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가족주의가 다른 것처럼 민족을 사랑하는 것과 민족주의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민족주의화 되어있다.
'민족복음화'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이고
심지어 '한민족은 동방의 이스라엘'이라는 말도 쓰인다.

성경은 민족주의가 아니다. 바울이 말하듯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의 예표로서 대체되었다.

민족주의란 베네딕트 앤더슨과 같은 민족주의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중세 유럽 기독교세계, 크리스텐돔이 해체되면서 19세기 근대의 사회통합의 대안 이념으로 상상되어 등장한 것이다. 그 시작부터 기독교와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민족복음화'처럼 교회와 민족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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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츨, 하르낙의 자유주의적 문화 개신교가 히틀러를 만났듯이 카이퍼의 칼빈주의 문화 개신교가 한국에서 윤석열을 만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카이퍼리안임을 자처하는 정성구 오정현 전광훈 신원균 등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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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고


부흥이 이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그렇게 한국 교회가 부흥집회를 해도


부흥이 안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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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장 배경과 환경, 성격과 기질, 삶과 일의 형편에 따라 회심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이 경우에는 이 부분, 저 경우에는 저 부분으로 서로 달라진다. 성경여러 교회 전통에 전해지는 회심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누구나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죄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누구에게나 그가 특히 강하게 붙들린 채 살아온 자기만의 죄, 즉 해방되어야 할 고유한 죄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복음은 매우 풍성하여,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어떤 순간에는 이 진리로, 또 다른 순간에는 저 진리로 빛을 비추고 위로를 준다.

이러한 회심의 다양성은 우리가 반드시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하나의 유형만을 기준으로 삼아 이를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다양하고 은밀하며 놀라운 인도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통회의 투쟁’**이나 ‘돌파의 경험’, 곧 두려움과 절망의 시기와 그에 이은 갑작스러운 평안과 기쁨의 물결을 요구할 수도 없으며, 반대로 강렬한 감정이나 특이한 사건을 근거로 회심의 진정성 여부를 즉각 판단할 수도 없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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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루에 3~40명의 접속 카운트가 잡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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