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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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전들에 담긴 '여자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겐 언제나 독특한 즐거움을 안겨 준다. 그런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에겐 도저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불가사의한 일'로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 과거엔 도리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뒤바뀌어 나타난다. 그런 일들이 주로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에 일어났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우스의 숱한 애정행각이 바로 '불가능을 모르는 신의 무한 능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저 유명한 트로이 전쟁도 바로 '단 한 명의 여자' 때문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일으킨 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숱한 영웅들의 '전기'에서 여자 이야기가 빠질 리는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온갖 절세의 미녀들을 탐내어 벌였던 엽색행각이 여기저기 난무할 만하다. 그러나 영웅전은 모름지기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쓰여진 작품이다 보니 그런 내용들이 언제나 맛뵈기로만 다루어진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마치 중국집에서 '육해공'으로부터 날라온 온갖 재료를 써서 만든 다양한 코스 요리를 실컷 맛보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남은 '약간의 허기'를 채울 때 시키는 '맛뵈기 기스면'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만약에 플루타르코스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공부했던 철학자도 아니었고, 방대한 분량의『윤리론집』을 쓸 만큼 그리스인 특유의 높은 '윤리와 도덕의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쓴 고대인들의 전기에 담긴 '여자 이야기'가 얼마나 더 풍성하고 다채로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50명이 모두 '본받을 만한 걸출한 영웅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는 점은 '흥미진진한 여자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에겐 그래도 한가닥의 희망이 될 지도 모르겠다. 플루타르코스가 '파렴치한 악인이 저지른 일이라도 모른 체 지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더 열심히 배우고 깨달으며 본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쓴 전기도 있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매우 지탄받을 못된 짓을 숱하게 저지른 인물로 그려진 그리스의 장군 알키비아데스, 로마를 끔찍한 내전으로 몰아넣었던 악명높은 인물인 술라, 독재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정벌에 도리어 앞장섰고 끝내 클레오파트라의 치맛자락에 빠져 이집트로 도망가 자살하고 말았던 안토니우스와 같은 인물이『영웅전』에 당당히 '자신의 전기'를 갖추고 있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로마가 인정했던 세계적인 미남이자 바람둥이였던 안토니우스에 '대비'되는 인물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군림했던 데메트리우스였다. 그 또한 당대의 호사가들이 널리 인정할 만큼 뛰어난 용모를 갖췄던 데다가 그가 지닌 권력과 방탕한 성격 때문에 평생 동안 숱한 여자들을 빼앗고 또 거느렸다. 이쯤에서 그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한 플루타르코스의 얘기 한 대목만 들어 보자.

두 사람 모두 권력을 누리는 동안 교만한 모습을 보였으며, 사치와 쾌락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와중에도 행동해야 할 때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는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에만 쾌락에 빠졌고, 그가 사랑했던 라미아도 꿈처럼 살면서 놀 때에만 가까이했을 뿐이었다. …… 저 유명한 시인 에우리피데스 시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바쿠스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금세 무섭고 용맹한 전쟁 신 마르스의 사자가 되어 달려나갔다. 데메트리우스는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 때문에 싸움에 진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옴팔레에게 곤봉을 빼앗기고 몸에 걸친 사자 가죽이 벗겨진 헤라클레스처럼 언제나 클레오파트라에게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그녀와 함께 카노푸스나 오시리스 무덤이 있는 타포시리스 해안으로 놀러 다니느라 대정복 계획을 모두 놓쳐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스처럼 전쟁에서 달아나 클레오파트라 치맛자락에 파묻혔다. 파리스는 그래도 전쟁에 져서 달아났지만, 안토니우스는 승부가 결정 나기도 전에 비겁하게도 클레오파트라 뒤를 쫓아 달아난 것이었다.(1723∼172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와 안토니우스의 비교> 중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전기'에서 '애정 행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인물들의 전기와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크다. 사실 '대비 열전'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도덕적으로 몹시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전기에서 흥미진진한 여자 이야기를 발견하기란 연목구어 격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라도 데메트리우스의 전기는 다른 인물들의 전기에 비해 일부 독자들로부터 특별한 흥미와 주목을 받았다. 그의 전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예술품들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데메트리우스의 '전기' 자체도 다른 인물들의 전기에 비해서 내용이 제법 풍성한 편이다.(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전3권에 총 2,015쪽에 이르지만 '작품 해설' 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전기 부분만 따진다면 대략 1,870쪽 분량이다. 1인당 평균 37쪽 정도인데, 데메트리우스 편은 51쪽이나 된다. 20쪽 남짓으로 다뤄진 인물들도 꽤 여러명이다. 참고로, 전기의 분량이 특히 방대한 인물들로는 알렉산드로스 75쪽, 폼페이우스 73쪽, 안토니우스 73쪽, 카이사르 56쪽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데메트리우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중언부언 더 소개하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지루해 질 게 뻔하다. 그래도 '명함 한 장' 정도에 담길 정도의 최소한의 프로필마저 아예 빼놓고 지나칠 수는 없다. 그는 마케도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들었던 알렉산드로스가 급작스레 죽고 난 이후의 소위 '디아도코이(후계자) 전쟁' 틈바구니에서 탄생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다. 그래서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은 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이었던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리시마쿠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이었고, 그들의 자식들인 카산드로스, 안티오쿠스와 같은 인물들도 데메트리우스와 활동이 겹쳤으며, 에피루스의 지배자로 유명한 피로스도 데메트리우스와 여러 번 전쟁터에서 맞닥뜨렸다.(피로스의 이야기는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서도 인상깊게 다루어지고, 심지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도 '피로스의 최후가 뭐였지요?'라는 스티븐의 질문과 함께 등장한다.)

이제 그만 데메트리우스의 여자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의 숱한 아내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시절의 아내들은 주로 '과부'였다. 다음의 이야기를 살펴 보면 그 당시에 패권을 노리던 인물들 사이에 '혼인 동맹'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도 엿보여 흥미롭다.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나이에 잠시 머무는 동안 에우리디케와 결혼했다. 영웅 밀티아데스의 후손인 에우리디케는 키레네의 오펠타스 왕의 아내가 되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테나이로 돌아와 혼자 살고 있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이 결혼을 아테나이 시의 영광이라고 여기며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이미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이 결혼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메트리우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는 필라였다. 그녀는 안티파트로스의 딸로서 이미 크라테루스와 결혼했었는데, 크라테루스는 그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테라크루스가 죽고 필라가 과부가 되자,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필라와 결혼시키려 했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처음에 이 결혼 제의를 받고 매우 못마땅해하자,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속삭였다.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시에는 본디 '복종'으로 되어 있는데, 안티고노스가 '결혼'으로 고쳐 말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필라를 비롯해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기생이나 첩들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는 같은 시대 어느 왕보다도 좋지 않은 평판을 들었다.(161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데메트리우스가 가장 오래 탐닉한 여자는 '라미아'였다. 그녀는 데메트리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한 끝에 자연스레 딸려온 전리품 목록 속에 포함된 여자였다.

