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대안 시리즈’에 이어서 우석훈의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네 권의 시리즈 가운데, <생태요괴전>(개마고원, 2009)와 <생태 페다고지>(개마고원, 2009) 두 권이 우선 1차분으로 나왔는데,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2009)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세 권이다. 언론의 아무런 조명도 없이 '조용히' 출간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작전'을 방불케 한다. 조용히 내딛는 걸음이지만 당차면서도 확고해 보인다.     

배송도 그렇고 책은 연휴가 지나야 보게 될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소개와 목차를 통해 대강의 취지와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생태요괴전>의 부제인 '넓게 생각하고 좁게 살기'의 풀이가 이렇다.

과시적 욕구로 가득 찬 본능, 혹은 마케팅에 의해 급조된 욕망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넓게 살기’다. 큰 아파트, 큰 건물, 대형 승용차 같은 것들이 이런 본능 혹은 욕망이 지시하는 방향이다. ‘좁게 살기’는 이와 반대되는 삶의 상징적 표현이다. 예전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망했다. 세상은 넓지 않다.  

본능이 지시하는 과시적 소비의 욕구를 이기고 좁게 살려면 생각을 아주 많이 해야 한다. 한마디로 ‘넓게 생각하기’가 가능해야 좁게 살 수 있다. 넓게 생각하기란 어떤 것인가? 각자의 삶의 영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좁게 살기’도 해석의 여지가 많다. 적게 먹는다고 라면을 주식으로 먹거나 햄버거 위주의 식사를 하는 것은 ‘싸게 살기’이지, ‘좁게 살기’는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좁게 살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왜 너는 생태적으로 살지 않니?”라고 야멸치게 쏘아붙이며 잘난 척하라고 좁게 살기를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높은 빌딩, 큰 차, 열관리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해야 개발요괴의 전성기를 극복할 수 있고, 다가오는 ‘희소성의 시대’에도 한국 경제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와 문화, 경험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들임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247-8쪽)  

이 대목을 읽고 서가에서 빼온 책은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2002)와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이다. 싱어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언급하는 대목이 생각나서다. '독서와 문화, 경험'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라고 할 때, 특히 이런 책들은 '도구 중의 도구'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결국 돈이 문제다'(85-88쪽)라는 절에서 싱어가 인용하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돈은 '분리의 보편적인 기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과 힘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추한 남자라도 돈이 있으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둘 수 있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돈은 우리를 진정한 인간성에서,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서 분리시킨다."(마르크스의 말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참조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의 이러한 생각을 입증해주는 심리학 실험을 싱어가 소개하고 있다는 점. 개인적으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의 하나였는데, 실험 내용은 이렇다. 두 대조군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한쪽에는 과제를 주면서 돈에 대한 문구를 중간중간 들려주거나 옆에 돈더미를 올려놓거나 각종 화폐가 나타나는 스크린세이버를 볼 수 있게 한다(이들을 '머니그룹'이라고 불렀다). 물론 대조군 피험자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머니그룹이 다음과 같은 행동 특성을 보였다. 

-어려운 과제를 주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도움을 청하기까지의 시간이 더 걸렸다. 
-각자 의견을 갖지고 다른 참여자와 이야기하게 자리를 옮겨보라고 하면, 의자 사이의 거리를 가장 멀리 떨어지게 놓고 앉았다.
-남들과 함께하는 오락보다 혼자서 하는 오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을 도우려는 자세가 덜했다.
-실험 참가 수고비로 받은 돈의 일부를 기부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장 적게 기부했다.
 

즉 두드러질 정도로 이기적인 행동양식을 보인 것인데, 이런 면은 다른 사람의 과제 수행을 돕는 일에 통제 집단이 평균 42분을 썼지만 머니그룹은 25분만 썼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사회에서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의존도가 줄고, 개인은 보다 자족적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돈은 개인주의를 북돋우는 한편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넓게 생각하기'의 한 측면은 '돈에 대해 덜 생각하기'이고, '좁게 살기'에 한 방식은 '돈에 덜 의존하며 살기'이다. 혹은 거꾸로 '돈 안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살기'이다(이런 서재질도 한 가지 예다). '돈이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의 목록을 늘려가는 것, 그것이 반자본주의적 실천이다. 물론 그런 실천은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란 말을 인사로 주고받고, 부동산과 재테크가 가족의 최대 관심사인 사회에서는 조롱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시대는, 우석훈의 표현을 빌면, '개발요괴들'의 시대였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 불황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그 시대는 끝났다, 혹은 끝나가고 있다.   

돈은 우리에게 안락과 편익을 제공해주지만, 더불어 확실한 건 우리가 또다른 지구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인류의 행복도, 영혼의 구원도 역시나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해서, 필요한 건 방향전환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이렇게 비트는 건 어떨까. "돈을 목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수단으로서도 대우하라." 아주 당연한 요구이지만, 물신주의와 성장신화가 권력을 잠식하고 우리의 의식을 세뇌하는 시대인지라 새삼스럽게 들린다.  

아, 돈은 한가위 보름달도 살 수 없다!..  

09.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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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0-03 22:13 
    우석훈의 생태경제학 시리즈 출간 시작 — via 로쟈
 
 
2009-10-03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3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ilocinema 2009-10-03 09:54   좋아요 0 | URL
우석훈님의 경제대안 시리즈를 주위분들에게 선물해가며 같이 읽었던 기억이 그리 멀지 않은데,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출간되었군요! 여러권 사서 주위분들과 나누어야 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석훈님의 책은 혼자 읽고 지식을 흡수하는 책이라기보단 여러 사람이 책을 읽고 삶이 변화하여 실천이 필요한 책이니까요!


로쟈 2009-10-03 10:28   좋아요 0 | URL
네, 많이들 읽으면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올 수 있겠죠. '녹색 성장'이란 말의 허울도 되새겨볼 수 있겠구요...

무해한모리군 2009-10-03 12:4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아니었으면 출간된줄 몰랐겠네요. 어서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한가위 잘 보내세요.
싱글은 게으르게 뒹굴뒹굴

로쟈 2009-10-03 22:09   좋아요 0 | URL
신간 소식이야 검색만 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구요. 유의미한 책이 제 때 나와주어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연휴 잘 보내시길.^^

indipia 2009-10-05 20:02   좋아요 0 | URL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생태와 교육을 주제로 우석훈님이 좋은 책을 쓰신것 같네요. 읽을책이 저만치 밀린터라 근신하고 있었는데,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인 생태와 교육이라니..얼렁 사야겠어요. 그나저나 댓글달기 잘안하는데, 실천대목에서..아차 싶어 댓글달아요 ^^

로쟈 2009-10-05 20:4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댓글은 가끔 달아주셔도 좋습니다.^^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의 갑론을박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미국 작가 샐린저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루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 완독했는데, 예전에는 읽다가 그만 둔 책이었다. 작품의 배경은 크리스마스 즈음이지만, '호밀밭'이란 제목이 10월을 연상하게 해서 고른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소개는 이렇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은 뉴욕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비틀즈의 광적인 팬으로 알려진 채프먼이 레논을 암살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와 자신을 동격화하며, 범행 뒤에도 도망가지 않고 이 책을 꺼내 읽었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거침없는 언어, 선정적 소재로 출간되자마자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샐린저 현상’이라 불릴 만큼 채프먼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화제를 모았다. 이번 시간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방황하는 10대의 눈에 비친 위선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살펴보자. 



