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의무론』을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평일엔 책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틈날 때마다 계속 붙잡고 읽고 있다. 책을 펼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의 다 읽었다. '도덕'을 다룬 옛 고전 가운데 이토록 재미있는 책도 다 있었나 싶다. 어느새 스무 쪽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이토록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명백히 '요즘 뜨는 뉴스들' 덕분이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역사적 사례들이나 비유들을 읽으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실 속 인물들과 상황들'이 자꾸만 겹쳐 떠오르니 어찌 책 읽는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이 <도덕적 선에 대하여>, 제2권이 <유익함에 대하여> 제3권이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이다. 이렇듯 겉으로만 살피면 책의 내용이 여간 따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3권의 중반부에 실린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을 다루는 부분까지 읽게 되면 너무나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망라되다시피 실려 있어서 책 읽는 재미가 정말 '깨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런 책을 읽는 재미를 두고 저런 표현을 한다는 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줄 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오늘 읽은 구절 가운데 정말 인상적인 대목 하나는 바로 다음 내용이다.(이 대목의 앞부분부터 인용하자면 너무 많은 부분을 끌어와야 하겠기에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전혀 그렇지 않다. 바다 한 가운데에를 항해할 때 선주는 배가 자기 소유라 해서 배에서 승객을 깊은 바다물 속에 절대로 내던져 버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객들이 운임을 냈을 때 그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승객들이 빌린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선주의 것이 아니라 승객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을 무렵에 떠오른 '새로운 뉴스'는 바로 다음 내용이었다.(이 뉴스에 대한 인용 역시 앞부분과의 '형평'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저 쓸데 없이 내 글이 자꾸만 길어질까 두려워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또 "'주기장 내에서 겨우 17m 후진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항로 변경이 아니라는 말은 법을 제일 잘 아는 변호사들이 할 말이 아니다"며 "모든 변호사는 음주운전을 1m를 했든 10km를 했든 음주운전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항 중인 항공기를 위력으로 돌린 건 명백한 사실이며 팩트"라고 강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8&aid=0003405783&date=201501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1

 

물론 내가 책에서 인용한 내용과 뉴스에서 인용한 내용이 서로 정확히 맞대응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가지 모두 '땅콩 회항'을 연상시킨다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나는 이 두 대목을 그저 억지로 연결시켜 보느라 이 글을 쓰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키케로가 이 책에서 극구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그건 바로 '도덕적 선과 유익함은 결코 상충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 진다. 더군다나 키케로의 이 책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더더욱 헷갈리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그 얘기이니 이 글을 계속 써 보겠다.)

 

이쯤에서 이 책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물론 이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인 만큼 등장 인물들이나 속담 조차도 생소하게 들리는 대목이 적지는 않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곤 했다. 콘술을 지낸 바 있는 가이우스 핌브리아가 정말로 도덕적으로 선한 로마의 기사인 마르쿠스 루타티우스 핀티아의 소송사건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핀티아는 그의 재산을 내걸고 "만약 법정에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재산을 몰수당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핌브리아는 핀티아에게 자신은 절대로 그 사건의 재판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만약 그가 핀티아를 유죄로서 판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에게서 그의 명성을 빼앗는 것이 될까 두렵고, 또 반대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면 이미 수많은 의무 이행과 찬양받을 만한 업적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진 그를 새삼스레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핌브리아가 알고 있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은 무엇이건 간에 절대로 유익한 것으로 보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선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감히 행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말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농부들조차도 의심이라고는 전연 하지 않는 이 윤리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이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부끄러운 불명예의 일이 아닌가? 농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미 진부해진 오래된 속담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의 신의와 착실함을 칭찬할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과는 함께 어두운 데에서 손가락 수를 맞추는 놀이를 할 만해.'43)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다름이 아니라 비록 네가 나쁜 짓을 해도 전연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데코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속담에 비추어 볼 때, 저 기게스나 내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손가락을 움직여 모든 상속자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그런 자에게는, 어떤 변명이나 용서의 여지가 전연 없다는 사실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 바로 그것이 아무리 잘 은폐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은 자연을 거역하고 자연과 상충하면서 유익한 것이 될 수가 없다.

 

43) 현대 이탈리아의 morra. 어두운 데에서 한 사람이 재빨리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펼쳐 보이면서 맞추기를 원하면, 동시에 상대방도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펴서 맞추어 보는 놀이.

 

인용문이 몹시도 길고 낯선 내용들이라 키케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속속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키케로가 무슨 뜻으로 저런 글을 썼는지는 누구라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옮겨 보았다. 더군다나 그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뛰어난 언변과 변론과 웅변술로 '법정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땅콩 회항'을 두고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이는 바로 지금의 '서울의 한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억울한 당사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차원에서, 결코 아무나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묘수'까지 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약자' 신세로 내몰린 채 앞으로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될 그 사람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재벌 총수'까지 재판정으로 불러낸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판 '솔로몬의 판결'이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키케로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는 결국 '도덕적으로 선함'을 포기하고 얻는 '유익함'은 결코 유익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상충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유익함'을 먼저 앞세우기 쉬운가. 그런데 키케로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무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다 보면 결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키케로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고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익함이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신의와 정의로움을 빼앗아 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그 유익함이 너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야수로 바뀌는 것과 사람의 외형만을 지닌 채 야수와 같은 잔인함과 야비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반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파렴치한 권력을 소유한 카이사르를 심지어 장인으로 모시려고 하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장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자기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하며 무익한 것인가를 그는 알지 못했다. 반면 장인 자신은 항상 포에니의 처녀들이라는 그리스의 시를 읊곤 했는데, 나는 정리는 잘 안되지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해 보겠다.

 

법이 범해져야 한다면,

왕이 되기 위해서나 범법이 행해져야 하리라.

다른 경우에는,

경건한 마음을 품고 범법하지 말지니.47)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추악한 한 가지를 취한 사람은 에테오클레스48)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49)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47) Euripides: Phoenissae, 5, 524 

 

48) Eteocles: Thebes의 왕, Oedipus의 아들인 Eteocles와 Polynices 형제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통치하기로 하고 먼저 형인 Eteocles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혼자 통치하기 위해 약속된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동생 Polynices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추방하였다. 그 결과 형제가 전쟁을 하다가 서로의 손에 둘 다 죽었다.

 

49)Euripides(B.C. 480∼406): 아테네의 비극시인. Anaxagoras의 제자이며 Socrates의 친구.

 

위의 인용문에서 '키케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포이니케 여인들』을 조금 더 들여다 봐야 한다. 그 작품을 소개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의 글만큼 명료한 것도 드물다.

 

『포이니케 여인들』작품 소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번갈아 가며 테바이를 통치하기로 약속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자 아르고스로 망명한 폴뤼네이케스가 이른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하러 온다.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가 두 아들을 화해시켜보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인 크레온의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면 에테오클레스와 테바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다. 아르고스군의 공격이 격퇴되자, 두 형제가 일대일로 결투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결투에서 두 형제가 서로 죽이자 이오카스테가 절망하여 칼로 자결하고, 그들의 누이 안티고네가 이 소식을 오이디푸스에게 전한다. 크레온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지 말고, 눈먼 오이디푸스는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결혼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랑길에 오르며 돌아와서 폴뤼네이케스를 몰래 묻어주겠다고 말한다.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 유명한 비극이 바로 스티븐 핑커가 문학 작품에서 '영원한 공식'이라고 말한 그 '형제간의 비극'을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이다. 키케로의 책에서 인용된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겨우 네 줄만 인용된 저 '짧은 대목'만 읽으면 얼핏 '왕이 될 정도로 대단한 야심을 가졌을 경우에나 법을 무시할 일이지, 그 외의 다른 경우라면 그저 법을 지키며 조용히 살 노릇'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의 참뜻은 그게 아니다. 자신의 동생에게 절대로 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그 대목을 조금 더 끌고 와 보면 이렇다.

 

이오카스테

······

내 아들 폴뤼네이케스야,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너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다나오스 백성들의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말이다. 제발 신들 중에

한 분이 재판관이 되시어 이 불화를 중재해주시기를!

 

폴뤼네이케스

진리의 말은 원래 단순하며, 정당한 요구에는

현란한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 요점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당한 주장은 속으로 병들어 있어

그것을 치유해줄 궤변이 필요하지요.

······

 

에테오클레스

······

제가 통치할 수 있는데, 저더러 이자의 노예가 되라고요?

그러니 불을 가져오고, 칼을 가져오고, 네 말들에

멍에를 얹고, 들판을 네 전차들로 메워보려므나.

