부족한 병력과 기근 등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던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끝끝내 고트족들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포위공격을 당한지 1년 하고도 9일이 지난 때였다. 

 

그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인 라벤나를 함락할 때까지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적군 한 명 맞닥뜨리지 않고 난공불락의 도시의 거리를 행진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고트족의 처지와 벨리사리우스의 뛰어난 계략 때문이었다. 라벤나에 갇혀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버티던 고트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왕의 약한 모습과 벨리사리우스의 명성과 우세함을 비교한 끝에 비상한 일을 계획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그 자신이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라벤나의 요새와 자신들의 재산과 무기를 모두 바치겠다고 제의해 온 것이다. 이 대담하고 영민한 로마군 총사령관은 고트족의 자발적인 항복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섰고,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던 적군들로부터 활짝 열린 성문을 제공받았다.

 

라벤나가 점령되자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 마을들도 그 본을 따랐다. 파비아와 베로나에서 무장한 채 독립적으로 지내던 고트족들도 벨리사리우스에게 복종했다. 그러자 다시금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로부터 의심스러운 호출이 왔다.

 

벨리사리우스가 두 번째 승리를 거두자 질투심이 다시 항제의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영웅을 불러들였다.

 

고트족과의 나머지 전쟁을 위해서 벨리사리우스가 더 있을 필요는 없다. 인자한 군주는 그의 수고에 상을 내리고 그 지혜를 빌려 자문하고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수많은 적군에 대항해 동로마 제국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그뿐이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가 품은 의혹을 알아차리고 그가 내민 구실을 받아들여 노획품과 기념품을 가지고 라벤나에서 출발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렇게 순종하자 이탈리아의 통치를 그만두고 급작스럽게 소환해 가는 것이 경솔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이탈리아의 정복자는 자신이 당연히 얻어야 할 두 번째 승리의 영예를 불평 한 마디 없이 한숨 한 번 내쉬는 법 없이 포기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칭송은 모든 겉치레나 과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노예근성이 만연한 시기였지만 온 나라에서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자자했으니 그것으로 공허하게만 전하는 몇 마디 칭찬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208∼20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는 얘기는 바로 벨리사리우스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벨리사리우스의 빛나는 활약사대한 기번의 묘사만 들어봐도 그가 얼마나 칭송 받을 만한 인물인지 금세 감이 잡힐 것이다.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엄격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사과 하나도 나무에서 따내거나 옥수수 밭을 함부로 다니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고상하고 건전했다. 군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방종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벨리사리우스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포로가 된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절세 미인들이 벨리사리우스 앞에서 섰지만 그는 그 매력을 물리치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단 한 번도 부부간의 정절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의 공훈을 기록한 역사가와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전쟁의 위험이 닥친 와중에도 벨리사리우스는 경솔함 없이 용감했고, 두려움 없이 신중했으며, 순간 순간의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절해 가며 대처했다고 전한다. 가장 비참한 지경에 빠졌을 때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거나 실제로 희망을 찾아내어 활기를 잃지 않은 반면 가장 운이 좋은 순간에도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미덕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과거의 군사 전략의 귀재들과 어때를 나란히 하거나 심지어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육상과 해상, 그 어디에서도 그의 군대는 승리했다. 그는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굴복시켰다. 가이세리크와 테오도리크의 후계자들을 포로로 끌고 왔고, 콘스탄티노플에 적들의 전리품을 가득 쌓아 놓았으며, 6년 사이에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의 절반을 되찾았다. 명성과 높은 덕, 부와 권력으로 인해 그는 제국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제일가는 인물이 되었다. 질투심 어린 목소리만이 그가 중요한 인사로 대접받는 것이 위험하다고 과장하여 말했다. 황제가 자신이 벨리사리우스의 천재성을 발견하여 등용하였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정도로 만족했다면 참으로 좋았을 일이었다.(21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던 시점(붉은색)과 재위 기간 중에 확장된(오렌지색) 영토의 비교.

확장된 영토의 대부분은 벨리사리우스의 용맹 덕분이었다.(출처 : 위키백과)

 

벨리사리우스의 나무랄 데 없는 명성이나 미덕도 일부나마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 아내의 잔인함과 탐욕 때문이었다고 역사가는 전한다. 안토니나는 출생이 비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극장에서 일하는 창녀였고,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비천했던 전차 기수였다고 한다. 가정 배경이 이렇게 다채로운 까닭에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했다. 행실이 나쁘고 야망이 컸던 두 여인은 비슷한 쾌락을 즐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적 부도덕에서 나온 질투심으로 갈라섰다가 결국에는 공통의 죄의식을 가지고 화해했다. 안토니나는 벨리사리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남편과 많은 연인을 거느리고 있었고, 전남편 소생의 아들까지 있었다. 이제부터는 기번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안토니나가 트라키아 젊은이와 수치스러운 애정 행각에 정신없이 빠져 지내게 된 것은 그녀가 나이 들어 아름다움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에우노미우스를 추종하는 이단 신앙을 갖고 자랐다. 아프리카 원정은 첫 번째로 승선한 병사에 대한 세례와 그 상서로운 이름으로 인해 신성시되었고, 이 개종자는 자신의 영적 부모, 즉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의 가족이 되었다. 이들이 아프리카 해안에 닿기 전에 이 성스러운 친족은 호색적인 애정의 대상으로 타락하였다. 곧 안토니나는 정숙함과 신중함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게 되어, 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해 모르는 이는 로마의 최고 사령관 혼자뿐이었다.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최고 사령관은 두 연인이 지하실에서 단둘이 거의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분노가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안토니나가 말했다. "이 젊은이의 도움으로 우리의 소중한 재산을 유스티니아누스 모르게 숨기고 있었어요." 젊은이는 옷을 다시 입었고, 신앙심 깊은 남편은 자신의 지각기관을 통해 직접 얻은 증거를 믿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한 벨리사리우스는 시라쿠사에서 매사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마케도니아라는 여자의 정보에 의해 비로소 현실을 깨달았다. 이 시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 다음에 안토니나의 간통 장면을 종종 목격했던 두 명의 시종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테오도시우스는 아시아로 재빨리 도망가 화가 난 남편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근위대 중 한 명에게 테오도시우스의 살해를 명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나의 눈물과 교묘한 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하는 우리의 영웅은 아내의 무죄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의와 판단을 흐리게 하여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고 비난하게 만든 경솔한 두 친구를 저버리게 되었다. 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여자의 복수는 앙심이 깊고 유혈이 낭자한 것이었다. 불행한 마케도니아는 두 명의 증인과 함께 안토니나의 잔인한 하인에 의해 사로잡혀 혀를 잘리고 온몸이 토막난 채 시라쿠사의 바다에 버러졌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상대가 되었던 그 소년보다 간통한 여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경솔하지만 현명하기 짝이 없는 충고를 한 것을 안토니나는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그가 절망에 빠져 벨리사리우스의 뜻을 거스르자 안토니나는 잔인한 충고를 하여 그의 처형을 서두르게 했다.(212∼2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전쟁터에서도 대담한 애정 행각을 저질렀던 안토니나였으니 전쟁이 끝난 후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후에도 사정은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안토니나의 열정은 전혀 약해지지 않고 더욱 격렬해져 갔다. 그러나 두려움과 신앙심, 그리고 어쩌면 권태로움까지 더해졌던 테오도시우스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퍼진 떠들썩한 추문을 두려워했고, 벨리사리우스의 아내의 무분별한 애정 공세를 무서워하여 그녀의 품을 피해 에페수스로 숨어들어 머리를 깎고 수도자의 생활이라는 피난처를 찾았다. 이 새로운 아리아드네의 절망은 남편의 죽음으로도 설명되지 않을 정도였다. 안토니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면서 온 궁전을 울음소리로 가득 채웠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 가장 사랑스럽고 믿음직하며 근면한 친구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나의 간절한 요청에다가 벨리사리우스의 기도까지 더해도 에페수스에서 독거하고 있는 성스러운 수도사를 끌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것은 총사령관이 페르시아 전쟁을 위해 출정한 후였다. 자신도 페르시아로 떠나게 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안토니나는 사랑과 쾌락을 정신없이 탐닉했다.(2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안토니나의 애정 행각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남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소생의 아들인 포티우스도 있었다. 안토니나는 자신의 아들을 일찌감치 추방해 버렸다. 티그리스 강 너머에 있는 진지에서 어머니의 은밀한 박해를 받았던 포티우스는 육친의 망신스러운 짓거리에 화가 나서 이번에는 자신이 가족이라는 감상을 치워 버리고 벨리사리우스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의무를 모두 저버린 여자의 비열함을 고해 바쳤다.

 

로마의 최고 사령관은 놀라면서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아마도 이전에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이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는 안토니나의 아들의 무릎을 끌어안고 출생의 정보다 의무를 기억하도록 서약시키고, 제단에 서서 서로를 지켜 주고 복수해 주자는 신성한 맹세를 했다.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국경에서 돌아와 안토니나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아내의 신체를 감금하고 목숨을 위협했다. 포티우스는 정말 어머니를 처벌하려고 마음먹고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에페수스로 직접 가서 충직한 환관에게서 안토니나의 죄악에 대한 고백을 강요해 얻어 낸 다음, 성 요한 교회에서 테오도시우스의 신병과 재산을 압류했다. 그리고 이 포로를 킬리키아의 외딴 숲에 숨겨 두고 처형 기회를 기다렸다. 사법 제도를 위반하는 이런 대담한 불법 행위는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없었다. 안토니나가 항의를 제기하자 황후가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황후는 최근에 어떤 총독을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일과 교황의 추방과 암살의 공을 세운 일로 안토니나를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마친 벨리사리우스는 황실의 소환을 받았는데 평소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에 반하는 명령을 받는다 해도 벨리사리우스의 복종은 진심으로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령에 따라 아내를 포옹하게 되었을 때, 황후 앞에서 이 자애로운 남편은 아내를 용서하고 또 용서받고 싶어졌다. 테오도라의 너그러움은 친구를 위해 더 소중한 호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황후가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귀족 부인에게 줄 더없이 귀중한 진주를 찾아 놓았다. 지금껏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보물이다. 하지만 이 보물을 보고 소유하는 일은 오로지 내 친구만이 할 수 있다.

 

호기심과 조바심으로 가득 차 기다리는 안토니나에게 갑자기 침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면서 그녀의 연인이 나타났다. 부지런한 환관들이 은밀하게 가두어 놓았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놀라움은 감사와 기쁨의 탄사로 터져 나왔다. 안토니나는 테오도라를 자신의 여왕이라 부르고 은인이며 구세주라 불렀다. 에페수스의 수사는 궁정에서 사치스럽게 지내면서 야망을 키워 갔다. 하지만 약속받은 대로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는 못하고 이 호색적인 만남에서 생긴 최초의 과로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214∼21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졸지에 연인을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었던 안토니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괴롭히는 일에서 위안을 찾았다. 과연 엽기적인 그녀였다. 이 젊은이는 재판도 없이 벌을 받았다. 하지만 지조가 굳은 포티우스는 채찍질과 고문의 심한 고통을 견뎌내며 벨리사리우스에게 했던 맹세를 어기지 않았다. 아무 소용 없는 학대가 끝난 뒤 안토니나의 아들은 어머니가 황후와 즐겁게 지내는 동안 그녀의 비밀 지하 감옥에 갇혀 밤낮의 구분도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포티우스는 두 번 탈옥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유서 깊은 성소인 성 마리아 성당, 성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던 압제자들은 동정심을 모르는 것만큼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성직자들과 민중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도 포티우스를 두 번 다 제단에서 끌어내 토굴 감옥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세 번째 탈옥은 성공했다. 3년이 지났을 때, 예언자 자카리아 또는 죽음을 각오한 어떤 친구가 도망칠 방법을 일러 주었던 것이다. 포티우스는 황후의 친위대와 스파이를 속여서 예루살렘의 성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수사가 되었다. 수도원장이 된포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이집트의 교회들을 정화하고 통제하는 일에 힘썼다.(21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에 관한 기나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의 45쪽에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 이 불세출의 영웅은 여기(216쪽)에서 무려 100쪽 이상을 더 읽는 동안에도 계속된다.(그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한 대목은 318쪽에 가서야 만날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반란, 토틸라에 의한 고트족 왕국의 부활, 로마의 함락과 탈환 등에서 매번 중요한 역할을 떠맡아 로마 제국과 황제를 위해 온갖 충성을 다 바쳤다. 무수한 역경과 힘겨운 전투를 다 치르고 죽을 날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마침내 그에게 마지막 역경이 찾아왔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에 걸렸을 때 그가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고, 벨리사리우스는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하여 일개 병사나 시민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가 그만 곤경에 빠지고 만다. 이때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인격과 아내 덕에 살아났다. 벨리사리우스의 아내는 남편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반려자인 그를 완전히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벨리사리우스에게 퇴락하는 이탈리아의 상태를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임무가 맡겨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군사도 없이 귀환하자 동부에는 냉담한 명령이 하달되어 그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고 그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 그가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를 초라한 수행원과 함께 지나자 그 비참한 몰골에 모두들 경악하며 동정했고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차가운 배은망덕으로 그를 맞이했고 아첨하는 패거리들도 무례한 시선으로 경멸감을 드러냈다.(216∼217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Bélisaire, by François-André Vincent (1776).