고교 독서평설(09년 10월호) 순수를 지키려는 젊은이의 방황

샐린저 현상 불러일으킨 세계적 베스트셀러
베일에 가려진 은둔형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 )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단지 ‘1950년대 미국 대학생들의 경전’으로만 기억되는 작품이 아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함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작가가 40년 이상 절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지지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600만 부가 팔려 나간 이 작품의 인기는 ‘샐린저 현상’, ‘샐린저 산업’이란 말까지 만들어 냈을 정도인데, ‘샐린저 현상’이란 독자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끼고 다니면서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 홀든과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고, ‘샐린저 산업’은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상업적 성공을 가리킨다. 이러한 ‘샐린저 현상’과 ‘샐린저 산업’이 작품이 출간된 지 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요인은 무엇일까? 주인공 홀든이 현실 속 인물이었다면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일 테지만, 오늘은 예전 그대로의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는 열일곱 살의 홀든을 만나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주인공과 닮은 샐린저의 청소년기
다들 알다시피 홀든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말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 제일 먼저 듣고 싶은 것은 내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어떻게 구차하게 보냈으며, 또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모는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따위일 것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카퍼필드식의 시시껄렁한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입에 담고 싶지 않다.” 이런 홀든의 태도는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기피했던 작가 샐린저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데, 몇몇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참고삼아 그의 삶을 살펴보자.  

샐린저는 1919년에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류·치즈 수입업자로 많은 돈을 번 덕분에, 그의 가족은 뉴욕의 고급 주택가에 살며 경제 공황 시대에도 중상류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2년 샐린저는 맨해튼의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하지만 낙제를 하는 바람에 1년 만에 그만두고, 아버지는 그를 펜실베이니아의 군사 학교로 보냈다. 이후 뉴욕대를 중퇴한 그는 어시너스 칼리지와 컬럼비아대에서 처음으로 문예 창작 수업을 받았다. 

샐린저가 본격적인 창작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건 1939년,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한 창작 강좌에 등록하면서부터다. 1940년에는 처음으로 단편 「젊은이들」을 발표하면서 차츰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샐린저는 전쟁에 참가하여 4년간 군 복무를 했다.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전역한 그는 마침내 1951년, 10년 동안 준비해 온 장편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했다. 주인공의 거친 언어와 반항적인 내용 때문에 초기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에 페이퍼백이 나오자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은 물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약 젊은 세대의 ‘바이블’이 되었고,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도 젊은이들이 이 책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꿈꾸며 방황하는 청춘
윌리엄 포크너(1897~1962)조차도 ‘당대 최고의 작품’이라고 치켜세운 작품이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찍부터 ‘금서’로 낙인찍힌 소설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학교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 성적 또한 부진하여 낙제당하기 일쑤인 주인공 홀든의 모습이 청소년 독자들에게 전혀 모범적이지 않다는 게 일부 교사와 어른들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어떤 조사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홀든은 ‘빌어먹을’이란 욕설을 245번이나 사용한다. 더욱이 조금 덜 심한 욕설까지 포함하면 785번에 이른다고 하니, ‘청소년 권장 도서’로서는 부적합하게 여겨졌을 게 당연하다. 흡연과 음주, 매춘 장면의 묘사와 동성애, 성도착(변태) 등에 대한 언급 역시 자녀를 둔 어른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퇴학을 당한 뒤에 동생 피비를 만나려고 부모 몰래 밤늦게 집으로 찾아온 홀든에게 피비조차도 이 말을 반복하지 않는가. “아빠는 오빠를 죽이고 말 거야.” 

홀든은 피비가 아직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무척 아끼지만, 퇴학당한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피비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이유야 많단다. 그 학교는 내가 다닌 학교 중에 제일 똥통 학교야. 바보들이 우글거리는 학교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오빠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야?”, “오빠는 어느 학교든 다 싫어해. 오빠가 싫어하는 것은 백만 가지는 될 거야. 그냥 싫어하고 있어.” 

한 가지라도 좋아하는 것을 말해 보라는 피비의 물음에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건,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 않기 위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제임스 캐슬’이란 아이와 자신의 죽은 동생 ‘앨리’ 정도다. “누가 죽었다고 해서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순 없지 않니?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라는 게 홀든의 주장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지키려 하는 ‘순수한 세계’가 현실보다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걸 암시해 준다. 

작품의 표제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 역시 그러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장래의 꿈을 말해 보라는 피비의 닦달에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 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벼랑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벼랑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요컨대 아이들이 놀다가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 낙제생 홀든의 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에서 ‘벼랑’에 직면해 있는 인물은 그 자신이며, 파수꾼이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보호해 줘야 할 인물도 바로 홀든이다

이분법적 선택과 판단을 뛰어넘어
홀든은 여러 번 배에 총탄을 맞은 배우의 연기를 흉내 내는데, 그 연기는 ‘흉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홀든이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의 추천을 받아, 어른 행세를 하며 매춘부를 방에 들이는 장면을 보자. 홀든은 매춘부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처음에 약속한 금액인 5달러를 지불하지만 여자는 10달러를 요구한다. 홀든이 거절하자 그녀는 엘리베이터 보이와 함께 다시 찾아와 완력으로 5달러를 더 갈취해 간다. 홀든은 욕설을 퍼붓다가 얻어맞기만 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혐오하는 동시에 두렵기도 한 현실에 홀든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복수, 단 ‘상상 속의 복수’다. 홀든은 피 흘리는 채로 권총을 들고 엘리베이터 보이를 다시 찾아가, 겁에 질려 애원하는 녀석을 무자비하게 쏘아 죽인다. “그러고는 전화로 제인(홀든의 첫사랑)을 오게 하여 내 배에 붕대를 감게 한다. 내가 계속 피를 흘리는 동안 제인은 내게 담배를 물려 주는 장면을 상상의 화면에 그려 본다.” 

물론 이것은 홀든이 많이 보았을 법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 역시 “영화란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속 현실은 ‘연기’이고 ‘가짜’다. 다시 말해 ‘속임수’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 선택이 아니라면, 홀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은 ‘자살’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자살이었다.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땅바닥에 떨어진 순간 누군가가 와서 내 시체를 덮어 준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정말 투신자살을 했을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시체를 구경꾼들이 내려다볼 것이 혐오스러워, 결국 자살을 결행하지는 못하지만. 

