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만에 '투자'에 대해 길게 써 본 글이라 여기에도 남겨 봅니다.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보세요~)

 

 

"높이 오르라. 멀리 오르라. 여러분의 목적지는 하늘이다. 여러분의 목표는 별이다."

 - 윌리엄스 대학 기념비에서

 

* * *

 

까마득한 옛날인 1930년에 태어나 어느새 우리 나이로 여든여섯에 접어든 '워렌 버핏'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 싶습니다.

 

그토록 명석했던 그가 세계 최고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대학원 강의(컬럼비아 대학원)와 회사 업무(그레이엄&뉴먼 투자회사) 등을 통해 '위대한 가르침'을 온몸으로 전수받은 뒤에 고향인 오마하로 돌아가 소위 전업 투자를 시작한 게 그의 나이 이십대 중반이던 1956년쯤이었을 겁니다.

 

그토록 걸출한 투자자가 마침내 1988년에 '코카콜라' 회사에 투자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자책했던 말은 다름아닌 '이 한심한 화상아' 였답니다. 그가 꼭 그처럼 표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대사에 나온다는 그 유명한 말이 마침 떠올라 '멍청한 버핏 할아버지'가 그토록 뒤늦게 코카콜라에 투자하고 난 직후에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할 때 자책하듯 내뱉었다는 그의 말을 재미삼아 살짝 비틀어봤습니다. 어쨌든 그의 말뜻은 셰익스피어가 표현하고 싶었던 바로 그 심정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을 테니까요.

 

그가 전업투자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 한국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코카콜라'를 마셔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1956년 쯤에 말입니다.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를 떠나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온 이북 사람들만 가난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땅 위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져내린 '폐허' 위에서 하루 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시기가 바로 195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날'을 떠올려 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1960년대 중후반 말이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카콜라'는 커녕 '보리쌀 한 톨 조차' 구경하기 어려워 온갖 구황 작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새봄이 돌아오면 진달래 꽃잎을 따먹기 바빴으며 한창 물이 오르는 소나무의 여린 껍질을 벗겨 먹으며 허기를 달래기 일쑤였습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너 코카콜라 먹어봤냐'는 질문 조차 극소수 사람들에게나 주고받을 법한 얘기였음에 틀림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누구나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먹어본 그 짜릿하고 달콤상쾌하기 그지없는 '코카콜라 맛'은 누구도 평생 잊지 못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워렌 버핏이 전업투자를 막 시작하던 당시만 하더라도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코카콜라의 바로 그 유명한 맛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게 '정설'입니다.(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중국, 인도 등 아시아와 브라질 등 남미에 훨씬 많이 살고 있으니까요.) 그때는 이미 코카콜라가 탄생한 지 70주년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는데도 말입니다.(코카콜라는 1886년 약제사였던 존 펨버튼 박사(Dr. John Pemberton)가 맨처음으로 만들었답니다. 어느새 코카콜라의 나이가 므두셀라를 따라기가 시작했군요...)

 

그런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스물여섯에 불과한 청년이, 미국 중부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오마하라는 시골에 살면서 그 당시로서는 그저 '머나먼 미래'였던 '70억이 넘는 인구가 실시간으로 거의 모든 소식들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는 기가 막힌 오늘날의 세계'를 온전히 내다본다는 건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그로서도 그저 코카콜라를 시도때도 없이 즐겨 마시기만 할 뿐 그 회사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는 능력이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물론 아주 가끔씩은 '투자 대상'으로 잠깐씩 스쳐 지나가듯 고민해 보았으리라는 짐작도 아예 배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겠지만요. 아마 그 당시에도 '70년 역사를 지닌 코카콜라'가 남겨 놓은 '엄청난 거부들의 탄생 스토리'가 틀림없이 시중에 시끌벅적하게 떠돌아다녔을테니까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코카콜라' 이야기를 하다가 지쳐서 이쯤에서 그만 '수정' 버튼을 누르고 이 창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 글에 조금씩 속도를 좀 올려보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각자가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일로 제때에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어쨌든 '오마하의 청년' 워렌 버핏은 '코카콜라'를 살지 말지를 두고 '환갑'이 다 되도록 계속 '고민'을 하며 살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 아둔한 우리가 보더라도 그는 참 '멍청한 넘'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매순간 빠르게 과거로 뒤바뀌면서 영원히 닫혀 버리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거의 모든 과거의 일들을 명쾌히 밝혀내며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언제나 명쾌한 판결을 내릴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또한 우리가 미래를 향해 얼굴을 돌리기만 하면 그 즉시 우리는 거의 대부분 '바보 멍청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면서 매순간 쏜살같이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지만 언제나 어김없이 '알 수 없는 상태로만' 다가올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결국 그토록 총명했던 워렌 버핏도 '먼 미래에는 새로운 경지가 개척될 것이다. 코카콜라는 전세계 어디서나 누구든지 즐겨 마실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일부 유럽 사람들만이 즐겨 마시지만 말이다....' 라는 사실을 아주 늦은 나이에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다짜고짜로 '허겁지겁 달려가서' 코카콜라 주식을 마구 쓸어담았을까요? 그는 결코 그렇게까지 서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과연 오마하의 현인 다웠고 운도 참 좋았습니다. 1987년 10월에 느닷없이 뻥 터진 블랙먼데이가 바로 그에게 30년 이상이나 앓아왔던 해묵은 고민을 마침내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어릴 때부터 그토록 마시기를 즐겼고, 미수( )를 코앞에 둔 아직까지도 여전히 즐겨 마시고 있는 '코카콜라'를 만드는 회사에 마침내 마음껏 투자할 기회를 바로 그때 얻었던 것이지요. 그때 그 시절에 쓸어담은 코카콜라 주식 때문에 그는 마침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계 최고의 부자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말머리의 결론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지 못하고 있군요. 글을 쓰다보니 자꾸만 제 얘기의 물줄기가 '워렌 버핏'이라는 거목이 자라게 된 '토양'을 거쳐 땅 속 뿌리까지 적시고 말겠다는 꼴이라고나 할까요. 이쯤에서 다시 물줄기를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제가 묻고 제가 답하고 싶은 '서론 부분의 결말' 같은 질문은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워렌 버핏이 코카콜라를 사들이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투자에 대한 많은 비밀'을 이미 얼마쯤 터득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투자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세상 이치에는 무척 밝은 사람'임에 틀림없을지도 모르겠구요. 물론 정답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요. 그가 코카콜라를 사기 전까지는 제법 멍청했다거나, 그조차도 '예측불가능한 먼 미래'는 온전히 내다볼 수 없었다거나 하는 말들도 결코 조금도 틀린 말은 아닐테니까요.

 

제가 좀 더 현실적으로(이 게시판 사정에 맞게) 떠올려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코카콜라는 너무 비싸 보였습니다.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가르침에 의하면 '코카콜라는 PER과 PBR이 너무나 높아 보였던' 게 사실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위 'Invisible asset'이라고 불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무형의 자산'으로부터 창출되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일은 워렌 버핏에게서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싶습니다.

 

그는 이미 오랜 투자 경력의 거의 대부분을 언제나 '무형의 자산'을 중시하는 투자를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코카콜라'에 투자하는데 그토록 애를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투자했던 종목으로 널리 알려진 회사들은 대략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워싱턴 포스트, 버팔로 뉴스, 네브라스카 가구, 보쉐하임(보석회사), 월트 디즈니, 맥도날드, 질레트(면도기 회사) 등인데, 이들 회사의 대부분은 '예측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미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요. 그랬던 그도 '코카콜라'를 사는 데 그만큼 오래 걸렸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가장 최근 뉴스로는 이미 보유종목인 케첩업체 하인즈가 미국 대형 식품업체 크래프트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인수를 성사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크래프트 하인즈'는 세계 5위 식품 기업이 될 예정이라고 하지요. 아 참...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꼽히던 'POSCO'를 전량 매도했다는 뉴스도 있었네요...)

 

서설이 너무나 길었네요. 어쨌든 저뿐만 아니라 여러 투자자들이 최근 몇 년 동안에 가장 놀란 건 아마도 아래 표에 실린 몇몇 기업들의 '엄청난 주가 상승'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시가총액이 저토록 엄청나게 불어났을까요? 한 종목 한 종목을 유심히 뜯어보시고 살펴보시면 뭔가 공통된 점들이 조금씩 수면위로 붕 떠오르는 게 느껴질 겁니다. 이들 기업들은 무엇보다 오랜 업력을 쌓아오는 동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해자'를 구축해 온 내수 기반의 불황을 모르는 기업들이며, 세상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여행의 확산 등으로) 점점 더 빠르게 좁혀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업의 외연'을 좁은 한국땅을 벗어나 해외로 꾸준히 확장해 온 기업들입니다.(물론 몇몇 예외도 있긴 합니다만..)

 

이들이 이토록 엄청난 시총으로 불어나고 영업이익의 20∼40배, 순이익의 30∼70배에 이르는 엄청난 멀티플을 대접받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워렌 버핏이 그토록 고민했듯이 말입니다.(맨 끝에 '비교'를 위해 덧붙여 놓은 대상홀딩스는 아직까지는 '참 착한 멀티플'을 가지고 있네요.)

 

 

 

이 글이 오래도록 머물게 될 공간은 결국 '대상홀딩스 종목 게시판'일 수밖에 없으니, 여러 지주회사들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표를 작성하면서 저는 대략 두세 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답니다.

 

첫째, 제일모직은 역시 엄청나게 비싼 주식임에 틀림없구나. 영업이익의 88.9배, 순익의 41.7배 멀티플은 과연 합리적인가? 외국인은 왜 꼴랑 2.5%만 투자하고 있을까? 저 주식이 액면가 5,000원으로 환산하면 7,025,000원에 달한다는 사실은 제대로 살피고 투자하는 것일까? 저 회사의 오너는 '투자 원금 대비 1,405배(주가 140,500원/액면가 100원)'로 뻥튀기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등등.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 속담이 그냥 생긴 게 아니더군요.

 

둘째, '업력 60년'을 자랑하는 대상그룹의 지주회사 시총이 '저 위치'에 있는 게 과연 얼마나 합리적일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한번 꼼꼼하게 '지주회사들의 실적과 투자 지표와 '현위치' 등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급적 '명백한 사실들'만 말하고자 할 뿐 굳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근거없는 '장밋빛 전망'까지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판단은 언제나 각자의 몫일 테니까요.

 

 

'대상홀딩스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을 듯합니다. 단기적으로는 2014년 2/4분기와 3/4분기에 '일회성 비용 계상' 때문에 나타났던 일시적인 실적 하락이 딱 그만큼 반전될 여지를 미리 예약해 두고 있기도 하고, 최근까지도 비우호적이었던 환율 흐름도 반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된 원재료인 '옥수수 시세'가 아직까지도 말이 아니게 헐값에 머무르고 있으니 '당분간의 실적 호전'은 따놓은 당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 국제 옥수수 가격 추이

 

 

무엇보다도 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중요합니다. 그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요.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초강력 브랜드인 '종가집 김치'는 이제 더이상 한국 사람들만 먹는 식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여러 나라로 수출될 게 뻔한 가장 확실한 먹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놀라운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드넓은 중국으로의 수출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채 이제 다시 막 열리기 직전이구요.

 

세계적인 발효기술을 통해 만들어 내는 식품 소재 분야의 사업 전망도 여전히 밝아 보입니다. 서양인들이 빵을 비롯한 수많은 음식에 캐첩과 마요네즈를 즐겨 곁들여 먹듯이 꼭 그렇게 한국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추장, 된장, 쌈장, 간장을 빼놓지 않고 곁들여 먹습니다. 비빔밥을 먹는데 고추장이 빠질 수 없고 삼겹살을 먹을 때 쌈장이 없을 순 없겠지요. 그 분야에서 '최고의 맛'은 누가 뭐래도 '순창 고추장, 된장, 쌈장'과 '햇살 담은 간장' 브랜드가 가지고 있습니다.

 

'카레 여왕'과 '맛선생'의 놀라운 활약도 빼놓을 순 없겠지요. 최근 식품업계의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는 1인 가구의 빠른 확산과 아울러 라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간편식의 빠른 성장세인데, 대상 청정원 브랜드의 선전이 돋보입니다.

 

앞으로 소득수준이 더욱 향상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수록 점차 확산될 게 분명한 유기농 식품 사업을 영위하는 초록마을의 전망도 매우 밝습니다. 식자재 유통 사업과 오랜 해외 조림 사업 끝에 이제 막 생산을 개시한 인도네시아 팜오일 사업도 장기적으로 매출 성장과 수익 확대에 크게 기여하리라 믿습니다. 아직도 빠진 것들이 더러 있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지요. 회사의 주요한 사업 내용과 미래 전망에 대한 보다 자세한 힌트들은 이미 '사업보고서'에도 상세히 나와 있으며, 동네 이마트 매장에 가서 여러 제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결국 먼 미래에는 모든 게 여러모로 지금과 달라져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업이나 주가나 사람이나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요. 아무쪼록 '좋은 방향으로' 변해 있길 바랄 뿐이지요. 아래의 그림들을 얼마쯤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래 기업들은 '환골탈태'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답니다.

 

3년 3개월 만에 30배가 오르다니요!
3년 10개월 만에 15.9배가 오르다니요!

 

그게 주식이랍니다.

 

 

* 삼립식품의 최근 1,000일 동안의 주가 추이

 

 

* 한샘의 최근 1,000일 동안의 주가 추이 

 

그러고 보면 벤저민 그레이엄이 1949년에 세상에 맨 처음으로 내놓았던『현명한 투자자』의 맨 끝 구절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평소 신중하면서도 기민한 자세로 대처하는 모든 현명한 투자자에게 이와 유사한 화려한 경험을 약속할 수는 없다. 우리는 시작할 때 우스개 소리로 했던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J.J.Raskob의 슬로건으로 끝맺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증권시장에는 흥미로운 가능성들이 넘쳐나니, 현명하고 적극적인 투자자는 이 떠들썩하고 즐거운 서커스에서 즐거움과 이익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흥분의 도가니를 보장한다.

 

두서도 없는 기나긴 글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모든 분들께 크나큰 행운이 따르기를~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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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5-04-05 00:45   댓글달기 | URL
한참만에 뵙습니다 oren님 ^^
안그래도 삼립식품은 요즘 제가 놓친 아쉬움에 땅을 치고 있는 종목이라 관심있게 읽었네요.` 기본적` 분석에 충실해야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늘 망각하니 그런가 봅니다.

oren 2015-04-05 12:40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야클 님~

저도 삼립식품은 관심만 가져봤을 뿐 침도 못 발라봤어요. ㅎㅎ

어느날 문득 4만원대까지 오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재무제표도 몇 번씩 들여다보고, 동네 편의점에 가서 `삼립식품`에서 나온 제품들 가운데 인기를 끌고 있는 상품들이 어떤 게 있는지도 물어봤구요. 그런데도 좀 더 깊이 연구하지 못해 결국 30만원이 되도록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답니다.