그래도 나는 왕권을 너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불의한 짓을 해야 한다면, 왕권 때문에 불의한 짓을 하는 게

가장 아름답지.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경건해야 해.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인용문'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알고 보니 삼모자(三母子)가 '왕권'을 다투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코 앞에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형국에서 나온 '절박한 말들' 가운데 일부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이었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들 형제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오라비들의 싸움 때문에 어머니마저 잃고 졸지에 비극의 한가운데로 곧장 내던져진 저 가엾은 안티고네는 눈 먼 장님이 된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머나먼 방랑길'을 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키케로가 저 대목에서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하는 말이 이쯤에서 좀 더 확실하게 이해되고 나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더욱 커진다.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댈러스 미술관

 

 

어쨌든 나로서도 키케로의 책에서 등장한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할 때'의 얘기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땅콩 회항 사건의 그 '문을 닫고 비행에 나서기 시작한 때'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명쾌하게 정리는 잘 안 되지만 약간이나마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키케로의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현실 속의 뉴스가 서로 뒤엉켜 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독자는 늘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이나 상황을 함께 떠올리면서 그 책을 읽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함께 떠오른 여러 현재의 상황들 때문에 이 따분해 보이는 책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마침 이 책은 키케로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수감된 딸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딸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도 '책'이 빠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책도 좀 읽고 수양의 기회로 삼아라'는 소식이 들려오니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서양의 논어'라고 불릴 정도이니 '수양'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라 할 만하다. 가끔씩 너무 완벽한 '도덕 군자'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우긴 하지만 말이다. 끝으로 '옮긴이의 말' 가운데 일부를 덧붙인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이 책에 대해 '볼테르가 한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서 코웃음을 칠 뻔 했는데,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부터는 그 사람의 말이 정말 틀린 게 조금도 없구나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어서 차마 그 얘기를 빼놓기 어려웠다. 이렇게 주렁주렁 책 속의 글을 끊임없이 덧붙이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욕심'인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그럼 이만 총총...

 

··· 그리하여 이 책은 서양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로서 서양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특히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키케로의 연구자 내지 찬양자들이었고, 근대 정치 사상가인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도 키케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볼테르가 1771년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나, 프레데릭 대왕이 "지금까지 씌어졌거나 씌어질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한 말은 모두가 진실이다.

 

아, 참,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적어도 볼테르가 한 말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 가운데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아예 없었던 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극소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도덕감정론』을 쓴 아담 스미스였고, 또 한 사람은 아마도『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이 사람들이 쓴 책까지 이 글에서 언급한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고, 이 글을 정말 웃기게 만드는 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글은 여기서 정말 '끝'이다. 끝.

 

 

접힌 부분 펼치기 ▼

 

 

 

영원한 공식

자연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감정을 살짝 어긋나게 조율하는 잔인한 장난을 쳤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시대의 소설가와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두 명의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세 가장 강한 끈으로 묶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때때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적 가능성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비극적 이야기가 가족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 명의 형제가 서로 싸우다 죽는 이야기에 비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 마이클과 프레도, 제이알과 바비, 프레지어와 나일스, 요셉과 형제들, 리어왕과 딸들, 한나와 자매들 ·······, 수세기에 걸친 드라마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가의 증오"와 "일가의 적대"는 영원한 공식이다." (466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467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755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펼친 부분 접기 ▲

 

 

* * *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5-01-24 13:06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yamoo 2015-01-23 15:19   댓글달기 | URL
헐~ 오렌님의 이 글을 읽으니 키케로의 <의무론>을 바로 읽어야 겠습니다. 책도 바로 잡히는데 있거든요..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1-24 13:05   URL
yamoo 님께서는 이미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놔두고 계셨군요.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후딱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라틴어 원문`을 빼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지요..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제 생각으로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겪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는 보통 사람들`의 손과 가슴까지 뜨겁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 * *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붉은돼지 2015-01-29 05:49   댓글달기 | URL
빈서판도 읽어봐야겠어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여러분이 추천하고 있지만 왠지 손이 안갔는데 오렌님 글을 보니 문득 읽고 싶은 생각이...ㅎㅎ
키케로도 물론이구요.
 

 

시시콜콜한 뉴스들에 대해서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다. TV 뉴스를 일부러 시간에 맞춰 보는 일이란 아예 없다고 하는 편이 맞고, 이제는 신문도 거의 들여다보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뉴스가 재미가 없게 되다니...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은 생각도 가끔은 든다. 그런데 별 재미도 없는 뉴스를 굳이 억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은 이미 뉴스가 자기 자신의 '손 안에' 다 들어와 있다. 그러니 뉴스를 일부러 외면하기도 그리 쉽지는 않다. 다른 게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열었다가 자꾸만 저절로 '뉴스'를 보게 되니까.

 

어제도 그랬다. 나는 정작 다른 무엇인가가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열었을 뿐인데, 거기엔 이미 온통 '두 여인'이 원인을 제공한 '뜨거운 뉴스' 때문에 열이 바짝 달아 올라 있었다. 거기엔 무수한 댓글과 '뜨거운 공감'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 뉴스들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밖에... 그리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햐아~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로마인이 쓴 책 속의 글이 어쩌면 이 두 여인에게 그토록 들어맞는지 무릎을 탁 칠 지경이었다. 바로 키케로가 쓴『키케로의 의무론』이라는 책 속 글귀들이었다.

 

키케로가 누구인가. 그는 로마에서 최고의 웅변실력을 자랑했던 인물이자 또한 로마 공화정 말기에 오래도록 정치 무대를 주름잡던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카틸리냐 탄핵을 주도했고,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카이사르와도 맞섰으며,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는데도 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결국 그는 카이사르가 급작스럽고도 드라마틱하게 암살된 이후 권력 공백기에 다시 등장한 제2차 삼두정치 시대에 이르러 '그 시대의 주역들'로부터 끝내 버림받게 되면서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 쫒긴 끝에 목이 잘리고 만다. 명연설을 토해 내던 그의 목과 그 연설문을 작성했던 손들이 로마 광장 한복판에 내걸렸을 때, 지은 죄(?)가 많았던 그의 혓바닥이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에 의해 밤중에 송곳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모욕까지 당했을 정도로 어쨌든 그는 정말 말을 잘 했던 인물이다.

 

본래 하고 싶은 말을 쓰기 위해 일부러 늘어 놓은 말이 자꾸 엉뚱한 데로 흐른다 싶다. 이제 그만 '라틴어 산문의 대가'로 평가받는 그 인물이 쓴 글을 직접 들여다 보자.

 

폭력과 기만

 

이상으로 전쟁들의 의무에 관해서는 정말 충분히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가장 미천한 자들에 대해서조차도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천한 상태와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은 노예들인데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훌륭한 교훈은 그들을 고용 노동자처럼 다루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심하게 일을 시키기는 하되, 의식주와 같은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불의가 행해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폭력과 기만이다. 기만은 마치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마치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모든 불의 중에서도, 남을 가장 기만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선인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면서 속이는 자들의 불의가 가장 위험하다. (44쪽)

 

 

어제 열린 '땅콩 회항' 사건의 첫 공판에서 나온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길게 쓸 것도 없다. 그저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로 요약된다. 심지어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까지도 나왔다.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웠던 뉴스는 바로 '13월의 세금 폭탄'이었다. 그토록 '경제 민주화'와 '증세 없는 복지'를 외쳤던 새로운 정부에서 기껏 '세제 개혁'이라고 내놓은 작품이 그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키케로의 말을 들어 보자.

 

다수의 증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모든 동기 중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확고히 하는 데는 경애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고, 공포보다 더 낯선 것도 없다. 엔니우스는 정말 감탄조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자를 증오하노라.

누구나 자신이 증오하는 자가 죽기를 바라노라.

 

그런데 어떤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뎌낼 수는 없다. 전에 몰랐다면 최근에는 알았을 것이다. 이 참주,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용하여 국가의 목줄을 눌렀고, 또 그가 죽은 후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전보다 더 아주 비굴하게 그에게 쩔쩔매고 있는 터인데, 그의 암살은 사람들의 증오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모든 참주들의 유사한 운명에 의해서도 같은 교훈이 도출되는데, 실제로 참주치고 그 누구도 일찌기 이러한 죽음에서 피할 수 있었던 자는 없었던 것이다. 정녕 공포 정치란 단지 권력을 유지시킬 뿐인 나쁜 안전 장치이지만, 이와 반대로 선의(善意)는 실제로 그것을 영구히 믿을 만하게 지켜주는 안전판인 것이다.(129∼130쪽)

 

지금이 비록 저 당시(카이사르 암살 두세 달 후인 B.C 44년 봄이나 초여름)와 비슷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작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이 매우 가파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지지율 하락'이 진짜 무서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어떠한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뎌낼 수는 없다'는 저 변치 않는 진리 때문이 아닐까.

 

내가 오래 전에 쓰인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오늘날의 뉴스'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한 건 아닐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키케로가 남긴 여러 명언들 가운데 내가 겨우 딸랑 하나 외우고 있는 인상적인 문장까지도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여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상상했을 정도니까. 내가 기억하는 문장은 바로 다음과 같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 (한참 있다가)

"Ego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이 짧은 두 문장 속에서도 내가 두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고 해서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키케로의 저 말은 '지금 여기'의 상황과 너무 어울린다. 오늘날의 뉴스와 옛날의 책이 서로 이렇게 '딱'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마주 손뼉을 칠 때도 다 있구나 싶다.

 

 * * *

 

 

 

 

 

 

 

 

 

 

 

 

 

 

 

 

 



 
 
다크아이즈 2015-01-20 17:06   댓글달기 | URL
고전에는 현실이 들어있다!
오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어요~~

oren 2015-01-20 17:45   URL
아직도 새해 인사를 하기엔 늦지 않았군요. 이제 겨우 연말정산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지요..
팜므 님도 새해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

qualia 2015-01-21 01:56   댓글달기 | URL
제 판단엔 ‘땅콩 회항’ 여성에 대한 한국 검찰(←지구상에서 가장 비열한 찌질남 무리들)의 뜬금없기 짝이 없는 수사 강도와, 한국 찌질남들의 인터넷/에스엔에스에서의 언어폭력/인격테러는 동일한 병증이 다른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그 여성이 잘못한 것은 어느 정도 맞지만, 한국 검찰이 갑자기 법과 정의의 수호신이 된 양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건 블랙 코미디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얼마나 시급했으면 지들 친척뻘 종족을 저렇게 처절하게 다구리치는 것일까요. 비굴하고 비열한 주구(走狗들의 전형적인 수작질의 하나라고 봅니다.

