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은 들떠 있지만, 실상 추석은 일년 동안 농사일로 고생한 농부들의 명절이어야 옳다. 내가 이 '가을저녁'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아직 갈길이 멀고 '겨울저녁'이라도 챙길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정산은 세밑에 가서 해봐야겠다). 연휴에 써야 할 원고를 때문에,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책 몇 권을 대출하고 자료도 몇 점 복사했다. 그러고 보면 들떠 있을 경황이 전혀 아니다. 명절이긴 하지만 '휴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다만 나대로의 명절 기분은 몇 권의 책 구경을 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일이다. 사실 엊저녁에 해놓았으면 편했을 텐데 인터넷접속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실행하질 못했다. 멀쩡한 상태에서 접속불량이다가 지금에서야 다시금 연결이 되는 이유는 따로 알지 못한다.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정찬의 소설집 <두 생애>(문학과지성사, 2009)이다. 7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는데, "이 소설들을 뚫고 지나가는 주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과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정찬에게 있어서 이 주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성실하고 꼼꼼하게 이 묵직한 문학적 주제로부터 떠나지 않았던 귀한 작가이다."라고 소개된다. 나는 <그림자 영혼>(세계사, 2000)과 그 이후의 단편 몇 편을 읽은 듯싶다. 안 그래도 '폭력'을 주제로 한 책을 한 권 구상중이던 차여서 이 새 소설집에도 눈길이 간다. 작가의 전작으론 <베니스에서 죽다>(문학과지성사, 2003)과 <희고 둥근 달>(현대문학사, 2006)이다. 3년 터울로 작품집을 내는 꾸준함도 높이 살 만하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역사분야의 책은 김효순의 <나는 일본인, 인민군, 국군이었다>(서해문집, 2009) 이다. 부제는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제목에서 이미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일제에 징용돼 끌려갔다가 소련의 포로가 되고, 다시 귀환하여 인민군이 되고 국군이 되어야 했던 이들의 삶을 추적한 책. 언론에서 리뷰기사를 읽었을 때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문학동네, 2007)을 자연스레 상기하게 해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조정래 선생의 자서전 <황홀한 글감옥>(시사IN북, 2009)도 파란만장에 있어서는 뒤처지지 않을 듯싶다. 그런 굴곡진 삶과 우리의 현대사를 평생 기록해온 작가의 글 역시 '파란만장한' 황홀이 아닐까?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황광우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생각들>(비아북, 2009). 추천자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의 장점은 첫째, 고전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입문서다. 둘째, 내용이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셋째,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되어 있다. 넷째, 동서양의 대비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쓰여졌다. 마지막으로 옥의 티라면, 저자가 자신의 좌편향적인 이념의 경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념에 대한 중립적 입문서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책속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자의 지적 양심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좌편향적인 이념의 경도"라고 했지만 내가 서점에서 잠깐 들춰본 대목에선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신랄하지만 온건하고 상식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경도'가 무얼 뜻하는지는 찬찬히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아울러 저자의 자전적인 기록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창비, 2007)도 바로 읽어봐야겠다. 안 그래도 요즘 필요 때문에 동시대인들의 자서전/평전들을 주목하고 있던 참이다. 참고로, 저자는 "인천지역노동자연맹 교육부장으로 활동하고, 군부독재 시절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아침을> 등을 출간했던 황광우 씨가 군사독재정권과 숨가쁘게 대결하던 격변기에, 학교와 감옥, 거리 등에서 민주화를 위해 보낸" 바 있다.  

덧붙여, 나대로 이달에 꼭 읽을 책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 서평까지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4. 정치/사회 

이달부터는 정치사회분야가 통합됐다.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주성수의 <직접 민주주의>(아르케, 2009).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제와 직접민주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hybrid)’ 형태로 규정한 후,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가 ‘아래로부터의’(또는 ‘풀뿌리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 개혁․보완되지 않으면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한다." 현단계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으로 김영수의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메이데이, 2009)와 김상준의 <미지의 민주주의>(아카넷, 2009)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물에 대한 책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물의 미래>(김영사 2009). 경제학 책 가운데 석유에 대한 것은 자주 봤지만, 웬 물인가? 한데, 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귀중한 자원을 아껴 쓰려 하지 않는다. 너무나 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예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 일깨워 준다.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물의 위기는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그 동안 물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해 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물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도 함께 깨닫게 된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사실 '에릭 오르세나'는 소설가의 이름으로 더 낯익은데, 알고 보니 다양한 활동경력을 지닌 지식인이다. "1981년 국제협력부의 고문으로 사회당 정부와 인연을 맺은 뒤 미테랑 대통령의 문화 보좌관 겸 연설문 초안 대필자, 최고행정재판소 심의관, 국립 고등조경학교 학장, 국제해양센터 원장 등 주요 공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발표한 다수의 소설과 에세이들은 이러한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 집필되었다. 1998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으로 지명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다른 책으론 "목화의 주요 생산.유통지인 다섯 대륙 여섯 국가 탐방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화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코튼로드>(황금가지, 2007)와 함께 <문법은 아름다운 노래>(미디어2.0, 2006)라는 소설도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지식인-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6. 과학 