포로들 가운데 라미아라는, 이름이 꽤 알려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플루트를 매우 잘 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음악적 재능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연애 사건으로 점차 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즈음 그녀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었고, 나이도 데메트리우스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데메트리우스는 라미아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녀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은 그녀를 너무나 부러워했다.(161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젊어서 부터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 데메트리우스는 어느새 헬라스의 '최고 사령관'이란 이름이 붙었고, 곧이어 자신의 아버지 안티고노스와 함께 '왕'으로까지 격상되어 불리게 되었다. 그가 라미아 때문에 욕을 먹은 일화들은 널리 해외에서도 곧잘 화제가 될 정도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테나이에 돌아온 데메트리우스가 시민들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의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250탈란톤이나 되는 큰돈을 즉시 바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린 일이다. 관리들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시민들의 돈을 긁어모았다. 게다가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마치 푼돈밖에 안 된다는 듯 라미아를 비롯한 여자들 화장품 값으로 내어주게 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데메트리우스가 자신들의 귀한 돈을 이렇게 써버리자, 돈을 잃은 것 이상으로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 일 말고도 라미아는 데메트리우스 왕 환영 연회 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돈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이 호화로운 잔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사모스 사람 린케우스는 이 일에 대해 쓴 역사책까지 따로 남겼다. 이즈음 어느 풍자 시인은 라미아를 '도시점령자'라 불렀고, 솔리 사람 데모카레스는 데메트리우스를 '미투스'라 불렀다. 데메트리우스 곁에 라미아가 늘 붙어다니는 것에 대해, 미투스 전설에 나오는 괴물 라미아에 빗대어 한 말이다.

실제로 데메트리우스가 라미아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되자 그의 다른 아내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신하들마저도 그녀를 미워하고 질투했다.

데메트리우스의 신하들 몇 명이 리시마쿠스 사절로 갔을 때 일이다. 리시마쿠스는 마침 한가로운 때에 자신의 허벅지와 팔에 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상처들은 언젠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기를 사자 우리 속에 처넣었을 때 사자와 싸우면서 생긴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 사절들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자기들 왕의 목에도 사자만큼 사나온 짐승에게 할퀸 상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나운 짐승이란 데메트리우스의 아내 라미아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놀라운 것은 데메트리우스가 시든 꽃이라며 필라를 거부하면서도,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라미아에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1621∼162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엽색 행각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의 추행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남자들도 있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나 여신을 자신의 누님이라 불렀으나 조금도 여신을 존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문 집안의 미소년들과 아테나이 여자들을 아크로폴리스로 불러들여 온갖 추한 행동을 했다. 차라리 크리시스, 라미아, 데모, 안티키라 같은 창부들을 상대했을 때가 이곳을 더 깨끗하게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테나이 시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는 젊은 다모클레스가 보여준 훌륭한 미덕과 정조에 대해 말해보겠다. 다모클레스는 '아름다운 다모클레스'라 불릴 만큼 외모가 아름다운 젊은이로, 데메트리우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이 젊은이에게 빠져서 온갖 선물로, 때로는 위협까지 하며 꾀어내려 했지만 젊은이는 계속 거절하기만 했다. 마침내 다모클레스는 사람들이 모이는 경기장 같은 곳에 가지 않고 목욕도 집에서만 했다. 하지만 기회만 노리고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그가 혼자 목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를 붙잡았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알아차린 다모클레스는 끓는 물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젊은이가 이렇게 삶을 마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모클레스의 행동은 그의 나라와 그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게 드높여 주었다.(161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플루타르코스가 <데메트리우스 편>에서 들려주는 숱한 '여자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한 이야기는 그녀의 딸 스트라토니케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은 데메트리우스의 사위의 아들이었는데, 후세 사람들로부터 '병든 왕자'라는 별명을 얻은 안티오코스였다. 그 왕자가 자신의 계모를 사랑하게 된다는 스토리는 일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힙폴뤼토스』를 연상시킨다. 테세우스의 후처 파이드라가 전처 소생의 아들 힙폴뤼토스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리고, 그녀의 애정 고백이 거절당하자 도리어 휩폴뤼토스가 자기를 유혹하려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편에게 남기고 목매달아 죽는다는 얘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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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드라와 힙폴뤼토스>,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1774∼1833), 1802년



<페드라>, 알렉상드로 카바넬 (Alexandre Cabanel / 1823~1889), 1880년


             테세우스
(얼굴을 돌린 채) 실수만 저지르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인간들이여,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수많은 기술들을 가르치고,
별의별 것을 다 생각해내고 발명해내는가?
바보들을 가르쳐 현명하게 만드는 법,
그것 하나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주제에!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힙폴뤼토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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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우스의 딸 스트라토니케는 이미 셀레우쿠스와 결혼하여 둘 사이에 아들까지 두었으나,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왕자 안티오코스가 계모 스트라토니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처음부터 자기 감정을 억누르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마침내 그는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기 위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안티오코스가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것이 상사병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안티오코스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의사는 하루 종일 안티오코스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젊은 여인들이 문병을 올 때마다 안티오코스의 태도와 몸 상태를 빈틈없이 살폈다. 그런데 스트라토니케가 자기 의붓아들을 만나러 올 때마다, 혼자서 오든지 남편 셀레우쿠스와 함께 오든지 관계없이, 저 유명한 사포가 발견해 낸 병증이 그의 몸에서 나타났다.

안티오코스는 스트라토니케 앞에서 늘 말을 더듬고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면서, 그녀의 눈길을 애써 피하려 했다. 게다가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빨라지고 식은땀까지 흘리다가, 마침내 감정이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면서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이제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왕자가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조용히 굶어 죽기로 결심하게 된 원인이 바로 왕비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가는 왕자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차마 왕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셀레우쿠스가 자기 아들을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셀레우쿠스에게 아들의 병에 대해 말했다. 의사는 젊은 왕자를 혼돈에 빠뜨리는 병이 다름 아닌 상사병이며, 이 사랑이 희망도 없고 치료도 불가능한 상태임을 덧붙여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셀레우쿠스는 의사에게 물었다.

"어째서 치료할 수 없다는 건가?"

의사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왕자님은 제 아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셀레우쿠스가 말했다.

"그래? 에라시스트라투스! 그렇다면 그대가 아내를 포기하고 나의 아들에게 보내주면 안 되겠는가? 왕자는 그대의 친구이며, 왕자를 살릴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안 됩니다. 전하꼐서는 만일 왕자님이 스트라토니케 왕비님을 사랑한다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하시겠습니까?"

에라시스트루투스의 말을 듣고 셀레우쿠스가 대답했다.

"이보게. 하늘과 땅에 맹세하지, 나는 사람에게나 신에게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왕자가 스트라토니케를 사랑하게 만들겠네. 안티오코스를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왕관마저 내려놓을 수 있네."

셀레우쿠스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으며, 그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러자 에라시스트라투스가 셀레우쿠스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하기를, 자신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며 셀레우쿠스야말로 가정에서 일어난 아픔을 고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의사라고 말했다.

