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김영규, 이승구 등등 4~50년대생 유명 장로교 신학자들이 죄다 음모론들에 빠져 침몰... 김세윤 같은 신학자는 조국기부대가 되어 침몰...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공포감에 몸서리치는 인생....


한국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뿌리 뽑혀져 나는 고아가 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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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경우, 칸트 이후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수용해서 신정통주의적 강점으로 전환시켰는데, 그것은 그가 자연 이성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고, 하나님은 이성이 아니고 신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우연적 사건들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근본적인 인식에 문을 열었다.

Milbank, Pickstock and Ward, eds. Radical Orthodoxy: A New Theology, 21.

반틸이 바르트를 비판하는 가장 핵심 지점이 칸트의 자율적 이성을 긍정하며 그의 본체계-현상계 구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바르트의 초월과 내재의 구분이 성경적인 초월과 내재가 아니라 칸트가 그어놓은 이성의 한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며, 그 점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밀뱅크도 이와 동일한 비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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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신학의 칸트적 요소와 밀뱅크의 비판


바르트 신학에 나타난 칸트적 요소: 초월론적 계시 신학과 자연신학 거부


칼 바르트(Karl Barth)는 20세기 신학에서 계시 중심의 신학을 구축하면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영향 아래 초월론적(transcendental) 접근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바르트는 인간 이성이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영역을 철저히 제한했고, 오직 하나님의 자기계시(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에 의해서만 참된 신 معرفة 이를 통해 바르트는 계시를 신학의 유일한 토대로 삼았는데, 이는 칸트의 인식론적 한계 설정과 맥을 같이합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 바르트는 칸트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모든 신학은 칸트에서 시작해 칸트로 끝나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접했다고 합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으로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실재를 알 수 없다고 단언했는데, 바르트는 이러한 칸트의 비판을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인간편에서 하나님께 도달하는 모든 시도에 철저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르트 신학은 “위로부터” 주어진 계시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초월론적 방법론을 띠게 되는데, 학자들은 바르트의 초기 로마서 주석에서 드러난 이러한 칸트적 신학 방법론이 이후 교회교의학에까지 지속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계시 중심주의는 자연 신학의 단호한 거부로 이어졌습니다. 바르트는 계시 외에 자연이나 역사, 인간 이성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시도를 모두 부정하였는데, 이는 칸트가 신 존재 증명과 같은 “자연 신학”을 불가능하게 본 관점과 일맥상통합니다. 1934년 에밀 브루너와의 유명한 논쟁에서 바르트는 자연계시를 인정하자는 브루너의 입장에 단호히 “Nein!”으로 응답하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접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 신학의 하나님 인식론마저 비판하여, 피조물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 개념을 **“적그리스도의 발명품”**이라고까지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발언에서 드러나듯이, 바르트는 자연 신학이나 철학적 신 개념을 신학에 끌어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바르트에게 신학은 철저히 계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철학이나 인간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거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르트 신학은 계시와 믿음의 영역을 절대화하고 이성적 사변이나 자연적 종교성을 배제하는데, 이는 칸트 이후 근대 신학이 설정한 한계를 신실하게 따른 모습이라고 평가됩니다. 실제로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규정한 것은 바르트 자신이 구(舊) 정통주의와 피상적 계몽주의를 넘어서는 결정적 전환이라고 언급될 정도였습니다. 요컨대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는 계시로, 이성은 이성으로” 구분짓고, 신앙과 이성, 은총과 자연을 엄격히 분리함으로써 칸트적 비판철학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존 밀뱅크의 비판: 바르트의 칸트적 범주 유지와 신학의 한계