Belisarius, blinded, a beggar, is recognised by one of his former soldiers. (출처:위키백과)

 

저녁이 되자 그는 황폐해진 집으로 떨리는 걸음을 옮겼다. 몸이 불편하다는 거짓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를 변명으로 안토니나가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안토니나가 주랑 현관에서 오만한 얼굴로 조용히 서성이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슬픔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면서 로마의 성벽 아래서는 몇 번이고 용감하게 맞섰던 죽음을 기다렸다.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에 황후로부터 사자가 도착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호기심 반, 걱정반인 심정으로 자신의 운명이 적힌 서한을 열었다.

 

부관은 내 역정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토니나의 충성심을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안토니나의 탄원과 그 높은 덕을 생각해서 부관의 목숨을 살려 주기로 한다. 원래는 국가에 귀속되어야 할 재산도 일부는 지니고 있도록 해 주겠다. 당연히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나, 이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기를 바란다.

 

이 영웅이 말도 안 되는 용서의 말을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고 기술된 이야기를 정말로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는 아내 앞에 앞드려 그 구세주의 발에 키스하고 안토니나의 유순한 노예가 디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엄숙하게 약속했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이 재산 중에는 12만 파운드가 벌금으로 징수되었다. 그는 궁전의 마사를 관리하는 직위를 받고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국민들은 모두 그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되면 곧 자유를 되찾아 위선을 버리고 그의 아내와 테오도라, 그리고 어쩌면 황제까지도 정당한 보복의 희생생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벨리사리우스의 엄청난 인내심과 충성심은 범인을 뛰어넘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참 아래의 수준으로 보인다.(217∼2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세세히 전달하느라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에 대한 글은 이쯤에서 맺는 게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의 이미지다. 이 유명한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 벽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그림이다. 이 성당은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했던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고 한다. 무려 1,500년 전에 그려 넣었던 모자이크가 아직도 생생하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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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24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벨리사리우스가 부족한 동로마의 재정지원으로도 다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음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그의 탁월함으로 무모한 원정이 지속되어 제국의 수명은 짧아지게 된 것은 아니었나도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5-24 11:54   좋아요 1 | URL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지요. 유스티니아누스의 기나긴 치세 동안 잦은 해외 원정 만으로도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끼쳤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 대규모 토목건축사업(대표적으로 소피아 성당 건설)과 황실의 사치와 낭비까지 더해졌으니 쇠약한 신체 상태로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셈이나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탁월한 인물이 없었더라면 동로마 제국 역시 호전적인 이민족들의 침략에 무너져 일찌감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책 속에서 저명한 책들의 저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에도 수많은 '책들의 저자'가 등장한다. 역사가는 어쨌거나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별의별 희한한 이름을 지닌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 평범한 독자들은 한 귀로 듣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런 역사가들의 책은 척박한 국내의 여건에서는 번역본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번보다 뛰어났던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 역사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기번의 역사서보다 앞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역사가들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사』를 쓴 티투스 리비우스, 『게르마니아』, 『연대기』 등을 쓴 타키투스,  『갈리아 원정기』를 쓴 카이사르,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 『페르시아 원정기』, 『키루스의 교육』 등을 쓴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 『로마사 논고』를 쓴 마키아벨리 등. 이런 쟁쟁한 역사가들과 작품들을 기번의 책 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런 역사가와 작품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늘 궁금하다.

 

기번의 책 속에는 이처럼 저명한 역사가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름난 철학자와 시인들도 꽤나 자주 등장한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는 시인들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이네이스』의 베르길리우스, 『변신』의 오비디우스도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민다. 기번의 머리 속에 이들 시인들의 작품이 항상 머리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자주 등장한다. 이들 말고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위안』의 저자 보이티우스도 등장하는데, 이들 세 사람의 철학자들은 작품의 저자로서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역사적 인물'로서 상세히 다뤄진다는 점이 또다른 특징이다.

 

우리에게 『철학의 위안』 이라는 저자로 잘 알려진 보이티우스는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인물이다. 나는 이 인물이 기번의 역사서에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철학의 위안』을 쓴 뛰어난 철학자 겸 정치가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유명한 고대의 철학 작품이 쓰여지는 과정까지 길게 서술된 설명을 들어보니 이 인물의 삶 자체가 그 당시의 역사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중이 큰 인물이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보이티우스(480~526년)가 활동하던 때는 이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는 여전히 제국의 지위를 유지한 반면, 서로마 제국은 최초의 야만족 왕인 오도아케르의 치세를 지나 테오도리크(재위 488∼526년)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테오도리크는 동고트 족의 왕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콘스탄티노플에서 볼모로 붙잡혀 있는 동안 '로마식 교육'을 받은 덕분에 로마인 특유의 관대한 포용 정신으로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야만족의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지배했지만 행정 관리들은 대부분 로마인들로 채웠고, 로마의 문화 유산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훌륭하고 용감했던 고대 로마인들과 함께 동상을 만들어 세울 만한 자격이 있는 고트족 출신 왕'이었다.

 

 

 Coin depicting Flavius Theodoricus (Theodoric the Great).

 

그토록 이탈리아에게 행운으로 여겨졌던 이 인물에게도 마침내 먹구름이 끼게 되었으니, 그의 말년에 찾아온 민중들의 증오와 귀족들의 유혈사태 때문이었다. 그때 가장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보이티우스였고, 그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감옥에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었다.

 

이제부터는 보이티우스라는 인물이 어쩌다가 그토록 관대한 테오도리크에게 미움을 샀으며, 그가 어떤 품성을 지녔고, 얼마만큼의 드높은 학문적 경지를 지녔던 인물이었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 차례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주저없이 규정한다.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린 인물이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였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칭호를 이 인물에게 부여한 셈인가.

 

 

보이티우스는 카토나 키케로가 자신의 동포라고 인정해 주었을 최후의 로마인이었다. 부유한 고아였던 그는 아니키우스 가문의 세습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이 가문은 당대의 왕이나 황제들이 야심차게 이 집안 사람임을 자칭했던 유명한 가문이었다. (…) 보이티우스의 청년 시절에는 아직껏 로마의 학문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있었다. 한 집정관이 교정한 베르길리우스의 책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문법학, 수사학, 법학 교수들이 관대한 고트족 덕분에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연금까지 받으며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티우스의 열렬한 학문적 호기심은 라틴어를 통독하는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프로쿨루스와 그 제자들의 열의와 학식, 그리고 근면성으로 유지되던 아테네의 학교들에서 18년간이나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감각과 플라톤의 경건한 명상과 숭고한 상상력을 조화시키려 했던 살아 있거나 죽은 스승들의 정신을 흡수하고 학문적 방법들을 모방했던 것이다. 로마로 돌아와서 벗인 심마쿠스의 딸과 결혼한 이후에도 보이티우스는 상아와 대리석으로 이뤄진 궁궐 같은 집에서 같은 학문을 연구했다.(29∼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보이티우스는 자신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고 나서 1,000년도 더 흐른 뒤에 나타난 걸출한 로마사의 권위자로부터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자신이 부여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싶다. 아무튼 그의 학문적인 위상은 댕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불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재능은 로마의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의 기초적인 과학과 학문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통해 표출되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피타고라스의 음악, 니코마코스의 산술, 아르키메데스의 역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플라톤의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그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석 등이 이 지칠 줄 모르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펜 끝에서 번역되고 또 설명되었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경이로운 과학 기구들, 예를 들어 해시계나 물시계, 천체의 운동을 보여주는 구(球)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보이티우스는 이러한 심오한 학문의 세계에서 사적 · 공적인 생활에 수반되는 사회적 의무들의 세계로 내려앉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올라앉았다. 그는 자선을 베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고,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의 연설과 비교되곤 했던 웅변에서는 일관되게 청렴결백과 인간애를 호소하였다.(30∼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뛰어난 미덕을 지닌 인물을 어찌 안목 있는 군주가 놓칠 리 있었겠는가. 그는 이내 집정관과 명예고관이라는 칭호로 장식되었고, 그의 재능은 직책에 어울릴 만큼 훌륭하게 발휘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의 두 아들까지도 아직 어렸지만 같은 해에 집정권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인간이었던가. 그가 생애 말년에 감옥에 갖혀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쓰며 세상을 한탄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그가 행복의 절정에 이르렀던 때를 기번은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이 취임하던 기념할 만한 날에 그들은 원로원과 군중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엄숙하고도 화려한 행렬을 이루어 자택에서 포룸까지 행진했는데, 로마의 실세 집정관이었던 그들의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서 왕의 은혜를 칭송하는 연설을 마친 후에 대경기장의 경기에 막대한 하사금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명예와 재산, 공적 직위와 사적 인척 관계, 학문의 수양과 미덕의 함양, 이 모든 것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보이티우스는 아마도 행복이라는 변덕스러운 형용사를 말년의 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 단어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행복했던 인물에게도 마침내 불행이 찾아 왔으니, 테오도리크 치세의 암울했던 말년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의 신세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원로원 의원 가운데 알비누스라는 인물이 '로마의 자유'를 '희망'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해 이미 유죄선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보이티우스가 이런 사태를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보이티우스는 "알비누스가 유죄라면 원로원 전체와 나 자신도 같은 죄를 저지른 것이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알비누스도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고 웅변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순수하고 헛되이 희망하는 것까지는 법률이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 음모를 알았더라도 압제자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이티우스의 성급한 고백은 묵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알비누스의 변호인(보이티우스)은 곧 자신의 의뢰인이 처한 위험과 죄상에 휘말려 들어갔다. 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달라고 동로마 황제에게 요청하는 원본 교서에서 그들의 서명이 발견되었고, 지위는 높았지만 평판은 좋지 않았던 세 명의 목격자가 이 로마 귀족의 반역 음모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는 테오도리크에게 변명할 기회도 박탈당한 채 파비아의 탑에 엄중히 감금당했고, 그곳으로부터 5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던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가장 저명했던 동료 의원에게 재산 몰수와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아, 그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보인다. (…) 원로원에 대한 진지하고 충실한 애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원로원 의원들의 떨리는 목소리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었다.(33∼3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불세출의 충신과 만고의 역적 사이는 언제나 단 한 발짝만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하루 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황제의 처형 명령을 기다리게 된 처지는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 기가 막힌 상황에서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얼마나 간절한 호소들을 담고 있을 것인가. 아무튼 이 역사적인 인물이 쓴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를 써내려간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전한다.