‘복수’와 ‘자살’, 두 가지 선택지에는 공통적으로 홀든 자신을 관찰하는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이 관찰자의 시선은 두 가지 양식을 가질 수 있다. ‘구경꾼의 시선’과 ‘파수꾼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홀든이 기대하는 건 ‘파수꾼의 시선’이다. 동생 피비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한 뒤에, 홀든은 예전 학교의 영어 교사였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전화를 걸고 찾아간다. 앤톨리니 선생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인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홀든은 앤톨리니가 자신이 만난 선생 가운데 제일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친구 제임스 캐슬을 안아 올려 준 이도 앤톨리니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말 그대로 벼랑(창문)에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구해 줄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델이다. 그는 홀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 세상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라고 정확하게 진단 내린다. 홀든은 이런 상황에서 주위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것을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지레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성급한 판단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의 작문 재능을 인정하면서, 일단 가고 싶은 길이 분명해지면 우선은 학교로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또한 홀든처럼 정신적 혼돈과 고민을 겪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들이 남긴 고뇌의 기록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충고도 보탠다. “장차 네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네게서 배울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한 정신 분석학자의 말을 빌려서 앤톨리니 선생이 홀든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적 복수’와 ‘자살’이라는 홀든 식의 이분법적 선택을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안은 아직 홀든의 몫이 아니다. 

홀든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앤톨리니 선생이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고는 경악하여 바삐 짐을 챙겨 나선다. 그가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이것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홀든만의 섣부른 판단이다. 날이 새자 홀든 스스로도 자신의 판단이 성급한 게 아니었을까 염려한다. 앤톨리니 선생은 단지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어루만졌을 뿐, 이러한 행위에 이상한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홀든은 “설사 선생이 변태라 하더라도 내게 정말 잘해 준 것만은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는 홀든에게 중요한 깨달음인데, 현실을 ‘진짜와 가짜’, ‘순수와 부정’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
서부로 떠나기로 결심한 홀든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피비의 학교에 찾아갔다가, 계단 벽에서 외설스러운 낙서를 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이를 지우지만, 그런 낙서는 여기저기에 널렸고 심지어는 칼로 새겨져 있기까지 하다. 100만 년을 걸려 지우러 다닌다고 해도, 온 세계의 더러운 낙서들을 다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홀든 역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얼핏 절망으로도 보이지만,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이기도 하다. 

가족을 떠나 서부로 가려는 결심 역시 홀든에게는 일시적인 기분 전환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같이 따라가겠다며 가방을 들고 쫓아 나선 피비의 말에 격분한 홀든이 그녀를 때려 줄 생각까지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화가 난 피비를 달래기 위해 홀든은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홀든 자신에게도 아주 적합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홀든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다만 요양 병원에서 잠시 회복기를 거쳐야 했을 따름이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서 홀든은 그토록 싫어하고 조롱을 퍼붓던 학교 친구들에게까지 그리움을 표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여기에 등장시킨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없기 때문에 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스트라드레이터와 애클리마저 그립다. 그놈의 모리스 녀석도 그렇다. 우스운 이야기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스트라드레이터는 흘든의 네 번째 학교인 ‘페니’에서 한 방을 쓰던 4학년 선배로, 모범생에 미남이지만 이중인격을 지닌 인물이다. 애클리는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며 행동거지가 더러운 옆방의 4학년 선배이고, 모리스는 홀든에게 창녀를 소개했던 엘리베이터 보이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홀든의 이야기이고, 그가 떠들어 댄 이야기이다. 이렇게 떠벌리는 행위 자체에는 이 세계에 대한 긍정과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함축되어 있다. 독자들이 홀든의 모습에서 ‘반항적 영웅’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거나 신비화가 아닐까. 더불어 샐린저 자신의 체험이 많이 녹아들어 간 작품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오랜 침묵에 빠져 있는 작가는 홀든과 가장 닮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09. 10. 01.   

P.S. 분량상 작품의 말미에서 홀든이 회전목마를 타는 동생 피비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대목에 대한 분석은 다루지 못했다. 나중에 분량을 더 키울 때 보충할 예정이다. 한편,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한 번역은 이덕형본(문예출판사, 1998)인데, 홀든의 어투는 마음에 들지만 결정적인 대목에 오역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에서 인용한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를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277쪽)고 잘못 옮겼다. '비겁한 죽음'을 택하는 게 성숙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건 넌센스임에도 왜 이제까지 방치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판매된 걸로 돼 있는 공경희본은 이 대목을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48쪽)이라고 옮겼다. 아무래도 '이유(cause)'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좀 어색하다.  

한편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 따르면, 국내에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 가운데 추천번역본은 한권도 없다. 아래는 그 평가내용을 간추린 한국일보의 연재기사 '번역 이것이 문제다'의 한 꼭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에서 읽을 수 있다. 이후에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국내 독자들이 가장 많이 찾고 또 읽는 작품에 추천본이 없다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일보(04. 03. 14)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청소년기의 고뇌를 그린 성장소설로 널리 읽히는 인기작이다. 샐린저는 작품을 출간한 후 독자들을 피해 은거해 버렸는데, 작가의 괴팍한 삶을 모델로 한 할리우드 영화도 만들어져 국내 상영까지 했다. 대중성이 있어서인지 현대작품치고는 우리말 번역도 일찌감치 1963년에 나왔다.  

국내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으로 확인된 것은 모두 30여 종이다. 이 중 내용이 같은 것을 빼면 검토 대상이 된 것은 17종. 그 가운데 8종은 표절본으로 기왕의 판본을 베끼거나 약간 윤문한 정도이다. 그런데 독자적 번역본 역시 작품의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질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비표절본 9종의 번역서 중에서 추천할 만한 번역서는 한 종도 없다. 추천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읽을 만한 번역은 이덕형, 윤용성, 김욱동ㆍ염경숙 공역본 등 3종이다.  

이덕형(문예출판사)과 윤용성(문학사상사)의 번역본은 가독성을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원문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문장을 자유롭게 변형하면서 자연스런 구어체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번역본들에서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전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긴 문단이나 문장을 편한 대로 나누어 처리한 대목이 많았다.  

특히 원문에서 작가가 주인공의 의식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중복해 표현한 부분을 하나로 통합해 번역하였다. 문장은 매끈해졌지만 결과적으로 원문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자신의 생각을 길게 연결하면서 서술해 주인공의 어투를 전달하는 것이 번역의 정확성만큼이나 중요하다. 단지 가독성만을 높이기 위해 작품의 고유한 어조나 서술방식을 무시한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김욱동과 염경숙의 공역본(현암사)은 원작의 속어, 비어 등을 살리려고 노력한 점이 특징이다. 때로 지나친 부분도 있지만 원작의 어감을 자연스럽게 전하려고 고심한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번역본의 문제는 주인공이 구사하는 비속어가 주인공의 경어체 말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전하는 독백투 이야기의 잠재적 청중은 어른이라기보다 동년배로 보는 게 무난하다. 따라서 어투도 경어체보다는 평어체로 처리하는 것이 무난하다.  

