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하이데거와 신학 - 코넬리우스 반틸 (번역: 류수민)
서문
이 소책자의 내용은 1964년 5월호 웨스트민스터 신학저널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을 현재의 형태로 다시 출판하는 것에 대한 허락은 해당 잡지의 편집 주간인 폴 울리 교수께서 주셨다.
1964년 6월
코넬리우스 반틸
신학의 새로운 개척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일련의 책들은 특별한 관심과 가치를 지닐 것이라 기대된다.
이 시리즈는 독일과 미국 신학자들 간의 토론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러한 토론은 이전의 논의들과는 달리, “미래의 흐름을 프로그램적 논문의 배태 단계에서 식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편집자들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따라서 각 권은 이러한 프로그램적 논문을 번역하여 제공할 것이며, 이 논문은 로빈슨 교수가 해당 논문이 등장한 독일의 상황과 그 의의를 분석하는 서론과 함께 소개할 것이다. 이어서 이 문제에 대해 유망한 미국 신학자들이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미국 신학자들의 기여를 고려하여, 콥 교수와 해당 논문을 분석한 독일 저자가 이 주제를 재평가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 권에서 논의된 주제에 집중해 보겠다. 이 첫 번째 권에서는 “후기 하이데거”가 대서양을 넘나들며 논의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제1부, 1927년 출간)이 루돌프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들은 어떠할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1953년부터 신학자들은 하이데거 사상의 전회(Turn)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9년에 이르러서야 “후기 하이데거가 신학에 미칠 폭발적 가능성이 명백해졌다.” 그해 바젤에서 젊은 사강사 Privatdozent인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는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후기 하이데거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하이데거 철학 전체가 불트만 신학보다 바르트 신학과 더 양립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하이데거가 이 논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 소식은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 신학계에서도 번개처럼 신학적 논쟁의 장을 밝히게 되었다.
여기, 많은 이들이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가라고 여기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있다. 그리고 여기, 현대 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칼 바르트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항상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았나? 하이데거의 유명한 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 “‘신 없는’(gott-loses) 책”이라고 불린 적이 있지 않은가? 하이데거 자신도 그의 철학을 기독교 신앙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지 않은가? 그리고 바르트 역시 그의 신학을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일반 철학과도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지 않은가가?
루돌프 불트만은 신약 성경 해석을 하이데거 철학의 특정 원리들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가 아니었는가? 확실히, 바르트가 불트만을 기독교 신앙의 단성생식(parthenogenesis)을 사실상 주장한다고 비판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현실성과 독특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이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거나, 적어도 적절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르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트는 우리 신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이름이 언급될 때 더 이상 불안(Angst)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는 전회(Kehre)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회심(Umkehr)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어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건, 후기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유 속에서 신을 위한 공간을 허용한다. 심지어 존재와 시간조차도 모든 면에서 gott-loses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결국, 하이데거의 궁극적인 목표는—심지어 그의 초기 저작에서도—인간을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유한성, 그의 시간성, 그리고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를 강조한 그의 모든 목적은 인간의 ‘사유’가 그것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The Umkehr
따라서, 오트가 하이데거 사상의 전회를 강조하고 주로 후기 하이데거에 근거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어도 함축적으로는 후기 하이데거에 기반한 입장이 불트만 신학보다도 초기 하이데거를 더욱 적절하게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제임스 M. 로빈슨은 하이데거 사상의 전환에 대한 오트의 평가를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한다. 그것은 “무(無)에서 존재로의 전환, 형이상학의 극복, 그리고 ‘뒤로-물러섬 Schritt zurück’”이다.
첫째는 “무(無)에서 존재로의 전환”이다. 하이데거는 1929년 취임 연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에서 “‘무(無)’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존재와 시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929년에 도입된 ‘무’ 개념 자체가 하이데거 사상의 급진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존재(Sein) 자체보다는 현존재(Dasein)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 개념의 도입은 전환적인 의미를 지녔다. 이는 1943년에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 후기(後記, Postscript)를 추가하고, 1949년에 서문(Introduction)을 추가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러한 추가 글에서 “‘무’는 점점 더 존재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즉, 존재사 - 형이상학에서의 존재 망각, 무 안에서의 형이상학의 종말, 형이상학이 철회된 후 무가 존재로 대체되는 과정이 후기 하이데거의 중심 주제로 부각된다.”
“무는 존재자들의 우연성을 가리킴으로써 우리를 그들의 존재 자체로 이끌며, 그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엿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장막 역할을 한다.”
존재를 가리는 장막으로서의 ‘무(無)’ 개념 속에는 두 번째 논점, 즉 형이상학의 극복이 포함되어 있다.
“형이상학이란 현존재(Dasein)가 스스로를 근거 짓고자 하는 노력이며, 이를 통해 모든 존재자는 궁극적으로 어떤 최고 존재(supreme being)에 근거를 두게 된다. 이 최고 존재는 자기 원인(causa sui)이다.” 형이상학에서 인간 주체는 “스스로를 실재의 기초로 삼고, 현실 세계를 자신 위에 세운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에서조차 하이데거는 “객관적 사유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주체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에 뿌리 내리려” 했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그는 여전히 개념적 사유를 통해 궁극적 존재를 찾고자 했다. 그는 아직 “개념적 사유보다 ‘더 엄밀한’ 사유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존재를 개념 안에 가두려는 것은 곧 존재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상, 바로 이러한 개념적 사유가 서구를 존재 망각으로 이끌었다.”
더욱이, 형이상학은 그 정적인 개념들로 인해 “존재의 ‘본질’이 그것의 사건성(happening)”이라는 점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존재의 행위적 성격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이 행위적 성격이 곧 “존재의 진리”다.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존재의 진리를 보여줄 수 없었다. 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이러한 드러남을 기다리지 않고, 존재가 스스로를 밝히도록 강요한다. 형이상학은 진리를 “지성에 대한 사물의 합치(adaequatio rei ad intellectum)”로 이해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성적 개념의 진리를 넘어서야 한다. “존재의 본질과 존재의 진리는 하이데거의 중심적인 존재 이해에서 하나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는 드러남(unveiling) 또는 계시(revealing)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 존재의 사건은 존재자와 사유 모두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존재 이해가 바로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비개념적 사유에 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논의된 두 가지 논점, 즉 (a) 무(無)에서 존재로의 전환과 (b) 형이상학의 극복은 이미 세 번째 논점, 즉 뒤로-물러섬이 의미하는 바를 시사하고 있다. “‘뒤로-물러섬’이란 철학사에서 이전 입장으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며, 개념적 사고 내에서 아직 도출되지 않은 논리적 추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사유의 본질적 운동과 관련된다. ‘뒤로-물러섬’이란 견해와 관점의 배후로 넘어서서, 사유의 대상이 우리를 마주하는 차원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이 성장한 근원적 토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Lichtungsgeschichte(‘역사를 밝힘’, clearing histor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존재자들은 존재 자체가 비추는 빛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무에서 존재로의 전환을 통해, 형이상학을 넘어서며, 모든 지성적 해석 체계를 초월하는 ‘뒤로-물러섬’의 과정을 거쳐 참된 객관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인간이 존재를 이해하려는 모든 주관적 노력을 제거할 때, 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때, 즉 어째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또는 왜 인간은 사유해야 하는가?와 같은 놀라움 속에서—즉, 절대적 우연성 혹은 무(無)의 개념 자체에서—인간은 존재가 그 자체로 진리임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의 진리는 스스로를 인간에게 드러낸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역사(Geschichte)로서뿐만 아니라 역운(Geschick)으로서도 말한다. 존재에 대한 사유는 “역운적 성격을 지닌다”고 그는 말한다.
불트만에 대한 오트의 견해
이제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얻어진 객관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 오트가 후기 하이데거를 어떻게 활용하여 참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구축하고자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트는 불트만의 연구에 대해 큰 존중을 보였다. 이는 그의 저서 *루돌프 불트만 신학에서의 역사와 구속사(Geschichte und Heilsgeschichte in der Theologie Rudolf Bultmanns, 1955)*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트가 불트만을 비판하는 핵심은 그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과도하게 활용했다는 점이 아니다. 오트에 따르면, 불트만의 가장 큰 실패는 오히려 하이데거 사상을 좁게 해석한 데에 있다. 만일 우리가 “보편적 신학적 존재론”(universal theological ontology)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상, 특히 그의 후기 사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불트만은 신약의 케리그마(Kerygma)를 신화적 외피로부터 해방시켜 현대인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그는 형이상학을 벗어나 존재의 보다 심오한 차원에 도달하려 하였으며, 이는 주체-객체 도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이중적 역사 개념(der doppelte Geschichtsbegriff)을 도입하였다. 복음은 역사학에서 파악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는 사실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이러한 검증 가능한 사실들의 영역은 역사(Historie)라고 부를 수 있으나, 이는 2차적 의미에서의 역사이다. 1차적 의미에서의 역사(Geschichte)는 단순한 연대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즉 현재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트만의 *이중적 시간 개념(doppelte Zeitbegriff)*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이중적 역사 개념과 근저에서 동일한 개념이다. 이 개념들 속에는 이중적 이해 개념(double concept of understanding)이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개념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해이다. 이 이해 방식은 2차적 의미에서의 역사 영역에 속한다. 두 번째는 비매개적인 대면(immediate confrontation)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해이다. 이 이해 방식은 1차적 의미에서의 역사 영역, 곧 복음에 속한다. 불트만에게 있어 복음은 참된 혹은 1차적 의미에서의 역사 영역에 속하며, 이 영역은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오트의 주장은 불트만이 존재와 지식의 두 영역을 지나치게 대조적으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즉, 불트만의 입장은 이원론적(dualistic)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의 이원론이 초래하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a) 2차적 의미에서의 역사가 지나치게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b) 그 결과, 1차적 의미에서의 역사가 지닌 진정한, 전-포괄적인 의미가 확보되지 못한다. 불트만은 참된 역사, 즉 ‘현재(the Present)’의 영역을 2차적 역사와 너무 대립적으로 설정한다. 그 결과, 그의 ‘현재’ 개념은 마치 순수한 무시간성(pure timelessness)과 유사한 형태를 띠게 된다.
