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

 -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중에서

 

 * * *

 

 

로맹 가리의 전기를 읽기 전부터 나는 줄곧 어떤 '슬픈 결말'을 생각했다. 내가 이 소설가와 처음으로 마주친 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펼칠 때였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은 어쨌든 '깊은 상처'부터 먼저 떠올리고 보는 식이었다. 나는 그 가슴이 아린 소설을 읽고 나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칼로 베인 듯 욱신거렸고, 그저 먹먹하고 우울한 기분을 좀처럼 달랠 수 없었다.

 

나도 가마우지를 본 적이 있었다. 열두 해 전쯤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 구이린(桂林)에 갔을 때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그저 그 새가 물고기잡이 선수인 줄로만 알았지, 모가지가 길어서 그토록 슬픈 짐승인 줄은 차마 몰랐다. 더구나 그 새들이 인간들을 위해 평생 물고기를 잡고, 자신의 분뇨마저 비료로 쓸 수 있게 만든 다음 '페루에 가서' 죽는 줄은 더더욱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새들이 어떻게 하면 하늘을 잘 날아다닐까를 고민할 때 가마우지는 그와 반대로 어떻게 하면 잘 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그 새는 날개 근육을 퇴화시켜 버렸고, 납처럼 무거워진 몸과 짧아진 날개로 잠수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 경탄할 만한 물고기잡이 새를 인간이 그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그럴 리는 없었다.

 

'가늘고 긴 내 목에는 / 이미 노끈이 조여져 / 그 고기 결코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한다 / 이때 어부는 재빨리 줄을 당겨 / 내 목에 걸린 고기를 뽑아 바구니에 담는다 / 나는 또 빈털터리가 되어 / 막막한 바다 위로 내던져진다'

 

어느 시인이 쓴 「슬픈 가마우지의 노래」일부다. 이제 가마우지를 떠올리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끝내 '목구멍'으로 삼키지 못하는 무서운 절망과 그 해소하지 못하는 욕망 너머에 자리잡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 때문에 도리어 내 목부터 먼저 메일 듯하다.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새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모여드는 곳이 페루 해안이다. 그 바다에 몸을 던지려 찾아온 여인은 불감증으로 고통받는다. '그녀는 몇 살일까. 스물한 살, 스물두 살? 리마에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텐데, 아버지나 남편은 있을까?'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는 바닷가에서, 그것도 도로에서 백 미터나 떨어진 모래 언덕에 세워진 카페에서 홀로 사는 남자가 그녀를 발견한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그날의 첫 담배를 피우면서 모래 위에 떨어져 있는 새들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인 마흔일곱의 자크 레니에는 바다에 뛰어든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몇 미터만 더 갔으면 물결에 휩쓸려갔을 거요. 이곳 파도는 몹시 사납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린아이를 연상시켰다. 사랑의 슬픔이군, 하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문제는 실연의 아픔이지.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어떻게 이 소설가는 그토록 짧은 소설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휘저어 놓을 수 있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경이로운 소설 하나를 읽고 나니 작가가 어느새 나처럼 무딘 독자조차 그냥 놔두질 않는다. 언제부턴가 소설과는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한 나는 서둘러 오래 전에 사 둔 에밀 아자르의『자기 앞의 생』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한동안 그 소설의 여운에 휩싸였다. 한동안 '모모'를 계속 떠올렸다. 내가 오래 전에 라디오로 줄기차게 들었던 그 노래와 함께. 삼십칠 년 전에 나온 그 '모모'라는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한 그 모모라니.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 짓하며,
날아가는 니스(Nice. 프랑스 도시)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김만준, 『모모』(1978년)

 

그리고 다시 작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로맹 가리』를 읽었다. 어쨌든 내겐 그 작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도대체 그 작가는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소설들을 써 냈고, 또 그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도 끝내 뭔가를 채우지 못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그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슬피 마무리하고 말았단 말인가. 어쨌든 이 두툼한 책이라면 그런 의문들은 말끔히 해소될 터였다.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로맹 가리의 전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었다. 더 이상 로맹 가리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로맹 가리에 대해 정말 너무나 세세하고 자세한 설명을 끊임없이 쏟아내 놓는 바람에 하마터면 독자가 먼저 '로맹 가리'에 물릴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특히 여느 독자들이라면 별 관심을 쏟을 이유가 없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곁다리 설명들을 덧붙여 놓는 데는 질릴 정도였다.

 

로맹 가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혹은 그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던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응당 그런 설명들이 몹시 흡족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저 그의 작품이 좋고, 그의 삶이 작품만큼이나 궁금했던 나같은 평범한 독자로서는 너무 디테일한 설명들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한 작가의 일생을 다룬 평전이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결핍이나 생략은 찾아보기 힘든 반면 과잉이 줄곧 넘치는 설명들이 꼭 필요할까 싶었다. 확실히 사람을 좀 지치게 만드는 구석이 적지 않았다. 그토록 세세한 설명들을 대략 절반쯤만 줄였더라도 얼마나 더 만족스런 걸음걸이로 이 소설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까 싶은 아쉬움을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 책은 좋았다. 그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이토록 '충분한 설명'으로 독자들에게 내놓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전기 작가이자 소설가인 보미니크 보나는 매력적인 글솜씨로 '로맹 가리의 작품과 삶'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매우 잘 되살려냈다.

 

어쨌든 로맹 가리의 소설같은 삶을 글로 쓰자면 제법 많은 지면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의 일생은 태생부터 죽음까지 늘 드라마틱한 삶의 연속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해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곧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상이 오로지 '둘만' 전쟁터에 내던져 놓은 듯한 환경에서도, 로맹 카체브의 어머니인 니나는 아들을 끔찍히 돌보고 감싸며 키워냈다.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간난신고를 다 헤쳐 나갔다. 오로지 어린 아들 하나의 '눈부신 장래'를 위해 그녀는 전쟁의 소용돌이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러시아를 벗어날 결심을 한다. 로맹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나 리투아니아로 이주했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정착했다가 기어코 프랑스의 변방, 가난한 이민자들이 잔뜩 모여 사는 니스에 터를 잡는다. 세 살때 모스크바를 떠난 로맹 가리는 그러는 사이에 열세 살이 되었다.

 

너무도 음울하고 고통스런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타 영화 배우'였던 아버지뻘 나이의 이반 모주힌을 스스로 아버지로 여기는 마법을 건다. 어쨌든 둘의 외모는 놀라울 만치 서로 닮았다.

 

 

동양적 얼굴과 맑은 눈, 흑갈색 피부, 눈썹, 툭 벌거진 광대뼈, 넓고 둥근 이마. 둘 다 슬라브계 아시아인 같은 외모와 맑은 눈 때문에, 금기시된 관계 혹은 야만적인 결합, 바이킹의 강간이나 집시의 통정이 떠오르는 동유럽의 혼혈을 드러냈다. 둘 다 건장한 체격과 볕에 그을린 듯한 얼굴빛으로, 중세 때 러시아 국가들을 지배 아래 두었던 칭기즈 칸이나 티무르 군대의 타타르 전사들을 연상시켰다.

 

문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프랑스어 과목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한다.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투고를 거듭한 끝에 1935년에 유력 문학 주간지에 그의 첫 작품「폭풍우」가 실리는 '첫 성공'을 거둔다. 비행사를 꿈꾸며 장교 양성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아마도 '토박이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귀화한 지도 오래 되지 못한 신분 탓에- 장교로 임관하는 데 실패한 그는 하사로 전쟁을 맞는다. 1940년에 자원 입대한 그가 오랜 훈련과 배속 부대를 전전한 끝에 폭탄 투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건 1943년이 되어서였다. 아프리카를 떠나 런던에 주둔할 때 로맹 카체브는 전쟁 중에 사용할 이름 하나를 고른다. 그때부터 그는 '가리(Gary)'라 불리게 된다.

 

'전쟁은 의무인 동시에,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에게 용기와 의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본능보다는 의지에 기초한 그의 영웅주의는 인내력과 도전 정신, 미래에 대한 계획의 혼합물로 보인다.' 1943년 11월, 전투기 '보스턴'에 오른 탑승 대원들은 심각한 총상을 입고도 '눈먼 조종사'와 함께 영웅적으로 '폭격 임무'를 완수한다. 대공포에 맞아 훼손된 조종석 뚜껑이 열리지 않아 낙하산 탈출 조차 불가능해진 그들은 놀라운 침착성과 동료애를 발휘해 전원 무사히 귀환한다. '눈먼 착륙'까지 성공했던 것이다!

 

마침내 중위가 된 로맹은 샤를 드골이 서명한 '해방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메달만이 그의 유일한 명예도 아니었다. 그가 전쟁의 폭풍 속에서도 끊임없이 글쓰기에 매달린 끝에 1944년에 완성한 『유럽의 교육』이 영국에서 영어로 출간된 것이다. 젊은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그는 이듬해인 1945년에 이 작품으로 비평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가 서른 살에 접어든 1944년에는 일곱 살 연상의 레슬리 블랜치와 결혼했고, 2차 대전이 마무리된 1945년에는 샤를 드골이 직접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그해에 그는 이등 대사 서기관으로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61년(47세)에 외교관 직을 포기할 때까지 17년 동안이나 외교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그 기간 동안 불가리아 소피아와 스위스 베른, 미국 워싱턴과 볼리비아 라파스를 거쳐 마침내 헐리우드까지 진출한다. 그가 미국 영사로 발령받으면서 로스앤젤레스에서 근무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외교관으로서 LA에 진출한 지 4년 만인 1959년, 그는 영화배우 진 시버그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녀는 스물하나, 그는 마흔다섯이었다.' 프랑스 남자와 갓 결혼한 그녀는 그때 이미 가리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사강 원작의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에서는 세실 역을 했고, 얼마 전에 고다르의 지도 아래 장 폴 벨몽도와 함께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 촬영을 마친 참이었다.'