세 번역본 모두 다른 번역본에서 잘못 옮긴 부분을 제대로 번역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장의 ‘The Cab I had was a real old one that smelled like someone'd just tossed his cookies in it’에서 ‘just tossed his cookies’는 ‘토한다’는 뜻이다. 이 속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옮긴 번역본들이 많다.  

그러나 세 번역본들에서도 문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 많이 발견된다. 10장의 나이트클럽 장면의 번역이 대표적인 경우다.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을 보면서 좋은 번역은 단순히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원작의 문체, 어조, 문맥을 전하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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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종류의 결단에 대하여
    from 게슴츠레의 공부터 2009-10-07 20:53 
     "지긋한 이 세계에 부시지는 못하더라도 균열을 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신중함을 내세우며 기다리다간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모두 다 잘 될거야 식의 악무한적 일상을 벗어나려는 이런 태도는 용감하기는 하나, 이는 '결단'의 층위에 놓인 거라기보다는 권태로운 세계 그 자체에 내속적인 구조적 열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주로 젊은이들에게 볼 수 있는 이 논변의 이면에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있을지 모른다.   "
 
 
펠릭스 2009-10-0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쟈 2009-10-02 11:43   좋아요 0 | URL
추석 잘 쇠시길.^^

펠릭스 2009-10-02 11:56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좋은 추석되시길...

바밤바 2009-10-0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와~ 소리 나오네요. 멋지십니다.^^;;

로쟈 2009-10-02 11:43   좋아요 0 | URL
손품을 좀 팔았습니다.^^;

게슴츠레 2009-10-0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채프먼의 경우를 떠올리기도 했고 또 마침 규율이 살짝 엄했던 고등학교 때라서 홀든에게 투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독서의 경험은 마냥 그런 바람에 마냥 맞장구를 쳐주지만은 않았더랬지만 결국 그렇게 읽어내는 데 성공(?)하고 책장 한 켠에 넣어 두었더랬지요. 오늘 로쟈 님의 비평을 보니 당시 풀리지 않았던 찝찝함들을 다시 헤집어 보게 되는군요.
그와 함께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저 '절망'으로서만 환원될 수는 없겠지요. 말씀하신 '절망'과 '체념'의 차이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전목마를 보며 행복해 하는 홀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기대되는군요. 항상 그렇듯이 멈춰서서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9-10-02 11:51   좋아요 0 | URL
홀든은 사실 매우 도덕적인 인물이잖아요. 고지식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직 미성숙하고. 어른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반항의 아이콘이 된 건 그의 일면이 부풀려진 탓이라고 봅니다.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 이전에 그런 파수꾼이 필요한 소년이었다는 게 제 해석입니다...

다이조부 2009-10-0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졸업한지 10년이 지났는데 로쟈님 덕분에

독서평설을 챙겨 보게 됬습니다.

인터넷에 뜨기 전에 본문 내용을 먼저 읽은 적은 처음이네요 ^^


로쟈 2009-10-02 1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연재는 11월에 끝나지만, 평설엔 다른 읽을거리도 많지요...

philocinema 2009-10-0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전집을 사놓고 마음 가는대로 한 권씩 읽고 있습니다.
아직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소개글을 보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곳에서 로쟈님의 글을 읽으며 기쁨을 느껴온 세월이
어느덧 4년이 다 되어 갑니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로쟈 2009-10-02 13:50   좋아요 0 | URL
아, 전집! 모양은 그게 좋을 텐데, 저는 낱권으로 사둔 책들이 많아서 따로 꿈꿀 수가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이 되시길...

yoonakim 2009-10-0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보지 않았던 소설인데...제목의 호밀밭도 파수꾼도 이상하게 제 정서와 매우 다르다는 생경함에 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1인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싶다고 해서 고민하는 즈음...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를 사놓고 바쁜 일정과 밀린 일들로 책상 위에 두고 구경만 하던 차에 아이와 함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거스르려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나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엄마가 함꼐 읽기에 좋은 텍스트인거 같네요. 젊은 시절에 읽었어야할 것을 고1이 된 아이와 함꼐 읽게 되나 봅니다. 풍성하고 평화로운 한가위 되시길...^^

로쟈 2009-10-03 10:26   좋아요 0 | URL
좀 위태한 장면도 나오지만, 아이와 엄마를 두루 만족시켜줄 것도 같은데요.^^ 한데, 벌써 고1이군요!^^

펠릭스 2009-10-04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설은 청소년의 눈을 통해 가족, 학교, 도시속의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것도 간접적인 언급하는 것을 보면
성장소설을 넘어 작가의 시대정신도 집약된 듯합니다. 따라서 비슷한
나이 또래와의 공감력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밭'은 호밀밭, 밑밭, 담배밭, 수박밭, 뽕밭 등을
연상케 합니다. '밭'의 풍요는 은밀함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밀밭안으로
들어가 두 발을 벌리고 누워 하늘을 보며 심호흡을 하는 것은 기성 남성의
동굴 심리로 남성주의적 사회 부조리를 상징합니다.

주인공 홀든(남성)에게 순수한 소통은 피비(착한 여성)입니다.
홀든의 학교밖은 자신이 속한 도시상과 멀리 떨어진 도시에 대한 전쟁으로
자신이 붙일 만한 곳은 없읍니다. 결국 동생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
오랜 은둔의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사학교에 입학한 후, 2차대전 로르망디작전에
참전하기도 하지만 '개츠비'와 '원폭의 발명'을 긍정합니다. 이는 청소년기인
홀든이 부조리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리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심리이며
곧 자존에 대한 재인식이라 생각합니다.

로쟈 2009-10-05 11:34   좋아요 0 | URL
마지막 멘트는 일리 있는 의견이십니다. 홀든은 도덕적 결벽주의자로도 보이니까요...

펠릭스 2009-11-20 21:50   좋아요 0 | URL
'고교독서평설' 읽었습니다. 홀든이 매춘부에게 강제로 5달러를 더 지불하고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두가지로 대응했데,하나는 복수며 또는 '상상속의 복수'를 영화처럼 합니다만,마치 이부분은 '루신'의 '아퀴'가 건달들에게 맞고서 스스로 위안하는 '정신승리법(=상상속의 복수)'을 생각나게 하더군요.