‘땅콩 회항’ 여성이 어느 정도 잘못한 건 맞겠지만, 저런 강도로 수사 받고, 비난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 ‘죄인’을 심문/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을 마녀사냥하는 것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비난 받는 측면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적 비난 광풍은 검찰을 비롯한 주구들과 기레기 언론들이 합작한 것이라 봅니다. 이런 공작질에 무뇌아처럼 부화뇌동하는 건 한국 찌질남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죠.

oren 2015-01-21 12:00   URL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판단은 각자의 몫이니 말이지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 1』은 781쪽,『돈키호테 2』는 927쪽, 들러리로 나선『평생독서계획』은 512쪽)

 

올해는 소설 『돈키호테』의 속편이 출간된지 꼭 400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다 보니 이 놀라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예년보다는 분명 더 높아질 듯한 성급한 예감도 조금은 든다. 특히나 작년 연말쯤 전편과 속편을 1,2권으로 나눠 출판한 '열린책들' 판본은 세르반테스의 걸작 소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할 듯하여 독자의 한사람으로서도 괜히 고맙고 기쁜 생각부터 앞선다.

 

이 뛰어난 소설을 읽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요소는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책의 외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방대한 분량이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종전에 나와 있던 시공사판 『돈키호테』도 물론 번역이 훌륭하고 충실한 주석들이 적지 않아 '스페인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을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그 책은 결정적으로 1605년에 나온 '돈키호테의 전편'만 번역해 놓은 한계점이 있었다. 다행히 그 책을 번역하신 분이 전편을 내놓은 지 10년 만이자 돈키호테 후편이 출간된지 400주년이 되는 올해 봄에 마침내『돈키호테』의 후편까지 마저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돈키호테』를 시공사판으로 '전편'만 읽은 독자들은 똑같은 역자가 내놓을 후편을 마저 읽는 계기로 삼아도 좋겠다 싶다.

 

시공사판과 열린책들판을 서로 비교할 생각에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닌 만큼, 곧장 내가 하고 싶은 얘기로 관심을 돌리면 그건 바로 두 출판사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실어 놓은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이다. 그 유명한 화가의 삽화는 이 걸작 소설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따라다닌 지 이미 오래다. 마치 단테의 『신곡』을 읽는 사람들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 유명한 삽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귀스타브 도레는 1832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나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성장했으나, 15세의 나이에 그린 스케치로 파리 출판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그가 그린 『돈키호테』의 삽화는 그 생생한 묘사력으로 극찬을 받았다. 그의 세밀한 터치에 피카소마저 매혹되었으며, 반 고흐는 <최고의 민중 화가>라 그를 칭송하기도 했다. 도레가 그린 『돈키호테』의 여러 인물들은 그 생김새와 상황에 대한 뛰어난 묘사가 아우러져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 귀스타브 도레 그림, 안영옥 옮김『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중에서

 

소설『돈키호테』를 다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그림만은 어쩌면 한번쯤 봤을지 모르겠다. 그가 그린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돈키호테와 로시난테, 산초 판사와 당나귀(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산초는 그를 그저 '잿빛'이라고만 부른다.)를 함께 그린 다음의 그림이다.

 

 

 

 

분명 처음 보는 낯선 그림은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은 물론 돈키호테의 전편에 나오는데 이 글을 계속 읽을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림에 딸린 '설명글'까지도 눈여겨 봐둘 필요가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에 빠른 돈키호테의 종자(從者) 산초가 주인 나리를 그토록 충실하게 따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모험이 성공하면 자네가 통치할 섬을 하나 떼주겠다'는 천금같은 약속 때문이었고, 그들 사이에 맺은 약속이 어떤 식의 결말을 맺으며, 그 즈음 산초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바로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인물은 익히 알려진 대로 성격이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돈키호테는 언제나 모험과 이상을 꿈꾸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믿고 생각하는 대로 곧장 '현장 속으로' 돌진하며 뛰어든다. 서양 문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 인물이 바로 돈키호테임을 누가 모를까. 그는 햄릿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무모함의 대명사'가 된 지도 벌써 400년이나 된 인물이다. 그에 반해 그를 따르는 산초 판사는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신의 눈 앞에 빤히 보이는 이익과 손실 앞에서는 두뇌회전이 놀랍도록 빠르게 돌아가지만 조금만 더 멀리 떨어진 미래까지를 포함한 '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지극히 눈이 어두운 인물이다. 그는 그저 오늘 등따습고 배부른 걸 최고로 여긴다. 그런 두 인물이 '편력 기사의 모험'을 오랫동안 함께 했으니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운 수많은 일들이 벌어질 게 너무나 뻔하다. 게다가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이미 소설과 현실조차 제대로 분간할 줄도 모르는 반쯤 미쳐버린 인물로까지 묘사되고 있으니 이 이야기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놀라울지는 새삼스레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그런 돈키호테에게 풍차가 거인으로 보이고 양떼가 군대로 보이고 객줏집이 성으로 보인다고 한들 이상할 게 조금도 없는 셈이다. 물론 그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꼭 함께 끌려가는 산초는 늘 '이게 도대체 뭐냐고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상황을 묘사한 숱한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들자면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하고도 기발한 중세 기사를 흉내낸 모험담이 도대체 왜 그토록 문학사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 된 것일까. 그런 평가를 제대로 실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꼼꼼하게 읽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르겠다. 나로서도 이 소설을 다 읽기 전까지는 도대체 그런 평가가 왜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음미하면서 온전히 다 읽어 보면 이 속에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되고, 나중엔 정말 엉엉 울어버릴 정도로 사람의 내면을 깊디깊게 파고드는 정말 대단한 소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저 읽는 내내 황당하고, 무모하고, 기발하고, 놀라우며, 재미있고, 안쓰럽고, 웃기기만 하던 소설이 어떻게 후반부로 점점 더 다가갈수록 그렇게나 놀라운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지, 그래서 왜 이 작품을 '인간 최대의 희극이자 비극'이라고 말하는지를 깨닫게 되면 이런 놀라운 소설을 그려낸 작가 세르반테스라는 인물에 대해 경외심마저 느끼게 된다.

 

전편이 출판되고 10년이 지난 1615년, 돈키호테가 한 달간 집에서 요양하다가 세 번째로 집을 나서는 내용으로 속편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출판된다.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가 한 일이 책으로 출판되어 세간의 호평을 받고 있으며, 이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시작이 된 허구와 현실의 문제, 상호 텍스트성 및 관점의 차이와 존재와 언어의 불일치에 따른 독자 비평으로의 초대 등, 현대 문학론의 싹이 전편에서와 같이 속편에서도 움트고 있다. 전편을 통해 이들을 알게 된 공작 부부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 두 주인공을 가지고 집요하게 장난을 치고, 이런 장난과 더불어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삼손 카라스코 학사의 끈질긴 추적이 이어진다. <하얀 달의 기사>에게 패배하여 모험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돈키호테의 최후는 현실 앞에서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한다.

 

 - 귀스타브 도레 그림, 안영옥 옮김『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중에서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까지도 좀처럼 속시원히 드러나지 않는 '한 가지'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건 바로 이토록 흥미로운 두 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자세한 얼굴 표정'을 한 번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귀스타브 도레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자세한 얼굴'을 도무지 내놓을 줄 모르는 것일까. 혹시 무슨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혹시라도 나처럼 이 두 인물의 '자세한 몰골'을 몹시 궁금해 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걸 일부러라도 꼭꼭 숨겨 놓아야지... 하는 그런 고약한 심보로 나같은 독자들을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러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정말 한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다.

 

『돈키호테』속편이 출간된 지 250여 년이 지난 1863년, 프랑스의 저명한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돈키호테』의 삽화는 현재까지 그려진 『돈키호테』의 삽화 중 가장 세밀하고도 유명한 삽화가 되었다. 그가 생전에 남기고 간 190여 점의 『돈키호테』돈키호테 삽화 중 본 책에는 1백 점의 삽화를 수록했다.

 

 - 귀스타브 도레 그림, 안영옥 옮김『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중에서

 

어떻게 그 많은 그림들 가운데 돈키호테와 산초의 얼굴 표정을 '보란듯이' 시원스럽게 그려놓은 그림은 이토록 찾기가 어렵단 말인가. (이 책을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 나간 나같은 우직한 독자들만이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앞에서 소개한 두 그림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그림들이 정말 놀랍도록 한결같이 그 두 사람의 얼굴을 교묘하게 감추기 일쑤여서 나같은 독자들의 갈증을 속시원히 만족시켜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오랜 궁금증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듯이, 마침내 그 화가는 우리의 두 주인공을 큼지막하게 그린 그림들이 '잇따라' 내놓았으니 그 첫 번째 그림이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당연한 얘기지만 그 반가운 그림들을 발견한 때는 물론 이 소설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어쩔 수 없이 이 두 주인공과 슬픈 결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면서 '웃음'보다는 '슬픔'이 점점 더 크게 밀려올 무렵이었다.)