 

 

보이티우스가 족쇄에 채워져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파비아의 탑에 갇혀 있을 때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다.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이 훌륭한 책은 그 시대의 야만성과 작가가 처한 상황을 보면 더욱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가 로마와 아테네에서 줄곧 도움을 받았던 천상의 인도자가 이제는 친히 그의 지하 감옥을 비추어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의 상처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 주었다. 또한 그에게 지금까지 누린 영광과 현재의 고난을 비교해 보고 이렇게 불확실한 인생사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도출해 보도록 가르쳤다. 이성은 인생의 은혜들이란 변덕스러울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쳤고, 경험은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한 점 부끄럼 없이 그 은혜들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아무 회한 없이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의 미덕까지는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행복도 빼앗지 못한 적들의 무기력한 악의를 조용히 경멸하게 되었다. 보이티우스는 '최고선'을 찾기 위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우연과 운명, 통찰력과 자유의지, 시간과 영원의 형이상학적 미로를 탐험했고, 신의 완벽한 속성과 그 도덕적 물리적 체계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무질서라는 모순을 온건한 방식으로 화해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명하고도 모호하고 또 난해한 주제는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위안해 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철학적 노력으로 불행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 작품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철학과 시, 웅변을 솜씨 있게 결합시켜 놓은 이 현자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담대한 평정심을 이미 체득했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힘들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사형 집행인이 테오도리크의 극악무도한 명령을 실행에 옮겼거나 아마도 한 발 더 나아가 집행했던 것 같다. 단단한 밧줄을 보이티우스의 목에 감고 눈알이 거의 빠져나올 때까지 잡아당겼는데, 죽는 순간까지 곤봉으로 때린 좀 더 가벼운 고문이 오히려 자비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살아남아 로마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었다.(34∼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이티우스를 묘사한 그림(출처:네이버백과)

 

 

에드워드 기번이 보이티우스가 남긴 이 하나의 작품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는 다음에 이어지는 또다른 묘사만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철학자의 저술들은 영국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국왕의 손으로 번역되었고, 오토라는 이름을 쓴 세 번째 황제는 아리우스파 박해자들의 손에 의해 순교자가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의 명성을 얻은 이 가톨릭 성인의 유골을 보다 영예로운 묘지로 이장해 주었다. 보이티우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두 아들과 부인, 그리고 장인이기도 했던 고매한 심마쿠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비탄에 잠긴 심마쿠스의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고 무모하기까지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친구의 죽음에 복수하고 말겟다고 탄식했다. 결국 심마쿠스는 사슬에 묶여 로마에서 라벤나의 궁정까지 끌려왔으며, 테오도리크의 의심은 이 죄 없는 늙은 원로원 의원의 피로 겨우 진정되었다.(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방금 인용한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만 들어서는 이 책이 어떤 인물에 의해서 번역되었는지 조금 아리송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알라딘 상품 소개'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에드워드 기번보다 훨씬 더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위안』은 9세기에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번역한 이래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등이 계속 번역하였다. 10세기에 고대 독일어로 번역되었으며, 중세 때 프랑스어로 수없이 번역되고 필사되었다. 프랑스어 번역 중 장 드 묑의 번역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이 번역본을 필립 4세에게 헌정하였다. 이 역본은 특히 아름다운 채식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지성의 번역본은 장 드 묑의 역본에 있는 유명 삽화 8장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본문에 삽입하였다.

『철학의 위안』은 카롤링거 왕조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철학 입문서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문학에서, 단테는 『신곡』에서 여러 번 이 책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라는 책에서 『철학의 위안』을 인용하고 모방하였다.

 

 - 알라딘 상품 소개

 

 

이 인물과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회한 많은 테오도리크의 죽음에 관한 일화다. 그가 죽은 때는 서기 526년 8월이었다.

 

 

인간이라면 양심의 판결과 국왕의 회오를 증언해 줄 보고를 듣고 싶을 터인데, 혼란스러운 공상과 병약해진 육체에 시달리다 보면 무시무시한 망령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철학에서도 다루어지는 현상이다. 미덕과 영광의 삶을 살았던 테오도리크는 이제 치욕과 죄의식과 함께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로 인해 그의 마음은 초라해졌고 당연한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테오도리크는 어느 날 저녁 식탁에 머리가 큰 생선이 나오자, 갑자기 심마쿠스의 노한 얼굴이 보인다고, 두 눈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입에는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왕은 즉각 방으로 돌아가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학질에 걸린 듯 덜덜 떨다가 시의(侍醫)인 엘피디우스에게 보이티우스와 심마쿠스를 죽인 일을 후회한다고 더듬더듬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사흘간이나 설사를 계속하다가 재위 33년만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날부터 계산한다면 37년만에 라벤나의 궁정에서 숨을 거두었다.(35∼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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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18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읽긴 했습니다만, 정작 인물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알았습니다. oren님 덕분에 자세히 배워 갑니다. 감사 합니다.^^:)

oren 2019-05-18 11:1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이 유명한 책을 진작에 읽으셨군요. 저는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이 등장할 때면 그저 ‘어떤 책인가‘ 하고 살펴보기만 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이런 글을 쓰기도 했으니, 저도 머잖아 이 오래된 책을 꼭 읽을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oren 2019-05-18 12:25   좋아요 1 | URL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언급되어 있었나 궁금해서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다른 대목에서 이 책을 언급한 부분은 잘 찾지 못하겠고(몇 번씩이나 언급되었던 듯한데 말이지요.),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인 ‘초서의 고별사‘에서 언급된 부분만 덧붙여 봅니다.

* * *

(… )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적혀진 것은 모두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제 목표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겸허하게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리스도가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인간의 허영을 다룬 저의 번역물과 글을 쓴 것에 대해 뉘우치고자 합니다. 그 중에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더』, 『명예의 전당』, 『착한 여인들의 전설』, 『공작 부인의 책』, 『새들의 토론』을 비롯하여 『캔터베리 이야기』에 수록된 죄를 짓는 이야기들과 『사자의 책』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또한 음탕한 노래들과 시들도 있습니다. 무한하게 자비로우신 그리스도여, 이런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반면에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나 성인들의 전설에 관한 책, 도덕과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번역서들에 대해서 저는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복되신 성모님과 천국에 계신 모든 성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제가 죽는 날까지 제 죄를 뉘우치고 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연구하도록 은총을 베출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5-18 15:45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초서가 보에티우스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에서 스토아 철학의 자취를 많이 느꼈습니다. 중세 철학자 기준에서는 이교 사상이라 볼 수 있는 면이 있음에도 초서는 보에티우스 사상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단테의 「신곡」 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살라딘이 떠오릅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 가운데 '민족의 대이동'을 빼놓을 순 없다. 제국이 번창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유럽에서의 로마의 국경은 대체로 라인강과 도나우강이 한계였다. 그 너머로는 숲들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호전적인 야만인들이 살고 있어서 정복하기도 어려웠고, 정복해 봤자 야만인들은 쉽게 교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면서 황제들의 군사적 역량과 리더십에 따라 변방의 이민족들과의 분쟁이 잦아지거나 수그러드는 경향을 반복하는 데도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의 중앙 아시아뿐만 아니라 저 멀리 고대 중국의 변방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던 훈족(이들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흉노족'이었다는 견해가 아직도 분분하다. 기번도 이런 견해를 주장한 학자들의 견해를 자주 소개했다.)들이 차츰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훈족의 발생지라고 믿어졌던, 기원전 205년경 묵돌선우 통치하 흉노족의 영토와 영항(출처:위키백과)

 

역사가들이 훈족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들이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했던 기록을 영구히 보존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훈족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던 이웃 문명 국가의 역사 기록으로부터 그들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록들에 의해 재구성된 그들의 이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훈족의 서쪽으로 이동을 추정한 경로(출처:위키백과)

 

훈족이 유럽에서도 드넓은 지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위력을 떨친 시기는 아틸라가 왕위에 오른 때였다.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멸망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훈족의 왕 아틸라,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로마를 멸망케 한 '3대 인물'로 꼽는다. 로마 제국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395년) 이후 무능한 두 아들(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된 이후 두 제국의 힘은 갈수록 약화된 반면, 훈족과 반달족과 고트족들의 활동은 나날이 위력을 더해 갔다.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 무렵의 영토가 얼마나 방대했던지는 아래 지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최대 판도 (434-453)(출처:위키백과)

 

아틸라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할 무렵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28년 동안이나 굳세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로마가 아닌) 라벤나의 궁정에서 자신의 안위만 걱정할 뿐 국사에는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이 당시의 서로마 제국의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표현했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28년간의 길고 불명예스러운 재위 기간 동안 동로마를 통치한 형 아르카디우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조카 테오도시우스 2세와 담을 쌓고 지냈다. 콘스탄티노플은 겉으로는 무관심을 가장하고 내심으로는 은근히 즐기면서 로마에 닥친 재난들을 구경했다. 플라키디아의 기이한 모험들은 동서 두 제국 간의 동맹 관계를 되살리고 한때 고트족의 포로 신세에서 여왕이 되었다가, 사랑하는 남편(아돌푸스)을 잃고 무례한 암살자의 손에 사슬로 묶여 끌려 다녔다. 그러다가 복수의 기쁨을 맛보고 평화 협정에서 밀 60만 포대와 교환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가족의 품에서 재혼이라는 새로운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의 없이 결정된 결혼에 반감을 나타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내키지 않는 결혼에 저항하는 아돌푸스의 미망인의 손을 참제들을 쓰러뜨린 데 대한 고귀한 보상으로 용감한 콘스탄티우스에게 넘겨주었다. 플라키디아는 혼례를 치른 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호노리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가 되어 감사해 하는 남편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275∼27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3장>

 

(나의 생각)

이 대목에서 처음 등장하는 '호노리아 공주'의 혈연 관계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딸이자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이었던 플라키디아는 무능한 황제였던 오빠의 옆자리에 재혼한 남편인 콘스탄티우스를 내세웠다. 황제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강요하여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만에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나서 플라키디아는 비열한 음모에 휩쓰려 오빠와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플라키디아와 자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궁정을 떠난 뒤에야 소란은 가라앉았다.

 

망명길에 오른 황족들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결혼 직후 페르시아에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했다. 그들은 친절하게 환대를 받았으나 서로마 궁정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동상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미망인에게 황후의 호칭은 허락되지 않았다. 플라키디아가 도착한 지 몇 달 안 되어 한 발빠른 사자가 부종으로 인한 호노리우스 황제의 죽음을 알렸다. (…)

 

군주제에서 왕위 계승은 다양한 선례에 따라 추대나 세습, 장자 상속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여성과 방계 혈족의 계승권을 명확히 규정하기란 불가능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혈연상으로나, 또는 정복자의 권리로 로마인들의 유일한 정통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아마도 눈앞에 펼쳐진 무제한의 권력이 잠시 동안 그를 유혹했겠지만, 나태한 기질의 그는 건전한 정책상의 요구를 따랐다. (…) 그는 야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조부(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중용을 본받아 서로마의 제위에 사촌 발렌티니아누스를 앉히기로 결심했다. (…) 로마 제국을 뒷전에서 지배하던 세 여성의 동의에 따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은 테오도시우스와 아테나이스 사이에서 난 딸 에우독시아와 혼약을 맺었다. (…)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의 칭호를 받았을 때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의 오랜 미성년기 동안 서로마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어머니가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플라키디아는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와 누이의 평판과 미덕, 즉 에우도키아의 우아한 재능과 풀케리아의 현명하고 성공적인 정책을 질투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지도 못할 권력을 탐냈다. 그녀는 25년간 아들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황제의 성격을 놓고 플라키디아가 방만한 교육으로 그의 젊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남자답고 명예로운 목표 쪽으로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온갖 수를 써서 막았다는 의혹이 점점 커져 갔다.(276∼28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3장>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서로마 제국은 여섯 살짜리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로 앉아 있는 동안, 제국의 국경 너머에서는 훈족에 밀려 고트족과 반달족들이 점차 로마의 국경을 넘어 왔다. 민족 대이동의 흐름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큰 민족들은 하나같이 로마 속주들의 변경 지대로 이동했다. 아틸라의 숙부인 로아스가 이끄는 훈족의 대집단은 현재의 헝가리에 있는 평원에 마을을 꾸리고 정착했다. 그들은 서로마가 내분을 겪는 동안 찬탈자를 돕기 위해 무려 6만 명의 대군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국경 지대로 진군한 적도 있었다. 로마는 그들의 행진과 퇴각에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훈족의 왕위는 로아스가 죽고 나서 조카인 아틸라로 이어졌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그 생김새와 성격부터 독특했다. 이 대목에서는 기번의 설명을 직접 듣는 게 훨씬 더 낫지 싶다.

 

아틸라는 문주크의 아들로 그의 가계는 중국 왕조와 대립했던 고대 훈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고트족 사가의 관찰에 따르면, 그의 용모는 자기 민족의 태생적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틸라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큰 두상, 거무스름한 피부색, 작고 푹 꺼진 눈, 낮은 코, 숱이 적은 수염, 떡 벌어진 어깨, 균혀이 잘 안 맞는 짧고 땅딸막하지만 기운이 넘치는 몸 등 현대 칼무크인의 추한 외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훈족 왕의 오만한 걸음걸이와 행동거지는 다른 모든 인간들에 대한 그의 웅뤌감을 드러내 주었다. 또한 그는 남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듯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야만스러운 영웅에게도 동정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 애원하는 적들은 그의 평화나 사면 약속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의 국민들에게는 올바르고 관대한 군주로 여겨졌다. 그는 전쟁을 즐겼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손보다는 머리를 써서 북방 정복을 달성했으므로, 모험을 즐기는 용장으로서의 명성 대신 현명하고 성공적인 지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30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스키타이의 정복자였던 아틸라는 흔히 칭기즈칸과 비교되는데, 그들이 미개한 동포들로부터 신과도 같은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던 방법은 참으로 교묘했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한낱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미개인들은 너무나 철석같이 믿었다.