셀레우쿠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모이게 한 다음, 안티오코스를 아시아 지역에 왕으로 보내고 스트라토니케를 그의 왕비가 되도록 허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신하들에게 왕자는 이제까지 자신에게 순종해 왔으므로 이 결혼 또한 반대하지 않으리라 믿지만 스트라토니케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기 말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니, 왕이 내리는 명령은 모두 옳고 명예로운 일이라고 그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안티오코스는 계모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게 되었다.(1632∼1633쪽)

이토록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난 뒤에 내가 찾아낸 그림은 아래의 석 점이다. 세 번째 그림을 그린 앵그르는 알고보니 마침 두 번째 그림을 그린 다비드를 사사한 화가였다.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호메로스 예찬> 등은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Antiochus and Stratonice
Author : ANTONIO BELLUCCI
Date :c. 1700
Technique :Oil on canvas, 253 x 301 cm
Location :Staatliche Museen, Kassel



Antiochus and Stratonica
Author : JACQUES-LOUIS DAVID
Date :1774
Technique :Oil on canvas, 120 x 155 cm
Location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Paris



안티오쿠스와 스트라토니케(Antiochus et Stratonice)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1866년, 유화, 파브르 미술관


이 이야기와 관련된 그림을 찾다가 우연히 덩달아 발견한 짧은 텍스트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엔 조금 아쉽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카셀의 회화박물관에 들러 벨루치의 그림을 직접 봤으며, 이 '병든 왕자'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도 풍성하게 담아냈다는 사실을 아주 상세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민음사)에서 앞으로도 여러 번 나오는 이 <병든 왕자 der kranke Koenigssohn>의 모티프는 원래 『플루타르크Plutarch 영웅전』의 데메트리우스편 제38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조인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B.C. 312-280)의 아들 안티오쿠스Antiochus는 젊고 아름다운 계모 스트라토니케Stratonike를 사모하여 시름시름 앓는다. 계모가 방에 들어올 때 왕자의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을 발견하고 병인(病因)을 알게 된 의사는 왕에게 우선 거짓으로 말하기를, 왕자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묻는다. 이에 왕은 왕국을 위해 부디 그의 결혼생활을 희생하고 왕자가 동경하고 있는 사랑을 성취시켜 주기를 간청한다. 이때 의사가 왕자의 진짜 병인을 밝히니, 왕은 스트라토니케를 단념하고 안티오쿠스를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도록 한다. 왕과 의사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에 스트라토니케가 왕자의 병석으로 다가서는 결정적 순간의 장면이 에로부터 많은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일찍이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도 <병든 왕자>의 그림을 논의한 바 있다. 또한 카셀Kassel의 회화박물관에는 벨루치Antonio Belucci의 그림 「병든 왕자」가 괴테 시대에 이미 전시되어 있었는데, 1779년 9월에 괴테가 그곳을 방문한 것이 입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스바덴Wiesbaden의 박물관에도 치크Januarius Zick의 「병든 왕자」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괴테는 1774년경에 이 화가와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p. 106,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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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루스의 왕 피로스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장식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워낙 전쟁을 좋아하는 바람에 잠시도 편안하게 쉴 줄 몰랐는데, 바로 그점 때문에 후세 작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던 듯하다. 따지고 보면,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제2장 달키의 초등학교>에서 '피로스의 최후가 뭐였지요?'라고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꽤나 심오한 '철학적 함의'가 있었던 셈이다. 피로스는 숱한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나중에 적군에게 쫒겨 어느 마을에서 포위된 끝에 어느 노파가 지붕에서 떨어뜨린 기왓장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손을 떼고 에피루스로 돌아왔다. 이는 구태여 일을 꾸밀 필요 없이 자기 국민들을 다스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으면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처럼, 그도 좀처럼 가만히 쉬고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에서 하릴없이 쉬지 못한 채

전쟁의 기쁨과 싸움을 그리워하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피로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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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매듭지은 자마 전투 이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그에게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소."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입니까?"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자마에서 나에게 패하지 않았습니까?"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세 번째인 것이오, 내가 그 전투에서 이겼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거요."


 * * *

 

한니발과 스키피오에 관련된 일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 세계의 최고 명장은 누구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일 것이다.

플루타르크는『피로스 전기』에서 말하기를, "한니발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명장 중에서 전술과 무술에 있어서 제일 뛰어난 사람은 피로스이고, 그 다음이 스키피오이며 그 다음이 한니발 자신이라고 하였다." 피로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니발의 순서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는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 이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니발의 병법과 전술을 창조적으로 모방한 자마 전투에서의 대승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 된 스키피오가, 그 전투가 있고 몇 년 후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한니발을 만나게 되었다. 지중해 세계의 최고 명장이고 한때 로마를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한니발도 자신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받고 싶었던지, 스키피오는 다소 도발적으로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군은 누구냐?"고 한니발에게 물었던 모양이다. 스키피오의 뱃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았을 한니발이 스키피오의 입맛대로 대답을 해주었을리 만무하다.

한니발은 대답하기를, 가장 뛰어난 장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했다.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스키피오는 마치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이 솔론에게 질문한 것처럼,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도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한니발은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라고 했다. 그가 병법의 대가요,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스키피오는 계속해서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자기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아닌 바로 자신의 이름을 댔다.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다음은 한니발이라는 얘기였다. 스키피오는 이쯤 되면 한편으로 화가 나고 다른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세 번째라는 말에 미소를 머금고,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에게 이겼다면?" 이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자마에서 나에게 진 당신이 어떻게 세 번째인가 하는 뼈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니발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자신의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스키피오의 질문에 대해 한니발은, 고대 세계 최고의 명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 피로스 → 한니발의 순서라고 대답한 셈이다.

플루타르크가 전하는 순위가 맞는 것인지, 시오노 나나미가 전해주는 이야기 속의 순위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 * *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로 원정하러 가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의 현명한 고문관 키네아스는 그의 야심이 얼마나 허영된 것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글쎄, 전하" 하고 물어 보았다. "전하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계획을 세우십니까?" "이탈리아의 영주가 되련다"고 그는 갑자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다음에는요" 하며 키네아스는 말을 이었다. "골과 스페인으로 가겠다"하고 왕은 말했다. "그 다음엔요?" "나는 아프리카를 정복하러 가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을 정복하여 내 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나는 만족하고 편안하게 살겠다." 키네아스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런 소원이시면 어째서 전하께서는 지금 그렇게 편히 살지 않으시려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런 생활을 지금 이 시간에 하고, 이 두 나라 사이에 그만한 수고와 위험을 면제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 * *



무엇이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에피루스(Epirus) 국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국왕에게 말한 것은 인생의 일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그 신하에게 자신이 예정하고 있는 모든 정복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최후의 정복계획에 이르렀을 때 그 신하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국왕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거야.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거야 ······ ." 그 신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폐하께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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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 동서문화사 월드북 245
플루타르코스 지음, 박현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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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움


모든 미덕 가운데에서도 으뜸은 정의로움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용감한 사람을 존경하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감탄하지만, 정의로운 사람에게는 그것 말고도 사랑과 믿음이 더해진다. 사람들은 뻔뻔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영악한 사람을 믿지 않는다. 용기와 지혜는 타고나는 성품에 속하지만, 정의는 그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로 정의를 선택한 사람은, 부정한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죄악이라 생각하며 혐오하는 법이다.(1403∼1404쪽)


 - <소(小) 카토 편>


 * * *


법을 잘 지켜라


본디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공포'뿐만 아니라 '죽음'과 '웃음', 그 밖의 다른 감정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두었다. 그들이 '공포'를 숭배하는 것은 그 초자연적인 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공포로 법과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보면, 에포로스는 관직에 취임할 때 사람들 앞에서 '모든 시민은 수염을 깎고 법을 잘 지켜라. 그러면 법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혹하지 않을 것이다' 선언했다고 한다.(1449쪽)


 - <클레오메네스 편>


 * * *


수치와 불명예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옛날 사람들에게 용기란, 단순히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닌, 수치와 불명예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었던 듯하다. 법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전쟁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우며, 정당한 비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속담은 진리라 할 수 있다.