허니버터칩이 그렇게 인기가 좋다고 해서 크라운제과도 한참 들여다봤는데 결국 손도 대지 못했구요. 어제 자주 가는 동네 도서관 앞 편의점에 가서 ˝허니버터칩 있어요˝ 하고 알바 여학생한테 물어봤더니 ˝이런 데까지 허니버터칩을 깔아주지는 않는다˝는 요상한 대답을 하더라구요. 이른바 감질나게 공급하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나요.. 그래서 전 여태까지 허니버터칩은 구경도 못해봤답니다. 참 맛있다던데 말이지요..

요즘은 마침 `실적 발표 시즌`이라 기업들의 변화된 실적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플 지경이네요. 숫자로 빼곡한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는 일도 `눈이 벌개서` 할 때가 있긴 있더라구요. 돈이 되니까 말이지요. ㅎㅎ

yamoo 2015-04-06 18:29   댓글달기 | URL
캬~~ 저 곡선들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줄창 보낼 때가 있었지요. 떨어지는 칼날은 받는 게 아니라던 말을 새기면서도 멍청한 짓을 한 것도 생각나고...그래도 주식해서 손해 보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마지막에 손해를 좀 보긴 했지만 평균적으로 30퍼센트의 이익은 보았던 거 같습니다. 마지막에 너무도 큰 투자를 했기에 손실이 커서 그렇지 전체적으로는 괜찮은 투자를 했다고 평하며, 주식은 빠이빠이 했습니다.

근데, 오렌님 페이퍼에서 주식 그래프를 보고 엔날 생각이 잘 줄이야...^^;;

주식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던 거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2009년 무렵)에 관심가졌던 종목이 LED였었는데, 최근에 보니 관련 종목들이 많이 뛰었더군요. 어쨌든 오랜님의 전문 분야의 페이퍼를 보니 의외로 반갑네요!ㅎ

oren 2015-04-07 16:28   URL
yamoo 님 반갑습니다. yamoo 님께서 이런 뜻밖의 댓글을 달아주실 줄이야...ㅎㅎ

주식은 참 `양날의 검`인 듯해요.. 잘만 투자하면 여간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게 아니죠.. 돈까지 벌면서 말입니다. 저야 뭐 전공이 경영학이다보니 자연스레 <투자론>도 배우고, 학창 시절부터 `명동 증권가`를 들락거리며 일찌기 실전 투자를 경험했고, 졸업 이후엔 투자신탁회사로 들어가 애널리스트도 해 보고, 펀드매니저도 해 봤으니, 사실상 `전문 투자자`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만.. `지식과 경험`이 뒤따르지 않으면 참으로 성공 확률이 낮고 위험천만한 곳이 `주식 투자 영역`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에 와서 문득 지난 과거를 되돌아 보니 한국증시의 시가총액이 100조원 남짓 할 무렵에도 증권시장에 발 담그고 있었고, 그 땐 저도 1조 6,00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굴리며 제법 힘깨나 쓰던 시절도 있었구나 싶어요. 그런데 그게 벌써 20년 전 옛 일이네요..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엔 그저 누가 뭐라든 오로지 나의 판단과 분석에만 오롯이 의존하는 `은둔형 투자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든답니다.. ㅎㅎ
 

 

 

 

 

 

 

 

 

 

 

 

 

 

 

 

 

희극적 공상은 심하게 탈선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 광기와 같은 것에도 조리가 있다. 꿈을 꾸는 듯하지만 곧 사회 전체에 승인이 되고 이해가 되는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희극적 공상이 인간의 상상작용에 관해서, 특히 사회적·집단적·민중적인 상상의 작용에 관해서 어찌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없겠는가? 실제의 삶에서 나온 예술과 닮은 그것이 어찌 예술과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없겠는가?

  - 앙리 베르그송, 『웃음』

 

 

 * * *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겐 해마다 열리는 축제가 국가적인 중대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에 내몰릴지라도 축제를 생략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던 듯하다. 축제가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는 행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연극 공연'이었다. 저 유명한 3대 비극작가의 '고대 그리스 비극'은 물론이고 '온갖 풍자와 저질스런 농담들이 가득찬 희극'도 바로 그때문에 쓰여지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어떻게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들은 한가로이 축제를 열고 또 연극 공연까지 즐길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들은 참으로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이었구나.

 

그런데 그 까마득한 옛날에 공연된 작품들을 2,500번의 여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우리말로 번역된 글로서만' 접하는 게 고작인 우리로서는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당시에도 물론 스타 작가들이 있었다는 건 능히 알겠는데 그와 더불어 '스타 배우'들도 당연히(?) 있었는지, 작품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무대장치와 합창단의 노래 실력은 과연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 때 공연된 작품들 가운데 수많은 명대사들이 여러 문학 작품에 무척이나 자주 인용된 사실은 알겠는데, 과연 요즘과 달리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인터넷도 없었던 그 당시에, 축제때 딱 한 번 공연된 드라마를 두고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자주 이야깃거리로 삼았는지 등등.

 

그런데 나로서는 그런 표면적인 문제들보다 훨씬 더 궁금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비극과 희극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왜 고대 그리스 비극들은 우리들에게 그토록 익숙하고도 잘 알려진 데 비해 희극은 턱없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희극은 비극에 비해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생소한가. 고대 그리스 희극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점들이 자꾸만 내 마음속을 맴도는 바람에 그걸 스스로 해명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기가 그리 쉽지는 않으리란 걸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아무리 고대 사람들이라고 해도 늘상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엄청난 비극'에만 유난히 더 관심과 애정을 쏟고 즐겼을 리는 만무했을 테고, 그들도 때로는 희극 공연을 통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실컷 웃어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희극을 보면서 '몹시도 미운 털이 박힌 놈들'을 실컷 골려주고 혼내주는 모습을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았을 텐데 그들은 도대체 왜 '비극'에만 유난히 더 골몰하고 그 작품들을 칭송하기 바쁜 반면, 희극은 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언제나 한켠으로 제쳐둔 느낌이 드는 것일까. 희극 작품들은 왜 비극 작품들에 비해 늘상 가벼워 보이고 심지어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일까.

 

그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리고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들을 '낄낄거리거나 키득거리지도 못한 채' 심지어 낑낑거리며 읽고 있을 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책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웃음'이라는 희한한 주제를 '드물지만 제대로' 고찰한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이라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 프랑스 철학자가 쓴 『웃음』이라는 책이야말로 '웃음'을 머금으며 읽을 수 있는 책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기묘한 책이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웃음'을 지상과제로 삼는 '고대 희극 작품'을 읽으면서 도대체 '웃음'이 제때 터져나오지 못해 줄곧 끙끙거리며 그걸 읽었던 마당에, 그 '웃음'의 정체가 궁금해서 다시금 일부러 찾아 읽은 『웃음』이라는 책은 한술 더 떠서 '웃음'을 싹 가시게 만드는 책이라니... 이거야말로 갈수록 첩첩산중이고 오리무중이 달리 없었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쓴 그 묘하고도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하나둘씩 어둠속에서 슬며시 정체를 드러내듯이 마구 술술 풀려나오는 모습들을 확인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무릎을 칠 듯한 묘한 기쁨을 느꼈고,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들을 읽으면서 제때 제대로 웃지 못해 속상해 하고 답답해 했던 그 정체 모를 감정들을 한층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비로소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참 일이 묘하게 풀렸던 셈이다.(어떤 책이든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바로 그때'와 제대로 마주치게 되면 그 책을 읽는 재미가 확실히 몇 배로 더 증폭되는 듯하다.)

 

내 이야기가 어쩔 수 없이 파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곁뿌리까지 너무 멀리 뻗어나간 듯하다. 다시 이야기를 본래 줄기로 끌고 오자. 고대 그리스 비극은 대체로 익숙한 데 비해 고대 그리스 희극은 그토록 낯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 '줄기' 말이다. 그 이유를 찾고 나면 비극은 오랫동안 깊은 각인을 남기고 희극은 자주 생겨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마는 물거품과 닮았다는 사실이 고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까지도 자연스레 해명될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 희극은 비극보다 우리에게 훨씬 낯설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두 예술 장르가 지닌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우리들 이상의 악인'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데 비해, 희극은 '보통 이하의 악인'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으니까 말이다. 쉽게 말하면 비극은 무엇보다도 우선 '매우 특별한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희극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러니 비극이 어찌 '특별'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베르그송도 특별히 강조했듯이) 비극작품과 희극작품은 '제목'부터가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등과 『구름』,『새』,『개구리』,『심술쟁이』,『삭발당한 여인』등등을 어찌 한 저울의 양쪽 접시에 동시에 올려 놓고 그 무게를 서로 비교해 볼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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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요약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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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술 장르 사이에 놓인 이런 중대한 차이를 명쾌하게 밝혀놓은 최초의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이므로 이 대목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그 유명한 통찰을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방의 대상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31∼32쪽)

 

희극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보통 이하의 악인의 모방이다. 이때 보통 이하의 악인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악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 즉 우스꽝스런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인데 우스꽝스런 것은 추악의 일종이다. 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우스꽝스런 가면은 추악하고 비뚤어졌지만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45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중에서

 

 

여기에 더해 '비극'은 또한 '희극'이 결코 넘보기 어려운 '멋진 선물'을 관객들이나 독자들에게 제공해준다. 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최초로 담겼는데, 우리는 여기서 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진 그 고귀한 책을 직접 우리말로 옮긴 천병희 선생님의 '친절한 해설'을 통해 좀 더 쉽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극의 목적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얻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14∼15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옮긴이 해설> 중에서

 

 

사정이 이렇다 보니 '희극'은 '비극'에 비해 자꾸만 여러모로 '스펙'이 딸리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더구나 희극은 본질적으로 '웃음'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인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적했듯이 본질적으로 '저속함'이나 '풍자'와 '조롱'을 동반하가 쉽다. 그러니 예로부터 '고상함'을 중시하고 추구했던 많은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얼마쯤 외면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물론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희극의 범주를 문학 일반으로까지 좀 더 확장시킨다면 말이다. 당장 소설『돈키호테』만 떠올려 봐도 충분하다. 수많은 문학가들이 격찬하고 베르그송도 당연히 거기에 적극 동조했듯이, 세르반테스가 지어낸 그 소설은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끌어들이기 쉬운 온갖 '독소적인 요소들'을 거의 다 배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유쾌한 웃음'을 불러 내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웃음'만 끊임없이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그 숱한 웃음 뒤에 남겨진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격한 감동'까지 숨겨놓았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는 특별히 경이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 거대한 감동을 좀 더 거창하게 표현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돈키호테의 모험과 착각 속에서 '인류의 거대한 진화의 발걸음'을 엿보는 느낌이 든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어쨌든 파고들수록 '희극'이 비극에 비해 숙명적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는 여러 불리한(?) 점들에 대해서도 빈틈없는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물쩍 넘어갔을 리는 만무하다. 내가 궁금해 했던 점들 가운데 하나인 '왜 희극은 비극보다 훨씬 더 푸대접을 받는 느낌이 드는가'에 대한 해명 또한 바로 여기서 손쉽게 발견되는 듯하다.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열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詞, enkomion)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38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중에서

 

 

 익살꾼, 저속한 사람

 

우스갯소리를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사람들은 '(저급) 익살꾼', '저속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려고만 하며, 고상한 것을 이야기하거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보다는 폭소를 만들어 내는 것에 더 마음을 쓴다.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우스운 이야기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촌스러운 사람', '경직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 적절하게 농담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방향을 빨리 바꾸는 사람(eutropos)처럼(회전이 빠른 사람처럼) '재치 있는 사람(eutrapelos)'이라고 불린다. 이런 종류의 농담들은 품성상태의 움직임(kinēsis)으로 보여, 마치 신체가 신체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듯, 그렇게 품성상태 또한 이러한 움직임으로부터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을 만한 일은 도처에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땅한 것 이상으로 놀이나 조롱하는 일을 즐기기에, 사람들은 저속한 익살꾼마저 즐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양자는 엄연히 다르며, 그것도 적지 않게 다르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를 보면 분명하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 <제8장 재치> 중에서

 

 

고대 그리스 희극이 그에 비교되는 비극 작품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낯설면서도 왠지 모를 가벼운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들에 대해서는 대략 이 정도의 탐구만으로도 충분할 듯싶다. 물론 다른 뛰어난 책들에서 더 훌륭한 설명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리는 건 내가 의도하는 바도 아니고 내 능력에서도 너무나 멀리 벗어나는 일이니 나로서는 상관할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희극들이 일반적인 예상보다 훨씬 재미가 없는가 하면 꼭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닌 듯하다. 물론 그 작품들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난 재미'를 주는 작품들이었음에 틀림없을지라도 '기나긴 시대'를 건너뛴 탓에 어느새 우리에게는 저절로 낯설게 변하고 말았으며, 그래서 당연히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웃음'이 거기에 너무 많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입장을 조금만 바꿔놓고 생각해 봐도 그점은 명백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웃음보를 아주 손쉽게 터트리는 온갖 '웃기는 개그들' 가운데 과연 얼마쯤이 몇 백년 후에 태어날 우리의 후세들까지도 '제때 제대로' 속시원히 웃길 수 있을까.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한 사회의 습속이나 관념과 연관되어 있음이 몇 번이고 강조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이중의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은 익살 속에서 정신이 흥겨워하는 단순한 호기심과, 다른 인간 활동과는 무관한 유별나고 고립된 현상만을 보아왔다. 그래서 '관념들 속에서 인정된 하나의 추상적 관계', 즉 '지적 대조'라든가 '감각적 부조리' 등으로 희극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비록 실제 희극적인 것의 온갖 형태에 들어맞는다고 해도, 왜 그것이 우리를 웃게 하는지를 조금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 앙리 베르그송, 『웃음』 중에서

 

 

이렇듯 온갖 난관들이 잔뜩 버티고 있는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들을 우리가 애써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던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을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도 고대의 희극 속에서 발견하는 소득이 결코 사소할 수는 없다.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가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을 읽는 독해 능력이 너무 뒤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걸 나무랄 사람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가 얻은 수확을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이렇다.

 

우선, 무엇보다도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희극 작품이 아니었다면 결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고대인들의 민낯'을 비로소 아주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희극 속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이나 역사책 혹은 철학책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평범한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들 역시 '똥이나 오줌 등 배설물'을 입에 올리며 낄낄대고, 그들 역시 '남녀간의 교접을 둘러싼 온갖 음담패설'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책에서 '인간의 성(性) 문제'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진화심리학적 통찰'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대목 하나가 지금 문득 떠오른다.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성(性)을 둘러싼 웃음'이 얼마나 다채롭게 각색될 수 있을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체스터필드 경은 성에 대해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자세는 우스꽝스럽고, 비용은 지독하다."고 말했다.