 

이 둘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마도 이 책을 쓴 작가의 '소설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목임에 틀림없지 싶다. 어떤 시간과 어떤 장소든 남자와 여자 사이를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은 그 누구도 거역하기 어려운가 보다. 도미니크 보나는 이 두 사람만이 직감했을 첫 만남에서의 강렬함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랑에 빠진 두 유부남의 불같은 사랑뿐만 아니라, 특히 로맹 가리에게는 여러모로 아주 잘 어울리는 아내였던 레슬리 블랜치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정말 놀라우리만치 멋지게 '설명'해 낸다.

 

프랑수아 모뢰이(진 시버그의 남편)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토대로 직접 시나리오를 쓴 영화를 찍기 위해 파리로 돌아갔다. "집사람을 부탁합니다." 그는 프랑스 영사에게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다.

 

레슬리 블랜치는 눈을 감아준다. 하지만 진이 영사관으로 로맹을 찾아오면 "저 여자가 여긴 또 뭐 하러 온 거야?"라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바람도 그야말로 바람처럼 곧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레슬리는 내심 깊이 사랑하는 가리에게 집착했다. 그래서 그를 지키기 위해 타협책을 받아들인다. 남편을 아기처럼 품고 있다가도 여행을 하고픈 욕망이 일면 즉시 팽개쳐버렸고, 그의 자유를 구속하기에는 그녀 자신이 자신만의 자유를 너무 소중히 여겼다. 그가 그녀의 여행을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의 부정을 눈감아주려 했다. 지혜와 아량으로 결국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하며.

 

이후로 길고도 충분하게 계속 이어지는 '새로운 커플' 혹은 '오래된 커플' 사이에 오가는 끊임없는 흥분과 긴장과 설렘과 아슬아슬함들은 매 페이지마다 '영화보다 더한 현실'을 실감나게 마주치게 만든다. 비록 오래 되었다 싶지만 그래도 충분히 오랫동안 유효할 수 있는 관계의 '불가피한 해체'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피할 길 없는 '필연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들 앞에서, 이들이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들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였는지를 알고 나면, 소설가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로맹 가리'를 보다 뚜렷하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게 된다.

 

가리는 함께 살기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성깔을 부렸다. 시도 때도 없이 불안에 시달리고 의심의 악마를 달고 다녔다. 그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세상의 광경은 늘 그에게 따뜻한 애정보다는 냉소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여자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최악의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가 글을 쓸 때는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많이 썼다. 매일 아침, 컨디션이 좋건 나쁘건, 건강하건 병이 들었건, 쾌활하건 슬프건 아니면 외적인 근심에 시달리건 한결같이 글을 썼다. 진의 미소도, 어리광도, 앙탈도 그가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부과한, 그에게는 예술인 동시에 치료인 메트로놈의 리듬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

하지만 그녀는 개미처럼 집요하게 요새를 공격했다. 그들의 사랑을 합법화하도록 로맹을 쉴 새 없이 볶아댔다. 로맹이 자신과 결혼하기를, 그들의 결합을 공식화하기를 원했다.

 

레슬리는 물러서기를 끈질기게 거부했다. 자신을 법적인 아내로 남아 있게 해준다면 불륜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며, 로맹에게 역공작을 펼친다.

 

진은 아이를 간절히 원한다. 로맹 역시. 레슬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터였다. 로맹과 결혼한 지 십칠 년째 되는 해, 진의 임신 소식을 로맹에게 전해 들은 레슬리는 결국 이혼을 받아들인다.

 

이 책의 장점 하나는 명백히 전기 작가 특유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로맹 가리의 작품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작가 내면에 대한 깊숙한 탐구'에서 찾을 수 있지 싶다. 나는 고작 그의 작품을 두 권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쓴 대표적인 작품들조차 제목만 겨우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두 권의 소설을 읽고 내가 받았던 강렬한 인상에 더해, 이 전기 작가가 쓴 『로맹 가리』를 읽고 나니 그의 여러 작품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얼개는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도미니크 보나는 로맹 가리의 여러 작품 속에 담긴 다양한 문장들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면서 작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 일이라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저 이상한 새들>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특히 많은 도움이 된다. 로맹 가리가 같은 이름으로 제작했던 영화가 왜 실패했으며, 그 작품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진 시버그는 그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어떤 고충을 겪었고, 프랑스 검열위원회는 왜 그 영화를 상영 금지했는지 등등...

 

 

 

<여자와 여행>은 그가 글쓰기에 더해 그것 말고 또다른 삶의 즐거움을 줄곧 어디에서 찾았던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일 년 내내 마요르카, 말레이시아 또는 모리스 섬의 태양에 그을려, 나이가 들면서 야위고 곧고 건장한 앤서니 퀸을 점점 더 닮아가는 로맹 가리는 가공의 조상 타타르인들의 과거와 다시 연결된다. 그 역시 자신의 보물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닌다. 또다시 유목민 혹은 떠돌이 광대가 된 그는 종종 가방도 꾸리지 않은 채, 몽골족이 초원의 말을 타고 다니듯 비행기를 이용해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닌다.

 

"늘 다른 곳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겠어. 뭔가가,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그게 존재한다면 찾아다니면 돼." 가리는 프랑수아 봉디에게 말한다.

 

가리는 공들여 이루어낸 영광 속에 안주하기보다는, 떠나려는 욕망에 떠밀려 고독한 모험가의 또다른 삶을 창조해낸다. 비행기는 그에게 오랜 길동무였다. 정기선이든 전세기든, 비행기를 타고 창공을 날 때면, 그는 조금씩 젊어졌다.

 

쉰일곱 살의 작가는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까지, 모든 유럽 언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본어, 그리스어로까지 번역된 그의 소설 열다섯 편은 세계 어느 나라의 도서관에나 꽂혀 있었다. 로맹 가리는 끊임없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신화를 유지하는 범세계적인 소명을 가진 작가였다. 여행은 무엇보다 부르주아적인 파리 7구의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날아날 수 있게, 문단을 호령하는 베테랑 문인의 포즈 속에 굳어버리지 않게 도와준다.

 

로맹 역시 다른 만남을 통해 그녀(진 시버그)로부터 달아난다. 늘 실망과 욕구 불만에 싸여 되돌아오기는 하지만. 그는 로베르 갈리마르에게 그 여자들 중 하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천상 여자였어. 기껏 베네치아에 데려갔더니 날 산 마르코 광장에 내버려두고 옷가지를 사러 가버리더군······" 유행을 좇는 멋쟁이 아가씨, 양갓집 규수, 기자, 대학생, 오며 가며 유혹한 여자들은 그의 꿈 깊은 곳에서 그의 모든 소설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운명적인 사랑의 대용품일 뿐이다.

 

로맹 가리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은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작가로 데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60세의 나이에 그 새로운 이름으로 『그로 칼랭』('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자기 앞의 생』이라는 놀라운 소설을 발표해서 프랑스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이 젊은 작가는 데뷔 2년 만에 공쿠르 상을 거머쥐게 된다. 물론 로맹 가리는 익명의 작가인 '에밀 아자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파리의 소식통들은 『자기 앞의 생』이 문학상을 수상할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인 미셀 트루니에는 시몬 갈리마르를 찾아와, 자신과 몇몇 동료들이 에밀 아자르에게 상을 주고 싶어하는데,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저자가 정말 존재하는지, 다시 말해 아자르가 위장 필명이 아닌지를 확인해두고 싶어한다고 털어놓는다. 시몬 갈리마르는 솔직하게, 자신은 아자르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미셸 쿠르노가 제네바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따라서 살과 뼈로 된 아자르라는 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대답한다. 로맹 가리도 이 대화를 전해 듣긴 하지만, 자신의 인형이 문학상 경주에 휩쓸리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이렇게 해서 아자르는 파트릭 모디아노(『슬픈 빌라』), 크리스티앙 샤리에르(『하늘의 과수원』), 피에르 장 레미(『삶을 꿈꾸다』)와 함께 공쿠르상 수상 후보자들 중에 끼게 된다.

 

 

 

에밀 아자르는 갑작스레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로맹 가리는 결국 자신의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로 내세울 수밖에 없게 된다. 로맹의 조카는 그 역을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 완벽하게 해 낸다. 나중에는 그 자신이 진짜 에밀 아자르인 줄 착각할 정도로.

 

로맹 가리가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네 권의 소설을 펴냈을 때, 그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는 그가 직접 쓴-그리고 권총 자살 이후에 발견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짧은 글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열렬한 포옹』에서 로맹 가리의 목소리를 읽어낸 평론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자기 앞의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 작품에는 『유럽의 교육』『커다란 탈의실』『새벽의 약속』에서와 정확히 일치하는 감수성, 문장과 표현, 인물들이 나온다. 『쳉기스 콘의 춤』을 읽어보면, 『자기 앞의 생』의 작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 아자르는 이미『튤립』에 나온다. 그러나 소위 '평론가'들 중에 누가 그것을 읽어냈는가?