존경에는 언제나 공포가 뒤따른다.


호메로스 시에는, 헬레네가 프리아모스에 대해 노래한 다음 대목이 있다.


사랑하는 아버지시여,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고 또한 존경할 것입니다.


(1449∼1450쪽)


 - <클레오메네스 편>


 * * *


더 중요한 것


의사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질병에 대해 연구해야 하듯이, 음악가는 아름다운 화음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먼저 불협화음에 대해 충분한 연구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완벽한 화음을 이루는 최고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 절제, 정의, 지혜 등을 분별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선과 정의 또는 좋은 수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악과 불의 그리고 나쁜 수단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한 번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순수한 고백만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것은 그저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롭고 명예로우며 유용한 것과 사람들에게 해가 되고 정의롭지 못하며 부끄러운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1598∼1599쪽)


 - <데메트리우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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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1-1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의 오늘 글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구속수사 논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기에 맞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7-01-17 10:32   좋아요 1 | URL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까마득한 옛날에도 당연히 ‘법대로‘ 처리해야 할 일들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법보다 다른 사정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아직까지도 태연하게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문명화된 국가 가운데 어디에서 과연 이런 ‘뇌물죄‘를 ‘다른 사정 때문에‘ 봐줘야 한다고 버젓이 주장할 수 있는지 그게 도리어 궁금할 지경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만일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에머슨이 유독『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심취했던 게 영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을 만난 영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칼라일은『영웅숭배론』까지 쓴 인물이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같은 텍스트도 금방 눈에 띄는 형편이니 둘 다 '영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건 분명하다. 작가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워낙 폭넓고도 내밀한 일이니 둘 사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이야기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에머슨이 특별히 '불타는 도서관'에 뛰어들어가서라도 꺼내고 싶다고 언급한 저 세 사람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읽기 쉬운 작품이 아마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아닐까 싶다. 무려 50명의 전기를 담고 있어서 그 양이 방대하긴 하지만, 각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워낙 생생하고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때론 박진감마저 넘쳐서 어떨 땐 만화책을 보는 듯한 몰입감까지 느끼며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책이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작품'이 지니는 독특한 한계는 그리 간단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문제로 치부할 일은 아닐 듯싶다.


가령, 셀 수도 없을 만큼 끊임없이 등장하는 낯선 지명들과 인명들과 족속들과 국가들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고역이다. 게다가 고대의 여러 신화와 인물들과 사건들에 얽힌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 등등에 대해서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 서술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를 꾹꾹 참고 견디는 일도 힘겹다. 물론 그리스·로마 시대에 쓰여진 몇몇 이름난 고전들이나 그 시대를 특별하게 다룬 후세의 여러 작품들까지도 더러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난관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까마득한 옛날 책들을 읽는 일에서 옛사람들보다 영영 불리한 점만 타고난 것은 아니다. 고대 고전 작품과 현대와의 거대한 간극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가교들이 적잖이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예술작품들'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덕분에 그런 예술작품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재빠르게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면서 자주 놀랐던 게 바로 그점이었다. 웅웅전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나 지명 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들을 검색하기만 하면 으레 예상치도 못한 '훌륭한 그림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는 데 몹시도 유익했다.


어젯밤에 내가 검색한 인물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넘어와서야 가까스로 만난 '포키온'이었는데, 마침 그를 알맞게 묘사한 그림들은 '추운 날씨에'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쯤인데, 포키온이 아테나이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기엔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전세계를 호령할 때였다. 선왕인 필리포스가 죽고 얼마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나이를 넘볼 때 이야기부터 들여다보자.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사절단이 전달한 결의문을 읽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그들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키온이 직접 찾아가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늘 신하들로부터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 포키온을 칭찬하고 존중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포키온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만일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멈추어야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전쟁을 하되 헬라스가 아닌 야만족들과 하라며 충고했다. 이처럼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 성격과 야망에 맞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헬라스를 이끌어 갈 나라는 아테나이일 것이라며, 아테나이인들에게 정치를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포키온을 친구이자 귀한 손님으로서 정중하게 대우했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헬라스에서 눈을 돌려 '동방 원정'에 나섰다. 그는 곧 아시아로 넘어가 다리우스 대왕을 패주시켜 '위대한 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자 그때부터 편지를 쓸 때면 그 누구에게도 첫머리에 인사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키온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에게 무척 너그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알렉산드로스가 포키온에게 100탈란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포키온은 돈을 가져온 이들에게 아테나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 돈을 가져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신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께서는 오로지 장군만이 명예롭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도 내가 계속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치고 이 돈을 도로 가져가시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아래의 그림이다. 포키온의 단호하면서도 당당한 표정도 몹시 인상적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신들이 놀라는 표정도 무척이나 생생하다. 그런데, 포키온의 발 옆에 놓인 세숫대야엔 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알렉산드로스의 선물을 거절한 포키온>, 지오아치노 아세레토(1600∼1649), 17세기경, 낭트 미술관



사신들은 포키온을 따라 그의 집에 갔다가 너무나 검소한 살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에서는 부인이 직접 빵을 만들었고, 포키온은 제 손으로 우물을 길어 손님들이 발 씻을 물을 떠다주었다. 그러자 사신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구가 이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 돈을 꼭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누더기를 입은 초라한 노인이 지나갔다. 포키온은 그 노인을 가리키며 자신이 저 노인보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사절단은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간청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저 노인은 나보다 더 가난하지만 그다지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고 있소. 내가 만일 이 돈을 쓰지 않으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리고 내가 이 돈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오."(1348∼13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렇게 해서 포키온은 끝내 그 돈을 돌려보냄으로써, 그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돈을 보낸 사람보다 더 부자라는 사실을 헬라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의 이러한 행동을 불쾌하게 여겨 자신의 자신의 친절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자 포키온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돈 대신에 감옥에 갇혀 있던 헬라스 사람들 몇몇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이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부하를 마케도니아로 보낼 때, 포키온을 만나면 아시아에 있는 네 도시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을 저버린다면 정말로 화를 내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대왕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포키온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녀를 그린 그림도 '명화'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포키온의 첫 번째 아내는 조각가 케피소도투스의 누이였다는 사실 말고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두 번째 아내는 포키온의 가난한 생활을 잘 견뎌낸 훌륭한 인품으로 아테나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언젠가 아테나이 시민들이 새로운 연극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여왕 역을 맡은 배우가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들을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배우는 무대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출을 맡은 멜란티우스가 여배우를 매우 꾸짖었다.


"저기에 포키온 부인이 앉아 계신 것도 보이지 않느냐? 저런 분도 시녀 하나만 데리고 다니신다. 너는 여성 관객들에게 허영심만 잔뜩 채워줄 작정이냐?"


연출자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극장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말소리를 듣고 관객이 동의하는 듯 크게 소리내어 박수를 쳤다.


또 언젠가는 이오니아에서 온 여인이 포키온 부인을 찾아와 자신의 보석 목걸이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키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보석은 지금까지 20년 동안 아테나이의 장군으로 계신 포키온뿐입니다."(1349∼13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후 마케도니아가 점차 강성하게 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이후 휘하 장군들끼리 권력다툼이 심화되는 와중에 아테나이도 결국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아테나이의 수비대장으로 파견된 마케도니아군의 사령관은 메닐루스였다.