 

나같은 독자의 '감정의 기복'까지도 귀스타브 도레는 일부러 고려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 두 인물이 크게 클로즈업된 그림들은 결국 '너무나도 슬픈 몰골'로 나타났다.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 얼마나 가엾은 몰골인가. 안 그래도 그에게는 '슬픈 몰골의 기사'라는 별명이 늘 붙어 다니는 처지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만신창이가 된 처지로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도 그는 여전히 '놀라운 상상'을 그칠 줄 모르니, 그 이야기를 잠깐만이라 살펴 보기 위해 나는 세르반테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여기까지 직접 끌고 왔다.

 

형편없이 부상을 당한 돈키호테는 신의 손도 아니고 고양이 발톱에 할퀸 자국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아주 슬프고도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편력 기사로 지내다 보면 이러한 불행도 따르기 마련이다. 그는 엿새 동안이나 사람들 앞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의 불운과 알티시도라의 집요한 구애를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을 때, 누군가 열쇠로 자기 방문을 여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사랑에 빠진 처녀가 자신의 귀부인 둘시네아 델 토보소를 위해 지켜야만 하는 그의 정절을 급습하여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할 상황으로 몰아넣으러 온 것이라고 상상했다. (589쪽)

 

 - 『돈키호테 2』, <48 돈키호테와 공작 부인의 과부 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에게 일어난 일과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기억할 만한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

 

그날밤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여인은 엉뚱하게도 자신에게 구애하던 알티시도라가 아니라 과부 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였다. 그 두 사람과의 '오밤중 대화'도 '기억할 만한 코미디'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며 웃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아무 일 없는 거죠, 기사 나리? 나리께서 침대에서 일어나 계신 게 그리 점잖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아서 말이에요.」

 

「바로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부인,」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그래서 묻소만, 내가 기습을 당한다거나 강간을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요?」

 

「누구로부터요? 아니, 누구에게 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나리?」과부 시녀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으로부터 구하는 겁니다.」돈키호테가 대답했다. 「나는 대리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고, 당신 또한 청동으로 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전 10시도 아니고 한밤중인 지금, 아니 내 생각에는 한밤중보다 조금 더 된 야심한 이 시간에, 배신자이자 무모했던 아이네이아스가 아름답고 인정 많은 디도를 취했던 동굴도 분명 그러했을, 아니 그보다 더할 정도로 밀폐되어 있고 은밀한 방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부인, 그 손을 주시지요. 내가 가장 믿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의 자제력과 신중함, 그리고 당신의 공경스럽기 그지없는 그 두건이 보장해 주는 안전함입니다.」(593∼594쪽)

 

 - 『돈키호테2』, <48 돈키호테와 공작 부인의 과부 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에게 일어난 일과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기억할 만한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

 

그런데 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계속 이어나갈 형편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불쌍한 산초에 대한 얘기를 결코 빼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제는 '통치 일을 열심히, 그리고 아주 재치 있게 하고 있는 산초 판사를 보러' 가 보자.

 

이 기나긴 이야기의 장면은 수도 없이 바뀌고 또 바뀌어 마침내 산초에게도 '진짜로 섬을 통치할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공작 부부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놀리기 위해 꾸며낸 거대한 연극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드디어 섬의 통치자로 부임한 산초 판사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제법 훌륭하게 '통치자'의 역할을 너끈하게 수행해 낸다. 그가 마침내 그토록 소원이었던 '섬의 통치자'로 부임하게 된 사실을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아내에게 재빨리 알렸음은 '당근'이니 세세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고 훌쩍 건너뛰는 대신에, 그의 소식과 편지를 읽은 아내가 쓴 답장 일부부터 소개하면 이렇다.

 

테레사 판사가 남편 산초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

 

내 영혼의 주인인 산초 여보, 당신 편지를 받고 어찌나 좋았는지 내가 미쳐 돌아 버릴 것 같았다는 걸,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당신께 약속하고 맹세해요. 여보, 당신이 통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뻐서 그 자리에 그냥 거꾸러져 콱 죽어 버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큰 슬픔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기쁨도 사람을 죽인다고들 하잖아요. 당신 딸 산치카는 그저 좋아서 그만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버렸어요. 나는 당신이 내게 보낸 옷을 앞에 두고, 공작 부인 마님께서 내게 보낸 산호 묵주를 목에 걸고, 편지는 손에 쥐고, 그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내 앞에 있는데도, 그러고도 내가 보고 만지는 게 모두 끔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다니까요. 글쎄 산양이나 치던 목동이 섬의 통치자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고요. 당신도 알다시피 많은 일을 보려거든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우리 엄마가 말씀하시곤 했지요. 더 오래 살다 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이제 그 말을 내가 하게 되네요. ···

 

올해 올리브 농사는 형편없는 데다, 온 마을을 뒤져도 식초 한 방울이 없어요. 보병 부대 하나가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그 길로 마을 처자 세 명을 데려가 버렸고요. 누구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어요. 아마도 돌아올 거고, 흠이 있든 없든 아내로 맞이할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산치카는 레이스 장식을 뜨고 있어요. 매일 꼭 8마라베디를 버는데 자기 시집갈 때 보탠다고 저금통에 넣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통치자의 딸이 되었고 당신이 지참금을 줄테니 걘 일할 필요가 없어졌지요. ···

 

당신의 아내

테레사 판사

(651∼654쪽)

 

그런데 나는 돈키호테의 슬픈 몰골에 '잇따라' 산초 판사의 몰골이 나온다는 얘기를 결코 잊은 게 아니다. 산초 판사의 '슬픈 몰골'을 마저 보기 위해 나는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부탁할 참이다. 이런 쓸데 없는 이야기로 내 글이 좀처럼 마무리될 기색이 보이지 않더라도 너무 답답해 하지 말아 달라. 이 글의 끝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쯤에서 작가 세르반테스의 얘기를 다시 한번 더 들어 보자.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봄은 여름을 추적하고, 여름은 한여름을 추적하며, 한여름은 가을을 추적하고, 가을은 겨울을, 그리고 겨울은 봄을 추적하니, 이렇게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다시 시작해 볼 희망도 없이 말이다. ··· 하지만 여기 우리의 작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산초의 통치가 순식간에 끝나 소멸되고 붕괴되어 그림자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655쪽)

 

 - 『돈키호테 2』, <53 산초 판사의 힘들었던 통치의 결말에 대하여>

 

제법 긴 나날 동안 아주 현명하게 그 섬을 다스리던 산초 판사는 어느 날 한밤중에 느닷없이 그 섬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적들과 싸우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전쟁의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급한 대로 두 개의 방패로 자신의 몸을 앞뒤로 두른 채 전쟁터에 떠밀리듯이 나선 그는 '자신의 껍질에 덮인 채 그 안에 갇힌 큰 거북이, 아니면 모서리가 좁은 두 개의 장방형 나무 상자 사이에 낀 절인 돼지고기 반쪽, 아니면 모래에 걸려 넘어진 배 같은, 바로 그런 꼴'로 쓰러져, 이리 저리 마구 짓밟히며 엉망진창이 되고 혼쭐이 난 산초는 공포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는데, 산초가 정신을 차리고 나자 전쟁은 벌써 끝나고 적들이 모두 물러난 뒤였다.

 

산초가 몇 시인지 묻자 그들은 벌써 동이 트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잠자코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저렇게 급하게 옷을 입는지 몰라 모두가 그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옷을 다 입은 산초는, 워낙 녹초가 되어 있었기에 성큼성큼 걷지도 못하고 느릿느릿 걸어 마구간으로 갔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산초는 자기의 잿빛에게 다다르자 그를 얼싸안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리로 오렴, 나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나와 고생과 가난을 같이해 온 잿빛아. 너와 마음을 나누고 네 마구를 손질하고 네 작은 몸뚱이나 먹여 살릴 일 이외에는 다른 생각일랑 하지 않으면서 보낸 나의 시간들과 나의 나날들과 나의 해들은 행복했었지. 하지만 너를 내버려 두고 야망과 오만의 탑 위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내 영혼 속으로 수천 가지 비참함과 수천 가지 노고와 수천 가지 불안이 들어오더구나.」(659∼660쪽)

 

 - 『돈키호테 2』, <53 산초 판사의 힘들었던 통치의 결말에 대하여>

 

바로 이런 놀라운 반전 속에 마침내 이 책 속에 삽화를 그려 넣은 화가가 산초의 '자세한 얼굴'을 내보였으니 그게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감동적인 그림인가!

 

 

 

그가 이런 말만 남기고 당나귀에 길마를 얹자 말자 훌쩍 그 자리를 떠난 건 물론 아니다. 그는 당나귀에 오르고 난 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일장연설'이라고 할 만한 명대사를 남겼으니 (그림 한 장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존재로 우리에게 확 다가온 그(산초 판사)의 얘기를 직접 들어 보자.