 

내가 얼마나 통쾌했을지 상상해보시라. 나의 작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이었다. 이런 나의 경험은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작가의 사후에나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작가는 그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이상 아무도 신경쓸 일이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받아 마땅한 몫을 돌려받게 되니까.

 

로맹 가리의 말은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이미 했던 말이어서 특히 내겐 인상적이다.("실질적인 이익도 되지 않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행하고 있는 자는 동시대인의 관심을 얻으려고 기대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대개 그러는 동안에 그러한 일들의 표면적인 것이 세상에서 행하여지게 되고 성황을 이루게 됨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일반사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일이든 일 그 자체는 그 자신을 위해서도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성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혹종의 의도를 갖는다는 것은 이해를 그르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문학사라는 좋은 증거가 보여 주듯, 가치 있는 것은 모두 그것이 인정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요한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2판 머리말 중에서)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시간은 정말 끔찍해. 아기 바다표범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놈들처럼, 시간은 산 채로 당신 피부를 조금씩 벗겨내지." 로맹 가리는 나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맹은 늙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어요." 그보다 연상인 레슬리 블랜치는 설명한다. "나이 사십에 벌써 자기가 늙어버렸다고, 끝장났다고 믿었죠······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레슬리,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당신 나이 생각을 전혀 안 해?' 늙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로맹의 경우, 그것은 하나의 강박관념이었죠."

 

실제로 가리는 시드는 것, 약해지는 것, 또는 추해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미리부터 그것을 두려워했다.

 

이미 진 시버그의 끔찍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가리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그에게는 -이미 그녀와 이혼한 지 11년이나 지났어도- 몹시도 사랑했던 그녀의 자살이 그를 절망시킨 게 분명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은 벼락과 같았다.'

 

그에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완성했다고 판단한 여정의 종착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진 시버그가 죽은 지 1년쯤 지난 때였다. 진 시버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나중에 밝힌 이유도 로맹 가리의 특수성에 비춰 보면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더이상 건설할 것도, 말할 것도, 할 것도 없다고 여기셨어요. 당신의 작품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진행중인 소설이 단 한 편도 없었죠. ··· 그래서 떠나신 겁니다."

 

그는 침대 발치에 남긴 마지막 편지 한 장에서도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왜? 해답은 아마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인 '밤은 고요하리라'와,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구절인 '더 잘 말할 수 없기 때문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좌절의 흔적'을 남기는 걸 한사코 거부했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미리 써 놓았던『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도 '자기 삶의 더없이 명철한 주인으로서의 자세'를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는 그 글을 쓴 날자와 자신의 서명 바로 위, 그러니까 미리 써 놓은 '고별사'의 마지막 줄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한바탕 잘 놀았소. 고마웠소. 그럼 안녕히.

 

삶 자체가 이야기가 된 남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언젠가 문득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오뒷세우스를 아주 잠깐 떠올렸었다. 비록 둘은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았지만 '경력과 취향'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공통점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둘 다 군인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전쟁터를 누볐고, 둘 다 혁혁한 무공을 쌓았다. 그리고 둘 다 훌륭한 외교관이었고 언변에 몹시도 능한 달변가였다. 그리고 둘 다 일생 동안 남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들과 어울렸고, 수많은 도시들을 떠돌아 다녔다.

 

이들 둘 사이의 공통점이 이렇게도 많지만 이 두 인물은 좀처럼 오버랩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찾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로맹 가리에게만 특별하게 내재된 러시아계 특유의 우울과 슬라브계 특유의 집시와 같은 방랑성과 유대계 특유의 강박관념 등에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어쨌든 온갖 장르가 뒤섞인 '분류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내가 『로맹 가리』를 읽으며 두어 차례 떠올린 음악이 있었다면 그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었다. 몹시도 아름다운 듯하지만 고통이 사무치게 느껴지며, 힘찬 행진이 펼쳐지다가도 비장하게 뒤바뀌고,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베어 있는, 끝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불빛 만큼은 더없이 찬란한 듯한, 그런 슬픔과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겹쳐지는 선율이 아마도 로맹 가리에게는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이 잠깐씩 내게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나도 이제는 로맹 가리에 대해 '많은 설명'을 들었다. 이젠 그가 남긴 빛나는 소설들을 틈나는 대로 더 읽는 일만 남았다. 그의 소설은 이왕이면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할 때 읽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로맹 가리에게 오랜 길동무였던 비행기를 타고 창공을 날 때면 그의 소설이 내게 훨씬 더 아름답게 반짝이며 매혹적으로 다가올 지도 모를 테니까.

 

 

 

 

 * * *

 

 

 

 

 

 

 

 

 

 

 

 

 

 

 

 

 

 

 

 

 

 

 

 

 

 

 

 

 

 

 

 

 

 

 

 

 

 

 

 

 

 

 

 

 

 



 
 
Stella.K 2015-02-16 13:04   댓글달기 | URL
와우, 대단하십니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도 아주 오래 전 <자기 앞의 생>을 읽고 그 감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거의 다 잊었지만, 로맹 가리는 최근 많이 회자된 인물이라
언제고 이 사람의 작품을 독파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렌님의 글을 읽으니 정말 감동입니다.ㅠ
언제고 이 사람의 글을 독파하면 저도 오늘 오렌님과 같은 글을 쓰겠노라고 다짐했는데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님의 글에 경의를 표합니다.^^

oren 2015-02-16 13:37   URL
<자기 앞의 생>은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는 기분이 들더군요. 로맹 가리나 생텍쥐페리나 둘 다 `비행기`를 좋아했던 공통점도 있고 말이지요.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파리에 처음 갔을 때 이틀 동안 묵었던 호텔도 다시금 생각나더군요. 그 호텔 로비에는 낡은 비행기가 한 대 들어 앉아 있었는데, 알고 보니 생텍쥐페리가 즐겨 찾았던 호텔이라고 하더군요.

로맹 가리가 쓴 소설도 재미있지만, 그런 멋진 소설들을 쓴 작가를 다룬『로맹 가리』도 흥미로운 책이니 Stella.K 님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래요~

cyrus 2015-02-16 17:23   댓글달기 | URL
전작 독서를 깊이하지 않으면 이런 글이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로맹 가리 소설들 중에 <자기 앞의 생>만 읽었어요. 다른 소설들도 읽어볼 생각만 했지 늘 다른 책들 보느라 늘 미루기만 하네요. ^^;;

oren 2015-02-17 00:01   URL
저도 아직은 로맹 가리의 소설을 겨우 두 권만 읽었을 뿐이에요. 이제 막『로맹 가리』를 통해 그의 작품을 한꺼번에 모두 소개받긴 했지만요. 읽고 싶은 소설들은 늘 한결같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ㅎㅎ

transient-guest 2015-02-19 06:51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느끼지만 오랜님의 독서는 아주 깊습니다. 세월의 경험과 책이 아주 깊은 속까지 내려가서 섞여나오는 글 같아요.

oren 2015-02-23 22:34   URL
작가들이 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스러운 이야기들`에 비하면, 제가 쓰는 글들은 늘 변죽만 울리는 알량한 글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늘 떨치기 힘드네요. 이 글도 알고 보면, 방금 말씀드렸던 그런 생각 때문에 쓰다 말다를 오간 끝에 몇 번을 뭉그적거리다가 겨우 겨우 끝냈답니다. ㅎㅎ

yamoo 2015-02-25 22:00   댓글달기 | URL
지하철에서 읽다가 시간이 없어 추천만 누르고 오늘 다시 읽어 봤습니다. 역시 이런 글을 써주시는 분은 오렌님 뿐이십니다!
정말 멋진 글 잘 보고 갑니다. 아직까지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지 않았는데..(오래 전에 자기 앞의 생을 읽다가 재미 없어서 50페이지도 못 넘기고 던진 기억이 납니다) 다시 봐야 겠습니다. 제겐 로맹가리 소설이 한 4권 정도 되거든요. 아주 오래 전에 중앙일보사에서 출판된 세계문학 전집에 로맹가리 작품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부터 읽어봐야 겠어요~
다시 한 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2-25 23:44   URL
시답잖은 글인데 추천도 해주시고, 다시 와서까지 읽어 주시고 댓글 남겨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네요.