다락방 2009-10-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저는 민음사판으로 읽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궁금한게 있어서요. 저 위에 홀든이 선생을 변태라고 오해한게 자는 홀든의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요, 제가 읽은 민음사판에서는 잠든 홀든의 성기를 만져요. 그래서 놀라서 옷을 챙겨입고 나가구요. 머리를 쓰다듬은 거라면 '오해'할 수 있지만 성기를 만진거라면 그건 더이상 '오해'가 아닐 것 같은데요. 혹시 원문과 직접 비교하신 거라면 어느게 맞는건지 알 수 있을까요?

'머리를 만진 선생을 오해하는 것'과 '성기를 만진 선생은 아무리 잘해줘도 변태인 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른데 말이죠.

로쟈 2009-10-05 11:33   좋아요 0 | URL
원문에 'head'라고 돼 있는 걸 역자가 '귀두'라고 옮겨서 아마 문제가 됐을 거예요. 이후에 다시 '머리'로 정정한 걸로 압니다. 만약에 성기를 뜻했다면 말씀대로 오해의 소지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다음날 아침 홀든은 자신의 판단이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하거든요. 역자의 오버였다고 생각합니다...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은 들떠 있지만, 실상 추석은 일년 동안 농사일로 고생한 농부들의 명절이어야 옳다. 내가 이 '가을저녁'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아직 갈길이 멀고 '겨울저녁'이라도 챙길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정산은 세밑에 가서 해봐야겠다). 연휴에 써야 할 원고를 때문에,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책 몇 권을 대출하고 자료도 몇 점 복사했다. 그러고 보면 들떠 있을 경황이 전혀 아니다. 명절이긴 하지만 '휴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다만 나대로의 명절 기분은 몇 권의 책 구경을 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일이다. 사실 엊저녁에 해놓았으면 편했을 텐데 인터넷접속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실행하질 못했다. 멀쩡한 상태에서 접속불량이다가 지금에서야 다시금 연결이 되는 이유는 따로 알지 못한다.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정찬의 소설집 <두 생애>(문학과지성사, 2009)이다. 7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는데, "이 소설들을 뚫고 지나가는 주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과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정찬에게 있어서 이 주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성실하고 꼼꼼하게 이 묵직한 문학적 주제로부터 떠나지 않았던 귀한 작가이다."라고 소개된다. 나는 <그림자 영혼>(세계사, 2000)과 그 이후의 단편 몇 편을 읽은 듯싶다. 안 그래도 '폭력'을 주제로 한 책을 한 권 구상중이던 차여서 이 새 소설집에도 눈길이 간다. 작가의 전작으론 <베니스에서 죽다>(문학과지성사, 2003)과 <희고 둥근 달>(현대문학사, 2006)이다. 3년 터울로 작품집을 내는 꾸준함도 높이 살 만하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역사분야의 책은 김효순의 <나는 일본인, 인민군, 국군이었다>(서해문집, 2009) 이다. 부제는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제목에서 이미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일제에 징용돼 끌려갔다가 소련의 포로가 되고, 다시 귀환하여 인민군이 되고 국군이 되어야 했던 이들의 삶을 추적한 책. 언론에서 리뷰기사를 읽었을 때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문학동네, 2007)을 자연스레 상기하게 해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조정래 선생의 자서전 <황홀한 글감옥>(시사IN북, 2009)도 파란만장에 있어서는 뒤처지지 않을 듯싶다. 그런 굴곡진 삶과 우리의 현대사를 평생 기록해온 작가의 글 역시 '파란만장한' 황홀이 아닐까?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황광우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생각들>(비아북, 2009). 추천자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의 장점은 첫째, 고전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입문서다. 둘째, 내용이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셋째,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되어 있다. 넷째, 동서양의 대비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쓰여졌다. 마지막으로 옥의 티라면, 저자가 자신의 좌편향적인 이념의 경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념에 대한 중립적 입문서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책속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자의 지적 양심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좌편향적인 이념의 경도"라고 했지만 내가 서점에서 잠깐 들춰본 대목에선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신랄하지만 온건하고 상식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경도'가 무얼 뜻하는지는 찬찬히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아울러 저자의 자전적인 기록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창비, 2007)도 바로 읽어봐야겠다. 안 그래도 요즘 필요 때문에 동시대인들의 자서전/평전들을 주목하고 있던 참이다. 참고로, 저자는 "인천지역노동자연맹 교육부장으로 활동하고, 군부독재 시절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아침을> 등을 출간했던 황광우 씨가 군사독재정권과 숨가쁘게 대결하던 격변기에, 학교와 감옥, 거리 등에서 민주화를 위해 보낸" 바 있다.  

덧붙여, 나대로 이달에 꼭 읽을 책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 서평까지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4. 정치/사회 

이달부터는 정치사회분야가 통합됐다.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주성수의 <직접 민주주의>(아르케, 2009).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제와 직접민주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hybrid)’ 형태로 규정한 후,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가 ‘아래로부터의’(또는 ‘풀뿌리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 개혁․보완되지 않으면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한다." 현단계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으로 김영수의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메이데이, 2009)와 김상준의 <미지의 민주주의>(아카넷, 2009)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물에 대한 책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물의 미래>(김영사 2009). 경제학 책 가운데 석유에 대한 것은 자주 봤지만, 웬 물인가? 한데, 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귀중한 자원을 아껴 쓰려 하지 않는다. 너무나 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예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 일깨워 준다.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물의 위기는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그 동안 물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해 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물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도 함께 깨닫게 된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사실 '에릭 오르세나'는 소설가의 이름으로 더 낯익은데, 알고 보니 다양한 활동경력을 지닌 지식인이다. "1981년 국제협력부의 고문으로 사회당 정부와 인연을 맺은 뒤 미테랑 대통령의 문화 보좌관 겸 연설문 초안 대필자, 최고행정재판소 심의관, 국립 고등조경학교 학장, 국제해양센터 원장 등 주요 공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발표한 다수의 소설과 에세이들은 이러한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 집필되었다. 1998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으로 지명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다른 책으론 "목화의 주요 생산.유통지인 다섯 대륙 여섯 국가 탐방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화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코튼로드>(황금가지, 2007)와 함께 <문법은 아름다운 노래>(미디어2.0, 2006)라는 소설도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지식인-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6. 과학 