 

「여러분, 길을 비켜 주시오. 그리고 내가 옛날의 자유로운 몸으로 돌아가도록 놔두시오. 현재의 이 죽음과 같은 생활에서 되살아나도록 지난 삶을 찾으러 가게 해주시오. 나는 통치자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오. 도시나 섬을 공격하고자 하는 적으로부터 그것들을 방어하려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라오. 나는 법을 만들고 땅이나 왕국을 지키는 일보다 밭을 일구고 땅을 파고 포도나무를 베고 가지를 치는 일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오. 성 베드로는 로마에 있을 때 제일 편안하다는 말처럼,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린다는 얘기요. 손에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상인 왕홀보다 낫 한 자루 쥐고 있는 게 내게는 더 잘 어울린다오. 나를 굶겨 죽이려 하는 염치없는 의사가 내리는 처방의 비참함에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스파초312나 질리도록 먹고 싶소. 그리고 통치한답시고 거기에 구속된 채 네덜란드산 이불 잠자리에 들고 검은담비 옷을 입고 사느니, 차라리 자유롭게 여름에는 떡갈나무 그늘에 드러눞고 겨울에는 새끼 양가죽을 입고 살고 싶다오. 그대들은 안녕히 계시오. 그리고 내 주인이신 공작님께는, 내가 벌거숭이로 태어나 벌거숭이로 남았다고 전해 주시오. 나는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소이다. 이 말은 곧 내가 다른 섬의 통치자들과는 완전히 반대로, 일전 한 푼 없이 이 섬에 들어와 일전 한 푼 없이 나간다는 뜻이오. 자, 나갈 수 있게 비키시오. 난 고약으로 치료하러 간다오. 오늘 밤 내 몸 위를 산책한 적들 덕분에 갈비뼈가 모두 주저앉은 듯하오.」

(660∼661쪽)

 

312 gazpacho. 토마토, 파프리카, 양파, 올리브기름 등을 넣어 만든 차가운 수프. 주로 더울 때 먹는다.

 

이렇게 아주 그럴싸한 고별사를 남긴 산초를 의사가 다시 한번 붙잡아 두려 하자 그는 자신의 결연한 마음을 다시금 확실히 밝히는데 이 책의 번역자는 그걸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옮겨 놓고 있다.

 

「삐악삐악 우는 게 늦었소.」313 산초가 대답했다. 「그런다고 떠나기로 한 걸 그만두면 내가 터키인314이지. 두 번 다시 이런 장난은 하지 않을 거요. 회복기에 들어간 환자에게 정성 들여 식사를 내놓듯 나를 대접한다 해도 내가 이곳에 남거나 다른 통치직을 허락하는 일은, 날개 없이 하늘을 나는 일과 마찬가지로 결단코 두 번 다시 없을 거요. 나는 판사 가문의 사람으로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가 고집불통이라, 한번 <아니>라고 하면 일이 실제로 돌아가는 게 <그렇고> 세상 모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도 <아닌> 게 되어야 하오. 제비나 다른 새들한테 잡아먹히라고 나를 공중에다 띄워 준 이 개미의 날개는 여기 마구간에 남기고 우리는 다시 평범하게 땅으로 돌아다닐 거요. 장식을 단 코르도바 가죽 구두로 발을 멋들어지게 할 수는 없겠지만, 끈으로 동여맨 투박한 삼으로 만든 신발은 없지 않을 게요. 양마다 자기의 짝이 있는 법, 이불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보다 더 다리를 뻗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오. 가게 내버려 두시오. 늦어지고 있소.」(661∼662쪽)

 

313 기회가 이미 지난 다음에 해결하려 한다는 뜻. 16세기의 해석에 의하면, 병아리를 품은 달걀을 먹어 삼킨 후에야 병아리가 삐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어떤 사람이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14 turco. 당시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터키와 스페인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종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또한 이 단어 자체에 <술주정뱅이>, <만취>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나니 문득 나 자신이 이불은 생각지도 않은 채 다리를 너무 길게 뻗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도 이제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와 함께 한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그 두 사람을 내 눈 앞에서 떠나보내는 일만 남겨 두고 있다. 그들과 마지막 슬픈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쯤에서 글을 마쳐야겠다. 이 글 때문에 그들과의 작별이 자꾸만 너무 늦어지고 있으니...

 

 

 

 

 

 

 

 

 

 

 

 

 

 

 

 



 
 
qualia 2015-01-12 12:53   댓글달기 | URL
일단 ‘좋아요’ 한 방 때려요.

「이리로 오렴, 나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나와 고생과 가난을 같이해 온 잿빛아. 너와 마음을 나누고 네 마구를 손질하고 네 작은 몸뚱이나 먹여 살릴 일 이외에는 다른 생각일랑 하지 않으면서 보낸 나의 시간들과 나의 나날들과 나의 해들은 행복했었지. ···」

위 대사와 그림을 보자마자 두 눈에 물기가 핑 돌았네요.
며칠 전, 십년 넘게 저와 동고동락을 해온 작은 소지품을 잃어버렸습니다.
제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지켜주지 못하고 무명처(nowhere)로 떠나보냈습니다.
oren 님의 주옥 같은 글/인용문/그림을 보자마자 다시 가슴 한 자락이 찢겨나간 것처럼 아파오는군요.

『돈키호테』는 또한 제가 태어나서 최초로 읽은 소설이었죠.
어릴 적 외갓집에 갔을 때 작은 외삼촌께서 선물해주셨죠.
oren 님의 안내를 따라 다시 읽어나간다면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삶의 비밀 같은 걸 재/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oren 2015-01-12 14:37   URL
qualia 님께서 마치 `잿빛과 같은` 그런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리셨다니 그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요...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 그림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짠하던지, 울컥하는 슬픔 때문에 잠시 책을 덮어 놓고 산초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나의 잿빛`이라 할 만한 존재들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되더라구요.

『돈키호테』가 qualia 님께서 읽으신 최초의 소설이라니, 이 소설에 대해 정말 남다른 특별한 추억이 많으시겠군요.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은 번역을 비롯해서 여러 면에서 나무랄 데가 별로 없을 만큼 좋은 책으로 보여지더군요. 이 책들로 다시 한번 라만차 지방으로 멋진 모험을 떠나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해피북 2015-01-12 15:10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글이네요! 저두 이 책 두권 준비해놨는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요 이 책과 함께 받은 그림집을 실은 큰 관심가지고보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으니 반성이되네요 돈키호테가 왜 문학사에 높은평을 받는지 저두 그이유가 궁금해서 읽고싶었는데 이유를 알것같아요 그리구 얼른 읽고 저두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oren 2015-01-12 16:08   URL
happybook 님 반갑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책 정말 재미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세르반테스의 얘기를 조금 덧붙여 봅니다요.. ㅎㅎ

* * *

「··· 이 말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그대들에게 그런 약속을 하는 자가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만일 이 이름이 그대들 귀에 닿은 적이 있다면 말이지요.」

「어머나 세상에!」또 다른 아가씨가 소리쳤다. 「이런 엄청난 행운이 우리에게 일어나다니! 우리 앞에 계신 이분 알아? 내가 알려 주자면, 이분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시고 가장 깊은 사랑에 빠지신 분이며 가장 정중하신 분이셔. 이분의 공적을 기록한 책이 출판되어서 나도 읽은 그 이야기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여기 함께하고 계시는 이 착한 분은 그분의 종자인 그 산초 판사인 게 분명한데, 얼마나 재미있는 분인지 이분에게 견줄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라니까.」

「그건 사실이지요.」산초가 말했다.「내가 바로 아가씨가 말하는 그 익살꾼에 그 종자랍니다요. 이분은 나의 주인이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돈키호테 데 라만차이시고요.」

「세상에!」다른 아가씨가 말했다.「얘, 우리 이분께 여기 머물러 주십사 부탁드리자. 나도 네가 말한 이분의 용기와 종자분의 재치에 대해 들었어 ······」(『돈키호테 2권』, 710쪽)

해피북 2015-01-12 16:13   URL
정말.... 제 마음에 불을 지르시다니! 꼭 읽구 복수할겁니다 ㅎㅎ 감사해요 정말빨리 읽고싶어졌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transient-guest 2015-01-18 01:07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주문하지 못하고 다음 달로 미룬 돈키호테 완역 1/2권이네요. `평생독서계획`도 보이구요.ㅎㅎ 저는 아직도 깊은 의미는 모르겠고, 그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 설사 그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에서 무엇인가 삶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oren 2015-01-19 01:15   URL
이번에 안영옥 교수님이 번역한 돈키호테 완역판을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시면 이 위대한 소설의 깊은 맛을 분명 새롭게 느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건 좀 엉뚱한 얘기인데요.(물론 너무 엉뚱하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요.) 제가 로맹 가리의 작품들을 뒤늦게 읽기 시작하면서 이번에 겨우 두 번째로 읽은 소설이 마침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었는데, 그 책을 펼치자 말자 바로 그 책 속에도 `돈키호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제사(題詞)가 쓰여 있어서 깜짝 놀랐답니다. 물론 그 소설의 뒤에 부록처럼 딸린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로맹 가리가 쓴- 글에도 돈키호테를 언급한 부분이 다시금 나오고 말이지요. 어쨌든 그 제사(題詞)를 제 글에 등장하는 `돈키호테`를 위해서라도 다시금 여기에 덧붙여 봅니다.
* * *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돈키호테』는 아주 유머러스한 소설이다. 이 책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가 지방 순찰을 나갔다가 길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떤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말했다. "저 남자는 미쳤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큰 소리로 웃고, 어떤 독자는 빙그레 웃고, 어떤 독자는 겉으로 웃고, 또 어떤 독자는 속으로 웃는다. 그리고 어떤 독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이한 감정 상태로 읽는다. 세르반테스의 유머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 * *