로맹 가리의 소설은 그가 아니면 결코 쓰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뭔가가 늘 있는 듯해요. 그래서 그런 소설들을 오랫동안 즐겨 읽었던 프랑스의 애독자들조차 나중에는 바로 그 `로맹 가리 작품 특유의 그 무엇`에 얼마간 싫증을 느꼈을 법한데, 바로 그럴 즈음에(작가의 나이 또한 이미 60세가 넘어서, 자연스레 그 노작가에 대해 차츰 시들해질 무렵에)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신선한 이름으로 잇따라 멋진 소설들을, `로맹 가리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꾸역꾸역 써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구나 에밀 아자르가 써낸 작품들은 어쩔 수 없이 풍기게 마련인 `노련한 작가의 솜씨`도 의도적으로 감춰야 했을 뿐만 아니라, `로맹 가리의 색깔`까지도 철저히 숨겨야 했는데, 작가 스스로 그런 제약을 즐기며 여러 소설들을 써낸 점이 더더욱 흥미로운 듯해요. 그런 면에서, 작가가 겨우 열두 살짜리 꼬맹이를 소설 속의 주인공이자 `화자`로 내세운 <자기 앞의 생>은 정말 천재 작가가 아니라면 결코 구상하기 힘든 멋진 소설이라 여겨져요. yamoo 님께서 이런 점들을 얼마간 염두에 두면서 그 작품을 다시 읽어 보시면 틀림없이 어떤 새로운 감동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옛날 옛적에 어느 눈먼 음유시인이 있어서, 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려줬던 훌륭한 이야기를 오늘날의 우리들조차 온전히 다 듣고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 시인의 음성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그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노래에 실었던 아름다운 음율조차 이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 그 시인이 불렀던 노래가 오직 그 시대 사람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노래가 아직까지도 문자로 온전히 전해져 내려와 우리가 쓰는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시인의 노래를 틀림없이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이야기가 아예 없지는 않다. '2,800번의 여름'을 지나는 세월 동안에도 원형을 잃지 않고 온전히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옛 이야기가 있다면 그게 바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그렇게 유명하고도 훌륭한 이야기를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그 이야기가 그토록 오래 전에 만들어졌고, 더군다나 그 이야기의 무대 조차 눈먼 음유시인이 노래했던 그 시대보다도 더욱 거슬러 올라간 까마득한 옛날이다 보니, 이 푸른 지구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즉각적으로 확인하는 놀라운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그 이야기는 너무나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그 이야기를 온전히 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진실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우리 스스로가 그 이야기를 자꾸만 낯선 이야기로 되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특별히 조금 더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그 옛날에 노래가락처럼 아름답게 읊조리던 그 이야기를 얼마든지 끝까지 다 읽을 수도 있다. 그 책을 읽으려는 독자가 무슨 특별한 신분일 필요는 없다. 대학생이라도 좋고 평범한 월급쟁이라도 상관없다. 주부와 가게의 점원이라도 그 이야기를 읽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 옛날엔 농사를 짓던 사람들과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과 양을 치던 양치기들과 노를 젓던 선원들까지도 그 노래를 즐겨 듣고 모두들 이해했으니 말이다. 오늘날처럼 문맹이 거의 다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똑똑한 현대인들이 왜 그토록 보편적이었던 이야기를 두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미리부터 무릎을 꺾고 좌절해야만 하는가.

 

어떤 일에서든 아무도 뛰어 넘지 못한 장벽을 끝내 뛰어 넘은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비록 눈 먼 음유시인이 쓴 옛 이야기가 아무리 어려운 옛날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끊임없이 번역되고 주석이 달렸다. 샹폴레옹은 나일강에서 발견된 로제타석을 붙들고 평생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파라오가 살던 시대에 쓰여진 이집트 상형문자까지도 해독하지 않았던가. 옛 이야기에  매혹되어 고대의 그리스어를 새로 배우고 또 그때마다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쓰던 언어로 끊임없이 바꾸어 내려온 끝에 그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이 고대의 서사시를 두고 불굴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 작품이 지닌 가치를 더하고 새롭게 만든 무수한 작가들과 학자들과 문학작품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켜켜이 쌓여온 그 '옛시인의 노래를 둘러싼 이야기'를 마치 여태껏 쭈욱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천역덕스럽게 술술 풀어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알베르토 망겔이다. 그가 오래 전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작품을 이제야 비로소 새롭게 드러낸 것도 아니고, 또 그 작품을 바탕으로 삼아 불멸의 문학 작품을 새롭게 탄생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이 작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는 정말 이 책에서 호메로스가 쓴 두 작품을 둘러싼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깊이있게 제대로 파고 들었다. 비록 나는 고대에 쓰던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 땅조차 여태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지만 그 시인이 쓴 옛날 이야기만은 두어번 읽어 보았다. 그러니 내게는 알베르토 망겔의 이야기가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비록 그가 이야기를 너무나 깊숙한 데까지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내게는 낯설기만 한 작가들을 그로부터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개받는 바람에 어리둥절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다른 책들'을 통해 호메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책 속에 담긴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마주칠 때마다 그 시인과 작품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주로 다음과 같은 책들을 통해서였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3대 작가의 현존하는 작품 33편 가운데 특히 16편)

헤로도토스의 『역사』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키케로의 작품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플루타르코스의『영웅전』

단테의 『신곡』

몽테뉴의 『수상록』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키호테』

에드워드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

괴테의 『파우스트』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어떤 사람들은 내가 허풍을 떨기 위해 유명한 고전들을 너무 많이 나열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가 읽은 책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까지 무슨 '헛바람'을 이 글 속에 집어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기울이는 관심은 단지 저 유명한 고전들 속에 '정말로'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색깔로 깊숙하게 물들어 있는지를 내가 과연 얼마나 자세히 살피면서 저 책들을 읽었을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몇몇 작품들은 안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몇몇 작품들을 읽을 때 아마도 나는 숱한 대목에서 '호메로스의 그림자'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알베르토 망겔이 쓴 책에서도 '내가 읽은 저 책들'이 조금이나마 언급되고 있을까. 물론이다. 한치의 과장도 없이 말하지만 망겔은 내가 언급한 작가와 책들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내가 기억 속에 저장해 둔 인상적인 문장들까지도 이 책 속에 그대로 옮겨 놓을 정도였다.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그런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왜냐하면 알베르토 망겔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를 다루기 위해 언급해 놓은 작가와 작품들이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호메로스와 깊은 인연을 맺은 작가'로 내세운 인물들이 어찌나 끊임없이 등장하는지, 그리고 그런 유명한 작가와 작품들 가운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책들은 왜 또 그토록 많은지, 나는 그런 작가와 작품들을 발견할 때마다 적잖이 놀라고 또 적잖은 자극도 함께 받았다. 내가 방금 말한 바로 그런 작가들을 여기서 다시금 간략하게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알렉산더 포프, 앨프리드 테니슨, 프로이트, 예이츠, 칼 융, 제임스 조이스, T.S. 엘리엇,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내 얘기는 이쯤에서 살짝 한 쪽으로 밀어 내고 여기서부터는 작가인 알베르토 망겔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고 싶다.(난 처음부터 이 작가가 쓴 놀라운 이야기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적인 몇몇 대목들'을 여기에 옮겨 놓을 생각뿐이었는데, 그건 너무 낯선 얘기일지 모른다 싶어 내 얘기를 조금이라도 집어 넣을 생각으로 글을 쓰다가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물론 이제부터 이 글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저 '입을 꾹 닫고' 필경사 노릇만 하겠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가장 먼저 인용할 대목은 '호메로스'를 우리의 코 앞까지 순식간에 끌어오는 대목부터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서 말했던 '2,800년의 여름'을 건너뛰거나 혹은 이어주는 방법 말이다. 이 책의 작가 알베르토 망겔은 이렇게 멋지게 풀어 놓았다. 마치 호메로스가 방금이라도 우리 곁을 지나쳐 가는 듯한 '멋진 시'까지 인용하면서 말이다.

 

길을 내려가는 호메로스에게

 

러디어드 키플링은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과거에 관해 알고 있는 바를 반추해볼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유용하다고 믿었다. 즉 로마제국의 장점과 단점에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제국을 비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중세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 호라티우스와 셰익스피어에서 현대 작가의 기술을 위한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호메로스에 대한 그의 초상은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예시해준다.

  

 

호메로스가 자신의 꽃 피어나는 리라를 두드릴 때

그는 들었지, 사람들이 육지와 바다에서 노래하는 것을.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것을 그는 요구할 수 있었고,

그는 다가가 그것을 취했어-나와 똑같이!

 

 시장의 소녀들과 어부들,

양치기들과 선원들 역시,

그들은 들었지, 오래된 노래가 다시 점점 크게 울리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조용하게 놔두었어-당신들과 똑같이!

 

그들은 알았지, 그가 훔쳤음을. 그는 알았지, 그들이 알고 있었음을.

그들은 말하지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어,

하지만 윙크를 보냈지, 길을 내려가는 호메로스에게,

그리고 그도 윙크를 보냈어-우리와 똑같이!*

 

 

* Rudyard Kipling, "When 'Omer Smote 'Is Bloomin' Lyre' in The Seven Seas, 1896

(270∼271쪽)

 

이렇게 멋진 시를 쓴 러디어드 키플링을 스웨덴 한림원이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907년에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긴 스웨덴 한림원이 덧붙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의 대표작은 물론 『정글북』인데 나는 아직도 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초딩때 이후로는. 그래서 앞서 내가 말한 바로 그 '자극'을 여기서도 받았다.)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그의 관찰력과 독창적인 상상력, 기발한 착상, 이야기를 이끄는 비범한 재능을 높이 사 노벨 묵학상을 수여함"

 

 

여기서부터는 제임스 조이스의 난해하기로 아주 유명한 소설인 『율리시스』에 관한 이야기이다.(나는 이 책을 예전에 사 두고도 여태껏 읽을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소설을 읽고 싶은 '강렬한 자극'을 확실히 받았다.)