 

내가 발견한 두 번째 소득이라면 고대인들 역시 스티븐 핑커가 말했던 이른바 '위엄의 격하'를 통해 유난히 즐거워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한『구름』은 심지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는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연극이 공연될 당시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는 소크라테스'는 희극 속에서 '말장난으로 남에게 진 빚 떼어먹는 언술을 가르치는 사이비 선생' 정도로 격하된다. 그렇게 훌륭한 인물을 그토록 실랄하게 풍자하고 조소하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또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크레온'을 틈날 때마다 여러 작품 속에 등장시켜 끊임없이 비난하고 비웃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비극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우리피데스까지도『개구리』라는 작품 속에 등장시켜 그가 지닌 '위엄'을 깎아내리며 즐거워한다. 이런 점들을 두루 살펴 보자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야말로 예술 창작에 있어서나 실생활에 있어서나 '예속'을 몹시도 싫어했던 기질 답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표현의 자유'를 만끽했던 듯하다.

 

위엄의 격하


위엄의 격하는 또한 성적이고 외설적인 유머의 보편적인 매력을 뒷받침하는 기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위트는 알공킨 원탁모임보다는《애니멀 하우스》에 더 가깝다. 샤농은 야노마뫼족의 가계조사를 시작할 때, 저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그들의 터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샤농은 피조사자들에게 저명한 개인의 이름과 그 친척들의 이름을 귀에다 속삭이라고 요청했고, 그 때문에 어색한 과정을 몇 번씩 반복한 후에야 이름을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이 거론된 사람이 샤농을 노려보고 구경꾼들이 킥킥대고 웃으면 샤농은 안심하고 그의 진짜 이름을 기록했다. 몇 달에 걸쳐 정성스럽게 가계를 정리한 후 이웃 부락을 방문하던 중에 샤농은 자랑삼아 그곳 추장 부인의 이름을 불쑥 꺼냈다.

순간 싸늘한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온 마을이 걷잡을 수 없는 웃음, 목메임, 헐떡거림, 아우성에 빠졌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비사시테리의 추장이 "털 많은 성기'와 결혼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뿐 아니라 나는 추장을 '기다란 음경'으로, 그의 형제를 '독수리 똥'으로, 그의 한 아들을 '병신 같은 놈'으로, 그의 딸을 '방귀 냄새'로 부르고 있었다. 다섯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가계조사를 한 결과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관자놀이에 피가 솟구쳤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중에서

 

 

내 몸에 밴 고약한 습성이 좀처럼 떠날 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이 자꾸만 엉뚱한 데로 달아나려고 헐떡거리고 있다. 정말 이쯤에서 마무리짓자. 비록 할 말은 많이 남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여태껏 '고대 그리스 희극'을 구경도 못해 본 독자가 제법 있으리라는 주제넘은 확신을 품으며 그들을 위해 '고대 희극' 한 대목을 소개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 끌어오고 싶은 작품은 『뤼시스트라테』이다. 먼저 천병희 선생님의 친절한 작품 소개부터 들어 보자.

 

 

기원전 411년 아테나이인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위기감이 감돌았으니, 시칠리아 원정 함대는 기원전 413년 괴멸하고, 아테나이 제국에 종속되어 있던 동맹국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으며,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와 유리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나이인들은 나라가 당장 붕괴할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니라 해도,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타협을 통하여 평화조약을 맺고 싶어 했는데, 이 희극은 아테나이인들의 이같은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

 

남자들이 전쟁을 종식시킬 가망이 없어 보이자, 뤼시스트라테는 여자들이 사태를 장악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남편들에게 교접을 거부하는 성(性)파업을 하고, 둘째,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여 그곳의 파르테논 신전에 적립해둔 전쟁 기금을 쓸 수 없게 함으로써 남자들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너무나 지겨워 여자들이 '섹스 파업'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담은 이 유명한 희극은 오늘날 '전쟁에 신물이 난' 여자들이 진짜로 '섹스 파업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2,500년 만에 다시금 주목을 받은 '놀라운 경력'을 자랑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진짜로 일어날 법한 일을 희극으로 꾸며낼 수 있는 작가의 상상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어쨌든 '섹스 파업'이라는 몹시도 흥미로운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공연윤리심의'조차 거치지 않은 듯 '수위높은 적나라한 대사'를 통해 그 당시 국가적 종교행사때 대중들에게 공연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놀랍기만 하다.

 

이 작품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섹스 파업 제안 설명'은 대략 이렇게 진행된다.

 

 

뤼시스트라테   여인들이여, 평화롭게 살도록 남편들을 강요할 요량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삼가야 해요.

 

     칼로니케   뭐를요? 말해봐요.

 

뤼시스트라테   그렇게 하겠어요?

 

     칼로니케   그렇게 할게요.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예요.

 

뤼시스트레테   앞으로 우리는 남근을 삼가야 해요.

                       (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면서 몇 명은 떠나려고 돌아선다.)

                       왜들 돌아서는 거죠? 어디로 가려는 거죠?

                       왜들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흔드는 거죠?

                       왜들 안색이 변하며, 왜들 눈물을 흘리세요?

                       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왜들 망설이죠?

 

     칼로니케   난 못해요. 전쟁이야 계속되든 말든.

 

     뮈르리네   제우스에 맹세코, 나도 못해요. 전쟁이야 계속되든 말든.

 

뤼시스트라테   이 넙치야, 그따위 말을 하다니! 방금 자신의 몸을

                       두 쪽으로 자르겠다고 하더니.

 

     칼로니케   다른 것이라면 뭐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불속에라도 뛰어들겠어요. 남근을 삼가느니 그편이 낫겠어요.

                       세상에 그만한 것은 없으니까요, 뤼시스트라테.                       

 

뤼시스트라테   (다른 여자 쪽으로 돌아서며)

                       그대는 어때요?

 

    다른 여자   나도 불속에 뛰어들래요.

 

 

 -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120∼137행

 

 

처음에는 이렇듯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여인들도 결국 '전쟁 대신 평화'를 얻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기로 맹세한다. 그 장면 또한 여간 웃기는 게 아니다. 선창자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지역 대표들의 '선수 선서'를 연상시키는 듯해서 더욱 재미있다.

 

 

뤼시스트라테   , 람피토, 그리고 모두들 술잔을 잡아요. 그리고 누구

한 명이 여러분을 위해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걸 맹세하고 확인하세요.

(엄숙하게)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자는 어느 누구도···.'

 

     칼로니케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자는 어느 누구도···.'

 

뤼시스트라테   '꼿꼿이 세우고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따라 해요!

     칼로니케   '꼿꼿이 세우고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맙소사! 난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아요, 뤼시스트라테!

 

뤼시스트레테   '집에서 나는 숫처녀처럼 지내겠습니다.'

     칼로니케    '집에서 나는 숫처녀처럼 지내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사프란색 가운을 입고 화장을 한 채.'

     칼로니케    '사프란색 가운을 입고 화장을 한 채.'

 

뤼시스트라테   '남편이 나를 몹시 열망하도록 하겠습니다.'

     칼로니케   '남편이 나를 몹시 열망하도록 하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나는 결코 자진하여 내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결코 자진하여 내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뤼시스트레테   '내가 싫다는데도 그이가 완력으로 강요한다면···.'

     칼로니케   '내가 싫다는데도 그이가 완력으로 강요한다면···.'

 

뤼시스트라테   '나는 재미없게 해주고 요분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재미없게 해주고 요분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나는 천장을 향하여 다리도 들지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천장을 향하여 다리도 들지 않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나는 치즈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엉덩이를 들고 웅크리지도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치즈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엉덩이를 들고 웅크리지도 않겠습니다.'

 

 -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209∼232행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넓은 의미의 '정치'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바람에 당대의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 같은 위대한 인물들까지도 무차별로 희극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여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게다가 노골적인 성행위와 배설물을 너무 자주 언급하는 바람에 그는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메난드로스로 대표되는 '앗티케 신희극'인 '풍속 희극'에 주도권을 내주고 밀려 난다. 그렇지만 그의 위상은 그런 정도의 흠결과 한 때의 인기 상실로는 결코 깎아내리기 힘들 만큼 '희극'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드높기만 하다.

 

그러나 일단 그의 생기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작품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랑프리에르(John Lemprière)는 『고전 사전』(Classical Dictionary)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이다. 그에 비하면 몰리에르(Molière)는 무뎌(dull) 보이고, 셰익스피어는 어릿광대 티가 난다(clownish)"고 말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 '옮긴이 서문' 중에서

 

오래 전부터 넘보던 '고대 그리스 희극'을 최근에 어렵사리 읽긴 했지만 그래도 보람이 적지는 않았다. 특히 웃기는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수많은 주석'을 살피느라 몹시 바쁘고, 기껏 주석까지 꼼꼼히 찾아 읽어도 '웃음이 제때 잘 터져 나오지 않는 아쉬움' 또한 달랠 길이 없었는데 이런 고충 때문에 이번에 베르그송의 『웃음』을 찾아 읽게 된 건 여간 보람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 대해서는 대략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이 글을 쓰자니 문득 어제 TV를 통해 잠깐 봤던 <웃찾사> 프로그램의 인기 코너인「서울의 달」이 생각난다. 촌사람이 서울에 올라와 살기도 참 고달프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2,500년 전에 쓰여진 고대의 희극 작품을 읽는 일도 결코 쉽지는 않다 싶다. 그래도 이런 작품들을 통해 '옛 사람들의 해학'을 아주 바싹 다가가 살펴보는 일은 여간 흥미롭지 않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한다고 그리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경상북도 무성리에서 올라온 내 일년 밑에 후배'의 말로 마무리하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거 아입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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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21 22:28   댓글달기 | URL
<뤼시스트라테>는 수위 높은 삽화도 유명해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의 삽화를 그린 비어즐리도 <뤼시스트라테>의 삽화를 그렸는데요, 그림이 상당히 적나라해요. 남근이 그려져 있고 여자 인물들이 거의 나체로 나옵니다.

oren 2015-03-22 11:42   URL
《뤼시스트라테》라는 작품을 다룬 삽화도 있었군요.저는 그런 얘기를 여태껏 전혀 들어보지 못했네요..
희극 자체가 `섹스냐 평화냐`를 두고 남편들과 아내들이 서로 밀당을 주고 받는 게 주된 내용이어서 그런지 `그림`으로 그려놓아도 적잖이 재미있을 듯해요. cyrus 님께서 소개해 주신 그림들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웃음 / 창조적 진화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동서문화사 월드북 74
앙리 베르그손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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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광석과 금속

 

웃음은 사회적인 의의와 효력을 지니며, 희극성은 무엇보다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어떤 특수한 부적응을 표시한다는 것, 즉 인간을 빼놓고 우스움이란 없다는 사실, 이를 확신하면서 우리가 우선 목표로 삼은 것은 인간과 그 성격이다. 따라서 곤란한 문제는 오히려 왜 성격 이외의 무언가를 대하고 웃는 일이 있는지, 또 어떤 미묘한 침투나 결합 또는 혼합 현상을 통해 희극성이 단순한 운동으로, 비인격적인 상황으로, 독립된 문구로 스며드는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해 온 일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순수한 금속이 주어졌고, 우리의 노력은 한결같이 광석을 재구성하는 일에만 기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가 연구하려는 것은 금속 그 자체이다.(79쪽)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

 

타인의 인격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했을 때야말로 희극은 시작될 수 있다. 사회생활에 대한 경직으로 불러도 될 만한 행동에서 그것은 시작된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만을 자동적으로 더듬어가는 인물은 희극적이다. 이런 사람의 방심을 다잡기 위해, 그를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 웃음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80쪽)


사회적 신입생에 대한 괴롭힘

 

만일 작은 일을 큰 일에 비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사관학교라든가 사범학교 같은 곳에 입학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이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이란 힘든 고비를 넘긴 수험생 앞에는 더 큰 산이 남아 있다. 바로 선배들이 그를 새로운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군기를 잡기 위해 마련한 과정이다. 큰 사회 속에 형성된 작은 사회라 할지라도 모두 이처럼 막연한 본능에 따라 이제까지 몸에 밴, 그러나 이제는 고쳐야 하는 습관의 경직성을 바로잡고 풀어주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본디 의미에서 사회란 것도 이와 별다르게 작용하지 않는다. 사회의 각 구성원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위 사람들을 거울삼아 자아를 형성한다. 즉 상아탑 속에 틀어박히듯이 자기 성격 속에 틀어박히는 것을 피한다. 그리고 사회는 각 구성원에게 교정하라는 협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굴욕의 예측을 늘 심어준다. 그 굴욕은 비록 경미한 것이라도 두려움의 대상이다. 웃음의 역할은 그와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웃음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언제나 얼마쯤의 굴욕을 준다. 사회적 신입생에 대한 괴롭힘인 것이다.(80쪽)

 

 

희극이 드라마보다도 현실 생활에 가까운 이유

 

연극에서조차도 웃음에서 오는 즐거움은 순수한 쾌락, 즉 절대적으로 이해 관계를 초월하고 한결같이 심미적인 쾌락은 아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지 않은 때에도 사회가 우리를 위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저류가 섞여 있다. 웃음에는 말은 하지 않을망정, 그 대상에게 창피를 줌으로써 적어도 외면적으로나마 바로잡아 주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희극이 드라마보다도 현실 생활에 가까운 것은 그 때문이다. 걸작 드라마일수록 작가가 현실에 있는 비극을 순수한 상태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현실에 가해야 할 분석적 재구성은 심오한 법이다. 이에 반해서 희극이 현실적인 것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는 것은 오로지 그것의 저급한 형태, 즉 보드빌(가벼운 희극)과 펄스(웃음극)에 있어서뿐이다. 그것이 고급이 되면 될수록 희극은 더욱더 생활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고,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무대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고급희극에 가까운 현실 생활의 장면이 얼마든지 있다.(80∼81쪽)

 

 

결점과 웃음

 

흔히 다른 사람의 가벼운 결점이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고 한다. 이 주장이 대체로 진리임은 나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엄밀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첫째로, 결점에 대해서도 경미한 것과 중대한 것과의 사이에 한계를 두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결점이 다분히 경미하기 때문에 우리를 웃기는 것은 아니고, 우리를 웃기기 때문에 그 결점을 경미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웃음만큼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나 더 나아가 중대한 것인 줄 잘 알면서도 우리를 웃기는 결점도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는가?(81쪽)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

 

엄밀하게 말해서 희극적인 동시에 도덕적일 수는 있다. 아르세스트의 성격은 완벽한 궁정신사와 같다. 그러나 그는 비사교적이며, 바로 그 때문에 희극적이다. 유연한 결함보다는 완고한 미덕을 희극화 하는 편이 쉬울지도 모른다. 사회가 의심스런 눈으로 보는 것은 이 경직이다. 따라서 아르세스트의 경직이 정직함에 다름없는 것일지라도 우리를 웃기는 것이다.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은 누구이건 농담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것은 희극성이 대부분 이 틀어박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희극성이 종종 습속이나 관념-정확히 말해서 사회의 편견과 대단히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설명된다.(82쪽)