물론, 불트만의 사유는 그리스도론적(Christological)이다. 그리스도 사건(Christ-happening)의 단회적 성격(once-for-all character)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이중적 역사 개념과 시간 개념 때문에, 그의 ‘현재’ 개념은 참된 역사와 2차적 역사 사이에서 *연장성extension을 지니지 않은 한 점(ausdehnungsloser Punkt)*처럼 되어 버린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great deeds of God)”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창조와 최후의 역사(final history) 개념은 단순히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된다.
결론적으로, 불트만은 자신이 요구했던 진정한 실존적 해석(genuine existential interpretation)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했다.
오트의 주장은, 하이데거의 사상, 특히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신학적 공간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오트는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실존적 해석의 흐름을 따라갈 때에만,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실재성을 말할 수 있는 역사 개념(Geschichte)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에 대한 오트의 견해
오트는 그의 두 번째 저서 사유와 존재(Denken und Sein, 1959)에서 하이데거의 사상이 신학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하이데거는 불트만의 *종말론적-역설적 이원론(eschatological paradoxical Dualism)을 넘어서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불트만은 단지 제한된 의미에서만 하이데거에 부합합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하이데거 사상의 주된 흐름(그가 전반적으로 의도하는 바, was er im Ganzen will)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의 존재 철학(Philosophie des Seins)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 철학을 논하려면 그의 사유 철학(Philosophie des Denkens)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이데거 사유의 대상은 곧 사유 자체이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칸트, 또는 헤겔적 관념론자들과 유사한 주관주의(subjectivism)로 다시 빠지게 되는 것인가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 여전히 그러한 주관주의적 요소가 남아 있었다면, 이제 그것은 극복되었다. 앞서 논의한 그의 사상의 전회(Kehre)가 이를 보증한다. 이제 존재(Sein)가 사유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더욱이, 사유를 온전히 지배하는 존재(Sein)는 역사(Geschichte)이다.
하이데거 사상의 전회, 즉 무에서 존재로의 전환, 형이상학의 극복, 그리고 뒤로-물러섬의 모든 의미는 결국 존재(Sein)가 역사(Geschichte)라는 사실을 이전보다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존재는 역사로서 사유를 지배한다.
결론적으로, 사유의 객관성(objectivity of thought)은 사유가 존재(Sein), 즉 역사(Geschichte)에 의해 완전히 지배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가 사유를 완전히 지배하는 방식은 사유가 존재(Sein)로서의 역사(Geschichte)에 참여(participate)하는 것이다. 사유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존재 자체의 역사이다(seine Geschichte ist primär die Geschichte des Seins selbst).
따라서 역사(Geschichte)는 밝히는-역사(Lichtungsgeschichte)라고 불릴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사유의 초월적 전제들(transcendental presuppositions)이 드러나며, 주관주의(subjectivism)는 완전히 극복된다.
물론, 개별 인간이 주관성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별 인간은 항상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오류(Irre)는 존재의 밝힘(Lichtung des Seins)의 일부이다. 즉, 존재는 인간을 오류 속으로 인도하며, 그를 존재 자체 앞에 서도록 요구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일상적인 개념적 범주들 속에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그는 존재자(das Seiende)를 조작하는 데 스스로를 잃게 되고, 존재자들 배후에서 그것을 지배하는 사건성으로서의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서 인간은 존재(Sein)로부터 소외됨과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자기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 하이데거 역시 그의 존재의 종말론(eschatology of being)을 가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무에서 존재로 전환하고, 형이상학을 극복하며, 뒤로-물러섬을 통해 모든 이원론을 극복함으로써 모든 주관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한다. 이 격언에 따르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그 기원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거기에서 시간의 질서서에 따라 불의(不義)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이데거는 선이 악에 대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제 하이데거 사상이 신학에 대해 갖는 의미를 탐구해 본다면, 우리는 인간의 참된 자유와 그의 진정한 존재(authentic being)는, 존재(Sein)가 그의 승리에로의 참여(participation in its victory)를 초대하는 데 대한 올바른 응답 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존재(Sein)는 사유의 초월적 전제이다(Das Sein ist die transzendentale Voraussetzung des Denkens).”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사상은 무신론적인 것인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과 대립되는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바르트가 존재 유비(analogia entis) 개념을 비판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공통된 존재(Sein)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파괴하는 것인가?
오트의 대답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바르트의 ‘존재 유비(analogia entis)’ 비판의 정당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전체적인 부정적 과녁과 목적 바르트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둘 다 형이상학을 넘어서거나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갔다. 물론, 하이데거는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남겨둔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존재 개념에 대해, 바르트가 존재 유비(analogia entis) 개념을 거부하면서 암묵적으로 요구했던 바로 그 운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허용하는 유일한 신(God)은 바르트의 신(God of Barth)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Im Grunde haut Barth hier in dieselbe Kerbe wie Heidegger." – "근본적으로 바르트는 여기에서 하이데거와 같은 방향으로 도끼질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Being)’와 바르트의 ‘신(God)’은 모두 인간의 사유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인간은 ‘존재의 계시(revelation of Being)’에 응답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성경도 하나님에 대해 유사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가?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한 최고의 존재임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존재(being)’라는 개념을 적용하신다. 여기에는 형이상학(metaphysics)이 없다. 또한, 하이데거는 신학자들에게 사도 바울의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지 않는가?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게 되었다"(고린도전서 1:20)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being of God)를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나타남(manifestation)의 사건(Event)을 의미해야 한다. 이러한 나타남(manifestation)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한다(compels free human response). 그것은 곧 신앙(faith)의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사유의 사유(thinking of thought)’를 존재(Being)의 나타남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라고 말할 때, 이러한 사유(thinking)는 결국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말하는 ‘신앙(faith)’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하이데거가 사유 Denken을 말할 때, 그는 우리가 철학과 과학을 논할 때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한다. 그는 존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원초적인 사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분명히 신학적 사유 또한 모든 다른 사고로부터 독립되기를 추구한다. 신학적 사유는 계시와 신앙의 사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불트만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돕는다.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사고의 본질을 계시-신앙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이 주관주의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불트만은 여전히 사고를 무언가에 대한 사고로 이해한다. 그 결과, 그는 여전히 객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사고에 대한 관점과 신앙에 대한 관점 사이에 이원론이 생겨난다. 이러한 이원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하이데거를 따를 수 있다. 사유의 사상가로서 그는 우리에게, 원초적인 사유란 존재가 역사(Geschichte)로서 지시하는 방향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유임을 가르쳐준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정한 객관성(die Wendung zum Ding, 사물로의 전환)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사물은 그것의 역사적 의미 속에서 그것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사물로의 전환(Wendung zum Ding)이 지닌 시대적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 전환을 통해 새로운 실재 개념과 새로운 세계 이해 개념이 우리에게 제시된다는 점에 있다. 이 새로운 실재 개념과 그 이해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실존주의 너머로 나아가게 한다.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잘못된 이원론과 대립을 제거해 준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 내재성의 닫힌 형태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단순히 내재성에 초월성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원리에 따르면 초월성은 본질적으로 내재성과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과 대립하는 ‘신적인 것’의 관계는 사물의 본질적 구조에 속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연신학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이미 자기 자신과 세계를 알고 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참이다. 그 결과, 세상의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현이 우리에게 분명해진다. 따라서 사유를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노력이 가지는 가능성은 신학의 전 영역, 곧 창조로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한다.
조직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트의 견해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신학의 새로운 개척지(New Frontiers in Theology)』 제1권에서 오트(Ott)가 쓴 「조직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이전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트는 이 글의 서두에서 “기독교 신앙과 사유”라는 주제로 열린 “마부르크 학파의 옛 구성원들(Old Marburgers)의 모임”을 언급한다. 이 모임에서 하이데거는 연설을 하면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Science does not think)”라는 명제를 제시하였고, 이 명제와 관련하여 그가 “존재 망각(Forgetfulness of Being)”이라 부르는 개념을 논의하였다. 또한 그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사유한다(Thinking)’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앙이 사유하는 방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오트는 하이데거의 두 번째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어, 주해를 할 때의 사고와 조직신학을 할 때의 사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묻는다. 더 나아가, 조직신학을 할 때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 질문에 답한 후, 하이데거가 신학에 기여한 바를 다시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
오트는 말한다. 조직신학은 당연히 해석학에 기초한다. 조직신학자는 케리그마를 다룬다. “본문에서 설교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단일한 이해 행위, 단일한 해석학적 과정의 연속성에 속한다.”