마케도니아군 수배대장인 메닐루스가 포키온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포키온은 이 돈을 거절하면서 자신은 메닐루스가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지난날 알렉산드로스의 돈을 거절했던 자신이 이제 와서 메닐루스의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메닐루스는 그 돈을 포키온의 아들 포쿠스가 받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이에 포키온이 말했다.


"포쿠스가 만일 나쁜 버릇을 고쳐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이 아비의 재산으로도 넉넉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버릇을 못 고치고 계속 낭비만 일삼는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할 거요."


한번은 안티파트로스가 포키온에게 어떤 그릇된 일을 시키려고 하자 포키온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건 정말 못하겠소. 나는 당신의 친구이면서 앞잡이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오."


안티파트로스는 늘 아테나이에 두 친구, 포키온과 데마데스가 있다고 말했다. 포키온은 어떤 방법을 써도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고, 데마데스는 뇌물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언제나 부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1358∼135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한편 마케도니아 왕의 섭정을 맡은 폴리스페르콘은 아테나이를 손에 넣기 위해서 포키온을 무너뜨릴 궁리를 했는데, 그 방법은 지난날 아테나이 시민권을 빼앗기고 해외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선동가들과 고발자들로 하여금 포키온을 공격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혼란한 틈을 다서 협잡꾼인 아그노니데스가 포키온과 그 일파를 반역죄로 고발했고, 포키온과 그의 지지자들은 폴리스페르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서 포키온과 그 일행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수레에 실려 곧장 아테나이 법정으로 끌려간 뒤 사형을 받게 되었다. 어리석은 아테나이 군중들이 협잡꾼에게 속은 탓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헬라스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둘의 죽음은 모두 아테나이의 잘못으로 빚어진 비극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조금 더 소개하면 이렇다.


감옥에 도착한 토디푸스는, 자신은 포키온과 함께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한탄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물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죽는 게 그렇게도 못마땅하오?"


포키온의 친구 하나가 아들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포키온은 이렇게 대답핬대.


"아테나이 시민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포키온과 가장 친했던 니코클레스가 자신이 먼저 독약을 마시게 해달라고 하자, 포키온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괴로운 부탁이로군. 그러나 내가 평생 동안 자네 소원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들어주겠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독약을 모두 마시고 나자 포키온이 먹을 독약이 남지 않았다. 감옥을 지키는 관리들은 12드라크메를 내야 독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친구를 불러 옥리에게 돈을 좀 주라고 부탁하며, 아테나이에서는 죽는 데도 돈이 든다고 한탄했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포키온의 적들은 그를 죽인 일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그의 시신을 아테나이 땅에 묻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포키온을 화장시킬 장작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선포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마치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을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골육상쟁 끝에 일대일 결투에서 서로 죽이고 죽자,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오이디푸스 왕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오라버니)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법령으로 포고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고 오라비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다가 잡혀 크레온 앞으로 끌려가고 사형을 선고받고 석굴에 갇힌다. 크레온의 아들로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 와서 아버지를 말려보지만 크레온의 생각은 확고하고, 안티고네는 끝내 목을 매달아 죽는다.


              하이몬   테바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아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 《안티고네》733∼739행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뇌물'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한 작금의 현실이 이내 선명하게 겹쳐 떠오르는 걸 참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점에 대해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건 내 몫이 아니다. 다시 포키온의 이야기로 되돌아 오자. 어느새 장면은 뒤바뀌어 '포키온의 장례 모습'에 이르렀다.


결국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는 코노피온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메고 엘레우시스를 지나 이웃 나라인 메가라에 가서 화장을 해주었다. 시녀들을 데리고 메가라까지 따라갔던 포키온 부인은 그곳에 빈 무덤을 만들고, 유골을 품속에 몰래 숨긴 뒤 밤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포키온의 유골을 벽날로 옆에 묻고는 이렇게 말했다.


"축복받은 벽난로야! 착하고 용감했던 분의 재를 너에게 맡기니 부디 잘 지켜다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때 조상들의 무덤으로 고이 옮겨갈 수 있게 해다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질고 위대한 보호자를 잃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늦게나마 포키온의 동상을 세우고 그 명예에 걸맞게 다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포키온을 고발했던 아그노니데스를 잡아들여 사형시켰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17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였던 푸생은 포키온에 대한 그림을 딱 두 점 남겼다고 하는데 그 그림들은 모두 포키온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평생 동안 조국을 위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멸사봉공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저토록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마치 물건을 내다버리듯이 조국으로부터 버려지는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 배경을 이루는 풍경들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하고 균형잡히고 아름답고 평화롭다. 화가 푸생은 바로 상상 속의 풍경을 저렇게 이상화시켜서 죽은 영웅의 위대성을 고결함과 숙연함으로 형상화시켰다고 한다.



<포키온의 장례식 풍경>, 니콜라 푸생, 1648년(1594 ~ 1665), 영국 카디프 웨일스국립박물관


푸생이 그린 두 번째 그림은 제목 그대로 아테네를 벗어난 한적한 교외에서 '포키온의 유해를 모으고 있는 포키온의 미망인과 하녀'를 묘사하고 있다. 하녀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경계하지만 포키온의 아내는 몹시도 꿋꿋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죽은 남편의 유골을 수습하는데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녀의 머리와 팔과 손 위로 눈부신 빛이 비치고 있는 모습도 몹시 인상적이다.


<포키온의 유골을 모으는 그의 아내>, 니콜라 푸생(1594 ~ 1665), 1648년, 영국 리버풀 워커 미술관


<포키온 편>을 읽으며 내가 살펴본 그림들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포키온의 얘기가 앞에서 내가 밑자락을 깔았던 '추운 날씨'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금방 이해하리라 믿는다.


역사가 두리스의 말에 따르면, 포키온은 공중목욕탕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거리를 걸을 때는 아무리 추워도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쩌다가 포키온이 외투를 입으면, 병사들은 오늘 날씨가 엄청 춥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1336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정말 매섭고 차다. 그런데도 어젯밤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무려 십만 명 이상이나 '뇌물을 주고 받은 재벌 총수와 대톨령을 구속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였다고 한다. 정작 '뇌물 장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 추운 날씨와 국민들의 분노에도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지내며 도리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뻐기고 있는데 말이다.


이 사태가 불거진 초기에만 하더라도 매일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나라냐' 싶더니만, 이젠 그 정도를 훨씬 더 넘어서 어느새 '저 사람이 도대체 과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이었던 포키온은 '뇌물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만 유명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포키온을 둘러싼 이야기를 읽다 보니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진 '대통령을 둘러싼 온갖 추악한 뇌물 이야기' 때문에 온나라 백성들이 이 혹독한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광화문에 모여든 모습과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 이야기를 길게 옮겨 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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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영어에서 'Lucullan'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군대 사령관이었던 '루쿨루스(LUCULLUS)'라는 인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사치스러웠으면 후세 사람들이 그런 단어까지 만들어냈을까 궁금하다.