 

 

웃음은 감정과 양립할 수 없다

 

희극성은 순수 이지에 호소하는 것이다. 웃음은 감정과 양립할 수 없다. 어떤 작은 결점이라도, 만일 여러분이 나의 동감, 공포 또는 연민의 정을 움직이며 그것을 드러낸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이제 그것에 대해 웃을 수가 없다. 반대로 뿌리 깊고 흔히 말해서 신물이 나는 악덕을 골라보라. 만일 여러분이 적절한 기교로 그 악덕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여 내 마음이 동요치 않도록 한다면, 악덕을 희극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악덕이 무조건 희극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희극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희극성을 창조하는 데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정말로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다.(82쪽)

 

 

희극의 몸짓

 

극작가가 한 영혼의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단순히 그것을 관객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할 의도로 묘사해 보일 때에는, 그것을 그 정확한 치수를 나타내는 동작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게 한다. 그리하여 수전노는 돈 버는 일을 안중에 두고 만사를 계획하고, 거짓으로 독실한 신자는 하늘만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되도록 교묘하게 지상의 일에 분주한 것이다. 희극은 확실히 이러한 잔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타르튀프의 간계를 그 증거로 들어두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은 희극이 드라마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점이다. 드라마와 구별되기 위해, 진지한 동작을 우리가 진지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즉 웃을 수 있도록 우리를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희극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된 하나의 수단을 사용한다. 그것은 우리의 주의를 행위 그 자체에 집중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몸짓으로 향하게 한다. 여기에서 몸짓이란 목적도 없고, 이득도 없고 단지 내적인 근질근질한 작용에 의해서 어떤 정신 상태가 표명되는 그런 태도, 거동, 그리고 말까지 가리킨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면 몸짓은 동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동작은 계획된 것이고 아무튼 의식적인 것이다. 반면 몸짓은 무심코 나타나며 자동적인 것이다. 동작을 부여하는 것은 온 인격이나, 몸짓은 인격의 고립된 부분이 나머비 부분이 모르는 사이에 또는 적어도 분리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의 주의가 행위가 아니라 몸짓으로 향하자마자 우리는 희극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것이다.(84∼85쪽)

 


 

방심이 뿌리 깊으면 깊을수록 희극성은 더욱더 진해진다

 

요컨대 어떤 성격이 좋건 나쁘건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보았다. 비사회적이기만 하면 그것은 희극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태의 중대성은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음도 보았다. 중대하건 사소하건 우리가 그것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인물의 비사교성과 관객의 무감동성, 요컨대 이것이 본질적인 두 조건이다. 이들 두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세 번째 조건은 바로 이제까지 우리의 분석이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동 현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 연구의 첫머리에서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점에 주목해 왔다. 대체로 본질적으로 우스운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사항뿐이다. 결점에서나 아름다운 점에서조차도 우스개는 인물이 알게 모르게 해버리고 마는 것, 본의 아닌 몸짓이거나 무의식적인 언어이다. 방심은 모두 희극적이다. 그리고 방심이 뿌리 깊으면 깊을수록 희극성은 더욱더 진해진다. 돈키호테의 방심처럼 조리가 있는 방심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맨 밑바닥 가까운 곳에서 꺼내 온 희극성 그 자체이다. 다른 희극적 인물을 누구건 택해서 보라. 그 말하는 것, 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아무리 의식적일 수 있었다고 해도, 그가 희극적이라고 하는 이상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인간적인 일면, 즉 그 자신의 눈에 띄지 않는 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점으로만 그가 우리를 웃기는 것이다. 깊이 있는 희극적 경구는 무언가 결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가식 없는 문구이다. 만일 스스로 자신을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85∼8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돈키호테』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그 작품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한 바로 그 '뿌리깊은 방심'을 깨트리기 위해, 스스로 '편력기사'를 자처하면서, '낡은 갑옷과 투구와 창과 늙은 말을 타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구하러 나선 돈키호테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다니... 그 자체가 또한 얼마나 희극적인가 말이다.

 

"나는 이 영웅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독창성보다 더 심오한 독창성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인생은 인습과 관행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존의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양식에 맞춰진다. 그러한 삶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습관에 자신을 내맡겼거나 현실 문제에 사로잡힌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그 일부를 떼어내는 과정이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 성찰』)

 

 

부주의

 

어느 행동을 희극적 인물이 말로 비난하면서 바로 뒤에 그 실례를 보여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주르댕 씨의 철학 교사가 화내는 것을 나무라는 설교를 한 그 입으로 바로 화를 벌컥 내는 것이나, 자기가 쓴 시를 읊는 사람들을 매도한 뒤에 바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는 바디위스 등이 그 예이다. 자신에 대한 부주의, 따라서 타인에 대한 부주의, 그것을 우리는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태를 자세하게 음미해 본다면 그 부주의가 바로 이 경우 비사교성으로 불리는 것과 하나가 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경직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람이 자신의 주변, 특히 자기 내부로 눈을 돌리는 일에 소홀한 것이다. 만일 타인을 알고 또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본보기 삼아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겠는가? 경직, 자동 현상, 방심, 비사교성, 그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성격의 희극성이 완성되는 것이다.(86쪽)

 

희극의 본질

 

갖가지 성격, 다시 말해 여러 일반적인 유형을 묘사하는 것이 하이코미디의 목적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오래도록 말해 온 사실이지만, 여기서 특별히 되풀이해 두고 싶다. 이 공식만으로도 희극을 정의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희극은 우리에게 일반적 유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생각건대 온갖 예술 가운데 일반적인 것을 노리는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 희극에 이 목적이 있는 것으로 정해지면, 희극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 된다. 그것이 바로 희극의 본질이며, 따라서 희극이 비극과 드라마를 비롯한 그 밖의 예술 형태와 대립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그 가장 높은 형태로써 정의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서서히 희극시로 내려가면, 희극이 예술과 생활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반성이라는 그 성격에 따라 다른 예술과 확실하게 대조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87쪽)

 

예술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술의 목적은 무엇인가? 만일 현실이 직접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와 닿는다면, 만일 우리가 사물과 직접 의사 소통할 수 있다면, 예술은 쓸모없는 것이 되거나 오히려 우리가 모두 예술가가 되거나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는 우리의 정신이 끊임없이 장단을 맞추어서 진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기억의 도움으로 모방할 수 없는 그림을 공간 속에서 잘라내 시간 속에 붙여둘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가는 길에도, 고대의 조각상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조각상의 단편들이 인체라는 산 대리석에 새겨져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영혼 깊숙이에서, 때로 쾌활하지만 대개는 구슬픈, 그러면서도 언제나 참신한 음악처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내적 생명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 주위에 있고, 우리 내부에 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의 어느 것도 확실하게 우리에게 지각되지는 않는다. 자연과 우리 사이에는,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의식 사이에는 하나의 장막이 가로놓여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두터우나, 예술가나 시인에게는 얇고 거의 투명에 가까운 장막이다. 어떤 선녀가 이 장막을 짠 것일까? 악의를 가지고 짠 것일까, 아니면 호의로 짠 것일까? 사람은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삶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사물이 지니고 있는 관계에서 우리가 그 사물을 터득하길 요구하고 있다.(87∼88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주장한  '예술철학'과 적잖이 닮았다. 베르그송이 여기서 언급한 '장막 이론'은 언뜻 쇼펜하우어가 그 책의 후반부에서 자주 언급한  '마야의 베일'을 떠올리게도 한다.

 

 

웃음

 

산다는 것은 행위한다는 것이다. 생활을 함은 사물에서 적절한 반작용으로 그것에 응하기 위해 유용한 인상만을 받는 것이다. 그 이외의 인상은 희미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막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주의 깊게 보면서 그저 본다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그저 듣고만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관찰하면서 마음속까지 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 대해서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단순히 나의 행위를 비추기 위해서 나의 감각이 외부 세계에서 추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 또한 가볍게 표면을 스치는, 내 행동에 실제로 연관된 사항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나 나의 의식은 현실에 대해 단지 그 실룡을 위해 단순화된 것만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사물과 나 자신에 대해서 부여하는 전망 속에는, 인간에게 무용한 차이는 지워지고 인간에게 유용한 유사함은 강조되어 내가 실제로 일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길들이 미리 나를 위해 깔려 있다. 온 인류는 이전에 그런 길을 지나왔다. 사물은 내가 그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이익이라는 입장에서 분류된다. 그리고 그 분류가 사물의 빛깔이나 형태보다도 훨씬 더 내 눈에 띈다.(88쪽)

 

(나의 생각)

베르그송의 다른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창조적 진화』에서 발견한 내용들과 몹시 유사한 주장들이다.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담긴 '눈의 작용'에 대한 설명과도 몹시 닮았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존재의 개성은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 물질적으로 유용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나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개성에 착안하는 경우에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을 구별할 때처럼) 우리의 눈이 포착하는 것은 개성 그 자체, 즉 형태이건 색이건 완전히 독창적인 일정한 조화는 아니다. 다만 다순히 실용적인 구분을 쉽게 하는 한두 가지 특징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사물 위에 붙어 있는 쪽지를 읽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필요에서 나온 이 경향은 언어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언어는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모두 종류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흔해빠진 양상만을 나타내는 언어는 사물과 우리 사이에 개입해 그 형체를 우리의 눈에서 가릴 것이다. 언어 그 자체를 만든 필요의 배후에 이미 그 형체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89쪽)

 

 

우리는 우리의 정신 상태 가운데 그 외적인 부분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리고 단순히 외부 세계의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깊숙하고, 개인적이며, 남다르게 체험된 것들마저도 우리에거서 벗어나 사라진다. 우리가 사랑이나 사랑이나 증오를 느낄 때, 기쁘다거나 슬프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감정 그 자체가 그것을 완전히 우리의 것인, 무언가로 하고 있는 수많은 은근한 색조와 깊은 공명음과 함께 우리의 의식에 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소설가이고 시인이며 음악가일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 상태 가운데 그 외적인 부분만을 지각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 가운데 그 비개인적인 면, 즉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에서 거의 동일하므로 언어가 결정적으로 기술한 면밖에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의 개체에서조차 개성은 떠난다.(89쪽)

 

 

바깥쪽에서 생활한다

 

우리는 일반성과 상징에 둘러싸여 움직이고 있다. 마치 우리의 힘이 다른 힘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시합장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최대 선을 위해 행동이 스스로 선정한 지반에서 행동에 매료되고 행동에 이끌려 우리는 사물과 우리 사이의 중간지대 안에, 사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 대해서도 바깥쪽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방심으로 인해서 자연이 생활에서 계속 초탈(超脫)하고 있는 정신을 출현시킬 때가 있다. 나는 반성과 철학의 소행인 의도적이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초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초탈이 완전한 것이었다면, 만일 정신이 그 지각의 무언가에 의해서도 행동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 정신은 이 세상이 아직 본 적 없는 예술가의 정신이 될 것이다. 그 정신은 모든 예술에서 동시에 뛰어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예술을 모두 혼합해서 하나의 예술로 만들 것이다. 또한 온갖 사물을 그 근원적인 순수함에서 인정할 것이다. 물질계의 여러 가지 형체, 색, 음향, 그리고 내면 생활의 가장 정교한 움직임까지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자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자연을 통해 예술가가 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연이 장막을 들어 올려 준 것은 단지 한 면에서뿐이다. 이 한 방향에서만 자연은 지각을 필요에 결부시키는 일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방향은 우리가 감각(sens)으로 일컫는 것에 응하고 잇으므로 그의 감각 하나에 의해서, 그리고 단지 이 감각에 의해서만 예술가는 보통 예술에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디 예술에는 다양성이 있다. 그리고 또 선천적 소질의 전문적 구별이 있다.(89∼90쪽)

 

 

삶의 비물질성을 내포한 예술

 

어떤 사람은 색과 형에 집착한다. 그는 형태를 위해 형태를 사랑하고, 색을 위해 색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또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체를 위해 지각하는 것이므로, 그가 사물의 색과 형태를 통해서 보는 것은 사물의 내적 생명이다. 그는 그것을 처음에는 망설이고 있는 우리의 지각에 서서히 잠입시킬 것이다. 적어도 한 순간이나마 우리의 눈과 현실과의 사이에 끼어 있는 형태와 색에 관한 선입견에서 우리를 풀어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술의 가장 큰 야심을 실현한다. 그 야심이란 우리에게 자연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성찰할 것이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한 행동 아래에서, 개인적인 정신 상태를 표출하고 은폐하는 흔해빠진 사회적 언어의 배후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순수한 모습 그대로의 감정과 정신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똑같은 노력을 하도록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연구에 골몰한다. 즉 전적으로 조성되어 하나의 독창적인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되는 언어의 운율적 배역에 의해서 그들은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사물을 우리에게 말하거나 암시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욱 깊게 파내려갈 것이다. 다급해지면 언어로 번역될 것도 없이 이런저런 환희와 비애 밑에 그들은 이제 언어와는 전혀 무관한 것, 사람에 따라서 다른, 인간의 가장 내적인 감정보다도 더욱 내면적인 것의 생명과 숨결의 일정한 리듬-사람의 의기소침과 열광, 회한과 희망의 살아 있는 법칙-을 파악할 것이다. 이 음악을 풀어서 고조시킴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지나가다 무도회에 참여하게 된 행인처럼 좋든 싫든 간에 우리를 그 속에 휩쓸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우리를 내몰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진동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무언가를 뒤흔들게 할 것이다. 이리하여 회화건, 조각이건, 시이건, 또는 음악이건, 예술은 우리를 현실 그 자체에 직면시키기 위해 실천에 유용한 상징, 관습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반성, 즉 우리에게 현실을 숨기고 있는 것 모두를 멀리하는 것 이외의 목적은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점에 관한 오해에서 예술에서의 사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논쟁이 태어난 것이다. 예술이란 확실히 현실을 좀더 직접적으로 투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각의 순수성은 유용한 관습과의 단절, 감각 또는 의식의 내재적으로 타고난 무사무욕, 즉 사람이 언제나 이상주의로 불러온 삶의 비물질성을 내포하고 있다.(90∼91쪽)

 

 

드라마의 목적

 