이 “신학의 본질을 구성하는 단일한 이해의 아치(unitary arch of understanding)”를 고려해 보면, 조직신학은 그 아치의 한가운데, 말하자면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해석학적 전이(hermeneutical transfer)”**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조직신학은 해석학적 아치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아치 전체를 성찰(reflect)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신학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이해의 본질을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의학(dogmatics)과 철학이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명제에 따르면, 교의학은 이 과제를 단순히 철학, 즉 계시에 구속되지 않은 사유(thinking not bound to revelation)에게 완전히 넘겨줄 수는 없다.” 그리고 조직신학자는 주해학자(exegete)의 작업을 어느 정도 감독할 책임을 지닌다.
조직신학이 해석학적 아치의 중심에 있다는 이 개념은 우리를 형이상학적 사고의 모든 폐해로부터 구해줄 것이다. 이 점은 이후에 다시 언급될 것이다. 지금은 보다 구체적으로 조직신학의 본질을 살펴보자. 조직신학은 주해학(exegesis)과 구별되며, 성경 본문의 전체적인 지평(the whole horizon of biblical texts)을 다룬다. 조직신학은 성경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다룬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Christ event), 계시와 신앙의 실재”를 다룬다. “이것은 단순히 ‘진술될 수 있는(fact that can be stated)’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시적이고 사유하는 언어를 통해 스스로 들려오며, 그리하여 현존하게 되는 실재이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조직신학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복음, 곧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변증법적 성격(dialectical nature of language)을 간과할 위험에 처해 있다. “언어에는 말해지지 않은 영역이 포함된다. 그리스도 사건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만나지만, 복음은 복음서와 그 증언을 통해서만 만나진다. 그러나 이 복음서들은 아직 복음 그 자체는 아니며, 또한 결코 복음 자체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말해지는 것은 언제나 ‘…에 따른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뿐이다. 즉, 마태에 따른 복음, 마가에 따른 복음, 누가에 따른 복음, 요한에 따른 복음, 나아가 바울에 따른 복음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마르틴 루터, 칼뱅, 루돌프 불트만, 칼 바르트에 따른 복음을 말할 수 없겠는가? 물론 그것들은 1차적인 것이 아니라 2차적으로, 그리고 앞선 복음서들에 의존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음 그 자체—오직 하나뿐인 복음—은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것은 복음서와 기독교적 증언, 즉 설교, 전례(liturgy), 신학 속에서 말해지는 모든 것 가운데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것(the unspoken)’으로 남는다. 이 ‘말해지지 않은 복음’은 모든 복음과 증언을 통해 들려온다—만일 참된 이해가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언어의 모호한 본성은 “조직신학이 ‘말해지지 않은 것(the unspoken)’, 즉 그 자체로서의 주제(subject matter), 곧 복음까지 사유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마치 하이데거가 휠덜린과 트라클을 해석할 때, 그들이 ‘의미하려 했던 것(what they meant)’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하도록 맡겨진 것(what was entrusted to them to say)을 사고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말해지지 않은 복음(the unspoken gospel)’에 대한 강조를 통해 우리는 형이상학적 조직신학의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정한 조직신학의 방법론은 여러 교리를 단순히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조직신학의 체계적 성격이란, ‘말해진 것(the spoken)’의 복잡성을 통해 ‘말해지지 않은 것(the unspoken)’의 나눌 수 없는 통일성(indivisible unity)을 바라보는 데 있다. 즉, 말해진 모든 것 속에서 현존하도록 요청받는 그 자체로서의 주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신앙이 하나의 나눌 수 없는 단일성이듯이, 그 대상 또한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실재(indivisible reality), 즉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 은혜로우시면서도 의로우신 분으로, 그리고 존재와 그의 세계의 한계이자 지탱하는 근거로서 우리를 만나신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신앙과 그 대상을 사고할 때에만 우리는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신학은 신앙과 관련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는 우리에게 사고(thinking), 언어(language), 그리고 이해(understanding)의 본질을 보다 원초적으로(primal way) 바라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봉사를 수행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비록 조금이라도 그의 길을 따라간다면, 어쩌면 언젠가 우리 눈을 가렸던 전제들이 비늘처럼 벗겨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를 따라가며 바르트의 사유 방식을 따른다면, 우리는 “구원의 사건들(saving facts)의 신학은 무의미한 무사유(empty-headed thoughtlessness)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유하는 신앙(faith that thinks), 즉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방식으로 사유하는 신앙은 신자를 ‘하나님의 단 하나의 구원의 행위(one saving act of God)’에 관계 맺게 한다. 그리고 이 하나의 구원의 행위는 ‘한 점에 국한된 것(punctually)’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십자가와 부활, 승귀(昇貴, exaltation)와 재림(second coming)은 모두 이 단 하나의 진리와 실재의 구조적 요소(structural elements)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핵심은 ‘의미 구조(structure of meaning)’라는 개념에 있다. 믿음의 대상(subject matter of believing)은 나눌 수 없는 통일성(indivisible unity)이다. 그것은 의미를 담고 있는(significant) 통일성이며, 바로 이 때문에 역사적 통일성(historic unity)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그리고 이것이 나의 일곱 번째 논제를 설명하는 여덟 번째 논제이다—이것이 모든 역사적 존재(historic being)의 근본 상황이다." 예를 들어, 한 편의 시(poem)는 우리를 의미의 총체성(totality of meaning)으로 이끈다.
우리는 “형이상학을 넘어선 신학”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후기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다. 형이상학은 “존재자(beings)를 존재자로서 사고하지만, 존재의 진리(truth of being), 즉 드러남(unveiling) 자체의 사건을 사고하지 않는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존재 망각(forgetfulness of being)에 빠진다.” “형이상학과 그것과 함께하는 과학(science)은 더 이상 본질적 사유(essential thinking)가 거리를 두고 주제를 다루는 인간의 처분(disposing of the subject matter)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an occurrence that happens to him) 속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형이상학과 과학은 결과(results)를 원한다. 그들은 우주의 퍼즐을 ‘풀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 사유는 어떤 결과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목표(goal)에 도달하지 않으며, 언제나 길 위에 머문다(remains on the way).” 반면, 진정한 교의학(true dogmatics)은 “어떠한 철학적 도식을 전제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경험된 의미 내용을 그 경험 자체로부터 사유적으로 펼쳐가는(unfold thoughtfully) 것”일 뿐이다.
객관화와 실존주의에 대한 오트의 견해
우리는 불트만의 신학과 하이데거의 철학을 평가하는 오트의 논의를 들어보았다. 또한 우리는 그가 조직신학의 올바른 방법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시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가 이 모든 논의를 통해 이루고자 한 목표는, 불트만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제한적인 경향(restrictive tendency)에 얽매이지 않는 신학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오트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존재와 그 이해를 통해 열린 인간 경험의 심층 차원(dimension of depth)에 들어가는 신학을 원한다. 그리고 그가 아는 한, 바르트의 신학이야말로 그러한 신학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오트는 자신의 논문 「객관화와 실존주의(Objectification and Existentialism)」에서, 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불트만의 신학과 달리 이원론적(dualistic)이 아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역사의 이차적 측면(secondary aspect of history)에 대해 잘못된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있어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history of Jesus Christ)의 빛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아니다.”
바르트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우선성(the absolute primacy of Jesus Christ)에 대한 이 사실은, 불트만 사상의 모든 제한적인 요소를 단번에 제거해 버린다. 불트만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 방법론의 어느 정도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불트만에 따르면,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이 신학의 장에 등장하기 전에, 철학이 먼저 인간과 그의 필요를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는 신학이 그리스도에게 진정한 탁월성(true preeminence)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특히,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초기 저작에서 사용된 ‘비본래적 실존(inauthentic existence)’와 ‘본래적 실존(authentic existence)’ 개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 어떤 철학적 체계에도 자신을 종속시키지 않는다. 그는 브루너와 논쟁하면서 「첫 번째 계명(The First Commandment)」을 신학적 공리(Theological Axiom)로 제시하지 않았던가? 바르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허용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체의 권위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말씀, 곧 하나의 이야기(narration) 속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history of Jesus Christ)를 만난다.”
물론 신학자는 인간 경험의 "형식(forms)과 구조(structures)"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철학과 함께 이것들을 실존구조(existentialia)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구조의 근거(rationale)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이 실존구조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history of Jesus Christ)와 분리된 채 연구된 인간 존재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해석된 존재이다.”