루쿨루스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헬라스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는데, 일찍부터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훌륭한 웅변가가 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그의 연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다른 웅변가들은 광장에서는 마치 '상처 입은 참다랑어가 바다에서 날뛰듯이' 열변을 토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지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는 말만을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정치적 목적만을 위해 유창하고 경쾌하게 연설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그의 연설은 언제 어디서나 듣는 사람을 크게 감동시켜 탄식하게 만들었다. (90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쯤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내 머리를 스치는 불쾌한 기억을 여기에 슬며시 꺼내 놓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오로지 자신의 측근들만의 사익을 위해 온갖 부끄러운 비리를 숱하게 저지르고 나서도 물불을 가리지 앟고 그런 궁지에서 벗어나 보려고 '상처 입은 다랑어처럼' 몸부림을 치는 어느 대통령의 언설과 몸짓이 순간적으로 내 눈앞에 다시 떠올라서 하는 얘기다. 노트북마저 지참하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억지로 끌려간 듯한 애꿎은 기자들 앞에서, 도무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인 '종을 잡을 수 없는' 말들만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이' 계속 내뱉기 일쑤인 그녀의 말을 우리 국민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더 분노하고 탄식하며 들어야 좋단 말인가.


잠시 기분이 잡쳤다. 얼른 다시 고대로 되돌아 가자. 어쨌든 루쿨루스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해 교양을 익히는 데 마음을 쏟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온갖 전쟁터를 누비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뒤에도 마침내 늘그막에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안식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장군으로서 쌓은 업적 때문에 획득한 부를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쾌락과 사치에 쏟아부은 건 분명 지나친 면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가 루쿨루스를 키몬과 비교하여 설명한 다음 대목은 루쿨루스에게는 분명 아픈 데를 적잖이 후벼파는 대목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둘은 모두 부자였지만, 그 부를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달랐다. 그들은 모두 야만인들로부터 빼앗은 재물로 부를 얻었는데, 키몬은 그 돈으로 아테나이 아크로폴리스 남쪽 성벽을 쌓았고, 루쿨루스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다.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키몬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베풀었던 일과, 루쿨루스가 몇몇 손님들을 위해 호화찬란한 식탁을 마련했던 일 또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은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돈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사치와 향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만일 키몬이 전쟁을 하지 않고 본국에 돌아와 한가롭게 지냈다면, 그도 난잡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술과 친구를 가까이하며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 많은 사람은 전쟁이나 정치에서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면 작은 쾌락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법이다. 만일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장군으로 있다가 그대로 싸움터에서 죽었다면, 아무도 그에게서 흠을 잡아내지 못했으리라.(95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어떤 여성 지도자가 21세기에 와서도 온 백성들의 눈과 귀를 교묘하게 가리면서까지 자신의 엄청난 권력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전방위로 힘을 쓴 얘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다. 어쨌든 루쿨루스는 당대의 여러 탁월한 장군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루쿨루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에 호시탐탐 로마를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외부의 적은 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을 파죽지세로 복속시켜 나가던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이래로 오랫동안 로마를 곤란하게 만든 몹시 야만스럽고도 완강한 적이었다. 로마는 그에 대항해서 무려 20여 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이른바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렀는데, 여러 차례 미트리다테스 왕에게 패해 수많은 로마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 미트리다테스 6세(B.C. 135년∼63년)의 조상, 루브르 박물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8∼84) 중에는 로마에서 '내전'을 일으켰던 술라가 이 전쟁에 참가하여 '카이로네이아 전투'와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둠으로써 간신히 적을 제압했다. 그 무렵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술라를 반역자로 내몰던 상태였다. 술라는 결국 수세에 내몰렸던 미트리다테스를 끝까지 추궁하지 못하고 그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사정이 더 급한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주역으로 참가했던 술라(B.C. 138 ∼78)


그 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3∼82)을 치르고 난 뒤 한동안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소강 국면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75∼65)이 다시 재개되었다. B.C. 77년에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도 거기에 호응하여 아시아에서 다시 로마에 대항한 것이었다. 이때 로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보내고 아시아 속주에 대해서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파견하였다.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루쿨루스가 보여준 교묘한 전략과 엄청난 용맹은 결국 연전연승으로 계속 이어졌다. 플루타르코스의 설명만 들어봐도 그가 3차 전쟁 중에 얼마나 빛나는 승리를 거듭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전쟁 공적은 루쿨루스가 키몬보다 뛰어났다. 그는 로마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고, 티헬라스 강을 건너, 티그라노케르타와 카베이라, 시노페, 니시비스 왕궁을 그 왕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는 북쪽으로는 파시스 강까지, 동쪽으로는 메디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왕국을 거쳐 홍해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또 여러 왕들 세력을 꺾어 쫓기는 짐승처럼 사막이나 밀림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루쿨루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적을 무찔렀는지는 다음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키몬이 죽은 뒤에 페르시아 군대는 언제 그에게 당했느냐는 듯이 무기를 쥐고 다시 나타나, 아이귑토스에서 헬라스 대군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 왕은 루쿨루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에도 꼼짝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루쿨루스에게 몇 차례 패한 뒤에는 맥이 풀려서 폼페이우스와는 감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보수포루스로 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티그라네스는 망토도 걸치지 않은 채로 무기를 버리고 폼페이우스 앞에 엎드려 자기 왕관을 바쳤다. 하지만 그 왕관은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한 것이 아니라 루쿨루스 승리를 빛나게 할 개선식에 전리품이 되었다.(956∼95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렇듯 모든 전투에서 거듭 빛나는 명성을 쌓았던 루쿨루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부하들과의 친화력 부족'이었다.