 

시대는 바야흐로

 

조이스는 그곳에 들어가는 것 이상을 원했다. 그는 출발부터 아일랜드의 배경 위에서 아일랜드의 재료로 그것을 새롭게 세우기를 소망했다. 1905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한 편의 에세이를 썼는데, 조이스는 트리에스테에 있을 때 그 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예이츠는 그 에세이에서 시대는 바야흐로 새로운 작가가 『오디세이아』의 고대 세계를 다시 방문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몽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매혹적인 섬들 사이를 떠돌던 한 노인의 모습을, 마침내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가 천천히 분노의 감정을 추스르고 축적시켜나가는 행태를, 한 여신이 야반도주하는 모습을, 화살들이 날아가는 광경을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새로운 것들로 만드는 일은 ······ 신성한 상상력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징표나 상징이 될 것이다." 예이츠의 촉구 그리고 비코 안에서 조이스는 그의 직감에 대한 확신을 발견했다. 문헌학상의 동시성이 그의 자신감을 지지해주었다. 『오디세이아』는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에 있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시작된다. 조이스는 오래 전에 플루타르코스가 아일랜드에 붙인 이름이 '오기기아'임을 발견했다. 비록 조이스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기초로, 그 뒤에 자신의 『율리시스(Ulysses)』를 올려놓은 것은 "일종의 변덕"일 뿐이라고 1937년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 말했고, 또한 『율리시스』·에 대해 호메로스식 대응을 준비하면서 스튜어트 길버트와 함께 했던 공동 작업은 "끔찍한 실수"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 『율리시스』에 계속 등장하면서도 그저 '갈색 우비를 입은 사나이'로만 묘사될 뿐 결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캐릭터가 사실은 자기 작품의 페이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이스 자신일 수 있음을 시사한 적이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 인물이 자신의 작품들이 개작되는 것을 감독하려고 온 호메로스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274∼275쪽)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

 

조이스는 버젠에게 자신이 『오디세이아』에 기반을 둔 책을 하나 쓰고 있으며,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스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 햄릿, 파우스트 모두 삶의 완전한 경험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여성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독신자로, 햄릿을 아들이었을 뿐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총각으로, 파우스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이나 가족도 없이 '언제나 그를 자기 옆구리나 발꿈치에 매달고 다니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저지당하는 한심한 자로 내몰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목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라에르테스에게는 아들이고, 텔레마코스에게는 아버지이며, 페넬로페에게는 남편이고, 칼립소에게는 연인이며, 트로이아를 포위한 그리스 전사들에게는 전우이고, 이타카의 백성들에게는 왕이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지혜와 용기로 모든 것들을 이겨냈다. 더 나아가 조이스는 버젠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전사이며 끝까지 전투를 지켜보기로 결심했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귀와 황소를 함께 멍에로 묶어놓고 밭을 갈면서 미친 척하며 병역을 기피하려고 노력했던 협잡꾼이라는 사실 말이다.(276∼277쪽)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

 

오디세우스는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일리아스』에서 그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전사이다. 또한 유능한 외교관이었기에 아가멤논의 화해 요청을 아킬레우스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수사(修辭)의 달인이라 청중을 더욱 놀라게 하려면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프리아모스의 오랜 조언자였던 안테노르는 오디세우스가 다중 앞에서 말할 때, 처음에는 뻣뻣이 선 채 눈을 땅에 고정시킨 뒤 연설을 터뜨린다고 서술한다.

 

그대는 말했을 것이오, 무뚝뚝하고 틀림없이 생각 없는 자일 거라고.

그러나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가슴속에서부터 토해내면서

겨울철에 휘날리는 눈보라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다음에는 오디세우스에게 논쟁을 걸지 못했지요, 그 누구도!

 

(277∼278쪽)

 

 

이쯤에서 그림 한 장을 끼워넣고 싶다. 오뒷세우스가 '유능한 외교관'으로 활약할 당시의 모습이다. 비록 그림의 주인공은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이지만 말이다.(☞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

 


<아가멤논의 사절단을 맞는 아킬레우스>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9세기 

 

 

베르길리우스는 오디세우스를 무정한 약탈자이자 '범죄의 달인', 말하자면 그리스의 모리아티로 묘사했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 번째 인격성을 입고서 유럽 문학에 들어왔다.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그의 동료인 디오메데스와 싸잡아 비난한 뒤 지옥의 여덟 번째 계로 보내버렸다. 이곳에는 사기 행위의 조언자들과, 다른 자들에게 도적질하라고 부추기는 영적인 도적들이 영원히 타오르는 화염 속에 봉인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워버렸던 탐욕스러운 열정이 이제는 외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탐욕에 불타오르게 했다면, 이제는 불꽃의 혀들이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단테가 직관적으로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완수하도록 만든 곳이다. ······ 테이레시아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말한다. 만약 그가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오디세우스는 "한 번 더 멀리 나가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며,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여행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단테가 묘사한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은 단테가 그때까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이다.(279∼280쪽)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

 

6세기가 더 지난 뒤, 앨프리드 테니슨 경은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테가 이룬 성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작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노년은 아직 그 영광과 노고를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닫는다. 그러나 끝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다.

고귀한 어떤 일이 여전히 완수될 수 있으니,

신과 투쟁했던 사람들은 흉한 것이 아니다.

빛은 반석들로부터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느린 달이 솟아오른다. 깊은

신음이 수많은 목소리와 함께 맴돌고. 오라, 내 친구들이여,

더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다.

밀어버려라,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쳐라

울려 퍼지는 밭고랑들을, 일몰 너머로 그리고

서쪽 모든 별들이 몸을 담그는 저 욕조들 너머로

돛을 펼치려는 나의 계획은 내가 죽을 때까지 유보되어 있으니,

해협들이 우리를 휩쓸어 침몰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볼 수도 있다.

비록 많은 것들을 거두어갔지만,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그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였던

그 힘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이다.

영웅적인 심장들의 한가지로 똑같은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투쟁하고, 탐색하고,

찾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안에서만은 강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 고전에 빠져 있던 테니슨은 단테에게 비난받은 왕을 자신의 호메로스적 원천으로 되돌려 보낸다. 오디세우스는 '여행에서 벗어나 쉬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량함에 비해 너무 영악한 부랑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담당해야만 한다. 자신의 길었던 여행을 요약하는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했던 귀향 병사에서, 집으로 와서도 다시 한 번 더 항해를 떠나려고 열망하는 왕으로 돌아온 과정을 요약하면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이렇게 썼다. "오디세우스가 상징(또는 대표)해왔던 수많은 것들 중에 변함없는 것 하나가 서양의 문학 안에 있다. 한계를 제거하며 '가능한 것'에 종속되는 대신,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이 바로 그것이다."(280∼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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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글에 대해서는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좀 크다.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는 다른 책에서 봤던 번역이 훨씬 더 좋았던 듯하다. <율리시스>의 다른 대목을 인용한 글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테니슨의 시집 한 권 산 적이 없다. 이런 데서도 '자극'을 받는다. (☞ T.S. 엘리엇의『황무지』와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이제 마지막 말을 할 차례입니다.
내가 늘 암송해왔던 테니슨의《율리시스》의 마지막 시행들보다 더 나은 말을 내가 고를 수 있을까요:

가자 친구여, 새 세계를 찾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배를 띄우고, 줄 맞춰 앉아, 힘차게 노를 젓자
뱃머리가 물살을 가른다; 나의 목적을 위해
황혼과 서쪽 하늘의 별들의 바다를 너머, 내가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라.
파도가 우리를 삼킬 수도 있으리라:
행복의 섬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아킬레스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많은 사람이 남았지만; 우리에게 비록
땅과 하늘을 움직이던 예전의 강인함은 이제 없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지만;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으나, 강인한 의지의,
영웅적인 용사의 침착함으로,
노력하고, 구하며, 찾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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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오뒷세이아』에는 이 때의 오뒷세우스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라고 번역해 놓았다. 이 대목은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제9권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들_퀴클롭스 이야기) 강대진이 쓴 『그리스 로마 서사시』를 읽어 보면 오뒷세우스가 스스로 자신을 '아무도 아니'로 명명한 그 일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일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폴뤼페모스를 속인 '아무도 아니' 이야기

 

이 이야기에 쓰인 '아무 것도 아닌 자' 속임수는 그냥 속임수라기보다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채 동굴 속에 갇힌 영웅의 무력감과 자괴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제우스도 튀폰과의 싸움에서 비슷한 사태를 겪은 적이 있다. ······ 또 다른 해석으로는 오뒷세우스의 일련의 모험은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인데, 그 시작점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시작해서 한 나라의 왕으로 자신을 회복해간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 트릭은 짐 자무시 감독이 <데드맨>이란 영화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악당들에게 잡힌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가 누구와 함께 왔냐는 질문에 "노바디Nobody와 함께"라고 답하는 데, 악당들은 동행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이 '노바디'는 그와 동행하던 인디언의 이름이었다. 잠시 후 방심한 악당들은 이 노바디의 화살에 쓰러지게 된다. 하지만 이 트릭 역시 그냥 속임수는 아니다. 그와 동행하는 '노바디'는 사실상 그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deadman이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주인공이 쏘는 총에 유명한 총잡이들이 모두 쓰러지는 반면, 그들의 총알은 노상 빗나가는 것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그의 모험 초기에 놓여서, 앞으로 있을 그의 성격 변화에 하나의 기준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오뒷세이아>의 모험들을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가 '성장 소설Bildungsroman' 이론이다. 주인공이 여러 모험을 겪으면서 점차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 간다는 것인데, 이 해석에 가장 잘 맞는 것이 바로 이 폴뤼페모스 사건이다. 그 사건 전에 오뒷세우스는 매우 호기심이 많고 무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점차 조심성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 나중에는 심지어 아테네 여신에게까지 신분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학습되고 획득된 조심성은 적들이 우글거리는 집에서 그를 구해주게 될 것이다.(66∼67쪽)