**존 밀뱅크(John Milbank)**는 이러한 바르트 신학이 근대 철학, 특히 칸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밀뱅크에 따르면, 바르트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계시의 우위를 세웠지만, 여전히 칸트가 설정한 인식론적 틀 안에서 사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 대 은총, 이성 대 계시”라는 이분법적 범주를 바르트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밀뱅크는 가톨릭 신학자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의 Surnaturel 논쟁을 언급하면서, 바르트의 신학이 혁신적처럼 보여도 결국 근대적인 자연/은총의 대비 속에 갇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바르트는 자연과 초자연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긋고 순전한 계시만을 신뢰했지만, 이는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이 빠진 “세속/신성” 이원화의 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밀뱅크는 바르트가 **아날로기아 엔티스(존재의 유비)**나 드 뤼박이 강조한 “자연 속의 초자연(surnaturel)” 개념을 전혀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제대로 해명할 수 있는 신학적 도구들을 등한시했다고 봅니다. 그 결과 바르트의 신학은 신학과 철학의 건설적 대화가 차단되고, 신앙의 영역만을 절대화하여 다른 학문이나 문화 영역과의 소통이 어려워지는 한계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밀뱅크는 바르트가 **칸트적 범주(이성과 계시의 이원화)**를 깨뜨리지 못하고 그대로 신학에 적용했기 때문에 신학의 지평이 불필요하게 축소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바르트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계시만을 강조하여 창조 질서 내 이성의 역할을 무력화함으로써 신학이 세속 학문과 분리된 “자율 영역”에 머물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근대 세속 이성에 도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한계를 받아들인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밀뱅크의 이러한 비판은 근대 이후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재검토하자는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입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이 근대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여전히 칸트적 초월/경험 구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참된 극복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 철학적 사변을 이교적(idolatrous)이라고 우려하여 아날로기아 엔티스를 거부했지만, 밀뱅크는 오히려 **올바른 존재의 유비 개념을 통해서야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밀뱅크는 바르트에게서 자연과 은총의 단절, 신학과 철학의 불통이라는 한계를 보고, 이것이 칸트 이후 잘못 형성된 신학적 패러다임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밀뱅크의 대안: 플라톤주의적 참여, 자연신학 회복, 신학-철학의 새로운 관계


밀뱅크는 바르트가 간과한 대안적 신학적 길로 “참여(participation)”의 신학을 제시합니다. 그의 신학 사상 전체의 중심에 플라톤주의적 참여 개념이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밀뱅크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의 전통 및 드 뤼박과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같은 **누벨 테올로지(nouvelle théologie)**의 영향을 받아, 피조세계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고 의미를 얻는다는 관점을 발전시킵니다. 이러한 “존재의 참여” 사상은 근대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계시를 이분법적으로 떼어놓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창조적 존재 안에서 통합하려는 시도입니다. 밀뱅크에 따르면 창조 자체가 이미 은총의 사건이며, 자연 속에 초자연에 대한 열린 지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는 **“창조와 구원을 결코 분리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창조 질서 자체를 초자연으로 재창안하는, 다시 말해 **“자연을 초자연화한다(supernaturalizes the natural)”**고까지 표현합니다. 이는 모든 피조 현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그 어떤 “순수 자연”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밀뱅크는 일종의 자연신학을 복권시키는데, 다만 그것은 계시와 대립되는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자연신학이 아니라, 창조 질서가 이미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다는 참여 신학적 자연신학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나 고대 교부들의 사상에서처럼 철학적 사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봉사하도록 통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뱅크는 **근대가 잘못 가른 “내재와 초월”**의 벽을 허물고, 신학이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영역과 대화하며 그 토대를 형성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성 활동조차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participation in the mind of God)하는 행위이므로, 어떤 학문이나 문화도 신학과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밀뱅크는 신학과 철학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합니다. 신학이 철학을 배척하는 바르트식 태도를 넘어, 신학이 철학적 개념(예: 존재, 선, 진리 등의 개념)을 변혁시켜 자기 언어로 받아들이는 상호 참여 관계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밀뱅크의 대안은 **“보다 포괄적인 기독교적 메타물리학”**으로서, 피조물의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음을 전제함으로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신학입니다. 이런 대안 속에서 자연 신학은 폐기될 것이 아니라, 참여의 논리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신학과 철학은 분리가 아니라 친밀한 대화 관계로 회복됩니다.


바르트와 밀뱅크의 근본적 차이와 신학적 논쟁의 의미


以上

바르트와 밀뱅크의 입장을 종합하면, 근본적인 차이는 신학과 철학(또는 자연) 사이의 관계 설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계시의 절대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칸트적 한계 인식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자연적 이성과 철학을 신학에서 배제하려 했습니다. 이는 계시의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신학을 교회 내부 담론으로 한정하고 세속 학문이나 문화에 발언권을 잃게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밀뱅크는 계시와 창조의 연속성을 강조하여 모든 현실을 신학적으로 조망하려 합니다. 그는 근대의 세속 철학이 오히려 기독교 신학에서 파생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신학이 다시 세계관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구체적으로 아날로기아 엔티스 논쟁, 자연신학의 가능성, 교회와 세속 사회의 관계 등에서 드러납니다. 예컨대 바르트가 배격한 **“존재의 유비”**를 밀뱅크는 신학적으로 재활용하여 피조물이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임을 말하고, 자연 속에서도 신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바르트가 계시 밖에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길이 없다고 본 데 반해, 밀뱅크는 계시 자체가 창조 질서를 통해 광범위하게 스며든다고 봄으로써 보다 포괄적인 은총의 영역을 상정합니다.