루쿨루스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말재주가 있고, 광장에서나 전장에서나 똑같이 신중했다. 그런데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기록을 보면, 병사들은 전쟁 시작부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그의 병사들은 키지쿠스와 아미수스 전투 때에도 한겨울에 야영을 해야 했으며, 그 뒤에도 계속 적의 영토에서 겨울을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평이 컸던 것이다. 그런 로마군에 협조하려는 도시들도 있엇지만, 루쿨루스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면서 굳이 병사들을 벌판에서 재웠다. 병사들 불만과 불평은 로마 민중 지도자들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루쿨루스를 시기하고 있던 그들은 루쿨루스가 오로지 권력과 재물 욕심 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루쿨루스는 킬리키아 · 아시아 · 비티니아 · 파플라고니아 · 갈라티아 · 폰투스 · 아르메니아 · 파시스 강까지 차지하고, 또 얼마 전에는 티그라네스 성까지 빼았았는데, 이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헐뜯었다.(94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끝내 병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고, 이 틈에 민중의 환심을 얻은 폼페이우스가 새로운 장군으로 아시아에 건너오면서 루쿨루스는 군대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고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쿨루스가 이렇게 된 것이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운이 나빠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장군으로서 가장 중요한 조건인 친화력이 부족했다. 만약 그가 지닌 많고 훌륭한 장점들인 용기와 행동력 그리고 판단력과 정의감에 병사들 마음을 살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로마의 경계는 에우프라테스 강이 아니라 더 멀리 아시아 끝과 히르카니아 해에까지 이르렀으리라. 다른 나라들은 티그라네스에게 몇 차례나 정복당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고, 파르티아 세력 또한 크라수스 때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자기 손으로 로마에 세운 공보다는, 남의 손을 거쳐서 로마에 끼친 손해가 더 많았다. 파르티아 국경 근처 아르메니아와 티그라노케르타와 니시비스 등에 세운 전승 기념비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많은 보물과 개선식 때 전리품으로 나온 티그라네스 왕관등을 본 뒤로 크라수스가 아시아 정벌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그곳 야만인 왕국을 오로지 전리품으로만 생각하고 만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곧 파르티아군 화살을 맛보았으며, 루쿨루스가 이루었던 승리는 적군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용기와 전략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94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여러 성가신 일들로 큰 시련을 맞았으나 뒤늦게나마 간신히 개선식만은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개선식은 다른 장군들처럼 성대하지도 않았고, 행렬이 길거나 전리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만인 왕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과 전쟁기계들로 커다란 플라미니우스 원형극장을 꾸민 것은 사람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선식 행렬에 나온 것은 중무장한 몇몇 기병들, 큰 낫이 달린 대형 전차 10대, 루쿨루스의 보좌관과 장군들 60명, 구리로 뱃머리를 감싼 군함 110척, 높이가 6척인 미트리다테스 황금 동상, 보석들이 박힌 방패 하나, 은그룻을 담은 들것 20개, 금술잔과 갑옷, 화폐를 담은 들것 32개 등이었다. 이 밖에도 노새 8마리가 황금으로 만든 긴 의자를 끌었고, 56마리의 노새는 은괴를 끌었으며, 107마리의 노새는 270만 개의 은화를 지고 있었다. 또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쳐부술 때 제공해 준 군자금과 국고에 낸 금액, 그리고 병사들에게 950드라크메씩 나누어 줬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판도 따라 나왔다.(9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개선식을 치르고 나서 얼마 뒤 루쿨루스는 제멋대로이고 행실이 나쁜 클로다아와 이혼하고 카토의 누이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루쿨루스 집안에서 맞아들인 여자들은 하나같이 방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 또한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다. 세르빌리아도 모든 면에서 클로디아에게 뒤지지 않는 끔찍하고 막돼먹은 여자였던 것이다. 루쿨루스는 카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얼마 동안은 참고 지냈지만, 마침내는 그녀도 내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정치에서도 은퇴했다. 그가 정치에서 은퇴한 것이 귀족들이 부패해서였는지, 아니면 이제까지 영예에 만족해 남은 삶을 평화롭게 보낼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루쿨루스의 이런 변화를 두고서, 그가 마리우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내린 올바른 결정이라며 칭찬했다. 얼마 전에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을 정복해 찬란한 공을 세운 뒤에도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공명심과 권세욕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과 섞여 정치를 했는데, 그로 인해 무서운 죄를 저질렀고, 엄청난 고생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 말처럼 키케로가 카틸리나 사건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생애를 보냈더라면, 또 스키피오가 누만티아와 카르타고군을 정복한 뒤에 은퇴 생활을 했더라면 훨씬 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으리라. 정치도 다른 모든 일들처럼, 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들도 운동선수처럼, 체력과 젊음이 다하면 새로운 상대에게 꺾이고 마는 것이다.(948∼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로마 공화정 말기 <카틸리나 탄핵>을 주도했던 키케로(B.C. 106∼43)


노욕에 찌들어 부질없는 권력만 탐하는 늙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도리어 망가뜨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쾌락과 사치에 젖어 있는 루쿨루스를 비웃었다. 그런 생활을 즐기는 것은, 정치를 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일 못지않게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 루쿨루스의 정원_상상도


루쿨루스 일생은 마치 옛 희극과도 같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정치와 전쟁에서 웅장하고 큰 활약들을 보여주고, 나중에는 먹고 마시고 잔치를 열며 흥청거리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가장 뒤에 나오는 장면에는 호화로운 저택, 사치스러운 목욕탕, 그림이나 조각들이 나온다. 그는 싸움터에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재산을 저택에 꾸밀 골동품들을 사 모으는 데 써버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루쿨루스 정원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마 황제의 정원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큰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산에 굴을 파서 마치 공중에 걸린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집 주위에는 바다에서 둥근 바위들을 가져다 놓았고, 연못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물고기를 길렀다. 그리고 바다 위에도 집 여러 채를 지었다. 스토아 철학자 투베로는 이 집들을 구경하고 놀란 나머지, 루쿨루스는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 왕이라고 말했다.


루쿨루스는 또 투스쿨룸 근처에도 별장 여러 채를 지녔는데, 이 집들은 모두 경치 좋은 전망대와 많은 사람이 잘 수 있는 시원하고 넓은 방, 그리고 아름다운 산책길을 갖추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 놀러왔다가 루쿨루스에게, 여름에는 시원하겠지만 겨울에는 살기 힘들겠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니, 나를 황새나 학보다도 둔한 사람으로 여기시오? 철따라 옮겨 사는 법도 모르는 줄 아느냔 말이오?"

(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저토록 화려한 저택에 살았으니 전속 요리사가 만들어 내는 '진수성찬'이 어땠을지는 가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에 딸린 일화를 조금만 조금 인용해 보자.


루쿨루스가 날마다 먹는 식사도 잔치에 못지않게 푸짐했다. 식사때면 언제나 염색된 천을 씌운 긴 의자와 보석이 박힌 술잔들, 그리고 합창과 연극이 따랐다. 음식들 또한 온갖 진기한 요리들과 향기로운 음료들을 모두 갖춘 산해진미였다. 그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음식을 먹었다.


폼페이우스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가 그에게 지빠귀를 잡아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여름철이라 이 새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하인이 나서서, 루쿨루스 저택에서 그 새를 기르고 있으니 거기서 얻어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럴 허락하지 않고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알아보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토록 사치스럽게 사는 루쿨루스 도움이 없으면, 이 폼페이우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9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동방에 사는 어느 여자 대톨령은 '혼밥'을 그토록 고집했다고 하나 루쿨루스의 '혼밥 이야기'도 제법 유명해서 로마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그런 생활을 즐겼는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는 언젠가 로마에 찾아온 몇몇 헬라스 사람들을 여러 날 동안 푸짐하게 대접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은 헬라스 사람들답게 자기들 때문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미안해서 다음부터는 초대를 사양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그들에게 웃으며 말헀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대접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또 어느 날에는 그가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음식이 꼭 한 사람 먹을 양만 나왔다. 그러자 그는 요리하는 하인을 불러 몹시 화를 냈다. 하인은 손님이 없어서 큰 잔칫상을 차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루쿨루스가 말했다.


"아니, 너는 오늘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손님으로 초대한 사실을 몰랐단 말이냐?"


이 말은 온 로마에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950∼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왕 '혼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얽힌 일화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이 일화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인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도 등장한다.


 -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지은 폼페이우스(B.C. 106 ∼ 48)


어느 날 루쿨루스는 홀로 공회당을 걷다가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를 만났다. 키케로와는 본디 가까운 사이였고, 폼페이우스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지휘권 문제로 다투기는 했지만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루쿨루스에게 인사를 건넨 키케로가 자신들을 식사에 초대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루쿨루스는 더없는 영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키케로가 덧붙였다.


"우리는 오늘 당신과 식사를 하고 싶은데, 당신이 혼자 있을 때 먹는 그대로만 대접해 주시오."


루쿨루스는 거북스런 표정을 짓더니 그러면 하루만 미루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꼭 오늘이라야 하고, 하인에게 미리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그가 하인을 시켜, 그가 홀로 식사할 때와는 달리 푸짐한 음식을 준비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다만 루쿨루스의 요청에 못 이겨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 하인 하나를 불러서, 루쿨루스가 오늘은 아폴로에서 저녁을 먹을 테니 준비해 두라는 지시를 내리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손님들은 루쿨루스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루쿨루스는 집에 있는 여러 방마다 이름을 붙이고, 그곳을 사용할 떄의 음식 비용과 여흥 종류들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방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면, 곧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형식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 정해졌던 것이다.