 

흔히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라 일컫는 『돈키호테』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다. 그것도 장장 두 달에 걸쳐서.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2년에 걸쳐서 읽는' 소설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굼뜨게 책을 읽는 나를 스스로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무슨 소설 한 권을 가지고 해를 넘겨서까지 다 읽지를 못하고 끙끙대냐고 말할 사람도 물론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 소설을 두 달째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는 내가 생각해도 좀 엉뚱하다. 그저 읽다 보니 이 소설의 분량이 어느날 갑자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난생 처음으로 작심하고 읽은『돈키호테』는 고작 그 이야기의 '1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스페인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 바로 돈키호테가 아니던가. 그 줄거리 또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듯한 그 뻔한 소설을 내가 '돈키호테만큼 나이를 먹도록' 여태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책망하지 마시라. 어디 그런 유명한 책들이 한둘이던가. 그런데 뒤늦게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게 하필 작년 11월이었고, 마침 그 무렵에는 내 눈과 귀로도 무슨 새로운『돈키호테』가 1,2권으로 나뉘어 새롭게 출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으레 그렇듯이 나는 그 얘기를 나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인 줄로만 알고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았다. 왜냐하면 마침 그때 내가 읽기 시작했던『돈키호테』만 하더라도 이미 책은 충분히 두꺼웠으며(731쪽), 그 책만 다 읽으면 나는 당연히『돈키호테』를 '전부 다' 읽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언제 구출될 지도 모르는 채 기약없는 세월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책장에 갇혀 있던 그 '시공사 판'의 익숙한 『돈키호테』가 겨우 그 소설의 '1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한동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말자 '슬픈 몰골의 기사'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인 산초 판사에게 금새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책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온갖 '기발한 모험들'과 '기막힌 말솜씨'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소설 속의 소설' 즉 '삽입 소설'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말았는데, 그렇게 많은 모험과 등장인물과 대화와 이야기도 모자라서, 그 작가가 '돈키호테의 2부'를 또다시 추가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돈키호테 1부'를 다 읽고 나면 자연스레 '2부 마저' 더 사서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끝에 나는 '옛날에 나온 돈키호테'를 바쁜 연말연시임에도 불구하고 틈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읽어 나갔다. 이만큼 재미있는 소설을 뒷전에 제쳐두고 다른 책을 읽는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될 뿐더러 이 소설을 쓴 작가는 물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에게도 모독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시간들'을 빼놓곤 가급적 이 소설을 읽는 데 드는 시간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틈을 자꾸만 엿보고 있었다는게 좀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심지어 '불요불급한 일'들은 좀 뒤로 미루고서라도 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읽고 싶은 생각에, 도대체 내가 '어데서' 그런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를 잠시 궁리해 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고, 내 손에는 이미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 2부'가 절반쯤이나 '밑줄이 좍좍 그어진 채로' 나의 손길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으며, 이제는 겨우 나머지 절반만 깨끗한 채로 남은, 다시 말해서 '돈키호테 전체'로 따지자면 4분의 1만이 나에게 '미개봉'인 상태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전체의 4분의 3쯤 읽고 나니 문득 작가 세르반테스의 위대함이 자꾸만 새록새록 더 크게 다가옴을 어디에라도 고백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듯한 마음이 들고,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해 내가 이토록 굳게 입을 다물고 끝내 이 소설을 마저 읽는다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좀 아니다 싶어 이렇게 갑자기 두서없는 글을 끄적이게 되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이야기라도 『돈키호테』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어느 누군가는 반드시 내 얘기를 읽어줄 사람이 있으리라 믿고 어쨌든 내 얘기를 계속 이어나가 보겠다.

 

이 소설을 쓴 세르반테스는 비록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대학 과정을 밟은 적도 없고, 『돈키호테』1부를 출판(1605년)한 58세 때까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20대 초반에 그는 '스페인 법'을 어긴 일이 있었는데,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죄목으로 중벌에 처해지자 그는 고향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도망쳤고, 거기서 2년 동안 고위급 사제의 시종이자 수행원으로 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된다.

 

그가 참전한 전쟁은 그 유명한 '레판토 해전'이었다. 거기서 그는 용감무쌍하게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어 왼손을 잃게 되면서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후에도 그는 5년 동안이나 더 군대에 몸담았다. 마침내 명예롭게 전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그는 그만 태풍에 휩쓸려 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은 끝에 알제로 끌려가 그리스인 해적에게 양도되어 5년 동안이나 포로로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만다. 포로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네 번의 탈출 시도가 모두 실패했지만 교회 수사의 도움으로 몸값을 치르고 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가 전역후 직장에서 맡은 일도 <무적함대>에 식량을 납입하고 조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도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그는 늘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돈키호테』를 구상한 것도 감옥에서였다고 한다. 체납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던 50세 때 하필 징수한 돈을 예금해 둔 은행이 파산함으로써 세비야에서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58세 때 내놓은 소설이 바로『돈키호테』(원제는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 돈키호테 '1부'))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8세 때 또다시 『돈키호테』(원제는『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 돈키호테 '2부')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어림잡아 따져 보더라도 소설 『돈키호테』 가 세상에 나온 건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을 막 끝낸 즈음일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옛 인물이 쓴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그 수많은 쟁쟁한 소설가들을 모조리 다 따돌리고 아직까지도 '세계 최고의 소설'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른단 말인가. 그 점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숱한 언급들을 계속 보태왔으니 나까지 나서서 구차스럽게 새로운 말을 덧보탤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온 말은 단연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한 다음 말이었다.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스페인을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철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 저런 말을 내놓았을 정도이니, 평범한 독자가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고 저떻고를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으며 그가 사물을 다루는 방식을 도대체 어떻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싶기도 하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키호테에 관한 명상 Meditaciones del Quijote》(1914), 《등뼈 없는 스페인 Espa?a invertebrada》(1921), 《예술의 탈인간화 Deshumanizaci?n del arte》(1925), 《대중의 반란 Rebeli?n de las masas》(1930), 《관객 El Espectador》(1916-1934), 《칸트 Kant》(1931), 《사랑에 관한 연구 Estudios sobre el amor》(1940)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이든지 전작이 있고 나서 나중에 후속편이 나오면 대개 그 후속편은 전작 만큼의 감동을 주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늘상 예외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듯이 『돈키호테』또한 그런 통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작품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옳게' 알았으면 좋겠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속편을 얼마나 훌륭하게 썼는지를 알게 되면 돈키호테의 전편만 읽고 소설 『돈키호테』를 다 읽었다고 말하는게 얼마나 한심스러운 얘기일 수 있는지를 누구나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여기서 잠시 (작가의 말도 들어볼겸) 소설 『돈키호테』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보자.

 

「그런데 혹시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 작가가 후속편을 약속하고 있소?」 

 

「그럼요.」삼손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책이 나올 것인지 안 나올 것인지 우리도 구금해하고 있답니다. 이런 사정인 데다 <속편은 절대로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어서 후속편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들 생각하지요. 토성보다 목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돈키호테 같은 짓을 더 보여 다오. 돈키호테는 돌진하고 산초 판사는 말하라,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것으로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요.」

 

「작가는 어쩔 생각이라 하오?」

 

「그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즉시, 다시 칭찬을 얻겠다는 뜻에서라기보다 그에 따를 이익 때문에 인쇄로 넘기겠지요.」

 

 - 『돈키호테 2』 <4. 산초 판사가 학사 삼손 카라스코의 의문을 풀어 주고 질문에 대답한 내용, 그리고 알아 두고 이야기할 만한 다른 일들에 대하여> 중에서

 

 작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2부를 얼마나 긴밀하고도 흥미롭게 1부와 서로 엮어 놓았는지, 또한 1부에서 다뤘던 '두 번의 모험'을 통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겪은 온갖 흥미진진한 사건들과 그 밖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가 꾸미고 만들어 내놓지 못할 이야기가 없을 정도라고 느낀 독자들을 다시 한번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가 돈키호테 2부에서 얼마나 새롭고도 닮은 이야기들을 더욱 풍성하게 꺼내 놓았는지를 알게 되면 다시 한번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소설이 지닌 빼놓을 수 없는 매력 가운데 하나는 분명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불리는 '삽입 소설'을 읽는 데 있음도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물론 그 '삽입 소설'에 대해서 작가가 아무리 능청스럽고도 교묘하게 그걸 깎아내리는 것처럼 포장하면서 너스레를 떨더라도 말이다. 그 대목을 끌어들이는 작가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그 이야기의 결점 중 하나는······.」학사가 말했다. 그 이야기 안에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넣은 것이오. 이 이야기가 재미없다거나 내용이 엉망이라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들어갈 게 아닌 데다가 돈키호테 나리의 얘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지요.」

 

「내기를 걸어도 좋아요.」산초가 말했다. 「어떤 개자식이 양배추와 바구니를 섞어 놓은 겁니다요.」

 

「그렇다면······.」돈키호테가 말했다. 「내 이야기의 작가는 현자가 아니라 무식한 수다쟁이라는 말이군. 생각도 없이 어름어름하면서 그것을 썼다는 얘기요. 우베다의  화가 오르바네하가 했던 것처럼 말이오. 이 사람한테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지. 한번은 수탉을 그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못 그려 전혀 닮지가 않자 그림 옆에다 <이것은 수탉이다>라고 대문자로 써놓아야 했다는 거요. 내 이야기도 아마 이런 식인 게 틀림없을 것이니,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설명이 필요할 테지.」