 

훈족과 몽골족의 왕조는 대중의 미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처녀의 몸으로 기적에 의해 수태했다는 칭기즈칸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를 보통 인간들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벌거벗은 예언자가 신의 이름으로 그에게 지상의 제국을 부여했다는 이야기는 몽골족의 용맹을 세차게 타오르게 했다. 아틸라는 자기 시대와 나라의 성격에 맞게 종교를 적절히 이용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전쟁의 신을 특별히 숭배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형태를 갖춘 상징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었으므로, 쇠로 만든 언월도 한 자루를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했다. 한 훈족 양치기가 어느 날 풀을 뜯던 암소 한 마리가 발에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핏자국을 따라갔다가, 풀숲에서 오래된 칼을 발견했다. 그는 칼을 땅에서 파내 아틸라에게 바쳤다. 관대하기보다 교활한 이 군주는 이를 신이 자신에게 내린 호의라며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마르스의 검을 소유한 자로서 지상을 다스릴 권리를 신으로부터 정당하게 받았으니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30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아틸라는 곧 마르스의 총아로 신격화되었고, 그의 정복 사업도 아주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야만족의 왕들은 신과 같은 이 훈족 왕의 존엄한 자태를 감히 오래 쳐다볼 수도 없다는 등 온갖 아첨과 숭배를 바쳤다고 한다. 나라의 상당 부분을 공동 통치하고 있던 형 블레다는 아틸라에 의해 왕홀뿐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겼는데, 이러한 잔인한 행위조차도 초자연적인 힘 탓으로 돌려졌다. 여기서 잠시 그의 모습을 감상하고 넘어가자.

 

 

19세기 아틸라의 묘사. 체르토사 디 파비아 건물의 파사드에 있는 메달리온.

라틴어 비문은 이 사람이 바로 신의 채찍, 아틸라라고 적혀있다.(출처:위키백과)

 

아틸라는 과히 야만족의 제왕이라 불릴 만했다. 그는 고대와 현대의 정복자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막강한 두 왕국, 게르마니아와 스키타이를 통합했다. 그는 강력한 이웃 국가인 프랑크족의 내정에까지 개입했고, 저 멀리 동쪽으로는 유연(柔然)족의 칸에게 굴욕적인 패매를 안기고 중국에 사절을 보내어 동맹 관계를 맺고자 협상했다. 그들은 결국 서로마와 동로마뿐 아니라 페르시아까지도 호시탐탐 넘보는 강성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윽고 흑해에서 아드리아 해에 이르기까지 500마일에 달하는 유럽 전체가 아틸라가 전장으로 끌어낸 무수한 야만족들에게 침략당하고 점령되어 초토화되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과 세 번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헬레스폰투스 해협에서 테르모필라이(영화 『300』의 주무대였던 그리스의 협곡)까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교외 지역에서 그는 거침없이 무자비하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속주들을 유린했다. 동로마 제국의 일흔 개 도시들이 겪은 참화에 대해서는 '완전한 몰살과 전멸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쓸 표현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겁 많고 이기적인 서로마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훈족의 손에 내버려 두었다. 동로마 황제는 오만한 자세로 가혹하고 굴욕적인 화명 조건을 전하는 아틸라에게 자비를 구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 유역을 따라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에서 트라키아 지역 노바이까지의 넓고 중요한 영토를 양도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의 공물인 보조금으로 금 연간 2100파운드로 증액하고, 훈족 포로들의 무조건적인 석방과 로마인 포로들에 대한 조건부 석방이라는 가혹하고 치욕스러운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왕은 한번 무릎을 꿇은 동로마 황제(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거듭 모욕을 가했다. 적들로부터 뜯어낸 재물로 자기 총신들의 배를 채워주는 걸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아틸라가 틈만 나면 비잔티움 궁정으로 사절단을 보냈고 온갖 성가신 댓가들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황제가 보낸 사절들의 인품과 지위를 의심하면서 오만하게 따질 때도 있었다. 집정관 직위를 지낸 고위급을 사절로 자신에게 보낸다면 먼 데까지 나가서 영접하겠노라는 제안에 이 야만족의 영웅이 기거하는 본거지까지 찾아간 인물은 명망 높은 막시미누스였다.

 

마침 그의 벗이자 역사가였던 프리스쿠스는 그 위험한 사절단에 자발적으로 동행했다. 그 특사단의 중차대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아틸라 암살'이었으나 그 계획은 미리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어쨌든 역사가 프리스쿠스 덕분에 아틸라가 머물던 도나우 강변 야만족 왕이 거주하는 마을과 궁정의 모습이 기번에 의해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었고, 프리스쿠스가 직접 관찰했던 풍경을 묘사해 놓은 '왕의 연회'는 1000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수많은 화가들의 화폭 위에서 재탄생했다. 막시미누스의 사절단이 아틸라에게 파견된 때는 서기 448년이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틸라의 궁정까지는 국경지대인 나이수스(지금의 세르비아 니슈)까지 가는 데만도 13일이 걸렸다고 한다.

 

 

"아틸라의 연회". 헝가리의 로망스풍 그림, 탄 모어 작(1870).

 

에드워드 기번은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이 아틸라의 왕궁을 찾아가 협상을 벌이는 이야기를 무려 13쪽에 걸쳐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이야기가 아무리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훌쩍 건너뛰어야 마땅하다. 그 이야기까지 이 글에 포함시키다 보면 '호노리아 공주 이야기'는 긴 글에 지친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가능성이 더한층 낮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특이하게도, 그 사절단 속에는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가 될 인물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고, 이탈리아 최초의 야만족 왕이 될 사람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아틸라 암살 음모'가 발각된 데 따라 치르게 된 곤욕 한 가지는 여기서 소개하고 넘어가야 마땅할 듯하다. 아틸라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자 즉각 고압적인 사절 두 명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고, 황제 앞에 대담하게 나아간 사절은 옥좌 옆에 선 환관(음모를 꾸민 범인)을 꾸짖은 다음 동로마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는 고명하고 존경받는 어버이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틸라 대왕도 그에 못지않게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셨으며, 문주크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권위를 행동으로 지켜 오셨습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는 부왕의 명예를 잃었을 뿐 아니라, 공물을 바치는 데 동의함으로써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노예처럼 뒷전에서 주인을 해하려는 음모를 꾸밈기보다는 운과 위업에서 우위에 있는 자에게 존경의 뜻을 바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아첨에만 익숙했던 동로마 황제는 이토록 가혹한 말에 경악하고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고 한다. 그토록 나약했던 테오도시우스 2세가 50세를 일기로 재위 43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만장일치로 동로마의 여제(女帝)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해 줄 원로원 의원 마르키아누스를 '공동 통치 황제'로 선택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불리한 입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틸라 왕에게 공물을 바치던 나약하던 동로마 제국은 군인 출신의 마르키아누스 황제 덕분에 다시금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틸라는 차츰 동로마 제국에서 고개를 돌려 서로마 제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년) 치하의 서로마는 황후 플라키디아와 실권자 아이티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훈족과의 동맹관계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아이티우스 덕분에 훈족과는 전쟁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등장한 돌출 변수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호노리아 공주였다.

 

발렌티니아누스의 누이(호노리아)는 라벤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녀의 결혼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으므로, 아무리 뻔뻔한 신하라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아름다운 호노리아는 열여섯 살이 되자 자신에게 고귀한 사랑의 기쁨을 영원히 빼앗아 버린 성가신 지위를 증오하게 되었다. 호노리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불만스럽기만 한 허식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 탄식하다가 욕망에 굴복하여 시종장인 에우게니우스의 팔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녀의 죄와 수치(이것은 오만한 남자의 어리석은 표현이다.)는 임신의 징후가 나타남으로써 곧 탄로났다. 황후 플라키디아는 경솔한 언행으로 황족의 불명예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녀는 딸을 엄격하고 치욕스러운 감금 상태에 두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다. 불행한 공주는 테오도시우스의 누이들과 그들이 선택한 시중드는 처녀들하고만 교제하면서 12년 내지 14년의 세월을 보냈다. 호노리아는 그 처녀들과 같은 영광을 바랄 처지도 아니면서 기도와 단식, 철야로 채워진 그들의 열성적인 금욕 생활을 억지로 따라 해야 했다. 길고 희망 없는 금욕 생활에 넌더리가 난 그녀는 기이하고 절망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342∼34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철부지 공주에게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좋을지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그녀는 아무튼 느닷없이, 뜬금없이, 난데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아팉라에게 시집을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세상에나!

 

 

아틸라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익숙하면서도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가 파견하는 사절들은 그의 막사와 황제의 궁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플라키디아의 딸은 사랑을 갈구해서가 아니라 복수심에서 모든 의무와 선입관을 버리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쓸 뿐 아니라 인간 같지도 않은 외모에 혐오스러운 종교와 관습을 지닌 이 야만인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한 충실한 환관의 도움으로 그녀는 아틸라에게 애정의 증표로 반지를 전해 주고 자신을 비밀 약혼한 적법한 배우자로 요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점잖지 못한 접근은 냉담하고 경멸스러운 태도로나마 받아들여졌다. 훈족 왕은 아내의 숫자를 계속해서 늘려 왔으나, 애정보다 더 강력한 감정인 탐욕과 야심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공주 호노리아를 황제의 세습 재산 가운데 정당하고 동등한 몫과 함께 공식적으로 요구한 뒤, 이를 빌미로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의 선조들인 고대의 선우(Tanjou)들도 똑같이 적대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로 중국의 공주들을 자주 요구하곤 했다. 아틸라의 요구는 그 못지않게 로마의 존엄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절들에게 온건하지만 단호한 거절의 뜻이 전달되었다. (…) 훈족 왕과의 관계가 발각되자 죄인이 된 공주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탈리아로 쫓겨났다. 그녀는 목숨은 구했지만 이름 모를 남성과 허울뿐인 혼례를 치른 후 영원히 유폐되어, 항제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죄와 불행을 탄식하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343∼34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서기 451년에 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는 순식간에 그 지역을 경악에 빠트렸다. 이때 갈리아의 도시들이 겪은 기구한 운명은 수많은 순교자들과 기적들에 대한 전설을 낳았다. 그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고된 행군 끝에 도달한 오를레앙은 그나마 완강하게 버텼다. 초기 성직자들의 거룩함과 헌신성은 기적을 바랬다. 마침내 기다리던 로마군과 고트군 연합군에 그들을 구원하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훈족 왕은 그들이 진군해 오자 즉시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갈리아 심장부에서 패배했을 경우의 치명적인 결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센강을 다시 건너 스카타이 기병대가 작전을 펼치기 좋은 평탄한 땅인 샬롱의 평원에서 그들은 적을 기다렸다.

 

샹파뉴 지역으로 불리는 넓은 땅에 펼쳐진 카탈라우눔 평원에서의 전투는 전면전이었다. 훈족의 진영에는 루기아족, 헤룰리족, 튀링기아족,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게피다이족, 동고트족이 전투 대형을 펼쳤고, 로마 군과 서고트족 연합군은 알라니족과 합세하여 진영을 짰다. 이 기념비적인 대전투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는 불행하게도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에도 '그 전투에 대해서는 '야만적이고, 집요하며 복잡하고 방대한" 전투였다는 기록 외에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고 아쉬워 할 정도였다. 기번 또한 그 점을 아쉬워 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방대한 규모뿐이다. 그러나 카시오도루스는 이 기념비적인 전투에 참전했던 고트족 전사 여러 명과 나눈 깊이 있는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전투는 격렬했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측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혈전을 벌였다. 과거에도 당대에도 이와 견줄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전사자들의 수가 16만 2000명을 헤아렸고 다른 계산에 따르면 30만 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믿기 힘든 과장이지만 이를 통해 실제의 손실을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이 정도 숫자라면 왕들의 광기로 한 시간 만에 한 세대 전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한 역사가의 말도 과장이라 할 수 없다.(351∼35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누가 이겼는지 졌는지조차도 모를 대혼전 속에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결과는 로마군의 승리였다. 이때 아틸라는 마차를 둘러쳐 만든 요새 안으로 퇴각했으며, 날이 밝을 때까지도 참호 안에서 꼼짝도 않고 쳐박혀 있었다. 이때 그는 꼼짝없이 생포될 운명이었으나 로마군의 지휘자인 아이티우스가 훗날을 내다보고 혜안을 발휘한 덕분에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다. 로마의 지휘관은 훈족이 궤멸된 후에 고트족의 오만과 무력이 공화국에 짐이 될 것을 더 우려했던 것이다. 이 당시의 경과를 몽고메리 장군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했다.