최영주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가 추천한 과학책은 가스가 마사히토의 <100년의 난제, 푸앵카레 추측은 어떻게 풀렸을까?>(살림Math, 2009)이다. 책은 본래 일본 NHK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저자 가스가 마사히토는 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푸앵카레의 난제를 푼 사람은 러시아의 수학자 페렐만이었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푸앵카레 추측 해결의 궤적을 찾아 푸앵카레의 고향인 프랑스 낭시와 페렐만 박사가 은둔하고 있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와 UC버클리 등을 일주하며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괴물에 도전한 수학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고통이 만들어 낸 장대한 드라마를 추적하였다" 한다. 한편, 살림Math는 이름이 말해주듯 수학서 전문 출판사인데, 가장 최근에는 <에바리스트 갈루아, 한 수학 천재를 위한 레퀴엠>(사림Math, 2009)도 펴냈다. '대칭'의 의미와 함께 갈루아의 삶을 엮어넣었다고 한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나도 며칠 전에 구입한 안애경의 <핀란드 디자인 산책>(나무수, 2009)이다. 추천의 변을 보니 "언제부터인가 핀란드가 디자인의 메카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찍이 추구해왔던 자연친화적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인류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서울시도 핀란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이미 교육쪽으로는 핀란드식 모델이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겨레21에서도 특집으로 다룬 바 있고. <핀란드 공부법>(문학동네, 2009)에 대한 반응도 좋은 편이다. 이런 서울시 말고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좀 챙겨봐야 할 책들인데...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서는 이재호, 김원중 두 영문학자의 <서양문화 지식사전>(현암사, 2009)이다. 작고한 이재호 교수는 '문화의 오역'을 많이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 애썼던 분인데, 이번 책도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싶다. 가령, "‘Zeus's Brother’를 제우스의 동생이라고 번역한 책들이 많은데 제우스의 형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제우스는 막내이기 때문이다. 즉 개념이나 관용구의 맥락을 풀이해냄으로써 그 정확한 의미를 읽어내는데 두 저자의 작업은 크게 기여했다." 그런 기여에 있어서 고전 전문 번역가 천병희 교수의 업적도 간과할 수 없는데, 과거 <신통기>라고 번역되던 책을 <신들의 계보>(도서출판숲, 2009)로 새롭게 펴냈다. 제우스 집안을 비롯한 신들의 족보는 이제 확실히 챙겨두게 됐다.    

9. 실용 

이달부터는 실용서가 새 카테고리로 추가됐는데, 손수호 국민일보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자폐증 아이를 둔 가족의 실상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 <혼자 있는 아이>(홍익출판사, 2009)이다. 덕분에 자폐아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임상관련 쪽과 사례담 쪽 책들이 눈에 띈다. <자폐아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들녘, 2004)는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수영선수 진호 군의 어머니가 쓴 책이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0>(자음과모음, 2007)은 "자폐아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과 교사, 의사, 재활센터 직원들을 작가가 직접 만나 취재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한 만화".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도 나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10. 편집자

'나대로 고르는 책'은 편집자들을 위한 책을 골랐다. 최근에 트렌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련서들이 나오고 있는데, 교과서적인 책은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잇인가>(휴머니스트, 2009)이고, 주간지 편집의 달인이라 할 만한 고경태 씨네21 편집장의 <유혹하는 에디터>(한겨레출판, 2009)도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한다.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부키, 2009)는 현장 편집자들의 실전 체험담을 담고 있다. 사실 편집자를 위한 책들을 일반 독자가 읽어야 할 이유는 드물 것이다. 한데, 내가 놀란 건 국내에 편집자가 1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 인문서 독자의 상당수도 이들 편집자들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편집자는 책의 생산자이면서 주요 소비자이다. 하니, 일반 독자들이 분발해야 할 일일 뿐더러, 저자들도 편집자들의 맘에 들도록 애쓸 이유가 충분하다...  

09. 10. 01.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개신, 2009)이다. 이 걸출한 러시아 아나키스트를 통해서 '원조' 아나키즘 사상이란 어떤 것인지 음미해보면 좋겠다. 다시 나온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우물이있는집, 2009)도 곁들이면 좋겠고, 아나키즘에  대한 개관으로는 하승우의 <아나키즘>(책세상, 2008)을 참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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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9-10-0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정치적 입장은 어떻게 될까요. 한국 프랑스 철학에서는 권위자라 할 분인데.

로쟈 2009-10-01 19:43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은 그냥 사회경제적 위치/지위라고 생각합니다. '말'로서의 정치적 입장은 장식인 경우가 많고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펠릭스 2009-10-0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밑에는 한 철학자가 있고, 내 머리위에 책을 미행(尾行)합니다.

로쟈 2009-10-01 19:44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 말씀인가요?^^

펠릭스 2009-10-02 10: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들을 미행한 기분입니다.
- '희고 둥근 달 : 스피드한 단문의 흡입
- '오, 하느님 : 다큐적인 회상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 위대한 실패에 대한 재고찰
- '미지의 민주주의 : 신자유주의의 대안
- '물의 미래 : '공기의 미래'에 대해서도
- '푸앵카레의 추측 : 수학자에 대한 궁금증
- '필란드 디자인 : 핀란드인의 일상 속 디자인
- '신들의 계보 : 비유와 상상력으로 우주 생성의 원리
- '혼자 있는 아이 : 집안에 돌연 비극적인 일(자폐아)
- '유혹하는 에디터 : 매체를 편집한 실무 경험
- '아나키즘 : 권위와 규제에 반대하는 아나키즘

로쟈 2009-10-01 23:28   좋아요 0 | URL
벌써 다 정리하셨네요.^^

philocinema 2009-10-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키즘' 관련서들이 가장 눈에 띄는군요.

로쟈 2009-10-03 10:27   좋아요 0 | URL
페이퍼를 쓴 한 가지 목적이죠.^^
 

'오늘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 책은 단연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시스테마, 2009)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개정판)를 읽어본 독자라면 저자가 누구이고 또 어떤 책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1984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 추천사는 또 도킨스가 쓰고. 어떤 추천사냐면, 이런 식이다.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해 흥분에 휩싸여 읽었으며, 이 책의 전도사라도 된 듯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읽으라고 권하였다. 수년간 내가 가르친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액설로드의 책을 읽고 에세이를 써내야 했다. (...) 나는 지구 위 모든 사람이 이 책을 공부하고 이해한다면 이 행성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고 굳게 믿는다. 세계의 지도자들을 모두 가두어 놓고 이 책을 준 다음 다 읽을 때 까지 풀어주지 말아햐 한다. 그것은 그들 개인에게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구원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수의 딜레마와 게임이론의 아이디어는 여러 분야에서 원용되고 있다. 책은 바로 손에 넣으려고 했으나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아직 판매하지 않고 알라딘에서는 내주에나 배송이 가능하다. 관련서평이 있나 찾아보니 국방일보의 칼럼이 하나 있어서 옮겨놓는다. 국방일보를 읽는 건 제대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국방일보(05. 03. 17) 액슬로드의 협력의 진화 