이 지점에서 불트만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존재론적 지식(ontological knowledge)은 존재적 주체(the ontic subject)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phenomenological study) 이외의 방식으로 획득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바르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인간 주체(human subject)와 그의 필요(needs)와 연관 지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구조적 친화성(structural affinity)은 오직 인간이 처음부터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 속에서 해석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과거에 살고 죽은 한 개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God’s kingdom come on earth)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신적 개입(divine intervention)의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두 가지 측면을 필요로 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앞서지만, 둘 다 하나님께 속한다. 바로 이 대립(polarity)이 ‘나를 위한 것(pro me)’을 도입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내게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속죄(attonement)의 교리를 내포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요구를 내 대신 성취하신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로 인해 나의 실존(my existence)은 근본적으로 제한된다(radically limited).” “이와 같은 기독론적 해석(Christological interpretation)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 되심(divine Sonship)의 분석은 바르트의 확대된 기독론적 실존주의(Christological existentialism)가 인간 존재에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바르트는 화해의 교리를 집필하면서, 이 확장된 기독론적 실존주의를 발전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항상 불트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트(Ott)는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4/1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또한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자신을 위한(pro se)’ 분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이 ‘그 자신을 위한 존재(pro se)’로서 또한 ‘우리를 위한(pro nobis)’, 따라서 ‘나를 위한(pro me)’ 존재이심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올바른 종류의 실존주의이다. 하나님의 pro se는 그의 pro me와 별개이거나 추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포기(abandonment of existentialism)도 아니며, 사변(speculation)의 개입이나 잘못된 객관화(false objectification)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pro me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구조적 요소(necessary element in the structure of his pro me)이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그리고 우리도 분명히 이에 동의해야 한다—“하나님의 pro me는 그의 pro se의 구조적 요소(structural element of his pro se)이며, 후자가 존재론적으로 우선(ontologically prior)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pro se, 즉 하나님이 그 자신 안에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포함하는 실존주의(an existentialism enlarged so as to include God’s pro se)”에 도달하게 되었다. “시편 115:1(Non nobis Domine, '우리에게가 아니라, 주여')의 말씀으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지금 중요한 핵심은, 바르트가 이 “확장된 기독론적 실존주의를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신학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a) 불트만(Bultmann)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난 신학 (b) 특히 후기 하이데거(the later Heidegger)의 사유와 일치하는 신학
오트(Ott)는 물론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의 차이점을 과장해서는 안 되며, 바르트와 하이데거 사이의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와 불트만에 관해서 우리는 항상 “그들이 첫 번째 계명(The First Commandment)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점은 분명하다. 불트만 논쟁은 그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혹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그의 의도는 바로 신약성경(New Testament)의 의도와 정확히 동일하다—곧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로 인간을 향해 행하시는 하나님님(God graciously acting upon man)이라는 것이다.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 의도를 신학과 설교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불트만 역시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기독론적인 신학을 원했다.
한편, 하이데거와 바르트의 동의점(agreement)은 우선적으로 그들이 모두 반대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 다 형이상학적 사변 속의 하나님을 반대한다. 둘 다 인간이 주체-객체(subject-object)의 사고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둘 다 인간이 먼저 말하기보다는 말 걸림(being spoken to)의 차원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the later Heidegger’s thought)는 존재(Being)에 대한 개방성(openness for Being)이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임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우선성(the primacy of the Christ-Event)을 받아들일 준비가 과거보다 더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자기 존재에 대해 자유로운(free with respect to his own being)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케리그마가 말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류인 것이다.
전체적 그림
이제 우리는 오트가 제시한 전체적인 그림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오트는 바르트를 따라 진정으로 기독론적인 신학을 추구한다. 인간의 존재는 그리스도가 역사(Geschichte)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불트만(Bultmann) 또한 같은 종류의 신학을 추구한다. 그 역시 기독론적이기를 원한다. 그의 비신화화(demythologizing) 방법론은 그 의도에 있어서 구성적(constructive)이다. 그 방법론은 케리그마가 신화적 잔재(the disfiguring detritus of mythology)로 인해 왜곡되지 않도록 해방하는 수단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불트만의 관점에는 분명한 약점이 있다. 그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오직 그 빛 안에서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역사(Geschichte)로서 온전히 제시되지 않는다. 불트만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 그 결과, 그는 신앙(faith)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신앙과 무관한 인간의 자기 이해(man’s understanding of himself apart from faith)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결국, 불트만은 궁극적으로 기독론적인 이해(Christological understanding)로서의 ‘이해(understanding)’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오트는 불트만의 주요한 약점이 그가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원리를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에서 제시된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사유 전개 과정을 계속 따라갔다면, 상황은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하이데거 자신이 ‘이해(understanding)의 참된 본질(the true nature of understanding)’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이 새롭고 더 깊은 이해, 혹은 새로운 사유는 이미 『존재와 시간』 안에 그 기초가 놓여 있었다. 이 책에서조차 하이데거는 인간이 반드시 ‘존재(Being)’의 관점에서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초기 저작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통해(self-referentially)’ 자신을 이해한다는 점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존재를 ‘역사(Geschichte)’로, 그리고 ‘밝힘의 역사(Lichtungsgeschichte)’로 이해할 필요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하이데거(Heidegger) 자신은 역사(Geschichte)로서의 존재를 현존재(Dasein)보다 우선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제 더 이상, 형이상학(metaphysics), 기술(technology), 그리고 과학(science)의 사고를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본래적 실존(authentic existence)’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개념을 유지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참된 자기 이해(true self-understanding)는 논리의 범주들을 통해 얻어질 수 없다. 참된 이해(true understanding)란 ‘존재를 역사(Being as Geschichte)로서 통찰하는(insight into) 것’이다. 이 Geschichte(역사)란, 어둠에서 더 큰 빛으로 나아가는 영원히 계속되는 과정(ever on-going process)이다.
그렇다면, 오트(Ott)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한다. “이제 이러한 이해 개념을 가진 현대인은 케리그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이데거가 이해를 사고하는 방식과 기독교인이 믿음을 사고하는 방식은 둘 다 그 대상(object)으로서 ‘역사로서의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as Geschichte)’를 전제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역사(Being as Geschichte)’로 전제한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역사(Christ as Geschichte)로 전제한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 케리그마를 즉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원칙에 따르면면 케리그마를 반대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만일 하이데거를 따르는 사람이 역사로서의 존재(Being as Geschichte)에 대해 말하려 한다면, 결국 그는 신앙인이 역사로서의 그리스도(Christ as Geschichte)에 대해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를 따르는 자에게 존재는 자유롭거나 주권적인 신비(free or sovereign mystery)이며, 자유롭거나나 주권적인 빛(free or sovereign light)이다. 신앙인에게 그리스도는 자유롭거나 주권적인 신비(free or sovereign mystery)이며, 자유롭거나 주권적인 빛(free or sovereign light)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감추어진 분(wholly hidden)이시며, 동시에 완전히 드러난 분(wholly revealed)이시다.
바르트와 불트만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오트가 제시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불트만과 바르트의 사상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은 복음주의 신학자(evangelical theologians)들에게 매우 유용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란, 종교개혁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우선성(primacy of Christ)을 믿는 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불트만과 바르트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직접적으로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와 동일하며, 구약과 신약 성경 속에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트의 논의는 유용할 수 있다. (1) 오늘날의 신학적 쟁점을 단순화하고 명확하게 만든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바르트나 브루너 같은 신학자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 “우리는 불트만을 따라가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이에 대한 준비된 대답은 “아니다.”이다.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트만의 신약성경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existentialist exposition of the New Testament)은 신약의 내용을 폭과 깊이 양면에서 거대하게 축소하는(grandiose reduction) 작업이다.” 바르트는 또한 불트만의 그리스도 부활 개념이 **“하나의 미신(superstition)에 근거한 실재 개념(concept of reality)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았는가? 즉, 불트만은 “오직 역사적 학문(historical science)으로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만이 실제로 시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미신적인 전제 위에서 부활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부활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역사가(historian)로서 확정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욱 확실히 실재하는 사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바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은 바로 그러한 사건이라는 증거가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은 정당하다. 이 비판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과정(demythologizing process)이 의존하는 ‘실재 개념(concept of reality)’을 폭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트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최소한 우리가 스스로를 돕는 방법을 제안할 수 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핵심 사항이 있다. 하나는 불트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르트에 관한 것이다. 오트의 전체 논증에서 중요한 핵심은, 불트만이 바르트만큼이나 복음을 인간에게 전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불트만이 닫힌 인과적 실재관(closed causal view of reality)을 믿고 있다고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신약과 신화(New Testament and Mythology)』의 첫 부분에서 말하는 삼층 구조의 우주(three-storied universe) 에 대한 논의를 읽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불트만에게 과학의 영역은 인과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부활의 사건은 이 과학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과도 직접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의 영역은 실재(reality)의 단 한 가지 측면만을 알려줄 뿐이다. 불트만에 따르면, 다른 차원의 영역, 즉 인간의 자유(freedom)와 결단(decision)의 영역이 존재한다. 불트만은 칼 야스퍼스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정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한다. “불트만은 무시할 수 없는 과학적 통찰에 맞서, 가능한 한 신앙을 보존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이것은 결코 나의 의도가 아니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 계시는 반드시 ‘사건’이 되어야 한다. 성육신의 개념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관념(the idea of God)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 관념이 참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으로 나타나신다. 그분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here and now), 인간의 입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기독교 신앙의 역설(paradox of the Christian faith)은 바로 이것이다. 즉,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종말론적 과정(eschatological process)이 역사 속에서 하나의 사건(event)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모든 참된 설교 속에서, 모든 기독교인의 발언(Christian utterance) 속에서 다시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불트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of God in Christ)를 믿는 것이 과학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계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에 대한 진리의 기준(criteria of truth)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터무니없는(absurd) 일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계시를 계시로 인식하기 전에 먼저 그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트만을 단순히 현대 과학자들과 비인격적 인과법칙(impersonal causal law)에 의해 지배되는 닫힌 우주(closed universe)를 믿는 현대 철학자들을 기쁘게 하려는 신학자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불트만은 **열린 우주(open universe)**를 믿는다. 그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역사(Geschichte)’로서 규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로 궁극적 실재가 ‘역사’라는 그의 관점 속에서 그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act of God)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a concrete, historical man), 곧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 속에서 온 세상과 모든 시대를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하셨다(acted decisively). 그를 통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주시는 용서와 은혜의 메시지(message of forgiveness and grace)를 들을 의사가 있는지를 질문받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불트만을 공정하고 충분하게 다루고자 한다면, 그의 궁극적 실재를 역사(Geschichte)로 이해하는 개념을 분석해야 한다.