 

아에티우스는 여세를 몰아 승리를 확고히 하지 않았는데, 훈족이 멸망하면 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듬해 아틸라는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는 기근과 질병 때문에, 그리고 로마 제국의 동쪽 지원군과 교황 레오 1세의 외교적 수완 때문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453년 그는 새 아내를 얻었는데, 결혼식 초야에 혈관이 터져 사망했다. 훗날 초서Jeoffrey Chaucer(1342∼1400)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보라, 저 대단한 정복자, 아틸라를

그는 대취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치욕스럽게도 자다가 죽었느니

대장이라면 모름지기 술을 삼가야 하거늘.(242쪽)

 

 -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6. 로마의 수비와 야만인 이주> 중에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지만 결혼식 초야에 코피가 터져 죽은 이 야만인을 비웃은 초서의 멋진 시까지 소개하는 재주를 부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역사』 어디에서도 호노리아 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아틸라 못지 않게 호노리아 공주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래서 샬롱 전투 이후 아틸라의 행적을 다시금 되짚을 필요를 느낀다. 다시 기번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아틸라의 기백, 병력, 평판은 갈리아 원정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듬해 봄, 그는 또다시 호노리아 공주와 그녀의 세습 재산을 요구했으나 다시 한 번 거부당했다. 분개한 연인은 즉시 전투를 개시하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략하고 야만족 대군이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35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고대 로마 시대의 가장 번성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아퀼레이아는 3개월의 포위 공격에도 굳세게 버텨냈지만 마지막으로 시도된 아틸라의 맹공격에 마침내 무너졌고, 이때의 공격으로 아퀼레이아는 후세 사람들이 그 폐허조차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응징 후에 아틸라는 진군을 계속해서 알티눔, 콩코르디아, 파두아, 비켄차, 베로나, 베르가모, 밀라노, 파비아 등을 돌무덤이나 잿더미로 바꾸고 지나갔다.

 

아틸라의 포악한 오만무도함은 극에 달하여 그의 말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야만스런 파괴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의 형향으로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새로 탄생시켰으니, 그곳이 바로 베네치아다. 훈족의 칼을 피해 도망친 아퀼레이아, 파두아, 인근 마을의 많은 가족들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근처 섬으로 숨어들었으니, 그곳의 조수 간만은 아주 약했고, 그 끝에는 백여 개의 섬이 대륙과 얕은 물을 사이에 두고 육지의 긴 단층 몇 개로 파도를 막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를 휩쓸고 지나가자 황제인 발렌티나아누스는 궁정이 있던 라벤나에서 로마로,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무방비의 수도로 황급히 퇴각했다. 아틸라의 진군을 방해하기도 벅찬 아이티우스로서도 더 이상 고트족이나 동로마 황제의 구원을 받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때 서로마 황제는 아틸라의 분노를 달래 보고자 특사단을 파견했고, 집정관과 민정 총독뿐 아니라 교황까지도 그 사절단에 합류하기 위해 기꺼이 발벗고 나섰다.

 

레오의 재능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정통 신앙과 교회 규율의 신성한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와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 교황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마의 사절들은 아틸라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아틸라는 민키우스 강이 천천히 굽이쳐 베나쿠스 호의 포말 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에 진을 치고 스키차이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카툴루스와 베르길리우스의 농장을 짓밟고 있었다. 야만족 군주는 호의를 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존중하는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호노리아 공주의 몸값 또는 지참금 명목으로 막대한 액수를 내놓으면 이탈리아에서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쉽게 조약의 체결에 동의하고 서둘러 퇴각한 것은 그의 군대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36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아틸라는 전쟁을 시작할 때나 화평 조약을 맺을 때나 이처럼 집요하게 '호노리아 공주'를 이용했다. 이 국가적인 재난 앞에서 기적적으로 로마를 구출한 교황 레오의 업적은 이 사건이 있던 때로부터 1000년이 더 지난 후에 태어난 천재 화가 라파엘로의 붓끝에서 다시 한번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라파엘로교황 레오와 아틸라 간의 회담성 베드로사도 바울의 호위를 받는 교황 레오 1세가 로마 외각에서 훈족의 왕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다.(출처 : 위키백과)

 

 

레오의 간곡한 열변과 위엄 있는 풍모, 사제복은 아틸라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적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환영이 아틸라 앞에 나타나 자기들 후계자의 기도를 물리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으리라고 위협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장 고귀한 전설들 중 하나이다. 로마의 안전은 천상의 존재가 중대할 만한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라파엘로의 화필과 알가르디의 정이 전하는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36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 기번의 주석

라파엘로의 그림은 바티칸에 있고 알가르디의 부조상은 성 베드로의 제단들 중 한 곳에 있다.

 

(나의 생각)

바티칸과 베드로 성당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목이 아프도록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 그림은 어디에 있었지? 베드로 성당에서는 기나긴 줄의 맨 끝에 서서 기어코 베드로의 '빛나는 맨발'을 만진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언제 다시 로마를 찾아 '기번의 주석'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나.

 

 

이제 이 무시무시한 야만족 왕이 호노리아 공주를 생애 마지막으로 울궈 먹은 이야기를 할 차례다. 아틸라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때만큼 '호노리아 공주'를 들먹일 좋은 기회도 더 이상 없었다. 기번의 얘기를 들어보자.

 

 

훈족 왕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에 앞서 만일 자신의 신부 호노리아를 조약에 명기된 기한 안에 그의 사절들에게 인도하지 않으면 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보복을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아틸라는 일디코라는 아름다운 처녀를 수많은 아내들의 목록에 새로 올려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두 사람의 혼례는 도나우 강 너머 그의 목조 궁전에서 야만족 풍습에 따라 호화스러운 축제로 치러졌다. 군주는 밤늦게 연회를 마치고 술과 잠에 취해 혼례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종들은 다음 날 거의 날이 저물 때까지 그가 쾌락을 즐기든지 쉬든지 방해하지 않고 놔두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침묵이 길어지자 공포와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큰 소리로 아틸라를 깨워 보려고 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자 마침내 왕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옆에서 겁에 질린 신부가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밤 사이 절명한 왕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자신에게 미칠 위험을 한탄하고 있었다. 동맥의 한 곳이 갑자기 터져서 반듯이 누워 있던 아틸라의 콧구멍으로 피가 나오지 못하고 폐와 위로 역류해 들어가는 바람에 질식하고 만 것이다. (…) 그들은 살아서는 영광스러웠고 죽어서도 무적이었으며, 국민들에게는 아버지 같고 적에게는 재앙이었으며 전 세계의 공포였던 영웅을 기리는 장례식 노래를 불렀다. 훈족의 관습에 따라 야만족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에 보기 흉한 상처를 내어 여자들의 눈물이 아니라 전사들의 피로 용맹스러운 군주의 죽음을 슬퍼했다. 아틸라의 유골은 금, 은, 철로 만든 세 겹의 관에 넣어 훈족의 전리품과 함꼐 한밤중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무덤을 팠던 포로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아틸라가 숨을 거둔 그 행운의 밤에 마르키아누스가 꿈에서 아틸라의 활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무시무시한 야만족의 모습이 로마 황제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361∼36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뒤늦게 알고 보니 아틸라와 호노리아 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아틸라 역은 안소니 퀸이 맡았고 호노리아 공주 역은 소피아 로렌이 맡은 모양이다. 안소니 퀸이야 워낙에 독특한 외모를 지닌 배우이니만큼 야만족 왕에게도 충분히 어울릴 법하지만, 호노리아 공주 역을 맡은 소피아 로렌이 알맞은 배역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 철딱서니 없는 공주는 자신의 감정 하나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자신의 조국인 서로마 제국을 더욱더 어려운 처지로 내몬 것밖에는 한 일이 없는데, 소피아 로렌이라는 여배우가 그 정도로 철딱서니 없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일부러 꾸며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민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몹시나 흥미롭다. 『전쟁의 역사』에는 이름조차 발견되지 않은 서로마 제국의 공주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는 거의 100쪽에 가까운 영역에서 다뤄지는 점도 이채롭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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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공중 목욕탕을 과연 어떻게 이용했을까?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을 들어 보자.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경탄할 만한 수로들은 황제가 관대하게 로마 시 곳곳에 건설한 공중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이 차별 없이 사용하도록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여는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욕장은 대리석으로 만든 1600개 좌석을 갖추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높은 욕실 벽은 화필로 그린 듯 우아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덮였다. 이집트산 화강암이 누미디아의 귀한 초록색 대리석을 보기 좋게 장식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빛나는 은으로 만든 수많은 수도꼭지를 통해 넓은 웅덩이로 계속해서 쏟아졌다. 로마 시민 중 가장 비천한 자라도 동전 몇 닢만 있으면 아시아의 왕들도 질투할 호사를 온종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건물들로부터 신발도 못 신고 망토 하나 못 걸친 지저분한 누더기 투성이의 평민들이 쏟아져 나와 온종일 광장이나 거리를 배회하며 주워들은 소식으로 논쟁을 벌이고, 처자식들의 비참할 만큼의 적은 생활비를 허황된 도박에 탕진해 버렸다. 그러고는 음침한 여관이나 매음굴에서 상스럽고 천박한 육욕에 탐닉하면서 밤을 지샜다.(18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제31장> 중에서 

 

 

역사가의 설명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 아직도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에 담긴 '카라칼라 욕장'을 보면 그 엄청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 사진에 딸린 설명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화려한 황제의 목욕탕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들에서 사람들의 흔적은 사라졌다. 카라칼라 황제가 세운 이 목욕지구에는 온탕, 냉탕, 상점, 도서관, 마사지실, 피부 미용실은 물론 정원도 있었다.(55쪽)

 

 -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중에서

 

 

카라칼라 욕장 (1899년 추측해서 그려낸 복원 그림) (출처 : 위키백과)

 

카라칼라 욕장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공중 목욕탕 유적을 말한다. 카라칼라 황제의 명령으로 212년부터 216년까지 지어졌다. 이 공중 목욕탕은 6세기까지 남아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고트 전쟁 중에 동고트족 군대가 공격하여 파괴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카라칼라 욕장의 디자인과 양식은 뉴욕 시의 펜실베이니아 역의 디자인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1960년 하계 올림픽 체조 종목의 공식 경기장으로 사용되었고, 2009년에는 카라칼라 욕장의 발굴 유적지가 2009년 라퀼라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출처 : 위키백과)

 

 

로마인들이 목욕탕 만큼 자주 들렀던 곳은 '원형 경기장'이었다. 그들이 거기서 벌어지는 경기들을 얼마만큼 광적으로 좋아했는지는 기번의 설명만큼 생생한 것도 드물지 싶다. 앞에서 인용했던 기번의 문장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그러나 이 나태한 대중의 오락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것은 자주 열리는 공공 경기들과 구경거리였다.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 군주들은 비인간적인 검투사들의 싸움을 폐지했지만, 원형경기장은 여전히 로마 시민들의 집이며 신전이고 공화국의 본거지였다. 성급한 군중들은 동이 트자마자 자리를 잡으려고 달려갔다. 근처의 주랑 현관에서 잠도 못 자고 마음 졸이며 밤을 보내는 자들도 많았다. 구경꾼들의 숫자는 떄로는 4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초조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말과 기수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 채, 자기가 선택한 깃발의 승패에 따라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오고 갔다. 이쯤 되니 로마의 행복이 한낱 경기 결과에 달려 있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은 경기에 고함을 지르고 갈채를 보낼 때 못지않은 열정으로 야수 사냥과 다양한 형식의 무대 공연을 즐겼다. 여기에 비하면 오늘날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공연들은 순수하고 우아한 취향과 미덕의 교육장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181∼18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제31장> 중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출처:위키백과)

 

 