이 논쟁의 신학적 의미는 현대 신학이 근대 철학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직결됩니다. 바르트의 노선은 **“신학의 자율성”**을 지켜내어 계몽주의 이성에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정통 신앙을 수호했지만, 그 여파로 신학과 철학이 단절되고 세속 학문 영역을 사실상 신학이 포기한 면이 있습니다. 밀뱅크의 노선은 이러한 단절을 비판하며 신학이 다시금 철학과 문화 담론의 중심에 설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신학의 메타담론화, 즉 신학이 다른 학문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세계관적 역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으로, 근대 세속주의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띱니다. 동시에 이 논쟁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전통적 견해 차이도 반영합니다. 바르트는 종교개혁 전통에서 자연신학을 불신한 극단을 대표하고, 밀뱅크는 가톨릭의 자연과 은총의 조화 전통을 탈근대적으로 재해석한 셈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논쟁은 20세기 에큐메니컬 대화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고,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같은 이는 바르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리스도론과 창조론의 균형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와 밀뱅크의 입장 차이는 신학이 철학적 범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상반된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칸트의 도움으로 신학의 초월적 순수성을 사수했지만, 밀뱅크는 플라톤적 참여 사상을 통해 신학과 철학의 재결합을 추구합니다. 이 논쟁은 오늘날 신학자들에게도 계시와 이성의 관계,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하면서, 신학의 임무가 단순한 교리 해설을 넘어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제공하는 것인지에 대한 심도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밀뱅크의 비판은 바르트 신학이 근대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일깨우며, 신학과 철학의 새로운 만남을 모색하는 현대 신학의 과제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바르트와 칸트의 관계 및 밀뱅크의 비판에 대해서는 Oakes, McCormack 등의 바르트 연구와 Milbank 본인의 저술 및 해설서를 참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헌들은 바르트 신학에 내재한 칸트적 요소를 지적하고, 밀뱅크가 주장하는 참여적 메타피직스의 의미를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Milbank의 The Suspended Middle과 Radical Orthodoxy 운동의 문헌들은 바르트 이후 신학이 나아갈 또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본 고찰은 이들 연구에 기초하여 바르트와 밀뱅크의 신학적 차이를 조명하고 그 함의를 분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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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위험한 생각
대니얼 C. 데닛 지음, 신광복 옮김 / 바다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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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엄청 큰데 전자책으로도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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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생각: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인 프란키스쿠스 유니우스 Franciscus Junius 의 A treatise on true theology 중 자연신학에 대한 부분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이 자연신학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는 J.V.Fesko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테제 18: 그러나 이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최초의 원리들은 여전히 개인들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공유되었으며, 가려져 있고 불완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완전히 손상되었고, 상호 간에 극도로 혼란스러워졌으며, 마치 타락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 우리의 본성의 파편들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타락, 혹은 그 타락의 기원과 방식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비참하게 죄에 빠지기 전,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상태와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다. 더욱이, 정통 교부들과 그들의 발자취를 따른 스콜라 학자들이 잘 전수한 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자연적 은사(natural gifts)는 타락하였고, 초자연적 은사(supernatural gifts)는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초자연적 신학(supernatural theology)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마치 거부되고 불공평하게 경멸당한 것처럼 보였고, 이 땅에서 사라지고 하늘로 물러났다. 자연 신학은 다른 모든 자연적 것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주체(subject) 안에서 그것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우리는 이 타락의 방식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주체 자체(subject itself)와 그 개별적인 부분들의 구성(constitution)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주체와 그 부분들이 서로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과 맺는 관계(arrangement)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 안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존재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성(intellect)에는 원리(principles)들이 있었으며, 마음(mind)에는 이성(reason)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적 인간(the natural man)은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인간의 타락 이전 상태에서도 이러한 원리들은 이미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의 이성 또한 변할 수 있는 속성(mutability)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한계를 인간의 타락이 결코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타락은 이 원리들이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할 수도 없었으며, 궁극적으로 그 원리들이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원리(principles)가 개별 사물들 속에서 공유되었을 때, 그것들은 여전히 공유되었으나, 악덕(vice)의 공격을 받았다. 만일 그것들이 가려져 있었던(veiled) 상태였다면, 이제는 훨씬 더 가려지게 되었다. 만일 그것들이 불완전(imperfect)했다면, 이제는 훨씬 더 심각한 불완전성 속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이성(human reason)은 더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으며, 가장 심각하고 수치스러운 타격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해 가장 참되게 말할 수 있는 진술은 다음과 같다. 온전한 본성이 타락하였으며, 그 본성의 모든 원리들 또한 완전히 부패하였다. 특히 신학과 관련된 원리들이 더욱 심각하게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신학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하지 않은 본성(unspoiled nature)조차도 신학적 대상을 본성의 한계 내에서만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 이상의 접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들은 자체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것들이 적절한 질서(proper order)와 올바른 관계(suitable relationship)로부터 극도로 멀어졌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보다 더 혼란스럽고(chaotic) 무질서한(disorderly) 상태일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체 인격(whole person)에서조차도 필수적인 질서(necessary order)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또한 그의 부분들(parts of that whole) 사이에서도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며, 나아가 자신의 전체 존재를 둘러싼 외부 사물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 원리들(principles) 자체는 타락한 인간(fallen man) 안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이 원리들은 그 기초(foundation)에서는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나, 그 방식(manner)에서는 극도로 흩어지고 혼란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래의 방식(mode)을 스스로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서로 간에도, 그리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원리들은 극도로 혼란스럽게 변하였으며, 마치 그 근거의 본성(underlying nature)의 부서진 파편들처럼 되어버렸다. 그 본성은 우리의 무거운 타락(weighty fall)으로 인해 비참하게 쓰러졌다. 마치 우아한 집(graceful house)이 강력한 충격(heavy blow)을 받고 한순간에 처참하게 무너질 때, 그 집을 구성하던 모든 부분들이, 비록 정교하게 제작되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이제는 산산이 부서지고, 폐허 속에 뒤엉켜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human nature) 안에 있던 모든 우아함(graceful quality)도 사라져 버렸으며, 이제는 우리의 악(viciousness) 속에서 무질서하게 뒤엉킨 혼돈의 덩어리로 묻혀버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타락한 본성(fallen nature)과 그 안에 남아 있는 자연적 원리(natural principles)의 작용과 그 영향(effects)을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히, 이러한 원리들의 기능(function)과 인간 본성 전체의 기능이 지금 이토록 쇠약해졌다면, 비록 자연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서도 그 기능이 미약한 상태라면,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본성과 그 원리들이 지닌 연약함과 불완전함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학(theology)의 대상(subject)은 이 타락한 본성으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infinite)하며, 모든 자연(nature)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의 본성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신학에 대해, 그 기능(function)과 영향(effects)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테제 19: 따라서,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은 어떠한 것도 완전하게 이끌어 갈 수 없으며, 또한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는, 은혜(grace)에 의해 더해지는 완전성(perfection)을 담아낼 능력조차 없다.