불트만이 현대 철학, 특히 하이데거가 제시한 인간에 대한 실존적 분석(existential analysis of man)과 케리그마를 조화시키려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철학과 복음(gospel) 사이의 조화 가능성(possibility)과 현실실성(actuality)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불트만에게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철학과 복음은 둘 다 궁극적 실재를 ‘역사(Geschichte)’로 사고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Geschichte(역사)는 개방성(openness)을 의미하며, 즉 순수한 우연성(pure contingency)을 의미한다. 순수한 우연성의 개념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해석학적 원리(hermeneutical principle)와 이해 개념(concept of understanding)은 실재(reality)가 ‘스스로 시간화한다(temporalizes itself)’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오트가 불트만적 신학보다 바르트적 신학을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바르트가 불트만보다 ‘역사(Geschichte)’ 개념을 더 온전히 구현한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오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직 바르트의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 이해 속에서만 ‘역사(Geschichte)’ 개념이 본래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낸다.” 또한, 오직 바르트의 ‘역사(Geschichte)’ 개념을 통해서만 일상적인 시공간(ordinary space and time)의 세계가 올바른 자리를 부여받는다.이 자리란 Geschichte(역사)에 대한 ‘종속(subordination)’과 ‘참여(participation)’의 자리이다. 그렇다고 해도, 바르트적(Geschichte)의 개념은 이미 하이데거, 특히 후기 하이데거(later Heidegger)의 사상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일상적인 시공간의 사물들을 조작(manipulation)하면서 경험하는 ‘비본래적 경험(inauthentic experiences)’을,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존재(ultimate free being) 속에 참여(participation)할 때 이루어지는 ‘본래적 경험(authentic experience)’에 종속시키려 한다.
오트에 따르면,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다. 둘 다 신약성경의 복음을 선포하려 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두 사람 중 더 성공적이다. 그 이유는 바르트의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이 불트만의 그리스도 사건보다 더 진정한 ‘역사적(geschichtlich)’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불트만의 ‘신앙의 처녀생식(parthenogenesis of the faith)’ 관념을 비판할 때, 이것은 ‘역사(Geschichte)’ 개념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불트만이 부활(resurrection)의 사실성(the fact of the resurrection)을 부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헤르만 리델보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비판은 정당하다. 이 비판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과정(demythologizing process)이 기반하고 있는 실재 개념(concept of reality)을 드러낸다.” 물론, 불트만이 부활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실재 개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바르트가 부활을 사실(fact)로 긍정하는 것 또한 그의 실재 개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바르트와 불트만 둘 다 ‘역사(Geschichte)’ 개념을 실재 개념으로 삼고 있다.
이제 바르트와 불트만의 Geschichte(역사)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즉, 바르트와 불트만 모두 자신들의 ‘Geschichte 개념’을 근거로 삼아, 부활(resurrection)이 ‘일반 역사(ordinary history) 속의 하나의 사실(fact)’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을 부정한다. 만일 오트(Ott)의 바르트와 불트만의 차이에 대한 주된 논지가 옳다면, 오히려 바르트가 불트만보다 더 원칙적으로 ‘부활을 일반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할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된다. 오트의 견해에 따르면, 불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초월성(transcendence)과 우선성(primacy)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불트만이 일상적인 시공간의 사물들(things of ordinary space and time)을 포함한 모든 것이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subordinate) 있음을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불트만은 **철학적 자기 분석(philosophical self-analysis)**에 지나치게 많은 실재성(reality)과 의미(significance)를 부여한다. 이는 곧 진정한 것이 아닌 것(unauthentic)에 너무 많은 가치를 두는 결과를 낳는다. 그 이유는, 불트만이 이러한 모든 경험을 ‘최고로서의 그리스도(Christ as supreme)’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트에 따르면, 바르트는 불트만보다 우월하다.
바르트의 부활 옹호는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우월성(supremacy)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바르트의 부활 옹호는 오히려 불트만의 부활 부정보다도 전통적인 부활 이해에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불트만이 부활을 부정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단정했을 수는 있지만, 바르트가 부활을 긍정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닌가?”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것은 ‘볼 수 있고(sichtbares), 들을 수 있으며(hörbares), 만질 수 있는(greifbares) 존재’로서였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4/1권 337페이지 및 여러 다른 부분을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이 있다면, 바르트가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정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그것은 단순히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는 일이다. 바로 앞서 인용된 형용사들(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을 근거로 바르트가 부활을 믿는다고 결론짓는 것은, 바르트가 무엇보다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바르트가 말하는 부활이 자신들이 믿는 ‘부활’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착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바르트에게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은 하나의 통일체(unit)이다.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승귀(exaltation)의 단계는 그분의 낮아지심(humiliation)의 단계에 시간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낮추어지시면서 동시에 높여지지 않은 때와 장소가 어디에 있는가? 그분은 이미 낮아짐(humiliation) 속에서 높여지셨으며, 높아짐(exaltation) 속에서 낮아지셨다. 우리는 하나이자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one and entire Jesus Christ)의 존재(being)를 다루고 있다. 그분의 낮아짐은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으며, 그분의 높아짐은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act of God)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a new act of God)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보편적인 은혜(the sovereign and universal grace of God)를 위대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리고 만일 부활이 정통 신학(orthodox theology)에서 말하는 의미 그대로 이해된다면, 바르트가 말하는 부활은 그러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오트의 핵심 주장
이제 마침내 오트의 핵심 주장(main contention)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의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오트의 주장은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이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제시된 신학적 관점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오트의 주장은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과 조화를 이루거나 그에 의해 요구되는 ‘Geschichte(역사) 개념’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들려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 이는 매우 잘못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1. 하이데거의 전회
오트가 하이데거 사상의 전회에 대한 평가를 적절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에는 이에 대한 바르트 자신의 평가와 상충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오트가 하이데거의 사상적 전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세 가지 요점 중 하나는, 하이데거가 후기 사상에서 무(Nothing)가 아니라 존재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오트의 평가에 따르면, 이 변화의 중요성은, 하이데거의 사상이 이제 이전보다 더 잘 초월(transcendence)의 개념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르트의 반응을 보면, 그는 하이데거의 사상적 변화에 대해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하이데거의 ‘무(Nothing)’ 개념을 논의한 부분에 관한 한, 이는 사실이다. 이 논의는 **『교회 교의학』 제50항(Paragraph 50)**에서 이루어지며, 이 부분은 “하나님과 무(Gott und das Nichtige)”라는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오직 선택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보편적인 은혜와의 관계 속에서만 ‘das Nichtige’(무(無),)가 얼마나 실재적인지를 볼 수 있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우리는 ‘das Nichtige’가 하나님이나 그의 피조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das Nichtige’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지속적인 승리 앞에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 실재한다. ‘das Nichtige’는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살아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대적하실 때에만, 그리고 그렇게 대적하시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은혜의 부정은 곧 혼돈(Chaos)이다. 따라서 ‘das Nichtige’는 오직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근본적인 법질서에 대한 모순과 반대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das Nichtige’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보편적인 은혜에 대한 반대로 보는 관점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개념은 기독교 신학자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의 빛 안에서 누가 악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혼돈(Chaos)에 대한 승리자로 참여하는 자만이 악의 실재를 감각할 수 있다. 인간 자신과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우월성과 으뜸 되심을 인정하는 자만이 ‘das Nichtige’를 그 본연의 모습대로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인정함으로써만 ‘das Nichtige’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기는 끝에서 두 번째 말일 뿐이며, 선택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인간을 향해 선포하는 최후의 말씀이다.