아폴로라는 방에서 식사할 때의 비용은 5만 드라크메였다. 때무네 그날도 그많나 돈을 들인 식사가 나왔다.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는 식사 규모의 엄청남에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루쿨루스가 돈을 포로나 야만인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해 함부로 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온갖 전쟁을 치른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했다고 해서 오로지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며 산해진미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는 데 시간을 모두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몽테뉴와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가까이 했다. 그는 도서관을 짓고 시민들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도서관을 갖추어 놓은 것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그는 좋은 책들을 많이 모았다. 그런데 이처럼 책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그 책을 널리 이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의 도서관은 늘 열려 있었고, 도서관에 딸려 있는 산책길과 열람실은 로마 시민들뿐 아니라 모든 헬라스 사람들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마치 무사이 신전처럼 즐겁게 드나들며,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루쿨루스도 자주 이곳에 나와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치를 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그의 저택은 로마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집이었으며, 때로는 시민들의 공회당이 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도서관을 갖춘 것은 철학을 사랑하고 여러 학파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학설과 필론의 지도로 발달한 신 아카데미이아 학파가 아닌, 그 무렵 석학이며 웅변가였던 아스킬론의 안티오코스를 대표로 한 구아카데메이아 학파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코스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가 키케로를 비롯한 필론파 철학자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951∼95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나도 한번 저렇게 살아봤으면...' 싶은 소망을 품게 만들 정도로 '부럽게' 살았던 루쿨루스였지만, 그런 삶이 도리어 '수많은 민초들의 온갖 희생' 위에 터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승에서라도 그를 다시 불러내어 심판대에 올려보면 좋겠다' 싶어서 쓴 작품이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쓴 <루쿨루스 심문>이었고, 작곡가 데사우는 오페라 작품으로도 만들어 놓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70769&cid=51211&categoryId=51211


한편, 로마의 이름난 영웅들과 여러 차례 건곤일척을 다퉜던 미트리다테스 왕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도 결코 적지 않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마치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비록 자신의 '열전'을 따로 갖지 못했다. 그렇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쓴 '50인의 열전' 가운데 <카이우스 마리우스 편>, <술라 편>, <루쿨루스 편>, < 폼페이우스 편>, <세르토리우스 편> 등에서 거듭 등장할 정도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고대의 이야기'에 특별히 심취했던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Jean Racine, 1639∼1699)은 이 인물에 매료되어 결국 희곡 『미트리다트』를 썼고, 그로부터 얼마 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불과 14세의 나이에 오페라 <미트리다테>를 만들어 그를 부활시켰다.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7&contents_id=10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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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 판본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추억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1-08 20:32 
    oren 님의 플루타코스 영웅전 얘기,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먼댓글로 연결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었네요. 제가 어렸을 때, 교과서를 제외하고 거의 최초로 읽은 책이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거든요(돈키호테, 아라비안 나이트와 더불어). 그런데 그때 읽었던 판본 제목이 ‘플루타크 영웅전’이었는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너무 어릴 때라 내용도 거의 기억
 
 
qualia 2017-01-0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 흥미로운 「루쿨루스와 미트리다테스에 얽힌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숨어 있던 인연이 드러나고, 그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위에 제가 남긴 먼댓글에 중에 “플루타코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오타인데, 제 블로그에선 올바로 수정했습니다(위 먼댓글 맛보기에 나타난 부분은 수정을 해도 반영이 안 되는군요. 처음 잘못 써올린 것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 번역판본들은 그리스어 현지 발음과 표기가 아닌 영어식 발음과 표기를 채택해서 “플루타크”나 “플루타르크”로 음역했더군요. 해서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플루타르크 모두 맞는 표기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또 다른 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는 아주 요긴하고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더군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oren 님 글 덕분에 저는 오늘 여러모로 얻은 게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oren 2017-01-09 00:22   좋아요 1 | URL
저 또한 적잖은(?) 나이에 뒤늦게 (어릴 때나 ‘아동용‘으로 접하게 되기 쉬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흠뻑 빠져 지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답니다. 이 책이 워낙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언감생심‘ 완독할 엄두를 내기는 좀처럼 어려웠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까마득한 옛날에(1980년 겨울에) 딱 한 번 읽었던 ‘몽테뉴 수상록‘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게 되면서, 몽테뉴가 평생 동안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금 이 책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고교시절 ‘세계사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께서 자주 들려주셨던 여러 고대의 인물들(가령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브루투스 등등)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끔씩 떠올라, 언젠가는 이 책을 꼭 한 번 완독해 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더군요.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러 차례 귓등으로만 스쳐 들었던 ‘미트리다테스‘라는 인물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너무나 자주 마주쳤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그 인물에 얽힌 이야기가 이미 숱하게 다른 작가나 예술가들에게도 놀라운 예술적 자극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더욱 놀랐답니다.
 


매우 늦은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이제 잠자리에 들겠지만, 잠을 자지는 못할 겁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꿈을 꾸게 되겠지요.
 - 프란츠 카프카, 1913. 1. 22

 * * *

카프카에게 꿈은 '잠 없는 밤에 벌인 투쟁'이었다. 그에게 꿈은 종종 환상적 글쓰기를 위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무서운 공포에 시달리게끔 하는 효과'가 더욱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오직 꿈을 꿀 뿐입니다. 잠 없는 꿈을."

어느덧 다 저물어 가는 올 한 해를 되돌아 보니 문득 카프카가 그토록 자주 꾸었다던 '악몽'을 꾼 느낌마저 든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거대한 카드섹션을 만들어 보이며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과거는 이미 온데 간데 없이 다 사라지고 진짜 악몽만 남은 기분이다. 저마다 붉은 티를 걸쳐 입고 시청앞 광장을 붉게 물들이며 '대한민국~'을 한 목소리로 그토록 우렁차게 외치던 그런 때가 과연 있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너무나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고 척박하게 변해 버린 듯힌 참담한 기분마저 든다.

이제와 문득 꿈에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악몽'이 아닌 진짜 현실이었다. '봉건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다'던 일들이 무수히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우린 그런 현실이 그저 '악몽'일 뿐인지 진짜로 벌어진 '현실'인지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며 살아온 느낌이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다. 뒤늦게나마 그런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우리 스스로 힘겹게 찾아내고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11월 5일부터 주말마다 광화문을 찾아 '촛불'을 들었던 게 결코 헛일은 아니었던 듯싶다. 탄핵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5주 연속으로 찾았던 '광화문 촛불 집회' 가운데 내게 가장 울컥했던 순간이 바로 전인권이 부른 이 노래를 들으며 함께 불렀던 순간이었다. 그날은 마침 운이 좋게도 주무대와 불과 3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찌감치 자리잡고 앉아 있었던 덕분에 모든 노래들이 다 생생하고 좋았지만, 그래도 이 노래를 듣고 부르던 순간만큼은 오래도록 잊기 힘들 듯하다.

참으로 힘겨웠던 올 한 해의 모든 기억들은 이제 다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또 흘려 보내고, 우리 다 함께 희망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언젠가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도 좋을 때가 올 것이다. 비록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아직 몰라도 '악몽'에서 벗어날 때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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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1 04:33   좋아요 1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31 13:08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6-12-3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꿈을 꾸는 새해 되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편안하기를 소망합니다.

oren 2016-12-31 18:55   좋아요 0 | URL
어느새 새해가 코앞에 바짝 다가왔네요.
2017년에는 정말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두루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