극예술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가 찾아내 조명하려는 것은 생활의 필요에서, 종종 우리의 이해 그 자체 속에서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깊은 하나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의 필요란 무엇인가? 시는 모두 정신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 상태 중에는 특히 다른 사람과 접촉해 낳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장 강하고도 격렬한 감정이다. 음양의 전기가 축전지의 양극 사이에서 서로 당기고 축적되어 불꽃을 튀게 하듯이, 사람과 사람을 단순히 함께 나란히 있게 하는 데서 강한 당김과 반발이, 균형의 완전한 파괴가, 즉 정념이라는 정신의 감전 상태를 낳는다. 만일 인간이 그 감성적 자연의 충동대로 맡겨두고 있다면, 만일 무언가의 사회적 법칙도 도덕적 법칙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격한 감정의 폭발은 일상적으로 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폭발은 피하는 편이 유익하다. 사람이 사회에서 생활하고 따라서 어떤 규칙에 따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익이 조언하는 것을 이성이 명령한다. 즉 세상에는 의무란 것이 있고, 우리의 법규는 그에 따르는 것이다. 이 이중의 영향 아래 감정과 관념의 외층이 인류를 위해 형성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는 것도 이러한 쾌락이다. 드라마는 사회와 이성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준 평온하고 평범한 생활 아래서 다행히 폭발은 하지 않으나 그 내적 긴장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를 뒤흔들어 놓는다. 자연을 대신해 사회에 복수해 주는 것이다. 때로 드라마는 일직선으로 이 목표에 돌진한다. 무엇이건 날려 보내는 정념을 속에서 표면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때로는 흔히 현대극이 하듯 옆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궤변으로도 보이는 교묘함으로 사회의 모순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법칙 속에 있을지도 모를 인위적인 것을 과장하고,그로써 우회적인 수단으로 이번에는 겉 껍데기를 찢으면서 역시 우리를 속마음에 접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를 약하게 하건 자연을 강하게 하건, 이 둘 중 어느 경우에도 드라마가 추구하는 목적은 같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숨겨져 있는 부분, 우리가 성격의 비극적 요소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뛰어난 드라마를 본 뒤에 우리는 그런 인상을 받는다. 우리의 흥미를 끈 것은 타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잠깐 엿보인 부분, 겉으로 드러나려고 했으나 우리로서는 다행히도 그렇게 되지 않았던 막연한 것들로 혼돈 상태가 된 하나의 세계이다. 또 한없이 먼 과거에 속해 있는 기억, 마치 우리의 현재 생활이 한때는 비현실적인, 또는 틀에 박혀 그 때문에 우리가 새롭게 터득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이 생활과는 단절된, 이 뿌리 깊은 격세 유전적인 기억, 그 기억에 대해서 우리 안에 하나의 호소가 보내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따라서 드라마가 좀더 유용한 획득물을 초월해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좀더 깊은 현실이고, 거기에서 이 예술은 모든 다른 예술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92∼93쪽)

 

(나의 생각)

TV 드라마 보다는 영화 드라마가 훨씬 더 그럴 것이다. 최근에 봤던 영화 가운데 《나를 찾아줘》,《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문득 생각난다.

 

 

천재의 각인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예술이 언제나 개별성을 지향함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화가가 화폭 위에 그리는 것은 그가 어느 곳,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본 것으로 다시 볼 일 없는 색조를 띤 것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리고 오직 한결같이 그 자신의 정신 상태로서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험이다. 극작가가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것은 정신의 두루마리이고 감정과 사건의 산 직물이며, 결국 한 번 나타나 두 번 다시 반복되는 일 없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 일반적인 명칭을 부여해도 보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정신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것들은 이제 같은 사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개별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예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반성, 상징, 유형조차도 우리의 일상적 지각의 통화(通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이 점에 관한 오해가 생기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단히 다르게 되어 있는 2개의 것, 즉 사물의 일반성과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의 일반성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감정이 일반적으로 진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인 감정일 수는 없다. 햄릿처럼 특이한 인물이 또 있을까? 설사 그가 얼마쯤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해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성격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보편적 진리의 성격을 띠는 것은 단순히 이 의미에서뿐이다. 다른 어느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느 것이나 특이하다. 하지만 만일 천재의 각인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결국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람들은 왜 그것을 받아들일까? 그리고 만일 그 것이 그 분야에서 유일한 것이라면 무슨 근거로 그것이 진실임이 인정되는 것일까? 생각건대, 우리가 진지하게 사물을 보도록 그것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노력 그 자체에 따른 것이리라. 진지함은 전달성이 있다. 예술가가 본 것을 우리가 다시 보는 일은 물론 없을 것이다. 적어도 같은 식으로는 전혀 보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그가 진실로 그것을 본 것이라면, 그가 기울인 철저한 노력은 우리를 좋든 싫든 모방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교훈으로서 도움이 되는 하나의 본보기이다. 그리고 교훈의 효력에 따라 작품의 진리가 측정되는 것이다. 진리는 그 안에 신념, 변화조차 촉구하는 힘을 맡고 있으며, 이것이 그 진리가 인정될 때의 표지(標識)이다. 작품이 위대해질수록, 거기에서 엿보이는 진리가 심원할수록 그 효과는 더욱더 기대해 볼 만하며 그만큼 보편적이 된다.(93∼94쪽)

 

 

비극 작가 VS 희극 작가

 

비극 작가는 그의 주요 인물 주위에 이른바 그를 단순화시킨 유사훔에 지나지 않은 인물을 표현하자고는 결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그 방면에서 유일한 한 개체이다. 그 주인공을 모방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우리의 의식 여부에 상관없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옮기게 된다. 그를 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하고도 닮은 면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희극 작가가 중심 인물을 만들어낼 때는 하나의 두드러진 본능이 그를 이끌어, 그 주위에 똑같은 일반적 특징을 지닌 인물들을 그러모으게 한다.(94∼95쪽)

 

 

비극 VS 희극

 

삶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의 눈에 비칠 뿐이다. 시적 상상력은 현실의 보다 완전한 이해 이외의 것일 수는 없다. 만일 비극 작가가 창조하는 인물들이 살아 있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면, 그것은 그들이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내면을 관찰하려는 노력으로 자신을 깊이 파고듦으로써, 현실적인 것 가운데 잠재적인 것을 포착하고, 자연의 소묘나 초찬으로 그의 내부에 맡겨 준 것을 되찾아서는 하나의 완전한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희극을 낳는 관찰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외면적 관찰이다. 아무리 희극 작가가 인잔적 본성의 우스운 점에 호기심이 있다고 해도, 생각건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을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격 가운데 의식으로 포착하기 힘든 면에서만 우스꽝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관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타인에 대해서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관찰은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 향하게 할 때에는 얻을 수 없는 일반성의 성격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찰이란 표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인물들의 겉모양, 즉 대부분이 서로 접촉해 서로 닮을 수 있는 데 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진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96∼97쪽)

 

 

허영심과 겸손

 

이 혼합물은 허영심(vanite)이다. 생각건대 이 이상으로 표면적인, 이 이상으로 뿌리 깊은 결점은 달리 없을 것이다. 사람이 허영심에 대해서 받는 손가락질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지만, 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사람이 이에 대해서 하는 봉사는 모든 봉사 가운데서 가장 허무한 것이지만, 그 뒤에 오래도록 고마움의 마음을 남긴다. 그 자체는 악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온갖 악덕이 그 주위에 모여들고 방법을 짜내면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 이외에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그것은 타인에게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찬미 위에 구축된 자화자찬이기 때문에, 이기주의보다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며 본디부터 타고난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은 종종 이기주의는 극복하지만, 허영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생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겸손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생리적인 어떤 소심함이라고 부르지 않는 한, 우리가 선천적으로 겸손하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만에 가까이 있다. 진정한 겸손은 허영심에 대한 성찰 외에는 있을 수 없다. 타인의 착각을 보는 것에서, 그리고 자신도 똑같은 미혹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겸손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에 관한 과학적 주의와 같으며, 숱한 교정과 시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즉 그것은 획득된 미덕이다.(98∼99쪽)

 

(나의 생각)

아마도 '허영과 오만'에 대해서라면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통해 밝혀낸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어쩌면 베르그송도 그 책을 읽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직업적 우스개

 

모든 전문적 직업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에게 어떤 정신적 습관이나 성격적 특이성을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서 서로 닮아가고 남의 것과 자신을 구별한다. 이렇게 해서 몇 개의 작은 사회가 큰 사회 내부에 구성되는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런 것들은 사회 전반의 조직 그 자체에서 나온다. 하지만 만일 그런 것들이 너무 지나치게 고립되면 사회성을 파괴하기에 이를 우려가 있다. 그런데 웃음은 모든 분리하려는 경향을 억제한다. 즉 경직을 유연함으로 교정하고, 개체를 전체에 재적응시키며, 모난 것을 제거해 둥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스개를 얻는다. 그리고 그 변종은 사전에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직업적 우스개로 부르고 싶다.(101쪽)

 

 

직업적 허영심

 

제일선에는 직업적 허영심이란 것이 있다. ······ 게다가 여기에서는 영위되고 있는 직업에 사기꾼 같은 기미가 엿보이고 허영심이 거드름을 피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어느 과목이 수상쩍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더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성직이 부여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람이 자신의 비밀스런 의식 앞에 고개를 숙이도록 요구하는 것은 두드러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용한 직업은 명백히 공중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유용성이 훨씬 의심스러운 직업은 공중이 그것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상정해 비로소 자신의 존립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거드름을 피우는 근저에 있는 것은 이 착각이다. 몰리에르가 묘사한 의사들의 우스개는 대부분 거기에서 오고 있다. 그들은 마치 환자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리고 자연 그 자체를 의술의 종속물 가운데 하나처럼 다룬다.(101쪽)

 

 

싸움터로 떠나는 돈키호테

 

이번에는 싸움터로 떠나는 돈키호테를 보자. 그는 애독하는 이야기 가운데서 기사가 도중에 적의 거인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아무래도 거인이 필요하다. 거인이란 관념은 언제나 그의 정신에 자리를 차지하고 대기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무언가의 사물에 몸을 드러낼 기회를 노리는 하나의 특권이 있는 기억이다. 그것은 물질화되길 원한다. 따라서 최초로 나타난 사물이 거인의 형태와 아주 먼 유사함밖에 지니고 있지 않아도 그것은 기억을 통해 거인의 형태를 부여받는다. 돈키호테는 우리가 풍차를 보는 곳에서 거인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희극적이면서도 부조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조리일까?

 

그것은 매우 특수한 상식의 뒤바뀜이다. 이것은 우리의 관념을 사물의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의 틀에 사물을 맞추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눈앞에서 보는 것이다. 양식은 사람이 그의 추억을 모두 차례로 늘어놓길 원한다. 그 결과 적당한 추억이 현재 상황의 호출에 응해 그때마나 나타나 그것을 해석하기만 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한 무리의 기억이 다른 기억들 위에 군림하고 또한 인물 그 자체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서 현실의 힘이 이번에는 상상 앞에 굴복하고 이제는 상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게 된다. 한 번 착각이 형성되면 돈키호테는 그것을 그가 내리는 모든 결론 속에서 합리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꿈대로 사는 몽유병자처럼 확실함과 정밀함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착각의 기원이고 부조리에 가득 찬 특수한 논리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돈키호테에게만 특별하게 있는 것일까?

 

우리는 희극적 인물이 정신 또는 성격의 완강함에 의해서, 방심에 의해서, 자동적인 것에 의해서 실수를 저지른다고 설명해 두었다. 우스개의 밑바닥에는 경직이 있어 그것이 사람을 일직선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타인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게 하거나, 모든 것에 귀를 막게 하는 것이다. 몰리에르 희극의 많은 장면들이 이 단순한 유형에 따른다. 즉 자신의 사고에 따라가는 인물이, 타인이 끊임없이 가로막는데도 언제나 자신의 사고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는 사람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행해질 것이다. 완강한 정신은 결국 사물에 자신의 관념을 적응시키는 대신 자신의 관념대로 사물을 굽히게 한다. 따라서 모든 희극적 인물은 지금 말한 착각의 도정에 있고, 돈키호테는 희극적 부조리의 일반적 유형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 상식의 뒤바뀜에는 이름이 있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광기의 어느 형태 속에서 급성이거나 만성이거나 이러한 상식의 뒤바뀜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많은 방면에서 고정관념을 닮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광기도 고정관념도 결코 우리를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연민의 정을 일으키게 한다. 웃음은 우리가 익히 알 듯이 정서와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웃음을 유발하는 광기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의 일반적 건강과 양립할 수 있는 광기, 건전한 광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점에서나 광기를 따라하는 건전한 정신 상태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정신착란에서와 똑같은 관념의 연합이고, 고정관념에서와 똑같은 기이한 논리이다. 그것은 꿈의 상태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분석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정리로 공식화될 것이다. 희극적 부조리는 바로 꿈속의 부조리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104∼105쪽)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가면서 느끼는 바로 그것

 

꿈속에서 크레센도, 즉 진행함에 따라서 고조되는 기괴한 일을 드물지 않게 본다. 이유가 없는 최초의 양보가 제2의 양보를 유치하고, 이것이 더욱 중대한 다른 양보를 유치해 계속해서 마지막 부조리까지 이른다. 그런데 이 부조리한 것으로의 진행은 꿈을 꾸는 사람에게 특이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생각건대, 술을 마시다 보면 논리든 체면이든 이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가면서 느끼는 바로 그것이다.(107쪽)

 

 

불가사의한 융합

 

꿈에는 특히 고유한 정신착란이 있다. 꿈꾸는 사람의 상상으로는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깨어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무척 거슬리는 것이어서, 그런 경험을 한 적 없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고 완전한 관념을 줄 수 없을 듯한 특별한 모순들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실제로 같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확실히 분리된 두 인물 사에에서 꿈이 종종 행하는 불가사의한 융합이다. 보통 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본인이다. 그는 실재하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을 느낌에도 다른 인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인 동시에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행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의 몸을 빌리고 그의 목소리를 택한 것으로 느낀다. 또는 평상시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을 자신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타인의 일처럼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107∼108쪽)

 

 

웃음이야말로 더욱 심한 무례

 

이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서 특히 교정 수단을 보았다. 일련의 희극적 효과를 들어서 크게 지배적인 타입을 분리해 보라. 그러면 중간에 있는 효과는 희극적 공덕의 힘을 그런 유형과의 유사함에서 빌려온다는 것, 또 그런 유형 자체가 사회를 상대로 한 그만한 수의 무례함의 본보기임을 여러분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무례에 대해서 사회는 웃음으로 되받아친다. 그 웃음이야말로 더욱 심한 무례이다. 따라서 웃음이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악을 악으로 갚을 것이다.(109쪽)

 

 

방심과 나태

 

희극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안이한 측면-대체로 습관의 비탈길-을 따라서 가려는 경향이 있다. 습관에 젖으면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일원인 사회에 대해서 끊임없이 몸을 적응시키고 재적응시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삶에서 지불해야 할 주의를 느슨하게 푸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많건 적건 방심하는 사람을 닮아간다. 이지(理智) 위의 방심이라기보다 의지의 방심임을 우리는 승인했다. 그래도 역시 방심은 방심이고 따라서 나태이다. 앞서 논리와 인연을 끊은 것처럼 습관에 젖은 사람은 예의범절과 인연을 끊는다. 결국 그는 유희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의 첫째 충동은 나태로의 초대를 수락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 순간 우리는 유희의 동아리에 낀다. 그것이 삶의 어려움에서 숨을 돌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을 돌리는 것은 겨우 잠시뿐이다. 희극성의 인상 중에 낄 수 있는 공감은 곧 사라지는 공감이다. 실은 그것 또한 방심에서 오는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가 때로는 자기를 잊고 아이의 못된 장난에 끼어들었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려서 아이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16쪽)