하이데거는 ‘das Nichtige’를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보편적인 은혜의 빛에서 바라보는가? 바르트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취임 연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연설에서 하이데거는 ‘das Nichts’(무(無))에 대해 길게 논한다. ‘불안’(Angst)의 경험을 통해 ‘das Nichts’는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하이데거에게 순수한 무(無)는 존재와 동일하다. 그의 사상에는 존재가 비존재에 대해 갖는 적절한 우선성이 없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최고의 형이상학적 질문은 “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가 존재하는가?”이다.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상적 경험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참조하려 한다. 그는 일종의 초월(transcendence)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한 번도 무신론자였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참된 초월을 갖지 못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das Nichtige’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는 만물의 근원과 귀결점이 되는 것이 단지 하나의 ‘그것’(It)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결국 “신화적 신생기(Theogonie)”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이데거가 ‘das Nichtige’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대면이라는 관점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이는 라이프니츠나 심지어 슐라이어마허에게조차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원리가 그로 하여금 진정으로 ‘das Nichtige’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das Nichtige’를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F. 드 흐라프(F. De Graaf)는 이렇게 말한다. 바르트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부록과 서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강연 자체는 1929년에 이루어졌고, 부록은 1943년, 서문은 1949년에 추가되었다. 그런데 서문과 부록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하이데거가 ‘das Nichtige’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것은 곧 존재이다. 만약 바르트가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적 방향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하이데거 역시 바르트 자신과 마찬가지로 철학으로부터 사고를 해방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전체 사상은 단순한 이성(Vernunft)을 넘어서는 사고 방식을 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이데거의 새로운 사유 방식에서는 행위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가 인간을 향해 행위한다. 그리고 이 존재는 곧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하나님 없이도 사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신 하나님이며, 논리적 조작을 통해 구성되고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이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책감을 통해 이 하나님을 만난다. 죄책감 속에서 인간은 존재의 계시에 열려 있다. “하이데거의 새로운 사유는 존재(곧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순종적인 경청이다.” 따라서 인간의 고립은 극복된다. “하이데거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적인 경청을 사유와 전체 문화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으로 여긴다.” 하이데거가 진정한 초월을 지닌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체-객체 관계 속에서 말해질 수 없는 분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말해진다면, 인간과 상관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하나님은 “전적으로 타자”이시다. 바르트가 하이데거 안에서 한 동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하이데거는 철학자이고, 바르트는 모든 철학과 분명한 거리를 두고자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철학을 넘어서는 철학자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신학에 반대할 뿐이다.
독자는 드 흐라프의 논증이 오트의 논증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쉽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드 흐라프는 오트보다 한층 더 나아간다. 후자는 하이데거의 존재를 단순히 하나님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트는 하이데거가 후기 저작들(즉,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 이후의 저작들)에서 존재를 역사(Geschichte)와 역운(Geschick)으로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무(Nichts, das Nichtige)에 대한 숙고를 통해 존재의 참된 개념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다. 무(Nichts)의 개념은 순수한 우연성(Kontingenz)의 개념이며, 논리적 조작만으로는 순수한 우연성의 차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물의 순전히 우연적인 본성을 보지 못하면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순수한 우연성은 존재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 무는 존재로서 본래적으로 존재한다(Aber dieses Nichts west als das Sein).”) 따라서 무(das Nichtige)는 존재의 장막이 된다. 인간은 무(das Nichts)를 통해 존재를 경험한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존재 개념과 함께 경험한 사유의 운동은, 바르트가 신앙의 이름으로 존재 개념을 거부할 때 경험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추구했다. 둘 다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개념을 인간의 사유와 열망에서 제거하고자 했다. 따라서, 오트는 본질적으로 하이데거를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그의 도움을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들에서 초월의 문제를 다룬 내용을 분석해 보면, 오트의 주요 주장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이러한 후기 저작들에서 실제로 무(Nichts)에서 존재(Sein)로의 전환, 형이상학의 거부, 그리고 “뒤로-물러섬(Schritt zurück)”이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초기에는 후설(Husserl)과 유사한 현상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거의 처음부터 후설의 그것과 차이를 보였다. 슈피겔베르크(Spiegel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중심을 의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 이동시키려 한다.” 점진적으로 하이데거는 더 나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존재(Sein)의 빛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Sein)의 빛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이는 새로운 사유 방식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존재 안에 내포된 사유 방식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존재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앎에도 참여해야 한다. 존재는 빛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 사용하는 사유 방식은 본래적으로 인간을 존재와 연결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교과서적인 논리를 사용하여 그것을 통해 인간 삶의 피상적인 존재자들을 다룰 뿐이다. 형이상학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립하려 할 때, 그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과 상관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차원에 도달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1949년, 하이데거는 자신의 취임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에 대한 서론을 집필했다. 이 서론에서 그는 1929년 강연의 결론을 다시 언급한다. 당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핵심 질문은 ‘왜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이것을 근거로 하이데거의 궁극적인 관심이 형이상학이며, 그의 기본 범주가 무(das Nichts)**라고 결론지으려 하는가? 이 결론에서 도출해야 할 올바른 결론은, 우리가 불안(Angst)을 통해 무(das Nichts)를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das Nichts)를 넘어 존재(Sein)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경유하여 존재에 이르도록 사유해야 한다(Die auf dem Weg über das Nichts an das Sein zu denken versucht).” 우리는 인과성(causation)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사유할 수 없다. 우리는 형이상학에서 사용되는 사유 방식보다 더 깊은 사유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의 1943년 후서(Nachwort)에서도, 자신이 강연에서 형이상학의 근본 질문이라고 불렀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모색함으로써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려 하더라도 형이상학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체-객체 관계에 기초한 모든 사유 방식이 존재(Sein)에 대한 지식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사유 방식만으로는 존재의 진리를 온전히 사유할 수 없음을 증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존재자의 존재자성을 통해 형이상학은 존재를 사유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용하는 사유 방식으로는 존재의 진리를 온전히 사유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의 참된 의미를 포착하려면, 그 궁극적인 기초가 무(Nichts)가 아니라 존재(Sein) 위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불안이 무를 넘어 존재에 근거할 때만, 우리는 그것의 대상이 단순한 공포(fear)의 특정한 대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진정한 사유(das wesentliche Denken)란 모든 특정한 존재자들 너머에서 존재 자체에 도달하는 사유이다. 진정한 사유는 존재의 진리(Wahrheit des Seins)에 도달한다. 인간이 이렇게 존재를 참되게 사유할 때, 그 자신은 역사성(historicity) 속에서 드러난다. 진정한 사유는 행동이다. 진정한 사유는 역사적이며, 존재에 순종하는 행위이다. 진정한 사유는 존재자들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참된 존재를 보호하는 과업에 헌신한다.그리고 진정한 사유가 존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시(poetry)와 유사한 방식으로 말한다.
하이데거 사상의 전회에 대한 핵심 논점이 여기 제시되었다. 오트가 언급한 세 가지 점, 즉 (a) 무(Nichts)에서 존재(Sein)로의 전환,(b) 형이상학의 극복,(c) 뒤로-물러섬(Schritt zurück) 이 모두는 인간의 자기 이해가, 존재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는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존재는 너무도 초월적이어서, 인간의 어떠한 진술로도 직접 말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의 모든 진술은 항상 어떤 무엇(something)에 관한 것이며, 이 무엇은 다시 그 진술을 행하는 주체와 상관적인 관계를 맺는다.
궁극적으로, 주체-객체 도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사유와 언어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초월하며, 자기 자신과 전적으로 다른 것에 대한 필요성을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는 무(das Nichtige)의 개념을 통해 단순히 우연성(contingency)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무 너머로, 혹은 무 이전으로 되돌아가 존재(Sein)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무에서 존재로 나아간다고 해서, 인간이 존재에 대해 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표면적인 현상적 경험들을 넘어, 플라톤적 이데아(Platonic Ideas)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뒤로-물러섬 (Schritt zurück)”은 모든 특정한 인간의 진술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이데거는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Vom Wesen der Wahrheit)』(1943)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 개념, 즉 “진리는 사물과 지성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이다”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진리 개념은 진리의 “본질”이 자유(freedom)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본질이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어떤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인간의 속성으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주체-객체 관계의 영역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존재(Sein)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자유를 소유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유가 인간을 소유한다”고 말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인간은 존재에 반하여 선택할 자유를 가지며, 설령 그 자유가 결국 자기 자신의 패배 속에서 근거를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그렇다.
오트의 기본적인 주장이 옳다는 사실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해졌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초월을 말할 때 원하는 모든 것이 하이데거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주체-객체 도식을 통해 궁극적 실재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시도를 하이데거는 바르트가 원하는 만큼이나 철저하게 거부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나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후기 하이데거가 제공하는 철학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특히, 바르트는 ‘무(Nothing)’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을 거부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불가능한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게도 ‘비진리(untruth)’는 ‘진리(truth)’에 의존하며, 결국에는 진리에 의해 반드시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르트가 하나님의 초월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상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이데거의 Sein(존재)은 세계 속 존재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자유를 가지지만, 그렇게 드러나는 동시에 완전히 감추어진다. 더욱이, 하이데거의 존재의 본질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있다. 존재의 존재(Being of Being)는 곧 그것의 계시와 동일하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의 위대한 요구 사항, 즉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되면서도 완전히 감추어져야 한다는 원칙과, 모든 논리적 사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존재 자체에 이르는 하이데거의 사유는, 심리적 믿음 이전에 신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바르트의 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오트가 주장한, 조직 신학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통해 사유한다"는 생각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근거의 본질에 대하여(Vom Wesen des Grundes)』(1929)에서 목적론(teleology)의 문제를 다룬다(“어째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묻고, 무(無)를 묻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탐구, 왜라는 질문이 가능해지는 조건, Ermöglichung der Warumfrage überhaupt). 우리가 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닌가를 묻는다면, 이는 함축적으로 우리가 목적(purpose)의 개념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개념을 일상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존재(Being)의 목적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체-객체 관계의 틀 안에서 목적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대신, 우리는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어 모든 존재자를 관통하는 목적을 사고해야 한다. 존재 이해(Seinsverständnis)의 빛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참된 근거를 감하게 된다. 우리는 초월(transcendence)의 의미와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물론, 초월의 계시는 언제나 감추어진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존재(Being), 진리(Truth), 그리고 근거(Ground)의 개념은 서로 융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의 통일성 개념 속에서 참된 초월(true transcendence)의 개념이 표현된다.