눈앞의 이득을 먼저 챙길 것인가, 아니면 맛을 아껴 두었다가 장래의 이득을 도모할 것이냐가 바둑의 딜레마다. 미국의 로버트 액슬로드(Robert Axelrod)는 이런 논리를 국제 정치에 응용, 배반의 전략으로 당장의 이익을 취하기보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협력의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협력의 진화론을 제시했다. 기원전 5세기에 있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 좋은 예다. 아테네가 배반의 전략을 선택, 먼저 도발한 전쟁이었지만 결과는 스파르타가 승리했다. 그러나 두 도시 국가는 함께 멸망했다. 원인은 서로 배반의 전략을 악순환시켰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도 예외가 아니다. 사연인 즉 두 죄수가 경범죄에 대한 증거만 있는 수사관과 벌이는 격리된 수사에서 하루라도 먼저 석방되고 싶은 나머지 서로 배반의 전략을 선택한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상대방 죄수를 만나 확인해 본 결과 배반의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에 더 복역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곧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교통이 복잡한 병목 지역에서 운전자가 서로 먼저 가겠다고 진입하면 정체 현상이 길어지고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배반의 악순환을 예방하기 위해 액슬로드는 협력의 진화에서 ‘보상과 보복의 전략’을 소개했다. 이 전략의 핵심 내용은 협상 과정에서 상대와 협조하는 것이 우선 바람직하고, 상대가 배반하면 반드시 응징하며, 상대가 배반하더라도 뉘우치고 화해를 구해 오면 용서하고 보상한다는 내용이다. 이유는 미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준수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월요일에 하는 말과 수요일에 하는 말이 다르면 상대방도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사적이어야 한다. 특히 초기 단계의 협상은 협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줘 장차 협력의 가능성을 더 크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대방이 협상 도중에 배반의 전략을 선택하면 그에 상응한 보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배신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론적으로는 관대해야 한다. 미래의 충분한 보상을 위해서는 협력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 이론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액슬로드의 협력의 전략을 실천한 미국은 소련을 공중 분해시키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됐다. 병영생활하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것은 바로 액슬로드의 협력의 전략이 정보화 시대의 인간관계에 아주 유익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전우 상호 간에 불신의 벽을 깨고 협력의 전략을 생활화하면 성공과 행복이 균형을 이루는 보람차고 유익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김창주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 

09. 09. 29.  

P.S. 오래전 기억이긴 하지만, 절판된 책 가운데 <딜레마 게임: 진화론으로 본 인간과 사회>(고려의학, 1991)에 '협동의 진화'란 글이 실려 있었다. 액설로드가 공저자의 한 명이었던 듯하다. 당장 확인은 되지 않지만, 지금 보니 'How Humans Adapt: A Biocultural Odyssey'란 책의 일부 논문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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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30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3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ilocinema 2009-09-30 09:22   좋아요 0 | URL
"액슬로드의 협력의 전략을 실천한 미국은 소련을 공중 분해 시키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다는 글쓴이의 주장을 보니 '글 쓰는 사람의 position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견강부회'라는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군요!

로쟈 2009-09-30 21:39   좋아요 0 | URL
그게 팃포탯 전략 덕분이라고 보나 봐요...

멧돌 2009-10-13 13:39   좋아요 0 | URL
저 지나가는 사람인데요,
결국 분자 수준, 세포 수준, 유기체 수준, 사회 수준, 국가 수준 어떤 규모에서건 두 이기적 개체가 상호작용할 때 벌어지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이므로 팃포탯 협력의 전략이 적용되고, 따라서 미소관계에도 적용하는 것이 견강부회는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매일 겪는 상황들은 다 죄수의 딜레마라고 봐도 되겠지요.

2009-09-30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30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9-30 12:13   좋아요 0 | URL
저도 리처드 도킨스처럼 흥분해서 1년내내 협력의 전략에 대해서만 파고 있던 지난날이 생각나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젠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한때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넘쳐나던, 이기적인 인간이 이기적이면서도 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가슴 설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는군요.

로쟈 2009-09-30 21:42   좋아요 0 | URL
<이타적 인간의 진화> 같은 책은 여전히 그런 '흥분'을 기록하고 있는 듯싶은데요...

멧돌 2009-10-13 13:26   좋아요 0 | URL
이 책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는 중인데요, 왜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하네요??

펠릭스 2009-09-30 19:26   좋아요 0 | URL
이론에 심취하면 '~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문학적인 살을 붙이지 않았나 싶구요. 유전자는 DNA라는 화학물질로 자기복제기능이 있어 생물의 형질을 자손에게 전합니다. 그 원본세포(줄기세포)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세포가 개체화되었을 때, 유전자의 본래의 기능을 발휘함으로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말은 선급한 표현같습니다.오히려 '기능화'된 단위 세포체(줄기세포이용)을 논하는(협력의 진화)것이 좋겠는데요. 인문학적 사고가 생물의 최초 단위(DNA)까지 개체화시킨다면 무리입니다.

로쟈 2009-09-30 21:47   좋아요 0 | URL
도킨스도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했어요. 한편으로 세포 내 협력관계를 밝혀낸 린 마굴리스도 '협력의 진화' 원조인데요. 경쟁이 아닌 협력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본 <새로운 생물학>이란 책도 있었습니다...

멧돌 2009-10-13 13: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 가지고 있고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었는데요, 그런 연구들을 뒤잇는 연구들은 없는지 무척 궁궁합니다. 있다면 왜 대중은 물론 생물학자들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알고 싶네요.

로쟈 2009-10-13 21:06   좋아요 0 | URL
도킨스를 비롯해서 열혈 지지자들이 적극 활용하고 있지 않나요? 게임이론은 국제정치학과 경제학 등에서도 쓰고 있는 걸로 아는데, 더 진전된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멧돌 2009-10-15 14:19   좋아요 0 | URL
아, 예, 저는 <새로운 생물학> 책 말하는 거였어요. 그 책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진화론에 반대하는 책이잖아요. 진화론의 논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진화론의 전제에 문제가 있다고 책 하나 가득 지적하는 내용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재미있죠.

로쟈 2009-10-15 14:25   좋아요 0 | URL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로 저는 읽었습니다. 저는 양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낙소리 2009-10-30 15:45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네요 퍼갈게요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주체'란 말의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학문 주체성'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 글이다.    

교수신문(09. 09. 28) ‘학문의 주체성’ 수립 이전에 던져야 할 질문들

‘학문의 주체성’ 혹은 ‘주체적 학문’의 정립이란 과제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한번쯤 부닥치게 되는 요구이다. 하지만 무엇이 주체적 학문이고, 학문적 주체성은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학문 사대주의’를 극복하자는 구호와 함께 우리 고유어나 고유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되살려 써야 한다거나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에 맞는 우리 이론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주장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 학문’과 ‘주체적 학문’을 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마음에 걸리는 말은 ‘주체’이다. 알다시피 이 ‘主體’는 ‘객체’에 대응하는 (철학)용어로서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로, 사전에는 ‘북한어’로서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인민 대중을 이르는 말”이란 정의도 첨가돼 있다. 어떤 행동의 ‘主가 된다’는 말 자체가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대략 ‘주도하는 자’ 정도로 ‘주체’의 뜻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주인이냐 하인이냐, 상전이냐 머슴이냐는 구도에서 주인노릇하고, 상전노릇하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한데, 학문용어로서 이 ‘주체’가 영어 subject(프랑스어 sujet, 독어 Subjekt 등)의 번역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정은 좀 복잡해진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juche ideology’라고 옮기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주체’는 대부분 ‘subject’로 옮겨지는데, 그렇다고 이 ‘subject’가 항상 ‘주체’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간추려도 ‘subject’는 주제, 주어, 신민, 주체 등의 뜻을 갖는다. 곧 주체와 subject는 서로 비대칭적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subject’가 주체(주인)이면서 동시에 신하나 국민 같은 피지배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subject’가 갖는 의미의 이중성이고 모호성이다.   