 

 

우리의 최대 선을 위해 어느 결점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미연에 막음으로써

 

웃음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교정이다. 굴욕을 주기 위한 웃음은 표적이 되는 사람에게 반드시 쓰라린 상처를 안겨준다. 사회는 웃음으로 사람이 사회에 대해서 행한 자유 행동에 복수하는 것이다. 웃음에 만일 공감과 호의가 새겨져 있었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즉 적어도 웃음의 의도만은 좋은 것일 수 있고,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최대 선을 위해 어느 결점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미연에 막음으로써, 그러한 결점 자체를 교정하고 우리를 내면적으로 개선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틀어서 웃음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분석은 그것을 증명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웃음이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거나, 그것이 친절 또는 공평함에 대한 생각에서 나왔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나 정곡을 찌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성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웃음은 자연적으로, 또는 거의 같은 이야기지만 사회생활의 아주 오랜 습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갖추게 된 기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혼자서 일어나 앙갚음의 빈격을 한다. 그때마다 어디서 맞는지를 확인할 틈은 없다. 웃음은 마치 질병이 사람의 과도함을 벌하는 것과 비슷하게 어느 결점을 벌한다. 죄가 없는 자를 공격하고, 죄인을 눈감아주고, 개개인의 경우를 따로따로 살피는 경의를 표하는 법 없이 일반적 결과를 지향한다. 의식적 반성으로 이루어지는 것 대신에 자연의 도리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은 모두 그와 같다. 하나의 중용적인 공평함은 전체의 결과라면 몰라도 개개의 세부 사항 가운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110∼111쪽)

 

 

웃음은 굴욕을 주어 기가 죽게 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반드시 친절한 것도 아님을 되풀이해 둔다. 그것은 굴욕을 주어 기가 죽게 하는 것을 역할로 삼는다. 만일 자연이 이를 위해 가장 선한 사람들에게도 심술궂음이나 적어도 놀리고 싶은 마음을 조금쯤 남겨두지 않았다면, 웃음은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은 깊게 파고들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우리는 이완 또는 팽창 운동이 웃음의 서곡에 지나지 않고, 웃는 자는 즛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다소나마 오만하게 스스로 자신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마치 자신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것이다. 게다가 이 오만 중에서 우리는 즉시 약간의 이기주의를, 그리고 그 이기주의 배후에 무언가 더욱 자발적이지 않은 좀더 고통스러운 무엇, 웃는 자가 자기의 웃음에 이유를 더 붙이면 붙일수록 더욱더 움직이기 어렵게 되어가는 무언가 일종의 맹아적(萌芽的) 염세주의를 구별해 낼 것이다.(111쪽)

 

 

사회가 완전한 영역으로 나아감에 따라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여기에서도 선을 위해 악을 이용했다. 이 연구 전체에 걸쳐서 우리가 마음을 쏟아 완성한 것은 특히 이 선이다. 즉 사회는 완전한 영역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좀더 큰 적응의 유연함을 그 성원에게서 얻고 그 뿌리가 더욱더 균형을 잡게 되며, 그 표면에서 그와 같은 대집단에 따라붙는 여러 가지 혼란을 일소하는데, 웃음은 그러한 동요의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111쪽)

 

 

웃음은 이 물거품처럼 태어나는 것

 

그리하여 바다의 표면에서는 파도가 잔잔해질 틈도 없이 싸우는데도 아래쪽 심연에서는 깊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파도는 서로 충돌하고 항쟁하면서 균형을 추구한다. 희고 가벼운 물거품은 끝없이 변화하는 윤곽의 뒤를 쫓고 있다. 때때로 파도가 바닷가 모래 위에 거품을 조금 남겨두고 간다. 그곳에서 놀던 아이가 와 그것을 한 주먹 쥐어보고는 손바닥에 물이 서너 방울밖에 잡히지 않은 것에 놀란다. 더구나 그것을 싣고 온 파도의 물보다 훨씬 짜다. 웃음은 이 물거품처럼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외면에 가벼운 모반(謀叛)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러한 동요의 움직이는 형태를 즉시 묘사해낸다. 그것 또한 염분을 머금은 거품이며, 거품처럼 다른 거품을 만든다. 그것은 쾌활함이다. 그러나 그것을 음미하기 위해 이 거품을 채집하는 철학자는 때로 그 보잘것 없는 양에서나마 한 가닥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111∼112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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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3-21 23:41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대학 다닐 때 종로서적에서 나온 <웃음>을 밑줄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동서문화사 책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여담인데, oren 님 쓰신 <시학>에 대한 리뷰를 보고 저는 시학 리뷰 쓰기를 포기했습니다. 혹시 나중에 다시 읽고 쓴다면 시학에 언급된 미술(그림, 조각)에 관한 내용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ㅎㅎ

oren 2015-03-22 11:52   URL
안녕하세요~ 돌궐 님.

돌궐 님께선 대학에 다니실 때 벌써 베르그송의 『웃음』을 읽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런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거든요. 저로서는 아마도 책 제목만 어렴풋이 들어본 정도였지 싶습니다.

제가 쓴 『시학』에 대한 리뷰 때문에 돌궐 님께서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못하셨다니 그런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싶네요. 어떤 책에 대한 어떤 리뷰든, 저는 그게 다른 사람들이 미래에 쓸 리뷰를 결코 배척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오히려 자극을 줄 수는 있어도 말이지요.. 돌궐 님께서도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아주 훌륭하게 쓰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틀림없이 읽을 테니 나중에라도 꼭 『시학』에 대한 리뷰를 남겨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웃음 / 창조적 진화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동서문화사 월드북 74
앙리 베르그손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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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자세히 살펴보라. 현재의 쾌락 가운데 지난날 쾌락의 추억에 지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늘 그렇듯 우리는 쾌락이나 고통의 감정에 대해서 선천적으로 노숙한 것처럼, 마치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은 듯이 말한다. 특히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자신들 대부분의 환희의 정서 속에 아직도 이른바 어린애와 같은 면이 있음을 잊고 산다. 자세히 살펴보라. 현재의 쾌락 가운데 지난날 쾌락의 추억에 지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만일 우리의 정서를 엄밀하게 느껴진 것만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만일 단순히 회상되는 것 모두를 거기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 많은 것에서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일정한 나이에서부터 우리는 선명하고 새로운 환희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진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성인의 가장 감미로운 만족이 되살아난 아이의 감정, 차츰 과거가 멀어져 갈수록 드물게 불어넣는 잔잔한 훈풍인지 누가 알겠는가? 더구나 이 지극히 일반적인 물음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하건 하나의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어릴 적 유희의 쾌락과 성인이 되어서의 쾌락 사이에는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극은 바로 유희, 삶을 모방하는 하나의 유희이다. 그리고 아이가 놀 때 인형이나 꼭두각시 등을 모두 가느다란 실로 움직인다면, 우리가 희극의 상황을 연결한 실 속에서 되찾아야 하는 것 역시 너무 써서 가늘어지긴 했지만 그것과 똑같은 실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선 어린애의 놀이에서부터 출발하자.(47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의 『삶의 예지』가운데  <나이에 대하여>에서 다룬 내용과 너무나 닮았다.

 

 

 

《소송광들》과 돈키호테

 

다음으로 희극을 보자. 이 단순한 유형으로 환원되는 익살 장면, 희극에도 얼마나 많은가.《소송광들》에서 시카노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11  소송이 소송으로 톱니바퀴 돌 듯이 진행된다. 그리고 그 계략은 차츰 신속하게 진행되어 (라신은 소송 용어를 차츰 집중적으로 늘어놓음으로써 가속화되는 느낌을 준다) 결국에는 한 줌의 건초 때문에 제기한 소송이 고소인의 재산 대부분을 탕진하게 한다. 돈키호테의 두세 장면에도 역시 같은 짜맞춤이 있다. 예를 들어 숙소 장면에서, 기이한 사정의 연속으로 마부가 산초를 구타하게 되고, 산초는 마리톨네스에게 덤벼들고, 그녀 위로 숙소 주인도 넘어진다.12(53쪽)

 

주석

11. 라신 《소송광들(Les Plaideurs)》제1막 제7장

12. 《돈키호테》상편, 3권 제16

 

 

 

허버트 스펜서와 칸트

 

······ 그런데 그 공이 여기저기서 돌다 멈추다 하며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면 더욱 큰소리로 웃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앞서 우리가 말한 구조는 그것이 직선적일 때에도 이미 희극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원운동을 해서, 인물의 이런저런 노력이 원인과 결과의 숙명적인 톱니바퀴 장치에 의해서 철두철미하게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게 되면 더욱 희극적이 된다. ······ 

 

이러한 우스개가 얼마나 강하게 또 빈번하게 나오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몇몇 철학자들의 상상력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많은 과정을 거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말할 나위없이 수고만 하고 전혀 소득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희극성을 정의하려고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허버트 스펜서의 생각 역시 이런 것이었으리라.15 그에 따르면 웃음은 노력이 갑자기 허무에 부딪히는 노력의 징표의 징표라고 했으니 말이다. 칸트는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웃음이란 기대가 갑자기 무로 해소되는 것에서 생긴다" 우리도 이러한 정의 가 바로 전에 말한 예에 적용됨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공식에는 두세 가지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다.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 헛수고도 많기 때문이다. (54∼55쪽)

 

주석

15. 스펜서이론(Essays : Scientific, Political and Speculative, Ⅱ, 452ff, Appleton, 1892)은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프로이트가 《기지론》에서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여기는 계기가 되는 다른 독창적인 의견도 포함하고 있다.

 

 

 

희극성은 삶이 없는 운동을 모방하는 인간적 사건의 양상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기계적인 구조를 보고 웃는 것일까? 한 사람이나 단체의 일이 일정한 순간에 톱니바퀴, 스프링, 또는 조종하는 실의 소행처럼 우리에게 보인다는 것, 그것이 왜 우스꽝스러운 것일까? 이 물음은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제기되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변함없이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인간적 사물의 계속되는 삶 속에서 우리가 때때로 침입자처럼 발견하는 경직된 기계 장치는 우리와 완전히 특수한 이해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방심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사건이 끊임없이 그 자신의 여정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기이한 만남은 물론이요 우연한 만남도 동행의 만남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앞으로 전개되어 어디까지나 진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언제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쏟았다면, 만일 우리가 언제나 타인과 또 우리 자신과 끊임없이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결코 스프링이나 실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희극성은 사물을 닮아가는 사람이 지닌 어떤 면이고, 완전히 특수한 일종의 경직에 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 장치, 자동 현상, 즉 삶이 없는 운동을 모방하는 인간적 사건의 양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초미의 교정을 촉구하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인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웃음은 이 교정 그 자체이다. 또한 인간과 사건의 어떤 특수한 방심을 지적하고 저지하는 사회적 행동이다.(55쪽)

 

(나의 생각)

찰리 채플린의 여러 작품들, 그 가운데 특히 『모던 타임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설명이다.

 

 

 

반복, 뒤집기, 교차

 

생명은 우리에게 시간 속에서의 일정한 진화, 공간 속에서의 일정한 복잡화로서 나타난다. 시간으로 고찰하면, 생명은 끊임없이 늙어가는 어떤 존재의 계속적 진행이다. 그것은 결코 뒤로 되돌아감이 없고, 되풀이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공간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생명은 서로 친밀하게 연대적이고 한결같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동시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동시에 다른 유기체에 속할 수는 없다. 저마다 살아 있는 존재는 다른 체계와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하나의 닫힌 현상 체계이다. 양상의 기계적 변화, 현상의 역행 불가능, 그 자체 속에 틀어박힌 한 계열의 완전한 개별성, 그것이 (현실인지 겉치레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치고) 살아 있는 것을 단순한 기계로부터 구별하는 외부적 특징이다. 그 정반대의 것을 취해 보자. 그 결과 우리는 반복, 뒤집기, 교차라고 불러도 좋은 3가지 방법을 얻게 될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이치이지만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보드빌 그 자체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56쪽)

 

(나의 생각)

'시간'과 '공간'에 대해 특별히 예민한 감각과 통찰을 보여준 철학자의 글 답다. 『창조적 진화』에 담긴 생각들의 '풍성한 밑거름' 가운데 일단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연극에서 보여주는 반복

 

1. 반복-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앞서와 같이 어느 인물이 되폴이하는 한 마디 내지 한 구절이 아니고 하나의 정황, 즉 여러 가지 사정의 짜맞춤이다. 이것은 몇 번이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시시각각 변하는 삶의 흐름과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미 이러한 우스개를 불충분한 상태로나마 맛보았다. 내가 느닷없이 거리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다고 하자. 이 상황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만일 같은 날에 또다시 그를 만나고 또 세 번, 네 번 더 만난다면 마지막엔 그 '똑같음'에 함께 웃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삶의 착각을 충분히 주는 일련의 사건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진행해 가는 이 계열의 한가운데에 동일한 인물 사이도 좋고, 또는 다른 인물 사이라도 좋고, 같은 장면이 여러 차례 일어난다고 상상해보자. 여러분은 역시 똑같음, 훨씬 이상한 똑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반복이다.(57쪽)

 

 

 

사건의 희극성은 사물의 방심

 

······ 이 모든 작용은 삶을 뒤바꿀 수도 있고 부분 부분이 서로 교환할 수도 있는, 반복되는 기계 장치처럼 다루는 것이다. 삶이 같은 종류의 효과를 자연스럽게 반복하도록 하고, 따라서 삶이 자신을 스스로 잊는 정도에 정비례해서 현실 생활은 보드빌이 된다. 왜냐하면 삶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역으로 할 수 없는 진보이며 분할할 수 없는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희극성은 사물의 방심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개인의 성격의 희극성이 우리가 이미 암시해둔 것처럼, 그리고 뒤에 더욱 명쾌하게 증명하듯이 인간의 어떤 근본적인 방심에 따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방심은 예외적이며, 그 결과는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교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보고 웃는다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웃음이 하나의 쾌락이 아니라면, 인간이 웃음을 낳는 최소의 기회라도 재빠르게 잡지 않았다면, 이 방심을 과장하고 체계화하고 그것을 하나의 예술로 창조해 보자는 생각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62쪽)

 

 

 

희극적이 되는 것은 언어 그 자체

 

말의 우스개에 대해서 하나의 특별한 범주를 세우는 것은 다분히 인위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연구해 온 해학적 효과의 대부분은 이미 말의 매개를 통해 낳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가 표현하는 우스개와 언어가 창조하는 우스개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만 한다.

