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의 생각: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인 프란키스쿠스 유니우스 Franciscus Junius 의 A treatise on true theology 중 자연신학에 대한 부분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이 자연신학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는 J.V.Fesko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테제 18: 그러나 이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최초의 원리들은 여전히 개인들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공유되었으며, 가려져 있고 불완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완전히 손상되었고, 상호 간에 극도로 혼란스러워졌으며, 마치 타락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 우리의 본성의 파편들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타락, 혹은 그 타락의 기원과 방식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비참하게 죄에 빠지기 전,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상태와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다. 더욱이, 정통 교부들과 그들의 발자취를 따른 스콜라 학자들이 잘 전수한 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자연적 은사(natural gifts)는 타락하였고, 초자연적 은사(supernatural gifts)는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초자연적 신학(supernatural theology)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마치 거부되고 불공평하게 경멸당한 것처럼 보였고, 이 땅에서 사라지고 하늘로 물러났다. 자연 신학은 다른 모든 자연적 것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주체(subject) 안에서 그것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우리는 이 타락의 방식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주체 자체(subject itself)와 그 개별적인 부분들의 구성(constitution)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주체와 그 부분들이 서로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과 맺는 관계(arrangement)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 안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존재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성(intellect)에는 원리(principles)들이 있었으며, 마음(mind)에는 이성(reason)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적 인간(the natural man)은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인간의 타락 이전 상태에서도 이러한 원리들은 이미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의 이성 또한 변할 수 있는 속성(mutability)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한계를 인간의 타락이 결코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타락은 이 원리들이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할 수도 없었으며, 궁극적으로 그 원리들이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원리(principles)가 개별 사물들 속에서 공유되었을 때, 그것들은 여전히 공유되었으나, 악덕(vice)의 공격을 받았다. 만일 그것들이 가려져 있었던(veiled) 상태였다면, 이제는 훨씬 더 가려지게 되었다. 만일 그것들이 불완전(imperfect)했다면, 이제는 훨씬 더 심각한 불완전성 속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이성(human reason)은 더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으며, 가장 심각하고 수치스러운 타격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해 가장 참되게 말할 수 있는 진술은 다음과 같다. 온전한 본성이 타락하였으며, 그 본성의 모든 원리들 또한 완전히 부패하였다. 특히 신학과 관련된 원리들이 더욱 심각하게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신학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하지 않은 본성(unspoiled nature)조차도 신학적 대상을 본성의 한계 내에서만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 이상의 접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들은 자체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것들이 적절한 질서(proper order)와 올바른 관계(suitable relationship)로부터 극도로 멀어졌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보다 더 혼란스럽고(chaotic) 무질서한(disorderly) 상태일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체 인격(whole person)에서조차도 필수적인 질서(necessary order)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또한 그의 부분들(parts of that whole) 사이에서도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며, 나아가 자신의 전체 존재를 둘러싼 외부 사물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 원리들(principles) 자체는 타락한 인간(fallen man) 안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이 원리들은 그 기초(foundation)에서는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나, 그 방식(manner)에서는 극도로 흩어지고 혼란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래의 방식(mode)을 스스로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서로 간에도, 그리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원리들은 극도로 혼란스럽게 변하였으며, 마치 그 근거의 본성(underlying nature)의 부서진 파편들처럼 되어버렸다. 그 본성은 우리의 무거운 타락(weighty fall)으로 인해 비참하게 쓰러졌다. 마치 우아한 집(graceful house)이 강력한 충격(heavy blow)을 받고 한순간에 처참하게 무너질 때, 그 집을 구성하던 모든 부분들이, 비록 정교하게 제작되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이제는 산산이 부서지고, 폐허 속에 뒤엉켜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human nature) 안에 있던 모든 우아함(graceful quality)도 사라져 버렸으며, 이제는 우리의 악(viciousness) 속에서 무질서하게 뒤엉킨 혼돈의 덩어리로 묻혀버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타락한 본성(fallen nature)과 그 안에 남아 있는 자연적 원리(natural principles)의 작용과 그 영향(effects)을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히, 이러한 원리들의 기능(function)과 인간 본성 전체의 기능이 지금 이토록 쇠약해졌다면, 비록 자연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서도 그 기능이 미약한 상태라면,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본성과 그 원리들이 지닌 연약함과 불완전함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학(theology)의 대상(subject)은 이 타락한 본성으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infinite)하며, 모든 자연(nature)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의 본성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신학에 대해, 그 기능(function)과 영향(effects)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테제 19: 따라서,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은 어떠한 것도 완전하게 이끌어 갈 수 없으며, 또한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는, 은혜(grace)에 의해 더해지는 완전성(perfection)을 담아낼 능력조차 없다.
이 글에서 우리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 대해 세 가지 사항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이는 마치 과학(sciences)에 능통한 자들이, 자신들이 논의하는 사물들의 본질(essence)에 대해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과 같다. 즉, δύναμιν, ἔργον, καὶ πάθος—즉, 잠재성(potency), 현실태(actuality), 지속성(persistence) 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 신학에 대해 주장하는 세 번째 주제는, 일부 사람들에게 더 무겁고 믿기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본성(nature)의 모든 것이 철저히 제거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glorious grace)만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 신학은 그 자체로는 은혜에 의해 더해지는 완전성(perfection)을 담아낼 수 없다. 즉, 자연 신학은 그 본성(nature)이나 성격(character) 자체로는, 질서 있는 관계(ordered relation)나 성향(disposition)으로도,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어떠한 준비된 상태(prepared state)로도하늘의 은혜(heavenly grace)가 부어질 완전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향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연이 잠재성(potency)이라는 범주에 따라 본성과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본성이 지닌 적성(aptitude)과 성향(disposition)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하늘의 영적 은사(heavenly and spiritual gifts)를 누리고 인식하는 문제에 이르면, 자연 신학은 그 자체로 수동적 잠재성(passive potency)을 지니지 않으며, 수용적(receptive)이지도 않고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순종적 잠재성(obediential potency)’을 지니지도 않는다. 결국, 자연 신학과 초자연 신학(supernatural theology)은 어떠한 공통된 성향(disposition)도 공유하지 않는다. 분명히, 두 신학이 다루는 대상(subject)은 동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지혜(wisdom)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대상을 공유한다고 해서, 동일한 범주의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각의 방식(mode)이 지식의 차이를 만든다. 예를 들어, 음악(music)과 산술(arithmetic)은 모두 숫자(numbers)를 다루지만, 그 접근 방식(mode of treatment)은 다르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논증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 자연은 항상 선재하는 질료(preexisting matter)로부터 성향(disposition)을 형성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하신다(works all things in all). 따라서, 자연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이해(understanding)를 적용하고, 원리의 씨앗(seeds of the principles)을 받아들여 성향을 형성한다. 하지만, 초자연 신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 모든 부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 신학은 완전히 정의롭게 ‘초자연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