 

 - 강대진, 『그리스 로마 서사시』

 

오뒷세우스가 폴뤼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술잔(기원전 550년경)
(에우리피데스 지음 /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에서 인용)

 

 

가장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며, 다시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모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새뮤얼 존슨 박사는 1765년에 쓴 저작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체계의 완벽함은 곧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인간 지성의 공통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덧붙여 말한다면, 국가와 민족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 지성은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순서를 바꾸고,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며, 그의 감성을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저술들에 대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존경은, 지나간 시대의 우월한 지혜에 대한 경솔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한 우울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정받았으며, 또 의심할 수 없는 입장들의 결론이다. 즉 가장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많이 이해된 것이라는 말이다.(289∼287쪽)

 

 

이렇게 길게 쓴 내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일까. 결국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이다.  이왕이면『일리아스』와『오뒷세이아』를 곧바로 펼쳐 읽는게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려우면 우선 알베르토 망겔의 책으로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아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_ 눈으로만 읽는 독서)

 

이 책을 읽고 또 이런 글까지 쓰고 나니 고전은 정말 '평생 동안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클리프턴 패디먼의 말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극'을 받았던 여러 '고전'들도 이제부터 찾아 읽어야 하고, 또 눈먼 음유시인이 쓴 옛 이야기도 가끔씩 다시 펼쳐 읽어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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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1-29 18:10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학부 2학년 영문과 시간에 숙제로 읽은 걸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다시 읽지 않았습니다. 당시 워낙 빡세게 읽었던지라....재미도 반감됐었고요. 그냥 숙제해서 보고서 내기 바빴던 거 같습니다.
지금 읽으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텐데, 워낙 책이 두껍다 보니 읽기가 어렵습니다. 오렌님의 좋은 글로 대신합니다..ㅎㅎ

oren 2015-01-30 12:05   URL
yamoo 님께선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그런 흥미로운 사연이 있었군요. 뭐든지 너무 빡세게 부딪히고 나면 정신이 얼떨떨하고 정나미가 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요. ㅎㅎ

붉은돼지 2015-01-29 19:48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한 선망이나 동경 비슷한 것을 품고 있어서 <숲>에서 나온 천병희 선생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의 세계> 시리즈 여러 권을 비치하고는 있습니다. 물론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있고요. 언제 읽을 지는 모르지만...책장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밀린 숙제를 빨리 해야하는데... 해야하는데... 하는 조바심이 생깁니다.ㅎㅎ

oren 2015-01-30 12:17   URL
일일이 사례로 들기도 어려울 만큼 숱한 사람들이 `그리스 고전`에 대해 뜨거운 동경과 온갖 경의를 다 바쳤지요.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어떤 인물은 장렬한 죽음을 스스로 맞을 때, 자신의 가슴에 바로 그 그리스 고전 한 권을 끌어안으며 `이 세상과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우도 있더군요. 그리스 고전에 대해서는 그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과 지명만 듣고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며, 호메로스에 대한 광적인 열의를 보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 제겐 특히나 인상적이었답니다. 붉은돼지 님께서도 밀린 숙제처럼 남겨놓은 과제를 언젠가 `즐겁게` 끝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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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을 나갈 때 귀중품 보관 상자에 《일리아스》를 항상 넣어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록된 말은 역사적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 작품보다 더 우리에게 친밀감을 주며 동시에 더 큰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예술 작품이다. 그것은 모든 언어로 옮겨질 수 있으며, 단순히 읽혀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인간의 입으로부터 숨결처럼 토해질 수 있다. 즉 화포나 대리석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입김으로 조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대인의 사상적 상징이 현대인의 말이 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Nussbaum 2015-01-31 18:42   댓글달기 | URL
oren님의 글을, 조금은 여유로운 토요일에 보니 끊임없이 책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게 됩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했을 천병희 님의 번역으로 올리신 책들을 갖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책장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잠시라도 다시 펼쳐보게 될 것 같습니다.
늘 정성들인,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1-31 20:47   URL
nussbaum 님 반갑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이 읽었던 책들도 조금씩 끊임없이 의미를 달리 하면서 다가오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어떤 책들은 강렬하게 다가왔다가 그만큼 빠르게 사라져 가는 반면, 어떤 책들은 잡힐 듯 말듯 먼 데서 손짓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다가, 끝내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고야 마는 경우도 있는 듯하구요. 책들끼리도 무수히 대화를 나누는 듯한데, 책과 (책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사람 사이의 대화야 오죽 다양하게 변주될까 싶기도 하네요. 늘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네의 호메로스는 내 옆에 말없이 놓여 있네. 나는 그의 작품 곁에서 벙어리로 있지만, 종종 이렇게 말하면서 입을 맞춘다네. '위대한 자여, 내가 당신의 말을 얼마나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

 - 페트라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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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로 갈 수 있는 길

 

호메로스는 신들이 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방식과 어느 정도 유사한 방식으로 단테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묘사된 것처럼-그리고 이후의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묘사된 것과 마찬가지로-제우스와 그의 동료 신들은 인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그들을 수시로 찾아가 그들의 영광이나 죽음을 찾거나, 또는 그저 폐를 끼치면서-마치 『일리아스』에서 아테나가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을 때처럼-그들 사이를 걸어다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으며, 신전에서는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물질적인 재현일 뿐이었다.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탐구에 전념하는 동안에는 그 곁에 앉아 있었으며, 인간들이 여행을 할 때면 그들과 동행했고, 인간들의 침실과 시장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살아 있었다. 플라톤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은 호메로스가 신들을 '변장한 스파이들'로 생각한 개념에 대해 변호했다. 그런데 플라톤 자신은 이 개념을 비웃었던 바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한담(閑談)처럼 쓴 그의 책들에서, 인간들 사이에 신들이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하늘의 별처럼 눈에 보이면서도, 또한 꿈속의 친구나 조언자처럼 존재하는" 신성한 존재들에 대해 명상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그 존재로서 이 세계를 가득 채웠다. 서기 1세기에 저술 활동을 했던 철학자이자 극작가인 세네카는 가운데로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가 볼 때는 신들이 아니라 고대의 위대한 저술가들과 사상가들이 우리와 어우러져 살았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직 제논과 피타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와 자유 학예 분야의 다른 훌륭한 대가들을 일상의 친근한 이웃으로 만들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를 친구로 구하는 자들만이 삶의 의무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의 부모는 그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그에게 할당될 뿐이라는 사실은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계를 선택할 수 있다." 그의 서재를 가리키면서 세네카는 위대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와 더불어 그들의 경험들을 공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 고귀한 자질을 부여 받은 가문들이 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가문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택하라. 당신의 선택은 당신에게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 재산까지 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당신의 정신 속에서만 비열하거나 인색하게 간직할 필요는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당신과 공유할수록 이것은 더욱더 위대한 것이 된다. 이것들은 당신에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고, 누구도 끌어내어 내던질 수 없는 지극히 높으 곳으로 당신을 올려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당신의 유한함을 연장시켜주는,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당신의 유한함을 불멸성으로 바꿔주는 유일한 방법이다."(137∼139쪽)

 

 - 알베르토 망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 * *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그런데 인간 모두에게 서로 최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활짝 열려져 있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자연이 산출한 모든 것에 대한 공동의 권리는 수호되어야 한다. 즉, 법과 시민권에 의해 할당된 권리들은 법 자체의 규정대로 지켜져야 함은 물론, 나머지 권리들도 '친구들 간의 모든 것은 공동 소유다'라는 그리스의 격언처럼 보호되어야 한다. 더욱이 모든 인간의 공동 소유는 엔니우스에 의해 제시된 유(類)의 사물로서 보이는데, 그가 든 아래의 한 가지 예는 한정되어 있지만 그 원리는 많은 것에 적용시킬 수 있다.

 

길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등불로 다른 사람의 등에

불을 붙여 주는 것과 같도다.

그런데 남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고 해서

자신의 불빛이 덜 빛나는 것이 아니니라.