 

「그런 건 아닙니다.」삼손이 대답했다. 「아주 분명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손으로 가지고 놀고, 젊은이들은 읽으며, 어른들은 이해하며, 노인들은 기린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다들 읽어 알고 있어서, 비루하고 비쩍 마른 말을 보기만 하면 누구나 <저기 로시난테가 간다> 하고 말할 정도죠. 그 책을 가장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시동들입니다. 『돈키호테』한 권쯤 놓여 있지 않은 주인집 응접실은 없는데, 누가 가져다 놓으면 다른 사람이 집어들지요. 누구는 덤벼들어 빼앗아 읽기도 하고 또 누구는 빌려 달라고 조르기도 한답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서 가장 재미있으며 가장 무해한 오락거리라는 겁니다. 책 어느 한 군데서도 기독교적이지 못한 생각이나 불순한 말을 찾아볼 수 없고, 그 비슷한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 『돈키호테2』, <3. 돈키호테, 산초 판사 그리고 삼손 카라스코 학사 사이에 있었던 우스꽝스러운 토론에 대하여> 중에서

 

소설 『돈키호테』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삽입 소설 가운데 내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이야기 또한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오비디우스로부터 얼마나 깊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세르반테스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라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시도 때도 없이 여러 차례 등장시키지만, 그 이야기에서만큼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속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케팔루스와 프로크리스에서 직접 끌어온 이야기임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의 정절'을 실험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과 아내가 모두 파멸하고 만다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바로 그 얘기이다.(돈키호테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가 '내가 추정한' 바로 이 내용을 주석에까지 달아놓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시공사'와 '열린책들' 모두 어떠한 주석도 없다. 이건 순전히 내 주장이다.)

 

근대 심리 소설의 효시라고도 불릴 정도로 흥미로운 이 <무모한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는 총 4부 52편에 이르는 '돈키호테 1부'에서도 무려 3편을 차지할 만큼 매우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게다가 작가는 편력 기사를 자처하는 돈키호테의 무모한 모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라고는 독자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과 우정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나 다름없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두 절친한 친구와 한 여자'를 등장시켜 꾸며놓은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교훈'을 던져준다.

 

······ 훌륭한 여자는 반짝이는 맑은 유리 거울 같지만, 그것에 닿는 어떠한 입김에도 흐려지게 마련이네. 정숙한 여인에게는 성스러운 유물을 다루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네. 그것들을 찬양하지만 만지지는 않는 것처럼 말일세. 훌륭한 여인은 마치 꽃과 장미가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소중히 하듯이 해야 하네. 그 정원의 주인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해야 하네. 멀리서 철책 사이로 그 향기와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전부지, 마지막으로 나의 뇌리를 스치는 시구를 들려주고 싶네. 이것은 어느 현대극에서 들은 것인데,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와 꼭 맞는 것 같네, 어느 신중한 노인이 젊은 아가씨의 아버지에게 딸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지키고 감추라고 충고하고 있었는데, 다른 말들 중에서도 그는 이런 말을 했네.

 

여자는 유리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시험하면 안 된다,

깨지는지 안 깨지는지.

모두 깨지고 말 테니.

 

깨지기는 쉽고

다시 붙일 수는 없으니

깨질 위험이 있는 곳에 두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일.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나에* 가 세상에 있다면

황금의 비 또한 있을 것이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의 어머니. 다나에가 낳을 아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운명 때문에 그녀는 탑 속에 갇히지만, 제우스가 황금의 비가 되어 들어와 그녀는 페르세우스를 낳았고 훗날 이 아이가 예언대로 할아버지를 죽인다.

 

 - 『돈키호테』, <33. 무모한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플로렌스라는 이름난 풍요로운 도시에 안셀모와 로타리오라는 두 기사가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이 <무모한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단편'으로 봐도 좋을 만큼 이야기가 완벽하고도 재미있다. 그런데 내가 읽은 '돈키호테 1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시공사에서 나온 『돈키호테』였는데, 이 절묘한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에서 딱 한 번 '번역이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무려 400년 전에 스페인어로 쓰여진 700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현대에 맞는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독자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번역해 놓은 부분은 번역자나 편집자 또한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을 듯한데, 그 부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문장을 가다듬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을 '1부'를 읽는 동안 내내 떨치기 어려웠다.

 

마침 『돈키호테』가 1부만 읽어서는 그 작품 전체를 온전히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1부만 다룬 돈키호테를 다 읽고 나서 (2부를 마저 읽기 위해) 또다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돈키호테』를 (2부만 사는 게 아니라)  1,2부를 모두 산다는 게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바로 이 '번역이 애매한 부분'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라도 나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를 두 권 모두 사들이는 데 조금도 망설일 게 없었다. 어쨌든 열린책들을 펼쳐보니 시공사에서 애매하게 번역한 부분이 아주 명쾌하게 번역되어 있어서 그점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 읽은 1부'를 새로 산 걸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번역이 애매하다고 느낀 부분'을 옮겨 놓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과연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별 문제도 아닌데...' 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어쨌든 나는 그 부분을 읽는 데 애를 좀 많이 먹었다. 물론 문맥상 '잘못 번역된 부분'이 어떤 뜻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판단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절친한 두 친구 가운데 로타리오가 한 이 말(인용문)은 물론 '결혼한 안셀모'가 자신의 아내의 정절을 시험해 달라고 친구인 로타리오에게 부탁하는 말에 뒤이어 나오는 장면이다. 물론 안셀모의 '제안' 또한 얼핏 들으면 구구절절 옳은 말처럼 들린다. 안셀모의 '이상한 제안'도 매우 길게 이어지지만 '도입부'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친구, 나를 괴롭히는 소망은 내 아내 카밀라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 착하고 완벽한 여인인지 알고 싶다는 거라네. 불꽃으로 금의 순도를 증명하듯이 아내의 정숙함을 확인할 만한 시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네. ······"

 

"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내게 한 말들을 농담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면 계속 말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네. 자네가 나를 모르거나 내가 자네를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네. 하지만 그럴 까닭이 없잖은가. 자네가 안셀모라는 걸 알고, 자네는 내가 로타리오라는 걸 잘 알지 않나. 문제는 나는 자네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네 또한 나를 평소의 로타리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네. 자네가 나에게 말한 것들이 나의 친구 안셀모의 말이 아니고, 나에게 부탁한 것들도 자네가 알고 있는 그 로타리오에게 청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 어느 시인도 노래했듯이, 절친한 친구 사이를 시험하거나 우정을 평가할 때에는 반드시 '제단까지만'으로 한정해야 하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할 만한 일에 우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길세. 우정에 대해 이교도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하물며 기독교인이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신성한 우정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친구에 대한 우정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멀리하면서까지 그 신성한 우정을 포기하는 건 친구의 명예와 생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지, 이렇게 하찮고 아주 순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네. 자, 안셀모. 자네가 나에게 말해주게. 지금 말한 이 두 가지 중 무엇 때문에 내가 자네를 기쁘게 하고, 자네가 청하는 그토록 증오스러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네. 내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이 일이 내가 자네의 명예와 생명을 빼앗고, 게다가 나의 것마저 빼앗을 걸세. 내가 만일 자네의 명예를 빼앗기 위해 애써야 한다면, 내가 자네의 생명을 빼앗게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네. 명예를 잃어버린 인간은 시체보다 못하지 않나. 그래서 자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자네를 이토록 나쁜 상황에 빠뜨리는 도구가 된다면, 나 역시도 불명예스럽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나? 잘 듣게, 나의 친구 안셀모. 자네가 소망하는 일들에 대해서 내가 자네에게 해줄 말을 끝마칠 때까지 묵묵히 들어주게나. 자네가 내게 반박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고 그 말을 경청할 테니 말이네." (448∼449쪽)

 

* 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한 말로, 친구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만 아니라면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시공사판 『돈키호테』

 

 

「오, 내 친구 안셀모! 자네가 한 말이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네. 정말 그런 말을 자네가 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군.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계속 지껄이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걸세. 자네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그 긴 사설을 멈추게 했겠지. 내가 보기에 이건 아무래도 자네가 나를 모르거나 내가 자네를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네. 하지만 그건 아니잖은가. 나는 자네가 안셀모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자네는 자네대로 내가 로타리오라는 것을 알고 있잖은가. 문제는 내가 자네를 평소의 안셀모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네 역시 내가 여느 때의 로타리오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네. 왜냐하면 자네가 한 말은 내 친구 그 안셀모의 말이 아니고, 자네가 부탁한 일은 자네가 알고 있는 그 로타리오에게 부탁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 말일세. 좋은 친구라면,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제단 밑으로까지 친구를 시험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되네.278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에 우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이교도조차 우정을 이렇게 느꼈으니, 기독교인이 인간적인 우정 때문에 신과의 우정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더 훌륭한 일이겠는가?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나 몰라라 한 채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할 정도가 되려면 일시적이고 가벼운 일이 아니라 친구의 명예와 목숨이 달린 일이어야 한다네. 그러니 말해 보게 안셀모, 내가 자네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네가 요구한 것처럼 그렇게 혐오스러운 일을 해야 할 만큼 자네의 명예와 목숨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겐가? 분명 둘 다 아닐세. 오히려 내가 보건대, 자네는 내가 자네의 명예와 목숨을 빼앗고 내 것도 같이 빼앗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네. 자네가 요구한 그 일로 내가 자네의 명예를 실추시키면 그것은 곧 자네의 목숨을 빼앗는 일임이 분명한데, 명예를 잃어버린 인간은 죽은 자보다 못한 법이니 말일세. 또한 자네가 원하듯이 내가 자네를 엄청난 불행에 빠뜨리는 도구가 된다면 나 역시 불명예스럽게 남겨져 결국 죽은 사람과 같지 않겠는가? 친구 안셀모여, 욕망 때문에 자네가 저지르려는 일에 대해 내게 떠오른 생각들을 다 말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들어 주게. 자네가 내게 반박할 시간과 내가 그것을 들을 시간은 있을 테니 말일세.」(509∼510쪽)

 

278 플루타르코스Plutarkhos(50∼120)에 의하면 그리스 정치가인 페리클레스Pericles(B.C.495∼B.C.429)가 친구로부터 거짓 증언을 부탁받았을 때 이 말을 하여 거절했다고 한다.