Colosseum 2013(출처:위키백과)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by Jean-Léon Gérôme (1883) (출처:위키백과)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에 대해서는 끔찍하게도 자세히 묘사했지만,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자신이 사망한 뒤 불과 1세기만에 영국인들이 로마의 콜로세움 못지 않은 대규모 축구장을 짓고 나서 매주마다 광적으로 축구 경기를 즐기기 시작했으며, 거기서 다시 1세기가 더 흐르고 나서는 전세계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단 하나의 경기 결과'에 얼마나 미쳐 날뛰듯이 광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도 언급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 새벽 경기에서는 또 어떤 극적인 드라마가 쓰여질까. 오늘 새벽처럼 전세게를(특히 한국을?) 뒤집어 놓을 드라마틱한 경기가 또다시 재연될까. 벌써부터 몹시 궁금하다. 이토록 큰 경기를 코 앞에서 놓칠 순 없는 노릇이지만, 이토록 야심한 새벽 시간에 열린다는 게 늘 문제다. 까마득한 옛날 박지성이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아스널을 맞아 멋진 선제골을 넣을 때, (정말 뜻밖에도!) 편안한 저녁 시간에 외국인들과 함께 그 경기를 봤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9년 5월 어느날, 토론토에 있을 때였지 싶다. 그땐 또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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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9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많은 스포츠 경기가 새벽에 있는데, 그럴 때는 밤늦게 시청하기가 쉽지 않네요. 특별한 경우에만 하이라이트를 보고 넘기고 있는 저로서는 밤늦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경기를 시청하고도 다음날 무리없이 일상으로 돌아오시는 분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oren 2019-05-09 11:33   좋아요 1 | URL
EPL 경기는 그나마 주말 밤에 게임이 열려서 밤늦도록 중계 방송을 보더라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는데, 챔피언스 리그는 꼭 주중에, 그것도 새벽 4시대에 열리니까 생중계 보는데 진짜로 애로가 많더라구요. 챔피언스 리그 주요 경기를 생중계로 근 10년 가까이 보다가, 요즘은 녹화된 하이라이트만 보는 형편인데, 오늘 새벽 게임은 모처럼 본방 사수했네요. 더군다나 오늘 경기는 두고두고 기억될 역사적인 경기여서 생중계로 본 보람도 컸네요. 하루 전에 있었던 ‘안필드의 기적‘보다 훨씬 더 극적인 ‘암스테르담의 기적‘을 봤으니까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9-05-09 11:33   좋아요 1 | URL
어재 경기가 그렇게 재밌었다는데 oren님께서는 실시간으로 보셔서 정말 기분좋게 하루를 보내시겠습니다^^:)

oren 2019-05-09 11:38   좋아요 1 | URL
후반 인저리타임에 역전골 넣었을 땐 정말 소리 지르고 싶어 미치겠더라구요. 야심한 새벽이라 도저히 고함을 지를 순 없었고, 어디에선가 도저히 못 참고 뿜어내는 극적인 환호성을 조용히 음미하기만 했답니다.^^

cyrus 2019-05-09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츠 중계를 보는 날 중 가장 기분이 좋았던 날은 어제였어요. 제가 바라던 결과가 나왔거든요. 류현진 선발 경기, 삼성 라이온즈 투수 윤성환 선발 경기, 대구 FC 아시아챔스리그 조별 경기, 그리고 오늘 새벽에 본 토트넘 경기까지 제가 응원한 팀들 모두 이겼어요... ㅎㅎㅎ

oren 2019-05-09 16:32   좋아요 0 | URL
어제 하루 그렇게나 많은 경기에서 모조리 승리를 챙겼군요. ㅎㅎ
류현진 완봉승도 대단했지요. 저도 실시간 중계를 틈틈이 챙겨봤습니다만.. ㅎㅎ

카알벨루치 2019-05-10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의 이런 면 좋아합니다 오우 본방사수하셔서 희열을 느끼셨겠습니다 모우라가 미친날! 가끔 큰 경기는 한 두사람이 미쳐주는 팀이 이기죠 ㅎㅎ

oren 2019-05-10 13:05   좋아요 1 | URL
전반전이 진행될 때만 해도 토트넘이 너무 못한다 싶었고, 상대적으로 아약스가 매우 짜임새 있게 토털 축구를 훌륭하게 펼친다 했는데, 후반전에 요렌테 투입하고 나서 게임이 완전 달라지더군요. 그 틈바구니에서 모우라는 ‘상상 그 이상‘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요. 간만에 대박 경기를 생중계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왕권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위와 같이 하신다면 국민들은 전하의 정의와 사랑에 감동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써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 <디온 편>

 

 * * *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대부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콘스탄티누스만 하더라도 무려 31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데다가, 그의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황제 또한 '가문의 대학살' 이후 탄탄하게 구축된 자신의 통치 기반 위에서 무려 24년 동안 황제의 지위를 누렸고, 이 두 황제의 치세 동안 그리스도교를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황제가 기독교를 옹호한 방식은 적잖은 차이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찌감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믿을 자유'를 사상 최초로 공인했고, 차츰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종교 정책을 꾸준히 확산시켰던 반면에, 콘스탄티우스는 기독교 가운데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내몰린)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는 반면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는 끈질기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 두 황제의 기나긴 치세가 막을 내리자 그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율리아누스였다. 전임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고 나자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오직 율리아누스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촌 형인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로마의 동쪽을 책임지고 있는 동안 그가 일찌감치 부황제로서 로마의 서쪽을 떠맡아 이미 훌륭한 무공과 명성을 쌓은 덕분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특이하게도 이 인물에 대해서는 지면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재위기간이 불과 2년을 넘지 못했고, 황제로 부임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고작 32세에 전사하고 만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로마 제국 쇠망사』 전체를 둘러보더라도 그 어떤 인물에 못지 않게 자못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그에 대해 유난히 공을 들여 언급하는 이유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가 좀 더 오래도록 살았더라면 인류 역사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뒤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에 얽힌 몇몇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그에 대한 이야기가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의 곳곳에 골고루 담겨 있는 데다가, 그의 행적 가운데 여러 대목들이 눈길을 끌기 때문에 이 인물의 활약상을 짧게 요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가 두 번째 부인을 맞아 생산한 3남 3녀의 자식들 가운데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31년에 태어난 율리아누스는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337년)할 때만 하더라도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누스가 죽고 사촌 형님인 콘스탄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할 무렵에 자행된 저 끔찍한 '대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이복형인 갈루스도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는 당시 열두 살이었다. 두 형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족이었다.

 

 

 

그는 가문의 대학살이 진행되는 내내 목숨이 간당간당했을 뿐만 아니라, 용케 살아남은 이후에도 늘 불안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인 갈루스와 그는 어릴 때부터 유폐되다시피 지내는 동안 언제나 특별관리되었으며 성년으로 자라나자 마지 못해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부황제'로 잠깐 등용되었을 뿐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갈루스는 재능도 적응력도 유연성도 없었고 침울하고 난폭한 성격 때문에 이내 콘스탄티우스의 노여움을 샀고, 끝내 살해되고 만다. 갈루스는 황제의 시종장으로부터 범죄 행위에 대한 심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이 황후인 콘스탄티나가 사주했다고 변명했고(자신의 잘못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는 못난이는 로마에도 있었다!), 이 때문에 더욱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이자 율리아누스의 형은 결국 흉악범처럼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감옥 안에서 목이 잘렸다. 

 

 

이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많은 자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율리아누스 한 명뿐이었다. 황제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불운 때문에 율리아누스도 갈루스 몰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또다시 휩쓸려 들어갔다. 평화로운 이오니아 지방에서 은거 생활 중이던 율리아누스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밀라노의 궁정으로 호송되었다. 율리아누스는 그곳에서 7개월 이상을 날마다 그의 몰락한 가문의 친구나 지지자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자신에게도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보내야 했다. (…)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건함과 신중함이라는 미덕을 배웠다. (…)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신의 가호 덕분이었다고 굳게 믿었다. 신들은 불경한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응당 받아야 할 파멸을 선언했지만, 무고한 율리아누스만은 면제해 주었다는 것이다. 신들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도와 준 가장 든든한 매개는 황후인 에우세비아였다.(11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황후의 중재 덕분에 밀라노에 소환된 후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졌다. 신하들이 '갈루스의 피'를 복수할 자를 살려두는 건 위험하다고 역설했으나 황후의 온정론이 그를 살렸다. 그 후에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유배지인 아테네로 거처를 옮겼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의 언어와 풍습과 학문과 종교에 이끌렸던 율리아누스로서는 너무나도 기쁜 명예로운 유배지였다. 아카데메이아 동산에서 당대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낸 세월은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내전의 상흔을 가까스로 수습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외적들의 침입에 또다시 시달리자 어쩔 수 없이 율리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해서 갈리아 지방으로 파견한다. 부황제 임명에 대한 환관들의 집요한 반대가 있었지만 황제는 또다시 황후의 영향력에 굴복했고, 여동생인 헬레나를 그와 결혼시킨 다음 부황제 칭호를 내렸다. 부황제 즉위식이 열리던 날은 그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즉위식을 마친 후 황제와 부황제가 같은 전차에 타고 궁정으로 귀환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마음 속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한 호메로스의 시를 반복해서 암송했다고 한다. 행운과 두려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자신의 운명을 대입시켜 볼 싯구들이 『일리아스』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갈리아 속주 지방은 비옥한 영토 맛을 본 야만족 동맹군들이 온통 휘젓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통그르, 콜로뉴(오늘날의 쾰른), 트레브(오늘날의 트리어), 보름스,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를 비롯한 마흔다섯 개 도시와 그보다 훨씬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야만족에게 약탈당해서 대부분 잿더미로 변한 상태였다. 로마 군단은 급여나 보급품도 받지 못했고, 전력이나 기강도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다.

 

(4세기 경 갈리아 지방의 국경 지도)

 

이런 비관적인 상황에서 경험도 없는 젊은이가 갈리아 속주를 구원하고 통치하도록, 혹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국의 위대성이라는 공허한 이미지를 과시하도록 임명된 것이다. 은거하면서 현학적인 교육만 받아 온 율리아누스는 무기보다는 책과, 산 자보다는 죽은 자들과 더 가까웠으며, 전쟁이나 통치의 실제적인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이제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군사 훈련을 어색하게 반복하면서 한쉼을 쉬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오, 플라톤이여, 플라톤이여, 철학자에게 이 무슨 고역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실무자라면 경멸해 마지 않을 이런 사색적인 철학은 율리아누스의 정신을 고귀한 교훈과 빛나는 모범들로 채워 주었고, 미덕에 대한 사랑, 명예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경멸 등의 덕목을 그에게 고취시켜 주었다. 아카데메이아에서 배운 절제의 습관은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천성적으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침식도 절도 있게 조절했다. 율리아누스는 식탁에 올라오는 산해진미들을 경멸하며 물리치고는 말단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거칠고 평범한 식사로 만족했다.(135∼1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전쟁 경험이 거의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명성을 빛나게 만든 첫 전투는 스트라스부르크 전투였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의 용맹과 기백으로 이끈 승리였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이 눈부신 승리의 전리품인 알레만니 왕 크노도마르를 공손하게 황제에게 진상했다.알레만니족을 몰아낸 율리아누스는 잇따라 프랑크족을 몰아냈고, 라인강 너머로도 세 차례나 진군했다. 특히 세번째 원정에서는 무려 2만 명의 로마인 포로들을 야만족들의 사슬에서 구했는데, 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번은 예전의 포에니 전쟁이나 킴브리 전쟁의 승리에 견줄 만큼 높이 평가했다.

 

갈리아의 여러 도시를 복구한 율리아누스는 동계 막사에서 지내는 여유로운 시간 동안에는 민정에 전념하여 장군보다는 행정관의 업무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때의 흥미로운 일화 한가지는 이렇다.

 

전시냐 평시냐에 관계없이 국가의 통치에서 군주의 이해는 대부분의 경우 일반 국민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자신이 피폐해지고 억압받는 나라에서 착취한 공물의 일부를 율리아누스의 선정으로 빼앗겼다고 여기며 손해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부황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율리아누스로서는 하급 대리인들의 건방진 약탈 행위를 시정하고 그들의 부패를 파헤친 후 보다 공평하고 관대한 조세 체계를 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정 업무는 갈리아의 민정 통독인 플로렌티우스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었다. 이 민정 총독은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모르는 소심한 독재자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는 아무리 정당하고 온건한 것이라고 해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오만불손한 자였다. 율리아누스는 이런 경우를 당하고 오히려 자신의 허약함을 탓해야 했다. 율리아누스는 임시 조세를 징수하려는 명령서에 서명해 달라는 민정 총독의 요청을 분연히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 거절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국민들의 비참상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가 콘스탄티우스의 궁정을 크게 화나게 했다. 율리아누스는 가까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때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했는데 이 편지는 지금도 읽어볼 수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취한 생동을 설명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어떻게 내가 한 행동 이외의 행동을 할 수 있겠나? 어떻게 내게 맡겨진 불행한 국민들을 저버릴 수 있겠나? 이 무자비한 도적떼들의 거듭된 약탈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었던가? 자기 임지를 버린 지휘관은 처형당하고 매장의 영예를 누릴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위기 상황을 맞아 내가 맡은 훨씬 막중하고 신성한 의무를 게을리한다면 무슨 명목으로 내가 그에게 처형을 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신께서 나를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올려 주셨으니, 그의 섭리로 나를 이끌고 도와 주실 것이다. 만약 내가 처벌을 받게 된다면 순수하고 공정한 양심의 증거라고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겠다. (…) 그들이 나를 파면하려고 하면 나는 아무 불만 없이 따르겠다. 오랫동안 죄를 눈감아 주며 지위를 누리느니 짧은 기간이나마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148∼14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로마인들이 환관들과 사제들의 폭정 아래서 고통받고 있을 동안에도 율리아누스에 대한 찬사는 제국의 방방곡곡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부상에 반감을 지닌 궁정의 총신들에게는 그러한 소문들이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민중의 벗이란 곧 궁정의 적을 뜻할 따름이었다.