 

이 예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은 손해가 없다면 낯선 사람일지라도 무엇이든 주라고 하는 것이다.(49∼50쪽)

 

 - 키케로, 『키케로의 의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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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의무론』을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평일엔 책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틈날 때마다 계속 붙잡고 읽고 있다. 책을 펼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의 다 읽었다. '도덕'을 다룬 옛 고전 가운데 이토록 재미있는 책도 다 있었나 싶다. 어느새 스무 쪽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이토록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명백히 '요즘 뜨는 뉴스들' 덕분이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역사적 사례들이나 비유들을 읽으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실 속 인물들과 상황들'이 자꾸만 겹쳐 떠오르니 어찌 책 읽는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이 <도덕적 선에 대하여>, 제2권이 <유익함에 대하여> 제3권이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이다. 이렇듯 겉으로만 살피면 책의 내용이 여간 따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3권의 중반부에 실린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을 다루는 부분까지 읽게 되면 너무나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망라되다시피 실려 있어서 책 읽는 재미가 정말 '깨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런 책을 읽는 재미를 두고 저런 표현을 한다는 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줄 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오늘 읽은 구절 가운데 정말 인상적인 대목 하나는 바로 다음 내용이다.(이 대목의 앞부분부터 인용하자면 너무 많은 부분을 끌어와야 하겠기에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전혀 그렇지 않다. 바다 한 가운데에를 항해할 때 선주는 배가 자기 소유라 해서 배에서 승객을 깊은 바다물 속에 절대로 내던져 버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객들이 운임을 냈을 때 그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승객들이 빌린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선주의 것이 아니라 승객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을 무렵에 떠오른 '새로운 뉴스'는 바로 다음 내용이었다.(이 뉴스에 대한 인용 역시 앞부분과의 '형평'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저 쓸데 없이 내 글이 자꾸만 길어질까 두려워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또 "'주기장 내에서 겨우 17m 후진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항로 변경이 아니라는 말은 법을 제일 잘 아는 변호사들이 할 말이 아니다"며 "모든 변호사는 음주운전을 1m를 했든 10km를 했든 음주운전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항 중인 항공기를 위력으로 돌린 건 명백한 사실이며 팩트"라고 강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8&aid=0003405783&date=201501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1

 

물론 내가 책에서 인용한 내용과 뉴스에서 인용한 내용이 서로 정확히 맞대응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가지 모두 '땅콩 회항'을 연상시킨다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나는 이 두 대목을 그저 억지로 연결시켜 보느라 이 글을 쓰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키케로가 이 책에서 극구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그건 바로 '도덕적 선과 유익함은 결코 상충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 진다. 더군다나 키케로의 이 책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더더욱 헷갈리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그 얘기이니 이 글을 계속 써 보겠다.)

 

이쯤에서 이 책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물론 이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인 만큼 등장 인물들이나 속담 조차도 생소하게 들리는 대목이 적지는 않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곤 했다. 콘술을 지낸 바 있는 가이우스 핌브리아가 정말로 도덕적으로 선한 로마의 기사인 마르쿠스 루타티우스 핀티아의 소송사건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핀티아는 그의 재산을 내걸고 "만약 법정에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재산을 몰수당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핌브리아는 핀티아에게 자신은 절대로 그 사건의 재판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만약 그가 핀티아를 유죄로서 판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에게서 그의 명성을 빼앗는 것이 될까 두렵고, 또 반대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면 이미 수많은 의무 이행과 찬양받을 만한 업적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진 그를 새삼스레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핌브리아가 알고 있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은 무엇이건 간에 절대로 유익한 것으로 보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선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감히 행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말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농부들조차도 의심이라고는 전연 하지 않는 이 윤리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이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부끄러운 불명예의 일이 아닌가? 농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미 진부해진 오래된 속담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의 신의와 착실함을 칭찬할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과는 함께 어두운 데에서 손가락 수를 맞추는 놀이를 할 만해.'43)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다름이 아니라 비록 네가 나쁜 짓을 해도 전연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데코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속담에 비추어 볼 때, 저 기게스나 내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손가락을 움직여 모든 상속자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그런 자에게는, 어떤 변명이나 용서의 여지가 전연 없다는 사실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 바로 그것이 아무리 잘 은폐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은 자연을 거역하고 자연과 상충하면서 유익한 것이 될 수가 없다.

 

43) 현대 이탈리아의 morra. 어두운 데에서 한 사람이 재빨리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펼쳐 보이면서 맞추기를 원하면, 동시에 상대방도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펴서 맞추어 보는 놀이.

 

인용문이 몹시도 길고 낯선 내용들이라 키케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속속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키케로가 무슨 뜻으로 저런 글을 썼는지는 누구라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옮겨 보았다. 더군다나 그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뛰어난 언변과 변론과 웅변술로 '법정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땅콩 회항'을 두고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이는 바로 지금의 '서울의 한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억울한 당사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차원에서, 결코 아무나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묘수'까지 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약자' 신세로 내몰린 채 앞으로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될 그 사람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재벌 총수'까지 재판정으로 불러낸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판 '솔로몬의 판결'이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키케로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는 결국 '도덕적으로 선함'을 포기하고 얻는 '유익함'은 결코 유익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상충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유익함'을 먼저 앞세우기 쉬운가. 그런데 키케로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무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다 보면 결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키케로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고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익함이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신의와 정의로움을 빼앗아 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그 유익함이 너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야수로 바뀌는 것과 사람의 외형만을 지닌 채 야수와 같은 잔인함과 야비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반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파렴치한 권력을 소유한 카이사르를 심지어 장인으로 모시려고 하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장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자기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하며 무익한 것인가를 그는 알지 못했다. 반면 장인 자신은 항상 포에니의 처녀들이라는 그리스의 시를 읊곤 했는데, 나는 정리는 잘 안되지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해 보겠다.

 

법이 범해져야 한다면,

왕이 되기 위해서나 범법이 행해져야 하리라.

다른 경우에는,

경건한 마음을 품고 범법하지 말지니.47)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추악한 한 가지를 취한 사람은 에테오클레스48)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49)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47) Euripides: Phoenissae, 5, 524 

 

48) Eteocles: Thebes의 왕, Oedipus의 아들인 Eteocles와 Polynices 형제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통치하기로 하고 먼저 형인 Eteocles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혼자 통치하기 위해 약속된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동생 Polynices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추방하였다. 그 결과 형제가 전쟁을 하다가 서로의 손에 둘 다 죽었다.

 

49)Euripides(B.C. 480∼406): 아테네의 비극시인. Anaxagoras의 제자이며 Socrates의 친구.

 

위의 인용문에서 '키케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포이니케 여인들』을 조금 더 들여다 봐야 한다. 그 작품을 소개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의 글만큼 명료한 것도 드물다.

 

『포이니케 여인들』작품 소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번갈아 가며 테바이를 통치하기로 약속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자 아르고스로 망명한 폴뤼네이케스가 이른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하러 온다.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가 두 아들을 화해시켜보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인 크레온의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면 에테오클레스와 테바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다. 아르고스군의 공격이 격퇴되자, 두 형제가 일대일로 결투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결투에서 두 형제가 서로 죽이자 이오카스테가 절망하여 칼로 자결하고, 그들의 누이 안티고네가 이 소식을 오이디푸스에게 전한다. 크레온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지 말고, 눈먼 오이디푸스는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결혼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랑길에 오르며 돌아와서 폴뤼네이케스를 몰래 묻어주겠다고 말한다.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 유명한 비극이 바로 스티븐 핑커가 문학 작품에서 '영원한 공식'이라고 말한 그 '형제간의 비극'을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이다. 키케로의 책에서 인용된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겨우 네 줄만 인용된 저 '짧은 대목'만 읽으면 얼핏 '왕이 될 정도로 대단한 야심을 가졌을 경우에나 법을 무시할 일이지, 그 외의 다른 경우라면 그저 법을 지키며 조용히 살 노릇'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의 참뜻은 그게 아니다. 자신의 동생에게 절대로 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그 대목을 조금 더 끌고 와 보면 이렇다.

 

이오카스테

······

내 아들 폴뤼네이케스야,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너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다나오스 백성들의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말이다. 제발 신들 중에

한 분이 재판관이 되시어 이 불화를 중재해주시기를!

 

폴뤼네이케스

진리의 말은 원래 단순하며, 정당한 요구에는

현란한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 요점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당한 주장은 속으로 병들어 있어

그것을 치유해줄 궤변이 필요하지요.

······

 

에테오클레스

······

제가 통치할 수 있는데, 저더러 이자의 노예가 되라고요?

그러니 불을 가져오고, 칼을 가져오고, 네 말들에

멍에를 얹고, 들판을 네 전차들로 메워보려므나.

그래도 나는 왕권을 너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불의한 짓을 해야 한다면, 왕권 때문에 불의한 짓을 하는 게

가장 아름답지.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경건해야 해.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인용문'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알고 보니 삼모자(三母子)가 '왕권'을 다투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코 앞에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형국에서 나온 '절박한 말들' 가운데 일부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이었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들 형제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오라비들의 싸움 때문에 어머니마저 잃고 졸지에 비극의 한가운데로 곧장 내던져진 저 가엾은 안티고네는 눈 먼 장님이 된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머나먼 방랑길'을 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키케로가 저 대목에서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하는 말이 이쯤에서 좀 더 확실하게 이해되고 나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더욱 커진다.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댈러스 미술관

 

 

어쨌든 나로서도 키케로의 책에서 등장한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할 때'의 얘기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땅콩 회항 사건의 그 '문을 닫고 비행에 나서기 시작한 때'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명쾌하게 정리는 잘 안 되지만 약간이나마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키케로의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현실 속의 뉴스가 서로 뒤엉켜 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독자는 늘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이나 상황을 함께 떠올리면서 그 책을 읽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함께 떠오른 여러 현재의 상황들 때문에 이 따분해 보이는 책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마침 이 책은 키케로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수감된 딸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딸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도 '책'이 빠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책도 좀 읽고 수양의 기회로 삼아라'는 소식이 들려오니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서양의 논어'라고 불릴 정도이니 '수양'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라 할 만하다. 가끔씩 너무 완벽한 '도덕 군자'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우긴 하지만 말이다. 끝으로 '옮긴이의 말' 가운데 일부를 덧붙인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이 책에 대해 '볼테르가 한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서 코웃음을 칠 뻔 했는데,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부터는 그 사람의 말이 정말 틀린 게 조금도 없구나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어서 차마 그 얘기를 빼놓기 어려웠다. 이렇게 주렁주렁 책 속의 글을 끊임없이 덧붙이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욕심'인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그럼 이만 총총...