 

 - 열린책들, 『돈키호테 1』

 

이쯤에서 나는 다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만나러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으로 서둘러 되돌아가야겠다. 마침 돈키호테는 이번 모험에서 '기쁨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다. 진짜로 공작 부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편력 기사들의 꽃이자 정수이신 분이시여,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그들 모두, 아니 거의 대부분이 돈키호테와 공작 부부 위에다 병에 든 향수를 뿌렸다. 이 모든 것이 돈키호테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은 그는 자신이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진짜 편력 기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전적으로 실감하고 믿게 되었다. 책에서 읽은 지난 세기의 편력 기사들이 받은 것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돈키호테의 모험은 아직도 나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 *

 

 

 

 

 

 

 

 

 

 

 

 

 

 

 

 

 

 

 

 

 

 

 

 

 

 

 

 

 



 
 
 

 

 

희망

희망을 그렇게도 강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래가 동시에 여러 형태로,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동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역주) 여기서 희망을 논하는 것은 다음의 기쁨과 슬픔, 특히 기쁨을 그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미래가 필연적 진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게 열려 있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철학이므로, 그런 무한한 가능성이 현재에 대해 제공하는 그낌 자체가 바로 희망이며, 그것은 무한이 인간에 주는 말하자면 <계시>이다. 빠스깔적 무한의 은총이 베르크손에게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 * *

 

새해의 첫 날 오후에, 벌써 아득한 심연 속으로 까마득히 묻히고 만 '지난 한 해'를 다시 되돌아보는 게 무슨 소용일까마는, 정초의 마음가짐이라는 게 늘 '작년보다는 올해가 좀 더 나으리라'는 밑도 끝도 없는 낙관과 굳건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깊게 들이마시는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한 번쯤 지난 세월로부터 새롭게 열릴 나날에 대한 희망을 슬쩍 엿보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2014년이 비록 '세월호'와 함께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끝없는 심연 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을 아직도 여전히 떨칠 수 없지만, 그래서 '그날' 이전과 이후가 이토록 극명하게 우리들 마음속에 뚜렷한 구분을 낳은 적이 있었나 싶다가도, 조금만 더 멀리 되돌아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보다 더한 아픔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겪으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마침 올해가 남북이 분단된지 70년째 되는 해라고 하니, 무려 수만 년을 함께 살아온 동족들이라 하더라도 그걸 하루 아침에 70년은 너끈히 버텨낼 만큼 확고하게 갈라놓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싶은 의문도 든다.

 

영화 한 편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비록 나보다 한 세대쯤 앞선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겪었던 삶이라 하더라도, 휴전협정을 맺은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땅에 태어난 내가 부모 세대를 왜 모르겠는가. 영화 '국제시장' 얘기다. 내 얘기가 갑자기 너무 먼 과거로 달아날까 두렵다. 그래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문득 지난 여름 휴가때 독일 뮌헨에서 우연히 만났던 '파독 광부' 출신 교민 한 분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서 그 얘기를 조금만 덧붙이고 싶다. 그분은 52년 전에 한국인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파독 광부'로 독일에 건너와 광부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독일에서 대학까지 나와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을 경영할 정도로 크게 성공하신 분이었다. 한때 '뮌헨 한인회장'도 맡으셨고,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뮌헨 시내에서 최고로 꼽히는 '한국음식점'을 운영하시며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살고 계셨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로 건너 오신 곱게 늙으신 사모님과 함께. 비록 우리와는 이틀 밖에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둘째 날 밤이 늦도록 독일 맥주와 한국 소주를 함께 마시며 서로 어깨를 걸고 '흘러간 옛노래'를 함께 부를 때, 고국과 고향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 때문에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슬픔에 젖어 눈시울을 계속 붉히시던 그 슬픈 눈과 눈물을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났더니 문득 그 할아버지와 그때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던 게 더욱 아쉽다. 아마 그 할아버지도 머지않아 틀림없이 그 영화를 보시며 많은 눈물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리라 믿는다. 그 분에게도 아직까지 간절한 희망은 남아 있었다. 그건 꿈에서조차 결코 잊지 못하는 '고국'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었다. 비록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 4월 어느 봄날, 여느해와 다름없이 벚꽃이 만개했다.

Shooting Date/Time 2014-04-06 오후 1:11:29

 

아직도 봄날~

 

 

 - 변산의 봄

Shooting Date/Time 2014-05-01 오후 12:44:58

 

변산, 내소사, 곰소 염전, 격포, 성주사지 등

 

 

 - 꽃이 슬프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절실하게 느꼈었다.

Shooting Date/Time 2014-05-06 오후 3:14:44

 

꽃들이 너무 아프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브뤼셀의 '그랑쁠라스'의 야경

Shooting Date/Time 2014-07-09 오전 5:41:51(한국시간)

 

 

 -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의 비 내리는 오후 풍경

Shooting Date/Time 2014-07-15 오전 1:58:59

 

 

 - 파독 광부로 52년째 독일에서 살아온 민사장님과 함께

Shooting Date/Time 2014-07-17 오전 3:57:35

 

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 어느 황홀했던 여름 저녁

Shooting Date/Time 2014-08-01 오후 7:49:16

 

 

 -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던 여름밤

Shooting Date/Time 2014-08-01 오후 8:18:24

 

One summer night

 

 

 - 불타는 억새

Shooting Date/Time 2014-10-03 오후 6:05:15

 

억새에 불붙다.

 

 

 -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섬 홍도의 아침

Shooting Date/Time 2014-10-26 오전 9:01:20

 

홍도·흑산도 2박3일_첫째 날

 

 

 - 단풍이 무척이나 고왔던 화창한 어느 가을

Shooting Date/Time 2014-11-01 오후 12:14:57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가을

 

 

 

 



 
 
cyrus 2015-01-01 19:41   댓글달기 | URL
작년 사계절 풍경이 아름다워요. 벌써부터 이런 멋진 풍경들이 그리워집니다.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느새 여름이겠죠? ^^;;

oren 2015-01-01 19:51   URL
사계절이 있어서 늘 천변만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게 언제나 즐겁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겨울은 너무 혹독하고도 너무 길다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요.^^

yamoo 2015-01-01 20:37   댓글달기 | URL
환상적인 사진 잘 봤습니다. 풍성한 한 해 였네요. 오렌님의 유럽 사진들이 무척 부럽게 다가옵니다. ㅎㅎ
작년 한 해 오렌님의 글과 댓글로 생각의 지평을 넓혔던 거 같습니다. 주옥같은 글들 감사합니다.

오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5-01-02 12:05   URL
사진으로만 보면 썩 괜찮았던 한 해였는지 몰라도, 그 나머지들을 살펴보면 그리 좋았던 한 해는 아니었지 싶어요. ㅎㅎ 그래서 저 또한 작년 보다는 올해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요.

야무 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커다란 행운이 함께 하길 빕니다~

보슬비 2015-01-01 22:11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사진들이 많은데, 그 중 고르시느라 더 힘드셨겠어요. ^^
그렇지 않아도 오늘 `우리 삶이 침이 된다면`을 보면서 멋진 사진들에 감탄했는데, oren님께서 올려주신 사진들을 보니 너무 멋져서 배경사진으로 담아두었어요. 덕분에 행복한 한해를 시작하게 된것 같습니다.

2015년에도 부탁드립니다.~~~ ^^

oren 2015-01-02 12:07   URL
보슬비 님 안녕하세요? 저도 <우리의 삶이 춤이 된다면>이라는 책 봤어요. 정말 멋진 사진들로 가득하더라구요. 거기에 비하면 제가 찍은 사진들은 볼품 없지만 그래도 제 나름으로는 열심히 찍고 있답니다.

보슬비 님도 2015년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빌께요~

pek0501 2015-01-02 15:09   댓글달기 | URL
다 좋지만,
두 번째 사진이 가장 맘에 듭니다.
푸른 나무들을 볼 수 있는 여름의 매력이 느껴집니다.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축하드리며
올해 2015년에도 님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

oren 2015-01-02 15:24   URL
아... 저때가 5월 1일이었어요. 온 산이 푸른 나뭇잎으로 우거져 말할 수 없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던 때였죠. `청춘`이라는 말과 `신록`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음미하면서 산길을 걷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pek 님도 올 한해 내내 건강하시고, 또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