 

어느새 율리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한 교묘한 계획들이 궁정의 대신들에 의해 짜여졌다. 그들은 율리아누스의 신변과 위엄을 지켜주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소환하여 그를 무장 해제 시킨 다음, 라인 강변에서 가장 사나운 게르만족을 물리쳤던 이들 강인한 정예 부대를 멀리 페르시아 군주와의 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파리의 겨울 병영에서 선정을 베풀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에 황제의 명령을 받은 율리아누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애정으로 보살펴야 할 부하들의 파멸까지 동의하는 셈이었고, 대놓고 거부한다면 반역 행위나 전쟁 선포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무자비한 질투심과 음흉하고 단호한 명령의 성격상, 그가 정당하게 변명하거나 솔직하게 해명할 여지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갈등 끝에 율리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군주에 대한 복종'을 선택했다. 곧바로 황제의 칙령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명령들을 선포하고 군대의 일부를 알프스로 출정시키고 일부 병력들은 집결지로 이동시켰다. 파리에 운집한 병사들을 격려하고 훈계하기 위해 도시의 성문 앞 평원에 세워진 단상에 오른 그는 '강력하고 관대한 군주에게 봉사하는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격려와 함께 황제의 명이니만큼 지체없이 기쁘게 복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병사들은 고집스럽게 침묵으로 버텼다. 막사로 물러난 병사들은 고달픈 운명을 한탄하기 바빴다.

 

그러던 끝에 그들은 대담하게도 떠나지 않아도 될 유일한 방책을 논의하여 뜻을 모았다. 이미 극에 달한 분노가 이 음모를 은밀하게 부채질 했고, 이유 있는 불만은 격정에 의해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술까지 여기에 불을 붙이니, 출발하기 전날 밤 군대는 통제 불능의 혼돈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깊은 밤중에 흥분한 병사들은 검과 술잔, 횃불을 손에 쥐고 밖으로 몰려나와 부황제의 궁을 에워싸고, 닥쳐올 위험은 아랑곳없이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한 마디 말,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이러한 저항에 더욱 흥분한 병사들은 급기야는 힘으로 궁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율리아누스를 정중하지만 강압적으로 끌어다가, 검을 빼어들고 파리 시내를 통과해 호위해 와서는 단상 위에 올려놓고 환호성으로 그들의 황제를 추대했다. 율리아누스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뿐 아니라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라도 병사들의 대역 무도한 기도에 저항해야만 했다. (…)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중죄를 저질렀음을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황제의 관용보다는 차라리 율리아누스의 후의에 기대기를 택했다. 그들의 흥분은 서서히 초조함으로, 초조함은 격분으로 바뀌었다. 마음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는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탄원과 질책, 협박에도 꿋꿋이 버티었으나, 살아남고 싶다면 왕좌에 오르는 데 동의하는 길밖에 없다는 거듭된 주장에 결국 굽히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전군의 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방패 위에 들어올려져, 우선은 왕관 대신 즉석에서 바친 화려한 군복 기장을 받고 적당한 하사금을 내리겠다는 약속으로 예식을 마무리지었다.(271∼27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위키 백과에서 율리아누스를 검색해 보면 그 당시의 정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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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율리아누스, 360년 2월> (출처:위키 백과)

 

하루 아침에 부하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황제에 오른 율리아누스에게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와의 우호적인 협상이라는 지난한 과제가 맡겨졌다.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공정한 조약에 서명한다면 갈리아 속주를 평화롭게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겟다는 서신을 작성하여 특사로 임명한 인물들에게 맡겼다. 율리아누스의 사절들은 친서의 낭독을 듣는 콘스탄티우스의 무성의한 태도를 보고 분노와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더군다나 둘 사이를 능히 중재해 줄 만한 인물이었던 헬레나(콘스탄티우스의 여동생이자 율리아누스의 아내)와 에우세비아 황후마저도 이때는 이미 죽고 난 뒤였다.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우스의 친서가 율리아누스 진영의 군중들에게 공개 낭독된 일이 있었다. 콘스탄티우스의 친서가 얼마나 오만방자했는지는 다음 대목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율리아누스는 아첨조르 한껏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즉위시킨 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버리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제안은 단숨에 묵살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시여, 그대가 구하신 군대와 백성과 공화국의 권위로 계속 집권하소서." 라는 외침이 광장 구석구석에서 일제히 천둥처럼 울려 퍼지자 콘스탄티우스의 사절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편지의 일부는 나중에 낭독되었는데, 그것은 황제가 의지할 데 없는 고아였던 율리아누스를 유년 시절부터 돌보면서 그토록 정성껏 애정으로 교육해 주고 부황제의 특권까지 내려 주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저버렸다고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고아라고!

 

율리아누스가 낭독 중간에 분노를 토했다.

 

내 가족을 암살한 장본인이 내가 고아로 남겨졌다고 말하다니? 내가 오랫동안 잊으려 애써 왔던 피해에 복수하도록 만든 건 바로 그자란 말이다! (278∼27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몰아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했고, 지나는 곳마다 로마 시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 전쟁 중 샤푸르의 퇴각으로 한숨 돌리고 있던 중 율리아누스의 행군과 빠른 진전을 알리는 첩보를 받았다. 병력들과 무기와 군수품들은 빠르게 내전용으로 전환되었다. 머잖아 두 황제 사이의 참혹한 내전이 권력의 향배를 결정지을 터였으나, 급작스럽게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내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황제는 극도의 정신적 흥분 상태에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가벼운 열병에 걸렸고 결국 타르수스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숨을 거뒀다. 45년간의 삶과 24년간의 통치가 거기서 마감된 셈이었다.

 

자만심과 나약함, 미신적인 사고와 잔인함으로 가득 찬 그의 성품은 앞서 기술된 내정과 교회 정책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둘렀으므로 동시대인들이 보기에는 중요한 인물이었겠지만, 개인의 가치만이 주목의 대상이 되는 후세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아들은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하고 결점만 이어받은 자라는 평가밖에는 받지 못할 것 같다. 콘스탄티우스는 사망하기 전 후계자로 율리아누스를 지명했다고 전해진다.(28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이리하여 율리아누스는 30세의 나이에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은둔 생활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었지만, 고귀한 출생과 운명의 장난으로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도 아카데메이아의 숲에 파묻혀 아테네 시민들과 사교를 즐기는 삶을 진정으로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든 싫든 콘스탄티우스의 행위에 따라 일신의 명예를 황제의 지위에 따른 위험에 내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그의 마음 자세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무리를 다스리는 일은 항상 더 우월한 종족에게 맡겨져야 하듯이, 국가를 통치하는 행위는 신과 맞먹는 권능을 요한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겼다. 이 원칙으로부터 그는 통치하고자 하는 인간은 무릇 신성이 갖는 완전무결성을 지향하여 자신의 영혼에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면을 정화해야 할 뿐 아니라, 탐욕을 억제하며 지력을 기르고 열정을 다스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생한 비유에 따르자면 반드시 폭군의 자리로 끌어가게 될 야수적인 거친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확고해진 율리아누스의 왕좌는 이성과 미덕의 자리였다. 그는 명성을 멸시하고 쾌락을 거부했으며, 끊임없는 성실성으로 고귀한 직책의 의무를 다했다. 이 철학적인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엄격한 법을 따르는데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면, 그의 신하들 중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왕관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고 나설 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종종 황제의 검약한 식사를 함께 하곤 했던 그의 가장 가까운 벗 중 하나는 황제가 먹는 빈약하고 가벼운 음식 덕에 그의 심신이 저술가로서, 제사장으로서, 행정관으로서, 장군으로서, 황제로서의 갖가지 책무들을 힘들이지 않고 활기차게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29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새로운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일했는가는 기번의 역사서에 충분히 실려 있으며, 그의 설명을 일일이 옮기기에는 이 공간이 너무 비좁다. 기번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글씨를 쓰면서도 귀로는 경청하고 입으로는 구술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있었으며, 망설이거나 실수하는 일없이 여러 갈래의 생각의 흐름을 금세 좇아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애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정략적으로 했던 짧은 결혼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여성과 동침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전임 황제들이 그토록 즐겼던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들도 그에게는 한낱 시간 낭비로만 생각되었다. 그가 취임 초기에 있었던 일화 하나만 살펴 보더라고 그가 얼마나 개혁적인 인물이었는지 금세 파악된다.

 

율리아누스의 통치 과제 중 가장 급선무였던 것 하나는 궁정의 개혁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 들어온 후 얼마 안 되어 이발사를 부른 일이 있었다. 그러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관리가 나타났다.

 

내가 부른 건 이발사지 세금 걷는 관리가 아니다.

 

황제는 짐짓 놀란 척 외쳤다. 그리고 그 관리의 급료에 대해 묻자, 많은 급료와 제법 되는 부수입을 제하고도 약 스무 명의 하인들과 그만한 수의 말들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1000명의 이발사들, 1000명의 급사들, 1000명의 요리사들이 호화롭게 꾸며진 여러 부처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환관의 수는 여름날 창궐하는 벌레들만큼이나 많았다. 콘스탄티우스는 공적이나 미덕으로 신하들을 앞설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고작해야 의복, 식탁, 건물, 행차의 위압적인 화려함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이 세웠던 웅장한 궁정들은 다양한 색의 대리석과 엄청난 양의 황금 장식들로 꾸며졌다. 또한 먼 지역애서 가져온 새들, 먼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 제철이 아닌 과일들, 겨울에 핀 장미, 한여름의 눈 등 미각보다는 자만심만을 채워 줄 최고로 희귀한 진미들이 바쳐졌다. 궁정의 종복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군단에 들어가는 비용을 초과했으나, 이 돈 많이 드는 무리들 중 쓸모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왕좌의 위용을 세우는 데에라도 도움이 될 인간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 율리아누스는 이 폐해를 모두 일소하여 골칫거리를 덜고 국민들의 불만을 하루빨리 진정시키고 싶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근면하게 노동한 결실이 실제로 국가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세금 부담도 덜 불만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업은 유익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는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성급하고 가혹하게 진행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단 한 차례의 훈령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을 허허발판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나이와 공로, 재산의 소유 정도, 황족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 여부 등을 타당성 있게 따져 보거나 인정상의 예의를 두는 일도 없이 노예들과 하인들을 남김 없이 굴욕적으로 내쫓아 버렸다. 율리아누스의 기질이 이러했으니, 진정한 덕성은 양극단에 위치한 악덕의 중간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에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292∼29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새로운 황제가 전임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에 켜켜이 쌓였던 적폐들을 어떻게 청산했는지, 어떤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었고, 어떤 경우에는 단호하게 단죄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문장들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배웠던 인문학적 소양들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는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콘스탄티우스가 원로원의 집회에 나가기를 피한 반면,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을 공화주의자로서의 신조와 웅변가로서의 재능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으로 여겼다. 그는 마치 웅변도장에서 하듯이 찬사와 비판, 권고 등 여러 가지 화법을 번갈아 가며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의 친구 리바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호메로스의 연구를 통해 메넬라우스의 단순하고 간결한 화법, 겨울의 싸락눈처럼 쏟아져 나오는 네스토르의 달변, 오디세우스의 감상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웅변을 모방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판관으로서의 직분이 황제로서의 직분과 충돌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율리아누스는 의무감에서뿐만이 아니라 재미있는 도락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래서 그는 민정 총독의 성실성과 통찰력을 신뢰하는 경우에도 종종 판관석에 배석하곤 했다.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그의 정신은 진실을 은폐하고 법을 왜곡하는 변호인들의 궤변을 찾아내 꺽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30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설사 평민으로 태어났더라도 혼자 힘으로 능히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을 것이라고 기번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초상을 아주 꼼꼼하게, 작은 흠이라도 잡아낼 셈으로 살펴본다면, 전체 인물상이 완전무결함과 기품을 얻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기번 특유의 날카롭고 재기 넘치는 예리한 평가를 조금 더 들어 보자.