 

··· 그리하여 이 책은 서양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로서 서양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특히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키케로의 연구자 내지 찬양자들이었고, 근대 정치 사상가인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도 키케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볼테르가 1771년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나, 프레데릭 대왕이 "지금까지 씌어졌거나 씌어질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한 말은 모두가 진실이다.

 

아, 참,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적어도 볼테르가 한 말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 가운데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아예 없었던 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극소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도덕감정론』을 쓴 아담 스미스였고, 또 한 사람은 아마도『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이 사람들이 쓴 책까지 이 글에서 언급한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고, 이 글을 정말 웃기게 만드는 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글은 여기서 정말 '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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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식

자연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감정을 살짝 어긋나게 조율하는 잔인한 장난을 쳤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시대의 소설가와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두 명의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세 가장 강한 끈으로 묶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때때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적 가능성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비극적 이야기가 가족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 명의 형제가 서로 싸우다 죽는 이야기에 비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 마이클과 프레도, 제이알과 바비, 프레지어와 나일스, 요셉과 형제들, 리어왕과 딸들, 한나와 자매들 ·······, 수세기에 걸친 드라마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가의 증오"와 "일가의 적대"는 영원한 공식이다." (466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467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755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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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5-01-24 13:06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yamoo 2015-01-23 15:19   댓글달기 | URL
헐~ 오렌님의 이 글을 읽으니 키케로의 <의무론>을 바로 읽어야 겠습니다. 책도 바로 잡히는데 있거든요..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1-24 13:05   URL
yamoo 님께서는 이미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놔두고 계셨군요.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후딱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라틴어 원문`을 빼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지요..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제 생각으로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겪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는 보통 사람들`의 손과 가슴까지 뜨겁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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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붉은돼지 2015-01-29 05:49   댓글달기 | URL
빈서판도 읽어봐야겠어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여러분이 추천하고 있지만 왠지 손이 안갔는데 오렌님 글을 보니 문득 읽고 싶은 생각이...ㅎㅎ
키케로도 물론이구요.

oren 2015-01-29 16:48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oren 2015-01-29 16:48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시시콜콜한 뉴스들에 대해서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다. TV 뉴스를 일부러 시간에 맞춰 보는 일이란 아예 없다고 하는 편이 맞고, 이제는 신문도 거의 들여다보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뉴스가 재미가 없게 되다니...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은 생각도 가끔은 든다. 그런데 별 재미도 없는 뉴스를 굳이 억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은 이미 뉴스가 자기 자신의 '손 안에' 다 들어와 있다. 그러니 뉴스를 일부러 외면하기도 그리 쉽지는 않다. 다른 게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열었다가 자꾸만 저절로 '뉴스'를 보게 되니까.

 

어제도 그랬다. 나는 정작 다른 무엇인가가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열었을 뿐인데, 거기엔 이미 온통 '두 여인'이 원인을 제공한 '뜨거운 뉴스' 때문에 열이 바짝 달아 올라 있었다. 거기엔 무수한 댓글과 '뜨거운 공감'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 뉴스들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밖에... 그리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햐아~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로마인이 쓴 책 속의 글이 어쩌면 이 두 여인에게 그토록 들어맞는지 무릎을 탁 칠 지경이었다. 바로 키케로가 쓴『키케로의 의무론』이라는 책 속 글귀들이었다.

 

키케로가 누구인가. 그는 로마에서 최고의 웅변실력을 자랑했던 인물이자 또한 로마 공화정 말기에 오래도록 정치 무대를 주름잡던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카틸리냐 탄핵을 주도했고,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카이사르와도 맞섰으며,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는데도 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결국 그는 카이사르가 급작스럽고도 드라마틱하게 암살된 이후 권력 공백기에 다시 등장한 제2차 삼두정치 시대에 이르러 '그 시대의 주역들'로부터 끝내 버림받게 되면서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 쫒긴 끝에 목이 잘리고 만다. 명연설을 토해 내던 그의 목과 그 연설문을 작성했던 손들이 로마 광장 한복판에 내걸렸을 때, 지은 죄(?)가 많았던 그의 혓바닥이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에 의해 밤중에 송곳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모욕까지 당했을 정도로 어쨌든 그는 정말 말을 잘 했던 인물이다.

 

본래 하고 싶은 말을 쓰기 위해 일부러 늘어 놓은 말이 자꾸 엉뚱한 데로 흐른다 싶다. 이제 그만 '라틴어 산문의 대가'로 평가받는 그 인물이 쓴 글을 직접 들여다 보자.

 

폭력과 기만

 

이상으로 전쟁들의 의무에 관해서는 정말 충분히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가장 미천한 자들에 대해서조차도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천한 상태와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은 노예들인데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훌륭한 교훈은 그들을 고용 노동자처럼 다루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심하게 일을 시키기는 하되, 의식주와 같은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불의가 행해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폭력과 기만이다. 기만은 마치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마치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모든 불의 중에서도, 남을 가장 기만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선인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면서 속이는 자들의 불의가 가장 위험하다. (44쪽)

 

 

어제 열린 '땅콩 회항' 사건의 첫 공판에서 나온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길게 쓸 것도 없다. 그저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로 요약된다. 심지어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까지도 나왔다.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웠던 뉴스는 바로 '13월의 세금 폭탄'이었다. 그토록 '경제 민주화'와 '증세 없는 복지'를 외쳤던 새로운 정부에서 기껏 '세제 개혁'이라고 내놓은 작품이 그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키케로의 말을 들어 보자.

 

다수의 증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모든 동기 중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확고히 하는 데는 경애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고, 공포보다 더 낯선 것도 없다. 엔니우스는 정말 감탄조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자를 증오하노라.

누구나 자신이 증오하는 자가 죽기를 바라노라.

 

그런데 어떤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뎌낼 수는 없다. 전에 몰랐다면 최근에는 알았을 것이다. 이 참주,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용하여 국가의 목줄을 눌렀고, 또 그가 죽은 후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전보다 더 아주 비굴하게 그에게 쩔쩔매고 있는 터인데, 그의 암살은 사람들의 증오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모든 참주들의 유사한 운명에 의해서도 같은 교훈이 도출되는데, 실제로 참주치고 그 누구도 일찌기 이러한 죽음에서 피할 수 있었던 자는 없었던 것이다. 정녕 공포 정치란 단지 권력을 유지시킬 뿐인 나쁜 안전 장치이지만, 이와 반대로 선의(善意)는 실제로 그것을 영구히 믿을 만하게 지켜주는 안전판인 것이다.(129∼130쪽)

 

지금이 비록 저 당시(카이사르 암살 두세 달 후인 B.C 44년 봄이나 초여름)와 비슷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작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이 매우 가파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지지율 하락'이 진짜 무서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어떠한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뎌낼 수는 없다'는 저 변치 않는 진리 때문이 아닐까.

 

내가 오래 전에 쓰인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오늘날의 뉴스'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한 건 아닐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키케로가 남긴 여러 명언들 가운데 내가 겨우 딸랑 하나 외우고 있는 인상적인 문장까지도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여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상상했을 정도니까. 내가 기억하는 문장은 바로 다음과 같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 (한참 있다가)

"Ego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이 짧은 두 문장 속에서도 내가 두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고 해서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키케로의 저 말은 '지금 여기'의 상황과 너무 어울린다. 오늘날의 뉴스와 옛날의 책이 서로 이렇게 '딱'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마주 손뼉을 칠 때도 다 있구나 싶다.

 

 * * *

 

 

 

 

 

 

 

 

 

 

 

 

 

 

 

 

 



 
 
다크아이즈 2015-01-20 17:06   댓글달기 | URL
고전에는 현실이 들어있다!
오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어요~~

oren 2015-01-20 17:45   URL
아직도 새해 인사를 하기엔 늦지 않았군요. 이제 겨우 연말정산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지요..
팜므 님도 새해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

qualia 2015-01-21 01:56   댓글달기 | URL
제 판단엔 ‘땅콩 회항’ 여성에 대한 한국 검찰(←지구상에서 가장 비열한 찌질남 무리들)의 뜬금없기 짝이 없는 수사 강도와, 한국 찌질남들의 인터넷/에스엔에스에서의 언어폭력/인격테러는 동일한 병증이 다른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그 여성이 잘못한 것은 어느 정도 맞지만, 한국 검찰이 갑자기 법과 정의의 수호신이 된 양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건 블랙 코미디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얼마나 시급했으면 지들 친척뻘 종족을 저렇게 처절하게 다구리치는 것일까요. 비굴하고 비열한 주구(走狗들의 전형적인 수작질의 하나라고 봅니다.

‘땅콩 회항’ 여성이 어느 정도 잘못한 건 맞겠지만, 저런 강도로 수사 받고, 비난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 ‘죄인’을 심문/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을 마녀사냥하는 것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비난 받는 측면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적 비난 광풍은 검찰을 비롯한 주구들과 기레기 언론들이 합작한 것이라 봅니다. 이런 공작질에 무뇌아처럼 부화뇌동하는 건 한국 찌질남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죠.

oren 2015-01-21 12:00   URL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판단은 각자의 몫이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