이 ‘주체’의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를 따라서 니체의 한 문단을 읽어봐도 좋겠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지하는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복종하거나 복종한다고 믿는 그 무엇에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명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복종하는 자이다.” 니체에게서 주체는 ‘명령하는 주체’와 ‘복종하는 주체’로 분열된다. 사실 ‘명령하는 주체’가 동어반복이라면, ‘복종하는 주체’는 모순형용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돼 보이는 이 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 

니체는 원문에서 마지막 문장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를 독어가 아닌 불어 “L'effet, c'est moi.”로 썼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유명한 말 “국가, 그것이 바로 나이다”(L'´Etat, c'est Moi.)를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다. “지배계급은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성취를 동일시하는 것이다”라고 니체는 덧붙였다. 이러한 정치적 비유는 ‘주체’란 말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절대군주는 법과 행정이라는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립하고 행사하는 권력이고, 그의 신민들은 그러한 ‘권리 속의 주체’라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장 보댕의 이런 말도 음미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든 시민이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는 그가 복종하는 주권권력에 의해 제한받기 때문이다.”

원래적 의미에서건 통용되는 의미에서건 주체(subject)의 자유와 강제, 의지와 복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러한 사실이 ‘주체적 학문’이란 요구에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주체적’이란 말로는 온전한 의미의 자유나 독립이란 뜻을 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서양학문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을 지향하면서 그것을 ‘주체적 학문’이라고 지칭한다면, 그때의 ‘주체적’이란 말은 ‘subjective’라고 번역될 수 없을 것이다.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자면 ‘주체적 학문’은 자기 정립적인 자유와 예속이 교차하는 양다리 걸치기식 학문이다.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권력에 다시금 예속되는 시민의 처지에 견주어볼 수 있겠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주체’나 ‘주체적’이란 말은 기만적이다. 이 말들이 갖는 의미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다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문 사대주의는 아니더라도 서양학문에 대한 우리의 예속성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가를 잠시 잊게 만든다. 사실 ‘주체적 학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우리의 자발적인 문제의식인가도 의문이다. 우리의 의지가 복종에 근거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말이다. 따라서 ‘학문의 주체성’과 ‘주체적 학문’ 정립에 매진하기 전에 ‘학문의 예속성’과 ‘객체적 학문’이란 현실에 대해서 더욱 깊이 성찰해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민 대중’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우리에겐 ‘자유’라는 이념보다 ‘복종’이라는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09.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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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젝과 탁석산 저서, 두 권을 주문했거든요, 딱 맞았네,,

로쟈 2009-09-29 19:40   좋아요 0 | URL
많이 보시네요.^^

2009-09-2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9-09-2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주체' 번역관련해서는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과 주체"라는 책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나옵니다. :) 특히 한국어 번역본에 실린 일본어판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네요. ㅎ

로쟈 2009-09-29 19:39   좋아요 0 | URL
네, 사카이의 책도 읽어봤는데, '환승중인 주체' 외에 제가 딱히 써먹을 수 있는 말이 잘 눈에 안 띄더군요.^^;

람혼 2009-09-2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이 글이 '우리말로 철학하기'라고 하는 어떤 경향, 곧 [순수]언어와 [순]민족주의를 향한 [순]진한 경도와 열정을 지닌 어떤 경향에 대해 우회적인 우려와 불만을 냉철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체'의 이중적 의미에 바탕하여 전개되고 있는 논의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경향에 대해 더욱 설득력 있는 공격과 반박이 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나 그러한 단순한 언어환원주의가 어떤 '주체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무척이나 회의적이기에, 이 글을 다른 글보다 더욱 가깝고 주의깊게 읽게 되었네요.
'주체성'을 '언어적 주체성' 혹은 '순수 민족언어'라는 가상과 동일시하면서 소위 '오염된' 용어들과 용법들을 기계적으로 '순수하게' 환원하려는 경향은, 말씀하신 대로 저 "지난한 과제"를 너무 쉬운 것으로 치부하거나 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를 [세계]구조적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민족]감정적으로 보려는 경향도 분명 있고요.
이를 두고 '우리말로 철학하기 혹은 학문하기' 자체의 '주체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9-09-29 19:38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주체'를 'juche'라고 표기하면 주체적 학문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펠릭스 2009-09-2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론적 환원주의에 준해 '우리학문'과 '주체적학문' 다르다고 규정한다면,
탁석산 박사의 '조선문화'와 '한국문화'와의 단절만이 현재의 '한국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로쟈 2009-09-29 19:36   좋아요 0 | URL
일리 있지만, 그게 '단절'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9-09-2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석산 선생님 덕분에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었는데, 그분의 첫 작품인 <한국의 주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은 당시에 많이 논란이 됐었죠. 티비에도 나와서 고종석으로부터 '순진한 우파'라는 이야기도 듣고. 이건 둘 중 어느 책 때문에 받은 '칭호'인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위 책들 말고도 <우리말로 철학하기>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하고, <우리말 철학사전>이 만들어진 취지도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급 구석에 놔두었던 이 주제에 관해 또 파고들고싶은.

로쟈 2009-09-29 19:35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말' 철학에 대해 좀 회의적입니다. '존재'로 옮기던 'Sein'을 '있음'이라고 옮긴다고 해서 무엇인 개시될 성싶지 않아서요. <우리말 철학사전>에 실린 표제어들도 사실 대부분 '우리말'은 아닙니다. '이성'이니 '존재'니 '상징'이니 하는 식이니까요. 번역이 아니란 의미 정도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09-09-29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쩍 지나가다가 한 가지 궁금해서요...^^ '주체적 학문'이 기만적이라면, '학문의 예속성'-인문 사회학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은 그렇지 않은가요? 예속적인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을 구분하는건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글의 요지와는 큰 관계가 없지만,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로쟈 2009-09-29 19:31   좋아요 0 | URL
'주체적'이란 말의 환상을 지적하고 싶었어요. 마치 그런 것이 있는 듯한 환상. '주체성'과 '예속성'은 분리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라는 게 제 요지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에서도 SCI급 논문을 요구받는 세태에선 '주체적 학문'이란 말 자체가 사치스럽기도 하구요...

빵가게재습격 2009-09-30 00:53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