 

그의 천재성은 카이사르의 것보다는 강렬함과 장엄함에서 좀 떨어지며, 아우구스투스의 완벽한 신중함도 갖추지 못했다. 덕행으로 평가하자면 트라야누스의 진지함과 자연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철학에 비하면 간결성과 일관성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역경을 맞을 때는 굳은 의지로 견디어 냈고, 성공을 누릴 때는 중용의 태도를 견지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후 120년이 지나서야, 로마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사기를 되살리고자 힘쓸 뿐 아니라, 뛰어난 인물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덕 있는 자가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다른 당파, 심지어 종교적으로 다른 파벌조차도 전시에나 평화시에나 그의 우월한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며 세계의 황제가 될 만한 자라고 탄식 섞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30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의 종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질 게 뻔하다. 그러나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까지 찍혀 있는 이 황제를 이야기할 때 그의 종교관이나 종교 정책을 완전히 제쳐둘 수는 없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역사서에서 그 부분을 매우 상세히 다룬다. <로마 제국 쇠망사> 제23장은 율리아누스의 종교(이교 숭배의 부활, 예수살렘 신전의 재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교묘한 박해 등)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글에서는 기번의 개괄적인 설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배교자라는 낙인은 율리아누스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으며, 그의 미덕을 훼손한 종교적 열정은 그의 과오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 놓았다.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가 제국 내의 종교적으로 다른 당파들을 동등하게 보호하려고 노력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칙령을 내린 시기부터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당한 시기까지 대중을 혼란에 빠뜨렸던 신학적 열광을 진정시킨 철학적인 군주였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실제 성격과 행동을 더 정확한 관점에서 본다면 호의적인 선입견은 사라지고, 결국 황제도 시대를 휩쓸었던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우리는 후세인으로서 그의 열렬한 찬미자들이 그린 율리아누스의 모습과 무자비한 적들이 그린 그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30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의 행적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단연 페르시아 원정이었다. 그는 게르만 전쟁의 성공을 통해 얻은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좀 더 영광스럽고 기억될 만한 업적을 거두어 자신의 치세를 드높이고 싶었다. 그가 무력을 겨룰 유일한 경쟁자는 키루스의 후계자인 사산 왕조의 샤푸르였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행군을 시작하여 소아시아의 속주들을 거쳐 그의 전임자가 죽은 지 약 8개월 만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로마 군단을 재정비하면서 겨울을 보낸 황제는 363년 3월에 드디어 출정했다. 황제를 배웅하겠다는 안티오크 원로원들을 경멸과 질책으로 쫓아 버렸고, 다시는 안티오크로 돌아오지 않겠다고도 결심했다. 동방 로마의 수도였던 그곳은 그의 취향과는 너무 다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크를 출발한 로마 군단은 베로이아(오늘날의 알레포)와 히에라폴리스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의 아주 오래된 도시인 카레로 향했다. 거기서 황제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눴다. 친족인 프로코피우스와 이집트인 지휘관 세바스티아누스에게는 3만 명의 병사를 딸려 티그리스 강쪽으로 진군하도록 했고, 자신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행군하여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를 포위할 즈음이면 크테시폰 성벽 아래에서 합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율리아누스의 군대는 안티오크에서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로마 영토의 동쪽 끝인 키르케시움의 탑에 도착했다, 그의 군대는 페르시아 원정에 동원한 군대 중에서 최대 규모인 6만 5천 명의 정예 부대였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어떤 행군 대열을 갖췄으며, 보병대와 기병대는 어떤 지휘관이 맡았는지를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들이 행군했던 경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어느 영웅이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굴의 용기와 함께 그 지역을 통과했던 유서깊은 지역이라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만인대(萬人隊)를 이끌었던 그 영웅은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크세노폰이었다.

 

카보라스에서 아시리아의 농경 지대까지 가면서 통과한 지역은 인간이 가진 어떤 기술로도 개간이 불가능하여 버려진 거칠고 메마른 황무지로,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로 간주되는 곳이었다. 율리아누스는 700년 전 젊은 키루스가 밟았으며, 그의 원정에 동반했던 지혜롭고 영웅적인 인물 크세노폰이 묘사했던 바로 그 땅 위를 행군했다.

 

이 지역은 바다처럼 평평하게 펼쳐져 다북쑥류의 풀이 무성히 자라는 평원 지대이다. 여기에서 자라는 관목이나 잡풀은 어떤 종류든지 강한 향내를 풍긴다. 그러나 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가 업삳. 느시와 타조, 영양과 야생 당나귀들만이 이 사막 지대의 유일한 주민인 것 같다. 이들을 사냥하는 일을 오락 삼아 행군의 피로를 풀었다.

 

사막의 모래는 종종 먼지구름과 함께 모래바람을 일으키곤 했으므로, 수많은 병사들이 예기치 않은 폭풍의 습격에 갑자기 천막째 땅 위에 내동댕이쳐지곤 했다.(37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Route of Xenophon and the Ten Thousand> (출처:위키백과)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이 황량한 지역을 벗어나 어떤 도시를 수중에 넣었고, 어떤 요새를 포위공격하는데 고전했으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오던 1100척의 로마 함대들을 어떤 방식으로 티그리스 강으로 무사히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생략하겠다. 어쨌든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모든 난관을 뛰어넘어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의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거기서 합류하기로 예정된 3만 명의 로마 군대와 합류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 황제는 작전 회의를 열어 충분한 토론을 거친 끝에 크테시폰 공격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용감하고 노련한 장군의 지휘와 충분한 수의 배와 군량, 대포, 군수품의 지원을 갖춘 6만여 명의 로마군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도시를 공략하는 일을 포기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명예욕과 용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율리아누스였던 만큼 공격을 포기할 만한 합당한 이유는 충분했으리라는 게 기번의 판단이다.

 

율리아누스는 이때 샤푸르가 제안한 평화 협상마저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이때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의 한 귀족이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황제의 막사로 탈주해 왔고, 로마군의 인질이 되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노련하고 현명한 호르미스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귀족의 말을 믿었던 율리아누스는 누가 보더라도 비난할 만큼 경솔한 명령을 내리고 만다. 수많은 노고와 희생을 치러 500여 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해 온 전 해군의 함대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병사들을 위해서는 겨우 20일 정도 버틸 식량만 남겨 놓고 나머지 군수품은 티그리스 강에 정박되어 있던 1100여 척의 함대와 함께 황제의 엄명에 따라 모조리 불태워졌다. 로마 군이 내륙 지역으로 전진해 들어갈 경우 크테시폰의 성문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올지도 모를 엄청난 수의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계책이었다. 그들은 이내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식량 조달을 위해 인근 도시와 마을을 찾아 나섰지만 그들은 가축류는 끌고 갔고 곡식과 풀은 불태워버린 뒤였다.

 

뒤늦게 함정에 빠진 사실을 알아챈 로마 군대는 티그리스 강변으로 퇴각해 코르두에네 국경까지 서둘러 행군하여 군대를 구하는 길만이 유일한 수단이라 판단했다. 페르시아를 타도할 부푼 꿈으로 카보라스를 건넌지 겨우 70일 만에 로마군은 낙담한 채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면서도 행군을 이어가던 어느 날, 새벽 일찍 진군 나팔을 울리고 험준한 지역을 통과해서 행군 중이던 로마 군대는 그 지역의 언덕마다에 매복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한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흉갑을 벗은 상태였음에도 병사들을 구하러 후방과 전방으로 분주히 질주하던 황제는 도주하는 야만족들을 추격하던 중 갑자기 패주하던 기병대로부터 비처럼 쏘아대는 화살과 투창 공격을 받는다. 그때 날아온 투창 하나가 황제의 팔을 스치고 지나가 갈비뼈를 꿰뚫고 간장 아래쪽에 꽂혔다. 황제는 의식을 잃고 말등에서 떨어졌고, 대량 출혈로 실신 상태에 빠졌던 율리아누스는 그날밤 늦게 가까스로 정신을 회복하지만 기력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그는 영웅이자 현인다은 간결한 태도로 임종의 순간을 맞았다.

 

이 불행한 여정에 동행했던 철학자들은 율리아누스의 막사를 소크라테스의 감옥에 비유했으며, 의무감 또는 우정 때문에 혹은 호기심 때문에 그의 침상 주위에 모여든 목격자들은 비탄에 잠겨 죽어가는 황제의 마지막 유언에 귀를 기을였다. 

 

벗들이여, 그리고 짐의 병사들이여, 이제 짐이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기꺼이 빚을 갚으러 가는 채무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의 부름에 따르리다. 짐은 일찍이 철학을 통해 영혼이 육체보다 값진 것이니, 더 고귀한 실체가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고통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임을 배웠소. 또한 종교를 통해서는 때이른 죽음은 신의 보상을 받는다고 배웠소. 그러니 이 죽음의 일격을, 지금까지 덕과 인내로 지켜 온 짐의 인격을 더럽힐지도 모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구해 주려는 신의 호의로 받아들이오. 짐은 생전에 죄 없이 살았으니 후회 없이 가오. 짐의 사생활이 순결했음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며, 신들의 힘의 발화라 할 제왕으로서의 최고 권력이 짐의 손 안에서 순수하고 흠없이 유지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짐은 전제 정치의 타락하고 파괴적인 원칙을 혐오했고, 국민의 행복을 정부가 취해야 할 목표라 여겨왔소. 짐이 취한 행동들은 신중함과 정의와 중용의 법을 따랐으며, 모든 것을 신의 섭리에 맡겨 왔소. 평화가 공공의 이익에 합치하는 한 짐의 목표는 평화였으나 조국이 짐에게 무기를 들라고 절박하게 청할 때는, 짐이 언젠가는 검을 맞고 쓰러질 운명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위험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소. 이제 잔인한 폭군이나 음모자의 단검, 혹은 질병의 느린 고통으로 죽은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신 영원한 존재에게 감사를 바치고 싶소. 또한 신은 짐에게 명예로운 삶을 살던 가운데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떠나도록 해주셨소. 운명의 일격을 간청하는 것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비겁한 일일 것이오. 이상이 짐이 말하고자 한 것이오. 이제 짐의 힘이 다하여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있소. 다음 황제의 추대 문제에 관해 여러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말은 삼가도록 하겠소. 짐의 선택은 신중하지 못하거나 현명하지 못할 수도 있소. 또한 군대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짐이 천거한 인물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소. 짐은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으로서, 모쪼록 로마인들이 덕망 높은 군주를 얻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오.

 

(…) 그는 냉수를 청하여 조금 마시고는 곧 고통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이리하여 한 비범한 인간의 삶이 막을 내렸으니, 그의 나이 32세, 콘스탄티우스 사후 왕위에 오른 지 1년 8개월 만이었다. 어느 정도는 허세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나,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해 온 덕과 명예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396∼39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알렉산드로스를 꿈꾸었던 걸출한 황제의 급작스런 전사는 로마 군대를 더욱더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급작스럽게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는 황제로서의 미덕과 용기가 부족했다. 기근에 허덕이는 로마 군대를 제대로 통솔하지도 못한 채 아사 직전까지 내몰았고, 샤푸르에게 병사들의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샤푸르와의 협상에서 전임 로마 황제들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의 굴욕적인 화평 조약까지도 모조리 받아들였다. 이 치욕스런 화평은 당연히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에서 기억할 만한 전기가 된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제2권에서 이토록 길고도 상세하게 묘사한 율리아누스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율리아누스의 유해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 매장되었으나, 서늘하고 평온한 키드누스 강변에 세워진 그의 장려한 묘소에 대해서는 이 비범한 인간의 기억을 아끼고 기리는 충실한 벗들의 불만이 많았다. 철학자들은 그가 플라톤의 사도로서 아카데메이아의 관목 숲 속에서 영면을 취했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반면에 병사들은 율리아누스의 유골은 마르스 광장에 있는 로마의 미덕을 기리는 고대 기념비들 사이에 카이사르와 함께 매장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제왕들의 역사에서 이와 겨룰 만한 사례를 찾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412∼4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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