 

전자는 필요하다면 어쨌든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풍습이나 문학 특히 관념의 연합을 달리하는 사회로 옮길 때에는 그것의 탁월함을 대부분 잃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반면 후자는 대체로 번역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희극성이 문장의 구조나 단어의 선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즉 언어의 도움으로 사람이나 사건에서 보이는 특수한 방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의 방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컨대 희극적이 되는 것은 언어 그 자체인 것이다.(63쪽)

 

 

 

재치의 구별, 독서가, 배우, 시인

 

우선 넓은 의미의 재치와 좁은 의미의 재치를 구별해 두자. 언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람은 연극적인 사고방식을 재치라고 부르는 듯하다. 재치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관념을 단순한 상징으로서 다루는 대신에 인물처럼 그것들을 보고, 듣고, 특히 그것들에게 서로 대화를 시킨다. 또한 그것들을 무대에 올리고, 자기 자신도 어느 정도 무대에 오른다. 재치 있는 민족은 연극을 몹시 좋아하는 민족이다. 뛰어난 독서가에게는 배우의 소질이 있듯이 재치가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쯤 시인적인 면이 있다. 이런 비유는 일부러 꺼낸 것으로, 이렇게 하면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이 네 가지의 비례적 관계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를 잘하려면 대체로 배우가 지닌 예술성의 지적인 부분만 있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연기를 잘하려면 진심으로 온 인격을 바쳐 연기하는 배우여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의 창조도 어느 정도 자아 망각을 요구하는데, 보통 기지가 있는 사람은 거기에 빠져드는 일이 없다. 이런 축에 드는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 배후에서 다소라도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는 그곳에 몰입하지 못한다. 그곳에 자신의 지성만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모두 자신이 원할 때에 재치 있는 사람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그는 그 때문에 무언가를 손에 넣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무언가를 잃어야 할 것이다. 그저 자신의 관념을 "아무것도 아닌 일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서로 대화를 시켜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단순히 자기의 관념을 자기의 감정에, 그리고 자신의 정신을 삶에 접촉시키고 있는 이중의 연계를 느슨하게 풀기만 하면 된다. 즉 시인이 감정을 토대로가 아니라 지성만으로 시를 짓는다면, 그는 재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64쪽)

 

(나의 생각)

'뛰어난 독서가'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장가'에 필요한 감각과 소질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글이다.

 

 

 

언어의 올가미

 

재치 있는 사람은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을까? 언어가 상대 한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었다면, 우선 그가 그 상대이다. 그 자리에 없는 인물이 상대일 때도 가끔 있는데, 그때 재치 있는 사람은 그가 이야기한 것에 대해 자신이 대답한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주 있는 상황은 세간(tout le monde), 즉 내가 상식(sens commun)과 상대하는 것이다. 재치 있는 사람은 통념을 역설(paradoxe)로 전환함으로써, 관용구를 이용함으로써, 또는 인용이나 속담을 모방함으로써 해치우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장면들을 서로 비교해 보라. 그러면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도둑맞은 도둑'이란 희극의 주제에 바탕을 둔 변형임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은유라든가 격언이라든가 논법을 갖다 붙여 그런 것들을 만든 사람, 또는 만들 것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말하게 하여 이른바 언어의 올가미에 걸리도록 하는 것이다.(65쪽)

 


 

 

패러디

 

장중한 어조를 일상적인 어조로 바꾼 결과 완성되는 것이 패러디이다. ······

 

몇몇 철학자, 특히 알렉산더 베인이 희극성 전반을 폄훼하여 정의한 까닭은 분명 패러디의 희극성 때문이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란 "이전에 존경받던 사물을 하찮은 것으로 제시할 때" 낳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폄훼는 전환의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전환 자체도 웃음을 얻는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73쪽)

 

 

 

과장

 

사소한 일을 큰일처럼 부풀리는 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장이다. 과장은 그것이 계속되거나 특히 체계적일 때 희극적이다. 실제로 그때야말로 과장이 전환의 한 수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과장은 사람을 정말 잘 웃기기 때문에, 일부 저자가 폄훼로 희극성을 정의했듯이 몇몇 저자는 과장으로 이를 정의했을 정도이다.(73쪽)

 

 

 

전문 용어

 

보통 직업에는 그만의 전문 용어가 있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개념들을 이 직업적 언어로 옮겼을 때 웃음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사무적 언어를 사교적 관계로까지 확장하는 것도 희극적이 된다.(75쪽)

 

 

 

웃음이 가려내고 교정하려는 것

 

수면에 낙엽 몇 잎 떠 있지 않은 연못이 없고, 타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경직되는 습관 하나쯤 붙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상투적인 것을 배제하고, 단순한 사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언어에도 적용해보고 싶어하는 뒤집기·전환 등과 같은 기계적 조작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각 부분을 일일이 배려하는 말은 없다. 유연한 것, 부단히 변화하는 것, 살아 있는 것에 반대되는 경직된 것, 상투적인 것, 기계적인 것, 주의에 반대되는 방심, 요컨대 자유 활동에 반대되는 자동 현상, 그런 것들이 바로 웃음이 가려내고 교정하려는 것이다.(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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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 창조적 진화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동서문화사 월드북 74
앙리 베르그손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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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웃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웃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웃음을 유발하는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익살꾼의 찌푸린 얼굴, 재치있는 말솜씨, 보드빌(vaudeville:가벼운 오락용 희극)의 착각, 하이코미디 장면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증류법을 사용하면 저렇게 종류가 잡다한 산물에 독한 향기를 감돌게 하는, 언제나 같은 그 엑기스를 채취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훌륭한 사상가들이 이 사소한 문제에 몰두해 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언제나 그 노력을 비웃듯이 빠져나가고 비껴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철학적 사색에 던져진 비위에 거슬리는 도전이라고나 할까.(13쪽)

 

* 특히 《시학(詩學)》5, 《니코마코스 윤리학》제4권, 제8장 등 참고, 다만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플라톤이 이미 머지않아 문제가 될 것임을 알았다. 다른 각도에서의 '해학성에 대한 웃음' 이론의 어엿한 싹을 《필레보스》29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묵살일까, 간과일까?

 

 * * *

 

(나의 생각)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에 특히 정통한 철학자이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었고, 부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론」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번에도 극히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건 '그만의 특징'이며 다른 곳에서도 늘 그런 식이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엔 '희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통째로 빠져있다.(아리스토텔레스가 '나중에 다루겠다'고 책에서 약속은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뿐'이다. 그래서 '희극'에 대해서는 비극을 다루면서 곁다리로 잠깐씩 언급하는 설명만 있을 뿐, 구체적인 설명이 거의 없다.) 그 대신『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웃음'과 연관해서 참고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재치'를 다루는 대목에 담겨 있다.

 

삶에는 휴식이 있으며 휴식에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있기에, 여기에도 또한 어떤 적절한 사귐이, 즉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마땅히 말해야 할 방식으로 말하고 듣는 그런 사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듣는 것인지 사이에서도 또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과 관련해서도 중간에 대한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스갯소리를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사람들은 '(저급) 익살꾼', '저속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려고만 하며, 고상한 것을 이야기하거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보다는 폭소를 만들어 내는 것에 더 마음을 쓴다.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우스운 이야기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촌스러운 사람', '경직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 적절하게 농담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방향을 빨리 바꾸는 사람(eutropos)처럼(회전이 빠른 사람처럼) '재치 있는 사람(eutrapelos)'이라고 불린다. 이런 종류의 농담들은 품성상태의 움직임(kinēsis)으로 보여, 마치 신체가 신체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듯, 그렇게 품성상태 또한 이러한 움직임으로부터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을 만한 일은 도처에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땅한 것 이상으로 놀이나 조롱하는 일을 즐기기에, 사람들은 저속한 익살꾼마저 즐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양자는 엄연히 다르며, 그것도 적지 않게 다르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를 보면 분명하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 <제8장 재치> 중에서

 

 

 

 

예술과 닮은 그것이 어찌 예술과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없겠는가?

 

희극적 공상은 심하게 탈선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 광기와 같은 것에도 조리가 있다. 꿈을 꾸는 듯하지만 곧 사회 전체에 승인이 되고 이해가 되는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희극적 공상이 인간의 상상작용에 관해서, 특히 사회적·집단적·민중적인 상상의 작용에 관해서 어찌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없겠는가? 실제의 삶에서 나온 예술과 닮은 그것이 어찌 예술과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없겠는가?(13∼14쪽)

 

 

 

 

많은 사람이 인간을 '웃을 줄 아는 동물'로 정의했다.

 

고유한 의미로 인간적인 것을 빼면 웃음이란 없다. 경치가 아름답다거나, 운치가 있다거나, 숭고하다거나, 보잘것없다거나, 또는 추악하다거나 하는 것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동물을 보고 웃을 때가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서 인간의 태도라든가, 인간적인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자를 보고도 웃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 사람이 조롱하는 것은 펠트나 밀짚 따위가 아니고, 사람이 모자에 부여한 인간의 변덕이다.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이 왜 철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을까? 많은 사람이 인간을 '웃을 줄 아는 동물'로 정의했다. 또한 그들은 사람을 웃길 줄 아는 동물로도 정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이 우리를 잘 웃게 한다고 해도, 이는 인간과 유사하기 때문이거나, 인간이 그것에 새겨놓은 표시나, 또는 인간이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14쪽)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꾼이 되어 삶에 임해보자.

 

순수하게 이지적인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다분히 울 일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웃는 일은 있을 것이다. 반면 언제나 사물에 민감하고 삶의 합창에 공감하고 모든 사건이 감정적인 공명을 수반하게 되어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웃음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시험 삼아 잠시 남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완전히 동화되어, 상상 속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느껴보자. 자신의 공감을 최대한으로 펼치는 것이다. 마법의 지팡이에 한 번 맞은 것처럼 자못 가볍게 보이는 것도 무거워지고 모든 것이 엄숙해짐을 보게 되리라. 다음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꾼이 되어 삶에 임해보자. 대부분의 드라마는 희극으로 바뀔 것이다. 사람들이 춤추는 연회장에서, 음악소리에 귀를 막기만 해도 그들을 바보스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어떤 인간 행위가 이러한 시련에 견딜 수 있을까? 대부분은 그것에 수반하는 감정의 음악을 끄면, 갑자기 엄숙함에서 익살맞음으로 돌변한다. (14∼15쪽)

 

 

 

"나는 이 교구의 사람이 아닙니다."

 

웃음에는 반응이 필요하다. 웃음소리를 잘 들어보자. 그것은 분명하고 또렷한 음이 아니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반응하면서 길게 가려는, 마치 산중의 천둥소리처럼 첫 폭발이 있고 나서도 울림이 이어지는 무언가이다. 그럼에도 이 반응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넓은 범위 안에서도 진행될 수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웃음은 언제나 집단의 웃음인 것이다. 기차나 식당에서 여행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야기가 우스워서 웃는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도 만일 그 가운데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패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도 웃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느 사람에게 모두를 감격의 눈물로 젖게 하는 설교를 듣고도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교구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내가 눈물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 웃음에 대해서는 한층 더 진실해진다. 사람들은 웃음이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웃음은 현실의 또는 가상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합의를 본, 거의 공범이라 할 만한 저의(底意)를 숨기고 있다. 관객석이 꽉 차면 찰수록 극장에서 웃음소리는 널리 퍼진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어 보지 않았는가.(15쪽)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

 

한편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한 사회의 습속이나 관념과 연관되어 있음이 몇 번이고 강조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이중의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은 익살 속에서 정신이 흥겨워하는 단순한 호기심과, 다른 인간 활동과는 무관한 유별나고 고립된 현상만을 보아왔다. 그래서 '관념들 속에서 인정된 하나의 추상적 관계', 즉 '지적 대조'라든가 '감각적 부조리' 등으로 희극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비록 실제 희극적인 것의 온갖 형태에 들어맞는다고 해도, 왜 그것이 우리를 웃게 하는지를 조금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온갖 다른 논리적 관계가 우리의 몸을 태연히 방치함에도, 유독 이 특수한 논리적 관계만이 인정된 순간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16쪽)

 

 

 

웃음을 이해하려면

 

웃음을 이해하려면 웃음의 본디 환경인 사회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웃음의 사회적인 역할이라는 유용한 역할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제부터 다룰 이것이 우리 연구의 주축이 된다. 웃음은 공동 생활의 어떤 요구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웃음은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16쪽)

 

 

 

사정이 다른 것을 요구하는데도

 

거리를 달리던 사내가 비틀거리면서 쓰러진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는다. 만일 그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않을 생각이었다고 상상했다면 사람들은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얼떨결에 앉은 것을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웃음을 나오게 한 것은 그의 태도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변화 속에 본의 아닌 것이 있다는 것, 즉 실수이다. 길에 돌멩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걸음걸이를 바꾸거나 아니면 그 장애물을 피해서 지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연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멍청했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몸이 고집을 부린 탓인지, 사정이 다른 것을 오구하는데도 말하자면 경직이나 외부의 힘 탓으로 근육이 여전히 같은 운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넘어진 것이고, 이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은 것이다.(16∼17쪽)

 

 

 

방심한 사람이 희극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상한 일일까?