이 글에서 우리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 대해 세 가지 사항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이는 마치 과학(sciences)에 능통한 자들이, 자신들이 논의하는 사물들의 본질(essence)에 대해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과 같다. 즉, δύναμιν, ἔργον, καὶ πάθος—즉, 잠재성(potency), 현실태(actuality), 지속성(persistence) 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 신학에 대해 주장하는 세 번째 주제는, 일부 사람들에게 더 무겁고 믿기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본성(nature)의 모든 것이 철저히 제거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glorious grace)만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 신학은 그 자체로는 은혜에 의해 더해지는 완전성(perfection)을 담아낼 수 없다. 즉, 자연 신학은 그 본성(nature)이나 성격(character) 자체로는, 질서 있는 관계(ordered relation)나 성향(disposition)으로도,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어떠한 준비된 상태(prepared state)로도하늘의 은혜(heavenly grace)가 부어질 완전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향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연이 잠재성(potency)이라는 범주에 따라 본성과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본성이 지닌 적성(aptitude)과 성향(disposition)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하늘의 영적 은사(heavenly and spiritual gifts)를 누리고 인식하는 문제에 이르면, 자연 신학은 그 자체로 수동적 잠재성(passive potency)을 지니지 않으며, 수용적(receptive)이지도 않고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순종적 잠재성(obediential potency)’을 지니지도 않는다. 결국, 자연 신학과 초자연 신학(supernatural theology)은 어떠한 공통된 성향(disposition)도 공유하지 않는다. 분명히, 두 신학이 다루는 대상(subject)은 동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지혜(wisdom)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대상을 공유한다고 해서, 동일한 범주의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각의 방식(mode)이 지식의 차이를 만든다. 예를 들어, 음악(music)과 산술(arithmetic)은 모두 숫자(numbers)를 다루지만, 그 접근 방식(mode of treatment)은 다르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논증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 자연은 항상 선재하는 질료(preexisting matter)로부터 성향(disposition)을 형성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하신다(works all things in all). 따라서, 자연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이해(understanding)를 적용하고, 원리의 씨앗(seeds of the principles)을 받아들여 성향을 형성한다. 하지만, 초자연 신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 모든 부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 신학은 완전히 정의롭게 ‘초자연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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