1946년, 하이데거는 파리의 장 보프레(Jean Beaufret)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확장된 형태로 『인간주의에 관하여(Über den Humanismus)』(1949)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참된 존재 이해(Seinsverständnis)의 빛 속에서 인간을 올바르게 이해할 때 그의 인간관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도 이미 인간을 존재(Being)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사르트르(Sartre)의 입장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는 분명 인간주의(humanism)를 원하지만, 그것은 참된 인간주의여야 한다. 즉, 인간이 존재의 빛 속에서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나는 인간주의여야 한다. 인간은 존재의 진리 속에 서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존재의 진리 속에 내던져졌기(thrown) 때문에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존재의 목자(watchman of Being)이 되어야 한다. 물론, 목자는 불성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는 인간으로서 서 있는 존재의 진리에 대해 불성실한(untrue)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Being)란 무엇인가? 앞으로의 사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사유란 무엇인가?(Was Heißt Denken?)』**에서 하이데거는 존재(Sein)에 대해 우리에게 통찰을 제공해야 하는 사유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그의 논의를 세부적으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그리고 스스로를 사유함으로써 존재를 사유하는 사유의 주요 특징은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형이상학은 자신의 근거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참된 사유를 할 수 없다. 플라톤(Plato)에서 니체(Nietzsche)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형이상학의 틀 안에서 사유해왔으며, 따라서 사유의 근거를 사유하지 못한 채 사유해왔다. 그 결과, 진리는 우연히 발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존재(Being)는 이러한 무지(ignorance)의 시대를 그냥 눈감아 주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올바르게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이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 중 특히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thinking)를 통해 존재(Being)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존재가 존재자들(beings)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또한 존재가 사유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사유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사유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존재는 우리에게 사유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응답할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사유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유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언제나 길 위에 있는 존재이다.
뒤돌아보면, 우리는 하이데거 후기 사상의 주요 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봉우리는 사유를 통해 존재(Being)로 돌아가는 것이다. 특히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이 점에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우리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시간적(temporal)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사유(thought)와 존재(Being)는 동일하다고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말해야 한다면—그리고 그것을 말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의심의 여지는 전혀 없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와 함께 ‘길 위에 있는’ 사유를 발견해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사유는 실재(reality)에서 솟아나오는 사유여야 하며, 그것은 시(poetry)와 유사한 방식으로 생성되는 사유여야 한다. 철학은 존재를, 인간에게 현존하는 그대로 바라본다.
과학(Science)은 사유하지 않는다. 과학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들을 조작할 뿐이다. 형이상학도 온전히 사유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은 개념(concepts)과 존재(Being) 사이의 일대일 대응을 추구할 뿐이다. 참된 사유(True Thinking)는, 존재(Being) 전체가 인간과 그의 모든 관심사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때 이루어진다. 따라서 참된 사유는, 존재로서의 역사(Geschichte)에 참여할 때에만 일어난난다. 그리하여 참된 사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유(Freedom)가 인간을 소유하는 것은 참된 사유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존재(Being)란 사건(Event)이며, 존재는 인간 속에서 사유의 사건으로서 일어난다.
하이데거의 케리그마
하이데거의 전체적인 노력의 목표는 현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지성적(intellectual)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관심을 두는 것은, 단순히 사실을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인간만이 아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죄책감을 느끼고, 죽음과 대면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전체로서의 인간(the whole man)", 그리고 현대적 상황 속에서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가 전체로서의 인간(the whole man)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인간을 전체적 실재(the whole of reality)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자는 곧 그의 환경 전체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를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기독교를 위한 논의를 하이데거와 진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기독교적 입장을 전체적으로 하이데거의 입장 전체와 대립하여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는 사실이나 논리에 대한 세부적인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 입장을 전체적으로 하이데거의 입장 전체와 대립하여 놓는다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과 사실성에 대한 모든 논의가 더 이상 공허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논의나 사실성에 대한 논의는, 만약 그것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두 입장 간의 근본적인 논의의 한 측면이 아니라면, 결국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에게 자신과 현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며, 이는 그를 그의 곤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의 사유가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그는 올바른 존재 이해(Seinsverstandnis)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설교자다. 시인인 횔덜린이 성스러움의 비전을 가졌다면, 하이데거는 존재(Sein)의 비전을 가졌지만, 결국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인간의 올바른 사유는 존재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그 존재로 돌아가 그 빛과 다스림 속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그의 "자연인"이 있다. 하이데거의 자연인은 존재 망각 속에 살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을 느낀다. 그리고 하이데거에게도 회심(Conversion)이 있다. 그것은 그의 자연인이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자연적 인간이 존재를 진정으로 사유할 때, 그는 자신이 먼저 존재에 의해 사유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유의 사건(Event of the Freedom)은 인간을 존재를 향해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주권적 은혜이다. 존재의 이 주권적 은혜는 동시에 보편적 은혜이기도 하다. 은혜가 은혜이려면 보편적이어야 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은혜는 존재(Sein)가 아니라 어떤 것(Etwas)에 의존하는 은혜가 되고 만다. 아니다, 보편적 은혜를 가지는 유일한 길은 주권적 혹은 자유로운 은혜를 가지는 것이며, 주권적 혹은 자유로운 은혜를 가지는 유일한 길은 보편적 은혜를 가지는 것이다.
오트는 바르트의 신학이 하이데거의 철학과 잘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즉, 바르트의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이데거의 존재(Being)에 본질적으로 아무런 의미 있는 추가를 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우선적으로, 인간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나 이미 말한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는 바르트의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순수한 자유(Freedom) 혹은 우연성(contingency)의 개념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바르트의 하나님을 규정한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곧 순수한 우연성이 순수한 우연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둘째로, 하이데거의 존재는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나며, 따라서 인간에 의해 완전히 인식된다. 이는 바르트의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물론, 바르트와 하이데거 중 누구도 범신론자(pantheist)는 아니다. 그들은 인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지도,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이 어떤 지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가 존재에 참여하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 말해, 존재가 스스로를 인간 안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하이데거는 사유(thought)와 존재(Being)가 하나라는 원리를 가능한 한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철저히 시간적(temporal)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자신이 시도했던 방식으로 이 원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개념화하는 사유를(conceptualizing thought)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개념화 도식을 넘어서는 더 깊은 사유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에까지 도달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인간이 궁극적 존재(ultimate Being)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만큼이나 확신에 차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하이데거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에게 어떠한 진정한(genuine) 실재성도 부정한다. 그는 인간(현존재, Dasein)에 대한 분석이 곧 초월적 실재(transcendent reality)에 대한 분석이라고 가정한다. 마찬가지로, 바르트도 사유와 존재가 하나라는 개념을 가능한 한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시공간 속의 사실(facts)에 진정한한(genuine) 실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되셨다(wholly revealed)고 말한다. 이는 만약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흡수할 수 있어야 함을 함축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와 바르트는 모두 전적으로 비합리주의자(irrationalist)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합리주의자(rationalist)이다. 즉, 그들은 둘 다 현대적 사상가(modern thinkers)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가 바르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두 사상가가 동일한 지적 환경 속에서 사고하며, 인간과 그의 우주에 대해 동일한 근본적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순수한 합리성(pure rationality)과 순수한 비합리성(pure irrationality), 순수한 결정론(pure determinism)과 순수한 비결정론(pure indeterminism)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dialectical relationship)를 견지한다.
하이데거와 바르트가 공유하는 이러한 가정들은, 일반적으로 배교적 사상(apostate thinking)의 근저를 이루는 것들이다. 아담이 죄에 빠졌을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현존재(Dasein)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지 않다고 가정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씀하실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무슨 권리로 그에게 이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는가? 아담은 하나님이 열매도, 인간도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가정했다. 그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순수한 우연성(pure contingency)과 순수한 비합리성(pure irrationalism)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본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순수한 비합리성을(pure irrationalism) 도입할 수 없었다. 아담은 철저히 선험적(a priori)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신 방식 속에서 전제하신 궁극적 실재가 결코 참일 수 없다고 가정했다.
따라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 곧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배교(apostasy)는, 처음부터 순수한 합리주의(rationalism)와 순수한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의 상관성(correlativity)이라는 사상 속에서 표현되었다.
타락 이후, 배교한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도 속임수에 능하여, 자신의 배교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도입된 비정상적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타락 이후, 배교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억누르려 한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을 약속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실 때, 배교한 인간은 그에게 증거(credentials)를 요구한다. "그는 정말로 전적으로 타자(wholly other)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알려진(wholly known) 분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속임꾼(impostor)이라고 정죄당하며, 인간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에게 줄 복음은 없다고 거부당한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다.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으며, 그에 의해 세상이 존속한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말씀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다시금 걸으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눈앞에서 가시적으로 하늘로 승천하셨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성경의 그리스도는 현상 세계의 사물 안에, 그리고 그 사물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현존하신다. 그러나 인간과 그의 세계를 하이데거의 존재 Sein 개념이나 바르트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이러한 모든 것, 그리고 그 이상의 것까지도 폐기되어야 한다. 후기 하이데거와 바르트의 핵심 논지는 인간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 Sein 혹은 전적으로 다른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진정으로 초월적인 존재(Being) 혹은 신(God)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특정한 속성을 지닌 존재나 신에 대해 말하는 한, 그러한 존재나 신은 진정으로 초월적일 수 없다. 진정으로 초월적인 신은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배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주체-객체 체계의 사고방식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전혀 유용하지 않다. 우리의 자기 이해 자체가 전제해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Being) 혹은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초월의 빛 속에서만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의 복음 또한 전적으로 초월적인 곳으로부터 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 곧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이데거나 바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기독교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 그것에는 진정한 초월이 없으며, 인간을 역사적 상대주의와 심리적 주관주의의 절망적 혼란 속에 그대로 남겨둔다.