 

어떻게 하면 웃음이 내부로 잠입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경직이 모습을 드러낼 때, 우연한 상황이나 누군가의 장난 같은 걸림돌이 더는 필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경직이 밖으로 나타날 늘 새로운 기회를 자기의 품안에서 자연스럽게 끄집어낼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서 마치 반주에 뒤처지는 선율처럼 언제나 한 것만을 생각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잊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이제는 없는 것을 보거나, 울리지 않는 것을 듣거나, 적합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그래서 결국 현실에 몸을 적응시켜야만 할 때에 여전히 과거의 상상 속에 계속 몸담고 있는 듯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이제 우스개는 그 인물 자체에 깃들어 있다. 이 인물이야말로 소재와 형식, 원인과 계기 모두를 우스개로 제공할 것이다. 방심한 사람(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바로 그 인물들)이 희극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상한 일일까?(17∼18쪽)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어떤 웃음의 원인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될수록 그 웃음은 우리에게 더욱더 희극적으로 다가온다.' 단순한 한 행동으로서 사람이 보여주는 방심이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그 기원도 알며, 그 내력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우스울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서, 평소에 연애 소설이나 기사도 이야기를 즐겨 읽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끌리고 매료되어 그 사람은 자신의 사상과 의지를 차츰 그들 쪽으로 옮겨간다. 이리하여 결국 그는 몽유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방심 행위이다. 다만 이러한 방심 행위는 이미 알고 있는 분명한 원인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더 이상 거짓이나 꾸밈없이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상적이긴 한데, 확실하게 정해진 어느 환경에 속해 있는 인물의 존재로 설명될 수 있는 방심인 것이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그럼에도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인 방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 깊이 있는 웃음이 가장 피상적인 웃음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 망상가, 광신자, 이들 별난 이유가 있는 미치광이는 그 직장의 짓궂은 희극의 희생자 또는 거리에서 넘어진 통행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같은 내부의 기구를 움직여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확실히 넘어지는 질주자이고 남에게 비웃음당하는 외골수이고, 현실에 좌절하는 이상주의자, 죄없는 몽상가이다. 하지만 그들이 특히 엄청난 방심가이고, 그 방심이 어느 중심 관념을 기준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그들의 불운한 실패가, 모두 서로 결합되고 더구나 현실이 꿈을 바로잡기 위해 적용하는 가혹한 논리로써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잇따라 겹쳐져 갈 수 있는 효과로 끝없이 커져가는 웃음을 주위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다.(18∼19쪽)

 

 

 

약점과 성격의 관계

 

어느 약점과 성격의 관계는 고정 관념의 경직성과 정신의 관계와 같지 않을까? 약점이란 좋지 않은 굴곡이 천성에 생긴 것이든 의지가 위축되든 간에, 대개 영혼이 휘어진 상태와 비슷하다. 물론 어떤 약점은, 풍부한 능력을 지닌 영혼이 그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서, 그 약점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끊임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돌아다니는 일도 있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약점이다. 그렇지만 웃움을 주는 약점은 이와 반대로 우리가 자신을 그 안에 끼워 넣는 틀처럼 외부에서 가져오는 약점이다. 그것은 부드러움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으면서도 딱딱한 경직성만을 부여한다.(19쪽)

 

 

 

긴장과 탄력

 

생활과 사회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알도록 끊임없이 기울이는 주의이고, 나아가 우리를 그것에 적응시켜 주는 육체와 정신의 탄력이다. 긴장과 탄력, 이것이야말로 삶이 발동시키는 서로 보완하는 두 힘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 육체에 심하게 부족하면 나타나는 것이 온갖 사고, 허약, 질병이다. 정신이 메마르면 일어나는 것이 온갖 심리적 빈곤, 이런저런 정신 박약이다. 결국 성격에 부족함이 있으면 비참한 처지의 원천, 때로는 죄의 기회가 되는 사회생활에 대한 심각한 부적응을 낳게 될 것이다. 생존과 연관이 있는 이러한 결핍에서 멀어져야만(그것들은 생존경쟁이라 불리는 것 가운데서 자연히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생활할 수 있으며, 특히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살 것을 원한다. 이제야말로 사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각자가 실생활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만족해, 그 밖의 것은 모두 몸에 익힌 습관의 손쉬운 자동 현상에 맡겨 방치하는 것이다. 또 사회가 우려해야만 할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성원이 서로 더욱더 정확하게 맞물려야 할 의지와 의지의 사이에서 좀 더 세심한 평형을 지향하는 대신에, 그 평형의 기본적 조건들만을 존중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야합만으로는 사회에서 충분하지 않다. 사회는 서로 적응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성격이나 정신 내지 육체의 경직은 사회가 우려하는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의 활동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표시이고, 또 그 활동이 고립되어 사회가 이끌고 있는 그 공통적 중심에서 벗어나 있을지도 모르는 표시이며, 요컨데 '중심이탈(excentricit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 때문에 손해를 입는 것은 아니므로 이때 구체적으로 단속하며 간섭할 수는 없다. 사회는 불안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것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징후일 뿐 위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기껏해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가 그것에 호응할 때에도 몸짓으로 하는 것이다. 웃음이란 이러한 어떤 것, 하나의 사회적 몸짓임에 틀림없다.(21쪽)

 

 

 

경직이 바로 웃음거리이고, 웃음은 그 징벌이다

 

웃음은 그것이 일으키는 불안감 때문에 엉뚱한 행동들을 억제한다. 그리고 자칫하면 고립되어 잠에 빠질 우려가 있는 부차적 부류의 활동을 언제나 일깨우고 서로 접촉시켜둔다. 이로써 결국 사회 집단의 표면에 기계적 경직으로 머물러 있을 듯한 모든 것을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웃음은 그렇기 때문에 순수미학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음은 (무의식적으로, 더구나 개별적인 많은 미적인 면을 보인 경우 부도덕적으로도) 넓은 의미에서 보았을 때 개선이라는 유익한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얼마쯤 미적인 면을 보인다. 왜냐하면 희극성이란 사회와 개인이 그들의 자기 보존의 고뇌에서 벗어나 자아를 예술품으로서 다루기 시작한 바로 그때 탄생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이건 사회이건 그 생활을 위태롭게 하고, 이로써 당연히 제재를 받게 되는 행동이나 성향의 주위에 원을 그린다면, 이 동요와 투쟁의 지역 밖에 사람이 단순한 볼 거리가 되는 중립지대가 생기는데, 여기에 육체와 정신과 성격의 어떤 경직이 잔류하는 것이다. 사회는 그 성원들에게 되도록 더 나은 유연성과 사회성을 주기 위해 이러한 경직을 더욱 제거하려고 한다. 이 경직이 바로 웃음거리이고, 웃음은 그 징벌이다.(21∼22쪽)

 

 

 

하나의 잔꾀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종종 힘을 보태주는 하나의 잔꾀를 시도해 볼 것이다. 원인이 명확해질 때까지 결과를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비대화시켜보자. 그리고 추함에 무게를 더하고, 그것을 꼴사나울 정도로까지 밀고나가 보자. 그리고 왜 꼴사나운 것에서 우스꽝스런 것으로 옮겨가는지를 살펴보자.(23쪽)

 

 

 

희극적인 것은 추함(laideur) 보다는 오히려 경직(raidekur)

 

요컨대 우리의 이성이 동조하는 학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상상력은 자신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적 형태 속에서 상상력은 물질을 형성하는 정신의 노력을 인정한다. 그 정신이란 한없이 부드럽고, 영원히 움직이며, 지구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중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이 정신은 자신이 생기를 불어넣은 육체에 날개와 같은 경쾌함으로 무엇인가를 전해준다. 이렇게 물질에 흡수되는 비물질성이야말로 사람이 일컫는 우아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저항하고 계속 버틴다. 그러면서 '비물질성의 우월한 원리가 이룬 언제나 깨어 있는 움직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 고유의 무기력 상태로 고쳐 이를 자동 현상으로 퇴화시키려고 한다. 물질은 또한 육체의 교묘하고도 끊임없는 움직임을 멍청하게도 몸에 밴 버릇으로 굳히려고 한다. 그리하여 얼굴의 생동하는 표정을 계속 찌푸린 표정으로 응결시키려는, 즉 살아 있는 이상과 접촉해 끊임없이 자아를 새롭게 해나가는 대신에,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물질성 속에 빨려들어 몰두하는 듯 보이는 그런 태도를 사람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물질이 그처럼 정신의 삶을 외면적으로 둔중하게 하여 그 운동을 응결시키는 일에, 즉 그 우아함과 모순된 것에 성공한 경우, 육체로부터 해학적 효과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만일 익살을 그 반대물과 대조시켜서 정의한다면 그것은 미보다는 우아함과 대립시켜야 할 것이다. 희극적인 것은 추함(laideur) 보다는 오히려 경직(raidekur)이기 때문이다.(25∼2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으면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 및 결합방식'을 연구주제로 하고 있는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한다.  『웃음』은 1,900년에 출판되었고 『물질과 기억』은 그보다 앞선 1896년에 출판되었다.

 

 

 

계속되는 관습이 그 사물에 깃들었던 희극적 효력을 잠재웠기 때문에

 

웃음에 대해서 잘못되거나 불충분한 이론이 생긴 이유의 하나는, 계속되는 관습이 그 사물에 깃들었던 희극적 효력을 잠재웠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이론적으로는 희극적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이 희극적 효력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는 연속의 급격한 단절, 유행과의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때 이 연속의 단절이 희극성을 낳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희극성이 우리의 눈에 띄게 할 뿐이다. 사람은 웃음을 기습이라든가 대조 등등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정의는 우리가 웃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많은 상황에도 또 들어맞는다. 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31쪽)

 

 

 

가장과 해학

 

가장한 사람은 해학적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가장한 것으로 생각게 하는 사람 역시 해학적이다. 이것을 더 확대하면 한 인간의 가장뿐만 아니라 사회의 그것도, 또 자연의 그것조차도 가장이란 가장은 모두 해학적이 된다.(32쪽)

 

(나의 생각)

찰리 채플린의 '네모난 콧수염'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탈'을 쓴 탈춤꾼도 마찬가지인 듯하고.

 

 

 

의식이 사회라는 몸과 맺는 관계

 

의식이 사회라는 몸과 맺는 관계는 꼭 옷이 개인의 몸과 맺는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이 지닌 엄숙함은, 우리가 관습 때문에 그 의식을 어떤 중대한 일과 똑같다고 간주하는 데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 의식을 그 중대함에서 분리하자마자 의식은 이 엄숙함을 잃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식을 익살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의를 의식의 격식에 집중시켜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형상만 생각함으로써 그 질료 쪽을 등한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점을 역설할 필요는 없다. 흔해빠진 상품 수여식에서 공판중인 법정에 이르기까지 꼼짝 못하는 형식의 사회적 행사에서 익살적인 기발한 생각이 얼마나 쉽게 떠오르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33쪽)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생명이 있는 것 위에 붙여진 기계적인 것, 그것이 역시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때 희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산 육체가 경직되어 기계화된다는 사실에서이다. 산 육체는 완전한 유연함, 언제나 기능하는 원리의 늘 깨어 있는 활동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활동은 실은 육체보다도 오히려 정신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급 원리에 의해서 우리 내부에 점화되고 투명화 작용으로 육체를 통해서 감지되는 생명의 불길인 것이다. 우리가 산 육체 속에서 우아함과 유연함만을 보는 까닭은 그 안에 자리한 무게가 있는 것, 저항이 있는 것, 즉 물질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만을 염두에 두어 물질성을 잊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력이란, 우리의 상상력이 지적 정신적 생활의 원리 그 자체로 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의 주의력을 육체의 이 물질성에 쏟도록 했다고 가정하자. 육체를 살리고 있는 원리의 가벼움에 참여하는 대신에 육체가 우리의 눈에는 이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은 것, 땅을 벗어나고 싶어 애태우는 정신을 지상에 붙들어두는 다리의 짐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상상해보자. 그러면 육체는 정신에 있어서 앞서 말한 의복의 육체 그 자체와 같은 것, 즉 생명의 에너지 위에 놓인 생명이 없는 물질이 될 것 이다. 이리하여 희극의 인상은 우리가 이 겹쳐짐에 확실한 느낌을 갖자마자 생길 것이다. 우리는 특히 사람이 육체의 욕구에 들볶이고 있는 정신을 말할 때에 그 느낌을 감지할 것이다-한편으로는 총명하게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에너지를 갖춘 정신적 인격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와 같은 고집불통에 간섭하고 차단하고 있는 어리석고 단조로운 육체. 이러한 육체의 욕구가 시시하게 일률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되풀이될수록 그 효과는 더욱 더 뼈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단순히 정도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현상의 일반 법칙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우리의 주의를 인물의 육체적인 것에 돌리도록 하는 것은 모두 희극이다.(35∼3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걸작『창조적 진화』(1907년 출판)에 담긴 내용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주의력이 갑자기 정신에서 육체로 돌아온 것 때문

 

왜 사람들은 연설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재채기 하는 연설가를 보고 웃는 것일까? 독일의 한 철학자가 인용한 다음의 추도사, "고인은 덕도 높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도 했습니다"의 해학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의력이 갑자기 정신에서 육체로 돌아온 것 때문이다.(36쪽)

 

 

 

희극성이 끼어들 우려

 

따라서 비극 작가는 우리의 주의력을 모을 수 있는 모든 육체적인 측면을 피하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면 희극성이 끼어들 우려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이 마시지 않고, 먹지 않고, 따뜻함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심지어 되도록이면 앉지조차 않는다. 대사를 하다 앉는 행위는 육체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때때로 심리학자 같았던 나폴레옹은 앉는 행위만으로 비극이 희극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구르고 남작의 《미완일기》에 이 문제에 대한 나폴레옹의 생각이 나와 있다.

 

(예나 전쟁 뒤 프러시아 여왕과 회견했을 때 일이다.) "왕비는 쉬멘처럼 비극적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는 '폐하, 정의를! 정의를!' 하면서 나를 몹시 곤란하게 하는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결국 나는 왕비의 태도를 바꾸려고 왕비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비극적인 장면을 끊는데 이처럼 좋은 것은 없다. 사람이 앉으면 그것은 희극이 되기 때문이다.(37쪽)

 

(나의 생각)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온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왕을 맞아들이던 장면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킬레우스도 무엇보다 먼저 '비극'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헥토르의 아버지'에게 무엇보다 먼저 '저녁과 포도주'를 내놓았고, 나중엔 '잠자리'까지 내주었으니까 말이다.

 

 

 

내용보다 뛰어나려는 형식

 

육체가 정신을 앞지른다는 이 형상을 확대해 보자. 우리는 더욱 일반적인 무엇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즉 내용보다 뛰어나려는 형식, 글의 진의에 트집을 잡는 표현, 희극이 어떤 직업을 웃음거리로 만들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관념은 이것이 아닐까. 희극은 마치 의사, 변호사, 재판관으로 하여금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직업의 외적 형식이 어디까지나 존중되는 것이 중요하며, 건강이나 재판 등은 사소한 일인 것처럼 말하게 한다. 이처럼 수단이 목적을, 형식이 내용을 대신하면 이제 직업은 대중을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직업을 위해 대중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된다. 형식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 규칙의 기계적인 적용이 여기에서 하나의 직업적 자동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여러 습관이 정신에게 강요하는 자동운동에 비교할 수 있고, 그것과 똑같이 웃음을 자아낸다.(37쪽)

 

 

 

 

사람이 사물과 같아 보이는 모든 경우는 웃음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중심적 형상으로 되돌아가 보자. 즉 생명이 있는 것 위에 붙여진 기계적인 것에. 여기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생명이 있는 존재는 인간, 즉 사람이었다. 기계적 장치는 이에 반대로 사물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웃음을 유발시킨 것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사물로 바뀌는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적이라는 명확한 관념에서 사물 전반이라는, 좀더 막연한 관념으로 옮겨보자. 그러면 일련의 새롭고 우스운 이미지가 생긴다. 그것은 이른바 전자의 윤곽을 모호하게 해서 얻는 것으로 우리를 다음의 새로운 법칙으로 이끈다. 즉 사람이 사물과 같아 보이는 모든 경우는 웃음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담요 위에 내던져져 풍선처럼 공중에 튀어오르는 산초 판사를 보고 웃는다. 또 대포알이 되어 공간을 날아가는 뮌히하우젠 남작을 보며 폭소한다.(39쪽)

 

(나의 생각)

산초 판사는 '담요 사건'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일을 당했을 때 느꼈던 비참한 심정을 돈키호테에게 여러 차례 호소한다. '그 때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나리님은 아셨느냐'고 말이다. 그때마다 돈키호테는 어쩔 줄을 모른다. 매번 '그 음악은 제발 틀지마세요~' 라는 말밖에 내놓지 못한다. '인간이 사물로 바뀌는 일'이 얼마나 '우습고도 심각한' 일이었던가를 세르반테스는 훤하게 꿰고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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