최영주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가 추천한 과학책은 가스가 마사히토의 <100년의 난제, 푸앵카레 추측은 어떻게 풀렸을까?>(살림Math, 2009)이다. 책은 본래 일본 NHK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저자 가스가 마사히토는 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푸앵카레의 난제를 푼 사람은 러시아의 수학자 페렐만이었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푸앵카레 추측 해결의 궤적을 찾아 푸앵카레의 고향인 프랑스 낭시와 페렐만 박사가 은둔하고 있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와 UC버클리 등을 일주하며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괴물에 도전한 수학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고통이 만들어 낸 장대한 드라마를 추적하였다" 한다. 한편, 살림Math는 이름이 말해주듯 수학서 전문 출판사인데, 가장 최근에는 <에바리스트 갈루아, 한 수학 천재를 위한 레퀴엠>(사림Math, 2009)도 펴냈다. '대칭'의 의미와 함께 갈루아의 삶을 엮어넣었다고 한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나도 며칠 전에 구입한 안애경의 <핀란드 디자인 산책>(나무수, 2009)이다. 추천의 변을 보니 "언제부터인가 핀란드가 디자인의 메카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찍이 추구해왔던 자연친화적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인류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서울시도 핀란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이미 교육쪽으로는 핀란드식 모델이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겨레21에서도 특집으로 다룬 바 있고. <핀란드 공부법>(문학동네, 2009)에 대한 반응도 좋은 편이다. 이런 서울시 말고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좀 챙겨봐야 할 책들인데...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서는 이재호, 김원중 두 영문학자의 <서양문화 지식사전>(현암사, 2009)이다. 작고한 이재호 교수는 '문화의 오역'을 많이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 애썼던 분인데, 이번 책도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싶다. 가령, "‘Zeus's Brother’를 제우스의 동생이라고 번역한 책들이 많은데 제우스의 형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제우스는 막내이기 때문이다. 즉 개념이나 관용구의 맥락을 풀이해냄으로써 그 정확한 의미를 읽어내는데 두 저자의 작업은 크게 기여했다." 그런 기여에 있어서 고전 전문 번역가 천병희 교수의 업적도 간과할 수 없는데, 과거 <신통기>라고 번역되던 책을 <신들의 계보>(도서출판숲, 2009)로 새롭게 펴냈다. 제우스 집안을 비롯한 신들의 족보는 이제 확실히 챙겨두게 됐다.    

9. 실용 

이달부터는 실용서가 새 카테고리로 추가됐는데, 손수호 국민일보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자폐증 아이를 둔 가족의 실상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 <혼자 있는 아이>(홍익출판사, 2009)이다. 덕분에 자폐아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임상관련 쪽과 사례담 쪽 책들이 눈에 띈다. <자폐아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들녘, 2004)는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수영선수 진호 군의 어머니가 쓴 책이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0>(자음과모음, 2007)은 "자폐아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과 교사, 의사, 재활센터 직원들을 작가가 직접 만나 취재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한 만화".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도 나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10. 편집자

'나대로 고르는 책'은 편집자들을 위한 책을 골랐다. 최근에 트렌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련서들이 나오고 있는데, 교과서적인 책은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잇인가>(휴머니스트, 2009)이고, 주간지 편집의 달인이라 할 만한 고경태 씨네21 편집장의 <유혹하는 에디터>(한겨레출판, 2009)도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한다.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부키, 2009)는 현장 편집자들의 실전 체험담을 담고 있다. 사실 편집자를 위한 책들을 일반 독자가 읽어야 할 이유는 드물 것이다. 한데, 내가 놀란 건 국내에 편집자가 1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 인문서 독자의 상당수도 이들 편집자들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편집자는 책의 생산자이면서 주요 소비자이다. 하니, 일반 독자들이 분발해야 할 일일 뿐더러, 저자들도 편집자들의 맘에 들도록 애쓸 이유가 충분하다...  

09. 10. 01.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개신, 2009)이다. 이 걸출한 러시아 아나키스트를 통해서 '원조' 아나키즘 사상이란 어떤 것인지 음미해보면 좋겠다. 다시 나온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우물이있는집, 2009)도 곁들이면 좋겠고, 아나키즘에  대한 개관으로는 하승우의 <아나키즘>(책세상, 2008)을 참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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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9-10-0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정치적 입장은 어떻게 될까요. 한국 프랑스 철학에서는 권위자라 할 분인데.

로쟈 2009-10-01 19:43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은 그냥 사회경제적 위치/지위라고 생각합니다. '말'로서의 정치적 입장은 장식인 경우가 많고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외투 2009-10-0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밑에는 한 철학자가 있고, 내 머리위에 책을 미행(尾行)합니다.

로쟈 2009-10-01 19:44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 말씀인가요?^^

외투 2009-10-02 10: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들을 미행한 기분입니다.
- '희고 둥근 달 : 스피드한 단문의 흡입
- '오, 하느님 : 다큐적인 회상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 위대한 실패에 대한 재고찰
- '미지의 민주주의 : 신자유주의의 대안
- '물의 미래 : '공기의 미래'에 대해서도
- '푸앵카레의 추측 : 수학자에 대한 궁금증
- '필란드 디자인 : 핀란드인의 일상 속 디자인
- '신들의 계보 : 비유와 상상력으로 우주 생성의 원리
- '혼자 있는 아이 : 집안에 돌연 비극적인 일(자폐아)
- '유혹하는 에디터 : 매체를 편집한 실무 경험
- '아나키즘 : 권위와 규제에 반대하는 아나키즘

로쟈 2009-10-01 23:28   좋아요 0 | URL
벌써 다 정리하셨네요.^^

philocinema 2009-10-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키즘' 관련서들이 가장 눈에 띄는군요.

로쟈 2009-10-03 10:27   좋아요 0 | URL
페이퍼를 쓴 한 가지 목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