따라서 우리는, 주체-객체 관계의 세계를 초월한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Being) 또는 신(God)에 대한 그들의 사유 속에서, 하이데거와 바르트가 성경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타락한 인간을 돕고 조장하고 있음을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와 바르트가 인간에게 전적 타자(他者)가 계시되는 방식에 대해 제시하는 관념에 대해서도 동일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계시되시거나, 아예 계시되지 않으신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Being)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동일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계시되셨다면, 하나님은 전적으로 알려지시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으신 것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계시의 현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자로서, 그리스도의 동료 인간으로서, 혼돈(Chaos)을 이기신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자로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존재(Being) 또한 인간 안에서 전적으로 계시되며, 인간에 의해 인식된다. 하이데거의 사유 방식에 따르면, 그는 존재의 심연을 통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여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진정으로 사유할 때 존재가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참된 사유란 존재의 진리에 대한 사유이며, 참된 사유란 존재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자유가 그 안에 나타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을 진정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종류의 "자유"야말로 성경에서 죄에 대한 종살이로 규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유"는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을 억누르는 데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죄인이 되었다. 인간의 죄책은 바로 이 불순종의 결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자기 백성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회개하며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들을 이 죄로부터 구원하셨으며, 지금도 구원하고 계신다.
하이데거와 바르트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구원이 실제로 존재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일도 없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성취하시고 적용하신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와 바르트에 따르면, 구원자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피조물이자 죄인인 인간 사이에 역사 속에서 진정한 대면(confrontation)이 이루어질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타락을 믿으며, 구원도 믿는다. 그러나 이들에게 타락이란 유한한 세계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비본래성(inauthenticity)이며, 구원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나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본래성(authenticity)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하이데거와 바르트는 전적 타자성과 철저한 계시라는 순차적 테스트를 통해서 배교교한 인간이 성경의 그리스도를 거짓된 것으로서 거부하도록 조장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현대적 사고를 따르는 배교한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을 구원하려는 어떤 그리스도든 동시에 전적으로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계시되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배교한 인간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은혜는 주권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그리스도는 결코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나사렛 예수와 직접 동일시하신다. 그는 타락한 인간이 요구하는 바와 같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또한 그의 은혜는 타락한 인간이 요구하는 의미에서의 "주권적"이지 않다. 그는 인간의 죄를 그냥 "자유롭게" 용서하지 않으신다. 즉,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롭다 하심을 위해 부활하시지 않고서는 용서를 베풀지 않으신다. 반면, 성경의 그리스도는 보편적 은혜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일반 역사 속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영원히 자신과 분리될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배교한 인간이 만들어낸 주권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은혜라는 관념은, 그에게 다가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의 도전을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그는 인간의 죄책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어긴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함은 단지 그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은 성경적 의미에서 인간이 책임져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죄인은 성경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오트가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이 올바른 기독교 신학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이미 올바른 기독교 신학을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에 맞춰 해석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트의 신학은 바르트가 제시한 것과 같은 주권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은혜의 신학이다.
따라서 오트의 노력의 전체적인 의미는, 바르트의 신학이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트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르트의 신학이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에 중요한 어떤 것도 추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었다. 또한, 오트가 신약의 복음을 현대인에게 전하려는 열정에 있어서 불트만(Bultmann)도 바르트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은 옳다. 하지만 그는 바르트가 이해하는 복음과 불트만이 이해하는 복음이 본질적으로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복음과 동일하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었다.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복음에는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가 없다. 그것은 배교한 인간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버리도록 도전하지 않는다. 또한,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한 구속을 구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죄책감, 염려(care), 그리고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관념을 그대로 둔 채,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게 된 것인지조차 스스로 숙고하도록 요청하지 않는다.
실로,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쳐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필요하다.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발견할 때, 그는 자신이 이전에 생각했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란 사실 전적으로 알 수도 없고 알려질 수도 없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간절히 호소하여 자신의 죄를 간과해 달라고 요청하고, 어찌 되었든 복된 섬으로 인도해 달라는 필사적인 시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죄인이 성경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구주를 발견할 때, 그는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보편적 은혜라는 개념이 사실상 은혜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었음을 보게 된다.
죄인이 성경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발견할 때, 즉 전적으로 계시되시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이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주권적이고 보편적인 은혜라는 관념 안에서,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순수한 비이성주의와 순수한 이성주의의 방향으로 동시에 질주하게끔 요구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하나님은 전적으로 감추어진 동시에 전적으로 계시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경험의 의미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를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결국 인간은 초월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이 본래 자기 안에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기본 가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호소하는 초월적인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투사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초월적인 것이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다시금 인간과 동일한 것이 되어야만 했다. 결국, 하이데거가 존재를 기준으로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무(無)와의 조우"로 귀결되고 말았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성경의 그리스도를 대체하려는 시도이다. 항상 인간 앞에 계시며, 약속과 심판을 선언하시는 성경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이데거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죄와 상관없이 모든 선한 것을 약속하는, 형체 없는 존재(Being)를 제시하려 한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주요 요점이 두드러진다.
(1)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는 모두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한다. 과학은 개념적 사고의 영역이며, ‘나-그것(I-it)’의 차원이다. 그 안에서는 어떤 독특한 사건도 일어날 수 없다. 과학은 법칙의 영역이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관계가 향하는 중심점인 인간과 연관된다. 이것은 역사적 상대주의와 심리적 주관주의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대면이 있을 수 없다. 역사는 계시적이지 않다.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는 인간이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영역이 과학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두 번째 차원은 인간들 간의 인격-대-인격의 차원이다. 또한, 이는 인간과 신 혹은 신들 간의 인격적 관계의 차원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는 것을,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적 체계와 그 배후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현실 사이의 대응으로 생각하는 한, 이 두 번째 영역에 대해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이 두 번째 영역을 단순히 잊어버리지 않는가?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영역은 두 번째 영역 없이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의 도덕성은 위로부터 오는 빛과 도움을 가리키며, 그것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계시는 역사적이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사적이라면, 그것은 절대적 성격을 잃게 될 것이며, 결국 역사로 변하여 스스로 다시 계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영역으로부터 인간에게 빛과 도움이 온다고 가정할 때,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생산적 상상력이다. 위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계시나 빛은 일종의 직관적 통찰, 즉 직접적인 침투를 통해 받아들여져야 한다. 신학자 불트만과 바르트는 이를 믿음이라고 말하며, 하이데거는 이를 새로운 형태의 인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세 사람 모두 궁극적 존재의 진리가 마치 자연적 눈이 태양빛을 보듯이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 오는 빛과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참된 존재가 그를 비추고 돕는 것에 참여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2) 복음주의 신자가 이 현대적 관점을 평가할 때, 만약 두 번째 존재의 영역—이를 Geschichte라 부를 수 있다—이 첫 번째 영역—이를 Historie라 부를 수 있다—과 대립하는 방식으로 설정된다면, 두 번째 영역은 첫 번째 영역과 완전히 동일시되지 않는 한 결코 첫 번째 영역 안에서 또는 그것에 대해 스스로를 계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든 배교적 사고 체계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의 사유 체계도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즉, 만일 인간이 개념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비시간적 실재, 즉 파르메니데스(Parmenides)가 개념화한 유형의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것이—per impossibile (불가능한 가정 속에서)—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어서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은 그러한 존재를 맹목적으로 믿어야만 한다.
Historie의 영역은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그 자체로 이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이 Geschichte의 영역조차도 그 본성에 대해 보편적 부정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초로 간주된다. Geschichte의 영역은 인간과 그의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스스로를 아는 하나님을 포함할 수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는 모두 비신화화(demythologizing) 작업을 수행하며, 그 이유는 동일하다. 즉, 그들은 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고백의 주장과 마주할 때, 그러한 주장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후, 그것을 Historie-Geschichte 개념 체계로 재해석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역사적 기독교 신조들을 비신화화한 후, 재신화화(remythologizing)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알려질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되었던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결국에는 인간의 생명과 빛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한편, 역사적 개신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종교개혁, 특히 칼빈(Calvin)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곳에 임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즉각적으로 의존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이해는 개념적으로 전포괄적인 이해(exhaustive understanding)도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 통찰(intuitive insight)도 아니다. 오히려, 이 이해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주어진 모든 능력이 함께 작용(joint-action)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의 모든 하나님께 받은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Word)과 사실-계시(fact-revelation)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는 실존적(existential)이어야 한다. 그것은 전-인간(whole man)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전체적(total)이고 다면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언약적(covenantal)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인간은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며, 자신의 세계—과학의 영역을 포함하여—의 모든 사실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과학도 사유하며, 철학도 사유하며, 신학도 사유한다. 이들은 동일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함께 사유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참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이 이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씀하시는 분이다.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 또한 이 말씀을 이해한다. 그들은 이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노력은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를 억누르려는 거대한 시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